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지난 9월의 마지막날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을 비디오로 빌려다 봤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는 지난 여름, '지나간 모든 여름'을 추억하며 개봉관에서 보고자 했었지만 '낭만'은 언제나 현실에 패배하기 마련이다. 내게 남은 낭만은 그나마 갓 들어온 신작 프로를 운좋게도 바로 빌려다 보는 일 정도이다. 그리고 며칠전에 김기덕의 <시간>에 관한 영화평 몇 개를 읽다가(<시간>은 <해변의 여인>에 이어서 빌려다 보았다) <시간>과 <해변의 여인>에 관한 김소영 교수의 영화평을 읽고 스크랩해놓았다. 그 영화평의 일부를 옮겨놓으면서 제목이 '해변의 여인'이 아닌 '해변의 페트라르카'가 된 것은 그 사이에 지젝의 '환상의 돌림병' 이야기가 끼여들어서이다. 일단은 '씨네21'의 '전영객잔'에 게재된 영화평의 후반부를 읽어본다(언제나처럼 강조는 나의 것이다).  

씨네21(06. 09. 13) 영화적 재미의 새로운 경지, <해변의 여인>

(...) '이미지와의 싸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중래가 주저리주저리 도형까지 그리며 설명하는 사악한 이미지와의 싸움은 사실 슬라보예 지젝의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책의 첫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자와 섹스를 했다고 하자, 뭐 괜찮아 하고 넘겼다가 이후 섹스 체위 등 온갖 것에 대한 환상으로 시달리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환상의 돌림병>의 서두다. 중래가 털어놓는 아내와 자신의 친구와의 관계 묘사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남긴 영향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 환상의 돌림병을 구성하는 이미지다.

 

 

 

중래는 제법 심각하게 이런 이미지와의 싸움을 털어놓고, 또 도형까지 그려 이미지의 구성을 그래픽하게 설명한다. 이와 엇비슷하게 그러나 문숙의 시각에서 제기되는 것은 자신이 방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중래와 선희가 어떻게 방을 나갔을까? 자신을 넘어 나갔을까? 하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에 중래는 위의 이미지와의 싸움이라는 강박으로 대응한다. 중래가 자신의 트라우마처럼 제시하는 위의 환상의 돌림병은 그러나 문숙에 의해 결국은 의미 폄하를 당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 의미 훼손의 태도다. 이처럼 의미를 구성했다가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 외에 영화가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은 일단 사용했다가도 슬그머니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영화적 기호 중 일단 한번 사용되기만 하면 그것이 결정적 의미화를 가져오게 되는 예 중 하나가 그 유명한 기침이다. 특히 여주인공의 기침은 불치병은 물론 거짓말, 불륜 등의 재앙을 예고한다. 문숙은 황사가 오고 있는 봄날, 기침을 하면서 등장하는데, 영화의 서두에서 문숙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중래와 창욱도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문숙은 그 무관심, 그 무언급 중에서도 몇번 더 기침을 하고 , ‘이틀 뒤’ 나타났을 때 기침은 멈추어져 있다.

 

 

 

또, 중래는 ‘이틀 뒤’ 해변에서 나무가 늘어선 사구에 가 나무에 절을 하면서 콧물이 나올 만큼 엉엉 우는데, 이런 의외의 의례를 뒷받침할 만한 설명은 거기 가면 그렇게 절을 하게 된다는 것 외에는 별로 제공되지 않는다. 위의 기침이 통상적 기호라고 한다면 나무에 절하는 행위는 제의적 기호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둘 모두 은유나 환유로 가는 대신 표면 위에 정지한다.

이미지와의 싸움도 트라우마로 규정되는 대신 조롱거리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해변의 여인>을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한국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의 새로운 경지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나 <극장전>보다 이 재미는 훨씬 더 명료해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신랄한 조소마저 조롱하는 되돌이과정은 영화감독의 환상의 돌림병처럼 보인다.(김소영)

이 영화평을 읽다가 나의 관심은 <해변의 여인>에서 <환상의 돌림병>으로 옮겨갔다(<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최근작들, 곧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을 포함한 세 작품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다). '해변의 여인'에서 '해변의 페트라르카'로의 이행은 그러한 관심의 전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 왜 '페트라르카'인가? 그건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 2002)의 서론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김소영 교수가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자와 섹스를 했다고 하자, 뭐 괜찮아 하고 넘겼다가 이후 섹스 체위 등 온갖 것에 대한 환상으로 시달리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환상의 돌림병>의 서두다"라고 정리하고 있는 그 '서두' 말이다. 그 서두의 (의미상) 첫 문단을 국역본에서 인용하면 이렇다.

"남성 쇼비니스트가 보이는 질투의 전형적인 상황 속에 우리 자신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즉 갑자기 나는 내 파트너가 다른 남자와 섹스했음을 알게 된다. 좋아, 문제 없어. 나는 이성적이고, 관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러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지들이 나를 덮쳐오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벌이고 있을 구체적인 이미지들(왜 하필이면 그녀는 바로 그의 바로 그곳을 핥고 있어야 했는가? 어째서 그녀는 다리를 그렇게 쫙 벌리고 있어야 했는가?)이다. 그리고 나는 당황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떨고 있다. 내 평화는 영원히 달아나 버린다."(11쪽, 강조는 원문 그대로)

사실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1999)에서 톰 크루즈를 괴롭혔던 것도 언젠가 해군 장교에게 유혹당할 뻔했었다는 아내 니콜 키드먼의 고백이 낳은 '이미지들'이었다(이 경우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정사이지만 그가 상상해낸 정사의 이미지들은 일시적으로 일상적인 삶을 중단시킨다. 혹은 영화밖의 이 커플을 이혼하게 만든다?). <해변의 여인>에서 '질투에 빠진 남성 쇼비니스트'로서 이혼한 영화감독 중래가 싸우는 이미지들도 자신이 마음에 두었던 여인들이 다른 남자들과 가졌던/가졌을 정사의 이미지들이다. 그 또한 '환상의 돌림병' 환자이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 말의 출처가 바로 페트라르카이다.    

"이러한 환상들의 돌림병은 페트랄크(Petrarch)가 <나의 비밀>(My Secret)이란 작품에서 자신의 명료한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시청각 미디어에서 그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번역문 자체가 비문이지만(원문에 따르면, '환상들의 돌림병'과 '명료한 이성/추론을 흐리게 만드는 이미지들'은 동위어이고 동의어이다), 그보다 더 어리둥절한 것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대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를 '페트랄크'라고 표기한 것이다. 페트라르카의 영어식 이름이 'Francis Petrarch'이긴 하지만, 역자가 이런 정도의 인명을 제대로 표기해주지 못한 것은 부주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사실 번역은 곳곳에서 삐걱거린다).  

 

 

 

 

오랜만에 다시 잡은 번역본을 읽다가 '페트랄크'에서 혀를 차게 됐지만 뜻밖의 소득도 없지는 않은바, 페트라르카의 국역본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지난 2004년 시인의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여 최초 의 번역본 <칸초니에레>(민음사)가 출간되었던 것(작년에 거푸 또 다른 전공자가 옮긴 <칸초니에레>도 출간됐다). "페트라르카가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쓴 시를 모은 시집이다." 변명삼아 말하자면, 이런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 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이다. 한데, 작년에 나온 <칸초니에레>(나남)는? 책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로쟈'도 '인간'임을 자인하는 수밖에.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칸초니에레'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시집'이라는 뜻을 가진 일반명사지만, 페트라르카의 시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총 366편의 작품이 실렸는데, 그중 317편이 소네트이고 이들 대부분이 평생 연인이었던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읊은 것이다. 초반부의 시에서 시인은 거절당한 사랑으로 인한 비탄, 정열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노래하였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지상의 욕망을 천상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강조는 나의 것)

"페트라르카식 소네트의 완성형을 보여주며, 이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시인들의 끊임없는 모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 시집 자체도 필독의 대상이지만 지젝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나의 비밀>(Secretum)이며, 'My Secret Book'이라고 영역본이 나와 있는 책이다(국내 도서관들을 검색해밨지만 단행본으로는 소장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얇은 책인데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의 가상의 대화를 담고 있는 책인데, 페트라르카식의 강렬한 고해성사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환상의 돌림병'으로 고통받는 자신에 대한. 그렇다면,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식 고해성사인가?(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인가?)



 

 

 

사실 "오늘날의 시청각 미디어에서 그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환상의 돌림병'의 가장 유력한 유포자는 '이미지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홍상수의 근작들은 그러한 영화의 메카니즘 자체에 대한 반어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조건적 기호)과 이미지(도상적 기호)에 포획된 현대인의 일상적 삶에 어떤 구원이 모색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성찰. "나무가 늘어선 사구에 가 나무에 절을 하면서 콧물이 나올 만큼 엉엉 우는" 중래의 모습에서 조롱만을 읽는 건 그런 의미에서 공정하지 못하다. 농담을 진담처럼 건네는 게 홍상수의 주특기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서 그는 진담도 농담(조롱거리)으로 던지곤 하기 때문이다...

06. 10. 07-08.

 

 

 

 

P.S.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변의 여인' 이미지는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1991) 맨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 연상에 기대어 나는 <해변의 여인>이 장르와 무관하게 '홍상수식 바톤핑크'가 아닐까란 억측마저 해본다. "Are you in the pi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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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벨상의 계절이다. 노벨상의 꽃으로도 불리는 문학상은 관례대로라면 내주 목요일쯤 발표될 예정인 걸로 아는데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후보들이 매번 쓴잔을 마셨던 '관행'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의외의 다크호스가 등장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노벨문학상 얘기를 꺼내자고 한 건 아니다.  '북데일리'의 '세계의 책' 코너를 오랜만에 훑어보다가(한동안 활발하게 기사가 올라오던 이 코너는 현재 '개점휴업중'이다) 작년도 전미도서상 픽션부문을 수상한 <유럽센트럴>에 다시 눈길이 갔다.

연휴의 막간에 잠시 수다를 늘어놓자면, 작년 12월쯤인가 우연히 기사를 읽고서 나로선 생소한 작가 (하지만 '젊은 거장'이라는) 윌리엄 폴만(1959- )의 책들을 두어 권 아마존에서 구입한 기억이 있다. 물론 <유럽센트럴>을 포함해서. 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국역본이 곧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미국내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상의 하나인 전미도서상도 아직까지 한국의 독자나 시장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란 사실만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혹 관심있는 분들이 있을까 하여 거의 1년 전 기사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북데일리(05. 11. 21) 소설 '유럽센트럴' 전미도서상 수상

미국 현대문학의 다크호스로 알려진 윌리엄 T. 폴만(46)의 소설 <유럽센트럴>(바이킹. 2005)이 올 전미도서대상 픽션부문 대상에 선정됐다. '내셔널 북 기금'이 주관하는 전미도서대상은 미국에서 매년 픽션, 논픽션, 시, 아동문학 4부문에서 매년 뛰어난 문학작품을 저술한 작가들에게 주는 문학상으로 퓰리처상과 함께 미국의 가장 큰 문학상 가운데 하나다.

폴만은 픽션과 저널리즘의 서술 기법을 차용해 작품의 독창성과 대담한 묘사로 독자와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어 왔다. 추리소설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쓰거나 창세기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폴만은 "예술을 위해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적인 장르에서 영혼을 불러내는 작품을 쓸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유럽센트럴>의 37개 에피소드는 2차대전을 전후한 당시 나치와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광신적인 유럽 통치체제를 그리면서 이에 대항했던 알져지지 않은 저항사를 복원시키고 있다. 폴만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소설은 인상깊은 스토리라인을 특징으로 하면서 각 에피소드는 연대순으로 나열돼 소설의 구성을 완성시키고 있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정치체제부터 독일의 급부상,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반격 그리고 동서체제로 나뉜 베를린의 냉전으로 끝을 맺는다.

20세기 소련과 독일의 호전적인 권위주의 정치문화에 눈을 돌린 폴만은 전쟁이 가져다 준 비극에 대한 인간의 행위와 저항에 초점을 맞춘다. 유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한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내려야만 했던 윤리적인 판단과 목숨을 건 결단을 비교하고 대조시킨다.

특히 시인과 미술가 등 예술가들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도 눈길을 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소련 작곡가 드리트리 쇼스타코비치, 그와 그의 작품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공격했던 스탈린주의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쇼스타코비치와 엘레나 콘스탄티노프스카야, 영화감독 로만 카르멘 사이의 삼각관계도 다루었다.

나치친위대 SS장교인 쿠르트 게르슈타인의 생은 보다 극적이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모집했던 임무를 맡았지만 게르슈타인은 전세계에 나치포로수용소의 위험성 경고했다. 케테 콜비츠(독일 여성판화가), 안나 아흐마또바 (러시아 여류시인), 마리나 쯔베따예바(러시아 여류시인), 반 클리번(미국 피아니스트) 등 당시 예술가에 얽힌 에피소드 담아냈다.

소설의 중심적인 배경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을 알리는 바르바로사 작전,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퇴 과정이다. 전쟁의 역사 속에서 상처와 고통을 입은 수백만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폴만은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전쟁의 역사 속에 묻힌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북데일리 노수진 기자)

06. 10. 06.

 

 

 

 

P.S. 대략적인 줄거리만으로 '이거다!' 싶은 소설이었다. 문학의 죽음이나 종언론 따위가 엄살이라는 보여주려면 이 정도의 스펙타클은 써줘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소설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일컬어지는 '제1세계'에서 아직까지 이런 문학의 씌어진다는 사실이 (좁은 견문에) 다소 의외였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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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책들과 씨름했다. 이때 '씨름'은 물론 비유적인 의미에서 쓴 것이지만 비유만은 아닌 게 책을 읽고 이해하느라 고투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책장의 있는 책들을 모두 빼서 다시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의미에서의 '씨름'이기 때문이다(그 결과 삭신이 쑤신다).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고 몇 주전부터 진행중인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로서 3단 책장 6개와 5단 책장 3개에 꽂혀 있던 책들을 모두 거실(혹은 베란다)로 빼내고 그걸 기화로 아예 서재의 책들까지도 전부 재배열했다. 전쟁터 같은 집안 풍경이 다소나마 정리된 게 어젯밤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칠하느니 마느니 갈피를 못 잡다가 결국 딸아이의 방에 칠할 '친환경' 페인트를 구했고 그 사이에 날은 저물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본 비디오를 반납하러 나갔다가 편의점에서 조간신문을 사들고 온 게 조금 전이다. 읽은 시간상으론 '석간'이라 해야 할 그 신문이 수요일자 한국일보이고 내가 읽은 건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이다. 특별히 오늘은 '文靑 사로잡은 비평의 신화' 김현을 다루고 있기에 여기에 옮겨놓도록 한다. 김현, 김윤식이란 이름은 내 청춘의 10년을 사로잡았던 '신화'이기도 했었기에(사실 고종석이 '말들의 풍경'이란 제명 자체를 빌어온 김현에 대해서는 연재의 말미에서나 다루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칼럼의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 불세출의 비평가가 세상을 뜬 지도 열여섯 해가 되었다. 그의 부고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어떤 막연한 의무감에 영안실이 안치돼 있다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던 기억마저 나는 갖고 있다(짧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만 되뇌었던가). 책장 정리를 다시 하면서 가장 가까운 서가에 그의 책 대여섯 권을 아직 꽂아둔 것도 그런 '인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그 중 손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이 <말들의 풍경>(문학과지성사, 1993 5쇄본)인데, 그가 세상을 떠난 1990년 12월에 나온 초판이 아닌 것은 내가 어떤 사정으로 이 책을 한번 더 샀기 때문이다(초판은 내가 군복무시절에 산 책이어서 지방에 놓아둔 것으로 기억된다).

사후적인 회고가 되겠지만, 언제부턴가 지난 90년대 문학을 '김현 이후의 문학'으로 나는 기억/규정한다. 마땅한 당대의 비평가를 갖지 못한 문학의 허전함을 나는 지우지도 채우지도 못하겠다. 칼럼의 중간에 나오는 고종석의 말을 미리 빌자면 "사실 김현은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목소리 큰 비평은 많고 그보다 예민한 비평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비평도 '문학'이라는 걸 확증시켜준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였고, 그래서 그의 부재는 아쉽고 유감스럽다. 최근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기대어 비평의 종언을 시비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만약 비평에 종언이 있(었)다면 그건 지난 199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4.19 세대가 소위 한국사의 '근대' 혹은 '근대 시민정신'과 '학생운동의 정신'을 웅변하는 세대였다면 김현이야말로 4.19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비평가였고, 지난 1990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니까.   

한국일보(06. 10. 04) [말들의 풍경]<31>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문학비평가 김현(1942~1990)이 돌아간 지 16년이 되었다. 16년이면 한 사람의 생애와 정신의 궤적을 감정의 동요 없이 되돌아보기에 꽤 넉넉한 시간적 거리다. 그에 대한 친구들의 사랑도, 적들의 미움도 그 격렬함이 많이 잦아들었을 테다. 그가 작고하고 세 해 뒤에 16권으로 완간된 ‘김현문학전집’의 종이빛깔도 제법 누렇게 되었다.

김현 이후 16년 세월은 이른바 ‘문지 동아리’ 안에서 김현 신화가 더욱 굳건해진 세월이기도 했고, 그 동아리 바깥에서 김현 신화가 사뭇 바랜 세월이기도 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치달은 이 세월의 힘 가운데, 더 큰 것은 뒤쪽이었던 듯하다. 그것은 생전의 김현이 누린 권위가 워낙 컸던 탓이기도 하다. 정점에 이른 자에겐 또 다른 상승의 가능성보다 추락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아닌게아니라, 그 16년 세월은 김현 글의 모자람을 드문드문 드러낸 세월이었다.

그 모자람은 김현 둘레 사람들의 글과 견주어서도 더러 드러난다. 김현 이후 16년은 김현의 제자나 후배 비평가들의 나이를 김현보다 더 먹게 만들었다. 그가 아끼던 후배 김인환과 황현산은 이제 그들의 선배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었고, 그가 아끼던 제자 정과리는 스승이 도달했던 마지막 나이에 이르렀다. 그 제자와 후배들의 글들 옆에 나란히 놓일 때, 김현의 글은 어쩔 수 없이 낡아 보인다. 사실 이런 ‘낡음’은 이미 김현 생전에도 기미를 드러냈다. 김현의 어떤 글은 정치함에서 김인환만 못해 보이고, 자상함에서 황현산만 못해 보이며, 화사함에서 정과리만 못해 보인다.

생전에 낸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의 서문에서 김현은 청년기부터 그 때까지 자신의 변하지 않은 모습 가운데 하나로 ‘거친 문장에 대한 혐오’를 거론했으나, 그 혐오를 철두철미하게 실천한 것 같지는 않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는, 청년 정과리의 글에선 찾기 어려운 유치함과 허세 같은 것도 읽힌다. 현학은 ‘배운 청년’이 흔히 앓는 병이지만, 청년 김현은 그 병을 좀 심하게 앓았던 듯하다. 물론 김현은 이내 그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러나 김현의 글은, 이 모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이 후배와 제자들의 글보다 훨씬 더 맛있게 읽힌다. 그의 윗세대나 동세대 평론가들의 글과 견주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김현은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김현이, 적어도 30대 이후의 김현이, 비평이란 수필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드문 비평가였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을 테다.

그에게 비평은 논리와 지식의 전시장이 아니라 직관과 감수성의 연회였다. 김현은 비평을 제 앎을 드러내는 자리로 사용하지 않고, 마음(의 파닥거림)을 주고받는 자리로 사용했다. 작품론이나 작가론에서, 김현은 (초기 글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불문학 교양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김현 특유의 직관과 감수성이, 모든 뛰어난 비평가에게 그렇듯, 오래 축적된 문학 교양과 어찌 관련이 없으랴?

김현이 자신의 직관과 감수성으로 작품에서 길어낸 의미가 늘 옳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한 작품이 김현의 손길을 통해 늘 제 비밀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한 작품에는 고정된 의미(들)만 있다는 속 좁은 문학관이 그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생전의 김현이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견해다. 그러니 이 말을 이렇게 바꾸자. 김현이 작품에서 길어낸 의미가 늘 표준적이었던 것 같진 않다고. 사실은 그 반대다. 김현의 말 읽기, 마음 그리기는 거의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바로 그 독창적인 의미화를 통해 한 작품을, 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두텁게 만들었다. 모든 독창적 해석이 누군가에게는 오해로 받아들여진다면, 김현은 오해의 대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김현은 한 작품을 그 안으로부터만 읽어내지 않았다. 그는 한 작품을 그 작가의 다른 작품 전부와의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한 세대 내 또는 세대간 영향(의 불안)이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았다. 그것은 유년기 이래 평생 이어진 그의 글 허기증 덕분이었다. 김현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썼지만, 진짜 잊어서는 안 될 점은 그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가 이런저런 작품들에 매긴 자리(생전의 김현은 ‘자리매김’이라는 말이 싫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자리매김이란 관계맺기, 관계짓기보다 훨씬 고착적이어서, 한 번 자리가 매겨지면 변경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상자 기사의 ‘말들의 풍경’ 서문은 그의 이런 생각을 매혹적인 한국어로 펼쳐 보이고 있다)가 늘 공정하게 보이진 않았다 할지라도,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넘나들며 작품과 작가에게 그럴듯한 자리를 마련해준 것은 김현 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후에 출간된 독서일기에서, 김현은 자신의 글을 괴팍하다고 평한 어느 소설가의 말을 거론한 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라고 적고 있다. 김현의 이 자부심은 온전히 정당하다.

김현의 글은 어느 순서로 읽어도 술술 읽힐 만큼 자기완결적이지만, 시간축을 따라 읽을 때 그 저자의 ‘인간적 매력’을 한결 또렷이 드러낸다. 그 ‘인간적 매력’이란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숙의 여정이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 설핏설핏 보였던 문장의 어설픔, 현학 취미와 자기애는 만년 글에서 거의 말끔히 걷혀지고, 단정하되 윤기 있는 문체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겸양이 독자를 맞는다. (물론 그는 자신의 ‘앎’에 대해서는 겸손했으나 자신의 ‘감식안’에 대해선 끝내 겸손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식안을 감식하지 못하는 한국 문단을 슬그머니 타박하기도 했다.) 기분 좋은 일이다.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나이가 늘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이와 함께 푹 익은 인격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한 분야의 세속적 정점에 이른 이의 인격일 때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생전의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과 유고 평론집 ‘말들의 풍경’에 묶인 글들은 한국어 산문이 도달한 아름다움과 섬세함의 꼭대기를 보여준다.

 

 

 



김현은 문학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정치적 문인이었지만, 그의 문학평론은, 특히 만년에 이르러, 폭력의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의 고갱이를 건드리곤 했다.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1987)와 그 즈음의 몇몇 평문에서 그가 탐색한 폭력의 의미는, 깊숙한 수준에서, 1980년 봄과 관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과, 역시 깊숙한 수준에서, 무관치 않았던 것 같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전라도 지식인들이 흔히 그렇듯, 김현도 ‘억눌린 자’와 ‘억누르는 자’ 사이에서, 아니 보편(적 지식인 됨)과 특수(한 소속감) 사이에서 정서적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제임스 쿤의 ‘눌린 자의 하나님’을 읽고 쓴 1986년 5월27일치 일기의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숙고했다. 때로는 혐오하면서, 때로는 연민을 갖고서,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도피의 마음으로.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하숙을 거절당한 것, 사투리 때문에 놀림받은 것, 전라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80년 이후에도 조용하다는 것…… 등의 것들이 뭉쳐져 내 가슴에 밀려들어왔다. 쿤의 책은 내 경험세계의 신학적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나는 억눌린 자인가? 아니다. 억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문학장’ 속에서 권력을 효과적으로 획득하고 합리적으로 행사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점에서 김현은 매우 정치적이기도 했다. 대학시절의 ‘산문시대’에서 ‘사계’와 ‘68문학’을 거쳐 ‘문학과지성’으로 이어지는 그의 동아리 운동에는 세대 전쟁과 세계관 전쟁이 버무려져 있었고, 김현은 늘 제 캠프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그가 문학의 고유성과 (은밀한) 위엄을 그리도 강조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 ‘문학’이었기 때문이리라.

서가에 꽂혀 있는 김현 전집 가운데서 아무 거나 뽑아 들어 띄엄띄엄 읽노라면 문득 가슴이 울렁거린다. 거기에 내 글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나 그 눈길을 담아내는 문체에서나 내 글은 김현의 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고 격조와 깊이에서 도저히 김현의 글과 견줄 수 없지만, 그 근원은, 행복해라, 김현의 글이었다.(고종석 객원논설위원)

● '말들의 풍경' 서문 (앞부분)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 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팽창하고 수축하는 우주가 바로 우주의 본질이듯이. 내 밖의 풍경은 내 충동의 굴절된 모습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풍경이다. 밖의 풍경은 안의 풍경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안과 밖은 하나이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의 참뜻은 바로 그것이다...

06. 10. 04.

P.S. 이 칼럼/페이퍼를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해놓는 것은 이전에 옮겨놓은,김윤식의 서문집에 대한 고종석의 칼럼('나는 '쓰다'의 주어다')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정당하게도) 칼럼 말미에 인용돼 있는 <말들의 풍경> 서문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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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5 00:48   좋아요 0 | URL
어머 그 많은 책정리를...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정말 책과의 씨름이었네요. 김현의 말들의 풍경 서문도 잘 보고 갑니다. 이 페이퍼 담아갈게요. 로쟈님, 감사합니다.^^

페일레스 2006-10-05 18:5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로쟈님이 풀어내는 '책들의 풍경'을 흥미롭게 읽다 가곤 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조각글(혹은 곁다리-텍스트)이 아니라 잘 정돈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로쟈님의 '말들의 풍경'을 손 안에 쥐고 싶다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가져봅니다...

로쟈 2006-10-06 00:39   좋아요 0 | URL
배혜경님/ 자업자득이니까 저로선 유구무언입니다. 할말이 많은 사람들은 주변의 가족들이지요(^^;)...
페일레스님/ 곁다리텍스트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한권의 책'이 채 되지 못하는...
 

몇 주전 마종기 시인의 신작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문학과지성사, 2006)가 출간됐었다. 시집의 펴낸 날을 보니 '2006년 8월 31일'로 돼 있다('그 여름의 끝'에 나온 시집이다!). 시집을 손에 들기 전에 먼저 두 편의 시를 한 지인의 블로그에서 읽었는데, 타이핑된 시는 아래와 같다.

아주 작은 날벌레가 어디서 날아와 읽던 책장에 앉
았다. 나는 책을 잽싸게 닫아 날벌레를 죽였다. 읽기
를 계속하려고 다시 책을 여니 벌레는 죽어서 검은
점 한 개가 되어 있었다.뜯어낼 건더기도 없었다. 날
벌레의 날개도 부서지고 눈알도 다리도 심장도 다 함
께 뭉개져서 작은 점 하나가 되어 있었다.

책장을 더 이상 넘기지 못하고 으스러진 벌레의 본
래 모습을 그려본다. 이 날벌레도 이름은 있었겠지.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이름. 입김이 시신을 다칠까 봐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미안하다. 나에게 이 날벌레는
너무 작고 나는 조팝나무 꽃보다 너무 작다. 작고 큰
것은 어차피 비교하기 나름이다. 미안하다. ......

세상에는 팔팔하던 몸이 죽어 겨우 검은 점 하나로
남는 생명이 많다. 나도 그럴까. 그러니 함부로 슬퍼
하지도 울지도 말 것. 눈물 한 방울에 시신이 완전히
씻길 수도 있다. 한 슬픈 감정이 남을 씻어 없애기도
한다. 저 함부로 내뱉는 슬픔의 잔인성, 저 함부로 내
뱉는 외로움의 음흉스러움, 저 함부로 내뱉는.......

 

 

 

 

내게 인상적이었던 시 '검은 점의 장례'의 전문인데, 처음에 이 시가 인상적이었던 건 물론 내용도 좋긴 하지만, 특유의 행갈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앉았다'를 1행과 2행에 걸쳐서 '앉/ 았다'라고 행갈이를 하는 게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한(시인은 1939년생이다) '문학적 젊음'의 표식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러한 행갈이가 이 시에서 그려지고 있는 삶과 죽음의 팽팽한 긴장을 더욱 고조시켜주는 것으로 읽었다. 뜯어낼 건더기도 없이 부서지고 뭉개진 날벌레 한마리의 모습을 '읽기/ 를' '날/ 벌레' '함/ 께'라는 식의 행갈이가 도상적으로 보여준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첫인상이었다.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시인의 자의적인 행가름이 아니라 그냥 타이핑의 문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즈음에 구한 시집에서 확인해보니까 역시나 원시는 따로 행가름이 돼 있지 않은, 다만 3개 연으로만 구획된 산문시였다. 아마도 타이핑된 시 또한 양쪽 맞춤을 했더라면 애초에 내가 가졌던 오해/오독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해프닝이었던 셈인데, 한편으론 그런 '전위적인' 행가름의 가능성이 무산된 듯해 다소 아쉬웠다. 산문과 달리 시에서 의미를 발생/증폭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식이 바로 행가름/연가름인데(가령 통사적인 한 문장이 두 연에 걸쳐 이어지는 앙장브망 같은 시행을 요즘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의 시들에서는 너무 무시되는 듯하기도 하고.

칼리그람시(그림시)였다면, "날벌레의 날개도 부서지고 눈알도 다리도 심장도 다 함께 뭉개져서 작은 점 하나가 되어 있었다"란 내용을 크기도 제각각인 산개된 글자들이 널브러져 있으면서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가는 과정을 표현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각적 효과를 배제한다면 시는 시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청각에 호소하게 된다. 낭송용 잠언들. 말 그대로, 그건 검은 점으로 수축된 '글자들의 장례'이기도 하다. 청각영상으로서의 시니피앙(기표)에 자신의 자리를 내준 말 그대로의 글자들(letters). 나는 그 글자들이 좀더 활개치는 시들이 보고 싶다...

06.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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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1-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던 거군요. 재미있네요.

맑음 2006-12-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 이럴 때 쓰는 거 맞죠? 로쟈님 이 글도 담아가겠습니다.^ㅅ^
 

경향신문의 고전읽기에서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새물결)가 다루어지고 있길래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나는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을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그 영역본을 타대학 도서관에 대출신청했다(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고아원'에 가 있다). 올 문단의 큰 논쟁거리를 가져온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자연스레 생각했기 때문이다(고진 스스로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내용정리를 마저 끝내는 일도 아직 미뤄둔 숙제로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페이퍼들을 자주 올렸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도 <탐구1>이었다. 그의 '비평'은 '고진식 비평'이라고 따로 분류해도 좋을 만큼(적어도 국내에서는 그런 종류의 비평을 접하기 어려웠던 거 아닌가? 철학과 문학을 횡단하는 쪽으로는 김우창 교수의 비평 정도가 예외적이었을 뿐) 독특하고 흥미로웠는데, 게다가 '읽히는' 비평이었다(아래의 기사를 보니 <탐구>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고진급의 비평가가 흔한 건 아니라는 데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읽은 게 <은유로서의 건축>이었던 듯하며 나는 이 책을 영역본과 나란히 놓고 읽었다.

 

 

 

 

영역본을 위한 이 선집이 <탐구>에서 더 나아간 것처럼 여겨지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후에 나는 고진의 애독자가 되었다. 당연히 이후에 출간된 고진의 모든 책을 사들였으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정도를 빼고는 다 읽어본 듯하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몇몇 저작(가령 <의미라는 질병> 같은 비평집)을 은근히 고대하고 있다. 혹 당신이 아직 이 거물급 비평가를 만나본/읽어본 적이 없다면 (뚜쟁이로서 말하건대) 한번쯤 시간을 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대충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면 당장 비평을 써보시라. '고진을 넘어선 비평'이 탄생하는 흔하지 않을 장면을 나는 목도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9. 30) ‘타자’와 ‘윤리’에 대한 치열한 성찰

한 권의 책이 생각하는 감각을 바꾼다고 할 때, 이는 날카로운 칼에 베는 일과 같다. 한 번 벤 자리는 아물어도 예전 같지 않다. 벨 때의 고통은 떠나겠으나 몸은 이미 전과 다르며, 미열이 가시지 않는 혼미함 속에서도 정신은 각성되어 있다. ‘탐구’를 읽고 나서는 전처럼 생각하기 힘들다.

저자인 가라타니 고진(1941~) 자신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탐구’를 ‘전환’이라 일컫는다. ‘탐구’의 글들은 1985년에서 88년까지 잡지 ‘군조우(群像)’에 연재됐는데, 그 2년은 첨예한 논쟁의 연속이었다. 고진이 ‘기존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대결해야 했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 이후 고진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이 시기 자신의 사상적 고투를 ‘패배한 전쟁’이라 일컫는다. 그의 싸움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나 자신을 ‘안’에 묶어 두려고 했다. …나는 바깥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바깥이란 일단 그렇게 파악되면 이미 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내성과 소행’)

그는 형이상학과의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경제학, 문학, 철학의 영역으로 전략적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형이상학과 맞섰다. 자리를 옮겼을지언정 고진은 한 번도 쉽사리 자신을 형이상학 밖에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형이상학의 내부로, 사유되지 않은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종국에는 형이상학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철저한 논리적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가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1983)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 초월적인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으나, 그 전투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메마른 감각과 갑갑한 논리였다. 거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타자’라는 생명력이었고, ‘윤리’로서의 소통이었다. 이제 고진은 형이상학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내가 ‘탐구’를 연재하면서 계속 질문했던 것은 ‘사이’ 혹은 ‘외부’에서 살기 위한 조건과 근거였다고 할 것이다.”(‘탐구’ 후기)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타자(他者)’이다. ‘타자’라는 말은 그 함의와는 달리 결코 낯설지 않다. 빈번히 사용되는 이 개념은 낯선 존재를 범박하게 처리하는 상투어가 되고 만다. 그 까닭은 타자라는 말이 자기 확장의 의미를 띠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용법을 가장 경계한다. 그에게 타자는 주체의 ‘바깥’이지만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바깥’이다. 만약 그 ‘알 수 없는 거리’가 빠져있다면 타자는 그저 주체 ‘안’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서 상정되는 신은 자기의 확장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소리이다. 자신의 말을 마치 누군가의 말인 양 듣는다. 그때 타자와의 ‘거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신이 전지전능하게 나를 꿰뚫고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내가 안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아시는 신의 상정, ‘기복 신앙’은 자기독백이다.

여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비대칭적 관계’이다. 타자는 내가 품는 의미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이쪽에서 자명하다고 저쪽에서도 자명하지는 않다. 이때 고진이 ‘타자’로 문제 삼으려는 것은 ‘독아론(獨我論)’이다. 독아론은 나에게 타당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타당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독아론에서 남은 나와 동일한 주체로서, 동일한 규칙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내면화된 존재일 따름이다.

고진은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독아론의 소산이었다고 지적한다. 거기에서 배제된 존재들은, 광인(푸코, ‘광기의 역사’)처럼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이란 무수한 존재들간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들을 뛰어넘는 ‘가늠할 수 없는’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를 성찰하는 일은 ‘윤리’적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비대칭성’을 품으면서도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탐구’는 이렇듯 ‘타자’와 ‘윤리’에 관한 책이다.

일본의 사상지 ‘유레카’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탐구’를 선정했다. 80년대 후반의 저작이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꼽힌 것은 ‘탐구’가 90년대의 맥락에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소위 동구권의 몰락 이후 ‘역사의 종언’이 고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이성 혹은 자본주의의 독백일 따름이다. 문제는 그에 맞서는 해체주의가 90년대에 이르러서 파괴력을 잃고, 지적 유희의 경향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 때 빠져있는 것 역시 ‘타자’와 ‘윤리’였다. ‘탐구’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을 부정하면서도 그 반편향으로 어려운 지적 수사에 이르지도 않았다. 다만 실제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제 고진이 ‘탐구’에서 자주 인용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 안에 신비는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비이다.”(윤여일|‘수유+너머’ 연구원)

06.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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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2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02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2 16:40   좋아요 0 | URL
**님/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아닙니다.^^ 저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았었는데, 별로 애로사항이 없다고 답했지요. 워낙에 가족이 단촐해서...
**님/ '고아원'이 좀 다른 뜻인데요(^^;). 제가 책을 보관해두고 있는 곳을 '고아원'이라고 부릅니다. 시화공단에 있습니다. 그리고 맞춤법은 제 잘못이 아니라 원고 필자의 잘못입니다요(^^;)...

2006-10-02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2 22:04   좋아요 0 | URL
**님/ 좀 헷갈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전엔 '-' 표시라도 앞에 달았었는데, 요즘은 그냥 전후 문맥에 맡겨놓고 있습니다. 특별히 퍼오는 글들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