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에 관한 글들을 띄우는 김에 러시아어본 레비나스도 잠깐 소개해둔다. 실상은 재작년 5월 모스크바 통신에 띄운 글에 포함돼 있는 내용인데, 당시 서점에서 새로 나온 <레비나스 선집>(2004)을 반가운 마음에 사들였던 추억을 담고 있다. 아래 사진의 왼쪽이 헌책방에서 구한 <레비나스 선집: 전체성과 무한>이고, 오른쪽이 신간이었던 <레비나스 선집: 어려운 자유>이다.

Э. Левинас Эмманюэль Левинас. Избранное.Тотальность и бесконечноеЛевинас Э. Избранное: Трудная свобода (сост. Левит С.Я.; пер. с фр. Вдовиной Г.В., Маньковской Н.Б., Ямпольской А.В.)

지난주(*2004년 5월)에 나온 신간 가운데, 가장 반가웠던 것은 <레비나스 선집>이었다. 역시 <크리스테바 선집>과 같은 ‘세상의 책’ 시리즈로 나온 최신간(이 시리즈에는 그밖에도 불트만, 아롱, 라크루아, 플레스너 등이 들어가 있다)인데, 로스펜출판사에서 내는 이 시리즈는 러시아와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열린사회연구소>에서 기획하는 ‘번역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돈줄은 소로스 펀드이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펀드 매니저인 소로스는 헝가리 태생이고, (‘열린사회’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칼 포퍼의 제자로도 유명하다. 요컨대, 그는 ‘열린사회’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가끔 계란 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그 ‘실천’의 방식이 ‘세상의 책’들을 번역/출간하는 데 있다는 점은 음미해 볼 만하다. 덧붙여, 소로스의 바람대로, 이번 미 대선에서 부시가 (제발) 낙선해서, ‘군사 민주주의’(촘스키) 국가인 미국도 어서 빨리 ‘열린사회’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물론 소로스의 기대에 어긋나게도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어쨌든 소로스 펀드의 도움으로 나온 <레비나스 선집>의 제목은 ‘어려운 자유’이고, 전체 752쪽이다(1,500부 발행).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점 <이데아>의 주인장 말에 따르면(사실 그는 몇 년 전에 뭐가 나온 게 있다고만 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번역된 레비나스의 책은 2000년에 나온 <전체성과 무한>이다(*나중에 헌책방에서 구했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인 듯한데, 모두 4권의 책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전체성과 무한>에는 5권이 번역돼 있다. 해서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 레비나스'는 모두 아홉 작품이다).

그 4권이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Theorie de l’intuition dans la phenonelogie de Husserl)>(1963),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발견하며(En de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1947/67), <어려운 자유(Difficile liberte)>(1963), 그리고, <타인의 휴머니즘(Humanisme de l’autre homme)>(1972)이다(번역서명은 강영안 교수의 표기를 따른다). 이 네 편의 번역 외에도 <글쓰기와 차이>에 실려 있는 데리다의 레비나스론 후반부가 번역돼 있고,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개념풀이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전체 번역은 두 사람이 했는데, 그 중 3편을 번역한 I. S. 보비나(Vovina) 여사가 레비나스 전문가로 보인다.

레비나스의 책으로 국내에 번역된 것은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 정도일 텐데(소로스의 ‘번역’ 펀드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런 책들이 한꺼번에 번역되기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앞으로 사정이 얼마나 나아질지는 의문이다(*원전 번역에 관해서라면, 아직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앞의 책 4권 가운데, 내가 본 영역본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 한 권뿐이었는데, 그쪽도 사정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지금은 거의 다 번역돼 있는 듯하다) . 물론 러시아에서의 인문서 번역 현황이 모두 레비나스 수준인 것은 아니다. 대형서점의 ‘철학’ 코너에 가보면, 클래식전집이라고 나온 걸 빼고, 외국철학자, 특히 현대철학자들의 책을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너네도 거장이 나오긴 틀렸구나!”라는 게 혼자 생각이었다. 물론, 사유의 거장들이 없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더 많은 번역서들이 나와야 한다는 당위의 가치는 유보될 수 없다. 적어도, 번역은 소통과 나눔에의 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이야말로 ‘프로메테우스의 일’이다. 그것이 유익할 뿐만 아니라, 간혹 아름답고 숭고한 것은 그 때문 아닌가?

어쨌든 부피만으로도 ‘숭고한’ <레비나스 선집>의 가격은 240루블이었다(9,600원). 얼마전 국내에서 새로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가 35,000원이던데, 할인가격을 고려하더라도 1/3이 안되는 가격이다. 하지만,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번역의 질이다. 내가 러시아아어본의 <그라마톨로지>를 아무런 주저없이 집어든 것처럼, 외국의 한국학 전공자가 우리말 <그라마톨로지>를 집어들 수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해서 (1)더 많이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다가 (2)믿을 만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유사-프로메테우스들에 대한 주의가 요망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신이여, 이들의 간을 쪼아주소서!).

06. 02. 13.

Эммануэль Левинас Время и другой. Гуманизм другого человекаЭмманюэль Левинас: Путь к Другому

P.S. 러시아어본들에서 레비나스의 생년은 구력에 따라 (1906년이 아니라) 1905년으로 기재돼 있다.(*'러시아어 레비나스'는 몇 권 더 있다. 왼쪽이 <시간과 타자> 등을 묶은 선집이고, 오른쪽은 연구논문들까지 같이 묶은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로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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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2-1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의 마지막 말씀 '신이여, 이들의 간을 쪼아주소서!'를 저도 되풀이하고 싶군요.
 
레비나스
베른하르트 타우렉 지음, 변순용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저자 베른하트르 타우렉은 독일 대학의 교수인데, 이 책과 함께 니체, 푸코, 셰익스피어 입문서와과 철학 입문서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역자도 이에 착안하여 레비나스에 관한 '적절한 입문서'로서 이 '불어로 저술하는 철학자에 대한 독어로 된 입문서'를 옮기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수고는 별로 빛이 나지 않는다. 역자의 말대로 "입문서라는 것은 입문서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더구나 번역마저 신뢰감을 주지 못할 경우에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연보에서부터 그가 태어난 나라 '리투아니아'를 독어식으로 '리타우엔(Litauen)'이라고 표기할 때(277쪽) 나는 이 번역서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데카르트적 명상>이라 옮겼을 때도 그러려니 했지만, 그마저도 <데카르트주의적 명상>과 혼용될 때는 좀 짜증스러웠다.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를 '플로틴(Plotin)'이라 옮길 때도 철학계에선 그렇게도 쓰나? 란 의구심을 가져지만, '로젠츠바이크'를 '로젠쯔바익(Rosenzweig)'으로 표기하는 특이한 취향을 지나서 (프랑스 시인도 아니고)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을 '쓸랑(Paul Celan)'(140쪽)이라고 옮길 때에는 당혹감을 넘어서 '낭패감'을 갖게 되었다(그나마 별 기대를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니 '데리다의 근본적인 반대리주의(反代理主義)'(128쪽)란 표현이 나오는 건('반표상주의'나 '반재현주의'가 아니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겠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빌자면, 독자가 역자에게서 '타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자 또한 독자에게는 '타자'라는 걸 확인하는 수밖에. 한데, 중요한 건 이 타자에 대한 '책임' 아닌가? 레비나스 철학 혹은 윤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인 그 책임!

역자가 레비나스를 접하게 된 계기 또한 그 책임의 문제였다고 하는바, "그의 책임론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책임"까지도 추궁한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그것은 "나의 모든 자유보다 선행하는 타자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다."(14쪽) 그러니 이 책 <레비나스>에서만큼은 역자의 책임은 '무한'이겠지만, 나는 역자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애당초 별로 재미없는 책을 쓴 저자에게도 책임의 일부는 돌려져야 할 것이기에(이 책과 비교한다면, 콜린 데이비스의 또다른 '입문서'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다).   

원전이 독어본인지라 미심쩍은 대목들을 대조해볼 수가 없었지만, 영어 연구서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대목은 예외였다. <해체론과 실용주의>란 책에 실린 로티의 말을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이 대목은 독어역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을 테니 중역이겠다).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가 하이데거의 존재보다 결코 도움된다고 보지 않는다 - 이 두 가지는 내게 단순하게, 좌익으로서, 그리고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189쪽) 

각주에 있는 원서의 쪽수를 찾아갔더니 이 대목은 "I don't find Levinas's Other any more useful than Heidegger's Being - both strike me as gawky, awkward, and unenlightening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41쪽)을 옮긴 것이다.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은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좌익으로서'란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신실용주의자' 로티다운 의견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 대목은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Other)'가 하이데거의 '존재(Being)'보다 뭐가 나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타자존재나 둘다 내게는 멍청하고 어색하며 몽매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자질구레하게 이런 대목들을 더 지적하는 것은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단순하게, 좌익으로서, 그리고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시급하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전히 '계몽'이며, '타자의 독서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만은 확인해두도록 하자. 역자가 부록으로 실은 논문들(68쪽으로 번역 본문 분량의 1/3이 넘는다! 이 분량은 책값과 무관한가?)에 쏟아부은 정성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정확한 번역과 교정에 할애했더라면 책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이런 책과는 달리 혹은 이런 책의 저편에서' 신뢰할 만한 모양새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역자로서도 변명의 여지는 있겠다. "그의 철학은 느껴야 한다. 그 느낌은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다."(15쪽)고 하니까. 해서 덧붙이자면, 레비나스 입문에 더 좋은 것은 이런 '입문서'들을 읽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렇게 '책' 따위를 놓고 투덜거리는 게 아니라, 선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레비나스의 얼굴을 보면서, '타자에 대한 책임'을 조용히 묵상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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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06-02-1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읽으면서 답답했던 생각이 납니다.^^

로쟈 2006-02-19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입문서로는 부적합해 보입니다. 레비나스 이해의 관건이 되는 하이데거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

사량 2006-02-2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파울 첼란의 경우, 이 사람이 훗날 파리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간주되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아요. 하이데거 전문가인 박찬국 교수의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동녘, 2004)의 앞부분에는 "프랑스의 시인 폴 셀랑(Paul Celan)"이라는 무시무시한-_- 말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6-02-2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무시무시한 말'이군요. 첼란이 불어로도 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한번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찾아보니까, 1951년에 프랑스로 귀화했군요. 한데, 프랑스어 시집은 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로 독어시집이고 루마니아어 시집이 한 권 있는 것 같네요.

김한솔 2021-12-3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는 서평이었습니다.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 역사, 2006) 출간에 대한 소개 기사/인터뷰를 옮겨놓는다.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붙여넣으려다가 따로 떼놓은 것이다. 기사는 국민일보(06.01.20)의 '책과 사람'란에 실렸던 것이며, (*)표를 하고 집어넣은 참견과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제 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써도 그 논문에 인용된 참고 문헌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으면 그 논문이 전개한 아이디어는 우리 문화의 일부로 편입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정부 내에 번역국을 두고 서양 서적을 조직적으로 번역했는데,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가 됐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근대 일본의 번역 열풍을 “동서 문화 교섭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우리 번역은 어떤가?(*"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학계의 고질적인 번역 경시풍조를 비판하면서 번역을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일부로 수행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인물은 동양철학자 김용옥이다. 1985년에 출간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상당 부분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번역은 반역인가>, 202쪽. 김용옥에 대한 박교수의 평가에 대해서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니체 전집이 작년 말에야 나왔어요. 니체 전집이 이제야 나왔는데 다른 전집이야 어떻겠어요? 화이트헤드(영국 철학자)는 ‘서양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플라톤 전집이 없습니다. 서양사 공부하는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역사학의 아버지 헤르도투스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가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서양사학자들이 '역사'를 말하려면 좀 쑥쓰럽겠다. 플라톤전집은 몇년전부터 그마나 조금씩 선보이고 있다. 분명 사정이 나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플라톤전집이 다 출간될 쯤이면 앞에 나온 책들이 절판된 상태일 것이다.)


 

  

 


-서양사 교수이자 지금까지 10여권의 학술·교양서를 번역한 박상익 우석대 교수(51)가 작심하고 입을 열었다(*나는 그 책들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역사책들에 손이 덜 가기도 하지만, '-에서 -까지'라는 제명의 책들을 괜히 꺼려하기 때문이었다). 번역을 무시하는 국내 학계와 출판계의 오만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실명까지 거리낌없이 거론하는 박 교수의 격정적인 육성으로 가득한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는 한국의 천민적 번역문화에 대한 거의 유일한 보고서이자 본격 비판서다.

“학자들은 논문만을 학문의 본령으로 취급하고 번역은 소일로 취급합니다. 걸핏하면 원서를 들먹이면서 지적 우월성을 뽐내기도 하죠. 그러나 이런 태도야말로 오만한 엘리트주의요 지식인의 반역입니다. 서양 학문을 수입해다가 팔아 먹기 바쁜 ‘지식 수입상’들이야 번역에 신경쓸 필요가 없겠죠. 그렇지만 지식의 대중화를 고민하는 학자라면 번역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박 교수는 번역은 학문 연구자의 기본 임무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책이 국내에 나와 있지 않을 경우,연구와 병행해 번역서를 출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박 교수는 박사 논문으로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와 표현의 자유’를 쓴 후,번역과 주석을 덧붙여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소나무)를 출간함으로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국내에는 수많은 루소 연구자들이 있지만 루소의 대표작 <에밀>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서가 없는 실정입니다. 로크, 홉스도 마찬가지예요. 구구단도 모르면서 수학을 안다고 하는 꼴이 아닙니까?”(*<에밀>을 비롯해서 몇 권 나와 있기는 하다. 루소 연구자가 그렇게 많은가? <리바이어던>의 정역본이 아직 없는 건 나도 유감스럽다. 홉스 대신에 오스터의 소설 <리바이어던>을 읽으면 되는 건가?)

-한국 번역의 빈곤함은 어느정도 역사적 이유가 있다. 한문 중심의 조선시대와 일본어 중심의 일제시대를 지나 한글이 제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겨우 반세기에 불과하다. 번역작업을 통해 지적 인프라를 축적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우리사회의 무관심과 홀대가 번역의 빈곤을 심화시켜온 것도 사실이다. 학계는 번역을 학문적 작업으로 평가해 주지 않으며, 출판계는 전문번역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실력있는 연구자들이 번역에 나서고 싶어도 못합니다. 열악하다고 소문난 시간강사 수입도 번역료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니까요. 그렇다고 정부 지원이 있습니까? 학술진흥재단의 학술명저 번역 지원 프로그램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그 예산이 얼만지 아세요? 연 17억입니다. 한 국가의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고작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이 들어가는 겁니다.”(*때문에 지원 경쟁률이 심하다. 나도 작년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시간강사료는 보통 시간당 3-4만원 수준이다. 그리고 번역료는 매절원고의 경우 지명도 있는 역자가 아니라면 3-4,000원선인 것으로 아는데, 원고지 10매 분량을 한 시간내에 번역하면 강사수준이 되겠다. 한데, 거기엔 강의준비시간이 고려되지 않은 데다가 시간강사가 하루에 8시간씩 강의하는 것도 아니므로 강사와 번역자의 수입에 대한 '도토리 키재기식' 비교는 공정하지 않다.)

-박 교수는 동·서양의 고전조차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우리 현실을 “텍스트가 없는 사회”라고 표현한다. 텍스트도 없는 상황이라면 문화의 교류나 확장,창조를 강조하는 최근의 담론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텍스트 없는 사회'가 또 주제파악 못하고 광분하는 것이 '콘텐츠'이다. 요즘은 관료들뿐만 아니라 대학의 일부 교수들도 '문화'와 '문화콘텐츠'를 혼동하는 듯하다. '콘텐츠'면 다 통하는 것! 해서, 내 의견은 번역지원 사업명을 '문화콘텐츠 번역지원사업' 쪽으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어쩌겠는가? '반역'도 입에 풀칠은 해가면서 해야지!) 


06.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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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문학과 번역, 그리고 민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02 17:10 
    격주간 <기획회의>(274호)에서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 꼭지를 읽었다. 인터뷰이는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밀턴과 칼라일 연구자이자 <서양 문명의 역사> 등 다수 번역서의 역자, 그리고 <번역은 반역이다>의 저자. 인터뷰의 타이틀은 '인문학, 지금부터 '새 역사'를 써야 한다'인데,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경철할 만한 대목들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우리의 경
 
 
2006-02-13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2-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박사 학위를 번역 작업을 통해서 수여받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기만 해도 참 좋으려만.

로쟈 2006-02-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모든 학문에 그런 풍토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인문학쪽은 좀 필요하지요. 그보다 먼저 '번역'에 대한 엄격한 심사/감시와 좋은 번역에 대한 공정한 사회적 대우가 우선되어야겠습니다.

2006-02-13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자는 번역'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도 부르더군요. 번역은 세상을 좀더 '평평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억지스런 얘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2006-02-18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말 자투리 시간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읽었다. 4/5쯤 읽었는데, 번역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진지하게 다룰 생각이다. 어쨌거나 저자의 과감하고 열성적인 문제제기가 반가웠고 다루어지고 있는 사안의 새삼스러움에 착잡했다. 번역 문제에 '감'이 없는 교수들이나 관료들께서 많이 읽어주었으면 싶다. 하지만, 젊은 인문학도들이 이 책을 읽는 건 말리고 싶다(우리의 '착잡한' 현실에 도전욕보다는 환멸감을 먼저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문득 번역 문제의 한 파트인 오역의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써둔 게 생각이 나 여기에 옮겨둔다. 재작년 5월에 쓴 것인데,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우연한 계기가 읽다가 눈에 띈 오역들을 지적하게 됐고, 거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인상적인’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자의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독자의 반응이었다.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일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듯하여 이 자리에서 '재탕'해둔다. 당시에도 적었지만,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에 대해서 (반)공개적으로 해명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제기했던 의문들에 대해 성의 있는 답변을 주신 역자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나의 의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은 (1)(공동번역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대해) 3년간에 걸친 단독번역이라는 것과 (2)(작품명 등의 혼동/혼란에 대해서) 편집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들이 포함돼 있다는 것, (3)(그럼에도) 모든 오역에 대한 책임은 역자에게 있다는 것, (4)(희박해 보이긴 하지만) 재판을 낼 경우, 오역들이 수정될 수 있도록 출판사측에 건의하겠다는 것, (5)(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해서도) 계속적인 지적을 바란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의 ‘기억’에 따른 것이다).

먼저, (1)에 대해서는 역자의 ‘고투’ 대해서 사의를 표한다. 아마도 눈치 빠르게 이 책의 판권을 입수한 출판사측에서(현재 국내 출판계에서 지젝은 그 ‘난해성’과 무관하게 ‘상종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책이 앞으로 번역/소개될 수 있다!) <삐딱하게 보기>의 역자를 번역의 적임자로 낙점했던 듯싶다. 소위 지젝 전문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건 자연스런 선택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게 2001년 하반기에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기도 하다(그건 ‘번역이 그다지 나쁘진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젝의 책으로선 비교적 쉽다는 ‘영화책’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일 뿐이고(해서 어떤 경우에도 지젝의 책이 촘스키의 책처럼 팔리거나 읽히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라크’에 대한 책이라 하더라도), 거의 ‘고공비행’ 수준의 이론적 담론을 제대로 포착해서 격추하기란, 즉 제대로 소화해서 번역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지젝을 읽는 즐거움은 그러한 난해한 이론/담론들의 ‘액츄얼리티’를 맛볼 수 있다는 데 있지만. 하여간에 비록 오역들을 지적하긴 했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라도 이 번역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르디외 전공자의 부르디외 번역이 상식 이하라거나(그래도 부르디외 연구서를 낸다!) 크리스테바 전문가의 크리스테바 번역이 기대 이하라는 것이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그래도 크리스테바 연구서를 낸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대충 ‘존경’받을 교수들이 굳이 번역이란 ‘고투’에 나선 데 대해서 비난만 할 수는 없다(물론 이런 경우 못 믿을 건 번역서들보다도 그 ‘놀라운’ 연구서들이지만).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공자’나 ‘전문가’란 타이틀의 ‘허명’에 대한 부수적인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그러한 오역들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속된/헛된 ‘분별’에 나서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저작권 보호법이 걸려 있기에, 한번 출간된 인문 번역서가 재번역/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상당히 무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면 다시 손써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이건 역자들로서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 고전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이브하게 말해서, 엉터리 번역서들이 난무해도 된다(나는 이 책들의 오역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거기에 들인 사회적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제대로 번역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 ‘이론서’들이 그런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지젝의 <향락의 전이> 국역본은 정말 그런 희박한 가능성을 붙잡았지만(그런 사례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도 들 수 있다) 내차버린 경우이다(역자도 번역만 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 ‘전문가’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둘째는 인문학 자체/전체를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기본은 말(로고스)에 대한 사랑(필로스)이며 존중이다. 그 유구한 언어적 전승 속에서 거장들의 내면적 고뇌와 사유의 높이가 언어에 의해, 혹은 언어 자체로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하지만, 오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이’는커녕, 짜증(‘고뇌’ 대신에)과 장벽(‘높이’ 대신에)만을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언어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따금 이런 염치없는 오역서들을 통해서 젊은 대학생들이 ‘인문학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경우 그들은 인문학을 포기하거나(“그 책 너무 어렵던데요. 제가 머리가 나쁜가봐요.”) 무시하게 된다(“인문학? 맨날 괜히 밥 먹고 알지도 못할 소리나 해대는 거 아닌가요?”). 서로 짝패인 이 포기/무시가 이들의 탓인가?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그리고 전의를 다지게 된다.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말로는 인문학을 한다는 인문학의 배덕자들에게…

다시 <히치콕>의 경우. 내가 앞에서 얘기한 것은 오역의 일반론이지 이 책이 오물의 범벅이라고 얘기하는 건 결코 아니다. 역자의 해명 이전에도 나는 이 책이 ‘읽을 만한’ 책의 범주에는 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책들에 비해서 특별히 오역이 많은 것은 아니란 점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번역본(‘러시아어본’이나 ‘영어본’)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류하자면, 그런 도움 없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고, 그런 도움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읽을 만한’ 번역이며,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이해에, 그리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번역이 ‘나쁜 번역’이다. 물론 나쁜 번역의 경우에도 반면교사로서, 오역의 교보재로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든, 아무리 ‘적임자’에다가 ‘경험자’라 하더라도 ‘영화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젝의 ‘영화책’을 누워서 떡 먹기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철학 전공자, 심지어 정신분석 전공자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작년 내한 강연 때의 번역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그 번역문들이 올 가을쯤에 어떤 모양새로 출간될지 나는 (벼르면서) 기다리고 있다(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물론 곧 쏟아져 나올 ‘지젝들’에 대해서도 나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요컨대, 지젝의 책을 번역하면서 일부 오역을 한다는 것은 역자 개인의 ‘역량’에서만 비롯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건, 현단계 우리 인문학 수준, 조금 좁혀서 인문서 번역 수준의 문제이고(지젝을 번역할 만한 지적 토양과 ‘언어’가 아직 우리에겐 잘 준비돼 있지 않다), 우리 출판계의 총체적인 번역 여건과 (출판)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 인문학계와 출판계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은 이미 ‘관행’이 되어 있으므로 길게 늘어놓을 것도 없고(북매거진 <텍스트>의 지적을 옮기자면, “(우리 학계는) 다른 지식인의 논문이나 외국 문헌을 베끼는 ‘표절’은 예사이고, 응당 책임져야 할 ‘번역’도 나 몰라라 하면서 숨겨둔 무공비급인양 ‘원전’을 활용한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힘써야 할 학회는 조폭처럼 치열하게 지역(나와바리)을 관리하고 소속원을 비판하면 떼거리로 몰려가 비판자를 공격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지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에 대해 침묵하는 ‘기묘한 공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런 부패가 소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번역자들을 ‘등쳐먹고’ 사는 출판계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을까?

<히치콕> 번역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책이 재판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3,000부를 찍었다고 할 때, 역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번역 인세(대박이 안 날 만한 책들은 다 인세이다)는 17,800원(도서정가)*0.07%(인세)*3,000(부수)=3,738,000원이다. 물론 이건 내 추측이고, 실제와는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실제로는 훨씬 적은 액수의 번역료를 받았다고 한다), 개정판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역자의 예상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크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대략 400만원 이하의 번역료를 보수로 받는 셈이다. 그러니까, 한 달 정도에 이 책의 번역을 해치울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수지’를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견적은 최소한 하루에 10시간씩 두 달 꼬박이다. 그것도 영화학과 근대철학,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예비학습’이 얼마간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물론 번역 중에라도 구할 수 있는 히치콕의 영화들은 다 구해서 보는 편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도록 해줄 것이다(물론 이 비용은 역자 부담이다). 그렇게, 두 달 동안을 이 책에 전념할 때 받을 수 있는 보수가 한 달에 200만원이 안된다(대개의 인문서 번역 형편이 그렇다). 당신이라면 이 ‘자원봉사’ 수준의 번역을 하겠는가?

 

 

 



따라서, 3년에 걸쳐 <히치콕>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역자의 고백을 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역자후기에 따르면, 이 번역은 “아내와 엄마로서, 선생이자 학생으로서 거의 분열적으로 살아가는 옮긴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과 아빠로서, 선생이자 연구생으로서의 분열적인 삶을 정상인양 살아온” 나는 5년 전에 맡은 번역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게으름’으로만 치자면 내가 한 수 더 위이지만, 거듭 말해서, 그건 ‘게으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건’의 문제이다. 아주 실제적으로 말해서, <히치콕> 같은 경우 적어도 6개월간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보장될 경우에나 번역에 전념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다(*물론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번역지원 사업을 벌이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1년간 지원총액이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에 머문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하긴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는 대표적인 우리말 오역서의 하나이다!).

가령,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박사연구자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공모하는바, 채택될 경우 매월 200만원씩 1년간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지원에 대한 의무는 등재학술지에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인문학계에서 제대로 된 <히치콕> 번역(400쪽)보다 더 많은 피와 땀을 요구하는 ‘논문’(30쪽)이 년간 과연 몇 편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그러니 (논문을 쓰는 대신에) 누가 (바보같이!) 번역을 하는가? 번역이나 하고 있는가? 이러한 여건 때문에 ‘악순환’이 생기는바, 번역에 대한 사회적 (상징계의!) 무관심과 ‘부적절한’ 보수 때문에 번역의 질이 떨어지고,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며(책을 사보질 않는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가 정당화되는 것이다(그래서 책을 많이 찍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번역자에게 제대로 돌아갈 몫이 없는 것이고. 해서 또 ‘저렴한’ 보수에 맞춘 때우기식 번역이 양산될 수밖에…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하나?

내 생각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여건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것이다(여건이 문제라고 했으니까).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아예 번역학과가 생기고, 번역가가 최고 유망직종이 되는 등)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지(그래서 번역자들이 다 외제차를 타고 다닐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아마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무관심을 딛고’ 여전히 고도(Godot)를 기다려 볼 수는 있으리라.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번역자들이 알아서(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듯이) ‘어려운 여건을 딛고’ 번역의 질을 좀 높이는 것이다(이런 걸 ‘살신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이로운’ 번역서들을 턱턱 내놓음으로써, 독자의 발길을 되돌림과 동시에 번역을 무시하던 이들의 코를 좀 납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전에 번역자 조합을 만든다는 전제하에서) ‘번역자 조합’의 조합원 결의를 통해서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다(나 또한 번역을 했고, 또 하고 있으므로 그 조합원의 자격을 갖고 있다). 번역자 인권과 제대로 된 보수를 보장받기 위해서. 번역자 시국선언과 양심선언이 뒤따르고, 한 번역자가 한강에 투신하는 등등…

어느 쪽이 더 리얼하고, 덜 리얼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두 가지가 상호 상승작용하는 것이다. 가령, 번역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얼마나 고투하고 있는지가 TV에 방영되고, 거기에 연이어 사회적 관심이 갑자기 증폭되면서 번역자들을 위한 성금(지원금)이 물밀듯이 기탁되고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기폭제가 번역자들의 ‘고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현단계 부실 번역의 책임을 사회적 여건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번역자들의 책임 또한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동료 번역자들의 노고에 경의와 동정을 표하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는 말끼리 서로 더 채찍질을 하는 것은 더 잘 달려보자는 뜻이지, 가긴 어딜 가냐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2)에 대해서. <히치콕>의 경우에 동일한 영화명이 다르게 번역된다든가 하는 실수는 역자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편집/교정 과정에서 다 체크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편집/교정자가 눈대중으로 책을 읽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여건’의 탓이 크다. 편집/교정자들이 극빈층의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그들의 ‘직업적’ 매저키스트 성향은 사회심리학적 분석대상이다). 그러니까, 그들로서는 두 눈 부릅뜨고 책을 볼 만한 여건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편집/교정자들에게도 다른 방도는 없어 보인다. 눈 빠지게 일하면서 빨리 그들만의 조합을 만드는 수밖에.

 

 

 



가령, <히치콕>의 46쪽에서 <히치콕의 스트레인저>로 출시돼 있다는 은 전부 <스트레인저>로 옮겨지고 있는 다른 대목들과는 달리 <열차 속의 이방인>으로 번역돼 있다(사실 이게 더 맘에 들지만). 이런 사례들 때문에, 나는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그건 알고보니 ‘분열적인’ 역자 한 명의 ‘오점’ 혹은 ‘얼룩’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역자가 이런 영화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번역과정에서는 그냥 원어로 놔두었었는데, 나중에 (자료조사 등을 한 다음) 알아서 처리해야 할 편집진에서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은 것. 그리고 다른 가능성은, 역자가 불우한 여건 속에서 정신없이 번역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옮긴 것을 편집진에서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것.

사실, 이런 사례는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잘된 번역에서라면, ‘즐거운’ 옥에 티에 불과하다), 번역이 꼬이게 되면 그에 대한 신뢰를 무섭게 잠식해가는 계기가 된다.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다(요컨대 역자나 교정자가 독자만큼도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물론, 편집/교정자들이 박봉에 ‘고투’하고 있다는 건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수’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건 책임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이다.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책, 완벽하다고 내가 자신할 수 없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것. 그게 ‘자존심’이다. 물론 이런 자존심을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것이 출판사의 사장과 편집장 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3), (4)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다. 안면도 없는 역자를 난데없이 난처하게 만들었으니까 한편으론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바라건대, 개정판을 찍었으면 하지만(그러자면 역설적이게도 많이 읽혀야 한다!), 많이 팔린다는 ‘지젝’이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결자해지,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한 ‘독해’는 계속될 것이다(*실제로 계속됐었다). 다만, 다른 사정들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이 (5)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물론 한두 장씩 읽으면서, 영화를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지 실감하고 있지만…



그리고 두번째로, 한 독자의 반응. 그것은 (1)(오역에 대한 지적들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는 것, (2) (하지만 번역을 기피하는 풍조 속에서) 자칫 ‘인신공격’적일 수도 있는 지나친 비판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박상익 교수도 이런 문제는 조용히/넌지시 처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충고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짤막하게 나의 의견을 밝혔지만, 보다 상세한 의견 개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번역/오역을 ‘응시’하는 나의 자리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1) 같은 번역자, 즉 동업자로서의 자리와 (2) 일반 독자로서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자리들에 따라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공식적인’ 명분에도 불구하고, 번역/오역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달라진다. 내가 분열적인가? 언젠가 밝혔지만, 나는 (별로 안 팔린 책이지만) 번역서를 낸 바 있고(러시아 소설이다), 또 현재 번역중인 책이 있으며(러시아 소설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여건도 좋아져야겠지만!) 얼마든지 다른 종류의 인문서 번역에도 참여할 예정이다(서너 권 정도 검토중에 있다). 또 이전에 번역 스터디에도 여러 번 참여한바 있으며(가다머와 리쾨르, 에코, 굿맨 등의 번역이었는데, 완역/출간되지는 않았다), 교정이나 잡스런 번역에도 적잖게 동원되었었다(바흐친, 로트만 등). 요컨대,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이 아니다. 해서, “(그렇게 잘났으면) 옆에서 비판만 하지 말고, 직접 나서보지 그러느냐”는 식의 간혹 ‘뒤로 듣는’ 비아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나는 뒷짐지고 옆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에크리>(라캉)와 <피네간의 경야>(조이스),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발생>(르네 톰) 등의 ‘숭고한’ 책들을 번역하는 일만 아니라면(그건 나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마치 박상륭의 <칠조어론>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처럼. 대신에 ‘교정’해 볼 생각은 있다. 그럴 만한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므로), 여건이 허락하는 한, 나는 어떤 번역에도 도전해볼 의사를 갖고 있다(번역이란 언어를 통한 존재의 전이라는 ‘사건’이다. 그러한 ‘전이’에, ‘사건’에 어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러한 ‘번역자’의 입장에서라면, 가급적 ‘동료’의 ‘실수’ 등에 대해서는 눈감아주는 것이 ‘의리’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유리하다. 동료 의사의 실수를 의사들이 눈감아주고, 동료 변호사의 비리를 변호사들이 눈감아주는 것처럼.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만한 일로 낯을 붉히는 건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으니까. 나도 ‘한국인’으로서 그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게 ‘번역자’가 아닌 ‘독자’의 자리로 오게 되면, 전혀 문제의 양상이 달라진다. 번역자는 같은 업종의 ‘공급자’로서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지만(간혹 불일치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의 나는 ‘소비자’로서 ‘공급자’인 번역자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물론 일치한다면 더 좋겠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 주고 받는 관계이다. 독자로서 내가 읽는 책은, 누구한테 기증 받은 책이 아니라, 내 돈 주고 산 책이다(이 책에 대한 과도한 지출 때문에 나는 더러 수모도 당한다!). 그리고 그 돈은 어디 가서 주워온 돈이 아니다(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라)!

때문에, 내 돈 주고 산 책이 엉터리라거나 불성실하다면 그건 관용의 윤리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건 ‘공급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종의 ‘사기’니까. 내가 지젝을 샀는데(나는 지젝을 좋아한다!), 뜯어 읽어보니까 지젝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수작’이 들어 있다면(그래서 ‘지젝’을 망쳐놓았다면) 관대한 당신은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넘어가는가? 당신이 비싼 돈을 주고 이브닝 드레스를 샀는데, 알고 보니까 남대문 시장에서도 파는 ‘짜가’였다면, 그런데 반품도 안된다면, 그래도 당신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넘어가는가? 있는 건 돈밖에 없으므로? 그냥 모르고 입고 다니는데, 그걸 굳이 ‘짜가’라고 옆에서 찔러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못된 친구’와는 차라리 절교할지언정 그걸 만들어 판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모르고 산 내가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는가?

해서 사정은 복잡한 듯하면서도 아주 단순하다. 물론 번역서의 경우, 최종적인 책임은 번역자(피고용인)가 아닌 출판업자(고용주)에게 있다. 하지만, 역자 후기 등에 ‘사장님’에 대한 감사가 곧잘 언급되더라도,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함께 역자의 이름이 박힌다. 그건, 적어도 책의 만듦새는 출판사에서 책임지지만, 내용만큼은 역자가 책임을 감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공급자(번역자)-소비자(독자) 간에는 일종의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고, 이 거래에는 아주 기본적인 윤리가 개입한다. 제값을 치르고, 제값의 내용(읽을 거리)을 공급받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서로에게 제값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면, 이건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자 ‘모욕’이다(당신은 그냥 대충 이 정도 수준에서 읽고 떨어져라? 나도 어려운 책이니까 그냥 구경이나 하고 말지 그래?). 오역에 대한 나의 지적/비판은 그런 기만/모욕에 대한 대응이고, 응전이다.

오역에 대한 그간의 지적이 지나치게 신랄해서 간혹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 독자의 반응 때문에 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의 발단이 ‘공격을 위한 공격’이 아니라 ‘방어적인 차원’의 공격이라는 점이며(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또 그런 부실한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다니, 당신 바보 아니냐?”는 식의 어조는 내가 받은 ‘모욕’(이렇게 번역해도 바보들이 뭘 알겠어?)과 금전적 손실(수입만을 따지자면, 나는 빈곤층에 속하는 시간강사이다. 소위 '화이트 프롤레타리아'이다)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그래도 소심한 편에 속한다는 점이다(이 생각을 하면 다시금 분노가 솟구친다. <킬 빌>을 다시 봐야겠다!). 고작 카페 한두 곳과 인터넷 서점 한 곳에 ‘의견’을 올리는 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 아닌가?

그로 인한 역효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역효과는 ‘인신공격’을 받은 번역자들이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성적으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즉 부실 번역들을 계속 양산해내는 것이다(게으른 자들에게 축복을!).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나의 지적/비판의 정당성을 더 확증해 줄 것이기 때문에(“욕먹을 만하군!”) 그들의 전략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거 같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 역효과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잘못된 역자를 만난 몇 권의 책들이 더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자존심을 회복해서 더 좋은 번역서로 ‘컴백’한다면, 그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며 이건 ‘역효과’가 아니라 ‘효과’이다.

나는 단지 (애서가로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책’에 대해서 근심할 따름이며, 그에 대해서만 말할 따름이다. 내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모든 오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함께 제대로 된 번역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혔다(그리고 그에 대한 반박 중 수용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용하기도 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번역자도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건 번역자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정상이다(독자의 입장에 서서 한번만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까). 번역자 자신이 그 책을 가장 깊이 있게 읽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충 둘러대고, 틀어막고, 얼버무리고, 살짝 빼고 한 내용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번역자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다면, 번역자로서는 수준 이하이고, 자격 미달이다(이런 번역자들에겐 ‘인신공격’도 부족하다).

거꾸로, 어느 정도의 수준과 자격을 갖춘 번역자에게서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성의’이다(‘여건’이란 건 이 ‘성의’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긍정문이 부정문으로 바뀐다거나 문맥상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이어진다거나 고유명사 표기를 헷갈리게 한다거나 우리말 문법에 맞지도 않는 문장을 쓴다거나(통사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하는 따위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번역자들로서는 능히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의 무능력이 아니라 고집스런 불성실과 아집, 그리고 부정직이다. 대충 얼버무리고, 황당한 걸 갖다붙이고, 자신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가는 태도 말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런 노력하지 않는 태도, 거만하고 방만한 태도이다. 독자가 무서운 줄 안다면,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충 번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도 이해가 안되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나쁜 번역서’들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그게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따라서, 한 독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부실한 번역서들에 대해서까지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라는 식으로 예의를 갖출 생각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똘레랑스(불간섭의 관용주의)야말로 지젝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는 태도이다(그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파이트클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오역의 실상과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그런 자극과 충격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나의 번역’은 개선될 수 있다. 창피하다거나, ‘인신공격’이라거나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참에 오역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확실히 밝혀두고자 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됐다. 결론은 독자에 대한 번역자의 예의란 것인데, 사실 거기에 덧붙여 ‘책에 대한 예의’ 또한 나로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여기선 더 부연하지 않겠다. 다만, “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실한 번역의 엉터리 책들은 도색잡지보다도 부도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고급 누드집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며, 그러해야 한다.



끝으로, 나쁜 번역서들만 판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기 위해서, (드물긴 하지만) 좋은 번역서들에 대한 옹호도 곁들인다. 내가 직접 읽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나 <니체-데리다, 데리다-니체>(책세상) 같은 건 좋은 번역서였다(후자는 내가 갖고 있던 영역본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역자들은 모두, ‘관행적으로’ 존경받는 교수들이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들에서도 약간 미심쩍은 곳(동의하지 않는 곳)이나 오타 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옥에 티에 불과하다. 해서, 나는 이들 번역자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있으며, 그들의 또 다른 번역서들까지도 주목하고 있다. 다른 번역서들에서도 그러한 역자들이 속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06.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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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2-13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역투성이 번역본들이 "짜증"과 "장벽"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종종 '창조적 오역'으로 재생산되는 경우도 있지요..^^ 크리스테바 책을 오역투성이로 번역한 크리스테바전문자의 크리스테바 연구서들도 아마..이런 '창조적 오역'에 의한 결과물일지도 모를 일...^^;;
넘 미워만 해주지는 말자고요..^^
그런데 로쟈님이 번역하신 책을 한번 읽어보고싶은 생각이 드는데 어떤 책인지 좀 알려주세요... 읽어보고 싶네요^^

瑚璉 2006-02-1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생각하는 건데 출판사에서 어떤 책을 출간할 때는 하다못해 단순한 오자 교정이라도 담당할 수 있는 작은 그룹을 운용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참가자에게는 인쇄본 1권 정도 증정.

비로그인 2006-02-1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해결책을 보니깐. 거의 자조적이고 시니컬한 느낌이 팍팍 오는 군요.

 


로쟈 2006-02-1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절판됐습니다. 새로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壺裏乾坤님/ 그것도 방안이겠습니다.
스메르쟈꼬프님/ '전의'도 읽으셔야 합니다.

paby 2006-02-16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단순히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문제가 아니라, 지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문제인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로쟈 2006-02-1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보다는 '과공비례'라는 게 제 소신입니다. 미심쩍은 대목에 대한 '이견'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자기견해를 밝힐 수도 있지만, (주관적으로) '분명한' 오역에 대해서는 그런 공손한 지적이 제가 보기엔 오히려 역겹습니다. 역자가 '제가 보기에는 이러이러한 뜻인 걸로 사료되옵니다'라고 번역하지 않은 인상...

외로운 발바닥 2006-03-0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 않은 글이었지만, 후딱 읽어버렸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번역과 오역에 대한 문제점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 글에 압축적으로 번역에 관한 제반 문제가 총 망라되어 있네요. 파이트클럽 사진 밑에서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부분 정말 제맘에도 듭니다. 퍼가고 싶은데 언제부터인가 퍼짐이 안되서 부득이하게 복사로 퍼갑니다.

로쟈 2006-03-0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의식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는 지난 1995년 성탄절에 세상을 뜬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것만으로도 그에 관하여 몇 마디 해야 할 의무감을 갖게 되지만, 며칠전 레비나스의 저작들에 관한 간단한 리뷰를 청탁받기도 한지라 두주 정도 레비나스에 관한 이야기들을 간헐적으로 늘어놓을 참이다. 이건 그 첫번째 이야기이다.

먼저, 지난해 말에 출간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5)은 레비나스로 가는 여정에 있어서 여러 모로 유익한 길잡이이다. 국내 레비나스 수용에 있어서 '중간결산'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저작인데, 모아놓은 논문들의 절반 정도는 학술지나 문예지 등에 발표된 형태로 미리 읽었기에 나로서(그리고 아마도 일반 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건 제1장 '레비나스, 그는 누구인가' 같은 총론격의 글이다. '네 문화의 철학자'란 이 글 제목의 인용문구도 거기서 얻어온 것이다. 그에 대해 몇 마디 하기 전에 먼저 간단한 레비나스 수용사. 이하의 인용쪽수는 모두 <타인의 얼굴>의 것이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히고 있지만 국내에 레비나스를 최초로 소개한 이는 '레비나스의 철학 - '다른 이'의 얼굴'(<문학과지성> 1974년 봄호)이란 글을 발표했던 손봉호 교수이다. 이 글은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성광문화사, 1978)에 재수록됐다고 하는데, 나는 레비나스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던 지난 94년쯤에 찾아서 읽었더랬다. 손봉호 교수의 바톤을 이어받은 이는 제자이기도 한 강영안 교수이다. 1989년경부터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강연과 논문 등으로 가장 왕성하게 레비나스 수용에 앞장 선 공로가 있다.

레비나스 저작 중 최초의 국역본인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이 또한 강영안 교수의 손을 거쳤다. 그리고는 그의 제자인 서동욱 교수가 그 바톤을 또 이어받게 되는데,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를 번역출간했을 뿐더러 그의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나 <일상의 모험>(민음사, 2005) 같은 저작은 레비나스적 영감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기도 하다.

세 사람은 모두 (후설 아카이브가 있는) 벨기에의 루뱅대학에서 수학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해서(김형효 교수도 루뱅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쳤다) 얼핏 보아도 끈끈한 학연을 이어가고 있다(또한 모두 칸트 전공자/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만하면 '루뱅 마피아'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이 '루뱅 마피아'가 국내 레비나스 연구를 주도하게 된 건 레비나스 연구가 "네덜란드 언어권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다음, 영어권과 독어권에 이어 마침내 프랑스에서 뒤늦게 진행된다"(13쪽)는 사정과 연관이 있다.

네덜란드와 가까운 벨기에의 루뱅대학에도 일찍부터 레비나스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인지라(레비나스는 생애의 50년간을 무명의 철학자로 지냈다) 루뱅 유학파들이 가장 먼저 그 수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국내 대학에서도 레비나스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이 나오고 있고, 젊은 연구자들의 논문들도 '상대적으로' 넘쳐나고 있으므로 한국의 '레비나스 텃밭'은 앞으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아직까지는 기대에 머문다. 일단은 기본이 되어야 할 레비나스 저작의 국내 번역본이 지극히 소략하기 때문이다(대담집을 포함해서 고작 4종이다). 게다가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면서 전공 논문들에서는 수없이 인용되는 <전체성과 무한>(1961)과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1974), 두 권의 철학적 주저가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니 일반 독자들에게 레비나스는 아직 '풍문'에 불과하며 '레비나스 텃밭'은 '그들만의 텃밭'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 같은 일급의 에세이를 좋은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적어도 일반 독자들이 '철학'에 대한 부담감을 다소간 지우면서 '레비나스의 지혜'를 맛보게 해주는 데 아직까지는 가장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물론 이런 책은 만만한 '에세이'인지라 <타인의 얼굴>의 부록으로 실린 방대한 2차문헌 서지에는 빠져 있다). 더불어 꼽자면,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에 실린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왜 '네 문화의 철학자'인가? 그의 태생에 대해서는 이미 적었지만, 그가 타계하고 나자 프랑스의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그를 '네 문화의 철학자'라 일컬었다는데,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히브리어 성경과 러시아 문학을 읽으면서 자랐고 독일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하였으며 1923년 스트라스부르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서 1930년 프랑스에 귀화한 뒤 줄곧 프랑스 철학과 함께 숨쉬고 생각해" 온 이가 바로 레비나스였기에, 그리고 "히브리어러시아어, 독일어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그 문화와 함께 숨을 쉬면서 작업한 철학자였기에" '네 문화의 철학자'라고 부른 것이고 그건 설득력 있는 호명이다. 레비나스의 전체상을 압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독일과 프랑스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만 레비나스를 독해하는 것은 그를 '두 문화의 철학자'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코우노)에서 태어나서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철학자이다(폴란드, 라트비아, 벨로루시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리투아니아는 발틱 3국 중 하나로 수도는 빌니우스이고, 카우나스는 두번째로 큰 도시라 한다). 리투아니아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기 이전이라 그의 모국어는 러시아어였으며, 여섯 살때부터 히브리어를 교습받고 그가 처음으로 읽은 책은 히브리어 성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성경(과 탈무드), 그리고 러시아문학이 그의 유년기를 채운 수프였던 것.

 

 

 

 

"자신의 철학적 관심이 히브리어 성경과 톨스토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슈킨을 읽으면서 형성되었다고 말하는 데서 보듯이 성경과 더불어 문학작품도 (그의)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준 바탕이 된다. 만일 철학이 '인간적인 것의 의미' 또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라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일은 칸트와 플라톤을 공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준비가 될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20쪽, 이 인용문은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에서 재인용된 것이다) '철학은 모두 셰익스피어에 관한 명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레비나스의 것이다.

그러니까 레비나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칸트나 하이데거에 대한 독해 못지 않게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셰익스피어에 대한 독해이다(최근에 '레비나스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논문들이 영어권에서는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레비나스의 철학을 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몇몇 시도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가 남긴 상당한 분량의 '탈무드 강의'에 근거하여 그의 철학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도스토예프스키 등 러시아문학과의 연관성도 전혀 조명되고 있지 않다(레비나스는 특히 자신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진 빚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것이 레비나스 '중간결산'이다. '네 문화의 철학자'로서 그의 크기가 제대로 밝혀지고 그의 철학이 풍족하게 음미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과제들을 남겨놓고 있는 셈...

06. 02. 10 

 

 

 

 

P.S. 자크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철학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이미 데리다 생전부터 충분히 주목되어온 바다. 레비나스 연구사에 대해 다루면서 강영안 교수가 던지는 코멘트. "프랑스어권에서는 가장 고전적인 연구로는 역시 데리다를 들 수 있다. <전체성과 무한>에 대해 데리다는 '폭력과 형이상학'이라는 장문의 논문을 써 <형이상학과 도덕평론>(저널)에 두 차례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1967년 데리다의 <글쓰기와 차연>에 약간 개정된 형태로 다시 실린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극복하려는 레비나스의 시도에 대해 철학을 하는 한 결코 존재론적 사유를 벗어날 수 없음을 데리다는 지적한다."(301쪽) '글쓰기와 차연'은 '글쓰기와 차이'의 오기이다. 참고로, 휴 실버만의 <데리다와 해체주의>(현대미학사, 1998)에서도 한 꼭지를 이 '폭력'의 문제를 둘러싼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싸움'에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데리다는 말년에 갈수록 초기 비판보다 훨씬 더 레비나스 철학에 가까이 다가간다. 레비나스 장례식 때 데리다가 했던 조사와 1주기 추모 강연을 담고 있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여 안녕>을 보면 데리다가 얼마나 가까이 레비나스에게 다가섰는지 드러난다.(...) 데리다의 후기 철학은 전적으로 레비나스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환대에 관하여>(1997)는 레비나스와 클로소프스키의 환대 개념을 데리다가 자기 식으로 수용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법의 힘>(1994)에서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라는 레비나스적 '정의'를 세속적인 '법'에 대립시키고 있다."(302쪽)

보다 자세한 논증이 필요한 주장이긴 하지만, 여하튼 데리다를 읽는 데에도 레비나스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거꾸로 레비나스를 읽는 데에도 데리다의 <레비나스여 안녕>은 기꺼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또한 신속히 번역되기를 기대한다(그러니 아직도 구만리이다. 우리는 레비나스에게 '아듀'를 건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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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2-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는군요...

로쟈 2006-02-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많은 과제들을 남겨놓고 있는 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2-1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사진을 보니 지젝이 화장실에서 바지를 입고 똥을 싸네요. 대략 난감.

yoonta 2006-02-1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와 차이에서의 차이를 차연의 오기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듯..데리다는 차이 la diffe'rence를 차이/차연 la diffe'rance로 표기함으로써 음성중심주의적 동일성이 해체되는 효과를 표현하기위해 저런 신조어를 만들었죠. 소리로는 구분되지는 않지만 문자로는 구분되는 문자의 효과를 보여주기위해서인걸로 알고있습니다. 이것의 한글표기를 차이로 할것이냐 차연으로 할것이냐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차이로 해야된다는 사람들은 음성적으로는 차이와 차연이 구분이 없다는 점에 착안하는 것이고 차연으로 하는 사람들은 철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으로 압니다...때문에 어느쪽이 옳은 표기냐라는 문제라기보다는 어디에 강조를 두느냐는 문제라고 봅니다..


로쟈 2006-02-1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에 책의 원제가 'L'ecriture et la difference'입니다. 'la diffe'rance'가 아니므로 '차연'이라 옮겨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yoonta 2006-02-12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고보니 제가 님 글을 약간 잘못봤네요..
저는 동문선에서 나온 번역본의 제목<글쓰기와 차이>의 제목해석을 '오기'라고 말씀하신것으로 봤는데 그게 아니네요..

님 글을 다시 읽어보니..강영안씨의 저서(301쪽)을 인용하면서..그 글속의 오기를 지적하시는 거군요..^^


로쟈 2006-02-12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데리다의 책명을 <글쓰기와 차연>으로 표기했는데, 그게 오기라는 얘기였습니다.

yoonta 2006-02-1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지금 다시 봤어요..지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