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멀리 가진 못해서 <세계의 문학>((2000 봄호), 247쪽, 그리고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 17쪽부터가 이 글에서 다루어질 범위이다. 두 국역본이 부분적인 차이가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한데, 이어지는 내용을 비교하여 읽어보면 이렇다.

(1)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말하게 하는 형식적 성격을 상실한 경우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인 것이다. 그는 형식적 성격들을 획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접지역으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이 생성되는 것이다. 모든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세계의 문학>, 247-8쪽) 

(2)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나타내게 하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빼앗길 때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얻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웃관계의 지대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 어떠한 글을 막론하고 운동경기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만, 문학과 스포츠를 조화시킨다거나 글로 올림픽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운동경기는 도피와 유기적 탈퇴에까지 미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비평과 진단>, 16-7쪽)

(3)But the power of the indefinite article is effected only if the term in becoming is stripped of the formal characteristics that make it say the. When Le Clezio becomes-Indian, it is always as an incomplete Indian who does not know "how to cultivate corn or carve a dugout canoe"; rather than acquiring formal characteristics, he enters a zone of proximity. It is the same, im Kafka with the swimming champion who does not know how to swim. All writing involves an athleticism, but far from reconciling literature with sports or turning writing into an Olympic event, this athleticlsm is exercised in flight and in the breakdown of the organic body - an athlete in bed, as Michaux put it.(영역본, 2쪽) 

 

 

 

 

먼저 첫문장.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이지만, 들뢰즈가 예찬하는 것은 정관사(le/la; the)가 아닌 부정관사(un/une; a/an)의 세계이다. 익명적 혹은 비인칭적 세계(그걸 '다중'적 세계라고 애써 해석하게 되면 들뢰즈와 네그리의 접점이 마련된다). (2)의 번역이 (1)을 베꼈다는 건 이 첫문장에서도 확인된다. 대략, '형식적 성격'을 '형태적 문자기호들'로 대체했을 뿐이다. 물론 이 대체는 엉뚱한 것이다. 불어의 caracteres가 영어 character와 마찬가지로 '문자'나 '부호'로 뜻도 갖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부정관사 대신에 정관사를 말하게 하는 특성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걸 말하는가? 시 한편을 예로 들어보자. 이성복의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여기서 1행의 '한 여자(a girl)'가 어떻게 2행에서 '그 여자(the girl)'로 한정되는가?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라고 구체화/인칭화됨으로써이다. 그때 '돌 속에 묻혀 있었던'이란 한정어구가 들뢰즈가 말하는 '형식적 특성들'이다. 그러한 특성들/한정들에 의해서 '한 여자'는 비인칭성(4인칭)의 평면에서 인칭화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번역에서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라는 건 좀 불친절한데, 가령 '여성-되기'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시기-되기'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시기'가 아무런 한정을 받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정관사를 수반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언제나 '어떤 거시기-되기'인 것이다.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만, '베컴-되기'나 '박지성-되기' 등의 고유명사-되기는 유사-생성의 사례들이다. 진정한 생성(되기)은 거꾸로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an athlete in bed)' 되기이다. (르 클레지오에 따르면) 그것은  미완의, 되다 만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되기이고,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되기이다(<비평과 진단>에서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라고 옮긴 건 문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도피'란 건 흔히 '도주'나 '탈주'로 옮겨지는 걸 말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빔 벤더스의 영화 중에 <페널티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1971)이 있는데, 그의 이 장편 데뷔작은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그는 <베를린 천사의 시>도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참고로, 한트케의 최신작은 작년에 발표된 <돈후안>(이며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오스트리아의 여성 작가 옐리네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 영화는 주인공인 골키퍼 브루노가 페널티 킥을 맞은 불안 때문에 경기장을 빠져나가 배회하는 걸 줄거리로 하고 있고 있다. 그런 게 '도주'이다('탈주'는 좀 낭만화된 표현이다).

 

 

 

 

그리고 국역본들에서 '유기적 탈퇴'라는 건 좀 부정확해 보이는데, 그냥 몸(유기체)이 고장나거나 부상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선수이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라는 것. 해서 '슈팅 라이크 베컴'이 아니라 '브레이크다운 라이크 베컴'이다(베컴에 언제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문장만 더 읽어보자: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 정신주의적 편견과는 정반대로 제대로 죽을 줄 알며, 죽음을 느끼거나 예감하는 것은 바로 동물이다. 문학은 로렌스에 따르면, 고슴도치의 죽음과 더불어, 카프카에 따르면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부드러운 연민의 몸짓으로 내밀어진 우리의 붉고 작은 발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고 모리츠는 말하곤 했다."

 

 

 

 

D. H. 로렌스(1885-1930)는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영문학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내가 별로 읽은 바가 없는 탓에 '고슴도치의 죽음'이 어느 작품(혹은 에세이)에 나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캥거루라면 몰라도). 그의 작품들은 주요 장편들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소개된 걸로 알지만.   

 

 

 

 

그리고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카프카. 그의 작품들 또한 전집 규모로 소개돼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을 듯하고 남은 건 그냥 읽어주는 것이겠다. 또한 아마도 들뢰즈의 카프카론에 대해서는 물론 책 한 권 분량을 써도 모자랄 테니까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참고로 올해 나온 카프카 책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빌헬름 엠리히의 <카프카를 읽다(전2권)>(유로서적). 카프카 연구자 빌헬름 엠리히가 1958년에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을 번역하여, 총2권에 나누어 담은 책인데,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해석이 지배적인 시점에서, 막스 브로트와 다른 견해로 카프카를 해석한 작품으로, 오늘날의 카프카의 작품해석에 다양성을 부여했다고 평가받는"단다. 카프카 애독자들의 즐거움이겠다. 전집판으로 <소송>(솔출판사)이 얼마전 출간된 것도 기록해둘 만하다.   

그리고 모리츠. 칼 필립 모리츠(K. P. Moritz)를 말하는데, 그의 작품 중 <안톤 라이저>(문학과지성사, 2003)가 번역돼 있다. "괴테가 당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 바 있는 칼 필립 모리츠의 심리소설"로서 "'안톤 라이저'라는 한 소년의 유년시절과 성장과정을 성인이 된 화자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는데, 소개에는 "보잘것 없는 신분, 가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난 소년의 성장사는 사회의 무시와 멸시, 냉대로 얼룩져 있다. 주인공은 진정한 배웅과 교양에 목말라하지만,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영혼의 훼손과 마음의 상처는 더해만 간다. 야비한 세상에 주눅든 안톤은 자폐와 분열,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든다. 경건주의 신앙의 실상과 그 이면,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찬 중간계급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묘사는, 18세기 독일의 사회사라 볼 수 있다."고 돼 있다.

모리츠는 "1756년 독일 북부 소도시 하멜른의 궁핍한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자 제조 기술을 익히는 견습생 생활을 했다. 에어푸르트 대학과 비텐베르크 대학을 다니며 신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786년 이탈리아 여행길에 괴테를 만나 2년간 교류했다. 독일로 돌아온 뒤 1789년 바이마르 공국의 칼 아우구스트 공의 중재로 베를린 대학의 문학이론 및 고전문헌학 담당 교수가 되었다. 1793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의 <안톤 라이저> 역자해설이 "'고통의 역사(Pathographie)와 소설의 형식"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사회사의 이면에서 '고통'이란 주제에 민감했던 작가로 보인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는 인용이 이해가 갈 만큼.

이해하기 까다로운 건 인용문의 첫문장인데,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세계의 문학>)나 "동물은 죽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동물적이 된다."(<비평과 진단>) 같은 번역문들은 그 까다로움을 풀어주지 못한다. 영역본엔 "One becomes animal all the more when the animal dies."로 돼 있다(불어 원문은 "On devient d'autant plus animal que l'animal meurt."). 러시아어본은 "동물-되기는 동물이 죽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정도로 옮기고 있다.

 

 

 

 

문맥상, 그러니까 바로 앞에 나왔던 정관사/부정관사 문제와 연계시켜보자면,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the animal(l'animal)'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동물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동물이 되는 게 아니라 불특정의 동물이 되는 것이며, 죽음은 '그 동물'이라는 특정성으로부터 도주하는 것이자 해방되는 것이다. '남해금산'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죽음은 '그 여자'를 '한 여자'로 해소하고 다시 환원한다. 다시 '한 잎의 여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女子

이 시의 결론에서 "그러나 구누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라고 규정되는 것은 '한 여자'(=한 잎의 여자)가 결코 '그 여자'로 특칭되지 않는 것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이 사랑은 '방법적 사랑'일까, '소유하지 않는 사랑'일까?). '여성-되기'라고 할 때 그 '여성'은 그러한 '한 여자'이면서 '한 잎의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여자'이다. '동물-되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죽어가는 동물이 될 때(동물들은 각자의/고유한 죽음을 죽지 않는다), 비로소 제대로 동물-되기에 이르며, 문학은 그때 거기서 시작된다. 이것이 들뢰즈 문학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간에 시간관계상 오늘은 여기까지 읽도록 하겠다(이런 진도라면 올해 안에 끝내긴 글렀다)... 

05. 12. 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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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에 실린 에세이 '문학과 삶'  읽기인데, 지난번 브리핑에서 다룬 건 <비평과 진단>의 서문이었다. 텍스트 '문학과 삶'의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가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번역서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에 실린 것이고(15-24쪽), 다른 하나는 계간 <세계의 문학>(2000년 봄호)에 실린 것이다(246-253쪽). 이 후자에 붙여진 제목이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이다.

발행년도는 갖지만 후자가 먼저 출간되었는데, 가독성이 앞엣것보다는 낫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예비적인 정보 없이 두 텍스트를 읽어본다면, 후자가 전자를 교정한 번역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데, 문장이나 문투가 유사한 대목이 많다. 나는 <비평과 진단>의 번역이 <세계의 문학>의 번역을 베꼈을 거라는 의혹을 갖고 있다. 동일한 오역이 발견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나는 년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세계의 문학> 번역이 <비평과 진단>을 베끼면서 교정한 것인 줄 알았다). 한데, 흔히 공부 못하는 학생이 컨닝하는 식의 번역이어서 베끼면서도 더 알아먹을 수 없도록 개악한 형국(그러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아무려나 들뢰즈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텍스트를 정리해보도록 한다. 내가 주로 인용하는 것은 <세계의 문학>의 번역이며, <비평과 진단>은 필요할 경우에 대조하는 방식으로 글은 전개될 것이다. 처음 몇 문장은 이렇다.

  

 

 

 

"확실히 글쓰기는 체험한 재료에 표현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곰브로비치(Gombrowicz)의 말과 행동처럼 오히려 비정형이나 미완성을 향한다. 글쓰기는 늘 미완성으로 끝나는, 늘 일어나고 있는 생선/변화의 문제이다. 그것은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246쪽) 맨마지막 문장만 <비평과 진단>에는 "살기에 편하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로 옮겨져 있을 뿐 두 번역본이 동일하다. '체험할 수 있거나/살기에 편하거나'는 불어의 le vivable(영어의 the livable)의 번역인데, 나는 언젠가 (<세계의 문학>에 대한 참조 없이도) '살기에 편하거나'란 번역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가능한 삶'이란 함축을 갖는 '체험할 수 있거나'가 내가 보기엔 더 정확한 번역이다.

Gombrowicz photo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1904-1969)의 작품은  <페르디두르케>(민음사, 2004)와 <포르노그라피아>(민음사, 2004)가 거의 동시에 출간됨으로써 국내에 소개되었다(<비평과 진단>에는 생몰년대가 '1905- '로 역주에 표기돼 있는데 무얼 참조한 것인지 모르겠다). 알라딘에 소개돼 있는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04년 폴란드 남부의 말로시체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뜻에 따라 귀족적인 가톨릭 학교를 거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법학에 흥미가 없던 차에 대학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하고 귀국했다.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틈틈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서 1933년 첫 작품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평단의 비난과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작가의 길을 결심하고 희곡 <부르고뉴의 공주 이본>과 첫 장편 <페르디두르케>를 발표했다. 1939년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다음 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했다. 그 후 그의 작품은 나치에 의해 긴 판금에 들어갔다. 지방 신문사와 은행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면서 두 번째 장편 <대서양 횡단선>을 완성했다. 1933년부터 잡지 <쿨투라>에 관여하면서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1957년 폴란드 자유화 운동의 결과 일시적으로 검열이 약화되면서 몇몇 작품들이 출간되었지만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다시 금서로 묶여 1960년대 중반까지 판금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고국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세 번째 장편 <포르노그라피아>를 발표한 후 1963년 포드 재단의 기금을 받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네 번째 장편 <코스모스>를 발표하고, 1968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69년 프랑스 방스에서 별세했다."

그러니까 네 편의 장편소설이 그의 주저인 듯한데, 작년에 출간된 이 번역본들을 나는 아직 안 읽어봤기 때문에 논평할 처지는 못된다. 하지만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본들이 나와 있는 걸 확인했었다(기억에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참고로, 최근에 폴란드 문학의 거장 헨릭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의 노벨문학상 수상작(1905) <쿠오바디스>(민음사)가 수상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됐다(폴란드어 완역본은 최초가 아닐까 싶다). 라틴어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란 뜻이다. 오래전 내가 본 영화에서는 라스트 신에서 베드로의 대사였다.

1905년이면 곰브로비치가 한 살 때이고, 프랑스에선 사르트르가 태어나던 해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10살이었고, 그해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닥터 지바고>의 초반부에 묘사된다). 아래는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차르 군대에 의한 시민 학살 장면이다(올해가 가기 전에 기억해 두도록 한다).  

Bloody Sunday Attack

아무려나 그해 가을 러시아와는 역사적으로 앙숙인 나라 폴란드의 작가 시엔키에비치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건너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 그리고 곰브로비치는 그 폴란드 문학의 또다른 거장이라는 것. 다시 들뢰즈로 돌아오면 첫문단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것은[글쓰기는] 과정, 다시 말해서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것을 가로지르는 삶의 이행이다. 글쓰기는 생성/변화와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식물이 되기도 한다. 또한 미립자가 되어 지각 불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여성-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지각불가능한 것-되기 등은 들뢰즈 문학론의 '표지' 같은 것이어서 요즘은 우리 주변의 비평이나 논문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호들'이다(가장 쉬운 안내는 콜브룩의 <질 들뢰즈>를 참조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작품론에의 적용은 <들뢰즈와 문학-기계>에 실린 글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되기'의 사례들로 최근 시의 경향들을 분석해 보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과제 중 하나인데, 가령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안, 2005)가 여자-되기 혹은 여장남자-되기의 사례라면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는 동물-되기(보다 구체적으론 고슴도치-되기)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한다(이에 대한 '읽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들뢰즈의 이어지는 문단: "이러한 생성/변화들은 르 클레지오의 한 소설 작품에서처럼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거나 아니면 러브크래프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생성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남자가 모든 재료에 강요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제시되는 한 남자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은 들뢰즈적 생성(되기)에서 열외라는 얘기겠다(하긴 그들은 필연코 뭐가 돼야 할 만큼 뭐가 아쉬울 리 없을 테니까).  

<비평과 진단>에서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따라서 인간은 모든 재료에 강요된다고 주장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표상되는 한,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16쪽)라고 돼 있다.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한 번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클브룩의 <질 들뢰즈>에서도 역자는 '남자/남성'이라고 옮겨져야 더 적합한 대목들에서 'man'을 '인간'이라고 옮기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라니?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1940- )의 책들은 데뷔작인 <조서>(세계사, 1989; 민음사, 2001)를 필두로 해서 이래저래 20여 권 가까이 번역/소개돼 있다(그는 지난번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내한한 바 있으며 작가 황석영과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2001년인가에도 방한한 적이 있으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내가 읽은 건 <조서>뿐이어서(그것도 15년쯤 전에 읽은!)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쓰려는데,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작품 <조서>에서 르 클레지오는 여자로의 생성, 쥐로의 생성, 그리고 지작할 수 없는 생성 속에 소멸해 가는 한 인물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로선 계속 도망다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H. P. 러브크래프트(1890-1937)는 내게 생소한 작가인데, '미국 출신의 호러 작가'라니까 그럴 만하다(호러는 소설이건 영화건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미국 로드 아일랜드주에서 태어났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8살 때 사망한 아버지, 신경질적인 어머니 아래서 악몽에 시달리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 자신 18세에 정신쇠약으로 학교공부를 포기하고 독서광으로 지냈다. <위어드 테일즈> 등의 잡지의 인기작가였던 그는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현재는 진정한 '미국적 판타지의 창조자'로 평가받고 있다. 암으로 사망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47살에 사망했으니까 애드가 앨런 포우만큼이나 불우한 작가의 계보에 속하는 모양이다. 국내에는 1992년부터 띄엄띄엄 소개된 걸로 나오는데, 올해 <러브크래프트 코드(전5권)>(책세상)이 한꺼번에 나왔으니까 그의 독자들에겐 '기념비적인' 해가 될 만하다. 판매율이 저조한 걸로 보아 그가 국내에선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영미문학 애호가인 들뢰즈에 따르면, 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생성은)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반면에 여성이나, 동물, 미립자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화를 벗어나는 도피 성분을 항상 지닌다.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이 생성은 그녀가 간청할 수 있을 어떤 상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생성은 어떤 형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인접지역이나 식별이 불가능한 미분화된 지대를 찾아내는 것이다."(247쪽)

세 가지가 지적될 필요가 있다. 먼저,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다시 말해서, 글쓰기는 남자임(being a man)으로부터의 도주이다. '글쓰는 자'는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 거북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자이다. 그리고, 둘째,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 여성은 들뢰즈의 여성-되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그러니까 여자라고 해서 이 '여성-되기'에서 무슨 특권을 갖는 게 아니다). '여성'은 '소수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기에. 그리고 끝으로 이 되기의 지향점은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식별되지 않는 익명적, 비인칭적 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Andre Dhotel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에필로그는 '하나의 삶'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데, 그때 '하나의 삶(une vie; a life)'에서 '하나'가 뜻하는 바는 고유성이나 단독성이 아니라 이 '익명성'이고 '비인칭성'이다. 그 사례로 들뢰즈가 들고 있는 것은 앙드레 도텔(Andre Dhotel; 1900-1991)의 성상체(aster)이다.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이 '성상체-되기'는 도텔의 <우화 같은 연대기(La Chronique fabuleuse)>의 225쪽을 참조할 수 있다(번역본엔 222쪽이라고 오기돼 있다). 나는 표지의 이미지만을 참조할 수 있는데(두번재 이미지), 혹 세번째 이미지의 풀 같은 종류가 아닐까 싶다(마지막 이미지는 작가 앙드레 도텔과 그의 캐리커쳐).

문학을 그러한 '성상체'로 만든다면, 거기서 "성(sexes)이나 속(genera), 계(kingdoms) 사이를 무언가가 지나간다." 여기서 '계'란 '동물계', '식물계'라고 할 때의 '계'이다. 이 사이로 지나간다는 말은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분류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나간다는 뜻이겠다. "예컨대 여자들 사이의 여자, 동물들 중의 하나처럼 생성은 언제나 <-사이>이거나 <-중에>이다."(영역: "Becoming is always 'between' or 'among': a woman between women, or an animal among other.") 그러니까 들뢰즈의 생성(되기)란 '군계일학(群鷄一鶴)' 즉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학이 되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군계일계(群鷄一鷄)' 곧,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닭이 되는 걸 말한다. 왜 이런 노래 있잖은가. "나는 한 마리 이름없는 닭/ 닭이 되어 살고 싶어라" 이 닭털 같은 나날들을?!

 

 

 

 

05. 12. 25-27

P.S. 분량상으론 '문학과 삶'의 한 페이지를 읽었다. 글이 늘어지고 있는 탓에 몇 차례 분재해야겠다. 저녁시간이 다가온바 육신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도 먹어야겠고. 우리의 '두더지'는 다음 연재에서 죽을 것인바, '문학'도 그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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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06-09-1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입니다만, 동서의 H. P. 러브크래프트(HPL) 선집 판매가 저조한 건 수준(그리고 상식) 이하의 번역 때문일 겁니다. 동서에선 그 선집을 내기 전에 이미 몇 작품을 묶어 [공포의 보수]라는 한 권으로 낸 적이 있는데, 이번 선집에도 그 번역을 재탕했다고 하며 나머지 작품들 번역수준도 과히 기대 이하라고 하거든요. 국내 HPL 매니아들은 황금가지 쪽의 전집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로쟈 2006-09-2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번역...
 

보통은 12월 23일이 동지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젯밤 자정 뉴스를 보니 어제가 동지였다. 뒤늦게 지난 주말 사다놓은 즉석 팥죽을 먹어볼까 하다가 야식도 이미 먹은 터라 참아두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야 (맛은 없지만) 구색을 차리느라 '동지 팥죽'을 먹었다(해서 이 글은 죽먹은 힘으로 쓰는 것이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이란 시구였는데, 기형도(1960-1989)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에 나오는 것이다. 생각난 김에 몇 자 적어둔다.

 

 

 

 

제목 그대로 '위험한 家係-1969'는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 어린시절 가족사에 대한 회상으로 구성돼 있다. 6개의 절로 돼 있는데, 동지의 불빛이 언급되는 건 맨마지막 절이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 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 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으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렇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전집>, 95쪽)

 

 

 

 

기형도의 많은 시들이 그의 유년시절과 불행한 가족사에 바쳐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 '위험한 가계'는 그 사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려내고/진술하고 있는 시인데, 그 시작은 아버지의 병환이다. 시의 서두에 진술된 대로,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92쪽) 그리고 이어진 건 이 가족의 '동지', 즉 '긴 밤'이고 '아주 추운 밤'이다(문득 일찍 겨울이 들이닥쳤다는 파키스탄의 지진 피해지역이 떠오른다). 유년의 화자가 희원하는 건 "우리가 모두 낫는 날" 곧,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고, 가족이 다시 '봄'을 맞이하는 것이다. 올해처럼 눈이 많이 내렸다는 1969년 겨울의 일이다(물론 이번 호남지역의 폭설은 기상관측사상 '최악'이라고 기록된다지만).

 

 

 

 

시의 이 마지막 대목에서 유년의 화자는 그래도 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환한 가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은 "해바라기 씨앗"처럼 웅크리고 자지만, 언젠가 "아주 큰 꽃"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거라고 다짐해보는 것이다. 언제가는 '용수철(spring)'처럼 튀어오를 '아주 큰 꽃'과 '환한 가계'!  

1968년하면 떠올려지는 건 '68혁명'이지만, 1969년이 내게 떠올려주는 건 한 시인의 불행한 가족사이다(그런데 이 구체적 가족사는 '그토록 쓰라린 삶'이라는 보편성을 상기/환기시켜주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게 시의 힘이고 문학의 힘이다). 시인의 요절 1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999년에 <전집>이 출간됐었는바, 우연찮게도 그건 이 시에서 제시된 가족사의 불행 30주년을 상기시켜주기도 했다(그 1999년 12월 말에 나는 한 독서대학에서 기형도의 시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1969년의 겨울, 이후로 시인은 20년의 삶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는 어머니께 '아주 큰 꽃'을 보여드렸을까?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기형도가 유년에 가졌던 꿈이 특이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가상'으로만 설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론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여타의 유년시들과 기형도의 시를 차별화시켜주는 것일 듯싶은데, 시에서 그 방법론은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라고 제시돼 있다. <전집>을 읽으면서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지만, 기형도 특유의 '식물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핵심은 이 '모종'과 '전정'이다(내 견문에 이 '전정'에 최초로 주목한 비평가는 정과리이다. 기형도에 대한 그의 평문은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의 가장 중요한 꼭지를 이룬다. 기형도에 관한 필수적인 참고문헌이지만, 나는 그가 이 '전정'을 기형도의 시적 세계관의 근간으로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모종'이란 다른 짝에 주목하지 않어서라고 생각한다).

전정(剪定)은 <전집>에 포함돼 있는 그의 일기 중 한 대목에 등장하는데(1982. 6. 16), 그는 먼저 '가치치기'란 뜻의 전문용어인 '전정(trimming)'을 정의하는바, "관수 재배에 있어서 균일한 발육과 수형(樹形)의 정리를 목적으로 가지의 일부를 잘라내는 일"이 전정이다. 그것은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인간에게도 누구나 잎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서너 개 이상 있다. 그 개별적 가지들은 시간의 묶음이며 그 시차인 공간인 가지 안에는 석은 잎부러 부활해가는 잎, 돋는 잎 등이 달려 있다. 그 잎들은 나무의 물관, 체관의 관다발로부터 양분 및 수분을 공급받으며 또 외적인 요소, 즉 햇빛을 이용하여 녹색 동화작용을 일으켜 내적 에너지를 확충한다. 고로 잎은 나무(自我)와 햇빛(外界)의 유기적 매체이다.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칭을 2인칭화(사랑, 친구, 가족)한다. 그러나 과수뿐 아니라 인간의 사육 기간 중에서 우리의 관계들 속에는 엄연히 칼날 같은 전정이 가해진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타의에 의한 단절의 전정과 적극적(주관성) 전정으로 구분한다."(<전집>, 321-2쪽)

 

  

 

 

이틀 전에 군대에 입대한 자신의 친구 조병준(내가 알기론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의 저자. 더불어, 성석제, 원재길 등이 일기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기형도의 절친한 친우들이었다)과의 관계(=가지)에 대한 상념을 채워나가고 있는 일기인데, 마지막 문단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자네가 보여준 믿음이나 우려는 정말 값진 것이므로. 너와의 가지는 나의 전정이 환상 그 밖으로의 소멸임을 내가 인식함으로써 톱날의 부위에서 벗어나야 함을 안다. 이러한 또 하나 나의 성찰이 순간적 긍휼이나 동정의 잔해로써 기억되지 않아야 함을 기원한다."(324쪽) 20대 대학생의 관념성(미숙함)이 엿보이는 문장이긴 한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기형도의 인식론적 구도이며, 그것은 '가지/전정(가치치기)'란 틀을 갖고 있다. 

그의 시들에서도 두드러지지만 다른 날짜의 일기들에서 빈번하게 출몰하는 식물성 은유들은 이 '가지/전정'의 틀이 기형도 세계인식과 언어운용의 '보편문법'이 아닌가란 생각마저 갖게 한다(오래 전 나는 '기형도의 보편문법'이란 제목의 평문을 기획했었다). 가령, "또 하나 내 청춘의 필름이여, 유리컵 속으로 곧게 뿌리를 내린 둥근 파의 유약함이여-"라거나 "기차 소리여, 나는 아예 네 앞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캄캄한 정전의 필라멘트였지. 아니 하나의 전율로서 소스라치는 일년초 식물이었는지 몰라." 같은 대목들이 그렇다.

이러한 기형도식 식물(나무)의 자기규정과 생존방식이란 무엇인가? (1)나는 식물/가지이다. (2)나는 열매/성장을 위해서 가지치기(=아픔, 상실, 희생)를 해야 한다. (3)나는 (가지)모종을 통해서 삶을 다시 회복한다. 여기서 핵심은 물론 전정(가치치기)모종(옮겨심기)이다. 이런 구도를 전제로 할 때, 앞에서 인용한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란 시구는 그가 어린날에 깨달은 '삶의 방법론'을 집약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읽을 경우, 그의 시 '식목제'의 다음과 마지막 대목이 보다 명료하게 와닿지 않는가?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튀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여기서 인용한 대목의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라는 문장을 음미해보자.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매개자로 기형도가 설정하고 있는 것이 '동일인으로서의 인칭', 곧 그가 '사랑, 친구, 가족'이라고 토를 달고 있는 '2인칭'이다. 그리고 이때의 2인칭이야말로 기형도적 세계의 핵심이다. 그것은 개별적 자아의 테두리 바깥으로 가지치기되는 존재이면서 아직 3인칭적 보편 세계로는 편입되지 않은 상태의 무엇을 지칭한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이란 시에서 그 2인칭은 고드름이란 형상으로 응집돼 있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라고 2칭으로 호명되는 그 고드름(그런 의미에서 기형도의 시는 '2인칭의 시'이며, 이것은 1인칭적 고백이나 3인칭적 묘사와는 차별적인 시이다).

흔히 처마밑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은 문밖에서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서 있지만 결코 바깥세계로 '도주'하거나 하는 '즐거운 액체'의 형상이 아니다. 한 자리에 붙박혀/꽂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식물적이며, 공중에 매달린 '가지모종'을 연상시킨다. 기형도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어쩌면 강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정된 이후의 가지가 새로 모종되는 것처럼 어딘가에 꽂혀 뿌리를 내리고 싱싱한 줄기로 솟아올라 '불의 立像'이 되고자 하는 자기암시적 갈망이다. 하지만 그러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자기정립을 현실화하기엔 그는 너무 연약한 '작은 이파리'였다(줄기가 아니라). 마치 이런 아버지의 운명을 따르는 것처럼: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다시 1969년으로 돌아가보자. 반장이었던 유년의 시인에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나서겠다고 하나, 시인은 만류한다: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선생님은 말한다: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시인은 다시 말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후에 시인은 긴 방죽을 걸어오며 몇 번이고 책가방 속에 들어 있는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풀밭에 잠시 '꽂혀서' 잠을 잔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강조는 나의 것)

'작은 씨앗들'이 '큰 꽃'을 피워내는 게 생명의 미스터리이고, 삶의 미스터리이다. 유년의 시인 또한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라고 대견스레 물을 때 그러한 미스터리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과 의지를 동시에 피력한 것이리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미스터리는 그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였다. 그는 다만,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잠시 유예하던 '마지막 한 잎'이었기에...

05. 12. 23.

P.S. 이상이 내가 기형도의 시에 대해 갖고 있는 대략적인 구도(말하자면 '매트릭스')이다. 자세한 분석은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나, 핵심적인 얘기는 갈무리돼 있다. 끝으로 초등학교인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 그의 시를 옮겨놓는다. 어제 김춘수의 시를 다루며 '울다'란 동사 얘기를 했었는데, 나를 울리는 건 '밤새 울었다'류의 그런 상투형이 아니라 그냥 한 어린아이의 훌쩍거림이다(나는 딸아이를 몇 번 훌쩍거리게 한 기억이 있다. 그런 생각하면 나도 훌쩍거리고 싶어진다). 당신 또한 '유년의 윗목'에서 한번쯤 훌쩍거려보았다면, 시는 그냥 이와 다른 게 아니어도 무방할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 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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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저자로부터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창비, 2005)를 선물받고 가장 먼저 읽어본 건 3부에 실린 '구름과 장미의 나날'이란 글이다('술과 장미의 나날'이 아니다!). 김춘수(1922-2004)의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1948)의 표제작인 '구름과 장미' 읽기인데, 작년 11월에 타계한, 한국시의 이 대표적 시인 한 분을 기억하는 겸해서 그의 글을 읽었고 이 글을 쓴다. 시인의 죽음에 기대어 그의 처녀작을 읽는다?

 

 

 

 

그게 억지스러운 일은 아닌 게 시인의 대담을 포함하고 있는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2001)에는 (이전에 지적한 바 있지만) 김춘수의 데뷔시집 <구름과 장미>가 <죽음과 장미>로 오기돼 있다(233쪽). 이러한 예기치 않은 우연/은유에 기대어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시작되는 시 '구름과 장미'의 후렴은 '죽음과 장미 되어 오는 것'으로 다시 읽을 수도 있는 것.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를 떠올린다면, '죽음과 장미'는 한편 그럴 듯한 커플이 되기도 한다.

해서, 작년에 나온 시인의 유고시집 <달개비꽃>(현대문학)이 이어서 김춘수의 시와 에세이 선집들이 올해에도 연이어 출간되었으나 거기에 동참한 바 없는 나는 나대로의 애도의 뜻을 이 자리에서 표하고자 한다. 그건 모든 시는 결코 아니지만 김춘수의 어떤 시들이 나를 즐겁게 했던 기억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애도의 뜻을 담고 있는 페이퍼이지만 이 글은 '즐거운 책읽기'로 분류된다. 하긴 친구의 책을 읽는다는 건 살짝 흥분되면서도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1948년이면 김춘수의 나이 26살 때이고 청마 유치환의 서문을 달고 있는 이 처녀시집은 자비로 출판된 시집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대상은 '원로 시인' 김춘수가 아니라 '새파란' 김춘수, 반세기가 넘어갈 그의 시의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한 '풋풋한' 청년시인 김춘수이다. 나 자신도 더듬어보아야 할 그런 시절의 시인. 그때 그는 이런 걸 써놓았다.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구름과 장미>의 맨앞에 실려 있다는 이 시는 시 자체보다는 제목의 상징성 때문에 자주 회자되는 시이다. 그 출처는 바로 김춘수 자신이며 이장욱도 곧장 인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인용한 대목은 이장욱의 책에서 재인용하지 않고 <김춘수 문학앨범>(웅진출판, 1995), 187쪽에서 인용했다('이른바 박래어다'라는 한 문장이 더 들어간다). 이 책은 김춘수 시의 독자라면 필히 소장할 만한 책인데, '앨범'인 만큼 연대기와 작품론, 자선 대표작들은 물론이고 시인과 관련한 사진자료들을 다수 싣고 있다. 시인의 서문에 따르면, "사진을 중심으로 한 이런 따위 문학앨범은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좋은 기념물이 되겠고, 나의 독자들께는 하나의 참고물 또는 흥밋거리가 되어 주리라고 기대해" 볼 만한 책이다. 이른바 종합선물세트 유형이다.   

이 인용에 대해서 이장욱은 시인의 발언을 시인 자신에게 되돌리고자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 시가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를 환기시킨다는 식으로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고 밝히면서 그가 원하는 건 '텅 빈 오독'이며, "이 잘못읽기로 그의 시적 편력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미리 단서를 단다. 요컨대, "구름과 장미의 나날. 이것은 그의 기나긴 시적 편력을 요약하고 있는 표현일는지도 모른다"(287쪽)는 것. "이 기나긴 시적 편력은 구름과 장미의 '사이', 혹은 구름과 장미의 '너머'에서 한 시인의 필생이 거쳐온 고투에 다름아니다"(288쪽)라는 것. 그의 생각을 조금 따라가보고, 나는 나 대로의 '오독'을 제시해보겠다.

"보편적 세계의 저 헛것으로 떠도는 관념(구름)들과 구체적 세계에 피고 지는 이 부질없는 실존(장미)에 대해서라면, 하긴 세상의 어느 시인이 하염없지 않았을 것인가. 그가 한때 머물렀던 무의미, 혹은 비대상의 시학이란 이 하염없는 자유에 다름아니었을는지도, 혹시 모른다. 이 하염없음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가 말했듯 허무의 산물이어서 역설적이다. 그것은 구름(관념)과 장미(세계) 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의하지 못했던 자의 비애일 터이다."(287-8쪽)

데뷔작이라 할 만한 한편의 시 읽기를 통해서 이렇듯 한 시인의 시적 편력 전체를 읽어내는 건 '오독'이란 전제하에서도 과감하며 경탄스럽다. 비록 그 시적 편력이 거의 완료된 시점(2001년)에 씌어진 글이어서 예언적이라기보다는 사후적인 성격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건 사실, 이러한 과감한/경탄스런 결론이 아니라 '잘못읽기'의 과정이다(어차피 죽음으로 마무리될 거라는 점에서 모든 생애는 '비애'의 정조를 지우지 못한다. 해서, 내 생각에 '비애'는 시인 김춘수만의 것은 아니다). 이장욱은 2연부터 읽어나간다(1연은 전제이지만 3연에서 반복되기에 뒤에 읽어도 무방하겠다).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시 속으로 바람은 불고 구름은 흘러간다. 구름은 눈뜨면 물 위에 담기는 부드러운 가상(假象)이다. 그것은 형태를 지니지 않아 만져지지 않으며, 그것은 수면에 스스로를 비추며 흘러갈 뿐이어서 인간의 규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름은 드러냄과 사라짐의 경계를 스스로 지우며 저 하늘에 유구하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님은 구름이 되어 온다."

 

우선 1-2행에 대한 읽기인데, 공감할 만하지만,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 자신의 규정과는 다소 어긋나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구름/장미를 낯익음/낯섬, 감각/관념의 짝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장욱은 구름을 '일부러' 가상관념으로 읽어낸다. 그건 물론 예고된 바대로의 '잘못읽기'이다(한데, 그는 어째서 이 '잘못읽기'를 통한 결론을 시인의 시적 편력에 대한 요약으로 제시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3-4행 읽기.

 

"장미는 밤의 뜰에 피어 그의 울음을 받아준다. 그것은 제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어둠속의 그를 위무하며, 그것은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인 것이어서 허허로울 수 없다. 장미는 꽃 지는 계절에 지는 꽃잎들 속으로 흩어질 유한(有限)을 제 운명으로 지니지만, 그래도 님은 장미가 되어 온다."

 

앞에서 구름을 '부드러운 가상'으로 읽은 이장욱은 이번엔 '장미'를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읽는다. 한데, 내가 읽기에 이 시에서 장미는 '그 장미'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어서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라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책에 실린 다른 글 '단 하나의 장미'에서 그가 적어놓은 바를 참조하면, 보통명사로서의 장미에 대해서 우리는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장미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장미'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것은 삶과 세계를 끊임없이 '고유명사화'함으로써만 존속한다. 대상을 '고유명사화'하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의 자질이다."(97쪽)

 

 

 

 

 

 

 

 

 

그 '고유명사화'가 '이미지화'가 환치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내 생각에 김춘수는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이 장미'가 아니라 '장미'에 대해서 노래하며, 더 나아가 '꽃'에 대해서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유명사화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란 이어지는 단언에 기대어 말하자면, 김춘수는 사랑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시에서 '의미'까지 배제하려고 했던 시인이 사랑타령을 늘어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쨍한 사랑노래'야말로 反김춘수적이지 않을까? 유일한 예외라고 할 만한 것이 먼저 사별한 아내에게 바치는 시들을 모은 시집 <거울 속의 천사>(민음사, 2001)일 듯싶은데, 그런 경우에도 내 기억에 시인은 단 한번도 아내의 이름(고유명사)를 시에서 호명하지 않았다. 아내는 '거울 속의 천사'로 이미지화되면서 오히려 일반화/추상회되었을 뿐이다.

 

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장욱의 읽기가 그의 약속대로 '잘못읽기'라는 것.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장미로서의 님은 나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울고, 구름으로서의 님은 물 위에 가상으로 떠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구름과 장미의 대비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을 물위에 담고 밤뜨락의 장미와 마주앉아 우는 자의 자세이다. 그가 기다리는 님은 구름과 장미가 되어 올 것이지만, 이것은 예정이나 필연 혹은 당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슬프고 한량없으니, 그 슬픔과 한량없음을 서술하는 동사들은 온전한 능동형으로 스스로를 견뎌내고 있다. 그는 하염없는 나날을 지나며 물위에 구름을 '담고' 장미와 '마주앉아 운다.'"(286-7쪽, 강조는 나의 것)

 

나는 장미의 구체성과 구름의 가상성이라는 대비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중요한 건 그러한 대비가 아니며 '우는 자의 자세'라고 하니까 굳이 더 캐묻지는 않도록 한다. 대신에 구름과 장미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자. 1연에서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전제돼 있지만, 이때 구름과 장미를 연결시켜주는 등위접속사 '과'는 연의 구조에 있어서도 병렬성을 낳는다. 해서 2연의 내용을 산문적으로 풀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침에) 눈뜨면 나는 (눈)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했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다/울곤 했다.

 

'밤엔'이란 시간부사가 전제로 하는 것은 '아침에'이며 그것은 전제되는 것이기에 생략 가능하다. 그리고, 구름을 '물 위에' 담아본다라고 돼 있지만, 이때의 2행 문두의 '물'은 1행 문두에 나오는 '눈'과 호응하면서 쉽게 '눈물'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물 위에 담기는/비치는 구름이면서 나의 눈물에 맺히는 구름이기도 한 것. 그리고 그렇게 '눈물'을 떠올릴 때 우리는 4행의 '울었다'는 동사와 자연스럽게 조우할 수 있다. 3행에서 '뜰에 핀 장미' 대신에 왜 ('뜰장미'도 아닌) '뜰 장미'를 고집했을까? 나는 그것이 '눈면'의 '뜨'와 호응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시어의 경제를 위해서 공통되는 내용들이 생략되긴 했지만, 1-2행과 3-4행은 구문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반복이며 이 경우 구름과 장미는 말 그대로 등가적이다(즉, '구름이거나 장미'가 아니라 '구름과 장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은 뭐고 장미는 뭔가? 시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 많이 나온다. 그럼 장미는? 서양의 현대시에 많이 나온다(특히 릴케의 시). 이런 식의 설명이 암시하는 것은 소재로서의 '구름'과 '장미'가 막바로 우리시와 서양시를 제유하고 있다는 것. '구름과 장미' 자체가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인-화자의) 임으로서의 구름과 장미는 바로 '시' 혹은 시의 뮤즈이며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고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임을 가졌으나 시인으로서 나의 임은 시, 즉 구름과 장미이다, 라는 게 내가 읽는 이 시의 1연이다. 여기서, 이장욱이 의도적으로 배제한 바이긴 하지만,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가 다시 환기되는 건 불가피하다. 물론 이 경우 미당과 릴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시인의 제유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시의 2연은 낮이나 밤이나 임(=시) 생각을 했다는 것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는 자의 자세'를 이장욱은 강조했지만, 김춘수의 초기시들에서 '울다'란 동사는 마치 상투어처럼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령 '부재'라는 시에서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나 '길바닥'이란 시에서 "언덕에는 전봇대가 있고/ 전봇대 위에는/ 내 혼령의 까마귀가 한 마리/ 종일을 울고 있다" 같은 연, 그리고 잘 알려진 시 '꽃을 위한 서시'에서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같은 시구들을 대하자면, 이 '울음'은 서양시에서 "새들이 노래한다"를 "새들이 운다"라고 우리말로 옮길 때의 그 울음인 것이어서 '한량없긴' 하지만, '슬픈' 것은 아니다(그것이 슬픈 경우엔 "슬픈 소리로 울었다"라고 명시된다). 즉, 김춘수 시의 '울다'란 동사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건 어떤 태도이지 정조가 아니다. 이제 3연이다.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이장욱의 해설: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그는 중얼거린다. 저마다 사람은 님을 가졌으나,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 그는 저 온전한 님을 온전히 볼 수 없어서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망연할 것이지만, 결국 그 기다림의 자세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에서, 하늘'만'의 그 '만'이 비교급의 조사인지 유일함을 표시하는 조사인지를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그와 더불어 50여년 전의 저 구름과 장미에서 오늘의 구름과 장미에까지 흘러갈밖에."(287쪽)

 

1행의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에서 생략된 것은 목적어이다. 이장욱은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아무도 님을 보지 못했다)로 풀고 있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님을 그들 자신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라는 건 다소간 모순되는 진술이다. 내 생각에 이 '보다'란 동사의 목적어는 2연이고 2연의 '나'이다. 밤낮으로 님(=시)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고 울고 있는 '나'를 참으로 누가 보았을 것인가, 라는 것.

 

이어서 "(그리움이) 염없는 일수록/ 하늘만 하였[다]"는 건 이장욱의 지적대로 문법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모호한 표현이지만, 음성학적으론 '하-날'/'하늘'로 호응하기에 정당화된다. 즉, 그건 동어반복이다. '하늘만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은 단호하게 "구름과 장미 되어" 온다. 이건 사실의 확인이면서 시적 화자의 결의이다(시집 맨처음에 왔다면, 이 시는 '서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건 이미 충분히 암시되었지만 내가 이 시를 일종의 시에 대한 시, 즉 메타시로 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쯤에서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김춘수가 우리시사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가장 강하면서도 분명한 자의식을 평생 유지했던 시인이라는 점이다. 내 견문으로 그는 가장 많은 분량을 '시론'들을 써낸 시인이다(낱권으로 7권이고 전집 2권 분량이다. 페이지수로는 1,200쪽 가량). 25살 이후에도 시론을 갖지 않고 시를 쓰는 시인들을 그는 '아마추어'라고 부르며 신뢰하지 않았다. 해서 내가 보고 읽기에 그는 이성적인 통제에 매우 능한 대표적인 지성파 시인으로서 감상성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평생 견지했다.

 

비록 이 시에서 '장미'란 시어가 등장하지만, 그때의 장미는 구체적인 꽃이라기보다는 '장미'라는 기표이고 추상이다(김춘수는 생화(生花)를 싫어한 조화(造花) 예찬론자였다). '하염없다'란 표현도 나오지만, 나는 그것이 '울다'와 마찬가지로 시적 상투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하염없는 날들이 흘러가고 그의 님은 아직도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형체 있는 것과 형체 없는 것, 만져지는 것과 만져지지 않는 것, 구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그리고 결국에는 죄와 구원 사이."(290쪽)라는 이장욱의 지적에 유보적이다. 분명 '구름과 장미 사이'에 김춘수는 놓여 있지만, 그때 '구름과 장미'가 의미하는 바는 시의 전통이자 시의 테크닉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시인 자신의 해설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이 문장이다. 그 금은 구름(=감각=전통)과 장미(관념=서양) 사이의 금이며, 김춘수라는 시인의 주체를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가져오자면) '빗금쳐진 주체'로서, 그러니까 진정한 주체로서 정립시켜주는 금이다. 알려진 바대로, 그가 시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39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대입을 목적으로 학원에 다니던 시절 한 고서점에서 구해 읽을 일역판 릴케 시집을 발견하고서이다. 그리고, 이어서 만난 일본인 교수의 시론 강의에 매혹되어 그는 시인으로의 길에 들어선다(2002년에 나온 <쉰 한편의 悲歌>(현대문학)는 그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모델로 하여, '마침내' 그와 대결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그의 첫시집이 나온 것이 (그는 '의미에서 무의미까지'란 글에서는 1947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1948년이니까 대략 9년만의 일이다. 릴케의 시에 영감을 받아 시를 쓰게 됐지만(=의식) 한국어로 시를 써야 한다(=언어)는 자의식, 그것이 흔한 해석대로. '장미'와 '구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이러한 사정이 정서적으로 '비애'의 함축을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비록 그가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지만, 이때의 허무는 분명 비애와 구별된다). '구름과 장미의 나날'은 무의미시만큼이나 그리고 형이상학만큼이나 테크니컬하고 건조하다. 적어도 김춘수의 경우에는.

 

05. 12. 22.

 

P.S.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란 시에 대해서 나는 한번도 주목해 본 적이 없다(이 시에 대한 시인의 언급은 물론 유의미하지만). 따라서, 이장욱의 글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씌어지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의 초기시는 따로 있는데, 그건 'VOU'이다(아마도 내 친구와 나는 시에 대한 취향이 많이 다른 듯하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VOU라는 음향은 오전 열한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저녁 다섯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다.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한 때가 되기도 하고, 마음 우울한 사람에게는 紫色의 아네모네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춘수답지 않은 이런 시에는 다른 시들과 비교할 때 특별한 테크닉이 구사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때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내게는 좋아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시이다. 그러니 '구름과 장미'보다 나는 '자색의 아네모네'를 기꺼이 더 사랑해마지 않는 것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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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분석론'이란 부제를 가진 <세미오티케>(동문선, 2005)는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 )의 '처녀작'이다. 1969년에 책이 나왔으니까 1965년 그녀가 불가리아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지 4년만이며 그녀의 나이 28살 때의 일이다. 자신의 소설 제목대로 파리 지성계의 기라성 같은 '사무라이들' 틈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돋보이는데, 그걸 가능하게 했던 '필살기'가 바로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이었다(올해는 바흐친 탄생 110주년이자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토록 조용히 지나갈 수가!). 

<세미오티케>에는 바로 그녀가 바흐친을 서구 지식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유명한 논문 '말, 대화, 소설(Le mot, le dialogue, et le roman)'(1966-7)이 실려 있다.(이 텍스트의 우리말 번역은 2종이며 각각 <세미오티케>와 <바흐친과 문학이론>에 실려 있다. 전자는 불어 번역이고, 후자는 영역본의 중역이다. 나열된 이미지 중 세번째는 불어본이고, 네번째는 이 논문이 실려 있는 영어본 크리스테바 선집 <언어 속의 욕망(Desire in Language)>이며, 마지막은 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 크리스테바 선집이다. 이 다섯 가지 버전의 텍스트에 근거하여 이 글을 쓴다). 해서, 그것은 바흐친 입문 텍스트이지만 크리스테바 입문 텍스트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 씌어진 탓에 패기만만하며 제법 난삽하다는 예비지식을 갖고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하지만, 무엇을?

 

 

 

 

대부분의 우리말 크리스테바는 요령부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대개 불어본이나 영어본 등과 대조하지 않고서는 읽어나가기 힘들다). 그건 전문가의 번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데, 완독한 것은 아니지만 <반항의 의미와 무의미>, <여성과 성스러움> 정도가 독해가능한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세미오티케>에 실린 '말, 대화, 소설'도 마찬가지인데, 나로선 국내에서 이 텍스트를 완독한 이가 손에 꼽을 정도이지 않을까라고 짐작해본다. 사실, 내가 읽은 것도 얼마전 이 텍스트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기회'라기보단 내가 자발적으로 '강제'한 것이지만).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낀 거지만, 출간소식에 반가움보다는 의혹을 더 많이 갖게 했던 <세미오티케> 역시 출간되지 않은 것만 못한 오역서이다. 이런 책을 내 돈 주고 산 이상 뒤늦게나마 그에 대한 대가를 두고두고 지불하도록 하겠다(돈주고 또 지불한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각주1)(국역본의 각주2)의 내용을 읽어본다(영역본은 이 각주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 영어권 독자들을 고려해서일 것이다) . 텍스트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텍스트는 미하일 바흐친의 저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시적 문제>(모스크바, 1963)와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모스크바, 1965)을 출발점으로 씌어졌다."(<세미오티케>, 105쪽) 여기서는 바흐친의 저작명부터가 오역인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시적 문제>는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가 원제이며 우리말로는 같은 번역본이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정음사, 1989), <도스또예프스끼 창작론>(중앙대출판부, 2003)이란 제목으로 두 차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모두 품절된 상태(읽어야 할 책을 구할 수 없는 나라는 문명에 가까운가, 야만에 가까운가?). 해서, 이미지는 영역본을 띄워놓았다. 참고로 이 영역본 <도스토예프스키> 1984년판에 나왔다. 영어권에서 바흐친학을 선도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1968년에 나온 <라블레>이며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불역본 <도스토예프스키>는 크리스테바의 주도하에 1965년에 처음 소개됐다. 

그나마 우리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 정도이다(불역본의 제목이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이고, 영역본의 제목은 <라블레와 그의 세계>이다). 여하튼, <도스토예프스키>와 <라블레>가 바흐친의 주저이며 각각 20년대말과 30년대에 씌어졌지만, 1960년대 중반에서야 모스크바의 세계문학연구소(고리키연구소) 젊은 연구자들에게 '재발견'되어 (다시) 출간되기에 이른다. 그 젊은 연구자들이란 S. 보차로프와 V. 코쥐노프 등을 말하는데, 바흐친 사후에 두 사람이 갖고 있던 바흐친 저작권은 코쥐노프의 사망으로 현재는 보차로프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세르게이 보차로프가 러시아 바흐친학의 좌장이며 전집의 책임 편집자이다(바흐친 전집은 아직도 두어 권이 더 출간되어야 한다). 이 전집의 한국어판이 출간기획중인 것으로 알며, 초기 문학론 모음집인 <말의 미학>(길)은 근간 예정으로 돼 있다.

어쨌든 이어지는 문장: "그의 작업은 1930년대 소련의 언어와 문학 이론가들의 저작에 명백한 영향을 미쳤다(볼로쉬노프, 메드베제프). 그들은 담론의 여러 장르를 논한 새로운 책을 내놓았다(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론>, 후자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여기까지가 각주의 내용인데, 첫번째 문장은 맞는 번역이지만 크리스테바의 원문 자체가 약간 부정확하다. 아마도 글이 씌어진 1960년대 중반에 바흐친과 그의 저작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볼로쉬노프의 이름으로 나온 책 두 권 <프로이트주의>(1927)과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 그리고 메드베제프의 책 <문예학의 형식적 방법>(1928)은 모두 1920년대의 저작이기 때문이다(이 시기에 출간된 바흐친의 저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 초판뿐이다). 하니 1930년대 언어학/문학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언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언급한 책들은 모두 국역본이 나와 있다).

사실 이 저작들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은 바흐친학의 한 파트를 차지할 정도로 분분하지만 최근엔 바흐친의 저작으로 간주하거나 바흐친/볼로쉬노프, 바흐친/메드베제프 하는 식으로 병기해주는 게 보다 일반적이다. 바흐친은 보차로프와의 대담에서 이 책들의 저작권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회피했다(그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단 바흐친의 저작으로 간주할 경우에 고려해야 할 사항은 바흐친이 볼로쉬노프나 메드베제프의 이념적 입장(마르크스주의)를 감안하여 책을 썼다는 것. 해서 러시아에서는 '가면을 쓴 바흐친'이란 표제로 책이 나와 있으며 바흐친 전집과는 별권이다.   

그런데, 내가 굵은 글씨로 처리한 "그들은 담론의 여러 장르를 논한 새로운 책을 내놓았다"는 괄호안의 부연설명과 함께 전혀 뜬금없다. 불어본의 문장은 "Il travaille actuellement a un nouveau livre traitant des genres du discours."(강세부호 생략)이 전부이다. '그'(=바흐친)는 현재 담화(담론) 장르에 관한 새로운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으며, 언제 '내놓았다'는 말인가? 번역에도 '조작'이 있다면 이런 경우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여기서부터 역자는 이미 이 번역의 수준에 대해서 충분한 암시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본문의 첫 문장을 읽어보자: "'여러 인문과학'의 연구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효성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과학적 논리가 아닌 다른 논리를 밝혀줄 연구 구조의 층위 자체에서, 그러니까 인문과학 분야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효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105쪽) 한마디로 '놀라운', 놀랍도록 뻔뻔한 문장이다. 요컨대, 인문과학의 연구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효성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인문과학 분야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효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경우엔 차라리 영역본에 중역한 번역문이 상대적으로 정확한데, 옮겨보면 이렇다: "'인문'과학에서 과학적 접근의 실효성이 항상 도전을 받아왔다면, 그러한 도전이 연구 대상의 구조들, 즉 과학적인 것과는 다른 논리에 상응한다고 생각되는 구조들의 차원에서 최초로 제기되었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바흐친과 문학이론>, 234쪽) 여기서 '도전하다'란 동사는 영역본의 'challenge'를 옮긴 것인데, 불어본에서는 영어 'contest'에 해당하는 'contester'란 동사이다. 즉, '이의를 제기하다', '반대하다'란 뜻의 동사가 쓰이고 있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인정하다'란 정반대의 뜻으로 옮겨질 수 있는지?(이 정도는 이제 '놀라운' 오역이 아니라 '익숙한' 오역인 것인가?)  

크리스테바가 여기서 과학과는 '다른 논리'로 지시하는 것은 시적 언어(=시어)의 논리이고 '역동적 그람(gramme dynamique)'의 논리이다. '그람'은 '글자들'을 생각하면 된다(기호로 다 환원되지 않고 남아있는 어떤 물질성이 그람이고 글자들이다). 이건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어서 넘어가기로 한다. 얼마 안 넘어가서 나오는 문장을 보라. 두 가지 국역본을 영역본과 함께 제시한다(사실 이 대목은 영역본만으로는 모호했고 러시아어본을 참조하면서야 비로소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1)"구조분석이 그 대안으로 삼고 있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쇠퇴할 때도 그 연구에 있어 문학이나 과학을 벗어난 문제 때문에 양자택일의 위기에 몰린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는 계속되었고, 최근 미하일 바흐친의 분석을 통해 그 연구가 결실을 보았다."(<세미오티케>, 106쪽)

(2)"현대 구조주의적 분석이 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형식주의도 문학과 과학을 넘어서서 추론이 노력을 멈추었을 때 그 자신 동일한 선택에 당면했다. 그래도 연구는 계속되었고, 최근에 그것은 미하일 바흐친의 업적에서 드러나고 있다."(<바흐친과 문학이론>, 235쪽)

(3)"Russian Formalism, in which contemporary structural analysis claims to have its source, was itself faced with identical alternatives when reasons beyond literature and science halted its endevors. Research was nonetheless carried on, recently coming to light in the work of Mikhail Bakhtin."(64쪽)

바로 앞 대목에서 크리스테바는 문학기호학의 두 가지 선택지(침묵하거나 다른 논리, 즉 시적 언어의 논리 모델을 세우거나)를 제시했었는데, 러시아 형식주의도 외압에 의해 이론적 작업이 중단될 때 그러한 동일한 선택지에 직면했었다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다. (1)에서 (현대의) 구조분석이 '그 대안으로 삼고 있는'이란 표현은 불어본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용이며 (2)처럼 '그 연원을 두고 있는' 정도의 뜻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1)'문학이나 과학을 벗어난 문제 때문에' (2)'문학과 과학을 넘어서서(beyond literature and science)'는 불어본의 'extra-literaires et extra-scientifiques'의 번역인데, '문학 외적, 학문(과학) 외적'이란 뜻이다. 1920년대 중후반 러시아 형식주의가 '문학 외적, 학문 외적인 이유들'로 탄압받음으로써 중단된 사태를 가리키는 것. 그러니 (2)에서도 'reasons'를 '추론'으로 옮긴 것은 잘못이며, 'its'가 받는 것은 '추론'이 아니라 '러시아 형식주의'이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러시아 형식주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예비지식이 필요한 대목이며, 두 가지 국역본은 모두 정확한 이해에 미달하고 있다...

하여간에 이런 식으로 또 '부지하세월'의 읽기를 시도해야 한다. '말, 대화, 소설'의 끝장을 보려면 말이다(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거짓말'에 더 익숙해질 것이다). 대략적으로 보자면, <바흐친과 문학이론>의 중역이 <세미오티케>의 원어역보다는 낫지만 그 또한 꼼꼼한 읽기를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며 줄거리 정도만을 알아챌 수 있게 해주는 정도이다(238쪽 각주8)에서 '러시아 방언의 역사를 위하여'가 '러시아적 변증법의 역사를 위하여'란 식으로 거창하게 오역된 것도 희극적이다). 그러니 과연 누가 크리스테바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05. 12. 21.

 

P.S. 겸사겸사 우리말 바흐친 입문서 두어 권을 적어둔다. 먼저, K. 클라크와 M. 홀퀴스트가 쓴 전기 <바흐친>(문학세계사, 1993). 두 공저자는 부부 학자인 걸로 안다. 알라딘에는 클라크가 미술학자 '케네스 클라크'로 기재돼 있는데 엉뚱한 오류이다. '카테리나 클라크(Katerina Clark)'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 연구자로 유명한데 홀퀴스트와 함께 바흐친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원저는 1984년에 하바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왔으며 1980년대 영어권 학계의 바흐친 열풍을 대변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유감스러운 건 국역본이 완역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량 때문인지는 몰라도 몇 개의 장이 누락돼 있다. 책도 이미 품절된 상태인데, 제대로 된 완역본이 다시 나왔으면 싶다(바흐친은 이미 지나간 '유행'인가?).  

두번째 책은 츠베탕 토도로프의 <바흐찐: 문학사회학과 대화이론>(까치, 1987)이다. 불문학자 최현무 교수(소설가 최윤)의 번역이다. 불어본 원저 <미하일 바흐친: 대화주의 원칙>은 1981년에 나왔고 영역본은 <도스토예프스키 시학>, <미하칠 바흐친> 등과 함께 1984년에 나왔다(이미지는 영역본의 것이다. 한편으로 1984년은 영어권 바흐친 수용에 있어서 기념해 둘 만한 해이겠다). 국역본은 번역어 선택 등에서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만 읽을 만하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분량이 아주 얆다는 것. 어느 해 여름인가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카테리나 클라크의 연구서와 함께 토도로프의 영역본을 동네 독서실에서 읽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아마도 국역본 바흐친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혔을 법한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창비, 1988). 영어권의 바흐친 열풍 덕분에 출간되었던 책인데, 1981년에 출간된 M. 홀퀴스트 편역의 바흐친 선집 <대화적 상상력(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를 저본으로 하고 있다(국역본은 4편의 에세이 중에서 3편을 옮겨놓고 있다). 러시아어 원저는 1975년에 출간된 (보다 방대한) <문학과 미학의 문제들>이다. 이 책의 불역본은 <소설의 미학과 이론>이란 제목으로 1994년에 나왔다. <장편소설과 민중언어>는 중역본이지만(중역본이기 때문에?) 가독성이 좋았던 책이었는데, 요즘도 구할 수 있는 것인지? 여하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런 정도가 바흐친에 입문하기 위해서라면  읽어두어야 할 책들이다. 러시아의 바흐친학에 대해 소개하는 책은 현재 기획중인 걸로 아는데, 아마도 1-2년쯤 후에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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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12-2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기대에 미달할 듯하군요. 이 일에만 매달릴 형편이 아니라서...

로쟈 2005-12-22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흐친 관련서들이 두어 권 더 나오면 바흐친 냄비가 다시 끓을까요?..

poiein 2010-10-06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테바에 대해서 알려고(이제사?) 왔는데 오히려 바흐친에 대해서 정보를 더 얻은 셈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