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출판계에서는2007년부터 명나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지만(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35130.html) 아직은 우리와 무관한 듯싶다. 대신에 이번주에 나온 중국사 관련서 두 권은 모두 청나라를 다루고 있다. 일본학자 이시바시 다카오의 <대청제국 1616-1799>(휴머니스트, 2009)와 미국학자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가 그 두 권의 책이다('사고전서'란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중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놓치기 어려운 책들이겠다...  

 
왼쪽부터 청조 1대 황제 누르하치, 2대 홍타이지, 3대 순치제, 4대 강희제,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의 초상.

국제신문(09. 01. 31) 淸 … 다민족국가 중국의 원형    

'만주족이 세운 일개 소국이 만족할 줄 모르는 혁신력에 의지하여 차츰 거대한 중화 세계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힘은 장성 안쪽 세계의 테두리를 아득히 넘어 몽골 세계와 티베트 세계를 통합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중앙아시아로까지 진출하여 이슬람의 위구르 세계도 수중에 넣었다. 청조의 그 만족할 줄 모르는 혁신력이란 도대체 어떠한 역사의 변화를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한국어판 서문 중) 



대청제국의 저자 이시바시 다카오(일본 고쿠시칸대 교수)의 서문은 명쾌하다. 역사학자로서 저자의 과녘은 두 가지. 중국을 정복할 당시 인구 100만에도 미치지 못한 만주족이 1억 명에 가까운 한족을 280년 동안 통치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대청제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구축하면서 팽창하고 발전했다. 그 원동력을 혁신력을 중심으로 밝히고자 하는 것이 하나다. 

또 한가지는 대청제국이 태생할 때부터 본질적으로 '복합 다민족 국가'였음을 밝혀내면서 이러한 체제의 형성·운영원리가 현대의 중국에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을 알려면 청나라라는 뿌리부터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대 중국은 1980년대 공포한 헌법에서 복합적인 다민족 국가임을 명기했고, 이런 다민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고민에서 동북공정 등의 대처법이 나온 것인데 이러한 행위와 인식의 뿌리가 대청제국 시절에 형성됐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일련의 혁신과정. 이것이 청나라 발전과 팽창의 원동력이다. 1616년 아이신국(후금 또는 만주국)을 세우면서 청 태조가 된 누르하치는 25세에 거병할 때만 해도 일족에서조차 후원받지 못하는 고립무원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여진족에게 숙명처럼 따라붙던 가난에 맞서려고 한족의 농경사회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선대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몽골과 한족을 끌어들이고 내부적으로는 군사제도인 팔기제도를 창시하면서 여진족의 전통적 부족제를 혁신한다. 

누르하치에게 권력이 집중되던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보수파는 그가 죽자 힘없는 권력승계순위 최하위 홍타이지를 2대 황제로 선택해 재기를 노린다. '보수의 반격이었던 것이다.'(121쪽) 홍타이지는 '굴욕감을 참고 분권통치 체제에 안주하는 편안한 길'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집권화에 모든 것을 건다. 홍타이지는 '한족의 정치·경제·군사력과 몽골족 기마병의 기동력'을 새 기반으로 삼고 혁신을 단행해 결국 대청국 건국을 선포한다.

뒤를 이은 순치제는 유목민 전통을 깨고 중화적 방식인 환관제도까지 도입했고 이후 강희·옹정제는 관료적 중앙집권제를 강행하는 두뇌와 강단으로 지배구조를 반석에 올린다. 청나라 전성기의 절정을 장식한 건륭제는 60년 치세 동안 오늘날의 중국보다 훨씬 넓었던 강역을 개척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혁신-보수의 대립 과정에서 시행된 일련의 혁신 과정을 통해 중국은 '만리장성 이남 한족의 나라'에서 몽골 위구르 티베트 등을 포괄하는 복합적 다민족국가가 되었고 이에 걸맞은 이데올로기와 인식을 형성했다는 점. 이렇게 놓고 보면 청나라를 단순히 한족 왕조를 대체한 정복왕조로 보는 기존 시각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청제국은 이전 '중화제국' 시스템을 해체하고 새로운 복합적 다민족국가로서 중국의 뿌리를 놓았으며 오늘에 이른 것이 된다. 이 점이 이 책의 새로운 점이다. 청나라 팽창기 판도는 성과 자치구로 이뤄진 현대 중국의 시스템과 대비시키면 거의 일치한다.

후반부에 가면 잘 나가던 대청제국이 건륭제 이후 쇠퇴기로 접어든 원인도 고찰한다. 그 중 한가지는 '혁신은 가고 보수만 남았다'는 것. 새가 좌우 날개로 날듯 혁신·보수가 짝을 이뤄야 국가도 활력을 잃지 않는다는 교훈을 여기서 도출하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에서 실용을 배우는 경영서적이나 CEO론이 아닐까 싶을 수 있겠지만 '대청제국'은 역사연구서로서 정통 인문학 책이다. 그럼에도 '혁신력' 또는 '혁신과 보수'라는, 친숙하고도 현명하게 대처해내기 힘든 함수를 푸는 데 영감을 준다.(조봉권 기자) 



문화일보(09. 01.31) 18세기말 中의 세계최대 출판 프로젝트

1772년 2월 중국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총독·순무·학정 등 각 성(省)과 현(縣)의 관리들에게 그들이 관장하는 모든 서고(書庫)에 보관된 희귀본과 귀중본들을 조사하는 한편, 이들을 필사해 그 성과물을 베이징(北京)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건륭제는 개인 장서가들에게도 그들이 소장한 귀중본을 자발적으로 베이징에 보낼 것을 촉구했다.

1773년 3월에는 각지에서 보내온 책들을 수납하고 내용을 평가하기 위한 행정기구가 베이징에 창설됐고 사업을 위한 실무진도 구성됐다. 당시 조정이나 학술계의 명사로서 이 기구에 참여한 찬수관·분교관·등록관만도 300명이 넘었다. 22년에 걸쳐 완성되고 수정된 최종 결과물은 청 제국에 남아 있던 1만680종의 책을 경전·역사서·철학서·문학서의 사부(四部), 즉 사고(四庫)로 나눠 그에 대한 해제를 작성한 목록과 그중 3593종을 3만6000여 책으로 다시 필사한 방대한 총서였다.  

Cover: The Emperor's Four Treasures 

미 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61)가 자신의 하버드대 박사 논문을 기초로 완성한 책은 ‘사고전서’의 편찬 과정을 통해 건륭제 시대의 학자와 국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고전서:건륭 연간의 학자와 국가’가 원제인 책에서 저자는 ‘사고전서’가 건륭제가 벌인 검열과 탄압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고전서’의 편찬이 당시의 학자와 국가, 건륭황제의 이해가 모두 반영된 복합적 행위의 성과물임을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고전서’가 편찬될 당시인 177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의 청대 사상가들과 그들을 후원한 고위 정치가들의 삶을 다루는 한편, ‘사고전서’의 편찬 과정에서 벌어지는 한학파(漢學派·고증학자)와송학파(宋學派·성리학자)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과 갈등, 대립과 반목을 섬세하게 복원해냈다.

사실 ‘사고전서’ 편찬 사업은 1770년대 후반과 1780년대 초반 조정에서 진행된 검열운동 때문에 20세기 내내 비판을 받아왔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검열운동을 통해 2400여종 이상의 책들이 파괴됐고 400∼500여종의 책은 공식적 명령에 의해 개정됐다. 이는 ‘사고전서’ 편찬이 서지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과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책을 수집하고, 수정하고, 검열하는 과정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청대 고증학이 만주족 통치자들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전하게 된 수동적 학문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사고전서’ 편찬의 주요 목적은 검열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사고전서’ 검열이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고 검열의 진행 과정도 학자와 국가의 상호반응에 의해 이뤄진 복합적인 결과일 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전대미문 또는 세계 최대의 출판 프로젝트로 평가되는 ‘사고전서’ 편찬사업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절대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최영창기자) 

09. 01. 31.  

 

P.S. 청나라의 치세를 다룬 책으로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이산, 2001), <반역의 책: 옹정제와 사상통제>(이산, 2004), 그리고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이산, 2001)가 떠오른다. 이번에 나온 책들과 같이 묶어서 통독하면 대청제국에 대한 그림이 조금더 자세하게 그려질 듯하다...


댓글(6)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25 09:58 
    서지학에 과문한지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중국 서지학의 고전도 출간됐다. 섭덕휘의<서림청화>(푸른역사, 201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란 부제가좀더 다가가기 편하다('중국책'이라곤 하지만 당연히 조선의 지식인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긴다. 뤄슈바오의 <중국 책의 역사>(다른생각, 2008)도 배경이돼줄 수 있겠다. 수년 전 중국여행 시 소주
 
 
노이에자이트 2009-01-31 22:29   좋아요 0 | URL
만주 문자로 된 수많은 서적들이 잠자고 있다고 합니다.만주어 해독자가 이제 없어졌다는 말도 있구요.엄청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이젠 만주족도 없어진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네요.한때 만주문자를 공부해서 청나라 역사서 연구하러 중국에 가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다 헛된 꿈이 되었습니다.

로쟈 2009-02-01 00:37   좋아요 0 | URL
중국에서마저 연구자가 없다는 건 의외인데요. 한데, 한국에선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있으셨나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1 01:33   좋아요 0 | URL
70년대에 만주문자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이 중국에 몇 명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하더라구요.만주족도 만주어를 모르니까요.예전 서울대 외교학과 이용희 씨가 만주어를 해독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분도 고인이 된지 10년이 넘었구요.
제가 먹고 사는 일에 관해선...비밀주의를 내세우기로 했습니다.

로쟈 2009-02-01 10:47   좋아요 0 | URL
동양사 전공자들 가운데에서도 없다면 좀 의외이면서 나름 심각한 문제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1 15:09   좋아요 0 | URL
소수민족의 언어가 사라지면서 닥치는 문제점 중의 하나가 그런 것 같아요.한때 대제국을 건설한 만주족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몰락할 수 있는지 참 서글퍼요.

로쟈 2009-02-01 21:39   좋아요 0 | URL
몰락이야 자연사에 속할 수 있지만 그걸 기억/보존하는 건 다른 문제일 텐데 좀 유감이예요...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유문화사, 2009)이란 책이 출간됐다. 흔한 컨셉이어서 타이틀만으로는 저자를 쉽게 떠올리기 어렵지만, 저자가 <오픈북>(을유문화사, 2007)의 '마이클 더다'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책.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의 서평 전문기자이면서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이력의 소유자다. 어쩌다 보니 서평 원고를 자주 쓰게 되는데, 또 그러다 보니 '최고의 서평가'가 쓰는 서평은 어떤 것일까란 호기심도 생긴다. 그래서 며칠전 기사를 보고 엊그제 대형서점을 찾았다가 허탕을 치고, 어제 동네서점에서 손에 들 수 있었다. <오픈북> 때와는 달리 이번엔 번역본의 표지가 원서보다 낫다. '서평'보다는 '즐거움'에 방점이 놓인 책이어서 편하게, 더디게 읽을 수 있을 듯. 만년에는 나대로의 즐거움을 기록해보고 싶다...

한국일보(0. 01. 31) 고전 앞에서 고전하는 독자에게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단테의 <신곡>,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고전,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작가와 작품 목록이다. 여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겠지만 이들 책은 긴 분량과 딱딱한 내용 때문에 책을 펼치려는 일반 독자들을 주저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것도 사실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열두 살 때 이런 목록으로 가득찬 고전안내서를 읽고 이후 목록에 있는 책들을 섭렵하며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저널리스트가 된 마이클 더다(61ㆍ사진)는 이런저런 고전들은 건너뛰고, 또 새롭고 덜 알려진 고전들을 소개하는 안내서를 쓴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은 그 산물이다.

 

80여 명의 작가가 소개돼 있는데, 선정의 기준은 제목 그대로 '즐거움'과 '다양함'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같은 잘 알려진 고전들도 있지만,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같은 과학소설, 애거사 크리스티나 코넌 도일의 추리소설, 심지어는 영국의 문필가 H W 파울러가 쓴 <현대영어 용법사전> 같은 책까지 포함돼 있다.

저자는 코넬대에서 프랑스문학과 중세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78년부터 워싱턴포스트에 서평과 문학기사를 기고해왔다. 오랜 신문 기고에서 쌓은 내공으로 그는 이 책에서 작가의 인상적인 에피소드나 격언 등을 적절히 제시하며 독자들의 흥미를 유도하는 등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묘미를 보여준다. 가령 사포의 연애시를 소개하면서 "어떤 시의 파편은 단 두 마디로 되어있다. '여기'라는 단어가 나오고 한참 뒤에 '다시'라고만 되어있다.

이 두 단어를 읽으면 어떤 텅빈 공간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정사를 상상하게 된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또 <타임머신>의 저자 H G 웰스를 소개하면서는 "결국 과학소설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뿐 아니라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리려는 문학이다"라는 독창적 해설을 곁들인다. 고전 앞에서 고전하는 독자들을 위한 독특한 독서지침서다. 원제 'Classics for pleasure'(2007).(이왕구기자) 

09. 01. 31.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9-01-31 11:0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은 동네에 서점이 있나 봅니다.
저희는 몇년 전부터 없어졌는데...
가끔 동네 서점이 그립기도 하더라구요.
있을 땐 몰랐는데 없어지고나니 왜 그리 허전한지...
하긴 있어도 거기 있나 보다하지 막상 이용은 안하게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동네 서점은 추억이란 여간해서 안 없어지네요.
이러다 로망이 되는 건 아닌지.ㅎㅎ

로쟈 2009-01-31 11:11   좋아요 0 | URL
'동네서점'이라고 적었는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역서점'입니다. 전철역 앞에 있는 중형서점이고, 나름 체인입니다. 주문해야 들어오는 신간이 많아서 제가 '동네서점'이라고 부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1-31 14:07   좋아요 0 | URL
저희 동네서점은 책분류가 엉망이예요 쩝 --;;

로쟈 2009-01-31 14:51   좋아요 0 | URL
분류의 원칙을 정하기가 사실 어렵죠. 동선이나 편의성도 고려해야 해서요. 집에서 꽂아놓을 때부터도 그렇습니다.^^;

놀이네트 2009-01-31 18:50   좋아요 0 | URL
책이라면 고전을 좀 읽어봐야하고 놀이라면 전래놀이에 좀 빠져봐야죠. ^^
예전에 로쟈님 따님에 대한 포스팅(덧글이었나?)이 있었던 게 생각나 몇 줄 남깁니다.
아이들이 책과 놀이를 마음껏 접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하는데요.
책에 관해서는 일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놀이는 영 그렇더군요.
아마 서포트해줄 산업이 전혀 없다는 차이 때문인 듯 합니다.
여하간 www.playkorea.net에 함 놀러 오셔서 둘러보시고 배너라도 달아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참 저는 01년생과 03년생 딸 둘과 함께 삽니다. ^^;
------------------------------------------------------------
어린이는 마음껏 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권리나 인권을 넘어서는 또다른 생명입니다.
놀이네트는 이 단순한 메시지를 송출하는 것을 기본적인 목적으로 합니다.
또한 새로운 과거이자 오래된 미래인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로쟈 2009-02-01 21:3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노는 데는 소질이 없는 편입니다.^^; '놀이생태계'라는 말이 신선하네요. 좋은 성과가 있으시길...

Kir 2009-02-01 15:42   좋아요 0 | URL
어릴 적에는 서점있는 동네에 살았는데, 어느새 서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곳에 산 지 오래되었네요. 주로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고 있으니 불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가할 때 조용한 서점 구석에서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한데, 언젠가부터는 작정하고 날을 잡아서 대형서점으로 나가야만 가능한 일이 되었어요.

로쟈 2009-02-01 21:38   좋아요 0 | URL
색깔있는 전문서점들이 생기면 대형서점에 밀려나지 않을 것도 같은데요. 일단은 책들을 사야 말이죠.^^;
 

국내 필자가 쓴 지젝론으로는 권택영 교수의 <잉여쾌락의 시대>(문예출판사, 2003) 이후 두번째 책이 얼마전에 나왔다. 독일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김현강 박사의 <슬라보예 지젝>(이룸, 2009)이 그것인데, '누구나 철학' 시리즈로는 상당히 오랜만이다. 책에 대한 서평기사가 좀 뒤늦게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이미 몇 권의 소개서가 나와 있어서 국내 필자(아니 독일에 체류중이니'국외 필자'라고 해야 할까?)의 저작이라는 점 외에 어떤 장점이 있을까 싶지만, 번역서가 아니어서 좀더 편하게(혹은 정확하게) 전달될 수는 있을 듯싶다.   

한겨레(09. 01. 31) 지젝 “해체된 저항주체를 되살려라”

이룸출판사의 ‘누구나 철학총서’의 하나로 나온 김현강(독일 본대학 철학박사)씨의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 지젝에 관한 단출하지만 밀도 있는 안내서다. ‘레볼루션스’ 시리즈의 <로베스피에르> <트로츠키> <마오쩌둥> 서문의 배경을 이루는 지젝의 철학적 바탕과 정치적 지향이 일목요연하게 서술돼 있다.

이 책의 설명을 따르면, 지젝의 대결 상대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다. 지젝은 이들의 철학이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저항의 거점도 동시에 해체했다고 비판한다. 근대적 주체 이념이 인간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억압과 구속에 빠뜨렸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해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이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철학이 주체성을 해체한다면 이와 더불어 주체마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지젝의 문제의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해체주의자들의 작업을 모두 일소에 부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낸 성과는 성과대로 보존하면서 저항과 혁명의 주체를 되살리는 방안을 찾는 것이 지젝의 목표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젝이 주체를 되살리는 작업에 동원하는 주요 사상으로 꼽히는 것이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독일 관념론의 종합인 헤겔 철학,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이 책은 이 사상들을 차례로 답사함으로써 지젝 이론의 핵심으로 다가간다.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지젝이 재구축하고자 하는 주체의 특성이다. 지젝은 근대 철학이 상정했던 자기완결적이고 충만한 주체는 없다는 해체주의적 관점을 수용한다. 주체는 균열과 틈새와 단절을 내장한, 내적 불화를 겪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주체가 말하자면, 지젝 저작의 제목이기도 한 ‘까다로운 주체’다. 이 주체는 그런 불완전성 속에서도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주체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입론에 기대어 지젝은 세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행동의 주체를 불러들인다.

더 나아가 지젝은 이 주체를 통해 정치를 다시 사유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 이유를 지젝은 “경제의 탈정치화”에서 찾는다. 자본과 시장의 문제를 정치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는 이야기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경제적 차원의 갈등, 다시 말해 계급갈등을 정치의 문제로 복권시키고 이 계급갈등을 다른 갈등보다 우위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사회적 갈등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거쳐 그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만난다. 요약하자면, 주체를 복원하고 그 주체를 통해 계급갈등이라는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정치를 실천하는 길을 찾는 것이 지젝의 관심사인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1. 30.  

P.S. 저자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탓이겠지만 부록의 참고문헌이나 후주에서의 인용문헌에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먼저, 참고문헌에는 원서와 국역본이 병기돼 있는데, 실수인지 고의인지 일부 번역본이 누락됐다(사실 출간된 번역본이야 알라딘에서 '지젝'을 한번이라도 검색해보면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가 <실재의 윤리학>으로, 미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도서출판b, 2004)가 <완전히 까만 점: 현대 초기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로 표기됐고,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는 <누가 전체주의를 말했는가?>로 표기됐다.  

 

비록 원제와는 다른 제목이 붙여지긴 했지만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길, 2007)는 <인형과 난장이: 기독교의 변태적 핵심>으로만 표기됐고,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교양인, 2008)는 <혁명이 문전에 와 있다: 1917년 이후의 레닌 작품선>이라고 표기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1917년 이후'가 아니라 '1917년'의 레닌 문선이다. 그리고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는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s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를 옮긴 것인데, 부록에는 지젝 편저의 <The Fright of Real Tears: The Uses and Misuses of Lacaan in Film Theory>(2000)와 <The Fright of Real Tears, Kieslowski and the Future>(2001)라는 엉뚱한 책 이름이 두 권이나 들어가 있다. 저자나 편집자의 착오가 아닌가 싶다.  

후주에서는 헤겔과 칸트, 니체, 비트겐슈타인의 인용 쪽수를 독어 원전을 근거로 표시해주고 있는데, 국역본을 이용하거나 국역본의 쪽수도 병기해주는 것이 '입문서'의 에티켓 아닐까(게다가 저작명도 독어만을 써주고 있다). 이것도 원칙이 있는 건 아니어서 프로이트는 영역본과 독어본을 왔다갔다하고, 라캉의 경우엔 <에크리>는 불어본을 <세미나>는 영어본을 참조해야 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독역본을 참고해야 하고, 울리히 벡은 독어본으로 읽어야 한다. 아무래도 독자에 대한 고려나 감이 좀 부족하달 수밖에 없다.    

 

참고로, 현재 국내에 소개돼 있는 지젝 입문서로는 토니 마이어스, 사라 케이, 이안 파커 세 사람의 책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초심자가 읽을 수 있는 건 마이어스 정도가 아닐까 싶고(사라 케이의 책은 번역도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그것도 지젝의 책을 한두 권은 읽은 뒤에야 흥미를 갖고 따라갈 수 있지 않나 싶다. 그 마이어스의 책에는 친절한 문헌 소개가 붙어 있는데, <믿음의 대하여>에 대해서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라고 소개한다. 정확하게 말하는 그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고, 예전에 지적한 대로 국역본은 최악의 번역이어서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이런 것이 한국(어)의 핸디캡이다.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책을, 읽다가 집어던져야 하는 나라에서 그래도 공부를 해보겠다고...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hEAV 2009-01-3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는 되게 오랜만에 출간이 되었네요.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네, 끊어진 걸로 알고 있었어요...

비로그인 2009-01-3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 마이어스의 지젝... Slavoj Zizek (Routledge Critical Thinkers) Routledge; 1 edition (December 3, 2003) 이것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로쟈님에 의해 관심이 발동해서 지금 이 책을 주문했습니다. ^^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혹시 오역본으로 아신 건가요?...

비로그인 2009-01-31 00:56   좋아요 0 | URL
아뇨, 제가 지젝에 대해 잘 몰라서요. 좀 알아보려고요. 그런데 써놓으신 것을 보니 마이어스의 책이 적당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로쟈 2009-01-31 01:02   좋아요 0 | URL
제가 처음으로 읽은 건 <향락의 전이> 같은 책입니다. 사실 입문서들보다는 지젝 자신의 책이 더 재미있습니다. 사라 케이의 책은 고급 입문서이고, 이안 파커의 책은 '비판적 입문서'입니다. 마이어스의 책은 평이한 입문서이고요...

비로그인 2009-01-3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토니 마이어스의 지젝 국역본이 그렇게 엉터리이던가요? 이 지구 반대편에서까지 그 분노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요...^^;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믿음에 대하여>가 엉터리 번역이란 말씀인데요.^^;

비로그인 2009-01-3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마이어스가 'Slavoj Zizek'이라는 책에서 지젝의 On Belief (Thinking in Action)가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라고 한 거군요. 그리고 이 책 <믿음에 대하여 On Belief>의 국역본이 엉터리라는 거구요. 하하하...^^ 제가 잘못 읽었군요. 이 두 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것이 좋을까요? 물론 저자를 알려면 저자의 작품을 직접 읽어야겠지만... 그래도 다른 읽을 책이 산적해 있으니 '알짜'를 골라야겠네요...

비로그인 2009-01-3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락의 전이>를 언급하신 댓글을 읽고 다시 씁니다. 그럼 지젝 자신의 책 중 가장 재미있고 relevant 한 책을 한 권 권하신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영어 단어를 써서 미안합니다. 이 단어는 참 '곤란'한 단어라서...)

로쟈 2009-01-31 01:15   좋아요 0 | URL
그건 관심사에 따라 다를 듯싶은데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혁명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등. <향락의 전이>에는 여성에 대한 내용들이 나오죠.^^

비로그인 2009-01-3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 혹은 신학에 관한 거라면 어떨까요? 제가 근래 몇 년 동안 신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거든요... 하지만 먼저 지젝이라는 인물의 사상에 대해 개괄해서 알고 싶은데... 그러자면 마이어스라는 사람의 책이 그 역할을 할까요?

로쟈 2009-01-31 10:22   좋아요 0 | URL
신학 관련으론 <죽은 신을 위하여>가 좋을 듯싶은데요. 원제는 <꼭두각시와 난쟁이>입니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나오는...

열매 2009-01-31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관한 내용은 아닌데요, 혹 책을 살펴보려 이미지를 클릭할 때 화면이 책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닌, 따로 창을 열어 보여주는 방식은 선택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소개해주시는 기사를 읽으며 책을 자주 클릭해보는데, 화면이 바뀌니 여러 면으로 불편합니다. 개선할 방법이 없는지요? 저는 서재를 통 안다루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엔미블루 2009-01-31 07:34   좋아요 0 | URL
저는 따로 창이 나옵니다...인터넷옵션-->도구-->고급 에서 기본값 복원을 한번 해보시지요..

BusterKeaton 2009-01-3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에 대한 입문으로는 어떤 책이 좋을지, 추천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로쟈 2009-01-31 10:20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어려우시면 <하우투리드 라캉> 같은 책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지젝이 만난 레닌>도 좋겠습니다...

푸른바다 2009-01-31 11:59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번역본은 이미 희귀본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새책은 절판이고 헌책방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네요^^

나의왼발 2009-01-3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딱하게 보기 한글판은 번역이 괜찮은가요?

로쟈 2009-01-31 10:18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읽은지라... 제일 처음 나온 번역서라서 전문용어들이 요즘과는 좀 다릅니다. 전반부는 괜찮고 민주주의를 다룬 후반부는 오역이 좀 있었던 듯싶네요...

옥점 2009-01-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락의 전이>는 개역판도 오역으로 말이 많던데요..게다가 책값도 올렸고.
읽을 수 있는건가요?

로쟈 2009-01-31 12:09   좋아요 0 | URL
차라리 원서가 읽기 쉽습니다.^^;
 

'레볼루션' 시리즈에 대한 서평기사가 이번주에 뜨는 듯하다. 마이리스트로만 만들어두었는데,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연휴의 자투리 시간에 <마오쩌둥>에 붙인 지젝의 서문을 읽었는다. 마오의 혁명론뿐만 아니라 지젝의 혁명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글이었다(시간이 나면 정리해서 올려두고 싶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이 필요한 분들은 나머지 다섯 권이 마저 출간되기 전까지 1차분 다섯 권 가운데 최소한 한두 권 정도는 읽어보시길 바란다.  

경향신문(09. 01. 31) 혁명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들에게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며, 실천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고 발전시키라”라고 했고, 공포정치의 대명사 로베스피에르는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했고,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는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오로지 피와 강철뿐”이라고 했다.  


마오쩌둥, 로베스피에르, 호찌민, 예수, 트로츠키(사진 왼쪽부터)

<레볼루션 시리즈>는 예수부터 카스트로까지 시대적·사상적·정치적 맥락에서 다양하게 독해되는 혁명가들의 불꽃 같은 사유와 상상력을 담은 원전들을 선별해 엮은 책이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Verso)가 2007년부터 출간하고 있는 시리즈를 번역 출간했다. 이번에 마오쩌둥·로베스피에르·호찌민·예수·트로츠키 등 5권이 나왔고 올해 안에 카스트로·토머스 제퍼슨·시몬 볼리바르·토머스 페인·마르크스 등 5권이 나올 예정이다.  

시리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원전의 함의와 그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40~50쪽에 이르는 서문. 슬라보예 지젝, 테리 이글턴, 알랭 바디우, 타리크 알리 등 이 시대의 진보적 지성들이 혁명가들의 육성이 어떻게 지금까지 새로운 혁명에 대한 영감을 주고 있는지를 풀어냈다.  



특히 세계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은 마오쩌둥·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의 서문을 썼다. 지젝은 ‘무질서의 왕, 마오쩌둥’에서 “혁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정이라는 ‘가무한(假無限)’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면서 “이것은 문화대혁명에서 정점에 도달했다”고 밝힌다. ‘로베스피에르, 혹은 공포라는 신성한 폭력’에선 로베스피에르의 사상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순수에의 의지’를 짚어내면서 그의 사상이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 자유주의 아래 놓여 있는 동시에 그것의 한계 역시 배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트로츠키>에는 스탈린 테르미도르에 대한 반(反)관료적·자유주의적 비판자와 ‘영구혁명’을 주장하는 ‘방랑하는 유대인’ 등 이질적인 모습으로 각인된 트로츠키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가 실렸다.  

지젝은 서문에서 이 책이 1930년대 스탈린주의를 예견하게 하는 많은 메시지들이 녹아 있는 “징후적 텍스트”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스탈린에게 레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외설적 영혼’ ‘권력의 도구가 되어 인공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영원히 산다면 트로츠키에게 레닌은 “같은 이데아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살아 있다”고 말한다.  



혁명가의 반열에 예수가 올라 있는 것도 이채롭다.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서문에서 ‘예수는 혁명가였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예수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더 우월하기도 하고 열등하기도 한 혁명가”라고 밝힌다. 자신이 맞섰던 권력구조의 전복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레닌이나 트로츠키에게 뒤지지만 그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완벽한 존재양상에 의해 기존 권력구조가 일소되리라 기대했다는 점에선 우월하다는 설명이다.

시리즈 발간의 의미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발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혁명에 대한 올바른 독법은 거대담론의 극적 도식을 해체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의 건너편을 사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그것은 오늘날 목도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김진우기자) 

09. 01. 30.   

P.S. 한겨레의 서평기사는 지젝의 로베스피에르론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횃불을 든 5인의 혁명가 그래픽이 볼 만하다!..  

 » 마오쩌둥, 호치민,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예수, 레온 트로츠키(왼쪽부터). 슬라보예 지젝은 이 혁명가들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반복할 필요가 있다며 혁명을 상상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한다.  

한겨레(09. 01. 31) 해방 위한 창조적 혁명을 꿈꿔라

영국의 대표적인 진보 출판사 ‘버소’에서 2007년 펴낸 ‘레볼루션스’ 시리즈 가운데 다섯 종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 <마오쩌둥-모순론·실천론> <로베스피에르-덕치와 공포정치> <호치민-식민주의를 타도하라> <예수-가스펠>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는 이 시리즈가 제목 그대로 ‘혁명가들의 말과 글’을 텍스트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레시안북은 이 책들에 이어 올해 안에 나머지 다섯 종, <피델 카스트로> <토머스 제퍼슨> <시몬 볼리바르> <토머스 페인> <마르크스>를 펴낼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원텍스트 앞에 저명한 지식인들의 긴 서문이 붙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늘날 이 오래된 글들이 왜 다시 읽혀야 하는지 소개하는 글이다. 이 글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세계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이 쓴 서문들이다. 지젝은 지난 200년의 근대 혁명의 인격적 대리자라 할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레온 트로츠키, 마오쩌둥 세 사람을 재해석함으로써 이 시리즈의 근본 의도를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다.  

시리즈가 발간된 2007년도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결코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처럼 세계를 지배하고, 반자본주의적 혁명 열정은 주눅이 들어 ‘제3의 길’ 따위 패배적 타협책에 안주하던 때다. 그런 상황은 본질적으로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전망 상실의 시대에 지젝은 혁명을 재사유하자고 이야기한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지젝이 혁명을 재사유하는 방식에 있다. 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마오쩌둥의 텍스트들이 보여주는 대로 지젝은 이들의 주장과 실천에서 ‘독재’와 ‘공포’를 사유의 중심으로 삼는다. 오랫동안 진보파들이 외면하고 회피했던 문제를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지젝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는 혁명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지젝의 문제의식은 앞서 그가 편집하고 긴 해제를 단 레닌의 텍스트(<지젝이 만난 레닌>)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텍스트에서 지젝은 레닌을 통해 러시아혁명을 다시 사유하자며 이렇게 말한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을 되풀이하는 것은 ‘레닌이 죽었다’는 것, 그의 특수한 해법이 실패했다는 것, 그러나 그 안에 구해낼 가치가 있는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마오쩌둥은 레닌의 기원이고 변주이며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 혁명가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은 이들의 실패한 해법 안에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인하고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는 일이 된다.

지젝이 해석하는 로베스피에르는 근대 정치혁명의 출발이자 원형이다. 근대의 거의 모든 급진적 혁명은 로베스피에르가 이끌었던 자코뱅파의 혁명 원리를 이어받았다.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주의 공포정치·독재정치의 기원적 모델을 제공한 사람이다. 자코뱅주의야말로 근대 혁명의 핵심 인자였던 셈이다. 여기서 지젝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1793년 없는 1789년’, 다시 말해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없는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데 대해,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를 옹호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 당통을 두고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는데, 지젝이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를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고 강직한 정의의 다른 말입니다.” 로베스피에르 연설의 특징은 ‘상반된 것들의 역설적 일체화’에 있다. “인류의 압제자를 응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비로운 일이요, 그들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야만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혁명의 본질에 들어 있는 이 ‘공포’(테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다. 지젝은 공포가 정치적 해방에 필수요소로 깃들어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코뱅파가 한없이 과격해지고 극단화한 데는 어떤 무능력이 깔려 있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사적 소유의 철폐와 같은 경제적 차원의 평등을 실현할 수 없었던 이 부르주아 혁명가들이 그 문제를 미봉하고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해보려 몸부림치다 나타난 결과가 대공포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겨냥해 ‘선한 테러리스트’, ‘덕을 집행하는 악마’라고 규정한다. 그런 식의 규정은 트로츠키와 마오쩌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이런 규정은 냉소적이기만 한 것일 뿐 자유와 해방에 대한 신념은 결여한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철학자 헤겔이 <역사철학 강의>에서 프랑스혁명을 두고 했던 발언이야말로 진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프랑스혁명은) 영광스러운 정신적 여명이다. 사고하는 존재가 모두 이 시대의 환희를 나누었다. 고귀한 감정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신적 열정이 전 세계를 흥분시켰다. 마치 신과 세상이 처음으로 화해한 듯했다.” 헤겔의 이런 평가는 러시아 10월혁명과 이후 중국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는 근대의 주요한 급진 혁명들이 공포와 독재라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을 단순히 부정해야 할 대상이 아닌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다. 그 문제에 담긴 해방적·창조적 내용을 보존하되 거기에 스며든 독성은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다소 추상적인 얼버무림으로 들리지만, 지젝의 강조점은 혁명을 상상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해서는 해방은 오지 않는다는 지점에 놓여 있다. 두려움이야말로 상상력의 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고명섭 기자)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람혼 2009-01-30 18:14   좋아요 0 | URL
저도 재작년에 <마오쩌둥>과 <트로츠키>에 붙인 지젝의 서문들을 읽고 이리저리 엮어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차, 로쟈님이 써주실 글을 학수고대하고 있어야겠습니다.^^

로쟈 2009-01-30 18:51   좋아요 0 | URL
요즘 같은 '생존 스케줄'로는 언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친 척하지 않는 한...^^;

비로그인 2009-01-30 19:37   좋아요 0 | URL
마오쩌둥에 대한 지젝의 서문 요약, 저도 읽어보고 싶군요. 그 살인적인 스케줄에 부담을 드려서 미안합니다만... ^^ "거대담론의 극적 도식을 해체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접속하는 일... 그것은 현실의 건너편을 사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영복 교수님의 이 말씀 좋군요. '거대담론'에서는 희망을 느끼지 못하지만 '인간의 진정성'이라는 말과, '현실의 건너편'이라는 말에서 희망의 가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전자에서도 그 빛이 잘 안보이는 듯하지만요...

로쟈 2009-01-31 14:48   좋아요 0 | URL
준비하는 자들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겐 빛이 될 수도 있겠지요.^^

2009-01-30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31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필요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과 자료를 조금 들여다보고 있는데, 일단 느낀 점 두 가지는 이번에 나온 라울 힐베르크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9)가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것과 노만 핀켈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한겨레신문사, 2004)이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는 것(벌써 절판되다니!). 이번에 알게 된 것인데, 홀로코스트학에도 파벌이 있고 두 권 다 시온주의자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는 두 사람의 책이 가장 계발적이고 또한 자극적이지 않나 싶다(힐베르크의 책은 규모나 통찰면에서 모두 경탄스럽다. 참고로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 산업> 등의 다른 책에서는 '힐버그'라고 표기돼 있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홀로코스트 산업>을 좀 읽다가 홀로코스트 학자 중의 한 사람인 톰 세게브를 검색해보았는데, 아래 기사가 뜬다. 마침 최갑수 교수의 논문도 복사해서 읽고 있던 터여서 요긴하게 읽었다(최교수는 핀켈슈타인의 주장도 또다른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또 읽은 김에 스크랩도 해놓는다.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노빅과 세게브의 책도 마저 소개되면 좋을 듯싶다. 하기야 홀로코스트 관련서는 부지기수이며 문제작도 드물진 않다. 참고로, 역사학에 한정하자면, 홀로코스트와 기억의 문제를 다룬 책으로 지성사가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홀로코스트 재현하기: 역사, 이론, 트라우마>(1994)도 소개됨 직하다. 책의 일부는 <치유의 역사학으로: 라카프라의 정신분석학적 역사학>(푸른역사, 2008)에 번역돼 있기도 하다.    

한겨레(07. 11. 08) '홀로코스트의 기억’ 누가 비틀고 있나

“모든 집단기억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일반적으로 쓰일 때는 대량학살을 가리키지만 고유명사일 경우는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을 일컫는다. 집시나 르완다의 투치족도 집단학살의 피해자이지만 홀로코스트 기억 만큼 현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누리지 못한다. 홀로코스트는 1970년대 이후 역사학에서 기억담론의 득세를 촉매하는 구실도 했다. 레오폴트 랑케와 같은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는 기억을 가변적이라는 이유로 불신했으나 홀로코스트가 공적 담론으로 부상한 이후 집단기억의 호출이 역사학의 큰 줄기가 된 것이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는 김진균기념사업회 연구총서 2권으로 나온 <전쟁국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책>(문화과학사, 홍성태 엮음)에 실은 글 ‘홀로코스트와 기억의 정치적 이용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에서 홀로코스트 담론의 한계와 문제점을 짚었다. 그는 홀로코스트 담론을 비판한 세 명의 유대인 학자의 글을 검토했다. 피터 노빅(미국) 톰 세게브(이스라엘) 노먼 핀켈슈타인(미국)이 그들이다.  

“세 사람은 자기성찰 능력을 가진 괜찮은 ‘유대인 학자’들이지만 그들도 유럽중심주의에 갇혀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2000년 홀로코스트 기억이 유대인들의 돈벌이에 이용되고 있음을 해부하고 폭로한 <홀로코스트 산업>을 펴낸 핀켈슈타인의 비판이 가장 급진적이다. 그는 홀로코스트는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 ‘유대인에 대한 비이성적인 이교도의 끊임없는 증오의 절정’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는 ‘윤리적으로 진실성 없는’ ‘지적 테러리즘’이며 유대인들에게 전면적인 면죄부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최 교수는 밝혔다. 핀켈슈타인은 홀로코스트 기억은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적 구출물”이라면서 기억의 담론 자체도 겨냥했다. “비유대인 가운데 홀로코스트 기억 비판을 펴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유대계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급진 비판론자조차도 “시오니즘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최 교수는 “핀켈슈타인이 그의 책 결론 부분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미국 주류 엘리트들의 판단 여하에 따라 희생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나타냈다”면서 “이런 위기의식이야말로 홀로코스트 기억의 부당한 정치적 이용을 정당화하는 시온주의 방책”이라고 밝혔다. 이런 인식은 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자 사이의 진정한 화해와 공존을 이끌어내는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이유는 뭘까? 최 교수는 홀로코스트를 그 일부로 하는 더 큰 담론의 구조 때문이라고 했다. 즉 “홀로코스트 기억과 담론이 유럽중심주의라는 더 큰 담론적 질서의 지지를 받아 그것을 작은 규모로 재생산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유럽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담론구조의 일부이자 보조장치라는 해석이다.   

최 교수는 그 반증으로 홀로코스트 담론에서 발견되는 세가지 분할과 배척을 지적했다. △문명과 야만 내지 비문명의 분할 △문명에 대한 문명의 대량 학살과 야만(비문명)에 대한 문명의 대량학살 사이의 분할과 후자의 배척 △유대인(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할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이말로 문명인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유일무이한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야만에 대한 문명의 학살은 당연히 비교 대상에서 제외된다. 최 교수는 “홀로코스트 담론에는 이스라엘과 유대인 권력이 들어가 다른 기억을 압도하고 있다”면서 “이-팔 분쟁이라는 현실과 담론이 변증법적으로 오고 가야 (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강성만 기자) 

09. 01. 28. 

 

P.S. 1961년에 초판이 나오고, 2003년에 3판이 나온 힐베르크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는 현재까지 9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한국어판은 열번째 외국어 판본이라고 한다. 저자는 새로운 번역판이 나올 때마다 자료들을 수정하거나 보충했고, 한국어판도 예외가 아니어서 334군데의 본문과 각주가 저자의 주문에 따라 수정되거나 추가되었다. 거기에 55개 문단은 전체가 교체되거나 추가되었고. 힐베르크가 2007년 8월에 세상을 떠난 탓에 역자에 따르면, "한국어판은, 행인지 불행인지 최종판이다." 오늘 힐베르크의 회고록 <기억의 정치>를 주문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9-01-2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사회서적들은 나오면 언제 절판될지를 알 수 없어서, 아 이건 꼭 소장하고 싶다, 그러면 지금 읽지 않아도 사야... 위에 말씀하신 <홀로코스트 산업>도 불과 이제 4년밖에(?) 안됐는데... -_-

로쟈 2009-01-28 22:15   좋아요 0 | URL
어떨 땐 그게 출판사들의 노림수 같기도 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1-3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번역판이 나올 때마다 내용의 일부를 수정 추가했다니 저자의 성실함이 돋보이는군요.모름지기 학자는 그래야지요.

로쟈 2009-01-30 17:35   좋아요 0 | URL
기록보관소 작업을 그보다 더 많이 한 연구자가 없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