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와보니 지난달 러시아에 주문했던 책들과 지난주 알라딘에 주문했던 책들이 한꺼번에 도착해 있다. 모두 16권이다. 복사를 맡긴 책들도 오늘 받게 되면 스무 네댓 권은 되겠다. 책으로만 치자면 흥부네가 따로 없다(해서 안팎으로 구박이다). 산악인들이 흔하게 말하는 것처럼 그저 '책이 있을 뿐'인 것을. 세월은 가도 책은 '옛날'처럼 남으리라.

 

 

  

 

오늘 받은 책들 가운데 제일 먼저 펼쳐본 것은 정현종 시인이 이번에 완역 출간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2007). 그리고 서가에서 찾아와 나란히 펼쳐놓은 게 이전에, 사랑의 시와 절망의 노래를 포함해 모두 21편의 시 가운데 4편만을 번역해 실었던 네루다 시선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1994)이다. 언젠가 첫번째 시 '한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는 다른 번역 2편까지 포함해서 자세한 읽기를 시도한 바 있지만, 이번에 비교해보니 정현종 시인의 번역에도 많은 수정이 가해져 있다. 거의 '두 편의 시'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걸 비교해서 옮겨놓는다(색깔을 넣어 처리한 게 2007년판이다. 수정된 부분은 강조처리했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당장 여기서 실행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번역상의 수정/차이를 음미해보는 일은 '시 번역' 일반론뿐만 아니라 정현종 시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단서들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지 네루다의 이 처녀시집은 그가 열아홉살에 낸 것이다. '해설'에서 역자가 평해놓은 바에 따르면, "이 시집은 우리가 다 겪게 마련인 젊은 시절의 욕망의 혼돈, 특히 성욕이 충동에 따른 즐거움과 괴로움, 사귐과 고독, 만남과 헤어짐 따위가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넘친다. 물론 그 소용돌이는 시라고 하는 형식을 통해서 질서를 얻은 것으로서,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이 커다란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52-3쪽)

 

 

 

 

 

흔히 정현종 시인은 '교감의 시인', '에로티시즘의 시인'으로도 평가받지만 대개 그가 다루는 교감과 에로티즘은 식물적인 성향이 강하다.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나는 그 '에로티시즘'에서 '네 젖가슴 잔들'이나 '네 치골의 장미들' 같은 구절을, 혹은 그에 상응하는 구절을 읽어보지 못했다. 네루다의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을 그가 매력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시의 '결여항'이어서 아닐까 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그것이 네루다가 정현종에게서 갖는 의의라고 보는 것이다). 

간략한 연보를 읽은 기억에 따르면 정현종 시인은 청소년 시절 카톨릭 교회에도 다닌 바 있고, 아마도 종교나 구원 같은 문제에 얽매였을 법하다. 한데 네루다의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같은 세계는 그야말로 정반대편의 세계 아닐까? 시인은 '내 여자의 육체'를 말하는 대신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를 상습적으로 읊조리곤 했을 따름이다. 그의 '품격'은 '적나라함과 솔직함'의 결여태였다...

07.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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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4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4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걸 내뱉지는 않는 게 시인의 '점잖음'이죠(네루다와는 다른)...
 

아침에 집에서 나오다 보니 우편함에 책 한권이 꽂혀 있다. <시인세계> 봄호였다. 짐작에 우체부 아저씨가 아침일찍 다녀간 모양이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시인의 마을'엔 봄도 일찍 오나 보다. 하지만 오늘 날씨는 아직은 겨울이라는 듯이 좀 쌀쌀하다. 올겨울 눈이 왔던 기억도 한번밖에 없어서 이 정도 '쌀쌀함'은 애교스러워보이지만. 오늘자 한국일보에 이 <시인세계> 봄호의 특집과 관련한 기사가 실렸기에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기사에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잡지에는 '강화도 시인' 함민복의 인터뷰 기사도 들어 있다.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일보(07. 02. 14) 우리 시대 詩人들의 방 '서울 땅에 있어도 불우한 유목민'

1990년대 초반 시인 유하가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끌어 안은 것은 세속의 즐거움이었다. 이후 후기 자본주의적 질서와 쾌락의 얼개는 시 세계까지 삼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시인들의 거개는 순응하지 않고 자신에게 허여된 공간과 삶의 불일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며,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시인세계> 봄호는 ‘시인의 집, 시 속의 집’이라는 기획 특집을 마련, 한국시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소록을 토대로 전국에 거주하는 1,434명의 시인들이 어디서 창작의 처소를 틀고 있는지 밝혔다. 그 간 간헐적으로 이뤄져 온 조사였지만, 이번에 최초로 현직 시인의 발품을 빌어 재구성한 것이다.

전체 시인의 35%인 547명이 살고 있는 서울은 숫자상으로 시인 공화국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울 땅에서 부르는 노래는 불우의 연주이며, 서울서 충혈된 눈을 가진 그들은 현대적 유목민”이라고 조사를 진행한 우대식(42) 시인은 규정했다. “죽은 사람들만 불러 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로 스스로를 노래 부른 안현미 시인의 “활짝 핀 착란”만이 살아 있는 곳이다(<시구문 밖>ㆍ2006년).

한편 274명의 시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된 경기도에는 일산이 최대의 시인 군락(40여명)으로 나타났다. 대전(39명)도 그와 비슷한 수준. 이 밖에 인천(37명ㆍ함민복 등)을 비롯, 안성(고은 등) 용인(박이도 등) 양평(박용하 등)의 순으로 드러났다.

충남(38명)의 경우에 서산의 생활 서정을 즐겨 다뤄 온 김순일, 충북(32명)에는 속리산 산방에 은거하며 아픈 몸을 치유한 도종환,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이라며 노래한 이성선 등의 시인을 가진 강원(35명), 안동소주를 노래한 인상학 시인을 품은 경북(32명), 섬진강 시편의 김용택이 거하는 전북(51명), 남도의 한을 깊이 아로새긴 송수권 등의 전남(26명) 순으로 시인들에게 땅뙈기를 내주고 있다.

광역시들의 존재가 이채롭다. 이성복의 상처가 시적 텍스트로 엄존하는 대구(69명)는 ‘아나키스트적’ 정서가, 헌걸찬 기개와 전위적 글쓰기가 공존하는 부산(85명)에는 특유의 시의식이, 광주(50명)에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에서 저류를 흐르는 반항의 혼이 각각 자신만의 서정을 구축해 오고 있다고 조사는 밝혔다.

잡지는 이와 함께 김태형 시인의 글을 통해 ‘집’의 외연을 확장,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시옹(조작된 이미지)의 세계까지 논한다. 카페나 포털 사이트는 물론 블로그와 미니 홈피 등 가상 공간상의 집까지를 포섭한다. 고은에서 황학주까지 36명의 웹사이트는 이 시대 시인들의 성소라는 것.

2년 전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를 내는 등 이번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을 해 온 우 시인은 “광주에서 문학전문지 <문학들>이 창간되는 등 지역의 독특한 서정과 풍토를 담아내는 움직임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무직의 전업 작가들에게 매달 생계비 지원 등 경제 논리 이상의 지원이 모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래부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은 “아무리 훌륭한 공간이라도 시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한낱 고통스런 불모의 땅일 뿐”이라며 “정부나 사회는 지극한 섬세함을 전제한 가운데 그들의 집과 방에 대해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주거와 창작 공간으로서의 시인의 방’) (장병욱 기자)

07. 02. 14.

P.S. 마지막 박래부 위원의 '충고'는 경청할 만하지만 막상 방도를 마련하는 건 어줍잖아 보인다(가령 월세 10만원짜리 함민복 시인의 집을 찾아가 쾌적하게 리모델링을 해줘야 하나?).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시인/작가들을 위한 아파트나 집단거주촌을 만들어줘야 할까? 시인들의 게토로? 뭔가 다른 방도가 있을까? 이런 건 시인들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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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두어 차례 다녀간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매트릭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 )의 책들은 나는 부지런히 사들였었지만 언제부턴가 자제하고 있다. 번역서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역본과 같이 읽지 않을 경우엔 읽는 게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마도 기억엔 7년전 <예술의 음모>(백의, 2000)가 출간된 이후에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 듯하다. 책을 읽을 수 없었으니까.

 

 

 

 

사실 <예술의 음모>는 출간당시 얇은 분량에 너무 고가이기도 했다. 내 재정형편을 고려하면 더더욱. 보드리야르의 예술론 6편과 보드리야르론 5편을 묶은 이 책을 나는 어제서야 다시 대출했는데(책은 이미 품절됐다), 그건 지난주에 책의 영역본을 구했기 때문이다(지난 2005년에 나온 영역본을 나는 작년에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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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본 또한 제목은 '예술의 음모'라고 돼 있지만 보드리야르의 짤막한 예술론들을 모아놓은 책의 제목이 국역본과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 왜냐하면 국역본이나 영역본 모두 불어본 원저를 번역한 게 아니고(불어본은 없다!) 각각 두 편(역)자가 잡지 등에 실린 보드리야르의 예술론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목이 같은 것은 '예술의 음모'란 표제의 글이 그의 예술론을 집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인 듯하다.

겨우 6편의 글을 모아놓은 국역본과는 달리 영역본은 보다 본격적이어서 인터뷰를 포함해 전부 21편의 글을 싣고 있다. 분량으론 2-3배 차이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얼마나 읽을 수 있느냐이지만. 예컨대, 표제글인 '예술의 음모'(1996)의 첫문단은 이렇다.

만약 욕망의 환상이 주위의 포르노그라피에 몰입했다면, 환상의 욕망은 현대 예술에 몰입했을 것이다. 포르노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든 욕망의 대향연과 해방 후에, 우리는 성의 투명성의 의미에서 성전환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성의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없애버리는 기호와 이미지로 옮겨갔다. 즉 성이 욕망의 환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환으로 옮겨간 것이다.(7쪽)

지극히 '보드리야르스러운' 문장들인가? '지적 사기'라는 비아냥의 표적이 되기도 했을 만큼 보드리야르의 후기 저작들은 난삽하고 현란하다. 새로운 개념들을 마구 쏟아내는 것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면서 독해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한데, 그런 거 다 고려하더라도 인용문은 해독이 잘 안된다(나의 한국어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독자의 무능인가? 영역본은 어떤가?

The illusion of desire has been lost in the ambient pornography and contemporary art has lost the desire of illusion. In porn, nothing is left to desire. After the orgies and the liberation of all desires, we have moved into the transsexual, the trasparency of sex, with signs and images erasing all its secrets and ambiguity. Transsexual, in the sense that it now has nothing to do with the illusion of desire, only with the hyperreality of the image.(25쪽)

내가 영역본을 갖다놓고 불어나 독어 번역의 오역을 지적할 때면 그게 아무래도 '중역'과 같은 것이어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내가 바라는 건 그분들이 갖는 관심이나 걱정만큼 이런 일에 동참해주시는 거다(나도 이런 수고를 좀 덜고 싶다). 옮겨적은 영역본이 국역본과 갖는 차이점이라면 적어도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그리고 보드리야르의 생각이 재밌다는 것도 알겠고). 그럼 한 문장씩 대조해보기로 하자.

만약 욕망의 환상이 주위의 포르노그라피에 몰입했다면, 환상의 욕망은 현대 예술에 몰입했을 것이다. The illusion of desire has been lost in the ambient pornography and contemporary art has lost the desire of illusion.

먼저 'ambient' 같은 단어는 사전을 찾을 만한데, '주위의'란 뜻이고 'ambient air'하면 '주변 공기'를 말한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니까 그만큼 널려있다는 것이겠다. 구문상 병치되고 있는 것은 '욕망의 환상'과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환상에의 욕망'이다. 이때 '환상(illusion)'이란 말은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고 할 때의 '환영으로서의 예술' 말이다. 영역본의 문장은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욕망에 대한 환영이 주변의 포르노에 푹 빠져있다면 현대예술은 환영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다."

포르노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 In porn, nothing is left to desire.

불어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다. 영역본으로 보자면, "포르노는 욕망에 더이상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즉, 욕망을 다 탕진시킨다, 정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욕망이란 원래 금지의 베일 때문에 작동하는 것인데, 포르노는 모든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니 욕망이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해서 더이상 욕망할 게 없다!

모든 욕망의 대향연과 해방 후에, 우리는 성의 투명성의 의미에서 성전환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성의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없애버리는 기호와 이미지로 옮겨갔다. After the orgies and the liberation of all desires, we have moved into the transsexual, the trasparency of sex, with signs and images erasing all its secrets and ambiguity.

국역본에 아무런 강조 표시가 돼 있지 않지만, 영역본에 따르면 여기서 'transsexual'은 보드리야르가 '신조어'로 도입하고 있는 말이다. 적어도 그는 이 단어를 다시 정의한다. 한데 웬 '성전환'? 바로 다음 문단에 나오지만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이 환영에 대한 욕망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초미적'(transaesthetic)이게 되었다고 말한다(국역본은 이 단어의 불어를 'transthetique'라고 오기했다). 그러니까 그가 오늘날의 예술적 상황을 지시하기 위해서 도입하고 있는 용어가 transaesthetic'이며 이것은 'transsexual'와 병렬적 관계에 놓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transsexual'은 '성전환'과 무관하며 '성을 넘어선', 곧 '초성적인'이란 뜻이다. 발가벗은 성, 아무런 비밀/베일이 없는 성, 방탕 혹은 난교파티 이후에 도달하게 되는 '투명한 성'을 가리키는 말이 보드리야르에게선 '트랜스섹슈얼'인 것이다. 이성(들)의 육체와 성기를 봐도 '무심한' 상태 말이다. 그런 맥락으로 다시 옮기면, "모든 방탕과 욕망의 해방 이후에 우리는 성에서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다 제거해버린 기호와 이미지 들과 함께 '초성적인' 상태, 성의 투명성에 도달했다."

즉 성이 욕망의 환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환으로 옮겨간 것이다. Transsexual, in the sense that it now has nothing to do with the illusion of desire, only with the hyperreality of the image.

"이제 욕망의 환영과는 무관하고 단지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하고만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초성적인' 상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현대)예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식 통찰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 역시 모든 것을 미적 평범한 것에 이르게 하기 위해 환상의 욕망을 없애버렸으며, 따라서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8쪽) The same is true for art, which has also lost the desire for illusion, and instead raises everything to aesthetic banality, becoming transaesthetic.

 

 

 

 

'평범한 것의 미적 변용'은 미국의 철학자 아서 단토의 연구서 표제이기도 하다(이 책은 국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 계열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마르셸 뒤샹이나 앤드 워홀 이후의 팝아티스트들이다. 단토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함께 예술이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았는데(<예술의 종말 이후>), 보드리야르의 입장도 대동소이하다. 그런 걸 기점으로 해서 미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초미적인' 상태에 우리가 도달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시 옮기면,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 또한 환영에 대한 욕망을 상실하고 대신에 모든 것을 미적인 평범함(범속함)으로 끌어올리면서 '미를 넘어선 것',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 주변엔 포르노만큼이나 예술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예술이 범람하게 되었다. 보드리야르가 얘기하는 '예술의 죽음'이란 그러한 과잉과 범람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됨으로써 예술이란 말의 의미 자체가 실종돼 버리는 현상, 그리고 그런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가? 혹은 그런 시대로 진입해들어가고 있는가?..

07.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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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1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보드리야르를 읽고 있는데 이해가 잘되지 않는게 제 머리탓만은 아니군요.ㅎㅎ

로쟈 2007-02-1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육을 받고도 읽을 수 없는 책의 80%는 번역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고난도여서 어려운 책은 세상에 20% 미만일 테니까요...

yoonta 2007-02-1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esire for illsuion--->desire for illusion ^^
정말 그런 경우가 종종 있더라구요. 독어본을 해석했다는 책들이 영어본보다도 읽기 힘든 경우. 영어본을 해석한 중역본이 더 읽기가 좋은 경우..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물론 영어본 자체에도 번역상의 오류가 빈발한다고는 합니다만..

로쟈 2007-02-1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yoonta님도 꼼꼼히 읽으시는군요^^). 영역본이건 독역본이건 오역이야 다들 있겠죠. 하지만 우리만큼 날림으로야 하겠습니까? 중국번역의 현황을 잘 모르고 제가 '중국산'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번역서들이 최소한의 기본과 성의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이번주 '씨네21'을 아침에 사들었다. '필름2.0'을 사고서도 '씨네21'마저 집어든 것은 '설합본 특대호'였기 때문이다. 이런 거 일년에 두어 번밖에 안 나온다. 추석과 설 연휴가 낄 때 말이다. 게다가 '별책부록'이란 말에 혹해서 바로 가판대 아저씨에게 돈을 지불했는데, 달랑 잡지만 내준다. 잠시 머뭇거리다, '부록 없나요?' '없어요.' 이런 응답이 세번쯤 오고갔다. 그제서야 나는 이 '별책부록'이 '정기구독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걸 눈치챘다. 

인지상정으로 얼마간 낭패감이 들었는데, 그래도 제일 먼저 펼쳐 읽기 시작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겨울영화 산책'이 그 낭패감을 100% 만회해주었다. 이 '아줌마'의 영화에 대한 수다는 갈수록 주체불능인 듯하다. 여하튼 재미있다. 나는 다 읽지 않고 좀 아껴두었는데, 다 읽고 나면 나중에 '정성일 아줌마와 자크 랑시에르'란 페이퍼를 쓸 예정이다.  

그럼 이건 뭐냐? 산책 혹은 수다의 말미에서 장이모의 <황후花>에 대한 소감을 적어놓다가 그가 내리는 결론: "항상하는 이야기. 자기 인생을 낭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허접한 영화들만 보러 다니면 된다. 여기에 이제 한마디 더 하고 싶다. 그런 영화들만 보러 다니면 점점 허접하게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걸 오늘의 경구로 새겨두도록 하겠다.

왜 영화뿐이겠는가? 널리고 널린 게 또한 허접한 책들이다. 문득 그런 책들만을 읽어제끼다 죽음을 맞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란 생각이 들었다. 낭패다. 한데, 문제는 그런 책들만 읽다 보면 또 그게 그다지 허접한 책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 이보다 더 큰 낭패가 있을까? 그런 낭비에서 벗어나는 길은 물론 경이로운 영화들을 보고 경이로운 책들을 읽는 것이다. 정말로 허접하지 않은. 그럼 세상이 좀 달라보인다. 좀 멋있어 보이고 좀 진지해보인다. 눈물난다. 삶은 길지 않다...

07. 02. 12-13.

P.S. 몇 줄 쓰는 동안에 날짜가 바뀌어 이틀걸이가 돼 버렸다. 시간은 화살과 같다. 인생도 삼세번이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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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2-1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화장실에서 비슷한 생각 했는데, 허접한 책들 1+1행사에, 쿠폰에 이벤트에 사두고, 허접한거 아니깐, 빨리 읽어서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막상 진지하고 두번 읽을 책들은 자꾸 뒤로 미뤄지고, 바보가 따로 없구나. 싶었어요. 말대로 저 위의 '영화'를 '책'으로 바꾸어도 꼭 맞는군요. 반성.

로쟈 2007-02-1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서를 살짝 바꾸시면 되겠네요.^^

비공개 2007-02-1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말씀에 저도 200% 공감이네요.. ^^; 인생을 알차게 살긴 참 힘든데 낭비하기는 왜 이리 쉬운지. 정말이지 우리의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건 비극이죠?

노부후사 2007-02-1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후화는 인생 낭비한 인간들이 자기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영화더군요. 그런데 정성일 씨가 '아줌마'였나요?

로쟈 2007-02-1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아줌마'인지는 칼럼을 읽어보시면 압니다. 술어논리에 의한 것인데, 아줌마는 수다스럽고 잘 삐친다. 정성일은 수다스럽고 잘 삐친다. 고로 정성일은 아줌마다, 대략 그런 논리에서 누군가 정성일씨는 '아줌마'라 평했다는군요...

노부후사 2007-02-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집에 가다가 서점 들러서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moonnight 2007-02-13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허접한 책들에 길들여지다보니 훌륭하나 읽기 힘든 책들은 자꾸만 뒤로 -_-;;;; 삶은 길지 않다. 뜨끔;;

2007-02-13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예, 저도 좀 수다스럽죠?^^ 언젠가 페이퍼로 올려놓은 게 있습니다. 아줌마적 이성과 기하학적 이성에 대해서...
 

일본에서 한국근대문학 번역총서인  '조선근대문학 시리즈'가 출간된다고 한다. 1차분으로 세 권은 이미 나왔고, 전 16권이 2009년말 완간예정이라고. 우리의 경우에도 사실 일본근대문학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소개된 것 아니기에 이웃나라의 '뒤늦은' 관심을 그렇게 타박할 필요는 없겠다. 기획자들의 지적대로, 한국어 정본 확정 작업도 다 마무리하지 못한 형국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 참에 우리 근대문학에 대한 텍스트비평 작업도 활발히 진행시키면서, 외국에서의 한국문학 소개현황에 대한 관심도 좀 가질 필요가 있겠다. 가장 가까운 나라의 형편이 이러하므로 다른 나라들의 사정은 안봐도 훤한 것 아닐까. 더불어, 국외의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책도 마련했으면 좋겠다. 문학도 그렇지만 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한겨레(07. 02. 13) “한국어 배우는 학생 많은데… 제대로 번역된 소설 없어 나섰어요”

한국 근대문학의 대표작들을 일본어로 옮기는 체계적인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명예교수와 호테이 도시히로 와세다대 교수(국제교양학부)가 기획·편집을 맡은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가 그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중국 연변의 윤동주 묘를 처음으로 확인한 이로, 일본 내 한국문학 연구의 대부로 일컬어진다. 호테이 교수는 김윤식 교수의 방대한 저작 목록을 최초로 완벽하게 정리함으로써 국내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일화로 유명한 이다. 이달 하순 서울대 졸업식에서 <초기 북한 문단 성립 과정에 대한 연구 ­ 김사량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지난 2002년 호테이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된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에는 두 사람의 기획자를 포함해 일본 내 한국 현대문학 전공자 대다수가 참여한데다 일본 굴지의 출판사인 헤이본샤를 출판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명실공히 일어판 한국 문학 선집의 결정판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5년 11월 이광수의 <무정>(하타노 세츠코 니가타단기대학 교수 옮김)이 첫권으로 나온 데 이어 강경애의 <인간문제>(오무라 마쓰오 옮김)가 지난해 5월에, 그리고 합동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시라가와 유타카 규슈산업대 교수 등 옮김)이 9월에 나왔다. 호테이 교수가 번역을 맡은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올해 5월에 나올 예정이며, 염상섭의 <삼대>, 이기영의 <고향>, 두 권으로 축약한 홍명희의 <임꺽정>, 그리고 김동인 단편집과 시선집 등을 포함해 모두 16권으로 2009년 말 완간될 예정이다.

“그동안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 작품은 주로 단편소설들이었습니다. 그나마 비전공자들이거나 일본어에 서툰 한국인들이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중역도 많았죠. 이광수의 <무정>조차 제대로 번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희는 장편소설들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일본어판 결정본을 만든다는 각오로 번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도쿄에서 만난 두 기획자의 말에서는 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아울러 자부심도 넘쳐났다. “꼭 한국문학 전공자는 아니더라도 한국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한국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데 소설 읽기는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제대로 된 일본어 텍스트가 많지 않아 애를 먹었지요. 이번 선집 발간은 학교에서 쓸 교재를 저희 스스로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즈음 한국에서 일본 소설들이 이상 열기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극히 미미하다. 해방 이전 작품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듯 이번 선집 출간은 번역자들 쪽에서 한 권당 200만엔씩의 제작비를 출판사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성사되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어느 일본 여성이 상당액을 희사해서 우선은 작업에 착수했지만, 16권이 모두 차질 없이 발행되기 위해서는 한국 쪽의 지원이 절실한 형편이다. 두 사람은 이에 따라 다음달께 한국문학번역원에 지원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가 근무하는 와세다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모두 1700명이 넘는데 전임 교수는 달랑 저 한 사람입니다. 2년 임기인 한국인 객원교수가 두 사람 있고, 나머지는 시간강사들이죠. 한국 정부나 기업 쪽에서 교수 충원이나 한국문학과 개설을 위한 지원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와 함께 이들은 한국 쪽 연구자들과 출판사들이 한국문학의 정본 확정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가령 윤동주의 시집이 그동안 수십 수백 종이 나왔을 텐데 그 가운데 윤동주 자신이 남긴 육필 원고와 일일이 대조를 하고 낸 게 몇 권이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윤동주만이 아니죠. 번역을 걱정하기에 앞서 한국어로 된 정본을 확정하는 게 우선돼야 하지 않겠습니까.”(도쿄/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2. 12-13.

 

 

 

 

P.S. 말미에 한국문학 '정전' 확정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사실 그간에 우리의 연구 역량에 비해서 관심이 소홀했던 게 아닌가도 싶다. <바로 잡은 무정>(문학동네, 2003)이 나온 게 불과 몇 년전, 또 원전 비평에 근거한 <윤동주 전집>(문학과지성사, 2004)이 나온 게 또 불과 몇년 전이기 때문이다. '조선근대문학 시리즈'가 어떤 텍스트들을 번역대본으로 작업하는지 모르겠지만 '텍스트 확정' 문제마저 외국의 연구자들에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연구용이 아닌 보다 대중적인 차원의 정본 확정도 중요하다. 문학과지성사의 한국문학전집 같은 게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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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한국문학 전공자로서,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네요. 현실적으로 '우리'가 돈을 대야지 번역이나 국문과 '자리'가 생긴다는 것이 그렇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민족주의적인 감상이라기 보다는, 파워 차이와 약소국이라는 권력관계가 문화관계에도 정확히 반영된다는 것.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 중 하나인 우리 작가들이 베트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이 증폭되고 반성되기를 바랍니다.

로쟈 2007-02-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이 나쁘더라도 당연한 현실이죠. 문학도 국력에 비례하니까요. 지난 연말에 한 학회에 가보니까 (재일교포나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일본어로 쓴 한국문학사는 한권도 없다더군요. 거기에 비하면 러시아에서는 지난 60년대말에 이미 <한국문학사>가 나오고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었습니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이 맞는 거 같습니다...

기인 2007-02-14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력과 같은 파워 문제가 아니라,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국문학에 대한 관심 또는 윤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 대한 관심으로 제 생각이 나아간 것이고요 ^^; 일종의 '인간'이라면 그래야 한다, 혹은 '인문학'의 의무 같은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일본의 인문학도가, 조선 식민지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면, 한국문학 전공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너무' 피해가는 것이 '인류' 차원에서 답답하다는 의미입니다.

로쟈 2007-02-1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모호하며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도 '식민주의'의 연장선으로 보시는 건가요?). 이게 관심을 '가져준다' 같은 시혜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더구나 그게 비단 베트남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며, 소위 '내부 식민지'로서의 전라도 문제부터 성차화된 식민지로서의 '여성' 등 안 걸리는 게 없는 문제인 듯싶어요...

기인 2007-02-1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 안 걸리는게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져주는'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언명령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