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출간된 책 중에 <기억 - 제3제국의 중심에 서서>(마티, 2007)가 '리콜'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접했는데(작년말에는 그린비출판사가 <자본주의 역사강의>를 리콜한 바 있다), 내일자 한국일보에 자초지종에 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기에 옮겨온다. 거의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가격 또한 상당해서 감히 손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책이었다. 그런 만큼 구입자들에게 '의미있는 책'이었을 텐데, 출판사측에서는 이런 점도 고려한 듯하다. 가장 바람직한 건 물론 한번에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내는 것이지만, 차선의 방책은 책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 '책임'을 지는 태도이겠다. 신뢰할 수 없는 책들을 내고선 입 닦는 태도가 가장 나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알고 보니 '마티'는 1인 출판사인데,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손해를 감수한 대표의 결단에 격려를 보낸다(사실 '30여 개의 오자'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출판사들 적지 않다).      

한국일보(07. 01. 31) ‘마티’ 정희경 사장 “오자 30여개… 다시 찍기로"

정희경(30)씨는 <마티>라는 1인 출판사의 사장이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젊은 출판사 대표이고, 마티는, 1인 출판사로는 유일하게 인문서적만 내는 곳이다. 그는 2005년 4월 출판 등록한 이래 지금껏 17종의 책을 냈고, 그 책들을 찾는 이들이 적으나마 꾸준히 있고, 타산 앞세워 단 한 권도 절판하지 않았다는 점을 자랑스러워 한다(*출간된 지 2-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절판된 책들 적지 않다).

가장 최근에 낸 책이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을 지낸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 서서>(957쪽ㆍ3만7,000원)이다. 그런데, 출간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이 책을 그 스스로 절판 시켰다. “오자가 30여 개나 돼 독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수정판을 찍어 구매자에게 다시 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여유가 있나 보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돈 안 되는 인문서만 고집하는 것도 그렇고, 이번 결정도 무모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땐 ‘땅이 좀 있어요’라고 말하고 웃어줘요. 문을 닫네 마네 하는 판인데 말이죠.”(*실제로 땅 밑천으로 책장사하는 출판사들이 많다고 한다.) 

-그 정도로 손실이 큰가.

“들인(일) 돈만 쳐서 약 2,500만원 정도 돼요. 제 책은 초판 2,000부를 1년 안에 소화하기도 쉽지 않거든요. 재판 찍으려면 또 목돈 들고, 그 돈 회수하려면 더 오래 기다려야 하고…. ‘투자- 회수- 재투자’의 아슬아슬한 균형에 이처럼 치명적인 변수가 터진 거잖아요.”

-대안은 없었나. 가령, 정오표를 따로 낸다든가.

“이틀 동안 고민도 하고, 조언도 구했어요. 그런데 내용상의 오류가 아니라 단순 오ㆍ탈자가 대부분이에요. 마티 이미지에는 그런 오자가 더 치명적일 수 있거든요. 후회하진 않아요.”(그는 ‘오프 더 레코드’를 조건으로 이번 사태의 경위를 설명했는데, 그 역시 어이 없는 피해자였다. 그렇다고 책임이 경감되지는 않는다. 피해자이자 책임자인 당사자는 이중의 고통, 곧 피해의 상처와 책임의 하중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아마도 편집/교정을 외주에 맡겼던 모양이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제가 사는 오피스텔 보증금(2,000만원)을 빼기로 했어요. 사무실(보증금 500만원)은 빼봐야 별 도움이 안 되거든요. 현재 진행중인 책만도 10종이 넘고, 집필이나 번역이 거의 마무리된 것도 있어요.”

대학 96학번인 그는 수습 월급 150만원의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4개월 만에 월급 50만원 주는 출판사로 이직했다. “기업 안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과 역량을 오롯이 책에 반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고 했다. 독자층이 적은 분야에 기약 없이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출판사는 흔치 않다. 그래서 차린 게 마티다. 그는 자신의 모든 책의 기획ㆍ편집ㆍ디자인을 해왔다.

“우리 근대 형성에 일본 못지않게 영향을 준 서양 근대에 대한 책은 많지 않아요.” 세기말 파리의 시각문화 양상을 분석한 책 <구경꾼의 탄생>이나, 20세기 초 상용화된 최초의 항공 운송수단인 비행선이 대중 문화에 미친 영향을 살핀 <비행선, 매혹과 공포의 역사> 등이 그렇게 출간됐다. 서양 미학사의 고전인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도 그가 낸 책이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의 논리가 출판시장을 장악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먹이 피라미드 안에, 돈 없이 돈 안 되는 인문서만 내는 마티의 자리는,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없다. 주거와 사무를 겸할, 보증금 싼 집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며 털고 일어서던 그는 “다 잘 될 것”이라고 했다. “제가 낸 책이 모두 살아있잖아요. 뜨겁게 활활 타지는 않아도 가장 오래 타는 출판사를 만든다는 게 제 모토랍니다.”(최윤필 기자) 

겸사겸사 <기억>에 대한 언론 리뷰도 하나 옮겨놓는다. 조만간 수정판의 '속살'이 드러나길 고대하면서.

서울신문(07. 01. 20) 침묵했던 제3제국 속살 드러내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서(김기영 옮김, 마티 펴냄)’는 9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우선 독자를 압도한다. 이처럼 두꺼운 자서전을 펴낸 슈페어(1905∼1981)는 과연 누구인가.‘히틀러의 건축가’로서 그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적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긴 장본인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에서 나치 독일의 장관 중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20년 징역형을 언도 받고 복역을 마쳤다.



독일 만하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슈페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1931년 베를린의 대학생을 상대로 맥주홀에서 가진 히틀러의 연설을 처음 들었다. 히틀러에 대한 첫인상은 “열광에 넘치는 분위기 자체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의 모습 또한 나를 놀라게 했다…모든 것이 적절한 겸손함을 풍겼다.”란 것이었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유머를 섞은 그의 연설이 풍기는 분위기와 열정에 빨려든 슈페어는 나치의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한다. 나치당 청사 공사에 참여한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장식과 시각적 장치를 맡아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히틀러의 신뢰를 얻는다. 히틀러의 대중선동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다. 나치 정권에서 최연소인 37살의 나이에 군수장관에 오른 슈페어는 전시경제를 장악한다. 또한 점령지 강제수용소의 노동력을 군수생산을 위해 착취했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모든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하는 히틀러에 맞서 독일의 문화유산과 산업시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체포된 슈페어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랐다. 자기반성과 변호를 절묘하게 뒤섞은 태도를 보이며 ‘선량한 나치’ ‘최고의 피고인’으로 불리며 교수형을 면한다. 재판 과정에서는 자신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류가 제시되면 무조건 히틀러의 명령이었다고 설명하는 피고들을 향해 “엄청난 월급을 받는 우편배달부들!”이라고 외쳐 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는 자살을 하려고 수건으로 아픈 다리를 묶어 정맥염을 유발하거나, 니코틴도 물에 녹으면 치명적이란 내용을 기억하고 부서진 시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러나 자살 시도를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슈페어는 메모광이었다. 감옥에서 군수장관으로서 작성한 업무일지, 편지, 전보 등을 바탕으로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히틀러의 내밀한 모습을 담아낸다.



히틀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비전문성이었다든지, 체중을 항상 걱정했다는 일화 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히틀러는 독학으로 자수성가를 이루었기에 모든 분야에 문외한이었지만, 재빠른 두뇌회전으로 전문가가 시도하기 어려운 특별한 방식을 고안했다. 전쟁 초기에는 과감성으로 승세를 잡았지만, 패배가 확산되면서 비전문성은 아집으로 변했다.

“끔찍하군! 배를 불룩 내밀고 걸어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그건 바로 정치적 파멸이야.”라고 외치며 채식을 고집했던 히틀러는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조롱했다.1943년 이후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히틀러는 “슈페어, 요즘은 친구가 둘뿐이군. 브라운(히틀러의 연인이자 비서었던 에바 브라운)과 개라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치 정권의 ‘속살’을 보여주는 ‘기억’은 유일한 내부 증언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럼에도 슈페어의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이란 비난이 뒤따르는, 여전히 논란 속에 놓인 책이다.(윤창수기자)

07. 01. 30.

P.S. 둘러 보니 오드리 설킬드의 <레닌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2006)이 또한 마티에서 낸 책이다. 그러고 보니 그 책 또한 젊은 여사장의 '열정'이 낳은 산물이었다.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혁명을 팝니다>와 <구경꾼의 탄생> 정도이다. 1인 출판사가 출판계에 드문 건 아니지만 이만한 실적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혼자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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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지난주에 깜박 잊고 넘어간 게 있다. '작가와 문학 사이'를 옮겨오지 않은 것. 짐작대로 경향신문의 이 연재는 심진경, 신형철 두 평론가가 번갈아가며 연재하고 있다(시와 소설로 분담한 것인지?). 지난주에 다루어진 작가, 아니 시인은 재작년 한국시단의 '뉴히어로' 황병승 시인이다. '미래파' 논란의 중심에 있던 이 시인에 대해서 젊은 비평가가 차분하게 그 의의를 짚어주고 있다.

경향신문(07. 01. 27) [작가와 문학사이](4) 황병승-본능에 충실한 ‘언어 모험가’

역사적인 시집들이 있다. 한 시대의 기념비 같은 책들이다. 이를테면 이성복과 황지우의 첫 시집은 1980년대 초반 한국 사회의 양심이 쓴 혈서다. 철조망 같은 시집들이었다. 다가가 부딪치면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 독서가 곧 출혈이었다. 장정일과 기형도의 시집은 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진단서다. 전자는 삐딱한 독학자의 눈으로 한국 사회의 ‘쓸쓸한 퇴폐’를 포착했고, 후자는 우울한 기자의 눈으로 ‘무서운 슬픔’을 보고했다. 90년대는? 풍요로웠지만 고요했다. 2000년대가 시작되고도 한동안은 그랬다.

그 무렵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2005)가 나왔다. 괴물 신인의 괴팍한 등장이었다. 불온한 붉은 빛깔의 시집은 단숨에 기념비가 되었다. 매력적인 정체불명의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 이해되기 이전에 먼저 빨아들이는 수사들, 비문(非文)의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씌어지는 문장들, 격렬한 분노와 황량한 슬픔이 뒤엉켜 있는 정서들이 시의 막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몇몇 동료들이 그와 더불어 각개약진했다. ‘2000년대 시’ ‘미래파’ ‘뉴웨이브’ 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기념비 주위에 화환들이 쌓여갔다.

1970년생이니까 문태준과 동갑이다. 공통점은 그것뿐이다. 문이 유토피아의 순간적 현현(顯現)을 도모하는 서정의 사도라면, 황은 언어의 모험과 정체성의 실험이 같은 것이라고 믿는 전위의 척탄병이다. 전자가 내실을 보살핀다면 후자는 외연을 넓힌다. 이것은 모든 시사(詩史)를 관류하는 두 개의 근원적 기질이다.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들을 긁어모아 ‘시’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 문과 황은 당대 한국 시의 남북극에 있는 전진기지다. 둘 사이의 거리가 곧 최근 한국 시의 넓이다.

“메리제인./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이 없지/누구보다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메리제인./가슴은 어딨니//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요코하마의 거지들처럼.//(중략)//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이었다고//메리제인. 말했지//빨고 만지고 핥아도/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슬픔이 지나간 얼굴로/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메리제인. 요코하마.” (‘메리제인 요코하마’)

인용한 시가 황병승의 본령은 아니지만 비교적 온건한 입구쯤은 된다. 태생적이라고 해야 할 비주류 의식을 여기서 본다.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다질 않는가. ‘그들 안의 블루’가 그것을 연주한다. 끼리끼리 모여 “빨고 만지고 핥아”가며 견딘다.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뿐이라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 즉 ‘타자’라서 그렇다. 그러니 그의 시에 출몰하는 이국의 인명과 지명은 모국어에 대한 불경이 아니다. 노동계급에 조국이 없듯, 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내 나라의 ‘꼰대’들이 아니라 ‘요코하마의 거지들’이 그들의 동포다.

그런 이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어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말문을 연다.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라고 고백하는 게이가 있다. 입술을 뜯어버리고 얼굴을 갈아버릴 테니 제발 사랑해 달라고 그가 말할 때 우리는 어쩐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시코쿠’라는 크로스드레서는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라고 냉소하고, 어느 트랜스젠더는 “눈을 씻고 봐도 죄인이 없으니 나라도 표적이 될래요”라고 쓸쓸히 자조한다. 이들은 실로 한국 시가 처음 경험하는 주체들이다.

그는 마이너리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이너리티가 그의 시에서 말한다. 이것이 그의 괴력이다. 세 군데 이상의 학교를 다녔고 세 장르의 예술을 넘나들고 있는 이 시인은 시를 ‘혼자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즐겁고 슬픈, 이상한 놀이다. 그의 시에서 ‘즐거운 놀이’만을 본다면 그것은 절반밖에 못 본 것이 아니라 전부를 못 본 것이다. 어서들 오시라, 이곳은 한국시의 신개지(新開地)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1. 30.

P.S. 해설만으로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을 위해 두 편의 시를 옮겨놓는다. "그는 마이너리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이너리티가 그의 시에서 말한다."라는 평론가의 말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그의 시들은 그가 쓰는 게 아니라 그의 '똑똑한 오리들'이 쓰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검은 바지의 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 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맞추던 시간들을.
오른 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 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주치의 h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 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떴다,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 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 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 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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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1-3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역할극'의 달인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난장이/시인을 초과하는/압도하는 기계/인형들의 반란같은...

로쟈 2007-02-0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ture님/ 라캉-지젝 말고 미래파도 읽으시는군요.^^

sommer 2007-02-0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장남자'라는 일종의 가면이 끌려서 읽은 거죠, 미래파는 나중에 따라 온 구실이고요...^^
 

엊저녁 학교에 있는 서가에서 연구서 한 권을 찾다가 우연히 칸트의 <판단력 비판>(책세상, 2005)를 손에 들게 됐다. 물론 이 책세상판은 제1부에서 '미의 분석론'과 '숭고의 분석론'만을 옮긴 발췌본이다. 완역본이나 영역본이 모두 집에 있기 때문에 굳이 학교에 놓아둘 필요가 없어서 가방에 챙겨넣으려다 역자가 쓴 '들어가는 말'을 읽어보고, 또 거기서 '감성적asthetisch'이란 번역어에 대해서 용어해설을 참조하라고 하길래 그것까지 읽어보았다.

 

 

 

 

흔히 '미감적', '미적'이라고 번역되어온 칸트의 'asthetisch'를 주로 '감성적'이라고 옮기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놓고 있는데, 서양어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아름다운'이란 표현(schon/beautiful/beau)의 연원이 'asthetisch'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aisthesis'에 있지 않다면서 역자가 인용하고 있는 것이 폴란드의 미학자이자 미술사가 타타르키비츠(1886-1980)였다(국내엔 그의 주저인 <여섯 가지 개념의 역사> 외에 3권짜리 <미학사> 가운데 두 권이 더 출간돼 있다). 

현대 영어에서 말하는 beautiful은 그리스어로는 kalon, 라틴어로는 pulchrum이라고 지칭되었다. 라틴어 명칭은 고대와 중세 동안 줄곧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어 bellum이라는 새 단어로 대체되면서 사라졌다. 이 새 명칭은 유래가 다소 특이한데, '선'을 뜻하는 bonum에서 지소사 bonellum을 거쳐 다시 bellum으로 축약된 것이다. 처음에 이 말은 여성과 어린이에 한정해서 쓰이다가 나중에는 앞서의 pulchrum울 밀어내고 모든 종류의 미를 가리키게 되었다. 현대어에는 pulchrum의 파생어가 전혀 없으니 bellum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형태로 채택되었다. 즉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의 bello, 프랑스어의 beau, 영어의 beautiful이 그것이다. 그밖의 유럽어는 토착어에서 유래한 독자적 표현을 사용한다. 독일어의 schon, 러시아어의 krasseeviy 등이 그것이다.(178-9쪽)

타타르키비츠를 인용한 이 문단은 원저 'A history of six ideas : an essay in aesthetics'(영어본 1980)의 국역본 <여섯 가지 개념의 역사>(이론과실천, 1990), 144쪽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 책은 <미학의 기본개념사>(미진사, 1990)라고 다른 번역서가 같은 해에 출간된 바 있으며, 손효주 역의 이 책은 <미학의 기본 개념사>(미술문화, 1999)로 재출간되었다. 그리고 원제의 '여섯 가지 개념' 가운데 '예술' 파트만 따로 떼 번역한 책으로 <예술 개념의 역사>(열화당, 1990)가 있다. 짐작에는 이 세 종의 번역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가 한꺼번에 출간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인용문에 흥미를 갖게 된 건 러시아어의 krasseeviy 란 말이 아무래도 미심쩍어서였다. 이론과실천판을 내가 갖고 있는지 기억에 가물가물해서(있다고 해도 박스보관도서이지만) 미술문화판을 구해볼 작정이었는데, 귀가길에 들른 서점에서 뜻밖에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아직 판매중인 책을 구할 수 있었다(내가 산 건 2006년판 초판 4쇄이다). 1997년에 찍은 미진사판도 품절되지 않고 알라딘에서는 판매하는데 같은 역자의 같은 책이지만 나중에 나온 미술문화판보다 3,000원이 더 비싸다(물론 미술문화판의 후기에서 역자는 이전판의 일부 오역들을 바로잡았다고 했으니 엄밀하게 '같은 책'은 아니겠다). 좀 희한한 시스템이긴 하나 아무튼 45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을 12,000원에 사들고서는 제일 먼저 펼쳐본 곳이 역시나 '미: 개념의 역사' 파트였다.

미술문화판의 이 대목 번역(155-6쪽)은 그리스어 kalon을 희랍어로 표기해준 것 말고는 이론과실천판과 대동소이한데, 차이라면 마지막 문장이 "독일어의 schon, 러시아어의 krasseeviy, 폴란드어의 piekny 등이 그렇다"로 마무리되는 것 정도이다. 한데, 여기서도 러시아어의 krasseeviy 라고 내 짐작과는 다르게 표기돼 있었다. 국역본의 대본이 된 영어본을 바로 찾아볼 수 없어서 집에 돌아와 내가 한 일은 이 장의 원출처가 되는 저널을 인터넷으로 뒤져보는 것이었다. 미국미학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미의 대이론과 그 쇠퇴The Great Theoty of Beauty and Its Decline'(1972)가 그 원출처이다.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Cover Image

다행히도 텍스트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거기엔 'Russian, krassivyj' 라고 짐작했던 단어가 제대로 표기돼 있었다. 'krasseeviy'와 'krassivyj'는 철자가 전혀 다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추정해보면, (1)영어본의 오타이거나 (2)두 국역본의 오기, 두 가지 가능성밖에는 나로선 떠올릴 수 없다. 그런 오타를 내기도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명의 역자가 똑같은 착시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매우 낮다(비슷한 시기에 출간됐으므로 한 역자가 다른 역자의 번역을 참조했을 리도 없고). 영어본을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이래저래 미스테리하다.

참고로, 러시아어의 '아름다운 krassivyj'을 구글에서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이미지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형용사의 남성형이기에 기대(?)를 약간 벗어나는 것. 러시아 여성들이 아주 듣기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한 '아름다운'의 여성 형용사 'krassivaja'를 검색해야 그래도 기대에 부응하는 이미지들이 조금 뜬다. 아래의 미스 우크라이나처럼...

07.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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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1-31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성형과 여성형의 구분이 있는 단어를 쓰는 나라의 언어관을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나라일수록 미학과 철학이 뿌듯하게 발전한 곳이 많은데 이것도 일종의 언어현상과 관련된 것인지. 저는 아주 오래전 잠깐 배운 프랑스어도 남성형과 여성형의 구분때문에 애를 좀 먹었거든요.

로쟈 2007-02-0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구분은 사실 대부분의 서구어들에 공통되는 것인데요. 그렇다고 미학/철학의 발달과 관계가 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요. 제 생각엔.^^
 

오늘 있었던 문단의 가장 큰 행사는 물론 작가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 100쇄 출간 기념회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나는 지난 연말 한 시상식 자리에서 작가를 볼 수 있었다), 아무 내색 없이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인터뷰 기사를 하나 스크랩해 놓는다. 오마이뉴스가 가장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오마이뉴스(07. 01. 29) "작가가 정치하는 건 문학에 대한 배반"

"작가도 현실 발언해야 한다. 단, 자기 이익과 상관없이 정의로워야 한다." 대하소설 <아리랑> 100쇄를 맞은 소설가 조정래(64)씨가 따끔하게 꼬집었다. 현실 발언을 하되,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엔 철퇴를 가했다. 그는 "정치가는 강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겠다는 사람"으로 타고난 거짓말쟁이라며, 오류투성이인 "정치가와 함께 하는 건 문학에 대한 배반"이라고 일갈했다.

조씨는 또 '민족'이라는 단어를 빼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움직임과 관련해서도 '민족'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씨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논리"라며 "민족이란 문제를 폐기처분하는 건 통일 이후 해도 된다. 폐기하지 맙시다. 폐기해야 한다는 건, 그건 신사대주의"라고 단언했다.

총 12권인 대하소설 <아리랑> 100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29일(월)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1994년 출간한 <아리랑>은 13년 만에 (1권 기준) 100쇄를 찍었다. '쇄'는 출판사가 책을 인쇄할 때마다 찍는 판 숫자. <아리랑>을 출간한 해냄 출판사는 <아리랑>이 총 330만부가 팔렸다고 밝혔다.

<아리랑> 100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조정래씨는 자신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존엄성을 지키려 했고, 나를 태어나게 한 모국에 대한 애정과 민족, 역사에 대해 천착하려 노력했다"며 세 가지를 지키려 애썼다고 토로했다. 조씨는 "<아리랑>을 쓰면서, 독자와 못 만날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어찌 독자가 안 읽겠나 확신이 있었다"며 "작가들이 독자 찾아가려 몸부림치고 끌어당기려 애쓰면 그 열정이 독자한테 전달된다. 그게 문학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조정래씨는 또 대하소설을 쓰는 어려움도 털어놨다. "1만5천매 대하소설 첫 장 쓰려면 20장 30장을 파지 내는데 이틀 걸려 첫 장 썼다. 그게 1만5천 분에 1이다. 내가 언제 이걸 다 쓸까 생각하면, 그 느낌이 터널 속에 들어가는 막막한 느낌이다." <아리랑>을 쓰는데, 대하소설 쓰기가 지긋지긋하고 하도 치 떨리게 힘들어서 후배에게 넘기려고 한 일화도 털어놨다. 아끼는 후배에게 '한강시대'를 대하소설로 쓰라고 취재방법까지 가르쳐줬는데 안 써서 결국 자기가 썼다며, 그게 <한강>이라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로 조씨는 검찰에 고발당했던 일과 몸이 아팠던 일을 꼽았다. <아리랑>을 4분에 3가량 썼을 때인 1994년, 고발당하는 바람에 검찰에 소환 당해 조사 받고 그러느라 글 쓰는 걸 중단당해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또 매일 35매에서 40매를 쓰다 보니, 오른쪽 관절이 아프고 손가락 끝까지 마비돼 고생한 일도 털어놨다.

작가 조정래씨는 또 '위기'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우리 문학의 현실에 대해, "젊은 작가들 소설이 전부 주인공이 '나'이고 일인칭 소설인 건 문제"라고 꼬집었다. 주인공을 '나'라고 설정하면 전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소설 속 인물이 능동적이 아니라 피동적인 인물이 돼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3인칭 소설을 쓰라고 얘기했다"며 "인생을 다면적이고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독자가 감동 받게 하려면 인물이 다양해야 한다. 그런 소설이 어찌 영혼을 흔드는 소설이 되겠냐"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또 "80년대 지났다고 역사시대마저 지나진 않았다. 일본 소설이 인기인 건 일본소설의 감각이 다른 데 대한 호기심으로 일시적 현상"이라며 "한국작가는 자기와 싸워야 하고 또 (핸드폰, 인터넷 같은) 문명의 이기와 싸워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조씨는 결국엔 그 무엇도 문학을 어쩌지 못하고 "그동안 작가는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며 "문학은 인간이 언어를 쓰는 한 그 생명은 영원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또 이문열씨가 <호모 엑세쿠탄스>에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소설가들이 현실 정치에 발언하고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조정래씨는 딱 잘라 말했다. 조씨는 "우리 모두에겐 모든 사람이 정치ㆍ경제에 대해 감시ㆍ감독하고 발언할 자유가 있는데, 특히 작가는 대중을 대변하고 감시 감독할 책무가 있다"며 "현실 발언해야 한다. 다만 '얼마나 정의로운가', '객관성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작가가 현실 발언할 때는 작가가 자기 이익과 상관없이 정의로울 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정치가란 강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겠다는 사람"이라고 후르시초프가 한 말을 인용하며, 정치가는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 꼬집었다. 따라서 "지식인, 작가는 그들을 감시, 감독해야 한다"고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작가가 직접 정치계에 입문하는 것에 대해선 "작가는 인류 스승이고 '산소'라고 한다"며 "정치세력과 함께 하는 게 작가의 소임은 아니다. 정치가와 오류를 같이 범하는 건 문학에 대한 배반"이라고 일갈했다.

한편, 조씨는 앞으로는 대하 소설은 쓰지 않을 생각으로,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읽을 만한 50권짜리 아동물을 집필 중이라며, "손자들에게 지금 같은 나쁜 글을 읽힐 수 없어서"라고 집필 이유를 밝혔다. 아동물은 국내 15명, 해외 15명 위인 이야기와 전래동화 20권까지 합해서 50권짜리로, 현재 출판사측에 원고를 넘긴 '단재 신채호'를 비롯해 앞으로 만해 한용운, 안중근 등을 다룰 예정이다. 조씨는 앞으로 2, 3년간 이 기획 저술에만 몰두할 것이라고 말했다.

07. 01. 29.

P.S. 어느 평론가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조정래는 '발로 쓰는 작가'이다. 원고지 1만 5천매를 머리로 메꾼다는 건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넌센스이다(나는 젊은 작가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소설을 쓴다고 하면 한대 때려주고 싶다). 청소년 시절 작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내가 '작가의 길'을 멀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그나마 다시 생각해보게 된 건 에세이 소설을 쓰는 쿤데라를 읽으면서였다). "1만5천매 대하소설 첫 장 쓰려면 20장 30장을 파지 내는데 이틀 걸려 첫 장 썼다. 그게 1만5천 분에 1이다." 내가 경의를 표하는 건 그 막막함에 대해서이다.

한편, 우리 어린이들이 '아동문학가' 조정래 할아버지의 위인전과 전래동화를 읽게 될 날도 머지 않은 듯하다. 대하장편소설 작가에서 아동문학가로의 변신이라... 국내의 아동문학 시장규모로 보아 이게 <아리랑>보다 더 대박이 날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는 '전업작가' 지망생들에게 여러 모로 모범이 될 만하다...

P.S. 말이 나온 김에 조정래 선생의 칼럼도 하나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1. 30) [조정래칼럼] 어차피 인생무상이다

출생률 저하 세계 1위, 교통사고 발생률 세계 1위, 이혼율 세계 1위, 사교육비 부담 세계 1위. 이다지도 세계 1위가 많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복된 일인가. 이것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실태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네 가지의 세계 1등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 ‘나’만을 앞세운 이기주의에 뿌리를 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자랑스럽지 못한 일들이 사회문제로 계속 지적되고 거론되는데도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나’만을 내세우며 얼마나 살벌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런데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급격한 출생률 저하다. 2∼3년 사이에 세계 1위를 차지한 이 사태는 이 나라의 미래를 잿빛으로 색칠하게 되어 있다. 앞으로 10년 후부터 노령인구는 늘어나고 노동력은 부족해져 우리가 소망해 마지않는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세상은 영원한 환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많이 낳지 않으려는 데는 확실하고 분명한 이유가 있다.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 제대로 키울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 다음에 곁들여지는 것이 직장여성을 위한 육아시설의 부족이다. 그러니까 출생률 저하 세계 1위와 사교육비 부담 세계 1위는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게 할 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사교육은 왜 그렇게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정부의 교육정책 잘못 때문인가? 학교 선생들이 실력 없는 무능력자들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전혀 그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내 자식이 잘 되어야 한다는 모든 부모들의 대책없는 이기심이 무한경쟁을 일으키며 빚어낸 비극이다.

저 1960년대를 거쳐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학원이란 학교공부가 좀 모자라는 학생들이 보충을 하려고 다니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 목적이 차츰 변하기 시작해 이젠 남들보다 1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필수적으로 다녀야 하는 혈전장이 되어 버렸다. 그 이기심의 무한경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공교육은 무력하게 초토화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이 지닌 몇 가지 미덕 중 하나로 교육열을 든다. 그렇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만주며 연해주에 유랑했던 동포들은 먹는 것보다 자식들 가르치는 것을 앞세울 정도였다. 그래서 연변에 중국의 소수민족들 중에서 최초로 조선족 대학이 섰고, 옛소련 시대에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인 다음으로 높은 계층을 이루었던 것이 고려인이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기적이라고 하는 우리의 경제발전이 논밭 팔고 소 팔아 자식들 가르친 그 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도 정도가 넘치고 또 넘쳐 ‘광적’인 상태로 들어가면 문제가 생긴다. 우리의 교육열은 이미 오래전에 이성의 선을 넘어서 광란의 상태에 빠져 있다. 미국에 조기유학 가 있는 것이 우리나라가 1등이고, ‘기러기 아빠’라는 새 풍속도가 생겨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니까 부모들이 앞서 뛰기 시작해 1학년부터 학원으로 내몰았고, 몇년이 지나니까 유치원생들까지 영어를 배우느라고 허덕거리고 있다.

몇 해 전 어느 텔레비전에서 유럽 여러나라 고등학생들이 과외도 안 받고 학원도 안 다니며 학교공부만 충실히 하는 것을 시리즈로 보여주며 우리의 교육열이 얼마나 병적인지를 지적했었다. 인생 어차피 한 번 사는 거고, 무상하다.(작가,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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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3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을 대할 때면 머리가 숙여집니다.

마노아 2007-01-3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목이란 생각이 듭니다. 경탄해 마지 못하겠어요.

하이드 2007-01-3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오늘 점심시간 조선호텔 앞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 마시며 책 보고 있는데, 바로 뒷자리에 온 어떤 여자분. 보라색노란색 보자기에 책을 잔뜩 싸가지고 오면서, 조정래 선생님 뵙고 왔다고 그러던데, 이 행사 다녀오던 길이었나보네요. '그 연세에 어찌나 카랑카랑하시던지...' 까지 듣고 일어나야 했긴하지만서도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1-3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죠? ㅎ
아, 아무튼 소설 쓰기 위해선 발이 튼튼하든지 엉덩이가 튼실해야되겠군요. 흐음.
잘 봤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저 대하소설은 언제쯤 손에 집을 수 있을는지...)

니브리티 2007-01-3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손으로 쓰는 거죠.(아닌가?) 혹시나 그런 작가를 만나더라도 정말 때리지는 마세요...^^ 그런 작가도 나름 자신의 몸으로 체득한 글쓰기 방식일 테니까요...

로쟈 2007-01-3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님/ 저는 많이 읽진 못했습니다.^^;
마노아님/ 저도 경탄스럽습니다...
하이드님/ 아 조선호텔 '앞'에 자주 들르시는군요.^^
연랑님/ 그렇죠, '엉덩이'도 한몫 하죠. 번역할 때는 특히나.^^;
니브리티님/ 네, 손품도 팔아아요.^^ 저는 '머리'쓰면서 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친구들이 좀 그렇다는 얘기였습니다...
 

지난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책 중의 하나는 '새로운 여자의 탄생'이란 부제를 가진, 댄 킨들런의 <알파걸>(미래의창, 2007)이다. 지난주 구내서점에서 책이 나온 걸 보고 한번 들춰봤었는데, 다시 확인해보니까 상당히 저렴한 책이다. 364쪽에 10,000원(할인가 9,000원)이면 짐작엔 신간들 가운데 분량 대비 최저가가 아닌가 싶다.

대개 이런 종류의 책은 그냥 리뷰들 몇 개 읽는 걸로 대신하는데(사실 그걸로 충분할 때가 많다) 그 '책값'이 특이해서 한번 관심을 가져본다. 내가 읽은 리뷰들이 정리하고 있는 내용을 옮겨놓는다.

국민일보(07. 01. 27) ‘알파걸’… 거칠 것 없는 그녀들의 야망·파워!

미국에서 여성들이 처음 투표권을 얻은 것은 1920년이다.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몸의 주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피임의 합법화는 1965년에 이뤄졌다. 백 년여 동안 페미니스트들이 힘들게 쟁취한 남녀평등이라는 토대 위에서 요즘 미국 10대 딸들은 역사상 최초의 신천지를 경험하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자와 남자의 출발선이 똑같아진 것. 이 아이들은 남녀구분 없이 동등하게 부모의 관심을 받고,교육을 받고,사회진출 기회를 갖게 됐다. 그 결과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우수해진 것이다.

이에 대해 하바드대 아동심리학과 교수인 저자 댄 킨들런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층이 출현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저자가 ‘알파걸’이라고 명명한 이 소녀들은 ‘여자들은 사춘기가 되면 자신감을 잃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는 심리학계의 유력한 학설과 달리 대다수 남학생들보다 더 씩씩하고 경쟁도 겁내지 않는다. 이들은 여성이 관리직에 오르는 것을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소위 유리천장도 얼마든지 분쇄해버릴 태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또다른 특징은 페미니즘의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저는 여권주의자가 아닌 평등주의자에요. 페미니즘은 여성평등이 아니라 남성 적대적으로 보이거든요”라고 말하는 이들은 사실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미 남자를 추월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과학이나 수학에 약하다는 편견에 대해 저자는 “같은 땅에 두 식물을 심고 수분,햇빛,영양분 공급 등 모든 조건을 똑같이 해주고도 한 식물이 더 크게 자랐다면 유전적 차이 때문”이지만 “현실에선 하버드대학이건 월가건 남녀에게 같은 토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면서 토양이 갖춰지지 않는 한 유전적 차이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미래 지도자가 될 알파걸들의 등장은 역할 모델이 되는 ‘알파우먼’의 수가 늘어난데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정계에는 힐러리 클린턴과 콘돌리자 라이스가 버티고 있고,대중문화에서는 오프라 윈프리와 마돈나가 있다. 이외에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저자인 JK롤링이나 미녀 테니스 스타인 마리아 샤라포바 그리고 골프스타 미셸 위 등이 알파걸들의 눈높이를 높이고 있다.

저자가 알파걸과 관련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의 친근한 관계. 신세대 아버지들은 구세대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그랬듯이 딸들에게 열심히 도전의식을 심어준다. 그리고 딸들은 여성적 혹은 남성적으로 규정됐던 다양한 기능들을 습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시켜 나간다. 이에 따라 딸들은 여전히 사회에 남아있는 남녀간 차별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 책의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는 “학교가 알파걸로 넘쳐나는데,왜 알파우먼이 미국을 지배하지 못하는가?”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 직장 여성들의 월급은 남성에 비해 평균 23%가 작으며 대기업 임원이나 의원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20% 안팎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저자의 ‘알파걸’은 모든 소녀라기 보다는 장래 권력과 영향력 있는 사회계층으로 진출할 소녀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계층과 인종을 넘어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이같은 사례는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올초 판·검사 임용 대상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으며 각종 고시의 수석은 물론 공군사관학교,경찰대 수석 졸업도 여성이 휩쓸고 있는 것을 볼때 우리도 새로운 계층의 출현이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알파걸의 출현에 불안해 하는 남성들에 대해서 저자는 긍정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여자들이 운영하는 세상에서 남자들은 스트레스도 덜 받고 장수할 수 있다. 그리고 미처 개발하지 못했던 다른 면들을 개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기르며 집안 살림도 할 수 있다…남자다워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더 사랑스러워질 수 있다.”(장지영 기자)

한국일보(07. 01. 27) 새로운 슈퍼파워 계층의 탄생 '알파걸'

“여성들에게 책임을 맡겨라. 그러면 감당할 능력이 생긴다.(…) 조만간 여성들이 완전한 경제적ㆍ사회적 평등에 도달하리라는 것은 확실해 보이며, 이를 통해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49년 <제2의 성>(1949)에서 낙관적 의지를 담아 예견했던 ‘내면의 변화’가 이미 시작됐고, 그 중심에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층”인 ‘알파걸(Alpha Girls)’이 있다는 게 심리학자 댄 킨들런의 논쟁적인 저서 <알파걸>의 요지다.

저자는 미국과 캐나다의 15개 학교를 방문해 “재능 있고 성적이 우수하며 리더이거나 앞으로 리더가 될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인종ㆍ계층의 야심만만한 소녀 113명을 인터뷰하고 900여 명의 소녀들을 설문조사했다. 그 결과 그가 확인한 이들이 알파걸이다.

●알파걸: 성실하고, 낙천적이고, 실용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개인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평등주의자인, 그러면서 관심 영역이 광범위해 인생의 모든 가능성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유능한 소녀집단.(203쪽)

이들은 ‘혁명의 딸’이다. 참정권과 스포츠 참여권, 낙태 합법화를 위해 싸운 여성해방운동가들의 딸이자 손녀로 그 투쟁의 열매를 쥐고 태어난 첫 세대다. “순응 아니면 반항, 억압 아니면 저항. 이것이 알파걸 세대 엄마에게 주어진 선택”이었다면, 알파걸은 “1980~90년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페미니스트의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저는 여권주의자가 아닌 평등주의자예요.”(몰리ㆍ17세)

알파걸은 또 과거 아버지들이 아들에게나 쏟았을 관심을 받고 자라며,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전통적인 남성적 가치관을 전수 받았다. 어머니만이 더 이상 딸의 역할모델이 아닌 것이다. 직업관 역시 ‘여성적’ 관습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들은 계란 거품기와 전기톱 둘 다 능숙하게 다룬다.”(202쪽)

저자는 전통적인 심리학과 지능, 신체적 특징 등을 둘러싼 성(Gender) 편견을 다양한 연구성과와 인터뷰를 통해 논박한다. 과거 심리학이 규정했던 사춘기 소녀의 특징들, 즉 낮은 자부심과 정서장애(우울증/불안), 타인 위주 가치관, 관계 지향, 감정적 스타일은, 적어도 알파걸에게는 낯선 가치관이다. 이들이 이끌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 이를테면 고등교육에서의 여성 우위, 직종 성역(性域) 파괴, 성 소득격차의 급격한 해소, 사랑ㆍ결혼관의 변화와 가정의 변화 등은 더 멀리 깊숙이 전개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이다.

이들의 진군으로 위축된 남성에게 저자는 “알파걸 세대가 성인이 되는 미래 세계에서 우리 아들들은, 혁명의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름대로의 ‘내면 변화’를 거쳐 전통적인 남자의 핵심적 특성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위로한다. “세계를 운영해야 하는 부담, 골칫거리들을 알파우먼들한테 해보라고 하면 될 것 아닌가.(…) 여자들이 운영하는 세상에서 남자들은 더 오래, 스트레스도 덜 받으며 살 수 있고, 아직까지 미처 개발하지 못했던 남성의 다른 면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199쪽)이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위 책에서 “자유만이 (억압의) 굴레를 깨뜨릴 수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알파걸>의 저자는 책의 말미에 “알파걸 정신은 우리 역사의 중심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한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어느 사회에도 여전히 “너무 똑똑하면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을까 봐 자신의 학습능력을 드러내기를 주저한다”고 했던, 페기 오렌스타인의 책 <여학생>(1994) 속의 여학생들이 있다.

그러므로 ‘알파걸’을 10대 소녀의 상징으로 미화할 수도 없고, 일반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들이 사회에 나와 머리 위에 얹힌 ‘유리천장’(소수자의 승진을 막는 보이지 않는 천장)을 과연 효과적으로 해체할지 낙관할 수 없고, 그 과정에 무수한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새롭고 야무진 계층은 지금 여기 우리 곁에서 희망처럼 자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최윤필 기자)

07. 01. 28.

P.S. 원저는 작년 9월에 나온 걸로 돼 있다. 번역이 초스피드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물론 사전 계약을 통해 국내 출판사에서는 원고를 미리 건네받을 수 있다). 분량도 352쪽으로 만만찮다. 국역본의 분량이 그보다 10여쪽 늘어난 데 그친 것은 놀랄 만하다(혹 참고문헌이나 후주가 빠진 것일까?). 그럼에도 역시나 놀랄 만한 건 책값이다. 번개같이 책을 출간한 걸 보면 판권료가 저렴하진 않았을 듯한데, 여하튼 궁금하긴 하다. 참고로, 국역본의 부제는 '새로운 여성의 탄생이지만, 원서의 부제는 'Understanding the New American Girl and How She Is Changing the World'이다. 그러니까 이 '알파걸'들은 일단 '뉴 어메리컨 걸'들이다. 한국적 현실과 얼만큼 관련되는지는 좀더 따져봐야 하는 것. 하지만 이미 '알파걸'을 인용하고 있는 시평들이 씌어지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칼럼들.

노컷뉴스(07. 01. 27) '알파걸' 세상 접수… 공부·운동·리더십 '남성' 능가

서울 은평구의 S고교는 남녀공학이다. 이 학교는 그동안 남녀학생을 구별하지 않고 내신등급을 매겼다. 하지만 지난해 신입생부터는 남학생은 남학생끼리, 여학생은 여학생끼리 각기 내신등급을 산출하고 있다. 남학생에 비해 여학생의 성적이 워낙 뛰어나 같이 묶어서 등급을 매기면 남학생들은 좀처럼 1등급을 받기가 힘들었고, 따라서 남학생 학부모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자 신입생들은 이 같은 학교의 조치에 당연히 항의했다. 또다른 ‘남녀차별’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학까지 서슴지 않는 남학생 학부모들의 반발을 우려한 학교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여학생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남녀를 구분해 내신 등급을 받는 ‘역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문제는 또 있다. 이 학교 남학생 1등급과 여학생 1등급의 차이가 너무 현저하게 난다는 것. 수학의 경우 여학생이 1등급을 받기 위해선 80점대 이상을 받아야 했지만, 남학생은 60점대 이상이면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과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남녀학생의 학력 격차는 크게 벌어져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히 고교 내신성적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진출은 이미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지난 16일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사법연수생 중 판사 임용이 예정된 여성은 전체(90명)의 64.4%인 58명이었다. 검사 임용이 예정된 연수생 100명 중 여성이 차지한 비율은 44%(44명)로 나타났다. 판·검사 임용을 앞둔 여성 비율이 전체 190명 중 102명(53.7%)으로 사상 처음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이처럼 급격히 커지고 있는 ‘여성 파워’의 현상을 최근 출간된 책 ‘알파걸’(댄 킨들런 지음, 미래의 창)은 ‘새로운 여자의 탄생’으로 파악하고 있다. 저명한 아동심리학자로 하버드대 교수인 저자는 1000여명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통해 “미국의 신세대 소녀들이 이전 세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층”이라며 이들을 ‘알파걸’로 선언했다.

미국 여학생중 약 20%에 해당하는 알파걸은 공부, 운동, 리더십 모든 면에서 남학생들을 능가하는 엘리트 소녀들이다. 재능과 욕심, 자신감이 넘치는 이들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제약을 느끼지 않는다. ‘소녀들은 자부심이 별로 없고 외모 때문에 비틀린 심리를 갖고 있다’는 통념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자신만만한 이들은 섹스와 남녀역할, 의존과 독립, 지배와 복종 같은 전통적인 사회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로 무장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과 동등하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다”고 이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장래 희망하는 직업에서도 이들은 전혀 여성으로서의 제약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장래 일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알파걸들의 응답을 보면, ▲의학·과학 분야 25.4% ▲수학분야 13.0% ▲공학·기업분야 12.3% ▲법·정치 분야 9.4% 순이다

알파걸이 탄생한 배경은 간단하다. 그동안 여성들이 힘들게 쟁취한 남녀평등이라는 토대 위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자와 남자의 출발선이 똑같은 조건에서 자란 첫 세대라는 것. 이 아이들은 남녀 구분없이 동등하게 부모의 관심을 받고, 동등한 교육을 받았으며, 동등한 사회진출 기회를 갖게 됐다. 그 결과 여자가 남자보다 더 우수해진,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알파걸 집단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축은 1980년대 말에 태어난 아이들로, 이때가 전환기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80년대 말부터 미국 대학에선 여학생 수가 남학생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알파걸들은 급격한 여성 상승세 속에서 성장한 것이다. 지난 2004~2005학년도엔 미국 전체 학위 취득자의 59%가 여자였다.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포함한 비즈니스계 영역에서도 여성의 리더십 역할은 상승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지 ‘포춘’ 선정 500대 기업에서 여성 기업간부는 15.7%, 여성 CEO는 1.4%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CEO 비율은 기업세계에서 여성들이 남자와 진정한 동격을 이루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알파걸들의 급속한 진출은 비즈니스계에서도 남녀의 역전 현상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문화일보 김영번기자)

경향신문(07. 01. 29) 딸

딸의 일생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지 못했다. 운전보조석에 앉아 운전수가 가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삼종지의(三從之義)의 길이 숙명이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르고. 여자 팔자가 뒤웅박팔자인 이유였다. 선택에 따라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 그 선택도 자신이 한 것은 아니었다.

딸의 인생은 흔적이 없다. 이름 없이 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의 아내로, 어느 누구의 어머니로만 존재했다. 총명한 것이 오히려 걱정이었다.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고 벼슬도 할 수 없었다. 시경 사간편(斯干編)도 그래서인지 “계집아이가 태어나거든/ 맨바닥 땅바닥에 잠자게 하고/ 실감개나 주어서 놀게 하고/ 술 데우고 밥짓기나 익히게 하라”고 읊었다.

어머니가 된 딸은 딸이 걸어가야 하는 그 기구한 인생길을 알기에 딸을 낳고 남몰래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고, 출가외인(出嫁外人)에 여필종부(女必從夫)였던 그 어머니를 보면서 딸은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항변했지만 여자의 일생은 오랫동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 풍습도 변하는 것. 그저 나이만 먹었던 올드미스는 인생을 황금빛으로 설계하는 ‘골드미스’가 되고, 일찍이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예견했듯 가능성 무한대의 ‘알파걸’이 등장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오랜 남아선호 사상도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국정홍보처가 전국의 성인남녀 25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자녀를 한 명만 가져야 할 경우 아들을 원한다는 응답이 1996년 40.4%, 2001년 31.2%에서 2006년 24.8%로 줄었다. 특히 출산을 가장 많이 하는 30대 부부의 경우 아들(17.3%)보다 딸(21%)을 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같은 세태변화는 여성들이 당당한 인격체로서 사회의 많은 영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젊은 세대들이 노후를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반쪽 사회에서 양쪽 사회로의 전환, 사회의 양대 축이 함께 뛰는 미래는 아마도 더욱 활기찬 시대가 될 듯하다.(이영만 논설위원)

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딸아이를 위해서 한번 읽어볼까 생각중이다. 가격도 저렴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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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1-29 00:26   좋아요 0 | URL
이 글들을 보고 떠오른 질문
1. 알파걸과 마담 스피커는 어떤 관계일까?
2. 상위로 올라갈수록 여성이 급격히 줄어드는 구조에 대해 알파걸들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3.알파걸들은 여성의 정체성으로 영향력을 드러낼까 아니면 남성들의 정체성에 편승하는 것일까?
4. 교대를 지원하는 2명의 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남교사가 급격히 줄고 있는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남학생들의 쿼터를 줘야 할까?" 각각 찬반으로 갈렸다. 한 학생은 '공정한 대결'에 초점을 한 학생은 '학생들의 교육권'에 초점을 두었다.
5. 최재천 선생이 한 칼럼에서 미래에는 정자은행에서 건강한 정자를 받아서 출산을 할 수 있으므로 남성이 '잉여존재'로 전락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학사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저항과 은폐의 역사라고 한다. 가능한 이야기일까?

물론 답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난 김에 적어 보았습니다.

로쟈 2007-01-29 00:36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질문들이네요. 제가 답변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제 생각은 보다 단순한데, 인구학적 관점입니다. '장래 권력과 영향력 있는 사회계층으로 진출하는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사회가 그만큼 바뀌는 거라고요. 그에 대한 이런저런 염려와 걱정은 나중 문제일 거 같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이 바꾸어가는 거라고 말할 때 제가 믿는 건(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인구'(쪽수)입니다(피플 파워는 그 한 예가 아닐까요?)...

승주나무 2007-01-29 00:50   좋아요 0 | URL
저는 '여권'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특히 우리 같은 남성들이 사용할 때 다소 '수세적'이라는 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많이 올라왔구나 하는 거죠. 최초의 총리, 최초의 헌재소장 (내정자) 하는 말들이 자꾸 거슬립니다. 제가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피해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진정한 인간'(반쪽짜리 인간이 아닌)이 되고 싶은 겁니다. 저도 쪽수를 믿지만, 그보다 '반대급부'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남성들이 전향적인 자세를 잡게 되고, 그것이 모든 면에서 '나은' 자세라는 확신에 도달하는지 기다려볼랍니다. 그 전에는 '반쪽짜리 쪽수'에 알파 걸들의 '고군분투'가 당분간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당~~

로쟈 2007-01-29 08:35   좋아요 0 | URL
딸을 원하는 부모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부터가 '전향적인' 자세 아닐까요? 앞으로 한 세대쯤 지나면 양상이 많이 달라질 거란 생각이 들고, 전향 이전에 그러한 상황에 '적응'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인간은 '반쪽'이 정상 아닐까요?^^ 성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승주나무 2007-01-29 10:41   좋아요 0 | URL
생물학적으로 반쪽이라 해서 반쪽이 '완성(?)'됐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반쪽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어느 한 쪽이 한쪽을 포함한다거나 위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내재돼 있을 때 '원래 반쪽'이라는 말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성의 발견이 있어야 그에 따라 남성의 발견이 생기고, 반쪽이나 인간도 그때에야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딸을 원하는 부모들이 많아진 것은 확실히 전향의 증표이지만 남아선호가 정상화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셋째, 넷째에 가서는 그 차이가 조선시대못지 않다는 건 거대한 뿌리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ㅋㅋ 이야기가 논쟁의 모양이 되었군요. 무서버요^^

로쟈 2007-01-29 11:42   좋아요 0 | URL
생물학적 관점이라고 한 건 완곡어법이었고, 사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 '진정한 인간'이란 표현 자체가 텅빈 기표가 아닌가라는 것이었습니다('여자는 없다'란 라캉식 테제를 확장하자면 결국 남자와 여자의 합으로서의 '인간'은 없다는 게 논리적 귀결이어서요). 한데, 너무 긴 얘기입니다... 출산률이 1.1명도 안 되는 나라에서 셋째, 넷째까지 키우시려는 분들의 '선택권'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moonnight 2007-01-29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신문에서 이 책에 대한 기사를 읽고 흥미가 생기더군요. 그땐 몰랐는데 책값도 상당히 저렴하군요. 읽어봐야겠네요. ^^

sommer 2007-01-29 16:57   좋아요 0 | URL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이 생정치(bio-politics), 더 나아가 알파걸이라는 새로운 종을 선택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셈이군요. 알파걸을 남아선호의 반대편보다는 주체의-선택에서 배제된 혹은 거절하는-반대편에 놓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건 왜일까요...

로쟈 2007-01-29 17:14   좋아요 0 | URL
저는 쪽수가 결과적으론 우발적인/잉여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믿는 편입니다. 알파걸이란 새로운 명명에 대해 예단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좀더 지켜볼 필요도 있지 않을가요? suture님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일적이며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사실 '완벽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죠). 뭔가 구멍이 있는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