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의 드라마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러시아 희곡은 아마도 고리키의 <밑바닥에서>(1902)일 것이다(일제때는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공연됐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대학로에서 뮤지컬로도 자주 공연되곤 했다. 오늘 기사를 보니 극단 유가 이번에 정극으로 다시 <밑바닥에서>를 무대에 올린다. 장소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이고, 김수로, 엄기준 두 배우가 주연을 맡는다고 한다. 나로선 두 배우 때문이 아니라 고리키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번쯤 시간을 내보고 싶다. <밑바닥에서>는 강의시간에 가끔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한겨레(09. 02. 17) 김수로·엄기준 ‘밑바닥에서’ 희망을 쏘다 

영화와 티브이 브라운관을 누비며 활약 중인 배우 김수로(39)씨와 뮤지컬 무대 출신의 배우 엄기준(33)씨가 나란히 연극 무대에 섰다. 두 사람은 극단 유가 지난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올린 <밑바닥에서>(연출 황재헌)에 젊은 도둑 ‘페펠’ 역과 사기도박 전과자 ‘사틴’ 역을 맡아 열연했다.

<밑바닥에서>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 막심 고리키가 1902년 발표한 희극. 싸구려 여인숙에서 살아가는 여러 인간 군상의 삶을 그렸다. 지난 15일 저녁 공연을 끝낸 두 사람을 분장실에서 만났다. 

“10년 안에 꼭 무대에 서려고 했어요. 제 주변에서도 영화보다는 연극 무대에 섰던 향기가 더 짙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았죠. 9년 만에 서 보니 정말 무대의 향이 짙고 좋더라고요. 커튼콜 때의 전율은 말 그대로 짜릿하죠.”

2000년 연극 <택시 드리벌> 이후 9년 만에 출연한 김씨는 “다시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없던 에너지가 다시 생겨 계속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영화와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의 만능 연예인으로 인식되지만, 기실은 무대에서 배우의 길을 시작한 연극인 출신. 대학 시절 극단 목화에 들어가 <백마강 달밤에>(1994)를 시작으로 <택시 드리벌>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 등 많은 연극에 출연했다. 

엄기준씨의 무대 경력은 김씨보다도 화려하다. 지난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매력적인 까칠남 손규호로 스타가 되었지만 뮤지컬계의 원조 꽃미남 배우 출신이다. 지난해 연극 <미친 키스>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그는 “14년간 뮤지컬과 연극 무대에 서 왔고, 드라마를 시작한 지도 2년이 채 안 되어 아직도 무대가 더 편하다”고 털어놓았다. “수로 형과 무언가 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불러줘 고마울 뿐이다.”   

고리키가 <밑바닥에서>를 썼던 1890년대 러시아는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 경제 공황 등으로 사회 밑바닥 빈민들이 급증하던 때였다. 도둑, 사기꾼, 알코올 중독자, 성공하고 싶어 하는 수리공 등의 극중 군상들은 어쩌면 2009년 한국의 ‘밑바닥’ 사람들과 너무도 닮았다. 이 작품이 100여 년을 뛰어넘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밑바닥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고,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인간이므로 끝까지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엄기준)

“동시대에서는 덜 행복하고 덜 만족스럽더라도 미래의 나 자신과 나의 후대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더 좋은 인간들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공감했다.”(김수로)   

두 사람은 “고전의 힘과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입을 모으면서 “앞으로도 1년에 1~2편씩 꾸준히 무대에 서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드라마, 뮤지컬 무대에서 계속 러브콜을 받고 있는 엄씨는 “알아보는 분이 많아질수록 무대에서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며 “수로 형처럼 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김씨에게도 이번 무대의 의미는 남다르다. 1997년 서울예술대 연극과를 졸업했다가 올해 동국대 공연예술학부에 다시 입학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연극을 더 공부하고 싶고, 제대로 된 배우 훈련을 하고 싶었다”며 “좋은 정극, 좋은 고전을 많이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더 좋은 배우로 거듭나서 김수로가 나오는 연극은 볼만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덧붙였다. 3월22일까지.(정상영기자) 

09. 02. 17. 

 

P.S. 러시아어 문고본 <밑바닥에서>의 표지이다. <밑바닥에서>는 러시아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다(이 드라마가 최초로 흥행을 거둔 건 독일에서라고 한다). 아래는 1902년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밑바닥에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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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리키 휴머니즘의 최대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24 23:43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어제 오전에 쓴 글인데,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의 한 대목을 다루고 있다. 시중에는 세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밑바닥>(동천사, 2005)은 영어본을 옮긴 중역본이며 기억에 번역이 좋지 않았다. 이 글에서의 인용은 <밑바닥에서>(지만지, 2008)와 <밤주막>(범우사, 2008)을 근거로 한 것이다.  
 
 
2009-02-18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r 2009-02-18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에 대학로에서 뮤지컬 버전으로 본 적이 있어요. 이 공연도 보러갈까 싶었는데 장소가 예술의 전당이라... 개인적으로 예술의 전당을 참 싫어하거든요-_- 교통도 불편하고, 주변에 먹을만한 밥집 하나도 없어서 말이죠;

무해한모리군 2009-02-18 10:18   좋아요 0 | URL
Kircheis님 좋아하시는 밥종류 말씀하시면 바로 추천 들어갑니다..
회사가 거깁니다 ㅎㅎㅎ

로쟈 2009-02-18 22:18   좋아요 0 | URL
백년옥 같은 두부집도 괜찮은데요...

무해한모리군 2009-02-1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로에서 하는 뮤지컬 버전을 본 적이 있는데, 이 공연도 한번 봐야겠네요.

Kir 2009-02-18 17:14   좋아요 0 | URL
(로쟈님, 신성한 서재에서 본문과 무관한 엉뚱한 댓글 죄송합니다!!!)
휘모리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감사합니다! 육류를 제외한 모든 식단 OK입니다. 저의 비루한 위장을 비롯한 소화기관에 육류는 엄청난 압박과 부담을 주거든요.

무해한모리군 2009-02-19 17:50   좋아요 0 | URL
어떤 종류를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일단 로쟈님 추천 집도 괜찮구요.
1. 예술의 전당 맞은편에서 사당역 쪽으로 조금 올라오다 보면 양마니라는 곱창집 옆에 오리엔탈국수집이 있습니다. 여기도 무난하군요.

2. 예술의 전당 길건너편에 에릭스스테이크가 있는 뒷편에 있는 백반을 파는 복있는집도 괜찮구요..

3. 한정식이라면 바로 앞에 있는 농군도 점심엔 괜찮은데 저녁엔 비쌀라나~
 

랑시에르 번역에 관한 페이퍼를 올려두려고 했으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도 있고 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봐야 두 권의 책 이야기다. 하나는 최근 바짝 붐을 타고 있는(짐작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개봉과 함께 바람을 탄 듯하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죽음의 중지>(해냄, 2009)이고, 다른 하나는 퓰리처상 수상작가 어네스트 베커(1924-1974)의 <죽음의 부정>(인간사랑, 2008)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09. 02. 14) 죽음이 사라진 세상… 천국일까? 지옥일까?

장생불사(長生不死)는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실명하고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 인류 본성의 밑바닥을 보여줬던 <눈먼 자들의 도시>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87)는 이번에는 '죽음이 소멸된 사회'라는 세계를 가상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진 사회, 경제, 도덕적 문제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라는 첫 문장이 암시하듯 갑자기 죽음이 소멸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현세에서 '불멸'의 권리를 얻게 된 사람들, 태초 이래 인류의 가장 큰 꿈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새 생명은 진실로 아름답다"고 외치며 집단적 환희감에 빠져든다.

하지만 웃는 사람이 있으면 우는 사람이 있는 법. 죽음의 협력 거부라는 난공불락의 벽에 부딪힌 장의업계는 정부에 가축 매장과 화장사업의 독점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죽지 않는 환자들로 만원을 이룬 병원에서는 환자를 복도에 내어놓는다. 돌봐줄 환자가 없는 호스피스들도, 생명보험 해약 요구가 빗발치는 보험사들도 통곡의 벽에 머리를 찧는다. 근본적 존재 위기에 빠진 것은 교회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이 없으며, 부활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무의미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죽음의 중지로 인한 사람들의 환호는 '지옥의 종소리'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희망과 절대 죽지 않는다는 공포 사이에 던져진 인간군상의 모습이 한폭의 만다라처럼 그려진다. 정부가 특별한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이, 죽음 직전의 가족을 둔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찾는다. 아직 죽음이 활동하는 국경 너머에 죽을 병에 걸린 환자들을 데려가주는 마피아는 이제 자선조직이 된다.

방송사 사장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면서 혼란의 7개월은 종식된다. 편지의 발신자는 '죽음'. 죽음은 이 실험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건 나를 그렇게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이었어요. 물론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언제까지나라는 말과 영원히라는 말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것처럼 동의어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걸 솔직히 고백해야겠군요." 

줄 바꾸기와 인용부호 따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작가 특유의 문장도 여전하다. 책을 덮고 나면 공자가 던진 '삶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는가'(未知生 焉知死) 하는 무거운 철학적 질문이 한 노대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를 깨닫고 그 긴 여운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이왕구기자)   

한편, 베커의 유작에 관해선 별다른 리뷰가 올라온 바 없다. 출판사 소개도 고작 넉 줄이 전부다. "현대 저술 중에서 죽음인식에 대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저술은 에른스터 베커의 <죽음의 부정>(1973)일 것이다. 이 책은 죽음과 관련된 현대적 고전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심화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죽음의 부정>은 에른스터 베커 자신이 암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3개월 전에 비문학 작품 분야에서 퓰리처 수상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책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출간되긴 하지만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라는 스피노자의 경구를 에피그라프로 달고 있는 베커의 책은 개인적인 관심사에 잘 들어맞는 책이다('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가 나의 네 가지 주제다). 비록 36년 전 책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주제만을 놓고 보자면 그간에 더 나은 진전이 있었는지 얼른 답하기 어렵다. 머리말의 필자는 베커의 주장이 갖는 의의를 이렇게 정리한다. "베커가 내린 근본적인 결론은, 세상을 납골당으로 변하게 하고 모든 개인과 국가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혁명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이타적인 동기들 - 보다 큰 전체와 합병하고, 보다 큰 대의명분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우주적 힘을 받들고자 한 우리의 욕망 - 에서 비롯된 것들이라는 것이다"(13-14쪽).  

사실 이 책을 서점에서 본 지는 오래됐지만 구입을 미루다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이유는 번역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서 방금 인용한 대목부터가 오역이다.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Becker's radical conclusion that it is our altruistic motives that turn the world into a charnel house - our desire to merge with a larger whole, to dedicate our lives to a higher cause, to serve cosmic powers - poses a disturbing and revolutionary question to every individual and nation."  

번역문은 접속사 that 이하의 전체를 마치 보어절인 것처럼 옮겼는데(Becker's radical conclusion is that- 을 옮긴 것처럼) 이는 물론 전혀 엉뚱한 해석이다. conclusion을 받는 동격절이기 때문이다. 전체 문장의 주어 'Becker's radical conclusion'을 받는 동사는 'poses'이다("베커의 과격한 결론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불온하면서도 혁명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중학생도 알 만한 구문을 엉뚱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나머지 번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베커 자신은 이 책의 주제를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가 서문의 시작에서 하는 말. "존슨 박사는 죽음에 대한 고찰이 놀랄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죽음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이라는 동물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인간 행위 - 주로 죽음의 치명성을 피하려고 고안된, 어떤 면에서는 죽음이 인간의 최종 운명이라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고 고안된 행위 - 의 주요 동기라는 것 이상이다."(29쪽)  

역시나 원문 '이상의' 번역이다. 원문은 이렇기 때문이다. "The prospect of death, Dr. Johnson said, wonderfully concentrates the mind. The main thesis of this book is that it does much more than that: the idea of death, the fear of it, haunts the human animal like nothing else; it is a mainspring of human activity - activity designed largely to avoid the fatality of death, to overcome it by denying in some way that it is the final destiny for man."  

먼저 'prospect of death'를 '죽음에 대한 고찰'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하다. 어려운 '고찰'에까지 갈 것도 없이 '죽음에 대한 예상', '죽음에 대한 전망'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저자가 암과 투병하면서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존슨 박사'는 물론 저명한 영어사전의 편찬자 새뮤얼 존슨을 가리키겠다. 그런데 여기서도 역자는 지시대명사 that을 앞의 나오는 것 이상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잘못 읽었다. "새뮤얼 존슨은 죽음에 대한 전망은 우리의 정신을 놀랄만큼 집중시킨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는 죽음이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하의 내용은 왜 그런가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죽음이라는 관념,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인간이란 동물에 들러붙어 괴롭히는 것은 없다. 죽음은 인간 활동의 핵심적인 동기이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대부분 죽음이라는 숙명을 피해보고자, 죽음이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자 계획된 것이다."    

우리는 번역에 대해서도 원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경구는 이 경우에도 적절해 보인다.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Not to laugh, not to lament, not to curse, but to understand). 언젠가 놀랄 만큼 집중해서 죽음에 대한 책들을 읽게 될 날이 올 것이다...  

09.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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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2-16 23:52   좋아요 0 | URL
죽음이 없으면 무간도지요.무한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감당할 수도 없을겝니다....그래서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엄마의 한을 풀기위해 그 먼나라 별나라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거 아니겠어요.ㅋㅋㅋ
그러니 <돌아 가야 할 때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라는 거죠.중의적이네요.ㅋㅋ

로쟈 2009-02-17 01:12   좋아요 0 | URL
불멸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불멸을 감당하기 어려운 게 인간이죠...

람혼 2009-02-17 00:4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랑시에르 번역에 관한 페이퍼는 어쩌면 국역본 <미학 안의 불편함>에 대한 글일 거라는 예상이 살짝 드는데요...^^

로쟈 2009-02-17 01:11   좋아요 0 | URL
미리 정해둔 제목은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입니다. '미학 혁명과 그 결과'와 함께 다루려고 해요. 시간이 되면...

2009-02-17 0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애초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이나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 같은 책을 생각했지만 조금 읽은 느낌으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에 더 가깝다. 해서 '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독창적 번역론!'이란 광고문구에서 '최고의 번역가'와 '독창적 번역론'에 괄호를 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읽을 만한 책으로 남을 듯싶다.   

어제 책을 구하고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건 직역/의역의 문제를 다룬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인데, 번역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기대지 않고 번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한 것이 좋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진단에서부터 '조리법'이나 '요리법'이란 한국어 대신에 '레시피(recipe)'라고 읽는 것이나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 번역하는 것 등의 사례 제시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러니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란 지적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론 직역이나 의역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만큼('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선택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직역 편향이 좀 교정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례로 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이나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일본도 이제는 외국어 원문을 자기 말로 길들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외국에서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면서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가 확실히 도약하고 자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번역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것이 번역문이고 어느 것이 창작문인지 일반이이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란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직역/의역의 문제가 경제적/문화적 자신감과 연동돼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라!). 한갓 취향이나 이론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신현상학> 번역이다. 1998년에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고 쉬운 말로만 번역한 하세가와 히로시의 번역본이 나오자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네 사정이 달라진 건 또 아니다. 해서 "난해하기로 소문한 헤겔의 저서를 (...)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려하고 명쾌한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독자들에게 충격과 감격을 주었"다는 건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다. 때문에 드는 생각은 <헤겔 사전>(도서출판b, 2009)이 그렇듯이 자체적인 역량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국어본 <정신현상학>을 기다리기보다는 하세가와의 일역본을 중역하는 게 더 낫지/빠르지 않을까 싶다.   

일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지만 하세가와의 솜씨를 감상해보면, 그는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명쾌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의 현실은 아직 이런 사례와는 거리가 멀다. 번역비평에 관한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읽은 논문 중의 하나는 '비트겐슈타인 번역의 미학'(박정일)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 전공자이자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서광사, 1997)을 번역한 바 있는 필자가 두 가지 종류로 번역돼 나온 <청갈색책> 번역에 대해 비교분석을 시도한 논문이었다. 그 두 종이란 진중권 번역의 <청갈색책>(그린비, 2006)과 이영철 번역의 <청색책. 갈색책>(책세상, 2006)을 말한다. 필자를 따라서 한 대목만 원문과 같이 비교해본다.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신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침대에서 뒤척이는 것을 보고 "이제 일어나려나?"하고 혼잣말을 할 때처럼 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 274쪽) 

"예를 들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의 움직임들을, 어떤 사람이 침대에서 방향 전환하는 것을 내가 예를 들어 "그는 일어나려고 하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바라보듯이 바라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가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 250쪽)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 also I don't look at my own movements as I might look at someone turning about in bed, e.g., saying to myself "Is he going to get up?"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But there is not one common difference between so-called voluntary acts and involuntary ones, viz,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 the 'act of volition'."   

먼저, 두 번역에 대한 비교평에서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voluntary acts' 'involuntary ones' 'act of volition' 등의 표현을 '의지적 행위'' '무의지적 행위' 의지 행위'(진중권)라고 옮긴 것이 '수의적 행위' '불수의적 행위' '의지의 작용'(이영철)이라고 옮긴 것에 비해 어색하며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act'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킬 때 주로 '활동'이란 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근거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see(보다)와 look at(바라보다)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쓰는 데 진중권은 이를 모르거나 놓치고 있다는 것. 이어지는 다수의 사례를 통해서 필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영철본에 비해서 진중권본은 "번역 요건의 최소한의 정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번역자의 학문적 기반을 의심케 하다"고 혹평한다. 그렇지만 진중권본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반면교사로서는 유용하다는 평을 내린다(진중권본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읽는다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다는 증거다!).        

한데, 비트겐슈타인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로서 나의 초점은 좀 다른 데 있다. 대의를 파악하는 데 둘다 별 지장이 없다면 가독성 면에서는 진중권본이 좀 낫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다 지나친 직역투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번역의 탄생>의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동적인 언어라서 명사나 명사구보다는 동사구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명사가 한국어보다 훨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려워"진다.  

대체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란 첫 구절을 어떻게 옮기는 것이 나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놀람'이란 명사형도 우리말에서는 어색하지만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는 건 또 뭔가? 뭔가 심오해 보이는, 그래서 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정작 영어에서 그 표현이 그토록 심오하며 시적인 표현인 것인지?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고 옮기는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 그냥 "이런 경우에는 놀랄 게 전혀 없다"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와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라는 두 문장에서도 차이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공통점이다.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를 '직역'한 것이긴 하나 '현존이 있다'나 '부재가 있다'는 표현은 한국어가 아니다(동어반복이거나 모순어법이다).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옮길 수는 없을까? "하지만 소위 수의적 행위와 불수의적 행위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작용'이라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 같은 문장도 자꾸 읽고 쓰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수용될 수 있다. 많은 번역투의 문장과 문체가 한국어화된 것처럼. 하지만 한국어의 특성에 맞게 가려쓰고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옮겨주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란 문제가 말 그대로 '선택의 문제'라면 나는 그쪽을 택하고 싶다. 어떤 쪽인가? 아래 문장을 순차적으로 좀더 우리말에 가깝게 바꾸어본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라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이영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진중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의적 행위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는 불수의적 행위는 서로 다르다.  

09.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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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역은 국어를 잘해야 한다
    from Ellie's Professional Software Insight 2009-02-19 00:53 
    원글 쓰신분의 예는 헤겔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서적을 번역한 예여서 왠지 더 까다롭고 심오한 내용인 것 같지만 ^^ 이런 문제는 기술서적을 번역할 때도 발생한다. 번역할때 같이 공역하던 분들과 계속 토론했었던 것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너무나 장황하고 영어 표현의 특성상 우리나라말과 바로 매치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이것을 원문을 존중할 것인가 우리가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역할 것인가를 많이 논의했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출판사 측에서는 당연히..
  2.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from weekly님의 서재 2011-06-14 01:39 
    1. 나는 비트겐쉬타인의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중 진중권의 것을 샀다. 그 이유는, 1).초반 몇 문장을 읽어보니 이영철 번역본보다 잘 읽혔다. 2). 적당한 분량의 재미있는 해제가 달려 있었다. 3). 이영철 번역본의 표지가 만화책 표지처럼 조잡해 보였다. 2. 나는 철학책을 살 때, 직역을 위주로 했다느니 저자의 문체를 느낄 수 있도록 번역했다느니 하는 역자의 말이 있으면 그 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 책은, 요컨대 가독성이 심하게
 
 
2009-02-16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09-02-17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라...이런 번역이 아직도 완전히 부재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군요^^
박정일씨는 미드를 보면 놀랄 것 같습니다. '완전히 부재가 존재한다'는 투의 영어식 표현이 미국 중산층 이상의 회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입니다. 그런 미드 대사를, 영어의 명사위주 표현을 그대로 번역한다면-.,-?
voluntary의 번역인 '수의적隨意的'이란 표현은, 한문을 공부했던 저에게도 한자 표기가 없으면 알아볼 수 없는 낯선 표현인데요. 번역어의 선택을 보면서 이영철교수가 일본어판을 상당수 차용하지 않았나라는 의심과 함께,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의도적으로, 너무 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일본어역을 참조하거나 거의 일본어판으로 번역한 경우, 의미는 대충 헤아려지지만 서양어 원본만 보고 번역에 임할 때는 떠올릴 수 없는 한자조어가 많이 등장하면 의심해 볼만 합니다.

로쟈 2009-02-16 15:06   좋아요 0 | URL
'voluntary'가 영한사전에 '수의적'이라고 나옵니다. 생리학 용어로. 영한사전의 모델이 또 영일사전일 테니까 열매님의 의혹도 자연스럽지요. '수의적 행동'이란 말을 의학쪽에서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법해서(의학용어도 일어에서 오잖아요) 놔두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명사형 표현을 직역하면 이상하긴 합니다.의사의 재빠른 도착이 그녀의 빠른 회복을 가져왔다...따위인데,의사가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이 빨랐다로 해야지요.물주구문이 특히 이런 해괴한 번역투 문장을 양산해 냅니다.

로쟈 2009-02-18 22:25   좋아요 0 | URL
수용이란 게, 어느 시점까지는 필요하지만 그 이후엔 '자기화'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요...

paul 2009-02-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번역문'이 양산되는 한 가지 이유가, 결국 번역의 '정확성'을 '직역'과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얼마나 의미를 쉽게 전달할 것인가'보다는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것인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물론 번역의 정확성은 엄밀히 지켜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언어의 무게중심은 번역되는 문장이기 보다는 번역한 문장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번역이 단순하게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닌, 옮겨지는 말의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창조적 행위라고 보았을 때, 번역의 창조성과 가치는 그런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환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직역과 정확한 원뜻에 집착하는 것도 번역(변혁)의 불안에 대한 자기방어적 제스처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9-02-18 22:26   좋아요 0 | URL
제 표현으론 '자신감의 문제'이고 '책임의 문제'인데, '충실성'이라는 이유로 대개는 회피하려고 하지요...

weekly 2011-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먼댓글을 썼다가 바로 지웠는데 시스템에 아직 반영이 되지 않았나 보네요...-.-)

먼댓글보다는 댓글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위에 비트겐쉬타인의 원문 인용 부분에 한정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rising of my arm"과 기지개 켜는 것은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rising of arm"이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지는 책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 involuntary를 불수의적이라 번역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심장은 불수의적입니다. 우리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런 건 비트겐쉬타인의 논의 대상이 아니죠.

3. 로쟈님께서 "... 놀랄 게 전혀 없다"로 옮기신 부분은 그렇게 옮기시면 안됩니다. 비트겐쉬타인이 의도한 바는 진중권이 번역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관찰하는 태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로 나중에 다시 언급됩니다. 다시 말해 전혀 일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4. "... 차이가 있다"를 "... 다르다"로 번역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뒤에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쟈님식대로 하면 '공통의 다름'이라는 정체불명의 말이 생겨날지도 모르겠습니다.

5. 인용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지 작용이 있으면 의지적 행위가 되고 의지 작용이 없으면 무의지적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진중권 번역본은 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반면 이영철 번역은 밋밋합니다. 저 원문의 번역만 놓고 보아서는 박정일이 주장하는 대로 이영철 번역은 "참으로 아름"다운 반면 진중권 번역은 "최소한의 정도"도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진중권이 원문의 맥락을 탁월하게 부각시켜 놓은 노고는 아무도 칭찬을 하지 않는군요. 번역에 있어 최고로 중요한 항목을 말입니다...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이후, 2009)에서 제일 처음 분석하고 있는 사례는 "헨리 밀러의 유명한 소설 <섹서스>"이다. 나는 그의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은 예전에 읽어보았지만 <섹서스>는 챙겨두지 않아서 찾아보았는데, 시중에서는 이미 구할 수 없는 책이었다. 언제나처럼 여러 저자와 여러 주제의 책들을 한꺼번에 읽어야 하는 처지라서 <성 정치학>에 대한 정독은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만약에 읽게 된다면 3부 '문학적 고찰'에서 다루고 있는 네 명의 남성작가(D. 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 장 주네)와 같이 읽는 게 좋을 듯싶다. 리스트는 그래서 만들어둔다(물론 밀렛이 다루고 있는 작품이 모두 소개된 것은 아니며, 또 일부는 도서관 신세를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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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02-15 19:3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그녀의 <성 정치학>을 잘 읽어보고 싶으면 저 책들을 먼저 다 읽어봐야 한다는 건가요? 나름 만만치 않은 독서로군요.

로쟈 2009-02-15 19:35   좋아요 0 | URL
설마요.^^ 분석대상이 그러하니까 그냥 같이 읽으면 더 좋겠단 뜻입니다. 메일러의 책은 <나자와 사자>를 골라야 하는데, 시중에 없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39   좋아요 0 | URL
나자와 사자가 없군요.첫 출세작인데 오래전 것이라 절판되었나 봐요.저는 박영문고에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예전에는 전집에도 가끔 포함되어 나왔어요.전쟁문학 전집인가 뭐 그런 것도 있었죠.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쳤지만 지난 목요일은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세계적으로 600여 개 기념행사가 펼쳐진 가운데 모국인 영국에서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됐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기념행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주에 나온(혹은 내주에 나올) <진화론의 유혹>(북스토리, 2009)은 나름대로 그를 기념할 만한 책이다. 아직 아무런 리뷰기사도 올라오지 않아서 출판사 소개를 옮기자면, "이 책은 진화론자인 윌슨 교수의 ‘모두를 위한 진화론Evolution for Everyone’이라는 강좌를 책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강좌는 매년 생물학은 물론 역사나 경제학, 심지어 법학이나 기계공학 같은 언뜻봐서는 진화론과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에게까지 많은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저자가 '윌슨 교수'라고 했는데,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아니라 데이비드 슬론 윌슨이고 뉴욕 주립대학교의 생물학과 인류학 교수이다. 국내에는 '진화론과 종교, 그리고 사회의 본성'을 다룬 <종교는 진화한다>(아카넷, 2004)로 이미 소개된 바 있다(나는 몇 달 전에야 책의 존재를 알았다. 이 또한 2004년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모두를 위한 진화론>은 2007년에 나온 책으로 부제는 '다윈의 이론은 삶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바꾸는가(How Darwin's Theory Can Change the Way We Think About Our Lives)'이다. 그것이 '가장 과학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욕망'이란 국역본의 부제로 어떻게 진화한 것인지는 실물을 봐야 알 듯싶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다. 소개는 이렇다.   

윌슨 교수는 그동안의 많은 연구자들이 진화론을 명확히 이해하는 순간, 가장 명료한 과학적 논리체계라는 진화론의 강한 매력 때문에 진화론 또는 다윈에 쉽게 빠져들어 왔다고 말한다. 나아가 현대의 진화론자들은 다윈의 강력한 이론 덕택에 그들만의 광활한 사고의 제국을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차원적인 지적 논문에서 다뤄지는 인문학적 주제들을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진화론이 가진 이런 매력은 현대의 모든 학문과 이론 분야에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동식물은 물론 인간과 관련된 모든 연구에서 갈수록 진화론을 활용하는 일이 늘었다. 그들은 주로 우연한 기회에 진화론을 접하게 되었고 진화론이 연구를 주도하는 힘이 될 때까지 조금씩 전문지식을 구축해 나간다고 한다. 또한 그들이 쉽게 스스로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 대량의 기술적 세부지식이 아니라 누구나 배울 수 있는 매우 단순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요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능력이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라는 얘기다. 가장 단순하게 '구애' 행동에 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이번주에 나온 잉겔로레 에버펠트의 <유혹의 역사>(미래의창, 2009)만 하더라도 인간의 구애행동과 남녀의 각기 다른 유혹의 전략에 대해 얼마나 명쾌하게 설명하는가.  

"우리 안에는 다양한 원시적 욕망이 내재되어 있고, 어떻게 보면 인류가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바로 그 원시적 욕망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이 발달되면서 원시적 욕망에 고삐를 당겨두기는 했지만 욕망의 목소리를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다양한 원시적 욕망 중 특히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성욕이다. 하지만 인간이 오로지 쾌락 때문에 성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거대한 착각이요 순진함의 발로이다. 성욕은 오히려 정반대 쪽에서 접근해야 옳다. 즉, 재미가 있어서 섹스를 즐긴다기보다는 섹스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가 자연의 '조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미가 있어서 인류의 번식이 보장되기 때문에 자연이 미리 그렇게 장치를 해둔 것이다."(7쪽)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남녀 관계는 한없이 복잡하면서도 한없이 간단하다."(13쪽) 말하자면 이런 것이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다(더불어 진화론은 '꽃보다 남자'에 폭 빠져 있는 딸아이를 이해하게 해준다. '올모스트 패러다이스'라는데 어쩌겠는가).  

또 다른 윌슨, 에드워드 윌슨은 <진화론의 유혹>에 대해서 "놀랍다! 그 어떤 작가도 이렇게 난해한 주제로 이렇듯 흥미롭고 명료하게 인간, 생명체, 사회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를 위한 책이다"라고 평했다. 이 정도면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특히나 초코렛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09.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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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5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5 17:44   좋아요 0 | URL
김범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나왔네요.

로쟈 2009-02-15 19:38   좋아요 0 | URL
저는 왼쪽 둘밖에 모르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28   좋아요 1 | URL
세번 째 사진입니다.김범을 검색해서 이 사진과 비교해 보세요.아무래도 이런 지식까지 다 갖추라는 부탁은 무리겠지요? 하하하...

로쟈 2009-02-15 22:32   좋아요 0 | URL
본인이 맞는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41   좋아요 0 | URL
이기우나 감우성 비슷하게 나온 것 같아요.김범은 더 이쁘장한 것 같던데...

로쟈 2009-02-15 23:40   좋아요 0 | URL
언니, 오빠들한테 너무 신경을 쓰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47   좋아요 0 | URL
아...이런 곱상한 청춘들이 늙어가야 한다니...세월이 잔인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