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와 소설의 지혜'란 주제로 읽을 대목은 쿤데라가 지난 85년 봄(그러니까 22년 전이군) 예루살렘상을 수상하면서 한 연설 '예루살렘 연설: 소설과 유럽'의 한 대목이다. 이 연설은 그의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책세상, 1990/2004)에 제 7부로 들어가 있다(나는 국역본을 여러 권 소장하고 있는데, 지금 곁에 있는 건 1994년판이다). 그 중에서도 주로 맨 마지막 문단에 초점을 맞출 예정인데, 그건 이 대목이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민음사, 1996)의 에피그라프(제사)로도 쓰였기 때문이다(이하 <우연성>으로 약칭).

확인해보니 <소설의 기술>은 현재 품절상태이고 로티의 <우연성>은 아예 목록에서도 빠져 있다. 불과 10년전에 나온 책이(1996년 12월에 초판이 나왔다) 그렇듯 완벽하게 '망각'된다는 사실은 유감스럽다(게다가 로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철학자였는데 말이다. 비록 그에 대한 관심은 지젝에 대한 관심으로 대체됐지만). 재판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당분간은 간간이 로티의 책들을 페이퍼에서 자주 언급할 예정이다. 

내가 읽고자 하는 대목은 <소설의 기술>의 176-7쪽에 나오며 <우연성>의 5쪽에서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우연성>에서는 출처를 <소설의 예술>로 적어놓았는데, 영역본의 원제 'The Art of the Novel'를 그렇게 옮긴 것이다. 이것이 부가적으로는 알려주는 바는 역자들이 이 책의 국역본을 참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루어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두 번역문이 좀 다르다.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지난 90년에 나온 'faber and faber'판인데 재작년에 새로 판이 나오면서 표지가 아래 이미지처럼 바뀌었다(나는 이전판이 더 맘에 든다). 그 영역본의 페이지로는 164-5쪽이다.

Cover of Kundera, Milan: The Art of the Novel

오랜만에 쿤데라의 소설론을 다시 읽으며 되새기게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우아하게 소설을 변호하며 또 얼마나 곡진하게 소설의 지혜를 설파하고 있는가이다. 그의 소설들이 '에세이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런 갈래는 그는 최강의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흔히 쿤데라와 자주 비교되는 하루키를 내가 안 읽는 것은 어쩌면 그의 소설론을 접해보지 못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설가의 재즈론이 아니라 소설론을 읽고 싶다)...

각설하고, 진도를 나가도록 한다. <우연성>에는 약간 발췌돼 있는 이 문단을 <소설의 기술>을 중심으로 인용하도록 하겠다.

아젤라스트들,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 키취, 이 셋은 신의 웃음의 메아리로 탄생되었고 어느 누구도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면서도 모두가 이해될 수 있는 매력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 줄 알았던 예술에 대한, 한 몸에 머리가 셋 달린 단 하나의 적인 것입니다.(176쪽)

이 첫 대목에서 쿤데라가 말하는 예술은 물론 소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는 그 예술(=소설)의 적을 지목하고 있는데, 이 적은 하나이다. 단 하나의 몸통에 머리가 셋이다. 그리고 그 머리들이 '아젤라스트들'과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과 '키치(키취)'이다. '아젤라스트'에 대한 설명은 조금 앞부분에 나오는데, 프랑수아 라블레의 신조어로서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웃지 않는 사람,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쿤데라의 설명이 재미있다.

소설가와 아젤라스트 사이에 평화란 불가능합니다. 한번도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아젤라스트들은 진리란 명확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확신하며, 자신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개인이 되는 것은 바로 진리의 명증성을 상실함으로써이고 타인들의 일치된 동의를 잃게 됨으로써인 것입니다. 소설이란 개인들의 상상적인 낙원입니다."(171쪽)

여기서 중요한 건 (남과 같지 않은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쿤데라의 정의이며, 소설이란 그러한 개인들의 낙원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맨앞의 인용문에서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이란 건 자기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떠들어대는 걸 가리키겠다. 그리고 '키치' 역시 개성의 상실에 대한 증좌이겠고(키치를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라고 변호하는 건 쿤데라라면 기겁할 일이겠다). 이 모두가 '웃지 않는 자' 아젤라스트와 가족적인 관계에 놓인다. 그들은 한 통속인 것. 이 첫대목에 대한 <우연성>의 번역은 이렇다:

아젤라스트들과, 받아들인 아이디어들에 대해 생각이 없는 자들과, 천박한 자들은 한결같고도 똑같이 신의 웃음의 메아리로 태어난 예술의 적이다. 바꿔 말해서 어느 누구도 진리를 소유하지 않으며, 누구든지 이해되어야 할 권리를 가진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였던 예술에 대한, 머리가 셋이나 달린 적이다.

'받아들인 아이디어들에 대한 생각이 없는 자들'과 '천박한 자들'은 각각 'the unthought of received ideas'와 'kitsch'를 인격화한 번역이다. 그리고 다시 반복하자면, 여기서 예술은 소설(예술)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어떤 '상상적 공간'이다.

이 상상적 공간은 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한, 유럽의 이미지, 혹은 최소한 유럽에 대한 우리가 품고 있는 꿈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이 꿈은 숱하게 배반당해 왔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를 연대감으로 묵어 우리의 조그만 대륙을 멀리 넘어설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이기도 합니다.(<소설의 기술>)

관용으로 이루어진 그 상상의 세계는 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하였으며, 그것은 바로 유럽의 이미지이다. 혹은, 그것은 적어도 유럽의 꿈이다. 몇 번이고 우리를 배반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유럽 대륙보다 훨씬더 멀리 뻗치는 우애 속에 우리를 통합시키기에 충분히 강한, 하나의 꿈이다.(<우연성>) 

 

 

 

 

정리하자면, 소설은 (1)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하였으며 (2)유럽의 이미지 자체이거나 최소한 유럽의 꿈, 유럽에 대한 우리의 꿈이다. 그리고 그것은 (3)유럽을 하나로 묶어준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용어를 빌자면, 쿤데라는 유럽을 소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라고도 보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 유럽'이란 표상은 '근대 소설'의 발생과 불가분적이다. 그리고 하나 더 보태자면 (4)소설은 개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소설이라는 상상적 세계와 유럽이라는 현실적 세계)가 허약하며 소멸할 수도 있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평선 너머로는 우리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아젤라스트들의 군대가 보입니다. 선전포고 되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인 전쟁의 바로 이 시기에, 그리고 그토록 극적이고 잔혹한 운명의 이 도시에서 저는 소설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다시 확인되는 바이지만, 이 연설의 제목 '소설과 유럽'이 가리키는 것은 '소설=유럽'이라는 것이다(그러니까 그에게서 '동아시아 소설'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의 대전제는 소설이 근대 유럽의 발명품이라는 점이니까). 그리고 이 둘이면서 하나인 세계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로 특징지어진다(쿤데라가 로티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고). 더불어, 이 세계의 적은 '웃지 않는 자들'의 세계이다. 이것이 쿤데라가 예루살렘이란 문제적 공간/도시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그리하여 결론.

제가 보기에 오늘날 유럽 문화가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 즉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독창적 사고와 침해할 수 없는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안팎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유럽 정신의 이 소중한 진수는 소설의 역사 속에, 소설의 지혜 속에 마치 금고처럼 보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기 때문입니다.(<소설의 기술>, 강조는 나의 것)

유럽의 문화가 오늘날 위협을 받고 있으며,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유럽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에 대한 존중 그리고 불가침의 사적인 삶에 대한 개인의 권리 존중 - 에 대한 위협이라고 볼 때, 유럽적 정신의 소중한 본질은 소설의 역사 속에 있는 보석 상자, 즉 소설의 지혜 속에 안전하게 보관중이라고 나는 믿는다.(<우연성>)

 

 

 

 

이 연설에서 오늘날의 시점은 물론 1985년이다. 바로 그 전해인 1984년에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했으며(예루살렘상 수상 이후 쿤데라는 한동안 노벨문학상의 단골 후보였다), 이어서 소설로만 치자면 <불멸>(1990), <느림>(1993), <정체성>(1998), <향수>(2005)를 차례로 발표한다. 알다시피 이 작품들은 곧바로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었다.

그리고 소설론/에세이집으로는 <소설의 기술>(1985),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엉뚱한 제목으로 번역된) <배반당한 유언>(1992), <커튼>(2005) 등이 있다. 이전에 한번 언급한 대로 이 <커튼>이 국내에는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고 있다(독어본은 바로 나왔으며 영역본은 올해 나오는 걸로 예정돼 있다). 비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넘어서는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커튼>의 소개가 지체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럽다.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소개/번역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서이다. 

07. 01. 27 - 30.

P.S. 쿤데라는 서문에서 이 연설의 자초지종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1985년 봄, 나는 예루살렘 상을 받았다. 도미니카 인이며 예루살렘 대학의 교수인 마르셀 뒤부아 신부는 영어로 씌어진 치사를 심한 프랑스어 악센트로 읽었다. 나의 수상연설이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즉 소설과 유럽에 대한 내 성찰의 마침표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프랑스어로 된 연설문을 심한 체코어 악센트로 읽었다. 보다 유럽적이고 보다 따뜻하고 보다 정감어린 분위기에서라면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11쪽)

맨마지막 문장이 좀 튀지 않나? 분명 시상식장에서 쿤데라는 그 연설문을 읽었던 것이니 마지막 문장의 함축은 번역 대로라면 "덜 유럽적이고 덜 따뜻하고 덜 정감어린 분위기"였다는 것이 되겠다. 설사 사실이 그랬더라도 그렇게 적어놓는 건 예의가 아닐 뿐더러 서문에 그렇게 적혀 있는 책도 나는 보지 못했다. 영역본에서 이 문장은 "I could have done it in no setting more throughly European, more cordial or dear to me."라고 돼 있다. 내가 읽기에는 "나는 그보다 더 유럽적이고 더 따뜻하고 더 정감어린 분위기에서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이다. 적어도 그게 '분위기'에도 더 맞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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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의 최신 화제작 <아포칼립토>(2006)를 봤다. 기독교의 기원이자 '유대문명 잔혹사'라 할 만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 이어서 '마야문명 잔혹사'를 다룬 <아포칼립토>는 살육의 피로 흥건하다. 마야의 희생제의에서 살아있는 제물의 심장을 꺼내고 목을 치는 장면 등은 심약한 관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하다(바타이유라면 흥분했을 듯하지만). 특이한 건 고대 히브리어, 아람어 등이 사용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마찬가지로 <아포칼립토> 또한 대사는 마야어로 처리되고 있다는 점(비록 아카데미상 후보에 들지 못했지만 두 영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쪽으로 분류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멜 깁슨의 고집과 야심이 읽힌다(그는 각본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모든 비극의 원인을 문명(과 종족) 내부에서 찾고 있다는 점. 멜 깁슨의 철학, 혹은 인류학인가?

영화 자체는 호오가 갈리고 있는데,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들이 이 영화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불만스러워한다는 기사들도 눈에 띈다. 야생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화면이 그런 약점을 카바해줄 수 있을까. 알라디너라면 마야문명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어볼 생각을 하는 것으로 영화감상을 대신해도 무방하겠다. 아래는 이 영화의 스펙터클에 담겨있는 은근한 '백인우월주의'를 의심하는 리뷰기사이다(영화잡지들의 리뷰기사는 내주판들에 실릴 듯하다). 

경향신문(07. 01. 25)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 백인우월주의 의심하다

미국의 생리학자이자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문명의 붕괴’(2004)에서 마야문명의 붕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문화적으로 발달한 창의적인 사회도 붕괴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마야에서 얻을 수 있다는 그는 문명이 붕괴되는 요인을 크게 5가지로 정리하고 마야문명은 이 중 4가지를 충족시킨다고 지적했다. 삼림을 해친 데 따른 ‘환경파괴’, 장기간 지속된 가뭄이라는 ‘기후변화’, 부족간 분쟁이 이어진 ‘적대적 이웃’, 지배세력이 경쟁적으로 전쟁에 매달리고 기념물 건립에만 몰두한 데 따른 ‘사회 구성원의 반응’이 그것이다. ‘우호적인 교역상대의 지원이 줄거나 중단된 경우’만 제외하고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겐 낭만적인 관광지로만 인식돼온 수백년 전 마야문명에 대한 분석이지만, 4가지 모두 옛날이야기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자원의 부족-삼림(환경) 파괴-이로 인한 가뭄(기상이변)-이에 대한 일시적 해결책인 전쟁(분쟁) 빈발의 악순환으로 마야문명의 붕괴 과정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걱정은 21세기 인류문명의 미래를 향하고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로 논란의 칼끝에 섰던 배우출신 감독 멜 깁슨은 마야문명의 붕괴 직전을 배경으로 한 신작 ‘아포칼립토’로 다시 한번 첨예한 논쟁을 촉발시킨다. 인류 역사상 야생과 문명이 가장 강렬하게 충돌했던 곳 중 한군데로 관객을 이끈 영화는 지나칠 만큼 사실적으로 당대의 야만을 재현한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벽화와 문헌 등을 통해 재구성한 마야문명의 잔혹사는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저서 ‘살육의 문명’(2002)에 따르면(*<살육과 문명>이다) 당시 이 지역 지배세력들은 “포로들을 제단 위 돌에 눕히고 돌칼로 가슴을 갈라 고동치는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친 다음 시신을 계단 아래로 걷어찼다.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살자들은 포로들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얼굴 가죽을 벗겼다.” ‘아포칼립토’는 마야문명 지배세력의 이같은 제사 장면을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이어 사지에서 겨우 빠져나온 주인공이 목이 잘려나간 시체들의 밭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에 이르면, 아무리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하더라도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가 이래도 되는지 싶을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이와 비슷한 ‘시체들의 밭’을 현대의 내전 소재 영화들에서 종종 본 적이 있다. 냉전시대 캄보디아 내전을 그린 ‘킬링 필드’(1984)부터 보스니아 내전이 배경인 오락영화 ‘에너미 라인스’(2001), 최근 르완다 내전을 다룬 ‘호텔 르완다’(2006) 등 인종(사상)을 청소하며 자행된 무차별 학살이 이런 참혹한 광경을 낳았고 또 영화에 재현됐다. 가장 야만적인 사태는 한 사회 내의 ‘적대적 이웃’에서 비롯되며, 이를 고발 혹은 상품화하려는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이전에 내부로부터 붕괴된다”는 미국 역사학자 윌 듀런트의 말로 운을 떼는 영화 ‘아포칼립토’는 그런 점에서 화면상 잔혹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듯 보인다(*듀란트의 <역사의 교훈>(범우사, 1989)은 품절됐다). 논쟁은 여기서부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스페인의 아스텍·마야 문명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서구·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미국 언론과 평자들 사이에서 뜨겁게 일고 있는 것이다.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데이는 저서 ‘정복의 법칙’(2006)을 통해 피지배인들의 이질적인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지배를 합리화하는 서구 침략의 역사를 비판한다. 중남미를 지배한 스페인 역시 현지인들의 제사 문화를 들먹이며 ‘야만을 문명화한다’고 주장했지만 데이비드 데이는 서구인들의 야만성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백인들이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수순을 밟아가는지를 살폈다.



‘아포칼립토’는 극중 제사를 관장하는 지배세력이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내세우며 다른 부족민을 권력 유지의 희생양으로 삼는 실상을 고발한다. 이것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침략자·독재자의 정복 논리이기도 하다는 풍자인지, 아니면 마야문명만을 대상으로 ‘미개인들의 말세’를 그린 것인지에 대해 영화는 똑부러진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극 종반부 스페인 에르난 코르테스의 무적함대로 보이는 백인들이 부자연스러우리만치 멋진 자세로 상륙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멜 깁슨 감독에 대한 의심은 짙어진다.

아름답고 양심 어린 영화로 국내에서 과대평가된 롤랑 조페의 영화들-‘킬링 필드’(1984), ‘미션’(1986), ‘시티오브조이’(1992)-처럼, 야생과 문명의 충돌을 다룬 영화들을 보는 관객은 소수의 백인이 의로운 일을 이끌고 다수 현지 유색인종들은 계몽과 개화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인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꼼꼼히 뜯어보며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다. 마야문명 속 선량한 부족의 한 청년이 호전적인 종족의 살육에 맞서 쫓고 쫓기며 가족을 지키는 이야기인 ‘아포칼립토’는 2월1일 개봉한다.(송형국 기자) 

07. 01. 27.

 

 

 

 

P.S. 찾아보니 국내 출간돼 있는 마야문명 관련서들이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개 품절된 책들이다. 가장 두꺼운 책은 존 핸더슨의 <마야문명>(기린원, 1999)이지만 이 또한 품절 상태다. 나로선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나 참조해봐야 할 듯하다.

P.S.2. 젊은 세대들에게 '잔혹사'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해줄 영화는 유하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이겠다. 잔혹사라고 해봐야 몇 대 때리고 맞는 정도이지만 젊은 치기에는 '잔혹사'라 불러봄 직하다(물론 영화의 배경은 70년대 말이니까 요즘의 젊은 관객들에겐 <친구>와 마찬가지로 '사극'이라 할 만하다).

점잖은 세대인 내게 '잔혹사'를 각인시켜준 영화는 기억에 '이조 여인 잔혹사'란 부제를 달았던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1983)이다. "양가의 규수이나 집안이 가난한 길례는 세도가인 김진사댁의 망자와 혼례하여 청상과부 노릇을 하는데, 한생에게 겁간을 당하고 그것이 발각되나 시아버지의 관용으로 접포 표식을 달고 도망하게 된다. 길례는 채진사댁 머슴 윤보를 처음 만나 종이 된다. 하지만 이후 윤보는 자신의 가문이 복권된 것을 알고 길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고, 길례는 윤부자의 며느리가 된다. 그러나 아이가 없어 윤보는 첩을 들이는데 결국 윤보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길례에게 씨내림을 강요한다. 길례는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 은장도를 받은 길례는 목을 매고 자살을 한다."는 게 줄거리이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느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던 이 영화는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였던 원미경의 청순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곧 그녀는 <변강쇠>(1986)에서 농염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여인들의 잔혹사'로 관통하기는 군부정권 치하였던 지난 80년대 한국영화의 책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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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7-01-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3번쯤 죽었다 깨도 못 볼 영화입니다. ^^;;
극장에서 예고편만 봐도 절래절래 고개가 돌아가더군요.

로쟈 2007-01-2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고편에 아마 다 들어가 있었을 듯한데요.^^

프레이야 2007-01-2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칼립토, 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1-27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형스크린으로 보신다면 심장은 집에 두고 가시길...

로쟈 2007-01-2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모호하지만 '면죄부'까지는 아닌 듯합니다.^^ 9.11 문제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이기 때문에요. 이라크나 빈 라덴은 그냥 미국 자체이 내적 분열을 외부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양날의 칼이란 생각이 듭니다...

sommer 2007-01-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의 구절을 빌려서 표현한 것처럼, 문명과 문명의 위상학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 속의 야만 사이의 관계로 더 나아가 문명의 붕괴 혹은 파국을 '지구제국'으로 확장시켜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역사 이후'의 관점에서 멜 깁슨의 영화는 역사 자체에 대한 우화로 읽히는 게 아닐까요?

sommer 2007-01-2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멜 깁슨이 분했던 '매드 맥스'까지 소급/퇴행해 갈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7-01-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멜 깁슨이 상상 이상의 야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고요. 뭔가 메시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 영화를 기대해봐야죠...

소경 2007-02-03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일보와 비슷한 기사가 수록 되었군요. 참모님 방 청소하나 그부분 슬쩍 보았기는 했는데 고고학을 계속 전공하려는 입장에서 그러한 '우월주의'가 왠지 그렇게 낯설게만은 느껴지지 않더군요. 허나 분명한건 요새 읽고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이 소개하는 벤야민의 견해가 오히려 '진리'처럼 느껴지더군요. 자세한 내용을 아직 이해 못하였지만 피지배 계급 입장으로의 역사의 복원이.
(잘 읽고 갑니다. 요새 몰래 제 작업장에서 몰래 간부 컴퓨텅에서 옮겨 잘 읽고 있습니다. 다만 사진은 여건상 보질 못하지.)

로쟈 2007-02-0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군대 문서작성도 다 컴퓨터로 하겠지요? 오래전에 4벌식 타자치던 기억이 새롭군요...
 

알라딘의 서재를 블로그로 쓰게 되면서, 거기에 서재의 꼴이 좀 알려지게 되면서 이런저런 불편한 의견들도 직간접적으로 전해듣게 된다.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이 '책 선전'이거나 책읽기에 관한 '공치사'인지라 "돈을 얼마나 받길래 그렇게 열성이냐?"는 핀잔에서 "꽤나 잘난 체/아는 체한다"라는 비아냥까지가 그 의견들의 스펙트럼이다. 게다가 둘러보면 알라딘에서조차도 이런 일에 '극성'인 이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그런 와중에 최근에 몇 분이 또 활동을 그만 두셨고). 조만간 1000명에 이를 것 같은 즐찾에도 불구하고 자주 회의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이번에 페이퍼의 달인 1위에 며칠 올라 있었는데 내가 갖게 되는 느낌은 부듯함이 아니라 배신감이다.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는구나!).

책읽는 걸 좋아하고 그게 또 밥벌이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그와 관련한 수다들을 늘어놓는다. 거기에 이왕이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더 나아가 인문학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대로의 '사명'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실효적인가는 늘 의문이며 결국엔 자기 알리바이에 불과한 게 아닐까라는 의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발을 빼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게 아닌가도 싶고('보이지 않는 조직'의 압력도 느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도서관련 정보를 주로 싣고 있기에 종종 드나드는 '북데일리'에서 한 기자의 고백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본 것들이다.

북데일리(07. 01. 26) 책 기사=책 광고? 황당한 공식 이제 그만!

책뉴스 사이트 북데일리에서 진행하고 있는 ‘책 읽는 사람이 리더다’ 시리즈는 사회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독자에게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추천하게 하는 독서권장 캠페인이다. 올바른 독서문화 정착과 책 읽는 사회 조성에 이바지하고자 포털사이트 다음과 문화일보가 뜻을 모았다.

얼마 전, 모 인사에게 캠페인 참여를 부탁했다가 다소 황당한 답변을 받았다. “책을 추천하는 일이 해당 도서를 광고하는 일로 비춰질까 염려스럽다”는 것이다. 책을 골라주는 일이 광고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령 광고이면 어떤가. 좋은 책 많이 읽도록 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순수한 의도로 진행되는 책 운동에 ‘돈의 논리’를 대입하는 사고가 못내 안타깝고 씁쓸했다. 이런 시각은 비단 그 한사람 뿐이 아니다. “홍보용 기사다.” “책 선전이네.” 기사 덧글엔 종종 이처럼 삐딱한 의견이 올라온다. 대체 언제부터 책을 ‘소개’하는 기사가 ‘홍보’ 글로 둔갑됐는지. 이는 포털사의 뉴스 에디팅 시각 역시 마찬가지다. "기사는 좋은데... 책 홍보를 하는 거 같아서..."라며 책기사를 섣불리 전면에 내세우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나 TV드라마를 보자.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가. 네티즌의 덧글 또한 얼마나 홍수를 이루는가. 하지만 기사를 두고 광고라고 의심하는 눈초리는 거의 없다. 왜 이같이 상반된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여기엔 여러 요인이 있다. 먼저 영상매체에 익숙한 대중들은 봇물처럼 쏟아지는 관련기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반면 책을 읽지 않는 이들은 가뭄에 콩나듯 나오는 책 기사가 낯설다. 또한 책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탓도 있다. 책은 양서여야하고, 계몽적이어야 한다는. 좋은 책이 아니면 절대 홍보하면 안된다는.

그러나 생각해보자. 요즘 악서가 얼마나 있는가. 과거와 달리, 엄청난 정보의 시대에 수도없이 쏟아져나오는 책을 두고 양서와 악서를 구분하는 일은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대개의 책들은 나름대로 정보나, 엔터테인먼트로서 가치가 있다. 책은 이미 무거움을 털어버렸다. 제발 읽지도 않는 사람이 책에 대해 엉뚱한 생각을 가지 말자.

이 모든 것은 책을 멀리하고 책에 무관심한 요즘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에 대해 논하는 장은 널려있다. 하지만 책에 관한 토론 장은 턱없이 부족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책 기사 = 책 홍보’라는 공식은 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돈과 거래할 때만 가능한하다는 어이없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저 책을 이야기 하는게 즐겁고, 책이 좋아서 글을 쓰는 사람은 여전히 적지않다.

살아가면서 내 인생을 밝혀준 책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함께 읽게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뜻 깊은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수다처럼, 지천에 널리고, 반갑고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바램일까. 기사에 대한 덧글이 해당 책에 대한 감상과 평가로 ‘치환’되는 그 날까지, 필자는 ‘책 선전’을 멈추지 않을 셈이다.(고아라 기자) 

07. 01. 26.

P.S. 기자의 말을 다시 반복하자면 "살아가면서 내 인생을 밝혀준 책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함께 읽게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뜻 깊은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수다처럼, 지천에 널리고, 반갑고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바램일까." 푸념과 결의는 그렇게 한 통속이 되어 나를 결박해놓는다. 잠시 딴생각을 했다. 마저 노를 저어야지.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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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1-2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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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eat it for me ~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I know 허기로 지친 아픈 니 배에
라면봉지 속 안에 니가 있단 걸 알기에
I know 거짓된 수많은 너구뤼~
너만 먹고 버텨오던 여린 나에게

너 매워서 그가 떠났던 날
널 위로했던 밥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저 하늘에 맹세해 널 먹어줄게 Shin Noodle~

오랜 시간을 냄비에서 숨죽이며 나는 끓어왔어
이젠 널 위해서 먹혀질 준비가 돼 있는 내게로오오~

이젠 그릇 놓고 넌 날 먹으면 돼
너의 냄비뚜껑이 뛸 수 있게
그저 넌 아무말 없이 기다렸단듯이
내 면을 잡고 먹어줘 그가 보란듯이 웃어줘
넌 날 먹으면 돼 라면을 먹고 편히 쉴 수 있게
가끔 또 먹고 싶을 땐 내게 말해, 신.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I know 우동에 길들여진 니 맛에
맑은 국물 속 안에 그(다시마)가 있단 걸 알기에
I know 지키지 못했던 promise
영원할거라 믿었던 국물 맛에게...

널 울리고 그가 떠났던 날
널 위로했던 밥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저 하늘에 맹세해
that I boil and I eat for you Shin Noodle~

오랜 시간을 냄비에서 숨죽이며 나는 끓어왔어
이젠 널 위해서 소화될 준비가 돼 있는 내게로~

이젠 그릇 놓고 넌 날 먹으면 돼
너의 냄비뚜껑이 뛸 수 있게
그저 넌 아무말 없이 기다렸단듯이
내 면을 잡고 먹어줘 그가 보란듯이 웃어줘
넌 날 먹으면 돼 라면을 먹고 편히 쉴 수 있게
가끔 또 먹고 싶을 땐 내게 말해, 신.라.면

니 국물이 마를 때까지 이 자릴 난 지킬게
밥을 말을 수 있게 신 라라라라-
니 국물이 마를 때까지 이 자릴 난 지킬게
밥을 말을 수 있게 .... 국물없인 못 먹니? 에휴 바보~~

Rap)

Uh! Uh! 냄비뚜껑이 뛸 수 있게!
내 면을 잡고 먹어줘, 웃어줘
라면을 먹고 편히 쉴 수 있게
내게 말해 신.라.면


기인 2007-01-2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노력과 그 실효성을 저는 느끼고, 도움 많이 받습니다. :)
로쟈님 마저 떠나신다면.. ㅜㅠ 로쟈님 만세! ㅎㅎ

마냐 2007-01-2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소심하다보니...*^^* '책 선전'을 한때 나름 열씨미 하다가...태업중인 관계로 제가 님같이 훌륭한 분을 배신때린 넘들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슴다.ㅋㅋ 로쟈님이 최근 이런저런 미약한 회의를 갖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엄...그건 요즘 알라디너 돌림병이던가요) 팬들의 기대는 멈추지 않슴다. 님도 계속 노 저으셔야 하구요. 보이지 않는 마수에 걸린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 않으셔도 될듯 함다. 님은 이미 '사명'을 완수하셔야 할 처지라니까요.이럇.

짱꿀라 2007-01-27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힘내세요. 흑색선전에 현혹되지 마시고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님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또한 표현을 하지는 못하지만, 너무나 감사한 일들이 많이 있답니다. 알라딘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활동을 그만 두게 하려는 그런 사악한 놈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개의치 마시고 계속 해주셨으면 합니다. 화이팅!!!

읽는기계 2007-01-2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알라디너의 욕망을 양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홧팅!!!

로쟈 2007-01-2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아빠, 힘내세요!' 분위기네요.^^; 그렇게들 보채지 않으셔도 노는 '열씨미' 젓고 있습니다. 어여, 노를 저어야지, 로쟈!..

마노아 2007-01-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부담이 우리의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지만 포기할 수 없죠. ^^ 다 함께 화이팅입니다. ^^

마늘빵 2007-01-27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책선전(?)으로 많은 펌뿌질을 하고 있는건 사실이나 매우 도움이 많이 됩니다. 뭐라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못마땅한 것이지만,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그만두면 안돼요. 걔네는 도움이 안될지 몰라도 저는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홧팅. 저는 비록 1000명중 한명이지만. ^^

나비80 2007-01-27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담배를 끊죠. 로쟈는 못 끊습니다.

책속에 책 2007-01-2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지인이 "도대체 무슨 책을 골라 읽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주변 분들도 동조하는 분위기. 우리 나라의 책 안 읽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바로 그런 문제 때문에 쉽게 책에 다가서지 못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그런 점에선 지금의 책 기사도 심히 부족해요...
저야 로쟈님께 늘 많은 도움 받고 있는데 말이요^^

네모선장 2007-01-2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님을 자주 찾는 손님입니다
그냥 제 사견은 특별히 대중매체에 응하여 인터뷰하지 않으시고 계속 이곳에서 이렇게 글을 꾸준히 쓰시면 여러해가 지나면 그 진정성을 대다수 인정하게되고 더 많은 책벌레,책소개자들이 생겨날 것 같아요 ^^ 아자 화이팅입니다. 전 고딩들을 가르치는 수학 교사입니다^^

수유 2007-01-2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회에 얼음집으로 이사오3. =3 =3 =3

허리우스 2007-01-27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댓글을 달아야할 것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로쟈님으로부터 엄청난 정보를 얻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려야 할 것같아서. 힘내십시요. 홧팅. 저도 로쟈님의 길을 따르겠나이다. ㅡㅡ;;;;;;;;;;

로쟈 2007-01-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동병상련의 기사가 떴길래 잠시 푸념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심려'를 끼쳐드린 건가요? 즐찾 1000명은 너무 약소하고 하루 방문객 1000명 정도 되면 은퇴를 고려해보겠습니다.^^

stella.K 2007-01-27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수다처럼, 지천에 널리고, 반갑고 익숙하게'라...그럼 좋겠군요. 저는 리뷰 쓸 때 하도 똥폼 잡고 써서 그런가 별로 사람들이 안 와 봅디다. 그래서 요즘처럼 리뷰 쓰기 힘든 때도 없구요, 용기도 의욕도 나질 않지요. 책에 대해 아무리 얘기해도 혼자 떠드는 것 같아서 말이죠. 책에 대한 수다, 저에겐 좀 요원해 보이네요. 저도 조만간 여길 뜰까 생각중이었는데, 저 사진 보고...좀 더 생각해 보죠.^^

로쟈 2007-01-2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아무래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힘을 좀 얻게 되죠. 뻘짓한다는 기분도 덜 들고(그게 독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스텔라님도 기운 내시고, 몇 달만 더 노를 저어봅시다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1-2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에 들러, 즐겨보는 사람으로서,
로쟈님의 '책선전'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로쟈 2007-01-2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옵니다. 게다가 오늘도 '책선전'을 멈추지 않고 있구요.^^

프레이야 2007-01-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멋진 닉네임이 문득 '노저어'로 들립니다.^^
저도 그 1000명중 한 명이랍니다...

로쟈 2007-01-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로져?..

paviana 2007-01-2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노저님 ㅋㅋ 계속 저으셔야 됩니다.몇달이 아니라 주욱..^^

로쟈 2007-01-2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viana님이 에이전시라도 해주시나요?^^

Koni 2007-01-29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책을 좋아한다면 내가 좋았던 책을 남에게 서슴지 않고 '선전'할 텐데. 실은 그 인사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뻘생각도 듭니다.^^;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책세상)을 잠시 읽다가 몇 군데 검색을 해봤다(내가 왜 러시아어본을 구하지 않았을까란 궁금증 때문이었는데, 이 책의 러시아어판은 3년전이나 지금이나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다). 그러다 눈에 띈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과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필립 카우프만의 <프라하의 봄>을 비교해본 것인데(기사란이 '동상이몽'이다), 자세한 비교는 아니지만 동의할 만하다. 해서 드는 생각은 <오래된 정원>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간을 내어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것.

강원일보(07. 01. 19) 오래된 정원 vs 프라하의 봄

혼자만 행복하면 미안했던 시대. 동지들이 하나둘 경찰에 붙들려 가는 것을 괴로워하던 현우(지진희)는 윤희(염정아)의 곁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프란츠(다이엘 데이 루이스)는 자유연애를 통해 역사의 무게를 견뎌낸다. `오래된 정원'과 `프라하의 봄'. 이 두편의 영화는 연인들의 엇갈린 사랑을 통해 슬픈 현대사를 보여준다.



1980년 5월, 현우는 광주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무슨일을 했는지를 윤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현우를 윤희는 말 없이 숨겨준다. 윤희는 첫눈에 봐도 당차고 씩씩한 여자. 현우는 그녀와 함께 보낸 6개월의 시간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곳에 숨어있을 수 만은 없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동지들의 소식에 괴로워하던 현우는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지금 보내면 아주 오랫동안 못 볼 것을 알면서도 윤희는 현우를 보내준다. 그로부터 17년 후, 감옥에서 나온 현우는 윤희가 암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윤희와 함께 지냈던 17년 전의 그 오래된 정원을 찾아간다.

임상수 감독의 현대사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오래된 정원'은 감독의 전작과 달리 진중한 어조로, 그러나 역시 감독 특유의 `쿨'한 태도로 80년대를 바라본다. `오래된 정원'은 현우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을 택하지만 화자가 현우는 아니다. 민주화에 투신한 그 `청년' 대신 그(그들)를 바라보며 고통의 시간을 통과해간 여성의 시선을 통해 80년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난 이후 감옥 바깥의 세상은,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후배들은 어떻게 90년대를 맞이했는가. 이성복의 싯귀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래된 정원'은 개인의 신념에 관해 이야기한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신념을 지켜낸 사람들의 사랑과 고통을 위로하며,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갈 오늘을 긍정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프라하의 봄'은 196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오랜 공산주의 사회였던 체코에 불어닥친 자유의 물결 속에서, 토마스와 테레사(줄리엣 비노쉬) 그리고 사비나(레나 올린)가 엮어내는 사랑과 배신, 집착의 서사를 매혹적인 영상으로 그려낸다. 필립 카우프만 감독은 격변의 시기에 인간을 둘러싼 외부의 부조리를 묘사함으로써, 그 안에서 방황하는 토마스의 고뇌를 부각시킨다. 그가 왜 한 여성과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의사직을 박탈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지를 말이다.(허남훈 기자) 

07. 01. 26.

P.S. 나대로의 '오래된 정원 vs 프라하의 봄'은 숙제로 남겨놓는다. 먼저, 영화 <오래된 정원>을 봐야 하고 <프라하의 봄>을 다시 봐야 하며, 소설 <오래된 정원>을 읽어야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어야 한다. 누가 대신 다 보고 읽고 써주면 더욱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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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도발적인' 것은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고전 <장자>의 재번역본이다. 한겨레의 기사 타이틀은 아예 "왜곡·오역의 ‘장자’는 불태워라"인데, 그간에 나온 <장자>의 번역들이 왜곡과 오역으로 도배돼 있으니 다 불태워 마땅하다는 것. 역자인 기세춘 선생의 일갈을 옮기면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장자는 장자가 아니다.” 나도 몇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는지라(비록 지금은 다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인지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데(내가 처음 접한 건 허세욱 선생이 옮긴 범우문고판 <장자>였다),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란 소리니까 더 없이 도발적인/충격적인 발언임에 틀림없다. 소위 '전문가들'의 신뢰할 만한 리뷰들을 읽어봐야 상황판단이 가능할 듯싶지만, 일단은 역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책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아마도 내일자 신문에 게재되는 모양이다.

경향신문(07. 01. 27) ‘장자’ 재번역한 기세춘씨

“노·장자의 기본 ‘캐릭터’가 완전 변질됐습니다. 저항성이 사라지고 지배 담론으로 윤색됐어요. 그 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고증학적 작업을 거친 재번역이 필요합니다.”

기존 학계에 기세춘씨(72)는 ‘불편한 존재’다. “시중의 동양고전 번역서를 모두 수거해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고전 번역서가 왜곡과 변질, 오역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게 기씨의 주장. 그가 “칠십 노인의 망령기와 당돌함으로 만용을 부려” 나선 재번역의 첫 결실로 ‘장자’(바이북스)를 내놓은 건 이때문이다.



“학계에선 아무도 경종을 울리지 않습니다. 저야 강단학계의 학맥이나 스승이 없어 자유로우니까 욕 좀 하겠다는 겁니다.” 기씨에 따르면 노장사상은 도교가 일어나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으면서 신비학으로 왜곡됐고, 정치권력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는 은둔과 청담의 사상으로 변질됐다. 왜곡의 뿌리는 2~3세기 중국 위진(魏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조에 의해 등용된 왕필이 당시 반란의 중심이었던 도교 세력의 민중성을 거세하기 위해 ‘노자 도덕경’과 ‘장자’에 나타난 반체제성과 저항성을 제거해 체제순응적이고 권력친화적인 내용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국내에 출간된 노장 주해 및 해설서들은 왕필의 주해를 근간으로 삼은 탓에 이러한 왜곡을 답습한 것들”이라고 비판했다.

번역자의 오역도 ‘장자’의 본 모습을 훼손했다. 시대와 문화, 언어 등의 차이로 인한 변질과 오해 가능성조차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번역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은미하고 철학적인 담론이 치졸한 처세훈이 되고, 서사적인 우화는 그 핵심을 놓치고 초점을 그르쳐 다른 길로 빠져버린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가 ‘장자’의 오역으로 꼽는 예를 살펴보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죽일 자를 풀어주는 것이오(綽乎其殺之)’로 해석해야 할 것을 ‘여유있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다’로, ‘잘못을 행해도 형벌로 다그치지 말라(爲惡無近刑)’로 해석되는 부분을 ‘어쩌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하라’로 옮긴 게 대표적. “권력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인 노장 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게 그의 분노 섞인 한탄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적 담론인 ‘동심론(童心論)’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심론을 기공술(氣功術)로 해석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가꾸어 젊음을 되찾자고 한 것은 “한심하다”고까지 말했다.

기씨는 “중국 고전의 경우 수천년 묵은 고문자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뜻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 “고전은 내용이 포괄적이므로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등 광범위한 소양이 요구된다”며 “자기 깊이가 그걸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 밥술이라도 먹게 됐으니까 적어도 동·서양 고전은 우리가 제대로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은 비판정신이 생명입니다. 그냥 그대로 답습하려면 왜 합니까.”(김진우 기자)

07. 01. 26.

 

 

 

 

P.S. 참고로, 교수신문에 연재됐던 고전번역비평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는 안동림과 오강남 역주의 <장자>가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표플 얻었지만 반론도 만만찮은 것으로 소개돼 있다. 지난 1963년 최초의 완역본이 출간된 이래 60여 종 이상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문학자와 종교학자의 번역이 가장 '읽힐 만한' 번역으로 추천되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거기에 '재야' 고전학자의 새 번역본이 보태진 셈이다. '정역본'으로 공인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장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하여 전문가의 조언을 같이 옮겨둔다.

교수신문(05. 07. 04) 장자,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자’는 천의 얼굴을 가진 고전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해석의 다양성은 모든 고전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특징이기는 하지만, ‘장자’의 경우 이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따라서 ‘장자’를 펼칠 때는 먼저 어떤 시각에서 읽을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각박한 현실로부터 삶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번득이는 지혜로 가득 찬 우화집으로 읽힐 수도 있고, 특유의 도가적 상상력으로 포장된 신화적인 사유의 보고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또 그런 주제들을 탁월한 레토릭으로 버무려낸 한 편의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자리매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형형색색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들어 있는 문제의식들의 면면을 감안한다면 ‘장자’의 본령은 역시 철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자’의 뼈대를 이루는 사유들이 조형된 시기가 중국철학의 황금기인 ‘戰國’ 시대라는 점도 이런 판단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러므로 ‘장자’에 대한 제대로 된 독법은 그것을 한 권의 철학서로 읽는 것이다.

‘장자’를 철학서로 읽고자 할 때 그 종잡을 수 없는 사유의 늪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선이해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첫째, ‘장자’에서 구사되는 언어적 표현들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통상 ‘장자’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구사 방식은 크게 ‘우언(寓言)’과 ‘중언(重言)’과 ‘치언(癡言)’, 세 가지로 나뉜다고들 말한다. ‘우언’은 말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른 말 속에 은폐시켜 전달하는 방식이고, ‘중언’은 사회적으로 그 권위가 이미 확립된 사람의 입을 빌리는 이중의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이며, ‘치언’은 마치 내용물이 일정 기준 이상 차오르면 저절로 기울어져 쏟아지도록 고안된 술잔처럼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고착되는 것을 시종일관 거부하는 표현법이다. 이와 같은 언어구사 방식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특유의 통찰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이런 까닭에 ‘장자’를 읽을 때는 언제나 이른바 ‘행간’을 읽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장자’는 연대기를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저자들이 만들어낸 집단 저작물이라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일반화된 견해에 따르면, ‘장자’에는 적어도 너댓 가지의 사상적 성향들이 혼재되어 있다. 장자 본인의 사상에서부터 그를 비교적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 장자후학들의 사상, 한비자류의 법가적인 경향성이 강한 사유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아나키즘적 색채가 농후한 사유 그리고 이런 정치적인 관심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탈속적인 개인주의적인 성향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혼재된 생각의 갈래를 개략적으로라도 묶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장자’는 고작해야 잡다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끌어 모아 놓은 단편들의 모음집에 지나지 않게 된다.

셋째, ‘장자’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의 성격을 간파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장자’에 담겨 있는 사유의 폭과 깊이는 ‘전국’이라는 시대가 제기한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나름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소화해낸 결과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중국의 전국시대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이후의 동서양 철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철학적 주제들의 원형이 제시된 시기이다. ‘장자’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적 분위기의 중심을 관통하며 형성된 고전이다. 장자 본인의 사상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 내편에서 다뤄지고 있는 문제만 보더라도, ‘자연’과 ‘인간’을 비롯해 ‘주체’, ‘타자’, ‘언어’, ‘소통’, ‘실재’, ‘몸’ 등 그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거론되는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를 정도로 다양하다. ‘장자’는 이런 주제들이 특유의 탈중심주의적 가치관과 심미적 세계관 속으로 수렴된 결과다. 이점이 또한 현대의 포스트모던적인 지적 상황에서 ‘장자’가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을 먼저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요소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며 구축해내는 철학적 사유의 정수와 대면하는 작업이다. 몇 번의 두레박질로 모두 길어 올리기에는 그 사유의 깊이가 너무 깊은 책, 그것이 ‘장자’이기 때문이다.(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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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7-01-2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덕에 또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늘 신세만 지네요. 그래도 로쟈님이 계속해서 좋은 정보 퍼뜨릴 거라 믿으며 자주 들르겠습니다.^^

로쟈 2007-01-2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 다 떠 있는 정보들입니다.^^;

승주나무 2007-01-2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도 장자가 4종이나 있었군요. 안동림본, 오강남본, 김학주본, 서광사본.. 장자는 편린만 취해서 그 전체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코멘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안동림본을 읽고 있는데(비싸고 두꺼운 것을 신뢰하는 편벽 때매) 옛날처럼 원문과 대조해가며 볼 수준이나 여건은 아니구요~~
장자의 정역본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모두 잡고 읽어보려구요. 근데 김학주본은 이제 애정이 식게 되더군요^^ 좋은 펌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07-01-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종을 갖고 있는데, 이게 문헌고증도 필요하지만 문학성도 옮겨줘야 하기 때문에 '난감한' 번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거 같습니다. 거기에 '내편'과 '외편', '잡편' 간의 차이(저자의 복수성)도 고려해야 하겠고. 연구서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가장 읽을 만한 번역(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번역?)이 먼저 확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biosculp 2007-01-2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물가물한데 동심론은 이탁오 애기하는것 같은데 김용옥교수가 그런식으로 해석을 한 기억은 없는데 다시 책을 뒤져봐야 겠군요.
그리고 김용옥 교수 책을 기준은로 노자철학이것이다에서 왕필의 필터로 본 노자이기에 그 왕필이 살던 시대 위나라지만 한나라가 붕괴된후라 한제국의 논리를 먼저 해부하고 노자로 가자 뭐 이런식의 논리였던것 같은데. 좀 심하게 애기하면 김용옥도 다 한애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쩝

로쟈 2007-01-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존 학계와 '불편한 관계'이면서 도올과도 생각이 다르다고 하니까 저도 뭐라고 덧붙이진 못하겠습니다. 전공자들끼리도 의견조율이 안되는 게 고전번역인지라...

기인 2007-01-2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자는 아예 다른 텍스트도 있지 않습니까? 왕필 이전 텍스트도 있고, 그 해석에 대해서 김시천 선생님께서 숭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요. 벌써 그 텍스트 이름도 가물거립니다;; 저도 장자 가장 좋아하는 고전 텍스트였었거든요. 매우 법가적으로 해석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로쟈 2007-01-26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철학에서 이야기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1-2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박원재씨 저 분한테 학부시절 장자를 배웠더랬는데;;;

기인 2007-01-2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출국하기 직전 떠오른 것.. 김시천 선생님은 장자가 아니라 노자 도덕경 새로운 텍스트였어요. ㅋㅋ 죄송합니다; 음. 집에와서 책장에 보니 '노자'아저씨의 책을 보고 두둥;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위지본 도덕경이었던가. 새로운 텍스트는요. 아니 근데 왕필 아저씨는 장자도 재해석 한 건가요? 스물몇살때 도덕경 주 달고 요절하신 천재로 기억하는데.. 돌이켜보면 6년 전쯤 기억이라 막막합니다.. 도는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기억할 수 업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