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핀커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난주 후반에 깔린 책인 듯하다(내지는 출판사가 언론홍보라는 간접적인 방식보다는 독자와 먼저 대면하는 정공법을 택했는지도).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소소, 2007)가 이번에 나온 책이며 원제는 'How the Mind Works'(1997), 제목 그대로이다(다만 저자명 '핀커Pinker'가 '핑커'로 바뀌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원서가 나온 지 10년만에 한국어본이 나온 셈인데, 기억엔 지난번 <빈서판>(사이언스북스, 2004)이 출간되던 때쯤 핀커의 주요 저작들 몇 권을 한꺼번에 구입할 때 사들였던 책 중의 하나이다(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라 '소장도서'란 말이 무색하지만).  

사실 출세작이기도 한 <언어본능>(그린비, 1998)이 출간되었을 때(2004년에 소소에서 개정판이 출간됐다) 내가 저자인 스티븐 핀커(1954- )에 대해 알고 있던 내용은 MIT의 동료인 촘스키와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언어학자라는 게 전부였다(그는 가장 탁월한 '촘스키 전도사'였다). 그렇더라도 <언어본능> 이후에 나는 '핀커의 모든 책'이란 분류항을 머릿속 서재에 마련해놓고 있다.  

본래 심리학 전공으로 출발하여 언어학과 인지과학쪽으로 연구영역을 확장해간 핀커는 21년간 MIT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3년 이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주로 언어심리학진화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다. 적어도 그 두 분야를 '조인트'해놓은 영역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빈서판>은 한 예증일 터인데, 그런 명망가에게라면 '마음'에 대한 강의를 한번쯤 들어봄 직하지 않은가?

<언어본능>, <빈 서판> 등으로 알려진 스티븐 핑커의 마음에 대한 탐구서. 마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진화했으며, 마음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웃고, 교류하고, 예술을 즐기고, 인생의 신비를 음미하는지를 신경과학에서부터 경제학과 사회심리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들을 동원해 설명한다. 총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음을 ‘역설계’(역설계란 대상을 분해하고 구조를 분석하여 그 설계로 거꾸로 파악해가는 기법을 말한다)하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 자연선택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최근 많은 담론으로 둘러쌓여 있는 인간 마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해주는 책.

'인간의 마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해주는 책'이라고 하니까 말하자면 '기본서'이다. 한데 분량은962쪽이다(원서 자체가 672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학문을 책두께로 승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만한 분량의 책들을 몇 년에 한권씩 턱 턱 써제끼는 역량 자체는 경탄할 만하다(문제는 그런 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학자들은 얼마나 겸손한 것인지!).

해서 어쨌거나 다소 부담스런 분량과 가격이지만 하버드대학의 강의를 한 학기 수강하는 셈치고 구입한 다음에 2주에 한 장씩 읽어나감으로써 본전을 뽑는 방법도 나쁘진 않겠다(소프트카바의 원서 자체는 물론 국역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그만한 비용과 수고로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밑그림을 얻을 수 있다면 한 학기 소득으로는 바꿔치기할 만하다(하지만 나는 정말 그런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핀커의 주요 저작으로 아직 번역되지 않은 또 다른 책(역시나 몇년 전에 구입했지만 박스 속에 묻어두고 있는 책)은 <단어와 규칙>(1999)이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1997)에 바로 뒤이어 출간된 것인데, 국역본도 그 순서에 따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럴 경우 우리는 2009년쯤에 국역본을 얻게 되는 것인지? 그때쯤이면 한국어로도 "스티븐 핀커를 좀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게 주변에 없다면 옆집에서 꾸어오는 일이라도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

07. 03. 25. 

P.S.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부담스럽다면 개리 마커스의 <마음이 태어나는 곳>(해나무, 2005)부터 읽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클루지>(갤리온, 2008)도 마커스의 책이다). '몇 개의 유전자에서 어떻게 복잡한 인간 정신이 태어나는가'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의 저자 자신이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도유망한 학자라는데,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에 따르면 "마커스는 생각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종합하여 보여준다. 재능이 넘치는 독창적인 이 책은 과학을 대중화하는 데, 그리고 과학 그 자체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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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3-25 12:49   좋아요 0 | URL
심리철학과 연관하여 볼 만한 책들이군요. 학부시절 심리철학을 접하고 꽤 관심있었는데, 졸업 이후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보다 봐야할 것들이 많아서.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로쟈 2007-03-25 13:22   좋아요 0 | URL
'심리철학'도 걸쳐 있지만 짐작에 좀더 실제적인 쪽 같습니다.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에 좀더 가까운...

비연 2007-03-25 20:43   좋아요 0 | URL
보관함에 넣어두었습니다^^ 항상 좋은책 알려주셔서 넘 감사해요~!

딸기 2007-03-26 07:06   좋아요 0 | URL
정말 부담스런 분량과 가격...입니다만 일단 보관함에 넣어두어야겠어요. 감사~

자꾸때리다 2007-03-26 12:25   좋아요 0 | URL
언어 본능 번역 상태 괜찮나요?

로쟈 2007-03-26 14:16   좋아요 0 | URL
오류들을 수정한 개정판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개정판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저로선 처음 국역본을 읽을 때 원본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marine 2007-03-27 21:14   좋아요 0 | URL
갑자기 읽고 싶은 생각이 확 당기는군요 "빈 서판" 도 7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었지만 워낙 쉽게 쓰여져서 소설책 읽는 기분으로 쭉 읽어 나갔거든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도올 김용옥의 문제제기를 기화로 하여 한국 기독교와 관련된 글들을 몇 차례 옮겨오고 몇 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그가 출간한 <기독교 성서의 이해>(통나무, 2007)도 출간되자 마자 사두긴 했는데 아직 펼쳐볼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그 책에 대한 차분한 리뷰가 게재되었기에 옮겨놓는다. 미리 읽어둘 만하다.

경향신문(07. 03. 24) ‘보수 교리’ 뒤엎은 ‘도발적 비판’

도올 김용옥은 최근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라는 두 권의 저서를 동시에 출간함으로써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충격적인 화두를 던졌다. 삼위일체와 동정녀 탄생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적 예수의 신성(神性)성 문제 등과 관련해 정통적인 한국 보수 신학계와 교회가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올은 “콘스탄티누스(313년) 이후의 역사는 ‘성서주의’의 본연으로부터 너무 이탈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아니라, 황제교화된 다른 차원의 기독교 발자취”라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성서주의’는 ‘교권주의’와 대비되는 말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논쟁도 ‘교권주의’의 산물로 파악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다가 이단으로 지목된 아리우스를 황제교화된 교회의 권위로 부당하게 축출된 하나의 희생양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보수적 신학자인 이국헌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된 존재(니케아 신조)이며, 그 분은 완전한 인간이시다(칼케돈 신경)”라는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도올은 오히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보다 반대파 아리우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교권적 해석을 거부한다.

도올은 또 “복음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버지(파테르)와 아들(휘오스)’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은 예수의 자기 이해 속에서 일차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며, 가부장적 유대인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쓰였던 토속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신적 존재”라기보다는 “자비의 품”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버지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고 증명하려던 일체의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올은 유일신론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한다. 예수 이전의 유대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은 유일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참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서 기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어떨까. 도올은 “마르시온이 구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라면서 구약성서와의 단절의 정당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의 율법적 정신을 대치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더이상 편협한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적 하나님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의 창세기가 지니는 다양한 메타포와 예언서들이 외치는 정의와 공의는 시대를 막론하고 신자들에게 언제든지 효력을 발생한다.

도올이 말하는 ‘낭송문화로서의 복음서’는 여전히 문학적 효과 이상을 던져주지 못한다.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도 심청전의 문맥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청의 죽음과 연꽃에서의 부활은 “어린 도올의 통곡을 자아내는 ‘역사적 사실’이고”, 그렇게 ‘믿는’ 자에게는 감동이 크며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또 다른 의미의 “역사적 사실”이 된다. 예컨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의 확충이라는 점과 그리스도 복음의 독특성이 다른 문맥 속에서 보편적 이야기로 세속화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는 또 동정녀 탄생을 우리나라의 시조설화인 난생설화와 비교하고, 마태가 이사야서 7장14절을 인용하여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는 것은 그릇된 인용이라고 비판한다. “순결한 처녀로서의 마리아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난센스”라면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은근히 부정하는 눈초리다.

이 책에서 도올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요한복음과 로고스 기독론’이다. 로고스는 ‘말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이는 ‘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과 나의 말씀은 하나로 통한다. 이러한 논리를 확대해서 도올은 로고스의 화신으로서의 아인슈타인을 언급한다. 범인이 접하기 어려운 상대성이론의 수리적 사유를 영감으로 구성해 내었는데 그것이 로고스다. 그 로고스가 아인슈타인이라는 역사적 인물로서 육화되어 나타났다. 이를 극단화시켜보면 ‘과학적 진리의 구조’를 띠고 발언되는 모든 견해는 로고스의 기능을 가지게 되며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로고스의 화신이 된다. 따라서 붓다도 ‘연기(緣起)’적 사실을 말한 것 하나만으로도 로고스의 화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도올의 일부 주장은 실상 진보주의적 신학자들이 이미 개진해왔던 내용이다. 이러한 책이 만일 서양에서 발행되었다면 그다지 관심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무수히 나왔다. 유독 한국에서 반론이 거센 까닭은 그만큼 한국 그리스도교가 보수적인 색채가 짙다는 뜻도 되겠지만 진보적인 해석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까닭도 있다.

성서는 언제나 누구에게든 열려 있는 책이기에 다양한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한 해석과 주장들을 감정적으로 혹은 교리적으로 다투는 식으로 대해서는 안될 것이며, 성숙하고 열린 자세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본다. 본서의 출간을 기화로 한국 기독교계에 진보와 보수간의 건전한 대화의 신학적 풍토를 기대해 본다.(이명권|코리안아쉬람대표·종교학박사)

07. 03. 25.

P.S. 마지막 문단의 멘트, 곧 "이러한 책이 만일 서양에서 발행되었다면 그다지 관심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무수히 나왔다." 같은 진술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식적인 주장을 상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지적/정서적 성숙이다. 그럴 때 아래와 같은 박노자의 '만감' 또한 '상식'(공통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의 교육문제에 대한 박노자의 지적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지만 종교문제에 대한 그의 '외부자적 시선'에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 제기한 문제가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는 '지각'을 갖고 있는 걸 보면 그의 마음상태도 거의 한국인이 다 된 듯하다). 

박노자글방(07. 03. 14)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 행위

유럽 같으면 조금 더 대담하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한국 같으면 "이미지 클럽/대딸방에서 아르바이트한다"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여성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일이 "부끄러운 직업"으로 인식되지요. 물론 실제로는 성매매 정도로는 아니지만 일단 성적 이미지를 상품화시키고 남성의 일방적인 만족을 전제로 하는 직업인 만큼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또 심신상의 피로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기에 별로 "자랑"스러워할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과연 다른 직종에 비해 그렇게 "부끄럽게"만 생각해야 하나요? 솔직한 말씀으로는, 저는 "마사지 클럽 아가씨"보다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훨씬 더 부끄러운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사지클럽에 오는 손님도 한 시간 동안의 "플레이"를 "사랑"으로 착각할 일이 없지만 서빙하는 여성도 굳이 "사랑" 따위를 연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 않습니까? "클럽"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일시적인 만족을 주되 본격적으로 외로움과 같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대체물"이라는 것을, 양쪽에서 다 알고 솔직하게 하는 것이지요. "유사 성행위"와 남녀간의 진짜 사랑 사이의 거리란 거의 천문학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대다수의 교회에서 설교되어지는 이야기나 행해지는 행위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사랑"의 사이의 거리도 거의 같을 것입니다. "우리 종파"가 아닌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느니 진정한 영적 생활을 못한다느니 하는 이야기와, 차별과 배제가 없는 하나님의 평등한 사랑을, 사실 같은 차원에서 논하기조차 어렵지요. 그리고 만법의 연기를 깨닫고 팔정도를 통해 사생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원래 논리와, "49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의 메꿀 수 없는 갭이 벌어져 있는 것이지요. 대다수의 교회나 사찰에서 "신앙"이라고 포장하여 파는 것은, 마사지클럽에서의 "유사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진정한 신앙의 "대체품" 내지 그 수준에도 못미치는 신앙적 "짝퉁 상품"입니다.

그런데 마사지클럽 아가씨가 자신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 아닌 사랑이라고 거짓말 하지 않는 것과 달리, 수많은 목사님 분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달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이 분들이 차라리 이미지클럽에 가서 거기에서 진솔함과 겸손함을 배웠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분들께서 "부자가 낙원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충실히 따라 가난은 몰라도 적어도 국내 도시 근로자의 한달 평균 소득인 1,600.000-1,700.000원 정도로 자신들의 소득과 소비를 조절했으면 그나마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결고리가 보였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과연 많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면 지금의 교회가 "사학법"을 갖고 떠드는 대신에 아이들의 인성을 파괴하는 성적, 등수 없애기 운동 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회"/"사찰"이라는 제도상에 이야기되어지고 실행되어질 수 있는 "신앙"과 진정한 신앙의 차이는, 말그대로 이미지클럽과 이도령과 성춘향의 첫날밤의 차이 정도지요. 그러면서도 저 분들은 이 사실을 꾸준히 부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직자들이 "사회적 어른"의 대접을 받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대딸방"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부끄러워하실 것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반론이 가능해요. 대형 교회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 "성령"을 받아보고 미쳐보는 것이, 마약복용이나 알콜 중독, 인터넷상에 이효리 팬클럽하는 일 등 또 다른 종류의 "자기 물화"보다 낫지 않느냐는 반론이지요. 맞습니다. 비툴어진 사회에서 비툴어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필요하다면 안방 극장과 술보담 교회가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론 거기에 다니다가 아주 광신으로 안나가는 한에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위안"과 진정한 의미의 "신앙" 사이의 차이를 좀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위안"이야 교회에서도 사찰에서도 휴게텔에서도 다 가능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어딜 가나 뭘 하나하고 무관하게 자기 안에서의 거짓을 불태우고 자기 바깥에서의 거짓을 적어도 "거짓"이라고 정확하게 부를 수 밖에 없는 아주 특별한 마음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걸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런 민감한 문제(다 알지만 대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가 어젯밤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후'에서도 다루어졌다. 나는 예고편만 보았을 뿐인데, '한국인'으로서의 감각에 따르면 기독교계의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이었다(한기총에서는 이미 방송취소를 요구한 바 있다). 관련기사는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8340§ion=sc4 참조. 방송 내용의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의 뉴스엔 기사에 정리돼 있다.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 후’가 국내 대형 교회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을 방송한다. 이에 따라 기독교계의 큰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뉴스 후’는 ‘목사님, 우리 목사님’이라는 제목으로 대형 교회의 세습, 부당한 부의 축적 등에 대해 취재한 내용을 24일 오후 10시50분 방송한다.

취재진에 따르면 K교회 김모 목사는 공금횡령 혐의로 지난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교단 법정은 ‘기소유예’의 면죄부를 안겼고, 김 목사는 아들을 자신의 후임자로 내세웠다. 김 목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부정당선자금과 당선 사례금 2억3,000여 만원과 부인 명의 별장 건축비 3억1,000만원, 미국 유학 중이던 큰 사위 생활비 2억원 등 총 30여억원의 교회 공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았다. 또 지난 1998년 100% S교회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한 기업체는 이 교회 당회장인 목사의 장남 조씨가 취임했으며 조씨는 수익 부서들을 개인소유회사로 넘기는 방법으로 2년 만에 재벌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조씨는 모두 200여 억원을 탈세하고 횡령한 혐의로 지난 2005년 1월 50억원의 벌금형이 확정됐음에도 벌금을 한푼도 내지 않고 해외로 도피,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취재진은 밝혔다. 조씨는 ‘뉴스 후’ 취재 결과 일본 도쿄의 부자 동네에 살면서 도쿄 소재 S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또 S교회는 미래에 교회 시설을 확충하겠다는 명분으로 경기도 파주에 땅 3만평을 장로들의 명의로 집중적으로 사들였으며 이 가운데 2만여 평이 교회 소유가 아닌 조 목사 개인 소유로 드러났다고 취재진은 전했다. 취재진은 또 “매입 당시 땅값은 평당 1만원이었으나 지금은 최대 60만원까지 급등했다”고 덧붙였다.

취재진은 “조 목사가 교회 돈으로 자신의 부동산 자산을 늘린 것 아니냐는 의혹을 S교회 측에 제기했으나 교회 측은 토지법상 농지를 교회 재단 명의로 살 수 없어 장로들의 이름으로 매입한 뒤 조 목사 개인 소유로 바꿨다고 해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회측 주장과 달리 농지뿐 아니라 교회 재단 명의로 소유할 수 있는 일반 땅들도 조목사 개인 소유로 바뀐 사실도 드러났다”고 설명했다.(김은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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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3-25 13:37   좋아요 0 | URL
저도 기독교인이지만 어제 본 <뉴스 후>는 한편으로는 저를 매우 부끄럽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통쾌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러운 것은 작금의 기독교 세력들이 쌓아놓은 부끄러운 신앙적 찌꺼기들과 직접 대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였고, 통쾌했다는 것은 그런 껍떼기와 같은 부분을 있는 그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이 대리적으로 비판한 것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 것을 의미하겠지요. 이래나 저래나 제 얼굴에 침 뱉기는 마찬가지네요. ㅠ.ㅠ

로쟈 2007-03-25 13:48   좋아요 0 | URL
기독교인시라니 뜻밖인데요.^^

yoonta 2007-03-25 17:17   좋아요 0 | URL
유대교의 유일신전통은 더 길게는 이집트의 아톤신 숭배와 연결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황실에서 자랐다는 것은 성서에서도 나오는것이고 때문에 아톤신숭배의 영향이 유대교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죠. 도올의 로고스기독론에 의한 구약의 폐기나 유일신적 전통의 부정은 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로고스기독론의 바탕이 되는 그리스의 헬레니즘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말이죠.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것인데. ㅋ

로쟈 2007-03-25 20:33   좋아요 0 | URL
그 대목에선 사실 고진의 모세론에 더 공감하는 편입니다. 구약 자체 안에도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적 계기가 혼재돼 있다는.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보지만, 의견이야 다양할 수 있지요...
 

어제 이번에 새로 출간된 <율리시스>(생각의나무, 2007)을 배송받았다. 출간 소식은 예전에 페이퍼로 다룬 바 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햇빛비둘기님이 선물로 보내주신 것. 수십 장의 화보를 포함하여 1,320여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번역서는 단순히 두툼한 책이 아니라 아주 '무거운' 책이어서 어제 집으로 들고 오자마자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았을 정도였다. 디지털저울이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2킬로그램, 적어도 세 근 정도는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21그램쯤 나간다는 우리들 '영혼'의 무게를 고려하면 책에는 얼추 100여명의 영혼이 숨쉬고 있는 걸로 계산할 수도 있겠다).

 

 

 

 

이 번역본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책장(원래는 신발장)에서 옥스포드판 <율리시스>(1998) 원서를을 꺼내놓았다. 이 페이퍼백 원서 또한 70쪽의 서론(작품해설)까지 포함하면 1,0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페이지당 행수는 원서가 37행이고, 국역본이 30행이다. 거기에 활자 크기 또한 국역본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분량에서 대차가 나지 않는 것은(무게에선 물론 대차가 난다!) 양장본 국역본의 판형이 원서의 두 배이기 때문이다(요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한 21-2행짜리 허허실실 책들을 나는 혐오하는 편이다. 노안의 독자나 초등학생들을 위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우화적' 조판은 너무 낭비적이다. 깨알 같은 활자들이 촘촘하게 박힌 책들이 나는 그립다. 이건 자세의 문제이다. 어지간한 영어 원서들은 페이지당 대개 40행 가량이다).

아무려나 만든 품새에 있어서나, 그리고 역자가 40년간 이 작품 번역에 쏟아부은 노고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몇 페이지 읽은 소감과 함께 역자인 김종건 교수의 서문(옮긴이의 글)을 조금 음미해보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기념비성에 대한 나의 인사치레이다.

'언어적 주술의 아수라장에 대한 반 세기의 도전'이란 제목이 붙은 '옮긴이의 글'에서 역자가 먼저 고백하고 있는 것은 번역의 경과, 곧 번역사이다. "<율리시스>의 첫 한국어 번역본(정음사 간)은 1968년에 출간되었다. 이는 여러 해에 걸친 번역 작업의 첫 결실이었지만, 결코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두번째 번역본(범우사 간)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8년판으로, 가블러 신판 원서에 기초하여 약 5천여 개의 원문 오류를 교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제 또다른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세번째로 신판본(3정판)을 출간한다."

하지만, 조이스의 작품이 갖는 '끊임없는 언어유희'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지난한 일이어서 "이번 번역 또한 완미(完美)와는 아스라이 먼 존재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진행중 작업'임이 틀리없다."는 게 역자의 토로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번역상의 난점에 관한 것이다.  

"조이스는 '무엇을' 묘사하느냐에 앞서 '어떻게' 묘사하느냐를 중요시한 작가다. 그는 이러한 미학적 장치를 강조하고 몸소 실험하면서, 현대의 작가는 바다의 항해사처럼 '배의 침몰'과 같은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조이스의 다양한 상상력을 건드리려면 다양한 형식을, 그리하여 형식 뒤에 숨겨진 인간 심리와 새로운 조망, 비전과 현현을 탐구해내야 한다. 이는 이번 개역본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동아일보(07. 03. 26) '율리시스’ 세번째 번역판 내놓은 김종건 교수

“사람들은 ‘율리시스’가 난해하고 비극적이라는 선입관을 갖지 실상은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이자 배꼽 잡도록 재밌는 코미디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율리시스’ 세 번째 번역판(생각의나무)을 내놓은 김종건(73) 전 고려대 교수를 만난 뒤 그 어렵다는 조이스의 작품이 꿀단지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비록 그 자신은 서문에서 “지난 근 반세기를 조이스 연구와 그 번역, 특히 ‘율리시스’의 번역을 위해, 마음 밑바닥이 무거운 쇠사슬로 묶인 듯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다”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같은 자리를 맴도는 ‘핀에 꽂힌 벌레’에 비유했지만.  

그와 ‘율리시스’의 만남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내 최초로 ‘율리시스’ 원어 강독을 시작한 조지 레이너 교수를 만나면서였다. “조이스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뒀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죠. 당시 난 학자로서 평생을 바칠 작품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딱’이었어요.”  

‘겁 없는 마음’으로 도전한 그는 1968년 국내 최초로 ‘율리시스’(정음사)를 번역했다. 그 공로로 이듬해 한국번역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제대로 번역했는가 하는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1984년 독일 뮌헨대 교수인 헤다 가블러가 조이스 친필 원고를 바탕으로 5000여 개의 오류를 바로잡아 가블러판 ‘율리시스’를 출간했다. 김 전 교수는 이를 토대로 해 1988년 제임스 조이스 전집(범우사)의 하나로 재판을 냈다.  

다시 근 20년이 흘러 4000여 개의 주석과 48쪽의 희귀 화보, 외설 시비 때문에 금서령이 내려졌던 이 책의 미국 내 출간을 허용한 존 M 울지 판사의 판결문 등까지 합쳐 1323쪽에 이르는 세 번째 번역판이 출간된 것이다. “1988년 전집에는 사실 한 권이 빠져 있었어요. 조이스가 17년에 걸쳐 집필한 ‘피네간의 경야(經夜)’였죠. 무려 65개국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번역 불가’라는 낙인이 찍힌 작품이었는데 2002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번역에 성공했어요. 그때 조이스의 언어유희에 새롭게 눈을 뜬 부분이 있어서 ‘율리시스’의 번역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율리시스’는 고대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을 마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10년에 걸친 모험을 그린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의 내용을 토대로 현대인의 내면적 방황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율리시스란 오디세이의 라틴어 이름이다.  

“조이스는 엄청난 독서광이라 말년엔 밀턴처럼 눈이 멀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좋아한 문학작품이 오디세이였어요. 그는 오디세우스를 3가지 면에서 가장 이상적 인물로 봤거든요. 인격적으로 가장 원만한 인간이자 집에선 가장 성실한 가장, 밖에선 가장 훌륭한 군인이라는 점에서였죠.”  

‘율리시스’의 독창성 중 하나는 1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단 하루로 압축해 냈다는 점이다. 조이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을 무대로 1904년 6월 16일 단 하루 동안 벌어진 평범한 광고회사 외판원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리오드 블룸의 일상 속 의식의 방황을 장편소설로 엮어 냈다.  

“오늘날 ‘블룸스데이’라고 축하받는 이날에는 아내 노라에 대한 조이스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6월 16일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노라와의 첫 데이트에 성공한 날이었거든요. 당시 노라는 가방 끈 짧은 호텔 여직원에 불과했지만 조이스는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그녀의 영혼’이라며 평생 아내 곁에 머물렀죠.”  

그러나 ‘율리시스’는 뭇 여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오디세우스,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 아버지를 우상시하는 아들 텔레마코스라는 오디세이의 행복한 삼위일체 구조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블룸의 아내 몰리는 남편이 가장 경멸하는 남자와 달콤한 불륜에 빠져 있다. 블룸은 이를 눈치 채고도 한마디 말도 못한 채 마사라는 여성과 익명의 연애편지를 교환하고 해변을 산책하다 만난 소녀를 훔쳐보며 수음을 통해 울분을 해소하는 소심한 남자다. 블룸의 정신적 아들이라 할 만한 스티븐 데덜러스는 블룸의 ‘부성애’를 뿌리치고 ‘가출’을 감행한다.  

“‘율리시스’에 대해선 ‘현대인의 분열된 영혼과 가족의 붕괴를 그린 비극적 세계관이 담겼다’는 부정적 해석이 지배적인 게 사실이죠. 하지만 몰리의 독백으로 이뤄진 마지막 18장이 ‘Yes’로 시작해서 ‘Yes’로 끝난다는 점을 상기해야 됩니다. 블룸은 숱한 상처를 받으면서도 끝내 가정을 버리지 않습니다. 데덜러스도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암시를 남기죠. 조이스에겐 ‘결혼의 축가’와 다름없는 이 작품은 비극이 아니라 부정을 뛰어넘는 긍정의 미학이 담긴 코미디입니다.”  

그는 ‘율리시스’의 이런 긍정적 세계관을 작품의 고향인 더블린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블룸스데이엔 공영방송이 일기예보도 접고 아침부터 30시간에 걸쳐 율리시스를 낭독하는데 더블린 사람들은 이 방송을 듣다가 폭소를 터뜨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100여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모델이 더블린에 살던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조이스 동상을 더블린 시내의 시장 바닥이라는 ‘저 낮은 곳’에 세움으로써 그가 학자들의 작가이기에 앞서 대중소설가임을 상기시키고 있다고 한다.  

“흔히 ‘율리시스’를 모더니즘 예술의 절정으로 꼽지만 가장 포스트모던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언어유희뿐 아니라 공상과학과 판타지, 스릴러, 코미디가 함께 담겨 있거든요. 그래서 조이스 연구자들에게 포스트모던은 탈(脫)모던이 아니라 속(續)모던이라고 할 수도 있죠.”  

“조이스 작품은 처음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빠져나오기는 더 힘들다”고 털어놓는 노학자의 경기 용인시 자택 서재에는 여백마다 빽빽한 글귀를 적어 놓고 다시 번역 중인 ‘피네간의 경야’ 원서가 펼쳐져 있었다.(권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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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denuit99 2007-04-05 21:4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좋은 리뷰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도 옥스포드 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 김종건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판은 Vintage Books에서 나온 가블러 판이더군요.(영문학계에서는 이 책을 주로 사용하더군요. 저도 이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일전에 딱 한 번 율리시스 강독회에 간 적이 있어서 선생님 옆에 앉을 기회가 있었서 슬쩍 보았더니 책이 정말 새까많고 너덜거릴 정도였습니다.

첫번째 에피소드를 보니 가독성이 훨씬 좋아졌더군요. 다만 사소한 오자들과 누락이 좀 있었습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올려볼까 합니다.

로쟈 2007-04-05 22:39   좋아요 0 | URL
전공하신 분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반갑네요.^^ 저야 관견을 몇 자 늘어놓을 따름이고 보다 진득한 리뷰는 따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천천히' 올려주신다니까 '천천히' 기다려보겠습니다.^^
 

'작가와문학사이'의 이번주 연재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의 작가 이기호를 다루고 있다(성령이 충만하면 갈팡질팡하게 되는가 보다). 문단에서 몇 안되는 젊은 기대주로 꼽히는 이 '육체파 소설가'(근육맨이란 뜻이 아니라 '막노동꾼'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의 '삽질'에 한번쯤 주목해보시길(최근에 작가는 인터넷방송 DJ와 대학강의를 맡아 더욱 바빠지게, 더욱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그냥 삽질로 보이는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사실 그렇게 파다보면 또 뭐가 되기도 하는 게 이 '소설-노가다판'이기도 하니까 기대는 버려두지 마시고. 관련기사와 인터뷰도 한데 모았다...

경향신문(07. 03. 24) [작가와 문학사이](11)이기호-삽질 같은 글쓰기

'소설 쓰는 노동자’. 어느 좌담에서 이기호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때 ‘노동자’란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는 임금 생활자라기보다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문자 그대로 ‘삽질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삽질하는, 아니 곡괭이질하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삽질, 아니 곡괭이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시대 소설가가 처한 곤경 혹은 광경을 잘 보여준다.

원래 ‘삽질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파내는 일”을 말하지만, 군대용어로 전용되면서 요즘에는 대개 “엉뚱하거나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죽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설을 ‘전구나 라디오’ 같은 발명품과 같은 것으로, 아니 사실은 더 못한 것으로 보는 시대에 소설을 쓰는 일은 속된 말로 삽질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소설가라면 ‘삽질’을 거부할 것이겠지만, ‘수인’의 소설가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삽을, 아니 곡괭이를 든다. 문자 그대로의 삽질을 하게 된 것이다. 25m의 시멘트벽을 뚫는 불가능한 ‘괜한 짓’은 그렇게 시작된다.



삽질로서의 소설쓰기. 그것은 ‘삽질하네!’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만큼 무용하고 비실용적인 일인 동시에, “바늘로 우물을 파는 듯한”(오르한 파무크) 고행에 가까운 힘겨운 노동이기도 하다.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가면서 홀로 죽을 힘을 다해 소설을 써도, 소설가는 한심한 인간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언젠가 홈리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도, 아무도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소설가는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삽질은 소설가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삽질을 해서, 땅을 파서 그 흙을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지하 벙커에 갇힌 채 6개월을 지내야 했던 ‘나’는 극도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우연히 흙을 먹는다. 그러다가 ‘나’는 흙맛에 매료되고 급기야 ‘나’에게 흙은 밥이 된다. ‘그냥 삽으로 대충 몇 번 파헤쳐도’ ‘나’는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흙만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밥’을 위해 그렇게 악전고투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러나 ‘누구나 손쉽게’ 흙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흙맛을 알기 위해서는 ‘흙은 먹을 수 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감각을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만든 조미료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땅 파 먹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에는 이렇게 삽질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삽질은 대개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스스로를 질책하지만, 그러면서도 자학과도 같은 삽질을 멈추지 못한다. 그 삽질은 대개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자해공갈을 하려다가 공갈(恐喝)은 못하고 자해(自害)만 한 경우(‘당신이 잠든 밤에’), 교통표지판을 잘라 고물상에 팔려고 하다가 되려 교통표지판을 수호하게 된 경우(‘아무 의미 없어요’), 국기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떼어서 팔려다가 국기 게양대와 이상한 사랑에 빠진 경우(‘국기 게양대 로망스’). 역시 삽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호는 이들을 일러 ‘이시봉’이라고 한다. 이 시봉이들은 분명 우리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그들은 사기조차 칠 수 없을 만큼 멍청하며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는 머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탓하는 대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자학을 선택한다. 물론 그들의 자학은 병리적 마조히즘도 자기 우월감의 반어적 표현도 아니다. 그런 멋 부리는 자학을 하기에 그들은 너무 우직하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우직함으로 삽질을,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계속하는지도 모른다.(심진경|문학평론가) 

한국일보(07. 03. 22) [길 위의 이야기] 정치적 올바름

요즘, 이곳저곳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이란 차별적, 혐오적인 언어로 소수그룹을 모욕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데 이 '정치적 올바름'이 근래 들어 자꾸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단 한 가지 진리만 제시될 수 있다는 믿음, 그 외에 것들은 모두 아니라는 생각. 그것이 이 '정치적 올바름'을 왜곡시키고 있는 주범이다. 그 왜곡이 가장 크게 작동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학이다.

많은 대학의 선생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교육자로 평가받고 싶어한다. 해서, 자꾸 '정치적 올바름'외에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소수의 권리를 부르짖느라, 다수의 권리는 망각하는 선생들을, 나는 많이 봐왔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이 오직 포즈로써의(*포즈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렇지 못한데, 인정욕망에 사로잡혀,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정치적 올바름'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만다. 근본적이지 못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주의는 종종 폭력의 형태로 우리 사회에 되돌아오곤 한다. 거 참, 문제다. 연기들 하지 말고 살자.(소설가 이기호)

주간한국(07. 03. 20) [이신조의 '작가와 차 한 잔'] <2> 소설가 이기호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한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해석을 하자면,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갈팡질팡이란 말 대신 우왕좌왕이나 우물쭈물, 오락가락이나 좌충우돌, 허둥지둥이나 전전긍긍이 들어간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아무튼 버나드 쇼란 작가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이 문장을 통해 그가 작품 속에서 특기로 발휘했던 씁쓰레한 자조(自嘲)의 뉘앙스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렇다면 묘비명이 아닌, 그 문장을 제목으로 내세운 소설책은 어떨까. 사실 갈팡질팡이든 우물쭈물이든, 좌충우돌이나 전전긍긍이란 말은 (한 작가의 일생보다는) ‘젊음’을 설명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단어들이다. 물론 젊음은 싱그럽고 활기차고 아름답다는 희망과 긍정의 수식어를 우선 헌사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젊음을 통과해왔거나 지금 젊음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지’ 탄식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젊음에게 ‘혼돈’은 전공필수, ‘방황’은 교양필수다.

젊음은 헤매고 더듬고 망설이고 놓치고 속고 허방을 짚는다. 시행착오는 피할 길 없으며, 창피를 당하거나 헛걸음을 치기 일쑤다. 말 그대로 갈팡질팡, 우왕좌왕, 오락가락의 나날들. 만만찮은 대가를 치르며 인생을 위한 세련의 기술을 습득해가는 시절. 그러나 인생이 짐짓 서글퍼지기 십상인 것은 많은 경우 그 세련이 그럴싸한 포장, 능란한 거짓말, 어떻게든 상처나 갈등을 면해보려는 회피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기호가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예의 ‘세련’의 문제다. 그러나 그는 애초부터 그럴싸한 포장이나 능란한 거짓말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라고 왜 번드르르한 세련의 포즈를 흉내내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결과는 무참했던 것 같다. 세련의 포즈를 취하려다 그야말로 무참하게 ‘깨지는’ 극적인 사례들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의 책을 펼쳐들면 된다.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에 좌절한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정면 돌파’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꺼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영웅이나 구도자라는 것은 또 아니다. 멋들어지게 돌파에 성공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시봉’이란 인물로 대표되는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이름부터가 벌써 좀 그렇다) 웬만한 소시민상(像)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지지리 궁상’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는 대의를 위한 거창하고 폼 나는 ‘선택’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나약한 자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자 발버둥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세상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어느 때는 거의 린치를 당하는 수준이다.

소설 속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주인공의 좌충우돌에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멋지고 근사한 주인공을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감정을 이입시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고개를 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기호의 주인공들이 그런 수모를 겪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련’ 때문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가 어쩔 수 없는 발버둥에 불과한 것이라도, 그들이 끝내 세련됨을 손에 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예의 이기호식(式) 정면 돌파는 당위성을 갖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도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삶에 대한 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은 솔직하고 정직하다. 애써 갑옷 같은 갑각류의 껍질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는 것, 그러지 않았다는 것. 생살의 쓰라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짐짓 건강하다는 뜻이다.

카페의 이름은 ‘제니스’. 좀 달콤한 것이 먹고 싶다던 그는 조언을 구한 뒤, ‘바닐라 카라멜 라떼’를 주문한다. 잠시 뒤 하트 모양의 하얀 우유거품이 떠 있는 예쁜 커피잔이 그 앞에 놓인다. 그가 웃으며 카페의 직원에게 묻는다.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어줍잖은 ‘작업 멘트’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커피 위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유거품을 만들어 얹은 것을 ‘라떼 아트’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아티스트’인 것이다. 우유거품으로 하트 모양을 내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을 그 직원을 ‘바리스타’라고 부른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뭐 어떤가.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순순히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창피를 당할까 굳이 아는 척을 한다거나, 주눅이 들어 물어보지도 못한다거나, 그게 더 지지리 궁상이다.

두들겨 맞는 얘기에 일가견이 있는 소설가와 ‘맷집’ 얘기를 했다. 이기호는 현재 한국일보에 <길 위의 이야기>라는 짧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세상살이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을 이기호 특유의 유머와 기지로 풀어내고 있는데, 무척이나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재미있다는 반응도 많지만, 몇몇 민감한 사안이나 어느 특정 단체의 문제를 언급했을 때는 바로 악플이 달리거나 항의 메일을 받거나 했다. 소설이라는 픽션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처음 써보는 칼럼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역시 여러모로 맷집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자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게 욕이건 칭찬이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잘 쓸 수 있는 건 역시 픽션이란 것도 확실히 깨달았다.”

모든 도식화(圖式化)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분류에 의하면 이기호는 ‘글월로 세상을 계몽하는 지식인’형(形) 소설가도, ‘글로 억압과 싸우는 투사’형 소설가도, ‘문자로 예술하는 고독한 댄디’형 소설가도 아니다. 신형철은 이기호를 ‘육체파 소설가’로 명명한다. ‘막노동꾼’에 가까운 소설가란 것이다. 그 말에 동의하듯, 그는 단편집 말미 ‘작가의 말’에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라고 썼다.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핵사고가 일어난 가상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상에 재앙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산 속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있던 신인작가 박수영은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게 된 수영은 자신이 쓴 소설책을 찾아내기 위해 폐허더미가 된 서점을 향해 이십오 미터 길이의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곡괭이를 들고 자신의 책을 향해 콘크리트 벽을 내리치는 소설가의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피가 흐른다.

곧잘 독자를 낄낄거리며 웃게 만드는 소설가 이기호는 스스로를 참 무취미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은 문단에 제법 알려져 있다. 여느 작가들처럼 마니아급의 예술적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도 음악도 여행도 그저 그렇단다. 컴퓨터 게임 삼매에 빠지는 일도 없고 흥미를 느끼는 특별한 잡기도 없다. 중독이라 할 만한 거라곤 담배와 축구중계 시청 정도. 경치 좋은 곳을 오래도록 산책하는 것, 멍하니 이런저런 공상에 잠기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이라 말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그의 어여쁜 아내는 “무슨 소설가가 그래요?”하며 첼로를 선물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이야 첼로 앞에 앉아 있으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어색한 게 사실이지만 덕분에 목표가 생겼다. 환갑이 되는 날, 첼로 연주회 겸 소설 낭독회를 열고 싶다. 과거의 작품이 아니라 그때 막 새로 쓴 소설을 가지고.”

이기호와 첼로!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을 익히지 못해, 흠씬 두들겨 맞으며 미련하게 곡괭이질을 해야 했던 젊은 소설가는 어찌됐든 ‘세련’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기호는 발음이 어려운 외국 영화감독의 이름이나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 앞에서는 그의 주인공 ‘시봉’처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귄터 그라스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책장이 나달나달해질 정도로 반복해 읽었으며 한나 아렌트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소설가다. “내가 쓰고 싶은 얘기는 메타 픽션(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이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며 장편소설에 대한 은밀한 결의를 밝히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갈팡질팡하다가 세련되어질 줄 알았다. 소설가 남편에게 첼로를 선물한 그의 어여쁜 아내는 올 5월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첫 장편소설에 매진하고 있는 소설가 이기호는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정면 돌파. 그는 정직하게 글을 쓰고 정직하게 아이를 키울 것이다. 힘겹겠지만 더욱 세련되어질 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참고로 작가와 필자의 친분관계상 대화는 이기호 소설의 그것처럼 지극히 리얼한 구어체로 진행되었으며, 곧 세상에 태어날 그의 아이는 필자의 예상대로 아들이란 점을 밝혀둔다.

07.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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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3-2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멋있는 말이군요! 가져 갈게요.^^

이리스 2007-03-24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품이 '그냥 삽질'로 보이시는지요?

로쟈 2007-03-2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가장이 됐으니 더 부지런해질 것 같은 작가입니다.^^
낡은구두님/ 너무 노골적인 질문이신데요.^^; 저는 '이시봉' 이야기들이 좀 싱겁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소스를 느끼기엔 좀 작위적이란 느낌을 받고요. 제 주관적인 느낌이 그렇습니다...

2007-03-25 0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학술저널 담비의 리뷰를 가끔 스크랩해놓는데, 이번에 옮겨오는 것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놀드의 '교양'론에 관한 것이다. '매슈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는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바 있지만 아직까지 손에 들어보지 못했는데 전공에 대한 관심사와도 맞물려서 조만간 훑어보기라도 할 작정이다. 아놀드 비평의 요체를 되짚어본 논문에 대한 리뷰를 워밍업으로 읽어둔다. 

담비(07. 03. 23) 매슈 아놀드의 '교양'을 다시 논하다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 1822~1888)는 영미 신비평(New criticism)이 활개를 쳤던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국내 인문학 담론 전반에서 널리 인용된 학자이다. 비평의 인문주의적 기능을 확립시킨 그는 어떠한 사적 의도도 갖지 말고 작품을 대하라는 '몰이해적 관심'(disinterestedness), 이제까지 존재한 최상의 작품과 비교해보았을 때 손색이 없어야 비로소 뛰어난 작품이라는 '시금석 이론' 등으로 유명하다.

F. R. 리비스와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정초된 문학 텍스트주의가 미국으로 건너가 남부 귀족 교수들의 보수적 세계관과 맞아 떨어지면서 제도권 평단을 석권했다는 비판이 있듯이, 이들의 사상적 鼻祖(비조)에 해당하는 매슈 아놀드 또한 그간 좌파 비평가들에게는 우파 부르주아 비평관의 원조격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소위 아놀드 때리기와 이에 맞선 아놀드 구하기가 영미 문학계 내부에서 진행되어온 것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 후 영국사회에 불어닥친 이념의 혼란상을 타개하기 위해 '비평' 기능의 회복을 주장하거나,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이 대중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면서 '교양' 개념을 통해 대중의 문화적 수준향상을 꾀하려했던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The Function of Criticism at the Present Time, 1864)과 '교양과 무질서'(Clture and Anarchy, 1869) 등의 저작을 통해 새로운 비평을 제안하고 그 핵심으로 교양 개념을 제시했다.

이런 아놀드의 기획에 대해 전형적인 맑스주의적 비평을 가한 이는 테리 이글턴이다. 그는 아놀드가 당대 계급세력의 급진적인 재편을 지배블럭 안에서 효과적으로 달성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기존체제로 포섭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고 비판했다. 귀족계급이 급속도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부르주아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문화적 패권 확보가 아놀드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본 것이다. '문학에서 문화연구로'의 저자 앤서니 이스트호프 또한 "아놀드의 교양이념에서 문학이 계급갈등을 희석시키고 국가적인 조화를 긍정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이글턴과 이스트호프는 당연히 문학의 정치적 읽기로 나아간다. 이들의 단골메뉴는 대중문학(문화)과 고급문학(문화)의 위계철폐다. 그러나 요즘 이런 주장의 효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담아내기보다는 자본의 확장에 동원되는 측면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철지난 '아놀드 때리기'와 '구하기'에서 벗어나 그의 핵심사유를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 김재오 영남대 교수(영문학)가 최근 '19세기 영어권 문학' 제10권 2호에 발표한 '아놀드의 사상-민주주의, 비평, 그리고 교양'이 그것이다. 김 교수는 "아놀드가 오늘날 대중문화의 자본종속과 같은 사태를 누구보다 우려하고 그 폐해를 실감했다"는 점에서 볼 때 "아놀드의 비판대상이 되었던 관점으로 아놀드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흐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아놀드의 이데올로기적 입장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아놀드의 주장을 거꾸로 읽어야 올바른 독자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 효과'"라며 김 교수는 목소리를 높인다. 아놀드의 현실인식이 '정치적 정답'과 일치하느냐의 여부보다 그의 비평과 교양개념에 담긴 당대적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오늘날의 현실을 진단하는 데 유용한 참조틀이 될 것이라며 아놀드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우선 김 교수는 아놀드의 첫번째 비평적 주저에 해당하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이 프랑스 혁명 후의 영국사회의 변화상에 대한 사상적 대응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아놀드가 보기에 당시의 문인들은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처럼 '창조성'이 중요한 사상의 흐름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 '인간의 힘'과 같은 것이 부족했고 필요했다. 아놀드는 바이런과 괴테가 위대한 창조력을 갖고 있었지만 괴테가 삶과 세계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력이 더 오래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놀드는 워즈워드를 비롯한 이전 세대 시인들이 프랑스혁명의 여파를 전 유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했고, 그 이념의 전파가 몰고 올 영국사회의 변화를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지 못한 점이 불만스러웠다.

먼저 프랑스혁명과 영국혁명의 차이를 보자. 아놀드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이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사상에서 그 동력을 발견한 것이었고, 영국의 경우는 법이나 양심 등의 실제적인 감각에 기초한 것이기에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을 두개로 쪼개서 보았다. 사상적 혁명에서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혁명에서는 실패했다고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에드먼드 버크에 동조했다. 버크는 프랑스의 과격한 혁명문화가 영국에 밀어닥칠 것을 우려한 대표적인 보수파 지식인이다. 주권재민의 원칙은 영국에서 시발되었으나 권리장전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로 건너가 형멱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해 버크는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정리했다. "주권재민의 원리는 영국 토양에 전적으로 맞지 않으나 영국에서 자란 가공되지 않은 산물로서 어떤 사람이 이중의 사기로 불법적으로 선적해 [프랑스에] 수출한 위조품이다. 이 수출의 목적은 이 위조품을 향상된 자유라는 최신 프랑스식의 유행을 따라 다시 제조해서 영국에 밀수입하려는 데 있다."

대단히 역동적인 정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여기서 아놀드가 읽어낸 교훈은 "훌륭한 사상들을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 즉각적으로 적용하려는 열광은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사상은 '그 자체로' 평가해야 하나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사상의 본질을 왜곡하면서까지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보았다. 김 교수는 여기서 "아놀드의 사상은 정치이념으로서의 성격보다는 한 문화를 성장시키는 정신적 토양에 가깝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명제가 김 교수 논문의 핵심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사상이 과연 보편적인가를 심각하게 질문했던 것이다. 그 방식은 바로 그것을 영국사회의 특수성 속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것은 '추상적'이라는 판단을 받게 된 것이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세계에 작용하는 '사상'에 대한 필요성이 아놀드에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교양' 개념은 이런 필요성에 따라 등장한 개념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 '교양'이 '프랑사(*프랑스)의 사상'과 다르게 하기 위해 그는 독일에 눈을 돌렸던 듯하다. 쉴러 같은 독일 관념론자들에서 잘 나타난 '인격도야(Bildung)의 개념이 그것이다. 리딩스(Bill Reading) 등의 지적에 따르면 독일 관념론자들의 기획은 지식과 역사적 전통을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매개하여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교양(문화)의 이상을 드러내는 일과 개인의 발전을 하나의 과정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의 국민적 기질은 거의 상반됐다.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개인주의가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아놀드는 개인적 도야를 역으로 틀어 당시 영국에 퍼지던 물질적 문명에 대한 맹신, 강한 개인주의, 융통성의 부족(똘레랑스의 실종?) 등의 문화적 에토스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양'을 설정했다.

교양이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학문적 열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에의 충동, 인간적 오류를 개선하려는 사회적 동기와 결합한다. 무엇보다 아놀드는 교양의 이념을 국가 개념과 결합시키려고 노력한다. 노동계급이 오랜 봉건적 습속에서 벗어나 자유 그 자체를 숭배하는 무질서한 경향이 뚜렷해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놀드의 노동계급에 대한 시각은 일방적인 면이 있음을 김 교수는 인정한다.

계속 지적하자면 아놀드에게는 계급의 현실이 부차적이거나 항상 생략됐다. 교양의 작용이 계급을 없애려면 계급간의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우선적 고려사항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아놀드 교양이념의 재료를 발견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은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의 탁월한 윌리엄즈는 "교양개념은 올바른 실천과 앎이 결합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지 않고 '앎'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일종의 '물신'이 되어버렸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결론에서 아놀드의 교양개념이 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측면이 많지만,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는 길목에 '교양'의 이념이 있음을 강조했고, 그 이념을 당성하는 데 '문학'의 역할이 있음을 알렸다는 측면을 높이 평가한다. 김 교수의 논문은 아놀드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그 장단점을 잘 정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양이라고 일컬어지는 가벼운 것들과 아놀드의 교양을 비교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을 듯하다.(리뷰팀)

07.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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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3-24 17:16   좋아요 0 | URL
예전에 문학권력 논쟁하던 무렵에 강준만 교수가 덕성여대 영문과 윤지관 교수를 비판하면서 매슈 아놀드를 언급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윤지관 교수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철지난 보수적 이론가인 아놀드를 가지고 얘기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 같은데^^ 그 이상은 아는 바가 없네요. 그때의 논쟁은 어떻게 정리가 됐었나요?

로쟈 2007-03-24 23: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억은 나는데, 결말은 모르겠습니다(결말이 따로 지어졌는지도 모르겠구요).^^; 백낙청 교수의 경우도 그렇지만 '보수적 비평가'를 준거로 삼는 건 창비의 기본 포지션입니다. 그 자체가 비난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징후적이란 생각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