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대목을 옮겨놓고 주석을 달도록 한다. 5장 '레닌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했는가'에 들어있는 대목인데, 오늘날 공과 사의 경계가 소멸돼 가고 기이하게 전도되는 현상을 문제삼고 있다. 사실 지젝의 모든 구절들이 이러한 '뜯어읽기'의 대상이 됨 직하하다. 그럴 만한 여유를 독자로서 갖고 있지 못할 따름이다. 뜯어읽기의 대상은 국역본 104-6쪽, 영어본 207-8쪽이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독어본을 옮긴 국역본과 영어본은 같은 제하의 장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에 인용하는 대목도 국역본에는 없는 문단이 영어본에 더 들어가 있다(반면에 영어본에 없는 내용이 국역본에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인용문의 문단은 국역본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을 가장 가까운 사람보다 완전한 이방인에게 더 쉽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이버공간의 채팅방과 정신분석 치료 같은 현상이 명맥히 이러한 패러독스에 속한다. 우리가 완전히 지인의 범위 바깥에 있는 이방인과 이야기하는 사실이, 우리의 고백이 우리가 말려든 열정의 '뒤얽힘'을 더 이상 휘저어놓지 않으리라 보장한다. 즉 이방인은 우리와 이웃한 타인이 아니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거대한 타자 그 자체'이며, 우리의 비밀을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 따위를 주변 사람들보다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역설적이지만 더 잘 털어놓는다. 사이버공간의 상의 채팅방이나 정신분석 치료가 기대는 것도 이러한 패러독스이다. 즉, 우리는 전혀 모르는 상대방에게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사적인 고백들로 채워진 개인 블로그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할 내용들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인터넷공간에서는 마음껏 늘어놓는다. 왜? 그렇게 하면 일이 괜히 복잡하게 꼬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비밀들을 담는 중립적인 그릇(수용체)으로서의 '대타자 자체(the big Other)'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유된 유아론'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우리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성하는 사랑과 증오에 관한 비밀을 고백하기 위해 이방인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가 보장된 거리를 배경으로 할 때만 관계 자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은 예외적인 지위에 머물고 있는(완전한 이방인과, 다음날 각자의 길을 갈 것이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 그대로 열정적인 섹스로 밤을 보내는 것 같은) 이러한 것들이 점차 새로운 기준으로 되어 가고 있다."

'공유된 유아론'은 영어로 'shared solipsism'이다. 자기만의 내밀성을 낯선이들과 나눠갖는 경향성 정도를 뜻하겠다.  그게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해가고 있다는 것. 즉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고백하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걸 넘어서서 아예 그러한 거리가 전제되어야 친밀한 관계(열정적인 섹스)를 맺는 것이 가능한 경지가 도래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원나잇스탠드'가 성관계의 '모델'이 되어간다? 국역본에는 빠져 있지만, 영어본에서 지젝이 덧붙인 내용은 파트리스 셰로의 영화 <정사(Intimacy)>(2001)이다. 무려 35분간의 정사 장면이 들어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영화이다(내용은 서로에 대해 묻지 않은 채 일주일에 단 하루, 수요일마다 만나 섹스를 나누는 남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같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밀한 인생의 세밀한 부분이, 사람들이 사적으로 속삭이는 외설적인 비밀이 아니라, 모두가 책이나 웹사이트에서 접근 가능한 공적인 등장인물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점이다. 이를 약간 향수어린 보수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스캔들이 더이상 없다는 사실에 바로 스캔들이 있다."

우리의 경우 최근에 컴백설이 나돌고 있는 O양 비디오 사건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등장인물'의 영어 표현은 'persona'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스캔들은 더이상 아무런 스캔들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 흔히 '섹스 비디오 파문'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유사 사건들은 가히 전세계적으로 분포돼 있다. 얼마전 관련기사를 참조하면 이렇다.

스포츠서울(06. 10. 23) 섹스비디오, 국내외 피해 사례는?

섹스 비디오 피해 사례는 국내·외를 통틀어 수 십여건에 달한다. 유명 스타 외의 연예인까지 포함한다면 그 사례는 더욱 많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O양', 'B양', 'L양' 사건. 1999년에 유포된 'O양' 비디오는 유명 여자 탤런트와 한 일반인의 성관계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첫 섹스 비디오라는 희귀성 때문에 당시 이 비디오 테이프는 서울 종로3가 세운상가 일대에서 개당 100만 원에 밀매되기도 했다. 섹스 비디오가 무더기로 뿌려진 이후 피해 연예인은 연예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불과 1년 뒤. 가수 B양의 섹스 비디오가 대량 유통됐다. '제2의 O양 비디오'로 불린 B양 섹스 비디오는 가수 B양과 전 매니저 김모씨의 성관계 모습이 담겨있다. 특히 B양 동영상의 풀버전이 개인사이트에 게재되면서 섹스비디오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인기 절정의 가수였던 B양은 이 사건으로 방송일을 접어야했고 비디오 파문 이후 6년만에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했다. O양, B양 섹스비디오와 달리 탤런트 L양 비디오는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이 비디오는 L양과 닮은 일본 여성의 목욕탕 몰래카메라 컷을 마치 L양인 것 처럼 조작, 유포됐다. 따라서 O양, B양 비디오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며 L양은 실체도 없는 비디오 때문에 심각한 명예 훼손을 당했다.

해외의 피해 사례도 부지기수. 그 가운데 패리스 힐튼과 콜린 파렐의 섹스비디오가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다. 힐튼은 옛 연인 닉 카터, 모델 제이슨 쇼와 찍은 섹스 테이프가 유출돼 곤욕을 치렀다. 이 비디오에는 힐튼의 적극적인 애정행각이 모두 포함돼 있다. 특히 힐튼의 첫 섹스 비디오 '파리에서의 하룻밤(One Night in Paris)'은 DVD판으로 출시되고 있다. 수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힐튼은 급기야 섹스 비디오를 몰래 빼돌리다가 발각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파렐은 옛 연인 니콜 나래인과의 섹스 비디오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파렐의 전 애인 나래인이 지난해 7월 파렐과 함께 찍은 섹스테이프를 유포하려고 한 것. 파렐의 고소로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나래인은 법원의 '공개 및 판매금지' 요청을 무시한 채 비디오를 유포했다. 결국 파렐의 섹스비디오는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파렐은 섹스 비디오로 마음 고생이 심하다고 밝혔다.

섹스비디오는 피해자에게 정신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오점(汚點)을 남긴다. 특히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라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질 한다는 망상에 빠지거나, 사람을 피해다니는 대인 기피증으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 때문이라도 톱스타 K군의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는 피해는 없어야 하겠다.(*지젝이 아래에서 들고 있는 사례도 이러한 것들이다.)

"이는 처음에는 모델과 유명 영화인에게서 시작됐다. 클라우디아 시퍼가 두 남자의 성기를 동시에 열렬히 입으로 애무하는 (조작된) 비디오 클립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만약 인터넷상에서 미미 맥퍼슨(더 유명한 호주 모델 엘 맥퍼슨의 여동생. 사진)에 관한 자료를 본다면, 사람들은 그녀의 뛰어난 친환경적 활동(고래 관찰 회사 운영), 비즈니스 우먼으로서의 그녀에 대한 인터뷰 사이트에 이르고, 그녀의 '점잖은' 사진들이 있는 사이트에 덧붙여, 자위하거나 연인과 성교하는 도둑맞은 비디오를 얻게 된다."

"그리고 카트린 미유의 최근 책은 어떠한가? 여기에서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 비평가는 차갑고 비감정적인 스타일로 창피함이나 죄책감도 없이, 그리고 결론적으로 격정적 일탈의 감정도 없이 자신의 화려한 성생활의 세밀한 부분을, 그녀가 큰 난교파티에 주기적으로 참가하고 거기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익명의 페니스들과 한번에 통하고 즐긴 것까지를 묘사한다."

 

 

 

 

국역본에서 '카트린 미유(Catherine Millet)'라고 표기된 이는 '카트린 밀레'를 가리킨다. 지젝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카트린 M의 성생활>(열린책들, 2001)이다(그녀의 미술관련서들도 국내에 번역돼 있다). 알라딘의 소개를 잠시 옮기면, "자신이 경험한 무수한 성경험을 거리낌없이 풀어놓은 논픽션이다. 놀라운 점은, 성에 대한 서술이 너무나 덤덤하다는 것이다. 섹스 상대의 숫자나, 섹스를 행한 장소, 가지각색의 섹스 스타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섹스와 오르가슴에 대해서 탈탈 털어 이야기하는데도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다. 그저 '나의 섹스'를 치밀하게 그려낼 뿐이다. 그러기에는 문체에 힘입은 바 크다. 허풍이라곤 조금도 없는 비쩍 마른 서술, '주정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 성행위 묘사, 자기의 몸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하는 눈. 공개적으로 섹스 경험을 털어놓았다는 점은 그 다음에 놀랄 일이다. 일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성애 장면을 그려낸 솜씨에 경탄하게 된다..." 

아무튼 성에 개방적인 프랑스에서도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유명인사의 성생활 고백서이다. 카트린 밀레 이후에 그렇다면 어떤 스캔들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지젝이 예감하는 미래는 이런 모습이다.

"여기에 더이상 선험적인 경계는 없다.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에 몇몇 정치가들이 (처음에는 제한적으로) 그 혹은 그녀의 성적 교제에 대한 하드코어 비디오를,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의 매력 혹은 (상적)능력을 확신시키기 위해 유통할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거의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경에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고 썼다. 아마 이 모토는 오늘날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진 것을 신호로 '빅브러더' 현실 드라마 같은 현상에서 파악되는, 주관성을 가진 지위의 급격한 이동을 지적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이상은 안되겠지, 라고 가정해볼 수 있는 '선험적인 경계'는 더이상 없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정치인들이 (처음에는 신중하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섹스비디오를 유권자들에게 유포시킬 가능성까지도 점쳐볼 수 있다. 이미 1912년에 버지니아 울프는 인간의 본성이 변화했다고 적었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러한 기술이 보다 더 적합해보이는 것은 공과 사의 구별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이다...

06. 11. 14-17.

P.S. 서둘러 끝내느라고 마지막 인용문단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먼저 '빅 브러더'는 물론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인물(독재자)인데, 같은 이름의 리얼 TV시리즈가 있다고. 올해 '시즌 7'까지 나왔고 내년에는 '시즌 8'로 들어간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할 수 있다(참가신청자들 가운데 시청자와 제작자들이 뽑은 배역들이 합숙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 같은 걸 하는 모양이다. 그런 게임의 과정이 TV채널을 통해서 전부 공개되는 방식). 그리고 '주체성을 가진 지위의 급격한 이동'은 영어로는 'the radical shift in the status of subjectivity'인데, 직역하면 '주체성의 지위에 있어서의 급격한 이동'쯤이고 의역하면 '주체성이 갖는 지위의 급격한 전도' 정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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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 저물어가려니까 머리가 무거워진다. 다음 학기부터는 가급적 월요일 강의를 맡지 않든지 해야겠다(그게 뜻대로 될 리 없지만). 더구나 내주엔 입시 한파도 몰아친다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한주의 시작이 갑자기 끔찍해진다. 게다가 해야 할일들을 생각하니 나도 벤야민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말았으면 싶다. 그런 생각으로 잠시 뉴스나 훑어보다가 <닐스의 신기한 여행> 완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번역분량이 전3권이니까 어린시절에 내가 읽은 건 반쪽짜리 정도였겠다(지금 딸아이가 읽는 그림책은 줄거리 정도일 테고). 반가운 마음에(이런 날은 어딘가로 날아가버리고 싶기도 하므로!) 읽어본다.  

오마이뉴스(06. 11. 11) 노벨문학상 수상 여성작가가 쓴 동화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혹은, '여성작가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알려져 있는 셀마 라게를뢰프(1858-1940)의 빼어난 동화 <닐스의 신기한 여행>(배인섭 역·오즈북스 전3권)이 출간 100년을 맞아 한국에서 완역됐다.

기자 역시 어린 시절 그림 가득한 축약본으로 번역된 같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장난꾸러기 한 소년(닐스 홀게르손)이 손가락만큼 작아져 거위의 등을 타고 온갖 곳을 떠돌다가 결국은 착한 소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땐 소년이 모험을 겪으며 머물고 떠나는 도시가 어느 나라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고, 또한 그 작품을 쓴 사람이 교육자와 작가로서 전국민적 존경을 받았던 여성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사실 본격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동화작가'라면 한수 아래로 치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좋은 동화 속에선 소설이나 시 이상의 감동과 만날 수 있고,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가 숨겨져 있다. 바로 이 <닐스의 신기한 여행>이 그렇다.

1858년 스웨덴 모르바카에서 태어난 셀마 라게를뢰프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또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작가가 되는 것. 그녀가 서른 세 살 되던 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짬짬이 써낸 첫 소설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비장미와 서정적인 문체로 스웨덴은 물론, 북유럽 문단을 놀라게 했다. 이후 1885년부터는 교직을 떠나 창작에만 전념했는데,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쓴 <반그리스도의 기적>이 평론가와 독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녀에게 '스웨덴이 자랑할만한 작가'라는 호칭을 안겨준 작품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머물며 쓴 1902년작 <예루살렘>.

이처럼 탄탄한 문장과 빼어난 감수성으로 사랑받던 라겔를뢰프에게 스웨덴 교육계가 한 가지 제의를 건넨다. "우리 아이들에게 조국의 아름다움과 자연, 풍속을 쉽게 알려줄 수 있도록 동화를 써보는 게 어떻겠는가?" <닐스의 신기한 여행>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태어났다. 그 부탁에 기꺼이 응한 그녀는 1906년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흥미진진하면서도 교훈 가득한 이야기를 완성시켰고, 그 공로로 1909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여성작가 최초의 수상이었다.

스웨덴의 남부 스코네에서 시작해 북쪽 끝자락 라플란드까지 날아갔다 돌아오는 닐스와 기러기들의 여행에 동행하며 스산하지만 아름다운 북유럽의 풍광과 만난다는 것, 호수와 숲 속에서 숨쉬고 있는 동·식물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 또한 신비로운 신화와 전설을 만난다는 건 근사한 경험이다.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그렇다. 거위 모르텐, 우두머리 기러기 아카, 여우 스미레, 거위치기 소녀 오사와 그녀의 아우 마츠, 까마귀 비타키, 독수리 고르고 등 유년시절 기억 속 아득한 이름들을 불러내는 이 동화와 만나는 겨울이라면 춥지만은 않을 듯하다.(홍성식 기자)

 

 

 

 

기사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좀 엉뚱하게도 <삐삐 롱스타킹>이다. <말광량이 삐삐>(1969)란 영화로 우리에겐 더 잘 알려진 작품인데, 나도 작품을 읽은 게 아니라 어릴 때 TV시리즈로 본 게 전부이다. 이 <삐삐 롱스타킹>을 다시 기억하게 된 건 요하힘 숄이 쓴 '클라시커 50' 시리즈의 <현대소설>(해냄, 2002)에서 <삐삐 롱스타킹>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베스트 50'에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이런 리스트를 만들 때 누가 <삐삐>까지 고려할 수 있었을까?).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가 또한 스웨덴의 여성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다. "북유럽 현대작가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작가"라고 하니까 여성작가로서 라게를뢰프의 적통을 이은 게 아닌가 싶다(알라딘의 소개는 한술 더 뜬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어린이 독자를 가진 작가"!). 흔히 안데르센의 동화를 이야기하지만, 20세기에 오면 이 '닐스'와 '삐삐'의 산파 두 사람이 다 해먹는 게 아닌가 싶다.

<삐삐 롱스타킹>에 대한 요아힘 숄의 평가는 이렇다: "<삐삐 롱스타킹>은 20세기 후반에 어린이 교육을 개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 큰 아이들도 삐삐처럼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해지고 싶어한다."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해진다? 어른이라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사항들은 아닌 듯하다!

 

 

 

 

린드그렌 여사의 책들은 <삐삐> 시리즈 외에도 다수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데, 그 중에서도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건 '라스무스' 시리즈이다. 원래는 <라스무스와 방랑자>, <라스무스와 폰투스> 두 권인 듯한데, 내가 읽었던 건 한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에 들어있던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였다(<라스무스>의 저자가 린드그렌이라는 건 이번에 알게 됐다).

<라스무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자유로운 방랑자가 맨발로 진흙탕을 지날 때 발가락 사이에 느껴지는 쾌감을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진흙'이 이후로 내겐 자유의 한 가지 표상이다. 한데 이젠 닐스처럼 거위의 등을 타고 날아가지도 라스무스처럼 맨발로 세상을 방랑하지도 못하는 처지로구나. 동화의 바깥 세상은 쌀쌀하다. 곧 겨울이 되리라. 다시 <성냥팔이소녀>나 읽어야겠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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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마이페이퍼의 뒷정리를 하는데(이미지들이 다운돼 있는 경우가 많다), '정리중'이라고 해놓고 방치해놓은 페이퍼들이 눈에 띄곤 한다. 널려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은 숫자도 아니다. 그 중에서 작년 12월말에 진행하다가 만 '토성의 영향 아래(3)'을 마저 끝내기로 한다. 12월 23일에 시작했으니까 이러다간 1년을 다 채우겠다 싶다. 얼마전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했는데 반납기한도 있으므로 '쇠뿔도 단 김에' 빼야겠다. 처음 두 문단이 작년에 적은 것인데, 따로 구분하지 않고 보태 쓰겠다.    

또 해가 넘어가기 전에 미뤄두었던 일들을 해치우기로 한다. 힘 닿는 한에서. 수잔 손택의 <우울과 열정>(시울, 2005) 중 표제가 된 벤야민 장에 관한 세번 째 정리이다. 67쪽, 아니 68쪽부터이다. "벤야민이 베를린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두 권의 짧은 책, 1930년대에 씌어져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은 이 책에는 벤야민의 자화상이 가장 뚜렷하게 담겨 있다."(국역본은 '이 책'이라고 단수로 돼 있다.)  그 두 권의 책이란 <베를린의 유년시절>(솔, 1992)과 <베를린 연대기>를 말한다. 참고로, 네권짜리 영역본 선집과는 별도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하버드대학출판부, 2006)은 단행본으로도 새로 출간됐다.

초기 우울증 질환자였던 벤야민은 "고독이 인간의 유일한 적합한 상태"라고 보았다. 이때의 고독은 방안에서만의 고독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거대 도시 내에서의 고독, 자유롭게 몽상하고, 관찰하고, 숙고하고, 떠도는, 한가히 산책하는 사람의 분주함 속의 고독을 말하는 것이다."(68쪽) 굵은 글씨는 국역본에서 누락된 내용이다.

그러한 벤야민의 모델은 보들레르의 산책자(flaneur)였으며,  그는 도시의 미로를 헤매는 걸 좋아했다. "<베를린 연대기>의 다른 부분에서벤야민은 여러 해 동안 자기 삶을 지도로 그린다는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하는데, 이 도시의 미로는 그에게서 삶의 은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도시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베를린이 아니라 파리에서였다. 그는 지도와 도식, 기억과 꿈, 미로와 아케이드, 원경과 전경 등의 은유을 이용해 "방향찾기의 일반적인 문제를 말하며 어려움과 복잡성의 기준을 세운다." 이때 벤야민이 참조한 것은 브르통의 <나자>나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같은 초현실주의 소설들이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아서 유감이다. 벤야민의 '체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주의'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점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은 우울질의 사람들은 또한 '둔함'을 특징으로 갖는다. 그리고 실수를 잘 하는 것도 특징이다. 어머니와의 산책에서의 그의 이러한 고집불통의 구제불능성은 강화되는데(그는 커피 한 잔 끓일 줄 모른다고), 그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보다 더 느리고,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버릇은 이때의 산책에 그 근원이 있다. 이 버릇에는 또 내가 나 스스로를 실제보다 더 빠르고, 더 능수능란하고 영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위험이 있다."(71쪽) 그리고 이러한 '완고함(stubbornness)'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의 1/3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이 나온다. 나는 '완고함'에 '구제불능'이란 뜻을 포개서 읽고 싶다. 문맥상 이 산책에서 문제된 것은 항상 그가 엄마보다 뒤쳐져서 따라가곤 했다는 것. "얘, 발터야, 너는 어째 그 모양이니!"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벤야민이 <일방통행로>를 헌정하기도 한 아샤 라시스 얘기가 나오는데('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란 페이퍼를 참조) '아샤 라키스'라고 잘못 표기돼 있다. 그리고 음미해볼 만한 기술. "벤야민은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기억에서 출발했을 때, 즉 어린아이일 때에 대해 쓸 때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쓸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어린시절을 보았을 때 벤야민은 자기 삶을 지도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에 드러난 솔직함과 고통스러운 감정의 물결은 벤야민이 과거를 완전히 소화하여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친구들을 접대하고 있는 동안 거대한 아파트 안에 괴물이 떠돌아다닌다는 환상에 빠진 이야기는 벤야민이 후에 자기 학급을 증오한 일을 예시(豫示)한다."(72쪽)는 문장에서 '자기 학급(his class)'은 아무래도 '자기 계급'의 오역이 아닌가 한다. 비록 이어서 학교가기 싫어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라고 내가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필요 없이 원하는 만큼 실컷 자도록 내버려뒀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꿈은 그의 교수자격취득청구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이 통과되지 않게 되자 "어떤 지위와 안정된 직업에 대한 희망은 언제나 헛된 것임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충족될 것이었다("벤야민은 과거에서 떠올린 것 전부를 미래에 대한 전조로 간주한다.").

해서 "어머니와 산책을 하는 방식, '학자티를 내며' 언제나 어머니보다 한발 뒤에서 걷는 모습은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를 예시하는 것이다."라는 게 손택의 통찰력 있는 예리한 지적이다.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sabotage of real social existence)'는 '실제적인 사회적 존재에 대한 거부' 정도의 뜻으로 풀 수 있겠다. 그는 제몫의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거절당했지만 그것은 그의 암묵적인 소망이 성취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공간'에 대한 그의 열정.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거부한 벤야민의 회상에는 시간적 순서가 없다. 시간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베를린 연대기>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자서전은 시간, 순서, 삶의 지속적인 흐름을 구성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공간, 순간, 불연속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프루스트를 번역하기도 했던 벤야민은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라고 불려도 좋을 파편적인 작품을 썼다... 벤야민은 과거를 되살리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과거를 공간적 형태로, 예언적 구조로 압축한다." 요컨대, "벤야민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세상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라는 특징을 지닌다."(73쪽)

공간에 대한 이러한 선호를 손택은 토성적 기질과 연관시킨다.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인물에게 시간은 제한, 부적절한 것, 반복, 단순한 완료의 수단이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거리의)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로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74쪽)

그렇다면 토성적 기질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나? "토성적 기질의 특징은 자의식과 스스로에 대한 가차없는 태도를 들 수 있는데, 이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건'이 뜻하는 건 자아(self)이다. 곧 자기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토성적 기질이다. "따라서 이 기질은 지성인에게 적합한 기질이다." 김현승 시인의 시구를 빌자면 "나는 내가 무겁다"라고 말하는 것이 토성적 기질이겠다.

이런 이들에게 "자아는 어떤 과제이며 만들어내야 할 대상이다(따라서, 이 기질은 예술가나 순교자에게 적합하다. 벤야민이 카프카에게 말하듯, '실패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의 기질이다)." 그리고 자아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늘 너무나 느리다. 이들은 항상 스로에 대해 뒤쳐져 있다(And the process of building a self and its works is always too slow. One is always in arrears to oneself)."  김현승의 시구를 비틀자면, "나는 내게 느리다"가 토성적 기질이다. 그들은 K처럼 마을에는 도착하지만 끝내 성(자아라는 성채)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 페이퍼 또한 아직 종결에 이르지 못한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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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이따가 집에서 퍼갈랍니다. 사진도 그리 많지 않으니..안된다고 하면 안가지고 가고. 흠흠.

로쟈 2006-11-13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될 리가 있나요? 기술적인 거라면 몰라도...

수유 2006-11-1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이번엔 아주 수월하게 옮겼네요.. 사진이 많지 않아서.
그나저나 서재는 리플을 달기위해 꼭 로긴해야 한다는게 넘 불편하군요.. 일부러 서재까지 만들어야 하고..

로쟈 2006-11-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덕분에 '악플'로부터 좀 자유로운 장점도 있습니다(^^;)...
 

결혼식에 갔다가 문학평론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책을 한권 선물받았다. 리차드 세네트의 <현대의 침몰: 현대 자본주의의 해부>(일월서각, 1982)가 그것인데, 거의 25년전에 나온 책이니 절판된 건 당연하고 헌책방에서나 가끔 눈에 띄는 책이겠다(그런데 내 기억에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걸로 보아 80년대 후반에도 드물었던 책이지 않나 싶다). '헌책다운' 이 책에는 초판을 찍은 날짜만이 박혀 있다.

원서는 1976년에 초판이 나온 듯하고 지난 1992년에 장정을 달리 해서 재출간되었다. 국역본은 그 사이에 나온 것인데, 다소 두툼한 책이지만 재번역돼 나왔으면 싶다. '현대의 침몰'이라고 옮겨졌지만 원제는 '공정 인간의 몰락' 정도가 될 듯하고 원래의 부제는 '현대자본주의의 해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사회심리학에 대하여'이다. 1장인 '공적 영역'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데이비드 리즈먼의 <고독한 군중>과 유사한 성격의 책이지 않나 싶다(1950년대에 나온 리즈먼의 책이 훨씬 먼저 출간됐지만).  

 

 

 

 

 

국내에는 리차드 세네트의 책이 더 출간돼 있는데, '세넷'이라고 검색해야 한다. <현대의 침몰> 외에 나와 있는 것으로는 <불평등사회의 인간존중>(문예출판사, 2004),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문예출판사, 2002), 그리고 <살과 돌: 서구문명에서 육체와 도시>(문화과학사, 1999)가 있는데, 모두 눈에 익은 책들이고 <살과 돌>은 특히 (제목 때문에) 벼르다가 끝내 구입하지는 못했던 책이다(품절됐군!). 겸사겸사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공적 영역/공간과 관련하여 물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다. 거기에서 암시받을 수 있지만, '공적 인간'이란 '정치적 인간'이며 '호모 폴리티쿠스'를 뜻한다. 최인훈의 통찰을 빌면, (남한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는 '밀실'만 있고 '광장'은 상실했다는 것. 그것이 세네트의 문제의식이 아닐까 넘겨짚어본다.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는 것 정도로 '공적 인간'의 소임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건 그저 알리바이일 뿐이다. 영어표현을 빌면, 우리의 관심은 '정치(politics)'에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로 확장돼 나가야 하며 우리의 '행위'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바야흐로 대선과 맞물린 '정치의 계절'을 불과 1년 남겨놓고 있다. 우리가 마저 '침몰'하기 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빨리 챙겨두어야겠다...

06.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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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각하는 손과 장인 예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4 14:04 
    리처드 세넷의 <장인>(21세기북스, 2010) 출간 소식의 반가움은 이미 지난주에 포스팅한 바 있는데, 언론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가장 빨리 올라온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는 번역본보다 원서를 미리 구했는데, 내주쯤에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기사를 보니 저자의 3부작 중 하나라고 하는데, 나머지 책들도 기대된다.   연합뉴스(10. 08. 04) '생각하는 손' 장인정신을 찾아서 
 
 
 

오늘은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185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가는 1821년 11월 11일 빈민구제병원의 의사였던 미하일 도스토예프스키와 마리야 도스토예프스카야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그는 1881년 2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해마다 '빼빼로 데이'가 그의 생일이니만큼 기억하기도 편하다. 기념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작가의 초상화로는 가장 유명한 바실리 페로프의 초상화(1872)를 아래에 옮겨놓는다.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별달리 준비한 것도 없어서 도스토예프스키 '입문'으로 읽을 만한 책들을 몇 권 나열해본다. <30분에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가장 쉽고 짧은 입문서가 되겠다(하지만 얄팍한 정보나 나열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문제거리를 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되겠다. 그리고 얀코 라브린과 콘스탄틴 모출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전이다(앙드레 지드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도 시중에는 나와 있다. E. H 카의 전기는 절판됐다). 후자는 세밀한 작품해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교양서를 겸한다. 그리고 두번째 아내였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와 삶을 같이했던 이의 생생한 육성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위대한 건 작가로서이다.

 

 

 

 

어쨌거나 잠시 도스토에프스키 문학에 대해서 명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11월의 하루이다.

06. 11. 11.

P.S. 보다 자세한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는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란 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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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손 2006-11-1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출스키 책에 10월 30일이라고 되어있는 걸 저는 종이에 적어놓아서 로쟈님이 잘못 쓰셨나 잠깐 어리둥절했습니다만 하하 러시아라는 걸 깜빡했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1-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H.카의 전기를 몇 달 전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했다죠.
아, 오늘은 또 키에르케고르가 고인이 된 날이기도 하더군요.
(우연히 YTN 뉴스에서 본 사실)

로쟈 2006-11-1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융아님/ 어디선가 본 사진인데요.^^ 구력 10월 30일인지라 지금의 달력으론 11월 11일입니다. 10월혁명 기념일이 11월 7일인 것도 그 때문이구요...
연랑님/ 카의 전기는 제 기억에 홍성사판도 있고 기린원판도 있지요? 키에르케고르는 요즘 <불안의 개념>을 읽을 만만의 준비를 해놓고 있는데, 시간은 잘 안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