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타이틀의 책은 비비아나 젤라이저의 <친밀성의 거래>(에코리브르, 2009)다.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원제였던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을 떠올려주는데, 기든스의 책이 '친밀성의 사회학'에 관한 것이라면 젤라이저의 책은 '친밀성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자식의 양육이나 부모 부양에서 언제나 갈등을 빚곤 하는 것이 '돈' 문제인데, 책은 그 껄끄러운 문제에 대한 '솔까말'의 기회를 마련해줄 수도 있을 듯싶다. 지난 주말에는 알라딘에 북이미지가 뜨지 않은 탓에 관련기사를 조금 늦게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06. 17) 친밀한 관계에 내재한 경제적 거래 파헤쳐

미국의 작가 셸비 화이트는 “(가족관계에서) 가장 큰 실수는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낭만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낭만을 돈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 자본주의 시대에도 인간관계의 친밀성과 경제행위를 분리돼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정서는 엄연하다. 반면 최근의 존엄사 논쟁에서 보듯 가족 중 누군가를 돌보는 숭고한 일도 사회경제적 이슈로 논의되고 판정받는 게 현실이다. 말기환자가 가족들의 지불가능한 비용을 넘어서 살게 될 경우에 대해 사회가 걱정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경제적인 활동과 사적인 친밀함이 긴밀하게 마주치는 영역에 입문해 있다.  



저자인 비비아나 A 젤라이저 프린스턴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상적인 대인관계를 ‘경제’라는 필터를 끼운 채 들여다본다. 책에서 저자는 로맨틱한 관계에 내재한 다양한 경제적 거래를 파헤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경제활동을 통해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고 재협상한다. 경제활동과 친밀한 관계는 심지어 서로의 관계를 촉진시킨다. 그는 미국 역사상 법정에서 벌어졌던 광범위한 분쟁사례들을 통해 이를 제시한다. 특히 조건 없는 사랑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졌던 부부·연인, 부모·자녀 등 가장 친밀한 관계들을 법정에 세워 놓는다.  

9·11테러 사건은 ‘관계에 대한 금전적 보상’ 논쟁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테러로 목숨을 잃은 여성 매캐너니의 희생자 보상금을 놓고 그녀와 20년 동안 함께 산 동성애인 크루즈는 50만달러의 보상금이 매캐너니의 남동생에게만 주어진 것이 부당하다고 청구했다. 자신은 고인과 집, 신용카드를 공유하고 모기지와 생활비를 공동 지출했으며, 생명보험 수혜자로 서로를 지명했기 때문에 자신이 절반의 몫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고인의 남동생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승인할 수 없고 유언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보상금을 모두 가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9·11사태 때 희생자 한 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유족은 별거 중인 남편, 동거자, 전 남편, 애인, 자녀 등 여럿이었고 얼마나, 어디까지 보상해야 하는지 논란이 이어졌다. 

이처럼 결혼하지 않은 동거 커플, 소원해진 배우자, 동성가정의 경우 종종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된다. 하룻밤 혹은 일생 동안 침대와 식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경제적 보상을 받을 만한 ‘진짜’ 친밀함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혼한 부모가 자녀의 양육비를 어떻게 분담해야 하는가, 빚에 쪼들리는 자녀가 늙고 병든 부모를 어디까지 부양해야 하는가 등 현대의 인간관계 상당부분이 법정의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  

◇요즘 맞벌이부부들의 상당수는 자녀 양육을 노부모에게 맡기며 양육비 보상을 얼마나 할 것인지 고민한다. 이처럼 진심과 친밀함을 담은 관계에도 물질적 보상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요즘 자녀 양육을 노부모에게 맡기는 맞벌이부부들이 양육비 보상을 고민하는 것도 부모자식간의 조건 없는 사랑에 흠집을 내는 사례. 하지만 지은이는 이조차 “경제활동은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며, 친밀함이라는 존재는 경제활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책의 다종다양한 사례들은 관계의 친밀함을 ‘맹목성’이라는 두꺼운 유리창을 가진 온실에서만 살아남는 민감한 화초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충격과 함께 해방감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지은이는 “목표는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친밀함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혼합을 만드는 것이다”면서 “돈이 악영향을 미치는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멈추고, 대신 어떤 조합이 더 행복하고 더 생산적인 삶을 만드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김은진 기자)  

09. 06. 29.

 

P.S. 저자인 젤라이저 교수의 다른 책들을 찾아보니 '아이의 사회적 가치'를 다룬 것과 '돈의 사회적 의미'를 다룬 것이 눈에 띈다. <친밀성의 거래>는 이 두 전작의 변증법적 종합(!)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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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길>에 대한 페이퍼를 적다 보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박상순의 '자네트가 아픈 날 2'. 기억엔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세계사, 1996)에 수록된 시인데, 그때 읽고 적은 촌평과 함께 옮겨놓는다.     

 

자네트가 아픈 날 2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에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 버린 솜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녀는 약을 먹는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약에 취한 그녀의 노래,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그녀의 이름을 새기고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고, 미술대학에 다닌 솜씨로 뚜껑을 밀봉한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그녀를 묻은 뒤에도 나는 가로수만 생각한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노란 가로수, 불타는 가로수, 그 속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가로수, 노래하는 가로수.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담겨질 거대한 항아리를 만든다. 담겨질 사람은 없다. 나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거꾸로 서는 가로수, 날개 달린 가로수, 돌덩이를 삼킨 가로수, 항아리를 삼킨 가로수.

나를 긴 줄에 묶어 책꽂이 뒤로 끌고가는 가로수,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나의 가로수.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즉 즐기기 위해서는 ‘항아리’와 ‘가로수’란 두 이미지가 뜻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녀(자네트)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와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가 이 시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항아리’는 한 ‘세계’를 뜻한다. 이때의 세계는 자기만의 예술세계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다. ‘그녀’와의 관계가 문제되고 있으니까 여기서는 가정이라고 해두자. 즉 이 ‘항아리’는 예술작품(Art Work)으로서의 항아리라기보다는 사회적 삶의 표준단위, 즉 가정(Family Life)으로서의 항아리이다.  

그럼 이제 1연을 보자.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만들 수 있는 항아리는 FL이 아니라 AW이다. 굳이 “틀어져 버린” 솜씨가 아니어도 그런 솜씨로는 FL을 만들 수 없다(이 사회적 통념!). 그러는 ‘나’의 옆에서 “그녀는 약을 먹는다”(그녀는 약값이 필요할 것이다). 2연에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니까 FL에 대한 감각이 ‘나’보다 나을 리 없다. 약에 취해 있으니까 더더욱 그렇다. 이 항아리가 제대로 된 항아리, 즉 FL을 보장해줄 수 있는, FL로서의 항아리인가 아닌가를 제대로 분별해내지 못하는 것.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기”는 ‘나’의 행위에서 드러나듯이 이 항아리는 AW로서의 항아리이다. 이건 생활의 터전, 즉 FL로서의 항아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3연에서 결국 이 항아리가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는 옹관묘가 된 것은 당연하다. “내 항아리”는 예술의 세계이고 죽음의 세계인 것...  

그리고 이제 ‘가로수’. 가로수는 버드나무처럼 길가에 서 있는 나무이다. 그것은 중심에 있는 나무가 아니다. 그래서 ‘가로수’는 ‘주변적인 존재, 주변적인 삶’의 은유가 된다. “그녀가 아픈 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는 바로 ‘가로수’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4연에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가로수만 생각한다”.  

그는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런 주변적인 자기세계에, 상상적인 세계에 안주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항아리’의 세계는 점점 멀어져 간다. 5연에서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항아리’를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질 리도 없고, 거기에 “담겨질 사람”도 없다. FL뿐만 아니라 AW로서의 항아리도 그는 이제 만들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그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이 자폐적인 세계는 6연에서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의 세계로 진술된다. 이 ‘가로수’는 이제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것이다. ‘가로수’가 ‘항아리’를 대신하는 것. 이 안쓰러움을 이 시는 은근하게 노래한다... 이게 내가 이 시를 재미있게 읽은 이유이다. 

09.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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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검은 비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인다. 보더 정확하게는 물감통에서 번져가는 듯한 짙은 회색 비구름이다. 오늘부터 장마비가 내린다더니 예고대로 빗줄기가 굵다. 방안에만 있을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오늘 아침 '책읽는 경향'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이 이반 부닌의 단편집 <어두운 가로수 길>(지만지, 2008)이다. 대부분은 예전에 <비밀의 나무>(삶과꿈, 2005)에 실렸던 작품들인데, 러시아어판 제목도 <어두운 가로수 길>이다(원저는 두툼한 단편집이다). '어두운 분위기'가 어쩐지 연관성이 없지도  않을 듯싶어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20세기 문학 강의 때 읽을 작품에 포함하는 것도 고려해봐야겠다...   

경향신문(09. 06. 29) [책읽는경향]어두운 가로수 길  

언젠가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의 단편집이 내 방 책꽂이에는 물론 집안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살짝 맥이 풀려버렸다. 조카 녀석이 빌려가서는 학교에서 돌려 읽다가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여중생이 읽기엔 좀 그런데’ 하고만 말 수가 없어, 나는 책을 내준 아내에게 채신없이 화를 내고 말았다. 나는 부닌의 단편들을 늘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깨끗한 월요일’을 시작으로 부닌의 단편집 <어두운 가로수 길>(김경태 옮김·지만지)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신께서 당신 편지에 답하지 않을 힘을 주시길 바라요”라는 문장은 역시 좋았다. 좋아서 두 번을 읽었다. “시간에 대한 희망을 제외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라는 대목도 여전히 곱씹을 만했다. 한데 이 매혹으로 가득 찬 사랑이야기들이 주는 느낌이 이전과는 제법 달라져 있었다. 그게 어젯밤의 술 때문인지, 오늘 아침 바람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혹 감정의 깊이가 소멸의 속도와 비례하기 때문은 아닐지.   

부닌은 표제작에서 말했다. “모든 게 사라진다고 잊히지는 않아요”라고. 내게는 이 한 줄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사라짐과 잊힘 사이에 무엇이 있는 걸까? 죽은 자도 기억과 추억이며 회한은 남기게 마련이란 뜻이겠지. 그래도 문장은 수정될 수 있겠다 싶었다. 결국엔 잊히고 말 테니까, 그런 거니까. 하지만 이 한 줄은 부닌의 단편들 모두에 대해 결론적이고, 그러므로 결정적이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언어로 아름다울 만큼 지독한 상실을 그려낸 사례로 부닌의 단편들을 지목한다.(현진현 소설가) 

09. 06. 29. 

P.S. 비는 잠깐 오다가 다시 해가 났다. '어두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다. 이것이 '장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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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9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30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7-0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어제 경향신문의 이 칼럼을 읽고 메모해 두었거든요.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말이죠. 그런데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 해보니까 어두운 가로수길의 책은 이미지가 없어요. 신문에도 나왔고, 로쟈님께서도 올리신 저 이미지 그대로이겠죠? 저도 한번 부닌의 단편들을 읽어보아야 겠어요.

로쟈 2009-07-02 20:34   좋아요 0 | URL
네, 소개된 책이 장편 <아르세니예프의 생애>와 함께 단편집 몇 권입니다. 나름 열독자들이 있는 듯해요...

털세곰 2009-12-03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닌은 의외로 시"도" 좋습니다. 맑고 깨끗하고 언어도 그렇게 어렵지 않고.
부닌의 문학상에는 사실 시가 더 많이 기여했어야 하지 않을까도 여겨집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찾아서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조너선 색스의 <사회의 재창조>(말글빛냄, 2009)에 대한 것이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어서 다문화주의가 서서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우리로서도 참조해볼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다.   

  

한겨레21(09. 07. 06) 다문화주의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현재 국내의 결혼 이주여성이 약 15만명이라고 한다. 주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을 통한 다문화가정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인데, 이들 가정의 자녀수도 2010년엔 10만명을, 그리고 2020년에는 160만명을 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문화가정의 양적 확대는 자연스레 한국 사회를 다문화사회로 접어들게 할 것이고, 이에 따르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도 제기될 것이다. 그것이 한국사회가 당면하게 될 불가피한 미래라면 다문화사회로 먼저 진입한 사회의 경험과 교훈을 참고해보는 것도 유익하겠다. 영국의 철학자이면서 영연방 유대교의 최고지도자이자 랍비인 조너선 색스의 <사회의 재창조>(말글빛냄 펴냄)가 적절한 길잡이가 돼줄 듯하다.   

이미 다문화사회로서의 한국을 진단하고 조망하는 책들이 여럿 출간돼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색스의 책은 좀 독특하다. 영국이 경험한 다문화사회의 문제점을 바탕으로 하여 다문화주의의 극복과 다문화사회의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다문화주의가 오늘날 수명을 다하고 있으며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고까지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다문화주의가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의 통합이 아닌 분리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 미국 등 다문화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사회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배타적이고 더 편협하게 변모해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대교 랍비답게 색스는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서 세 가지 유형의 사회를 설명한다. 첫 번째는 ‘시골 별장으로서의 사회’다. 이 별장에는 주인과 손님, 곧 내부인과 외부인이 있으며, 다수와 소수가 존재한다. 별장 주인이 아무리 따듯하게 환대하더라도 외지인은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손님으로만 남는다. 두 번째는 ‘호텔로서의 사회’다. 호텔은 시골 별장이 줄 수 없는 자유와 동등한 권리를 제공한다. 애초에 내부인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주류문화도, 국가적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경우를 보면 1950년대까지는 시골 별장 모델이 지배했다고 한다.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인이 영국사회의 주류이고 내부인이었다. 그러나 50년대말부터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갖은 사회적 충돌이 빚어졌고 결국 내부인과 외부인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다문화주의가 채택됐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호텔 투숙객’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투숙객’들은 ‘호텔 주인’이 아니기에 그 ‘호텔’에 대해서 아무런 애착도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색스가 보기엔 이것이 다문화주의가 궁극적으론 실패한 이유다. 기대와는 달리 다문화주의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막아내지 못했고 오히려 분열만을 더 심화시켰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세 번째 모델이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으로서의 사회’다.  

사회적 통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저자는 보수적이지만, 그러한 통합이 과거와 같은 시골 별장식 모델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점에서, 즉 미래 지향적이라는 점에서는 진보적이기도 하다. 색스는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의 소속감이 사회적 공공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창출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때 그가 강조하는 것은 국가와 시장의 바깥에 있는 가치들이다. 그는 사회가 국가와 시민간의 계약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신뢰에 바탕을 둔 언약의 산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사회 언약론자’가 꿈꾸는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사회는 이방인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사회 자체가 구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인류가 공존을 위해 고안해낸 최선의 방식이다. 각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재능을 통해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을 때 사회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이 된다.” 물론 그가 말하는 사회는 다문화주의를 넘어설 때 도달할 수 있는 사회다. 더불어 한국 사회와는 아직 거리가 먼 사회다. 이 또한 ‘당신들의 사회’인 것일까? 

09. 06. 29.  

P.S. 원제의 'home'을 번역본은 '고향'이라고 옮겼는데, 약간 핀트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은 우리말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라기보다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표지 그림에서 보듯이 이 'home'은 일차적으로 '집'을 가리킨다. '별장'이나 '호텔'과 대비시켜 말하자면 '가정집' 혹은 '살림집'이다('호텔로서의 사회'라는 저자의 비유는 적절해보인다. 아직 본격적인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이지만, 사회를 '호텔' 정도로 간주하는 이들은 우리사회에도 결코 적지 않다). 단, 이때의 집은 남이 만들어놓은 집이 아니라 거주자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집이다. 즉 공동으로 건축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는 집, 그래서 서로가 권리와 책임을 나누어갖는 집이다. 색스가 꿈꾸는 사회는 바로 그런 '살림집으로서의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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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03 09:27 
    한국출판문화상 50년을 기념하여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책, 미래와의 대화'의 한 꼭지를 옮겨놓는다. 나도 몇 달 전에 서평을 쓴 적이 있는 조너선 색스의 <사회의 재창조>(말글빛냄, 2009)를 다루고 있다. 색스는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재창조를 주창한다. 그의 주장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우리도 다문화주의와 '호텔로서의 사회'가 사회적 진보의 지향점이 될 수 있을지 한번 더
 
 
 

<순교자>의 작가 김은국씨가 지난 23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의 예기찮은 죽음으로 이 부고는 묻혔는데, 여기서는 추모기사라도 스크랩해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1학기에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한 강의안을 짜면서 <순교자>를 포함시켰다가 나중에 알베르 카뮈와 함께 다루기로 하고 뺀 적이 있다. 내년에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 아마도 카뮈의 <페스트>와 같이 읽게 될 듯하다. 이미지를 찾다보니 유현목 감독의 영화 <순교자>(1965)의 스틸컷도 있기에 옮겨놓았다. 작품이 발표되어 화제를 모은 게 1964년이니 막바로 영화화되었던 듯하다. 아래 기사의 필자인 김욱동 교수는 국내에서 유일한 김은국 연구서의 저자다.     

경향신문(09 06. 27) 유랑의 삶, 이산의 삶

재미소설가 김은국씨(미국명 리처드 E 김)가 지난 23일 미 매사추세츠주의 자택에서 향년 77세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한국계 미국문학의 개척자인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대한 김욱동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기고를 싣는다.  

인간을 다른 짐승과 구별짓는 특성이 어디 한두 가지랴만은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만큼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는 것도 없다. 한 조각 구름처럼 떠돌다 사라지는 것, 나그네처럼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삶의 본질일지 모른다. 현대 작가 중에서 김은국만큼 구름처럼, 나그네처럼 살다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수원농고를 다녔던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부터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함흥에서 원산으로, 원산에서 두만강 근처 남양으로, 다시 두만강을 건너 만주 룽징(龍井)으로 이주한다. 다섯살 때 다시 아버지의 고향 황해도 황주로 이주하고 중·고등학교는 평양에서 다닌다.

해방과 더불어 혈혈단신 남하한 김은국은 목포로 내려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하여 연락장교와 통역장교로 근무한다. 휴전 후 미군 장군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간 그는 미들베리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등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미국에서의 삶도 평탄치는 않아서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전역을 누벼야 했다. 



김은국은 한때 귀국해 직업군인의 길을 걸으려 했지만 작가에 뜻을 두고 아이오와대학 ‘작가 워크숍’에서 작가 수업을 받는다. 폴 엥글 교수 밑에서 엄격한 작가 수련을 쌓은 그는 마침내 첫 장편소설 <순교자>(1964)를 발표함으로써 미국 문단, 아니 세계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외국 태생의 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비평가들의 주목도 받았다. 그후 5·16 군사혁명을 소재로 한 <심판자>(1968),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소재로 한 <잃어버린 이름>(1970)을 잇따라 발표해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그는 한국계 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는 자신이 걸어온 이산과 유랑의 궤적이 짙게 배어 있다.

그동안 한국계 미국문학은 백인 중심의 주류 문학에 갇힌 ‘문학적 미아’와 다름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 문단에 적자로 입적된 작가가 바로 김은국이다. 1920년의 서재필, 1930년대의 강용흘에 이어 그는 한국계 미국문학을 굳건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비록 그는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의 작품은 길이 남아 뭇 독자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김욱동 한국외국어대 교수·영문학) 

09.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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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09-06-2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저는 '순교자'를 잊지 못한답니다. 이 작품을 읽다가 그만 애인이 될 뻔한 사람을 놓쳤거든요. 상상이 잘 안될 수 있는 스토린데, 하여간 그랬답니다. 김은국님의 명복을 빕니다.

로쟈 2009-06-28 16:46   좋아요 0 | URL
특이한 인연을 갖고 계시네요.^^;

사량 2009-06-2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교자>를 영화화한 유현목 감독이 세상을 뜨셨다는 부고기사가 조금 전 올라왔네요. 정말로 한 시대가 가는 걸까요. 김은국 작가와 더불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로쟈 2009-06-28 17:36   좋아요 0 | URL
앗, 그렇네요. 묘한 우연의 일치입니다. 저도 고인들의 명복을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