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문 일이긴 하지만 일간지 지면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161803331&code=990000). 좀 낯설게 느껴지는데, 오늘 아침에 경향신문의 오피니언란을 읽을 때도 그랬다. 어제 갑작스레 전화연락을 받고 블로그의 기사가 실리게 될 거라는 건 알았다. '블로그 속으로'라는 소위 '블로그 탐방' 연재인데, 목요일에는 주로 경향신문을 집어들기 때문에 몇 주 전 처음 연재가 시작될 때부터 읽어본 기억이 있다(우석훈,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들이 이 서재보다 먼저 다루어진 블로그들이다). 지면에 게재된 건 작년말에 작성한 '벤야민 읽기의 우울'(http://blog.aladin.co.kr/mramor/1797977)이고 글의 선정과 발췌에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기억을 위한 자료로 창고에 넣어둔다.   

경향신문(08. 01. 17) [블로그 속으로]우울한 ‘벤야민’ 읽기

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에서 벤야민에 관한 장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는다. 원저인 ‘토성의 영향 아래’를 내가 안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책을 찾아보려는 열정 역시 이럴 땐 ‘우울한 열정’이다(손택은 벤야민이 우울증적 기질의 비평가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한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 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08. 01. 17.

P.S. 이 연재에서 제일 처음 다루어진 건 우석훈의 '유관순 그리고 좌파소녀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21744581&code=990000) 이다. 그의 블로그는 일일 방문자수가 이곳의 세 배가 넘는 '최강 블로그'의 하나다(http://fryingpan.tistory.com/). 요즘 경부운하에 대한 글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방문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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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비판서와 또 다른 종교 비판서로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가 한꺼번에 출간됐다. 두 사람에 대한 읽기 목록을 만들어둔다.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1월 16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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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하지만 목사님들은 위대하다...
자비를 팔다-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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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1월 1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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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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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사도-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14,800원 → 13,320원(10%할인) / 마일리지 740원(5% 적립)
2008년 01월 16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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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1 12:02   좋아요 0 | URL
저도 대형서점에서 지나치면서 저런 반비판서를 보았는데요, 저런 책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딴에는 발끈해서 저런 책을 발간하시겠지만, 실제로 독자들은 유명한 책을 사볼 뿐이지, 그 유명한 책에 딸려서 나오는 반비판서를 별로 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저 그 원래 유명한 책만 더 선전해줄 뿐이지요. 뭘 주장하고 싶으면 독자적으로 해야지, 어떤 유명한 책에 빌붙어서 반비판서를 낸다는 건 이미 전략적인 패배 같습니다.

저도 도킨스 선생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최소한도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테니까요. 도킨스 선생의 외침은, "우리 거짓말은 하지 말고 살자."라고 이해했습니다. 책을 읽어보니, 과학자 입장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종교 교리를 지키기 위해 하는 거짓말은 도가 지나친 데가 있으니까요.

로쟈 2008-01-21 14:33   좋아요 0 | URL
<도킨스의 신>의 경우엔 일부 과학자나 진화생물학자들까지도 지지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전략적인 패배'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간추린 내용을 보니 저로선 쉽게 동의되지 않았지만...
 
프루스트와 신경과학

며칠 매달렸던 일이 끝나서 30분 정도 쉬기로(놀기로?) 했다. 그래봐야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몇 권 대출하고 서재에 새로 페이퍼를 올리는 것 정도이지만. '만남'이 오늘의 화제인 듯해서 컬처뉴스의 한 칼럼기사도 옮겨놓는다.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지호, 2007)는 지난달에 소개 페이퍼를 올려놓기도 했는데, 그동안 책상에 올려놓고 아직 펴보지도 못한 책이다. 막간에 리뷰를 하나 더 읽어둔다.

컬처뉴스(08. 01. 16) 예술과 과학의 매혹적인 만남

우리는 감각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행위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타인을 인식하면서 자아를 형성해간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감각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세상은 감각계가 우리와 다르게 작동하는 동물들의 세상과 다르다. 외계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도 분명 우리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흥미롭게 재구성하기도 한다. 예술 활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이상적인 미를 구현해낸다. 이것 역시 감각 기관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인간들에게 새의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고 나비의 무늬가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이다.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오버로드 종족이 인간의 음악을 들으며 당혹해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감각이 우리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유기체의 감각 기관의 작동 방식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세상이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구성’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술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예술의 본분이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과학적 사고가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파고들면서 역으로 예술가들은 인간의 심리적 내부, 주관적인 세계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당대의 대중들은 이런 예술에 놀라워하고 일부는 혐오감마저 드러냈지만 역사는 결국 이들 예술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세상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과 과학이 흥미진진하게 만난다. 지난 2-30년 동안 신경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인식의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험 장비가 개선되고 실험 방식이 정교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는지, 그리고 이런 감각자료들이 어떻게 종합적인 인식으로 구성되는지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인식이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양상을 띤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드러냈던 경험의 양상이 과학에 의해 하나씩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바로 인간의 인식의 비밀을 두고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서로 조응되는지를 흥미롭게 파헤친 책이다.

감각과 인식의 선구자들
어렵고 따분한 줄로만 알았던 신경과학이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학문 분야로 떠오를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인간의 뇌의 미묘한 비밀을 밝혀내는 신경과학은 올리버 색스라는 스타급 필자를 낳으며 흥미로운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조나 레러도 만만치 않다. 대학에서 신경과학과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데이터를 오가며 우리를 인간 두뇌의 내밀한 세계로 안내한다.

이 책에는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다들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의 인식의 틀을 새롭게 정의한 예술가들이다.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현대 요리의 기초를 확립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요리사이다. 그의 요리의 비밀은 송아지고기 육수에 있었다. 고기를 적절히 눌어붙게 해서 단백질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기막힌 소스를 만들어냈다. 그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이 맛의 비밀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과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의 입맛을 끄는 음식에 글루타메이트라는 분자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맛을 해독할 수 있는 수용체의 존재가 우리 혀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한편 에스코피에는 음식의 풍미가 그저 혀에서 감도는 맛일 뿐만 아니라 후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의 혀가 상황에 좌우되는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 또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우리의 기대감이 맛을 규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같은 맛과 냄새라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그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음이 신경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에스코피에는 다행히도 당대에 인정을 받아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화가 폴 세잔과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대중들의 편견과 몰이해로 고통을 받은 사례에 속한다. 폴 세잔이 회화에서 이룩한 혁신은 빛이란 보는 과정의 시작일 뿐임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그는 눈이 아니라 뇌로 그리는 그림을 그렸다. 세잔의 화폭은 어떻게 보면 미완의 그림처럼 보일 만큼 본질적인 요소들만을 남겨둔 다분히 추상적인 경향을 띤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거기서 비어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 그림에 채워 넣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한 감각들을 취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각자료들을 일관된 재현으로 묶어내는 뇌의 작용이 없이는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을 사진처럼 이미지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을 통해 이미지를 조합해낸다. 이런 신경학적 진리를 세잔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음악사상 가장 떠들썩한 스캔들이었다. 조성 화음을 근간으로 하는 예측과 해결의 익숙한 패턴을 벗어던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으로 밀어붙이는 이 곡은 아름다움과 가장 거리가 먼, 청중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음악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왜 이런 음악을 작곡했을까. 그것은 아름다움도 학습을 통해 새롭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음악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싶어했다. 여기서 조나 레러는 우리에게 피질푸가 네트워크라는 것을 설명한다. 아무리 흉한 소음도 반복적으로 들으면 패턴을 기억해 점차 수월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기제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파민이라는, 음악적 정서와 관련 있는 신경전달물질이 관여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의 말대로 <봄의 제전>의 초연은 청각의 경계를 밀어붙이는 극단적인 실험이었지만, 이후 청중들은 점차 여기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현재 이 음악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춘 고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위의 세 명이 미각, 시각, 청각이라는 개별 감각의 본질에 대해 알려주었다면, 작가들은 주로 우리의 정신 작용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의 기억이 늘 현실을 왜곡하는 불완전한 것임을 간파했다. 우리의 뉴런은 고정된 회로로 연결되어 전기적 자극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시냅스라고 하는 틈새를 통해 소통한다. 그래서 기억은 회상의 순간에 시냅스 간의 전이를 통해 매번 새롭게 활성화된다. 우리의 기억이 변덕스러운 것은 우리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신경적 기제 때문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동기술을 통해 언어에서 의미와 구조를 분리하려고 했는데, 훗날 촘스키에 의해 언어 배후에 심층구조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시도가 정당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인간 심리의 내면을 파고든 버지니아 울프의 양식은 우리의 자아가 감각자료들을 해석하는 가운데 창발하는 것임을 선취한다. 자아가 단절된 순간들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현대 신경과학을 통해 밝혀진 바이다.

이렇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과학과 예술이라는 상이한 두 분야를 흥미진진하게 오가면서 우리에게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벌인 작업이 얼마나 과학적인 개연성을 확보한 실험이었는지 확인시켜 준다. 이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오만함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과학이 제아무리 인간의 모든 비밀을 풀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신비는 남을 수밖에 없으며, 과학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군림하는 시대에도 예술은 여전히 맡은 바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SF 소설가들의 상상이 미래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듯, 오늘날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인간의 인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발견될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일종의 과학 실험실인 셈이다. 이렇게 과학과 예술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정이창_문화비평가)

08.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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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과 뇌과학이 만나는 곳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14 11:47 
    어제 주문한 책 중의 하나는 석영중의 <뇌를 훔친 소설가>(예담, 2011)이다. 지난주에 나온 가장 흥미로운주제의 책인데다가 저자가 러시아문학 연구자여서더더구나 놀랍다.소개기사를 미리 읽으니 문학과 뇌과학의 만남이불가능한 만남은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더 장려되면 좋겠다...연합뉴스(11. 08. 14) 문학과 뇌과학이 만나는 곳"공상의 행복한 힘으로/ 다시 살아난 허구의 인물들,/ 쥘리 볼마르의 연인,/ 말렉 아델과 드 리나르,/ 격정의
 
 
2008-01-17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학사, 2007)에 대한 서평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072). 서평에 관한 글을 쓸 일이 있어서 서평들을 간간이 둘러보는데, 읽다 보니 재미있기에 스크랩해놓는 것이다. 책은 예전에 소개하고(http://blog.aladin.co.kr/mramor/1584851) '이달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도 올려놓았었지만 개인적으론 극히 일부분밖에 읽지 못했다(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견물생심'이라고 서평 덕분에 또 읽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일단은 참아두기로 한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질 들뢰즈의 수업 시기

하나의 텍스트가 국경을 넘어 올 때 변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아마 우리의 경우에는 저자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번역도 한 몫 할 것이다). 변하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제목일 텐데, 그것을 원서의 제목과 비교해 번역본 앞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략 ‘생각 없는 제목’과 ‘생각 있는 제목’으로 나눌 수 있다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는 ‘생각 있는 제목’에 속한다.

번역본의 프랑스어 텍스트는 들뢰즈 사후, 들뢰즈가 생전에 이런 저런 지면들을 통해 발표했지만 하나의 단일한 텍스트로 묶여 출판되지는 않았던 글들이 라퓨야드(David Lapoujade)의 편집을 통해 두 권의 텍스트(L’i^le deserte et autres textes :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Paris : Editions de Minuit, 2002, Deux re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Paris : Editions de Minuit, 2003)로 출판된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이 두 텍스트에서 12편의 소논문과 철학저널에 발표되었다가 나중에 단행본에 실린 것들 가운데 7편의 소논문을 번역하여 싣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후에 묶여 나오는 텍스트들의 특징인 발표 시기에 따르는 연대기적 배열과는 상관없이 철학자들에 대한 소논문들이 플라톤부터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철학사의 재구성
이렇게 사후에, 생전에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글들이 독립된 텍스트로 묶여 나오는 것은 들뢰즈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어서 이미 푸코의 경우도 Dits et ecrits(Gallimard)로 그의 이런 저런 짧은 글들이 사후에 묶여 나왔으며 그렇게 실린 글들은 우리에게 푸코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더 없이 소중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들뢰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게 두 권의 텍스트가 ‘철학사’에 초점을 맞춘 제목과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배치된 내용을 가진 하나의 텍스트로 출판된 사연은 역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들뢰즈 철학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이 지니는 난해함 때문에 수용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난해함을 체계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역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그의 철학적 연대기를 구분하여(1953년 『경험주의와 주관성』에서부터 1968년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까지의 첫 번째 단계, 1968년 『차이와 반복』과 1969년의 『의미의 논리』의 두 번째 단계, 마지막으로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리는 1972년의 『앙티 오이디푸스』이후의 세 번째 단계) 초기의 철학사 연구를 중심으로 들뢰즈 철학의 굵은 줄기를 잡은 다음에 중기의 수렴과 후기의 발산을 따라 들뢰즈의 사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자의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중추에 해당하는 제3장「사유의 이미지」에서 보여준 작업은 서양고전철학에 있어서 사유의 임의적인 전제들을 추출하여 고전적 사유의 임의성을 보여주고 이에 대해 필연적인 사유의 형식을 마주침의 사유로 설립하는 작업이었으며 이러한 임의적인 전제를 추출하는 방식은 동일하게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의 임의적인 전제(오이디푸스)를 추출하는 작업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의적 전제’의 시굴작업은 그의 니체 연구시기에 이미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완료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초기의 철학사 연구를 통해 들뢰즈의 중기로 수렴해 들어갈 수 있으면서 또한 후기의 발산들을 따라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들뢰즈 철학의 가장 좋은 입구는 『니체와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들뢰즈에 도달하는 간략한 지도
그렇다면 들뢰즈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초기의 철학사 연구의 효용성은 지적된 셈인데, 과연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철학자들에 대한 소논문들과 들뢰즈의 초기의 철학사 연구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질 들뢰즈의 수업 시기’의 결과물들은 이미 우리에게 『베르그손주의』, 『니체와 철학』, 『칸트의 비판철학』,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등과 같은 개별적인 연구서로 출간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서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연구대상인 철학자의 생각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유하는 들뢰즈의 사유 스타일(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베르그손 연구자들에게서 들려오는 끝없는 비난들-그것은 스피노자의, 니체의, 베르그손의 것이 아니다!)과 그 스타일을 통해 전개되는 들뢰즈 사유의 만만치 않은 두께에 고전을 면치 못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짧은 소논문들은 문제의식과 그 전개에 있어서 큰 차이 없이 개별적인 연구서를 요약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초기의 철학사 연구 시기가 들뢰즈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면 이 소논문들은 우리를 들뢰즈에게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하는 간략한 지도와도 같다.

예를 들어, 이 텍스트에 실린 「베르그손, 1859~1941)」은 그간 들뢰즈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소논문이다. 그러나 “지속duree”, “기억memoire”, “생의 약동elan vital”, “직관intuition” 과 같은 베르그손 고유의 개념으로 베르그손의 철학을 정리할 때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다가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차이와 반복』의 구조를 앞서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짧은 소논문은 사후적으로 우리가『차이와 반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물론 『차이와 반복』으로 들어가는 소논문은 이 뿐만이 아니다. 「드라마화의 방법」은 『차이와 반복』의 다른 방식의 요약이기도 하다).



철학사 해설을 위한 최대치의 변화
따라서 들뢰즈의 저서가 거의 대부분 번역되어 있으면서도 수용에 있어서의 어려움이 여전히 크다는 것이 현재 우리의 상황이라면, 한국어로 번역·재구성함에 있어서 이렇게 배치하는 것은 우리를 기대에 들뜨게 하는 초청장일 듯하다.

하지만 나는 역자의 친절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은 남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논문들을 통한 접근이 주는 효용은 읽어야할 텍스트의 페이지수가 줄어드는 정도의 효용에 불과할 뿐, 들뢰즈의 사유 그 자체를 따라가기 위한 어려움은 그리 크게 감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손, 1859~1941)」을 읽으면서 우리는 당연히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이나 『물질과 기억』과 같은 베르그손의 저작을 꺼내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베르그손 본인의 생각이 정말 그러했던가? 라는 어리둥절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그의 가장 난해한 저서에서”와 같은 들뢰즈의 표현을 보면 울화가 치밀 수도 있다(“이봐 들뢰즈! 당신이 더 어려워!”).

그러나 들뢰즈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지만 『차이와 반복』같은 대작 앞에서 시간적으로 망설여진다면, 우선적으로 「드라마화의 방법」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 번역의 페이지수를 계산하면 『차이와 반복』은 708페이지이만 「드라마화의 방법」은 23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런 식의 배치는 단지 난점들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법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역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서문에서 니체적 영감에 힘입어 말하고 있는 콜라쥬(collage)의 문제이기도 하다. 니체 이후로 현대 철학이 처한 어떤 비가역적 상황 가운데 하나는 바로 철학 책 쓰기의 문제이다.

철학사는 이미 고정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철학 자체의 재생산이다.” 따라서 “철학사에서 해설은 [해설되는 철학의] 진정한 분신으로 기능해야 할 것이며, 이 분신에 적절한 최대치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을 들뢰즈는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철학자들에 대한 비역질을 통해 괴물을 낳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는 들뢰즈의 소논문들의 연대기적 배열은 들뢰즈에 의해 변용된 하나의 사유의 계보 또는 괴물의 계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유일무이한 철학사를 만나게 된다. 역자가 붙인 제목처럼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마지막으로 책의 표지에 대해서 한 점의 불만을 토로해보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등장하는 철학자들 가운데 일부의 초상화를 이 책은 표지에 배열했는데. 과연 그 철학자들에 대한 들뢰즈의 글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까? ‘최대치의 변화’를 겪은 얼굴인데도?(정재화│철학 박사과정)

08.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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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소개)『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08-11 14:34 
    ‘생명의 철학’으로 다시 읽는 들뢰즈『시네마』—탈인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예술의 역능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클레어 콜브룩 지음 정유경 옮김|도서출판 그린비|갈래 : 철학, 인문발행일 : 2008년 8월 5일 | ISBN : 9788976823151신국판변형(150*220mm)|304쪽리좀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서 들뢰즈의 독특한 이미지론을 통해 철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의 역능을 살핀다. 살아 있는 인간 신체가 이미지화하는 능력으로 세...
 
 
2008-01-15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5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16 16:58   좋아요 0 | URL
순간적인 착오였지만, 처음에 제목을 "이봐 들뢰즈, 당신이 더 더러워!"로 읽었다는.ㅜㅜ

로쟈 2008-01-16 17:57   좋아요 0 | URL
'더럽게 어려워'로 정리하면 될 거 같네요.^^

람혼 2008-01-18 10:47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개그에 약한 것 같습니다. 또 혼자서 웃고 말았다는.^^;

Runa 2008-01-18 02:39   좋아요 0 | URL
들뢰즈 어려운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뭐라 할 말은 없고..^^;;

그래서 이 페이퍼와 아무 상관없는 소리지만, 작년 말 나온 옵세르바퇴르의 미셸 투르니에 대담 기사를 읽었는데, 들뢰즈를 거론하는 내용이 있어요. 들뢰즈보다 한 살 많은 그가 표현하길 들뢰즈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의 형제였다. 나는 그를 보호했고, 나는 그의 노예가 됐다. 허참 두 사람이 친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돌 줄이야...
고교 2학년 때 신입생인 들뢰즈를 만나 철학을 알려준 이도 투르니에 자신이었다는데, 들뢰즈가 철학을 공부하고는 모두를 그에게 무너졌다는..후후 완죤 무협지? 투르니에는 그걸 어떤 거대한 창조자였다고 회고하더군요.
저는 사실 그 다음 이야기가 더 흥미롭더군요. 저역시 들뢰즈가 얼마나 피로와 권태, 자신의 비관주의와 싸우며 철학했던가를 느끼지만, 투르니에는 그에게 모든 것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고 표현하더군요. 아예 고흐와 비교된다고 보더군요.

나름 힘들게 사유했던 사람이니, 그에게 연민을..

로쟈 2008-01-18 23:09   좋아요 0 | URL
제가 듣기에도 투르니에가 들뢰즈 때문에 철학을 접었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현대사상에 관한 책들의 출간이 최근 몇 년간 부쩍 늘었다. 예전에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반 독자라면 이 분야에 관한 읽을 거리가 모자란다고는 말 못하겠다. 최근 출간된 후지타 쇼조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논형, 2007)은 '연구'란 말이 붙은 제목부터가 이제 보다 '본격적인' 저작들이 소개되는 듯하다는 인상을 준다. 당장에 읽을 일은 없어 보이지만 리뷰기사는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1. 12) 천황제와 ‘전향’의 함수관계

패전을 맞이했을 때 후지타 쇼조(1927~2003)는 18세의 육군예비사관 후보생이었다. 그는 귀향하던 도중 서점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마루야마의 제자가 되었다. 전후 일본 사상에서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이 제1세대에 속한다면 후지타는 요시모토 다카아키, 이로가와 다이기치 등과 함께 제2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다지 많은 글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마루야마 학파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그가 ‘사상의 과학 연구회’의 ‘공동연구·전향’ 상중하의 3권에 기고한 4편의 논문을 엮어 출판한 것이다. ‘사상의 과학 연구회’는 마루야마 마사오, 쓰루미 순스케, 다케다 기요코를 비롯하여 문자 그대로 전후 일본 민주주의를 리드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으로 1946년 발족되었다. 특히 이들의 전향에 대한 공동연구가 1959~1962년에 걸쳐서 집필-번역본의 편자 해제에서는 상권이 1952년으로 되어 있지만 59년의 오기일 것이다-되었다는 것은 당시 전후 일본의 사상 상황이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1955년의 육전협(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과 스탈린 비판, 1956년의 헝가리 동란, 1960년의 안보투쟁과 그 좌절 등을 배경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인 영향력이 퇴조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근대주의적인 이론과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마루야마의 ‘일본의 사상’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을 비롯하여 이시다 다케시, 가미시마 지로, 하시가와 분조 등 마루야마 학파의 연구가 거의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후지타의 입장도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1956년 발표한 ‘천황제국가의 지배원리’와 이듬해의 ‘천황제와 파시즘’에서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전향 성명이 일본 민중의 천황숭배에 대한 ‘굴복’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황제와 전향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후지타의 전향론의 기본적인 시각도 이러한 천황제의 지배원리에 대한 관심과 ‘보편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후지타는 1933년을 정점으로 한 ‘급진주의자’들의 집단전향, 1940년의 신체제운동에서 정점을 이루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강제적 전향, 그리고 패전에 의한 권력의 이동에 따른 ‘반동주의자’들의 전향과 냉전체제의 심화에 따른 점령정책의 역코스와 1952년의 노동절 탄압 직후에 정점에 달한 ‘급진주의자’들의 전향을 각각 단계별로 나누어 총론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전향, 비전향, 위장전향, 표면적 전향, 실질적 비전향 등에 대한 일면적인 판단을 배척하고 다의적인 양상의 내면으로 들어가 파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향은 단순한 강제성이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사상이나 심경의 변화도 아니다. 그것은 곧 자발성의 문제와 강제성의 문제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장의 표제가 ‘쇼와’라는 원호를 사용해서 표기한 점에 대해서 저자는 당시에는 “이러한 종류의 연구 집단과 그 지도자조차도 원호 표기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쇼와’라는 원호를 사용하는 그 자체에 천황제와 전향의 관계가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역자 후기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넓은 의미에서의 전향이란 국가와 민족을 다른 어떤 것보다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것으로 자신의 내면세계에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국가권력의 강제적 행위를 가리키며, 일본의 경우 그러한 강제성과 자발성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천황제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후지타의 글은 난해하다. 마루야마 학파의 글들이 모두 그렇지만 특히 석사과정 때 읽은 후지타의 ‘천황제국가의 지배원리’는 정말 난해했다. 지금 다시 펼쳐보면 새까맣게 줄이 그어져 있지만, 여전히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난해한 후지타의 글을 옮기는 작업도 여간한 집중력과 끈기가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역자의 노력에 새삼 감탄한다.

끝으로 이미 반세기 전에 집필한 ‘전향’을 주제로 한 연구서가 오늘날 번역된 의미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는 후기에서 한국의 ‘운동권’과 ‘진보적’ 지식인의 ‘전향’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친일파가 해방 후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과연 ‘전향’인지 ‘변절’인지 되씹어보고 싶은 부분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전향’과 ‘비전향’, ‘변신’과 ‘변절’에 대해서도 사상사적인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박진우|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08.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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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14 08:19   좋아요 0 | URL
저의 '강박적 전공분야'(?)와 관련된 반가운 출간 소식이군요.
소중히 갈무리해두겠습니다. 감사드려요, 로쟈님.^^

로쟈 2008-01-14 08:23   좋아요 0 | URL
저는 리뷰만 기다리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