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업그레이드된 물고기'란 페이퍼를 올려놓고 보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역시나 95년 여름에 쓴 것인데, 제목이 '물고기는 죽는다'이니 <내 안의 물고기>란 책 제목과 맞물려 얼추 연상됨 직하지 않은가. 그래서 옮겨놓는다. 

  

물고기는 죽는다

한 줌의 비가 흩뿌리고 물고기는 눈을 뜬다
몇 채의 집이 먼지처럼 떨어진다 물고기는
헤엄을 쳐야 한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 공간
물고기는 물결들을 뒤로 뒤로 밀어내며
하나의 이념처럼 눈알이 붉다 새벽이 멀다
물고기는 다만 헤엄을 쳐야 한다
몇 채의 집이 먼지처럼 무너져 앉고 물고기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쪽에 입을 맞춘다

한 줌의 비가 흩뿌리고 물고기는 눈을 뜬다
물고기는 눈을 뜨고 죽는다 

 

09. 06. 13. 

P.S. 20대 후반에 쓴 시작메모를 보니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다: "(...)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고 그림도 그릴 줄 모른다. 달리기도 잘 못하고 수학도 잘 못한다. 고작 책읽는 걸 나는 주로 해왔을 뿐이다. 대학이란 곳이 책읽는 것과 관계가 있어서 나는 그럭저럭 이곳에서 버텨왔다. 그러나 가끔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직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새벽이 멀기 때문이다. 계속 헤엄을 치고는 있지만, 나는 내가 늙어갈 거라는 걸 알고, 언젠가 힘이 빠질 거라는 걸 안다. 자손을 많이 퍼뜨릴 만한 위인도 못 되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럴 듯한 유언들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 지상에서 인간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책이 되는 일이다." 책이 못 된다면 저자라도 될 일이다.(나는 저자가 되고 싶었다. '저자의 죽음'이란 얘기가 떠돌 때는 나도 따라서 죽고 싶었다.)"   

 

흠, 그러다 결국 '저자'가 되긴 했다. 이젠 무얼 더 해야 할까.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의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시오랑의 말. "우리는 모두 어릿광대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있으니까." 이걸 조금 비틀어볼 수 있을 듯하다. 물고기 버전으로. "우리는 모두 물고기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엄을 쳐야 하니까." 눈을 뜨고 죽을 때까지. 요즘 같아선 눈을 부릅뜨고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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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09-06-1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 가르치셔야죠...^^;;;

로쟈 2009-06-14 13:47   좋아요 0 | URL
제가 아직 '학생' 수준입니다.^^; 배우기 위해서 가르칠 따름이에요...

Sati 2009-07-1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읽은 로쟈님의 글이 http://blog.aladdin.co.kr/mramor/842940 이건데, 2004년에 아직 모스크바에 있을 때 읽은 것 같아요. 도블라토프 검색하다가 찾았는데, 누군가 펌질한 것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뭐랄까, '참 친절하신 분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로쟈님 시 가끔 올려주시는 것들도 참 친절함이 느껴져요 알알이. 예쁜 시집도 내주시길 기대합니다.

로쟈 2009-07-12 21:17   좋아요 0 | URL
시집은 제가 낼 수 있는 건 아니고, 아직 제안해오는 곳이 없습니다.^^;

Sati 2009-07-13 12:47   좋아요 0 | URL
시집 나오면 제가 10권은 살 거예요, 선물하게.

로쟈 2009-07-13 23:02   좋아요 0 | URL
네, 기억해 둘게요.^^
 

주중에 신간 몇 권을 소개하고 나면 주말엔 세 권 안팎의 관심도서가 남는다. 이번주도 비슷하다. 영화학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상상적 기표>(문학과지성사, 2009)가 불시에 출간된 것이 다소 놀랍긴 하지만 특별히 '대작'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읽을 만한 책'은 꽤 된다. 그 중 하나는 조지 레이코프의 <자유전쟁>(프레시안북, 2009). 최근 부쩍 자주 소개되면서 이제 '레이코프'란 이름도 낯설지는 않다.   

아마도 이 인지언어학자는 생존 언어학자 가운데 인지도를 따지자면 촘스키 다음쯤 되겠다. 국내에는 <인지의미론>(한국문화사, 1994), <삶으로서의 은유>(서광사, 1995; 박이정, 2006) 등의 학술적인 책으로 처음 소개됐지만, 그가 언론리뷰에서 주목받게 된 건 '프레임'이란 말을 유행어로 만든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삼인, 2006) 이후일 것이다. 이번에 나온 <자유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데(한국 또한 '자유전쟁'의 격전장이니만큼 이번 책은 시사하는 바가 특히 많을 듯싶다). 자신의 학문과 정치적 입장을 잘 접합시킨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한다.

한국일보(09. 06. 13)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들…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많은 일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부르카를 입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고, 극빈국 어린이에게 빵과 책을 제공하고, 제3세계 반정부 인사의 석방을 위해 콘서트를 연다. 동시에, 이런 일들도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수익률 제고를 위해 대량해고를 실시하고, 증여세율을 낮춰 빈부격차를 확대시키고, 모래와 가난뿐인 나라에 순항 미사일을 날린다.

<자유전쟁>은 자유라는 오래된 개념어의 이처럼 넓은 외연을 무대로, 진보와 보수가 격돌하는 미국 사회의 오늘을 그려낸 책이다. UC버클리대 언어학과 교수인 저자는 '인지언어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세계적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의 제자다. 

그러나 언어의 형식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스승과 달리, 그는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 구조라는 입장을 취한다. 저자는 특히 정치적 사고를 읽어내는 도구로 인지언어학의 틀을 사용한다. '프레임 분석'이라 이름 붙인 이 틀을 다룬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은 2006년 국내에 번역돼 학계와 정치권에서 화제를 모았다.   

<자유전쟁>은 자유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의 역학관계와 도덕적ㆍ정치적 세계관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전통적인 자유 이념을 진보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정치적 참여권 확대, 노동환경 개선, 공공보건 강화 등 "지난 두 세기 동안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변화의 방향"이 자유라는 개념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빠른 속도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수많은 보수 정당들이 자유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자유무역협정이나 자유시장 같은 용어에 '자유'가 등장한 데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진보, 보수 진영이 자유라는 개념을 쟁탈하기 위해 격돌하는 이유를 "자유는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유 개념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도 있지만, 그밖의 큰 부분은 여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진보주의자들은 우파가 자유를 말하는 것을 순전히 위선으로 여기고 있지만, 극우파들은 바로 이 자유 개념을 재정의하려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를 잃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자유의 개념을 잃는 것은 훨씬 더 끔찍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사고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 법칙이 아니라, 프레임이나 은유'라는 인지언어학의 틀을 자유 쟁탈전을 이해하는 돌파구로 제시한다. 진보와 보수가 추구하는 서로 다른 자유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내놓는 프레임은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과 '자애로운 부모' 모형이다.

자애로운 부모 모형에서는 각 개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고, 도덕적 인간이 되려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보살펴야 한다. 이런 가치체계가 자유와 연결될 때, 자유는 권리와 기회의 확대를 의미하고 타인의 자유와 상호의존적이다. 반면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에서 자유란 도덕적 권위자가 나눠주는 것이며, 도덕성과 명령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모형에서는 단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만 있으며, 도덕성은 도덕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다. 낙태나 동성결혼은 이 도덕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보수주의자들에게 이런 행위는 곧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된다.

저자는 부(富)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는 "보수주의적 경제 원리는 서민 납세자의 돈이 부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끊임없이 승인하는데, 이때 자유 또한 다수의 서민에게서 소수의 부자에게 넘어간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시스템이 가능하도록 자유를 보수주의의 개념 속에 가두는 프레임들을 지적한다. 그것은 '누가 가난하라고 했나' '가난은 제 탓이니, 남을 탓해선 안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2009년 한국사회의 일상에서도 매일 부딪히게 되는 프레임들이다.(유상호기자) 

09. 06. 13.  

P.S. 진보적 언어학자로서 레이코프의 주된 관심이 '정치적 마인드'에 있다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최신간 <정치적 마인드>(2009)는 레이코프의 '기본서'가 될 듯하다(이 역시 국내에 소개되면 좋겠다). '정치적 마인드'와 함께 인지언어학자들의 관심대상이 되고 있는 건 '도덕적 마인드'인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레이코프의 동료인 마크 존슨의 <도덕적 상상력>(서광사, 2008)이 이미 출간돼 있다. 다소 학술적인 책이긴 하지만, 인지과학이 윤리학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럼 이제 '심미적 마인드'만 남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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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6-13 09:53   좋아요 0 | URL
그래요. 전쟁 후 한국의 프레임과 은유는
뭐, 박정희와 개발, 교회와 우파... 뭐, 그런 데 갇혀있죠.
아직도 그네양이나 개발, 교회와 우파가 빨갱이를 때려잡는 걸 보면...
논리는 그런 데 먹혀들지 않으니까요.

로쟈 2009-06-13 11:21   좋아요 0 | URL
네, 그러니 '프레임 전쟁'이지요. 이게 수십 년 걸려서 만들어진 것이니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구요...

2009-06-1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3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게슴츠레 2009-06-13 19:08   좋아요 0 | URL
얼마 전 한 만화(http://homa.egloos.com/4152404)를 보면서 '노무현'이야말로 하나의 프레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로쟈 2009-06-14 11:19   좋아요 0 | URL
프레임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9-06-13 21:53   좋아요 0 | URL
이슈 선점,개념전쟁...이데올로기 주입의 기법을 꿰뚫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보적 이론가들이 정교하면서도 대중들의 일상언어로 홍보할 줄 아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삼성이나 조중동이 만든 조작적 개념어를 마치 일상어 쓰듯 바로 앵무새처럼 쓰는 대중들이 많으니까요.

로쟈 2009-06-14 11:21   좋아요 0 | URL
'자유'란 번역어가 오해를 부추기는 면도 있다고 전에 읽었어요. 개념사가 프레임에서 해방되기 위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교수신문에서 며칠 전에 읽은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이번주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꼭지인데, 철학이 생활세계와의 '반성적 평형상태'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철학(서)의 번역과 사회적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로 분류해놓는다. 기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이란 구절은 하버마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필자가 하버마스 전공자인데다가 최근에 번역서도 출간했으니 이유가 없지는 않다. 하버마스의 신간인 <분열된 서구>(나남, 2009)는 작년인가 영역본을 구하려고 애썼던 책이기도 해서 반갑다...    

 

교수신문(09. 06. 08) ‘반성적 평형’의 상태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철학, 어디로 휴가 갔나 

요즘 우리나라의 독서 시장에서는 대단한 고전이 아닌 철학 번역서의 경우 1천부 이상을 팔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인데, 언론에 매우 호의적인 서평이 실린 경우라도,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철학의 인기가 형편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상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학령인구 대비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 아닌가. 그 많은 대학생들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쩌면 이런 사태에 대한 책임의 가장 큰 몫은 다름 아닌 우리 철학자들이 져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지금, 학문 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철학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반성적 평형’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철학은 그것이 우리 생활세계의 삶의 경험이나 문화적 인식의 합리적 재구성 같은 데서 출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우리의 철학적 이론들을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해 그것들이 바로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경험과 문화적 인식의 올곧고 참된 합리적 정수를 표현하고 있다고 설득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철학은 단지 시대하고만 불화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참된 지반이어야 할 삶 그 자체에 대해 겉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철학을 그저 동서양 외국들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수입했을 따름이다. 퇴계의 철학조차 우리에게는 예컨대 현재의 미국보다도 더 먼 외국이라고 보아야 할 옛 조선의 철학일 뿐이다. 덕분에 우리의 철학 언어는 온통 번역어, 그것도 주로 제대로 통일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일본식 번역어다. 예컨대 ‘a priori’를 전혀 뜻이 다른 ‘선천적’이라는 말로 번역해 놓고는 사람들보고 이해하란다. ‘선험적’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지만, 이 말은 이미 다른 개념의 譯語로 굳어져 사용된다.
물론 이 말도 번역하고자 하는 ‘transzendental’이라는 말의 뜻을 적절하게 전달해 주지 못하고 있다. ‘변증술’이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의 뜻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의 철학적 언어들은 생활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멀리 휴가를 가 있는’ 언어들일 뿐이다. 그나마 마음 놓고 권할 수 있는 번역서조차 많지도 않다.

철학적 문제들도 대부분 우리의 문제들이 아니다. 윤리학은 도덕의 문제를 다루면서 ‘의무론’과 ‘결과론’을 들먹이는데, 도덕을 무슨 ‘삼강오륜’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런 문제 틀을 너무 낯설어 한다. ‘진리’의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해 놓고 철학적 인식론을 소개하면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인식론이 다루는 진리는 학생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철학자들은 지금껏 철학에 대한 어떤 영웅주의적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보면 우리의 철학 언어들은 우리의 생활세계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종의 ‘외계어’일 뿐이고, 우리가 심각하게 다루는 문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딘가 번지를 잘못 찾은 문제들이다. 그래서 단순히 심심찮게 시도되곤 하는 ‘철학의 대중화’ 노력 같은 것으로 극복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관건은 우리나라의 철학이 우리의 생활세계적 문화에 대해 연속적이면서도 반성적으로 단절할 수 있는 창조적 긴장의 관계, 말하자면 ‘참여적 비판’의 관계를 어떻게 하루빨리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장은주 서평위원 영산대·철학) 

0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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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6-12 11:24 
    ‘“반성적 평형’의 상태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철학, 어디로 휴가 갔나” — via 로쟈
 
 
- 2009-06-16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어떻게 보면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니까 읽지 않는 것 아닐까요? 더불어 한국과 GDP가 비슷한 국가들에서 과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들이 얼마나 팔리는지도 궁금합니다.

제 생각엔 왜 이 대단한 책을 읽지 않을까이런 글들은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이 앞선 기술이 시장에서 안 먹힐까, 왜 이 베토벤 7번 교향곡이 대중적이지 않을까' 이런 질문과 같은 게 아닐까요? 더 뛰어난 책으로 승부하면 될 일이라는 시각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또 저런 글을 쓰는 분 중에 정작 자신이 제대로 쓰거나 번역한 책이 있는 분도 흔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는 뭐하고 시간보내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많은 대학생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하다면 그 많은 교수들이 뭐 쓰는지도 그만큼 의문스러워야 될텐데.

로자님, 절대 offensive한 의도로 쓴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개인적으로는 인문학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냥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반성적 평형'에 힘을 보태지 못하는 글이나 쓰면서 시간 보낼 바엔 본인이 직접 뭔가 하고 나서 결과는 세상에 맡기는 게 지적인 자세가 아닌가 하는거죠.

로쟈 2009-06-17 08:20   좋아요 0 | URL
인문학계나 학자들의 책임도 무시할 순 없겠죠. 한데, 이건 당분간 해결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강단 인문학의 경우 대중과의 소통보다는 자리 보전이 더 시급한 형국이라서요(대중의 관심이 아니라 연구비 지원으로 먹고 사니까요)...
 

연세대학원신문 5월호에 기고한 글이지만 내부 사정으로 신문이 나오지 않게 된 바람에 붕 뜨게 된 원고를 옮겨놓는다(나중에라도 나오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혁명'을 키워드로 한 '당신 서재의 나침반'인데, 그냥 김규항의 <예수전>(돌베개, 2009)과 몇 권의 책을 거명하고 있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자칭 ‘B급 좌파’ 김규항은 <예수전>(돌베개, 2009)에서 그렇게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혁명’이란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이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이 영성이다. 김규항이 보기에 영성 없는 혁명가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 없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개인의 심리적 평온뿐이다. 마르코복음 읽기를 통해서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예수의 참모습은 영성과 함께 하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예수는 한 사람의 변화가 우주의 변화인, 그리고 우주의 변화가 한 사람의 변화인 그런 변화와 혁명을 꿈꾸었다고 그는 적는다.  

그렇게 보자면, 개인의 자발적인 변화를 도외시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그러한 영성을 갖추지 못한 데 있다. 즉 사회주의 패망이 말해주는 것은 ‘영성 없는 혁명’의 필연적인 실패일 뿐이다. 우리에겐 아직 시험되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니 그것은 ‘영성과 함께 하는 혁명’이다. 그것이 바로 2000년 전에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가 우리에게 전해준 메시지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된 한 ‘시골 청년’이 꿈꾼 ‘하느님 나라’이고 새로운 세상이다. 그것은 어떤 세상인가?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모든 억압과 착취,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그것이 아무런 과정이나 절차 없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그 세상은 어떻게 오는가? 가령,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문제로서 ‘정치적인 해방’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김규항은 마르코복음 5장에서 돼지떼에게 귀신이 들게 하여 호수에 빠져 죽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복음서를 통틀어 가장 또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돼지 같은 로마군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려 모조리 물에 빠져죽게 했다는 것이 로마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이 이야기의 숨겨진 메시지이자 익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예수의 정치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생각이나 태도로 볼 때 그가 로마에 대해 아무런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좀 허전하다. 로마는 예수의 분명한 적이었을 테지만 정작 이 로마의 지배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김규항은 진정한 변화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고 적어놓긴 했다. 그는 혁명과 변화를 동일시하는 듯하다).  

대신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분노는 주로 ‘위선자’ 바리사이인들을 향한다. 그러한 예수의 방식을 따라서 김규항도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은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를 표어를 내걸고 활동한다. 이들은 배운 만큼 배운 사람들로서 나름대로 안정된 경제력을 갖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개는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 정도에 머문다. 이들은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적대세력으로서 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비판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과연 그들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교회>(김영사, 2009)를 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으로 ‘완고한 신앙’을 가진 대다수 한국 교회도 포함해야 할 듯싶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믿사오니’를 외치는 예수 신자로서 예수 ‘믿으미’는 많아졌으나, 그의 명령을 올곧게 따르는 예수 ‘따르미’는 적어진 것이 한국 교회의 성장사다. 물론 이러한 왜곡이 한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역사적 예수’는 증발하고 대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만 더 강화된 기독교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주요 개신교 교파마다 세계 제일의 교회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판국이라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괴롭히지 말라”는 저자의 충고가 새삼스럽지 않다. 그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의 힘과 조직의 힘을 숭배하며, 그런 교회일수록 예수의 이름을 크게 외치지만 실상과 이름과 현실이 따로 노는 위선적인 행태일 따름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잘못된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온 우리 자신을 회개해야” 하는 일이다. 과연 한국 교회는 그러한 회개를 통해서 거듭날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우리가 진정한 혁명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변화를 창출할 수 있을까? ‘자발적인 변화’와 ‘회개’에 대한 기대가 미덥지 않다면 프랑스혁명에 대해 다시 숙고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것은 근대 혁명의 원점으로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걸 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프레시안북, 2009)를 참조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라고 이 혁명가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인류의 압제자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하는 것이 자비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평가되는 에드먼드 버크는 1790년에 쓴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2009)에서 이러한 파괴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무정부상태를 초래하고 결국엔 군사적 독재자를 출현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나 아렌트 또한 1963년작 <혁명론>(한길사, 2004)에서 프랑스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짓고 미국혁명을 혁명의 새로운 모델로 추켜세웠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르벨은 1970년에 펴낸 <마르크스도 예수도 없는 혁명>(법문사, 1972)에서 20세기의 혁명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못박았다. 유혈과 폭력이 없는 혁명, 곧 ‘혁명 없는 혁명’이 바람직한 혁명의 조건이라면 ‘자본주의 혁명’이야말로 그에 부합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0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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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9-06-1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뭔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문제였는데 핵심적으로 연결하고 배치하고 설명해주셨네요.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책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읽고 있죠. 그럼 건필하시길.......

로쟈 2009-06-13 08:26   좋아요 0 | URL
'건필'은 보시는 대로입니다.^^

꼬마요정 2009-06-1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큰 생각은 못 하고... 명박이라도 내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우리 역사를 볼 때 언제나 우리의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면 얼마 뒤 다시 빼앗겨 버리는 게 일쑤라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청산 없는 혁명은 (혁명이라는 뜻 안에 대안과 청산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혁명이라는 단어를 못 쓰겠네요..) 혁명이 아니라 그저 전복일 뿐이겠죠.. 아.. 짧은 지식으로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ㅠㅠ 사회주의 혁명이니 자본주의 혁명이니 다 좋지만, 정말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혁명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로쟈 2009-06-13 08:29   좋아요 0 | URL
'혁명'이란 말도 하도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자체만으론 모호한 감이 있습니다. 그걸 좀 분명하게 해두는 게 좋을 듯해요...

2009-06-15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7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7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란 가사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는 아직도 귀전에 생생하다. 초등학생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 새마을운동에 대한 생활사적 연구서가 출간됐다. 김영미의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 2009). 바우만의 '액체근대'에 견주자면, 한국식 '고체근대'에 관한 한 가지 보고서로도 읽을 수 있겠다. 

한겨레(09. 06. 11) “새마을운동은 농촌 몰락의 시작이었다”

“새마을운동을 성공한 농촌 근대화운동으로 미화하든 농민에 대한 억압적 동원체제로 비판하든, 정부 정책에 초점을 둔 국가중심적 접근이란 점에선 마찬가지입니다. 농민이란 존재는 철저히 지워져 있어요.”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학계의 첫번째 연구서라는 점 말고도, 민중의 경험세계를 통해 사건에 접근하는 생활사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새마을운동 시기 모범 마을로 선정돼 두 차례나 포상을 받은 경기 이천군의 작은마을 아미리와, 새마을운동의 기수가 돼 <대한뉴스>에까지 보도된 농촌운동가 이재영씨가 책의 주인공이다. 책을 쓴 김영미(42) 국민대 연구교수의 논지는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 마을’과 ‘새 농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미리는 1930년대 일제가 펼친 농촌진흥운동에서도 모범 부락이었습니다. 과거부터 근대화를 위한 자발적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던 곳입니다. 이재영씨 역시 1950년대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애향청년회라는 계몽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던 농촌운동가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이런 자발적 흐름이 박정희 정부 시기 가시적 결실을 맺게 된 데는 정부의 물질적 지원과 평가, 포상이 모두 마을 단위로 이뤄짐으로써 마을공동체의 자치력과 마을간 경쟁심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당시 마을공동체의 주도권을 둘러싼 신구세력간 권력 갈등이다.

“이농이 본격화되기 전이라 당시 농촌마을에는 중등교육을 받고 군대를 다녀와 근대성을 내면화한 청년 주체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연장자 중심의 마을 권력과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정부는 발전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충일된 청년들과 손잡음으로써 운동의 자발적 주도 세력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유신체제를 마을로 이식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연장자 중심의 마을공동체를 움직이기 위해선 국가의 권위와 행정력을 등에 업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청년들은 자기 마을을 박정희 정부의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실을 했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엔 3선개헌을 계기로 뚜렷하게 하락한 도시지역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농촌을 체제 유지의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던 박정희 정부의 의지 또한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동원 방식은 소외계층의 욕망을 자극해 체제의 자발적 동조자로 포섭한 파시즘의 대중 동원과도 유사하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농촌 마을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그토록 원하던 발전과 부를 성취했을까? 김 교수는 말한다. “거주 환경이야 나아졌죠. 문제는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농가부채가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정부 시책에 따라 앞다퉈 고수익성 작물 재배에 뛰어들었는데 설비투자 비용은 물론 불투명한 판로와 널뛰는 가격 탓에 피해가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갔던 것이죠. 80년대가 되면서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고향을 등졌고, 농촌은 희망이 사라진 노인들의 휴식처로 전락합니다. 새마을운동은 역설적이게도 농촌 피폐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세영 기자) 

09. 06. 11 

 

P.S. 같은 저자의 책으로 <동원과 저항 - 해방 전후 서울의 주민사회사>(푸른역사, 2009)에도 덩달아 눈길을 주게 된다. 저자는 역사 대중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도 기획했다고 한다.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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