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인가 한국일보에서 새로 연재하는 '우리시대의 고전50' 관련기사와 목록을 옮겨온 일이 있다. 선택과 배제의 문제가 개입하긴 하지만 어떻든 이런 캠페인을 통해서라도 동시대의 삶과 인식의 지평을 밝혀주고 넓혀준 책들을 다시금 상기해보는 일은 뜻깊다고 생각한다. 내일자 신문에는 그 여섯번째 연재가 게재되는 듯한데, 도정일 교수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민음사, 1994)을 다루고 있다. 모처럼 내가 완독한 책이기도 해서 거리낌 없이 스크랩해놓는다. 그게 벌써 12년도 더 전의 일이군.

기사에서 문학평론가로 호명되고 있지만, 이 책은 저자의 유일한 문학평론집이면서 유일한 단행본 (단독)저작이기도 하다. 기사의 말미에도 비치고 있지만 12년 전에도 저자는 원고 더미를 정리해서 당장이라도 서너 권 정도의 책은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세월무상이다. 아직 한권도 안 나왔다.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일에 너무 헌신하신 탓인 듯한데, 책읽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일급의 저자 한 사람이 책을 낼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 독자로서 안타깝다. 가령,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같은 제목의 책이라면 서가에 꽂아둠 직하지 않은가? 그 안타까움을 나눠드리고 싶다.

한국일보(07. 02. 08) 풀밭에 앉아 詩를 쓰다 여우비에 젖는 꿈을 꾸다

"친구여, 닭을 잡아 먹지 마라 / 그 닭은 그대의 할머니일지도 모르므로.”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에서의 메타포는 미상불 기괴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더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시인의 말을 빌면 할머니를 소스에 찍어 먹는 형국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오늘날 그 같은 행위는 광범히 유포돼 천연덕스런 일상이 되고 말았다.

문학평론가 도정일(66)씨는 오비디우스의 시구를 끄집어 내고,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시인들로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마지막 인내력마저 소진시켰음에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그 같은 확신의 밑바닥에는 이런 명제 하나가 불길하게 흐물대고 있을 거라고 그는 예시한다. ‘자동 판매기가 / 고무 호스로, 밑을 대주는 종이컵들을 윤간하고 있다. / 창녀들은 포주의 뱃속에서 / 밥을 빌어 먹는다.’(최승호의 <무인칭 시대> 중)

운문의 형식을 빌어 그려진 저 지옥도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는 말한다. “1970년대 이후의 한국사는 과거 어느 시기 것과도 다른 욕망 생성의 사회적 환경, 정확히 말하면 ‘천민 자본주의’의 환경 속에서 씌어져 왔다. 21세기, 저 환경은 더욱 정교해져 ‘탐욕’이라는 형태의 지배적 욕망을 사회적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책 이미지

그가 여기 저기 실린 평론들을 묶어 처음으로 낸 책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읽어 낸 생명들의 표정이다. 시적 분석의 형태를 취하지만, 곳곳에서 문명 비평의 체취를 짙게 풍긴다. 전례를 찾기 힘든 글쓰기에, 사람들은 ‘경쾌한 듯 한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서 배제당한 자연은 역으로 인간을 배제한다. 시인은 눈 내리는 숲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비를 겁내고, 농사꾼은 땅을 믿지 못한다. 비슷한 이유로, 풀잎은 시인을 배제한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비 맞으면 안 돼”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깊이 박혀 있다’ 또는 ‘농약 끈적한 풀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함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비는 시인을 배제한다’는 진술을 보라.

푸른 강 대신에 그에게는 ‘똥물’이 있고, ‘똥통’이 된 지구가 있다. 시인들마냥, 그 역시 강으로부터 배제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과 함께 사는 듯이 생각하는 환각의 능력이 필요하고 감성 분열의, 평론가적 능력이 필요하다. 책의 말마 따나 산성 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어느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그 같은 현실 앞에 낭패감을 느끼고, 처리 곤란한 딸꾹질에 내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그는 고백한다. “마르쿠제가 강조했던 것처럼 자연이 노예화할 경우,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 자신도 노예화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죠. 자연에 발생한 재난은 곧바로 문학의 재난이며, 자연의 수난은 곧장 문학 자체의 수난이에요.”.

문명 비평 같기도 하고, 시민 운동을 위한 굳건한 지지대 같기도 하고, 개성 넘치는 사유에 빚지고 있는 수상록 같기도 한 이 책은 이 강퍅한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 지를 예시한다. 창작과비평 등 잡지ㆍ강연 등에 산발적으로 소개된 글들을 어느 눈밝은 편집자가 모아 두었다, <녹색평론>에 썼던 제목을 내세워 단행본으로 묶은 이 책은 1994년 1쇄를 찍은 이래 현재 10쇄까지 찍었다는 기록에 빛난다. 그 와중에 1만부 팔리고 절판된 기록도 갖고 있는, 별난 문학평론집이다. “게으른 나로서는 수정ㆍ보완까지 했죠. 10년이 지났는데도 갖고 와, 사인을 부탁하는 독자에, 저도 놀랄 정도예요.” 아예 재판을 내자는 제의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

책은 한국 사회가 아직 그 광풍을 체감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눈을 치켜 뜨고 있다. 그것은 인문학자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믿는다. “동유럽 붕괴, 마르크시즘 퇴조 등에 대한 대안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주의와 해체론 쪽으로 갔어요. 책 속에 일관된 반포스트모더니즘론은 한 시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의 결과였죠.”

비판의 칼날은 보건 사회ㆍ청결 사회에 대한 집착, 웰빙에 대한 광적 증후에 예리하게 번득인다. 원로 인문학자의 의무감이기도 했다. “삶의 부조리, 유한성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인문학이니까요. 행복 이데올로기에 미친 시대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릅니다.”

책은 위기에 처한 우리 시대 인문학이 택할 수 있는 방편도 제시했다. 문학인들끼리 통하는 언어만이 아닌, 문학과 대중의 괴리를 좁히고 문학이 대중의 삶에 어떤 영향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이라고 서문이 밝힌 대로다. “문학과 삶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환기시키자는 나의 비평적 모토가 발현된 거죠. 대학에서의 난삽한 비평 논의는 대중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필요하니까요.” 그는 한국 문학 평론이 그 부분에서 돌파구를 열지 않으면, 문학 평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힘 준다.

평론의 형식과 문체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에세이나 문학 저널리즘 같은 문체로, 대중의 삶에 접착된 형식말예요. 친근한 용어를 구사, 이론성ㆍ난삽성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인문학적 글쓰기.” 이런 종류의 평론은 처음 접했다며 일반인들은 반겼다. 대학 비평, 문학 이론 가르치며 한국 문학 현장 비평은 삼가왔던 그가 <문예중앙> 주간 정준수의 ‘꼬드김’에 몇 번 연재했던 계간평이 거둔 결과를 보면 자신도 좀 놀랍다. “이미 당시 문학 평론과 대중 간의 괴리는 심화돼 가고 있었죠. 지금은 서로 백리 밖이지만.”

이 반자연적 시대, 그의 책이 노둣돌 삼는 ‘숲’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태 환경이에요. 좁게는 자연, 넓게는 자연과의 관계죠. 지금 한국은 볼거리 문화로 사람들을 마취시키려는 서커스 정책으로 통합돼 있잖아요?” 364쪽에 달하는 책은 눈ㆍ비 오면 오히려 두려워 하는 이 시대, 즉 자연이 망가진 때 문학이 당해야 하는 곤경을 증거한다. 삶의 모태인 자연을 착취ㆍ파괴하는 현상을 왜 추방해야 하는지, 문학은 철저히, 뼈저리게 느껴야 함이 동시대 우리 문인들의 육필로 증거돼 있다. 사회 혁명, 생산 양식, 소비 양식에 왜 일대 전환이 이뤄져야 하는지도. “생태란 게 어떻게 문학 속으로 용해될 수 있나를 보여주자는 거 였죠.”

그러나 어느 누가 냉장고를, 자동차를 포기할 것인가? “예술 작품이나 교육 같은 일상의 삶 속에서 풀어갈 수 있어야죠.” 그는 일상, 즉 현실에 아직도 문학이 할 일은 남아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대중 문화에 쫓겨, 문학 자체가 변두리에 내몰린 때예요.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삶에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인식부터 확산돼야 하는 시기죠.” 그는 이 책이 예술ㆍ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기를, 나아가 평론가들이 문학과 소비자들 간의 연결 고리를 재정립해 주기를 소망한다.

책 속에 드러난 바, 그의 현실 인식 지형도를 고려한다면 상황은 화급하다 ‘지금의 문학은 오락의 한 형태다. 대중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오락물의 형태로 이동해 가고 있다. 문학과 오락의 화간(和姦) 시대다.’ 그는 “문학이 이제 아예 말초적ㆍ외피적ㆍ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품어 온 문학의 속성 혹은 운명론이 있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반(反)행복론이라는 것이다. “독자의 엔터테인먼트 수준을 높이게 하고, 다양하면서도 근원적인 딜레마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기려 하죠. 삶이 말초적 오락의 수준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예술이 문학이니까요.”

생태 파괴와 간통한 온난화가 성큼성큼 한반도를 잡아 먹으려 오는 때, 그의 말은 이 책의 속편을 암시한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그들은 하루하루 눈앞의 삶에 매여 있다. 그들에게는 개발 정책만큼 매력적인 것이란 없다. 한국에서, 환경청이란 영원히 찬밥 신세 아닌가?”

‘책 읽는 사회…’ 5년 활동, 농어촌 57개 도서관 재건

명함이 말하듯, 또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는 글보다 행동으로 더 이름 높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그의 명함이 알려주는 바, 그는 <책 읽는 사회 문화 재단>의 이사장이다. 시인이 숲으로 가지 못하는 시대, 그의 책은 숲속에 안주할 수 없었다. 그가 책의 숲에서 사람의 숲으로 온 것은 1999년 문화연대 출범에 맞춰 시민운동에 적극 관여하기 시작하면서다. 그는 뛰면서 생각하고 발로 썼다. 잡지사, 언론사, 대학 교수(작년 2월 퇴임) 등을 두루 거쳐 지금은 민간 사회 운동의 축이 된 그가 한갓지게 자연을 완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평론이라도 그가 쓴 글은 여느 책상물림의 글과 달랐다. 신문의 칼럼을 써도, 그의 논조는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죽통에 쉬파리 엉기듯 달려들어 세상의 소음을 늘리는 데 공헌하는 3류 학자’(<시인은…> 389쪽)의 글이 아니었다. YS 정권 때는 정부의 문화 정책 자문에, DJ 때는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에 적극 응했던 그의 관심은 현실 속의 문화 운동 또는 정책이었다.

지난해 2월 경희대 퇴임 직후, 지인들은 “책 없는 퇴임 없다”며 “책 내고 강연회도 갖자”고 성화였다. 그러나 팔 걷어 부치고 뛰어든 <책읽는…> 사업에 열중하느라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2002년 받은 암 수술은 그를 더욱 강하게 했다. “지난 5년 동안은 ‘책 읽는 사회…’ 사업에 송두리째 바쳤지만, 그 동안 잃어 버린 시간들을 앞으로 복구해 낼 것”이라 다짐한다. 대기업의 기부를 받아, 지난해 9월 이후 농어촌 낙도 지역의 도서관 57개를 도시 도서관 뺨치는 수준으로 리모델링한 ‘작은 도서관 사업’은 한국 땅에서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공공 지식’의 중요성을 새삼 알려낸 쾌거로 기억된다.

그의 컴퓨터에 간직돼 있는 20여권 분량의 원고는 더러 제목만으로도 족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라니. 상생, 평화, 선린, 공존 등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체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책이다. 이성복 시인의 어투를 흉내낸다면, 일에 밀려 하드 디스크에서 뒹구는 원고들은 언제 잠을 깰까?(장병욱 기자)

07.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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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2-07 23:38   좋아요 0 | URL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상생, 평화, 선린, 공존 등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체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책이다. ' 이군요

 크리스티나 페리로시의 이 책이 생각났어요. 스페인좌파작가의 쓸모없(어 보이)는 노력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좀 비슷한 색인가요? ^^


로쟈 2007-02-07 23:58   좋아요 0 | URL
거기에 '쓸모없는 독서의 노력'도 덧붙여야 되겠네요.^^

기인 2007-02-08 00:03   좋아요 0 | URL
아; 도정일 선생님의 유일한 단행본이라는 말씀은, 평론집으로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유일하다니 놀랍네요. 퍼갑니다. 읽어봐야 겠네요. 한국일보 즐찾해야겠어요 ㅋ

로쟈 2007-02-08 00:15   좋아요 0 | URL
단독저작으론 제가 알기로 유일합니다...
 

어제 유고슬라비아 시인 바스코 포파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문학동네, 2006)을 구입했는데, 정현종 시인의 '추천의 글'이 맨앞에 적혀 있었다. 시인이 경험도 나와 다르지 않아서 '작은 상자'란 시를 통해 바스코 포파를 처음 만난 인연을 고백하고 있었다. 한데, 다른 시들은 대략난감이었던 듯,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번에 번역되어 나오는 이 선집이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니 대체로 해독이 쉽지 않은데, 그 점은 영역자인 찰스 시믹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써, 그는 그 까닭을 포파의 시가 갖고 있는 세르비아적 전통 - 역사, 민속, 신화 등 - 이라는 배경과 시인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에서 찾고 있다.

인용문에서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는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가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게 어제의 일이다. 암튼 정현종 시인과 궁합이 더 잘 맞는 시인은 아무래도 스페인어권 시인들이고 그 중에서 파블로 네루다를 빼놓을 수 없겠다('정현종과 네루다'란 글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네루다의 시편들을 여럿 우리말로 옮긴 바 있는 시인이 이번에 더 보태서 두 권의 네루다 시집을 새로/다시 출간했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사실 청년 네루다의 대표작인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나대로 자세히 읽기를 시도해본 적도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CNO=0&PCID=492&CType=1&paperid=793966). 찾아보니 작년초의 일이다. 그때 참조했던 정현종 시인의 번역은 완역이 아니어서 다소 아쉬웠는데, 이번에 완역본 시집이 나왔다니 반갑다. 유고에서 아르헨티나로의 시적 여정을 이 겨울의 마지막 '여행'으로 삼아봐야겠다... 

경향신문(07. 02. 08) 정현종시인 네루다 첫시집 ‘스무 편의…’ 완역

시인 정현종씨(67·전 연세대 교수)가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정시인은 1989년 번역했던 네루다 시선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를 통해 네루다의 존재를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그후 네루다는 노시인이 우체부에게 시를 가르치는 내용의 영화 ‘일 포스티노’ 등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고, 그의 시선집도 94년 개정판이 나오는 등 스테디셀러가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종전의 시선집 번역을 가다듬어 ‘네루다 시선’(민음사)으로 제목을 바꾸고, 네루다의 첫 시집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21편을 모두 번역해 원래의 제목을 되돌려줬다. 국내에서 시선집 제목이었던 ‘스무 편의…’가 시집 제목으로 바뀐 것이다.

“개인적으로 네루다, 로르카(스페인), 릴케(독일)를 20세기의 위대한 시인으로 생각하며 그중 최고는 네루다라고 본다”는 정시인은 네루다 시집 ‘백 편의 사랑 소네트’(문학동네)를 이미 번역했으며 ‘충만한 힘’이란 만년의 시집도 새로 번역할 계획이다. 그는 네루다 탄생 100주년이던 2004년 칠레 정부가 전 세계의 문화인 100인에게 수여한 네루다메달을 받기도 했다.

“네루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시가 언어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생동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의 시를 통해 드러날 때 사물은 희희낙락하는 것 같고, 스스로의 풍부함에 놀라는 것 같아요.”



태국·중국·일본 등 극동 주재 영사를 지냈던 네루다는 광산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상원의원에 출마, 정치를 시작했고 아옌데 민주정권을 지지했던 현실참여 시인이었다. 초기 낭만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시는 후기로 가면서 역사가 들어있는 혁명시로 바뀐다. 그래서 민중 시인 김남주씨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됐을 때 네루다의 시를 틈틈이 번역해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88)라는 번역시집으로 내기도 했다.

그러나 서정 시인 정현종이 보는 네루다의 미덕은 남미의 풍성하고도 신비로운 자연 속에서 태어난 초현실주의적 상상력, 만물과 하나가 되는 힘이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책으로는 처음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된 시집 ‘스무 편의…’는 열아홉살의 시인이 지닌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랑시들로, 젊은날 사랑의 소용돌이를 열광적 호흡으로 노래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한 여자의 육체’ 일부)

정시인은 “‘터널처럼 외로웠다’는 말이 얼마나 신선하고도 놀라운 표현인가”라고 물으면서 “성욕의 충동에 따른 즐거움과 괴로움, 감정의 소용돌이가 시라는 형식을 통해 질서를 얻은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 “스무 편의 사랑시의 시로 끝났으면 밋밋하고 싱거웠을 텐데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덧붙인 게 묘미”라며 “사랑의 상실 없이, 사랑이 어떻게 열매를 맺겠는가”라고 말했다.(한윤정기자)

07.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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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세상을 떠난 오규원 시인의 장례식이 엊그제 강화도 정족산에서 있었다고 한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 것으로 추념을 대신한다.

중앙일보(07. 02. 06) 시인 오규원, 소나무 아래에 잠들다

소나무 가지가 흔들린다. 바람 한 줄기 불어온 모양이다. 시인 오규원이 갔다. 강화도 정족산 기슭의 소나무 아래에 묻혔다. 이름하여 수목장(樹木葬). 시인의 뼛가루는 송진이 되고 가지가 되었다가, 이윽고 솔방울로 매달릴 것이다.

5일 오후 2시쯤. 산비탈 소나무 숲에 고인의 옛 제자들이 두 손 모아쥐고 둘러섰다. 이창기.이경림.신경숙.황인숙.윤희상.장석남.박형준.양선희.최정례.이원.강영숙.천운영.윤성희.조용미 등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제자들이다. 선생으로부터 호된 꾸지람 들으며 시를 깨우친, 이제는 어엿한 시인과 소설가가 된 제자들이다.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들'('프란츠 카프카' 부분)이다.

평생의 절반을 알고 지낸 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추모시를 읽었다.

'문득 돌아보니,/규원이, 자네가 없네./둘러보아 찾아도/규원이, 자네가 없네./…/규원이, 자네/이제 무엇이 되려는가./여기로부터 자리 옮겨/어디로 가려는가./…/나무 한 가지의 정령이 되어/영원의 하늘로 솟아 날아오르려는가/그것이 허망한가/그것이 슬픈가, 한스러운가.'

시인은 1991년부터 아팠다. 흔히 폐기종으로 알려진, 만성폐쇄성폐질환이란 희귀병을 앓았다. 허파가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기능을 잃어 인간이 누리는 산소의 20%만으로 살아야 하는 병이다. 하여 강원도 인제.무릉, 경기도 양평 등 공기 맑은 곳에서 귀한 숨 아껴가며 시 쓰고 살아왔다. 지난달 숨이 가빠왔다. 병원에 입원했고, 병문안 온 시인 이원의 손바닥에 선생은 손톱으로 시를 썼다.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1월 21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2월 2일, 시인은 66세의 일기를 마감했다. 병문안 왔던 이경림.최정례.양선희는 졸지에 선생의 임종마저 보게 됐다. 추모사에서 신경숙은 "그렇게 편찮으신 대로, 그렇게 늘 곁에 계실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겨우 말했다.



고인은 한글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한국 시사에서 오규원이란 이름은 자체로 하나의 계보였다. 수다한 제자 때문이 아니다. 그가 평생토록 쌓은 시업(詩業), '날이미지의 시론' 때문이다.

'주체중심,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서 그 관념을 생산하는 수사법도 배제한, 그러한 상태의 살아 있는 이미지들을 시에 구현하는 것, 그것이 날[生]이미지 시이다.'('날이미지와 시'에서, 2005년)



인간의 관념이나 수사 따위로 오염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그는 추구했다. 그래서 시창작실습 시간, 제자들이 밤새 쓴 습작원고에 시뻘건 줄 죽죽 그으며 "시가 되지 않는 것은 버려라" 호통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늘 무섭게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업 끝나고나면 선생은 막역한 친구가 됐다. 맞담배를 폈고, 후루룩 함께 라면을 들이마셨다. 87년 제자들이 길거리로 나가겠다고 결의했을 때, 선생은 "막는 것은 옳지 않겠지, 다치지만 말아라…"고 말했다.

강화도 시인 함민복은 꾹꾹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 공장에서 학비를 번 뒤 늦깎이로 선생의 제자가 된 시인이다. 굳이 서울예대를 선택한 까닭을 그는 "오규원 선생이 계시잖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오규원 선생이 하필이면 떠돌이 시인이 정착한 바로 그 섬에 묻히고 있었다. 선생의 제자 문인들은 그래서, 농반진반으로 그를 능참봉으로 명했다. "선생을 평생 곁에서 모시게 됐다" 했더니 "이제부터는 바람소리 하나도 예사롭지 않겠지요"라고 답한다.

소나무 가지, 또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손민호 기자)

07.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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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오규원 선생님 돌아가신 소식도 모르고 있었네요...

로쟈 2007-02-0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계 소식도 바로 올렸었는데...
 

오전부터 프레드릭 제임슨과 씨름하려니까 지겨기도 한데, 잠시 짬을 내 '러시아 이야기' 하나를 올려놓는다. 러시아 관련 뉴스라야 '테러 아니면 에너지'가 주종이었고, 최근에는 단연 에너지 관련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한 행보에 대해서 '에너지 파시즘'으로 경계하는 한 칼럼이며 프레시안에 번역 전재된 걸 스크랩해놓는다. 내용 자체는 새로운 게 없지만(푸틴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처음 알게 됐다), '에너지 파시즘'이란 선정적인 용어가 일단 눈길을 끌고 관련정보들을 정리해놓은 의의가 있다. 아래 편집자의 말에 이어지는 것이 그 칼럼이다.  

다음은 미 뉴햄프셔대 마이클 클레어 교수의 '석유 패권과 핵 르네상스기': 에너지 파시즘의 두 얼굴(Petro-Power and the Nuclear Renaissance: Two Faces of an Emerging Energo-facism)'을 완역한 것이다. 에너지정치학의 국제적 권위자인 클레어 교수는 석유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석유 확보를 명분으로 한 파시즘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한 앞의 글('우리의 미래는 에너지 파시즘인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에너지 초강대국으로 급부상 중인 러시아를 모델로 에너지 파시즘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의 소유하고 있는 에너지 재산을 비합법적 방법으로 국유화 한다든지, 에너지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도구로 활용한다든지 하는 등 러시아가 에너지 패권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몇 가지 모습들이 에너지 파시즘의 어두운 얼굴이라는 것이다. 
  
석유나 천연가스가 고갈된 자리를 원자력이 메우게 되면서 그 시설을 방어하고 그 부산물의 유출을 감시하기 위한 정부 통제권이 강화되라라는 전망 역시 파시즘의 도래를 우려케 한다. 이에 클레어 교수는 "대다수의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의 초점을 정부 통제력을 증가시키거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두려 한다"며 '지각 있는 시민'이 이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 원문은 미국 진보성향 인터넷 매체인 <톰디스패치닷컴>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프레시안(07. 02. 07) 러시아, '에너지 파시즘'의 정점에 서다

전편에서 말한 것처럼 앞으로 수십년간 세상사를 지배하고 일반 사람들의 삶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이슬람 파시즘'이 아니라 '에너지 파시즘'이다. 즉 갈수록 줄어드는 에너지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지구적 군사투쟁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의 정부 관료들이 국가 에너지 수요를 시장의 힘에 맡겨두기보다는 에너지의 확보, 수송, 할당 등을 정부가 직접 책임지고자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에너지 확보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무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돼 있다.
  
이러한 에너지자원 확보의 절박성은 미국의 경우, 미군의 업무를 '세계 석유 보호기관'으로 전환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밖에 에너지 파시즘의 도래를 알리는 또 다른 징후로는 러시아의 '에너지 초강대국'으로의 급부상,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안전 등을 이유로 한 국가권력의 감시 및 통제가 강화될 것이란 점을 들 수 있겠다.

에너지 부국이 곧 강대국이 되는 시대
  
에너지 수요는 증가하는 데 반해 공급은 줄어드는 상황에서(최소한 공급 증가가 수요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 세계는 크게 에너지 부국과 에너지 빈국으로 나뉘게 됐다.
에너지 부국들은 에너지(석유, 가스, 석탄, 수소에너지, 우라늄, 대체에너 자원 등) 자체 보유량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아 다른 나라에 수출까지 한다. 반면, 에너지 빈국들은 부족한 에너지자원을 수입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거나 아니면 에너지 부족의 뼈아픈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지난 50년간(1950~2000년)은 에너지가 풍부하고 값이 쌌기 때문에 에너지 부국과 빈국 간의 차이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일본처럼 어마어마한 부자거나 영국, 프랑스처럼 핵무기를 갖고 있거나, 하다못해 나토 동맹국이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들처럼 '힘센 우방국'이 있다면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도저도 없는 국가들은 고생을 해야 했다. 아직도 이들 국가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는 외채위기는 사실 에너지부족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돈이 많다거나 핵무기가 있다든가, 또는 강력한 우방국을 갖고 있다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다. 오히려 에너지 부국이냐, 빈국이냐의 차이가 더 중요해졌다. 돈 많고 힘 있는 미국과 일본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에너지 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의외로 적다. 호주, 캐나다, 카자흐스탄, 쿠웨이트, 나이지리아, 카타르,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현재의 혼란이 극복된다면) 정도다. 그 외에 몇 나라 더 있을까. 이들 나라는 선망의 대상이다. 일단 엄청난 가격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고, 이들 나라의 지도층들은 충분한 에너지 확보를 원하는 다른 나라 지도층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혜택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들을 싸움 붙여 이득을 챙길 수도 있다. 워싱턴과 베이징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초대받고 있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이런 게임에 아주 능숙한 지도자다.
  
심지어 단순한 경제적 혜택을 보장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에너지 소비국은 국가운영에 필수적인 석유와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판매를 보장받기 위해 에너지 공급국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다.

러시아의 가스는 '패권의 방향'으로 흐른다 
  
냉전이 끝난 후 러시아는 희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초강대국'은 이미 과거의 얘기였고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그리고 영향력 면에서도 한물 간 것처럼 보였다.
수 년 간 미국 관리들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미국이 이끄는 나토가 동유럽의 러시아 위성국가에까지 확장됐고, 요격미사일금지협정(ABM)은 일방적으로 폐기됐다. 미국 정부의 수많은 관료들이 러시아를 역사적 유물 이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세계사에서 러시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최후의 미소를 짓는 자'는 워싱턴이 아니라 모스크바인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양의 석유와 우라늄은 물론 유라시아 최대의 천연가스와 석탄 보유량을 자랑하는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 '승자'가 됐다.
군사 초강대국이 아닌 에너지 초강대국이 된 것이다. 어찌됐건 초강대국은 초강대국인 셈이다.
  
먼저 큰 그림을 보자. 러시아는 천연가스 생산에 있어 '절대강자'다. 영국의 BP 석유그룹에 따르면 러시아의 천연가스 보유량은 측정된 것만 1700조 입방피트에 이른다고 한다. 전 세계 천연가스 공급량의 27%를 차지하는 양이다. 이 사실은 보기보다 갖고 있는 의미가 더 크다. (러시아 에너지 자원의 주요 고객인) 유럽과 옛 소련국가들의 천연가스 의존 비율이 34%로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높기 때문이다. (석유를 주 연료로 하는 미국의 경우 천연가스 의존도는 25% 정도다.) 유라시아 가스 공급원을 주도한 덕에 러시아는 다른 에너지 공급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배적 공급자의 위치를 누리고 있다.

물론 석유 공급에서도 러시아는 강력한 우위를 갖고 있다. 세계 1위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하루 1100만 배럴을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고작 140만 배럴 뒤져 있을 뿐이다(2006년 초 기준) . 게다가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석탄이 매장돼 있는 나라이자 현재 31개의 원자로가 가동 중인 주요 원자력 소비국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1999년, 집권 직후부터 이 넘쳐나는 에너지를 러시아 패권 부활을 도모할 만한 정치적 무기로 바꾸는 계획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러시아에서 수출되는 에너지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에서 러시아 송유관을 통해 유럽에 공급되는 에너지까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푸틴 대통령은 냉전 시대에 누렸던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의 일부나마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1990년 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됐던 가스 산업을 다시 국유화하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에너지 산업도 모두 국가의 지배 아래 둬야만 했다. 공산주의 법체계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이 같은 국유화를 합법화할 길이 없었기에 푸틴은 불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이 귀중한 자산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에너지파시즘의 도래를 관찰할 수 있다.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을 국가가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푸틴의 오랜 지론이었다. 푸틴은 1999년 '러시아 경제 발전을 위한 전략상의 광물자원'이란 제목의 박사학위논문 요약본에서 러시아 정부는 국가의 광물자원 활용을 감독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이익의 위해서라면 이미 개인사업자 손에 들어간 석유 부분도 예외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천연자원, 특히 광물자원에 대한 획득과 사용 과정을 제어할 권리가 있다. 그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에너지파시즘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정의를 상상하기는 힘들 것 같다.

석유 재벌 체포하고 석유 기업은 정부 품에
  
이 같은 푸틴의 속셈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이른바 '호도르코프스키 사건'이다. 지난 2003년 러시아 최대 석유재벌이던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이 사기 및 세금포탈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미국) 엑손모빌과의 합작회사 설립 등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난 온갖 에너지 판매를 추진해고, 러시아 내 반(反)푸틴 정치세력을 지원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으로도 크렘린의 격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푸틴이 이 사건을 기획한 최종 목표는 유코스의 주요 자산인 유간스크네프트가스를 빼앗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유간스크네프트가스는 러시아 석유 생산의 11% 가량을 담당하고 있었다. 호도르코프스키와 그의 측근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정부는 유간스크네프트가스를 경매에 부쳐 명의뿐인 유령회사에 넘긴 다음 곧 국영기업인 로스네프트에 시장가 이하의 가격으로 되팔았다. 푸틴은 순식간에 민간기업인 유코스를 분할해 러시아 최대의 국영석유생산업체 로스네프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푸틴은 석유 및 가스의 수출, 공급도 국가가 장악하려 했다. 민간 기업의 송유관 건설을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국영기업 가스프롬의 천연가스 독점과 역시 국영기업인 트랜스네프트의 송유관 독점은 확고해졌다. 미국과 다른 에너지 소비국들은 민간 기업의 송유관 건설을 오랜 기간 압박해 왔다. 유럽과 다른 해외 시장에 공급되는 에너지의 양을 늘리는 동시에 가스프롬과 트랜스네프트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렘린은 제도적으로 이 같은 노력을 배제시켜버렸다.
  
에너지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합법성 여부가 의심되는 방법으로 정부가 장악해버린 것이 러시아가 보여준 에너지파시즘의 한 단면이라면, 러시아가 자원을 이용해 자원 빈국들을 러시아 주변에 묶어두는 데에서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악명 높은 사례로는 2006년 1월 1일 우크라이나로 공급되던 천연가스를 끊어버렸던 것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가스 가격을 두고 분쟁을 벌이던 가스프롬이 가스 공급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태를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의 친서방 정책에 대한 러시아의 경고로 믿고 있다.

이 사건이 한 겨울에 일어났음을 유념하라. 구소련 국가들과 동유럽 국가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의 주 난방 연료였다. 결국 가스프롬은 막판까지 가격 협상을 하다가 서유럽의 요란한 불만에 못 이겨 가스 공급을 재개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공급하던 가스를 내수로 돌려버리자 공급받던 가스에 결손이 생긴 서유럽이 큰 소리를 낸 것이다. 이제껏 러시아 정부가 해 온 모든 일이 결국 에너지를 공급하는 '수도꼭지'를 외교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였음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러시아 정부는 '근린국가(Near Abroad)'라고 부르는 이웃 국가들을 협박하기 위해 종종 이 전술을 사용해 왔다. 2006년 7월 29일에는 트랜스네프트가 누출 위험을 이유로 리투아니아 최대 정유소인 마제이큐에 대한 원유 공급을 중단했다. 마제이큐의 회장이 이 정유소를 러시아가 아닌 폴란드에 매각키로 했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였다. 이 같은 움직임을 지켜본 사람들은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회사가 정유회사를 인수하는 데까지 힘을 쓰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어 11월에는 가스프롬이 그루지야에 공급하던 천연가스 가격을 1000입방미터 당 110달러에서 230달러로 두 배 이상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가격을 올릴 수 없다면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그루지야의 친서방 정부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러시아 정부에 반항해 왔던 점이 일정 부분 감안된 정치적 압력으로 여겨졌다. 가스프롬은 12월 벨로루시에도 같은 장난을 쳤다. 주변의 헐벗은 국가들이 조금이라도 독립의사를 보이면 여지없이 가격인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가 보여준 에너지파시즘의 다른 얼굴이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원 빈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유라시아 그룹의 자문역인 클리프 쿱샨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에너지가 새로운 종류의 핵무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러시아는 석유권력을 공격적이고 영리하게 사용해 자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과 함께 르네상스를 맞을 '빅 브라더'
  
에너지파시즘의 마지막 얼굴은 원자력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차원의 억압과 감시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스와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수록 정부와 산업계 지도자들은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 추가 에너지를 공급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높은 우려도 이 계획을 부추길 것 같다.
  
석유, 가스, 석탄 등을 태울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가겠다는 계획을 거듭 말해 왔고 2005년 정부가 마련한 '2005 에너지 정책법'에도 미국에서 새로이 원전을 짓는 전기 사업들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를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등 다른 나라에서도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고, 이는 원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소위 '원자력의 르네상스기'라고 말하는 길에는 몇 가지 문제가 버티고 있다. 엄청난 부대비용이나 핵 쓰레기를 장기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이 상당부분 개선됐음에도 1979년 '쓰리 마일 아일랜드' 사건이나 1986년 체르노빌 사건 같은 핵사고 위험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원자력 산업이 성장할 미래에 대해 우려되는 점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원전 부지의 결정권이 연방정부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과 테러리스트, 범죄자, '불량 국가' 등에 대한 핵무기 이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개인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이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원자력 시설을 세우려면 (연방정부가 아닌) 시, 카운티, 주 정부 등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뒷마당에 원전이 설치되는 것을 반대할 권한을 갖는 것이다. 이는 지난 수 십 년간 미국 내 새 원자력 시설을 건설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 됐다. 법이 정한 대로 주 의회와 카운티 의회, 그리고 환경단체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규칙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원자력 르네상스기'를 절대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시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는 가난한 촌 동네에 원자로 몇 개가 세워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허가권을 연방정부가 장악해서 지역단체를 따돌리고 연방정부 관료들에게 새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발부할 수 있는 무한한 권한을 허락하는 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다고? 다음 정황들을 잘 살펴보라. '2005 에너지 정책법'은 지역 관료들로부터 '천연가스 재기화(再氣化) 플랜트' 설치를 허가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아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만드는 의미심장한 전례를 만들어 놓았다. 이 거대한 시설은 해외 공급자로부터 배로 수송된 액화천연가스를 미국 전역의 파이프를 통해 배달할 수 있도록 다시 가스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몇몇의 동서부 해안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 항구에 이 플랜트가 세워지는 것에 반대해 왔다. 폭발할 위험이 있고(완전 억지 주장은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저항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잃었다. 아, 지방자치여 안녕.
  
내 걱정은 여기서 출발한다. 미래의 정부는 '천연가스 재기화 플랜트'의 전례를 따라 원자로 설치에 관한 권한도 연방정부에 넘기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법' 수정을 추진할 것이다. 그리고선 보스턴,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덴버 등 대도시 인근에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원자로 신설 계획을 발표할 것이다. 추가 에너지 필요량의 긴급성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시민들은 궐기할 것이고 이들의 저항에 공감하는 지방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집단 연행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명령에 대한 반발과는 경우가 다르다. 엄연한 연방정부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고로 시위대를 제압하고 원자로 주변을 방어하기 위해 주 방위군이나 정규군이 소집될 수 있다. 에너지파시즘의 발동이다.
  
마지막으로 원자력 확산이 낳을 또 다른 위험은 원자력과 연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먼 관계더라도 정부의 조직적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라늄 농축시설, 원자로, 핵 폐기장 등 모든 핵 관련 시설과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테러리스트나 암시장 불법거래상인, 그리고 이란과 북한 같은 '불량국가'의 손에서는 핵 무기화 될 수 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물론 이 같은 시설에 종사하고 있는 개인과 하청업자, 그리고 재하청업자와 그들의 가족들까지 항시적으로 불법 가능성을 조사받을 수 있으며 24시간 엄격한 감시 하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다. 더 많은 원자로와 더 많은 핵 시설이 생길수록 일종의 감시 대상이 될 관여자들의 수도 늘어나고, 이들을 감시하는 보안 관계자들 역시 정부 정보국 차원의 더 높은 단계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매우 광범위한 '빅 브라더' 공식이다.
  
그런가 하면 '증식형 원자로'에 대한 문제도 있다. 증식형 원자로는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핵분물질들을 만들어 낸다. 플루토늄의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플루토늄은 원자로에서 태우면 전기를 생산해 내기도 하지만 핵무기원료로 이용되기도 한다. 비록 미국에서는 증식형 원자로의 건설이 금지돼 있지만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화석 연료와 그 역시 한정 자원인 천연 우라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건설 중에 있다. 원자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나라들이 증식형 원자로를 짓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여기엔 미국도 포함될 수 있다. 이는 폭탄에 가까운 플루토늄의 세계적 공급을 광범위하게 증가시킬 것이고 모든 면에서 원자력 산업에 대한 정부의 더 강한 감시를 요구할 것이다.
  
지각있는 시민의 힘으로 에너지 파시즘의 도래 막아야
  
2회에 걸쳐 논의된 모든 현상- 석유보호 서비스로 미군의 주요 업무 전환, 군비 경쟁에 비견할 만한 강대국간 에너지 확보 경쟁의 격화, 러시아의 에너지 초강대국 부상, 원자력 산업에 관한 감시감독 필요성의 증가-은 모두 에너지의 생산, 획득, 이전, 분배 등에 관한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정부의 경향성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이는 전 세계적 자원 고갈의 대가인 동시에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에너지 생산의 거점이 이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같은 흐름은 얼마 전부터 진행돼 온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몇 년간 더 큰 모멘텀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폴로 얼라이언스, 로키 마운틴 인스티튜트, 월드워치 인스티튜트 등 많은 지각있는 시민들과 단체들이 에너지 고갈과 에너지 생산지의 불안정성, 그리고 지구온난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해법을 개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의 초점을 정부 통제력을 증가시키거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두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만약 이러한 경향을 막지 못한다면 에너지 파시즘은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번역 이지윤 기자)

02.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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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2-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또 엉뚱한 생각이 드네요.그래서 석유재벌이 첼시구단을 인수해서 축구선수들을 사모으는건가?? ^^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원자력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무결점사고방식' 위에 구축되었다는 것이라더군요...

로쟈 2007-02-0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 좀 남아도니까요.^^ '에너지 파시즘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석유시대의 종언 같은 게 얘기되고 있으니까 뾰족한 수를 찾긴 찾아야 하겠습니다...
 

책은 남들 못지 않게 사놓고 정작 재미를 못보고 있는 대표적인 두 저자가 내겐 프레드릭 제임슨과 아도르노이다(제임슨이 아도르노 연구서를 쓴 건 당연하면서도 짓궂다!). 그 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만한 건 제임슨인데, 일단 여러 권의 저작들이 소개되었으면서도 정작 대표적인 주저들은 번역/소개되지가 않았고(이럴 때 쓰는 말이 '닭 쫓던 개 제임슨 쳐다보기'이다), 그나마 번역된 책들 읽기 어려우며(어떤 것들은 이제 구하기도 어렵다), 그걸 좀 덜어주겠다고 나온 해설서들 마찬가지로 난삽하기 짝이 없어서이다. 이때 '난삽함'이 비단 어려운 내용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역의 난잡함을 좀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이번에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로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과 함께 출간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이 이 시리즈의 성격에 걸맞게 '가장 쉬운 제임슨 입문서'의 구실을 해주려나 은근히 기대를 가졌건만 어젯밤에 첫장인 '왜 제임슨인가?'를 읽고서 기대를 접었다(정말 묻고 싶다. 왜 제임슨인가?).

사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도 기대에 부응하는 번역은 아니었다(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알라딘은 이 책명을 '자크데리다의 유령들'로 붙여놓아서 '데리다'로는 도서검색이 안된다. 업무량이 그토록 과다한가?). 원서와 비교해보면 앨피출판사의 국역본 시리즈는 편집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는데(얼마나 알뜰한 편집이냐면 원문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끊어놓은 번역문을 두 개의 문단으로 나눠놓는 식이다), 정작 '콘텐츠'가 뒤를 받쳐주지 못하는 형국이어서 안타깝다. 책은 껍데기가 아니잖은가. 공연한 험담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가령, "여러 차례 그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에게서 얻어낸 통찰, 즉 결정이 순간은 광기라는 진술을 상기한다."(42쪽)는 구절을 읽으면 당신은 무엇이 상기되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이거 송충이 씹는 맛 아닌가? 어쩌자고 덴마크의 '고독한 단독자'의 국적을 네덜란드로 바꿔놓는단 말인가?(나도 '어려운 오역'을 좀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축구 사랑의 인연으로 네덜란드에 더 친밀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역자와 편집자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를 아무생각 없이 접수할 수 있었단 말인가?(많이 쓰는 이름인 '키에르케고르'를 '키르케고르'로 표기하면서 '네덜란드 발음은 이게 더 가깝지'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듯 시작이 께름칙해놓으니까 이래저래 주의해서 읽을 도리밖에. 그래도 <자크 데리다>의 경우 1장에서 몇몇 의문스런 번역을 제외하면 2장부터는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내가 먼저 다뤄보기로 한 건 그 때문이다. 멀쩡하게 씌어진 역자 서문을 지나 '왜 제임슨인가?'의 몇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괜찮다. 제임슨의 두 화두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두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과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 대해서 유익한 해설을 읽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한데, 이러한 기대는 제임슨의 이력을 읽어나가는 대목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제임슨은 하버대학에서 강사와 조교수로 재직했고, 이어 1967년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971-76년까지 불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교수로 일했으며, 1976-83년까지는 예일대학에서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때까지 듀크대학의 비교문학과 명예교수직도 겸했다."(29쪽)

사실 제임슨의 이력이 어떻다는 것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역자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말로도 말이 안되는 게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때까지... 겸했다."? '그때까지'는 언제를 말하는가?(1983년 이후는?) 1983년까지 예일대학과 듀크대학의 교수직을 겸했다고?(유렵대학의 명망있는 교수들이 미국대학에도 초빙교수로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지만, 같은 미국내에서도 그렇게 'two job'을 갖는다?)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은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원문은 "SInce then he has been Distinguished Professor of Comparative Literature at Duke University."(3쪽)이다. "그 이후로 그는 듀크대학의 비교문학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명예교수'는 정년퇴임 이후 봉직기간 등 해당대학에서 규정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교수에게 수여하는 명예직이다. 그리고 미국대학에서 'Distinguished Professor'는 내가 알기론 해당분야의 탁월한 업적을 이룬 교수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대우도 물론 좀 다를 거라고 예상되고). 그게 몇년 전부터 국내에 도입된 '석좌교수'직과 성격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물론 영어에서 석좌교수를 가리키는 말은 따로 있지만).

원문 어디에도 '겸했다'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since then'을 '그때까지'라고 옮겨놓으니까 수습차원에서 '겸했다'란 말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 사례이지만 내 독서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역자가 어떻게 번역해놓았을지 얼추 짐작하게 한다. 사실 본문 첫문장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23쪽)에서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에 인용부호와 인용출처가 빠져 있는 데에서도 번역의 충실성에 대한 의혹은 슬슬 기어나오기 시작했었다. 그러니 사단이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을 따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들여다보기 전에 '제임슨을 읽는 어려움' 일반론에 대해서 먼저 정리를 해둔다. 이러한 국역본의 소제목들은 아마도 편집자가 붙인 듯하지만(32-43쪽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이 원서에는 'The Challenges of Jameson's Work'로 돼 있다) 내용에는 부합한다. "일반적으로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속한 비평적 맥락이 복잡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임슨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를 읽어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이다."(32쪽)

'복잡하고 광범위한 비평적 맥락'으로 치자면 슬라보예 지젝 같은 경우 한술 더 뜨기 때문에 제임슨만의 두드러진 난점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매력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한결같이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33쪽)니까 특별히 번역상의 문제만으로 우리가 곤란을 겪거나 분통을 터뜨리는 건 아니겠다. 반면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  같은 경우에 "나는 종종 서가의 문학이론서 자리에서가 아니라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 꽂힌 자리에서 그의 책을 뽑아든다."(33쪽)고 하니까 그의 문체(스타일)이 악평만을 얻고 있는 것도 아니고(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글턴의 활달하고 재기넘치는 문체를 더 좋아한다).  

물론 대세는 역시나 꼭 그렇게까지 문장을 꼬이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다. "제임슨의 스타일을 피곤하고 번잡스러우며 어쭙잖다고 평가절하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더글러스 켈너는 제임슨의 스타일을 형편없다고 얘기했다."(33쪽) 켈너는 국내에 <탈현대의 사회이론>(현대미학사, 1995)부터 <미디어문화>(새물결, 2003)까지 여러 권의 저작이 소개돼 있는 좌파이론가이다(보드리야르와 마르쿠제 연구서가 유명하다).

한데, 형편없다'고 옮긴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켈너가 쓴 단어는 'infamous'이며 사전적 정의대로, '악명 높은'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엔 이 말의 출처가 빠져 있지만, ('제임슨의 모든 것'이란 참고문헌 해제에 포함돼 있는 바대로) "제임슨의 다양한 논문을 실은 책" <포스트모더니즘/제임슨/비평>의 편자 서문에 나온다. 그 편자가 바로 켈너인 것. 따라서 "제임슨의 문체는 악명이 높다" 정도이지, "제임슨의 스타일은 형편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그의 난해한 문체가 시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잖은가!).  

왜 그럼 제임슨은 그렇게 쓰는가? 아도르노의 난해한 문체를 옹호하면서 제임슨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한데, "요컨대 독서는 어렵고 불편한 일이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독서가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닐 때,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다."(35쪽) 그러니까 드러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낫다, 라는 게 제임슨의 글쓰기론이자 문체론이다. 저자인 로버츠의 해석대로, "이러한 주장은 난해한 글쓰기일수록, 비록 소극적인 의미에서나마 진보적 행위라는 사실을 내포한다."(36쪽)

거기에 보태어 제임슨은 그 '난해성'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왜냐하면 시류에 흔들리는 양떼처럼 제도적 압력에 굴복할 때보다는, 그에 저항하고 교전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 제임슨과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다. 

저자 로버츠의 제임슨 꼬집기: "가령 우리는 제임슨을 제도권 학계와 비평계에서 높은 존경을 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제도권 학계와 비평계가 교육사업을 벌여 미국에서만 연간 수천 만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사실이다. 제임슨의 난해한 스타일은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없는 무지한 노동계급의 접근을 차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37쪽) 이것이 '난해한 글의 계급성'이자 좌파 엘리트주의의 함정이다.  

그리고 인용문에는 오역의 함정도 있다. 미국 대학시장의 규모를 '수천 만 달러'라고 옮겨놓았는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원서에 따르면 미국의 대학 '산업'이 해마다 벌어들이는 수익은 'billions of dollars'로 돼 있다. 지적하기도 뭐하지만 'billion'은 '천만'이 아니라 '십억'이다. 이건 액면상 적은 차이가 아니다. '무지한 독자계급'을 상대로 한 번역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대충 번역하면 곤란하다.

어쨌든 그러한 '함정'에 대해서 저자가 일침을 놓고 있는 대목: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가의 물건을 소유하는 행위로 자기를 과시하듯, 난해한 제임슨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자신이 학식과 교육 정도를 과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된 이 '루틀리지' 비평가 시리즈가 더 급진적 전략일 수도 있겠다."(38쪽) 단, 여기서도 '루틀리지 비평가 시리즈(Routledge Critical Thinkers)'는 '루틀리지 비판적 사상가' 시리즈 더 타당하다(비평가와 사상가는 좀 다르지 않나?).

이제 오역의 핵심적 문제로 들어간다. "이와 연결된 핵심적 문제를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문장을 제임슨의 글에서 뽑아보면 이렇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 <정치적 무의식>에서의 인용문으로 넘어가는데, 유감스럽게도 세 줄이 누락됐다. "Chapter 3 of The Political Unconscious looks at 'the novel', and reads the French novelist Honore de Balzac to illustrate his case."가 그것이다. 뭐 빠져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지만(한데 굳이 누락시킬 이유가 있는가?), 디테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차라리 발췌역을 하는 게 나을 터이다(그나마 인문서들의 경우엔 덜한 편이고 실용서나 경영서들의 경우엔 공공연하게 발췌역이 자행된다. 그런 책들 돈 주고 산다는 것이 넌센스이다. 물론 발췌독을 한다면야 할말 없지만). 거기에 이어지는 인용문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이다.

진실로, 사실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진술들은 <돈키호테> 같은 소설의 원시적 선조들처럼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는데,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 다양하게 불리는 과정은, (전통적 서사가 갖는 신성성을) 구조적으로 훼손시키고 탈신비화시키는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부여받은 서사의 신성성의 패러다임 혹은 전 존재적 유산과 전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 것이다.

진실로 이해해보려고 여러 번 읽어보았지만 내게 남는 건 두통뿐이다. 제임슨의 원문 자체가 난삽한 건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문장을 갖다놓고 번역문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역자는 대체 무슨 뜻으로 옮긴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편집자는 한쪽 눈을 감고 교정을 보는가?). 제임슨의 원문보다 난해한 문장을 어떻게 '해독'하라는 것인가?

Indeed,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 assert,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이 문장에 대해서는 저자가 이어서 3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국역본은 40쪽에서 원서와는 다르게 인용문을 한번 더 반복해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한데 읽을 수 없는 인용문을 한번 더 읽는다고 이해가 되는지?). 그러니까 설혹 제임슨이 쓴 문장의 의미를 바로 캐치하지 못했더라도 로버츠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내용 파악을 할 수 있게끔 돼 있다(뒤이어 이 문장에서 주어가 뭐고, 동사가 뭐고, 목적어가 뭐고 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한데 역자로서 불성실한 것은 그러한 저자의 '노고'조차도 발췌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장 요소들을 분절해서 각각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히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야만 이 모든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41쪽)고 해놓고 역자 자신은 그 '힘겨운 작업'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더러 저자의 그 '힘겨운 작업'을 독자에게 전달해주지도 않았다.'옮긴이의 글' 말미에서 "이 책을 쓴 애덤 로버츠는 짧은 분량 안에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을 압축적이고도 명쾌하게 설명하여, 독자들을 단번에 제임슨 이론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그 충실하고 명쾌한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거나 깊이 공감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을 역자의 부족한 능력 탓이다."라고 적은 내용이 아무래도 역자 스스로에겐 충분히 이해되거나 공감되지 않은 듯하다.

Indeed,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 assert,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그럼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한다. 번역문 말고 원문을, 저자 로버츠를 따라서(조금 더 자세하게 풀었다). 먼저 문장 전체 주어는 무엇인가?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가 주부이고 주어는 'definitons'이다. 그리고 전체 동사는 동사는 'assert'. 그리고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가 삽입절이고, that-이하가 'assert'의 목적절이다, 라고 처음에 보았었지만 이 문장에서 that은 접속사가 아니라 지시형용사이다. 거기에 준해서 내용을 정정한다.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그리고 주절에서 'that processing operation'이 주어이고 'has'가 동사이다. 'has A as B'로 'A를 B로 갖고 있다'란 구문인데 A가 너무 길어져서 'as B'가 먼저 나온 형국이다. 그럼 A에 해당하는 거은 무엇인가?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나머지 전체이다. 그럼, B(its historic function)에 해당하는 건 무엇인가? (1)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2)demystification, (3)the secular 'decoding' 세 가지이다. 그리고 이 명사(구)들이 전치사 of 를 통해서 뒤에 나오는 목적어들을 받고 있다.

그러한 구문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들은... 서사적 모사라는 그 작동과정이 이러이러한 것을 (1)체계적으로 침식하고 (2)탈신비화하고 (3)세속적으로 '해독'하는 것을 그 역사적 기능으로 갖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번역문에는 어떤 착오가 있는가?

진실로, 사실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진술들은 <돈키호테> 같은 소설의 원시적 선조들처럼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는데,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 다양하게 불리는 과정은, (전통적 서사가 갖는 신성성을) 구조적으로 훼손시키고 탈신비화시키는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부여받은 서사의 신성성의 패러다임 혹은 전 존재적 유산과 전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 것이다.

혼돈은 등위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1)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2)demystification, (3)the secular 'decoding'이 '역사적 기능'의 내용이란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덧붙여 지적하자면 'emblematically'는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란 뜻이고, 'initial'은 '필수적으로'가 아니라 '최초의'란 뜻이다. 'preexisting'을 '전 존재적'이라고 띄워서 옮긴 건 (편집자의 오류로 보이는데) '전(前)'이라고만 해줬어도 오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반대로 제임슨이 만일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쓴다고 할 때 우리가 잃게 되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돈키호테의 둥장 이래 사물의 사실적 재현을 시도한 소설들은 실제로는 사실적 재현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명맥히 기반한 고대의 신성한 서사들의 가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해독해온 것이다.''"(38-9쪽) 

(제임슨의 것이 아닌) 로버츠의 원문은 "Novels, from Don Quixote onwards, that have attempted a 'realistic representation' of things have not in fact been doing this, they have actually been undermining and 'decoding' the ancient sacred narratives on which they are distantly based."(8쪽) 여기서도 '명백히'라고 옮긴 'distantly'는 '간접적으로' '멀리'란 뜻이다('distintcly'와 헷갈릴 정도로 정신없이 번역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다시 옮기면, "<돈키호테> 이래로 현실의 '사실적 재현'을 시도해왔다고 하는 소설은 실상 그러한 재현과는 무관하다. 소설이 실제로 한 것은 그 자신이 멀리 기원을 두고 있는, 고대의 성스러운 이야기들의 기반을 침식하고 '탈코드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최초의 인용문을 다시 옮기면: "리얼리즘에 관한 많은 '정의들'이 주장하듯이, 그리고 소설의 기원으로서 <돈키호테>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고 다양하게 불리는 그 작동과정은 과거부터 존재해온 전통적인 이야기나 최초에 관한 성스러운 이야기들의 패러다임을 체계적으로 침식하거나 탈신비화하고 세속적으로 '탈코드화'하는 일을 그 역사적 기능으로 갖고 있었다."(가독성을 위해서 얼마간 의역을 했다.)

이제 정리해보자. "이상적인 독자라면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할 만큼 머리가 좋겠지만, 그보다 열등한 독자는 해독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단서를 잃고 헤매며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제임슨은 이렇게 자신의 글을 읽고 또 읽도록 의도했을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인내심을 잃고 이해 자체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41쪽) 저자가 먼저 던지는 질문이지만 과연 그런 난해함이 (제임슨이 입만 열면 반복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으로 이런 문장을 읽고 느낄 즐거움은 '내가 이 어려운 걸 다 읽고 이해했어'라는 식의 자기만족적 즐거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비싸다!

이제 기운이 떨어져서 더 주절거리지도 못하겠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왜 제임슨인가?'의 맨 마지막 인용문까지도 오역으로 점철돼 있다. 가령, "post-traditonal daily life and its bewilderingly empirical, 'meaningless,' and contigent Umwelt"를 당신이라면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탈전통적인 일상적 삶과 그 정신없을 만큼 경험적이고 '무의미하며' 우연적인 환경세계" 정도 아닌가. 국역본은 "탈전통적 일상생활, 당혹스러울 정도로 제국주의화되고 의미가 상실되었으며 우연적인 환경"이라고 옮겨놓았다.

"현재 프로이트와 라캉, 지젝의 글 등을 읽으며 서사를 둘러싼 행동의 비밀을 이해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역자는 먼저 이러한 말실수들을 둘러싼 오역의 비밀들을 먼저 이해하려고 애를 썼으면 좋겠다...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라... 제임슨은 건너뛰란 얘기로군...

07. 02. 07.

P.S.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을 건너뛰면 재미있는 건 많다. 가령, 일반인들에겐 프레드릭보다 유명한 포르노배우 제나 제임슨은 어떤가?(사실 외설적인 오역서를 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제임슨을 검색하다 보니 학교도서관에 <프로노스타처럼 사랑하는 법>(2004)이란 책도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다. 제나 제임슨의 자서전이며 우리에겐 <게임>(디앤씨, 2006)으로 소개된 닐 스트라우스가 대필한 책이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지만, <포르노스타처럼 돈 버는 법>(2006)은 그 이후에 쓴 책이다. 프레드릭을 읽느니 차라리 제나를 당신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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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바로 이번주부터 정치적 무의식 세미나 시작하는데요. 번역된 제임슨의 두 책 신비평 비판서(언어의 감옥)랑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는 들춰보기는 했는데, 그렇게 '구린' 문체였다는 기억은 없는데. 정치적 무의식 걱정되네요;;
영문학도 3명과 함께 하는 거라서.. 오 마이 잉글리쉬! ㅎ

로쟈 2007-02-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명'에 미리부터 주눅들 필요는 없는 거죠. 사실 모든 문장들이 욕나오는 건 아니고 군데군데 요령부득일 따름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이나 데리다는 얼마나 평탄한 것인지요...

yoonta 2007-02-0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는 왜 저런 책 번역을 로쟈님같으신 분들에게 부탁하지 않는건지 (아니면 로쟈님이 거부하시는건가?) 그런데 empirical같은건 그렇다쳐도 제임슨의 원문은 난삽하기 정말 그지없네요. 번역자가 혼동할만도 합니다.

로쟈 2007-02-0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지젝 등을 비롯해서 여러 건의 번역 청탁을 받긴 했지만, 현재 맡고 있는 일들 때문에 고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인건비 문제도 있지만). 제임슨의 경우 달리 악명이 높았겠습니까!..

yoonta 2007-02-08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 인건비?를 좀 적절하게 책정해서(로쟈님이 큰 욕심부릴분 같지도 않고^^) 청탁하면 저희같은 독자들에겐 보다 양질의 번역본을 읽어볼수있다는 혜택이 생길텐데..안타까울따름이네요.

로쟈 2007-02-0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다시피, 인문서 번역은 약간의 명예욕을 충족시켜준다는 걸 제외하면 3D업종이죠. 힘들고 대우 못 받고, 인정 못 받는. 그런 상황에서 자꾸 출간되는 오역서들이 상황이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maysoony 2007-02-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잔데요, 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쉽게 쓸 수 있는 내용을 저토록 어렵게 쓰는 제임슨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부분이니까요.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누락된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로 누락이 있었는지, 그것이 어느 과정에서 일어났는지 확인이 필요하지만) 진심으로 사과 말씀 드립니다. 적어도 이 책이 단칼에 쓰레기 취급받을 만큼 형편없는 오역은 아니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02-1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무니 없는 부당함'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하시느라 수고하셨는데, 어려운 말이어서 머리 아픈 것과 말도 안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 종류가 다릅니다. (2)부주의가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 만큼'은 아니라고 하셨는데, 제가 읽은 바로는 계속 나오더군요. 그런 '부주의한' 오역들이 어느 정도 나와야지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지 기준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3)'누락된 부분'에 대해선 '실제로 누락이 있었는지' 확인이 필요하신가요? 원서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으셨다면 바로 확인되는 거 아닌가요?.. 아시다시피, 안면도 없는 처지에 '악의적인' 지적을 제가 굳이 할 필요가 있는지요? 저는 제 돈 주고 산 책의 '품질'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다 자세하고 성의있는 반박을 부탁드립니다...

cretois 2007-02-1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보아도 역자가 원서를 제대로 독해못한 케이스입니다. 절판시키거나 다시 번역하세요

로쟈 2007-02-1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어본 2장까지 오역은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성의도 없을 뿐더러 기본 독해력도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너무 많은데, 역자는 무엇을 '번역'이라고 생각하며 무엇이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2007-02-12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좋은 지적이십니다. assert가 타동사여서 목적어/목적절을 뭐라도 갖다 붙이려고 했고 사실 인용문이라 'that'이 지시형용사로 쓰일 수 있다는 건 미처 고려하지 못했네요. <정치적 무의식>의 원문을 보니까 앞문단에 process 얘기가 나옵니다. 확인해보지 않은 불찰입니다(구문분석은 잘못됐지만 그래도 번역은 틀리지 않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