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라기보다는 저술가란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탁석산의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더러 칼럼들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그리고 한때는 TV에서도 곧잘 볼 수 있었지만) 그의 '베스트셀러'들은 관심을 끌지 않았다. 흄 전공자로 처음 이름을 알게 됐지만(아마도 흄의 <인성론>에 관심을 가졌을 때인 듯하다), 그가 널리 알려진 건 <한국의 정체성>이란 책이 뜨면서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책을 손에 들기 전에 부정적인 평을 먼저 접했던 듯하고, 이후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최신작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2008)가 지난달에 나왔을 때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창비'에서 출간됐다는 점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한 가지를 보태자면,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했기 때문입니다"란 주장이 눈길을 끄는 정도. 이걸 '조선 단절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근 조선사와 조선 유학에 좀 관심을 갖게 되면서(제임스 팔레와 한형조 교수 덕분이기도 하고 나이 탓이기도 하다. 나는 마흔 이후에는 한국학과 동양 고전에도 눈길을 주기로 10여 년 전에 작정한 바 있다) 문득 '조선 단절론'의 근거(evidence)가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손에 들게 됐고, 또 그런 김에 관련기사도 찾아 스크랩해놓는다(나의 부지런함이여!). 강성민 전 교수신문 기자의 '탁석산론'은 퍽 신랄한 평가를 포함하고 있는데, 어차피 '한국에서의 철학=문화'라는 것이 탁석산의 지론이기에 '철학'이란 (서구식) 기준에 미달한다는 비판에 대해 저자가 괘념할 성싶지는 않다. 어쨌든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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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8. 11. 15) [저자 초대석]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철학자 탁석산(50ㆍ사진)씨의 답이다. 개항 후 한국의 100년을 지배해 온, 탁씨가 한국인의 '생활철학'으로 지목한 세 가지다. 이 질문을 제목으로 딴 그의 새 책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발행)가 출간됐다. '한국적'이라는 타이틀의 권위를 허물어뜨렸던 전작 <한국인의 정체성>(2000)처럼 이 책도 단정적이고 도발적이다.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선비에 대한 향수가 이는데, 조선의 패러다임인 주자학과 현대 한국인 패러다임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서양의 철학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것 못지않게, 고유의 것에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 이미 서양과 조선을 뛰어넘고 새로운 시기를 100년 이상 살았다"며 "지식인 사회가 조선이라는 벽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 종교, 철학이 일치된 조선 주자학과 결별한 뒤에 '개인'의 공간이 탄생했고, 그 공간에 깃든 한국인의 철학과 정신이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라는 것이다.

"종파를 초월한 기복신앙이 현세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또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즐기자'라는 태도는 인생주의를 보여주죠. 적극적으로 감각적인 즐거움을 원하는 것, 그것이 한국인 특유의 역동성과 야성성을 낳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허무주의를 한국인의 철학으로 내세운 것, 그리고 그것을 긍정하는 그의 논지다. "한국인의 허무주의는 서양의 니힐리즘과 다릅니다. '인생 뭐 있나. 다 그런 거지'하는 태도가 절망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시간을 견디는 방어수단 혹은 '보험'으로 작용합니다. '지치고 힘들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결국 '어쩌겠냐, 열심히 살아야지'로 이어져요. 이게 현대 한국인의 철학입니다. 건강한 허무주의죠."(유상호기자)    

 

담비(08. 06. 10) 상식은 어떻게 철학으로 포장되는가 : 철학자 탁석산  

탁석산(卓石山)은 그 특이한 이름 때문에 머리에 각인된 철학 전공의 저술가이다. 한자로 보면 더 특이하다. ‘탁월한 돌산’이니 완전히 울산바위 아닌가. 이름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는 걸 보면 본명인 것 같은데, 부친이 대단하신 분인 것 같다. 그는 지난 2000년 ‘책세상문고·우리시대’ 시리즈의 1번 타자로 나와 ‘한국의 정체성’(2000)과 ‘한국의 주체성’(2000)으로 연타석 홈런을 쳐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매우 실용적인 글들을 써서 철학자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지만, 데이비드 흄으로 박사를 받았고, 그 박사논문의 인용빈도가 높은 전공자임은 분명하다.   

그가 대학을 싫어했는지, 아니면 대학이 거부했는지 모르지만 교수의 길을 가지 않고 40대 중반 대중서 저자로 본격적으로 나선 탁석산은 책세상 문고판으로 어느 정도 유명해지자 똑같은 출판사에서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책세상, 2001)를 펴냈고, ‘철학 읽어주는 남자’(명진출판, 2003)를 내면서 이른바 ‘대기업’으로 파트너를 바꿨다. 그가 갈아치우는 출판사 이름을 한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탁석산의 고공행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웅진닷컴, 2004), ‘탁석산의 글짓기 도서관(1~3)’(2005), ‘토론은 기싸움이다’, ‘보고서는 권력관계다’(이상 김영사, 2006), ‘대한민국 50대의 힘’(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그의 최근까지의 행보다. 여기에 몇 가지 추가한다면 2004년 KBS ‘TV 책을 말한다’ 사회자를 지낸 것(얼마 못하고 장정일·김미화에게 바통을 넘기긴 했지만), 2002년 도올 김용옥의 논어강의를 신문에다가 대문짝만하게 비판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정도일 것이다. 



사실 나는 교수신문 기자시절 그와 대면한 적이 있다. 2003년 조긍호 서강대 교수가 쓴 ‘한국인 이해의 개념틀’(나남출판)이란 책이 나왔을 때였다. 대외의존도가 심한 한국의 여타 학문분야에 비해 그나마 토착성을 획득한 게 심리학 분야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심리학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인’ 연구의 계보를 조명하는 특집을 준비했고, 그 서브 메뉴로 신간을 낸 조긍호 교수의 책을 다루게 된 것이다. 좀 독특하게 할 수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서평이 아닌 ‘논쟁대담’의 방식을 취했는데, 대담자로 탁석산이 정해졌다. 교보문고 1층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조긍호 교수는 내내 겸허했고 탁석산은 내내 당당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에 이렇게 독특한 관심을 가져준다는 점에 조 교수는 감격했던 것 같다. 탁석산은 당시 A4용지 에 질문할 거리를 몇가지 적어 왔는데, 대담의 내용은 이 자리에 그리 소개할 만할 게 못된다. 인상 깊었던 건 탁석산이 대담료가 적다고 불평했다는 점이다. 두꺼운 책을 한권 다 읽고 나오는데 10만원이 뭐냐고 말이다. 그 대신 대담이 끝난 후 식사대접은 신문사 측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돈 때문에 필자들에게 책망을 듣는 일은 교수신문을 다니는 내내 겪어야 했다.(90%의 필자들이 기꺼이 글을 써주고 때로는 원고료를 받지 않기도 했지만, 나머지 10%의 필자들이 던진 쓴소리가 가슴에 꽂혔다.)

독특한 글쓰기와 사례인용적 글쓰기의 효과
그런데 이것을 끝으로 탁석산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학술적이고 인문학적인 책을 펴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날 대담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탁석산은 책의 내용이나 수준에서 별로 주목을 요하는 저술가는 아니다. 대화체 글쓰기와 독특한 사례인용 등에 영감을 얻어 그걸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은 있다. 책을 보고나면 남는 것 없지만 한두마디 에피소드는 꼭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의 저술을 놓고 본격적으로 논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을 되새겨보자. 게다가 고종석은 탁석산의 책이 매우 위험하다며 “순진한 극우주의자”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진중권은 ‘폭력과 상스러움’(푸른숲, 2002)이란 책에서 아예 기겁을 한다.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탁석산이라는 철학자(?)가 쓴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란 책을 보았다. 몇 페이지 들쳐보고는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엽기적인 책으로, 이 책에 비하면 장기의 자유판매를 주장하는 공병호의 ‘갈등하는 본능’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제3제국의 나치 철학 이후로 전 세계에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유일한 철학자다. 심지어 이런 책이 ‘좋은 책’으로 추천까지 받는다”라고 말이다. 나 또한 여기에 동감한다. 센세이션을 일으켜 떠보겠다는 ‘야심’까지 읽혀져서, 나는 탁석산이 김용옥을 가리켜 ‘약장사’라고 독설을 퍼부을 때 ‘영역다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마 김용옥은 탁석산에 비하면 그 깊이가 1백미터는 더 깊은 사람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고작 ‘상식’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사람 아닌가. 수능학원에 다 정리돼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사랑은 오류’(웅진지식하우스, 1995)라는 소설에서 유머러스하게 정리해놓은 오류의 방정식이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아닌가. 그나마 마르케스는 이 소설에서 헛똑똑이를 참 잘 그렸다. 한 법대생이 여자친구에게 ‘일반화의 오류’니 ‘의도의 오류’니 하며 잘난 척 읊어대다가, 막상 프로포즈를 할 때는, 그 여자아이가 법대생의 말끝마다 그건 무슨무슨 오류라며 넉다운을 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탁석산이 그의 책들에 깔아놓은 내러티브는 이에 비하면 반전도 없는 밋밋한 상상력을 보여줄 뿐이다.

‘자생적 학문담론’과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행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석산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단행본 출판이 그려놓는 시대풍경의 측면에서다. 그가 2000년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문고판 시리즈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제1권의 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석산에겐 행운이다. 당시는 한국사회가 IMF의 지독한 펀치를 얻어맞고 겨우 일어서던 시기였다. 낙관적인 이들은 비싼 수업료를 냈다며 다신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외치던 때다. 경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경제학자들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이런 비판의식은 각 학문분야로 널리 퍼져 이른바 이 땅에 걸맞은 ‘자생학문’을 위한 담론화가 활발히 시작될 때였다. 우리사상연구소가 2001년부터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1~3)’(지식산업사)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우리말 철학하기’ 모임이 결성돼 작업한 결과물이었고,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의 ‘탈식민적 글쓰기’ 담론이 호응을 얻어 내고 있었다. 



자생학문 담론이 무르익는 상황에서 나온 책세상문고는 ‘우리시대’라는 문제의식을 눈에 띄게 표방하며, 학문의 쓰임새를 고민했다.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전재호), ‘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는갗(박동진), ‘우리시대의 북한철학’(선우현),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김창수),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배식한),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구춘권) 등의 문제작들을 계속 쏟아냈다. 책세상문고는 출발 당시 일본의 이와나미문고나 프랑스의 끄세주처럼 문고판 르네상스를 견인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세상문고는 중반 이후로 가면서 필자발굴이 어려운데다 글을 대강대강 쓰는 학계의 풍토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문제의식과 글쓰기가 둔해지면서 그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탁석산은 속된 말로 하면 주가가 폭등한 책세상문고의 시세차익만 챙긴 후 발을 뺐다. 책세상에서도 그리고 동시대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에서도 말이다. 가령 그에게 강의를 들었던 어떤 이는 “일본에 관한 책을 쓴다더니 그건 언제 쓸 건지…”라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이후 그의 행보는 책장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탁석산의 글짓기교실’에서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의 글쓰기 요령을 조목조목 비판한 대목이 있는데, 이것을 읽고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 비판이 그럴듯했다고 생각했던지 장(章)의 마지막에 표로도 정리해놓았다. ‘매일 적어도 몇 줄씩 자기 생각을 글로 써보자’는 것에 대해선 ‘메모에 불과하다’, ‘내가 잘못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을 떨치자’에 대해선 ‘글쓰는 방법을 알면 불안감은 사라진다’는 식으로 비꼬았다. 서울대의 글쓰기 매뉴얼이 평범한 충고에 그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어디에나 있는 매뉴얼일 뿐이다.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반박할 만한 매뉴얼이 얼마든지 있을텐데, 굳이 그는 ‘서울대’를 걸고 넘어진다. 서울대를 우습게 만들어야, 그래야 전략이 통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여러 번 비판받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뒤집는 것이 탁석산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서울대 매뉴얼 비판에서도 여지없이 관찰된다. ‘가장 쉬운 부분부터 쓰기 시작하자’는 것에 대해 ‘가장 쉬운 부분은 없다. 글은 유기체와 같은 구조이다’라고 비판해놓고선, ‘너무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써보자’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규범이 존재한다. 일단 규범을 익혀야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쉬운 부분부터 쓰자’는 말이 글이 유기체라는 관념을 거스르는 건가. 결코 아닐 것이다. 글이 유기체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쉬운 부분부터 쓰라는 서울대의 매뉴얼은 뭔가. 일종의 방법이자 요령이고 그것이 규범 아니겠는가. 그런데 탁석산은 서울대가 규범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듯이 비판한다. 비판에도 종류가 있다. 탁석산의 서울대 매뉴얼 비판은 한마디로 불필요한 비판이자, 비판의 장식효과를 노린 비판에 불과하다.

내면의 불신과 논증의 신뢰, 그 불협화음
사실 ‘한국의 주체성’ 등은 철학자가 가한 사회비판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공감을 얻은 부분은 딱 한가지로 보인다. 주체성을 ‘정신이나 마음의 문제’가 아닌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주체성이 생기고 강대국에 대해서 할말도 한다는 단순논리이다. 조선시대부터 한국의 지식인들은 주체성을 너무 내면적인 것으로 파악해 몸은 식민지에 구속돼 있어도, 정신만 온전하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윤치호 등이 여기서 거론되고 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 글에서 탁석산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높이 평가했다. 물론 여러모로 미숙하다는 단서는 달지만, 아무튼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 특히 권혁범 대전대 교수가 민족과 국가에 반대하는 ‘관념적’ 태도에 잘 들어맞는다고 했다. 아니 강 교수는 권혁범 교수와는 또 다른 강단 좌파, 머리는 진보이면서 생활은 보수인 이들에게 탁석산의 책을 선물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2000년 당시 탁석산의 이런 문제제기는 신선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내면성에 대한 불신이 탁석산의 본래적 특징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책으로 출판된 그의 박사학위논문 ‘흄의 인과론’(서광사, 199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흄은 그가 20대 초반에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싶어 책읽기에 몰두하던 시절에 읽던 책 중의 하나였다. 그 때 그는 흄이 매우 평이한 상식적인 문제를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논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흄을 주제로 논문을 쓰다보니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먹을 듯이 읽게 되고 그러다보니 흄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흄의 인과성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을 반박한다. 오히려 전통적 해석을 새로운 논리로 옹호한다. 흄에 대한 인과론적 해석의 대표적 사례인 ‘무지 논증’과 ‘브로턴 논증’을 반박하고, 이 반박에 대한 반론인 자연주의적 해석에 답변을 시도한다. 탁석산은 흄이 경험을 넘어서는 주장에 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브로턴이 대상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힘 얘기를 꺼내면, 탁석산은 “흄의 책을 찾아보니 어떠한 인과적 힘이 존재하여 그 힘이 결과를 야기한다는 주장은 순환정의에 빠진다고 써있네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라는 식이다.

위에서 보듯 이 책의 전체적인 인상은 논증적이라는 것이다. 뭐랄까. 영미 분석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논술선생 같은 탁석산의 면모를 눈여겨본다. 가지를 쳐내고 논리의 핵심을 뽑아내 연관관계를 검토하는 모습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한국의 주체성’의 충격적인 주장도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주체성이 정신과 마음의 문제라면 외부 환경과 상관없이 우리가 자신을 주체적이라고 여기는 한 주체적일 수 있다. 이것은 일면 옳은 지적이지만, 약소국의 지식인이 이 점을 강조하면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사유라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결국 강대국이 원하는 약소국, 말로만 주체적이고 실제로는 식민지인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장에서 우리가 약소국이되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과 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약소국이라도 핵을 보유한다면 강대국도 결코 만만히 보지 못한다. 북한과 파키스탄이 좋은 예이다. 왜 우리는 핵무장을 하면 안 되는가? 나는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중장기적 계획을 세워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한국의 주체성’, 79~80쪽).

문제를 넘지 못하는 문제제기의 황당함
정말 놀랍다(!) 철학자가 이런 주장을 펼쳐도 되는가. “우리가 핵에 대해서 세계 인류 차원의 평화만을 공허하게 외친다면 우리의 주권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단다. 소설가 김진명하고 친구 사이인가. 그 많은 지식인들이 평화를 위해 핵을 반대하는가. 궁극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평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핵이라는 것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남을 몰살시킬 수 있는 대형무기를 합법적으로 보유하며, 그것을 통해 타인에 대한 상시적 위협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의 못견딤, 미국중심의 핵질서에 대한 제3세계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스탠스는 아랑곳없다. 너무 단순한 주체성의 물신화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된다. 강준만 교수는 탁석산에게 핵무장을 주장하기 전에 리영희를 읽었어야 했다고 충고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특히 이 책의 71쪽에 나오는 “조금이라도 눈치를 덜 보고 살려면”이라는 조건절에 눈길이 간다. 탁석산에게 주체성이란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 그것이 주체성의 내면성이며 내면성은 자신의 독립을 지킬 수 있는 힘의 확보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모순된 연결인가.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주체성의 원초적 본능 아닌가. 원초적 본능과 내면성은 다르지 않은가. 내면성은 어떤 성찰적 이성이 개입된 각성된 마음이 아닌가. 주체성의 내면성이란 자아-타자 관계를 복잡하게 내면화한 심리상태란 말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내가 아는 한 학자는 겨울에도 집에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어떤 사람과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장(長)과 죽어도 함께 밥을 먹지 않고 그 직장을 그만두기도 했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관계를 잘라내고 복원하는 결단의 연속을 생활의 호흡으로 삼는 것이다. 웬 핵무기를 끌어들여 민감한데다가 사람마다 다른 문제를 왜소화시키고 희화화시키는지 모르겠다.

그는 “외세는 약소민족의 역사를 종식시킬 수는 있을 것이나 그의 역사를 결정할 수는 없으며”라는 남경희 교수의 말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으나 무리가 있다”며 “역사를 종식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역사적 결정이 있나”라고 반론을 편다. 그러면서 주체성을 내면화하는 것으로는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면화와 동시에 힘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누구의 말마따나 참으로 괴로운 철학과 경제의 결합이다. 철학의 힘만으로는 주체적 삶이 불가능하다는 그 아포리아에 경제의 논리를 잇대어 기워나가는 것은 뭐랄까 범주의 착오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경제와의 타협을 포기하고 차라리 주체성을 포기해버리는 이들은 그런 손쉬운 타협을 몰라서 안하는 것일까. 우습고 유치하고 더러워서 못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결론에서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破邪現正(파사현정)이란 말이 있다. 잘못된 것을 없애면 올바른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강대국 논리의 논파를 이런 맥락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정파사’의 전략을 택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강대국의 논리와 의도를 논파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정의를 내리고 그에 따른 행동 지침을 마련하여 잘못된 논리와 상식을 논파하려는 것이다. 올바른 논리가 서면 잘못된 논리는 봄 햇살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탁석산의 말인즉 본인은 로드맵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대로 따라오라는 말인데,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잘 그리는 로드맵을 보라. 그대로 따라갔다가 낭패 보길 한두 번인가. 게다가 탁석산은 언어문제, 핵문제에서 전문가도 아니지 않은가.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픽 웃고 말 허술한 논리, 살펴봐야 할 현실의 장애물들과 프로세스도 제대로 모르는 그런 비전문가가 사회쟁점을 열거하면서 따라오라고 하면 누가 따라가겠는가. 현정이 안 되기 때문에 파사도 안 된다.

“교과서에 적힌 것만 역사인가요?”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를 살펴보자. 민족주의를 사다리라고 말하며 그는 그것이 ‘실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實體란 말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 현실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란 의미로 탁석산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민족주의는 이념이거나 정서이거나 하기 때문에 만지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그의 논리에 의하면 실체가 아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현실에서 민족의 중량감은 크다. 만질 수 없지만 없다고 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물건을 탁석산은 실체(thing)가 아닌 실재(entity)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어를 바꿔 단다고 해서 민족에 대한 그의 ‘반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탁석산의 이런 논리를 ‘실체의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주장을 한다.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인가. 과연 남한과 북한이 동일한, 아니면 유사한 문화를 갖고 있는가? 문화가 같으려면 정치체제, 경제구조 등의 바탕구조가 어느 정도 유사해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은 매우 상이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연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유재산과 이자에 대해 남한 사람만큼 이해할 수 있겠는가? (…) 그래도 남북한을 같은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핏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핏줄이란 가족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민족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핏줄로 민족을 정의하려면 사돈의 팔촌의 사돈의 팔촌으로 한없이 확장해야 할 것이다.”

실체를 신봉하는 그는 정치, 경제, 문화를 보니 남북한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기억’을 보지 못한다. 생활이나 습성에 스민 전통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게 남북한 사람들을 얼마나 끈질기게 묶고 있는 것인지, 황석영의 ‘손님’(창비, 2001) 정도만 읽었다면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탁석산도 역사를 염두에 둔다.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민족을 정의하는 것은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라며 이순신의 예를 든다. 북한 역사교과서에 이순신이 “양반 지주계급으로 봉권왕조에 충성해 싸웠을 뿐”이라고 해석돼 있기 때문에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는 건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겨레문학의 상징이라고 떠받드는 박지원이나 김시습 같은 이는 어떤가. 그들은 남북한 사람들에게 공히 영광스러운 유산 아닌가.

심지어 실체주의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는 언어마저도 같은 민족을 삼는 보편적 기준이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와 호주는 같은 영어를 쓰지만 같은 민족은 아니라고 근거를 댄다. 역사를 돌이켜보자. 청교도와 영국이민자들이 1607년 미국에 건너와 식민지를 건설한 후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1776년까지 1백7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 후 미국과 영국은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북한은 어떤가. 한국전쟁 이후 고작 60년이 지났을 뿐이다. 전쟁에 참전한 이들이 많이 살아있다. 고향이 북한인 사람도 많다. 기억이 완전히 분리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남북한 문화의 이질성이 강조되는 것은 당장 남북한의 경제, 정치체제를 합쳐서 단일국가로 만들자는 급진론에 대한 반론이지, 남북한을 하나의 민족으로 정의하고 느끼는데 사용될 필요는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핏줄이 민족의 조건으로는 약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철학자 김용옥이 프랑스인 사위를 봤는데, 손자가 태어나면, 그리고 손자가 다시 외국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는다면 핏줄이 흐려지지 않느냐고 한다. 그는 확실히 역사적 사고에 약하다. 그는 논리의 좌우를 따지는 데 익숙할 뿐이지 거기에 통시적 시각을 부여하는 데는 서투른 것이다. 그 손자가 태어나고 다시 결혼해 애를 낳으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리지 않을까. 요즘 같은 담론의 민주화 시대에 30년이라는 시간은 바뀐 현실을 따라가며 민족의 배타적 테두리의 어느 한 부분을 헐어버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지 않을까.

“민족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개인의 삶을 너무 억압하고 있다”는 말도 문제의 소지가 많다. 가령 명확한 사례를 보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억압받는 건 있다. 민족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탁석산이 좋아하는 국민 혹은 시민의 여건을 갖추지 못해서일까. 나는 국가장치가 그들을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인종적 편견은 홀리건들이 득세하는 유럽이나 러시아보다 그리 심하지 않고, 소수 민족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정서는 대체적으로 호혜적으로 바뀌고 있다. 인터넷과 온갖 미디어들이 이 세상 곳곳을 대명천지처럼 비추는 시대에, 그것도 그 나라의 3D 업종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생활필수품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밀어내서야 그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쯤은 상식차원에서 동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민족이 대한민국 국민을 억압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스포츠민족주의(월드컵), 영토민족주의(독도·간도) 등이 시끄럽고 귀찮으면 귀찮았지 억압은 확실히 ‘오버’다.  

고정관념 깨는 맛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엘리트주의
탁석산에게는 사회적 고정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오래된 습성이 있다. 이는 그의 글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다가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구절에서 “태어나니 역사적 사명이 기다린 것이지,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은 아닌데”라고 의문이 들었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타고난 자질 같다. 탁석산을 읽으며 불편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형 글쓰기다. 물론 문제제기형 글쓰기는 중요하지만, 결과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탁석산의 문제제기는 문제를 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민족이 내용 없는 형식적 구호일 뿐이라는 식의 극단적 비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그는 “무엇을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거짓말을 하거나 별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하거나 아니면 본심을 숨기려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본인에게 정확하게 대응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엔 철학을 생각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퍼져있다. “내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철학”이라는 단순화는 보통 철학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고자 하는 책들에 퍼져있다.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도 그렇게 시작한다. 왜 지식인은 대중에 대응하는가. ‘대중의 발견’. ‘철학이 대중과 멀다는 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하다. 멀 수밖에 없는데, 철학은 성찰적이고 더딘 것이고 괴로운 사유의 길인데, 거기 대중이 다 참여할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조선시대에 철학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 시대엔 양반이면 누구나 철학자연 하는 게 상식이었지만, 계급이 없어진 요즘은 철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 철학을 하면 된다. 사실 철학과가 너무 많고, 철학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우리 사회가 그 공급을 다 수요하지 못하는 것이지, 철학의 위기라는 말은 냉정히 보면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질 때”를 모르는 미련한 소리인 것 같다.  

아무튼 누구나 철학적 감수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철학하는 이들은 철학적 감수성이 없는 이들의 질시와 투정을 받아줘야 한다. 본인이 설 곳을 모르고 대중사회로 내려와 영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중이란 얼마나 영악한가. 나는 이 철학의 대중화를 앞에서 어려운 척 자기들끼리의 언어놀음에 빠져있는 학자들을 향해 교양주의라고 비판하는 탁석산이야말로 일종의 교양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철학자가 자신의 내공을 공개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은 누구나 관심있는 문제를, 누구나 아는 용어를 사용하여,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롭고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라는 교양의 신봉자다. 나는 진정한 철학자라면 누구도 관심 없는 문제를 그래도 한번쯤 관심을 가질 수 있게 사유해서 그 과정을 보여주는 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탁석산은 핵문제 같은 누구나 아는 문제에 대해 쉽게 풀어내지도, 탁견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극우적이고 순진한” 발상을 했을 뿐이다. 탁석산은 또 말한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사유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특징인데 사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고이지 옛날 철학자들의 사유가 아니다. 물론 같은 문제를 사유하다보면 앞선 사람들의 사고를 배우고 익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 사유를 튼튼하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따라서 과거 철학자들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참조일 뿐이고 훈련과정일 뿐이다.”

요즘 누구나 입만 열면 하는 교과서적인 소리이고 개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행어에 대한 주석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철학사에 파묻혀 제대로 훈련하려면 10년은 투자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다. 10년이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인생이다.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고 현장이고 사유가 꽃피는 순간이다. 탁석산 같은 이들은 사유의 과정을 분절화하고 세밀하게 흐름화하여 그 속의 소리와 이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감수성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내 힘으로 생각한다”는 것. 이게 말처럼 그리 쉬운 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막막하게 가부좌만 틀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다는 돈오(頓悟)라는 말이 있는 것이고, 유교에서는 계속 자세를 바르게 하여 읽고 또 읽고 그대로 따라서 생활하다보면 언젠가 깨닫는바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읽기와 쓰기의 무수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교환, 피곤과 절망의 뒤범벅 속에서 피어나는 한줄기 아이디어, 대책 없는 분노와 용기에서 내질러진 비명과도 같은 말들, 이 말들이 몇번씩 부딪혀 곤죽이 되어야 그 곤죽이 길에 비로소 길을 낸다. 제대로 된 말은 자기 생각의 시체들을 깔고 흘러가기 시작한다.

열정만 있다면 재미있고도 어려운 철학책은 많다
탁석산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는지는 조금만 신경 쓰면 잘 알 수 있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옛 경전을 버려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가령 경전처럼 숭상되는 하이데거, 플라톤, 니체,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보자. 그들 중에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게 무시한다고 무시당해진다면 애초에 고전이란 이름을 달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전을 버리라는 말을 경전을 상대화해야 한다는 말로 고쳐 읽으면 그나마 말은 된다. 그것도 겨우 된다. 하나마나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 초심자들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읽기 전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보라고 한다. 그는 글쓰기 책에서 “어느 정도 규범을 알아야 그 때부터 글이 써진다”고 하더니 생각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생각이 글쓰기보다 더 쉬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생각과 글을 따로 따로 보는 것일까. 그의 말은 이렇듯 종잡을 수가 없다.

철학 깨나 했다는 이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철학을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타자화하는 것이다. “철학책이 수면제 외에는 쓸 데가 없으므로 철학 소비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적 현실이라고 제시해놓은 게, 오히려 현실을 크게 왜곡하는 경우이다. 요즘의 독자들은 약간만 지루해도 잠들어버린다. 문학이라고 과학이라고 안 그러겠는가. 심지어 책은 재미있어도 읽다 보면 잠이 온다. 그게 책이다. 책은 잠과 서로 침투하는 공생관계다. 책의 수면제 역할은 책이 책 고유의 역할 너머의 역할을 통해 자신의 매체적 수명을 연장해온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현행 ‘철학=수면제’라는 인식을 폭력적으로 일반화하고 있다.

그는 근대경험론(흄)을 전공하고 거기에서 양식을 구하는 사람이다. 경험한 것 이외의 것들은 아예 취급도 안하는 곳이 근대경험론이다. 그가 사회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찬반의견을 많이 표출하는 것도 바로 경험 가능한 사실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탁석산의 현실주의와 솔직함은 모두 경험과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것의 이치가 안보이는 모든 것보다 앞선다는 독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흄이 그랬다고 탁석산이 말하지 않았는가.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他者)를 보지 못하는 걸 가리켜 독아론(獨我論)이라고 불렀다. 탁석산은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의 폭을 넓히고 있지만, 철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유하고 말 걸고 현실을 분석하는 데에서는 경험론의 자리에 멈추어 있다. 그의 계속되는 독서와 현실관찰이 철학적 태도의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강성민 학술평론가) 

08. 12. 24.  

P.S. 한국인의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를 (부연)설명하고 있는 본론보다 내가 흥미를 갖는 대목은 부록격의 '특강'이다(한국문화론이라면 이어령, 강준만, 정수복 등의 책과 비교해봄 직하다). '불교와 주자학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이 사실은 내가 이 책에서 읽고 싶었던 부분이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더불어 불교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한다. 왜 그런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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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2-24 18:06   좋아요 0 | URL
^^ 재밌는 글입니다. 그의 견해에 언제나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하는 철학자죠. 그래서 좋아합니다.

로쟈 2008-12-25 00:19   좋아요 0 | URL
제가 조금 읽은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한데, 충분한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 않은 주장들도 자주 나오네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정도면 약한데요...

쉽싸리 2008-12-25 00:18   좋아요 0 | URL
크라이스트의 이브가 지났네요.
로쟈님의 종교는? 궁금^^


탁선생이 전에 "TV 책을 말하다" 진행할때, 어? 어색, 참신, 경직?? 이정도 느낌이 들었드랬습니다.
저의 단편적인 사고로는 (사정은 누구나 있겠지만/그러므로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하겠지만)박사를 따면 강의를(교수건 강사건)해야하지 않나요? 안할 수도 있겠지요, 못 할수도 있겠지요,박봉이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학문의 기본?이 그렇지않느냐는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와우!!(주님 영접하느라 UP 되어있습니다)66

로쟈 2008-12-25 00:21   좋아요 0 | URL
성탄절이라고 특별한 감회를 갖지는 않고요, 다만 아이의 선물 '궁리'나 하는 편입니다. 물론 겸사겸사 예수나 기독교에 관한 책들을 괜히 들춰보긴 하지요.^^;

2008-12-25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5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rori 2008-12-25 11:39   좋아요 0 | URL
탁석산의 탁상(산)공론인지 탁석산 까기의 탁상공론인지..
----------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옛 경전을 버려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가령 경전처럼 숭상되는 하이데거, 플라톤, 니체,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보자. 그들 중에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게 무시한다고 무시당해진다면 애초에 고전이란 이름을 달지도 못했을 것이다.
--------
이 부분에서 필자가 매우 화가 난 상태로 글 썼다는 걸 알았어요.
철학이 실용적인 학문은 아닌데.. (필자가)독단적 철학 숭상주의 같아요. 고전= '진리' 라고 말하는 거 같고요. 필자가 좀 편파적이네요.
그래서 제 결론은 둘 다 탁상(산) 공론. 둘 다 비생산적인 글을 배설하는 듯.

로쟈 2008-12-27 07:24   좋아요 0 | URL
사감도 좀 들어가 있다고 봐야죠..

porori 2008-12-25 11:42   좋아요 0 | URL
만약 영화감독 Jean Luc Godard가 이글을 봤다면 그나마 탁석산을 옹호할 듯.

yoonakim 2008-12-26 00:48   좋아요 0 | URL
전 속이 다 시원한대요..수년전에 대학원 총학에서 '한국의 주체성','한국의 정체성' 책이 바로 나왔을때 초청강연을 하는것을 본적이 있어요. 그 이후 그분의 책을 관심있게 본적이 없네요..ㅎㅎ..근데 참 많이 나왔네요..그런데 학술평론가...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8-12-27 07:24   좋아요 0 | URL
원래 학술담당 기자였습니다. '학술평론'이라고만 돼 있는데, 제가 '가'를 더 붙였어요...
 

강의를 위해서 연말연초에 카잔차키스의 책을 몇 권 읽는다(연말연초에는 조선사와 조선 유학, 그리고 한국학 관련서도 몇 권 읽어볼 계획이다. 연말연초가 몇 달이라도 되는 건지?). <그리스인 조르바>와 <영혼의 자서전>, 그리고 <러시아 기행>이 내가 필요에 따라 이번에 읽을 책들이다. 이미 전집까지 나와 있기에 카잔차키스의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 것이 큰 의미는 없지만, 이 세 작품 위주로 골라본다. 관련 연구서와 영역본도 지난주에 대출해놓았는데, 얼마나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니체와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와 러시아'란 주제의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는 읽었으면 싶다(참고로, 카잔차키스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니체와 베르그송이다. 젊은 시절 카잔차키스는 파리에 유학하며 베르그송의 강의를 들었고 니체에 관한 학위논문을 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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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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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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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2-24 00:32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1년간 방문자 수는 거의 압도적이군요. 단위가 다릅니다...

로쟈 2008-12-24 00:36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아담한 우물 같습니다.^^ 다른 데는 일일 방문자가 수십 만까지 가는 블로그들도 더러 있잖아요?..^^;

yoonakim 2008-12-24 09:21   좋아요 0 | URL
아..카잔차카스 전집..전 고려원판으로 다 있습니다요..반갑네, 로쟈님이 카잔차키스 얘기해서요^^ 메리크리스마스, 해피뉴이어 입니다!

로쟈 2008-12-24 09:24   좋아요 0 | URL
'카잔초프스키'라고도 하잖아요.^^ 남들 언해피할 때 해피이어하긴 어렵겠고, 그래도 건강하시길!..

무해한모리군 2008-12-24 09:52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제가 읽은 책을 언급하면 너무 기뻐요.. 그래서 지금 기쁘다는 ^^a
즐거운 성탄되세요~~

로쟈 2008-12-24 11:29   좋아요 0 | URL
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아무래도 휴일이니까요.^^

쉽싸리 2008-12-24 17:39   좋아요 0 | URL
그리스인 조르바는 같은 출판사,역자인데 가격은 다르네요.
맨위에 있는 책으로 읽은것 같습니다. 이윤기 선생이 후기에서 그리스어 원본의 영역본을 번역하는거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던것 같은데..
하여간 조르바가 자유인 같기는 하더군요."카잔차키스" 참 제 입에는 달라붙질 못해요.
yoonakim 님도 그래서 앞에는 카잔차카스 라고 하셨나 봐요. ^^

로쟈 2008-12-25 00:22   좋아요 0 | URL
전집본과 문고본의 차이입니다. 그러고 보니, 카잔차'카스'네요.^^

2008-12-25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5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1:31   좋아요 0 | URL
저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고,<전쟁과 신부>가 좋았어요.동생은 빨치산,형은 성직자...어딘지 모르게 우리나라와 비슷한 내전이라서요.

로쟈 2008-12-25 21:33   좋아요 0 | URL
전에 한번 댓글을 다셨더랬죠.^^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3:35   좋아요 0 | URL
기억하시는군요.정말 좋았어요.제가 웬만하면 무엇이 감동적이란 얘길 안하는데 그 소설은 예외였어요.통속적인 재미도 있구요.

yoonakim 2008-12-26 00:43   좋아요 0 | URL
허걱...그냥 오타인데...^^ 카잔차키스...ㅎㅎ
 

"톨스토이가 추리소설을 썼다면 바로 이런 소설일 것이다."란 평을 듣는 작가가 있다. 단연 최고의 추리소설가란 얘기겠다. 러시아 작가 보리스 아쿠닌이 바로 추리소설의 '톨스토이'이고(그는 러시아에서 대중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주인공 에라스트 판도린이 말하자면 러시아판 '셜록 홈즈'이다. 아쿠닌의 소설 두 편이 번역돼 나왔다. 추리소설의 독자나 러시아문학 애호가에게는 마치 연말 보너스 같은 책이다.   

합뉴스(08. 12. 22) '러시아의 셜록 홈즈' 탐정 판도린의 모험

러시아의 인기 추리소설 작가 보리스 아쿠닌의 대표작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아자젤의 음모'와 '리바이어던 살인'(황금가지 펴냄)은 러시아에서만 1천200만부 이상 팔린 대형 베스트셀러인 '에라스트 판도린' 시리즈의 초기 작품들이다.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젊고 매력적인 수사관 에라스트 판도린이 치밀한 두뇌 싸움으로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아자젤의 음모'에서는 수사과에서 갓 근무하기 시작한 하급 관리 판도린을 처음 등장시킨다. 1876년 모스크바의 한 공원에서 스물셋의 젊은 청년 하나가 벤치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를 희롱하다가 보란듯이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한다. 사건을 맡은 판도린은 숨진 청년이 한 매력적인 젊은 여인에게 빠져 친구와 목숨을 건 내기를 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려는 순간 정체불명의 자객이 판도린에게 남긴 '아자젤'이라는 한 마디는 사건의 배후에 더 거대한 음모가 있음을 암시한다.

'아자젤의 음모'가 모스크바와 파리, 런던을 넘나들며 역동적으로 펼쳐진다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리바이어던 살인'은 밀폐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의 추리소설이다. 파리의 유명한 수집가 리틀비 경의 집에서 리틀비 경을 포함해 10명의 사람들이 살해된 채 발견되고, 리틀비 경의 손에서 발견된 배지를 단서로 찾아간 고급 여객선 리바이어던 호에서 또다른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번역에 참여한 이항재 단국대 교수는 "이 작품이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무거움'을 떠올리는 한국의 독자들,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많이 읽혀서 러시아 문학에 대한 그들의 고정된 시각을 조금이라고 변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미혜기자)

08. 12. 23.

Борис Акунин АзазельБорис Акунин `Левиафан`

P.S. 러시아어본의 표지이다. 러시아어본의 제목은 둘다 그냥 <아자젤>과 <리바이어던>(<레비아탄>)이다. 한편, <아자젤>은 지난 2003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영화의 한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t3ESN21Vzd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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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24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련 시절에도 추리소설이 있었나요? 사회주의 국가는 추리소설이 발달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로쟈 2008-12-25 00:24   좋아요 0 | URL
대학 강의에선 보통 장르소설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과문할 수도 있지만, 소련 시절의 추리소설은 저도 못 들어봤습니다. '범죄'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가 아니었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앵글로 색슨 문화에서 추리소설이 발달한다고 하니까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로쟈 2008-12-25 21:28   좋아요 0 | URL
많이 하는 얘기로 법질서가 '안정된' 사회에서 추리문학이 읽힌다잖아요. 소련에는 '공식적으로' 매춘도 없는 사회였기 때문에 '범죄'를 다룬 문학이 나올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쿨리나 2009-01-2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비에트 초기 추리소설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해요. 러시아(소련)가 나름대로 추리소설의 긴 역사를 가진 유럽국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최근에 번역된 <러시아의 민중문화>(스타이츠)에 좋은 정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먹성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느껴지는 식당의 음식들이다. 20년이 넘게 먹어온 대학 식당에서도 가끔 '감동'하며 밥을 먹을 때가 있고, 5000원짜리 칼국수나 김치찌개, 청국장, 곱창전골 등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값비싼 음식들도 더러 먹어보았지만 그저 '호사로군!' 할 따름이다).

파리가 들어간 수프도 후루룩 먹어치우는 고골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먹는 일에 목숨 걸지는 않는 편이다('다 먹자고 하는 일이지!'란 말을 나도 덩달아 내뱉곤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몸에 해롭지 않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며 가끔씩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따름이다(비록 정신의 양식에 관해서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지난달인가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본 <앤티크> 같은 영화가(고급 케이크가 잔뜩 나오는 영화다) 취향에 맞지 않는 건 그런 때문이다(영화를 보며 딴생각을 하기도 하고 졸기도 했다). 굳이 안 볼 이유까지는 없지만 <식객> 같은 영화도, 드라마도 나는 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책의 바다'에서 매일같이 허우적거린다고 해도 요리책에 눈길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하다(요리책만큼 눈밖에 나 있는 책은 처세서 정도다).

갑자기 '서론'을 늘어놓은 건 그런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요리책이 있기 때문이다! <늑대를 요리하는 법>. 제목이 좀 특이한데, 저자는 MFK 피셔이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그래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한다). 제목에서 '늑대'는 '굶주림과 가난'을 뜻한다고 하므로 풀어서 말하자면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이다(우리말로는 <쥐를 요리하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나 같은 사람도 눈길을 끌게 만드는 이 흥미로운 책을 소개해준 기사를 옮겨놓는다. 책은 빨리 번역되면 좋겠다(저자의 다른 몇몇 책들도 입맛을 돋군다)...   

 

한겨레(08. 12. 23)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

연말이라 모임이 잦다. 주로 저녁식사들인데, 다양한 사람들과 시리즈로 저녁을 먹다 보면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 음식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꽤 드라마틱하게 체험할 수 있다. 왜 달라지는지 이유가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상대방이 갖고 있는 음식에 대한 절실함이 한몫한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평소의 부족함이 주는 음식에 대한 흥분감이란 게 별로 없고 심지어 권태감마저 느낄 수 있다. 달걀이 귀할 때 먹던 삶은 달걀의 맛과 요즘 느끼는 맛이 같을 수 없듯이, 음식에 대한 기본적 ‘허기’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식사는 다른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읽는 책 중에 MFK 피셔가 쓴 <늑대를 요리하는 법>(사진)이란 책이 있다. 전쟁으로 궁핍할 무렵인 1942년 나온 책이라 더 감칠맛 나게 읽힌다. 미국에서 쓰는 표현 중에 “늑대가 문간에 들이닥치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늑대란 굶주림과 가난을 뜻하는데, 늑대를 제목의 일부로 사용한 이 책은 곤궁한 시대에 먹고사는 일을 은유 삼는 문학적 요리책이자 특별한 음식 에세이다.

여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전쟁 중이라 설탕과 버터를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던 젊은 주부들이 모여앉아 어떻게 설탕과 버터를 거의 쓰지 않고 케이크를 만드는지 서로 묘안을 자랑했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피셔의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평생을 전쟁통 예산으로 아껴가며 살아왔다. 부엌에서 상식적으로 하는 일이 어려울 때나 스타일리시해진다는 건 이제야 알았구나.”

전후 미국엔 풍요와 잉여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게 배어버렸다. 음식도 부족함을 아는 사람과 함께 먹어야 맛있는 걸 보면, 부족함이 없다는 건 뭔가 균형이 깨진 상태라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결핍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살다 보니 나도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갈 때 생기는 즐거움을 감지하는 감각기관 자체가 퇴화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피셔 할머니의 말씀처럼 가난은 가난할 때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삶 속에 항상 있는(혹은 있어야 하는) 가난과 결핍을 ‘어떤 스타일’로 다스리는 것이다. 즉 ‘늑대’를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맛있고 아름답게 요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미국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창조적 경제 운용은 훌륭함을 낳는 연료가 된다”고 했다. 더하거나 새로운 것만 찾는 것이 꼭 창조적인 건 아니다. 있던 것을 빼고 모자람을 즐기는 것 또한 멋지고 흥미로운 삶을 사는 한 방법일 수 있다.(박상미/화가·작가)

08. 12. 22.

P.S. 안 그래도 요즘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이 부르디외가 편집한 <세계의 비참>(동문선, 2002) 시리즈다. 세계의 비참을 말해주는 방대한 사례집인데, 부르디외와의 대담에서 귄터 그라스는 모든 나라가 이런 책을 한권씩 갖게 된다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동감이다(내기로만 한다면 어디 한 권뿐이겠는가!). '늑대를 요리하는 법'의 재료로서 더할 나위가 없지 않나 싶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세계의 비참'과 유사한 컨셉의 책으론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미래>(삶이보이는창, 2006)가 있다. 노동운동가 하종강의 책들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겠다.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에 맞추자면, 이거 무지하게 식욕을 돋구는 책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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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3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3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otzky 2008-12-23 02:27   좋아요 0 | URL
읽어야 할 넘들은 쌓이고 쌓이지만... 그래도 읽고 싶고 눈앞에 쌓아두고 "언젠가는 읽고 말꼬야~~!" 하는 넘들의 리스트를 쌓아올리는데 너무 많은 도움을 받는군요.

로쟈 2008-12-23 09:12   좋아요 0 | URL
그 도움이 고민거리가 되진 않으셨으면...^^;
 

'한겨레'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번역서) 리스트(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8763.html)를 보면 10권 가운데 두 권이 같은 번역자의 작품이다. 디어드리 베어의 <융 -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열린책들)과 코맥 매카시의 <로드>(문학동네)가 모두 번역가 정영목씨의 손을 거쳤다. 그런 점에서도 '올해의 번역자'를 꼽자면 단연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매일경제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2216809) 씨네21의 인터뷰도 찾아서 스크랩해놓는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의 한 꼭지인데, 한 번역가의 '서재'로 가는 길잡이로서 더없이 친절하고 유익하다. 

씨네21(08. 11. 28) [김혜리가 만난 사람] 번역가 정영목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는 7과 1/2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이 등장한다. 천장이 유독 낮은 이 방은 알고 보면, 타인의 몸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비밀 통로다. 번역가의 작업실을 상상하는데 퍼뜩 그 괴상한 방이 떠올랐다. 출판 번역가의 작업실이란 말하자면 독자의 방과 저자의 서재 사이 층계참에 포복한 셈이어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일쑤다. 역자의 작업은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본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번역가 정영목의 작업실은 일산이다. 보통 회사원들이 직장에 도착할 즈음 집을 나서는 그는 15분을 걸어 친구의 연구소 한쪽에 자리잡은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커피와 인내심이 식지 않도록 주의하며 영어로 쓰인 책을 한줄 한줄 모국어로 옮긴다.

1991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으로 출판 번역가로 입문한 그가 옮긴 책은 줄잡아 100여권. <의뢰인> <펠리칸 브리프> 등 존 그리샴의 스릴러가 초창기 그의 작업이고 알랭 드 보통의 저서 중 다수가 정영목의 손을 거쳤다. 노벨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연작은 적당한 포르투갈어 역자를 만나지 못해 그가 중역한 경우다. 화제작 <로드> <서재 결혼시키기> <책도둑>이 그의 번역으로 소개됐고 비소설로는 모차르트, 붓다, 간디, 융의 전기와 <지젝이 만난 레닌>, 조지프 캠벨의 <신의 가면III-서양신화> 등이 있으니, 웬만한 애서가라면 책꽂이에서 정영목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터다.



기나긴 임종의 기록에 가까운 암담한 내용에도 국내에서 16만부 가까이 팔린 소설 <로드>의 역자 후기에서 정영목은 스스로를 “친절하지 않은 번역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에 거는 편집자들의 신뢰는, 번역에는‘친절’보다 중한 미덕이 있음을 방증한다. 정영목과 세권의 책을 낸 <문학동네> 이현자 팀장은, 문학성이 깊고 번역이 까다로운 소설의 최고 적임자로 그를 꼽으며 “그저 한 문장을 잘 옮기는 것과 작품 전체의 온전한 이해가 뒷받침된 균형 잡힌 번역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도서출판 강 대표인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로알드 달의 단편집 <맛>을 정영목의 새로운 번역으로 읽었던 소감을 “이야기만 같을 뿐 구간(舊刊)과 완전히 다른 소설이었다. 번역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번역가의 대학 동아리 후배이기도 한 정홍수 평론가에 따르면 청년 정영목은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정리해주는 조용하고 현명한 형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그의 자취방을 찾아갔다가 책상 왼쪽에 원서, 오른쪽에 원고지를 두고 곧바로 펜을 달리는 광경에 감탄했던 일도 정 대표가 전하는 추억이다.



하지만 지인과 동료들이 말하는 성취를 본인의 목소리로 듣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영목은 밥벌이를 위해 번역을 했고 본인의 노동이 성실하기만 희망할 뿐이라고 반복한다. 옮긴이에게 주어지는 한뼘의 공간인 역자후기에서 그의 글이 고집하는 자세도 극도의 겸양이다. 부커상 수상작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The Sea) 후기는 “부커상이 영국에서 유명하고 중요한 문학상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지만”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리샴의 소설에 견해를 보탤 때는 “저자가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번역자도 편승한 우스운 꼴이지만”이라고 유보조항부터 단다. 그런 그가 챙기는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지금 여기서’이 책을 읽는 이유와 의미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주의가 중앙아시아에서 벌인 쟁투를 그린 <그레이트 게임>에서, 독자들이 영국인 저자를 과도하게 동일시할까봐 조심스레 경계한 후기는 좋은 예다.

번역은 독해보다 천만배 무겁다. 외국어로 의미를 어림잡는 행위와 그것을 모국어 문장으로 확정하는 결단 사이에는 통과해야 할 엄격한 법정이 존재한다.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는 훌륭하게 정리했다. “번역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독서라면 그 삶을 흡수하여 소화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번역이라는 것은 그 삶을 밖으로 잡아 끌어내 세포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몸뚱이가 솟아오를 때까지 자기가 꽉 붙들고 있는 것이다.”(<번역사 산책> 쓰지 유미 저,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 세상이 번역을 ‘먹물의 막장’이라 불러도 “그럴지도 모르지” 주억거리며 묵묵히 일해온 사람, 인터뷰 내내 번역 예찬이라고는 “어찌 보면 세상 모든 일이 번역인지도 모르죠”라는 단 한마디가 전부였던 사람과 헤어지며 나는 그가 번역가의 묵직한 의자에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태원에서 성장기를 보내셨다고요. 언뜻 듣기엔 번역가에게 어울리는 고향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는데요. (웃음)
=지금의 이태원은 몰라도 제가 어려서 살던 해방촌은 그렇지 않았어요. 기지촌이라 미국인들을 더러 보긴 하지만 접촉은 없고 그렇다고 “기브 미 쪼꼬렛”할 시대는 지났고.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 많고 부대 정문 앞에서 아가씨들이 미군 병사를 기다리는 부박한 곳이었죠.

-번역이라는 작업에는 원전의 뒤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일면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책상에 홀로 앉아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일의 성격과 본인의 기질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느끼세요?
=지금까지 해왔다는 건 제가 뭐라 생각하든 성격과 맞는 것 아닐까요? 설령 맞지 않았어도 맞추었다는 뜻이고요. 굳이 조직생활을 기피했거나 중뿔나서 회사를 못 다니겠다고 뛰쳐나온 경우는 아니에요. 졸업 직후 문예진흥원에 들어가 1년 남짓 다녔죠. 문예지 원고료 지원 업무였는데 조사하고 접수하고 영수증 챙기는 일을 했어요.

-‘문예’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이 선택에 영향을 줬나요?
=(잠시 생각한다)저희 세대의 진로 고민은 지금 세대와 달랐을 거예요. 제 경우에는 직장을 선택할 때 우선 고려한 것이 최소한의 시간만 일을 하고 칼퇴근을 해서 나머지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가였어요.

-느낌에 그 ‘다른 일’이 취미는 아닌 것 같은데요. 80년에 대학(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하셨는데 혹시 정치적인 이유로 도망 다니는 처지의 친구를 도우셨다거나….
=그맘때야 친구 절반은 도망 다니고 있었죠. (웃음)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따로 있었다고만 말하죠. 그러다 영문학과 대학원 간다는 핑계로 직장을 나왔어요. 그 대학원은 몇년 전에야 겨우 졸업했지만. (웃음) 직장을 나온 뒤에는 돈을 벌기 위해 학원 강의와 과외, 번역 같은 일을 했지요. 하지만 가르치러 왔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일이 싫어져서 과외는 그만두고 수입은 시원치 않지만 번역만 하게 됐어요. 번역은 1991년부터 시작했는데 ‘부업의식’의 여파는 꽤 오래갔어요.

-남들 눈에는 영문과와 대학원을 차근차근 나와 번역가가 된 직선코스인데 내막은 그렇지 않군요. 번역이 생업이라는 자의식은 대략 언제 때쯤에 왔나요?
=아마 <마르크스 평전>을 옮긴 즈음(2001)이었나봐요. 중요하다고 여겼던 일이 끝나고 계속 흔들리는 상태에서 내 일이 뭔지 정신 차리고 생각해봤어요. 그 나이에 고시를 보는 친구, 유학을 떠나는 친구도 있었는데, 저는 사람이 못나서 하던 일을 관성적으로 하게 된 거죠. 그즈음 번역할 책을 제가 고를 수 있는 위치도 됐고요.

-저는 기본적으로 번역가란 이방의 언어와 문화에 반한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요.
=상상하셨던 번역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제 아래 세대를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나 제 윗세대가 외국문화에 대한 매혹을 번역가가 된 동기로 꼽는다면 전 거짓말이라고 의심할 것 같아요. 저희 세대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게 과연 정당하냐고 의문을 제기한 세대거든요. 영문과더러 제국주의학과라는 농담도 오가는 상황에서는 서구 문화에 대한 매혹이 있다 해도 뒤틀려서 표현됐겠죠.

부업의식을 떨치기까지의 긴 시간

-<매일경제>와 인터뷰하시면서 경제학이나 법학이 아닌 영문학과를 선택한 이유를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라고 답하셨던데요. 거꾸로 법학이나 경제학을 할 경우 예상한 결과는 뭔가요?
=어린 나이에 법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겠습니까? 법학이나 경제학이 싫었다기보다 그 전공은 부모님이 내게 바라는 바의 상징이었죠. 반발심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집안 어른들이 기대하는 삶을 도저히 살 수 없을 듯한 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인문대를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정 그러면 영문과를 가라고 하셨어요. 일종의 타협점이었던 것이죠.

-학창 시절 독서를 많이 한 편입니까?
=많이 읽은 친구들에 비하면 턱도 없죠. 즐겨 읽긴 했는데 어머니가 학업과 무관한 책 보는 걸 말리셨어요. 그래서 대학 가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다림이 컸죠. 그런데 80년 3월에 입학을 해보니 공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본래 늦되는 편이라 학생운동에 동참하는 데에 갈등이 있어요. 공부 좀 해보려고 했는데 방해받는 게 싫었고, 고교 시절 교련 과목이 싫었듯 대열에 서기 싫은 저항감이 있었죠. 그러다 81년에 경제학과 4학년생이 도서관에서 투신했어요. 공부만 하던 선배였다고 했어요. 이게 뭔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 판단과 행동을 가속한 사건이었죠.

-말씀을 듣다보니 한 시절을 박탈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저는 절대 박탈당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누가 강요했던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했기에 즐거웠어요. ‘화양연화’라 불러도 좋을 만큼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그 시절에도 외국어 사회과학 원전에 대한 갈증이 있었을 법합니다.
=일본어는 선배들에게 남들은 사흘 배우면 읽는다고 구박 받으며 한자로 대충 때려잡는 법을 배웠어요. <자본론>을 그때 영문판으로 구해서 봤어요. 셰익스피어보다 사회과학서적을 먼저 본 경우죠. <성문종합영어> 다음의 제 영어교과서는 그쪽으로 넘어간 것 같네요. (웃음)

-1991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으로 처음 출판 번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번역자들의 상황이 기억나세요? ‘번역계’라는 것이 있었는지 세대구분은 있었는지.
=안정효, 이윤기 선생님 외에 특별히 번역가가 언급되는 일은 없었어요. 번역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번역만 해서 먹고살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나요? (웃음) 단, 소설을 쓰려고 하거나 다른 일을 도모하는 중간 단계에 번역을 하는 전통은 길었죠. 합리화지만, 제가 말씀드린 부업의식이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죠. 한 사람이 매달려 할 정상적인 직업으로 번역을 나도 남도 인정하지 않은 긴 세월이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안정효, 이윤기 선생님이 중요한 역할을 하셨고 또 IMF 이후 번역을 지망하는 분들이 급속히 늘어났어요. 실직자가 많아지니 번역은 좌우지간 혼자 먹고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출발부터 번역을 업으로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죠. 새로운 세대를 보면 내게는 애초에 없는 자세가 있구나 생각합니다. 제게 번역은 첫사랑 같은 느낌이 전혀 없고 어쩌다보니 같이 살고 있는 상대에 가까우니까요. (웃음)

-번역 작업의 일반적 순서가 궁금합니다. 일단 책을 통독하고 일을 맡을지 결정하시겠죠?
=과거에는 책을 선정하는 일도 맡는 번역자가 더러 있었고 지금도 기획을 겸하는 훌륭한 번역가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요즘은 주로 출판사가 에이전시를 통해 책을 선정합니다. 책을 받으면 빠르게 읽으면서 할 만한지 살피고 답을 드립니다. 그리고 번역을 시작하죠. 전 둔한 편이라 읽어서는 감이 안 오고 손으로 옮겨봐야 알겠더라고요. 보통은 절반가량 진도가 나가면 궤도에 오릅니다.

-궤도에 오른다 하면?
=배우로 치면 대사가 입에 붙는 거죠. 저자의 문체가 내 몸에 붙어 대충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오죠. 처음에는 불분명했던 대목이 뒤쪽을 마저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되는 경우도 많아요. 아, 이 사람은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구나 깨닫는 거죠. 그렇게 한 차례 번역하고 처음부터 다시 보며 습득한 스타일대로 다듬어요. 그러니까 앞쪽 절반을 퇴고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제 경우는 초고 만드는 시간과 다듬는 시간이 얼추 비슷해요. 이렇게 다듬어 보낸 다음 나중에 역자교정을 편집자와 의견을 나누면서 보고 옮긴이의 글을 마지막으로 씁니다. 동시에 두권 정도 진행해요. 종일 같은 책만 붙들고 있으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말귀를 알아듣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워

-번역을 논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외국어도 잘 알아야 하지만 모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던데요.
=소설은 번역의 결과 자체가 소설로서 읽혀야 하죠. 그런 의미에선 모국어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맞는 말인데, 문제는 그 능력이 어디서 오냐는 거죠. 예를 들어 글솜씨가 있으면 되느냐, 문장구조가 정확하고 비문만 없으면 되느냐. 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우리말을 구사하는 법은 국어실력뿐 아니라 번역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거든요. 번역자는 저자의 스타일을 향해 가려고 애쓰는 것이기에 문제는 내가 우리말을 잘 쓰느냐보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겼느냐입니다.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이란 전제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극단적 예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서문을 보면 14세기 말 독일의 한 수도사에 의해 라틴어로 쓰인 작품의 17세기 라틴어판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이탈리아어로 옮겼노라 써 있잖아요. (웃음)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할 때는 어떤 문체가 합당한 것인지 굉장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잖아요?
=불가능이라… 원작과 번역은 다른 거죠.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악몽이 되는 것이고요. 말장난이나 운을 갖고 벌이는 유희를 그대로 번역하기는 힘들어요. 나아가 오리지널 텍스트가 뭐냐는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걸작이 있을 때 작품의 의미가 고정돼 있다면 많은 학자들이 논의할 필요도 없겠죠.

-문외한 입장에서도 번역은 딜레마 덩어리로 보여요. 단어를 정확히 옮기는 게 옳으냐 아니면 사상을 옮기는 게 옳으냐, 운문을 운문으로만 옮겨야 하느냐 산문으로 옮겨야 하느냐, 독자와 동시대 문체로 써야 하느냐, 원전과 동시대의 책으로 읽혀야 하느냐 등등. 매번 작업할 때마다 그런 문제를 고민하시나요?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로 풀면 얘기가 복잡해집니다. 번역자의 선택이 가능한지도 별개 문제입니다. 제가 “자, 오늘부터는 의역을 해볼까?” 하고 의역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좌중 웃음) 광고라면 메시지 전달이 중요하지만 문학 텍스트는 오역이 아닌 이상 번역자의 기질과 성향,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 결정적인 것 같아요. 제 경우 굳이 어느 쪽이냐를 묻는다면 직역쪽에 가깝죠. 독자의 편의를 염려하는 것은 편집자 소관이고 역자는 저자가 어떻게 말한 것인지를 충실히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죠.

-근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죠. 번역에서는 말귀를 알아듣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저자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깊어야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이른바 ‘초를 치는’번역은 싫어해요. 번역은 설명이 아니잖아요? 원문 풀어쓰기(paraphrasing)도 아니고요.

‘번역투’가 나쁘다는데 장말 나쁜가?

-번역문이 술술 읽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반대쪽에는 번역문은 원문쪽으로 끌어당겨서 쓴 이질성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던데요.
=저보고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번역스러운 번역쪽을 택하겠죠. ‘번역투’가 나쁘다는 것이 통념인데, 왜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거든요. 번역인데 번역투가 아니라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요? 가만보면 몇몇 분열적인 직종이 있어요. 번역은 번역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칭찬받고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호평받고. 정신건강에도 안 좋은 겁니다. (좌중 웃음) 옛날엔 실물과 똑같다는 것이 그림에 대한 칭찬이었지만 달라졌잖아요. 저는 번역의 매끄러움에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번역의 완성도와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사실 주된 비난의 대상은 한글 문장을 번역투로 쓰는 경우죠. 번역서가 악영향을 끼쳤다고 원흉으로 지목받기도 하지만요. 우리가 읽는 책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라면 자연스런 사태이기도 하겠죠.
=번역의 영향이 없진 않죠. 하지만 A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영어로 읽어도 독특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작가란 모름지기 그런 독특한 목소리가 없으면 작가가 아니잖아요? 비문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고 저자의 문투를 무화하는 방향은 제 방침이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보존하느냐를 고민하는 쪽이죠. 물론 번역자 중에는 (글이) 이런 꼴은 못 본다고 생각해 다듬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입장의 차이죠.

-서평이나 신문의 책 기사에서 번역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거칠다고 지적하느라 언급하는 예가 많지만 매끄럽다는 칭찬도 있죠. 기자가 원서도 읽었을 가능성은 희박한데 무엇을 기준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하는지 여러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다.
=일단 대부분 원문과 대조없이 평한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죠. 기사에서 번역을 논하는 의도는 사실 본격적으로 번역을 평가한다기보다 이 책은 기본이 안돼 있다는 평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방법 아닐까요?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니까. 축구 경기를 보면서 기본기가 안돼 있다고 해설하듯이 말이죠.

-번역자로서 마지막 방법이 영어 원문을 그대로 쓰고 주석을 다는 것일 텐데요. 역주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주석을 싫어하는 건 편집자들이죠. 책이 어려워 보인다고 학술서도 아닌데 그래야 하냐고 묻기도 하는데, 전 번역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봐요. 영어의 말장난도 어떤 역자들은 비슷한 우리말 농담으로 치환도 하지만 일단 전 그런 재주가 없고요.

-왜요. <책도둑>에서 “A로 시작하는 말”을 “ㅅ이나 ㅆ으로 시작되는 말”로 옮기셨잖아요? (웃음)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옮길 때, 제복이라 치고 입었는데 결과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표현을 “제각각복을 입었다”라고 옮겼어요. 그때는 뭐 약간 제 상태가 좋아서 해본 건데(웃음), 만약 그런 농담이 자주 나왔다면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렇게 옮기지 않았을 거예요. 기본적으로 재치가 없어요.

<로드> 성공, 한국 독자의 수용력에 놀라

-의뢰를 많이 받는 번역가이십니다. 수락 여부를 좌우하는 조건이 뭔가요?
=처음 읽었을 때 독자 입장에서 제가 느끼는 호감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나 인문사회과학서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고요. 무엇이건 제가 어느 한 부분을 건드려주는 책이길 바라죠. 그런 동기가 없으면 몇달의 작업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좀 이해해주세요. (웃음)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낸 <미메시스>라는 번역 무크지가 있었습니다. 99년에 “올해의 좋은 번역서 가운데 선생님이 옮긴 <신의 가면III: 서양신화>가 있던데요. 개인적으로 성취감을 크게 느끼는 번역서는 무엇입니까?
=번역의 완성도에 대한 만족과 성취감이 일치하진 않아요. 일단 <마르크스 평전>이 떠오르네요. <지젝이 만난 레닌>도 작업은 힘들었지만 보람있었어요. 존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이 있는 골목>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죠. 마치 어려서 읽은 한국의 민중소설, 그것도 아주 잘 쓴 작품을 보는 것 같았어요. 현실을 끌어안는 품이 푸근한데 그 위에 예술적 깊이와 온기도 대단해서 각별했습니다.



-제약 조건 없이 선택할 수 있다면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나요?
=호치민, 레닌, 마르크스, 마오쩌둥 평전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오쩌둥은 좀 생각이 달라졌지만 이 나이에도 설레는 남은 로망으로는 프로이트가 있었는데 그의 평전 번역에 곧 착수할 것 같습니다. 피터 게이가 썼으니 책은 좋을 것 같습니다. 한때 베토벤 평전을 옮기고 싶어 안달을 하고 출판사 사장님을 설득하느라 공을 들였는데 막상 설득에 성공하고 나니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계약을 했더군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가 전기를 해보고 싶은데 기회가 많이 돌아오지 않네요.

-주로 인물에 관한 책이군요.
=중요한 인물의 저작을 옮기기엔 제 능력이 미흡한 것 같고, 평전이 제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난이도로 치면 소설이 최고죠. 어찌보면 인문사회과학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데 소설 번역은 결과 자체가 완성품이 돼야 하니까요. 예컨대 <지젝이 만난 레닌>의 경우 쉽지 않은 번역이었지만 지젝은 기본적으로 독자에게 말을 하려는 사람이거든요. 반면 소설 <로드>의 작가 코맥 매카시는 꼭 말을 하고 싶어 한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어요. 독자가 알아듣는지 여부에 딱히 관심이 없달까. “잘 모르겠냐? 어쩔 수 없지”라는 식이죠. 내게 설명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옮기는 일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일을 애써 알아듣고 번역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죠.

-<로드>는 암울하고 무거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16만부가량 판매됐다고 들었어요. 올해의 작은 사건이랄까.
=저도 의외였어요. 정보가 없는 상태로 번역하겠냐는 제의를 받았는데 간결함이 주는 매력과 알 수 없는 힘에 끌렸어요. 이게 뭘까, 더 알고 싶었어요. 책이 성공한 뒤 제 친구가 내린 해석을 옮기면 <로드>는 누구나 대입하기 쉬운 절망을 그렸기 때문에 잘된 거라더군요. 우리 독자들의 좋은 책에 대한 수용력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저 같은 사람에겐 큰 힘이 되죠. 일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신장되고 자유가 커지니까요. 사실 <로드>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대가는 그거예요.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전에서 꼭 맞는 단어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나요?
=번역을 배우는 학생들 말이 사전에 나온 1번의 뜻으로 번역하면 안된대요. 실력이 없어 보이니까. (웃음) 그렇지만 저는 1번이 제일 중요한 뜻인데 그걸 피해가면 어떻하냐고 하죠. 단어의 의미는 문맥이 규정하죠. 사전에 나온 풀이가 문맥에 들어맞지 않으면 그때부터 고민에 들어가는 거죠. 사실 작가가 일일이 사전을 들춰보며 원문을 쓰는 건 아니잖아요? 사전이 몇권이라도 소용없는 부분이 있어요.

영화자막 번역은 악몽이더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보니 편집위원들이 문학의 고전은 세대마다 새로 번역돼야 한다고 표명하셨어요. 번역은 원작보다 수명이 짧다는 것이 상식인데요.
=그 문제도 단순하지 않아요. 그분들은 그렇게 선언했지만, 원작은 가만히 있는데 번역은 왜 시대마다 새롭게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간단한 건 아니죠.

-번역문에 쓴 단어가 예스러워져서 동시대 독자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있겠죠?
=저는 현재 흔히 쓰지 않는 단어도 뜻과 느낌이 맞다면 쓸 수 있다고 보는 쪽이죠. 쓰지 말아야 할 유일한 이유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인데, 독자들은 사전을 찾아보면 안되나요? 어휘 선택도 일종의 검열이라고 생각해요.

-불필요한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원문이 젠체하며 외래어를 쓰는 문체라면 번역도 그래야겠죠. 실제로 출판 관행이 저자들의 문장은 토씨 하나 고쳐도 난리가 나니 조심스럽게 다루는데 번역문은 편집자가 윤문하기도 해요. 저로서 기분 좋은 변화가 있다면 과거에는 당의를 입힌 매끈한 번역이 선호됐지만, 지금은 원작의 문체를 어떻게 정확히 드러내느냐에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이에요. <로드>도 그런 불친절한 문체를 살려서 출간하기 쉽지 않죠.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한 문단이 몇쪽에 이르는- 역시 독특한 문체를 출판사에서 받아들여줬고요. <책도둑>도 흔치 않은 구성과 문체라 초반 진입을 못한 독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번역이 뭐 이래?”거든요. 그래서 편집자에게 고마워요. 좋은 편집자와의 만남이 번역가에겐 중요합니다.

-본인이 번역한 책 중에 개정해서 번역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눈을 크게 뜨며) 다죠, 다. 저한테 한정없이 잡고 있으라면 한책을 갖고 끝도 없이 고칠걸요? 오역은 당연히 바로잡지만 그래서 역자교정 이후에는 일부러 책을 안 보려고 해요. 그걸 어떻게…. 가끔 제 번역을 인용한 글을 읽으면 낯 뜨거워 못 읽겠어요.

-영화를 볼 때도 자막 번역에 대해 민감하십니까?
=미디어 번역을 전공하는 친구들 말을 들으니 가로 번역은 몇자 이내, 세로 번역은 몇자 이내로 해야 하다보니 원뜻과 무관한 번역을 하는 분도 있대요. 물론 그분의 스타일이겠지만. 저는 영화를 잘 모르지만 어떤 영화는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디 앨런 영화자막을 만드는데 잣수 제한이 있다면 몹시 괴로울 거예요. 그분 영화야 스펙터클이 있길 하나 그야말로 말 갖고 하는 건데 대사를 잃으면 영화의 큰 부분을 잃는 셈이잖아요.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웃음) 딱 한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책을 번역하면서 한꺼번에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의 자막을 번역했는데 악몽이었어요. 자막 번역의 고충을 알았죠.

음식과 옷 묘사하기 가장 힘들어

-번역하는 입장에서는 관념적인 명제보다 시시콜콜한 묘사가 옮기기 더 어렵지 않나요? 역서 중 책장의 역사를 다룬 <서가에 꽂힌 책>을 읽었는데, 중세의 사슬 달린 책장의 생김새를 설명하는 문장들을 읽으며 옮기는 이가 괴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묘사의 번역이 의외로 굉장히 힘들어요. 일단 이미지를 제 머릿속에 확실히 잡아야 우리말로 옮길 수 있고, 동시에 문체도 살려야 하거든요. 제일 싫어하는 내용이 음식과 옷이에요. 먹어보거나 눈으로 봤어야죠. 특히 여자 옷은. 번역뿐 아니라 작가들도 묘사력을 보면 재능을 가늠할 수 있어요. 묘사를 못하는 사람은 영어 자체가 꼬여서 이미지를 설득 못하거든요. 주장하는 문장이 훨씬 쉽죠.



-한 문화권에는 존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등가물을 찾을 수 없는 단어가 맞을 텐데요. 관직명도 그렇고요.
=<번역어 성립 사정>이라는 일본에서 나온 책이 있어요. 민주주의, 연애 등 10개의 단어를 갖고 처음에 서양어로부터 어떻게 일본어로 번역됐느냐를 따진 책이죠. 예를 들어 경제라는 말은 언제 어떻게 해서 쓰게 됐는지 알 수 있죠.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쓴 라틴어가 영어로 흘러드는 과정에 관한 책도 있어서 한때 이 두권의 책을 엮어 번역해볼까 하는 구상도 있었어요. 일본 책이 먼저 나와서 무산됐지만.

-선생님이 두권 이상 번역한 책의 작가들을 살펴보면 존 그리샴, 알랭 드 보통, 주제 사라마구, 타리크 알리 등이 있는데요. 어떤 작가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존 그리샴은 정의감이 중요한 장점이죠. 그 정의감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다른 문제지만요. 주제 사라마구는 노동자 출신다운 강단과 세상을 보는 각도가 있는데, 낯선 그의 스타일이 실은 구술문화에서 온 것이라고 해요. 타리크 알리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이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은 깊지만 의욕만큼 성취한 작가는 아직 아닌 듯합니다. 알랭 드 보통은 글쓰려는 주제 안으로 독자를 포섭하는 능력이 있죠. 무거운 책과 가벼운 책을 번갈아 내는 느낌입니다. 신경질적인 면도 있지만 무게도 실을 줄 아는 저자입니다. 제가 번역한 책 중에서는 <불안>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현재 <일>(Work)이라는 책을 쓰고 있대요.

-다양한 작가의 책을 작업했는데 옮긴이가 같아 나타나는 문체의 일관성이 전혀 없을까요?
=누군가 그런 말을 제게 해준다면 최악의 평가일 겁니다. 피아니스트에게 베토벤과 쇼팽을 똑같이 연주했다는 말과 같은 거니까. 물론 불가피한 공통점이 있고 저의 무엇이 저자와 변증법적으로 작용해서 번역이 나오는 것이겠지만요. 훌륭한 배우의 경우 어떤 역을 연기했을 때 “이게 그 사람이었어?” 하고 놀랄 때가 있잖아요?

-배우의 경우 육체성을 떼놓을 수 없으니 약간 다르겠죠. 가끔은 독자로서 동의하기 힘든 내용을 번역하기도 할 텐데요.
=제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는 아니니까요. 최근 나온 <그레이트 게임>이 그런 예인데, 저자 피터 홉커크가 영국인의 시선으로 아프가니스탄인을 폭도로 간주한다거나 하는 대목이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한국의 독자들이 ‘폭도’라는 말의 다양한 함의를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해서 아니까 굳이 각주를 달지 않고 역자후기에만 언급했습니다.

번역은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

-선생님은 유학도 간 적이 없고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시지도 않는데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 온갖 투자와 노력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면 비결을 궁금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언어에는 끈적한 속성이 있고 해당 사회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나 영어든 한국어든 어떤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일정한 선을 넘으면 모두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게 핵심이라고 본다면 영어를 잘하는 것과 한국어를 잘하는 것이 같은 의미일 수 있죠. 그리고 영어를 잘하는 건 좋은데 그걸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요. 물건을 사고팔려는 건지, 철학을 하려는 건지, 연애를 하려는 건지. 그런 요소가 있으니 제가 번역을 하고 있겠죠? 외국 거주 경험이 없고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니면 번역을 못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낄 자리가 없겠죠.

-자동 번역기계가 등장했을 때는 감회가 어떠셨나요?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란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게재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자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

-<지젝, 레닌을 만나다>의 후기에 번역 준비과정에서 과거에 나온 책들을 보면서 20여년 전 금서를 타자기로 번역했던 익명, 가명의 번역자들에게 감탄했다고 쓰셨던데요.
=과거의 책들을 찾아본 까닭은 일단 틀리고 싶지 않았고, 앞서 옮긴 이들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작업한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번역이 좋아서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도록 만든 원동력에 눈길이 갔어요. 저야 먹고살려고 번역한 거지만 그들에게 번역은 틀려서는 안되는 절박한 문제였던 거죠. 오류 여부를 떠나 본인의 번역이 당시 논쟁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행동을 결정하는 큰 변수가 된다는 데서 나오는 서늘한 기(氣)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때 그 사람들만이 소유한 기운이었고 지금의 저한테는 없는 부분이라 부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번역이란 지금 말씀하신 정치적 절박함이건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건 문학에 대한 동경이건 아마추어적 열정이 중대한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번역을 비전문적 영역으로 여긴다는 뜻은 아니고요.
=패러독스인데, 20년 전 레닌을 번역한 사람들은 당연히 아마추어였을 텐데 그들만큼 프로가 되겠다고 의식한 사람도 없었을 거예요. 레닌 이론의 핵심이 직업혁명가론이잖아요. (웃음) 아마 새로운 세대들은 아마추어적 정열을 바탕으로 프로페셔널 번역가가 되겠죠?

-혹시 반대 방향의 번역, 한글을 영문으로 옮기는 작업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여러 설이 있지만 모국어가 도착어(번역문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번역이 아트(art, 예술)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래프트(craft, 장인의 기술)는 되는 것 같아요. 즉 결과로 나오는 언어를 세공해야 한다는 뜻인데, 세공은 모국어가 아니면 힘들 것 같아요.

追伸: 나이와 함께 체력이 쇠하고 집중의 지속이 짧아졌다고 정영목은 말했다. 이어“그래서 저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책이 점점 더 필요해집니다”라고 덧붙였다. 거꾸로 젊은 번역자들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덤벼들어야 할 책이 있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느슨해지려는 몸과 마음의 탄력을 추슬러주는 정영목의 도락은 등산과 클래식 공연 관람. 얼마 전에는 그가 사는 도시의 음악당에서 최다 관람 관객 2위로 뽑혀 부상을 받기도 했다고. 표값이 아닌 방문횟수를 합산한 덕분일 거라면서도 흐뭇한 기색이 비친다. 번역자의 가슴에는 원작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락시켰던 말의 부스러기가 쌓일 테지만, 연주자는 공연으로 작품을 끝없이 재해석할 수 있다. 연주자와 연주를 향한 그의 사랑에는 혹시 그런 특권을 향한 천진한 동경이 포함돼 있는 게 아닐까.

08.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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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2-2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일 오후 좋은 글을 로쟈님 덕분에 읽었네요. 정영목씨는 어린이책들도 번역하셔서 조카에게 망설임 없이 권하곤 했죠..

로쟈 2008-12-21 13:59   좋아요 0 | URL
저도 인터뷰기사 덕에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이 있는 골목>을 알게 됐어요. 어린이책에 대해선 좀 무관심해서 모르고...^^;

쉽싸리 2008-12-2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몇 권 사야 겠습니다.
이 분 이름으로 검색해서 살펴보니 단 한 권도 제 수중엔 없군요.늘 소유욕만 난발,
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뭐가 좋을까요? ^^

로쟈 2008-12-21 18:20   좋아요 0 | URL
보통의 책들이 가장 접근하기 쉬울 듯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독했습니다.기자가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하고 질문한다는 느낌이 드네요.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평전을 번역한다니 기대가 되는군요.게이의 슈니츨러 연구서를 읽은 기억이 있거든요.

로쟈 2008-12-21 18:20   좋아요 0 | URL
리뷰어가 이름을 걸 만하지요. 피터 게이의 책은 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Kir 2008-12-22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이 분이 번역한 책을 꽤 가지고 있는 편인데, 좋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반반이었어요. 그래서 선호하는 역자로 꼽기는 어쩐지 애매했는데, 이 기사를 보고나니 선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버렸네요^^ 언제나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 땅의 수많은 번역자분들의 노고에 새삼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로쟈 2008-12-23 00:09   좋아요 0 | URL
본인 스스로도 고칠 게 많다고 하는데, 점점 좋아지고 있는 케이스죠. 이제까지의 번역보다 앞으로의 번역에 더 기대를 걸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