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외출길에 우편함에 <출판문화>(538호)가 배송돼 있기에 꺼내 읽었다. 권두언에 해당하는 '초대석' 코너에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란 주제의 원고를 청탁받아 쓴 글이 실렸다. 주제가 너무 거창하여 주로 '5피트 책꽂이'와 '독서국민'을 화두로 삼아 나대로의 생각을 적었다. 오탈자를 바로 잡아 옮겨놓는다.   

 

출판문화(10년 9월)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는 ‘곁다리 인문학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창한 주제다. 나는 그냥 ‘5피트 책꽂이’ 이야기에서 내가 느낀 바를 조금 적고 싶다. ‘피트’란 단위에서 우리네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짐작하실 것이다. 미국 얘기다. 지난 세기 초의 일인데, 무려 40년 동안이나 하버드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한 찰스 엘리엇이 은퇴할 무렵에 한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50권짜리 전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51권이다. 일방적인 제안은 아니었고, 엘리엇 총장이 평소에 “5피트 책꽂이면 몇 년 과정의 일반교양 교육을 대체할 만한 책을 충분히 담을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 지론을 바탕으로 1909년에 펴낸 것이 ‘하버드 클래식’이란 전집이고, 이 전집의 별칭이 ‘5피트 책꽂이’다.  

<하버드 인문학 서재>(21세기북스, 2010)의 저자 크리스토퍼 베하의 묘사에 따르면, 자신의 외할머니가 소장한 이 전집은 한 칸의 폭이 2피트인 책꽂이 세 칸을 차지했다. 세 칸의 높이가 5피트 가량 되는 셈이니까 꽤 큼직한 책들인 듯싶다. 각 권마다 400-500쪽이라고 하니까 분량도 만만찮다. 엘리엇은 하루에 15분씩만 투자하면 누구라도 고등교육이 제공하는 최상위 수준의 교양을 갖출 수 있다고 장담했고 또 그렇게 기대했다. 그로서는 ‘5피트 책꽂이’가 교양의 ‘핵심’이자 ‘최소한’이었던 모양이다. 하나의 교과과정처럼 편집한 이 전집에서 그는 독자가 세계 사상의 주요 흐름을 간파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그야말로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위대한 교과서”로 비치길 원했다.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나서 베하는 2006년 연말에 거의 100년 전에 나온 이 전집 완독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2007년 1년 동안 독서록을 썼다. 견적상으론 1주일에 한권씩, 하루에 60-70쪽 정도씩 읽는 일이었고, 일견 대단한 일로 보이지 않지만 이뤄낸 성취는 작지 않아 보인다. 사실 우리의 경우 대학 교양과목을 2년간 듣는다고 해서 50권 정도의 고전을 독파하는 학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버드 인문학 서재>에는 1권의 첫 작품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부터 우리에겐 생소한 49권의 마지막 작품 윌리엄 모리스의 <볼숭과 니벨룽 이야기>까지 하버드 클래식의 전체 목차와 요지가 부록으로 수록돼 있는데, 100년 전 ‘목록’인 만큼 유익한 참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절대적이진 않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이 목록이 아니라 ‘5피트 책꽂이’라는 기획이다. 민주 시민이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 제시되고 그것이 실제로 읽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와 좀 구별되지 않을까.  

하버드 클래식은 출간 이후 20년 동안 약 50만질, 낱권으로는 1000만권 가량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게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시할 만한 수치는 아니다. 또 모든 독자가 이 전집을 통해서 애초에 엘리엇이 기대한 만큼의 지적 수준과 교양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도 미지수더라도 그들의 집집마다 같은 전집이 꽂혀 있었다는 사실 자체의 의의는 간과할 수 없다. 책에 대한 기억과 독서 경험을 공유한다면 그들은 이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니까. 설사 무얼 읽었는지 다 망각한다손 치더라도, 라이오넬 트릴링의 말대로 같은 걸 잊어버리는 것이므로 의의가 없지 않다.   

미국에서 그렇듯 국민적 교양을 위한 고전 전집이 기획되고 읽히기 시작할 때 일본에서는 막 ‘독서국민’이 형성되고 있었다. 나가미네 시게토시의 <독서국민의 탄생>(푸른역사, 2010)에 따르면, 메이지 30년대(1897-1906)에 일본의 독서문화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독서국민이란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밴 국민’을 가리키며 좀더 구체적으론 ‘신문이나 잡지, 소설 등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독서국민은 물론 근대의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독서국민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가? 두 가지가 필수적인 계기였다. 하나는 읽고 쓰는 능력과 독서 습관의 보급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서 자료의 지속적인 공급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 국민 대다수는 소학교 졸업자였지만 그 정도 교육으로는 읽고 쓰는 능력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지방에 많은 도서관을 설립했고, 독서회나 순회문고 사업 등에 나선 언론사들도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 일조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팔기 위해서라도 문맹퇴치와 일반적인 독서능력 함양은 필수적인 요구였다. 거기에 근대적 철도의 부설에 따라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추게 된 출판 자본이 근대 일본어로 쓰인 책들을 찍어내면서 바야흐로 독서국민이 탄생하게 됐다.  

이러한 사례들에 견주면 우리의 출발은 매우 불우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데다가, 비록 근대식 교육과 언론이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독서국민은 형성되기 어려웠다. 30%의 식자층만이 한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어 책까지 읽을 수 있는 엘리트 독자층은 10%를 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계급 이전에 한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읽고 쓰는 능력의 유무에 따라 분할돼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라면 모든 구성원을 동등한 주권자로 전제하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이 제대로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 어렵고,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된 해방 이후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군주가 통치하는 왕정국가라면 그 국가의 존립과 흥망을 좌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군주 한 사람의 학식과 덕성이다. 그런 것이 그의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따라서 예비 군주의 교육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그의 배움을 일컬어 ‘성학(聖學)’이라 불러왔다. 똑같은 원리가 민주주의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국민 각자가 주권을 갖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그 주권자의 역량, 곧 국민의 일반적 역량이다. 그리고 그 역량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 사고력과 판단력의 원천이라 할 지식과 교양이다. 그것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물론 책을 통해서, 독서를 통해서이다. 기본적인 독서력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민주사회의 기본 토대이자 버팀목이다. 그런 독서력의 중요성에 비하면 책의 종류는 부차적이다.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밴” 다음이라면 어떤 종류의 독서라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들 각자는 ‘독서국민’이며 대한민국은 독서 강국이라 할 만한가? 우리는 국민 개개인이 주권자로서 자랑할 만한 식견과 교양을 갖고 있는가? 우리의 교육과 독서 현실은 그러한 시민을 양성하기에 모자람이 없는가?  

해마다 반복되는 설문결과이지만, 우리의 독서율은 한 달 평균 1권꼴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라 한다. 이런 지표를 놓고서는 사실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식의 독서지도가 무의미하다. 하루에 30분씩만 책을 읽어도 요즘 나오는 200-300쪽 짜리 책이라면 일주일에 한 권은 너끈히 읽을 수 있다. 적어도 독서가 습관으로 밴 국민이라면 한 달에 4-5권은 읽어야 ‘정상’이다. 그런 면으로 보자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독서국민’이 돼본 적이 없다. 독서국민의 ‘효과’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5피트 책꽂이’를 집집마다 끼고 살지도 않으며, 자신의 무지와 무교양을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런 우리가 또한 세계 7위의 출판대국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그 많은 책들은 누가 다 읽는 것인지 궁금할 뿐더러 누구를 위해서 책을 만드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자명한 것은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세계 7위의 출판대국이라는 것보다는 세계 7위 이상의 독서대국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도 바람직하리라는 점이다. 남에게 별로 지기 싫어하는 우리가 이 정도 욕심은 내봄직하지 않을까.   

한동안 한 방송사와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책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 등의 단체에서 지역 도서관 건립운동을 벌인 바 있다. 지역민의 독서와 문화생활의 기본 거점이 되어야 할 도서관은 현재보다 대폭적으로 늘어나야 하고, 장서 및 설비도 크게 확충되어야 한다. 그건 두말할 것도 없다. 정부나 지자체가 예산타령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국민이 저마다 자기 책장 갖기를 실천하는 것은 어떤가. ‘5피트’ 대신에 ‘다섯 자’짜리라고 해도 좋겠다. 물론 참고서나 수험용 책 말고 순수하게 자신의 지적 교양을 높이기 위한 고전이나 인문서를 꽂아둘 책장이어야겠다. ‘하버드 클래식’에 견줄 만한 필독 고전 목록을 제시해도 좋겠고, 도서 구입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도 고려해봄직하다.  

출판계 안팎의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대로 독서력을 갖춘 독자층이 점점 줄고, 제대로 된 독서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아무리 좋은 인문서가 출간돼도 사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한편으론 독자를 유인할 만한 좋은 책이 계속 나와야겠지만, 다른 한편에선 그런 책을 알아보고 읽을 수 있는 독자를 교육하고 길러내야 한다. 나는 우리시대 인문학에 대한 고민이 이런 ‘바닥’에서부터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책을 읽어야 하고 독서국민이 돼야 하는가, 라고 혹 질문하실지 모르겠다. 치명적인 질문이다. 굳이 산에 올라가봐야 하느냐, 굳이 인생을 다 살아봐야 하느냐, 란 질문처럼. 답하자면, 우리가 그래본 적이 없으므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온 국민이 매주 한권씩 책을 읽는 사회를 꿈꿔본다. 

10.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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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9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9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코 2010-09-29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로쟈님의 글을 눈팅만 하다가 이제야 겨우 댓글 씁니다. 너무 감동적인 글이네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10-09-29 08:17   좋아요 0 | URL
감동적이라고 하시니 제가 감동을 받습니다.^^

Mephistopheles 2010-09-29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피트면...152.4센티미터...삼단으로 구성했다고 가정했을 때 책장의 칸막이 두께를 2.5센티로 잡았을 때 10센티가 날라가고..책을 꽂을 여유공간 털어내면 권당 책 높이는 적어도 40센티는 된다는 말이군요.(아침부터 계산기 두둘기고 난리 중)

로쟈 2010-09-29 08:44   좋아요 0 | URL
검색해보시면 책장 사진도 뜨는데, 어떻게 해서 5피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알로하 2010-09-29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있었습니다. 최근 읽은 어떤 글보다 독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로쟈 2010-09-29 16:42   좋아요 0 | URL
음, 반응이 나쁘진 않군요.^^

워킹슬로울리 2010-09-29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어제 홍대 상상마당 가셧어요?!
얼핏 뵌거 같은데!

로쟈 2010-09-29 16:42   좋아요 0 | URL
네.^^ 편집팀과 발문을 쓴 신형철 평론가도 같이 있었습니다.^^

oren 2010-09-29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독서라는 주제 앞에서는 언제나 불끈하시니 댓글로라도 응원하고 싶네요.

인간이 지구상의 주인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탁월한 전달능력' 때문일텐데,
책이나 독서만큼 '엄청난 것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전달해 주는 것도 드물다 싶네요.
그 책을 만든 '글자 형태의 언어'에 대해 갈릴레오가 극찬한 대목을 읽었는데 옮겨봅니다.
****
그러나 그 모든 위대한 발명품을 능가하는 것이 있으니, 비록 시간과 공간이라는 강력한 장벽이 놓여 있지만 자신의 깊은 사고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단을 꿈꾸었던 자의 마음은 얼마나 위대했던가! 인도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앞으로 천 년이나 만 년이 지나도 태어나지 않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다니, 스무 개의 철자를 종이 한 장에 배열해 그렇게 쉽게 의사를 소통하다니!

로쟈 2010-09-29 16:43   좋아요 0 | URL
뭐든지 꺼내놓으실 수 있을 거 같아요.^^

햇빛눈물 2010-09-30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으로 댓글을 작성합니다. 한 2년 전부터 로쟈님 글방에 들어와서 매번 좋은 글과 기사만 본 덕분에 저도 알라딘 블로그도 만들고 했습니다. 평소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궁금하며 고민하는 '독서', '독서습관'에 대한 글이라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나름 책도 많이 읽고 책에 엄밀히 말하면 활자에 관심 있어하는 축에 속하지만 제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아 때론 답답할때도 있습니다. "왜 책을 읽지 않을까?하고요 직업상 그래도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글에 쓰신 것처럼 우리나라 국민이 '독서국민'이 된다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벌어지지 않겠죠? 제가 사는 동네가 관악구인데 저번 선거할때 관악구청장(현구청장) 민주당(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후보가 내건 공약중 큰 부분이 도서관 확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전에 국회도서관장을 지냈다고 하더니 책과 도서관에 관심이 많은 듯 했습니다. 아직 뭐 별다른 변화는 없지만 내심 기대해봅니다. 집 앞에 작은 도서관이 하나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왠지 모르게 도서관에 가면 평온해지고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우리 아이들이 이런 느낌을 어릴때부터 느끼고 간직한다면 언젠가 우리도 '독서국민'이라 불릴수 있는 그날이 오겠죠...(혹 글을 제 블로그에 스크랩해도 되겠습니까?)

로쟈 2010-09-30 08:50   좋아요 0 | URL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기본'인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뭐가 달라질지 저도 궁금해서요. 스크랩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2010-09-30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1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아침까지 주제를 못 잡고 있다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한 대목을 조금 풀어주는 쪽으로 쓰게 됐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독자들이 체호프의 <벚꽃동산>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경향신문(10. 09. 28) [문화와 세상]노예의 본성, 자유인의 본성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동산>에는 피르스라는 늙은 하인이 등장한다. 나이는 87세. 집안 대대로 주인댁의 농노였는데, 1861년 러시아에서 농노해방이 단행된 이후에도 그는 ‘자유의 몸’이 되는 걸 원치 않아 하인으로 남았다. 하인 이외의 다른 운명은 전혀 상상해보지도 않아서 농노해방을 아예 ‘불행’이라고 부를 정도다. 딱히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옛날에는 그냥 다 즐거웠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이제는 늙어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중얼거리며 차츰 존재감을 잃어간다. 타고난 농노, 타고난 하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 옹호’에 관해 읽다가 피르스란 이름을 떠올렸다. 인간의 본성과 정치의 목적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었다. 알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했지만 여성과 노예의 본성은 정치의 주체인 시민이 되기에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부당해 보이는 판단이지만, 사실 그런 부당한 배제는 2000년 이상 지속돼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점에서 노예제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일단 노예가 꼭 필요하다는 점. 시민들이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동안 누군가는 집안일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타고난다는 점. 자유인으로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예로 타고나는 사람도 있으며, 그런 경우엔 노예제가 이롭고 공정하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벚꽃동산>의 피르스라면 아마도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노예제 옹호자로 비판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노예 본성론’이 노예제를 반대하는 근거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의 천성이 노예로서 적합하지 않다면 그에게 노예 일을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도 함축하기 때문이다. 즉 피르스의 경우처럼 하인의 직분에 만족하며 사는 ‘타고난 노예’가 없다면, 노예제는 자연스레 지지될 수 없다. 아무리 정치적·경제적으로 노예가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성론은 자유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몇 시간이고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닭 가공공장에서의 일을 예로 들자면, 자유주의적 입장은 노동력과 임금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교환됐는가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에 서면, 노동조건에 더하여 그 일이 노동자의 본성에 맞아야 한다. 만약 너무 힘들고 위험하며 지저분한 일이라 본성에 부적합하다면, 노예제가 부당하듯 그 일 또한 부당하다. 적어도 우리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치를 위해서, 즉 함께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 인간의 본성은 폴리스에 살면서 정치에 참여할 때만 충분히 실현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동물과 달리 인간의 언어는 단지 쾌락과 고통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공정하고 불공정한지,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수단이다. 그런 언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입증한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정치공동체나 정치적 활동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면, 그는 짐승이거나 신이다. 또 누군가 스스로 그러한 정치적 활동과 관심에서 자신을 배제시킨다면, 그는 자발적으로 노예의 삶을 선택한 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삶인가? 역시 피르스의 경우가 참고할 만하다. <벚꽃동산>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모두가 떠난 무대 위에 드러누우며 이렇게 말한다.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 

10.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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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9-2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해방? 되고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고,
조선의 상놈들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자, 소작농을 자처하였지요.
그 소작농의 자손들인 서민들의 삶이 그렇지요.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은...'
노예 본성론... 결국 노예에게 보이는 세계는 '노예로서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 그것이고, 권력자는 그것을 벗어나는 자에게 단두대를 마련한 것이 '역사'란 놈 아닌가 합니다.

로쟈 2010-09-28 11:19   좋아요 0 | URL
노예 본성론은 양면을 갖고 있어요. 노예 취급에 반발한다면, 노예 본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노예로 취급해선 안되지요...

목동 2010-09-28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신문에 읽었습니다. 명쾌했습니다.

로쟈 2010-09-28 11: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읽는아저씨 2010-09-28 21:33   좋아요 0 | URL
화장실에서 **신문 칼럼을 읽던 아내가 오늘도 어김 없이 소리쳤습니다. 오늘자 신문에 로자씨 글 실렸어, 오빠! ㅎㅎ

로쟈 2010-09-29 08:12   좋아요 0 | URL
멋진 아내를 두셨습니다.^^

승주나무 2010-09-2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어떤 존재로 상정하느냐는 모든 일의 기본인 것 같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 조금 더 진보적인 생각에 힘을 들이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함정은 인간을 고도의 도덕적 본성을 소유한 존재로 '전제'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 극단과의 싸움에서 항상 밀리는 까닭

로쟈 2010-09-29 08:14   좋아요 0 | URL
그것도 폭력이죠. '고도의' 도덕적 본성이라기보다는 임기응변의, 임시방편의 도덕성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해요. 평균적으론...

자꾸때리다 2010-09-2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어차피 맹목의 노예가 아닌가요. 존 그레이 책 읽고 드는 생각...

로쟈 2010-09-29 08:14   좋아요 0 | URL
맹목의 노예 중에서 주인과 노예가 또 갈리는 거지요...

oren 2010-09-28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어보니 노예제도가 그렇게 뿌리뽑히기 어려웠던 것도 일견 이해할 만 하네요.

노예와 제도를 함께 떠올리면 다윈의 언급도 빼놓기 어렵지 않을까 싶구요.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 다윈,「비글호 항해기」中에서

여러 인물들이 '노예'에 관해 언급한 글을 뒤져보니 꽤나 '중대한' 단어이긴 한것 같습니다.
"전쟁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고? 불명예가 전쟁보다 더 나쁘다. 노예 상태가 전쟁보다 더 나쁘다." - 처칠

"한사람 또는 소수자의 노예가 되지 말라. 만인의 노예가 되라. 그때 너는 만인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키케로

"만약 제군이 노예의 목에다 쇠사슬을 감는다면, 그 쇠사슬의 한 끝은 제군의 목에 얽혀 붙을 것이다." - 에머슨

"육체의 노예가 된 자가 어찌 자유를 찾겠는가." - 세네카
(세네카의 장렬한 죽음이 그저 나온 게 아니었네요)

로쟈 2010-09-29 08:15   좋아요 0 | URL
창고가 있으신가 봅니다.^^

oren 2010-09-29 14:42   좋아요 0 | URL
눈이 너무 밝으신듯..ㅎㅎ

떠다니는 글들을 '서버'위에 슬쩍 얹어둔 걸 창고라고 부르긴 좀..ㅎㅎ
제 눈길은 거쳤지만 손길로부터 멀어진 상태로 버려져 있었던 걸들을
억지로 '뒤적여서 끄집어 낸'걸로 따지면 창고라는 표현이 맞을지도..ㅎㅎ

jeounju 2010-09-29 17:40   좋아요 0 | URL
저도 다윈의 저글 너무 좋아하는 글인데~~ 반갑네요^^ 문득 동지를 만난 느낌~~
 
서울국제도서전 인문학 카페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가 나온 지 얼마 안돼 관련기사들을 검색해보는데(오늘도 몇 건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특이하게도 지난 5월 서울국제도서전의 '인문학 카페' 행사 때 강연한 내용이 기사화돼 올라와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는데(뉴스라도 몇달 전 뉴스다!) 여하튼 기사는 기사니만큼 스크랩해놓는다(거의 브로마이드 수준의 사진들도 포함하고 있다!). 두 가지가 놀라운데, 하나는 매우 긴 장문의 기사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문과 오탈자가 무척 많다는 것(오탈자 몇 개는 바로잡아 놓는다). 아마 데스크에서 읽어보지도 않는가 보다. 그래도 대충 읽으면 강연 내용을 어림잡을 수 있다.  

ⓒ뉴스한국  

뉴스한국(10.09. 26) 이현우 교수의 ‘인문학 카페’ 

인문학에 관한 책은 현재까지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 단 한 권으로 굉장히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바로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이며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 문학과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현우 교수다. 그는 인터넷서점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꾸리며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말을 빌려 그를 설명하자면 그렇다. “한방에 뜬 것 같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피눈물 어린 노력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이현우 선생은 그런 사람이다. ‘인문학 카페’에 매우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본인의 책에도 기록돼 있지만 그야말로 ‘사서 읽은 책’의 값을 따지자면 웬만한 ‘소형 아파트’ 값을 능가한다.

“저는 영투독이 편향적이라고 생각한다(*영투독?). 또한 개인적으로 저 역시 편식하는 편이다. 인문학 의의나 중요성, 가치 등을 강변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 그래서 ‘곁다리 인문학자’다. 이는 또한 ‘어게인스트’라는 의미가 있다. ‘타라’(*'파라')의 우리말 번역은 ‘옆에 있으면서 어깃장 놓기’다. 인문학 옆에서 전도하고 홍보하지만 동시에 불충분하다, 좀 불친절하다, 우리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순전히 개인적 전략이다”는 이현우 교수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나기에는 너무도 아쉬워 직접 만나 보았다.  

 

대중에게는 친숙한 ‘로쟈’의 인문학 스토리
그는 인터넷 공간에서 ‘로쟈’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동안 써온 글을 모아 <로쟈의 인문학 서재>란 단행본 책을 엮었다. 이 책의 절반 정도는 2004년 그가 모스크바에 채류 할 당시 섰다고(*썼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제일 한가했다고 회고하는 그다. “가족이 멀리 있고, 나이도 있고, 학교에 청강한다고 하지만 내키는 대로 집에 있을 수 있었다. 먹는 것만 해결하면 되는데 그래도 자유시간은 있었다. 그때 쓴 글이 가장 많다.”

현재 그는 많은 출판사에서 의뢰하는 ‘서평 원고’를 쓰고 있다. 역시 그러한 글들을 모아 올해 ‘서평집’을 낼 계획이다(*출판사에서 의뢰하는 서평?). 이현우 교수는 ‘가장 한가할 때 쓴 글이 가장 재미있다’고 들려준다. 그래서 바쁘게 산다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된단다. “다들 구박했다. 혼자만 게으르게 지낸다고, 그러나 제일 게으를 때 제일 생산적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외양상으로 보면 가장 바쁘게 지내지만 성에 차지는 않는다.”

이현우 교수는 그때 썼던 글 중에서 ‘호모사피엔자의 인문학’이라는 이 책의 타이틀로 달고 싶었다고 말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인간에게서 사유 능력이라는 것이 인간만의 특권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질병이고, 과잉이다. 무엇인가 초과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질병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자연적 종으로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동일한 자연사적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는 것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책을 본다는 것은 자연사적 소명에 얼마나 유익하고 도움이 될 것인지 거기에 대해 약간 제 경우 반신반의한다. 다만 정당화하고 싶은 것은 자연사적 소명 호모사피엔자 못지않게 병적인 소명도 있다. 나의 인생은 삶으로 충만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삶이 내게 충분하지 않다, 불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왠지 산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존, 연명이 차원도 있다. 생체 차원이다. 조금 부정적이면 생체실험을 던져지기도 한다. 마루타로 다뤄지기고 하고 서바이벌 하는 존재로서의 생명도 있다. 그런 삶도 가능하다.”

이어 이현우 교수는 “그리고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에 물려주는, 생물학자는 유전체 운반체라고 한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있지만 본 줄거리는 운반해 주는 것, 유전자 택배 비슷한 것이다. 전달해 주는 것, 그 사이에 에피소드도 물론 있다.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유전자 전달이다. 그것에 충분한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 인문학이 필요하지 않다. “부자 되세요”로 충분하다. 가족과 일가친척의 행복으로 충분하다”고 들려준다.   

ⓒ뉴스한국

병적인 사람들, ‘산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는 이 교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강의한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나는 병든 사람이다. 나는 병적인 사람이다. 나는 심술궂은 사람이다”고 시작되는 부분에서 세상에는 그렇게 병적이고 심술궂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삶은 불충분하다고 느끼며, 산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긴다.  



삶이 불충분하고, 불친절하고, 불공평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목숨을 내버리고 부차적인 것으로 방치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병적인 사람들이다. 삶에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 내 한 몸 보존하고 후대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뭔가 필요하다고 여기며 결핍된 삶을 산다.

그러한 생각은 인문학을 초과한다. 생계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현우 교수는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인문학을 대하면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인문학의 제스처일 뿐이다. 때문에 그것을 위해 인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편견이다. 제 책에도 썼지만 루마니아 출신의 에밀 히오랑(*시오랑) 같은 작가의 경우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고 했다. 인간의 사유 능력 자체는 이 삶을 보다 더 안락, 편안, 안전, 행복 위한 보조 수단이다”고 설명한다.

“어떨 때는 사고 능력이 제멋대로다. 자족성을 가지고 있어서 존재 자체를 폭발시키기도 한다. 부작용이며 오작동이다. 그런데 저는 그런 쪽으로 매혹을 느낀다. 그쪽으로 끌린다. 에밀 히오랑(*시오랑)처럼 “삶이란 저질 취미에 속한다”고 했다. 그 사람은 그쪽으로 간 경우다. 저는 최소한 인문학에 관한 관심이란 저질 취미까지 가지 않아도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병적 열망이 다른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다?
“그 요즘은 피곤해서 잘 잔다. 대학 1년 때는 긴장되어서 자다가 벌떡 잘 일어나곤 했다. ‘내가 스무 살이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내가 내 삶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 아주 긴장되고 부담이 되었다. 또한 아이를 안아 들었을 때의 부담감도 있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장래가 잘 될 것인가에 대한 부담감이다. 자기가 돌봐야 할 아이를 안고 있는 느낌처럼 자기의 삶도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해 가치 부여하며 산다. 하지만 병적인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가치 부여를 한 끝에 자기 한 사람만으로 잘 돌보는 게 불충분하게 느낀다. 자기의 행복만으로는 불충분하게 여긴다. 또한 그것은 속 좁은 이기주의라고 생각한다. 자기 안위만 돌보는 것을 묵살한다. “어떤 사람은 교향곡을 9개나 쓰고, 천지창조나 성상화도 그리는데 나는 뭐냐 한다. 그럴 경우는 자기 자신의 안락 요구나 욕구를 넘어 서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그게 병적인 것이다.”

이현우 교수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에피소드를 예를 들어 병적인 욕구에 대해 설명한다. “장화를 2년 넘도록 한 번도 안 벗어서 아예 발에 달라붙은 적도 있다. 장화에 신경을 안 썼으니 아마도 자녀에게 신경을 안 썼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광기고, 병적이고, 심술궂은 인간형이다. 그런 병적 열망이 다른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다. 안전이나 행복에서 벗어나 그것 말고 다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열망에 빠져 잇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다움’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일상어에서도 그렇게 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인간만으로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돼야 한다’는 말이 있다. 태어난 인간 자체라는 것과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생각의 특별한 차이가 있다. 그 간극에 대해 사고는 것, 차이에 대해 예민하게 주시하는 것이 인문학적 관심이다. 문학, 역사, 철학 세분화되어 들어가지만 그것은 결국 나중 문제다. 그런 물음 자체를 가지고 있는 것, 자기 삶에 대해서 그저 산다는 것만 아니라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설명을 들려준다.

생존만으로 부족한 삶, “그래서 호모사피엔자다”
이현우 교수는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 부호를 붙인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 될 수 없다고 강의한 적 있다는 것이다. 자기와 가족이 행복한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현대엣(*현대에) 그는 새로운 반론을 제기한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기에는 삶이 너무 길다. 그리고 지친다. 사람은 저마다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결정의 순간들, 갓 연애하고 그럴 때 행복하다. 결혼식 날 잡을 때 그러나 1년 지나면 삐거덕거린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왜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는 것일까. 가장 행복할 때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정도 식어가고, 권태, 짜증, 혐오감이 생긴다. 그러나 학문이라면 가능하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공부는 끝이 없다는 지론이다. “책도 자자손손 읽어야 한다. 그런 것이라면 살아갈 이유가 있지만 행복이 목표라면 더 살 이유가 없다. 가장 행복할 때, 덜 불행할 때 인생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살아갈 이유가 없다. 행복한 순간에 끝내야 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행복은 부족하다. 생존이 삶의 의미라고 해도 부족하다. 그 이상의 요구를 받고 있다. 병적이다. 그래서 호모사피엔자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인문학’도 있지만 ‘병든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을 말하고 싶어 한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시 구절이 있다. 보들레르의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에나’란 시다. “인생은 환자들 침대를 제각기 바꿔놓고 싶어 하는 욕망에 들린 하나의 병원이다.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괴로워하고 싶어 하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창문 옆자리에서라면 회복이 되리라 믿고 있다.” 그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병원학’이라 부른다고 설명한다. “세계가 모두 병원이고 인류가 모두 환자들인데 저마다 꿈을 꾸며 욕망을 가지고 있다. 난로 옆이면 행복할 텐데, 창가라면 행복할 텐데 등등의 것을 꿈꾼다.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열망을 가지고 있다.”

이현우 교수가 좋아하는 부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퇴폐적인 데카당스파 시인 보들레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인문학은 삶의 수준을 질적으로 풍요롭게 높여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지칭해 ‘인문학 전도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한다. “인문학 자체도 불충분하다. 인문학적 교양 자체는 서양고전이다. 구색 맞추기로 동양고전, 중국의 공자 맹자 책들이 들어가 있다. 스탠더드는 서양 백인이 클래식 전통을 고전이라 한다. 인문학의 표준으로 되어 있다. 제 경우는 거기에 공감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다.”

‘내가 인간이라는 종이구나, 내가 이렇게 구체적이구나’
“제가 쓴 글 중 ‘느릅나무’라는 장이 있다. 20년 전 쯤에 매혹적인 두 가지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첫째 ‘내가 인간이라는 종(種)이구나’ 느꼈다는 것이다. 일종의 발견이다. ‘이렇게 생겼구나’란 발견과 같다. 자신이 이렇게 생기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발견이며 놀라움이다. 자기 성격에 대해서도 발견한다. 잠재적 재능도 그렇다. ‘생물, 생명이구나’ 하는 것 역시 나 자신을 놀라게 했다.”

그는 또한 서울대 진학 후 1학년 때 ‘내가 이렇게 구체적이구나’란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고 말한다. 막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살과 피를 가진 생명체로서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한다. 칼에 베이면 피가 나온다. 관념이 아니라 실제 존재한다는 것이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로서 그는 ‘자연사적 소명’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 형이상학이 놀랍게 했다. 하이데거 책이었는데, ‘형이상학 입문’에 대해 딱 하나 질문한다. ‘왜, 무엇인가가 차라리 존재하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고 있는가’란 물음이었다. 스스로 감탄부호를 찍었다. 이후 제가 아는 말이나 글이나 쓰는 글은 모두 그쪽으로 어필된다. 그게 형이상학이다. 존재 자체로 끝나지 않고 질문하며 경탄하는 것, 그것이다.”

그의 모든 관심의 뿌리는 두 가지다. 그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이현우 교수의 공부라고 여긴다. “저 역시 나름 환자다. 병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계나 가족보다 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환자고 병이 들려 있다.” 

니체의 오버맨 초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극복돼야 할 존재다”. 인간으로 부족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행복이 궁극적인 목표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대해 병든 사람들은 면역 항체 역할을 한다. 한 방향으로 휩쓸리고 있기 때문에 ‘행복에 대해 조금 진정’시키고 싶어 한다. ‘행복이란 주술’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삶이라는 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인다.

“장 에밀(*아메리)에게 ‘자살’ 대신 인간적 존엄과 품위를 지키기 위한 ‘죽음’도 있다. 인문학은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 인문학이 있다면 노자(*로쟈)의 생각은 삶, 행복에서 해방되는 것, 속박 되지 않은 것,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병적 열망이 있다.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다. 동물에게 ‘너는 강아지를 극복할 열망이 있느냐’ 물어보라. 인간만 가지고 있다. 너랑 나랑 다르다는 괴리감도 좋다. ‘너는 강아지, 나는 인간이다’는 생각 자체가 좋다”는 이현우 교수.

이러한 인문학을 위해 그는 카페를 운영하고 블로커 활동을 하며 자신의 ‘인문학 서재’를 개방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니진스키의 말, “나는 셰익스피어의 어릿광대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유머가 풍부하지만 때때로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신이 아니다. 나는 신 안에 깃들인 어릿광대다. 그래서 나는 농담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현우 교수는 니진스키처럼 하녀고 광대인 인문학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읽고 쓰고 떠들겠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대단찮은 것이어도 ‘겸손한 식사’ 정도는 될 수 있다면 말이다.(안현희 기자) 

10.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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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7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노자(*로쟈)님!

로쟈 2010-09-27 20:22   좋아요 0 | URL
라디오에서도 한번 '노자 사상'이라고 언급됐었죠.^^;

목동 2010-09-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로쟈 2010-09-29 08:10   좋아요 0 | URL
^^

리토르넬르 2010-10-0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인생관이 보이는군요.

로쟈 2010-10-02 09:27   좋아요 0 | URL
네, 나름의 인생관입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계속 머리를 굴리고 또 끼적이고 있지만, 밀린 원고들의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는다. 머리가 무거워 잠시 서가에서 옛날 시집을 꺼내 뒤적이다가 내가 쓴 걸 내가 재밌다고 또 읽어보았다. 전에 한번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꽃들이 비에 젖는다'란 시다. 새벽처럼 오늘 낮에도 비가 왔더라면 어울릴 뻔했다. 이번엔 시에 붙여놓았던 말들도 같이 옮겨놓는다(1996년에 쓴 것이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막연히 기다린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그친다 꽃들은 언제나 다그친다 비는 푼돈을 벌러 다시 빗속으로 나간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이건 일종의 '불행한 의식'이다. 비는 본의 아니게 모든 것을 젖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그렇게 젖은 꽃을 팔러다니는 모습이 눈물겹다. 너무 과장인가?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여자를 다루는 B의 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도 싶다. 

어느 책에서 본 것인데, 여자를 '세뇌'하려면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고 한다(남자를 세뇌하는 요령은 책에 나와 있지 않았다. 남자들은 멍청해서 별다른 작전이 필요 없는 것일까).  

1. 작은 선물을 계속 보내라.
2. 연애 드라마의 시간대를 이용하라.
3. 서투르게 행동해서 경계심을 풀어라. 
4. 두 사람만의 비밀을 만들어라. 
5. 꿈을 이야기하라.
6. 콧대 높은 여자에게는 철저하게 야단을 쳐라.
7. 질투심을 이용하라 등등.
 

이게 연애 세뇌의 방법이라고 한다. 이런, 너무 상식적인가? 그래도 새겨두어야 한다. 나중에 고작 이런 일로 후회하면 곤란하니까.(이런 건 대학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학교육의 이념을 정초한 사람들은 내 생각에 대단한 연애 혐오론자들이었다.) 저자가 덧붙이는 바에 의하면, 이별의 세뇌는 연애 세뇌의 반대라고. 

말이 나온 김에 '고작 이런 일'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이겠다. 내가 하는 말은 곧이 듣지 않을 테니까, 믿을 만한 여류 작가의 입을 빌려서.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차피 그 여자를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이고, 여자가 남자의 매력을 느끼는 것은 역시 그 남자 품에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일 것이다. 머릿속에 든 것이나 용모도 이런 종류의 건전한 욕망을 보강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건전하고 자연스럽고 인간의 본성에 가장 충실한 이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이다."(시오노 나나미, <남자들에게>)  

아주 간명해서 좋다. 어련하지 않았을까 싶다. 문제는 다시 생물학인 것이다!  

10.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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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도 좋지만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는 시구도 좋군요.
'언제나'라는 부사가 시에 모두 일곱 번 나오는데 단호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을 잘 살려주네요. 낭송해보면 일곱 번의 '언제나'를 모두 다른 톤으로 발성하게 됩니다.
제목이 <언제나>였어도 좋았을 뻔했어요. 좋은 시를 감상했네요^^

로쟈 2010-09-27 18:41   좋아요 0 | URL
'언제나' 꼼꼼히 읽으시네요.^^

반딧불이 2010-09-2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말씀 나누는 것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요. '언제나'이런 대화를 나누셔서 저 좀 웃게 해주세요.

로쟈 2010-09-28 11:20   좋아요 0 | URL
웃음이 헤프신 게 아닐까요?^^

책읽는아저씨 2010-09-2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에게 로자님의 시를 읽어주니 재미 있다고 웃네요. ^^

로쟈 2010-09-29 08:11   좋아요 0 | URL
목적은 달성했네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요양원 환자 모드로 휴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딱 생각나는 것이 헤르만 헤세의 <요양객>(을유문화사, 2009)이지만, 나는 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눈길을 보낸 책이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문학동네, 2010). 알라딘에서 내달 저자와 함께 하는 바다낚시 행사가 있다는 소식이 무의식적으로 꼬드긴 모양이다. 

  

서가의 책을 빼내 펼치니 책 한가득 싱싱한 바다내음이 물씬 풍긴다. 바다낚시를 해본 적이 없고 보나마나 이런 컨디션으론 배멀미나 하기 십상이지만, 마음은 잠시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본다. '한 생계형 낚시꾼이 몸으로 기록한 바다의 별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한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번도 못 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는 문구가 뒷표지에 박혀 있는데, 흠 이럴 땐 한번 먹어나보고 죽어야겠다는 '의지'도 생긴다(내친 김에 그의 이야기와 소설로 <한창훈의 향연>과 <나는 여기가 좋다>도 손에 들고 싶어진다).  

한 일간지 리뷰를 인용해본다. 

깊은 바다의 푸른 서정을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활자로 풀어온 작가 한창훈. 그가 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다시 섬으로 돌아가 ‘생계형 낚시’로 잡아낸 물고기들과 해산물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와 더불어 각 항목마다 소설 같은 에피소드를 곁들여 펴낸 이 책은 1814년 손암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되어 집필한 ‘자산어보’를 각 장마다 머리에 인용해놓았거니와, 손암 선생의 업적을 보충하면서 입맛과 체험담을 특별히 조미료로 첨가한 21세기판 ‘현산어보’라 할 만하다.

첫 키스 기념으로 남녀가 포장마차에서 한창훈을 불러내 같이 먹었다는 병어회. 세월이 흘러 그들의 인연이 엉클어졌을 때 그 친구와 다시 청했던 것도 그 병어회였다. 결혼해서 어찌어찌 살고 있는 와중에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던 섬 남자를 다시 만나, 그 시절 약속처럼 그가 늘 되뇌던 놀래미 회를 산처럼 쌓아놓고 한 점도 먹지 못한 채 눈물 속에 뛰쳐나온 후 그 맛난 회가 아쉬워 입맛을 다시는 아주머니의 회한도 눈물겹고 우습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런 에피소드들은 사소한 양념일 뿐 엄연한 주인공들은 물고기와 해초 자신들이다. 그것들을 요리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제 사진들과 어쩔 수 없이 잡고 죽인 그것들에 대한 한창훈의 지극한 연민과 애정이다. 어쩌다 먹어야 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냐고, 한창훈은 짐짓 탄식한다.(세계일보)

어쩌다 먹어야 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냐란 탄식은 "그리고 저 때문에 죽어간 해양생물들, 미안합니다. 하필 저는 먹어야 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났지 뭡니까."란 서문의 문장에서 가져온 듯싶다. 그 서문의 다른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 아는 것은 다르다고들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쓴 이유입니다. 깊숙이 친해지게 되는 것,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게 하는 것, 이윽고 뒤엉킨 매듭을 하나하나 매만지게 되는 것, 머물다보면 스스로 그러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산은 풀어진 것을 맺게 하지만 바다는 맺힌 것을 풀어내게 하거든요.

사람의 인연에 비유하자면, 풀어진 인연은 산에 가서 맺고, 마음에 맺힌 것은 바다에 가서 풀어야 하는 모양이다. 엊저녁에 술안주로 먹은 홍합탕의 맛이 되살아난다. 기운을 좀 차려봐야겠다... 

10.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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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9-26 23:31   좋아요 0 | URL
세계일보 기자도 맛이 갔을 때 썼나봅니다. 자산어보랑 현산어보를 섞어쓰는 걸 보니... ㅎㅎ
언제 부산오실 일 있으면 한번 바다구경하면서 회라도 한 접시 대접할게요.
바다는 맺힌 걸 풀어주는 데라니까는, 맺힌 거 하나 갖고 오시면... ㅎㅎㅎ

로쟈 2010-09-27 18:42   좋아요 0 | URL
네, 감사. 1년에 한번 갈까 말까하지만요.^^;

2010-09-27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7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쉽싸리 2010-09-27 13:29   좋아요 0 | URL
기자가 대개 자산어보라 칭하는 것을 21세기판 현산어보라 칭했으니 둘의 차이를 알고 쓰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왜 현산어보인지는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저자가 자세히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로쟈 2010-09-27 18:4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통일이 안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