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의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한길사, 2003)을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하면서 같이 읽어보자고 생각한 책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21세기북스, 2008)이다. 마침 저자가 내한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젯밤에 기사를 검색해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립서비스도 충실히 하고 갈 모양이다). 한데, 가격이 만만찮은 이 책은 대학도서관에서도 다 대출중이다(바우만의 책이 그 반만큼이라도 읽히면 좋겠다). 흔히 '세계화의 전도사'로 알려진 프리드먼의 전작  <세계는 평평하다>(창해, 2006)를 나는 읽지 않았다. 제목만으로도 핀트가 안 맞는 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코드 그린'으로 코드를 전환하여 낸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는 얼추 진실에 부합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단 '평평하고'를 '평평하지 않고'로 수정하기만 하면. 내가 읽은 바우만은 왜 '평평하고'가 불가능한가에 대해 말해준다. 그래서 바라건대, '프리드먼과 함께 바우만을' 같이 읽어보시길 권한다. 나는 거꾸로 '바우만과 함께 프리드먼을'이 되겠지만... 관련기사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녹색성장 VS 생존사회'을 대비시킨 기사는 간명하면서도 아주 유용하다) .

   

아시아경제(09. 02. 24) 토머스 프리드먼"녹색산업이 유일한 대안"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다가오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선 국가들이 '녹색산업'(Energy Technology)을 지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국제학술회의 '글로벌 코리아 2009' 제3세션 발표자로 나서 기후변화, 에너지 빈곤, 생물다양성 감소 ,자원수요증가 ,독재 산유국의 영향력 증대 등 5가지 위협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녹색혁명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신재생에너지, 에너지자원효율화, 환경오염 저감등이 녹색산업의 주요 분야"라며 "녹색산업은 최대 성장잠재력을 보유한 글로벌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녹색산업부문에서 국가간 경쟁이 시작됐으나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의 '저탄소 녹색성장'기조 아래 한발짝 앞서 있다고 밝혔다. 우수한 인적자원과 산업경쟁력을 갖춘 한국이 녹색혁명이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이를 위해선 에너지와 정보통신(IT)간의 신융합기술개발과 가격시그널을 통한 보급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가격시그널 없이는 녹색산업은 발전할 수 없다며 기존 화석에너지와 달리 더 많이 사용할수록 비용이 싸지는 신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나중'이 아닌 '지금' 바로 녹색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프리드먼은 그의 최근 저서 '코드그린'에서 현 지구를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Hot, Flat and Crowded) 세계로 비유한 바 있다. 여기서 '뜨겁고'는 기후온난화를, '평평하고' 전세계적으로 부상하는 중산층을, '붐비는' 10년만에 13억씩 증가하는 세계인구를 각각 의미한다.  

  

전자신문(09. 02. 05) [이머징 이슈] 녹색성장 VS 생존사회

요즘 토머스 프리드먼의 신작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Hot, Flat, and Crowded)’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는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세계는 평평하다’ 등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미국의 주류 사회의 대표적 논객이다. 그동안 일관되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지지해온 프리드먼은 이번 책에서 태도를 바꿔 ‘녹색성장(코드그린)’을 주장하고 나섰다. 골수 세계화주의자의 눈에도 인류의 미래가 위태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녹색성장이 성과를 거두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신자유주의 전도사인 프리드먼이 갑자기 환경주의자로 전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코드그린을 주창한 배경은 미국식 과소비·경제성장 전략이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처럼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많은 과학자는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는 인류에게 이미 심각한 위협이며 산업활동에 따른 탄소 배출 증가가 빈번한 가뭄과 홍수, 해수면 상승 등 자연적 재해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또 세계화의 진전으로 미국식 소비를 갈망하는 개도국 중산층(Flat)이 늘고 인구증가(Crowded)까지 어우러져 지구를 더욱 뜨겁게(Hot) 만들고 있다.  

미국의 중산층이 향유하는, 예를 들어 자가용, 냉장고, 에어컨 등이 유발하는 글로벌 에너지 수요는 지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꼭짓점으로 가파르게 치닫고 있다. 중국, 인도 등 개도국의 중산층이 커짐에 따라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을 증가시켜 지구온난화와 향후 에너지 자원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분쟁을 유발하는 추세다. 만약 중국과 인도가 미국식 성장과 소비 모델을 계속 따라간다면 인류는 환경적 대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존 환경단체들의 주장처럼 경제성장을 포기한 그린정책을 택하는 것은 미국은 물론이고 다른 국가에도 엄청난 사회혼란과 희생이 뒤따른다.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기 위해 프리드먼이 제안한 것이 바로 ‘코드그린’ 전략이다.  

그의 녹색성장 전략은 청정에너지의 개발이다. 점점 줄어드는 석유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탈피해 미국이 가진 기술력, 연구자금, 기업가 정신 등을 통해 세계 청정에너지의 리더로 부상하자는 전략이다. 미래를 밝히는 유일한 해결방안은 ‘녹색혁명’이며, 만일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경제성장, 인권, 안보, 평화 등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만약 미국이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고 세계의 리더 역할을 한다면 미국은 그동안 실추돼온 패권적 위상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미국적 가치를 세계에 전파했던 것처럼 21세기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녹색혁명을 선도하자는 논리다. 이를 통해서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에서 지속적인 성장과 번영을 이끌어내자고 프리드먼은 주장한다.  

프리드먼의 코드그린은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과 맞물려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1980년 레이건 행정부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미국 사회에서 환경주의란 머리에 꽃을 꽂은 히피들의 비현실적 주장 정도로 치부됐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코드그린을 환경운동의 수준을 넘어 미국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로 격상시켰다. 이제 그린정책을 시행하는 목적은 자연보호를 넘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프리드먼의 사상 전향은 그동안 지구자원의 고갈에 앞장서온 미국 주류사회가 녹색성장을 진지하게 검토 중이라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금은 새로운 성장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중요
하와이대학의 미래학자 짐 데이터 교수는 ‘녹색성장’과 관련해 프리드먼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상당히 다른 진단을 내리고 있다. 데이터 교수는 끊임없는 소비와 생산을 종용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지속되는 한 인류는 위기를 넘어 붕괴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구온난화, 기후 및 생태계 변화, 에너지 자원 고갈 등 현재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끊임없는 소비와 생산을 종용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세계적 확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화석자원에 기반한 에너지 자원의 고갈, 이미 복원력을 상실한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빚에 의존한 사상누각의 미국 금융시스템은 그가 30년 전부터 경고해온 부문이다.  

데이터 교수는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와 관련해 “미국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소비를 조장하고 소비자의 빚으로 소비가 창출되는 시스템을 만들었기에 위기가 벌어졌다”고 진단한다. 그는 성장 일변도의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는 금융시스템의 문제, 석유자원 고갈, 환경 오염이라는 세 가지 복합 악재로 위기가 계속되고 결국 대안적인 경제·사회 시스템으로 전환을 모색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것이 바로 생존사회. ‘서바이벌 소사이어티’다.   


 
◇‘생존사회’의 원조는 ‘보존사회’
‘생존사회’는 1970년대 캐나다에서 연구가 시작된 ‘보존사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발생한 제1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캐나다에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회의를 갖는 환경주의자들이 나타났다. 특히 급증하는 자원수요와 환경오염 문제의 대두는 ‘성장의 한계’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인식하에 캐나다 국가과학위원회는 캐나다를 ‘소비자 사회(consumer society)’에서 ‘보존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한 심층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보존사회’의 핵심은 지구의 유한한 자원을 현 세대가 과도하게 소비하지 말고 ‘미래세대’를 위해 보존하는 데 역점을 두는 경제·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불행히도 보존사회에 대한 연구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70년대 오일쇼크의 충격은 차츰 진정됐고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사회체제를 굳이 보존사회로 전환할 만큼 급박하지도 않았다. 특히 80년대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에 보존사회의 소박한 논리는 묻혀버렸다. 그러나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와 석유대란이 현실화되면서 유럽, 캐나다 등지에선 ‘보존사회’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코드그린,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을까
짐 데이터 교수는 현재 인류문명을 ‘녹색성장’은 고사하고 ‘보존사회’로 시스템을 전환하기에도 너무 늦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고도성장에 대한 미련이나 환경보존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버리고 심하게 파괴된 지구환경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지를 고민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고갈될 자원과 파괴된 자연환경을 보존한다고 뒤늦게 야단법석을 떨지 말자. 앞으로는 황폐한 지구에서 인류가 욕망을 절제하면서 효과적으로 생존하는 방법을 모색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데이터 교수는 프리드먼이 뒤늦게 주창한 ‘코드그린’을 통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 전략에도 회의적이다. 지금이 80년대라면 석유문명의 틀을 바꿀 희망이 있지만 현재 미국에게는 ‘코드그린’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 자금, 자원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도전을 통한 경제성장보다는 ‘생존’을 모색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주장이다.
 
◇녹색성장이 아닌 또 다른 미래도 준비해야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사회에선 지속적인 고도성장이 국가 안보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직결된다는 고정관념이 너무도 뿌리 깊다. 기성세대는 국민소득이 5000달러에서 1만달러, 2만달러, 4만달러로 증가할수록 더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하듯이 외환위기 이후 국민소득은 높아져도 서민들 먹고살기는 더 팍팍한 세상이 돼가고 있다. 정부는 더 많은 생산과 소비, 고용을 창출하는 신성장동력을 찾아 경제성장률을 높이려 안간힘을 쓰지만 왠지 공허한 느낌이 든다.  

현시점에서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는 지속적인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생존 방법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지난 반세기 고도성장을 구가해온 한국경제로서는 솔직히 녹색성장으로 체질 전환도 엄청난 부담이다. 그러나 데이터 교수의 지적대로 새로운 녹색성장을 위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자금, 자원이 너무 부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리드먼 또한 ‘코드그린’ 전략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시간이 소요된다고 인정했다. 만약 오바마 행정부가 시동을 건 코드그린 정책이 실망스러운 결과를 남기고 끝내 좌초한다면 10년 뒤 대한민국은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생존사회가 현실로 닥쳐왔을 때 한국은 극심한 변화를 수용하고 나름대로 생존할 준비가 돼 있을까. 생존사회의 모습을 너무 부정적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다. 자가용 대신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집에서 키운 콩나물과 채소로 반찬을 해 먹는다. 원거리 여행은 텔레프레즌스 가상현실로 대체하고 사회지도층은 솔선수범해 환경보호를 실천한다. 인류의 역사 전체를 따져본다면 비록 풍족하진 않아도 생존사회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세상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미래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것이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고 뛰다가 상황이 급변하면 사회적 비용이 너무도 커진다. 요즘 MB정부의 공식적인 미래 이미지는 녹색성장으로 굳었지만 또 다른 미래의 모습도 언제나 상상해둘 필요가 있다.(배일한기자) 

09. 02. 24.  

P.S. 짐 데이터 교수의 현실 진단도 새겨들을 만하다(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8/08/02/200808020500001/200808020500001_1.html). 그는 '고유가'와 '온난화' 그리고 '금융위기'를 거대한 '쓰나미'의 '불길한 삼총사(Unholy Trinity)'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대목 중의 하나는 이렇다. 

그럼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당장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다. 가능한 모든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사용하는 에너지를 줄여야 한다. 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이 바람, 태양, 바다, 그리고 지열(地熱)을 이용하는 에너지다. 바다에선 파도를 이용할 수도 있고, 해양 온도차 발전 시스템(OTEC)을 개발할 수도 있다. 미국이 이제껏 이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개발하지 않은 것은 범죄행위에 가깝다.  

믿을 만한 통계에 따르면 쿠바는 지구상에서 가장 건강한 국민들이 사는 나라다.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대(對)쿠바 경제봉쇄 정책 때문이다. 쿠바로 들어가는 석유량을 미국이 통제하자 쿠바 국민은 이를 견디기 위해 걷거나 자전거를 탔고, 기계를 사용하기보다 수작업으로 일을 했다. 석유 에너지를 마구 사용한 하와이 주민들이 비만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반면 쿠바 주민들은 석유 없이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최근 우리는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식수와 토양 오염, 그리고 새로운 질병(또는 과거의 질병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는 것) 등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하와이에선 바뀐 지구환경이 섬 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하자 이 섬과 저 섬을 옮겨 다니는 ‘환경 피난민’마저 등장했다. 이러는 사이 자동차나 전자제품의 생산과 소비, 혹은 여가활동이나 여행에 돈과 시간을 아끼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본토 주민이나 하와이 주민은 과거처럼 값싼 상품을 구매하기가 힘들어졌다. 생산과 소비 천국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사실 저가의 상품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소비 풍조는 20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오랜 인류 역사에서 탐욕과 낭비는 나쁜 것이었고 지족(知足·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과 절약은 좋은 것이었다. 끝없는 소비는 나쁜 것이었고, 옛것을 복원하고 재생해서 다시 사용하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일은 조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놀거나 대화하거나 혹은 기도하면서 보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의 환경 재앙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때보다 옛 시대의 가치를 복원하는 노력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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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tois 2009-02-24 10:53   좋아요 0 | URL
flat과 fair는 다르죠. 프리드먼도 같다고 주장하진 않죠. 두껍지만 읽는데 들어가는 노력은 바우만의 반도 안될듯. 2MB가 프리드먼 주장의 반만이라도 이해했길 바랄 뿐입니다. cwd에서 작년부터 미팅을 준비했다고 얘기하더군요.

로쟈 2009-02-24 12:17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 하지만 '평평하고'가 "전세계적으로 부상하는 중산층"을 의미한다면, 전세계인의 '중상층화'란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불공평하고'라고 썼습니다('평평하지 않고'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를 다루고 있다(시간에 쫓겨 교정도 보지 않고 보낸 글이라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지면으로 읽으니 '티'는 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바우만에 대해서는 그동안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사회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그가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우만의 책들을 좀더 진지하게 읽기로 작정한 이유이다. 참고로, 기사에서 수잔 니먼의 <근대 사상에서의 악>은 번역/소개되면 좋을 듯싶어서 일부러 명기를 했다. 관심을 갖는 번역자나 출판사가 있었으면 싶다(나는 오늘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한겨레21(09. 03. 02) 공포는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2008년 5월 8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이 진앙지 주변에 있던 지핑푸 댐의 물 무게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보도되었다. 쓰촨성 지진광물국과 미 컬럼비아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쓰촨성이 지진 다발 지역이긴 하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대규모 지진활동은 없었다. 그럼에도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 것은 수력발전용 댐에 가두어진 엄청난 무게의 물이 지하 단층에 압력을 가한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진대에 400개에 이르는 댐을 건설하고 있는 중국 정부는 이런 추측을 진화하기 위해 부심하면서 쓰촨성 지진의 연구자료에 대한 접근도 차단하고 나섰다 한다. 하지만 정확한 진상조사와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향후 또 다른 지진 피해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대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너무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댐을 건설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고 합리적 계산능력이지만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은 더 이상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공포’의 한 양상이다. 최근에 나온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펴냄)는 그의 ‘유동적 근대성’(liquid modernity) 시리즈의 하나인데,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는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다. ‘유동적’이란 말은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하여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리고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이러한 유동성의 양상은 물론 단단한 ‘고정적 근대성’(solid modernity)과 대비된다. 바우만의 통찰은 ‘유동적 근대성’을 ‘고정적 근대성’의 부정적 결과이면서 그 필연적 귀결이라고 보는 데 있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2002)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서 바우만은 근대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대지진에서 찾는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수만 명이 사망한 이 재난은 당대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무자비한 자연의 재앙과 전지전능하신 신의 섭리는 도저히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흔히 자연재해는 죄인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것이 기독교적 믿음이었지만 “이 피할 수 없는 충격에는 무고한 자나 죄인이나 똑같이 희생되었다”(볼테르). 이러한 모순에서 비롯된 악에 대한 성찰이 결국엔 자연을 신의 섭리로부터 분리시키는 ‘탈주술화’를 가져왔다. 자연에서 신의 가면을 벗겨낸 것이다. 

물론 그렇게 탈주술화되었다 하더라도 자연은 여전히 거대하고 압도적이며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도 대신에 과학과 기술을 새로운 대응책으로 선택한 근대인은 도덕적 악이 이성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악도 이성에 의해 예측과 예방이 가능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이것이 근대성의 기획이자 견고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은, 바우만이 보기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자연재해는 ‘원칙적으로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거꾸로 도덕적 비리가 ‘고전적인’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부도덕한 행동에서 빚어지는 악보다도 더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바우만이 드는 대표적인 예가 근대 관료제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닌 ‘규칙에의 복종’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사실 20세기의 역사는 그러한 ‘합리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역사적 교훈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바우만은 아우슈비츠와 굴락(소련의 강제수용소), 히로시마의 교훈을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한 사례들이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도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위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책임’이 없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것이 바로 유동적 근대의 공포인 것이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이 유동적 공포에도 차별이 있다는 점.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분명 부자와 빈자를 구별하지 않았지만 이 자연재해가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허리케인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의 결과는 분명 사람의 작품이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은 카트리나가 덮치기 이전에 법질서에 버림받고 근대화에 뒤처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미리 고려해서인지 연방정부는 홍수 대비 예산을 마구 삭감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늑장 출동한 주 방위군은 구호활동에 나서기보다는 ‘법질서’ 유지에 더 주력했다.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은 근대화의 두 가지 모토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배려할 가치가 있는 부류’와 ‘가치가 없는 삶’(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그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이 보기에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유동적 공포란 지속될 수도, 보편화될 수도 없는 근대화와 세계화가 불가피하게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공포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바우만의 예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09. 02. 23.   

P.S. 내가 흥미롭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은 건 주로 2장과 3장이다. 바우만의 핵심적인 아이디어, 적어도 나에게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가 그 두 장에 집약돼 있고, 이것은 <쓰레기가 되는 삶>(새물결, 2008)의 2장('그들'이 너무 많은가?)과도 이어진다. 가령 이런 문제의식: "우리를 걱정시키는 것은 항상 그들의 과잉이다. 우리 주위로 눈을 돌리면 그와 반대로 출산율의 지속적인 저하, 그리고 그것이 갖고 오게 될 결과, 즉 인구의 고령화가 우리를 안달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우리'가 미래에도 있을까? 미래에도 청소부가, 즉 '우리의 생활방식'이 날마다 쏟아내는 쓰레기를 수거할 사람들이 충분할까?"(<쓰레기가 되는 삶>, 90쪽)란 물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의 생활방식'이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기사에서 정리한 대로,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창안된, 훨씬 안락해 보이는 삶의 방식을 '보편화'하기, 그것은 그런 방식을 채택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려된 적이 없다."(<유동한는 공포>, 28쪽) 오히려 그러한 삶의 방식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일이 진정으로 참담한 재앙을 낳을 거라는 논리, 곧 '사다리 걷어차기'를 정당화하는 논리만을 들먹일 뿐이다. '세계는 평평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평평함'이며, 그것이 근대화/세계화의 허구이자 본질이다.  

한편 <유동하는 공포>의 번역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바우만의 문장들이 기본적으로 길고 나열적이어서 번역이 까다롭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몇몇 오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자크 아탈리의 <인간적인 길>에서 내용을 가져온바 "반면 세계 인구의 11퍼센트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들은 세계 총생산의 겨우 0.5퍼센트만을 차지한다. 그것은 세계 최부국 3개국의 소득을 합산한 만큼에 지나지 않는다."(127쪽)에서 '세계 최부국 3개국'은 'three wealthiest men on the planet(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을 잘못 옮긴 것이다('men'을 아마도 'nations'로 잘못 본 듯하다. 대체 얼마나 빨리들 번역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대목은 어떨까? 

"근대적 발전은 그 '자연스러운' 그리고 절대 끝이 없는 공간적 한계 문제 제기를 흘려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한, 또는 도구적 이성의 계산 목록에서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 발생할 수도, 진행될 수도 (아마도 분명) 없다. 이 지구의 한계가 인식되고 진지하게 고려되었다면, 그런 발전이란 시작도 못했으리라. 시작했더라도 곧바로 중단되었으리라. 가끔씩 마지못해 던지는 립 서비스 이상의 무엇이,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에 대해서 주어졌으리라. 말하자면, 간단히 말해서, 근대적 발전 개념의 선구자들과 그 실행자들은 야심적인 개발 전략이 '실제로 추진'될 경우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낭비와 폐기물 문제에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128쪽)  

의미가 불투명하여 반복적으로 읽어보다가 원문을 확인해볼 수밖에 없었는데, 원문은 '바우만식 문장'으로 복잡하다: "Modern developments could not have occurred and most certainl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proceed at the pace they acquired if the issue of their 'natural' and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 had not been argued away and actively repressed, or simply removed from view by being struck off the list of factors included in the instrumental-rational caculations. They would not have begun, and if they had they would promptly ground to a halt, had the limits of the planet's endurability been recognized and admitted, seriously considered and respected, and if more than occasional and perfunctory lip-service had been paid to the precept of universality and human equality. If, in short, the promoters and practitioners of the modern concept of development the 'really deployed' stragedy of progressive improvement necessarily entailed."(74-5쪽)  

문법적으로 보자면 문단 전체가 가정법 과거완료 구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처럼 과거형의 평서문 문장으로 바꿔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번역문은 이 문단을 '가정법 현재+가정법 과거완료+평서문 과거'로 어지럽게 옮겼다. 일단 첫문장을 가정법 현재로 옮긴 것은 부정확하다(이 문장은 '과거 사실'에 대한 유감만을 전달할 뿐이다). 귀결절에 해당하는 "Modern developments could not have occurred and most certainl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proceed at the pace they acquired"는 "근대적 발전은 발생할 수도, 진행될 수도 (아마도 분명) 없다"가 아니라 "근대적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확신하건대 그와 같이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조건절은 어떻게 되나? "if the issue of their 'natural' and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 had not been argued away and actively repressed, or simply removed from view by being struck off the list of factors included in the instrumental-rational caculations."이고, 3개의 동사구로 구성돼 있다. 번역문은 이것은 "(문제제기를) 흘려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한, 또는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이라고 옮겼는데, '(문제제기를)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은 주술관계가 맞지 않는 비문이다. 그리고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를 '절대 끝이 없는 공간적 한계'라고 옮긴 것도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한 대로 옮기면 "근대적 발전의 '자연적' 한계, 침해 불가능한 공간적 한계 문제를 논파하거나 적극적으로 억압하지 않았다면, 혹은 도구적 이성의 계산 목록에서 쉽게 배제하지 않았다면" 정도이다.   

두번째 문장의 경우도 가정법 과거완료 구문이고, 조건절은 "had the limits of the planet's endurability been recognized and admitted, seriously considered and respected, and if more than occasional and perfunctory lip-service had been paid to the precept of universality and human equality."이다. 조건절이 두 개인 셈. 한데 두번째 조건절이 국역본에서는 "가끔씩 마지못해 던지는 립 서비스 이상의 무엇이,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에 대해서 주어졌으리라"라고 귀결절인 것처럼 옮겨졌다. "이 지구의 지속가능성의 한계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고려하고 또 존중했더라면, 그리고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이란 교훈에 간헐적이고 피상적인 립 서비스 이상의 관심을 가졌더라면" 정도로 옮기고 싶다. 거기에 이어지는 귀결절이 "They would not have begun, and if they had they would promptly ground to a halt"이고, "근대적 발전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고, 시작했더라도 곧바로 중단되었을 것이다."로 옮겨진다.  

비록 대의를 파악하는 데 큰 지장은 없더라도 이런 식으로 '뜯어읽어야' 하는 대목이 종종 나온다. 조금 더 세심한 교열이 이루어졌다면 좋았을 뻔했다. 끝으로 141쪽에서 '데카르트적 개체'는 '데카르트적 객체'의 오타라는 것 외에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자 한다. 그건 145쪽에 나오는 '추방의 제거'라는 번역어다. 바우만은 'adiaphorization'이라는 희귀한 단어를 쓰고 있는데(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의 설명으론 "인간 행동의 바람직함을 따지는 과정에서 도덕적 범주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아예 그런 범주를 평가 기준에서 일체 삭제해버리려는 경향"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런 뜻이 어떻게 '추방의 제거'로 옮겨질 수 있는지 나의 한국어 실력으론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책임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근대 관료제의 두 가지 주된 도구라고 바우만을 말하는데, 내 생각으론 전후 맥락상 '몰관여성' 정도로 옮기는 게 어떨까 싶다(*몇 분이 의견을 주셨는데, '무감각화'가 더 적합한 번역이다)... 

09. 02.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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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판형 140×207 제본 무선철 쪽수 312쪽 책값 14,000원 발행일 2009년 1월 30일 ISBN 978-89-01-09212-6 (03100) 분야 인문ㆍ역사 - 철학 한층 두텁고 전일적인 ‘21세기 공포의 시대’에 대한 최고 지성의 성찰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한 ‘부정적 세계화’의 일상, 그 실체를 파헤치다 “가장 파급력이 있으며 어쩌면 가장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결과는 현대의 ‘신뢰성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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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리스본 대지진과 그 결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05 09:47 
    지난주 관심도서의 하나는 니콜라스 사라디의 <운명의 날>(에코의서재, 2009)이다. 부제가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라는 걸 알면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리스본 대지진에 대한 관심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를 읽다가 처음 갖게 되었고 짧은 서평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바우만도 인용하고 있는 수잔 니먼의 <근대 사상에서의 악>도 번역되면 좋겠다
 
 
2009-02-23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3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24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san Neiman의 "Evil in Modern Thought" - 시간을 내어 숙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깊이 있는 책입니다.

로쟈 2009-02-25 00: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비로그인 2009-02-2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로쟈 2009-02-25 23:52   좋아요 0 | URL
분량은 만만찮은데요...^^;

게슴츠레 2009-02-2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의 adiaphorization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adiaphoron을 응용해서 만든 개념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수업에서 짧게만 들었던 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생과 사, 부와 가난같은 것들은 단지 '선호'의 대상으로서 '합리적인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합니다. '도덕적인 삶'의 기준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어찌되든 상관없는 것, 얼핏 보면 크게 달라보이지만 도덕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데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는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사람이 부자일수도 가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도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경향에 지쳐있던 때 수업을 들으면서 이거 참 좋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우만의 설명을 연관지어 들으니 거 참 다르게 느껴지는군요.

로쟈 2009-02-25 23: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냥 쉽게 '무관심성'이라고 옮겨도 될 거 같은데요...
 

유튜브에서 내가 좋아하는 등려군의 노래 '해운'(http://www.youtube.com/watch?v=wYyzMuVa_qw)을 듣다가, 또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매염방의 '석양지가'(http://www.youtube.com/watch?v=un8V4giKiR8)를 연거푸 들었다(나는 애조를 띠면서도 박력 있는 노래들을 좋아하는가 보다). 어제 한 지인의 문상을 다녀온 탓인가 본데, 노래를 듣다 보니 또 매염방을 나보다 좋아했던 친구도 생각난다(더불어 감정은 얼마나 '추상적'인가란 생각도 다시 든다). 그래서 서재를 검색해보다 '잊혀진' 페이퍼를 읽게 됐다. '매염방의 죽음을 애도함'(http://blog.aladin.co.kr/mramor/429988)인데, 2003년말에 쓴 것을 2004년 봄에 정리해놓은 것이다. 세사르 바예호 시도 곁다리로 붙여놓았는데, 내친 김에 따로 분리시켜놓는다. 일종의 '리바이벌'이다.  

지난주말에 산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에 실린 ‘숨막히는 진정성의 시: 바예호 읽기’를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가 바로 5년 전인 1998년 12월에 나왔었고, 나는 그해 겨울을 레바나스를 읽으며, 바예호를 읊조리며 보냈다(나는 스페인어권 시인들 가운데 미겔 에르난데스와 바예호를 좋아한다). 평생을 경제적 고통과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시인 바예호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그의 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이다. “호이 메 구스타 라 비다 무초 메노스(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a detrás de mi palabra.

Hoy me palpo el mentón en retirada
y en estos momentáneos pantalones yo me digo:
¡Tánta vida y jamás!
¡Tántos años y siempre mis semanas!...
Mis padres enterrados con su piedra
y su triste estirón que no ha acabado;
de cuerpo entero hermanos, mis hermanos,
y, en fin, mi ser parado y en chaleco.

Me gusta la vida enormemente
pero, desde luego,
con mi muerte querida y mi café
y viendo los castaños frondosos de París
y diciendo:
Es un ojo éste, aquél; una frente ésta, aquélla... Y repitiendo:
¡Tánta vida y jamás me falla la tonada!
¡Tántos años y siempre, siempre, siempre!

Dije chaleco, dije
todo, parte, ansia, dije casi, por no llorar.
Que es verdad que sufrí en aquel hospital que queda al lado
y está bien y está mal haber mirado
de abajo para arriba mi organismo.

Me gustará vivir siempre, así fuese de barriga,
porque, como iba diciendo y lo repito,
¡tánta vida y jamás! ¡Y tántos años,
y siempre, mucho siempre, siempre, siempre!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들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버텼다.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자살에 대한 관념은 자살을 유예시킨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느새 삶은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내가 지난봄에 그 친구에게 바예호를 읽어주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해가 가고 있다. 하지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또 다른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산 자들의 몫이다. 저무는 해에 삶을 놓음으로써 자유를 얻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내 친구의 명복을 빌고, 매염방의 명복을 빈다(이 도톰한 여가수 덕분에 그 친구가 좀 덜 심심할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은 어린 남매의 명복을 빈다. 전철에 몸을 던져 우리가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한, 한 외국인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진으로 숨진 수만의 이란 사람들...  



바예호의 사후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지 말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두고 가지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슬픈 시신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멀리해다오.12>  

03. 12. 30/ 09.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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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from Astraea's Say about,,, 2009-02-23 21:11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 César Vallejo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염방 주연 영화 중에 <가와시마 요시코>가 있어요.10여년전 허름한 비디오 테이프 파는 가게에 있더라구요.중국에서 체포되어 전범으로 교수형 당했는데 그 영화 나올 때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이라 어떻게 가와시마를 그렸을까 궁금했지요.그러나 머뭇대고 사지는 않았는데 결국 지금까지 못보고 있어요.

로쟈 2009-02-22 00:07   좋아요 0 | URL
필모그라피에 나오지 않는 영화네요. 출시명이 그런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비디오로는 그냥 히라가나 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으로 <천도방자>로 나왔더군요.원래는 청나라 왕녀인 중국인이예요.관동군 장교의 내연녀 노릇도 하고...꽤 드라마틱한 삶을 누렸지요.매염방이 가와시마 역을 했어요.유덕화도 나오고...

로쟈 2009-02-23 21:3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대부분 오락영화에만 나와서요...^^
 

아이가 학원에 다녀올 때까지 한두 시간 '재택'을 해야 할 상황이어서 무얼 할까 하다가, 지난주말에 미뤄놓은 페이퍼를 쓰기로 했다. 사실 오전에 네댓 시간을 원고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15매를 쓰면서 그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는 게 좀 우울하긴 하다. 사전준비가 부족한 탓이다) 여가를 좀 가졌으면 싶지만 요즘 형편이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고 또 막바로 '생계'와 관련한 일을 하자니 스스로를 너무 혹사시키는 듯하여(?) '무보수 알바'을 하기로 한 것(서재일이 내겐 '무보수 알바'에 해당한다). 게다가 오늘은 무보수에다 '불편한 알바'로군...     

 

<뉴레프트 리뷰>(길, 2009)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게 두어 주 전이다. 나는 격월간인 이 잡지가 연간으로 번역된다는 게 좀 불만스럽긴 하지만 서구 이론/담론의 한 수준을 보여주는 잡지(혹은 학술지)이기에 소개되는 것 자체는 환영한다. 그래서 바로 구입을 하고 가장 먼저 읽을 논문으로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와 테리 이글턴의 '자본주의와 형식'을 꼽고서 원문까지 구했다(랑시에르의 원문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참에 랑시에르의 미학, 혹은 '미학과 정치'를 정리해보자는 게 개인적인 계산이었다.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과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2008), 그리고 작년 12월 방한 강연문의 하나인 '감성적/미학적 전복'이 정리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관심사는 '뉴레프트 리뷰'와는 별로 상관이 없고, 다만 랑시에르의 미학에 한정돼 있었던 것.  

랑시에르의 글을 읽으며 그런 관심에 걸맞는 '한정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면 좋았겠다. 한데, 막상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건 불편과 당혹감이다. 그 불편은 먼저 두 가지 출처를 갖는다. <뉴레프트 리뷰>의 출간을 소개하는 기사의 이런 대목: "출판사측은 “현재 국내에 있는 좌파적 성격의 잡지들은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을 반영할 뿐”이라며 “1년간의 준비 끝에 나오는 <뉴 레프트 리뷰>의 한국어판은 우리의 협량한 지적 풍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고 밝혔다."(한국일보) 그리고, <미학 안의 불편함>의 역자가 '옮긴이 서문'에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런 대목: "이런 의문들이 드는 것은 랑시에르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여러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글들이, 그리고 그 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들이,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결국 현실과 분리된 채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말장난 하는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생각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21쪽)  

물론 정확하게 똑같은 대상을 두고 평한 것은 아니지만 <미학 안의 불편함>의 역자가 거명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들뢰즈,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르, 바디우 등인 걸 보면, 그리고 <뉴레프트 리뷰>에서 보드리야르나 바디우, 랑시에르의 글도 읽을 수 있는 걸 보면 서구산 '고담준론'에 대한 두 가지 평가는 사뭇 대조된다. 그들의 이론/철학은 "한국의 협량한 지적 풍토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의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나로선 '둘다 불편하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두 가지 평가가 모두 번역이란 매개를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에서라면 어떻게 고급 수준의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이 나올 수가 있을까?(그러니까 낮은 담론 수준 운운은 누워서 침뱉기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말장난"이라도 우리에게 제대로 번역/소개된 적이 있을까?(사실 '메시지'야 어떻게 전달한다손 치더라도 '말장난'을 옮기는 건 매우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한다. 역자는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랑시에르의 말장난을 옮기고 있는 것인지?)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를 읽기 시작한 건 몇 주 됐지만 처음 서너 쪽을 읽은 게 전부였고 다른 일들 때문에 미루다가 마저 읽은 게 지난 일요일쯤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청하, 1995)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랑시에르의 다른 글들에도 보인다. 그러니까 겹쳐 놓으면 겹치는 부분도 아주 적지는 않다. 따라서 하나의 글만 온전하게 해독할 수 있다면 대강의 요지는 파악한 것이 되며 다른 글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물론 그 '하나'를 이해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중반쯤 읽다가 나는 그것이 랑시에르 탓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이 글에서 'configuration'란 단어를 역자는 '공형상화'라고 옮기는데('con-figuration'으로 읽어서), 의미를 유추해볼 수는 있지만 '공형상화'는 한국어가 아니다. 그것이 차라리 '콘피겨레이션'이라고 음역해주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는지 의문이다(철학계에서는 '위버멘쉬'란 음역도 번역어로 쓰지 않는가). 혹은 그냥 '모양새'나 '형태'로 옮기는 건 무식한 일일까?  

번역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이런 건 또 어떨까. "이마누엘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미감적 파악의 중요한 사례로 그림 장식을 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데, 이 장식들은 어떤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성의 장소의 향유에 기여하는 한에서 '자유미'다."(476쪽) 원문은 "It is no coincidence tht in Kant's Critique of Judgement significant examples of aesthetic apprehension were takedn from painted decors that were 'free beauty' in so far as they represented no subject, but simply conributed to the enjoyment of a place of sociability."(139쪽)  

"사회성의 장소의 향유에 기여(conributed to the enjoyment of a place of sociability)" 같은 번역은 직역이면서 전형적인 번역투인데, 나라면 "사교 공간을 쾌적하게 해주는" 정도로 옮기고 싶지만, 원문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subject'를 '주체'로 옮긴 건 의문이다. 물론 다의적인 단어여서 '주체'인지 '주제'인지는 매번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림 장식'과 관련되는 것이라 '주제'가 타당하지 않나 싶다. 다른 대목에서 'subject'를 '주제'라고 옮긴 곳도 있기 때문에 역자 나름대로 선택한 것일 텐데, 의견이 좀 다르다고 해야겠다.  

그렇게 의견이 다른 대목이 더 있다. "시인은 표상적인 주제를 일반적인 형상의 디자인으로 대체하고 시를 무용술이나 선풍기의 회전과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477쪽) 원문은 "The poet wants to replace the representational subject-matter of poetry with the design of a general form, to make the poem like a choreography or the unfolding of a fan."(139-140쪽)  

인용문에서 '시인'은 '말라르메'를 가리킨다. 말라르메의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나 그의 시 가운데 '부채' 연작 같은 게 있었던 듯하다. '선풍기의 회전'(unfolding of a fan)이라고 옮긴 건 '부채 펼치기'를 뜻하는 게 아닐까?('선풍기의 회전 같은 시'는 얼른 연상이 안된다.) 그리고 '안무'란 뜻의 'choreography'는 '무용술'이라기보다는 어원적 의미 그대로 '무용 기록(법)'이란 뜻이 아닐까 싶다. 말라르메는 시어를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시를 어떤 춤이나 동작의 기록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이 말라르메에 대한 나의 얕은 지식에 부합한다.      

이제 그런 얕은 지식을 가지고 조금더 깊이 들어가보기로 한다. '깊이'라기보다는 '본격적'이라고 해야겠다. 프랑스문학뿐만 아니라 사실 나의 철학적 지식도 교양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전문가적 지식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반적인 교양 수준의 사회적 제고와 확산이라고 생각하기에 소소한 교양이라도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공유하고자 애를 쓴다. 가령 나는 <헤겔 미학>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헤겔 미학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교양 수준에서 알고 있고, 그런 수준에서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상은 예술이 아닌데, 그것은 이 조각상이 집합적 자유의 표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조각상이, 집합적 삶과 그 조각상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사이이 거리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479쪽) 같은 문장을 읽으면 그게 맞는 말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조각상은 예술이 아니다"? 

미심쩍어 확인해본다. 원문은 이렇다. "The statue, in Hegel's view, is art not so much because it is the expression of a collective freedom, but rather because it figures the distance between hat collective life and the way it can express itself."(141쪽) "not so much because A but rather because B"구문으로 돼 있다. A라는 이유에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하다, 라는 뜻이겠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각상은 A라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예술이다." 물론 '...is art not...'이라는 연쇄를 '...is not art...'라고 잘못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번역문을 보통은 한번이라도 다시 확인해보지 않는지? 한국어판 편집자 서문은 "좋은 글들을 오역으로 뒤덮어 한탄만 나오게 만드는 문화 속에서 어려운 글들을 꼼꼼하게 손보아 가독성을 높여준 훌륭한 번역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란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런 오역은 '한탄'은 아니더라도 '한숨'은 나오게 한다. 원문과 대조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  

이 '한숨'은 '긴 한숨'이다. 이런 대목은 어떤가. "조각상은 그것을 생산하는 의지가 타율적인 경우에만 자율적이다. 예술이 더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480쪽) 이 논문의 부제인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가 무슨 의미인지 가장 확실하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대목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또한 잘못 옮겨졌다. 원문은 "The statue is autonomous in so far as the will that produces it is heteronomous. When art is no more than art, it vanishes."(142쪽)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역자가 이 논문을 직접 옮긴 것이 맞는지(혹은 진지하게 옮긴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됐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아서다. 요즘은 똑똑한 초등학생도 알 만한 관용구인데, 'no more than'은 '단지, 고작(only)'이란 뜻이다. 이걸 '더이상 -가 아닐 때'라고 직역(?)함으로써 번역문은 "예술이 단지 예술에 불과할 때, 예술은 사라진다"는 랑시에르의 역설을 동어반복으로 바꿔놓았다. 역자나 교열자는 바로 앞문장의 "조각상은 그것을 생산하는 의지가 타율적인 경우에만 자율적이다"이란 역설과 "예술이 더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는 '허무한' 동어반복이 과연 호응한다고 본 것일까?   

헤겔에서 벤야민으로 넘어가보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루이 아라공의 소설 <파리의 농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수잔 벅모스의 인용에 따르면 "나는 밤마다 침대에서 그 책을 읽었는데, 몇 자 읽기도 전에 심장박동이 빨라져 더이상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실제로 <파사젠베르크>의 최초의 메모는 이때부터 씌어졌다."라고 벤야민은 적었다). 그와 관련된 대목이다. "물론 발자크의 진열장을 가장 탁월하게 변모시킨 것은 파리 오페라 거리에 있는 낡은 유형의 우산 상점의 진열대인데, 루이 아라공은 여기에서 독일 인어의 꿈을 인지하고 있다."(484쪽)   

'오페라 거리'는 '오페라 파사주(Passage de l'Opera)'를 옮긴 것이다. '오페라 아케이드'라고 옮길 수도 있겠다. 아라공이 <파리의 농부들>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나중에 위스망 대로를 만드느라고 다 철거됐다 한다(그러니 지금은 파리에 가봐도 구경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이 아케이드에서도 특히 "낡은 유형의 우산 상점의 진열대"(old-fashioned umbrella-shop)가 자주 언급되는데, '발자크의 진열장'이 '오래된 골동품 진열장'이므로 'old-fashioned'는 '낡은 유형'보다는 '구식'이나 '골동품'이란 뜻으로 새기는 게 더 좋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우산 상점(umbrella-shop)'.  

<미학 안의 불편함>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렇게 돼 있다: "바로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오페라 골목의 낡은 지팡이 가게를 신화적 풍경과 놀라운 시로 변형시킨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를 읽고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90쪽) 분명 지시대상이 같을 듯싶은데, 하나는 '우산 상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팡이 가게'다. 우산도 팔고 지팡이도 파는 가게인지, 아니면 불어 단어가 '우산'으로도, '지팡이'로도 번역되는 것인지 오역 여부를 떠나서 궁금하다. 'umbrella'야 우산이 맞지만, <파리의 농부>를 다룬 다른 글들에서도 '지팡이'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건 대체 뭔가 싶다.  

이어서 낭만주의 시학에서 시인의 역할에 대한 설명: "그리하여 시인은 단지 화석들을 캐내고 그것들이 지닌 시적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자연학자나 고고학자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이상적인 사물들의 신체 그 자체 속에 새겨져 있는 전언들을 간파하기 위해 사회의 어두운 밑바닥이나 무의식 속을 파고드는, 일종의 증상학자가 된다."(484쪽) '자연학자'는 'naturalist'를 옮긴 것으로 흔히는 '박물학자'를 가리킨다. 시인은 박물학자이자 고고학자이면서 동시에 증상학자가 된다는 것이 요지다. 그런데, '이상적인 사물들'은 뭔가? 이게 'ordinary things'를 옮긴 것이다. '일상적인 사물들'의 오타인 것. 번역이 굉장히 급하게 이루어졌고, 출간작업 또한 시일을 다투면서 진행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증상학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새로운 시학은 사회로 하여금 그 자신의 비밀을 깨닫게 만드는 과제를 스스로 떠맡으면서, 정치적 주장과 교의로 가득 찬 시끄러운 무대를 떠나 사회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 일상생활의 내면적인 실재 속에 감추어져 있는 수수께끼와 환상을 드러내는 새로운 해석학의 틀을 짠다."(484-5쪽) 여기서도 '일상생활의 내면적인 실재'는 'the intimate realities of everyday life'를 옮긴 것인데, '내면적인 실재'처럼 거창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냥 '일상생활의 친근한 현실' 정도의 뜻이 아닐까?    

조금 딱딱하더라도 원문에 충실하게 옮긴다는 것이 다른 번역본들에서 내가 받은 역자의 번역관인데, 기이하게도 이 랑시에르 번역에서는 부주의하거나 불충실한 대목들이 자주 나온다. "상품 물신숭배가 벤야민으로 하여금 파리 아케이드의 지리와 한가로운 구경꾼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들레르 상상계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485쪽)에서도 '보들레르 상상계의 구조'는 '보들레르 이미지의 구조(sthructure of Baudelaire's imagery)'를 옮긴 것이다. '이미지의 구조'를 '상상계의 구조'라고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짐작엔 아무래도 'imagery'를 'imaginary'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심증은 이런 문장을 읽으며 더 굳어진다: "문화비평은 낭만주의 시학의 인식론적 모습으로, 예술의 기호들과 삶의 기호들의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485쪽) 원문은 "The critique of culture can be seen as the epistemological face of Romantic poetics,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the signs of art and the signs of life."(145쪽) 놀랍게도 '교환방식에 대한 이론적 설명(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이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이라고 엉뚱하게 옮겨졌다. '탈주술적' 번역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착시'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근본적인 오역이라 할 만한 두 가지를 지적하고 마무리짓기로 한다(실수도 너무 자주 반복되면 필연처럼 보인다). 먼저 재현의 문제를 다룬 대목: "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 사이의 '안정적인 관계의 상실'은 관계짓는 힘의 상실이 아니라 그 형식들이 복수화된 것이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도 '재현 불가능'하다."(490-1쪽) 뒷문장의 원문은 "In the aesthetic regime of art nothing is 'unrepresentable'"(149쪽) 아마 역자도 이런 문장을 번역서에서 봤다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재현불가능한 것은 없다"라는 랑시에르의 핵심적인 주장을 역자는 정반대로 옮겨놓았다(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이 가장 나쁜 오역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재현의 가능/불가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현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랑시에르가 홀로코스트 재현 불가능론("홀로코스트는 재현 불가능하며, 예술이 아니라 증언만을 허락한다")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오역은 미스테리하다.  

그리고 끝으로,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랑시에르의 정식화: "미학적 정식이 처음부터 예술을 비예술과 연결하는 한에서, 그 정식은 예술의 삶을 두 개의 소실점, 곧 단순한 삶이 되는 예술이나 단순한 예술이 되는 삶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492쪽) 원문은 "To the extent that aesthetic formular ties art to non-art from the start, it sets up that life between two vanishing points: art becoming mere life or art becoming mere art."(150쪽)  

'삶이 되는 예술'/'예술이 되는 '은 'art becoming mere life'/'art becoming mere art'를 옮긴 것이고, 물론 '예술이 되는 삶'은 '예술이 되는 예술'의 오역이다. 쉽게 말하면 예술의 삶(life of art)은 '삶을 위한 예술'(타율성)과 '예술을 위한 예술'(자율성) 사이에서 진동한다는 것. 랑시에르의 표현으론 이렇다.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의 삶은 정확히 말하면 왕복 운동하는 것, 곧 타율성에 맞서 자율성을 실행하고, 자율성에 맞서 타율성을 실행하고,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한 가지 연결에 맞서 다른 연결방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메시지 전체는 궁극적으로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한 편의 논문을 갖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랑시에르의 사례를 보건대 한국어판 <뉴레프트 리뷰>를 일반 독자가 읽고 제대로 해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원문을 대조해서, 적어도 참조해서 읽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거나 오독할 수 있는 대목들이 적잖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재로선 거기까지일 것이다. 조급한 번역과 부실한 교열/편집은 자랑할 게 못되지만 '한국적 현실'이다. 이것을 '우리의 협량한 출판 풍토' 탓이라고 하면 내가 오버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번역은 한 사회의 총체적 문화 역량과 관련된다.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에서 결코 높은 수준의 번역이 나오지 않는다. 사회적 보상도 낮고 대우도 부족한 형편에 언제나 '기대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을 들추며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09. 02. 21. 

P.S. 랑시에르 논문의 오역들을 지적했지만 그 다수는 단순한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정오표 등을 통해서라도 바로잡았으면 좋겠다(한데, 그런 부주의는 왜 대부분의 인문 번역서에 만연한 것일까?). 혹자는 번역비평에 대해 '식은 죽먹기'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 번역작업에 비하면 번역비평의 수고는 약소하다(그래서 보상도 없을 뿐더러 별로 하는 이도 없는 것 아닌가?). 이건 '프로'의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나는 번역의 동업자가 아닌 한 독자로서 내가 지불한 책값이 정당한지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 확인의 방식이 언제나 '식은 죽먹기'다.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이다. '식은 죽'이되 남이 먹다 남긴 죽이니까. 이런 걸로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양서를 읽고 정신을 살 찌우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며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유감스러운 건 한국어로 그런 양서를 읽기가 쉽지 않다는 것. '식은 죽'이라도 계속 먹어치우면 좀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미학 안의 불편함>의 경우 나는 앞뒤로 조금씩 읽고 더 읽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현학적으로 기술된 글을 완전히 체계와 문화가 다른 언어로 번역을 했으니 이 책을 읽고 단번에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나아가 무례하기까지 한 요구일 것이다."(9쪽)란 역자의 판단을 존중해서다. 그 요구가 독자의 것인지 역자의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나는 조심하는 차원에서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이 책은 올여름에 <미학과 그 불만(Aesthetics and Its Discontents)>이란 제목으로 영역본이 나올 예정인데, 아마도 가을쯤엔 '체계와 문화가 아주 다르진 않은 언어'로 읽을 수 있을 듯싶다(러시아어로는 마지막 장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환'만이 번역돼 있다). 그때까지는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이 조금 더 누그러지기를 기대해본다(그의 영화론이나 이미지론도 더 번역되면 좋겠고). 덧붙여, 시간이 되면 <뉴레프트 리뷰>의 다른 논문들에 대한 독후감도 나중에 적어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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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역 논란의 한 가지 사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0 14:50 
       교수신문(09. 03. 09) 알라딘 블로그의 ‘오역 논란’이 유쾌한 이유  마르고 닳도록 강조되는 번역의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오역에 대한 지적도 끊이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오역의 당사자로 주목된 역자들이 ‘나 몰라’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역자가 자신의 오역에 대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 사과하고, 정오표를 올려 작은 화제가 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유명 인터넷 논객인 로쟈의
 
 
기인 2009-02-2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흠.. 지난번부터 알아차린 것이지만, 로쟈님은 한국어 번역본 읽으실때 원문/내지는 같은 서구언어와 대조하면서 읽으시네요. 제 생각에도, 원본/같은 서구언어로만 읽는게 편하기는 한데, '한국어'로 결국 학문을 해야 되기 때문에, 번역본을 참조하면서 개념어들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로쟈님도 이 때문에 원문/서구언어본과 한국어 번역본을 대조해서 읽으시는 거 맞죠? ^^; ㅎㅎ

로쟈 2009-02-21 01:03   좋아요 0 | URL
그런 비밀을 눈치채시다니!^^; 원서로 보는 거야 혼자 보면 되지요. 번역본은 같이 읽을 수 있는 거니까, 관심을 갖고 고쳐도 보고 합니다. '한국어'에 매인 몸이어서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구요...

2009-02-2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2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비평이 과연 "식은 죽 먹기"일까요? 해당 언어와 문화, 그리고 문학비평과 번역론 등 전반에 걸친 확고한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인데요???

"no more than art" 에서 no more than 이 art 가 그 정도밖에 안 됨을 강조하는, 혹은 only 를 강조하는 말임을 모르고 한 - 부주의한 차원을 벗어난 - 번역이라면 문제는 문제로군요.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죠...?

로쟈 2009-02-23 21:36   좋아요 0 | URL
베테랑 번역자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려나 믿기지 않는 오역들입니다...

람혼 2009-02-2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런 일이... 조금 충격적인데요. '사소한' 실수로 보이는 부분들이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라 그 '파급'이 좀 크게 느껴집니다. 아직 <뉴레프트리뷰>의 랑시에르 논문은 읽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렇게 많은 오역들이 있었군요. 논문 읽을 때 참조해야겠습니다. 아라공의 Paysan de Paris는 예전에 읽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에 관해서는 제 기억으로도 '지팡이(canne)'가 맞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랑시에르의 <미학 내의 불만(Malaise dans l'esthétique)> 원서에서도 이 부분은 "la boutique de cannes obsolète"(Galilée, 2004, p.71)로 되어 있는 걸 봐서도 '지팡이'가 맞을 듯합니다(영역자가 이를 '우산대(canne à parapluie)'로 파악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만...). <뉴레프트리뷰>에 다른 글을 번역한 한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로쟈님, 시간 나시면 제가 번역한 글에서도 오류가 있다면 바로 잡아주셨으면 하는 바람 전해봅니다.

로쟈 2009-02-23 21:34   좋아요 0 | URL
네, 좀 충격적이면서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오역이 원문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하고 명백한 것들인데(하지만 '치명적인' 것들이죠), 베테랑 역자가 실수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문명론의 개략>(홍성사, 1986)을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예전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지만 어느새 희귀해져서 어지간한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책이 돼버렸다. 갑자기 후쿠자와가 생각난 건 며칠전 학교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다가 분실한 줄 알았던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을 다시 찾은 때문. 후쿠자와는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던 탓에 번역과 출판 등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고 많은 번역어들을 만들냈다. <번역어 성립사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간에 '<문명론의 개략> 읽기'도 두어 권 소개된 바 있는데, <서양사정>, <학문의 권장> 등과 함께 그의 3대 저작으로 꼽히는 <문명론의 개략>이 새로 나오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마루야마의 책에 다 포함돼 있는 건가? 책이 당장 옆에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한편, <서양사정>과 함께 후쿠자와가 참조했다는 프랑수아 기조의 <유럽문명사>도 소개되면 좋겠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이 두 책과 별개로 읽는 건 불가능하다고도 하고). 어차피 책을 다 훑어볼 여유는 없고, 이번에는 개략적인 윤곽만 잡아보려고 한다(일본 사상사 관련서들도 다수 참조할 수 있다). 번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화'란 주제를 생각할 때 그의 문명론을 빼놓을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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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허호 옮김 / 이산 / 2006년 3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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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가와무라 신지 지음, 이혁재 옮김 / 다락원 / 2002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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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마루야마 마사오.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김석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30,000원 → 28,500원(5%할인) / 마일리지 90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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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김석근 옮김 / 역사비평사 / 2007년 10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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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2-21 03:18   좋아요 0 | URL
유키치하면 자동으로 돈이 연상되어 버려서 원래 뭐하는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돼요 ㅎㅎ

로쟈 2009-02-21 11:21   좋아요 0 | URL
일본에 자주 가시나 보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1 16:05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 하면 저는 김옥균이 생각나네요.

로쟈 2009-02-22 00:08   좋아요 0 | URL
네, 개화파들이 많은 영향을 받은 걸로 돼 있죠...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4:55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저런 사진을 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후쿠자와는 사상가로 알려졌는데도 긴 칼을 찬 사진이군요.하기야 예전에 태평양 전쟁 때 일본 파일럿들도 공중전 나가면서 일본도를 차고 가는 사진을 보고 이 나라는 칼이 그냥 다순한 칼이 아니로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냥 단순한 무기 이상의 존재...

로쟈 2009-02-22 15:12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 자신이 사무라이 계급 출신인 걸로 아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6:23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의 전통 관행이나 의식을 없애려고 긴칼 차고 외출을 못하게 하고 그랬어요.그래도 워낙 칼에 의미 부여를 하는 나라니까...우리나라는 군인출신들도 국회의원이 되면 장군보다 의원 님 소리 듣는 걸 더 좋아한다잖아요.예전 김용옥 씨가 일본에선 선비를 일본어로 사무라이라고 하면 된다고 해요.실제로 유학을 받아들여 공부한 계급도 사무라이니까요.무인에 대한 관념 자체가 우리와 다른 것 같아요.

로쟈 2009-02-22 17:58   좋아요 0 | URL
네, 자세한 건 후쿠자와의 자서전을 보면 알겠는데, 책이 안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