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서 혼란스런 고유명사 음역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며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클로소프스키'를 언급한 바 있는데(375쪽), 바로 그 클로소프스키의 대표작이 출간됐다. <니체와 악순환 - 영원회귀의 체험에 대하여>(그린비, 2009). 책은 1969년에 출간됐고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과 함께 1960년대 '니체의 재발견'을 가져온 저작으로 평가된다. 참고로, 1964년 루아요몽에서 니체를 주제로 한 유명한 학술토론회가 개최되며 클로소프스키 또한 발표자로 참여한다. 기억에는 들뢰즈 혹은 푸코가 이 학술토론회를 주도했고, 발표문은 <새로운 니체>로 묶여서 출간됐다.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와 악순환>은 내가 니체 자신과 함께 읽은 가장 위대한 철학책입니다." 개인적으론 오래전에 구해놓은 영역본을 어제 책꽂이에서 빼놓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을 여유는 없고, 일단은 리뷰기사만을 먼저 챙겨놓는다.      

한겨레(09. 06. 06) 니체 ‘자아 동일성’ 벗어나 ‘무한 자유’ 얻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클로소프스키(1905~2001·사진)의 저작 <니체와 악순환-영원회귀의 체험에 대하여>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인 ‘영원회귀’를 중심으로 삼아 니체의 사유를 해석한 독특한 연구서다. 클로소프스키의 니체 연구의 결산이라고도 할 책이자, 한국어로 번역된 클로소프스키 첫 저작이기도 하다.  

 

클로소프스키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부모가 모두 화가였던 클로소프스키는 그 자신도 화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화가 생활은 클로소프스키 삶의 일부일 뿐이다. 청소년기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앙드레 지드의 영향을 짙게 받은 그는 1950년대에 소설들을 발표해 큰 관심을 끌었다. 클로소프스키의 집요한 탐구 영역은 인간의 한계 체험으로서의 ‘광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28년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들을 번역한 것은 광기 탐구의 전초전이라 할 일이다. 1934년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조르주 바타유를 만나 니체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횔덜린도 니체도 광기의 폭발로 삶을 암흑으로 밀어넣은 사람들이다. 1947년에는 ‘에로스의 광인’이라 할 사드 후작에 관한 연구서 <내 이웃 사드>를 발표했다. 그는 스스로 “나는 기인(maniaque·광인)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암시하는 대로 수수께끼 같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1969년에 출간한 <니체와 악순환>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니체>, 질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과 함께 니체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고 독창적인 해석을 제공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1960년대에 쓴 10편의 소논문을 묶은 이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독특함을 보여준다. 짧은 논문들이 모여 니체 일생의 모자이크화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클로소프스키는 니체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출간하지 않고 남겨둔 단편들을 주로 참조해 주인공의 두뇌 속으로 들어간다. 니체 삶의 역사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서 사유의 국면국면을 조명해 니체 사상의 변곡점들을 확인한다.  

이 책이 다른 니체 연구서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먼저 니체의 광기에 관한 꼼꼼한 추적에 있다. 클로소프스키는 니체의 사유가 착란(광기) 주위를 돈다는 점이 이제까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음을 이 책의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니체의 글에서 이 착란의 중심은 ‘벌어진 틈’으로, ‘심연’으로, ‘간극’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카오스’로 표현되는데, 이 카오스가 니체를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었음을 니체의 글은 보여준다. 니체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 이 카오스를 보기 시작해 발광 때까지 그 심연에 매혹당했다. 다른 니체 연구서들이 니체의 광기를 삶의 파국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보는 데 반해, 클로소프스키는 광기를 니체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힘으로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이 광기에 휘말리지 않고 사유의 명석함으로써 광기의 힘을 해부하고 거기에 저항했다는 사실에 있다. 니체의 발광은 그 대결이 마침내 끝났음을 의미한다. 카오스와 명석함의 이 지속적인 대결이 니체 사상을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클로소프스키는 해석한다.

클로소프스키가 니체 사유에서 주목하는 또다른 주제이자 이 책에서 가장 힘주어 해명하려는 주제가 ‘영원회귀’다. 영원회귀는 1881년 여름 서른일곱 살의 니체가 알프스산맥 질스마리아에서 얻은 계시적 체험의 내용이다. 삶이 영원히 되돌아오고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이 돌연한 계시를 받고 니체는 깨달음이 주는 ‘환희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의 내용이 니체 자신에게 매우 모호한 의미를 지녔는데, 그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 니체의 나머지 인생이었다고 클로소프스키는 말한다.

클로소프스키가 여기서 강조하는 영원회귀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삶을 반복해 사는 것’이다. 니체는 “역사의 모든 이름들, 결국 그것은 나다”라고 썼는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무수히 다른 모습으로 내가 다시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동일성, 그 삶의 주인인 ‘나’라는 동일자는 사라지게 된다.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삶을 반복해서 살게 된다. 삶은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의미도 없다. 끝없이 되돌아오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악순환만 남는다. 이런 인식은 ‘자아’라는 이름의 동일성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니체는 서양의 기독교 문화가 모두 ‘자아라는 동일성’에 기반을 둔 사유의 산물이라고 보았는데,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근거를 발견한 셈이 된다. 클로소프스키가 해석하는 니체는 ‘탈근대적 급진주의자 니체’의 모습이다.  

니체는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최후의 발광을 하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 사건은 니체 내부의 카오스가 그의 명석함을 집어삼켰다는 뜻도 되지만, 니체 자신이 자기동일성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다는 뜻도 된다. 니체는 자아라는 완강한 정체성으로부터 풀려나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됐다고 클로소프스키는 해석한다.(고명섭 기자) 

09.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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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6-06 11:25   좋아요 0 | URL
니체에게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 될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로쟈 2009-06-06 16:10   좋아요 0 | URL
네, 책은 평이해보이진 않지만, 니체 독자들에겐 '선물'이 될 듯합니다...

드팀전 2009-06-06 13:25   좋아요 0 | URL
한겨레에서 이 책을 보고 반가왔습니다.^^ 로쟈님이 바로 페이퍼작업 하실 것도 알았지요.ㅋㅋ

로쟈 2009-06-06 16:11   좋아요 0 | URL
저도 고명섭 기자가 리뷰를 쓸 줄 알았습니다.^^
 

서경식 교수의 세번째 미술 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고뇌의 원근법>(돌베개, 2009). 부제는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그의 전작들을 접해본 독자라면, 이내 손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나도 출간 소식을 접하자 마자 주문을 넣어서 그제 받아본 책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주말 북리뷰들에서 주목할 만한 책으로 다루어졌는데, 한겨레의 기사를 옮겨놓는다. 주로 한국 근대미술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계기로 삼고 있다. 저자 자신이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랐던 이유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에서 미술-그것도 근대미술-에 나타나는 미의식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다."(6쪽)

 

한겨레(09. 06. 06) 한국은 ‘예쁜’ 미술에서 독립하라 

그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그야말로 전혀 개념이 다른 미술 에세이집으로 미술과 미의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흔들며 1990년대 초 베스트셀러가 됐던 재일동포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 그 10여년 뒤 <청춘의 사신>이 번역·출간됐고, 이번에 그의 세 번째 미술 에세이집 <고뇌의 원근법>이 나왔다.

앞의 두 권은 일본에서 출판되고 나중에 한국어로 출간됐으나, <고뇌의 원근법>은 역시 일본의 여러 매체에 먼저 실리긴 했지만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건 한국 쪽이 먼저다. 차이는 그것만이 아니다. 더 두텁게 쌓인 연륜이 더 날카롭게 벼린 최근작일 뿐만 아니라, 2006년 4월부터 2년간 서울에 머문 그의 난생 첫 장기 한국 체험이 새롭게 부가한 문제의식을 짙게 반영한 편집이라는 점에서도 분명 다르다.    

 

» <댄서 아니타 베르버의 초상>. 1991년 슈투트가르트와 베를린에서 열린 ‘오토 딕스 탄생 100돌 기념 회고전’의 포스터가 된 그림. “이 잔혹하기까지 한 강렬함!”이라고 서 교수는 평했다. 

바로 그 한국 체험을 토대로 그가 던진 화두는 이것이다. “왜 내가 본 모든 한국 근대미술 작품은 그렇게도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실은 이 도발적인 의문이 오토 딕스 등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을 주로 다룬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다.  

서 교수에게 ‘미의식’이란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라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무언가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느꼈을 때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지 되물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미의식은 실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도 인간의 일인 이상 그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돼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그런데 “지나치게 예쁘기만 한” 한국 근대미술은 ‘지루하다’고 그는 얘기한다.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 오토 딕스의 <늙은 연인들〉

위대한 화가들로 그가 꼽는 사람들, 곧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그리고 이번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 에밀 놀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프랜시스 베이컨, 빈센트 반 고흐 등은 결코 그들 작품이 예뻐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다. 이 거장들은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그 현실을 직시해서 그리려 했고”, 그게 바로 감동의 원천이며,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는 게 서 교수 지론이다.  

왜 한국 근현대 미술은 지루한가? 그건 실제 삶과 유리돼 있고, 뒤틀린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목숨 건 대결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계열의 일부는 예외적이라 했으나, 그것마저 거의 고사 단계란다. 그렇다고 그가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예쁜 미술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미술이 판치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 이런 문제의식이 겨냥한 대상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90년대의 전세계적인 기억의 싸움 속에서 패배하고 있는 사회”, “예술과 싸움이 무관한 사회”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서 교수는 군국 일본의 참혹한 범죄행위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공범자로 가담한 일본 근현대 미술이 과거 기억을 말살하고 날조하는 전후 일본 국가의 무반성과 파렴치에 편승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미술 에세이들은 바로 국민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미의식’을 통제함으로써 편향된 국민적 이데올로기를 조작해온 일본 국가의 의도에 놀아나는 일본 대중의 의식에 일본미술과는 다른 길을 간 서양미술의 진실을 통해 충격을 가하려는 고독한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두 형이 한국에서 장기수가 된 비통한 자신의 가족사와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근대 미학주의와 강고하게 결합한 국가의 억압체제를 깨뜨리는 ‘기억의 전쟁’은 국가로부터 독립한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으며, 독립적 인간은 단지 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미의식의 차원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어가 자기성찰을 통한 미의식의 독립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게 서 교수 생각이다. 그 출발점은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더 철저하게 바라보고, 더 격렬하게 창조하라!”

서 교수는 자신에겐 ‘금단의 땅’이었던 군사독재하의 처참한 한국 현실이 일본에선 불가능했던 치열한 미의식과 미술운동, 말하자면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군사정권이라는 역사를 겪어온 조선 민족에게 그 역사들과 길항하는 미술”을 창출했을 것으로 상상한 듯하다. 그는 그 가능성을 줄기찬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확인하고 꿈꾸어 왔다.

하지만 2년간 실제 겪어 본 조국의 미술은 그렇지 못했다. ‘성공한’ 근대 때문에 근대의 미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 바로 그 일본한테서 ‘실패’를 강요당한 한국 현대미술이 근대의 수입 통로였던 일본의 한계를 복제하고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현실이 그에겐 더욱 절망적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그게 애초 일본 사회를 겨냥했던 이 책을 한국에서 먼저 묶어내는 이유다.

따라서, 살롱 회화의 정통 원근법의 한계를 비극적으로 돌파하면서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인간 고뇌의 원형을 보여줬다는 고흐에 관한 지은이의 글에서 제목을 따온 <고뇌의 원근법>은 국가주의에 저항한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준 고흐와 카라바조에 대한 생생하고 정밀한 현장실사를 통해 우리 미술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돼 있는지, 돌파구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를 점검해보는 안내지도일 수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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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ousee 2009-06-0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했듯이 한국근대미술은 일본의 한계를 복제한 수입미술이었으며 미술잡지등의 사진이미지들을 통해서 체험된 감상적 미술이 주류미술로 인정되고 대학교편을 잡으면서 서교수가 지적한 '기억의 전쟁'이 부재한 뜬구름잡는 추세만 낳았다고 봅니다. 그럼 세계현대미술계가 자본의 흐름과 영향력때문에 주목하는 현재 중국은 어떨가요? 더 교활한 방법이 나타나죠, 이데올로기 문제를 아예 상품화 하는 경향인 거죠. 희생자들의 아픔을, 눈물을 대상화하며 공예품처럼 아주 잘 뽑아내죠...그가 실망한 한국은 그러나 나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다고 평가되기 시작했죠. 서교수가 2년 체류기간에 어떤 방식으로 미술을 접하셨을가요? 유명한 서양미술관들에 시간의 아우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명작'들이 어떻게 한국의 근대미술과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서교수도 고호에 관련된 선지식과 정보, 신화때문에 그 그림을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 어느 마을사람 눈에는 삽화수준의 별 쓸데없이 힘줘 그린 그림일 수도 있지 않을가요? 한국근대미술의 문제점은 어찌보면 '읽기'가 없는 전통에서 수입된 '읽기'로 짜맞추기를 힘겹게 하는 과정에서 비롯된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nanousee 2009-06-07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놓고보니 제가 댓글다는 일이 익숙치않아 다른 분들보다 좀 길게 쓰는 촌스러움을 저지른것 같네요..죄송-_-;;

로쟈 2009-06-07 20:15   좋아요 0 | URL
더 긴 댓글들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목은 더 자세하게 쓰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서평자로 적임이실 듯한데요.^^

목동 2009-07-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이 어떤 풍경이나 사물을 본 다음의 반응은 다양하다.
스치듯 본 이미지나 문구, 그것들의 연유를 알고 다시 음미하는,,,

토끼장에서 막 생산된 새끼를 봤다. 장맛비에 둥지는 젖어 있었고,
새끼들은 밖으로 흩어저 있었다. 붉은 토끼 새끼가 징그러웠다.
이미 죽은 새끼를 면장갑을 끼고도 집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시 생각했다. 어미 토끼는 어떨까, 어미는 무감각할 수 있다.
잠시 어미 토끼 심정을 상상했다. 그 어미의 심정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 왔다. 살아 있는 나머지 새끼를 직접 들어 마른 둥지로
옮기지 않는다면, 나는 독서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토끼보다 책을 편하게 읽을 욕심으로 다섯마리의
토끼 새끼를 직접 옮기는 행동을 찔금 감고 했을 것이다.

어찌했든, 어미 토끼의 마음과 살아 있는 새끼에 대한 연민,
내 자신의 얄팍한 술수가 조화된 지금, 토끼 새끼도 나 자신도
편할 것이라는 안도감에 젖어 있다.

창밖에 나무들이 심하게 흔들린다.
작가의 마음과 화가의 마음은 어느 부분에서 일치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다를 뿐, 그들에게는 나에게 없는 무엇이 있다.
나는 그 무엇이 내속으로 들어 오기를 기대한다.
 

'이번주의 경제서'라 할 만한 책은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 공저의 <야성적 충동>(랜덤하우스, 2009)이다.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란 부제에 이끌려 바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이번주에는 <권력의 포르노그래피>도 그런 경우다). 경제학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편이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란 말의 출처가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1936)이란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서평을 읽어보니 그 케인스주의의 '진정한 함의'가 무엇인지 밝혀주는 책으로도 읽을 수 있는 모양이다(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해당하는 것이 케인스에게는 '야성적 충동'이라고 한다). 장하준 교수의 추천사는 이렇다. "현재의 경제위기를 이해하고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한국경제(09. 06. 05)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두려움의 전염성이 경제를 움직인다

케인스주의가 다시 뜨고 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글로벌 위기에 직면한 세계 경제는 끔찍했던 악몽을 되새기면서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큰 획을 그었던 케인스의 주장에 관심을 쏟고 있다. 모두가 케인스주의자를 자처한다. '변화의 기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공공연히 케인스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케인스주의의 진정한 함의는 모호한 게 사실이다. 대부분 정부의 시장 규제,적자 재정,국유화 등에 관심을 갖지만 정작 '케인스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간과하고 있다. 경제의 작동원리와 정부의 역할에 대한 케인스의 깊은 분석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 메커니즘이 파탄난 현 상황에서 시장을 보완하고 대체할 '보이는 손'의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 애커로프(버클리캘리포니아대 교수)와 저명한 금융 경제학자 로버트 쉴러(예일대 교수)의 공동저서 《야성적 충동》은 케인스 혹은 그의 대표작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의 근본 메시지를 현대적인 맥락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최근의 경제위기가 이미 해결된 것으로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급하게 새로운 해답을 찾고 있는' 상황에서 대공황에 비견될 충격에 시달리는 우리의 문제와 위기 극복 방안에 대한 은사로서 케인스의 진정한 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책에서 케인스의 진정한 메시지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다. '행동에 대한 즉흥적인 욕구'를 의미하며 '동물적 본성' 혹은 '야성적 혈기'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개념이야말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응하는 케인스 사상,특히 <일반이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케인스는 수리적인 계산과 추정에 기반한 이성적 · 합리적 접근에서 벗어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그는 '심리적 요인'이야말로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보았으며,1930년대에 일어난 대공황은 비관과 낙담 그리고 회복기의 심리적 변화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들도 불황과 실업,빈곤,부동산 가격 변동 등 경제학적이며 심리학적인 사례를 근거로 자유시장경제가 만들어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또 '야성적 충동'의 다섯가지 요소인 자신감,공정성,부패와 악의,두려움,이야기 등이 현대인의 경제생활에 미치는 영향과 레이거노믹스,대처리즘,합리적 기대이론의 허점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특히 경제학에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통찰력을 가미한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을 기반으로 이 책을 썼다. 애커로프와 쉴러는 "경제학적 개념에서 야성적 충동은 경제에 내포된 불안정하고 일관성이 없는 요소를 말하며,사람들이 모호성이나 불확실성과 맺는 독특한 관계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경시되거나 아예 무시돼 온 측면들을 부각시킨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금융위기 및 주택위기와 같은 경제위기가 대부분 사고 경향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외견상 견실한 재무구조에도 불구하고 단 며칠 만에 유동성이 바닥나 파산에 내몰린 베어스턴스나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돈을 떼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에 휩싸인 기관투자가들의 군중심리에 영향받은 바 크다. 또 서브프라임 부실과 별 연관이 없는 한국을 비롯해 지구촌 전반이 무차별적으로 혼란에 휩싸인 것도 '사고의 전염효과'로 설명된다.

이 책은 현대의 주류 경제학을 대상으로 정통 경제학자들이 쓴 '내부로부터의 진지한 반성'과 아울러 현대 경제학의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담고 있다. 이들이 개척하고 있는 경제학의 새로운 전선에 많은 과제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 지향적인 관점으로 볼 때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들의 말처럼 "지금과 아주 다른 특성과 편익을 지닌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09. 06. 05.  

P.S. 경제사 관련 신간으로는 샌드라 핼퍼린의 <유럽의 자본주의>(용의숲, 2009)가 있다. 원제를 참고하면 '제3세계라는 거울을 통해서 본 유럽 자본주의 발달사' 정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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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6 0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6 0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하일 바흐친, 산문학의 창조

이번주 씨네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 서재> 소개 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마도 일간지/주간지 기사로는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특이하게도 바흐친에 관한 페이퍼가 언급되고 있어서 나도 오랜만에 한번 클릭해보았다. 서재를 잘 아는 필자인 듯싶어서 반갑다.    

  

씨네21(09. 06. 04) 묵은 인문서의 먼지를 털어라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인문서를 구입하느라 서평이나 리스트, 페이퍼를 참고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로쟈라는 닉을 모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바흐친의 <말의 미학>을 검색하면 로쟈의 마이페이퍼가 총 6편이 뜬다. 그중 내가 바흐친의 책을 사려는 이유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페이퍼 제목 ‘미하일 바흐친, 산문학의 창조’를 클릭하면 <말의 미학>과 더불어 읽을 만한 바흐친의 저서에 대한 뉴스 자료와 로쟈 자신의 간략한 생각을 볼 수 있다. 그 생각의 깊이가 놀라워 이 글 저 글 클릭하고, 그의 페이퍼를 하나 읽을 때마다 보관함에 책 쌓여가는 소리가 들린다. 각종 이벤트니 행사 때문에 온라인 독자 리뷰가 광고 문구처럼 여겨지는 세상에, 꽤나 귀한 서평꾼인 셈이다.

알라딘의 페이퍼에 썼던 글을 손보고 혹은 새로 써 나온 책이 <로쟈의 인문학 서재>다. 인터넷에서 클릭을 반복하며 책으로 책으로 타고 넘어가는 재미는 느낄 수 없지만 종이책으로 묶이면서 좀더 꼼꼼히 읽고 관심분야를 파고들 여지는 커졌다. 읽다 포기했던 인문서의 먼지를 털어 로쟈의 책을 옆에 두고 가지고 있는 책이 인문학의 지형도에 어디 놓이는지 확인하고 다시 한번 읽기를 시도해도 좋겠다.  

저자가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특히 그에 관련된 글을 신뢰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의 글을 애독해온 입장에서는 특정 언어나 특정 언어권의 문학에 제한을 두지 않고 신뢰할 만하다. 대학생들, 혹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법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책은 “한권으로 끝내는” 어쩌고 하는 인문학 실용서가 아니다. 안 읽은 책을 읽은 척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인문서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하여’, ‘김기덕의 <사마리아>와 <빈집> 읽기’와 같은 글을 추천한다.(이다혜 기자)  

09. 06. 04. 

P.S.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18금'인 글들도 포함돼 있어서 어떨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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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송받은 책들 가운데 하나는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 2004)다. 로이의 이름은 여러 차례 거명한 적이 있는데, 사실 나는 그녀의 책을 한 권도 갖고 있지 않았다. 기억에 인도의 걸출한 이 작가-지식인의 이름을 인상적으로 접한 건 가라타니 고진의 글에서였던 듯하다. 로이는 문학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문학 바깥으로 나간 작가/비평가로 김종철과 함께 거명되었다. 그녀의 정치평론선인 <9월이여, 오라>는 제목 때문에(!) 해마다 9월이면 떠올리게 되는데, 어인 일인지 매번 보관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주장과 메시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가길에 읽으니 이미 알고 있어도 읽어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아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것처럼 말이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2004년에 나온 책은 2005년에 2쇄를 찍었을 뿐이다.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참에 '아룬다티 로이의 모든 책'이라고 적어둔다. 덧붙여둘 만한 관련기사를 찾으니 지난달에 고종석의 기획연재 '여자들'에서 다뤄진 적이 있다. 다소 길지만 옮겨놓는다. " 명민하고 열정적인 글쟁이에게 나는 질투와 연대감을 동시에 느낀다."란 마지막 멘트는 나의 느낌과 별로 다르지 않다. 거기에 부듯함과 고마움을 덧붙여도 좋겠다... 

 

한국일보(09. 05. 18)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6> 아룬다티 로이 

최근 10년 사이에 미국의 주먹(군사적 신보수주의)과 보자기(경제적 신자유주의)에 맞서 가장 열정적으로 펜을 휘두른 논객은 누구일까? 얼른 떠오르는 사람은 그 전부터 미국 정부의 정책에 비판의 펜촉을 들이댄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나 역사학자 하워드 진 같은 원로들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한두 세대 아랫사람으로서 근년에 이들 못지않게 눈길을 끈 이가 있으니,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48)가 그녀다.

그녀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첫 소설이자 지금까지의 유일한 소설 <작은 것들의 하느님>이 1997년 명망 있는 부커상을 수상한 뒤다. 작가의 어린 시절 체험을 반영한 이 반(半)자전소설은 그 해 뉴욕타임스의 '주목할 만한 책'(Notable Books of the Year)으로 꼽혔고, 그 신문의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4위에 올랐다. 그해 5월 출간된 이 소설은 6월 말에 이미 18개국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오늘날 한국어를 포함한 40여 개 언어로 번역됐다. 평단의 반응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로이는 첫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과 부를 얻은 드문 소설가다. 

 

소설쓰기는 그녀의 첫 번째 소명이 아니었다. 뉴델리 도시계획건축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로이는 방송과 영화 쪽에서 이력을 시작했다. 시나리오와 극본에서 단련된 그녀의 손가락이 소설 <작은 것들의 하느님>에서 풀리면서 일을 낸 것이다. 로이는 이 첫 소설로 저명인사가 된 뒤 다시 시나리오와 방송극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것들보다 더 몰두한 것은 정치에세이들 쪽이었다.

로이 자신은 소설가로 불리기를 더 원할지 모르지만, 스무 권이 넘는 그의 책 가운데 소설은 단 한 편이고 나머지가 모두 (강연 원고를 포함한) 에세이이므로, 에세이이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의 시나리오와 방송극과 소설 속에 잠재해 있던 수사(修辭)와 논리의 힘은 그녀의 에세이에서 진면목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수많은 친구와 그만큼의 적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는 인도의 핵개발과 대규모 댐건설 공사를 비판한 에세이 <생존의 비용>이 2003년 번역된 이래, 그 이듬해에는 정치에세이와 강연문 일부가 <9월이여, 오라>라는 제목으로 편집 번역되었고, 역시 에세이와 강연문 모음 <보통사람을 위한 제국가이드>도 번역됐다. 출간 즉시(1997년) 번역된 <작은 것들의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로이는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첫 소설말고 로이의 국제적 명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은 2001년 9ㆍ11테러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본격화했다. 그녀는 영국 신문 가디언에 기고한 '왜 미국은 당장 전쟁을 중지해야 하는가?'에서 "아프가니스탄 공습은 뉴욕과 워싱턴 참사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 인민에 대한 테러"라고 썼다. 그녀가 보기엔 세계무역센터 공격이 테러리즘이듯 아프가니스탄 공격도 테러리즘이었다. 특히 그녀는 부시 주니어와 미국의 총애를 받는 '대사(大使)' 토니 블레어가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 식의 이중언어(더블싱크)를 사용하고 있다며, 외국에 공습을 가하는 그 순간에도 자기들은 평화국가라고 주장하는 이들 덕분에 '돼지'는 '말(馬)'을, '소녀'는 '소년'을, '전쟁'은 '평화'을 뜻하게 됐다고 비꼬았다.

이 글에서 그녀는 미국이 평화애호국이라는 부시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전쟁을 벌인 나라들을 열거했는데, 좀 길지만 여기 옮겨 놓아보자. 중국(1945~46, 1950~53), 북한(1950~53), 과테말라(1954, 1967~69), 인도네시아(1958), 쿠바(1959~60), 콩고(1964), 페루(1965), 라오스(1964~73), 베트남(1961~73), 캄보디아(1969~70), 그레나다(1983), 리비아(1986), 엘살바도르(1980년대), 니카라과(1980년대), 파나마(1989), 이라크(1991~99), 보스니아(1995), 수단(1998), 유고슬라비아(1999),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이들 나라를 열거한 뒤 로이는 "확실히 미국은 지치지 않는다"고 썼다. 맞다. 미국은 로이의 이 발언이 나온 지 두 달도 채 안 돼서, 9ㆍ11테러와 아무 상관도 없고 대량살상무기도 지니지 않은 이라크를 다시 침공해 지금까지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로이가 열거한 전쟁들은 미국 정보기관들이 일상적으로 벌인 파괴, 살상, 쿠데타 조종 같은 비밀공작들을 제외하고 셈한 것이다.

로이의 주장은 늘 상식적이다. 미국 스타일 자본주의가 이 사태의 주범이라는 것, 군수산업, 석유산업, 주요 미디어네트워크, 외교정책 따위가 동일한 자본복합체 아래 있기 때문에 미국은 전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 따위다. 그러나 이 평범한 상식을 끌어내는 그녀의 문장은 너무나 힘차고 아름다워서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녀의 정치적 목소리는 에세이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세계지식인들과의 연대서명운동과 강연을 통해서도 이뤄졌다. 그녀는 자신을 선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연설은 적절한 수사와 공격성이 아름답게 결합된 일급 선동문이다. 

 

라난재단 주최로 2002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에서 행한 유명한 강연 '9월이여, 오라'에서, 로이는 2001년 9월11일을 피노체트가 미국 CIA 지원으로 칠레의 합법 정부(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1973년 9월11일, 영국 정부가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언한 1922년 9월11일 등과 포개며, 앵글로-아메리카와 이스라엘이 제3세계에 저지른 범죄들을 추궁했다.

이 아름다운 연설문의 들머리에서 그녀는 소설가 로이와 에세이이스트 로이를 일치시키며 "논픽션과 픽션은 이야기를 전하는 기법의 차이일 뿐입니다.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픽션은 내게서 춤추듯 흘러나오고, 논픽션은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 맞이하는 이 고통스럽고 깨진 세계가 비틀어 짜듯이 내보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그녀는 미국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인스턴트-믹스 제국민주주의'라는 강연을 통해 자신을 '미 제국의 한 신민'이자 '왕을 비난하는 노예'로 비유하며, 미국을 "신으로부터 직접 정당성을 부여받아 아무 때나 그의 속국들을 폭격할 권리를 보유한 지구제국"으로 묘사했다. 2006년 부시가 인도를 방문하자 로이는 그를 '전범'이라 비난했고, 같은 해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자 그는 촘스키, 하워드 진 등과 성명서를 발표해, 그것을 '전쟁범죄'이자 '국가테러'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로이의 정치활동이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군사주의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공공의 더 큰 이익'과 '상상력의 종말' 두 편의 에세이로 이뤄진 <생존의 비용>에서 보여주었듯 그녀는 나르마다 강 댐 프로젝트로 상징되는 인도의 성장우선정책과 핵개발에 반대했고, 더 나아가 카시미르의 독립을 옹호했다. 그녀는 또 어떤 사회운동이 폭력을 수반했을 때, 그것을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의 맥락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반대하는 것은 이른바 세계화 자체다. 그녀 생각에 세계화란 원격조종되고 디지털 방식으로 작동되는 변종 식민주의이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녀 생각이다.

그러나 그녀의 '현실주의적' 정치 활동은 그녀의 적들로부터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동료들로부터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곤 했다. 특히 나르마다 강 댐 건설이 관개나 식수공급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수천만 주민들에게 고향만 빼앗을 것이라며 반대했을 때는, 생태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그녀에게 용기와 신념은 있지만, 그녀의 언사가 너무 과장됐고 단순하며 세계를 마니교적 2분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로이의 대답은 이랬다. "내 글의 열정적이고 히스테리컬한 톤은 의도적인 것이다. 나는 히스테리컬하다. 나는 유혈이 낭자한 지붕 위에서 소리 지르고 있다. 나는 점잔을 빼며 '쯧쯧쯧' 하고 싶진 않다. 나는 내 이웃들을 깨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목적의 전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뜨기를 바란다."

미국과 이스라엘, 탈레반 등의 근본주의와 목하 진행되는 세계화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 역시 또 한 사람의 근본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약한 자들을 위한 근본주의고, 때로 지나쳐 보일 때도 있지만 정의감각과 조율되는 근본주의다. 이 명민하고 열정적인 글쟁이에게 나는 질투와 연대감을 동시에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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