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리뷰를 두 편 옮겨놓는다. 지난주 한국일보에 리뷰가 실렸었는데, 컬처뉴스에도 같은 리뷰가 실려 있길래 모아놓는다. 지난 1월 중순 명품극단(이거 고유명사다!)의 '고골 3부작' 공연이 있었다. <비>, <광인일기>, <행복한 죽음> 세 작품을 묶어서 3부작으로 만든 것이고, 모두 원작은 드라마가 아니라 (단편)소설들이다(<비>는 귀신 얘기이고, <광인일기>는 제목대로 정신병자 얘기이며, <행복한 죽음>은 <옛기질의 지주들>로 국역돼 있는, 먹성좋은 노인네들 얘기이다). 이 '각색'만으로도 새로운 시도인데, 새로운 연극언어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양이고, 그 점이 주목받고 있어서 반갑다. 연출자를 비롯해서 스탭들 가운데 다수가 러시아연극학교 출신들이어서도 그렇다. 사적인 인연을 보태자면, 조연출을 맡은 친구가 모스크바통신에 가끔 등장하던 나의 룸메이트였다. 거의 매일 같이 공연을 보러 외출했었고, 내가 본 공연도 대부분은 그와 같이 본 것들이다(그러니 미리 광고라도 했어야 하는데, 나조차도 공연이 끝난 뒤에야 알게 됐으니!)...  

컬처뉴스(07. 01. 26) 몸, 충동적 에너지의 물화

‘고골 3부작’(명품극단, 김원석 작/연출) ― <비>, <광인일기>, <행복한 죽음> ― 은 ‘연극의 정체성 찾기’란 화두를 다소 색다른 방식으로 자극하는 연극이다. <고골 3부작>은 19세기 러시아의 소설가 고골의 단편소설 세 편을 극화한 연극인데, 주목되는 것은 이 연극이 연극의 정체성 모색에 있어 ‘왜’와 ‘어떻게’란 문제제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연극은 연극과 타 예술매체와의 구별 지점에 대해 파고든 듯 하다. 즉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극 언어로서의 연극 언어에 대한 질문’을 근간에 깔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는 차이의 주장을 통해 생존 근거를 찾기 위한 시도로 읽힌다.

‘고골 3부작’은 무용수에 버금케 훈련된 신체의 배우들이 아크로바틱을 응용한 미장센을 통해 요소요소 신선함을 제공한다. 가면과 인형, 악기 등 오브제의 놀이적 사용은 가벼운 눈요기로 흘러가지만, 강도 높은 신체 훈련의 흔적이 역력한 배우들의 역량이 만들어내는 육체 에너지는 연극적 구조 짜기의 또 다른 방향을 느끼게 한다.

이 단체의 개성이 가장 효과를 드러낸 경우는 이 연작의 첫 번째 공연 <비> ―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세 명의 신학생이 마녀(혹은 귀신)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 ― 다. 비현실적 소재의 환상성이 극의 논리적 해명의 ‘빈틈’ ― 마녀가 신학생의 억압된 성적 욕망의 상징인지 아니면 그 지방 고유의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단순 지시인지에 대한 해석의 유보 ― 을 메워주며, 밤마다 다시 살아나는 처녀 귀신과 그녀의 영혼을 떠나보내기 위한 한 신학생의 장례 치러주기 한판 승부가 팽팽히 펼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극이 신체 에너지의 물리적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길 잃은 청년들의 공포와 절박함을 세 명의 배우가 극장 공간 전체를 원형으로 도는 행위로 전환시킨다. (분장 안 한 맨 얼굴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어 간신히 찾은 집에 묵기를 사정할 땐 여태껏 뛰어온 에너지를 간직한 채 배우 두 명이 다른 한 명의 몸 전체를 들어 그대로 집주인에게 들이밀며 장면을 연결시키는 등 극은 움직임 이전의 충동인 에너지의 물화(혹은 외면화)를 시도한다. 즉 <고골 3부작>의 새로움은 말이 아닌 ‘행위로 이야기 이어가기’를 의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은? ‘고골 3부작’의 가장 취약한 지점은 (이 단체의) 언어에 대한 다소 소홀한 대접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세 작품 중 가장 대사량이 많았던 <광인일기>의 경우 들리지 않는 대사에 극은 나아가는 대신 흔들리며 오브제들의 ‘놀라운’ 사용 ― 눈을 즐겁게 해 주는 ― 의 순례가 되고 만다. 대사가 거의 없거나 혹은 중요 대사 외에는 의미 없는 말로 처리한 <비>나 <행복한 죽음>의 경우 갖가지 소품들은 배우의 신체 리듬에 합세해 고유의 극 리듬을 만들어 간다. (<행복한 죽음>의 중요 오브제인 세 개의 커다란 공은 술단지란 극의 설정과 어우러져 배우들이 공 위에서 이리저리 튀기며 놀 때 인생의 ‘제어되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전달한다).

‘고골 3부작’을 통해 독특한 연극 만들기 메소드를 선보인 이 단체는 작년 객석과 평단 모두에게서 호평을 이끌어낸 박근형이나 이윤택, 김낙형, 김한길의 연극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연극의 생존을 위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듯 하다. 가장 큰 구별점은 개인의 시선이 놓이는 자리에 다수의 배우들의, 상대의(동료 배우이든 관객이든)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예민하게 다듬어진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거르는 ‘막’이 없어져서인지 이 연극은 실험적 극언어들로 넘쳐남에도 전복적인 의미에서 ‘새롭지는 않다’. 오히려 고골 고전으로, 즉 텍스트의 원의미로 회귀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고유의 방법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의 경향을 좇아 비슷비슷한 연극 만들기를 반복하는 우리 연극계를 되돌아보게 하기에 반갑다. 일정한 메소드로서 연극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 단체의 작업이 한국 연극에서 하나의 분명한 목소리가 될 것인가. 프로듀서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한 개인의 예술 세계의 깊어짐으로만 가능한 것일까.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메소드이기에 희망적이지만, 무엇보다 아직은 메소드다.(엄현희 _ 연극평론가) 

한국일보(07. 01. 20) 고골의 광대놀음… 그게 바로 인간세상인걸!

18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내린 극단 명품극단의 ‘고골 3부작’은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연극학도들의 성실한 연구공연이자 도전적인 출사표로 느껴졌다.(지난해 9월 같은 작품이 공연됐으나 당시 출연진의 건강 악화로 2부까지만 공연되고 중도에 막을 내려야 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 3부에 해당하는 <행복한 죽음>까지 보고 나니, 별난 이름의 이 극단이 러시아 연극 전통에 대해 갖고 있는 매혹과 탐구심을 짙게 느낄 수 있다. 원작의 문화적 배경에 해당하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토속적 색채와 질감을 재현하고, 러시아의 민속악과 정서를 충실히 옮겨놓은 고골 3부작은 <비이> <광인 일기> <행복한 죽음>(원제 <옛 기질의 지주>) 등 세 단편에서 줄기를 취해 왔다.

고골의 소설들은 본질적 속성상 소극(笑劇)으로의 장르 전환이 용이하다. <외투>와 <코>는 이미 2005 2인극 페스티발에서 연출가 박근형과 반무섭에 의해 공연됐다. 해외 연극제 출품 목록에서도 고골의 각색물은 간간이 눈에 띈다.

고골에 의하면 인간은 그다지 품위 있거나 정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상황과 사회적 환경에 짓눌려 있으며, 게걸스레 먹고, 배설하고, 침 튀기고, 땀에 절어 번질거리고, 겁에 질려 다리나 떨어대면서도 한편으론 발정이 나 날뛰는 존재들이다. 연극 고골 3부작은 이러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소극적 본질을 취하는 한편 소극에 걸맞는 곡예적 연기, 인형극, 광대 연행 등 다양한 쇼 비즈니스를 선보인다. 이는 신체적 기량을 갖춘 배우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희극 연기에 자질을 보인 주용필, 손경숙과 일인극 <광인 일기>를 그로테스크한 개성으로 끌고 간 조하석 등 눈여겨볼만한 배우들이 이 극단에는 포진해 있다.

문화에도 본격 펌프질 직전의 마중물이 있다. 우리 삶의 마른 대지를 적시기 위한 예술가들의 쉼 없는 펌프질을 생각해 본다. 이제 이 땅에 돌아와 연극을 막 시작하려는 이 젊은이들에게 러시아 연극은 우리 연극의 수원지에 숨은 물을 퍼 올리기 위한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돼야 한다.

그 동안 선학들이 걸어온 러시아 문학을 향한 흠모와 근대 연극의 심리적 사실주의 연기 방법론에 거리를 두고, 메이어홀드의 신체 역학과도 다르며, 러시아의 민속 문화와 대중극 전통의 원형을 탐구하는 듯 보이는 이 극단의 독자적 방향성이 다음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들려줄까. ‘소극’과 ‘광대극’이라는 만국 공통어 안에서 극단의 방향성을 잘 수렴해낸 고골 3부작 이후가 궁금해진다.(극작ㆍ평론가 장성희) 

07. 01. 28.

P.S. 참고로, '공식적인' 공연 소개를 옮겨놓는다.

니꼴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은 그리바예도프, 뿌쉬낀으로 대변되는,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고향 우크라이나 이야기, 수도 뻬쩨르부르크 이야기, 러시아 관리의 세계, 러시아 지방의 삶, 종교적 성찰 등, 폭넓은 주제를 통해 혼란하고 무질서한 삶의 실상을 때로는 날카로운 현실 바판과 고발의 형태로, 때로는 통렬한 풍자의 스타일로 그려내어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토대를 닦은 작가이기도 하다. 고골은 이러한 사회성 짙은 주제를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에 기반을 둔 언어로 그려나가며 환상적 리얼리즘, 일명 ‘판타스마고리야’라는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며 러시아 문학사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는 자칫 센티멘털적 습성으로 빠질 수 있는 작품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극복하며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확대하고 있다. 그의 대표 희곡 작품인 ‘검찰관’은 물론이거니와 산문 작품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현대 연출가들의 무대적 영감의 재료가 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명품극단 창립작품인 고골 삼부작 시리즈는 한국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초기 그의 우크라이나 이야기 시리즈 중의 하나인 ‘비이’,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단편중의 하나인 ‘광인일기’, 그리고 죽음과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 감동적인 ‘행복한 죽음’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봄’, ‘여름’, ‘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이는 삼부작 시리즈를 하나의 통일 된 작품으로 이루게 하는 역할을 한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 음악가 프라꼬피예프, 러시아의 전통 민속음악과 로망스 등, 낭만과 열정의 대명사인 러시아 음악을 바탕으로 역동적인 배우의 신체연기가 어우러져 새로운 연극세계를 창출을 기대한다. ‘비이’와 ‘광인일기’와 는 이미 러시아 국립 연극원 기티스 극장과 모스크바 슈킨 연극대학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러시아 관객들로부터 한국연극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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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예고한 대로, 필름2.0에서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씨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최근간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에서 '셀프인터뷰'를 싣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장시간 인터뷰 대상이 된 건 처음이 아닐까도 싶다. 이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고 내가 자꾸 그의 책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라고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한국사회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고, 많은 걸 염려하게 된다. 혹 이미 많은 걸 알고 또 염려하고 계신 분들은 사서 그냥 꽂아두시든가 다른 분에게 선물하시라. 그래야 이런 책이 더 나올 수 있고, 이런 인터뷰어가 밥먹고 살 수 있다. 나는 어제 책에 실린 이상호 기자와의 인터뷰를 읽었다.

 

필름2.0(07. 01. 26) 인터뷰의 사나이, 지승호

국내 유일의 전문, 전업 인터뷰어로 불리는 지승호가 통산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를 선보였다. 정치인에서부터 사회 운동가, 언론인, 영화감독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취재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을 얻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인터뷰의 사나이 지승호를 만나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의 정체성과 고민에 대해 물었다.

지승호ㅣ<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라잉 넛, 그들이 대신 울부짖다>(공저) <사회를 바꾸는 아티스트> <다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우리가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마주치다 눈뜨다> <유시민을 만나다> <7인 7색> <감독, 열정을 말하다> <금지를 금지하라>



2002년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단행본 인터뷰집 작업을 시작한 이후 4년 만에 열 번째 결과물 <금지를 금지하라>를 내놓았다. 부지런한 건가 욕심이 많은 건가?
욕심이 많으니까 부지런한 거 아니겠나. 나야 전업 인터뷰어인데 이것 안 하면 먹고 살 게 있어야지.(웃음) 권수를 세면서 인터뷰집을 낸 건 아니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열 번째 책을 내고 보니 이제야 유아기를 벗어나 소년기 정도에 이른 것 같다. 한 백 권 정도에 이르면 많이 깊어졌다, 성숙해졌다 말을 들어도 부끄럽지 않겠지.



백 번째 인터뷰집? 정말 욕심도 과하다.
그 정도는 써야 딸내미 대학교도 보내고 시집도 보내고…. 난 이거 아니면 먹고 살 수단이 없다니깐 자꾸 그런다.

과연 전문 인터뷰어라 그런지 질문에 응하는 태도가 도전적이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전문 인터뷰어라는 감투는 내 말이 아니다. 사실 매우 가치중립적인 용어라 문제가 될 건 없지만, 기자 분들이 듣기에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빤히 기자라는 직업이 있는 상황에서 네가 뭔데 도대체 전문 인터뷰어라는 거야, 라고 생각할 것 같고. 아닌 게 아니라 인쇄매체가 내 작업에 대해 무관심한 건 사실이다. 벌써 열 번째 책인데 자칭 진보 매체들조차 관심 있게 지켜보려 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전문 인터뷰어라는 말은 출판사에서 홍보를 목적으로 아예 책에 박아 넣기도 하는데, 괜히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스스로 ‘전업 인터뷰어’로 자칭하고 다닌다. 그럼 좀 겸손해 보이려나 싶어서.

결국 인터뷰라는 작업이 전문적인 영역일 수 있느냐는 고민인 것 같다.
전문적이라는 말에 좀 거부감이 드는 게,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업에 대한 접근성을 차단하고 장벽을 쌓는 것 같다. 헌법에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돼 있지 않나. 언론의 자유란 뉴스매체를 위해 보장된 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열려 있는 기본적 권리다. 누가 인터뷰를 하든 문제될 게 없다. 전문성을 해친다고 생각지 말고 좀 더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정직하게 보도하고 인터뷰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실상 그 언론의 자유라는 게 뉴스매체들에 한해 허용돼 있지 않았나. 얼마 전 한 독립영화 감독은 시위현장을 카메라에 담다 시위대로 몰려 연행되기도 했다. 당신은 일종의 언론 권력을 해체한 꼴이다. 주류언론의 미움 혹은 무관심을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건데, <감독, 열정을 말하다>를 내고 그나마 자부심을 가졌던 부분이 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취재원과 접촉할 때, 그 사람을 만나려면 자신이 속해 있는 매체의 권위가 있다든지 기자의 명성이 대단히 뛰어나다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전업 인터뷰어로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대중적인 명사가 아닌 이상 취재원을 섭외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 언론매체와도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김지운 감독이 내 진심을 이해하고 작업에 동참해 “좋은 만남이었다”는 평가를 해준 건 정말 고무적이었다. 김지운 감독에 대한 책이 얼마 전에 나왔는데, 책에 넣을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는 출판사의 말에 “내가 할 이야기는 지승호와 다 했으니 그 인터뷰를 책에 넣어 달라”고 했단다. 결국 <감독, 열정을 말하다>에 들어갔던 인터뷰를 50매 분량으로 줄여서 건네줬다. 주류언론의 기자가 아니더라도 좋은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건 역으로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꼭 주류언론의 기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인터뷰라는 작업 자체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누군가 이번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와 그간의 작업을 극찬하는 기사를 썼는데, 첫 번째 댓글을 보니 “전문 인터뷰어? 얘는 그냥 남이 하는 말 그대로 옮겨 적어서 책으로 만드는 것뿐 아닌가?”라고 썼더라. 인터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면 자기가 당해보기도 많이 당해보고, 해보기도 많이 해봐야 한다. 최종적으로 인터뷰가 정리돼 나올 때 조사 하나 잘못 붙이면 이야기의 뉘앙스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지 않나.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아, 이건 내가 한 말이다”라며 만족할 정도로 그 내용을 정리하는 일은 진정 어렵고 고된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내가 정말 여태껏 창조적인 면 없이 그저 남의 말을 기록하기만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워낙 주류언론의 시선이 내 작업에 대해 냉담하다보니, 그렇게라도 생각 안 하면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내가 부족하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일종의 피해의식 같이 들린다.
피해의식 많다. 운동선수를 보면 몸 전체의 밸런스가 좋다기보다 어느 특정부위를 훈련으로 혹사시켜 일종의 기형이 된 사람들이 많다. 발레리나 혹은 축구선수의 발을 보면 누구나 감탄하고 박수를 보내지 않나. 하지만 내가 하는 작업 같은 경우는 아무리 진심을 가지고 노력해도 그게 뭐냐고 폄하해버리면 그만이다. 증명할 수 있는 게 없다. 가치판단의 영역이니까.

그건 변명 아닌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변명은 굉장히 중요하다. 변명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그만큼 고민이 없다는 의미다. 일단 변명을 시도한다는 건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거 아닌가. 변명을 하면서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거다. 그게 첫걸음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신이 하는 인터뷰 작업이 결국 ‘변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적인 장을 마련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 욕을 하더라도 최소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나서 평가를 하자는 거다. 주류언론을 통해 노출되는 인터뷰 기사들은 대부분 매체의 정치적 지향점이나 목적을 위해 의도를 가지고 악의적으로 편집되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백 마디를 하면 그중에 전체적인 맥락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엉뚱한 한 마디를 끄집어내 헤드라인으로 뽑는다. 그런 기사를 통해 어떻게 한 인간을 평가할 수 있겠나. 내 인터뷰 작업은 있는 그대로 한 인간의 생각과 모습을 드러내 세상과 정당한 소통을 하게 하는 데 그 가치를 두고 있다. 꼭 변명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언론이나 대중에 의해 정신적 상흔을 입은 사람들을 만나 “당신의 진심을 이해한다”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참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신해철 같은 예술인부터 김규항, 홍세화, 강준만, 진중권, 이상호, 손석희 같은 지식인과 언론계 인사들, 그리고 유시민, 김근태, 강금실 같은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당신만큼 폭넓은 스펙트럼의 취재원을 만난 인터뷰어도 드물 것이다. 신기한 점은 그들 모두 당신에게 각별한 신뢰를 가지고 두 번, 세 번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한다는 거다. 비결이 뭔가?
예전에는 농담처럼 내 인터뷰어로서의 장점이 비굴함이라고 했다. 내가 인터뷰를 하는 대상들이 주로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그들을 만나기 전에 굉장히 많은 노력과 고민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내 인터뷰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뺏는 것 아닌가. 보통 며칠에 걸쳐 질문지를 만드는데, 꼬박 두 달이 걸리기도 한다. 관련된 모든 인터뷰 기록과 보도 내용, 취재원이 만든 영화 혹은 책을 몇 차례에 걸쳐 읽고 분석한다. <감독, 열정을 말하다>의 두 번째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박찬욱 감독을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지금까지 만든 질문만 200개다. 이 전에 봉준호 감독을 만났을 때는 140개 정도의 질문을 준비했었다. 그렇게 노력을 들이면서 결국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왜곡 없는 그대로를 독자에게 전달하자는 것 하나뿐이다. 다행히 번번이 진심이 통해 ‘최소한 이 사람은 기사를 위해 취재원을 이용하지는 않겠구나’라고 생각해주시는 것 같다.

한정된 지면에 압축된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의 고충도 있다.
나도 기자생활을 해봤다. 하지만 그런 기사가 그 사람의 진의를 왜곡 없이 전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굳이 매체에 소속된 기자가 되려 하지 않는 거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취재원의 입을 통해 들은 다음 그게 마치 그 인간의 가치관인양 말하는 기자들이 많은데, 그건 정말 최악의 인터뷰다.

당신의 정치적 정체성이 궁금하다. 언뜻 진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김규항 선생이 나보러 “너는 거북이처럼 점점 왼쪽으로 나아간다”고 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 스스로를 딱히 좌파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거다. 아마 난 자유주의자에 가까울 것이다. 남에게 피해 안 주면 사회나 국가가 개인에게 간섭하는 걸 극렬하게 반대하는 편이니까. 그러고 보면 나야말로 건전한 보수 쪽에 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한홍구 선생을 만났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젠다가 모두 우파적인 것들이라고 하더라. 경찰이 사람 잡아다가 함부로 때리지 말라는 거, 남 속이지 말고 도덕적으로 살자는 게 좌파적인 마인드가 아니지 않나. 자본주의 사회가 건전하게 돌아가려면 가진 사람들이 더 모범을 보여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 그거야말로 ‘진짜’ 보수우파가 해야 할 주장의 정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진보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위해 애쓰며 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진보적인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을 주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며 기록하게 되는 것이겠지.

한 번 인터뷰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듣는 건 무엇 때문인가?
진중권, 강준만, 홍세화 같은 지식인들을 매년 만나 인터뷰하고 기록해도 꽤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거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담론 생산자들을 만나 그 내용을 성찰하고 고민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의미에서 말이다. 큰 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이란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부분과 불합리한 모순들, 착취와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그들의 기록이 꾸준히 모이면 세상을 바꾸는 데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는 당신에게 단순히 수치상의 의미 이상으로 다가올 것 같다.
물론이다. 그래서 가증스럽게도 셀프 인터뷰까지 끝에 싣지 않았나.(웃음) 이번 책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회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오해받고 마녀사냥 당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송가다. 개인적으로 이상호 기자 인터뷰를 제일 잘 했다 싶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에게 바치는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삼성이라는 권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면서도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번 출판기념회 때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와 인터뷰하기로 약속해놓고 굉장히 많이 후회했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어려운 인터뷰였다. 워낙 이상호 기자가 예민했던 시기니까. 그런데 그때 자신이 했던 고민들이 기록으로 남은 걸 보니 정말 뜻 깊게 생각된다며 고맙다고 하더라. 개인이 어떤 한 시점의 생각과 고민을 300매 분량의 글로 정리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 난 그걸 공짜로 해준다. 얼마나 좋나.(웃음)

그런데 당신의 인터뷰 작업으로 세상을 바꾸기에는 버겁다고 생각지 않나? 누가 요즘 정치인 인터뷰를 읽고 싶겠는가.
‘아찔한 소개팅’같이 돈과 외모로 모든 걸 판단하는 얄팍한 상술의 프로그램을 봐도 이젠 예전처럼 흥분하거나 욕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모든 게 무기력해지고 의미 없어진 세상이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최근에는 좀 더 대중 친화적인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 한다. <감독, 열정을 말하다>도 그런 맥락의 작업이었다. 영화감독을 만나 단순히 영화뿐만 아니라 스크린쿼터, FTA 등 사회 전반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게 영 엉뚱한 작업이 아니라는 희망과 확신이 생겼다.

그럼 당신의 대중 친화적인 다음 인터뷰 상대는 누군가?
일단 <감독, 열정을 말하다>의 두 번째 시리즈를 작업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과는 이미 약속을 잡았고, 개인적으로는 홍상수 감독과 김기덕 감독을 만나보고 싶다. 다른 계획도 하나 있는데 대중가수와의 인터뷰를 구상 중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책 한 권을 통째로 신해철과의 인터뷰로 꾸며볼 생각이 있다. 그와는 전에도 한번 인터뷰를 했었다. 정말 재미있는 아이콘 아닌가? 마광수 교수는 자기 홈페이지에 독자가 올린 누드 사진 때문에 조사를 당했는데, 신해철은 공중파에 나와서 “나는 여고생 교복을 트렁크에 넣고 다니면서 심지어 사용한 적도 있다”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자연스레 웃어넘긴다. 게다가 그의 통찰력과 화려한 언변을 봐라. 어떤 상황에서 분야를 막론한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보통 내공이 아니다.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다.

서점에 가면 책의 성격별로 여러 가지 코너가 나뉘어 있다. 당신의 책들은 그중 어디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역시 사회과학 코너가 가장 가깝지 않을까. 사람들에 관한 지난 기록이 인문학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지금 현재 생각하고 있는 문제의식들에 대해 기록하는 것보다 더 인문학적인 게 어디 있나(*그런데 왜 '사회과학 코너'에 가야 하나?). 옛날 글을 뒤져 현재의 담론을 생산할 게 아니라,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우선이다. 사람들이 그 중요성에 대해 좀 더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누구나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왔지만, 오히려 남의 이야기는 더 안 듣게 된 것 같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세상이다. 남의 이야기 좀 들어보자. 그의 온전한 의견과 생각을 읽고 듣자. 그리고 평가하자. 그리고 판단하자. 그게 옳다.(인터뷰: 허지웅 기자)

07.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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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7-01-28 00:12   좋아요 0 | URL
저도 필름 2.0에서 봤어요.감독 ,열정을 말하다도 아직 다 읽지 못하고 있네요.흑흑

로쟈 2007-01-28 17:14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감독>은 저도 아직 못읽어봤습니다. 책은 그냥 사서 표지만 읽어도 좋은 거죠.^^
 

'정보바다'를 돌아다니다 보면 의외의 문서들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알다시피 얼마전 한겨레에 '인터넷 서평꾼'에 관한 기사가 난 바 있는데, 돌아다니다 보니 그 '아류' 기사도 떠 있는 게 보인다. '로쟈'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자료'로 옮겨놓는다(국제신문은 부산의 지역신문 아닌가?). 그래도 로쟈가 올려놓은 글 몇 개 정도는 읽어본 듯하여 반갑다.

국제신문(07. 01. 23) 정보바다의 등대 인터넷 서평꾼

로쟈! 누구더라? 고개를 갸웃 하실테죠. 책 좀 읽은 분들은 열혈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떠올리거나, 러시아 출신 귀화인 박노자를 연상하겠죠. '도덕경'을 쓴 노자(老子)와도 이름이 비슷하군요. 하지만 로쟈는 혁명가나 철학자가 아닌 '살인자'의 이름입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 로쟈라네요.

이 로쟈가 요즘 책림(冊林) 고수들이 득실하는 인터넷 서평계를 평정하고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진상 확인을 위해 다음카페 '비평고원'에 들어가보니, 과연! 듣던대로더군요. '비평고원'에는 로쟈 외에도 폭주기관차, 소조(小鳥), 쌍수대인, 로카드 같은 고수들이 한 영역을 구축하고 일합들을 펼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로쟈는 단연 도드라집니다. 식견은 박사급이고(*박사에게 '박사급'은 뭔가?) 순발력은 전광석화급이며 필력은 기자들을 주눅들게 합니다.

로쟈가 다루는 책은 주로 인문 교양서로, 국내외 온·오프라인을 망라하고 신간 뿐만 아니라 관련서적까지 좍 펼쳐냅니다. 책 속의 오·탈자를 찍어내는 건 기본이고, 번역서의 촌스러움과 상스러움, 국내외 인문학계의 동향과 지평까지 훤히 꿰고 있어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죠.

지난 19일 로쟈가 올린 '지젝이 추천하는 라캉 필독서'란 글을 잠깐 엿볼까요. '… 오늘 아마존에서 온 소포를 뜯어 보니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2007)가 들어 있다. 별로 크지 않은 포켓북이다. …라캉에 대해서라면 '에크리'와 '세미나'를 읽어야 한다. 지젝의 권고는 반드시 둘다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을 겹쳐서, 잇대서 읽어야 하다. 사위인 밀레르가 편집한 라캉의 '세미나'는 국내에 단 한 권도 출간돼 있지 않지만, 영어로는 1~2년의 터울을 두고 계속 번역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장 최근에 나온 건 '세미나7: 정신분석의 윤리'(2006)이다. …국내엔 몇 편의 글이 '욕망이론'(문예출판사·1994)으로 번역돼 있으나 불어본 '에크리' 이상으로 읽기 어렵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얼마나 경쾌하며 이해하기 쉬운가!'

이런 식입니다. 식견과 정보 없이는 쓰기 어려운 글이죠. 신상 정보를 캐보니, 로쟈는 1999년부터 인터넷에 글을 썼고,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서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있더군요. 누군가 그의 독서(도서)편력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더군요. "보수만 두둑이 준다면 앉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책 이름을 적어나갈 수 있다."



로쟈를 비롯한 인터넷 서평꾼들은 정보의 바다를 비춰주는 등대가 아닐까요. 전문가급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자신의 이름은 감춘 채, 지식 공유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으니까요. 이들 서평꾼은 책벌레겠지요. 책벌레라고 하니 실학자 이덕무가 떠오릅니다. 이덕무 역시 지독한 책벌레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 불렀는데, 그 말을 들은 이덕무는 '옳거니'하고 그걸 자호로 삼아버렸죠. 이덕무의 독서벽(癖)은 로쟈 같은 인터넷 서평꾼들보다 한수 위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추운 겨울날 이덕무는 얼어죽을까봐 '논어'를 병풍 삼아 외풍을 막고, '한서'를 잇대어 이불처럼 덮고 잤다고 하지요.



후대의 사가들은 '간서치'를 조롱하기는 커녕 진정 인간이 되는 길을 걸었다고 평합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책을 읽고 쓰서 전한 웅혼한 독서 전통이 곧 오늘날 지식문명의 바탕이 되고 있으니까요. 인터넷 서평꾼들이 자기 영역에서 등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전통의 소산이 아닐까요.(박창희 기자)

07. 01. 27.

P.S. 기자가 '간서치' 이덕무와 비교해준 것은 과분한 일이다.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은 나로선 아직 꿈꾸기 어려운 경지이다(나는 쿠션에서 이불 제대로 덮고 잔다). 그걸 이해해줄 만한 사람도 주변에 없고. 다만, 책에 파묻혀 죽을 거라는 애기는 곧잘 듣는바 그 정도의 운명이나 꿈꾸는 정도이다. 여하튼 정보바다 노예선의 벤허처럼 열심히 노젓는 로쟈 정도를 자임하고 있었는데, '정보바다의 등대'라고 평해주는 분도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외로운 밤배들'은 다들 안녕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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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7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2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예, 기억납니다. 맥베스 때문에 기억나는 것인데요, 시간이 너무 지체 되어 비공개 작업실로 옮겨두었습니다. 언제 또 강의를 할 기회가 있으면 해치울 수도 있을 텐데요--; 암튼 소리없이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물론 별일없구요(아니면 이렇게 떠들지 못하겠지요^^) 다만, 여유가 좀 없는 게 불만일 따름입니다.^^;

다크아이즈 2007-01-2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로쟈님이로세! 기자가 혹 알라딘 열혈분자?

로쟈 2007-01-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 아니라 '비평고원'에 들러본 것 같습니다...

yoonta 2007-01-28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으로 로쟈님이 매체에 계속 노출되는거 저는 그다지 달갑지 않네요. 생각지 않은 역풍이나 맞지 않으실까 은근히 걱정됩니다. 유명세를 타게 되면 좋은 일도 생기지만 안좋은 일도 동시에 생기기 마련이니..

paviana 2007-01-2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yoonta 님 말씀처럼 안 되었으면 좋겠는데...걱정많은 나그네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게 하시면 안됩니다.

로쟈 2007-01-2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걱정을 끼쳐드리고 있군요.^^; 한데, 비공개 활동을 하지 않는 한, '노출'은 불가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바람은 저 같이 '뻘짓'하는 분들이 더 많아져서 제가 지워지는 건데요, 알라딘에서 간혹 제가 '배신감'을 느끼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저 혼자 '책에 미친 바보' 혹은 '두더지' 노릇 하고 있으니까요.--;

2007-01-2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28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빨리 작가 되십시오! 제가 '해설' 써드리겠습니다(저렴하게!).^^

마늘빵 2007-01-2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여기저기 많이 뜨는데요? ^^ 이 기사는 좋군요! 맘에 듭니다.

클리오 2007-01-2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더욱 알려지는건 좋지만, 로쟈님은 숨겨놓고 싶어요. ㅋㅋㅋ 모쪼록 강건하시길, 가능한만큼 님의 길에 동참하게 될 수 있기를... ^^

Runa 2007-01-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지역의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군요. 괜히 흐뭇^^
만고불변의 진리, <좋은 건 누구나 안다>는 것.
1000명 중 한명으로서 응원해요.

로쟈 2007-01-28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제가 쓴 걸 직접 인용까지 해놓아서 놀랐습니다.^^
클리오님/ 숨어있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다 들통나버렸어요.^^;
horsain님/ 부산에 게시는군요. 며칠새 즐찾이 1명 늘었는데, 혹 부산분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놔키스트 2007-01-2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을 등대 삼아 밤바다 안 헤매고 있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응원을 보냅니다..(앞으로도 열심히 노 저어주십사고 부담도 아울러...^^)

다락방 2007-01-2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프락사스님 말씀처럼 이 기사는 퍽 맘에들어요 :)

깽돌이 2007-01-2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커가 쓴 글인줄 알았습니다.조심하세요,크크.

로쟈 2007-01-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필라님/ 감사. 이왕이면 같이 저으시죠.^^
다락방님/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깽돌이님/ 그래도 드러내놓고 쓰는 '스토커'라면 무서울 건 없지요.^^

글샘 2007-01-30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라스콜리니코프가 로쟈였군요. 그놈이 나쁜짓하고 노예선을 타고 있단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노 열심히 저으시길...

로쟈 2007-01-3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그만 저으란 말씀들은 안 하시는군요.--;

딸기 2007-01-30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하하하
'박사에게 박사급' 넘 웃겨요 >.<

그런데 등대가 어떻게 노를 저어요
그냥 계속 비추고 계셔요

로쟈 2007-01-30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10년쯤 전에 '박사급'이란 얘기를 들었으면 나았을 텐데요.--;
글구 등대는 페달 동력이랍니다.^^;
 

지난주 문학 신간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이다. 나는 지난주에 구내서점에 들어와 아직 서고에 있던 책을 사들고 왔다. 윤대녕의 작품들을 찬찬히 따라 읽어온 건 아니지만 짐작에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집이 될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윤대녕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라고 적었지만, 알라딘의 착오인 듯하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제비를 기르다>는 다섯번째 소설집이다. 지난 94년 <은어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이 나온 후 12년이 지났으니까 적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작이랄 수도 없겠다. 중간에 장편소설들과 산문집 등이 끼여 있어서 많게 여겨졌었나 보다.

두번째 소설집 <남쪽 계단을 보라>(세계사, 1995/2003)에 이은 세번째 작품집은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생각의나무, 1999; 양장본 2001/2005)이며, 네번째가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 2004)이다. 나는 둘러보니 두번째, 네번째 작품집을 안 갖고 있는데, 언제 한번 모아놓고 통독해볼 생각은 있다. 그의 장편소설들을 나는 읽은 바 없지만(<은어낚시통신>에서도 강한 인상은 받지 못했었다) 견문에 그가 작가로서 더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건 중단편들에서가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나온 소설집을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이고.

알라딘의 표준적인 소개에 따르면, "이번 소설집은 태어나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인간사에 대한 포용 혹은 긍정의 시선으로 충만하다. 수록된 여러 작품에 죽음을 앞둔 인물이 등장하지만('탱자', '제비를 기르다', '편백나무숲 쪽으로') 그들을 감싸고 있는 소설의 정조는, 슬픔은 슬픔이되 어둡지 않고 환하다. 초기 윤대녕 소설을 설명해주던 '감각'과 '내면'의 세계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틋한 시선으로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런 면에서도 그의 작품세계가 보다 성숙한 단계로 접어든 게 아닌가 싶다.

이번주 언론리뷰들에서 다들 크게 다루고 있지만 특히 동아일보에는 작가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기에 잠시 옮겨온다(아무래도 작가의 육성이 어필하는 바가 있으므로). 인터뷰어는 김지영 기자이다.

-‘윤대녕 소설’ 하면 비현실적이면서 묘하게 연애감정 생기는 여성이 떠오르는데, 이번에는 별로 없네요.

지난해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요. 어머니 곁에 있다 보니 여자의 일생이 뭘까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을 돌보고, 나이 들어가고…. 막연했던 여성의 이미지가 피부로 느껴졌달까.” (‘제비를 기르다’의 어머니는 철마다 가출해 길에서 몸으로 구르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나이를 먹고, ‘탱자’의 고모는 첫사랑의 상처를 안은 채로 굴곡진 삶을 살아간다).

-예전 작품엔 구차한 생활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하늘하늘한 여성들이 대부분인데 이번엔 여자들이 그악스럽게 집안을 꾸려갑니다.

몇 년 전부턴 인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렇게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고. 앞서 나온 책들은 여성 독자들한테서 종종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길 들었는데, 최근작들은 여성 독자의 호응이 많아요. 여성에 대해 알기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나 봐요. 나뿐 아니고 모든 남성이….”(웃음)

-한편으로 고단한 삶이면서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성찰을 발견합니다.

“‘탱자’의 병든 고모는 실제 고모님의 부음을 듣고 쓴 작품이에요. 큰 충격이었지요. 죽음에 대한 어렴풋한 관념이 육화했다고 할까요. 인생과 인간에 대해 좀 더 넓게 생각해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등단 17년에 많은 작품을 냈지만, 윤대녕 하면 첫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손해 볼 때가 많다는 느낌도 들어요. ‘은어낚시통신’을 보면 저 스스로도 신통하다 싶긴 한데,(웃음) 문장이 거칠고 구조도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눈에 띄고…. 작품집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지금껏 그 인상이 이어지네요.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해요. 그때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평이 나왔는데, 내가 그동안 많이 걸어왔지만 결국 그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 그건 결국 내가 추구해 온 철학적 구현이라는 생각.

-여전히 사람들은 길을 떠나네요. 그 여정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고….

로드 로망! 난 이게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길을 떠난다는 게 결국 살아가는 것이고, 죽음을 준비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하면, 익숙했던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모색을 하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죠.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

짧은 인터뷰이긴 하지만 '윤대녕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요약해주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가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지나가는 자'들이다. "길을 떠난다는 게 결국 살아가는 것", 거꾸로 말하면 살아간다는 게 결국은 길을 떠난다는 것이라는 게 그의 '작가적 세계관'이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길(떠남)은 삶의 비유일 뿐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이 비유가 갖는 시적/서정적 울림이 내가 생각하기에 '대녕본색'에 해당한다. <제비를 기르다>에 실린 중단편들은 그 '대녕본색'을 유장하고도 아득하게 그려보이기에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내가 동의하는 세계는 아니지만 충분히 현혹될 만한 '아름다움'이 거기엔 펼쳐져 있다.

07. 01. 27.

P.S. 소설가란 직함을 갖고는 있지만, 내 식으로 분류하자면 윤대녕은 '시인'에 속한다.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시적인 것'을 쓰는 시인 말이다. 작품집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그는 그 '시적인 것'의 일단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삼년 만에 다시 소설집을 낸다. 각별히 고독을 챙기며 살았던 지난해에 여러 편의 중단편을 쓸 수 있었다. 자정에 작업실에서 퇴근할 때 막사발에 냉수를 받아놓고 아침에 출근하면 그것을 마셨다. 하루하루 그 일을 되풀이하면서 내가 과연 삶의 한가운데로 가고 있나를 산짐승처럼 틈틈이 살폈다. 길을 잃으면 안되겠기에 보다 숨을 낮추고 되도록 말을 꺼렸다. 그렇게 생의 한가운데를 어두운 숲처럼 더듬더듬 관통하면서 나는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을 자주 체험했다. 삶의 정체는 결국 그리움이었을까?(...) 그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들을 밖으로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또한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삶이라는 '어두운 숲'을 관통해나가는 '산짐승'이다. 그리고, 그에게 소설쓰기란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그리움을 밖으로 떨쳐내는 일이다. 그것이 소설적인 것이 아닌 시적인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그가 장편소설보다 중단편소설에서 그만의 세계를 더 잘 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해서, 어지간한 시집들 대신에 <제비를 기르다>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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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1-27 16:07   좋아요 0 | URL
저는 노골적으로 '윤대녕빠'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독자군에 속합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속절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병을 앓으면서도 쉽사리 그의 책을 덮지 못하겠더라구요. 시적 문체로 먼 곳의 것들을 기억하고 호명하는 소설가들 중 단연 백미는 윤대녕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편백나무숲 쪽으로>와 <탱자>는 계간지를 통해 읽었는데 서둘러 소설집도 사 둘 생각입니다.

로쟈 2007-01-27 16:04   좋아요 0 | URL
줄여서 '윤빠'라고 하더군요.^^ 어느 기자의 서평대로 서너 번은 물리지 않고 읽으시겟습니다..

읽는기계 2007-01-27 16:29   좋아요 0 | URL
기자가 깜빡한 모양인데 <제비를 기르다>는 다섯번째 소설집입니다. 제가 알기론 <남쪽 계단을 보라>가 두번째 소설집입니다. 윤대녕이 시인으로 분류된다는 데 동감입니다. 소설에 취한다는 것이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드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윤대녕의 소설을 읽을 때 작가와 사적인 만남을 갖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소개하신 작가의 말을 보니 <제비를 기르다>는 수도생활을 한 산짐승의 자취를 담아낸 소설인 듯 하군요. 얼른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언젠가 저 산짐승의 성차와 '로드 로망'의 미학 사이 함수관계를 푸는 것이 저 혼자만의 과제입니다.^^

로쟈 2007-01-27 16:33   좋아요 0 | URL
알라딘의 착오구요, 저도 왠지 작품집 수가 좀 적다 싶었습니다.^^

수유 2007-01-27 18:08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의 소설집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옛 팬으로서 좋은 평을 받는 소설집이기에 더 반갑군요^^ 작가의 말도 그럴듯 합니다. 제 손이 움직이기에 말이죠.

드팀전 2007-01-28 12:02   좋아요 0 | URL
저도 옛날에는 윤대녕을 좋았했었지요.지금은 좋고 말고 할것도 없이 .... 90년대 그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지금은 잊혀진듯 또 기억되고 그런 상태인가 봅니다.책장을 바라보면 윤대녕 소설집을 살펴봤는데..^^ 꽤나 많네요.<은어낚시><지나가는자의 초상><누가걸어간다>..거기에 98년 현대문학상,2003년 이효석문학상.윤대녕이 상을 받아서 마치 윤대녕 책 같군요.에 서있군요.그러나 역시 제가 윤대녕에게 꼽힌 건 96년 이상문학상의 <천지간>이었습니다.TV문학관에서도 했었는데..심은하가 주인공했다니까요.^^

sommer 2007-01-28 15:52   좋아요 0 | URL
그의 로망의 '에로스'를 더불어 좋아했었는데요, 여행하는 자는 에로스적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백 석의 어느 시구절과 더불어서 말이죠...

로쟈 2007-01-28 17:12   좋아요 0 | URL
'지나가는 자', '지나가고 싶은 자'들은 매혹될 만한 작가죠. 저는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기로 했습니다...

다락방 2007-01-28 22:3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제 신문에서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고 살까 말까를 망설였는데, 로쟈님의 페이퍼를 보니 구입해도 무리가 없겠네요 :)

비로그인 2007-01-31 13:49   좋아요 0 | URL
저는 윤대녕작가가 세상에 발표한 작품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매번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한권 읽고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하다가 다시 작품집이 나오면 사고 말았죠. 그 문체의 매력을 쉽게 잊을 수가 없어서요.
작품들과 작가의 사진이 영 매치가 안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제겐 윤대녕과 은희경이 그렇더군요. 그 섬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 인지... 이 책도 결국은 사게 되겠네요.

로쟈 2007-02-01 00:0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로님을 보시길!
아로님/ 윤빠시군요!^^
 

'쿤데라와 소설의 지혜'란 주제로 읽을 대목은 쿤데라가 지난 85년 봄(그러니까 22년 전이군) 예루살렘상을 수상하면서 한 연설 '예루살렘 연설: 소설과 유럽'의 한 대목이다. 이 연설은 그의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책세상, 1990/2004)에 제 7부로 들어가 있다(나는 국역본을 여러 권 소장하고 있는데, 지금 곁에 있는 건 1994년판이다). 그 중에서도 주로 맨 마지막 문단에 초점을 맞출 예정인데, 그건 이 대목이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민음사, 1996)의 에피그라프(제사)로도 쓰였기 때문이다(이하 <우연성>으로 약칭).

확인해보니 <소설의 기술>은 현재 품절상태이고 로티의 <우연성>은 아예 목록에서도 빠져 있다. 불과 10년전에 나온 책이(1996년 12월에 초판이 나왔다) 그렇듯 완벽하게 '망각'된다는 사실은 유감스럽다(게다가 로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철학자였는데 말이다. 비록 그에 대한 관심은 지젝에 대한 관심으로 대체됐지만). 재판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당분간은 간간이 로티의 책들을 페이퍼에서 자주 언급할 예정이다. 

내가 읽고자 하는 대목은 <소설의 기술>의 176-7쪽에 나오며 <우연성>의 5쪽에서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우연성>에서는 출처를 <소설의 예술>로 적어놓았는데, 영역본의 원제 'The Art of the Novel'를 그렇게 옮긴 것이다. 이것이 부가적으로는 알려주는 바는 역자들이 이 책의 국역본을 참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루어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두 번역문이 좀 다르다.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지난 90년에 나온 'faber and faber'판인데 재작년에 새로 판이 나오면서 표지가 아래 이미지처럼 바뀌었다(나는 이전판이 더 맘에 든다). 그 영역본의 페이지로는 164-5쪽이다.

Cover of Kundera, Milan: The Art of the Novel

오랜만에 쿤데라의 소설론을 다시 읽으며 되새기게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우아하게 소설을 변호하며 또 얼마나 곡진하게 소설의 지혜를 설파하고 있는가이다. 그의 소설들이 '에세이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런 갈래는 그는 최강의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흔히 쿤데라와 자주 비교되는 하루키를 내가 안 읽는 것은 어쩌면 그의 소설론을 접해보지 못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설가의 재즈론이 아니라 소설론을 읽고 싶다)...

각설하고, 진도를 나가도록 한다. <우연성>에는 약간 발췌돼 있는 이 문단을 <소설의 기술>을 중심으로 인용하도록 하겠다.

아젤라스트들,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 키취, 이 셋은 신의 웃음의 메아리로 탄생되었고 어느 누구도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면서도 모두가 이해될 수 있는 매력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 줄 알았던 예술에 대한, 한 몸에 머리가 셋 달린 단 하나의 적인 것입니다.(176쪽)

이 첫 대목에서 쿤데라가 말하는 예술은 물론 소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는 그 예술(=소설)의 적을 지목하고 있는데, 이 적은 하나이다. 단 하나의 몸통에 머리가 셋이다. 그리고 그 머리들이 '아젤라스트들'과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과 '키치(키취)'이다. '아젤라스트'에 대한 설명은 조금 앞부분에 나오는데, 프랑수아 라블레의 신조어로서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웃지 않는 사람,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쿤데라의 설명이 재미있다.

소설가와 아젤라스트 사이에 평화란 불가능합니다. 한번도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아젤라스트들은 진리란 명확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확신하며, 자신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개인이 되는 것은 바로 진리의 명증성을 상실함으로써이고 타인들의 일치된 동의를 잃게 됨으로써인 것입니다. 소설이란 개인들의 상상적인 낙원입니다."(171쪽)

여기서 중요한 건 (남과 같지 않은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쿤데라의 정의이며, 소설이란 그러한 개인들의 낙원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맨앞의 인용문에서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이란 건 자기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떠들어대는 걸 가리키겠다. 그리고 '키치' 역시 개성의 상실에 대한 증좌이겠고(키치를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라고 변호하는 건 쿤데라라면 기겁할 일이겠다). 이 모두가 '웃지 않는 자' 아젤라스트와 가족적인 관계에 놓인다. 그들은 한 통속인 것. 이 첫대목에 대한 <우연성>의 번역은 이렇다:

아젤라스트들과, 받아들인 아이디어들에 대해 생각이 없는 자들과, 천박한 자들은 한결같고도 똑같이 신의 웃음의 메아리로 태어난 예술의 적이다. 바꿔 말해서 어느 누구도 진리를 소유하지 않으며, 누구든지 이해되어야 할 권리를 가진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였던 예술에 대한, 머리가 셋이나 달린 적이다.

'받아들인 아이디어들에 대한 생각이 없는 자들'과 '천박한 자들'은 각각 'the unthought of received ideas'와 'kitsch'를 인격화한 번역이다. 그리고 다시 반복하자면, 여기서 예술은 소설(예술)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어떤 '상상적 공간'이다.

이 상상적 공간은 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한, 유럽의 이미지, 혹은 최소한 유럽에 대한 우리가 품고 있는 꿈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이 꿈은 숱하게 배반당해 왔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를 연대감으로 묵어 우리의 조그만 대륙을 멀리 넘어설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이기도 합니다.(<소설의 기술>)

관용으로 이루어진 그 상상의 세계는 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하였으며, 그것은 바로 유럽의 이미지이다. 혹은, 그것은 적어도 유럽의 꿈이다. 몇 번이고 우리를 배반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유럽 대륙보다 훨씬더 멀리 뻗치는 우애 속에 우리를 통합시키기에 충분히 강한, 하나의 꿈이다.(<우연성>) 

 

 

 

 

정리하자면, 소설은 (1)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하였으며 (2)유럽의 이미지 자체이거나 최소한 유럽의 꿈, 유럽에 대한 우리의 꿈이다. 그리고 그것은 (3)유럽을 하나로 묶어준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용어를 빌자면, 쿤데라는 유럽을 소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라고도 보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 유럽'이란 표상은 '근대 소설'의 발생과 불가분적이다. 그리고 하나 더 보태자면 (4)소설은 개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소설이라는 상상적 세계와 유럽이라는 현실적 세계)가 허약하며 소멸할 수도 있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평선 너머로는 우리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아젤라스트들의 군대가 보입니다. 선전포고 되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인 전쟁의 바로 이 시기에, 그리고 그토록 극적이고 잔혹한 운명의 이 도시에서 저는 소설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다시 확인되는 바이지만, 이 연설의 제목 '소설과 유럽'이 가리키는 것은 '소설=유럽'이라는 것이다(그러니까 그에게서 '동아시아 소설'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의 대전제는 소설이 근대 유럽의 발명품이라는 점이니까). 그리고 이 둘이면서 하나인 세계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로 특징지어진다(쿤데라가 로티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고). 더불어, 이 세계의 적은 '웃지 않는 자들'의 세계이다. 이것이 쿤데라가 예루살렘이란 문제적 공간/도시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그리하여 결론.

제가 보기에 오늘날 유럽 문화가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 즉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독창적 사고와 침해할 수 없는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안팎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유럽 정신의 이 소중한 진수는 소설의 역사 속에, 소설의 지혜 속에 마치 금고처럼 보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기 때문입니다.(<소설의 기술>, 강조는 나의 것)

유럽의 문화가 오늘날 위협을 받고 있으며,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유럽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에 대한 존중 그리고 불가침의 사적인 삶에 대한 개인의 권리 존중 - 에 대한 위협이라고 볼 때, 유럽적 정신의 소중한 본질은 소설의 역사 속에 있는 보석 상자, 즉 소설의 지혜 속에 안전하게 보관중이라고 나는 믿는다.(<우연성>)

 

 

 

 

이 연설에서 오늘날의 시점은 물론 1985년이다. 바로 그 전해인 1984년에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했으며(예루살렘상 수상 이후 쿤데라는 한동안 노벨문학상의 단골 후보였다), 이어서 소설로만 치자면 <불멸>(1990), <느림>(1993), <정체성>(1998), <향수>(2005)를 차례로 발표한다. 알다시피 이 작품들은 곧바로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었다.

그리고 소설론/에세이집으로는 <소설의 기술>(1985),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엉뚱한 제목으로 번역된) <배반당한 유언>(1992), <커튼>(2005) 등이 있다. 이전에 한번 언급한 대로 이 <커튼>이 국내에는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고 있다(독어본은 바로 나왔으며 영역본은 올해 나오는 걸로 예정돼 있다). 비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넘어서는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커튼>의 소개가 지체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럽다.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소개/번역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서이다. 

07. 01. 27 - 30.

P.S. 쿤데라는 서문에서 이 연설의 자초지종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1985년 봄, 나는 예루살렘 상을 받았다. 도미니카 인이며 예루살렘 대학의 교수인 마르셀 뒤부아 신부는 영어로 씌어진 치사를 심한 프랑스어 악센트로 읽었다. 나의 수상연설이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즉 소설과 유럽에 대한 내 성찰의 마침표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프랑스어로 된 연설문을 심한 체코어 악센트로 읽었다. 보다 유럽적이고 보다 따뜻하고 보다 정감어린 분위기에서라면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11쪽)

맨마지막 문장이 좀 튀지 않나? 분명 시상식장에서 쿤데라는 그 연설문을 읽었던 것이니 마지막 문장의 함축은 번역 대로라면 "덜 유럽적이고 덜 따뜻하고 덜 정감어린 분위기"였다는 것이 되겠다. 설사 사실이 그랬더라도 그렇게 적어놓는 건 예의가 아닐 뿐더러 서문에 그렇게 적혀 있는 책도 나는 보지 못했다. 영역본에서 이 문장은 "I could have done it in no setting more throughly European, more cordial or dear to me."라고 돼 있다. 내가 읽기에는 "나는 그보다 더 유럽적이고 더 따뜻하고 더 정감어린 분위기에서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이다. 적어도 그게 '분위기'에도 더 맞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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