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읽은 인터뷰기사는 '마을영화'를 만드는 신지승 감독 부부 이야기였다. 우연히 지난주에 두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독특한 영화제작 방식과 '또 다른 영화'에 대한 열정이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제작하는 새로운 개념의 영화를 '마을영화'라고 지칭하지만 별칭도 여럿 된다. '마을공동체영화' '돌탑영화' '심청이젖동냥영화' 등등.  

최근에 펴낸 책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만들기>(아름다운사람들, 2009)의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렇게 적었다. "영화라는 것과는 인연이 없을 것같이 생각해온 사라들, 진짜 용기도 없고 재주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주저했던 사람들,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 속에 묻혀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돌탑영화를 만들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거창한 시대적 소명과 간교한 자본적 전략을 극복하고, 감독 개인의 미학적 취향과 주관을 넘어 화두를 변방으로 삼고 지역적 삶으로 회귀하여 동네잔치 같은 영화를 만들면서 마냥 행복했고 마냥 즐거웠다." 아래 기사에서도 그 즐거움은 얼마간 묻어나는 듯싶다... 

 

경향신문(09. 07. 02) '마을영화’ 만드는 신지승·이은경 부부   

영화는 산업이다. 제작에서부터 배포에 이르기까지 자본의 뒷받침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한데 이 자명한 사실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돈 없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신지승(46)·이은경(40) 부부다. 영화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출연료는 0원, 영화촬영에 동원되는 배우와 스태프에게 소요되는 식사와 숙박 등의 제비용도 들지 않는단다. 해답은 ‘마을영화(혹은 공동체 영화라고도 부른다)’이다. 감독은 신씨가, 제작은 아내 이씨가 맡는다. 배우는 전국의 마을 주민들이다. 때로 아이들도 동원된다. 주민들은 배우일 뿐 아니라 때론 영화감독이 되기도 하고 손이 모자라면 붐마이크를 들고 녹음기사를 하기도 한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카메라 한번 만져본 적 없고 심지어는 영화 자체를 본 적도 없는 고령의 노인들과 함께 영화를 촬영하는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부부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부부의 작업실 겸 거처는 경기 양평 용문산 자락. 사륜구동 차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산중턱이다. 집에는 여러 명을 수용해 영화교육과 상영이 이뤄지는 작업실이 있고, 집 앞 경사로 한쪽에는 돌을 쌓아 만든 작은 규모의 노천원형극장이 있다. 영화제작과 관람이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원스톱제작 시스템이 숲속 한 가운데 구축된 셈.

지금의 공간을 만들고, 마을영화의 개념을 바로 세우기까지 부부는 지난 10년간 고군분투했다. 충무로와 여의도 등 영화사와 드라마프로덕션에서 10여년간 연출부 생활을 하다 데뷔가 어그러지면서 좌절한 뒤 지금의 양평에 귀촌한 것이 99년.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작품창작에도 한계를 느끼면서였다.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몇년간은 힘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서울이 아닌 시골에서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지금 한국의 영화는 돈으로 만드는 겁니다. 자본을 투자해도 단기에 최대한의 성과를 얻어내려고 하다보니 더욱 상업화가 되죠. 독립영화도 마찬가지예요. 독립영화 감독들조차도 언젠가는 상품으로서 자신의 영화를 들고 대중과 만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투자비가 많지 않다보니 오래 촬영하고 오래 묵히고 고민해가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어요.”

마을영화의 개념을 구체화시킨 것은 2003년 무렵. 가진 돈 탈탈 털어 5t 트럭을 사들여 작업을 하고 먹고 자고 씻을 수 있도록 개조한 뒤 트럭을 타고 전국의 마을을 누볐다. 영화현장에서 부부의 연을 맺어, 실무를 맡아 온갖 뒷감당을 다 해내는 아내 이씨도 물론 함께였다. 부부가 제작하는 영화에는 성공이니 복수, 살인 등 보편적인 영화의 소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며 빚어내는 소소한 일상이 소재로 등장한다. 송아지를 잃어버려 화병이 나 누워버린 할아버지, 고춧값 100원 차이로 서로 싸우는 할머니, 경로잔치의 주인공인 노인들이 스스로 잔치 준비를 위해 전을 만드는 씁쓸한 현실, 이주여성 며느리와 시어머니간의 갈등 등 작지만 농촌의 단면이 담긴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된다.  

“기존의 드라마는 복수와 선악의 문제를 다루고 갈등이 있고 이것이 풀리면서 완결되잖아요? 마을영화에서는 생활속 갈등을 다룹니다. 마을마다 고유한 술이 있듯이, 마을영화도 마을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죠. 마을영화는 마을 사람들이 빚어내는 드라마입니다.”

마을영화는 자본과 대중의 입맛에 맞춰 기획된 상업영화, 독립영화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제작 방식도 통상의 영화제작과는 차이가 난다. 영화제작 방식은 대강 이렇다. 역사, 설화 등을 통해 영화의 단초를 찾은 뒤 영화촬영지를 고른다. 마을 이장을 통해 연락을 넣고 협조를 구하는 것은 필수. 요즘엔 직접 의뢰가 오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사전답사를 통해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소재를 수집하는 것. 그 후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면서 전체 주제를 잡아나가고 편집 등 마무리 작업을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제작의 마무리는 주민들과 함께하는 ‘달빛영화제’다. 야외에 천막을 치고 모두 함께 마을영화 시사회를 즐기는 것이다.

기존 영화제작과 가장 큰 차이라면 사전에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열려진 상태에서 작업을 합니다. 시나리오를 들고 가면 일단 그건 감독 개인의 영화가 되는 겁니다. 마을영화는 백지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이야기의 원형을 마을에서 구해요. 여러개의 에피소드가 통합되면서 하나의 구성체가 돼 가는 거죠.”

신씨는 상업주의에 물든 한국 영화계의 대안을 마을 공동체에서 찾고 있었다. 그는 “마을은 자본주의의 물신 숭배를 극복하고 인간 정신의 가치를 위협하는 퇴폐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 창작의 소립자”라고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주민들에게는 유쾌한 체험이자 놀이며 치유의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행위라고 설명했다.

“전남 화순에 갔었어요. 겨울이라 농한기였는데, 경로당에 가니 노인분들이 60~70여명 앉아계시더군요. 영화 이야기를 했더니 즐거운 소일거리로 받아들이시더군요. 나이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즐겁고자 하는 놀이의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예술은 즐거운 것이라는 데서부터 마을영화는 출발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어설픈 연기가 혹여 영화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사실 농어촌의 잔잔한 일상을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이 어렵지 ‘전원일기’류의 연기는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시골분들이 예술적 그릇이 더 커요.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알아요. 상황만 주어지면 스스로 알아서 대사를 해요. 서로 연기를 지켜보며 스스로 감독이 되어 훈수를 두기도 하죠.”

때문에 촬영 현장은 모두 함께 웃고 즐기는 축제의 장이다. 신씨는 공동체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을 요하는 마을영화 작업은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문화예술교육·미디어교육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이건 미디어 운동이 아니라 영화를 찍는 행위, 예술창작행위예요. 영화를 통한 미디어교육이라든가 문화예술교육은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는 가능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주민들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그 분들이 기껍게 참여해야 영화제작이 진행되거든요.”

부부는 지난 10여년간 60여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대부분 중·단편. 90분 이상의 장편도 10편이 넘는다. 작지만 성과도 있다. 환경을 소재로 한 영화는 영화제에 초청되고 청소년과 노인들이 배우로, 스태프로 참여한 영화는 청소년영화제, 노인영화제 등에서도 초청을 받아 상영됐다. “마을영화가 널리 알려지진 못했지만 영화계 내부에서는 파급력이 크다고 봅니다. 영상자료원이 진행하는 ‘찾아가는 영화관’이나 독립영화배급지원센터가 진행하는 ‘우리동네 극장만들기’ 등 최근에 커뮤니티를 위한 영화상영 이벤트가 늘고 있어요. 물론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런 면에서 마을영화는 앞으로 더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하나의 문화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도 보고요. 맛집을 찾아가듯, 마을영화를 보려면 그 마을로 가도록 만드는 거죠.” 



부부는 최근 그간의 경험을 모아 마을영화의 이론과 방법론, 비전을 담은 책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만들기>(아름다운사람들)를 펴내기도 했다. 자본과 분업화된 시스템, 전문인력 없이는 불가능해보이는 영화제작을 농어촌 주민들과 유쾌하게 진행하고 있는 부부와 이들이 제작한 마을영화를 관람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예술의 본질을 되새겨봤다.(윤민용기자) 

09.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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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7-0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왜 땡스투를 할 수 없나요????

로쟈 2009-07-02 22:21   좋아요 0 | URL
제가 스크랩한 기사에 대해서는 책의 이미지만 따붙이고 있습니다...

2009-07-02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2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2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2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7-19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BS "책 읽는 밤", 제11화를 봤다.
영화의 특징은,
1. 동시에 한 공간에서 함께 감상.
2. 감상자의 시각 등에 자동으로 옴.
3. 시작과 결말이 평균 3시간 소요.
4. 감상후 다른 공간으로 쉽게 이동.
5. 비주얼한 세계로 순간 퐁당 가능.
감상자가 직접 배우가 될 수 있는 "마을영화",
있는 그대로 출연할 수 있는 편안한 영화만들기.
"극장이라는 곳은 공동묘지와 같다." -신지승 감독 -
 

저녁에 목동 교보에 들렀다가 발견한 책은 지젝과 라클라우, 버틀러 세 사람이 공저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도서출판b, 2009)이다. 원저 자체는 2000년에 나온 것이니까 좀 됐고, 번역에 대한 소문도 진작에 돌았으므로 좀 뒤늦게 출간된 감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여하튼 반갑다. 여름방학 필독 리스트에 한권을 더 추가해놓는다.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아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일부 옮겨놓는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하, <우연성>)은 서로 다른 이론적 배경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 세 명의 저자들이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에서 좌파 정치에 필요한 사유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전개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을 담고 있다. 책은 각 저자들이 상대방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을 기초로 진행되며, 상대를 비판하고 상대의 비판에 대응하는 저자별 3편의 글, 총 9편의 글을 담고 있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주요한 의의 중 하나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좌파적 사유의 주요 방향으로 설정된 우연성과 특수성을 보편성의 견지에서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사고되었던 필연성/보편성 대 우연성/특수성의 이분법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우연성과 특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어떻게 보편성이 창출될 수 있는지를 각자의 이론적 렌즈를 통해 고찰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우연성과 보편성은 대립인 아닌 새로운 관계 속에서 모색되어야 할 개념들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세공되었으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새로운 분기점을 이루어낸 헤게모니 개념은 본질주의적 사유와의 대립 속에서가 아니라 우연성과 특수성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지형 속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특수성과 차이, 우연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론과 실천의 일면적 흐름 속에서 보편성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시도, 보편성의 견지에서 그것이 특수성/우연성과 맺는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는 <우연성> 내에서 진행된 대화와 논쟁의 구체적 세부에 상관없이 이 책이 갖는 고유한 ‘현재적’ 의의를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09. 06. 30.  

P.S. 지젝과 버틀러의 책은 계속 소개되고 있지만, 라클라우의 책은 무페와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조만간 재번역본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을 제외하면 소개된 책이 거의 없는 듯싶다. 타이틀로 보자면 <해방(들)>이나 <인민주의 이성에 대하여> 같은 책도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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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교수신문에서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서평위원 칼럼란인데,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대한 이택광 교수의 서평을 싣고 있다. '인터넷 글쓰기'라는 매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로쟈의 저공비행'이 '새로운 글쓰기'와 '게으른 지적 유희' 사이에 놓여 있다는 그의 진단은 나름 정확하다. 이 '서재질' 탓에 논문을 게을리 쓰고 있으니 말이다. 더듬어보면, 사실 학부를 졸업하면서 개인적으로 만든 문집의 타이틀이 '게으른 저공비행'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미 싹수가 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교수신문(09. 06. 29) 책읽기와 글쓰기, 그 오랜 습속의 전환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활동이 아니다. 읽는 것은 항상 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작고한 데리다의 철학이 이 문제를 평생에 걸쳐 숙고한 데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 묵독이든, 낭독이든, 책을 읽는 활동은 남의 비석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죽어버린 언어의 음각들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그것이 책 읽기의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최근 나온 『로쟈의 인문학서재』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서 혼자서 즐거워했다. ‘로쟈’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현우 박사의 아바타다. 꼼꼼한 번역비평과 책 읽기의 미덕을 보여주는 훌륭한 블로그라는 게 중평이다. 이런 세간의 평가에 별도로, 나는 『로쟈의 인문학서재』가 책읽기가 글(책)쓰기로 바뀐 훌륭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책은 블로그에 비해 작다. 작기 때문에 훨씬 단단하고 조밀하다고 볼 수 있겠다. 세상을 책으로 생각했던 중세의 상상력은 여전히 인문학자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참으로 식상하면서도 인문학이라는 세 글자에 아직도 연정을 품는 모든 이들의 상식이자 양식인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서재』는 특이한 매체성을 보여준다. 서평에서 비평까지, 문학에서 문화현상까지, 종횡무진한 흔적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로쟈의 인문학서재』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형식이다. 인터넷 글쓰기가 책이라는 전통적 매체를 만나야할 이유에 대해 고민해볼 만하다. 제임슨의 지적처럼, 형식은 사회경제적인 문제와 인과적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디킨스의 소설이 신문연재라는 시장의 논리 때문에 서사의 분절을 감내해야하고, 도서관 대출이란제도적 한계 때문에 통권으로 묶이지 못하고 낱권으로 나뉘어져야했던 것처럼, 이 책도 인터넷 글쓰기라는 매체의 조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글 쓰는 이가 먹고 살 수 있는방법은 글을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은 글로 먹고 살겠다는 이들에게 수익구조를 제공하지 못한다. 블로그나 게시판에 올린 글들을 모아, 전통적인 ‘책’이라는 매체성에 담았을 때만 비로소 글은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은 책으로 묶이기 이전에 ‘초벌-기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책으로 묶인 ‘로쟈의 서재’는 초벌의 단계를 넘어선 간벌의 과정을 통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훨씬 정제된 사유들이 담겨 있는 셈이지만, 그 형식만을 놓고 본다면, 인터넷 특유의 분절성과 잡학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책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로쟈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오프라인을 살아가는 평론가 이현우가 아니라 인터넷 서평가 로쟈이기 때문에 가능한 글들이 ‘이현우’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 수 있다는 ‘낯선 현실’이 여기에 있다. 천정환이 말하듯 그것은 이현우의 글이 ‘인민의 벗’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이라는 제도에서 더 이상 인문학을 할 수 없기에 로쟈의 책이 필요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드러낸다. 논문쓰기로 복귀해버리고, 아무도 글쓰기의 형식에 대해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대학의 풍토에서 로쟈와 같은 르네상스적 글쓰기는 언감생심 대학평가라는 숫자 놀음이 추방시키고 싶어하는 게으른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유희할 수 없는 대학의 공간에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는 로쟈와 이현우라는 이중적 존재성으로 인해, 『로쟈의 인문학서재』는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작업의 산물을 ‘서재’라는 제목으로 묶어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요즘 한 포털 사이트에서 기획연재하고 있는 ‘명사들’의 서재탐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책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그 서재의 클리셰에 대한 하나의 항의처럼 로쟈의 책이 읽히는 건 그래서 놀랄 일은 아니다. 책읽기와 책쓰기에 대한 오랜 습속을 이제 바꾸어야할 때가 됐다는 걸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이택광 서평위원 경희대·영문학) 

09. 06. 29.   

P.S. 알다시피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마지막 장은 '번역비평'에 할애돼 있는데, 그런 관심사와 관련지어 보자면 '이달의 책'으로 꼽을 만한 것이 지난주에 출간됐다. 역시나 이번주 교수신문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인데, 앙트완 베르만의<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철학과현실사, 2009)이 번역돼 나온 것. 번역학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저자와 이 '필독서'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두어 달 전에 영역본을 구했는데, 이번 여름에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한번 만끽해봐야겠다. 나대로의 '여름휴가'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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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러웨이부인 2009-06-3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이네요. 그런데 로쟈님은 휴가에도 책을?

로쟈 2009-06-30 21:24   좋아요 0 | URL
'휴가격'의 책이란 뜻이지요.^^;

2009-06-30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30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30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30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따우리~* 2009-07-03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정말 글을 잘 쓰신다는 생각말곤 아무것도 들지 않습니다. 평소 블르그에서 본 글도 있고 못 본 글도 있는데 항상 로쟈님의 분야를 뛰어넘는 폭 넓음이 참 부럽습니다. 다 읽고 난 뒤에 제 블로그에 시덥지않은 서평도 쓸 생각입니다 ^^;;
아 ~ 강연회는 시험기간이라 못 간게 정말 땅을 치고 후회가 되네요..
다음 번에 기회가 되면 꼭 뵙고 싶군요.

로쟈 2009-07-03 09:34   좋아요 0 | URL
동영상이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땅을 치실 일은 아닌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아는 체를 해주세요.^^
 

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타이틀의 책은 비비아나 젤라이저의 <친밀성의 거래>(에코리브르, 2009)다.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원제였던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을 떠올려주는데, 기든스의 책이 '친밀성의 사회학'에 관한 것이라면 젤라이저의 책은 '친밀성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자식의 양육이나 부모 부양에서 언제나 갈등을 빚곤 하는 것이 '돈' 문제인데, 책은 그 껄끄러운 문제에 대한 '솔까말'의 기회를 마련해줄 수도 있을 듯싶다. 지난 주말에는 알라딘에 북이미지가 뜨지 않은 탓에 관련기사를 조금 늦게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06. 17) 친밀한 관계에 내재한 경제적 거래 파헤쳐

미국의 작가 셸비 화이트는 “(가족관계에서) 가장 큰 실수는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낭만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낭만을 돈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 자본주의 시대에도 인간관계의 친밀성과 경제행위를 분리돼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정서는 엄연하다. 반면 최근의 존엄사 논쟁에서 보듯 가족 중 누군가를 돌보는 숭고한 일도 사회경제적 이슈로 논의되고 판정받는 게 현실이다. 말기환자가 가족들의 지불가능한 비용을 넘어서 살게 될 경우에 대해 사회가 걱정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경제적인 활동과 사적인 친밀함이 긴밀하게 마주치는 영역에 입문해 있다.  



저자인 비비아나 A 젤라이저 프린스턴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상적인 대인관계를 ‘경제’라는 필터를 끼운 채 들여다본다. 책에서 저자는 로맨틱한 관계에 내재한 다양한 경제적 거래를 파헤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경제활동을 통해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고 재협상한다. 경제활동과 친밀한 관계는 심지어 서로의 관계를 촉진시킨다. 그는 미국 역사상 법정에서 벌어졌던 광범위한 분쟁사례들을 통해 이를 제시한다. 특히 조건 없는 사랑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졌던 부부·연인, 부모·자녀 등 가장 친밀한 관계들을 법정에 세워 놓는다.  

9·11테러 사건은 ‘관계에 대한 금전적 보상’ 논쟁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테러로 목숨을 잃은 여성 매캐너니의 희생자 보상금을 놓고 그녀와 20년 동안 함께 산 동성애인 크루즈는 50만달러의 보상금이 매캐너니의 남동생에게만 주어진 것이 부당하다고 청구했다. 자신은 고인과 집, 신용카드를 공유하고 모기지와 생활비를 공동 지출했으며, 생명보험 수혜자로 서로를 지명했기 때문에 자신이 절반의 몫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고인의 남동생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승인할 수 없고 유언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보상금을 모두 가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9·11사태 때 희생자 한 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유족은 별거 중인 남편, 동거자, 전 남편, 애인, 자녀 등 여럿이었고 얼마나, 어디까지 보상해야 하는지 논란이 이어졌다. 

이처럼 결혼하지 않은 동거 커플, 소원해진 배우자, 동성가정의 경우 종종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된다. 하룻밤 혹은 일생 동안 침대와 식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경제적 보상을 받을 만한 ‘진짜’ 친밀함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혼한 부모가 자녀의 양육비를 어떻게 분담해야 하는가, 빚에 쪼들리는 자녀가 늙고 병든 부모를 어디까지 부양해야 하는가 등 현대의 인간관계 상당부분이 법정의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  

◇요즘 맞벌이부부들의 상당수는 자녀 양육을 노부모에게 맡기며 양육비 보상을 얼마나 할 것인지 고민한다. 이처럼 진심과 친밀함을 담은 관계에도 물질적 보상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요즘 자녀 양육을 노부모에게 맡기는 맞벌이부부들이 양육비 보상을 고민하는 것도 부모자식간의 조건 없는 사랑에 흠집을 내는 사례. 하지만 지은이는 이조차 “경제활동은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며, 친밀함이라는 존재는 경제활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책의 다종다양한 사례들은 관계의 친밀함을 ‘맹목성’이라는 두꺼운 유리창을 가진 온실에서만 살아남는 민감한 화초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충격과 함께 해방감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지은이는 “목표는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친밀함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혼합을 만드는 것이다”면서 “돈이 악영향을 미치는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멈추고, 대신 어떤 조합이 더 행복하고 더 생산적인 삶을 만드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김은진 기자)  

09. 06. 29.

 

P.S. 저자인 젤라이저 교수의 다른 책들을 찾아보니 '아이의 사회적 가치'를 다룬 것과 '돈의 사회적 의미'를 다룬 것이 눈에 띈다. <친밀성의 거래>는 이 두 전작의 변증법적 종합(!)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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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길>에 대한 페이퍼를 적다 보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박상순의 '자네트가 아픈 날 2'. 기억엔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세계사, 1996)에 수록된 시인데, 그때 읽고 적은 촌평과 함께 옮겨놓는다.     

 

자네트가 아픈 날 2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에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 버린 솜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녀는 약을 먹는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약에 취한 그녀의 노래,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그녀의 이름을 새기고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고, 미술대학에 다닌 솜씨로 뚜껑을 밀봉한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그녀를 묻은 뒤에도 나는 가로수만 생각한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노란 가로수, 불타는 가로수, 그 속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가로수, 노래하는 가로수.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담겨질 거대한 항아리를 만든다. 담겨질 사람은 없다. 나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거꾸로 서는 가로수, 날개 달린 가로수, 돌덩이를 삼킨 가로수, 항아리를 삼킨 가로수.

나를 긴 줄에 묶어 책꽂이 뒤로 끌고가는 가로수,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나의 가로수.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즉 즐기기 위해서는 ‘항아리’와 ‘가로수’란 두 이미지가 뜻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녀(자네트)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와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가 이 시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항아리’는 한 ‘세계’를 뜻한다. 이때의 세계는 자기만의 예술세계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다. ‘그녀’와의 관계가 문제되고 있으니까 여기서는 가정이라고 해두자. 즉 이 ‘항아리’는 예술작품(Art Work)으로서의 항아리라기보다는 사회적 삶의 표준단위, 즉 가정(Family Life)으로서의 항아리이다.  

그럼 이제 1연을 보자.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만들 수 있는 항아리는 FL이 아니라 AW이다. 굳이 “틀어져 버린” 솜씨가 아니어도 그런 솜씨로는 FL을 만들 수 없다(이 사회적 통념!). 그러는 ‘나’의 옆에서 “그녀는 약을 먹는다”(그녀는 약값이 필요할 것이다). 2연에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니까 FL에 대한 감각이 ‘나’보다 나을 리 없다. 약에 취해 있으니까 더더욱 그렇다. 이 항아리가 제대로 된 항아리, 즉 FL을 보장해줄 수 있는, FL로서의 항아리인가 아닌가를 제대로 분별해내지 못하는 것.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기”는 ‘나’의 행위에서 드러나듯이 이 항아리는 AW로서의 항아리이다. 이건 생활의 터전, 즉 FL로서의 항아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3연에서 결국 이 항아리가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는 옹관묘가 된 것은 당연하다. “내 항아리”는 예술의 세계이고 죽음의 세계인 것...  

그리고 이제 ‘가로수’. 가로수는 버드나무처럼 길가에 서 있는 나무이다. 그것은 중심에 있는 나무가 아니다. 그래서 ‘가로수’는 ‘주변적인 존재, 주변적인 삶’의 은유가 된다. “그녀가 아픈 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는 바로 ‘가로수’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4연에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가로수만 생각한다”.  

그는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런 주변적인 자기세계에, 상상적인 세계에 안주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항아리’의 세계는 점점 멀어져 간다. 5연에서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항아리’를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질 리도 없고, 거기에 “담겨질 사람”도 없다. FL뿐만 아니라 AW로서의 항아리도 그는 이제 만들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그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이 자폐적인 세계는 6연에서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의 세계로 진술된다. 이 ‘가로수’는 이제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것이다. ‘가로수’가 ‘항아리’를 대신하는 것. 이 안쓰러움을 이 시는 은근하게 노래한다... 이게 내가 이 시를 재미있게 읽은 이유이다. 

09.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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