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때 모더니티에 관한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가 몇 시간째 오역과 씨름하고 있다(열댓 페이지 읽는 데 몇 시간이 걸리다니!). 모더니티/모더니즘에 대한 강의도 준비할 겸 집어들었던 것인데 오히려 혹만 더 붙인 셈이다. 이 난감한 번역에 대해 또 불평을 늘어놓으려다가 정신건강을 위해서 잠시 영화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지난 12월 개봉작으로 놓친 영화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영화는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황혼의 빛>(2006)이다. 그의 전작인 <과거가 없는 남자>는 챙겨보았었는데, 어쩌다가 이번엔 놓치게 됐다. 비록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로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성냥공장 소녀> 등을 더 본 정도이지만 카우리스마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나는 그의 모든 영화를 보고 싶다). 흔히 '노키아의 나라'로 불리는 핀란드가 내게는 '카우리스마키의 나라'일 정도이다. 뒤늦게(!) 그의 최신작에 대한 리뷰와 함께 감독 소개를 옮겨놓는다.

씨네21(06. 12. 13) 인생의 고독과 비애 <황혼의 빛>

영화관은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가보지 못한 세상에 데려다주고, 현실에서는 해볼 수 없는 감정과 사건을 체험하게 해주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예술적 경험을 즐길 수 문화적 공간이다. 그런데 영화는 소비되는 지점에서는 서민과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되는 수준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소비의 측면에서는 복제 예술이라는 점 때문에 가장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산의 측면에서는 일단 제작되는 과정에서는 상당한 비용이 투자되어야 하고 더 많은 대중과 만나기 위해 실제에서 불가능한 꿈 혹은 달콤한 환상을 제공해야 하기에 대중의 현실과 멀리 떨어진 곳을 스크린 위에 담는다. 그래서 현실에 밀착된 우리의 삶을 담아내려는 감독들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 지경이다. <황혼의 빛>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도 그런 감독의 명단에 빠져서는 안 될 이름이다.

켄 로치가 하층민의 삶을 사회운동 차원에서 전투적으로 다룬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그것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관조적으로 담아낸다. 그래서 켄 로치의 영화는 다소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어떤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다보면 주인공의 삶이 직면한 절박함에 시나브로 물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떠도는 구름> <과거가 없는 남자>에 이어 ‘빈민 3부작’의 마지막 편인 <황혼의 빛>에서도 동일한 정서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대도시의 야간 경비원인 코이스티넨(얀 히티아이넨)이다. 그는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에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허름한 집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금발의 여인 미리야(마리아 예르벤헬미)가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고 꿈같은 데이트가 시작된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미리야의 배후에는 코이스티넨이 경비를 도는 백화점 보석상을 노리는 범죄조직이 있었고, 그녀는 코이스티넨에게서 경보장치의 비밀번호와 열쇠를 훔쳐내 조직에 알려준다. 사랑의 단꿈에 빠져 있던 코이스티넨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절도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빈민 3부작’은 공통적으로 상실의 과정을 다룬다. 세 작품 모두 서사적 시간의 진행과 더불어 주인공은 무언가를 잃는다. <떠도는 구름>에서 주인공 부부는 평범한 직장과 소박한 가정이 있었지만, 실직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에 처하고 가정까지 붕괴될 위험을 맞이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는 영화 초반에 모든 기억을 잃는다. <황혼의 빛>에서 코이스티넨도 (애초에 거짓된 것이기는 했지만) 사랑은 물론 직장과 집 그리고 전 재산까지 잃게 된다. 세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원래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서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당하게 잃고 빈민화되는 과정은 신파적으로 소화될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감독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삶에 동정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눈물 한번 흘리는 법 없고, 절규 한번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사건들이 삶의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버텨내야하는 오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에 투정부릴 정도로 유아적이지도 않고, 울며 나뒹굴 감정적,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다.

스스로를 ‘마음 따듯한 아저씨’라고 평하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무언가를 계속 잃고 끊임없는 좌절을 경험해야 하는 주인공들에게 ‘희망’이라는 출구까지 닫아두지는 않는다. <떠도는 구름>의 부부는 실직한 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거나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 월급을 떼어먹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꼼꼼하게 작성한 창업계획서가 자본문제로 폐기처분되기 직전 기적처럼 옛 직장 상사의 도움을 받아 ‘노동’(Work)이라는 레스토랑을 내게 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는 기억과 함께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지만, 바닥부터 시작한 새로운 인생에서 사랑을 만난다. 점차 그에게 과거가 돌아오지만 그는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서 인생의 답을 찾는다.

<황혼의 빛>의 주인공 코이스티넨이 우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꿈을 꾸는 것이다. 그는 직원들의 따돌림과 상사의 무시를 경험할 때마다 경비업체의 사장이 될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금발 여인에게 농락당한 뒤 자신의 꿈을 지탱해줄 씨앗마저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코이스티넨은 유일한 말동무이자 감옥에 간 그를 기다려준 아이라(마리아 헤이스카넨)에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관객이 그럴 만도 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릴 즈음, 그는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아이라가 던지는 한마디. ‘희망을 안 잃었다니 다행이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주인공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자꾸만 솟아나오는 희망이다. 그것이 <황혼의 빛>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코이스티넨의 생사에 대해 눈으로 본 것보다 ‘여기서는 안 죽어’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크 오몽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재현하는 집약체로 ‘얼굴’을 이야기한다. 얼굴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가면인 동시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타자를 바라보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는 아무런 대사나 음악도 없이 인물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는 클로즈업이 많이 등장한다. <황혼의 빛>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우리는 고독하게 살아가는 코이스티넨의 무표정한 얼굴을 수시로 마주해야만 한다. 아무리 억울한 상황에서도 변명 한마디없이, 부당한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견뎌내는 삶의 태도가 그의 담담한 얼굴표정을 통해 끊임없이 상기된다.

감독은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설득의 과정을 생략하지만 화면을 가득 메운 얼굴은 관객에게 인물의 영혼과 바로 접속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러한 삶의 논리가 지배하는 하나의 우주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코이스티넨뿐 아니라 미리야의 얼굴에도 많은 시간을 허용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일종의 팜므파탈인 그녀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뭔가 끊임없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악행 뒤에 숨겨진 사연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운동이 정지되거나 청각적으로 음이 소거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템포 빠른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 인물의 얼굴만 멀뚱멀뚱 들여다보라는 감독의 요구가 때때로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황혼의 빛>은 말없는 얼굴이 쏟아지는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김지미)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핀란드의 영화감독이자 전세계 예술영화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컬트 감독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지금까지 한번도 미국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 배급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뉴욕 맨해튼, 파리, 베를린 영시네마 포름 등에서 거의 ‘숭배’ 차원으로 열광하는 관객들을 만난다. <오징어 노동조합 Calamari Union>(1985),<햄릿, 장사를 떠나다 Hamlet Goes Busi-ness>(1987),<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1989)와 같은 기상천외한 제목을 단 그의 영화들은 예상을 불허하는 블랙유머의 뇌관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심드렁하다. 88년 토론토영화제에서 <오징어 노동조합>이 상영됐을 때 관객과의 토론에 참석한 카우리스마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최악이에요. 왜 자리를 뜨지 않지요? 당신들은 마조히스트인가요?”

1957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카우리스마키는 형 미카가 설립한 빌레알파영화사에서 첫 장편영화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1982)을 발표한 이래 비교적 다작한 편이다. 거의 해마다 한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햄릿, 장사를 떠나다>는 덴마크를 떠나 헬싱키로 장사를 떠난 햄릿이 사기꾼에게 속고, 강도에게 털리고 설상가상으로 부친이 남긴 회사를 숙부에게 빼앗길 뻔하는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고전비극 <햄릿>의 배경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복판으로 옮긴 블랙코미디인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햄릿의 고뇌는 ‘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바뀐다.

<죄와 벌>,<햄릿, 장사를 떠나다>가 고전문학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라면, <천국의 그림자 Shadow in Paradise>(1986),<아리엘 Ariel>(1988),<성냥공장 소녀 The Match Factory Girl>(1990)는 평단에서 ‘프롤레타리아 삼부작’이란 평가를 듣는 영화다. 계급적 위치면에서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이 삼부작의 공통된 주제다. <천국의 그림자>는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소녀와 중년의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외국을 동경하다가 결국은 에스토니아행 배를 탄다는 줄거리인데, 두사람은 배를 타고 나서도 자기들이 왜 망명을 결정했는지 모른다. <아리엘>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카스리넨은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무작정 길을 떠났다가 미혼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사람은 우연히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남미로 가는 밀항선 ‘아리엘’을 타고 탈출하는 신세가 된다.

카우리스마키의 이런 국외자적 강박감이 가장 잘 녹아들어가 있는 작품이 <성냥공장 소녀>다. 무성영화처럼 대사가 거의 없는 이 영화는 작은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리스가 지긋지긋하고 전망이 없는 삶을 살다가 못된 세상에 복수하기로 결심하고는 쥐약을 넣어 주위사람들을 몰살한다는 이야기이다. 불행에 빠진 소녀가 운명을 극복한다는 동화적인 설정을 잔인하게 비튼 이 영화는 엄격한 무기교의 기교스타일을 통해 섬뜩한 감동을 전해준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성냥공장 소녀>와는 달리 희극적 감성이 녹아 있는 블랙코미디로 북구의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핀란드 촌놈들이 미국을 여행하면서 겪는 해프닝을 담았다. 전형적인 로드무비지만 미국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모의 땅임을 영화 속 황량한 풍경을 통해 자질구레한 설명없이 묘사한다. 60년대 유럽영화의 상투적인 스타일과 다른 것은 로드무비의 쓸쓸한 풍경에 슬랩스틱 코미디와 개그를 덧칠해 넣는 카우리스마키의 유머감각 때문이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뿌리는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고다르 영화의 60년대식 사랑과 무정부주의에 대한 향수, 새뮤얼 풀러와 로버트 올드리치류의 할리우드 고전영화에 대한 애착,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소설의 달콤한 냉소주의 등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화면에 배어 있다. 그러나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진정한 실체는 핀란드와 헝가리의 보헤미안 전통일 것이라고 영국의 평론가 피터 코위는 말한다. 이것은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가 낭패를 보는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I Hired a Contract Killer>(1990)나 돈이 없어 밥을 못먹어도 돈을 빌려서라도 술잔치를 벌이며 호기있게 인생을 사는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보헤미안의 삶 La Vie de Boheme>(1992)과 같은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코미디로, 가끔은 비극으로 그려낸다. 이 괴짜 핀란드 감독의 좌충우돌하는 유머는 보헤미안 정신의 영화적 형상화라 할 것이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

07. 02. 11.

Аки Каурисмяки. Последний романтик

P.S. 그나마 부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 영어권에서도 나오지 않은 카우리스마키 연구서가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출간됐다는 사실이고(러시아어 표기로는 '아키 카우리스먀키'이다), 아마도 이달안으로는 내가 받아볼 수 있을 거라는 점(어제 책을 발송했다는 메일을 인터넷서점측으로부터 받았다). 제목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마지막 낭만주의자>(2006)이다. 296쪽이니까 분량은 그렇게 두껍지 않다(하지만 우리 번역본으로 하면 400쪽이 넘는다). 책값은 14,000원 가량(배송비 별도). NLO출판사에서 나오는 '키노텍스트'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는 지난 2004년에 처음 나오기 시작해서 작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세계>, <기타노 다케시, 유년시절> 등이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같이 출간됐다(<히치콕>도 같이 주문했다). 이럴 땐 러시아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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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2-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평, 2006년 겨울호에 박인환 특집을 읽었는데, 아래 글을 본 첫느낌이 박인환이 모더니즘을 추구했다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얘긴가? 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새로운 시어' '모더니티''모더니즘'이라는 단어들이 병렬적으로 눈에 들어오는데 아주 느슨하게 이해되는군요. 일단 박인환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지점이 '모더니즘'을 추구했다고 해서인지 알고 싶고요, 박인환 시가 '모더니즘 시가 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모더니즘/모더니티 관계도 짤막한 논평이 가능할까요^^

박인환의 시어에 대한 자세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그의 시세계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낯선 시어의 사용을 들어 전후 모더니즘의 기수라고 정리되고 있는데, 그가 새로운 시어를 통해 새로운 시 쓰기를 추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모더니즘을 추구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모더니티의 추구가 모더니즘의 시가 될 수는 있지만 모더니티가 곧 모더니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세계에 대한 편향된 인식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진정 박인환이 새로운 어휘에 지대한 고나심을 가진 것은 모더니즘의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태도라고 봐야 한다.

로쟈 2007-02-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더니즘시의 대응어로 '전통시'나 '리얼리즘시'가 가능할 테니까 그와 견주면 될 거 같습니다. '모더니즘시'로서 함량이 좀 미달한다, 는 의견들을 자주 접했지만, 모더니즘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태도'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드문 게 아닌가 싶네요. 구체적인 논변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저로선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박인환은 김수영의 프리즘을 통해서 본 박인환이긴 하지만.

글구, 모더니티/모더니즘은 일반적인 정의를 따릅니다. 모더니즘은 모더니티(근대성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가 촉발하게 된 문학/예술사조이고, 각 나라별로 시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에서 보들레르, 미술에서 인상파부터 카운트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Runa 2007-02-11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시나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죠.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영화는 다 봤고(한 10년 전 비됴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본 이후, 시네마테크에서 <죄와 벌>, <성냥공장소녀>, <개들에겐 과거가 없다(텐 미니츠 트럼펫)>, <과거가 없는 남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황혼의 빛> 등), 그의 신작이 있다면 항상 볼 준비가 돼 있지요. 물론 <오징어 노동조합>, <햄릿, 장사를 떠나다> 등의 예전 영화도 꼭 보고 싶은 영화 목록들 중에 올려져 있지요. 감독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잘 몰랐는데, 덕분에 잘 봤습니다. 어디서 보니 아주 자존심이 강하다고 하더군요(그런 점도 좋게 보죠). 칸느에서 <과거가 없는 남자>가 작품상을 못 받자 악수도 인사도 없이 바로 단상에 내려와 짐 싸서 비행기 타고 핀란드로 돌아와버렸다는..^^

특히 <과거가 없는 남자>에 대해선 어린 후배들이 내는 작은 영화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는데, 갑작스런 잡지 폐간으로 끙끙거리며 쓴 글이 빛을 보지 못했다는..^^;;
암튼, 그때 저도 오몽과 들뢰즈의 클로즈업을 빌어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소수자의 얼굴"을 다른 영화들의 얼굴과 비교했던 기억이 있네요.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는 적어도 희망을 얘기하는가 했는데, <황혼의 빛>은 더 암담하지요. 그렇다고 그가 비관적이라고 생각진 않습니다. 쉬운 타협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다시 암중모색 중이라고 보는 쪽이죠.

로드무비 2007-02-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로쟈 2007-02-1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orsain님/ 네, 멕시코 영화감독 아르투로 립스테인과 함께 전작이 궁금한 몇 안되는 감독입니다. 제 취향이 그런 감독들과 잘 맞습니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신다니까 반갑네요. 전에 쓰신 글도 올려주시죠.^^
로드무비님/ 오랜만에 퍼가시네요.^^

2007-02-11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작년에 나온 전집 말고 또 나오는 건가요? 기이한 일입니다...

릴케 현상 2007-02-1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거 50주년이다 보니^^
 

엊그제 구내서점에서 본 신간은 데이비드 베레비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이다. '우리와 그들'의 구별방식에 대한 인류학적, 심리학적 고찰쯤으로 보였는데, 주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부피가 좀 있는 책이라는 생각 정도. 한데, 언론에 뜬 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뭔가 흥미로운 글감이 되겠다 싶어서 구입을 결정했다. 키워드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부족적 감각'이다('민족주의'라는 말보다는 근본적이지 않은가?). '부족의식' 혹은 '끼리끼리의식'. 국역본의 제목엔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지만 원서는 부제는 '당신의 부족 심리를 이해하기(Understang your  tribal mind)'라고 돼 있다. 원서의 서평을 잠깐 읽어보니 주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나 베레비의 책은 다양하고도 풍부한 사례를 제공해준다고 한다. 아마존을 검색해봐도 이 책은 그의 처녀작처럼 보이는데,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를 갖게 한다.

뉴스메이커(07. 02. 13)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무리를 짓고 집단 혹은 부류에 속하며 산다. 혼자 동떨어져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리는 결코 어느 하나에 국한하지 않는다. 인종, 종교, 민족, 계급에 따라 한 인간이 여러 개의 부류에 속한다. 더욱이 현대사회에서 ‘무리’는 나이, 직위, 정치이념에 따라 더욱 세분화된다. 가정을 갖고 있는 40대 남성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지역사회에서, 직장에서, 학부모 모임에서, 동호회에서, 정치이념에서 여러 무리에 속할 수 있다. 우리도 각자 서는 위치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무리에 속할 수 있다. 무리 속에서 개인은 ‘우리’라는 표현을 아주 쉽게 쓰며 ‘우리’와 다른 사람들은 ‘그들’ 또는 ‘적’이 된다.

이러한 무리·부류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본질적으로 뜻이 맞기 때문에 자연스레 형성된다.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다. 하지만 코드보다 더 중요한 것요소가 있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의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는 사람들이 한 무리·부류를 형성하는 데에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가 무척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무리·부류는 나의 위치에 따라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거나 본의 아니게 무리에서 이탈해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새로운 무리·부류에 합류할 수도 있다. 

 

베레비는 이 책에서 인류학부터 신경과학까지 여러 분야를 접목해가며 인간의 ‘부족적 감각’을 설명한다. 어디든 부류에 속하고자 하는 ‘부족적 감각’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다. ‘부족적 감각’은 당연히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디든 속하고 싶어하는 ‘부족적 감각’은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부족적 감각’의 가장 큰 폐해는 뻔히 잘못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부류에 섞여 자기의 뜻을 접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적·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따금 자기가 동의하지도 않는 무리에 속해 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무리짓기는 인간의 주관에 좌우되는 것보다는 놓인 상황에 따른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또한 ‘한 부류는 외부에서 말하고 평가하는 것처럼 되어간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를테면 ‘한국인은 근면하다’ ‘B형 남자는 이러이러하다’는 등 외부의 평가에 따라 원래 그렇지 않은 부류도 점점 그렇게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무리의 생각이 옳다고 느끼고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면 여전히 그때 옳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그때 달리 할걸’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제일 경계해야 할 일로 드는 것은 동지와 적으로 분류하는 ‘무리짓기’이다. 오늘날 ‘코드’는 영원히 맞을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드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무리는 언제든지 해체되고 새롭게 조직될 수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상황만 봐도 이는 명백해진다. 불과 몇 년 전 창당 당시의 뜨거웠던 정신은 식은 지 오래고 무리별로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 아닌가. 끼리끼리 무리를 형성하고 다른 무리를 적으로 분류하는 행동은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적은 바로 우리’라는 점, 이것이 저자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임형도 기자)

07. 02. 10.


 

 

 

P.S. <우리와 그들>의 내용을 좀 읽어봐야겠지만, 내가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로 얼른 떠올린 것은 '부족적 감각'이 문명의 수준으로 확대된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김영사, 1997)과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룬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동문선, 2004), 그리고 그 기원에 있어서 주체의 불완전성이란 객체의 불완전성의 반영/반복이라는 걸 보여주는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까지이다. 각각 정치학, 철학, 정신분석학으로 대별될 수 있겠다. 거기에 <우리와 그들>의 심리학/인류학을 보태 읽고자 하는 것. '계획'은 언제나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런 계획마저 없다면 나의 책읽기는 한 뼘 이상 더 게을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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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10 21:52   좋아요 0 | URL
"문명의 충돌"을 그렇게 엮어 읽는 것 꽤나 신선하네요..^^
근데 문명의 충돌은 '정치학'이라기 보다는 헌팅턴 스스로 부족적 감각을 문명의 수준으로 체현한 것에 가깝지 않을지... ㅎㅎ
곧 새학기 시작인데 계획한 바 최대한 이루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7-02-10 22:03   좋아요 0 | URL
제 짐작도 그런 것인데, 자세한 건 들춰봐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곧 새학기'라서 거의 '플랜 임파서블'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sommer 2007-02-11 00:31   좋아요 0 | URL
'무리짓기'를 근본적 적대의 '강팍한' 차원으로 이해하려는 무리들과 문화 인류학적 혹은 하위 문화의 '유연함'으로 파악하려는 무리들로 대립구도를 만들어 볼 수 있겠네요. 여기에 칼 슈미트의 '적과 친구'의 관계는 두 곳 모두로 통하는 입구가 될 수 있겠네요.

로쟈 2007-02-11 00:35   좋아요 0 | URL
suture님도 이 참에 흥미로운 플랜을 한번 세워보시죠.^^
 

어제 <섹스와 공포>,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등과 함께 주문한 책은 손종섭 선생이 엮은 <손끝에 남은 향기>(마음산책, 2007)이다. 문화일보의 북리뷰를 보고 무슨 책인가 하여 알라딘에서 확인해봤다. '한시 번역'의 달인이라 할 정민 교수조차도 이런 추천사를 남기고 있었다: "선생의 작업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나는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읽었다. 선생의 글을 펄떡이는 물고기 같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 젊은이의 감수성도 그 앞에서는 그저 머쓱할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큰 어른이 가까이 계신 것이 내 큰 복이요, 우리 문화계의 자랑이다." 몇몇 번역시들은 이러한 상찬이 허사가 아님을 입증해준다. 내가 읽은 리뷰를 같이 옮겨둔다.

문화일보(07. 02. 09) 우리말로 옮긴 漢詩의 감칠맛

남녀 문학인 몇 사람이 술을 먹는 자리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이 화제가 됐다. 각자가 자신의 미관(美觀)을 피력하는데, 소설가 김훈씨의 한마디가 압권이었다. 난, 젊지도 늙지도 않은 여성이 겨드랑이 아래의 흰 살결을 드러낼 때 눈이 부셔서 어쩔 줄을 몰라 하지. 김훈씨의 말에 좌중은 실소했으나, 그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의견을 다시 펼쳤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익살을 전하는 독특한 화법의 소유자다.

조선시대 문신인 유영길(1538∼1601)도‘절구질하는 아가씨(春杵女)’의 겨드랑 밑 흰 살결에 매료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절굿공이 사뿐사뿐 드놓는 연약한 팔/약방아 찧던 월궁 솜씨 여기서도 그대로고!/깁적삼 들릴 때마다 드러나는 저 살결!’

유영길의 한시를 이렇게 우리말로 옮긴이는 올해 만 89세의 한학자 손종섭옹이다. 손옹은 시를 해설하며 이렇게 적었다. ‘감출수록 신비롭고 거룩해지는 반면, 드러낼수록 알량함에 시틋해지는 여체!’

이 책 ‘손끝에 남는 향기’는 손옹이 선인들의 한시(漢詩) 280수를 우리말로 옮기고 감상을 덧붙인 것이다. ‘사랑’‘이별’‘기다림’‘그리움’‘회고’‘무상’‘정한’‘해학’‘달관’ 등 18가지 주제로 시를 나눠 담았다. 표제시는 고려말 문신 이제현이 고려가사를 한역한 것을 손옹이 현대어로 옮겼다.‘수양버들 시냇가에 비단 빨래 하노라니/말 탄 선비님이 손잡으며 정을 주네./손끝에 남은 향기야 차마 어이 씻으리?’

손옹의 한시 번역과 해설은 우리말의 진수를 보여준다. 한문학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는 “선생의 글은 펄떡이는 물고기 같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고 상찬했다. 손옹은 책 머리글에서 “(한시도) 본디는 정감 어린 고운 우리말이었건만, 부득이 한자를 빌려썼던 것”이라며 “고운 우리말로 말문만 열어주면, 굽이굽이 정에 겨운 사연들이, 실꾸리에서처럼 하염없이 풀려나온다”고 말했다.

손옹의 번역은 한시를 시조 가락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기존 번역과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서화담과 황진이가 주고 받은 시처럼 양장시조로 번역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전통적인 3장시조로 옮겼다. 한시에 숨어있는 선인들의 정감을 되살리기에 적절한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옛 시절에 한시를 즐겼던 문신들뿐만 아니라 아녀자, 천민, 기녀들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들어있다는 것. 손옹은 “설움 받던 계층의, 설움에 겨운 목소리들을 더 많이 발굴해서 실었다”고 밝혔다.(장재선 기자)

07. 02. 10.

P.S. 책은 내주에나 받아보게 될 터이니 소개된 한시 한 수만 더 옮겨오면 이렇다.

버들개지 하나
- 노긍

어디선지 버들개지 하나 사뿐 떨어지기에
무심결에 손 내밀어 고이 접어들고서는
유심히 들여다보다 도로 던져버리네.


怪來楊柳花 輕薄墮當地
偶然拾得之 促視還復棄

「子夜曲」

 

 

 

 

시 번역에 있어서 역자 또한 시인이어야 함을 입증해주는 사례이겠다. 그간에 손종섭 선생이 낸 책들 가운데 <다시 옛 시정을 더듬어> 같은 책은 서점에서 자주 봤던 것이지만 그저 그런 번역이겠거니 해서 특별히 주목해보지는 않았었다. 우리 고전과 한시 번역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이라면 전범이 될 만한 스승이 있어서 부듯하겠다...

 

 

 

 

문득 생각나서 보태자면 작고하신 김달진 선생의 고전, 특히 선시 번역 또한 일가를 이룬 것이었다. <당시전서>와 <한산시> 등의 번역시집들을 나는 갖고 있었다(시골집 어디엔가 꽂혀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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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디저트 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같이 사들고 온 한국일보를 뒤늦게 펼쳐들었다. 별로 눈길을 끄는 기사는 없었는데 한 칼럼의 제목이 '좌파의 가치'여서 읽어보았다. 며칠전 소설가 이기호의 '우파의 길, 좌파의 길'을 읽은 소감을 적어놓은 칼럼이었다. 잠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에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2. 06) 우파의 길, 좌파의 길

예전 어느 에세이스트 책을 보다가 이런 구절을 보고 절망한 적이 있었다.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문구를 보고 내가 절망한 것은, 내가 평생 우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근원적인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에게 양심을 건사하는 일이란, 책을 읽고 또 읽어도, 고민을 하고 또 해보아도, 도무지 알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어떤 안개 같은 것이었다.

한데, 이 시대엔 그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겸손치 못하게 나는 우파요, 쟤는 좌파요, 라고 말을 한다. 쟤는 좌파요, 라는 말 속엔, 그래도 저 사람은 다른 이의 양심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있소, 라는 뜻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저 험담처럼 내뱉는다. 나는 또한 내 주위에 진정한 좌파들을 보지 못했다.

얼치기 좌파들만이 '나, 좌파요'라고 떠벌리고 다닌다. 진정한 좌파들이란, 진정한 우파를 통과한 다음에야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절대 자신이 '좌파'라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소설가 이기호)

한국일보(07. 02. 09) [편집국에서] 이 시대 좌파의 가치

며칠 전 한국일보 연재물 <길 위의 이야기>를 읽고 묘한 생각이 들었다. '우파의 길, 좌파의 길'이란 제목이 붙은 그 글에서 글쓴이 이기호는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부담감 때문에 자신이 평생 우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인식했다고 고백했다.

글을 읽은 뒤, 우파보다 좌파가 더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건 좀 불공평하다는 작은 반발도 생겼다. 진정 잘못된 세상을 바꾸겠다면, 자신이 먼저 깨끗해져야 하며, 그때 도덕성이나 삶의 진실성은 좌파든 우파든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옳든 그르든 이기호의 글은 좌파, 우파에 대한 사회적 잣대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시대의 좌파는, 거친 목소리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설파하는 투사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날카로운 지식인의 모습보다는, 생활 속에서 양심껏 살아가고 타인의 양심까지 지켜주는 성실한 사회인상을 요구 받는다.

21세기에 접어든 뒤에도 우리 사회에는 좌우의 이념 갈등이 여전하다. 역사를 보는 눈도, 사회를 보는 눈도, 북한을 대하는 태도도, 미국에 대한 생각도 서로 다르다. 언뜻 양측이 경합하는 듯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미 승부가 났다고 볼 수 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시장주의가 몰아쳤고 그것과 맞설 힘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했는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성장주의, 성과주의, 배금주의에 숨이 막힐 정도다. 승자는 싹쓸이하고 패자는 구석으로 몰리는 씁쓸한 양극화가 우리의 자화상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돈에 혈안이 돼있고, 돈만 된다면 다소의 잘못이나 부도덕도 용인하는 그런 세상이다. 지향점도, 작동원리도 다른 정부는 기업 흉내 내기에 바쁘다.



그래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이라는 책에서 이런 모습을 '기업사회'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약자를 안고 못난 자를 격려하겠다는 좌파의 가치가 더 존중돼야 하지 않을까. 그 동안 우파는 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몰아 부쳤고 대기업 노조를 이기적 집단이라고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보는 게 어이가 없지만, 어쨌든 그런 식의 규정을 통해 좌파의 무능, 좌파의 공허함, 좌파의 부도덕성을 질타했고 국민적 공감도 어느 정도 얻었다. 그러나 좌파 진영 인사의 행태를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좌파의 목소리 자체를 누르는 것은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동구권이 몰락한 직후 한 잡지에 실린 우파 지식인의 글이 생각난다. 그렇게 동구권이 무너지고 좌파의 설 자리가 좁아질수록 좌파는 더욱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기호는 좌파 되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진정한 좌파라면 도리어 쉬울 수도 있겠다. 양심을 인정받는 진정한 좌파가 하는 주장이라면,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넘어 약자와 함께 가자는 좌파의 가치가 쉽게 팽개쳐질 것 같지는 않다.(박광희ㆍ문화팀장)

07. 02. 09.

P.S. 소설가는 갈팡질팡하고 문화팀장은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읽힌다. 좌파/우파에 대해서는 이전에 여러 차례 관련 페이퍼를 써놓았기 때문에 재론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단순 이분법으로 얘기하자면, 좌파는 학습하는 반면에 우파는 공부하며, 우파가 교양을 쌓는 시간에 좌파는 품성을 단련한다. 그건 각기 다른 가치이며 세계관이다. "진정한 좌파들이란, 진정한 우파를 통과한 다음에야 나오는 법이다"라는 이기호의 주장은 <공산당 선언> 강의 등에서 강유원이 주장한 바이기도 하다(사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이후에 오는 거 아닌가). 문제는 말세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처럼 중구난방으로 떠벌이는 사이비좌파들과 '좌파 딱지붙이기'로 기득권이나 챙기는 무교양 우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이다. 품성은 모자라고 교양은 부족하다. 우파의 길이건, 좌파의 길이건 혹 남의 얘기는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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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10 00:05   좋아요 0 | URL
제쳐두고 품성을 닦고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디저트 치고는 새겨들어야 하는 이야긴걸요.
 

일간지들의 북리뷰가 주로 주말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온라인 기사가 미리 뜨는 금요일 밤시간이면 할일이 좀 늘어난다. 내일이면 어느새 날짜가 10일로 접어드는구나, 란 생각에 경악(!)을 하면서(주말의 빨래감처럼 밀려 있는 일들이여!) 또 하던 일 안할 수는 없는지라 '작가와 문학사이'의 연재도 옮겨놓는다. 이번 주는 진은영 시인 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철학전공자로서(아래의 기사를 읽으니 어느새 학위도 받았다) <순수이성비판>의 '리라이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을 나는 사두지는 않았지만 개성적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더 미더운 촉수를 가진 신형철 평론가의 감식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경향신문(07. 02. 10) [작가와 문학사이](6) 진은영-청신한 몸·유연한 머리의 언어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은 명품이다. 재료도 고급이고 만듦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독자가 많다는 소문이다.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 왈, 시는 메타포다. 시 조갈증에 걸린 우편배달부에게 이 시를 처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는 고급 메타포의 일대 향연이다.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 등과 같은 혼수상태의 단어들이 젊은 피를 받아 막 살아난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특히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로 혹은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규정한 대목은 곱씹을수록 아득해진다. 사유를 건너 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혹자는 그녀를 최승자의 후계자라 칭한다.(시인 김정환의 말대로라면 이 후계책봉은 어느 술자리에서 최승자 본인의 기꺼운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최승자가 누구인가? 한국 여성시의 발성법을 혁신한 시인이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최승자의 언어는 격렬한 액체의 언어다. 그녀는 시에서 오줌 싸고 똥 누고 생리혈을 흘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생의 막장에서 자존심 내던지고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에게 가겠다고 매달리는 여자의 발화다. 참혹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이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와 연동해 지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시는 더욱 위력적이었다. 역사·정치·문명의 허위를 사유하는 강인한 지성이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여류’라는 수상쩍은 말이 척결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合線)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후계 운운하는 사람들의 저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이 몸의 언어와 머리의 언어 모두에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숙한 선배와는 또 달라 보인다. 덜 뜨겁지만 더 청신한 몸의 언어, 덜 치열하지만 더 유연한 머리의 언어가 그녀의 것이다. 그 차이가 더 소중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또 다른 혁신으로 선배에게 진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2. 09.

P.S.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진은영의 첫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짓는다. 허나 '모든 표정이 사라진 세상'에 '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막 심어진 묘목이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듯, 조심스레 손가락을 내어밀어 적은 시편들이 담겼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평론가 이광호의 해설도 그렇지만, 대개 이 시인의 키워드로 꼽는 단어(그러니까 '일곱 개의 단어' 중 하나이겠다)가 '손가락'이다.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그녀의 시들은 '긴 손가락'으로 씌어진 시들이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고 시인은 적었다. 듣기에 두번째 시집이 늦어지는 건 시인이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간의 잎들'이 더 풍성하게 피어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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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자입니다. 리라이틸 -> 리라이팅

로쟈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기인 2007-02-10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저도 진은영 시인 이 시집 잘 읽었는데, 어느새 박사학위도 받았다니! 역시 공부하느라 창작하기 힘들다는 것은 변명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