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말 '안나 카레니나' 내한 공연을 앞둔 러시아의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의 인터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자주 강의도 하게 되는 작품이어서 어떻게 발레로 공연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조만간 알게 될 듯싶다... 

 

한겨레(09. 03. 03) 그의 발레,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나의 무대는 열려있는 감정의 경험이다. 내가 지배하는 캐릭터가 사는 곳에서 미스터리를 창조하여 그것의 대단원을 가지고서 나만의 세상을 만든다.”

러시아 ‘드라마틱 발레’의 거장 보리스 에이프만(63)과 그의 발레단이 이달 말 한국을 찾는다. 에이프만은 뛰어난 심리묘사와 애크러배틱에 가까운 극적인 안무, 장엄한 스케일의 연출로 세계 무용계의 눈 귀를 끌어온 안무가. 우리에게는 2001년부터 <차이코프스키-미스터리 한 삶과 죽음>, <레드 지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돈키호테> 등의 내한 무대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3월27~29일 서울 역삼동 엘지아트센터(02-2005-0114)에서 신작 <안나 카레니나> 국내 초연을 앞둔 그를 전자우편으로 미리 만났다.

에이프만은 “한국 관객들은 매우 감성적이고 지적이다”며 “나의 작품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모이는 곳을 방문한다는 것이 가장 기분 좋다”고 기대감을 에둘러 표시했다. 그는 러시아 고전발레의 빼어난 테크닉을 바탕으로 현대무용을 접목시켜 철학적 이야기를 그려낸다. 고전문학이나 역사상의 극적 이야기와 철학적 주제가 그의 크고 화려한 현대발레로 무대화된다.  

그의 발레단이 한국 무대에 처음 선보이는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 명작에 현대 발레의 옷을 입힌 작품. 19세기 러시아 왕정 관료인 남편과 유복한 삶을 누리던 안나 카레니나가 청년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의 도피를 하지만, 혹독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비극을 담았다.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 등 당대 최고 여배우들이 주연을 맡으며 꾸준히 영화화된 작품이다.

에이프만은 카레니나의 타오르는 열정과 내면적 고통을 숨막히도록 격정적인 안무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 등의 극적인 음악으로 형상화했다. 19세기 러시아 왕정의 시대상을 그린 소설과 달리 에이프만은 안나의 심리적 억압과 욕망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이 작품으로 2006년 ‘무용계의 오스카상’으로 일컫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안무상을 수상했다. 

“사랑에 관한 발레를 만들고 싶었다. ‘3각 관계’라는 영원하고도 신화적인 주제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젊고 현대적인 배우들로 이뤄진 우리 무용수들은 사랑의 현대적인 개념과 증오를 표현한다.”

에이프만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었다”며 “주인공 안나가 받아들인 감정적이고 에로틱한 세계는 우리 공연의 세계였다”고 작품 동기를 밝혔다. 그는 안나의 심리를 극적인 독무뿐만 아니라, 남편 카레닌 또는, 애인 브론스키와의 화려한 듀엣 춤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그는 “안무가는 수많은 여성과 남성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나의 발레에서 여성의 주제는 언어가 아닌 몸을 통해서 표현된다”며 “나 자신을 춤추는 안나의 열정으로 드러내야 했다”고 귀띔했다.  

특히 에이프만은 안나의 심리 상태에 따라 흰색, 검은색,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게 해 순수, 어둠, 열정에 대한 상징성을 덧입혔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생활에서도 색깔은 특별한 드라마적인 의식과 연관이 있다. 예를 들면, 검은색은 죽음의 비극과 관련 있고, 흰색은 결혼, 붉은색은 열정을 연상시킨다. 그것의 전형성을 바꾸고, 새로운 드라마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13살 때부터 안무를 시작한 에이프만은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와 옛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컨서바토리에서 수학했고, 1975년 키로프 발레의 <불새>를 안무하면서 처음 세계 무용계의 눈길을 받았다. 1977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을 창단한 뒤로 연극성이 강화된 ‘현대발레’ 장르를 선보여왔다. 그는 옛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 공연 예술인 최고의 찬사인 ‘러시아의 국민 예술가’ 칭호를 받았고, 러시아 최고 권위의 ‘골든 마스크상’을 두 번, ‘황금 소피트상’을 다섯 번 받았다.

그는 고전 발레뿐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체호프 등이 지은 고전문학 작품을 비롯한 다양한 소재를 현대발레로 창작했다. 또한 차이코프스키, 몰리에르, 발레리나 올가 스페시프체바 등 천재 예술가들의 고뇌를 극적인 무용작품으로 무대에 올렸다. 에이프만은 “처음에는 발레의 새로운 잠재력을 발견하려고 노력했고, 그리고 나서 심오한 문학세계와 진실한 음악을 발레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2007년 10월 내한했을 때 “발레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 내면세계를 관객들과 나눌 수 있는 예술”이라고 말했던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에게 춤은 무엇일까? “나는 춤에 의해 살아가고, 춤을 위해 산다. 춤은 구경꾼들을 인간의 열정을 끌어올리는 사람들에게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나는 그 지점이 가장 흥미롭다.”

<안나 카레니나>는 서울공연에 앞서 3월20일 거제문화예술회관, 22일 대구 오페라하우스, 24일 김해문화의전당에 이어 31일 경기도문화의전당, 4월2일 울산 현대예술관에서 지방 관객과도 만난다.(정상영 기자)   

 

■ 보리스 에이프만 인터뷰 전문  

-발레 <안나 카레니나>의 매력을 소개한다면?  

=저는 사랑에 관한 발레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3각 관계’에 대한 영원하고도 신화적인 주제였습니다. 이 주제는 항상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이 이러한 신화적인 스토리를 읽는 동안 영감이 생겨납니다. 우리 무용수들은 젊고 현대적인 무용수들로서 사랑과 증오의 현대적 개념을 표현합니다. 만일 우리가 타이틀 <안나 카레니나>를 지운다고 해도, 이 공연은 여전히 (톨스토이의) 그 소설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발레는) 톨스토이 작품의 영향 아래서 쓰인 독립적이고 새로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작품에서 음악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당신이 음악에 대해 특별한 노력과 관심이 있는 것은 컨서바토리에서 공부했기 때문인가요?

=아마 당신이 알 텐데요, 나는 컨서버토리에서 안무를 공부하였습니다.(참고로 에이프만은 옛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컨서바토리에서 수학했다) 그런 연유로 음악의 세계와 특별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음악과의 연관성은 사실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음악을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음악의 ‘조형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감정들이 표현되는지, 그리고 드라마투르그에 무엇을 답하는지 말입니다. 음악은 더 이상 내 작업에 ‘보조제’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고 창조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한 요소입니다.

음악을 고르는 것은 발레를 만드는 작업의 첫번째이자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후의 모든 작업의 과정을 규정합니다. 음악을 고르는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은 단지 많은 시간 음악을 듣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며, 무언가 음악 안에 있는 새롭고 현대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음악이 잘 알려진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한국 관객들에게 팁을 준다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저는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을 때 당신은 그의 주인공들의 심리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작가의 이해력을 느낄 것이며, 또한 러시아 삶을 반영함에 있어서 놀라운 열정과 정확성을 느끼게 됩니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는 여주인공의 내면세계에 대한 몰입뿐 아니라 그녀의 성격에 대해 완벽한 사이코-에로틱한 이해가 있습니다. 현대 문학에서 우리는 그러한 열정과 은유와 환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내 안무에 필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나는 마침내는 소설을 넘어섰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받아들인 감정적이고 에로틱한 세계는 우리 공연의 세계와 같습니다. 저는 오늘날에도 남자와의 에로틱한 관계에 사로잡혀 아이들을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여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희고, 검고, 붉은 드레스는 그녀의 감정변화와 처해있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공연을 위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술과 삶 속에서 색깔은 특별한 드라마적 의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검은색은 죽음의 비극과, 흰색은 결혼과, 붉은 색은 열정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전형적인 것을 바꾸고, 새로운 연극적인 효과를 주는 것은 가능합니다.

-안나가 브론스키를 만난 후 심리변화를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이해시키고 주제를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같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안무를 창작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안무가는 수많은 여성과 남성 캐릭터를 만들어 냅니다. 제 발레에 있어서 여성의 주제는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몸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저는 제 자신을 열정을 춤추는 그녀에게 구체화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 표현의 한계를 위해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안나 카레니나가 제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무용수들과 함께 우리가 이러한 사이키델릭 타입의 여성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몇몇의 사람들은 우리의 비전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은 사이코드라마로 불려지는 동시에 관객들을 감정적이고 지적으로 영향을 주는 황홀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엘리트적이거나 실험적인 예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현대 발레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우리의 스타일을 발전시켜왔고, 이것은 최근에 많은 추종자를 양산했습니다. 최근에 저는 우리의 스타일과 유사한 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젊은 안무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았습니다. 발레의 다른 경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우리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발레로 만든 첫 번째 안무가로 유명합니다. 그런 작업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런 작업을 하면서 오리지널 작품의 명성과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책임감이나 우려를 느낀 적이 있습니까?

=발레를 비롯한 많은 무대예술의 바탕이 되는 문학 작품은 발전되어야 합니다. 최초에 저는 발레 작품을 위한 새로운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진지한 문학과 진실한 음악을 결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저는 항상 새롭고 독립적인 작품을 만듭니다. 문학적 주제는 단지 발레의 바탕이 될 뿐이며, 제 공연들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판타지아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도스토예프스키, 셰익스피어, 체홉, 톨스토이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현대발레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차이코프스키, 몰리에르, 발란신 같은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의 삶과 이야기를 발레화하였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혹시 당신의 마음 속에 발레화하고 싶은 위대한 아티스트나 작품이 있습니까?

=저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삶에 대한 발레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 작품은 특별히 프로이트의 심리와 연관된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어떤 인물입니까?

=안나 카레니나는 비극을 위해 창조된 매우 특별한 타입의 여성입니다. 그녀의 관능적인 세계는 매우 모호합니다. 만일 그녀가 브론스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났을 겁니다. 조금만 밀어 부쳤어도 그녀가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안나는 한 남자에 대한 성적 집착에 의해 파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는 약물 중독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지속적으로 아편을 먹으면서, 신경과민으로 인한 신경쇠약증에 빠진 그녀, 바깥 세상을 향한 적개심… 흉악한 존재로 변한 그녀는 그녀 자신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자살을 택함으로써 그녀는 자신과 그녀를 그 지경으로 몰아넣은 친척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저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훌륭한 작품이지만 톨스토이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작품전체에 다 이식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프로이드보다 더 깊은 프로이드의 세계입니다. 그녀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그녀 자신을 희생토록 했습니다. 이것은 희생당한 여성의 타입입니다. 그녀는 죽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비난하거나 죄를 면제하여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녀는 동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삶은 그녀에게 점차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모성애를 잃었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그 두 가지의 사랑이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브론스키를 선택했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19세기가 일치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여성과 어머니로서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이러한 카테고리는 가정이란 개념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넘어, 신의 도덕성을 포함한 모든 것을 뛰어 넘어 - 이것은 당신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녀는 남자를 잃은 상실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마 같은 세상의 창조물로 다시 태어난 한 여성의 비극입니다.

제 견해로 남편 카레닌은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나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합니까?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결국 가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이러한 열정이 바로 그의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로부터 이것을 숨기고 귀족들과 함께 즐기는 것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혼자였고, 발가벗겨졌고, 내면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당신에게 춤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춤에 의해 살아가고, 춤을 위해 삽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춤의 철학을 소개한다면?

=안무는 선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안에는 미학적인 아름다움, 감정과 에너지가 있습니다. 안무가가 문학을 어필한다고 해도, 특별한 형식의 세계는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예술이며, 발레는 발레 고유의 법칙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반대로 춤은 구경꾼들을 인간의 열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며, 저에게는 무엇보다 그 지점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의 움직임은 애크러배틱에 가깝고 무용수들에게는 어렵고 위험하게까지 보입니다. 이런 어려운 움직임을 요구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백조의 호수> 같은 작품은 매우 어렵습니다. 무용수는 기본적으로 매우 훌륭한 테크닉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별한 작용, 테크닉과 스타일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무용수의 능력이 요구됩니다. 전통적인 작품에서는 밖으로 보여지는(외적인) 면, 움직임(안무)의 그림, 현상(그래픽)이 보다 중요합니다. 여기서는 전문성이 필수 요소입니다. 우리 단체에서는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우리 무용수들은 신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깊이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단체에 우리를 하나로 묶고 다 함께 이루고자 하는 지향점에 대한 지시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는 리더가 있고 그 리드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리더를 믿는, 그리고 상호 합의된 지향점에 따르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협력에 의해 이루어 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리더의 아이디어가 성공이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지향점을 포기했던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 지향점이 우리 모두를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이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금은 매우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이유입니다. 나는 결과를 달성하는 것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모든 것을 제거했습니다. 나는 목표를 위한, 거의 금욕적인 삶을 삽니다. 그리고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남았고, 그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무용수들의 역할이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안나의 역할. 몸으로 표현하기 불가능할 것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시스템이 있습니까?

=창작에 어떤 시스템은 없고 만들기 원치도 않습니다. 어쩌면 나 대신 누군가가 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매일 열심히 안무적 창조를 하고 그 실현은 우리에게 큰 결과를 가져옵니다. 당신이 매일 스케일을 연습하면 당신의 손가락은 점차 자유롭게 키보드를 날아다닙니다. 무용수가 안무(움직임)를 이해하고 느끼면 그의 몸은 점차 가장 어려운 테크닉이라도 자기 몸에 익숙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런 무용수들은 연극적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무용수들이 눈부신 테크닉뿐 만 아니라, 연극적인 재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나라 많은 도시에서 공연을 했다. 당신이 한국에서 공연했을 때 만났던 한국 관객들의 느낌은?

=한국 관객들은 매우 감성적이고 지적입니다. 나의 작품이 올려지는 곳에 있을 때 기분이 좋고 나의 작품을 잘 이해하는 무용 전문가들이 모이는 곳이 좋습니다.

-이번 한국에 왔을 때 하고 싶은 것이나, 꼭 먹고 싶은 음식이 있나요?

=일반적으로 건강에 좋고 낮은 칼로리의 음식을 좋아하고 한국에서는 김치를 좋아합니다.

-앞으로 한국에 꼭 소개하고 싶은 당신의 작품은?

=당연히 나의 최근 작품인 <오네긴>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3월3일에 오픈 4월 말까지 공연하고 미국 투어를 갑니다. 한국 관객들도 이 작품을 좋아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끝으로 오는 3월 당신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젊은이들과 일해 왔으니까요. 그들에게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 스스로를 파악하기 위해 멈추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느끼고,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미션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생각해 볼 시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많은 것이 나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이 누군가 탓해야 한다면 자신을 탓하십시오. 정부나 이웃에게 이유를 돌리거나 다른 사람을 질투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절대 다른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하십시오. 인생 전체를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09. 03. 05. 

P.S. 인터뷰에서 내게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다. 먼저 카레닌에 대한 에이프만의 옹호. "제 견해로 남편 카레닌은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나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합니까?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결국 가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이러한 열정이 바로 그의 재앙이었습니다." 카레닌을 열정을 가진 인물이자 '비극적인 인물'로 보는 견해를 나는 따로 접해보지 못했다. 그의 발레에서 왜 카레닌에게 그토록 많은 비중이 두어지는지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두번째는 '서프라이즈'. 그의 신작 <오네긴>에 관한 얘기다. "당연히 나의 최근 작품인 <오네긴>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3월3일에 오픈 4월 말까지 공연하고 미국 투어를 갑니다. 한국 관객들도 이 작품을 좋아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호, 내가 가장 보고 싶은 발레 작품이 하나 생겼다. 내년에는 우리도 볼 수 있을까? 참고로, 에이프만 발레단의 리허설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pVTjdr724Ac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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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리스 에이프만의 차이코프스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07 15:14 
    한국을 자주 찾는 러시아의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의 발레 <차이코프스키>의 공연을 위해 주연 발레리노와 함께 내한했다는 소식이다.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연합뉴스(09. 09. 07) <인터뷰> 안무가 에이프만ㆍ발레리노 말라코프 "한국 무용수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통하는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에이프만) "일본에서는 90번 넘게 공연했는데, 한국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한국에 대한 여러
 
 
하이드 2009-03-06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엘지 티켓 오픈할때 방심했더니, 벌써 코앞이군요. 3일만 하는거라 좋은 자리가 남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로쟈님 소개해주신 덕에 오랜만에 공연나들이 하게되었네요. ^^

로쟈 2009-03-06 22:37   좋아요 0 | URL
며칠전까지는 자리가 좀 있던데요.^^

하이드 2009-03-06 23:47   좋아요 0 | URL
2007년 왔을때는 그 해 티켓 오픈하자마자 공연 3개를 모조리 가장 먼저 하는 바람에, 정말 좋은 자리로 예매 했었는데 이번엔 좀 많이 늦었죠.

그래도 늦게 한 것 치고는 꽤 좋은 자리에 예매했습니다. ^^ 가격도 너무 착하네요.

비로그인 2009-03-06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는 남자를 잃은 상실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마 같은 세상의 창조물로 다시 태어난 한 여성의 비극입니다." 인터뷰 기사가 여러군데 좀 이상하지만 이것은 유독 그렇군요. 사회가 안나 카레니나를 정죄할 권리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요. 이 소설이 성경을 인용(로마서 12:19)하고 시작하지 않습니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라는 구절이지요. 나보코프가 이 구절에 기대어 해설한 바에 의하면, 사회도 안나를 비판하고 정죄할 아무런 권리가 없지만, 안나도 복수의 자살을 함으로써 브론스키에게 복수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메시지가 있지요.

"제 견해로 남편 카레닌은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나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합니까?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결국 가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글쎄... 알렉세이 카레닌이 "비극적"이고 "노력하는 평범한 남자"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카레닌의 위선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겠죠? Pavear & Volokhonsky 부부의 번역(위의 영역본에서 제일 왼쪽)을 읽으면서 알렉세이 카레닌의 위선과 교묘한 심리가 혐오스럽더군요.

독자마다 나름 달리 읽을 수도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인정하면서도 간혹 제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부 작품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냥 넘어가려다가 에이프만의 말에 - 어쩌면 좀 이상한 번역(?)에 - 토를 약간 달아봅니다.^^;

로쟈 2009-03-06 22:37   좋아요 0 | URL
러시아어 원문을 보고 싶네요. 아니 영어로 인터뷰를 했는지도 모르겠군요...

urblue 2009-03-0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예매해뒀습니다. 지금은 안나 까레니나를 다시 읽고 있는 중이구요. 대학 때 읽었지만, 그때는 톨스토이 작품은 좀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아주 재밌네요. 문제는 좀처럼 속도가 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만. ^^;
존 크랑코의 <오네긴>은 9월에 공연이 있습니다. 내년엔 에이프만의 <오네긴>도 왔으면 좋겠네요.

로쟈 2009-03-06 22:38   좋아요 0 | URL
네, <오네긴>을 같이 기다려보지요.^^

anthony 2009-03-06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기대중이에요-
저번에 '차이코프스키'가 최고의 무용 공연이었던지라ㅠㅠ

로쟈 2009-03-07 13:32   좋아요 0 | URL
^^
 

밀턴의 <실낙원>을 읽기 위한 첫강의가 있었다. 밀턴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17세기 영국의 정치-사회사에 대한 조감도 필요했지만 아직은 입에 설었다. 아무려나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한달 후에는 <실낙원>을 완독한 소감도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에 대한 강의를 하려니까 떠올리게 된 글은 '클래식'을 주제로 한 사보에 실은 것이다. 지면에는 약간 축약된 글이 실릴 터인데, 여기에는 초고를 옮겨놓는다. 글의 일부는 예전에 적은 '클래식이란 무엇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985806)에서 가져왔다.   

클래식(Classic)이란 무엇인가? 서양의 말이나 개념이 국내에 수용되면서 의미의 변형과 굴절이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클래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한국어에서 ‘클래식’이란 말은 이중적이다. 영어사전에서 ‘Classic’은 명사일 분야를 막론하고 ‘일류 작가’나 ‘걸작’을 가리키는 것이 첫 번째 뜻이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작가와 작품을 가리키는 것이 두 번째 뜻이다. 사실은 첫 번째 뜻이 두 번째 뜻에서 파생되어 나왔을 것이다.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는 문화사의 전범이 되는 시기이자 가장 빼어난 시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똑같이 ‘클래식’으로 옮기지만 복수형 어미를 취한(하지만 단수로 취급하는) ‘Classics’는 보다 한정적으로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이를 연구하는 ‘고전학’을 뜻한다.  

 

한편, 이런 ‘본래적’ 의미와는 다르게 국어사전에서 ‘클래식’은 ‘서양의 고전음악’으로 정의된다. ‘Classic’이 ‘클래식’으로 음역(音譯)되면서 의미의 축소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언어 현실을 인정하자면 우리말에서 ‘클래식’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해야겠다. 즉, 좁은 의미에서의 클래식은 고전음악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의 클래식은 ‘고전(古典)’ 일반을 가리킨다. 이 넓은 의미에서의 클래식이 이 글의 테마다. 그래서 ‘클래식이란 무엇인가’는, 다시 ‘고전이란 무엇인가’라고 바꿔 물어도 좋겠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Why read the classics?)’란 질문을 던지면서 고전을 이렇게 정의했다(여기서 칼비노가 말하는 고전은 ‘고전 문학작품’을 뜻한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이 정의에 덧붙여 칼비노는 “동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드러낸다.”고 꼬집었다. 그가 말하는 ‘위선’은 흔히 고전을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은 책”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상응하는 것이겠다. 모두들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감히 ‘안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 그래서 ‘지금 읽고 있어’가 아니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이 소위 고전이다. 하지만 칼비노의 정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합당한 정의다. 고전은 한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 다시 읽는 책이고 반복해서 읽는 책이기에 그렇다. 왜 그런가?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물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선사 시대의 그리스에서부터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바세이 신전, 파르테논 신전 조각,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로마 미술품 등이 15개의 전시실이 나뉘어 배치돼 있으며 요즘은 온라인 투어도 가능하다. 박물관 관람이 대개 그렇듯이 이런 유물들을 들여다보자면 자연스레 이 고대인들과 현재 우리 자신들 사이의 ‘간격’을 생각해보게 된다. 즉, 박물관에서 접할 수 있는 고대 세계의 문학․언어․문화․사고방식이 현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며, 우리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읽어낼 수 있을까란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한 ‘클래식’ 입문서의 저자들은 이러한 물음 앞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물․조각․도기․그림 등은 “물질적인 유물 이상의 것”이 된다고 말한다. 옛것(古)이지만 현재를 되새김해보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클래식이고 고전(古典)이다. 따라서 고전을 읽는 것은 ‘그들의 문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에 ‘우리의 문화’를 견주는 것이며, ‘우리의 문화’ 속에 아직 숨 쉬고 있는 그들의 ‘살아있는 유산’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클래식 속에는 어떤 의미가 무엇이 새겨져 있으며 무엇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일까? 다시 클래식이란 말의 어원으로 돌아가 보도록 한다. 일본의 인문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는 ‘클래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결국은 ‘클래식에서 배운다’는 뜻이라면서 이 말의 라틴어 어원을 이렇게 풀어준다. 곧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형용사이며 처음부터 ‘고전적’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클라시쿠스는 사실 ‘함대(艦隊)’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classis)’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함대라는 말은 군함이 적어도 두세 척 이상은 있다는 뜻이다. 클라시스는 ‘군함의 집합체’라는 의미였다. ‘클라시쿠스’라는 형용사는 로마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그것도 한 척이 아니라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富豪)를 뜻하는 말로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가리켰다. 다시 말해서 전쟁과 같은 긴급한 어려움에 처한 국가에 큰 도움을 주는 재력가를 가리키는 말이겠다.   

이 ‘클라시쿠스’와 ‘클래식’은 어떤 관계인가? 이건 유비적 관계다. 국가적 위기에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상황을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인생의 위기에 당면했을 때 정신적인 힘을 주는 책이나 회화, 음악, 연극 등을 통칭하여 ‘클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이마미치 교수에 따르면 중세의 비교적 이른 시대, 즉 교부시대부터 그러한 의미로 클래식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비유컨대, 위대한 고전은 거대한 ‘항모 선단’쯤 되는 것이다. 더불어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 않다면 ‘고전’은 ‘쇳덩이’나 ‘종이더미’ 이상의 적극적인 의미를 갖기 어렵겠다. 이 클래식이란 말을 동아시아문화권에서는 ‘고전(古典)’이라 옮긴 것인데, 이것은 ‘오래 전부터 소중하게 여겨온 서적’이란 뜻이다. 여기서 ‘典’이란 글자는 상형문자로 다리가 달린 책상 위에 옛 책의 형태인 두루마리를 소중히 올려놓은 모양새를 의미하며,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이라 한다.  

물론 이 ‘고전’이란 말에는 ‘위기적 상황에서 힘이 되어 준다’는 클래식의 적극적인 어원적 의미는 가미돼 있지 않다. 그리고 ‘고전음악’을 뜻하면서 아울러 ‘고급’이나 ‘걸작’ ‘명품’을 뜻하는 우리말 ‘클래식’에도 그러한 어원적 의미는 결여돼 있다. 지금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불황에 처하여 한갓 ‘고전 나부랭이’를 들먹이는 것은 매우 한가한 노릇이 아닌가라고 혹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클래식이 갖는 본래적 의미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거나 망각한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서 막강한 정신적 힘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클래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클래식이 ‘나’에게는 아무런 용기도 지혜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힘만 빠지게 한다면 그것은 ‘클래식’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겐 클래식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그러니 억지로 클래식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클래식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준 작품들을 뜻한다면, 그런 맥락에서 ‘나의 클래식’, ‘나만의 클래식’ 목록도 만들어질 수 있다. ‘나’에게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나만의 클래식’이다.    

물론 클래식이 불어넣어주는 삶의 희망이 단지 ‘생존’만을 의미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며 고전에서 배워야 하는 삶은 당당한 삶이고 기품 있는 삶이다. 삶의 기품은 부유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시 라틴어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식(프롤레스)밖에는 내놓을 게 없는 사람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렀다 한다. 즉 ‘클라시쿠스’가 재산이 있어서 국가를 위해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부유층을 가리킨데 반해, ‘프롤레타리우스’는 오직 자기 자식을 내놓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했다. 한국어의 말장난을 갖다 쓰자면 ‘클라시쿠스’는 ‘맨션계급’이고 ‘프롤레타리우스’는 ‘맨손계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클래식의 가치와 효용이 이 두 계급에 모두 가 닿는다는 점이다. 즉 클래식은 ‘고귀한 자’도 읽어야 하고 ‘나약한 자’도 읽어야 한다. ‘고귀한 자’는 고전을 통해서 자신의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나약한 자’는 자신의 처지를 극복할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다. ‘함대’를 기부할 정도가 못되는 ‘고귀한 자’는 ‘고귀한 척하는 자’일 따름이고, 형편 때문에 고전을 읽을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나약한 자’는 ‘나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자’이다. 이제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차례다. 

09.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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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31 10:08 
    '우리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는 얼마전에 출간된 <고전의 미래>(길, 2009)의 부제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이자 고전학자인 살바토레 세티스. 200쪽 남짓하는 분량이 너무 짧아서 관심에서 제쳐놓고 있었는데, 책을 번역한 김운찬 교수의 소개글이 있기에 일단 스크랩해놓는다. 고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도 들어가 있는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
 
 
2009-03-05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5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 필요 때문에 존 밀턴의 <실낙원>을 읽는다. <실낙원>을 읽으려고 하니 자연스레 밀턴에 대해서도 읽게 된다. 그다지 많은 책이 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막상 읽으려고 하면 또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기본이 되는 책은 박상익 교수의 <밀턴 평전>(푸른역사, 2008). 작년에 '6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17762)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읽지 못하고 지금 읽는다. 간략히 말하면, "영문학사상 최고의 서사시인이자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이라는 세간의 일반적 평가 외에도 시력 상실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의지와 국왕파의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공화정에 대한 꿈을 견지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세세하게 짚어주는 전기이다. 밀턴은 <실낙원>의 저자이면서 <아레오파기티카>(소나무, 1999)의 저자이기도 하다. 역시나 박상익 교수에 의해서 옮겨진 바 있는 이 책은 '언론 자유의 경전'으로 불리니 만큼, 가뜩이나 언론이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요즘 한번쯤 손에 들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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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3-03 23:34   좋아요 0 | URL
짧지만 C. S. Lewis 의 'A Preface to Paradise Lost: Being the Ballard Matthews Lectures Delivered at University College, North Wales, 1941' 도 빼놓을 수 없지요. ^^

로쟈 2009-03-03 23:37   좋아요 0 | URL
나름 고전인가 보군요. 요즘 같아선 <실낙원> 텍스트라도 제대로 읽으면 다행일 거 같습니다.^^;

비로그인 2009-03-04 00:00   좋아요 0 | URL
하긴, 그렇군요. ^^

밀튼의 작의와 시작 그 자체에 대한 길잡이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군더더기가 없이 짧아서 좋습니다. 제가 짧은 책을 좋아하거든요. ^^

로쟈 2009-03-04 21:12   좋아요 0 | URL
짧은 책들이 강의할 땐 요긴하죠.^^
 

알다시피, 인도의 빈민가를 다룬 대니 보일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지난주에 아카데미 영화상을 석권했다. 관련기사 몇 편을 모아놓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판타지를 걷어낸 '현실'은 어떤 것인지 한번 더 직시할 필요가 있다. '퀴즈쇼'와는 다른 현실을...

경향신문(09. 02. 28)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본 지구촌 빈민가의 삶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8개부문을 석권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어린 주인공들이 26일 인도 뭄바이의 슬럼가에 ‘금의환향’해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했다 해서 이 아이들과 슬럼 주민들의 삶이 갑자기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 곳곳 슬럼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슬럼은 지구촌 전체에 확산되고 있지만 슬럼가 출신이 ‘밀리어네어(백만장자)’가 되는 것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미 CNN방송은 이날 영화에 출연했던 아자루딘 이스마일(10)과 루비나 알리(9) 두 어린이가 귀환하자 뭄바이 공항에 시민이 몰려들어 환호했다고 보도했다. 시내에서 열린 축제가 끝나자, 두 아이는 철길 옆 판잣집 안의 플라스틱 박스들 밑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이날 ‘더타임스오브인디아’는 다라비 슬럼을 재개발하려는 시 당국의 야심찬 계획이 주민 이주대책 문제로 늦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도의 경제수도 뭄바이에서는 인구 1400만명 중 1000만명 이상이 슬럼가의 무허가 판잣집에 산다. 당국은 다라비 슬럼을 없애려 하지만 살 곳을 잃게 될 빈민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재개발 압력과 그에 맞선 빈민들의 충돌은 비단 인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동아프리카 최대도시인 케냐 나이로비의 키베라 슬럼도 그중 하나다. 케냐 시골과 주변국들에서 온 빈민 100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이 슬럼은 동물의 낙원을 자랑하는 케냐의 치부다. 케냐 정부는 오는 7월부터 키베라 재개발을 시작할 방침이지만 26일 주민들과 이주대책을 합의하는 데 실패했다.   

멕시코의 광역수도권(ZMVM)에는 신도시들을 따라 슬럼들이 띠처럼 둘러 있다. 이집트 사막에는 맘루크 왕조 시절의 묘지에 사는 빈민이 늘면서 ‘사자(死者)의 도시’라는 기묘한 마을이 생겼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빈민촌’이라는 뜻), 파키스탄 카라치 근교의 오랑기 타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캄풍바루(‘새 마을’), 터키 이스탄불의 게체콘두(‘하룻밤에 지은 집’), 이라크 바그다드의 사드르시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웨토 등 슬럼의 이름은 다양하지만 사는 모양은 비슷하다. 오염된 물과 공기, 에너지난, 질병과 실업, 마약과 범죄, 높은 자살률 등이 슬럼들의 공통분모다.  

제3세계 대도시의 슬럼들은 대개 1970년대 후반의 채무위기와 8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주도하의 구조조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사회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제3세계의 슬럼화는 산업이 성장하면서 농촌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들어오면서 일어난 ‘선진국형 슬럼화’와는 다른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제3세계 슬럼 주민들은 더 나은 여건을 찾아 도시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농촌에서 삶의 기반을 잃어 등떠밀려 나오게 된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세계 곳곳에서 인구 1000만명 이상의 거대도시, 이른바 ‘메가시티’가 늘어난 것은 슬럼이 커졌기 때문이다. 유엔은 지난해 전 세계 인구 중 도시 거주자가 절반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했다. 그중 10억명 이상이 슬럼에 살고 있다. 2050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70%가 도시에 살 것이며 그중 절반은 슬럼 주민일 것으로 예상된다.

부의 독과점에 맞선 슬럼 빈민들의 저항은 새로운 흐름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부재지주의 집을 차지하는 ‘스쿼팅(squatting·무단점유)’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스쿼팅 지지자들은 “재산권보다 생존권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2005년 남아공 항구도시 더반에서는 ‘아발랄리 운동(AbM)’이라는 무단점유 캠페인이 시작돼 전국으로 퍼졌다. 인도 서벵골에서는 2007년 토지퇴거반대위원회(BUPC)가 결성됐다. 브라질에서는 대농장주들에 맞선 ‘토지 없는 농민운동(MST)’에 이어 ‘집 없는 노동자운동(MTST)’이 일어나 800만채 이상을 점유했다.

반면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주로 슬럼 없애기에 초점을 맞춘다. 유엔 인간거주계획(UN-HABITAT)과 세계은행 등은 2001년부터 ‘슬럼 없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빈민가 주거여건 개선과 교육지원 등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개도국의 구조적 빈곤을 건드리지 못하는 캠페인은 ‘빈민 강제퇴출’이라는 부작용만 낸다는 비판도 많다.(구정은기자)   

아시아경제(09. 02. 28) '슬럼독' 아역배우, 영화 인기로 '일희일비' 

아카데미시상식 8개 부문 수상작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출연한 10세 소년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희일비하고 있다. 영국 타블로이드 '더 선'에 따르면 이 영화에 출연한 아자루딘 이스마일은 미국 LA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고 26일(현지시간) 인도 뭄바이로 돌아온 이튿날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아자루딘의 아버지 모하메드는 이웃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을 발로 차고 뺨을 때렸다.  

모하메드가 아들을 구타한 것은 아자루딘이 장시간 비행과 주위의 관심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껴 혼자 있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 선'은 모하메드가 아들의 인기를 이용해 뭄바이 다라비 슬럼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더 선'에 따르면 모하메드는 "아들을 때린 것에 대해 사과한다"며 "아들의 귀국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다.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하며 아들이 돌아와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6일 영국 BBC 온라인판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빈민가 아역배우들이 새집으로 이사할 예정이라고 인도 정부관리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인도 정부가 아자루딘과 알리의 가족에게 무상으로 집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두 가족은 현재 영화의 실제 배경인 뭄바이의 빈민가에 살고 있다. 지역 주택협회의 아마르지트 싱 회장은 "이 아이들이 국가에 영광을 안겨줬기 때문에 무상으로 집을 받아야 한다"면서 "마하라슈트라 주지사도 이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한편 '트레인스포팅'의 대니 보일 감독이 연출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뭄바이 빈민가에서 자란 소년이 거액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 결승에 진출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고경석 기자) 

경향신문09. 03. 02) [베이징에서]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  

인도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중국에서 적잖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쓴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에는 아시아영화가 할리우드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반오리엔탈리즘도 깔려 있다. ‘중국신문주간’이 이 영화를 두고 ‘아시아’적 요소를 잉태했다고 평가한 것이 그 사례다.

중국 지식인들에게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자국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창(窓)이다. 사회평론가 왕궈창은 ‘우리도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찍을 용기가 있다’라는 칼럼에서 왜 중국에는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가 나오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중국에도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묘사된 경찰의 강압수사, 아동학대, 빈부격차 같은 사회모순이 만연해 있지 않느냐는 우회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중국인들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빈민굴의 백만장자)를 ‘핀민푸웡(貧民富翁)’이라 부른다. 이 영화 제목은 지식인들이 중국을 얘기할 때 쓰는 ‘푸궈충민(富國窮民:부유한 나라, 가난한 국민)’이라는 말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지난해 중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독일을 제치고 세계 3위로 부상했다. 무역액도 3위이고, 외환보유액은 세계 최고다. 그러나 개인 소득은 최하위권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7년 말 중국의 1인당 GDP는 2485달러로 세계 99위에 그쳤다.

지난 30년간 중국 공산당은 ‘국부(國富)’ 만들기에 주력했다. 파이를 키운 뒤 나누자며 인민들을 다독였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수출과 투자를 통한 경제성장이 한계에 부딪치자 선 성장 후 분배론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길은 국민 소비를 통한 내수확대뿐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880조원대의 재정 투자에 나섰다. 전자제품을 사는 농민에게 보조금을 주는 가전하향(家電下鄕) 정책도 시행 중이다.

국부에 대한 분배 구조의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민들에게 지갑을 열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경제전문가들은 중국 정부가 진정으로 내수진작을 통한 소비 확대에 나서려면 민영화 등을 통해 국부를 국민에게 환원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의 국유지와 11만 국영기업체의 보유 자산 총액은 79조위안에 달한다. 이를 민영화하면 국민 한 사람당 6만위안이 돌아간다. 국영기업체 상장 주식만 민간에 돌려도 13억 인민은 각각 5500위안어치의 주식을 소유할 수 있다. 2조달러(약 13조위안)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국민에게 분배할 경우에는 각각 1만위안을 손에 쥐게 된다.

그러나 공산당이 영도하는 중국에서 국부가 민간으로 환원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차선책은 의료, 교육, 주거 분야의 사회보장제를 확충하고 노동자의 세금을 줄여주는 일이다. 3일 시작되는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는 경제위기 등 민생 문제가 집중 거론될 것이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국부(國富)와 민부(民富)의 균형을 이루는 방안도 논의됐으면 한다. 공자도 “없는 것보다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不患寡而患不均)”고 하지 않았던가.(조운찬 특파원)  

09.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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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3-0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년대에 빈민운동가 솔 알린스키가 청계천 판자촌을 방문해서 이런 지옥같은 곳이 있다니...했답니다.

로쟈 2009-03-03 23:38   좋아요 0 | URL
용산 참사도 '지옥'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죠...

노승영 2009-03-0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보고 싶은 영화가 꽤 되네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마오쩌둥』 오류는 아래 글에 덧글로 올려주시거나
제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http://cafe.naver.com/translate2meditate/12

로쟈 2009-03-04 21:11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한데, 4월은 돼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마구 쪼들리고 있어서요.--;
 

아마도 내일자 경향신문 지면에 실리는 '책읽는 경향' 코너를 옮겨놓는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811005&code=960207). 지난주에 청탁을 받았지만 짧은 분량이어서 계속 미루다가 오늘 오전에야 원고를 작성해서 보냈다. 일간지라서 저녁에 벌써 기사로 올라와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 2008)이 떠올리게 해주는 간단한 단상을 적었다.  

   

경향신문(09. 03. 02) [책읽는 경향]쓰레기가 되는 삶들  

요즘 부모들의 관심은 온통 아이들의 성적과 키에 쏠려 있는 듯하다. 부유층과 서민층을 가리지 않기에 ‘평균적인’ 관심사라고 해야겠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아이들의 평균적인 학력과 키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중요한 건 ‘내 아이’의 성적이고, 다른 아이와의 성적 ‘차이’다. 키 또한 그렇다. 성장기 아이의 키가 ‘상위 90%’(성장도표 백분위수 기준)라고 하면 부모는 우쭐댄다. 그렇게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고 남보다 뛰어나길 열망한다. 그래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우리’와 낙오된 ‘그들’이 나뉜다. 한편에는 성공한 소수로서의 ‘우리’, 곧 ‘대한민국 1%’나 ‘최소한 20%’에 턱걸이한 ‘우리’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빈곤층과 몰락한 중산층이 구성하는 ‘그들’이 있다. ‘우리’는 항상 ‘그들’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질타한다. 그런 ‘그들’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고,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충고도 보탠다. 그렇게 ‘우리’의 특권을 정당화한다. ‘그들’은 ‘쓰레기’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지그문트 바우만·새물결)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와 ‘그들’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부유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우리’이고 빈곤한 저개발 국가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없으며 ‘우리’가 존립할 수도 없다는 점. 책상 앞에 앉아 ‘우리’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우리 임금의 10분의 1만 받으면서 화장실을 청소해주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안락과 품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는 기식자다. 성장의 한계를 넘어 거인증에 걸린 지구는 ‘기식자’와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09. 03. 01.  

P.S. "책상 앞에 앉아 ‘우리’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우리 임금의 10분의 1만 받으면서 화장실을 청소해주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안락과 품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란 구절은 바우만(<쓰레기가 되는 삶들>, 90쪽)에게서 간접 인용한 것이고, 바우만은 리처드 로티(<철학과 사회적 희망>)에게서 인용한 것이니까 일종의 간접 재인용이다.   

바우만이 이 인용문의 앞뒤에서 하고 있는 얘기는 '그들'의 과잉에 대한 부국들의 대처다.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인구와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20개년 계획의 '인구와 건강 프로그램'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들'(개발도상국)이 비용의 2/3를 부담하고, '기증자' 국가들이 나머지를 부담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우리'(부유한 국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1994-200년 사이에 1억 2천2백만 명의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걱정시키는 '그들'의 과도한 출산에 맞서는 싸움에 예기치 않은 동맹군이 등장했는데, 다름아닌 에이즈이다. 예컨대 보츠와나에서는 같은 기간에 기대수명이 70세에서 36세로 떨어졌고, 2015년 예상 인구는 28%나 떨어졌다. '우리'의 제약회사들은 '지적 재산권'을 수호한다는 이유로 필요한 약을 적절한 가격에 공급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과잉을 억제하는 것이 또 다른 일면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단지 '우리의 생활방식'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더 적은 수가 아니라 더 많은 수의 '그들'을 수입해야 한다는 냉엄한 전망"이 그것이다.  

"인간 쓰레기, 특히 부유한 땅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한 인간 쓰레기를 써먹을 새로운 용도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전망이 그렇게 소름끼치지는 - 경비가 철저한 회사의 이사회의실과 지루함을 자아내는 학술회의장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듯이 - 않았을 것이다."(91쪽)  

인용문에 착오가 있어서 겸사겸사 지적을 해둔다. 삽입절을 빼면 "인간 쓰레기, 특히 부유한 땅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한 인간 쓰레기를 써먹을 새로운 용도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전망이 그렇게 소름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가정법 문장이고, 원문은 이렇다. "That prospect would not be so frightening were it not for a new use to which wasted humans, and particularly the wasted humans who hve managed to land on affluent shores, have been put."(46쪽) 즉, 현재 사실의 반대를 나타내는 '가정법 과거' 문장이다. 따라서 번역문이 '가정법 과거완료'로 옮겨진 것은 시제상의 오류이다. <유동하는 공포>에서도 그렇고, 바우만의 가정법 문장이 자주 착오를 유발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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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3-02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이익과 안락한 삶을 위해서는 타자의 인권이나 생명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 동정이니 뭐니 하는것도 결국 나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한에서만 허용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오늘의 세계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싶어 무섭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로쟈 2009-03-03 00:03   좋아요 0 | URL
사람들의 '자연스런' 욕망이 모여 결국엔 '쓰레기'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죠. 말 그대로 '유동하는 공포'입니다.--;

[해이] 2009-03-0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의 글들은 술술 읽혀서 좋은것 같습니다. 내용도 알차면서 크게 난해하지 않게 글을 쓰는거 같아서 원추이죠 ㅋ

로쟈 2009-03-03 00:0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별로 반응을 못 얻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습니다...

다락방 2009-03-0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
안그래도 어젯밤에 경향신문 읽으면서 책을 메모해 놓았거든요. 이거 한번 봐야지, 쓰레기라니, 하면서요. 그리고 이름을 보고 로쟈님과 이름이 같구나, 했는데 옆에 로쟈님이라고 쓰여있더군요. 하핫.

핸드폰에 메모해놓았어요. 어제 경향의 책소개,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로쟈 2009-03-03 22:31   좋아요 0 | URL
네, 한번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