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jacket

여기서 다루어질 내용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의 '서문'이다. 먼저, 원서의 표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그래서 이미지를 키웠다). 저자는 이 표지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화가 데이비드 리드(David Reed; 1946- ).

 

"내가 이 책의 권두화로 선택한 이미지는 유명하고도 친숙한 영화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에서 오려낸 한 장면을 약간 수정해서 찍은 스틸 사진이다. 수정은 화가 데이비드 리드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자신의 그림중 하나 - 1990년작 <#328> - 를 호텔 침실 장면 속에 집어넣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히치콕이 영화의 신빙성을 보태기 위해 침대 위에 걸어놓았을지도 모르는 특징없는 호텔 그림이 있었다.(...) 스틸 사진 자체는 1995년작이다."(19쪽) 아래의 작품이다(그 아래는 변주 작품). 

 

"리드는 오려낸 이 장면을 TV수상기에서 반복해서 방영되는 일종의 순환 테이프로 변형시켰는데, 당연히 이 TV수상기는 킴 노박이 분한 <현기증>의 여주인공 주디가 빌려 쓰고 있던 샌프란시스코의 호텔 침실에 있는 가구들처럼 별다른 특징이 없다.(...) 리드가 영화의 장면을 수정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TV수상기는 이 예술가에 의해 침대 바로 옆에 놓여졌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영화 속의 침대를 복원하고 있으며 리드 자신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졌다는 점만 빼면, 그 영화에 등장하는 침대와 마찬가지로 전혀 특징이 없다."

 

단토는 리드의 이러한 작업이 갖는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리드가 갖고 있는 몇 가지 강박관념을 지적한 이후에 이것을 자신의 이론적 맥락 속에 집어넣는다: "나의 목표는 리드가 - 침대, 욕실 가운, 심지어는 침실 설치작품의 일부로 삽입된 그림 <#328> 등은 말할 것도 없고 - 순환테이프라고 하는 영화장치, 그림 더빙 메커니즘, 그리고 모니터 등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컨템퍼러리 미술 실천의 견지에서 무엇을 예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화가들이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전혀 다른 매체 - 조각, 비디오, 영화, 설치 등등 - 에 속하는 장치들을 갖고서 자신의 그림을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 컨템퍼러리 미술의 실천방식이다. 리드와 같은 화가들이 대단한 열정을 갖고서 이런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의 화가들이 매체의 순수성을 자신의 규정적 의제로 고집하였던 모더니즘의 미적 전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를 증명하고 있다."(22쪽, 강조는 나의 것)

 

해서, 단토가 보는바, "시각예술에서의 동시대를 잘 보여주는 표본"이 데이비드 리드이다.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비평가 그린버그와는 다르게, 단토는 이러한 탈모더니즘적 미술, 탈역사적 컨템퍼러리 미술에 대한 성찰과 옹호를 통해서 예술철학자이자 비평가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한다. 이성복의 시구를 빌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를 (역사)철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종말 이후>에 설정된 과제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술의 종말 이후>는 1995년 미국의 워싱턴 소재 국립미술관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앤드류 멜론 강좌 강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거기서 단토는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경계'라는 제하의 강연을 했는데, 이것이 이 책의 부제이다(번역서에서 이 동일한 부제는 '동시대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역자들이 '반복'을 싫어하는 듯하다). 

 

예술이론에 관한 멜론 강좌는 1951년부터 시작됐다고 하는데(이샤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도 이 강연에 바탕을 둔 책이다. '낭만주의적 사유의 원천들'이란 주제의 벌린의 강연은 1965년에 있었고, 각각 1954년과 1956년에 강연한 허버트 리드 경과 곰브리치도 또한 단토의 선배 연사였다), 단토의 강연은 44회인 셈이고 그의 지적대로 리드의 (영화수정) 작업은 1958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작업이다. 그것은 '역사적 불가능성'이다. 그러한 불가능성이 암시하는 것은 예술사/미술사에서 회귀불가능한 어떤 내러티브의 구성 가능성이다. 그리고, 예술의 종말이란 그러한 내러티브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자세한 건 본문에서 밝혀질 것이다).

 

 

 

 

 

 

 

 

 

이 책의 목표를 다시금 정리하면 이렇다: "이 책은 미술사의 철학, 내러티브의 구조, 예술의 종말, 그리고 예술비평의 원리는 논하는 데 바쳐진 책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해서 데이비드 리드의 예술과 같은 것이 역사적으로 가능해졌으며, 그러한 예술을 얻허게 비평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을 묻고자 한다. 또한 나의 책은 이런 견지에서 모더니즘의 종말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고, 예술에 관한 전통적인 미학적 태도에(게) 불경스러운 짓을 가하는 형태로 나타난 모더니즘의 신경과민을 진정시키고자 할 것이며, 탈역사적 현실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약간이라도 밝혀내고자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역사의 문제로서 어디를 향해 나아갔는지를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25쪽, 강조는 나의 것)

 

 

요컨대, <택시드라이버>1976)의 단토-드니로 버전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신이시여, 어디로 더 가시나이까? 다 왔거든요!"(옆에 있던 술취한 아저씨: "이봐요, 아가씨, 어데까지 가요? 거, 몸매가 예술이네!")

 

06. 0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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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과 대중심리>에 관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은 독어본을 제외한 4종의 번역본이다. 이번에 나온 황선길 역의 <파시즘과 대중심리>(그린비, 2006)와 함께 오세철/문형구 역의 <파시즘과 대중심리>(현상과인식, 1980/1987), 그리고 영역본 'The Mass Psychology of Fascism'(1970 )과 러시아어본 'Психология масс и фашизм'(2004)이다(러시아어본은 여러 권이 나와 있으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악트출판사의 2004년판이다).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을 구입할 당시에 내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은 현상과인식사판의 국역본이었지만, 작년에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은근히 고대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라이히 정본으로서 흠잡을 데 없어 보인다. 이젠 독자들이 좀 읽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 

 

한데, 새 번역본을 읽어나가다가 좀 의아스런 대목들과 마주치게 됐다. 본문 첫장인 '제1장 물질적 힘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첫 페이지부터이다: "독일에서 민족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여러 해 동안 자신들의 혁명적 굳건함과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를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들조차도 사회적 사건에 대한 맑스주의적 기본개념의 정당성에 대하여 자주 의혹을 표명했다."(33쪽)

 

굵은 글씨로 표시한 건 처음 읽으면서 낯설게 느낀 대목들인데, 일단 예전에 '국가사회주의'라고 주로 번역해온 단어 'Nationalsozialistische'(영어로는 'National Socialism')이 최근에는 '민족사회주의'로 번역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학계에 따르면, 나치즘의 이론이 국가보다 민족을 더 우위에 두고 있는바, '국가'는 '민족'을 위해 존재하는 식이라는 사고 방식을 고려한 수정된 번역이라 한다(물론 독어나 영어 등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nation'이라 통칭하므로 이런 번역문제가 제기되는 건 한국, 일본 등 아시아권에 국한될 듯하지만). 어쨌거나 새 번역어가 단번에 입에 익지는 않을 테지만 새로운 '관행'에 따라야 할 터이다.

 

이어서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 그린비판의 번역은 <파시즘과 대중심리> 독어본이 아니라 라이히재단에서 제시한 라이히 '수고본'을 옮긴 것이기에 다른 번역본들과 차이가 나는 대목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까지 그러한 차이와 관련되는 것인지는 좀 의심스럽다. 현상과인식사판의 이 대목 번역은 이렇다: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혁명적 굳건함을 가지고 혁명에 투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인정된 사람들까지도 사회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개념의 정확성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였다."(37쪽)

 

그리고 영역본: "In the months following National Socialism's seizure of power in Germany, even those individuals whose revolutionary firmness and readiness to be of service had been proven again and agian, expressed doubts about the correctness of Marx's basic conception of social process."(3쪽)

 

오세철본은 영역본을 옮긴 것이고 러시아어본의 번역도 영역본과 일치한다. 나로선 황선길본 번역이 부정확한 게 아닌가 싶다('자유'라는 단어가 어떻게 끼어든 것인지 모르겠다. 거기에 '출격'?). "자신들의 혁명적 굳건함과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를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들"이란 짐작에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행동의지(준비)를 갖춘 사람들" 정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우리말로 어색하며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회적 사건에 대한 맑스주의적 기본개념". 이에 대한 영역이 "Marx's basic conception of social process"인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사회적 사건'보다는 '사회과정'이라는 역어가 더 적절해보인다(러시아어본도 '사회과정'이라고 옮기고 있다). 해서, '정당성'과 '정확성'은 문맥상 호환의 여지가 있다고 쳐도 이 대목의 새 번역의 '정확성'에 나로선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첫 페이지이기 때문에 더더욱.

 

조금만 더 읽어보자. 황선길본 35쪽에서 라이히가 맑스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오토 슈트라서(1897-1974)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그레고르와 오토 슈트라서 형제는 나치당 형성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로서 바이에른의 중산층 출신이고 1920년 신생 나치당에 입당, 1923년 히틀러의 '비어 홀 폭동'에 참가했다. 히틀러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레고르는 불법화된 나치당을 이끌었고, 설득력 있는 대중 연설가이며 타고난 조직가였던 그는 동생 오토와 함께 요제프 괴벨스의 도움을 받아 대중운동을 조직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인종주의적인 색채가 가미된 사회주의를 역설함으로써 중하층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해서, 1928년 이후 나치당이 얻은 대중적 지지는 부분적으로 이들 형제의 노력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한다(하지만, 이후에 이들은 히틀러의 노선에 환멸을 느껴서 탈당하게 되며, 그레고르는 1934년 에른스트 룀의 숙청기간에 살해되었고, 오토는 간신히 탈출하여 캐나다에 정착했다가 1955년 독일로 돌아와 정계복귀를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한다). 

 

그는 무어라고 연설했는가: "당신들 맑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맑스의 이론을 즐겨 인용한다. 맑스는 이론을 실천에 의해서만 검증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당신들은 항상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실패에 머무르고 있다.(...) 1880년 이후 실천을 통한 사회혁명의 가르침에 대한 검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오세철본의 번역: “마르크스주의자 당신들은 당신들의 방어를 위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이론은 실천에 의해서만 입증된다고 마르크스는 가르쳤으나 당신들의 마르크스주의는 실패로 판명되었다. 당신들은 항상 노동자 인터내셔날의 실패에 대한 설명에 머무르고 있다.(...) 80년이 지났는데도 사회혁명 이론구체적인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39쪽)

 

그리고 영역본: "You Marxists like to quote Marx's theories in your defense. Marx taught that theory is verified by practice only, but your Marxism has proved to be a failure. You always come around with explanation for the defeat of the Workers' International.(...) Eighty years have passed, and where is the concrete confirmation of the theory of social revolution?"(5쪽)

 

 

 

 

 

 

  

 

 

 

굵은 글씨는 일단 차이가 나는 대목들인데,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일단 황선길본에서는 '당신들의 맑스주의는 실패로 판명되었다'란 대목이 누락됐다. 그리고, "80년이 지났는데도"가 "1880년 이후"로 옮겨졌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처음에는 오세철본이 오역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1880년'이 아니라 '80년'이라고 돼 있었다. 연설시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점을 <공산당선언>(1848)으로 삼은 게 아닐까 싶다. 이후 80년이면, 대략 1928년 이후가 되며 슈트라서 형제가 활동하던 시기이다. 그렇다면, '1880년 이후'란 번역은 픽션에 속한다. 나머지 '사회혁명의 가르침' 대 '사회혁명의 이론'이나 '검증' 대 '구체적 확신' 등의 차이가 선택적인 걸로 용인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고작 몇 페이지를 읽은 소감이긴 하지만(역자는 열번 이상 읽지 않았을까?), 모처럼 출간된 <파시즘과 대중심리>의 새 번역본이 기대에 값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필요한 대목들이 2판에서라도 수정/교정되어 라이히 정본으로서 널리 읽히고 인용되기를 기대해본다.   

 

06. 01. 18.

 

 

 

 

 

 

 

 

 

P.S. 몇 페이지밖에 안 읽었어도 건질 건 건져야겠다. 당대 맑스주의의 문제점(결점이면서 태만)을 꼬집으면서 라이히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런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맑스주의적 정치는 그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 대중들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36쪽) 그렇다면, 거꾸로 라이히가 이 책에서 고려하고자 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대중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의 사회적 영향'이다. 여기서 '신비주의'란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바, 그 '영향'이란 건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이다. 이제나 저제나 좌파 관념론자들이 간과하거나 사고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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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6-01-1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서재에 가져가서 볼게요.

Joule 2006-01-18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참, 홀링데일의 니체요. 루 잘로메 말고 나머지 번역상태는 괜찮은가요.

로쟈 2006-01-1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링데일의 책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바로 반납했기 때문에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책은 아니므로 별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lefebvre 2006-01-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을 로쟈님 글 앞쪽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이유는......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로쟈 2006-01-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문점들을 해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라이히의 독일어 수고를 직접 옮긴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번역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독일에도 없는 책이죠!) 한데, 이미 나와 있는 독어본, 영어본들이 수고본과 결정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차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심사항이 될 만한 것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의미있는 차이'일 경우, 아마 역자도 기존의 독어본을 같이 참조했을 터이므로 국역본에서 언급해주었더라면 보다 완벽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민족사회주의'는 제가 의문을 제기한 게 아니고 (2)'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는 라이히의 '시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3)그렇다면, '사회적 사건'에 대해서만 옮긴이와 '해석'을 달리하는 듯합니다. '독일 파시즘(즉, 나치즘)의 등장과 성공'에만 국한된다고 보진 않지만, 그 경우에도 '특정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일련의 '흐름'이나 '진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4)'정확성'과 '정당성'도 선택(해석)의 문제로 보이며, 저는 어느 한쪽이 오역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본문에서도 오역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사소한 '옥에 티'도 커보이는 걸로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瑚璉 2006-01-1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옮기신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느니 참 좋군요.

그런데 로쟈 님께 하나만 질문드리자면, 저로서는 정확성과 정당성을 상호교환이 가능한 개념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념들이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냥 딜레탕트의 질문으로 간주해 주십시오)

로쟈 2006-01-1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에 '맞다' 같은 경우 '옳다'의 함의도 갖기 때문에 '정확성'과 '정당성'을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영어의 'correct'에도 두 가지 뜻이 다 있구요. 우리말이 '너무 예민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1924- )의 책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는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예술/미학 관련서로서 단연 손에 꼽을 만한 책이다(모스크바에서 이 책을 검색하고 잠시 놀라고 반가웠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구입을 망설이다가 얼마전 미술 전공자 몇 분과 독회를 꾸리게 되면서 이 책을 드디어 손에 들게 되었다. 마침 그해 여름에 나온 미국의 모더니즘 최고의 미술비평가로 꼽히는 클레멘트 그린버그(1909-1994)의 에세이집 <예술과 문화>(경성대출판부, 2004)도 번역/소개된 만큼 미학과 예술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들로선 한번쯤 시간을 내봄직하다.

참고로 평론가 그린버그의 짝패는 액션페인팅의 주창자 잭슨 폴록이며, 이 두 사람의 주거니받거니 덕에(거기에 CIA가 뒤를 봐줬다고도 하고) 2차 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건너가게 된다. 단토는 '그린버그 이후'의 대표적인 비평가이고자 한다(이미지들은 차례대로, 아서 단토와 'After the end of art' 원저, 그리고 그린버그와 'Art and Culture' 원저). 그의 이론적 영감의 원천은 앤디 워홀. 폴록과 워홀에 대해서는 각각 영화 <폴락>(2000)과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1999)를 참조할 수 있겠다. 나는 몇년 전에 <폴락>은 본 적이 있는데, 볼 때는 몰랐지만 거기 나오는 비평가가 혹 그린버그가 아닌가 싶다. 단토의 책 제4장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역사적 비전'에 할애돼 있다.

현재 컬럼비아대학 철학과의 명예교수로 소개돼 있는 단토는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과학철학과 분석철학에서 시작해 역사철학, 예술철학 등 다방면에 걸친 수십 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1984년부터 <네이션>지의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니까 20년 이상 현역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며, 비평서들도 꾸준히 묶어내고 있다. 최신간은 작년에 출간된 'Unnatural wonders'). 그 중 <사르트르의 철학>(민음사, 1985)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실상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후에 <철학자로서의 니체>(1965, 작년 200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가 그의 또다른 주저라는 걸 알게 됐고, 도서관에서 그의 역사철학서도 발견하면서 '스케일'에 놀랐다('Narrartion and Knowledge'가 그 책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 예술철학자나 미술비평가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고, 단토 자신도 그걸 더 원하는 듯하다. 그럴 경우 그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기억될 테제가 바로 '예술의 종말'론이다. <예술의 종말 이후> 한국어판에 붙인 서문의 끝자락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한 결정이 이 책의 테제가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러한 그의 기대가 백일몽만은 아닌 것이 독어권 학자인 미카엘 하우스캘러(혹은 '미하일 하우스켈러')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철학과현실사, 2004, 이 책의 다른 번역본이 <예술앞에 선 철학자>(이론과실천, 2003)이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미학이론가'들이 바로 플라톤부터 단토까지이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셈.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1974년생이라는 저자 하우스캘러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내 룬트샤우 신문에 기고했던 16명의 사상가들의 미학 사상을 요약한 글 모음"이라는데, 단토와 함께 거명되고 있는 20세기 후반의 미학이론가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1998)와 넬슨 굿맨(1906-1998) 정도이다(단토는 리오타르와 동갑내기이군). 그 정도면 단토의 지명도를 어림짐작해볼 수 있겠다. 한편, 단토와 교분을 나누었던 박이문 교수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1984) 등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비록 그 책에서 박이문의 경쟁상대는 단토가 아니라 '제도로서의 예술'을 주장했던 조지 디키(딕키)였지만. 알라딘에는 저자가 '조지디키'로 돼 있다. 현재로서 단토의 지명도는 디키를 넘어선 듯하다). 한편, 하우스캘러의 책은 너무 소략해서('책'이라기보다는 '팜플릿'이다) 말 그대로 '30분에 읽는 예술이론'이다.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라고는 하지만, 이때의 '예술'은 '미술'을 가리킨다(영어에서 'art'란 단어는 예술과 미술을 구분없이 지칭하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에서 간혹 애를 먹인다). 곰브리치(1909-2001)의 고전 'The Story of Art'가 <서양미술사>(예경, 1999)로 번역되는 것처럼(곰브리치는 그린버그와 동갑내기로군). 이 예술 혹은 미술의 종말은 사실 여러 차례 주장되었었다. 세잔 이후에 미술은 끝났다는 둥,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에 미술은 이미 종쳤다는 둥.

 

단토의 경우 이 '미술의 종말'은 1965년부터이다. 일단 역자해설을 참고하면,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인데(아래 이미지. 말 그대로 상품박스이다. 단 '미술관에 전시된'. 이게 '마트'에 있을 경우엔 별 문제가 없지만 '미술관'에 놓여 있을 때는 머리 아파지기 시작한다!), 그게 미술의 끝이자 역사의 끝이며, 이후는 '미술의 역사 이후의 시기(the Post-Hostorical Period of Art)'이다. 단토의 <브릴로 상자를 넘어서(Beyond the Brillo Box)>(1992)는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미술사는 이른바 이 '브릴로 상자'를 경계로 하여 '역사시대'에 '탈역사시대'로 구분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왜 그토록 충격적인 것인가, 혹은 충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미술작품과 미술작품이 아닌 것의 차이를 더이상 식별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개나 소나, 혹은 비누박스나 라면박스나 다 '예술'로 둔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적어도 외관상으로 똑같은 브릴로 비누상자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그렇다면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미술에 대한 정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술의 문제를 감각(손)의 문제가 아닌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단토]에게 워홀의 작품은 헤겔 이후 미학의 황무지에서 발견한 한 가닥 희망이었다. 그는 미술의 의미를 미술로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워홀의 작품에서 깨달은 바는 '어떤 것들이라도 작품이 될 수' 있으며, '미술이 무엇이냐는 점을' 발견하려면 '감각의 경험으로부터 사고로 방향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이 외관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 철학의 문제임을 알았다."(역자해설, 431쪽, 강조는 나의 것)

사정을 단토의 표현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작품의 외양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과 논리적으로 서로 맞아떨어지는 예술정의를 짜만들어야 했다. 어떤 것을 집어들고서 이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이제 논지를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역사는 종말에 도달하였다."(13쪽)

 

 

 

 

다시 말해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규정해줄 수 있는 어떤 고유한 '예술성'의 목록을 우리가 제시할 수 없을 때 더이상 (예전에 정의되던 바의) '예술'은 없다. 예술은 끝났다. 예술은 종쳤다. 그럼, 뭐가 남는가? 폐허만이 남는가? 그건 아니다. 여기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외침을 다시 반복하면 된다: '만세!'(딸아이의 표현으론 '앗싸!') 해서, 예술 이후의 시대는 "심원한 다원주의와 완전한 관용의 시대"(24쪽)이다. 더불어, 예술에 대한 모든 규정과 종속으로부터 해방된 시대이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17쪽)

이것이 헤겔리안으로 분류되는 단토의 '철학적 미술사'이다(비록 헤겔과의 차이도 그 자신은 분명히 하지만). 그리고, 그의 자평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의 종말이라고 하는 테제는 철학적 미술사라 불릴 만한 것에 대한 하나의 기여이며, 혼돈스럽게 보이는 모던 미술에서 어떤 이해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10쪽)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06. 01. 18.   

P.S. 앤디 워홀의 작업이 불러일으킨 충격으로부터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 테제는 제창되었지만 <예술의 종말 이후>의 서문에서 그가 상기시키고 있는 작업은 책의 권두화로도 쓰인 화가 데이비드 리드의 것이다. 당초 이 리드의 작업과 관련한 페이퍼를 의도했지만, 분량상 그 내용은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한다.

P.S. 2. 얼핏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연상시키지만, 마이크 비들로(Mike Bidlo)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아님 Not Andy Warhol (Brillo Box, 1969), 1991>이다. 일종의 '따라하기'이고, '한술 더뜨기'이고 패러디이다. 물론 비들로의 작업은 워홀의 작업을 전제로 한 것이며, 순서상 선행할 수 없다. 이것이 단토가 말하는 '역사적 불가능성'이고, 말하자면, 불가능성의 내러티브이다. 하여간에 이 정도면 갈데까지 간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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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의아니게(?) 속타게 해드리고 있군요. 단토의 책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여러 차례에 나누어 '브리핑'을 할 계획입니다(계획상으론 두달쯤 걸릴 거구요). 물론 서론에 대한 이 페이퍼는 오늘 끝내는 게 목표이지만...
 

몇 년전부터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담론, 혹은 키워드는 '파시즘'이다(최근엔 보다 '대중적'인 버전으로 '대중독재'란 말도 쓰이고/퍼지고 있다). 흔히 스탈린이즘과 함께 전체주의의 두 축을 이루는 이념으로 지칭되는 파시즘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권위적 국가주의'와 그에 대한 '대중의 절대적 지지'가 결합된 형태인데('대중독재'란 조어는 그 두 가지항을 결합한 것이겠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의 응원열기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파시즘'이란 표현을 썼고, 최근에 황우석 사태와 관련하여 일부 열성적인 '황빠'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파시즘'이란 표현을 갖다붙였다. 당초 '파시스트'란 말은 아마도 최대의 경계와 경멸을 담은 어사였을 텐데, 이젠 다반사로 쓰는 말이 돼 버린 것. 나의 일상, 나의 파시즘? 

 

 

 

 

그만큼 '파시즘'이란 용어가 '일상화'되었다는 뜻이겠는데, 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이는 줄기차게 우리사회의 '일상적 파시즘'론을 주장해온 임지현 교수가 아닌가 싶다(거기에 강준만 교수의 개마고원팀들이 가세했다). 좁은 견문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 '(일상적) 파시즘'은 아마도 계간 <당대비평>의 최고 히트상품일 것이다. 최근엔 김상봉 교수까지 <도덕교육과 파시즘>(길, 2005)으로 무장하고서 이 '반-파시즘' 대열에 가세했다. 한 용어의 이러한 일반화/일상화는 한편으로 우리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극대화하면서(대한민국이 파시스트 국가라니!)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도록 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파시즘'을 말 그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순치시켜버린 면도 있다('항시적' 파시즘은 말 그대로 '부드러운' 파시즘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나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현 '노빠 정권'이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정권의 '무시무시함'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히틀러/무솔리니 정권을 무능력하고 무기강적인 정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지지율이 30%를 밑도는 '국가주의'도 있나?).

해서, 현재의 '파시즘 인플레'는 주창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파시즘을 권장하고 장려한다(왜? 일상적 파시즘은 견딜 만한 파시즘이니까. 견딜 만한 것이 아니면 일상화될 수 없으니까). 더불어 모든 근본주의는 서로 공모하기에(주사파들이 조갑제류가 되는 것은 '전향'이 아니다. 본래 조갑제가 '주사파'이기 때문에. 박정희주의나 김일성주의나 그게 그거니까. 모두가 '인민'을 위해 애면글면했다. 단, 차이라면 뭔가 꿀리는 게 있었던 '친일파'는 어떻게든 먹여살렸지만 너무도 당당했던 '항일투사'는 인간 주체라는 게 먹고만 사는 거냐라고 내내 '교시'했다는 것. 말하자면, '배부른 돼지' 대 '배고픈 주체' 간의 차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파시즘론이 무용하다거나 임지현 교수의 작업이 오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이론은 의미론과 함께 화용론을 가지는 것이어서 의미론적으로 '옳은' 이론이 화용론적으로, 즉 실제 현실상으로 언제나 '옳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라는 것(이론적 순결주의자는 교리적 근본주의자의 세속적 버전일 뿐이다). 사실 '좋은 의도'와 '나쁜 결과'의 조합은 인간적인 결함의 결과만은 아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이런 모양'을 기대하신 건 아닐 테니까.  

 

 

 

 

이야기가 괜히 길어졌는데, 최근에 임지현 교수의 파시즘론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던 책이 출간됐고, 나는 그냥 그 책에 대해서나 말하려던 참이다. 빌헬름의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그린비, 2006)이 그 책이다. 임교수는 책의 뒷표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동감을 잃어버린 좌파 교과서의 정답을 무시하고, 파시즘의 복합적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내 개인의 지적 여정에서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와의 만남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를 일반적으론 '프로이트 좌파' 혹은 '프로이트 맑스주의자'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해보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프로이트주의는 혁명 러시아에서 곧 기각된다). 이미 작년에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2005)이 출간됐을 때 라이히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대신에 횡적으로, 작년초에 출간된 책으로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는 '최고'라는 평을 듣는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교양인, 2005)과 나란히 읽어볼 만하겠다는 의견 정도를 덧붙인다. 심리적 분석과 역사적 분석이 서로 보완해줄 수 있을 테니까. 팩스턴의 <파시즘>은 600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이게 좀 부담스럽다면, 마크 네오클레우스의 <파시즘>(이후, 2002)로 때우셔도 해도 좋겠다. 1/3 정도의 분량이다. 얼마전에 나와서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강유원의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에는 한 장에 파시즘 관련서들에 대한 서평에 할애돼 있다.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라이히의 파시즘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만한 책으로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교양인, 2006)도 이번에 출간된 책이다.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괴벨스의 본격 평전인 이 책은 괴벨스의 일기와 그가 쓴 소설, 연설문, 편지 등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분석해 괴벨스의 내면세계를 가장 깊숙한 지점까지 파헤쳐 들어간 탁월한 나치 심리의 해부서"라고 하니까 관심있는 독자들은 참조해볼 만한다. '대중의 자발적인 지지'가 '파시즘'의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할 때, 괴벨스의 공적은 그 지지를 '동원'할 수 있는 선전선동(=아지프로)전략을 개발한 데 있다. 물론 이것은 파시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그러한 선전선동은 현실민주주의에서도 이미 '파시즘'만큼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니까.

 

 

 

 

괴벨스를 언급하면서 히틀러를 빼놓을 수는 없겠는데, 관련서들은 막스 피카르트의 <우리 안의 히틀러>(우물이있는집, 2005)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분석서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을유문화사, 2004), 히틀러에 대한 신화적 분석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민음사, 2003), 히틀러에 대한 정신분석서 <히틀러의 정신분석>(솔출판사, 1999)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거기에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푸른숲, 1998)과 <히틀러 최후의 14일>(교양인, 2005)도 덧붙일 수 있겠다(바람구두님의 강추에 따른 것이다). <30분에 읽는 히틀러>(랜덤하우스중앙, 2004)라면 히틀러에게 너무 야박한 것일까? 그렇다고 당신이 이 참에 <나의 투쟁>까지 읽겠다고 나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속으론 이렇게 중얼거리겠다. "그건 좀 오버가 아닌가요?" 

 

 

 

 

두번째로 꼽을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두 에세이스트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알렝 핑켈크로트(팽켈크로)의 공동저작인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동문선, 2005). 작년말에 나온 책인데, 최근에서야 눈에 띄었다. <피아니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비터문>의 원작자이기도 한 브뤼크네르의 책은 <비터문>(산하, 1993) 등의 소설을 포함해서 여러 권의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읽은 가장 압권은 역시나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이었다. 핑켈크로트의 경우도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 <사유의 패배>(동문선, 1999) 같은 뛰어난 에세이들이 소개돼 있고(아래 사진은 영화 <비터문>의 포스터).

각자가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지만, 내가 알기에 두 권의 공저도 쓰고 있는데, 한때 내가 구했던 책은 <새로운 사랑의 혼돈>이었지만 이번에 <길모퉁이의 모험>이 먼저 나왔다(전자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얼른 가늠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엔 저자들의 지명도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물론 번역서의 경우엔 역자를. 한데 역자의 책을 내가 읽은 게 없다! 브뤼크네르의 <번영의 비참>을 약간 읽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차례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곱 개의 장이다. 그러니까 '일상'이 전면화되어 있는 셈인데, 일상에서의 모험이란 사실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밖에 더 있겠는가?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이 모험이듯이(한가지 곁들이자면 동문선 책 치고는 가격이 저렴하다).

 

 

 

 

세번째 책은 송태현의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살림, 2005). '융, 바슐라르, 뒤랑 - 상징과 신화의 계보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책 자체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부제이며 세 명의 상상력 '이론가'들과의 조우를 한번쯤 권하는 의미에서 꼽아본다. 유익한 안내서가 되어줄 듯하기 때문에. 융이나 바슐라르 관련서들은 우리 인문학 현실에선 '과다'할 정도로 여러 권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에(가장 얄팍한, 그래서 읽기에 간편한 책 몇 권만 이미지로 띄워놓는다), 한때 소개되다가 주춤하고 있는 질베르 뒤랑에 대해서만 몇 마디 덧붙인다. 사실 저자 자신이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에서 '질베르 뒤랑의 문학비평:새로운 세계관과 비평의 쇄신'으로 박사학위 받은바, 뒤랑은 상상력이론과 신화이론에 있어서 (바슐라르파와는 또 구별되는) '그르노블학파'의 수장이었고, 국내에도 그의 직간접적인 제자들이 여럿 된다.

 

 

 

 

대표적으론 뒤랑의 <상징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1983)을 처음 번역/소개한 진형준 교수를 들 수 있다.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질베르 뒤랑의 신화방법론 연구>(문학과지성사, 1992)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오래전에 둘다 읽어보았지만 역시나 번역서보다는 우리말 저작이 읽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다. 이후 뒤랑은 진형준 교수가 관여하기도 했던 계간지 <상상>과 살림출판사쪽이 '전담'하게 되는데,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 심층사회학을 위하여>(살림, 1998)이 유평근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고, 이어서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원제는 '상상력')>(살림, 1997)이 다시 진형준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다. 같은 해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살림, 1997)도 진형준 교수 등의 편역으로 출간되고(덧붙이자면 유평근, 진형준 교수의 <이미지>(살림, 2001)도 이런 맥락상에 놓여 있는 책이다). 뒤랑의 상상력론이 한국문학에 실제적으로 적용된 사례는 진형준 교수의 비평집 <깊이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86), <또 하나의 세상>(청하, 1988)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가장 최근의 평론집인 듯한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살림, 1997)은 읽어보지 못했다).   

 

 

 

 

네번째 책은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라 로슈푸코의 인간을 위한 변명>(한길사, 2005). 라 로슈푸코(1613-1680)에 관한 책으론 국내에 드물게 소개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꼽아본 책이다. 이미 <고야>와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등의 저작이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는 바, 저자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문화사나 지성사쪽의 전문가라고 해야겠다. 언젠가 몽테뉴를 <인생에세이>를 소개하면서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요시에의 <몽테뉴>를 꼽은 적이 있는데, <라 로슈푸코>도 보태야겠다.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는 라 로슈푸코는 블레즈 파스칼(1623-1662)과 동시대인이고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보다는 두 세대쯤 아래 연배이다. 저작으론 원래 <잠언집>이 유명한데, 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나무생각, 2003), <광우예찬, 군주론, 방법서설, 잠언과 성찰>(을유문화사, 1995)에 실린 '잠언과 성찰'이 있다.

 

 

 

 

끝으로 남아공의 여류 극작가 레자 드 왯(Reza de Wet)의 <러시안 트릴로지>(예니, 2005). 출간된 책들은 많지만, 손가락은 한정돼 있고 또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 법이니 내 눈길이 '러시안'에 머문 걸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에 대해선 별로 아는 바 없다. 다만, 이 희곡집이 체홉의 주요 희곡 <세자매>, <바냐 아저씨>, <갈매기>를 토대로 그 주요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그렸다는 것밖에(그러니까 '후일담 희곡'이다). 나로선 그걸로도 충분히 흥미롭다(아래 이미지들은 차례대로 레자 드 왯, <세자매> 영화스틸, 데이빗 마멧과 그의 <세자매> 원서이다).

소개에 따르면, "<세자매2>는 체홉의 <세자매>의 마지막 장면에서 17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1920년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그 격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올가, 마샤 그리고 이리나 세 자매가 갖고 있는 열망과 희망이, 또 그들의 고귀함과 선량함 혹은 그들의 무지가 어떻게 비루해지고 전락해 가는가를 성찰한 작품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원작인 <바냐아저씨>의 8년 후를 배경으로 혈연과 애정, 결혼으로 이루어진 한 작은 집단이 사랑으로 파멸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 "<호숫가에서>는 원작 <갈매기> 4막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호숫가에 있는 집에 다시 나타난 니냐의 이야기로,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보인다."

이미 번역/출간돼 있는 체홉의 희곡들과 나란히 비교해서 읽어봄 직하다. 거기에 덧붙일 건 이번에 미국 연출가 데이빗 마멧의 번안작을 옮긴 <세 자매>(예니, 2006). "체홉을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현대 관객들에게 소개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영상미에 주안점을 두고, 공연하기에 적합한 글로 새롭게 썼다"고 하니까, 이 또한 흥미를 끌 만하다. 

 

 

 

 

P.S. 그밖에 눈에 띄는 우리 저자들의 책들은 나중에 몰아서 다루기로 하고, 세 권 정도만 덧붙여 '언급'하도록 한다. 먼저,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란 부제를 가진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 아마도 지난주에 이 페이퍼를 썼다면 제일 먼저 꼽았을 책이다. 하지만 이미 주간베스트에도 오를 만큼 널리 알려진 책이기에 내 말은 군말 정도이겠다. 책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 즉 도서수집가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책의 제목인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는 한마디로 '점잖은 미치광이, 책에 미친 점잖은 사람들'을 일컫는다."는 소개대로이다. '곱게 미친 사람들'로 보면 되겠다("미치려면 곱게라도 미칠 것이지!"란 요구를 그래도 잘 수용한 사례들이라고나 할까).

이런 책소개를 수시로 늘어놓는 통에 간혹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내게도 어쩌면 '젠틀 매드니스'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 말은 1800년대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리켜 '가장 고귀한 질병, 바로 애서광증(愛書狂症)에 일찌감치 푹 젖어버린 분'이라고 한 표현에서 차용했다"고 하니까 그게 그리 나쁜 건가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책은 분량도 분량이고 역자들도 역자들이다. "평론가이자 번역가인 표정훈,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김연수, 출판기획자이자 번역가인 박중서 등 책에 미친 세 사람이 3년만에 번역을 마쳤다"! 우리의 경우 혈통과 무관하게 이들의 조상은 아마도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가 아니었을까? 표덕무, 김덕무, 박덕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두번째 책은 중국화인열전의 한 권으로 나온 저우스펀의 <석도>(창해, 2006), "청대 초기의 화가 '석도'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전기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왕손으로 태어나 승려의 몸으로 세상을 떠돌고 유민(遺民)화가로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서위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되살려 그림과 함께 담아냈다. <팔대산인>, <서위>에 이어 출간된 '중국화인열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내가 중국 회화에 조예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다만 이전에 김용옥의 편역으로 출간되었던 <석도화론>(통나무, 1992/2002)에 등장하는 이름 '석도'가 그 '석도'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되어 꼽은 것이다. 도올의 책은 부제가 '김용옥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라고 돼 있는데, 백남준 예술론의 요체는 '예술은 사기다!'라는 것이다. 오래전에 백남준과 '플럭서스' 운동에 대한 논문을 교정하느라 참조했던 책들이 문득 몇 권 떠오른다(김홍희의 책들이 표준적이었다).   

세번째 책은 <호두까기인형>의 독일작가 E. T. A. 호프만의 <스퀴데리양>(열림원, 2006). 예전에 <스퀴데리 부인>(이유, 2002)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인데 새 번역본이 나온 것. 러시아 낭만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작가이기에 관심이 가는 책이다. 비록 '세 자매'에 밀리긴 했지만. 호프만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P.S.2.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오세철 교수 등의 번역으로 1980년대에 현상과인식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내가 산 1987년 2판은 당시로선 고가인 8,000원이어서 상당 기간 망설이다가 구입한 기억이 있다. 어제 새로 나온 번역본과 대조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부분적으로라도) 새 번역본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걸 알았다(오역들이 지적되던 예전 번역보다 못한 대목들도 더러 있는데, 이에 대한 지적은 다른 자리에서 하도록 하겠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우리말 정본에 대한 기대는 좀더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06. 01. 17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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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7 15:02   좋아요 0 | URL
<최후의 14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읽어보지 않았지만 분량이 많지 않아서 집어넣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자리에서 바람구두님이 이미 추천하셨더군요.^^

돌바람 2006-01-19 13:13   좋아요 0 | URL
글 퍼가는 걸 좀 자제하는 편인데 로쟈님 페이퍼는 나중에라도 다시 봐야겠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득불 퍼갑니다.

로쟈 2006-01-19 14:41   좋아요 0 | URL
'셀프'라서 좀 불편하긴 하지요.^^

새벽길 2006-01-20 15:49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아갑니다.

모네 2006-01-20 16:02   좋아요 0 | URL
님의 평론에서 늘 많은 도움 받고 있어요. 감사!

승주나무 2006-01-20 23:04   좋아요 0 | URL
라 로슈푸코를 보게 되는군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잠언집을 인용했는데, 그 중에서도 '나이가 들면 주위에서 늙었음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아우! 십 년은 젊어지셨네요''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아요'라는 인사말도 씁쓸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혹시 '잠언과 성찰'은 예쁘게 번역이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저는 세로 읽기로만 보아서..

로쟈 2006-01-21 10:35   좋아요 0 | URL
저도 새 번역본을 읽어보지 않아서 '예쁘게'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기호학과 관련한 로트만의 저작은 국내에 세 권이 소개돼 있다.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 러시아 영화론 선집인 <영화의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2001), 그리고 치비얀과의 공저 <스크린과의 대화>(우물이있는집, 2005)가 그것이다. 이 중 <영화기호학>과 <영화의 형식과 기호>에 실린 '영화기호학과 미학의 문제'는 (내가 알기에) 같은 내용이다. 해서, 로트만 영화기호학에 대한 개괄적인 코멘트를 담고 있는, 오래전에 작성된 아래의 글은 <영화기호학>(민음사)를 대본으로 했던 것이지만 <영화의 형식과 기호>에도 적용될 수 있다(단, 페이지수는 전자의 것이다).

로트만의 <영화기호학>(1973)은 그가 결론에서 지적한 대로 ‘소박한’ 입문서이다. 무엇에 대한 입문이냐고 하면 바로 영화-언어(film language), 즉 언어(기호=약호)체계로서의 영화 입문이다. 이 입문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 영화 이해의 문턱이다. 단순하게 그렇게만 본다면, 그래서 영화기호학을 영화 이해의 한 방법이나 절차로서 인정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1968년 이후 영화연구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기호학이 처음부터 그러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기억하기로 하자(기호학은 “값싼 물건과 장신구로 치장한 귀부인들”이나 하는 짓(혹은 실천)이며 기호학의 일반적 태도는 “백치 수술을 받은 담비(a lobotomised ferret)의 경계심”에 불과하다는 비난 여론이 있었다).

즉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영화기호학 또한 자연스러운 것(선험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 모든 걸 따져볼 수는 없고(그럴 능력과 시간이 없다), 영화기호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만을 잠깐 옮겨보기로 한다: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해서(사진은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언어> 영역본).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이 향하는 곳은 역시 이미지와 서사 중 어느 것을 근본적으로 보는가라는 문제이다.

메츠는 의미작용을 행하는 일상적인 언어와 달리 영화에서는 이미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쇼트가 문장이나 발언에 해당하는 지위를 갖고 있음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움켜쥔 이 손의 쇼트는 ‘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손이다’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관점은 언어를 영화분석의 틀로 간주하는 전제 위헤서(만) 성립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발언으로서의 쇼트와 그의 ‘거대 통합체’는 언어학의 모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법의 산물이며 이를 통해서 영화의 분석에서 이미지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서사란 가시적 이미지들 자체와 그것들의 결합의 결과에 불과하다... 서사란 이미지의 자명한 소여가 아니며 그 이미지의 토대에 있는 어떤 구조의 효과도 아니다. 즉 그것은 가시적 이미지들 자체의 한 결과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를 사유(=서사=개념=이론적 이성=인식론)에 대비시키면서 그 존재론적, 가치론적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은 분명 이해의 또다른 문턱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당장에 그 문턱을 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저만치서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만을 얼핏 감지할 수 있을 뿐인데, 그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한 문단을 여기에 다시 옮긴다:   

“현대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박성수, '이미지와 사유: 들뢰즈의 영화기호학 비판에 대해'에서 재인용)

이 무능력 앞에서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영화언어의 이해는 20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의 이념적-예술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지만, 그건 진짜 막연한 걸음이어서 과연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는 과연 영화를, 삶을 이해할 수 있기나 한것인지? 도대체 그걸 전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 생리적 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무능력을 염두에 두고 다시 질문하자면, 영화기호학의 알짜는 무엇인가? 그건 영화기호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얼마만큼 가능한가를 묻는 일에서 구해져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가능성의 물음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사진이나 그림처럼 연속적인, 분절될 수 없는 기호에서 과연 자연어에서의 단위와 같은 의미 단위를 찾을 수 있을까?”(<영화기호학>, 역자해설)라는 것이 그것. 그에 대해서: “(프랑스의)초기 영화기호학 이론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것과는 달리, 로트만은 일정한 문화적 관념들이 하나의 도상 텍스트(그림 혹은 영화의 쇼트)에 어휘적인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함으로써 이 함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개략적이지만, 여기에 처음과 끝이 다 들어 있다. 영화기호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화언어가 가능해야 하고, 그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분절될 수 있는 어떤 (의미) 단위가 설정돼야 한다. 로트만 자신은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호체계”로 아주 기능(주의)적으로 정의한다. 뭔가(전언)를 전달할 수 있는 약호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언어라는 이름에 값한다. 그런데 영화가 바로 그렇다. 왜? 사람들은 영화를 만들고 또 보면서 뭔가를 전달하려 하고 또 전달받기 때문이다. 분명 여기에 오고가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달의 매체(매질)는 무엇인가? 조형적 기호(이미지)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의 이 기호연속체(sign continuum)가 분절되는 자리, 그러니까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자리, 그것이 바로 쇼트이다. 이 쇼트가 바로 “몽타주의 세포”이면서 영화적 의미론의 기본단위가 된다.

기본단위는 그렇다 치자. 그럼 어떤 방식으로 이 단위들의 통사론과 의미론이 가능한가, 즉 영화에서의 의미작용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이건 그다지 어려운 물음이 아니다. 일단 단위가 주어진다면, 그걸 배합해서 잘 버무리는 일은 그저 ‘솜씨’에 달려 있을 따름이니까. 쇼트들을 a, b, c, ...라고 해보면, 이들간의 연결관계가 문제된다. 즉 가능한 관계, 가능한 경로가 문제되는 바, a-b-c의 조합이 가능할 수 있고, a-b-d의 조합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조합들 중에서 보다 중립적인(비표지적인) 것을 표준으로 놓는다면, 이 표준으로부터의 표시될 수 있는 거리 관계, 일탈 관계(말하자면 기대-위반의 메카니즘)가 바로 의미발생의 전조건이 된다(<영화기호학>, 67쪽 참조).

이건 보다 매크로한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얘기될 수 있다. 어떤 한 묶음의 쇼트(단어 혹은 문장)를 시퀀스(담화discourse)라고 한다면, 이 담화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적, 사회적, 이념적 의미소들과의 결합(연루) 관계에 의해 영화적 담론은 보다 복잡한 사회적 의미기능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대충 그런 식이다. 좋은 영화건 ‘나쁜 영화’건 영화가 말하는 방식, 그러니까 말하게 되는 방식은 그런 식이다(사진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 시퀀스에서 사자상 몽타주).    

이제, 무얼 더 말해야 할까? 영화기호학의 대강이 그러하니까 이젠 그것의 디테일에 대해서 말할 차례인 듯한데, 로트만은 그 디테일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건 아랫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듯하다. 그는 요컨대, 기본만을 말하는 것이며, 전략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건 조건적 기호조형적 기호라는 로트만의 기호 이분법이다. 물론 이 두 기호는 고정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모든 기호는 이 두 극단 사이에 퍼지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거기에 어떤 변증법적 운동이 가능해지는데, 로트만이 보기에 시(문학예술)는 조형적 기호를 지향하는 조건적 기호이고, 영화는 조건적 기호를 지향하는 조형적 기호이다.

 

지향한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끝까지 잘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잘 안되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이 바로 기호의 존재론적 긴장이고 의미론적 긴장이다. 글자들은 이미지를 동경하면서도 완강하게 글자들로 남으며, 이미지들은 이야기를 동경하면서도 또 굳건하게 이미지로 남는다. 로트만은 바로 거기까지만 얘기한다(그리고 나머지는 암시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에겐 생각할 거리들이 좀 남는다. 서로를 마주보며 애닯도록 깃발을 흔들어대는 시와 영화에 대하여, 그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시텍스트의 분석과 영화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에 대하여(그 공통점과 차이에 대하여). 사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할 거리들이 좀 남아 있다고. 이하는 <영화기호학> 후반의 내용정리이다(전반부는 다른 사람이 정리했던 모양이다).  

 

10장 시간과의 투쟁

영화는 세계를 모형화한다.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시간과 공간이다. 모형의 시간-공간적 성질에 대한 대상의 시간-공간적 특성의 관계는 모형의 본질과 그 인식적 가치를 여러 모로 규정한다. 모형의 인식적 가치는 모형화의 방법을 선택하는 예술가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높아진다. 이 때문에 자연히 예술가는 세계의 시간-공간적 변수를 영화 속에 자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영화는 창조행위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객관적 시공간의 등가물들이 갖는 고유의 엄격한 체계를 예술가에게 부과한다. 이들로부터 벗어난 채로 영화의 경계내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가에게 남겨진 것은, 다름아닌 영화적 수단을 가지고 이들과 투쟁하여 이기는 일뿐이다.

 

시각 및 도상적 기호화 관련된 모든 예술에서 예술적 시간은 오직 하나, 즉 현재밖에는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각 예술에 있어서의 시간은 언어 예술에 비하여 궁핍하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배제한다. 시각적으로 지각되는 행위는 오직 하나의 양태, 즉 현실적인 양태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영화는 현재 시제의 필연성과 스크린상의 행위가 갖는 현실적 양태를 한꺼번에 돌파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그 초기부터 꿈, 회상, 의사 직접 화법 등의 전달을 위한 수단을 모색하면서 디졸브를 비롯하여 일련의 수단들에 기대어왔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영화는 여러 가지 동사 시제를 현재 시제에 의해 전달하고, 비현실적 사건을 현실적 사건으로 전달하는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삶의 템포에 대한 자동 기록장치로부터 시간의 예술적 모형으로 전화시키기 위하여 영화 필름에 가해진 힘은, 관객에게 예술적 에너지로, 긴장과 의미 포화성으로 느껴진다.

 

11장 공간과의 투쟁

현실의 모든 공간적 형식과 네 변으로 한정된 평면 스크린 공간과의 동형성 위에서 쇼트의 효과는 구축된다. 상이한 것끼리의 이러한 대비 관계야말로 영화 공간의 기초를 이룬다. 스크린은 네 변과 표면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 한계 밖에서 영화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 돌파의 가능성이 언제고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속에서 스크린 내의 표면을 채운다. 클로즈업은 네 변을 위협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떨어져나온 디테일은 전체를 대신하는 환유가 된다. 따라서 스크린 위에 존재하지 않는 이 사물의 전모는 스크린의 경계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평면성에 대한 공격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큰 의의를 거두고 있다.

 

Citizen Kane

 

 

 

 

 

 

 

 

 

 

 

 

 

 

 

이와 관련하여 현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른바 쇼트의 심도 구축이다. 화면의 전경에 클로즈업을 배치하고 그 후경에 롱 쇼트를 결합시키면, 이들은 스크린의 '본래적인' 평면성을 깨고 훨씬 더 엄밀한 동형성의 체계를 구축하면서 영화 세계를 만들어낸다. 3차원이며 경계가 없는 다층적 현실 세계가 평면적이며 제한된 스크린의 세계와 동형으로 되는 것이다(심도 쇼트의 탁월한 테크닉으로 <시민 케인>과 트뤼포의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공간은 특정한 액자 안으로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무한한 공간과 동형성을 갖는다는 점을 이 책의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모든 예술에 공통되며 특히 조형 예술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모순에다 영화는 자기 특유의 모순을 보탠다. 요컨대, 그 어떤 다른 조형 예술에서도, 예술적 공간의 내부 경계를 채우면서 그처럼 적극적으로 그 경계를 파괴하고 한계 밖으로 나오고자 애쓰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갈등은 영화 공간의 현실성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12장 영화배우의 문제

영화 쇼트의 기호학적 구조 속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화 예술은 역사적으로 두 전통의 교차점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 하나는 비예술적인 기록물의 전통에, 다른 하나는 연극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록 영화는 스크린 평면 위에서 우리에게 흑백으로 교차되는 얼룩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잊은 채 스크린 위의 형상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지각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연극은 우리에게 보통의 인간, 즉 우리의 동시대인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잊고 그에게서 어떤 기호적 본질, 예컨대 햄릿, 오셀로 혹은 리처드 3세를 보아야만 한다. 예술 영화를 이러한 두 전통에 이중으로 투영해 본다면, 예술 영화에 있어서 스크린 위의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된 관계 유형이 당장 드러나게 된다.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세 차원으로 약호화된 전언이 된다 - 1 감독의 차원, 2 일상적 행위의 차원, 3 배우 연기의 차원. 감독의 차원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쇼트 작업은 많은 점에서 다른 경우와 동일한다. 즉, 클로즈업, 몽타주, 그 밖에도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수단들이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의 연기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이런 전형적인 영화 언어의 형식들이 특별한 상황을 창출한다.  

 

 

일상적 행동에 대한 관계는 연극과 영화에서 근원적으로 상이하다. 무대는, 그것이 아무리 사실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특별한 '연극적' 행동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배우의 행동이 일상의몸짓과 억양에 대한 복사가 아니라 단지 이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일상의몸짓과 행동의 정확한 재현을 위한 기술적 가능성들을 만들어낸다. 일상 관계의 기호학과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전통의 기호학을 흡수할 수 있는 영화 텍스트의 능력은 영화를 광범한 비예술적 시대 기호로 가득 차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어떤 극장 공연형식과도 비교가 안된다. (참고로) 우리시대의 여배우들은 안나 카레니나나 나타샤 로스토바의 의상을 입었다 해도 여전히 우리시대의 여자들인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 이 점은 이미 결핍이 아니라 미적 법칙이다. 이는 스크린 위에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보여주어야 할 때에 특히 강조된다(그레타 가르보에서 소피 마르소까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의 의상은 어떤 역사적 시기의 실제 의복에 대한 재현이기보다는 특정한 시대의 기호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기호적 의미의 세번째 층위는 바로 배우의 연기에 의해 구축된다. 스크린상의 인간 행동이 지니는 기본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는 생생함, 즉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현실을 관찰한다는 환상을 갖게끔 한다는 데에 있다. 이 '생생함'이란 느낌은 실은 영화배우의 연기 구조 속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생겨난다. 한편에서 보면 영화배우는 최대한 '자유롭고' 일상적인 행동을 하고자 애쓰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영화 연기의 역사는 현대의 연극에 비해 더 상투어, 마스크, 역할의 컨벤션, 전형적인 제스처들의 복잡한 체계에 의존해 왔다. 영화는 컨벤션 연기의 다양한 유형을 단지 이용할 뿐만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창조해 왔다(감독의 영화/ 배우의 영화). 영화배우 연기의 컨벤션이 갖는 또다른 유형은 영화의 장르적 성격과 관련된다. 하나의 예술적 세계에 대한 특별한 조직 유형으로서의 장르는 연극에서보다 현대의 영화에서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기대와 관련된 충족은 물론, 그 파괴까지도 많은 예술적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영화의 특정한 부분에서 조건성의 정도를 심하게 변화시킴으로써 전체 속에서 배우 연기가 갖는 기호성이 제고될 수 있다.

 

13장 영화 - 종합예술  

우리는 "움직이는 그림의 도움을 빌린 이야기"가 전달하는 복잡한 의미구조를 고찰했다. 그렇지만 현대의 영화는 단지 이 언어로만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어적 전언, 음악적 전언, 텍스트 외적 관련의 활성화를 포함하며, 이들은 영화에 다양한 의미구조들을 보태준다. 이 모든 기호학적 층위들은 또한 의미적 효과를 창출한다. 영화의 이와 같은 능력 때문에 우리는 영화의 종합적 특성 혹은 다성적 특성을 거론하는 것이다. 다양한 기호체계의 복잡성, 텍스트 약호화의 다회성 그리고 이와 관련된 예술적 다의성 등은 현대 영화를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비슷한 걸로 만든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화가 어떻게 고도의 기호적 복잡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교육의 수준이 천차만별인 광범한 관객 대중의 이해에 부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로, 어떤 체계를 사용하는 것과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복잡성을 갖는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둘째로, 영화는 다층적 구조이며 그 구조의 층위들은 상이한 정도의 복잡성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육 정도가 다른 관객들은 각각 다른 의미 층위들을 취한다. 세 번째로, 텍스트는 또다른 의미에서 다성적이다. 그것은 한 차원 위에서 다양하게 움직이는 기호들의 다발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상이한 차원들 위에서의 동시적인 움직임을 제시한다. 관객에게는 텍스트와 나란히 약호가 주어진다. 영화란 하나의 교육기제이다. 그것은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취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14장 기호학과 현대 영화의 진로

기호와 의미의 문제에 대한 증대된 관심은 단지 학문적 기술에서의 특성일 뿐 아니라 19세기 후반의 문화적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기호의 문제는 언어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 속으로도 침투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베르히만(<페르소나>), 펠리니(<8 1/2>), 안토니오니(<블로우업>) 등과 같은 여러 예술가들의 흥미를 끌었다...  

 

 

<블로우업>(1967)에 대한 분석... 안토니오니를 그의 주인공(사진작가)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그럴수도 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니가 작품의 플롯을 그런 식으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와 주인공과의 분리를 증거해준다. 안토니오니는 <배회하는 카메라>의 이념으로부터 분석의 영화로 옮겨간 것이다('확대'란 뜻의 '블로우업'은 국내에 <욕망>으로 출시돼 있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현대 영화의 자발적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증거이다. (<블로우업>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은 살인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이 세계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은 사실의 부동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흔들면서 영화적 진실에로의 길을 열어준다. 또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예술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보다 정신적, 예술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하는가? 안토니오니는 예술가가 하나의 ‘개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메타-언어에로의 무한소급 문제. 이러한 과학적 진리는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함의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예술이 그 대상이 삶보다 논리적 추상화에 있어 높은 차원의 언어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학 텍스트에서는 메타 언어의존재 자체가 연구자로 하여금 연구 대상의 바깥에 있게끔 보장해준다. 예술의 경우 이 점에서 예술가의 이념적이고 도덕적인 자질이 더욱 불가결하다. 예술가는 종종 자신 속에서 기술자와 기술 대상, 의사와 환자를 겸하고 있는 까닭이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 나오는 사진작가는 다면적인 의식으로 인해 후자에 속하며, 바로 그 때문에 전자의 위치를 가질 수가 없다. 의사, 재판관, 삶의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주인공이 필요하다. 안토니오니는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론

이 책은 영화의 기초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도 아니고 영화의 문법서도 아니다. 이 책이 추구하는 목적은 가장 소박한 것, 즉 관객들에게 영화 언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나아가서 영화언어를 관착하고 그 영역에 관해 숙고하게끔 자극하자는 데 있다. 영화언어의 이해는 20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의 이념적-예술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다...

 

06.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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