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가 다시 번역돼 나온 김에 카프카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둔다. 워낙에 많은 책들이 나와 있기에 탐나는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 위주로 꾸린다. 대선이 끝나면 가장 읽고 싶어질 작가가 카프카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로테스크한, 혹은 카프카레스크한 세상에 대해서 상담을 좀 하고 싶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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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의 대화
구스타프 야누흐 지음, 편영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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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이진경 옮김 / 동문선 / 2001년 7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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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마르트 로베르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3년 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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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읽다 1
빌헬름 엠리히 지음, 편영수 옮김 / 유로서적 / 2005년 1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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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13 18:30   좋아요 0 | URL
음, 저도 많이 읽진 않았지만 카프카 좋아하는데. 그로테스크한 세상에 대해 상담을 하고싶다는 로쟈님 의견에 大공감이에요.

로쟈 2007-12-13 20:41   좋아요 0 | URL
즐거운 일은 아니지요.^^;

뭉실이 2007-12-31 22:50   좋아요 0 | URL
카프카의 책이라고는 민음사의 '변신,시골의사'밖에는 없는데요...
이책을 읽고 언젠가는 카프카의 책을 읽을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압축된 카프카의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

로쟈 2007-12-31 23:33   좋아요 0 | URL
대표작들이야 다 아시는 건데요, <변신>, <소송>, <성>이 필독서이고, 개인적으론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추천합니다...
 

지난 여름에 출간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은 '올해의 이론서' 후보작 중의 하나일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갖는 책이다(관련 페이퍼는 '루만이냐 하버마스냐' http://blog.aladin.co.kr/mramor/1342097 '체계이론과 주체철학' http://blog.aladin.co.kr/mramor/1377766 등 참조). 여름에는 서론부만 좀 훑어보다가 다른 일들에 치여 미뤄두고 말았는데 내년에는 좀더 많은 장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싶다(나는 영역본까지 구해두었었다). 다행히 관련 입문서들도 나온다고 하니 사정도 더 좋아질 듯하고. 연세대대학원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담비에서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654). 국역본의 문제점도 짚고 있어서 유익하다. 

담비(07. 12. 11) 루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체계이론’을 통해 현대사회학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온 독일 사회학자다. ‘메타는 없다’는 (언뜻 포스트모던한) 테제를 기초로 정교하면서도 거대한 메타 사회이론을 구축해냈다는 점에 루만의 지적 독특함과 거장다운 사유의 넓이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작으로도 유명하여 평생 50권이 넘는 저서와 35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으며 다룬 주제의 범위도 사회의 일반이론에서 정치, 경제, 교육, 법 심지어 문학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하버마스와 더불어 전후 독일 사회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성으로 평가하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서 루만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가 매우 난해한 이론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하다’고 할 만큼 낮은 수준이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사회체계이론1, 2>가 지난여름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런 답답한 상황이 슬슬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관심을 가진 원우들을 위해 두 편의 좋은 소개글을 싣는다. (편집자)

루만과 사회학의 사고 전환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째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었고, 둘째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이론을 마련했고, 셋째 이를 토대로 한 사회이론을 제시했으며, 넷째 여기에 더해 20세기 후반의 세계사회에 대한 몇 가지 시대 진단을 내린 거대 이론가이다. 사회학자라면 누구나 그런 일을 할 텐데, 왜 굳이 ‘거대’ 이론가라고 부르느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루만이 이룬 사회학적 사고의 전환과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풍부한 개념틀, 그리고 그 방대한 작업 규모에 주목한다면, 다른 이론가들이 인본주의 개념틀에 사로잡혀 얼마나 협소한 범위만 다루고 말았는지 알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는 그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그 환경에 있는 인간을 닮은 모습(부족, 혈통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현대 이전에는 ‘인간적 사회’라는 관념을 갖고서도, 즉 인간 주체나 사물 객체와 다른 사회적 차원을 고민하지 않고도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치, 법, 학문 등 여러 기능체계로 분화된 현대에 이르게 되면 사회는 더 이상 그 환경에 있는 인간들을 구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화 형식을 갖게 된다. 오직 경제인이기만 한 사람도 오직 학자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경제나 학문과 같은 기능체계의 작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사회계약론이나 실천이성과 같은 주체철학에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정된 사회구조 모델을 전제하는 것은 비개연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연속인 소통 과정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지금까지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루만의 중기 주저작인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초반, 특히 이중의 우연성을 다룬 3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전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전환을 토대로 루만은 기존 사회학과 철학의 개념들인 의미, 소통, 행위, 관찰, 구조, 과정, 인격 등에 모두 새로운 위치값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 일반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틀을 이 책에서 마련한다. 사회학 역사에 있어서나 체계이론 역사에 있어서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더 소개하기 전에 왜 내가 한글판의 제목인 ‘사회체계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들’이라고 칭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루만 번역서의 문제들

한국에 루만에 대한 소개는 그리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전에 번역된 저작은 협소한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루만을 다룬 입문서 하나가 번역되긴 했으나, 그조차도 루만의 제자들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 개론서 전문 저자가 겉핥기식으로 쓴 책이었다. 아직 하버마스의 저작들을 통해 이루어진 루만에 대한 왜곡된 소개, 즉 파슨스의 아류 혹은 기성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체계이론 정도로 여겨버리는 인식을 교정할 만한 한글책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생성(Autopoiesis)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이후 1984년에 나온 Soziale Systeme의 번역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루만의 이론사에 있어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 개념들을 완성한 저작이자, 1997년에 나온 또 다른 주저작인 『사회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사회이론 생산의 출발점이었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이 연구는 사회를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이자 다른 여러 사회적 체계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독18, 한1:63)고 말한다. 사회적 체계를 다루는데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니?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상호작용, 조직, 사회(Gesellschaft)로 분류한다. 이들 사회적 체계는 각각 고유한 작동(Operation) 원리를 갖고 있으며, 그중 사회는 ‘모든 소통을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로 정의된다. 그래서 기업, 정당, 학교 등에 대한 연구가 조직사회학의 과제라면, 경제, 정치, 교육 등 지역 경계를 넘어 범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에 대한 연구는 사회이론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체계들』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이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상호작용, 조직, 사회 등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기초를 놓는 책이다. 그래서 soziales Sytem은 social system과 ‘사회적 체계’로, Gesellschaftssystem은 societal system과 ‘사회체계’로 구별해 옮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한글판 옮긴이는 독자들이 읽기 쉽게 ‘사회적-’를 ‘사회-’로 바꾸었고, 그래서 Gesellschaft를 “사회”, “(기능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전체사회”, “공동체” 등 “문맥에 따라 상이한 역동적 번역을 취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역동적 번역은 사회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루만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다. 분절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소통들이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회들이 있었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전세계적으로 소통이 연결되는 현대 사회는 세계사회라고 말하는 루만의 설명법은 위와 같은 역동적 번역 때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더구나 ‘공동체’라는 번역은 사회를 결코 인간 공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루만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식대로 그대로 옮기면 “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사회”(독585)라는 문장은 옮긴이에 의해 “전체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공동체”(한2:290)라는 무의미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Gesellschaft라는 단어 자체에는 결코 ‘전체’니 ‘공동체’니 하는 함의가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옮긴이의 몰이해는 제목뿐만 아니라 루만 소개에서도 드러난다. 옮긴이는 1997년에 나온 루만 사회이론의 집대성작인 『사회의 사회』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의 경제』, 『사회의 학문』 등 일련의 사회이론 저작들을 『사회적 체계들』의 각론이라고 말한다. 앞선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기초 개념을 마련한 후 사회이론 작업은 각론들을 먼저 쓰고 이들의 총론을 마지막에 썼다. 옮긴이가 루만 이론의 체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체계이론』을 유일한 “결정판”으로 만들어 많이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책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번역의 질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연산(Operation), 외율준거(Fremdreferenz)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 선택은 그렇다 치고, 수십 번에 걸쳐 bewa..hren(입증)을 bewahren(보존)으로, Simplifikation(단순화)를 Implikation(함축)으로, Zumutung(요구)를 Vermutung(추측)으로 잘못 읽는 것은 최소한의 정성 부족을 보여준다. 문장 오역도 무수히 많으며,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 나온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여기서 밝혀둘 것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루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원래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역의 탓도 크다는 점이다. 독일어를 못 읽는 사람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영역판을 추천한다(*역시나 국역본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 체계들』의 내용

『사회적 체계들』은 도입과 1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도입인 ‘체계이론의 패러다임 전환’과 체계와 기능, 체계와 환경을 다룬 1장과 5장은 루만 체계이론이 파슨스와 달리 구조보다는 기능을 우위에 둔다는 점,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이룩한 자기생성적 전환을 받아들임으로써 체계 중심이 아닌 세계(체계/환경-차이의 통일) 중심의 이론이라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체계이론이 보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줄 것이며, 사회의 환경 문제, 즉 인간의 고통이나 배제 문제나 생태적 위기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큰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를 다루는 2장은 루만 이론의 또 하나의 자원인 후설의 지향적 의미 개념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수용해 변형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 루만은 70년대 초부터 의미가 행위나 구조보다 앞서는 사회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해왔고, 이 책에서 의미 개념은 의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체계(의식체계, 사회적 체계)의 다른 자기생성 원리를 밝힘으로써 완성된다. 앞서 말했듯이 3장은 사회적 체계가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임을 밝히고 있으며, 4장에서 소통 개념을 해명함으로써 사회적 체계의 구성요소가 소통이지 왜 행위일 수 없는지 밝힌다.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의 위상을 밝히는 4장과 8장은 사회학 논쟁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루만은 행위란 체계가 자기생성의 동일성 지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통의 세 가지 선택인 정보, 통지, 이해 중 통지행위 하나로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구조는 사건들의 연쇄인 소통 과정에서 기대를 제약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구조는 과도한 임의성을 제약하는 것이지 행태 자체를 규제할 수 없고, 따라서 과정은 구조상 비개연적인 것을 개연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듯 행위에 대해 소통을, 구조에 대해 사건과 과정을 우위에 둠으로써, 루만은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이 행한 행위 중심 사회학과 구조 중심 사회학의 절충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며, 하버마스의 소통적 행위 이론이 상호이해지향이라는 확인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의지함으로써 갖는 한계를 드러낸다.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이며, 개인은 무엇이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히는 대목은 6장 상호침투와 7장 심리적 체계들의 개체성이다. 그리고 9장은 헤겔 이래 계속 논쟁이 되어 왔고 오늘날도 기능론 대 갈등론이라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며, 10장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사회적 체계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루만은 이 책의 1장을 “다음의 고찰들은 체계들이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실재에 비추어 입증되어야 할 책임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체계가 단순한 분석 모델이 아니라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러한 선언에 대한 해명은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루만에게 세계란 체계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하는 체계는 자신의 관찰이 가진 맹점을 볼 수는 없으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반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루만이라는 관찰자의 맹점에 묶여있는 것이고 세계는 다르게도 관찰 가능하지만, 누구도 그런 맹점을 벗어난 세계를 알 수 없다. 합리성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지시와 합리성, 그리고 인식론을 위한 귀결들을 다루는 11장과 12장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들이지만 과감하게 ‘체계들이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체계/환경-구별이 세계 기술에 있어 높은 실적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루만 이론의 전면모는 여기까지 읽어야만 밝혀진다. 그리고 11장의 논의는 체계이론을 통한 사회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으로도 이어진다.

Niklas Luhmanns Theorie sozialer Systeme. Eine Einführung.

『사회적 체계들』을 다 읽는 데는 워낙 긴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친절한 입문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입문서를 추천하자면 독어는 G.Kneer와 A.Nassehi가 함께 쓴 책과 M.Berghaus가 쓴 책을, 영어는 M.King과 C.Thornhill이 함께 쓴 책을 추천한다. 첫 번째 책은 필자의 번역으로 내년 초에 한글판이 나올 것이다.(정성훈 /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0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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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만을 전공하는 분께 이야기 들은 바가 있기도 해서, 아직 번역본은 구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역시나 더욱 구입을 망설이게 하는 글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3 08:4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크게 신뢰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은 덜컥 구입했었는데요, 역시나 문제가 터지는군요.--;

책사랑 2007-12-1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미비에 대해 공감하는 바입니다.

로쟈 2007-12-13 08:39   좋아요 0 | URL
출판계 자체의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 같습니다. 언제나 독자들이 문제를 떠안아야 한다는 건 참...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언론리뷰들이 다소 뒤늦게 뜨고 있는데 늦게라도 많은 이들이 관람할 수 있으면 좋겠다(나는 이달 마지막주에 단체관람할 예정이다). 그래야 러시아 미술을 안방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생길 것이기에. 그런 계산속으로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12. 12) 칸딘스키 보러 갔다가 ‘19세기 러시아’에 빠지다

주최측에서 욕심을 많이 부린 전시다. 이는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 됐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19세기 리얼리즘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까지’(한·러교류협회 주최)는 제목 그대로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러시아 미술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한 작가만 54명, 작품은 회화만으로 무려 91점이다. 한국 사람들이 알 만한, 추상화의 선구자 칸딘스키를 제목에 내세웠지만 그의 작품은 4점밖에 안된다. 초기 습작 소품 두 점을 빼면 실질적으론 두 작품에 불과하다. 정작 감동을 주는 작품은 19세기의 그림들이다. 제목이 전시의 진가를 제대로 강조하고 있지 못한 셈이다.



바꿔 말하면 19세기 러시아 그림들을 본 것만으로 전시의 가치는 높다. ‘광대한 국토만큼이나 폭과 깊이를 자랑하는 러시아 미술의 백미’를 볼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특징은 리얼리즘으로 요약된다. 문혜영 큐레이터는 “민중·인간에 대한 관심, 광대한 영토에 대한 사랑이 러시아 미술의 두 가지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사실주의적인 메시지는 드라마틱한 러시아적 분위기를 담아 회화로 표현됐다. 19세기 작품은 총 63점으로 초상화, 풍경화, 역사화, 풍속화 등 주제별로 구분된 방에서 전시되고 있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등 예술가들을 주로 그린 것이 특징인 19세기 러시아 초상화는 동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자랑스러워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다. 러시아의 국민화가로 꼽히는 레핀이 인물의 본질을 깊숙이 통찰해낸 작품 ‘작가 고골의 분신’을 비롯해 낭만적 분위기를 가진 대작 크람스코이의 ‘달밤’ 등이 대표작이다. 풍경화에선 러시아 특유의 자연풍경을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묘사한 사브라소프, 격정적인 바다의 생명력을 탁월하게 묘사한 아이바조프스키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혁명, 빈부격차, 사회부조리 등을 주제로 러시아 미술의 본질적 특징인 ‘사회 참여로서의 예술의 적극적 힘’을 반영한 작품들은 역사화와 풍속화 섹션에서 확인된다.

러시아 회화사 전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전쟁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는 베레샤긴의 ‘불의의 습격’, 권력자와 무산자의 불평등한 현실을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마소예도프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 등은 꼼꼼히 챙겨봐야 할 작품이다. 주제별로 접근하다보면 러시아 미술의 아름다움을 다각도에서 속속들이 볼 수 있게 된다.

20세기 러시아 미술은 유럽 화파와 교류하며 여러 사조를 혼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말레비치, 라리오노프, 곤차로바, 포포바 등 다양한 화풍을 보이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 24점이 경향별로 전시된다. 칸딘스키 작품으로는 완숙기의 걸작 ‘블루 크레스트’와 ‘구성 #223’이 왔다.



전시장 구성은 좋은 편이다. 19세기의 드라마틱한 그림에서 받은 감상의 충격은 20세기의 현대적 그림들을 보며 한숨 돌릴 수 있다. 작품 수가 많기 때문에 작품이 빽빽하게 걸려 있어 감상하기에 다소 숨찬 느낌이다. 그러나 칸딘스키 작품 넉점을 여유있게 배치해 놓은 붉은색 방이 마지막에 있어서 감상을 인상적이면서도 여유롭게 마무리할 수 있다. 작품들은 러시아 양대 국립미술관인 러시아미술관과 트레티야코프미술관에서 왔다. 1996년 ‘일리야 레핀전’ 이후 12년 만에 들어온 러시아 미술전이다. 내년 2월27일까지.(임영주기자)

0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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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12-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봐야지 하는...전시입니다. 모네마네피카소에 넘 정열을 쏟아붓는 우리네 전시회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닙니다..다만 넘 편중..되었다는 생각이..)에서 이렇게 보기 힘든 전시회를 기획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로쟈 2007-12-13 14:16   좋아요 0 | URL
어렵게 성사된, 드문 기회인 건 확실합니다...

소경 2007-12-1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날 가마터 발굴장에서 일하는게 초읽기로 다가 왔네요. 어렵지 않게 행사에 문제만 없다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찬바람에 곡갱이질이나 호미나 삽질에 열정이 붙을 지도. ^^;;

로쟈 2007-12-14 22:37   좋아요 0 | URL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들고 가시길.^^

소경 2007-12-14 22:29   좋아요 0 | URL
앗.. 어제 시골에서 김장 도와서 챙긴 돈으로 책을 다량 구입해서 인터넷으로 손쉽게 구입은 무리고, 가기전에 구내 서점에 부탁해서 구해야겠네요. 연모하는 누님이 밥사준다 해서 다음 주에 직행 할 걸 미뤘는데 그게 다행인지 ^^;;, 추천 고맙습니다.

로쟈 2007-12-14 22:38   좋아요 0 | URL
겨울에 땅 파면서 읽기는 가장 좋은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을 자주 둘러보는 편이다. 12월 13일자는 러시아 출신의 화가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다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기일이어서다. 현재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http://blog.aladin.co.kr/mramor/1726386)에서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는 터여서 기사를 챙겨두도록 한다.  

한국일보(07. 12. 13) [오늘의 책<12월 13일>]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바실리 칸딘스키가 1944년 12월 13일 78세로 사망했다. 러시아 태생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한 칸딘스키가 미술로 인생의 방향을 튼 것은 30세 때인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파 회화전에서 모네의 그림 ‘건초더미’를 보고서였다.

그 해 대학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고 뮌헨으로 가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가 현대예술의 방향마저 바꿔버린 최초의 추상회화 ‘첫번째 추상 수채’를 제작한 것은 44세 때인 1910년이다. 나치에 의해 퇴폐 예술가로 지목돼 작품이 몰수되기도 했던 칸딘스키는 1933년 프랑스에 귀화해 여생을 보냈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는 칸딘스키의 예술론을 집약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무릇 예술가의 임무라는 것은 형식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고,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 데 있다”고 선언한다. 존재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모방하고 재현하던 전통적 회화를 벗어나, 예술가의 ‘내적 필연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와 색채로 화면을 채우는 현대예술은 그의 이 선언에서 시작됐다.

이로써 현대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미적 실체, ‘오브제’가 된다. 예술의 모든 외적인 표현수단이나 형식을 관통하는 예술가의 내적인 울림을 가리키는 말인 ‘내적 필연성’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닌 정신이라는 칸딘스키의 생각이 담긴 핵심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참된 예술작품은 비밀로 가득 차고 수수께끼 같은 신비스런 방식으로 예술가에 의해 생겨난다.”

칸딘스키의 글은 그 자체로 음미할 문학적 향기가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흰색은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無)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부터 무요, 태어나기 전부터 무인 것이다.”(하종오기자)

07. 12. 12.

P.S. 찾아보니 얼마전 칸딘스키 등이 엮은 <청기사>(열화당, 2007)이 번역돼 나왔다. 국내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것으로 기억돼는데, "청기사(靑騎士, Der Blaue Reiter)는 20세기 유럽 현대예술의 불규칙하고도 혼란스러운 태동을 포착하고 그 산고를 함께하며 새로운 탄생을 널리 선포했던 선구자들의 이름인 동시에, 그들이 1912년에 발간한 예술연감(藝術年鑑)의 제목이자, 그 연감의 주도적인 편집진이었던 바실리 칸딘스키(W. Kandinsky)와 프란츠 마르크(F. Marc)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시회의 이름이다."

이 청기사파를 소개하는 책으로 <청기사파>(예경, 2007)도 올해 나온 책이고, 하요 뒤히팅의 <바실리 칸딘스키>(마로니에북스, 2007)은 지난 가을에 번역돼 나왔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2007)까지 더하면 나름대로 풍족한 읽을 거리다.

Василий Кандинский Точка и линия на плоскости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은 <평면 위의 점과 선>. 우리말로 <점. 선. 면>(열화당)이라고 소개된 책이다. 한데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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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이 오늘 배송받은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748507).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과 함께 뒤적이다가 최근에 출간된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코뮨주의 선언>(교양인, 2007)에 대한 서평을 읽게 됐다. 무페의 책이 환원불가능하며 제거불가능한 사회적 '적대'를 이론적 입지점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서 '코뮨주의자'들은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을 주장하고 제창한다. 극과 극이라고 할 만하다.

<정치적인 귀환>의 '옮긴이 후기'를 보니 "같은 좌파 탈근대론자들이지만 이들(*라클라우와 무페)의 기획에 명확한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조류도 있다. 특히 들뢰즈는 민주주의의 등가연쇄에 반대하여, 소수적 생성, 직접적인 생산의 힘을 높이 산다."(251쪽)라고 적어놓았는데, '코뮨주의자들'은 달리 '들뢰즈주의자들'이기도 하므로 대립의 구도는 '급진 민주주의 vs. 코뮨주의'이면서 '라클라우/무페 vs 들뢰즈'이기도 하겠다. 하므로 나란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아직 내게 더 설득력있게 들리는 건 '우정'이 아니라 '적대'다). <코뮨주의 선언>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2. 13) 코뮨주의, 공산주의와 다른 ‘우정의 정치학’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코뮨주의’는 매우 익숙한 단어다. <문화/과학> 동인과 조정환씨로 대표되는 자율주의 평론 그룹, 연구공간 ‘수유+너머’ 등이 이 용어를 새로운 미래사회 모델을 담는 그릇으로 애용하고 있다. 이 용어의 부상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실패한 체제인 스탈린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공산주의(코뮤니즘) 대신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현실 사회의 코뮤니즘은 물질적 생산과 분배 등 생산력주의에 과도하게 치우치면서 마르크스가 애초 생각한 ‘코뮨’이 주는 상상력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요인이었다. 마르크시즘을 마르크스주의라고 바꿔 부르듯이, 코뮤니즘을 코뮨주의로 대체시켜 자신들의 미래 변혁 모델을 담은 것이다.

그렇다면 ‘코뮨주의’의 정확한 실체는 무엇인가? 코뮨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 가운데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이 질문에 응답했다. 이 단체가 최근 펴낸 <코뮨주의 선언-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교양인)은 코뮨주의의 이념적 지향을 정치·철학 등 여러 각도에서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코뮨주의’가 “현실 자체에 대한 변혁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이념임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 이념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공산주의’와 반대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코뮨의 정의에서부터 차이는 드러난다. “다양한 차이들, 여러 특이점들이 소통하며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코뮨이라고 부른다.”

옛 ‘동지들’처럼 사유화와 자본주의 화폐 경제에 반대하고 혁명을 꿈꾸지만 궁극적 목표로 가는 길은 다르다. 이 책의 부제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이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기존 마르크스정치학은 모든 차이와 대립을 계급 적대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적대의 정치학’이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대신 어감상 정반대인 ‘우정의 정치학’을 내세운다. 적이 아니라 친구에서 시작해야 하며, 부정적 방법이 아니라 긍정적 방법으로 사유하자는 것이다.

“긍정적 감응이 발생하고 지속된다면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적대 관계를 가로질러 우정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했다. 경제적 대립이나 정치적 적대조차도 우정을 막는 결정적인 경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함께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는” 코뮨은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방법은 일상의 구체적 실험이다. 대중은 “특정한 촉발이 주어지면 갑자기 솟아오르며 거대한 힘과 운동을 만들어 나아가는 자발적 흐름”이라는 것이다.

전위가 아니라 이 ‘자발적 흐름’이 혁명을 만들어나가는 주체라는 설명이다. “대중의 일상적 삶을 바꾸고, 감응과 감각을 바꾸고, 습속의 무의식을 변혁하는 것이 의식화보다 훨씬 더 혁명에 긴요한 직접적 동력”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에너지, 음식, 정보, 지식, 정서 등을 다른 코뮨과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하는 일상의 대안적 실험이 중요하다.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하고 확산시킬 때 “세상이 바뀐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국가를 독점의 영역으로 규정하면서 ‘국가적 공공성’이란 개념에 부정적이다. 이런 견해는 혁명에서 국가 권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화/과학> 동인의 사유와 크게 다르다. <문화/과학> 동인들은 국가 권력이 엄청난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중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뒤 그 기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아래로부터의 대안사회 건설 원리는 위로부터의 국가 개입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삶 속에는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많다”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줄이고 싸워나가는 일상 속의 대안적 실천이 중요하며 국가가 중요한지 아닌지는 그 이후의 문제”라고 말했다. 고 대표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하겠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강성만 기자)

0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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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2-12 23:10   좋아요 0 | URL
기쁨과 우정의 정치라...왠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들리네요. 자신이 형제로 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떠오르네요. 공상적 사회주의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그대로 덮어씌워도 되지 않을런지

로쟈 2007-12-13 00:57   좋아요 0 | URL
소규모 공동체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겠죠...

사량 2007-12-13 01:08   좋아요 0 | URL
'선언'치고는 책이 너무 두껍네요. 400쪽짜리 선언이라...

로쟈 2007-12-13 01:09   좋아요 0 | URL
우정과 기쁨이 넘쳐났나 봅니다...

람혼 2007-12-13 01:5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댓글을 읽고 그만 파안대소하고 말았습니다. 왠지 속이 다 시원하군요.^^

드팀전 2007-12-13 10:29   좋아요 0 | URL
저도 내공이 열나부족하여 '적대'적인가 봅니다.^^

가끔 자기의 삶을 바꾸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선이나 불교 좋아하시는 분들이 이런 거 좋아라 하시더군요.나도 좋아하긴 하지만 거기까지-것으로 변혁을 상정하는 그 원대한 꿈에 딴지를 거는데..딴지건다고 뭐가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염불하는 사람은 계속 염불하고 주기도문외우는 사람은 계속 외워야지...^^

공감하는 내용이 많네요.무페 책은 어떻습니까? 읽기 어려운가요?


로쟈 2007-12-13 14:18   좋아요 0 | URL
<귀환>이나 <역설>이나 비슷한 얘기들이 계속 변주됩니다. 무페는 원서도 평이한 편이어서 읽기 쉽습니다. 국역본 <역설>은 고유명사 표기에 오류가 많고 이물감이 좀 생기는 번역입니다...

드팀전 2007-12-14 09:46   좋아요 0 | URL
ㄳ ㄳ

sommer 2007-12-15 00:05   좋아요 0 | URL
에피쿠로스의 가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의 차이에 해당할 거 같네요.

로쟈 2007-12-15 10:24   좋아요 0 | URL
수유+너머식으로 말하면 밥을 같이 먹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도 될 거 같습니다. '우정과 기쁨'은 '밥상'에서 나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