데리다와 크리스테바의 대담,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Semiology and Grammatology"에서 중요하다거나 난해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옮겨본다. 오래전 대학원 시절의 번역이기 때문에, 미흡한 점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한번 올렸던 글이지만, '로쟈의 책의 바다'에도 빠져 있어서 찾아읽기가 쉽지 않고(어쩌다 찾는 사람이 있지만!), 편집상태도 좋지 않아 다시 편집했다. Alan Bass의 영역본 과 박성창의 국역본 <입장들>(민음사)을 대본으로 한다. 영역본은 작년에 조다단 컬러(아니면 크리스토퍼 노리스)가 새롭게 서문을 쓴 출간 30주년 기념 증보판이 나왔고, 국역본은 현재 절판됐다. 우리말로도 새 번역본이 나오길 기대한다. 초기 데리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쉽고 요긴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의 첫번째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기호학(모델)의 한계는 무엇이며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런 한계를 빠져나갈 방도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기호학적 모델의 한계에 대해 데리다가 답하는 부분: "For if the sign, by its root and its implications, is in all its aspects metaphysical, if it is in systematic solidarity with stoic and medieval theology, the work and the displacement to which it has been submitted - and of which it also, curiously, is the instrument - have had delimiting effects."(17쪽)

이에 대한 국역: "왜냐하면 그 토대와 함축적 의미로 인해 기호라는 개념이 형이상학적이며 또한 스토아적이고 중세적인 신학과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부과되었던 작업과 치환은 -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것은 그러한 작업의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 한계가 지어진 효과들을 지닐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40쪽)

먼저 '함축적 의미'로 번역된 "implication"은 에코식으로 말하자면 이차적으로 확장된 의미이다. 즉 기저의미, 기본의미에서 가지를 치고 뻗어나간 의미(그래서 "root"와 조응한다). 그래서: "만약 기호라는 개념이 그것의 기원적 의미와 파생적 의미 모든 측면에서[그것의 뿌리에서부터 또 여기저기 뻗어나간 가지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형이상학적이라면, 즉 스토아철학[신학]과 중세신학에 아주 체계적으로[조직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면, (이제까지) 그것[기호]에 부과되어 왔던 (탈형이상학에의) 작업과 전복[전복작업]은, 또 아주 흥미롭게도 그것[기호]은 이러한 작업의 도구이기도 한데, 제한적인 효과[결과]만을 낳았던 것이지요[낳았을 밖에요]."

여기서 "displacement"를 나는 '전복'('전도'나 '치환'으로 옮겨도 무방할 것이다)으로 옮겼다. 이 부분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에서의 두 항을 자리바꿈한다고 해서 탈형이상학이 될 수 있겠느냐는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보여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전도된 플라톤주의'라고 니체를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도된 플라톤주의도 플라톤주의 아니냐는 것.

또 한편으론: "For this work and displacement have permitted the critique of how the concept of the sign belongs to metaphysics, which represents a simultaneous marking and loosening of the limits of the system in which this concept was born and began to serve, and thereby also represents, to a certain extent, an uprooting of the sign from its own soil."

국역: "즉 그 효과들은 기호라는 개념의 형이상학적 귀속을 비판함과 동시에 이러한 개념이 태어나서 복무하기 시작했던 체계의 한계를 나타내고 그 틈을 열어놓게 해주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그 고유한 토양으로부터 기호를 떼어놓게 합니다." 영역본은 조금 풀어서 이 부분을 옮긴 모양이다.

나의 번역: "왜냐하면 이 (기호의) 작업과 전복(의 효과[결과])은 기호가 어떻게 형이상학에 연루되어 있는가를 비판하게 해주는 바, 이것은 곧장 이 (기호라는) 개념을 낳아주고 보살펴준 체계의 한계를 표시하고 완화시킴으로써[한계를 눈에 띄게 하고 느슨하게 함으로써],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기호를 그것을 배태한 토양으로부터 분리해내기[잘라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호[라는 모델이]가 이중적(equivocal)이라는 것.

여기서 '완화'라고 옮긴 "loosening"을 "틈을 열어 놓게 (함)"으로 옮기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uprooting"과 조응되게 하려면 느슨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to a certain extent", 즉 "어느 정도까지"만 괜찮다는 것. 즉 기호와 형이상학의 결속을 분리해내는[잘라내는] 일이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This work must be conducted as far as possible, but at a certain point one inevitably encounters "the logocentric and ethnocentric limits" of such model. At this point, perhaps, the concept is to be abandoned."

국역: "이러한 작업을 가능한 한 멀리 수행해야 하지만 실제 어느 순간에 그러한 모델이 지니는 '로고스중심적이며 인종중심적인 한계'를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개념을 포기해야 할 때는 바로 이 순간입니다." 대충 맞게 번역되어 있지만 굳이 옮기자면: "이 작업은 최대한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우리는 그러한 모델의 '로고스중심적이고 인종중심적인 한계'를 불가피하게 만나게 됩니다. 그때엔, 아마도 이 (기호라는) 개념을 포기해야겠지요."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아주 정합적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But this point is very difficult to determine, and is never pure." 국역: "그렇지만 이 순간은 결정하기 매우 힘들뿐더러 결코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번역: "그러나 (기호라는 개념을 포기해야 하는) 이 타이밍을 결정하는 문제는 매우 어렵고 또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All the heuristic and critical resources of the concept of the sign have to be exhausted, and exhausted equally in all domains and contexts. Now, it is inevitable that not only inequalities of development (which will always occur), but also the necessity of certain contexts, will render strategically indispensible the recourse to a model known elsewhere, and even at the most novel points of investigation, to function as an obstacle."

국역: "기호라는 개념의 비판적 자원들이 소진되고 모든 영역들과 문맥들에서도 똑같이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불규칙적인 진전들과(이것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특정 문맥들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모델에의 의지가 전략적으로 필요불가결해짐은(연구가 가장 진척된 시점에 이르면 이러한 모델에 의지하는 것이 하나의 장애로 기능할 것이 주지의 사실이겠지만) 불가피합니다."

불규칙적인 진전들? "사과나무와 떡갈나무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하는 법칙은 없는 것이다."(신경숙) 이 부분도 크게 틀린 곳은 없지만 내친김에 마저 옮긴다: "(우리의 이 타이밍은) 기호라는 개념의 모든 발견적, 비판적 에너지가[기호라는 개념이 발견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이] 소진되었을 때, 그것도 모든 영역과 컨텍스트[상황] 속에서 똑같이[동시에] 소진되었을 때이어야 하니까요. (이게 가능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론 (이 모든 영역과 컨텍스트에서의) 불균등한 발전[성숙]과 (원래 일이란 게 그렇지요) 다른 한편으론 어떤 컨텍스트적인 필요 때문에, (우리의) 작업[탐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면 그저 골칫거리에 불과할 이 (기호) 모델로 다시금 귀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예를 든다. 소쉬를 기호학의 이중적 역할(double role), 두 가지 배역에 대해서. 먼저, 착한 기호학. 그것은 먼저 기표/기의의 비분리성과 기호(학)적 작용의 차이적(differential), 형식적(formal)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소쉬르는 그가 거기서 차용했던 기호의 개념을 형이상학적 전통의 반대편으로 돌려놓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41쪽); "Saussure powerfully contributed to turning against the metaphysical tradition the concept of the sign that he borrowed from it."(18쪽)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호학의 변신, 혹은 나쁜 기호학의 징후가 바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소쉬르는 그가 기호라는 개념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한 이러한 전통을 확고히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끝내 손을 씻지 못한다는 것. 칼리토의 길? 그래서: "There is at least one moment at which Saussure must renounce drawing all the conclusions from the critical work he has undertaken, and that is the not fortuitous moment when he resigns himself to using the word "sign," lacking anything better."

국역: "적어도 소쉬르가 자신이 시도했던 비판적 작업으로부터 모든 결과들을 끌어내는 것을 포기해야 했던 순간은 존재하며 이는 그가 부득이 '기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결코 우연적인 것만은 아닌 순간입니다."

나의 번역: "소쉬르는 자신이 착수했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작업의 결론[결과]을 모두 망라하는 것을 적어도 어느 한 순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모멘트]은 불가피한[필연적인] 것인데, 그가 만부득[울며 겨자먹기로] 사용해왔던 '기호'라는 개념을 단념해야[포기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지요." 데리다는 이어서 나쁜 기호학이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늘어놓는다.

(1)먼저, 기의(signatum)와 개념을 등가로 처리한 것. 이렇게 되면 "(소쉬르는) 그 자체로, 그 본질에 있어 어떤 기표도 참조하지 않으며 기호들의 연쇄망을 벗어나는, 어떤 순간에 이르면 더 이상 기표로서 기능하지 않는, 내가 '초월적 기의'라고 부르기를 제안했던 것의 고전적 요구에 순응하게"(42쪽) 된다. 어쨌든 이 '초월적 기의'[중심]가 문제되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전환(switch) 운동, 즉 한 기의가 기의의 기표되는 무한운동[유희]을 방해하고 억제하기 때문이다. 의자앉기 게임(충분한 의자가 있다면 문제가 없다, 재미도 덜할 테지만. 하지만 자리가 하나씩 비어간다면? 재미있지만 가혹한 게임! 사랑(仁)이란 다른 사람을 의자에 앉혀주는 배려[어진 마음]라고.). 하지만 이 '초월적 기의'를 문제삼는 작업은 신중하게[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a) it must pass through the difficult deconstruction of the entire history of metaphysics which imposed, and never will cease to impose upon semiological science in its entirety this fundamental quest for a "transcendental signified" and a concept independent of language."(20쪽)

국역: "그러한 작업은 모든 기호학적 과학에 '초월적 기의'나 언어로부터 독립된 개념의 근본적 요청을 부과했으며 앞으로도 끝없이 부과할 형이상학의 전체 역사에 대한 어려운 해체를 거쳐야 하기 때문"(43쪽)이다. 끊어서 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그것은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해체해야만 하는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바로 이 형이상학이 기호(과)학[기호학을 바탕으로 한 모든 과학적 탐구]에 대해 '초월적 기의', 곧 언어(체계의 의미작용)으로부터 독립된 개념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원초적인] 요구[추구]를 강제[부과]해왔던 것이고, 또 앞으로도 끊임없이 강제할 것입니다."

또: "(b) nor is it a question of confusing at every level, and in all simplicity, the signifier and the signified." 국역: "기표나 기의를 모든 층위에서, 매우 단순하게 뒤섞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번역: "(그렇다고 해서) 그저 단순하게 기표와 기의를 뒤죽박죽으로 혼용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즉 초월적 기의가 문제된다고 해서 기표/기의의 이분법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분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형이상학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공작대는 특수하게 무장할 필요가 있겠는데, 그것이 바로 데리다의 그람(gram)이고 차연(differance)이다. 이 그람과 차연은 오직 흔적만을 남겨둔 채 포위망을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아직 빠져나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럴 것으로 기대될 뿐이다).

예를 들어볼까. 번역[혹은 변장]의 문제: "For example, no translation would be possible without it. In effect, the theme of a transcendental signified took shape within the horizon of an absolutely pure, transparent, and unequivocal translatability."

국역: "예를 들어 그것이 없으면 어떠한 해석(traduction)도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초월적 기의의 주제가 구성되었던 것도 실제로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투명하며 단의적인 해석 가능성의 지평에서입니다."

나의 번역: "예컨대 그것[기표와 기의의 대립]이 없으면 어떠한 번역[해석]도 가능하지 않게 됩니다. 사실, 초월적 기의라는 주제가 가능한 것도 바로 이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투명하며 단의적인 번역이 가능하다는 전제[지평] 하에서인 것입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그러한 번역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번역이란 말을 옮김[변형](transformation)이란 말로 대체해야 한다(사실 우리말의 이 '옮김[운반]'은 데리다의 구도에 아주 적합한 말이다. 또 이 말은 로티의 재서술과 같은 의미연관을 갖는다.).

그리하여: "We will never have, and in fact have never had, to do with some "transport" of pure signifieds from one language to another, or within one and the same language, that the signifying instrument would leave virgin and untouched."

국역: "우리는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혹은 하나의 동일한 언어의 내부에서 기표의 수단, 혹은 '전달매체'를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기의'들의 어떠한 '이동'과는 상관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뜻은 통하지만 좀 억지스럽다. 조금 고쳐보자: "우리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거나 한 언어체계 내에서 어떤 말을 다른 말로 옮길 때, 결코 그 기호표현[기표]에 아무런 손도 대지 않거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순수하게 기호의미[기의]만을 '운반'해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쉬르가 기의와 개념을 등가로 처리한 것은 잘못이다!

(2)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소쉬르가 (형이상학적인 이유로) 음성(phone)에 부여한 특권. "그는 또한 사유와 목소리, 의미와 소리 사이의 '자연적 유대natural link'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고]" "심지어 '사유-소리thought-sound'에 관해" 말한다. 이렇게 되면: "The theme of the arbitrary, thus, is in turned away its most fruitful paths (formalization) toward a hierarchizing teleology."(21쪽)

국역: "자의성의 주제는 이렇게 해서 그 풍요성의 방향(공리화)으로부터 이탈되어서 위계질서적 목적론을 향하게 됩니다."(44쪽) 나의 번역: "(우리의 기대주인) 자의성이란 주제는 약속의 땅[민주화?]으로 가는 길[정도; 마땅히 가야할 길]로부터 이탈하여[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고] (다시) 차별적인[위계적인] 신학[신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와 개념들은 헤겔에게서도 똑같이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소쉬르가 음성에 부여한 특권은 그의 또 다른 주장과 모순된다. 그는 뭐라고 말했던가: ""it is not spoken language that is natural to man, but the faculty of constituting a language, that is, a system of distinct signs...," that is, the possibility of the code and of articulation, independent of any substance, for example, phonic substance."

국역: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말해진 언어가 아니라 랑그를, 다시 말해서 서로 구별되는 기호들의 체계, 즉 실질, 예를 들어 음성적 실질과는 독립적으로 약호와 분절의 가능성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인정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나타납니다."

나의 번역: "(소쉬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본래적인[고유한] 것은 음성언어가 아니라 랑그, 즉 변별적인 기호들의 체계를 구성할 줄 아는 능력이다. (데리다의 부연) 즉, 어떤 실체, 가령 음성적 실체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약호와 분절의 체계를 세우는 능력인 것이지요." 여기서 나는 "possibility"를 "faculty"에 대응하는 말로 보아 능력이라고 옮긴다. 소쉬르, 혹은 한 입으로 두말하기.

(3) 문제는 소쉬르의 모순[오류]이 개인적인 모자람 탓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기호 개념(기표/기의의 이분법)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소쉬르가 음성적 실체에 특권을 부여하고 언어학을 기호학의 전범(pattern)으로 삼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우면서 필연적이다. 어떤 필연인가: "Phon , in effect, is signifying substance given to consciousness as that which is most intimately tied to the thought of signified concept. From this point of view, the voice is consciousness itself."(22쪽)

국역: "음성은 실제로 기의의 개념에 대한 사유에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의식에 주어지는 의미의 실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소리는 의식 그 자체입니다."(45쪽) 맞게 번역되어 있지만 굳이: "음성, 이것은 사실 기의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오는, (직접적으로) 의식에 주어지는[막바로 연줄이 닿는] 기표의 실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목소리[음성]는 바로 의식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 듯한" 현상이 유발되는 것: "나 자신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자발성에 의존하는 듯하며 어떠한 도구나 부속물, 외부의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기표를 나의 사유나 '개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간직하고 있다고 의식합니다."

이렇게 되면: "Not only do the signifier and the signified seem to unite, but also, in this confusion, the signifier seems to erase itself or to become transparent, in order to allow the concept to present itself as what it is, referring to nothing other than its presence. The exteriority of the signifier seems reduced."

국역: "기표나 기의는 결합된 듯이 보일 뿐 아니라 이러한 혼동 속에서 개념이 그 자신의 현전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않으면서 그 스스로 제시되게 하기 위하여 기표는 지워지거나 투명해지는 듯이 보입니다. 기표의 외재성은 환원된 듯이 보입니다." 나의 번역: "기표와 기의의 구별[차이]이 없어져 보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혼동[구별이 없어짐] 속에서 기표는 지워지거나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투명해집니다. 개념이 마치 자기 자신의 현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것처럼[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는 것처럼]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이죠. (그렇게 되면) 기표의 외재성[기표가 우리의 의식 바깥에 있음]이란 것은 거죽만 남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이것은 환상이다: "Naturally this experience is a lure, but a lure whose necessity has organized an entire structure, or an entire epoch..."
국역: "당연히 이러한 경험은 환상이지만 이는 그 필요성에 근거해서 하나의 구조나 시대 전체가 조직되었던 환상입니다." 나의 번역: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경험은 미끼[유혹]에 걸려든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미끼에 걸려들 수밖에 없음[필연성]이 하나의 구조 전체, 시대 전체를 조직했던 것입니다[주물렀던 것입니다]."

이어서 데리다는 이 미끼에 걸려든 거물들을 나열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헤겔 등을 거쳐 후설까지. 그런데 우리의 기호학은 바로 이들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4) 기호의 외재성을 부정[환원]하게 되면 남는 것은 심리적인 것뿐이다. 이에 따른 소쉬르의 단언: "언어학적 기호는 그러므로 양면을 지닌 심리적 실체이다."; "linguistic sign is therefore a two-sided psychic entity." 그렇다면 일반 기호학을 어떻게 심리학에 복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소쉬르는 (장래의) 기호학이 사회 속에서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예언[기대]했다. 이런 소쉬르가 (그의 비판자들에게까지도) 기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이 심리주의[기호현상을 심리현상으로 환원시키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걸 그냥 제거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 이제 심리주의 하지 말자고 좋게 합의를 보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또 단순하지 않다: "Psychologism is not the proper usage of a good concept, but is inscribed and prescribed within the concept of the sign itself, in the equivocal manner of which I spoke at the beginning. This equivocality, which weighs upon the model of the sign, marks the "semiological" project itself and organic totality of its concepts, in particular that of communication, which in effect implies a transmission charged with making pass, from one subject to another, the identity of a signified object, of a meaning or of a concept rightfully separable from the process of passage and from the signifying operation."(23쪽)

국역: "심리주의는 좋은 개념의 나쁜 사용이 아니며 그것은 내가 서두에 말했던 이중적인 방법으로 기호라는 개념 자체에 기입되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기호의 모델을 짓누르고 있는 이러한 이중성은 그 모든 개념들, 특히 이행과정과 의미의 작동과 이론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의미·개념·기의라는 대상의 동일성을 하나의 주체에서 다른 주체로 이동하게 하는 전달을 함축하고 있는 의사소통의 개념의 유기적 총체성과 더불어 '기호학적' 기도를 나타냅니다."(46쪽)

얼른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알아먹을 수 있게 옮겨보자: "심리주의는 좋은[멀쩡한] 개념을 엉뚱한 데다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호라는 개념 자체에, 내가 서두에 말했던 것과 같이 이중적인 방법으로 기입되고 이미 지정되어 있습니다[기호라는 개념 자체에 겹쳐져 있습니다]. 기호 모델을 틀어쥐고 있는 이 (모호한) 이중성은 '기호학적' 구상[프로젝트] 자체와 (그런 기호학적 구상에 소용되는) 개념들의 유기적 총체성, 특히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의 유기적 총체성을 표시합니다[나타내줍니다]. 이 커뮤니케이션이란 것은 사실, 한 주체로부터 다른 주체에게로 어떤 기의(대상), 그러니까 의미라거나 개념을 전달경로나 (기호적인) 의미작용으로부터 안전하게 분리시켜서 온전하게 전달하는 이송행위[이송과정]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기호학의 전제와 구상 자체에, 커뮤니케이션 메카니즘 자체에 심리주의가 개입되어 있다는 얘기다(커뮤니케이션의 아주 단순한 발상[전제]: "A는 C에게 B를 전달한다. A communicates B to C."). 바탕 자체가 그런 것이지 무슨 쓰임이 잘못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즉 기호학과 심리주의는 샴쌍동이(이것도 이중성이다!)처럼 서로 붙어 있다. 그러니 피를 안 보고 이걸 분리해낼 수는 없다.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외과용 메스가 필요하다. 게다가 둘 중의 하나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 따라서, 다시 한번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수술)작업은 신중하게,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기호와 연관된 개념으로 크리스테바는 질문에서 커뮤니케이션과 구조에 대해 언급을 했고, 이제 데리다는 구조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인다. 구조라는 개념의 경우는 훨씬 더 애매모호하다고. 모든 것이 그것[구조]의 작용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기호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로고스중심적이며 인종중심적인 확신들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뒤흔듭니다."(47쪽)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개념들을 폐기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할 방법 또한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데리가 제시하는 방법[대안?]: "Doubtless it is more necessary, from within semiology, to transform concepts, to displace them, to turn them against their presuppositions, to reinscribe them in other chains, and little by little to modify the terrain of our work and thereby produce new configurations."(24쪽)

국역: "그러므로 기호학의 내부에서 이 개념들을 변형시키고 이동시키며 그것들의 전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놓고 다른 연쇄망 속에 재기입하며, 작업의 지평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새로운 지형을 생산해내야 합니다."

번역이 잘돼 있지만 내 식대로 옮겨본다: "(그러므로) 기호학 안에서 개념들을 변형시키고 도치시키며 자신들의 전제에 대항하도록 부추기고 또 다른 관계망[연결고리]에 재편입[재기입]시키면서 아주 조금씩 우리 작업[공작]의 지형적 구도[작전지역]를 변화시켜감으로써 새로운 판도를 이룩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게릴라전이다. 데리다는 전면전[혁명?]에 동의하지 않으며 거기에 승산이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I do not believe in decisive ruptures, in an unequivocal "epidemiological break," as it is called today. Breaks are always, fatally, reinscribed in an old cloth that must continually, interminably be undone. This interminability is not an accident or contingency; it is essential, systematic, and theoretical. And this in no way minimizes the necessity and relative importance of certain breaks, of the appearance and definition of new structures..."

국역: "나는 오늘날 흔히 거론되는 결정적 단절, '인식론적 단절'의 단일성을 믿지 않습니다. 단절들은 이전의 망 속에 항상 필연적으로 재기입되기 마련이며 그 순환 속에서 이 망은 끝없이 해체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끝없음은 우연한 사건이나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체계적이며 이론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단절, 새로운 구조들의 출현 혹은 정의의 필요성과 상대적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번역: "나는 어떤 결정적인 단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어떤 명확한[전면적인] '인식론적 단절'을 믿지 않습니다. 단절들은 항상, 그리고 운명적으로 이전의 낡은 의상을 걸치게 마련이며 이걸 벗어던지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지만 결코 끝장나지는 않습니다. 이 끝장나지 않음[비종결성]은 결코 우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이고 체계적으로 그러한 것이며 이론적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물론) 사정이 이러하다고 해서 어떤 단절들, 혹은 새로운 구조들을 나타나게 하거나 정의해야 하는 필요성과 상대적인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까지가 데리다가 내뱉은 한 마디이다. 대략 그의 어프로치[공격] 방법이 직선적이라기보다는 우회적이며, 그것도 지그재그로 우회적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 그는 목표설정은 단번에 하지만, 그리고 그걸 명확하게 지정하지만, 이후의 공략태도에 있어서는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그러면서 집요하다. 그러니, 힘[펀치]만 가지고는 그를 결코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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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하급관리 마카르 제부시킨과 먼 친척뻘 되는 소녀 바르바라의 편지만으로 이루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에는 대학생 가정교사 포크로프스키 부자(父子)의 얘기가 나온다. 바르바라의 회상 속에서 어릴 적 연정의 대상이기도 했던 포크로프스키에게는 가난하고 늙고 병든, 게다가 알콜중독인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들은 이 아버지의 자랑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의 생일 선물로 바르바라의 도움을 받아 헌책방에서 러시아 시인 푸슈킨 전집을 사지만, 미처 선물을 전해주기도 전에 병약했던 아들은 홀연히 세상을 뜨고 만다.

아들의 장례식날, 아들의 관은 드디어 뚜껑이 덮이고 못이 꽝꽝 박힌 채 짐마차에 실린다. 그리고 묘지를 향하여 마차가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고, 말은 빠른 걸음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가련한 포크로프스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운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리면서 가끔씩 끊어지기도 한다.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춰 서지도 않는다. 궂은 날씨에 내리는 비가 그의 벗겨진 맨머리를 적시고 쌀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여전히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한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푸슈킨 전집) 비죽이 기어나온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으면서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본다. 그 사이에도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진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준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간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간다. 그렇게 마차는 길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만년의 걸작들로 잘 알려진 문호이지만, 내 마음에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소설은 이렇듯 ‘감상적인’ 에피소드들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그의 데뷔작이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대목들로 대표되는 그들의 ‘값싼’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다. 어떤 초월적 실재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로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절대적인 상실이며, 결코 다 애도될 수 없는 어떤 잉여의 체험이다. 그래서 결국, 아들의 관을 실은 마차를 끝끝내 따라갈 수 없었던 포크로프스키 노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저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할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한 대목에서 내가 배우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종교를 만나는 그 자리에서 나는 시를 만난다.

 

 

 

 

 
한때 시인 이성복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쩌자고’란 부사어를 통해서 집약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가령, 세상엔 어쩌자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것일까? (시인 백석을 따라서)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있는 것일까? 그토록 사랑스러우며, 그토록 연약하고, 그토록 한심한! 왜 세상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들이 있는 것일까? 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얼마전 새로 나온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서 시인의 ‘어쩌자고’는 ‘왜, 어떻게’로 변주된다. 왜, 어떻게 그이는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바로 그 ‘남국의 붉은 죽도화’는 왜, 어떻게 여기에 와 피어 있는 것일까?

왜, 어떻게, 너는 이곳에 와서 꽃피었니?
초록 잎새 속에 뿌려진 핏방울.
내 살 속의 살, 살보다 연한 뼈

나는 그 연한 뼈마디보다 더한 슬픔도, 덜한 슬픔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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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학 관련서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영화 연구로서의 영화학이 학제화되면서 영화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과 지식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제도가 지식을 생산한다!). 그것은 이미 문학연구의 경우에도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이론의 많은 부분이 문학이론의 그것과 겹쳐지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영화사보다는 영화이론쪽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학 서적을 드문드문 사두었지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로선 이 분야의 책들을 개관할 만한 형편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도 간간이 출간되는 이 분야의 책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은 분명하기에 대충이라도 정리해둘 필요는 있어 보인다.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은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현암사)이다.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온 정평있는 '교과서'로서 영화학 관련서로서는 아마도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지 않나 싶다. 그런 후에 루돌프 아른하임(<예술로서의 영화>)나 앙드레 바쟁 정도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분야의 초심자로선 충분하다. 그런 초심자에게 적합한 책은 더들리 앤드류의 <현대영화이론The Major Film Theories>(한길사, 1988)이다. 76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영어권에서도 이론사를 정리하고 있는 거의 최초의 책이다. 우리말 번역도 전문 학술어들의 오역을 빼고는(가령 paradigm을 '어형변화'로 옮기는 식) 그런대로 읽을 만하다. 아쉬운 건 절판된 책이라는 점.

이어서 읽을 책은 <현대영화이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영화이론의 개념들>(시각과언어, 1996)이다. 저자는 역시 더들리 앤드류. 그의 책들은 특별히 재미가 있다거나 영감을 준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간의 이론들을 요약해서 잘 정리해준다. 이를테면, 에너지(힘)나 감각을 길러주는 책이 아니라 정보를 전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읽을 만한 책은 얼마전에 나온 신간 <어휘로 풀어읽는 영상기호학>(시각과언어, 2003)이다. <영화기호학사전New Vocaburaries of Film Semiotics>이라고 예고돼 있던 책이 그렇듯 멋쩍은 제목으로 나온 것도 좀 불만스럽고, 번역도 유치한 대목이 많지만, 책 내용 자체는 유용하다.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리얼리즘(반영의 문제)를 큰 가닥으로 하여 현대 영화이론의 쟁점들을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로버트 스탬 외 2인인데, 스탬이란 이름은 기억해 둘 만하다. 브라질 영화 전문가인 스탬은 두툼한 영화이론입문서의 편집자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영화기호학 파트와 리얼리즘과 상호텍스트성 파트를 서술하고 있는데, 나는 그가 신뢰할 만한 이론가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의 계기를 만들어준 책은 <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한나래, 1998)이다. 이런 책은 정보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책에 속하는데, 번역도 좋은 편이다(역자 오세필의 다른 번역인 구로자와의 <감독의 길>도 추천할 만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의 책들이 영화이론과 관련하여 큰 줄기를 이룰 수 있는 책들이다. 거기에 풍족함을 더하기 위해서 로도윅의 <현대영화이론의 궤적The Crisis of Political Modernism>(한나래, 1999)을 읽을 만하다. 손꼽히는 영화이론가의 한 사람인 로도윅은 아직 미번역된 <들뢰즈의 타임머신>의 저자이기도 하다(*2005년에 출간됐다). 번역이 유려하지는 않다.



 

 

 

그리고 들뢰즈. 그의 2권짜리 <시네마> 중에서 제1권 운동-이미지만이 중복 번역돼 있다. 최근 것은 <시네마1>(시각과언어, 2002). 조만간 2권이 마저 출간되기를 기대한다(*2005년에 출간됐다). 그리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한 가장 우수한 비평집인 <뇌는 스크린이다>(이소출판사, 2003). 그레고리 플랙스먼의 편집이고, 10여명이 필자들이 들뢰즈 영화론의 구석구석을 검토하고 있다. 들뢰즈나 영화이론에 관심있는 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다. 역자는 헤겔, 하버마스 전공에서 들뢰즈 영화론 전공으로 방향을 튼 박성수 교수. 아직은 더 나은 역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쉬운 것은 현대영화이론의 문턱에 해당하는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1931-1993)의 저작들이 아직 번역되고 있지 않은 점. 메츠를 기점으로 영화이론은 고전적 시기와 현대이론으로 분할될 수 있을 만큼 그는 중요한 이론가이다. 일반언어학으로 국가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영화'언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당연해 보이는데, 후기에 그는 정신분헉학과 영화쪽으로 관심을 확장한다. 주저인 <영화의 언어>와 <상상적 기표 - 정신분석학과 영화> 정도는 조만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메츠의 구조주의적 영화분석에 대해서 간단하게 참고할 수 있는 책으로는 존 레흐트의 <문화연구를 위한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 1996)이 있다. 아주 유용한 현대사상가 사전 혹은 현대사상 매뉴얼인 이 책은 최근에 <한권으로 보는 현대사상 50인>(2003)으로 다시 나왔다. 편제는 약간 바뀌었지만 내용은 그대로인데, 물론 오역이나 오탈자 등도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용하지만.

예컨대, 메츠의 거대 통합체에 관한 해설에서 레흐트는 흔히 shot로 번역되는 불어의 쁠랑plan을 그냥 plan으로 옮겼는데 우리말 역자는 그걸 '계획'으로 옮겼다. 그래서 '자율적인 쇼트'가 '자율적인 계획'으로 탈바꿈했다('계획'이란 영화용어가 어디 있는가?). 그런 거 말고도 책에는 이런저럭 오역이나 부적절한 번역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한다면, 책은 손때가 묻을 정도를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 세번쯤 읽으면 현대사상의 로드맵이 그려질 것이다...

 

 

 

 

덧붙임: 지난주에 벨라 발라즈의 <영화의 이론>(동문선)이 번역돼 나왔다('발라슈'라고 읽는 게 맞다고 한다). 40년대 저작이니까 아주 태고적 저작이지만, 나름대로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론서이다. 벨라 발라즈에 대해서는 역시나 더들리 앤드류의 <현대영화이론>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03. 6. 11./ 06. 08. 18.

P.S. 몇 개의 이미지를 추가했지만, 지난 몇 년 사이 더 출간된 책들이 또 꽤 많다. 이 목록도 언젠가는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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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이때의 어떤 것은 어떤 작용력이다.

 

  

 



M. 하이데거의 존재(Sein)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글자들, 유전형(genotype)과 표현형(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중력은 그런 것이다.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로 규정할 때, 그는 이 중력에 대해서 잠시 잊은 듯하다. 즉 그는 현존재의 한 면만을 말한 것. 다른 한 면이란 바로 현존재가 ‘잡아당겨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내던져진 채로 가만 놔두어지는 존재가 아니다(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꼼지락거린다). 따라서 내던져짐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현존재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는다. 잡아당겨짐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반드시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존재물음과 존재사유는 제값의 덩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시는 포스트그램(post-gram)이다(시인은 포스트그래머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삶이 무게(질량)와 거리의 관계에 의해 정식화되는 중력의 지배하에 놓인다면, 시는 그것에서 벗어난다. 적어도 벗어나는 체한다. 시는 무게와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 즉 시는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의미에 지배되지 않는다. 시는 단지 어떤 형태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시라는 것은 백과사전적(혹은 n차원적) 의미공간에서 어떤 자력(磁力)에 의해 결합되는 단어들의 집합이다. 새로운 시라는 것은 이 의미공간에서 새로운 항로를 발견한다는 뜻을 갖는다. 이때 시의 공간은 다만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다. 따라서 시는 현존하지 않는다. 시의 흔적만이 현존할 따름이다. 언젠가 당신 뺨에 흐르던 눈물 자국처럼, 그것은 곧 마르고 곧 지워지며 곧 잊혀진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부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삶을 많이 가난하게 만들 것이다. 시는 그런 것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시적인 것의 세 가지 사례: ⒜아침에 아이들을 깨울 때는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경쾌한 음악을 틀었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잠옷 위에 바바리를 걸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나갔다가 아예 지하철을 함께 타고 남편의 직장까지 가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경직 상태)로 되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할 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동물들은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약탈자로부터 위기를 모면한다... 카메룬 두꺼비와 돼지코뱀은 위협을 당하게 되면 등을 땅에 대고 드러누워 혀를 빼물고 죽은 시늉을 한다. 그러나 이 방어기제는 완벽하게 발달된 것은 아니어서 똑바로 길을 가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때 즉시 다시 드러눕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한다.

⒞아버지께서는 시상(詩想)이 떠오르실 때면 항상 우리를 불러다 받아쓰게 하셨다. 언젠가 아버지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은 시 쓰시는 일밖에 없으시면서 그것도 왜 혼자 하시지 않으세요?”하고 철없는 불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시를 쓰려고 하면 내가 시를 쓸 수 있구나 하는 기쁨에 손이 떨려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등가적이다. 과연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3초의 시간 여유. 정답은 과잉, 뭔가 넘쳐남이다. 먼저 ⒜는 바순(파고트)을 전공, 시립교향악단의 수석 바순주자로 활동하다가 “립스틱을 지워야 하는 것이 싫어”서 그만 둔 M여사(41세)의 얘기다. 다른 건 평범하다. 경쾌한 음악쯤은 나도 튼다. 하지만 바바리만 걸치고 ‘아파트 현관’을 지나서 남편의 직장까지 동행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G. 베커의 가족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부부생활(결혼)은 생물학적 차이에 바탕을 둔 교환계약이며 생산기술과 부부노동의 잠재적 시장가격에 의해 부부생활이 결정된다. 이때 사회적 의미에서 결혼이란 특정한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제도로써 사회가 수용한 것이라고 정의된다. 사랑의 감정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교환계약의 한 요소이다.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따라서 M여사 류의 감정(표현)은 과잉이다. 그래서 시적이다!

⒝의 두꺼비도 마찬가지이다. 이 녀석의 불완전한 방어기제 또한 눈물나게 시적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혀를 빼물고 죽은 시늉”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이 시지프적인 두꺼비가 제법 시를 알 만한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양서류로서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포유류의 시적 동물로서의 우리는 이 두꺼비에게 깊은 연민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는 박용래 시인의 얘기다. 시가 무엇이기에 손이 떨려 글씨도 제대로 못쓴단 말인가? 이건 시를 초과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시적이다! 이 세 가지 사례는 각각 제도와 본능과 시가 무엇인가라는 사유에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과잉, 넘쳐남을 통해서이다.

 

 

 

 

H. 베르그송은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을 ‘웃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나는 기계적인 것에 덧붙여진 생명적인 것을 ‘시(시적인 것)’라고 규정하겠다. 물론 이때의 시는 장르적인 규정이 아니다. 이 시적인 것은 우주적인 차원의 것이다. 바로 우리가 존재-시와 중력-시를 말하고 더듬고 사유하는 차원 말이다. 장르로서의 시는 이 전체-시(한 권의 시집Le Livre!)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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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4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식과 이해는 개개 사물과 사건의 ‘다름’ 속에서 ‘같음’을 보는 행위이다. 즉 차이 속에서 어떤 반복을 보는 행위이며, 그래서 어떤 타입과 패턴을 파악하는 행위이다. 여기엔 동서양이 따로 없다. 동양의 주자학적 전통에서 공부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말하는데, 이때 ‘격물’은 사물을 격자 속에 놓고 파악하는 걸 뜻한다(패턴에 대한 앎이 바로 공부이다). 이 격자가 바로 서양철학적 전통에서의 기하학적 공간이다.

기하학적 이성이란 자신의 삶이 유일한 삶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삶(패턴)의 한 양상(거품)에 불과하다는 걸 꿰뚫어보는 이성이다. 즉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카뮈는 이걸 부조리라 부른다)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조되는 것이 바로 반-기하학적 이성, 섬세한 정신이다(‘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의 이분법은 파스칼을 따른 것이다). 그것은 진짜 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개개의 물고기(혹은 물방개)의 물에 대한 현실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다. 즉 우리의 현실을 주무르는 손때묻은 이성이다. 나는 이걸 달리 아줌마적 이성, 아줌마 정신이라고 부른다(아줌마들은 섬세한 걸 좋아한다).

한 아줌마의 시적 발언 한 대목을 예로 들어보겠다(김상미의 ‘아줌마’).

한 명의 아줌마 안에 수백 수십 명의 아줌마가 숨어 있다
그 수심의 깊이는 아줌마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아줌마는 현재 우리 집 안에도 있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줌마의 생각을 알려면 아줌마들만의 은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학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이다.

이 시의 1행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줌마 나름의 (무시 못할) 내력이다. 이 내력은 기하학적 이성에서의 전체화된 부분, 부분화된 전체에 대응하는 것이고 맞먹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3행이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라는 건 뒤집어서 얘기하면, 아줌마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 이 자기-중심적 사고야말로 아줌마적 이성의 모토요, 아줌마 정신의 알토란 같은 핵이다.

이 억척 어멈의 이성(메를로-퐁티의 ‘신체적 이성’)은 삶의 현장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성이다. 이 이성은 물밖에서 팔짱끼고 있는 제3자적 이성이 아니라, 물속에서 팔딱이고 있는 주관적 이성이다. 그것은 결코 삶을 멀거니 관조하지 않는다(‘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이다). 악착같이 삶에 밀착하여 부대끼고 싸우며 이겨낸다. 그리하여 “육체적 편안함과 안락한 보금자리, 그리고 걱정없이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가능성”(이런 것이 아줌마에겐 중요하다)을 확보한다. 아줌마는 동물적인 실존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줌마의 이러한 존재론에 비하면, 아줌마의 사회학은 별거 아니다(그런 사회학에 집중하고 있는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은 그래서 우리의 주목에 값하지 못한다). 이 아줌마들에게 E=mc2 같은 기하학적 인식은 오직 미학적, 장식적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이건 결코 폄하의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아줌마’가 바로 우리 집 안에도 있고,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남성에게 있는 여성성은 ‘아니마’만이 아니다).

아줌마성이란 무엇인가? “라파엘의 그림이 다 없어진다면 야단들이 날 것이다. 그러나 이끼의 한 종류나 식물 한 가지가 없어지는 데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불균형한 휴머니즘이 현대문명의 이상한 점이다.”(레비-스트로스)라고 한 인류학자가 털어놓을 때, 그가 꼬집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줌마성이다. 또 “언제나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본다.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루스트에 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들은 내 낮은 목소리만을 듣고, 가슴만 뚫어져라 볼 뿐이다.”(제니퍼 틸리)라고 한 여배우가 털어놓을 때, 그녀가 꼬집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줌마성이다(아줌마들은 돈을 좋아하고 또 음탕하다).

사실 이 아줌마성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면서, (생활 속의) 행복의 원천이긴 하다. 또 자기-중심주의와 가족-중심주의, 그리고 종족(민족)-중심주의, 자문화-중심주의에 아줌마성이 기여하는 바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에의 편향이다. 무엇에의 편향(편애)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기하학적 이성과 반-기하학적 이성의 균형과 조화에서 인간다움의 품위와 가치가 찾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저마다의 죽음을 죽으면서 동시에 인류 공통의 죽음을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수많은 파도 중의 하나처럼 개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일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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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6-09-2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저씨적 이성이라 써도 괜찮을 법한데. 이런 비유 보면 문득 생각나는 에피소드.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러 간다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옆집 아가씨 왈, 아줌마들은 (이런 영화) 이해하기 힘들텐데... 혹, 로쟈님 안에 은근한 마초 하나 키우고 있을까 두렵다는...

로쟈 2006-09-25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줌마적 이성'이란 게 '아저씨적 이성'과는 전혀 종류가 다릅니다. 저는 니체나 레비나스 같은 이들을 '아줌마 철학자'로 분류하는데, 이들은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들이기도 합니다(관련 페이퍼들이 여러 개 더 있습니다). 그리고 '은근한 마초'라고 할 때, 그 마초성이 XY염색체에 새겨진 거라면 저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06-09-2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물학적 마초성은 인정하지만 사회학적(혹은 심리학적) 그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히니 위안이 됩니다. 각설하고, '아줌마적 이성'과 전혀 다른 '아저씨적 이성'에 대한 주제로도 쓰신 게 있나요? 비교해서 읽어야만 제 독해가 그나마 나아질 것 같아요.

로쟈 2006-09-2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생각나는 건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란 페이퍼입니다. 제목이 은근히 마초적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