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딸아이의 방을 '진짜로' 만들어주기 위한 '공사'를 시작한 탓에 집안이 어수선하다. 서가들을 대부분 거실로 내오고 방에는 벽지를 다시 바르거나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하는 탓에 한동안은 준-전시상태로 지내야 할 듯하다. 그런 와중에 옛날 파일들도 정리하다가 언젠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번역문을 발견했다. J. M. 번스타인의 <예술의 운명(The Fate of Art)>(Polity Press, 1993)에서 하이데거를 다룬 장의 한 절이다(2장 8절). 기억에 부분적으로 발췌한 번역문인데 문장을 약간 다시 손보면서 가급적 병기된 원어들을 삭제했지만 번역문을 원문과 다시 대조하지는 않았다([ ]안의 말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던 것이다). 절제목이 '미적 소외'였던 탓에 '하이데거와 미적 소외'란 제목을 달아서 창고에 넣어둔다(아래 이미지는 다른 판본인데, 폴리티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까만색 장정이다).  

 

이 장 전체를 통해서 나는 예술과 미학의 담론이, 테크놀로지적 현전화의 지배에 대항하고 그러한 지배를 폭로(개시)하는 유리한 비판적 거점을 제공해준다고 주장해왔다. 이 [테크놀로지의] 지배는 [예술작품에서의] 유한한 초월에 대한 억압으로서 역사 속에 자리한다. 이러한 거점과 역사를 하이데거의 에세이(「예술작품의 근원」)는 제공하고 있다. 「근원」에서 하이데거의 전략,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속을 다루는 그의 방식은 후기 에세이인 「테크놀로지에 관한 문제」에서 이들의 관계를 표지화하는 방식, 즉 테크네와 포이에시스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근원」에서 제기하고 있는 중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미학적이지 않은 방식[비-미학적 방식]으로 예술에 관여할 수 있는가, 즉 (미적) ‘쾌감’의 안쪽에, 그리고 (이론적) 인식과 도덕(적 실천)의 바깥쪽에 울타리 지워지는 예술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예술에 관여할 수 있는가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하이데거는 미감적 지각이 ‘자신의 마땅한 제값’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는 테제를 세운다. 그리스 신전을 지적하면서 (하이데거는 예술의 또 다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는 예술이 (지배적이건 위축되었건 하여간에) 지금도 [그런 또다른 개념에 따른] 동일한 요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러한 미학-외적 요구는 예술이 더 이상 단순히 미적인 것[미학]이라는 범주적 분류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을 수[동일시할 수] 없다는 자각 안에서, 그리고 그런 자각을 통해서 성립한다.

이 자각은 예술이 주류적인(진보적인) 문화, 즉 모든 창조를 생산으로, 현전화 작용을 [눈앞의] 현전으로(만) 축소시키는 지배적인 현전의 경제[단도리]와 병치되도록 내던져져 있다는 자각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논변은 그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데[그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그리스 사원이 세계를 개시한다는 주장은 현대 세계가 그에 상응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데야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전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지만, “그 작품속에 들어서 있던 세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세계의 퇴거'와 '세계의 쇠퇴'는 어찌해볼 도리가가 없다.” 그리스 신전이 드러내주는 것은 한때 예술이 단순한 (심)미적 대상 이상이었다는 사실이다. 반 고호의 그림에도 이러한 ‘뭔가’가 더 있지 않는 한,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인식과 테크놀로지의 현전화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적인 것은 자신을 초과하는가?

 

 

 

 

휠덜린의 한 편의 자연시, 반 고호의 한 짝의 구두 그림, 하이데거가 들고 있는 이들 작품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우리가 정당화할 수 없고, 지지할 수 없으며,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개시에로 잡아끈다. 그것들은 우리를 거주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또다른 개시[세계의 열어젖힘]에로 유인한다. 이런 생각을 많이 듣던 소리로 옮겨볼까: 예술작품은 현재에는 현실화되지 않은 어떤 현상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이해가능성을 제공한다]라고. 그래서 예술은 그것이 상상적인 가능성들을 다루기 때문에 허구적이라고.

 

비록 하이데거의 테제가 처음엔 이런 식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근원」의 의도가 그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사실 바로 그런 테제를 거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가능성’이란 조작적 개념은 현전을 (초월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현전화 작용]보다 먼저, 그리고 그것과는 무관하게 현실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감적’ 인식을 (단순히) 취미로 축소시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로)의 축소[환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 고호와 횔덜린의 작품에서 어떤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가? 위대한 예술의 종언이 암시하는 바대로, 이들 작품들은 그저 ‘사물-존재’, 그러니까 미감적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위대한 예술은 한물갔지만 ‘작품-존재’적인 뭔가는 남아있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반 고호의 작품에 대해 그것이 “독특하게도 자신에 의해 열려진 영역 안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새로운 세계도 아니고 상상력의 영역도 아니라면, 그 영역은 환상 세계인가?

 

 

 

 

 

 

 

 

 

<진리와 방법>에서 가다머 또한 예술을 미적인 것[미학]과의 유착에서 구출하고자 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미의식은 그 자신 자유롭게 예술작품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미의식은, 즉 취미판단에 기초하여 예술작품들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우리의 자의식은 보다 더 기본적인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일단 어떤 예술작품의 요구에 붙들리게 되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작품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 자유롭다고 느낄 수 없다.

 

여기서 가다머의 요점은 말하자면, 무사심성[무관심성]이 우리를 작품에 대한 경험이 그저 좋아하고 말고의 차원을 넘어서는[초월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예술작품의] 요구를 훨씬 강력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이데거를 좇아서 그는 예술작품이 이미 시초부터 단순히 미적인 수용(혹은 거부)만을 위해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의식, 즉 미의식은 “예술작품으로부터 발원하는 직접적인[즉각적인] 진리 요구[주장]에 대해 언제나 이차적인 것이다.” 

취미 판단은 우리를 예술작품과의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론)적인 연계[동거]로부터 소외시킨다. 미적 소외의 경험은 작품 본래의 진리 요구와 그 요구에 대한 (심)미적 반응[수용]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청원과 거절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며, 작품의 유혹과 [그 유혹에] 자리할 수 없음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한 간극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작품이 미학(의 테두리)를 초과하는 걸 경험한다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지배문화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정당한 가치평가는 그 간극 속에 놓이는 것이고 미적 소외의 경험(이 경험이 하이데거의 사유를 불러낸다) 속에 놓이는 것이라는 거다.

 

다시 한번 반 고호의 그림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우리를 잡아끌며 닦아세운다. 그러나 어떻게인가? 먼저 어떤 현상의 ‘진리’를 개시함으로써이다. 그 그림에 대한 하이데거의 재-평가가 우리에게 그 작품에 대한 한 가지 해명으로서 유효한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한 그림이나 시를 두고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해명이 보여주는 바에 상응하는 [진리] 요구를 감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그런 해명에 대해서 자연스럽지만 순진한 두 가지 비판적 반응이 있다. 첫째는, 마이어 사피로의 비판이다. 그는 그 해명을 다른 여러 가능한 성격부여에 대립하는 한 가지 재현적 성격부여로 다루면서, 하이데거의 해석에 당연한 시비에 건다. 그런 식의 비판[사피로의 비판]이 (비록) 부당하고 부적절하더라도, 그것은 재현(론)적이고 (심)미적인 고려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철저하게 주도하고 있는가, 그래서 미(학)적 담론의 지반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정말 잘 보여준다. 사피로의 비판은 본의 아니게도 중심의 지배, 즉 (심)미적 문화에 대한 진보적 문화의 헤게모니 앞에서 예술작품의 '어찌할 바 없음'을 드러내준다.    

 

하이데거의 해명을 인간과 사물, 그리고 자연이 함께였고, 마치 하나였던, 그래서 제각기 따로 노는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던 과거 농촌 세계에 대한 순진한 낭만화로 비판하는 것은 보다 핵심에 근접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동일한 비판이 <존재와 시간>에서 망치에 대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논의에 대해서도 가해질 수 있다. 이 두 경우에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뭔가 의고적인 접근방법이다. 도구(혹은 공간)에 대한 ‘사실적인’ 해명 대신에 하이데거는 우리를 이해와 실천의 이전 형태로 되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특정한 과거의 가능성의 재현을 도모하는 것처럼, 과거 농촌의 이데올로기를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수련발전 댐이나 로봇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망치나 시골 아낙의 구두와 동일한 의미연관을 가질 수는 없다. 도구의 본질은 그때 이후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사정이 그러하다면, 과거 도구 개념의 단순한 제시는 별로 의미가 없는 바, 그것은 상상의 세계에서의 가벼운 산책과 다를 바 없다. 「근원」에 대한 비판은 우리를 세계에 대한 이 두 개념으로부터, 사물에 대한 그 낙천적인 재현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다.(“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사물들의 직접적인 둘레 속에 안주한다. 그것은 친숙하며 신뢰할 수 있고 일상적이다. 그럼에도...”)

 

그래서 하이데거가 그 본성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도구의 본성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겠다고 말할 때, 그는 명시적으로 이 두 해명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역사로부터 자유롭게 도구성을 숙고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존재와 시간󰡕에서의 그것, 그러니까 망치의 예와 아날로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가 세계를 탈은폐하는 그리스 사원과 [고호의] 그림을 대조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단지 그 시골 아낙이 알고 있는 바가 비역사적인 것이라는 걸 알려줄 따름이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형이상학적인 태도에 대한 하이데거의 자기비판과 모든 비역사적인 계시적 예술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반 고호의 그림에 대한 해명이 그리스 사원과 대조되고 있는 결과, 도치된 형태로 [여기서도] 유효하다. 그리스 신전, 그리스 비극, 중세 성당, 그리고 <신곡>에 대해서도 이 작품들이 사물들에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드러남을 가지게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하이데거가 결코 충분히 해명하고 있지 않는 것이지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반 고호의 그림에 대해서는 뭔가 그럴 듯하지 않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의 종언(의 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이데거는 탈은폐 같은 인식(론)적 체제와 동종적인 용어를 가지고 그 그림을 끌어들이는가? 반 고호의 그림은 어떻게 미학을 초과하는가?(즉 <존재와 시간>은 어떻게 형이상학을 초과하는가?) 비록 근대 예술작품에는 인식적 요구[진리 요구]가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반 고호의 그림은 그리스 신전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그러한 요구 자체는 재현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작품은 여전히 생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물이며 하나의 작품이다. 우리에게 부과되는 예술작품의 요구는 과거의 (진리)개시의 가능성을 불러모으는 그 작품의 현존이고 물질적인 만들어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끄집어내고 싶은 것은 근대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구의 성격이다. 그것은[그 요구는] 어떻게 자신을 주장하고 우리 생활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가? 한 가지 대답은 이미 제거되었다. 세계(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탈은폐를 통해서라는 것 말이다. 그러나 좀 거리를 두고 볼 때, 그 작품이 세계의 탈은폐를 자신이 직접 전달할 수는[가져올 수는] 없지만 그 탈은폐를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까지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그것은[근대 예술작품은] 자신만의 [세계]개시 가능성에의 (필연적인) 실패 속에 거주한다. 그래서 그것을 생산물이 아닌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창조됨은 작품(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세계와 대지를 뒤섞는다.

 

예술작품에 들러붙어 다니는 이념성, 허구성, 상상력은 그것의 내용들(농촌세계, 이상적인 미래 등등)의 기능이 아니라 그것의 ‘형식’이고 그것의 예술작품됨이다. 작품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구는 바로 예술 자체의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들이다. 그들[근대 예술작품]의 세계 개시 실패,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개시하는 것, 그들의 인식(론)적 무능력, 진리문제로부터의 배제됨[소외] 등이 그래서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며 그들의 부정적 인식(능력)이다.

 

근대 예술작품들은, 천재의 작품들은 자신의 본질적인 불가능성[무능력], 위대한 예술작품이 되고 세계를 개시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를 자양분으로 삼아 번성한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다른 걸 할 수도 없다. 바로 거기가 [근대]예술이 서 있는 자리이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의 주변성을 특정한 주변성으로서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중심적인 것[주류적인 것]의 지배의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근대]예술작품은 예술의 힘과 잠재성에 대한 기억과 예감 속으로 (우리를) 잡아끈다. 이 잠재성은 그것이 현전의 실재성으로만 다루어지게 되면 그 작품의 진짜 의미, 기억과 예감의 작업을 숨기게 된다. 이 작업이 성취되면 현재적인 것은 특정한 현전으로 이동한다.

 

위대한 예술의 불가능성은 테크놀로지의 지배 하에 놓여 있는 예술의 운명이다. 만약 하이데거의 도식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적인 개시는 현전하는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냄 없이 개시한다. 포이에시스에 대한 그것의 거부는 예술을 주변을 내보내고 그래서 예술은 그 근원[기원]으로부터 소외된다. 이것은 말끔하고 엘레강스한 정식화이지만, 틀렸다. 진리로부터의 예술의 소외는 하이데거가 공표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다른 문제이다.

 

 

반 고호의 그림이 떠맡아주리라고 하이데거가 기대했던 역할을 모더니스트 작품들만이 온전하게 실행할 수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데리다의 성취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예술이] 일단 그러한 지위를 부여받은 이상, 일단 모더니티가 예술적 모더니즘 작품들을 통해서 그 반성적인 (자기)이해를 부여받은 이상, 하이데거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게 된다.

 

06. 09. 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줌마는 배제하라? 문예지 신인상 심사에서 '노티'나는 작가들은 암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기사를 읽고 '소설가의 나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기서 '시인의 나이'는 고려되지 않는데, 상업적인 계산과 밀착되어 있는 것은 소설가의 나이이지 시인의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관련기사는 이렇다. 

북데일리(06. 09. 13) 문예지 신인상 아줌마는 배제? 작가의 주장 파문

“문예지 신인상을 심사할 때 편집위원 혹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아줌마를 배제하라’라는 규율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일단 무조건 아줌마 냄새가 나는 작품은 제외시킨다. 요즘은 신인상 공모 공고에 대놓고 ‘우리는 젊은 작가를 원한다’라고 주를 달아놓는 문예지도 있단다. 그럼 젊지 않은 작가는 아예 응모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한겨레출판. 2006)로 제1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조영아가 문예지 신인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시사 주간지 한겨레21(제626호)을 통해서다. 조영아는 “수준이 고만고만한 몇 작품을 뽑아놓고 일일이 전화로 나이를 확인한 다음 연락이 없다. 그중에 나이 제일 어린 누군가가 다시 연락을 받는 행운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모를 준비할 때면 아줌마 티가 나는 작품은 일찌감치 제쳐둔다. 뛰어나게 잘 쓰지 않은 이상 뽑히기 어렵다는 지론에서다”라고 덧붙였다.

-문학상 심사에 나이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일반인들로선 의외로 받아질 대목(*하지만 얼마간은 '상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수천 만원의 상금을 내건 신인상들의 경우, 잡지나 출판사에선 '본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고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이'를 한 가지 변수로 고려하는 것이다. 기사에서 이 '돈'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일단 조영아가 민감할 수 있는 문제를 거론한 것은 젊은 작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문학판의 풍토를 지적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깊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조만간 문학상 공모에 나이 제한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고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아줌마 티가 난다는 이유로 심사 대상에서 일찌감치 제외된다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나라를 떠나라’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

-올해는 유독 신춘문예, 문학상에서 나이든 늦깎이 신인들의 출현이 돋보였다. 오래 묵혀 온 문학에의 열정과, 탄탄한 습작 과정을 통해 등단한 실력 있는 신인들에게 ‘나이’란 문제조차 되지 않는 납득할 수 없는 잣대다. 따라서 만약 신인상에 그같은 풍토가 작용하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신인상에 거액의 상금만 내걸지 않으면 된다. 혹은 수상작가가 상금을 거절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독자가 작가의 나이와 무관하게 책을 좀 사주든가).

-조영아 역시 나이 마흔에 등단한 아줌마 작가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른 넘어 시작한 부단한 글쓰기의 수련과정을 공개 한 바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결혼 후 전업주부로 생활하면서도 늘 ‘글밭’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며 가정 살림을 이끌어야 하는 주부에게 창작의 여유를 부릴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 시키고 고시원에 출퇴근하며 이를 악물고 글을 썼다.

-동화는 물론 단편, 중편 습작을 거듭했으나 등단은 쉽지 않았다. 각종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에 도전했지만 최종심에만 오를 뿐 수상은 하지 못한 것. 그러나 창작을 향한 그의 투지는 쉽게 사그라질 만큼 약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잠든 때를 틈타 밤잠까지 줄여 가며 매일 10시간 이상 글을 쓰며 갈고 닦은 열성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다. 조영아의 이번 칼럼은 그의 이같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번 신춘문예나 문학상에서 드러났듯이 실제로 잘 쓰는 아줌마 작가들, 혹은 나이 많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반문하며 "`우리도 한 때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아줌마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라고 일갈했다.

-그의 이번 주장은 고시원, 공공 도서관의 좁은 칸막이에 갇혀 등단에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전국의 늦깎이 습작생들에게 띄우는 격려이자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문예지 신인상을 향한 시의적절한 채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기사는 최근에 번역돼 나온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을 떠올리게 했는데, 지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상을 수상한 그의 소설 <짧은 뱀>(문학세계사, 2006)이 그가 76세에 쓴 처녀소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 부슈롱은 프랑스의 엘리트 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했다. 항공 산업에서 시작해 텍사스 주의 테제베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산업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 사전 습작의 경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2004년, 76세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 <짧은 뱀>으로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작가의 나이를 불문하는 걸 보면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도 공쿠르 상처럼 상금이 얼마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려나 부슈롱의 '노익장'은 가령 미셸 투르니에처럼 40대에 데뷔하는 늦깎이 작가들조차도 젊어 보이게 만든다.

소개에 따르면 <짧은 뱀>은 "정교한 고증학적 지식과 잔혹한 상상력이 결합된 종교적 모험 이야기. 14세기 말 북극지대에서 펼쳐지는 문명과 야만의 충돌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이 76세에 쓴 생애 첫 소설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했다. 야만의 지옥에서 타락의 길을 걷는 북방동토(누벨툴레)의 기독교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출발한 원정대. 그들이 '짧은 뱀'이라는 선박 한 척에 의지하여 빙산과 폭설로 고립된 혹한의 섬을 찾아가는 과정이 일인칭 시점의 보고서 형식으로 기술된다." 나이로 보아 '긴 여정'을 남겨놓지 않은 작가의 데뷔작이지만, '굵은 여정'의 시발점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한국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늦깎이 작가 박완서(1931- ) 선생의 단편문학전집이 전 6권으로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1999년 출간된 전집을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선보이는 개정판"으로 "초판에는 빠져 있던 199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추가하여, 총 여섯 권으로 구성했"으며 "1971년 3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발표된 박완서의 단편소설들을 총망라했으며, 각각의 작품은 발표시기 순으로 나누어 실었다"고 한다.

1970년「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경력이 올해로 서른 여섯 해이다(그간의 업적으로 몇달 전 작가는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설가로서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작가로서의 태도, 혹은 각오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나이를 핑계삼는 문단/출판계 일각의 '계산'은 속좁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혹 그러한 계산이 요즘 한국문학의 독자들을 점점 말라붙게 한 것은 아닌가?). 문학의 신이시여, 그들의 소갈머리를 어찌해야 하옵니까?..

06. 09. 16-17.

 

 

 

 

P.S. 마흔도 멀지 않은 요즘 같아선 나도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와 폴 오스터/크누트 함순의 <굶기의 예술>을 (다시) 읽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그들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강퍅해야 하며 굶주려야 하는가를 증언해주고 있으니까(기름기 좀 들어간 작가들은 다른 종의 소설가들이다). 하긴 네가 지금 배부른 처지냐고 하면 대답이 사뭇 궁하긴 하지만...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oshot 2006-09-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화로 나이를 확인'하다니. 참 잔머리라고 해야할지 나름의 고심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국외자가 보기에는 그저 '꼴깝'으로만 보이네요.

로쟈 2006-09-1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이든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면 좀 추해지지요...

니브리티 2006-09-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소설이라... 로카드님도 전에 소설 쓰신다고 조금 올리신 적이 있는데.. 이번 문예중앙 시인들의 대담코너에서 이런 말들이 오가더군요..좀 다른 의미에서 동의하는 말이긴 한데, <장르는 운명이다>

로쟈 2006-09-2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는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해소시켜 준 작가가 쿤데라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하면서 저도 언젠가는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지젝 스타일의 책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도 갖고 있어서 어느 것이 실현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뛰어넘는 게 또한 게으른 일상인지라...

다크아이즈 2006-09-27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묘사적 강박을 주입시키는 경로들(각종 신춘문예나 메이저급 문학 잡지)을 극복하는 게 우선이겠지요. 지겹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나저나 '참을 수 없는~' 말고 쿤데라의 어떤 소설을 읽으면 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 권만 권해주세요.

로쟈 2006-09-2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쿤데라의 모든 소설이 그런 건데요... 소위 에세이적 소설, 성찰적 소설 류라고...

다크아이즈 2006-09-2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소설을 묘사와 산문적 성찰로 구분해서 말씀하신 거군요. 저는 묘사와 서술(이야기)로 구분할 때 우리 소설은 지나치게 묘사에 올인한다는 뜻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자와 일반독자의 차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또 배우고 싶은 게 있어요.


양파와 문첸가 하는 제목으로 김훈에 대해 언급한 것 읽은 적 있는데(아직 카테고리 성격을 파악 못해 다시 찾아 읽으려니 못 찾겠어요.) 로쟈님 말씀으로는 김훈은 소설가보다 에세이스트로서 탁월하다, 뭐 이렇게 읽혔거든요. 그건 문체만 얘기할 때 그렇다는 것인지요? 즉, 쿤데라 소설이 묘사보다는 성찰이 우선한다는 전제를 두고 볼 때 김훈은 해당 사항이 없는 건가요? 그 미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문체만으로는 '쿤데라적 소설가'(제가 지은 말)가 되기에는 어림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김훈의 문체를 부러워하지만, 소설이나 에세이 두 편 정도만 읽어도 김훈적 문체가 너무 드러나는 바람에 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 질문의 요지는 김훈의 문체로는 쿤데라적 성찰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인가요? 왜냐면 김훈 보고는 에세이스트가 어울린다고 하고 쿤데라는 그 에세이적 성찰 때문에 뛰어난(?) 소설가라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지금 생각난 건데 김훈은 감각(감성)적 에세이스트, 쿤데라는 철학적 에세이스트, 고로 철학적 에세이스트가 더 소설가에 합당하다, 뭐 이렇게 해석해도 되나요? 아휴, 골치 아파, 제 미흡한 독해를 해독해주세요. 요즘 로쟈님 서재 훔쳐보느라 미치도록 즐거워요. 그나 저나 언제 이 보물들을 완독할 수 있을지...

로쟈 2006-09-2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을 간추리면 김훈의 에세이가 쿤데라의 에세이적 소설과 뭐가 다른가쯤 될까요? 저는 쿤데라를 에세이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그가 비평적 에세이들도 썼지만). 그는 작가, 곧 소설가이지요. 거꾸로 저는 김훈을 소설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좀 과도한 주장이지요. 하지만, 그가 아직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 기대에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들은 독백적이며 제겐 김훈 자신의 복화술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3인칭의 시점으로는 세계를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 그런 게 에세이스트의 운명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반면에 소설은 (바흐친에 기대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대화적이고 대화적이어야 하지요. 다른 말, 다른 의식, 다른 이데올로기의 간섭과 혼종이 소설의 규정항입니다. 얘기가 너무 거창해지는군요.^^

다크아이즈 2006-09-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수 잘 했습니다. 에세이스트와 에세이적 소설이 이렇게 다른 거군요. 혼자 씨불이느냐,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상충이 있느냐에 따라... 왜 김훈의 소설(문장)이 빛나긴 했지만 지겨웠는지 감이 오네요.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정치가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의 <수사학>(길, 2006)이 번역돼 나왔다.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룰까 했지만, 역자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길래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키케로의 책으로 오래전에 출간된 <의무론>(서광사, 1989)와 작년 천병희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도서출판 숲, 2005) 정도를 꼽아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화술에 대한 책들이 그간에 더 출간돼 있었다. 양태종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 <화술의 법칙>(유로서적, 2005), <화술과 논증>(유로서적, 2006)이 그것이다.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란 부제를 달고 있는 <수사학>이 같은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얼마간은 겹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수사학에 관한 책들이 아주 드물진 않다. 박성창, 김욱동 교수의 입문서가 각각 <수사학>(문학과지성사, 2000), <수사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2002)로 출간돼 있고, 고전수사학과 수사학의 역사 등을 다룬 번역서들도 여러 종 나와 있다. 물론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도 번역되지 않았으니까 사정이 '양호'하다는 말은 못하겠다. 더불어 서양 수사학의 고전들과 함께 리쾨르의 <살아있는 은유>(영역본은 <은유의 규칙>) 정도까지 출간되어야 어느 정도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해서 갈길은 아직 멀다 하겠지만 이번처럼 역량 있는 전공자들에 의해서 고전들이 번역/출간된다면 먼길의 수고가 그래도 많이 덜어질 수 있겠다. 소개에 따르면 이번 책은 "그리스의 수사학 전통을 집대성한 수사학의 대가인 키케로의 책 <수사학 :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를 분석하고 라틴어 원문을 함께 담았다. 사론이나 그릇된 내용을 현학적으로 수식한다는 편견을 넘어, 수사학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 체계로서 전달하고자 하였다."

눈에 띄는 건 책에 들인 공인데, "라틴어 원문과 현대어 해석과 더불어 상세한 옮긴이 주"가 달려 있는바, "일례로 비유법에서 알고 있는 은유, 환유, 제유, 아이러니 등의 기법을 실제 정확히 이용되도록 환유, 제유 등의 실례를 들고 그리스 로마의 학술 전문 용어에 대해서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또한 'stasis'를 '쟁점'으로 바꾸는 등 우리나라 어문학계에서 아직 수사학 전문 용어로 정착되지 못한 것을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였다"니까 여러 모로 눈길이 가는 책이다. 게다가 아래 인터뷰 기사의 사진을 보니 안면도 있는 양반이 아닌가?(나이 들어서 오히려 젊어보이누만.)

경향신문(06. 09. 16) ‘고전문헌학’입각 키케로 원전 번역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서가 있다. 영어판이나 독어판의 ‘이중 번역’이 아니라 그리스어나 라틴어 원전 번역이다. 이쯤 되면 번역서로는 최상급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질문 한 가지. 과연 그 원전이 원저자의 저술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고전 문헌들이 원저자의 필체로 기록되지 않은 데다, 설령 그것이 원저자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서양 고전문헌학은 ‘주어진 텍스트’를 ‘원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모든 필사본을 수집해 이들 중 원전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내고, 다른 필사본과 비교해 오류를 바로 잡고 원전을 복원코자 하는 학문입니다.”



안재원 서울대 강사(38)는 국내 몇 안되는 ‘고전문헌학’ 전공자다. 최근 키케로의 ‘수사학’(도서출판 길)을 국내 최초로 고전문헌학의 원전 작업 방식에 입각해 번역했다. 한글 번역 아래에 라틴어 원문을 수록하고, ‘비판장치’(다른 판본들과의 비교)를 본문 밑에 넣었다. 또 옆 페이지에는 옮긴이 주를 상세하게 달았다. 이 때문에 원 텍스트는 40쪽 정도지만 번역서는 400쪽이 넘는다. 이처럼 지난한 작업을 자처한 것은 “이제 우리도 우리의 원전을 갖자는 노력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독일·영국·프랑스 등은 그리스·로마 고전의 부활을 외치면서 그들만의 시각으로 원전에 접근했고, 이는 그들 각각의 문화적·사상적·이념적인 고유성과 독창성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정본 텍스트에 대한 주석 작업을 통해 우리 문화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모색하자는 거지요.”

그는 “원전 번역 같은 기본적인 것이 안된다면 인문학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 원전’들과 그에 대한 지식들이 쌓이면 그것이 우리 사회의 ‘아이덴터티’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인문학이 ‘수입학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작업을 용기내 해보면 더딘 작업과정 중에 그들보다 나은 시각과 깊이를 가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고전문헌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해석에 매달린다는 점에서 ‘미시 진리(micro veritas)’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 해석 하나 하나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작업이다. “조그마한 미시 진리가 결국 거시 진리와 연결됩니다. 우리 사회는 거대 담론에 강하지만 과연 그것이 구체적인 대안들을 만들어 냈습니까. 거대 담론 하는 것도 좋지만 겸손하게 텍스트를 잘 번역하고 주석을 잘 다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키케로’이고, ‘수사학’일까. 키케로는 단지 빼어난 연설가나 정치가가 아니라 그리스 정신과 사유세계를 서양 사회에 ‘번역’한 인물이고, 보편시민이 가져야 할 덕목을 강조한 인문학자였다. 키케로가 말한 수사학도 단순히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수사학은 한 인간이 공동체에서 어떤 입장과 언어 표현을 가지고 갈등을 조율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입니다. 이는 보편교양인으로서의 시민사회와 연결됩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시민사회의 진입로에서 개인들이 갈등하고 투쟁하고 있지만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요. 이런 의미에서 키케로와 수사학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다른 길이 없겠다. 논술과 함께 웅변도 입시과목에 집어넣는 수밖에.)

06. 09. 1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maDe 2008-12-23 21:58   좋아요 0 | URL
양태종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것과 안재원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것은 키케로의 같은 텍스트입니다. partitiones oratoriae (연설의 부분 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네요). 이 책에서 분명하게 밝히기를, 양태종 선생님은 독어본을 번역한 것이라고 하네요. 서양 고전학적 안목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쉬웠다고 했습니다. 같은 텍스트를 번역한 것입니다.

로쟈 2008-12-23 23: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실물을 확인해보지 못해서 긴가민가했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 그간에 또 쌓였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책은 없지만, 나름대로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은 책들은 많아서 두 번에 나누어 다루려고 한다. 먼저, 마젤란식의 세계 일주로부터 시작해본다. '마젤란의 해양 오디세이'를 다룬 로런스 버그린의 <세상의 끝을 넘어서>(해나무, 2006)가 첫번째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의 기록을 남긴 마젤란의 당시 항해 과정을 재구성한 책"으로 "처음에는 향료 제도를 찾아 떠났지만, 기상천외한 모험과 폭력, 이국에서의 향락과 섹스를 겪고 마젤란의 죽음을 거치며 결국 유령선의 몰골로 돌아온 것으로도 유명한 마젤란의 항해. 그 이야기의 앞뒤 사정을 역사적 문헌들을 참조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자작나무, 1996) 등을 읽지 않았기에 내가 읽은 마젤란은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세계위인전집'의 마젤란이다(따지고 보니까 1970년대에 읽은 셈이 된다!). 남들처럼 역마살이 있는 건 아니어서 마젤란의 항해와 '모험'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 '오디세이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초등학교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책에서 "어리석고 앞을 내다볼 줄 몰랐으며 몽상가적 기질까지 있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마젤란에게서 위대한 업적을 세운 한 인간의 나약한 이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하니 여유/여건만 된다면 느긋하게 '항해'에 나서볼 만하다. '마젤란의 무덤'까지?(정과리의 이 비평집 제목은 아마도 비평집으로선 가장 튀는 제목일 것이다.) 

 

 

 

 

마젤란의 항해 여정이 내겐 시간 여행의 의미를 갖는다고 적었지만, '근대성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이란 부제를 가진 해리 하르투니언의 <역사의 요동>(휴머니스트, 2006)은 실제 '역사 속의 시간 여행'이겠다. '근대성'과 '일상'을 키워드로 한. 이 책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근대성과 일상에 대한 권위 있는 설명을 통해 하르투니언은 일본과 아시아에 대한 지식 생산의 정치를 예리하게 비판한다. 이론적 정교화와 열정과 비전에 있어 이 책은 귀감이 될 만하다."라는 레이 초우의 추천사 덕분이다. <원시적 열정>의 여성 중국문화학자 그 레이 초우 말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20세기 전반 유럽과 일본에서 일어난 다양한 일상담론을 탐구한 흥미로운 이론서. 우리 지식 사회에 넓게 퍼져있는 일상의 지형도를 꼼꼼하게 인식하고 세밀하게 서술했다. 미국의 동아시아학, 특히 일본학의 대표적 학자인 지은이는 정보수집과 실증성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있던 지역학에 비판적 문화이론을 도입하고 철학, 역사학, 문학, 정치학, 사회학을 넘나드는 학제 간 연구로서의 '새로운 지역학'을 모색한다. 책에서 중심적으로 다룬 '일상'은 '새로운 지역학' 사유의 자연스러운 귀착점. 지역학에 고질적인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깨기 위해 '동시적 근대성'을 사유하고, '동시적 근대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개념인 '일상'에 주목한다." 이젠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듣던 얘기이다.

차이라면 "아직까지 국내에는 본격적으로 소개된 바 없는 크라카우어나 아르바토프를 비롯하여 하이데거에서 벤야민까지 다양한 일상담론의 서술"을 다룬다는 점. 하지만 "미국 내 동아시학에 대해 관심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이라는 건 친절한, 하지만 불필요한 멘트이다. 책은 '근대적 일상'에 조금만 관심있는 독자라면 흥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정도의 멘트여야 하지 않을까? 한편 눈길을 국내로 돌리면, <근대의 첫경험>(이화여대출판부, 2006) 등이 근대적 일상을 다루고 있는 책들로 나와 있다. 학술서의 성격들이 강해서 다양한 일상담론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세번째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말하는 나의 영화들'이란 부제가 모든 걸 말해주는 <말의 색채>(미메시스, 2006)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 적어놓고 보니까 올해는 20세기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이 '전설적인 작가'의 10주기가 되는 해이다. 프랑스 여성작가로서 그만한 명성을 누린 작가가 많지 않을 듯한데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한 뒤라스의 영화에 대한 담담한 증언과 고백을 통해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는 책으로 보인다.

La couleur des mots : entretiens avec Dominique Noguez

소개에 따르면, "텍스트와 이미지를 넘나드는 그의 영화-글쓰기를 뒤라스 본인의 솔직 담백한 증언들을 통해 살펴보"는바 "작가이자 뒤라스 연구가인 도미니크 노게즈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하고 있는 책에는 영화의 스틸 컷과 현장 사진들을 비롯한 영화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와 함께 소설과 희곡, 에세이 등의 작품들, 뒤라스와 관련된 각종 미디어 자료들까지 수록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 눈에 조감하게 한다"고. 그러니 뒤라스의 독자들이라면(아주 많지는 않겠지만) 놓칠 수 없겠다. 유지나 교수의 번역인데, 내 기억엔 역자의 학위논문이 뒤라스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뒤라스가 관여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높은 평판을 얻은 것은 알랭 레네가 감독한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일 테지만(뒤라스의 각본이다), 그녀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준 영화는 1984년 공쿠르상 수상작 <연인>을 영화화한 장 자크 아노의 <연인>(1992)일 것이다(토니 륭과 제인 마치 주연). 전세계적인 화제를 불러모은 이 소설/영화는 알려진 바대로 뒤라스 자신의 연애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언젠가 롯데극장(?)에서 본 기억이 새롭다(황톳빛 인도차이나의 강물결과 함께).

뒤라스에 관한 나의 또다른 기억은 몇년 전 한 작은 시립도서관에 갔을 때 서가에 뒤라스의 소설들이 잔뜩 꽂혀 있었던 것. 몇 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연인>의 개봉 이후에 번역/소개된 책들이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절판된. 덧붙이자면, 그녀가 세상을 뜬 1996년에 나온 <이게 다예요>(문학동네)가 얼마 안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뒤라스이다. 고종석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한 내용이 없어서 '고작 이게 다인가?'라고 혼자 툴툴댔던, 아주 얇은 책이다. 여하튼 그런저런 시간여행을 뒤라스와 함께 떠나볼 수 있겠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지난 8월말 정년을 맞아 퇴직한 독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 김주연의 <독일비평사>(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독문학자로서의 마지막 업적은 아니겠지만(아니기를 바라지만), 30년 가까운 대학 교단생활을 정리하고 기념하는 의미는 있겠다. 책의 제목에서 내가 떠올린 건 당연 저자의 막역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문학비평가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문학과지성사, 전집판2001)이다. 두 비평사 사이에는 20년쯤의 간극이 놓여 있는데, 그래도 나란히 놓으면 우정의 끈은 이어지는 것이지 않나 싶다. 문지4인방 비평가들의 '새파란'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아래 사진에서 맨왼쪽이 김현, 그리고 맨오른쪽이 김주연이다.

<독일비평사>와 함께 (아마도) 정년을 기념하여 같이 나온 책 <인간을 향하여, 인간을 넘어서>(문이당, 2006)는 저자가 드물게 내는 에세이/시론(時論)집. 가장 최근에 나온 평론집 <근대 논의 이후의 문학>(문학과지성사, 2005)의 경우에도 그가 아직 '현역' 비평가임을 두루 과시한 바 있으므로 '정년 이후의 문학비평'을 더 기대해볼 만하겠다.   

 

 

 

 

끝으로, 불가리아 산문 문학의 대가로 추앙받는다는 작가 요르단 욥코프의 1927년 작 <발칸의 전설>(문학과지성사, 2006)이 출간됐다. 저자에 관해서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불가리스'로나 알려진 나라의 문학을 접해보는 드물고도 유익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발칸에 대해서라면 주로 영화감독 쿠스투리차의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나 이즈마엘 카다레의 알바니아를 떠올리게 되는데, 욥코프 덕분에 불가리아를 첨가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줄리아 크리스테바나 츠베탕 토도로프 같은 걸출한 지식인들이 불가리아출신이지만. 아래 사진은 불가리아의 최고봉이라는 릴라산.   

책은 "이념과 관습,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사랑을 노래하는 열 편의 짧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는데, "불가리아 중심부에 위치한 '스타라 플라니나(발칸 산맥)'에 흩어져 있던 전설과 민담을 채록하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재탄생시킨 단편들"이라고 한다. 소개를 더 보태자면, "발칸의 광활하고 풍요로운 자연과 민족 영웅, 범부 등을 그린 이야기 속에, 15~19세기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 풍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500여 년에 걸쳐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리아를 배경으로 하며, 사라진 과거의 아름다움이 몽상적인 필치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작가 욥코프는 '(불가리아 국가가 형성된 이후 근 1300여년 동안)불가리아인에 영향을 준 100대 위인'에 뽑힐 만큼 불가리아인들이 사랑하고 존경해온 작가이다. 불가리아 출신 작가들 중 노벨 문학상 후보에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런 욥코프와의 발칸 기행에 한번 나서볼까? 집시들의 바이얼린 소리도 옆에 끼고서 말이다...  

06. 09. 15.

 

 

 

 

P.S. '마젤란의 해양 오디세이'에 덧붙이자면, 천병희 선생의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06) 개정판이 출간됐다. 단국대출판부판(2002) 이후 4년만인데, 직역투의 문장들을 좀더 유려하게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더 맘에 들어하는 것은 달라진 표지이다(예전 번역본은 표지 때문에라도 구입하고 싶지 않았었다). 이젠 오뒷세우스의 여정도 뒤따라가볼 수 있는 준비는 갖춰진 셈. 거의 등떠미는 수준인데, 그렇다고 짐짝 같은 우리의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다... 아,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어이할 것이냐? 우리의 뼈도 못추리게 만드는 이 세이렌(사이렌)의 마녀들을 모두 어이할 것이냐?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이 물귀신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의 저명한 진보저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판이 창간되었다. 어제(14일) 날짜의 일이다. 예전에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이 등이 한국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필요성을 역설한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한국판'으로 구체화된 모양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프랑스에서는 발행인인 이냐시오 라모네가 방한하여 간담회까지 가졌다고. 그의 저서로는 공저인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백의, 2001)를 넘어서 외에도 <소리없는 프로파간다>(상형문자, 2002)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나는 그 두 권의 책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국내에 가장 널려 알려진 프랑스 언론인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새로운 언론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는 소식인바, 관련기사를 읽어본다.

경향신문(06. 09. 14) “독립적 언론만이 진정한 비판 가능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을 계기로 한국지식인 사회에 진지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빨라진 인터넷 환경이지만 긴 호흡을 가진 디플로마티크 같은 언론을 원하는 독자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국제문제에 대한 심층 분석과 독립적 비평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14일 한국판(발행인 박승흡)을 창간했다. 창간행사와 토론회 등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64)은 이날 ‘세계화와 미디어·문화 민주주의’를 주제로 국내 미디어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라모네 발행인은 모두 발언에서 “정치와 경제로부터 독립적인 언론이야말로 사회에 대한 진정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면서 재벌들의 언론사 소유로 인해 다양한 여론이 반영되지 않고 비판이 약화되는 미디어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라모네는 “프랑스의 경우 에르상과 라가르데르 등 양대 언론사가 닷소 등 거대 군수기업에 합병돼 언론으로서의 비판성을 거의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라모네는 “소유구조가 독특한 르몽드만이 정치와 재벌로부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사회에 대한 진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르몽드 독립성 유지의 바탕에 관해 “다른 언론과 달리 편집인집단 주주, 소액주주(독자), 사원주주 등 3대 그룹이 주식을 소유한 독립적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라모네 발행인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해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움직임”이라고 규정하고 “이 흐름 안에서는 문화도 상품이 되며, 상품화된 문화는 획일화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상업화가 진행되면 겉으로는 다양한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미디어는 거의 동일한 가치를 옹호한다”고 말했다. 라모네는 “문화와 미디어 부문에서 세계화는 다양한 지역의 문화와 미디어의 소멸을 초래하고, 그 결과 미국문화와 미디어만 살아남는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문화다양성을 위한 투쟁과 미디어 다양성을 위한 투쟁은 일맥상통한다고 설명했다.

라모네 발행인은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지면 국가와 민족이 가진 정체성과 창조성이 소멸된다고 걱정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강자만 살아남는 ‘다위니즘’에 비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미디어의 다양성이 사라지면 동시에 비판성도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문화다양성 운동에 오랜 기간 관여해 온 라모네 발행인은 작년 10월 문화다양성협약이 탄생한 것에 대해 “약소 문화나 국가가 승리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문화다양성협약이 발효하려면 30개국의 비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진행중인 FTA에 대해 라모네는 “미국은 FTA를 통해 세계화 반대세력을 무력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FTA를 통해 미국이 원하는 것은 각국의 무역장벽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지배에 더해 문화적 지배도 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FTA를 통해 자국 상품에 대한 장벽을 없애려 한다는 얘기였다. 라모네는 한국의 스크린쿼터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쿼터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들었다면서 “한국 문화계가 타격을 입을 것이며 결국 미국 문화가 그 빈 자리를 메우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랑스 68혁명세대 출신인 라모네는 에밀 졸라,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 등 프랑스 앙가주망 운동을 계승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지난 15년간 디플로마티크를 이끌어 온 라모네는 파리 7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의 교수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아메리카-미국, 그 마지막 제국’ ‘커뮤니케이션의 횡포’ 등은 국내에서도 번역·출간됐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1954년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의 자매지로 창간된 이래 세계 56개국에서 22개 언어로 매월 2백만부 이상 발간되고 있으며 이번에 한국판이 생기는 것이다. 디플로마티크는 인터넷판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판은 주로 오프라인 신문에 집중하겠다는 방침이다.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디플로마티크에서 선별한 기사 70%, 한국판 편집진이 집필한 기사 30%의 비율로 편집할 계획이다. 편집위원회는 위원장 박순성 동국대 사회과학대 북한학과 교수를 포함해 이기언 연세대 불문과 교수, 이혜정 중앙대 정외과 교수,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 등 모두 21명으로 구성돼 있다.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40면으로 매월 발행되며, 초기 발행부수는 1만부다.(설원태 기자)

06. 09. 15.

P.S. 참고로, 아래는 지난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판 창간예정 소식을 전하고 있는 레이버투데이의 관련기사이다. 필자는 이대호 기자이다.

레이버투데이(06. 05. 26)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

‘명품’ 국제관계 전문지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 한국판이 오는 9월 공식 창간된다. 르몽드코리아(대표이사 박승흡)는 지난해 12월 프랑스 본사와 독점판권계약을 맺고 6, 7, 8월 세 번의 창간준비호를 거쳐 9월15일 한국판을 공식 창간한다고 밝혔다. 온라인사이트(www.lemonde.co.kr)도 6월중 선보일 예정이다.


▲ 이냐시오 라모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과 박승흡 르몽드코리아 사장이 지난해 12월12일 프랑스 현지 본사에서 한국판 발간계약을 체결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프랑스의 <르몽드>가 54년 자매지로 창간한 월간지로 국제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과 대안 제시로 인권과 평등, 평화를 옹호하는 정론지로 위상을 굳혔다. 91년 이후에는 이냐시오 라모네 편집인이 주도하면서 미국 중심의 패권적 담론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 대안 세계화 운동의 흐름을 확장시키는 등 권위지로 인정받았다. 현재 세계적으로 21개 언어로 총 150만부가 발행되고 있다.

22번째 언어이면서 오프라인으로는 아시아에서 처음인 한국판에는 프랑스 원판 번역기사 70%와 한국판 편집진이 기획·취재한 기사 30%가 실린다. 르몽드코리아는 “한국판은 프랑스판 편집 기조를 존중하면서 한국인들이 국제적 안목을 넓히고 언어와 인종, 국경을 넘어 세계 시민사회에 다가서도록 하는 안내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르몽드코리아는 국제관계 등 분야별 전문가 10명으로 한국판 편집위원회(위원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를 구성했으며, 그 밑에 국제팀, 경제통상팀, 사회문화팀 등 기획전문가 그룹을 뒀다. 프랑스판 기사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10명 이상의 박사급 번역팀을 구성했으며, 불어전문 편집위원들이 감수를 담당한다.

박승흡 대표이사 겸 발행인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사회연대를 확장할 뿐 아니라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매체를 만들겠다”며 “정책결정자, 기업인, 시민사회 등 지성인과 세계적 안목을 가지려는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벗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국판 창간 작업에 바쁜 최방식 편집장을 전화로 만났다. 최 편집장은 “서방 통신사 기사를 받아쓰는 ‘우물 안 개구리식’ 보도관행을 깨고, 이들이 무시해 온 또 다른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매체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 편집장은 <시민의 신문> 편집국장과 미주특파원을 역임했다.

- 기사의 30%를 직접 생산하는데 동북아의 이슈를 본사와 역할을 분담하는 것인가.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동북아는 관심지역 중의 하나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언론은 물론 국제관계 전문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도 동북아와 관련해서는 기사의 양도 적고 전문성도 떨어진다. 따라서 한국판은 한반도 문제와 함께 동북아 관련 전문기사를 생산할 것이다. 이 기사가 좋으면 프랑스판에 실려 세계적으로 보급된다.”

- 지금 우리 사회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이 필요한 이유는.
“우선 한국사회가 밖을 보는 시선이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늦게 민주화가 되고, 국제적 관문을 넘나든 것도 늦었다. 국제사회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다음으로 국제사회를 보는 눈이 비뚤어져 있다는 것이다. 미국을 통해서 각종 정보가 들어오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본다. 편향이다. 국가마다 다른 시각이 있다. 이것을 우리사회에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 다른 매체 국제뉴스와 차별성은.
“기존 언론, 특히 일간지들은 AP 등 서방 4대 통신사의 국제기사를 받아쓴다. 그러면 그들의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북반구의 선진자본주의는 다루지만 그외 다수 나라들의 이슈는 중요해도 소외된다. 다뤄도 자신들의 시각에서 다룬다. 이런 관행을 깨고 세계 구석구석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차별성이다.”

- 한국판 발행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우선 번역이다. 프랑스어가 형용사, 부사가 다양하고, 특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표현 스타일이 직설적이지 않고 한바퀴 돌린다. 이런 표현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번역과 감수과정에 고통이 따를 것이다. 또 국내판 기사를 만드는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명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씨름을 하고 있다.”

- 국내판 기사는 어떻게 만드나. 상근기자가 있나.
“상근기자 체제는 아니다. 전문적인 프리랜서 기자나 국제관계에 밝은 전문가, 대학교수, 연구원 등 필자 풀을 만들고 있다. 해당분야의 이슈가 결정되면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적임자를 선정해서 기사를 쓸 것이다.”

- 쉬운 글이 아닐 텐데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수준인가.
“각 분야의 학자나 연구원, 정책생산자, 언론인 또는 대학원생들이 주요 독자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말 그대로의 국제관계뿐만 아니라 교육, 환경, 정치, 문화 등 국제적인 이슈가 없는 분야가 없으므로 모든 분야가 한국판에 담긴다. 그리고 여기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 월간지인데 어떤 판형으로 만드나.
“흔히 우리나라 일간지가 취하는 대판과 타블로이드판의 중간 크기인 베를리너 판형을 택했다. 휴대와 읽기가 쉬워 유렵에서는 <르몽드>나 <가디언> 등이 이 판형이다.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판형이기도 하다. 매달 15일 50페이지 분량으로 발행할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