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가 출간된 김에, 바우만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가끔 우리시대의 현자라는 생각이 든다). 국내에 몇 권 소개돼 있지만, 아직 그가 (포스트)모더니티 비판에서 갖는 지명도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 아닌가 싶다. '유동성' 시리즈 외에도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 <바우만과의 대화>, 최신작인 <윤리가 소비사회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등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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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빈곤-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천지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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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Living on Borrowed Time : Conversations with Citlali Rovirosa-Madrazo (Paperback)
Bauman, Zygmunt / Polity Pr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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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ism the Active Utopia (Routledge Revivals) (Hardcover)
Bauman, Zygmunt / Routledge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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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2-08 00:48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로 중남미 쪽에서는 바우만의 글을 읽고 운동권이 된 청년들이 무척이나 많다고 그러드라고요.

로쟈 2009-02-08 10:49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스페인어본도 눈에 띄는 게 까닭이 있군요...

게슴츠레 2009-02-08 11:04   좋아요 0 | URL
<윤리가 소비사회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는 제목만 봐도 확 와닿는군요. 대학가에서 운동을 해야겠는데 뭔가 색다른 게 필요하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저를 포함해서요). 아예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축은 "이런 세상이 '옳으냐'"는 도덕주의적 변론으로 가고, 느끼는 축은 재밌고 신나고 명랑한 문화적 저항같은 것들에 매력을 느끼더군요. 전자의 메세지에 매력을 느끼는 이는 지극히 소수고, 후자는 전자와 차별화를 강조하면서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느끼는 때에 자본의 추상적 보편성을 사유의 마지노선으로 삼는 고진이나 바디우나 지젝이나 바우만야말로 진정으로 동시성을 가진 저자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바우만의 경우,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보니 딱히 독자적인 개념이나 체계를 만들지 않고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기 쉽게 비판의 지점들을 집어주더군요.

로쟈 2009-02-08 22:22   좋아요 0 | URL
<유동하는 공포>도 어려운 책이 아니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네요. 국내에선 생각만큼 안 읽히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2009-02-09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9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교 독서평설 2월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괴테문학에 대한 '갑론을박'을 다루려고 했으나 셰익스피어의 경우와는 달리 국내에 소위 '괴테 비판서'가 소개돼 있지 않아서(독일에서도 드물 듯싶긴 하다) <파우스트>에 대한, 보다 구체적으로는 주인공 파우스트의 형상에 대한 논란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실은 괴테의 고전주의 드라마 <이피게니에>와 같이 다루려고 관련자료를 잔뜩 읽었으나 <파우스트> 얘기만으로 주어진 지면이 다 차버렸다(나중에 따로 다루어야 할 듯싶다). 고등학생을 독자로 고려한 글이어서 작품의 줄거리도 자세히 다룬 탓이다.   

고교 독서평설(09년 2월호) 파우스트의 구원은 정당한가? 

괴테 문학의 대명사 『파우스트』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란 구절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파우스트』는 괴테(1749~1832)가 전 생애를 걸고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자 독일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16세기경에 살았던 기인(奇人)이자 학자인 파우스트에 대한 민간의 전설에 흥미를 느낀 괴테가 처음 집필을 시작한 해는 1773년이다. 그리고 1만 2,000행이 넘는 이 대작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1831년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8개월 전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파우스트』가 괴테 문학의 대명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우스트의 방황과 구원 
‘비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방대한 분량의 『파우스트』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흔히 제1부를 ‘학자 비극’과 ‘그레트헨 비극’이라 부르고, 제2부는 ‘헬레나 비극’과 ‘지배자 비극’이라 부른다. '학자 비극’은 당대 최고의 학자 파우스트가 자신의 늙어 버린 육신과 학문 수준에 절망하던 차에 메피스토펠레스(악마)의 제안에 따라 계약을 맺는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약 조건은 현세에서 메피스토를 종으로 삼는 대신, 저세상에 가서는 그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는 악마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죽은 뒤에는 영혼을 내주겠다는 것이 계약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파우스트의 절망은 무엇이었나? 자신의 서재에서 늙은 파우스트는 이렇게 한탄한다.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똑똑해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그는 평생에 걸친 공부를 통해, 가장 내밀한 곳에서 이 세계를 총괄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지만 그러한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의 서재가 ‘감옥’에 불과했던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런 의문은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부족해도 참아라! 부족해도 참아라! 이것이 영원한 노래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앎을 위해서 젊음을 희생하고 욕망을 억제했지만 이젠 더 이상 참지 못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을 빌리면, 그는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이고 푸른 건 인생의 황금 나무”라는 깨달음에 뒤늦게 조바심을 낸다. 이제껏 세상은 그에게 인식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는 세상을 경험해 보려 한다. 그런 파우스트가 모든 소망을 들어주겠다는 메피스토의 제안에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렇게 메피스토가 마녀의 물약으로 파우스트에게 젊음을 선사하고, 다시 청춘을 되찾은 파우스트가 순박한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그레트헨 비극’이다. 여기서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의 유혹에 빠져 어머니와 오빠를 죽게 만들고,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마저 물에 빠뜨려 죽인 죄로 참수형을 받게 된다. 하지만 감옥으로 찾아와 도망을 권유하는 파우스트의 제의를 거부하며 자신의 죄를 참회한 덕분에 영혼만은 구원을 얻는다.         

2부의 무대는 시공간적으로 더욱 확장된다. ‘헬레나 비극’의 배경은 중세의 궁정으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도움을 얻어서 헬레나를 지하 세계에서 불러내 결혼하고 아들도 낳는다. 헬레나를 그리스 어로 바꾸면 ‘헬레네’인데, 그녀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절세의 미녀다. 헬레나와 결혼한 파우스트는 지극한 행복감을 맛보는 듯싶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아들 오이포리온이 날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모한 시도를 하다가 죽고 만다. 헬레나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파우스트를 떠나고, 다시 파우스트 혼자 남게 되는 것이 ‘헬레나 비극’의 줄거리다. 고대 그리스의 여인 헬레나와 결혼한다는 설정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대목은 파우스트의 환상을 무대로 옮겨 놓고 있다.  

마지막 ‘지배자 비극’에서 파우스트는 황제를 도와 전쟁에서 공(功)을 세운 덕분에 거대한 땅을 하사받고 간척 사업을 벌인다. 지금까지의 온갖 영화(榮華)에도 만족할 줄 몰랐던 파우스트는 이 지상의 ‘지배권’을 획득하는 일을 마지막 과업으로 여기고, 바다를 막아 거대한 간척지를 만든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결실이 없는 파도는 그 비생산성을 퍼뜨리려 사방팔방으로 접근해 온다. …(중략)… 연이은 파도는 힘에 넘쳐 그곳을 지배하지만, 물러간 뒤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 그것이 날 불안케 하고 절망으로 이끌었도다! 이 참을성 없는 원소의 맹목적인 힘이라니! 그리하여 내 정신은 감히 비약을 시도하려는 것. 여기서 나는 싸우고 싶다. 이것을 이겨 내고 싶다.”  

파우스트가 이겨 내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반복을 통해서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버리는 파도, 곧 자연의 지배력이다. 그는 이 자연과의 싸움을 위해서 거대한 제방 공사를 기획하여 백성의 노동력을 쥐어짠다. 파우스트가 꿈꾸는 것은 그렇게 해서 얻으려고 하는 ‘자유로운 땅’이고 ‘천국’이다. 과연 그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인가? 

“밖에선 성난 파도가 제방을 때린다 해도, 여기 안쪽은 천국 같은 땅이 될 거야. 파도가 세차게 밀려와 제방을 갉아먹는다 해도 협동하는 마음이 급히 구멍을 막아 버릴 게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중략)…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파우스트는 지상에서 최고의 순간을 맛본다면 자신의 삶을 가져가도 좋다고 메피스토와 내기를 걸었고, 이 대목에서 마침내 그러한 순간에 도달한다. 이로써 그는 죽음을 맞이하고, 메피스토는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지옥으로 수습해 가려 한다. 하지만 천사들이 내려와 “영원히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라고 노래하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상으로 데려간다. 이것이 ‘지배자 비극’의 결말이자 『파우스트』의 대단원이다.  

파우스트는 구원받을 만한가
장엄한 합창과 함께 마무리되는 이 마지막 장면은 분명 감동적이지만 『파우스트』를 구성하는 네 가지 ‘비극’을 따라온 독자라면 한 가지 의문을 떨치기 힘들다. ‘파우스트의 구원은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지배자 비극’이다. 이 대목에서 파우스트는 자신이 기획한 과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강압적인 통치자 또는 권력자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는 언덕 위 오두막집이 간척 사업에 방해가 되자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하며 메피스토에게 ‘처리’를 부탁한다. 그러자 메피스토가 보낸 부하들은 집주인인 노부부를 강제로 끌어내려다가 오두막을 통째로 불태우고 만다. 노부부가 그 화염에 희생된 건 물론이다. 비록 파우스트는 이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눈이 멀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의 욕망은 이후에 더욱 거세게 불타오르지 않았는가!    

“밤이 점점 깊어 가는 것 같구나. 하지만 마음속엔 밝은 빛이 빛난다. 내가 생각했던 것을 서둘러 완성해야겠다. 주인의 말보다 위력이 있는 것도 없으리라. 여봐라, 하인들아! 모조리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내가 대담히 계획했던 일, 멋지게 이루어 다오. 연장을 잡아라. 삽과 괭이를 놀려라! …(중략)… 이 위대한 일 완성하는 데는 수천의 손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족하리라.” 

이러한 독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파우스트는 자신을 ‘주인’이자 수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지에 속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하인’이자 ‘지체’가 될 것이다. 이것을 파우스트적 ‘영도자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록 그의 의도가 버려진 땅을 일구어 모든 사람을 위한 낙원을 만들려는 것이라지만, 그의 방법은 결코 윤리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았다. 파우스트적 지배자 형상이 20세기 나치 독일에서는 ‘영웅적 지도자’ 상의 모델이 되고, 동독에서는 민중 동원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과연 역사적 우연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지배자 비극’에 등장하는 개발 지상주의자 파우스트는 근대의 기획자이자 근대성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이때의 근대는 무한한 소유욕과 지배욕을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근대 자본주의’다. 이미 ‘학자 비극’에서 파우스트는 ‘그의 정신으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을 파악하고, 자신의 자아를 온 인류의 자아로까지 확대시키는 것이 소망’이라 토로하였다. 그렇듯 무한히 팽창하려는 파우스트적 욕망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구현한 것, 그것이 바로 ‘근대 제국주의’ 아니던가.  

파우스트의 명령을 받고 세계를 일주하며 무역 거래와 약탈을 일삼아 부(富)를 챙겨 돌아온 메피스토의 이런 독백은 괴테가 통찰한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핵심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단 두 척의 배로 떠났던 우리가 스무 척이 되어 항구로 돌아왔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는 싣고 온 짐을 보면 알 거야. 자유로운 바다에선 정신도 자유스러워지는 법, 사리 분별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중략)… 전쟁과 무역과 해적질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삼위일체인 것을.”   

그런 ‘수완가’ 메피스토를 감독관으로 하여 파우스트가 벌이는 최후의 사업이 대규모 제방 공사다. 하지만 그의 무절제한 욕망 추구는 곧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공사 중인 수로가 얼마나 길어졌는지 매일같이 보고하라고 명령하는 파우스트의 등 뒤에서, 메피스토가 인부들은 그 ‘수로(Graben)’를 ‘무덤(Grab)’이라 부른다고 중얼거리는 데서도 암시된다. ‘헬레나 비극’에서 파우스트가 꿈꾸었던 행복과 마찬가지로 ‘지배자 비극’에서 그가 꿈꾸는 지상 낙원 또한 한갓 주관적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 파우스트는 과연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과연 파우스트의 영혼은 충분히 구원받을 만한가?   

괴테 자신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그는 『파우스트』를 완성하기 직전인 1832년 6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파우스트의 구원을 위한 열쇠는 “영(靈)들의 세계에서 고귀한 한 사람이 악으로부터 구원되었도다.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그에겐 천상으로부터 사랑의 은총이 내려졌으니, 축복받은 무리가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게 되리라.”라는 천사들의 합창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 이는 작품의 서두에 놓인 〈천상의 서곡〉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라고 한 하느님의 말과 호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방황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파괴하였더라도 여전히 그 방황은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혹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는 없을까?  

파우스트의 개발주의 VS. 메피스토의 허무주의
파우스트는 “내가 세상에 남겨 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자연의 허무에 맞서서 끝까지 어떤 ‘흔적’을 남겨 놓으려 한 것이 파우스트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파우스트의 죽음을 놓고 메피스토는 “어떤 쾌락과 행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무쌍한 형상들만 줄곧 찾아 헤매더니, 최후의 하찮고 허망한 순간을 이 가련한 자는 붙잡으려 하는구나.”라고 평한다. 메피스토가 보기에 모든 창조는 결국엔 무(無)로 휩쓸려 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영원한 허무를 더 좋아하며, 유위(有爲)보다는 무위(無爲)를 예찬한다.  

 

괴테의 시대 이후 두 세기가 흘렀다. 지금은 과연 파우스트의 개발주의와 메피스토의 허무주의 중 어떤 태도에 더 점수를 줄 수 있을까. 미국의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이 보여 주는 ‘인간 없는 세상’의 연대기가 참조가 될 수 있겠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진 바로 다음 날부터 자연이 ‘집 청소’를 하기 시작해서 곰팡이는 벽을 갉아 먹으며, 빗물은 못을 녹슬게 하고 나무를 썩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살던 집들은 50년이면 대부분 허물어지고, 습지와 강을 메워 만든 도시들은 물에 잠길 것이다. 300년 뒤면 세계 곳곳의 댐들이 무너지고, 1,000년 뒤엔 인간이 남긴 인공 구조물 가운데 도버 해협의 해저 터널 정도만 남아 있게 된다. 물론 과다하게 배출된 이산화탄소처럼 인간이 남긴 부정적 유산들이 모두 제거·정화되는 데는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지워질 것이다. 파우스트의 바람과는 달리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09.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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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2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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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내가 입수한 책은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이후, 2009), <뉴레프트 리뷰>(길, 2009), 베블런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책세상, 2009),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 등이다. 이순예의 <예술, 서구를 만들다>(인물과사상사, 2009)는 리뷰를 읽고서 구입하기로 했다. 유종호 교수의 '회상 에세이' <그 겨울 그리고 가을: 나의 1951년>(현대문학사, 2009)은 나중에 <나의 해방전후>(민음사, 2004)와 같이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기로 했다. 이런 것이 신간에 대한 이 주의 '정산'이다.   

아쉬운 것은 언론 리뷰에서 내가 챙기지 못한 새로운 책을 발견하지 못한 점. 오히려 로널드 드워킨의 <생명의 지배영역>(이대출판부, 2008)과 하버마스의 <진리와 정당화>(나남, 2008)는 '학술서'로 분류되는 탓인지 마땅한 리뷰가 눈에 띄지 않는다(<진리와 정당화>는 <인식과 관심>의 속편이라는데, <인식과 관심>은 언제 재번역되는 것일까?). 사실 이전 페이퍼의 소재인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에 대한 리뷰도 없었다. '권력으로서의 자본'이란 그의 이론 때문에 생각난 책은 지난달에 나온 <달러>(AK, 2009).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이 부제이고, 원제는 'The Web of Debt'(빚의 거미줄). 베르나르 리에테르(전 유럽중앙은행장)에 따르면 "이 책을 읽으면 우리 금융 시장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왜 그런 정보가 필요한가? 이런 걸 학교에서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일보(09. 01. 24) '사악한 화폐' 달러, 왜 금융 몰락의 주범 됐나 

아시아가 1997년 금융위기로 초토화되자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렸던 이 지역의 신흥공업국들은 하루아침에 국제적인 말썽쟁이로 전락했다. 위기의 책임은 전적으로 말썽쟁이가 져야 했다. 부패한 경제시스템, 무능한 정치와 관료, 무모한 기업경영이 몰매를 맞았다. 돌에 걸려 넘어져 코가 깨진 어린아이에게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냐며 회초리로 때리고 굶기는 식이었다.

하지만 아시아에 이어 러시아가 무너지고, 마침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말썽쟁이 아시아를 훈계했던 미국까지 경제위기에 몰리자, 끝없이 되풀이되는 국제 금융위기의 원인을 보는 시각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을 부제로 단 <달러>(원제 'The Web of Debt')는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와 영ㆍ미식 금융시스템을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달러가 왜 문제인가. 변호사이자 법학박사로 국제금융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11권의 책을 낸 저자 엘렌 H 브라운은 달러에 대한 막연한 통념부터 뒤집는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경제의 제1 변수인 달러를 발행하는 미 연방준비은행(FRB)은 미국 정부기관이 아니라 민간법인이다. 그리고 주주로서 실질적으로 FRB를 좌우하는 세력은 유럽 최대의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일가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JP모건과 록펠러 가문과 연관된 극소수의 숨어있는 자본가들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FRB가 멋대로 달러를 찍어내지는 않는다. 달러가 발행되려면 먼저 미국 정부, 즉 재무부가 정부 지불증권인 국채를 찍어 FRB에 맡기고, FRB는 그만큼의 지폐를 발행해 국채를 담보로 정부에 빌려주는 식이다. 하지만 FRB는 이 과정에서 확보한 국채를 독자적으로 시장에 풀거나 회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달러 통화량의 목줄을 쥐게 되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직접 달러를 찍어내도 될 것을 굳이 FRB라는 민간법인에게 국채 이자를 주면서 돈을 빌려 쓰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정착하게 된 것일까.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달러의 지배권을 궁극적으로 숨어있는 극소수의 자본가들에게 넘겨주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저자는 미국의 독립 이래 달러 발행권을 정부로부터 찬탈해 미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영ㆍ미 자본가들의 집요한 음모를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맞서 싸웠던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류 잭슨, 존 F 케네디 등 역대 미 대통령의 좌절과 암살도 경제음모론적인 시각으로 조명한다.

극소수의 세계 자본가들의 이해에 따라 달러가 움직이고 있는 현실 외에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금융시스템의 또 다른 맹점은 은행의 '부분준비금 제도'이다. 오늘날 대출에 대한 은행의 지불준비금은 대출 원금의 10% 정도. 이 지불준비금으로 은행은 최초의 예금 100달러로 1,000달러의 신용화폐를 팽창시킬 수 있게 된다. 저자는 현재의 금융시스템이 이같은 '뻥튀기 마술'과 이자 메커니즘을 통해 세계의 자산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집중시키고 있다고 고발한다.

책은 모두 6부로 구성됐다. 특히 3부에서는 달러와 영ㆍ미식 금융시스템의 계획된 공격이라는 시각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조명하고 있다. 6부에서는 금융의 주권을 민간으로부터 국가로 복원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을 모색한다. 친절한 역주나 보다 적절한 번역용어 선택 등 책에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내용의 흥미를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장인철기자) 

09. 02. 07.   

P.S. <달러>의 원서에는  '우리의 금융 시스템에 관한 충격적인 진실(The Shocking Truth About Our Money System)'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그런 부제가 상기시켜주는 책은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 그리고 아주 유익하지만 잊혀진 책으로 한스  크리스토프 빈스방어의 <부의 연금술>(플래닛미디어, 2006)가 있다. <부의 연금술>은 '괴테 경제를 말하다'가 부제인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가 오늘날 중요한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가 이 작품에서 경제를 일종의 연금술 과정, 즉 인조금을 만드는 일로 그리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의 경제 사상이 이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괴테가 그리고 있는 부의 연금술은 주로 <파우스트> 제2부 초반부에 등장하며 가장 덜 주목받는 대목이다(하지만 '괴테와 근대'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하지만, 빈스방어는 "경제의 연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대 경제의 중요한 차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이 오늘날 괴테의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P.S.2. 참고로, <달러>의 홈피(http://www.webofdebt.com/)에서 관련정보와 일부 원문을 읽어볼 수 있다. 저자가 동영상을 통해 직접 설명하는 책의 요지는 http://www.youtube.com/watch?v=Bn6mlgrG51I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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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9-02-07 22:28   좋아요 0 | URL
채무자에다 노예지요.^^;

2009-02-07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8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자누스 2009-03-15 15:04   좋아요 0 | URL
중앙은행이 사기업인 나라는 미국 뿐인가요?

로쟈 2009-03-15 15:49   좋아요 0 | URL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드물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번주 한겨레21의 '노 땡큐!' 칼럼을 옮겨온다. '푸닥거리 경제'란 제목으로 주류 경제학의 무능력과 함께 미네르바 체포 사건을 도마에 올려놓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 이론(경제 운영 기성 권력)이나 그에 근거한 예측이 '푸닥거리' 수준이라면 경제 전망과 더불어 경제학의 미래도 궁금해진다. 이건 또 한편 '푸닥거리 경제학의 미스터리'가 아닐는지...   

한겨레21(09. 02. 06) 푸닥거리 경제

나는 지금 박사 논문 지도교수가 사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교수가 예전에 속해있던 금융조사 분석기관에서 일하는 이들도 함께했다. 단연코 뜨거운 화제 1위는 한국 정부의 ‘미네르바 체포 소식’이었다. 역시 선수들이었는지라 사건을 보는 시각에 남다른 것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야말로 현재 경제위기를 통제할 능력과 자신감을 상실한 전세계 지배 세력의 불안감의 극적 표출이라는 것이 그날 이야기의 대충의 결론이었다.   

기우제 올리는 신관의 불안감  

2차 대전 이후의 현대 자본주의 정치체제는 사실상 ‘경제 시스템의 조종 능력’에 그 정당성의 근거를 두어왔다.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의 작동을 성공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방향만 다를 뿐이지 케인스주의자들이나 하이에크주의자들이나 똑같다. 자신들이야말로 경제의 작동을 ‘정밀하게, 과학적으로, 수량적으로’ 관찰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의 목소리는 오히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 쪽이 더 시끄러웠다. 따라서, 하늘의 강우량이 그해 농사의 풍흉에 절대적이던 아득한 옛날, 신과 통해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신관들이 그러했듯이, 이들도 지난 몇십 년간 일국 및 지구 차원의 경제 작동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지금 벌어진 일국 및 지구 차원의 경제위기로 이들의 능력이라는 게 순식간에 거덜이 나고 만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홍수든 가뭄이든 책임은 무정한 하늘에 있지 열심히 기우제 올린 제사장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경제위기는 바로 이 신자유주의 경제학, 혹자가 붙인 이름으로 ‘푸닥거리 경제학’(voodoo economics)의 결과라는 혐의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중이다. 지난 십 몇 년간 벌어진 이른바 ‘금융 혁명’은 누구의 눈에도 각종 금융 사기와 대규모 금융 거품으로 이어질 것이 명백했지만, 그러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이들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너희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고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지금은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게 된 ‘신경제’(new economy)니 ‘검은 물질’(dark matter)이니 하는 허망한 소리까지 떠들어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전 지구의 경제가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야말로 ‘검은 구멍’에 빠져버렸고, 모래알만큼 많은 경제학 박사들은 모두 침묵 모드로 들어가버렸다.

요즘 <파이낸셜타임스>나 <포천> 등 여러 유명 경제 매체의 지면에는 ‘혹시 현대 문명이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를 떨쳐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글들이 사설에 칼럼에 분석 기사에 넘쳐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안습’인 경우가 많다. 이는 악몽이다. 자신들이 키와 노를 쥐고 있다고 믿었던 지구 경제라는 배가 알고 보니 키질·노질 따위와는 상관도 없이 그저 급류에 떠밀려 표류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이제 천길 폭포로 빠져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전세계의 경제 담론에 유령처럼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 구속은 공포의 고백
한국에서도 이른바 ‘경제 운영 기성 권력’(economic establishment)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관계, 학계, 업계, 언론계 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사실상 지난 몇 년간 한국의 경제 운영 방향을 독점하다시피 해왔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은 한국 경제가 위기의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능력 상태에 빠져든 상태다. 거창한 기우제를 무수히 지냈건만 몇 년째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는 나라가 있다 하자. 그곳의 신관들은 얼마나 엉덩이가 따끔거릴까. 이 분위기 파악 못한 미네르바라는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해 마땅히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그날 저녁자리의 중론이었다.

이것이 미네르바 사건의 ‘지구적 보편성’이지만, 이 사건의 ‘한국적 특수성’도 지적되었다. 지금 불안한 것이 한국 정부뿐인가. 이 공포 속에서도 모든 정부는 자신들의 상황 통제력이 불신당할까봐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표정 관리에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 정부는 ‘믿거나 말거나’(oddly enough)난에 실린 이 엽기적인 사건을 벌임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처해 있는지를 전세계에 공포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앞서가는 ‘선진화’ 정권이다.(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09. 02. 06.

 

P.S. 필자인 홍기빈 박사가 옮긴 소스타인 베블렌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책세상, 2009)를 귀가길에 손에 들었다(같은 세대인 우석훈, 홍기빈 박사가 내가 의지하는 경제학 멘토들이다. FTA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면서도 우석훈이 생태경제학이 관심이 많다면, 홍기빈의 전공분야는 지구정치경제학이다). 그가 다시 번역한 칼 폴라니의 <대변형: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길, 2009)도 근간 예정인데, 덕분에 베블런과 폴라니의 경제사상에 대한 유익한 안내자를 우리를 갖게 될 듯싶다.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의 부록에는 '더 읽어야 할 자료들'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함께 칼럼에서 '박사논문 지도교수'라고 언급된 조너선 닛잔의 <권력 자본론>(삼인, 2004)도 포함돼 있다. 심숀 비클러와의 공저인데, "저자들은 베블런의 '자본=권력'의 관점을 21세기까지의 현대 자본주의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해석하고 더욱 확장하여 독특한 이론을 개진하고 있다"고 소개된다.    

그밖의 책으로는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풀빛, 2005)와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이마고, 2008)이 추가된다. 전자는 "베블런의 경제사상에 대한 해설로는 한국어로 출간된 것 중에서 가장 충실하고 폭넓은 것"이라 하며, "경제사상사 입문서로서 군계일학의 위치에 있는" 후자는 "베블런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한다. 돌이켜보니 개인적으로는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푸른나무, 1998/2004)에서 베블런의 경제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읽고 그의 책들은 주섬주섬 몇 권 구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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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2-07 00:06   좋아요 0 | URL
베블렌은 학파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굳이 대중에게 알려진 후학을 찾는다면 갈브레이스 정도일까요? 제도학파라고 하는 이 학자들의 특징은 저술에 숫자나 도표가 없다는 것이죠.제가 가지고 있는 베블렌이나 갈브레이스 책을 봐도 정말 그래요.

로쟈 2009-02-07 00:17   좋아요 0 | URL
서문에서 역자는 신고전파와 마르크스의 자본 이론과는 다른 제3의 자본 이론으로 부각시키더군요. 베블런을 캐나다의 요크대학에서 '권력자본론'으로 계승하고 있나 봐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7 00:52   좋아요 1 | URL
예...미국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한센은 베블렌이 마르크스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선 19세기 말의 미국 경제학자 중에선 베블렌보다 헨리 조지를 더 많이 연구하는 거 같아요.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이론제공자로 조지를 내세우는 것이지요.헨리 조지학회가 있더라구요.

로쟈 2009-02-07 21:34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의 <부활>도 헨리 조지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8 15:09   좋아요 0 | URL
오호...러시아에도 영향을 끼쳤군요.
 

'희망의 원리'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열린책들, 2009)가 출간되었기에 관련기사를 찾았지만 아직 별다른 게 없다. 해서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과 관련한 긴급토론회의 발표문을 소개하고 있는 기사를 대신 옮겨놓는다. '친이스라엘'의 뿌리를 검토하면서 홀로코스트 신학을 비판하는 김진호 목사의 주장을 정리해주고 있다. 

»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에 대한 비난은 신학적 금기가 됐고, 기독교는 이스라엘 정부가 자행하는 타자에 대한 횡포에 침묵했다. 왼쪽 사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억류된 유대인 여성들, 오른쪽은 지난달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항의해 나치 독일의 상징을 집어넣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는 스페인 시위대.   

한겨레(09. 02. 05) “한국교회 ‘친이스라엘’은 신앙적 식민지화 산물” 

한국 주류 기독교의 ‘이스라엘 사랑’은 유난스럽다. “북핵 해결을 위해 이스라엘의 강경노선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름난 교계 지도자들이 스스럼없이 펼칠 정도니, 가자 침공을 ‘정당방위’라 두둔하는 것은 차라리 점잖은 축에 속한다. 이 골수에 사무친 친이스라엘 정서는 대체 어디서 발원하는가.

 

많은 이들이 이 땅에 개신교를 전파한 미국 복음주의 교단의 보수성을 탓하지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김진호 목사(사진)는 한 걸음 더 나간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결합된 친이스라엘 정서는 미국의 근본주의 교파뿐 아니라 비교적 온건하고 성찰적인 유럽 기독교조차 안고 있는 일반적 문제”라는 것이다. 김 목사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과 관련해 종교인 네트워크가 5일 개최하는 긴급토론회의 발제문에서 “(한국 기독교의) 친이스라엘 성향은 서구의 ‘성공주의’ 신학에 예속된 식민화된 의식의 결과물”이라며 “이것을 성찰할 지적·신앙적 의지가 없다면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김 목사가 볼 때, 현대 기독교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는 관점은 근대 유럽 세계의 산물이다. 자기 문명의 종교적 뿌리 찾기에 나선 유럽인들이 다윗-솔로몬 제국(기원전 10세기)과 이스라엘인의 팔레스타인 정착(기원전 13~11세기)과 같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발명’하는 과정에서 ‘신의 축복을 받은 문명국 이스라엘’과 ‘미개한 피정복민 팔레스타인’에 대한 피아 이분법의 관념이 형성됐다는 얘기다. 

그가 다윗-솔로몬 제국과 팔레스타인 정착사를 ‘발명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여기에 관한 기술 자체가 매우 빈약한 사실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최근의 고고학·문헌학적 연구들은 다윗-솔로몬 왕조의 번영을 기술한 구약성서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실증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가나안 정착 역시 이스라엘인들이 외부(이집트)로부터 들어와 토착세력을 대체한 게 아니라 토착민 일부가 산간지역으로 이탈한 뒤 부족동맹을 형성하고 성읍국가와 대결하다 평야지대에 재정착하는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인과 비이스라엘인의 혈통적 이분법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고대사가 ‘발명됐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 발명된 역사가 근대 유럽 세계에서 수행한 정치적 기능이다. 김 목사가 볼 때, 다윗-솔로몬 제국 설화는 세속적 번영을 신이 내린 축복의 징표로 해석하는 서구식 성공주의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정착 설화는 정복을 통해 야만 민족을 문명화하는 것이 신이 부여한 사명이라는 서구의 제국주의 논리에 정당화 근거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세속적 역사의 실패자인 팔레스타인 부족은 이스라엘에 지배당해도 마땅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김 목사의 설명이다.

이런 서구 기독교계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20세기 기독교 문명국가에서 벌어진 ‘인종 절멸’이란 야만 행위는 ‘문명=성공=축복’이라는 근대 신학의 성공주의 신념체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이 과정에서 홀로코스트를 초래한 유럽 사회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를 일소하려는 움직임이 현대 신학 안에서도 뚜렷한 조류를 형성했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뼈아픈 기억에 압도된 나머지 성공주의 신학 전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않고, 기독교의 전통적 ‘반유대주의’를 무비판적 ‘친유대주의’로 뒤집어놓는데 머물렀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기독교의 상생 대상인 유대교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적 역사”로만 조명될 뿐, 그들의 고통은 “회수되고 유기됐다.”

이런 연유로 2차 대전 이후의 서구 신학은 유대교 엘리트나 이스라엘 정부가 자행하는 타자에 대한 횡포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유대인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신학의 금기가 됐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이처럼 유대인과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서구 신학을 ‘홀로코스트 신학’이라 명명한다. 홀로코스트 신학은 과거의 희생자가 힘없는 이웃에 강요하는 또다른 희생에 침묵한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제국 신학’이다. 따라서 “과거의 이스라엘이 아닌 지금의 팔레스타인, 나아가 전지구적인 약자의 고난에 참여하고 싸우는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이 필요한 때”라고 김 목사는 말한다.

토론회에서 김 목사와 함께 발표자로 나서는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홀로코스트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글을 통해 유대인들의 희생자의식이 혈통주의에 의해 지탱되는 이스라엘의 공격적 민족주의를 어떻게 지지하고 강화하는지를 규명할 계획이다. 행사는 5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 돈의빌딩 안병무홀에서 열린다.(이세영기자)  

09. 02. 06. 

 

P.S. 이번에 나온 블로흐의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는  원제는 'Atheismus im Christentum'이다. '기독교 안의 무신론'이란 뜻 정도일까. 아래와 같은 책소개가 내용을 잘 집약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기독교 사상에서 유토피아의 희망을 보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통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철저히 부정해 왔다. 전복시켜야 할 또 하나의 거대한 지배 체제였다. 그러나 블로흐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걷어 내야 할 장애물로 보면서도 기독교 사상에 담긴 본질적 가치를 치밀하게 추적해 간다. 수세기 동안 교회가 철저히 은폐하고 왜곡해 온 성서에 담긴 진실을 백과사전적 지식을 총동원해 발굴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성서와 기독교에서 구해 낸 보물은 바로 저항과 반역의 인간 정신이다. 즉 성서에는 상부에서 하부로 전달되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는 저항의 목소리가 도사리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그가 내세운 명제는 다음과 같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을 뿐, 종교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블로흐의 이 명제는 종교의 본질적 가치를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 블로흐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며, 종교를 혁명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본질적 갈망이 종교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믿는다. 그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지배 체제를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종교의 비합리성을 주장하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종교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은 통속 마르크스주의자일 뿐,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신이 사라지고 없는 종교의 영역에서 어떤 새로운 기능을 발견해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저항을 통한 인간학적 진정성을 찾는 작업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그의 독특한 사상적 위치가 포착되는 대목이다.  

블로흐에 따르면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는 명제는 억압 상태의 모든 나라가 해방될 수 있는 격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유효하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가 있는 곳에는 희망 역시 존재한다>는 명제는 경계의 대상인데, 이 말에는 종교적 천국과 권력의 당국이 퍼뜨린 종교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종교는 신적 존재와의 재결합(re+ligio)이라는 의미에서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요소를 지녀 왔다. 이러한 <재결합으로서 종교>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더 낫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적 희망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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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06 20:47 
    희망의 신학에 영향 준 블로흐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즈음하여, 로쟈님이 홀로코스트 신학과 저항의 기독교에 대해 정리.
 
 
2009-02-06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6 23:50   좋아요 0 | URL
홀로코스트 신학에서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으로...매우 중요한 문제제기입니다.찬찬히 정독했습니다.

로쟈 2009-02-07 00:18   좋아요 0 | URL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까지 한국 교회가 갈 수 있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7 00:48   좋아요 0 | URL
일전에 말씀드린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은 장정일 씨의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만들어진 고대><국사의 신화를 넘어서>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9-02-07 21:38   좋아요 0 | URL
네, 고대사쪽은 '만들어진 고대'에서 탈피하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실증'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 영역인지도 모르죠...

노이에자이트 2009-02-08 15:11   좋아요 0 | URL
장정일 씨의 독서목록에는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에 관한 책들도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