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나온 가장 눈에 띄는 신간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이다. 출간 소식은 이미 이달초부터 접했고 '물건'이 나오기만을 고대하던 참이었다.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에 이어서 근 1년만에 가라타니의 책이 출간된 것인데, 출판사에서는 연이어 그의 책들은 낼 모양이다(표지에서 큼지막한 '1'자가 뜻하는 바이다). 이번 타이틀이 '세계공화국'인데, 그의 비평은 막바로 '비평의 세계화'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국내 비평집들이 초판을 소화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유독 그의 비평집들만이 독자들로부터 환대와 환영을 받아온 탓이다. '비평'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그간에 불철저했던 것이 아닌가 돌이켜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책은 내일 역자에게 받기로 했는데, 그 전에 리뷰 먼저 읽어둔다. 마침 오늘자 한겨레의 '책과 생각'의 1면을 다 책임지고 있군...  

한겨레(07. 06. 09) 국경을 지워라, 느린 혁명으로 

가라타니 고진(66)은 일본 지성계를 대표하는 비평가다. 1970년대까지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가 누렸던 지위를 1980년대 이후 가라타니가 대체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마루야마가 ‘사상계의 천황’이었다면, 가라타니는 그 천황의 자리를 뒤엎은 전복자다. 그는 무리를 거느리지 않은 단독자다. 그는 자객처럼 지배적 사상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심장을 겨냥한다. 그의 무기는 전방위로 뻗친 지식과 불온한 비판성이다. 문학에서부터 철학·경제학·역사학·언어학, 심지어 건축학과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르네상스적 지식의 힘으로 그는 현실이라는 괴물의 딱딱한 외피를 뚫고 탄환처럼 그 속살을 관통한다. 그의 최근 작업은 그 괴물이 고꾸라지고 난 뒤에 열리는 시야를 보여준다. 그의 2006년 저작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그 시야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1845년 카를 마르크스가 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세계공화국으로>를 쓴 가라타니의 경우에 정확히 대응한다. 이제까지 그의 작업이 불온성을 내장한 해석이자 비판이었다면, <세계공화국으로>는 명백히 ‘변혁’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책은 마르크스가 ‘테제’를 쓰고 3년 뒤 작심하고 집필한 <공산당 선언>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 말하자면 이 책은 팸플릿이고 선언문이며 새 세계를 향한 이행 전략론이다. 팸플릿 성격이 강한 만큼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다른 책들이 무수한 전문용어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지만, 이 책은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지은이는 고등학생을 포함한 일반인이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당대의 여러 사회주의 조류와 대결했듯이, 가라타니도 이 선언문에서 기존 이념과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의 대결 지점은 마르크스와 이마누엘 칸트다. 기존의 변혁 운동이 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논거로 마르크스가 동원된다면, 칸트는 마르크스를 넘어 세계 변혁의 방향과 전략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다. 칸트의 한계를 마르크스가 뛰어넘었다는 전통적 견해를 거의 정반대로 뒤엎은 꼴이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마르크스 이론의 치명적 약점은 ‘국가론’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분석에서는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지만, ‘국가’에 관한 한 시종일관 프루동주의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국가 없는 세상을 꿈꾼 근대 아나키즘의 시발점이다. 프루동은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뒤엎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 곧 생산자 협동조합 체제를 만들면 국가가 소멸할 것이라고 보았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하는 외부적 장치일 뿐이므로 자본주의가 무너진다면 국가라는 껍데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생각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프롤레타리아가 연합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무너뜨리면 국가는 사라진다고 믿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면,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일시적 국가기구를 상정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독재론은 혁명의 구체적 상황에서는 국가기구를 일시적으로 틀어쥐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지, 국가의 자연스런 소멸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가라타니는 프루동-마르크스가 국가 안에서 국가를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다고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국가란 다른 국가에 대항해서 존립한다. 국가를 내부의 힘으로 해체한다고 해도, 다른 국가들이 먹어치워 더 큰 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다른 국가들이 있는 한 국가는 해체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프루동의 아나키즘은 순진한 사상이다. 그렇다면, 세계동시혁명으로 일거에 모든 국가를 철거해 버리면 되지 않는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에서 그런 가능성을 내비쳤는데, 가라타니는 단호하게 이 책의 주장을 부정한다. <제국>은 1990년 이후 세계가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제국이 됐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수많은 국민국가들의 갈등과 경합 체제다. 다중의 반란이 제국의 그물을 찢어낼 것이라는 전망도 가라타니가 보기엔 환상이다. 다중의 반란은 세계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개별 국민국가만 더욱 강화시키고 말 것이 틀림없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프루동-마르크스를 그대로 이어받은 ‘국가론 없는 아나키즘’이다.

그렇다면 변혁의 전망은 없는 것인가. 여기서 가라타니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주목한다. 개별 국민국가들의 팽창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외부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국가 내부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것대로 계속해야 하지만, 인류적 차원의 집합적 힘으로 국민국가의 준동을 억누르고 궁극적으로 그 국가를 소멸시켜야만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총체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 칸트는 그런 외적 장치로서 ‘세계공화국’이란 이념을 내놓았다. 현재의 국제연합(유엔)이 장래의 세계공화국 모태라 할 수 있다. 그 실천의 첫발은 국민국가들의 군사 주권을 국제연합으로 넘기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세계공화국은 먼 미래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변혁이라기보다는 점진적 이행에 가깝다. 그러나 이 점진성이야말로 진정한 변혁의 경로다. 인류를 이끌어주는 이념 또는 이상 아래서 오늘의 현실과 싸우는 것, 가라타니가 그의 선언문에서 밝히는 전략이다.(고명섭 기자)

삐딱이는 나의 힘!
가라타니, 주류에 끊임없이 저항…‘퇴물 공산주의’ 부활 나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에서 이력을 시작한 사람이다. 1969년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에 관한 글로 비평계에 입문한 뒤 1972년 첫 비평집 <불안에 떠는 인간>을 출간했다. 문학비평가로서 그의 이력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2005년 <근대문학의 종언>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비평가라는 규정은 가라타니라는 지식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의 삶을 일관하는 것은 ‘주류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일본 지식계에 프랑스 탈구조주의 운동을 소개하고 퍼뜨린 사람이었다. 뭉뚱그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 흐름을 앞장서서 받아들인 것인데, 그것은 근대주의적 억압 질서에 대한 지적 저항의 한 방식이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 시절에 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그 저항의 학문적 결과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서 그는 미셸 푸코의 고고학 방법을 원용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파고들어갔다. 근대적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난 뒤 국민문학이 성립됐을 거라는 상식적 믿음을 깨뜨리고, 제도로서 형성 중이던 근대문학이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음을 입증했다. 국민이라는 관념이 성립한 것이 최근의 일임을 문학 연구로 보여준 것이다.

1978년 출간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도 시대 흐름을 삐딱하게 보는 그의 반골 정신이 밴 작품이다. 그 시절 일본 지식계에서 ‘마르크스’ 하면 퇴물 취급을 받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마르크스를 혁신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내려 했다. 1980년대까지 프랑스 철학의 영향 아래 ‘해체주의’를 실천하던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비평적 태도에 깊숙한 변화를 겪었다.

해체주의란 사실상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영향력에 맞서 그 이념의 억압성을 고발하는 것인데, 그 사회주의가 파산해버린 것이다. 일본 안에서도 사회당과 공산당이 몰락하고 좌파가 궤멸했다.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난 뒤에도 계속되는 해체주의란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바지가 될 뿐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가라타니는 모두들 ‘공산주의는 끝났다’며 돌아선 지점에서 다시 ‘코뮤니즘’을 되살리는 작업에 나섰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변화시키는 이론”이 필요함을 절감한 것이다. 10년 가까운 작업 끝에 내놓은 <트랜스크리틱>이 그의 새로운 관점을 담은 책이다. <트랜스크리틱>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는 과정에서 칸트를 만났다. 내가 하려고 한 것은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었다.”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런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트랜스크리틱>의 후속 작업으로 그가 하고 있는 것이 <트랜스크리틱 2> 저술인데, 이 저술을 대중적 문체로 풀어내 미리 보여준 것이 이번에 출간된 <세계공화국으로>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보면 오히려 아나키스트 쪽”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아나키즘을 비판한 <세계공화국으로>는 일종의 자기비판인 셈이다. 그 자기비판으로써 가라타니는 새로운 세계전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7.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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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6-09 21:59   좋아요 0 | URL
'지은이는 고등학생을 포함한 일반인이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 나네 ..^^ 그래줘야겠지요?.^^;; 일단 보관함으로 골인.

로쟈 2007-06-09 23:12   좋아요 0 | URL
'장바구니'로 가야 주문을 하실 수 있는 건데요.^^

자꾸때리다 2007-06-10 22:58   좋아요 0 | URL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가지고 뭔가 굉장히 현실적인 대안인 척하는 사람들, 게다가 특히 (자칭-타칭) 좌파, 내지는 맑스주의자라는 사람들을 보면 '아 이제는 이 사람 정말로 할 얘기가 다 떨어졌구나'라는 생각만 든다. 철학을 핑계로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가장 형식적인 논의를 끌어와서 논지를 전개하는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하는 회의와 함께. ] 양창렬 씨의 클럽에 가니 어느 분이 이런 리플을 달으셨더군요. 로쟈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7-06-10 23:25   좋아요 0 | URL
고진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발언 같네요. 그렇게 말하자면 세칭 '고전들'이란 게, 그리고 '읽기' 혹은 '비평'이라는 게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것이지요...
 
왕가위와 레르몬토프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에 곡을 붙인 '나 홀로 길을 나선다'를 그냥 흥얼거리다가 문득 예전 모스크바 통신에서 '레르몬토프의 고독'이란 페이퍼만 유독 정리해놓지 않은 걸 알게 됐다(이것도 그의 고독에 대한 배려였을까?). 바쁠 때일수록 이렇게 딴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놓는다(모스크바통신에서는 푸슈킨 시와의 비교도 다루었었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한다). 참고로,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는 링크해놓은 '왕가위와 레르몬토프'를 참조하실 수 있다. 러시아 가수 올렉 포구진이 부르는 노래는 http://www.youtube.com/watch?v=DcNMQIT-FCo 에서 들어보실 수 있고(예전에 국내 드라마에서는 여자가수가 부른 버전이 주제가로 쓰였었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했는데, 나는 이 50번째 통신문에서도 그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유리 미하일로비치 레르몬토프(1814-1841)에 대해서 말이다. 푸슈킨에게서는 기념비란 테마가 시인 자신에게서조차 주제화되며, 그의 예언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탄생 100주년(1899), 사망 100주년(1937), 탄생 200주년(1999) 등이 매번 성대하게 치러진 반면에, 고독의 시인 레르몬토프는 그의 문학적 유언(<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걸맞게 언제나 혼자였다(*이 시마저도 종종 푸슈킨의 시로 오해받는다고 한다!)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1914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사망 100주년이 되던 1941년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2차대전은 1939년에 발발하지만,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던 독일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비로소 참전한다). 해서, 러시아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인/작가이자 러시아 낭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 러시아에서 한번도 제대로 기념되지 못했다(그의 지명도에 비추어보면, 거의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리고 올해(*2004년)는 그의 탄생 19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역시나 그와 관련된 행사들은 (내가 아는 한) 치러지지 않았다(체홉 사망 100주년에 묻혀서). 그저 문학신문의 기념 기사 한 자락 정도.

하다못해 2주전 일요일에는 그의 탄생 190주년을 기념하여 대표작인 <우리시대의 영웅>(1964) 등이 문화채널에서 영화로 방송됐지만, 그날 따라 나는 저녁 늦게야 TV프로그램을 확인했다(그의 탄생일은 1814 10 3일이다. 2일 밤인데, 보통 3일로 기록한다. 이게 구력일 것이기 때문에, 지난 17일이 신력에 따른 생일이었을 것이다. 결투로 인한 사망은 1841 7 15.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개죽음이로군!이라고 간단히 언급했다. 한편 최초의 레르몬토프 전기는 파벨 비스코바트이의 것이며 1891년에 나왔다. 이 책은 올해 재출간됐다). 나는 레르몬토프를 전공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버린 일이 한동안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사실 그에 대한 본의 아닌 홀대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조국 한국에서는 레르몬토프를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지난 1999년에 전집이 간행된 푸슈킨과 다르게 그나마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레르몬토프의 시집과 소설 <우리시대의 영웅>(한길사, 조선대출판부)은 진작에 품절되었다(<우리시대의 영웅>은 영어 중역본도 나와 있었지만 역시 품절. 참고로 영역본 <우리시대의 영웅>은 나보코프가 그의 아들과 함께 옮긴 것이다). 그의 드라마 <가면무도회> <러시아희곡1>(열린책들)에 들어가 있지만, 이 책 또한 품절인 걸로 안다(그의 <가면무도회>는 지금도 모스크바의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이번 시즌에 포킨이 연출한 고골의 <외투>와 함께 내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레퍼토리이다).

 

해서, 아마도 당장에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레르몬토프는 내가 아는 한 없을 듯하다(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건대출판부에서 나온 작가론 <레르몬토프>를 소략한 대로 참조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우리말로 쉽게는 읽을 수 없는 시인/작가인 셈이다(참고로, 레르몬토프의 러시아어 전집은 2권짜리에서 10권짜리까지 다양하며, 보통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4권짜리 전집이다(*이미지는 단행본 <우리시대의 영웅>).

 

 

한편, 푸슈킨과 마찬가지로 그는 장교시절에 포르노그라피적인 시들도 썼는데, 그런 시들만을 따로 묶은 <성인을 위한 레르몬토프>도 올해 출간됐다. <성인을 위한 푸슈킨>과 함께. 두 책 모두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도색화보들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한국에서라면 도색잡지로 분류돼 판금될 만한 책들이다).

 

해서, 생전에나 사후에나 고독한 그의 운명과는 비록 다소 걸맞지 않아 보일지라도, 약소하지만 이 50회 통신문은 (무심코 지나친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뒤늦게) 그에게 바치고자 한다(이런 걸 뒷북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뒷북이라도 치는 것이다). 이건 며칠 전에 작정한 것인데, 좀 전에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해치우기로 했다. 그렇다고 새로 무슨 글을 쓰는 건 아니고(그럴 형편이 안되므로), 이전에 쓴 글을 약간 편집하는 정도이다(휴식시간 동안 그 일이 끝나기를 바란다).

 

글은 주로 레르몬토프의 연애시에 대한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푸슈킨과의 대비 속에서 레르몬토프를 이해하기 때문에, 푸슈킨의 연애시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이다(*이번엔 생략한다). 사실 레르몬토프가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것은 1837년 푸슈킨을 죽음을 권력층의 음모로 비판한 시 <시인의 죽음>을 발표하면서이다. 푸슈킨의 죽음에 부친 시이면서도 정작 푸슈킨이란 이름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인이 죽었다! - 명예의 노예 -

헛소문과 비방으로 쓰러졌다,

가슴에 복수의 열망과 총알을 박은 채,

당당한 머리를 숙이고 쓰러졌다!

시인의 영혼은 사소한 모욕의

불명예를 참지 못하고,

그는 세상의 소문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혼자서, 예전처럼... 그리고 살해당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 일로 유배당하며, 그에 대한 황제의 미움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이후에 불과 4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레르몬토프 전공자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레르몬토프와 마찬가지로) 27살에 죽었다면 역시나 총각으로 죽었을 시인 푸슈킨(1799-1837)의 문학적 명성이 레르몬토프를 크게 앞지르진 못했을 것이며, 고골(1809-1852) <검찰관>(1836) 공연의 스캔들로 아마 상심해서 죽었을 것인바 아주 재미있고 재능 있는 괴짜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고, 톨스토이(1828-1910)는 자전 3부작이나 끄적거리다가 문학사의 여백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또한 페트라셰프스키 사건(1849)으로 말미암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을 것인바 고골의 아류 작가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것도 다 팔자인 걸 어떡하랴   

 

04. 10. 26/ 07.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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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2. 레르몬토프와 페초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9 00:39 
    아트앤스터디에서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Joule 2007-06-09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기 위에 턱에 손 괴고 얼짱 각도로 나온 사진이 레르몬토프인가요?... 흠, 음...그러니까...이건...뭐랄까...다음에 만나면 손 각도가 틀렸다고 전해주세요. (후다닥)

로쟈 2007-06-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 <우리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 같습니다. 자전적인 부분도 있지만 레르몬토프는 아니죠...
 

얼마전 지성사가인 스튜어트 휴즈(1916-1999)의 '서구 지성사 3부작'이 출간됐다. 오래전에 나온 국역본들이 때깔을 달리해서 재출간된 것이라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나도 3부작 중의 두 권(1,2권)은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 알길이 없다. 예전에 나온 책의 모양새가 궁금한 독자라면 나귀님의 페이퍼(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255649)를 참조해볼 수 있겠다. 새번역도 아닌 다음에야 다시 사두기도 뭐한 책이어서 자세한 리뷰만 챙겨두도록 한다.

경향신문(07. 06. 09) 20C 들추면 ‘지식인의 위기’ 답이 있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등고시 등에서 특정 기수에 인재가 몰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발견된다. 이런 현상은 어떤 조직에서나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회사든 학교든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경우가 흔하다. 대표적으로 공자,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기원전 500년 전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약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서유럽에서 1890년대 이후 40여년간은 20세기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와 지성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로 꼽힌다. 흔히 좁은 의미의 ‘세기말’로 통칭되는 19세기 말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친 20세기 초를 관통하는 때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막스 베버, 베네데토 크로체, 에밀 뒤르켐, 앙리 베르그송, 카를 융, 오스왈트 슈펭글러 등 독보적인 이론을 세운 지식인들이 출현한 그 시기다.

유럽 지성사 연구의 권위자 스튜어트 휴즈가 이 시대를 각별하게 주목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전후 유럽사 분야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낳은 연구자로 평가된다. 스스로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지적 교양은 주로 유럽적이라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그의 역저 ‘서구 지성사’ 3부작은 이 대변혁기와 2차 세계대전을 거친 또다른 격동기의 서유럽 사상사를 인물과 형성과정 중심으로 접근한 현대 고전이다. 이런 점이 통상적인 사상사와 차별화된다.

이미 40여년전에 첫 출간되기 시작했던 이 책들은 오늘날까지 이를 능가하는 저술이 없을 정도라는 호평을 받는다. 이처럼 오래 전에 첫 선을 보였던 책의 번역본 ‘서구지성사’ 읽기가 이 시대에 요긴한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운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7년 6·10항쟁 이후 지금처럼 ‘지식인의 몰락’이라고까지 표현될 만큼 지식인 담론이 우울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3부작은 전체적으로 중요한 시기의 지성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정립하려는 목표를 설정했다. 개개인의 전기적(傳記的) 요소를 중시하는 한편 그 시대 지성인들의 동선(動線)에 역점을 두고 재구성한 점이 특기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일련의 지적 전기는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선 단순한 사상사가 아니라 ‘개념화된 사회사’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통상적인 사상사가 다 익어서 수확한 과일을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이 책들은 과일나무에 과일 하나하나가 열리는 과정을 자세히 소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를테면 지적 거장들 가운데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는지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문장은 시종 품격이 있으면서도 글맛이 느껴진다. 짧은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모든 종합자들 중에서 아도르노는 가장 눈부신 성과를 올렸지만, 그는 그런 멋진 고공비행을 하면서도 헤겔주의라는 귀찮은 모래주머니를 영원히 끌고 다녔다.”



1권 ‘의식과 사회’(황문수 옮김·2만5000원)는 3부작의 중심축을 이룬다. 휴즈는 1890~1930년까지 40년간의 지성적 상황을 실증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대결 구도로 삼는다. 여기에다 무의식의 등장과 주관주의에 비중을 두고 시대를 정리한다. 이에 따라 중심 인물로 프로이트, 베버, 크로체를 세우고 있다. 그 주변에 뒤르켐, 베르그송, 융, 슈펭글러, 안토니오 그람시, 앙드레 지드, 토머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헤르만 헤세 등 수많은 지성들을 배치한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소문난 프로이트의 지적 세계를 이 책만큼 명쾌하게 해부한 것은 찾기 힘들다는 평판을 얻을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다. 저자는 1930~60년의 지적 세대를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첫번째는 프랑스 사람으로 한정했다. 두번째는 유럽과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이나 영국에 정착한 반(反)파시스트 망명자들로 구성됐다.

2권 ‘막다른 길’(김병익 옮김·2만원)은 앞의 프랑스 지성인들을 다뤘고, 3권 ‘지식인들의 망명’(김창희 옮김·2만원)은 두번째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엮은 것이다. 휴즈는 프랑스 사상사에서 1930~60년대의 한 세대를 ‘절망의 시대’로 상정한다. 그렇지만 ‘막다른 상황’을 타개하는 마지막 희망을 알베르 카뮈, 테야르 드 샤르댕,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서 찾아낸다. 3권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라는 시련에 직면한 지식인들의 고뇌를 현실감 있게 엮어냈다. 3부작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같다. 각기 독립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심층적인 지성사를 공부하고 싶은 독자들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사를 곁들여 읽으면 한층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에 함께 나온 니콜 라피에르의 ‘다른 곳을 사유하자’(이세진 옮김·1만4000원·푸른숲)도 더불어 읽을 만하다(*엊그제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은 ‘서구 지성사’ 시리즈 3권 ‘지식인들의 망명’과 비교된다. 20세기 초 망명한 지식인들로부터 학제간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지금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비판적 지식인들의 삶과 사유를 다루었다는 점이 흡사하다. 이 책은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소통을 이야기한다. 들머리에 인용한 “세계가 그토록 광대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흩어지기 위함이니”라는 괴테의 말이 이 책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상징하는 듯하다.(김학순 선임기자)

07. 06. 08.

Dominick LaCapra

P.S. '지성사'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이름은 도미닉 라카프라(1939- ) 미 코넬대 교수이다. 그의 <지성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Intellectual History)>(1983), <역사, 정치 그리고 소설(History, Politics, and the Novel)> 등을 소장하고 있어서겠다(최근작들이 아니어서인지 마땅한 책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언제 번역서들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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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뉴스메이커의 '커버스토리'(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4657)는 '일본소설에 점령당한 한국소설'이다. 타이틀이 좀 선정적이긴 하지만 한국소설의 현황을 짚어보는 기획기사로서 의미가 있어 뵌다. 물론 기사에서 소설은 '상품'으로서의 소설을 가리킨다(어제는 '중국소설이 온다!'란 기사를 퍼왔는데, 요약하면 한국소설의 현황이란 경제와 마찬가지로 일본과 중국 사이의 '샌드위치'이다). 거기에 현장에서 뛰고 있는 5명의 젊은 작가들(김중혁, 이기호, 김애란, 박민규, 김언수)의 인터뷰 기사도 같이 싣고 있는데, 여기서는 기획관련 기사만 네 꼭지 옮겨놓는다. 이런 기사에 흥미를 갖는 독자란 어떤 부류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부류에 속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쁜 와중에도 기꺼이 이런 펌질을 무릅썼으니...  

 

뉴스메이커(07. 06. 12) 일본소설에 점령당한 한국소설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 베스트셀러 시장을 점령했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도 더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쉽고 재미있는 일본소설. 독자들의 읽고 싶은 욕망을 우리 작가 대신 채워주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한국소설의 싹을 틔울 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상상력과 글쓰기로 무장한 신예작가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그들은 과연 한국 소설시장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소설의 위기’. 요즘 출판계를 달구는 최대 담론이다. 김훈과 공지영을 제외하면 잘 팔리는 작가가 없다는 하소연이다. 문학전문 출판사들은 “한국소설은 이제 어떤 작품을 내도 팔리지 않는다”고 푸념한다. 한국소설의 위기론에 더욱 불을 지핀 것은 일본소설의 인기다. 일본소설의 선전은 대형서점이 집계하는 베스트셀러 목록만 훑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교보문고 5월 3째 주간 베스트셀러 10위권에 든 한국소설은 김훈의 장편 ‘남한산성’(1위)과 은희경의 단편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4위) 뿐이다. 반면 일본소설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르헨티나 할머니’(3위)와 ‘키친’(10위),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6위)와 ‘면장 선거’(9위), 요시다 노리코의 ‘눈물이 주룩주룩’(8위) 등 무려 다섯 권이다.한국소설시장을 일본소설이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키 마니아 국내에 5만 명 이상

지난해에도 한국 시장에서 일본소설의 존재는 눈부셨다. 그나마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리고 일본작가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작업한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2006년 전체 소설 집계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게 잔뜩 위축된 한국문단에 촉촉한 단비가 됐다.

일본소설이 한국독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1989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국내에 소개되면서부터다. 다른 출판사가 원제 ‘노르웨이숲’으로도 출간한 적 있는 ‘상실의 시대’는 지금까지 70만 부가 팔렸다. 이후 하루키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속속 소개됐고 일본소설은 한국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해 ‘해변의 카프카’ ‘어둠의 저편’ ‘도쿄괴담집’ 등 하루키 소설의 상당수를 번역 출간한 문학사상사의 정종화 팀장은 “국내에 하루키 마니아가 5만 명 이상 형성돼 있어 하루키 소설의 경우 10만 부 안팎은 기본으로 판매된다”고 말했다.

199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를 필두로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가 한국에 충성스러운 독자를 양산했다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츠지 히토나리 등의 인기는 2000년대에 구축된 것이다. 한국소설의 부진과 대조적으로 일본소설이 부쩍 사랑을 받자 국내 출판사의 관심은 일본작가에 집중했다. 이는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 소개된 일본소설의 폭발적 증가가 입증한다. 2003년 191종이 번역된 일본소설은 2004년 242종, 2005년 420종을 거쳐 2006년 무려 462종이나 출간됐다.

일본의 스타작가를 잡으려는 국내 출판사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본소설의 저작권료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일본소설과 한국 출판사를 연결하는 에이전시가 국내 출판사 간 경쟁을 부추기면서 호가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빅히트 일본소설인 ‘공중그네’와 신작 ‘면장 선거’의 국내 저작권을 가진 은행나무 주연선 사장은 “국내 출판사 간의 과당경쟁 탓에 3년 전에 비해 일본소설에 대한 저작권료가 적게는 2~3배에서 많게는 10배 이상까지 뛰었다”고 말했다.

주 사장에 따르면 아쿠다가와상이나 나오키상 등 일본의 각종 문학상 수상작이나 서점관계자들이 가장 기대되는 작품에 시상하는 서점대상 수상작의 경우 불과 3년 전만 해도 선인세 개념의 저작권료로 1000만~1200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 하지만 지금은 1억 원 이상을 줘야 한다. 수상작이 아닌 소설의 저작권료도 종전엔 200만~300만 원 수준이던 것이 지금은 800만 원 정도다. 물론 저작권료로 지불한 것 이상으로 책이 팔릴 경우엔 그에 따른 인세를 추가로 줘야 한다. 국내 출판된 일본소설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작품이 전체의 10% 수준임을 감안하면, 일본소설에 대한 ‘묻지마 수입경쟁’이 국내 출판사에 큰 손실을 끼칠 수 있다는 얘기다.

분명한 사실은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 상위에 일본소설의 비중이 높은 것은 일본소설에 한국독자를 매혹하는 힘이 있음을 입증한다는 점이다. 출판관계자들이 “일본소설의 저작권료에는 분명 거품이 있지만 작품 자체에는 거품이 없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일본소설의 선전과 한국소설의 부진. 공지영과 김훈을 빼면 한국소설은 어떤 작품을 내도 되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고 있다. 사진은 교보문고 국내소설 코너. <김재구 기자>

일본소설 저작권료 10배 이상 뛰어

요즘 한국독자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소설은 공통적으로 무거운 주제도 가볍고 밝고 재미있게 서술하는 장점을 지녔다. 출판칼럼니스트 박지현씨는 “요즘 젊은 세대는 지나치게 무겁고 진지한 것을 반기지 않고, 음악을 듣거나 잡지를 보듯이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어떤 독특한 것을 원한다”며 “일본소설은 바로 그런 욕구를 채워준다”고 밝혔다. 소설가 박민규씨는 최근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서 “지금 일본소설이 많이 팔리는 이유는 일본문학이 그만큼 앞섰기 때문”이라며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오랜 세월동안 소설을 써오면서 노하우를 축적한 결과”라고 말했다.

또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일본소설이 잘 팔리기 때문에 한국소설이 안 팔리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출판연구소 백원근 부장은 “독자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국내소설의 등장이 부진한 상태에서 새로운 공급처를 찾아야 했고 그 경로 중 하나인 일본소설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소설이 채워주지 못한 틈새시장을 일본소설이 치고 들어온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소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소설은 지나치게 무겁고 서사가 약하며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비판이 일반적이다. 또 ‘끼리끼리 잘 봐주기식’의 ‘주례사비평’에 대한 환멸 그리고 단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문학상 제도도 한국소설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한국문학이 성장한 것은 6·25전쟁, 남북분단, 독재권력 등 역사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겪었기 때문”이라며 “문제는 이 같은 외적 조건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젊은 세대의 생활상과 가치관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까지 한국 작가들은 거대담론이나 후일담 또는 공격적 페미니즘 소설을 들고 나온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문학에는 달라진 삶의 형태와 고민을 담아내야 하는데 우리 소설은 여전히 과거패턴을 답습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역시 계간 ‘세계의 문학’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독자들은 즐기기 위해 또는 뭔가 도움을 받기 위해 책을 읽는데 한국소설의 주류를 이루는 작품들은 여전히 민족적·국가적 측면에 몰두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소설가 박민규가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가 마련한 좌담에서 “한국문학은 단 한 번도 번성한 적이 없고 이제 겨우 습작기에 들어간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내뱉은 말은 꽤 설득력이 있다. 박민규는 “기존의 한국소설, 한국문학을 젊은 세대들이 올드하게 느낀다고 하는데 올드해서가 아니라 실은 어려서 그런 것”이라며 “이유는 우리의 진도가 여기까지인 것이고, 지난 수십 년간 그나마 우리가 일군 것은 리얼리즘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사실과 환상은 문학이 가진 두 개의 유전자 줄기인데, 한국소설에 공상과학(SF), 추리소설, 공포소설, 판타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소설의 점령 속에서 한국소설은 정말 바람 앞에 선 촛불과 같은 신세인가.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한국소설이 싹을 틔워 꽃을 피우려 하는 시기라는 희망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문화평론가인 서영채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1980년대만 해도 문학은 현실에 대해 실천적인 힘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리얼리즘적 기준이 심했고, 문학 자체에 대한 시대적 후광도 있었다”며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대중문화가 활기를 띠면서 문학에 대한 후광 없이 원점에서 문학을 시작해야 했고 그때부터 조금씩 축적된 힘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위기’가 아니라 ‘호기(好期)’라는 주장의 근거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한국적인 특수성을 강조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엮어내기 시작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서영채 교수는 “우리 소설이 1980년대에 가지고 있던 우국지사 또는 지식인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20대의 김애란부터 50대에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에 들어서 육순이 된 김훈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문학 속에 뛰어들면서 우리 소설은 탄력성과 보편성을 가지게 됐다”며 “특히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이 매우 자유로워져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젊은세대, 무겁고 진지한 것 안 읽어

새로운 상상력과 글쓰기를 보여주며 문단과 대중의 주목을 끌고 있는 젊은 작가군은 박민규, 김애란, 김언수, 이기호, 김중혁, 한유주, 정이현 등이다. 정치적·역사적 무게를 지닌 문제작들로 명성을 얻은 황석영씨가 2000년대 들어 연달아 발표한 3편의 장편에서 보이는 변화도 눈길을 끈다. 서영채 교수는 “황석영씨의 최근작들은 이전의 현실에 대한 중압감을 많이 떨어뜨리며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며 “신경숙이 종전의 작품과는 다른 스타일의 장편 ‘리진’을 발표한 것도 우리 작가들의 변화를 읽게 한다”고 말했다.

발표하는 소설마다 ‘불패신화’를 낳고 있는 김훈과 공지영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장르나 문체는 판이하지만 두 작가의 공통점은 취재를 철저히 한 후 집필한다는 점이다. 4월 12일 발간해 지난 5월 말 현재 벌써 10만 부를 훌쩍 넘긴 ‘남한산성’을 집필하기 위해 김훈은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쳤고, 집필에 7개월을 소요했다. 1년 넘게 베스트셀러 상위를 기록하며 영화로도 제작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지금까지 88만 부가 판매됐다. 공지영이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실제 사형수와 면담을 하는 등 면밀한 취재를 거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소설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또 있다. 한국의 문학시장이 작아졌다고는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다. 문학평론가인 최원식 인하대 국문학과 교수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층도 두텁고 소설을 쓰겠다며 신춘문예 등 신인등용문을 열심히 두드리는 문학지망생도 굉장히 많다”며 “현재는 일본소설을 비롯한 외국소설이 국내 소설 베스트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한국소설이 우리 독자의 욕구와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독자는 돌아온다”고 확언했다. 최 교수는 덧붙여 “작가들은 지금 한국 독자들이 왜 외국소설에 매료되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독자들이 우리 소설에서 어떤 부족함과 갈증을 느끼는지를 깨닫고 독자의 욕망을 작가 나름의 새로운 글쓰기로 충족해주면서 소설시장을 탈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소설이 도약하려면 작가들이 국내 시장만 겨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누가 번역하는가?). 이미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고정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 영어로 번역하는 데 무리가 없는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출판칼럼니스트 박지현씨는 “소설 속 주인공의 생활양식도 그렇지만 문체까지도 치밀하게 계산한 정교함과 국제성을 지향한 작가의식은 세계적인 ‘하루키 현상’을 일으킨 요인”이라고 한 기고문을 통해 단언했다.(박주연 기자)

뉴스메이커(07. 06. 12) 한국 출판시장에 일본소설 러시

오쿠다 히데오는 요즘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신간 ‘면장선거’는 초판 3만 부가 1주일 만에 매진되면서 주요 인터넷서점에서 일제히 종합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진입했다. 바로 2쇄 2만 부를 제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의 전작 ‘남쪽으로 튀어’가 2주일 만에 2만 질이 소화됐던 것에 비해 독자의 반응이 무척 빨라진 것이다. 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남쪽으로 튀어’를 두고 “우리 문학 지형도에서 이만한 역량을 발휘하는 본격 문학가를 찾아볼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오쿠다는 이렇게 작품성마저 인정받자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본작가로 올라섰다. 한국에서 그의 출세작은 ‘공중그네’다. 이 책은 벌써 5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미야베 미유키 등 전작 나올 태세

일본소설이 왜 이렇게 잘 나가는 걸까?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은 일본소설 붐이 마니아에서 시작되었다고 분석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등 소수의 작가에게 국한되어 있던 일본소설 출간은 최근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장르소설의 출간이다. 대중소설 작가로 분류되는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온다 리쿠 등은 거의 전작이 나올 태세이고 다양한 스타일의 추리, 판타지, 공포 같은 장르소설들이 줄을 잇는다.

일본 장르소설의 출판러시는, 인터넷 추리동호회 등에서 활동하던 마니아들이 출판편집자로 자리 잡으면서 대중성은 물론 작품성이 있는 소설들을 선별하여 관심을 끈 덕으로 보인다”(‘마니아 문화-탐닉에서 창조까지’ <기획회의> 2007년 5월 20일자)는 것이다. 이밖에도 요시다 슈이치, 이사카 코타로, 가네시로 가즈키 등도 마니아층이 형성된 경우다. 이중 요시다 슈이치는 1만 부 정도의 독자층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 마니아층은 갈수록 두터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마니아 열풍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마도 일본만화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듯하다. 일본문화가 전면 개방된 뒤 가장 많은 특수를 누린 것은 일본만화다. 만화는 애니메이션과 결합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키웠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라면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이자 산업이 아닌가? 일본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65%를 점할 정도라니 이웃나라인 우리로서는 그 기세가 놀라울 뿐이다. 최근 주요 만화출판사들의 매출에서 일본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80%가 넘는다. 우리 만화는 그야말로 ‘구색’ 갖추기일 뿐 책으로 펴내봤자 이익이 나지 않는다는 아우성도 나온다. 이처럼 일본만화를 열심히 읽은 세대가 이제 성장해 일본소설 붐까지 일으키는 것이다.

일본 만화와 일본 소설의 인기는 영화와 드라마에까지 급속하게 번졌다. 마치 우리 문화 콘텐츠의 원천이 일본만화와 일본소설인 듯 여겨질 정도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와 드라마 ‘하얀 거탑’은 최근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대표적인 경우다. 가타야마 쿄이치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가 원작인 ‘파랑주의보’, 가네시로 가즈키의 ‘플라이, 대디, 플라이’가 원작인 ‘플라이 대디’처럼 일본소설이나 만화 가운데 영화의 원작을 찾는 일이 늘어났다.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또한 우리나라의 영화사가 영화 판권을 확보했다. 오쿠다 히데오의 전 작품을 영화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오히려 원작자가 뜸을 들이는 형편이다.

과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등 몇 사람의 스타작가에게 집중되었던 인기가 지금은 점차 많은 작가에게 분산되고 있다. 서점에 가보면 이 땅이 일본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이 소설들이 젊은 세대의 정서에 잘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만화 읽다 일본소설 마니아로

한국 출판시장에서 요시모토 바나나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에쿠리 가오리가 기반을 닦아가던 몇 년 전에 일본소설과 함께 인기를 끈 것은 인터넷소설과 카툰만화였다. 그러나 인터넷소설은 곧 기세가 꺾였고 카툰만화는 ‘파페포포’ 시리즈 등 몇 종을 제외하고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세 유형의 공통점을 찾자면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드는 몽환적인 분위기나 상상력을 매우 섬세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진지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치 지나간 일기장을 들추어보는 듯하다고 할까.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는 절대 빈곤과는 거리가 멀다.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과외’를 받아서라도 채우면 된다는 것을 체감한 세대였다. 하지만 가슴 속으로는 끝없는 상실의 고통을 느끼는 세대이기도 하다. 가족과도 떨어져 원룸에서 살고 휴대전화나 메신저 등 ‘1인용’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정치·경제·사회문제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늘 ‘관계의 쓸쓸함’에 젖어 있다.

앞의 세 유형은 이런 정서의 소유자들이 즐기는 장르였다. 일본출판계는 이런 독자를 의식해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쏟아낸다. 대중소설에도 늘 상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권위’를 키운다. 최근에는 휴대전화소설, 즉 ‘겐다이 소설’ 문학상을 만들어냈다. 서점인들이 추천한 ‘서점대상’이란 것도 만들었는데 1~3회 대상 수상작은 모두 200만 부를 넘었거나 근접해 있다. 젊은 세대를 위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며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장과 언론과 출판사가 연대해 끊임없이 화제작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런 작품들은 늘 영상과 함께 호흡하기에 생동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가볍게 보는 소설은 늘 매도의 대상이 된다. 그런 매도가 결국 대중소설이라는 밭을 고갈시켰다.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는 소설은 진지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작품은 늘 ‘부재’ 상태다. 최근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 ‘카스테라’의 박민규처럼 ‘21세기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마니아층을 형성해가는 작가도 없지 않지만 그야말로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궁핍’이 결국 일본소설의 활개를 자연스럽게 조성한 것이 아닐까.(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뉴스메이커(07. 06. 12) '주례사비평’이 한국소설 죽인다

우리 문학, 또는 우리 소설에 활력이 사라진 이유로는 작가 못지않게 비평가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있다. 인간적으로 친해진 호의적인 안목이 작품에까지 연장되어 이른바 끼리끼리 잘 봐주기의 행태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독자의 반응은 시큰둥한데 평론가들의 비평은 종종 호들갑이다. 중견 평론가 구룡모씨는(*구모룡씨다) “비평가가 시인·작가를 경배하고 그들이 생산한 작품을 무조건 예찬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의 문학적 장이 활력을 잃어가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비평권력’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구씨는 비평가에게 부여되는 권력은 ‘필요악’이라면서, 문제는 비평권력 자체가 아니라 권력의 바르지 못한 사용이라고 말했다.

“한국 작가들 자의식 너무 강해”

비평은 대상을 교육시키려는 태도가 아니라 작품을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 시비를 가려 작품의 진가를 밝히려는 태도다. 그러나 한국의 소설 비평은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해도 종종 자기가 총애하는 작가를 띄워주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작가에게 영합하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은 출판사의 매출 전략과 맞물려 한국 소설을 죽이는 촉매제 역할을 해왔다는 지적이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 역시 한국 소설의 위기를 ‘비평의 신뢰성 상실’로 꼽고 있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우선 각종 문학상제도가 단편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양대 문학월간지 ‘현대문학’과 ‘문학사상’이 주관하는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이 수상대상을 단편 내지 중편으로 제한하고 있다. 역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황순원문학상’과 ‘이효석문학상’ 역시 대상을 중·단편으로 한정하고 있다.

물론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적지 않다. 문학동네소설상, 한겨레문학상, 세계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삼성문학상 등 장편공모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상은 대체로 출간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행본 출판’을 목표로 한 신인급 작가에 대한 공모의 성격이 강하다.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씨는 그 서글픈 결과를 이렇게 지적한다.

“작가들은 막상 장편소설을 쓰려다가도 잡지에서 단편 청탁이 오면 거절하기 어렵다. 문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잡지 편집위원들의 심경을 거슬렀다가는 그나마의 청탁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한다. 한편으론 중·단편에 주어지는 주요 문학상의 상금과 명예가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한다.”

한국 문단과 문학상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71)는 작년 여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호되게 비판하며 한국 대학생들의 독서 성향을 질타했다. 유씨는 ‘현대문학’ 2006년 6월호에 기고한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글에서 대학생들이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노르웨이의 숲’(한국어판 제목은 ‘상실의 시대’)을 가리켜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 지적했다. “무라카미의 소설은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가 없는 시대의 언어상품”이라는 것이다.

유씨의 이런 단호한 지적은 “지난 10년간 대학 초년생의 문학독서 성향을 조사”해 온 결과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맞닿아 있다. 인구 대비 대학생 수 전 세계 1위(1997년)라는 통계와 젊은이들의 문학적 교양의 결여 사이의 불일치를 겨냥해 그는 “그들(=젊은이들)이 매우 부실한 문학교육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

계간지 ‘문학수첩’ 2006년 여름호의 특집 ‘대학에서 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도 유씨의 비판적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특집에서 다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학생들의 대중문화에의 쏠림 현상이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의 경우 응답자의 37%인 24명이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교과목에 포함시켜주기를 바랐고, 게임시나리오와 장르문학을 원하는 학생도 15.4%인 10명에 이르렀다. 젊은이들이 자아를 확립하고 사회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 성숙해가는 교양 형성의 장으로서 대학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유종호씨의 지적과 통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지적하는 한국 소설관도 음미해볼 만하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인지 작가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작은 얘기부터 풀어나갈 줄 몰라 무겁고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작가들이 ‘내가 작가요’ 하고 잘난 척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일본 소설의 ‘미덕’을 이렇게 지적한다.

“가볍고 밝고 유쾌하다. 한 장르에 치우치지 않으며 적당한 생각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삶의 본질이라는 무거운 주제보다 가족과 청춘, 성장기의 진통 등을 그려내는 테크닉이 뛰어나다. 전반적으로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서 양쪽 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평론가 정호웅씨는 그러나 우리 소설이 길을 잃고 골짜기에 빠져 있다는 ‘소문’에 대해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 소설의 자기갱신과 창조의 생명력이 여전히 활기차게 살아 약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진작가들이 최근 쏟아낸 장편들의 가능성에 높은 평점을 매긴다. 김원일의 ‘전갈’, 조정래의 ‘인간연습’과 ‘오 하느님’,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한승원의 ‘소설 원효’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작품은 ‘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내걸고 추상화된 관념의 규정성을 해체하며 과거 진실의 포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작품 속에는 ‘현실 공간의 가상 공간화’라는 새로운 형식 실험도 모색되고 있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주제와 형식 탐구, 중견작가들이 새롭게 포착해내는 역사의 진실과 삶의 본질 탐구가 아직 한국 소설계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한기홍 편집위원)

일본의 문고분 출판은 문학시장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일본 최대 서점 중 하나인 이케부쿠로 소재 준코도 서점의 문고분 전용 서가.

뉴스메이커(07. 06. 12) “출판마케팅이 일본소설 성장엔진”

지난해 교보문고의 연간 베스트셀러 소설 10위권에는 한국 작가의 소설이 3권밖에 올라가 있지 않다. 반면 일본은 최대 출판 도매상인 닛판(日販)의 연간 단행본 픽션 분야 베스트셀러 10종에 외국소설이 단 한 권도 없다. 소설 발행종수에서는 8.5 대 1.5, 매출 구성비는 8 대 2 정도로 일본소설이 외국소설을 압도한다.

이처럼 자국 소설의 경쟁력이 판이한 두 나라의 풍경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먼저 양국의 소설 출판 현황을 보면 2005년 기준으로 발행종수는 2.5배(한국 3905종, 일본 9614종), 시장규모는 4배, 발행부수는 6배 정도 차이가 난다. 일본 인구가 우리의 3배 정도임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차이다. 발행량 기준으로 한국인은 연간 2명이 1권꼴, 일본인은 1명이 1권꼴로 소설책을 사보는 셈이다.

일본소설의 강점은 작가와 편집자의 파트너십에서 출발한다. 한국 출판계에서 문예물의 경우 편집자의 역할은 대개 교정을 꼼꼼히 보는 선에 그친다. 창작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려는 배려라기보다는, 첫 번째 독자인 편집자와 작가의 소통 부재를 뜻한다. 반면 일본의 문예 출판사들은 소설 담당 편집자가 아이디어나 기획을 제안하기도 하고 집필 과정에서 매우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한다.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가 분업화되거나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읽히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동업자적 결속이 강하다. 따라서 편집자가 출판사를 옮기면 작가도 그를 따라 출판사를 바꾸는 일이 많다. 문학출판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큰 것은 서양 출판계에서도 보편적이다.

또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일본의 문고본 출판은 문학시장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단적으로 소설 발행종수의 절반 이상이 문고판이다. 일본에서 제일 큰 서점으로 비유되는 세븐일레븐을 필두로 문고와 잡지, 길쭉한 문고판인 신서(新書)에 이르기까지 편의점은 강력한 출판유통 채널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일반 도서의 평균 정가가 1200엔 수준인 데 비해 문학도서 평균가는 700엔대(6000원 수준)인 것은 문고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저렴한 가격과 파격적인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는 소설이 4만 개 편의점과 열정적인 점원들이 일하는 1만8000개(한국은 약 3000개) 서점에서 판매된다.

나아가 마케팅 노력은 가상할 정도다. 눈에 띄는 것이 문학상 비즈니스인데, 최근에 출판사들이 새로 제정한 문학상만 보아도 그 다양성에 혀를 내두를 만하다. 외국어 번역출판을 전제로 내건 ‘오에 겐자부로상’, 거액의 상금과 편집자 심사위원 체제의 도입을 통해 문학상 형식을 파괴한 ‘소설대상’, 야후재팬이 주제를 제시하고 소설을 공모하는 ‘야후문학상’, 서점원들이 자체적으로 제정하여 베스트셀러 코스로 자리잡은 ‘서점대상’, 연애 이야기만 공모하는 ‘일본 러브스토리대상’, 영상화를 전제로 공모하는 ‘감동논픽션대상’, 작가의 조기 발굴을 위해 만 12세 이하 어린이만 응모 가능한 ‘12세문학상’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물과의 효과적인 연동전략이 두드러지는데, 대개 출판기업 스스로 상당한 투자·제휴를 통해 다매체 환경에 대응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소설을 열심히 사들이는 공공도서관은 우리보다 5배 이상 많고, 만화대여점은 많아도 소설은 대여하지 않는 저작권 보호 및 출판시장 재생산구조, 휴대전화 소설 히트작들의 잇단 출판화 성공 등도 일본소설의 생태환경에서 눈여겨볼 대목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급속히 영역을 확장한 일본소설은 다양한 메뉴와 잘 짠 오락성이 강점이다. 하지만 작품 외적인 측면에서 일본소설의 영향력을 지탱하는 것은 강력한 출판시장과 마케팅 시스템이다. 따라서 다양한 방식의 작가 양성과 전방위적인 소설 마케팅 체제 구축이야말로 일본 출판계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다. 이제 한국문학의 위기 돌파 논의는 문단 못지않게 한국 출판계의 철저한 자기 반성과 멀리 내다보는 출판철학에서 시작해야 한다.(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07.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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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6-0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김훈의 <남한산성>이 '대박'을 터뜨리는 걸 보면 30대 이상 남성 독자들이 시장에서 아주 이탈한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흥미를 갖고 읽을 만한 소설들이 '공급'되지 않는 게 문제이겠죠. 작가들이 자의식이 강하다는 건 저로선 그냥 일반론이 아닌가 합니다...

나비80 2007-06-0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정환도 30대 남성 독자의 이탈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사로잡을 걸출한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 남성작가 출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더군요.

로쟈 2007-06-0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 남성작가'라고 못박을 필요까지야.^^ 저로선, 나이/성별 불문으로 그냥 그런 걸 써주는 작가가 필요하다는 정도입니다...
 

학술저널 담비에서 고대 대학원신문에 게재된 기사 하나는 옮겨온다. 어제가 현충일이었지만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57년전 발발한 한국전쟁의 의미를 한번쯤 되새겨보게 하는 기사이다. '전쟁과 함께 만들어진 '한국인이 사는 법''이란 기획기사의 한 꼭지인 듯하다. 실상 여전히 '분단체제'하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한국전은 57년째 계속되고 있다'란 문제의식 자체가 파격적이거나 새로운 건 아니다. 다만 '한국전 망탈리테'에서 한국인 코드라 할 '사바사바'의 기원을 찾고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기사는 '가설' 수준에서 머문 듯한 감이 있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한 가지 방향을 제시하는 듯해서 스크랩해놓는다.

▲ 부산 인근에서 벌거벗은 채 줄맞춰 이동 중인 인민군 포로들의 모습

고대 대학원신문 6월호(07. 06. 06) 한국전은 57년째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은 계속되고 있다.” 예비군 훈련 정신교육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다. 그렇다. 한국전은 분명 57년째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이 종전으로 매듭 지워지지 못하고 휴전이라는 상태로 진행되어 오지 않았던가. 본 기자가 예비군 훈련장이 아닌 이곳에서 귀중한 지면을 빌려 ‘한국전은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안보 장사’를 하는 이들처럼 휴전상태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안보의식을 고취하자’는 따위의 이야기를 섣불리 하고자 함은 아니다. 한국전이 만들어낸 우리의 망탈리테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IMF 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변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만들어 놓은 이른바 ‘한국전 망탈리테’는 여전히 한국사회에 온존하고 있다. 단기간에 극심한 경제, 사회적 공황을 불러일으킨 IMF위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특정 정책이나 제도는 내, 외부의 변화압력에, 시간차를 가질지언정 비교적 쉽게 변하기 마련인 반면, 우리의 일상생활을 주조하는 망탈리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학살에 학살을 거듭한 인류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의 참혹한 전쟁인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일반인들의 삶에 완전히 체화된 ‘한국전 망탈리테’는 여전히 우리에게 삶의 방식내지 지혜로 뿌리깊이 체화되어 있다.      

비록, 국가의 자율성은 크지만 능력은 미약한 ‘약탈국가’였을 망정, 한국의 국가는 한국전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다.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는 찰스 틸리의 주장은 한국의 ‘국가 만들기’에 잘 부합된다. 또한 전상인 교수의 지적처럼 한국전은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절대적 우위문화, 달리 말해, ‘국민의 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국민’을 만들어 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나타난 폭압적이고 무책임한 국가권력은 전쟁이 휴전된 이후 사라지지 않고 다소 부드러운, 완화된 형태로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구조화된 형태로 온존하고 있는 것이다.

휴전 이후 계속해서 권위주의 정권들을 거치면서 전쟁의 방식과 논리, 더 나아가 군사주의는 한국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군대를 다녀와 봐야 사람된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타당한 말이다. 사회가 군대논리로 돌아가니, 싫던 좋은 이런 논리가 몸에 완전히 체화된 사람들이 약육강식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산발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국지전이, 북한의 남침으로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커지자 이승만 정권은 국민을 속이고 도망쳤다. 그뿐 아니라 9·28수복 이후에는 남쪽으로 미처 피난가지 못한 이들의 상당수를 ‘부역자’라 명명한 후 무차별적으로 처벌했다. 전쟁을 겪으며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던 숱한 양민들은 전선의 이동에 따라서 남, 북, 미군에 의해 무차별적 학살을 당했다. 또한 엄청난 수의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던 국민방위군 사건이 말해주는 바는 자명했다.



사람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국가나 제도에 관한 강한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고 도망치며 다리를 끊어버린 정부,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을 징집해가서 굶어죽이는 정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죽이는 정부나 제도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전쟁 통에 당장 나를 살려주고 먹여주는 것은 공적기구나 제도나 아니라 바로 나의 가족들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는 지배계급과 줄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만이 출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른바 ‘사바사바’의 위력을 모두가 실감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공적 영역에 대한 만성적인 저신뢰를 낳았으며, 공적 영역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참여 내지 비판을 금기시하게 했다. 그러나 물론 공적 영역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가 삶 자체에 대한 소극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다. 강준만 교수의 주장처럼 한맺힌 세월에 대한 강한 보상심리의 작용으로 ‘공적 소극성, 사적 적극성’현상이 나타났으며, 사적 적극성은 중앙과 정상을 향한 맹렬한 돌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었던 한국전쟁 당시의 삶의 전략은 이른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낳으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국가의 공적인 체제나 제도를 믿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삶의 지혜’를 한국전을 거치면서,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우리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연줄망이나 빽에 의존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남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고 만성적 피로 속에서 산다. 줄을 만들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적재적소에 아첨 및 ‘사바사바’를 해야 한다. 그리고 시원하게 술도 마셔줘야 하고 남들의 경조사도 깔끔하게 챙겨줘야 한다. 한국인들 상당수가 취미하나 없고, 놀 줄도 모르고 가정에 와서는 잠과 휴식만을 갈구한다는 것은 공적신뢰가 전무한 ‘약육강식 사회’가 보여주는 하나의 자화상이다.

물론 한국전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류사에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한 전쟁은 분명 우리 한국인들이 이른바 ‘삶의 양식’내지는 ‘망탈리테’라고 할 만한 것들의 상당부분 기초를 제공했다. 이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전체 인구의 상당비율을 차지하는 요즘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이른바 ‘한국전 망탈리테’는 우리가 ‘개발국가’하에서 전래 없는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저신뢰사회와 극단적인 쏠림현상을 낳아서 우리의 삶을 극도로 피곤하게 항상 긴장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듯, 한국전 망탈리테는 우리에게 희열과 아픔을 동시에 가져다 준 것이다.(김경필 기자)

07.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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