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들을 좀 등한시했나 싶어 구내서점에 잠시 들러봤지만 마땅히 눈에 띄는 책은 없었다. 아침신문에서 본 몽골 서사시 <게세르>만 눈길이 끌기에 잠깐 뒤적여보았을 뿐. 기사에는 <게세르>라고만 돼 있는데, 국역본의 표제는 <게세르 칸>(사계절, 2007)이다. "티베트, 몽골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영웅서사시로, <몽골비사>, <장가르>와 함께 몽골의 전통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한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중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요긴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소개에 다르면, "오랜 세월 다양한 방언으로 전승되어 판본의 갈래가 매우 복잡해 연구자들조차 단편적으로 밖에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은 번역 텍스트인 1716년 북경판 목판본을 저본으로 삼고, 사진으로 함께 실어 연구자들과 일반 읽는이들 모두를 배려하였다." 역자의 품이 많이 들었을 책이다. 아침에 읽은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요즘 뜨는 '미드'라는 <프리즌 브레이크> 사례에 견주어 고전번역 품앗이에 네티즌들이 나서면 어떨까라고 필자는 제안하는데 생각해봄 직하다.   

 

한국일보(07. 06. 20) 게세르와 프리즌 브레이크

이달 초 몽골의 대서사시 <게세르>가 유원수씨의 노고로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반갑고 고맙다. 그리스ㆍ로마 신화만 판을 치는 한국적 현실에서 괜히 부자가 된 기분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신화, 전설, 민담을 아우르는 서사시 분야에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가 서양을 저만큼 제친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키르기스의 <마나스>, 몽골의 <장가르>, 인도의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서사시 등등이 그러하다.

● 동양고전 번역 소홀한 인문학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만 본 사람과 <마나스>까지 읽고 자란 학생이 가슴에 품는 세계의 크기와 수준은 엄청 다르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다. 그래서 읽고 싶어도 읽을 수가 없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잘 배워서 그런 작품들을 우리말처럼 술술 읽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전공자가 드물고, 한 사람이 옮기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상업성도 낮으니 출판사도 나서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인문학계는 허구한 날 위기여서 이런 문제를 절박한 과제로 인식할 능력조차 없다(*인식할 능력조자 없다는 건 과장이다. 다만 여건이 따르지 않고 의지가 부족할 따름이다). 학자나 전문가만 믿고 기다리다가는 토끼 머리에 뿔 나고, 거북 등에 풀 돋기를 바라는 격이다. 그래서 늘 답답하고 화가 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2를 보면서 묘책이 떠올랐다! 이 드라마는 MIT를 나온 천재 동생이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인 형을 탈옥시키는 내용인데 지금 1부가 지상파에서, 2부는 케이블에서 방영 중이다. 그러나 웬만한 분들은 2부 22편 다 본 지 오래다. 네티즌 내지 ‘미드(미국 드라마) 폐인’들이 현지 방영 즉시 어떻게 구했는지(이건 극비다) 전편을 인터넷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국어 자막을 충실히 달아서. 어떤 대사에는 주석까지 붙였다(이 얘기는 미국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합시다. 베른협약 위반이니까).

미드 폐인들의 이런 헌신과 열정을 인류의 위대한 서사시에도 쏟아보면 어떨까. 원어를 모르신다고요? 별 상관없습니다! <마하바라타>만 해도 산스크리트어 몰라도 잘 된 영어 번역본이 인터넷에 여럿 올라 있다.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서 저작권법 위반도 걱정할 필요 없다. 개미들이 달라붙어 나눠서 번역하면 질은 좀 떨어지겠지만 아예 못 읽는 것보다야 백배 낫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 한 가지. 기왕 하려면 판본을 잘 골라야 한다. 판본 따라 내용과 느낌이 하늘 땅 차이니까. <게세르> 서사시 사계절 출판사 한글본의 경우 불교적 색채가 짙은 18세기 몽골어 판본을 텍스트로 삼았다. 반면 러시아연방 부리야트몽골공화국의 사랑게렐 오디곤씨가 최근 몇 년에 걸쳐 영어로 인터넷에 띄운 판본(http://www.buryatmongol.com/halaa1.html)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싱싱한 샤머니즘 세계의 냄새가 물씬 난다. 첫 대목부터 ‘죽인다’.

“태초 하고도 아주 태초에/ 여러 시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시대에/ 처음 하고도 맨 처음인 때에/ 드높은 밝은 하늘이 안개로 회오리치고/ 저 아래 땅은 진흙과 티끌로 뒤덮이고/ 풀은 아직 자랄 생각도 못할 때/드넓은 가람들은 흐를 조짐조차 없고/ 거대한 우윳빛 호수는 한 줌 연못에 불과하던 때/ (…) / 사람이 다니는 길도 나지 않았던 때/ 그 때가 좋은 시절이었노라고/ 사람들은 지금도 이야기한다!”

천지 창조와 신들의 다툼으로부터 영웅의 탄생과 지상에서의 활약까지를 광활한 초원처럼, 대하장강 같은 입담으로 풀어가는 이 판본은 가히 압권이다.

● 네티즌 열정모아 쌍방향 번역을…
이런 고전들을 네티즌과 재야 고수들이 열정을 합쳐 우리말로 옮겨 보자. 동시에 우리 고전은 영어로 바꿔 세계에 올려 주자. 미래 세대의 지성과 감성을 풍요롭게 할 동서고금의 고전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이광일 논설위원)

07. 06. 20.

P.S. 러시아에는 아예 3D 게임까지 나와 있군(이런 걸 유통시키는 게 이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제 격이겠다). 원래는 어디서 개발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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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 2007-06-21 01:43   좋아요 0 | URL
신화와 게임의 접목이라...멋진 발상이긴 한데...모 방송사에서 하고 있는 대조뭐시기 하는 드라마는 너무 게임스럽던데요...뭐랄까요...워낙 사료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흥미 위주의 극전개는...좀...하하..^^;;
참고로 눈팅만 하다가 첨 글남기는데 몽고 신화를 보니 신기하네요..^^

더불어...드라마에 관련된 자료들(별로 중요치 않겠죠?)을 바로 출판해버리는
미국의 능력에 감탄하는 바입니다. 그것이 자본과 관련된 것이든 정말 필요해서든지 간에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다는 것에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기록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깐요

로쟈 2007-06-21 08:44   좋아요 0 | URL
'너무 게임스러다면' 아예 게임으로 개발하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싶군요.^^

몽당연필 2007-06-21 11:10   좋아요 0 | URL
프리즌 브레이크...넘 보고 싶은데 ㅠㅠ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책이 원작소설인가요?

로쟈 2007-06-22 11:55   좋아요 0 | URL
"미국의 TV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팬들을 위해 만든 에피소드 가이드"라고 하는데요...
 

사실 좀 지나간 일이 돼 버렸지만 서재 방문자수가 지난달말인가 20만명을 넘어섰다(그 사이에 7천명 넘게 방문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서재의 문을 일시적으로 닫고 '휴가'에 들어갔던 때인지라 따로 챙기질 못했다. 다행인지 우연인지 20만을 캡쳐해두긴 했는데, 날짜를 다시 확인해보니 6월 1일이다. 아래가 남은 기록이다(today는 왜 다운된 건지 모르겠다). 

183200000 

그 사이에 또 조촐하게 기념하려고 했던 즐찾 1111명도 훌쩍 지나쳐버렸다(지금은 1147명이다). 요즘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퍼오는 글이 많고 아주 '대중적인' 글들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방문객이 이처럼 많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기 이전에 다소 의아한 일이다(당신은 무슨 기대로 '로쟈의 서재' 아니 '로쟈의 저공비행'을 찾는가?). 하긴 대다수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기 때문에 나는 동료 알라디너보다는 외계의 염탐꾼들이 더 많이 다녀가는 것으로 짐작하고는 있다. 여하튼 그런 숫자에 현혹되어 매일같이 서재에 물붓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종의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나처럼 책임감이 좀 부족한 경우에도(나는 줄줄이 '가'를 받은 초등학교 성적표에서 책임감이 '나'였다). 

그래서 기획하게 된 것이 '로쟈의 한줄'이다(벌써 몇 차례 아이템은 잡아놓았는데, 한줄 정도야 수시로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이어서 작업량이 꽤나 늘어날까 미리부터 걱정되긴 한다). 취지는 그냥 카테고리가 말해주는 대로이다. 눈에 띄는 한줄에 대해서 자세하게 뜯어보거나 뒷조사를 해본다는 것. 가령 며칠 전에 옮겨놓은 인터뷰(http://blog.aladin.co.kr/mramor/1322403)에서 작가 황석영의 말.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워털루>(1970)를 보라고. 그 사람이 워털루 싸움의 앞뒤 사흘로 나폴레옹의 정점과 몰락을 카메라로 어떻게 담아내나 보라고. 윌리엄 프레이커 감독의 <몬티 월쉬>(1970)를 또 봐. 그렇게 촬영감독이 중요한 거야.

 

 

 

  

 

여기서 오늘의 한줄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워털루>(1970)를 보라고."이다. 본다르추크는 <전쟁과 평화>(1968)로 잘 알려진 러시아감독이다. 그리고 워털루는 러시아 진격에 실패한 나폴레옹이 절치부심 끝에 치른 마지막 전쟁이다(알다시피 그는 여기서도 패장이 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1815년 6월,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주도한 프랑스군과 웰링턴이 주도한 영국군, 프로이센 등을 포함한 연합군이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대전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패배하고,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위키백과)

이탈리아와 러시아 합작으로 찍은 이 영화는 아마도 전작인 <전쟁과 평화>에 고무되어 제작된 게 아닌가 싶다(http://www.youtube.com/watch?v=IEYvfy8zKzk). <워털루>를 본 기억은 없지만 전투장면의 스틸사진상으로는 <전쟁과 평화>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장쾌한 스펙터클을 뽐내지 않았을까 싶지만(가장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의 하나로도 꼽힌다) 동시대 러시아 감독인 타르코프스키의 평은 아주 신랄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두레, 1997)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본다르츄크'란 표기는 '본다르추크'로 고쳤다).

"오늘 본다르추크의 <워털루>를 보았다. 불쌍한 작가다. 수치스런 작품이다. 본다르추크에게 작품 <워털루>를 위임했던, 이탈리아의 디노 라우렌티스 제작팀에서 온 로베르토 쿠오마라는 이탈리아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영화감독으로 이탈리아에 초대하고 싶은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란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일이 잘만 된다면 카뮈의 <페스트>를 영화화하고 싶다."(49쪽)


 

 

   

 

1970,년 9월 18일자 일기의 한 대목인데, 국역본에서 9월 14일자 일기로 처리돼 있다. 영역본을 옮기면 "Today I saw Bondarchuk's Warterloo. Poor old Seryozha! It's embarrassing."(21쪽). '세료자(Seryozha)'는 '세르게이'의 애칭이다. 속되게 말하면 '맛이 갔군, 세료자!' 정도가 될 수 있을까? 문제는 본다르추크와는 달리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는 것. 결과적으론 <요셉과 그의 형제들>도 <페스트>도 그의 필모그라피로 남지 않았다. 두번째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로 상당기간 마찰을 겪은 후에 그가 찍게 된 세번째 영화는 <솔라리스>였다.  

해서, "<워털루>를 보라고."란 황석영의 말은 "<워털루>를 보았다."란 타르코프스키의 말에 의해 반향되고 굴절된다. 그것은 이중적이다. 워털루 자체가 나폴레옹 자신의 영광과 굴욕을 상징하게 되듯이 말이다. 이 서재의 운명 또한 그러할 것이다...

07.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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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지난 8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지난 세기말 금세기초에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의 한 사람이어서 만감이 교차한다(그의 방한시 나는 강연을 직접 들어보기도 했다). 국내 여러 권의 책들이 번역소개돼 있고(그만큼 읽히는 건 아니다) 나는 그 대부분을 갖고 있다(원서로도 주요 저작들은 모두 갖고 있는 듯하다). 그 중에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 대한 페이퍼를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밀린 일들을 재촉한다. 애도의 뜻으로 잠시 그의 책들을 검색해보았지만 대부분 절판이다. 유감스럽다. 이미지가 뜨는 책들만 골라 며칠간 게시한다.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리처드 로티
이유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8월
9,300원 → 8,370원(10%할인) / 마일리지 460원(5% 적립)
2007년 06월 19일에 저장
품절
국내에서 대표적인 로티 전문가로 꼽히는 사람은 이유선, 김동식 교수 등이다. 책은 이유선 교수의 친절하고 간명한 입문서이다. 시리즈의 제목대로 '누구나' 로티의 세계에 초대받을 수 있다.
듀이 & 로티 : 미국의 철학적 유산 프래그머티즘
이유선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13,800원 → 12,420원(10%할인) / 마일리지 6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06월 19일에 저장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저자의 <리처드 로티>와 함께 손쉬운 입문서이다. 로티가 가장 존경해마지 않는 미국철학자 존 듀이와의 비교를 통해서 프래그머티즘의 맥락을 짚어주는 책일 듯. 로티는 자신을 네오프래그머티스트라고 불렀다.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리처드 로티 / 까치 / 1998년 8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07년 06월 19일에 저장
절판
리처드 로티의 출세작이자 문제작. 나는 따로 리뷰를 써두었다. 어색한 국역본의 제목은 못마땅하다.
로티 철학과 자연의 거울
김동식 지음 / 울산대학교출판부(UUP) / 2002년 10월
8,000원 → 8,000원(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7년 06월 19일에 저장
품절
로티의 문제작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 대한 로티 전공자의 해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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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서 기획연재 중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에서 이번 주에는 '대중지성'을 화두로 다루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물론 연구공간 '수유+너머'이지만 예기치않게도 나도 관여하고 있는 한 인터넷 카페가 그 '대중지성'의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물론 '로쟈'란 이름도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한국사회가 얼마나 좁은 동네인 것인지!).

올초에 '책의 오피니언 리더 인터넷 서평꾼'(http://blog.aladin.co.kr/mramor/1033363)이란 기사가 한겨레에 게재된 적이 있는데, 반년만에 '오피니언 리더' 혹은 '인터넷 서평꾼'에서 '대중지성'으로 '진화'한 셈인지? 같은 기사의 다른 꼭지로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의 지식투쟁'을 다루고 있는 고병권의 글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181826421&code=210000 참조.  

경향신문(07. 06. 19) 지식사회 새 경향, 대중지성

대중이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나타난 새로운 현상, 즉 ‘대중지성’의 탄생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지난해 5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 위한 대장정’에 들어가며 내놓은 선언문은 대중지성이 지향하는 바를 잘 나타낸다. “우리는 대중을 훈계하는 지식인, 대중에 연민을 갖는 지식인 모두를 거부한다. 우리는 지식인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식인 스스로가 대중일 때뿐임을 안다.”



‘수유+너머’는 올 1월 ‘2007 대중지성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지식은 아카데미의 강단이 아니라 대중적 네트워크를 타고 소통되고 있다. 아카데미도, 지식인도 없지만, 가르치고, 배우고, 묻고, 읽고, 쓰는 일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고 밝혔다. ‘대중지성 프로젝트’는 대학과 학술진흥재단이 규정한 분과에 얽매이지 않은 학자들이 ‘강좌’를 통해 대중들과 교감하며 네트워킹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구 공동체인 ‘다중네트워크센터(http://waam.net)’도 지식인의 죽음을 선고했다. “과거 절대정신이자 보편적 주체로서 역할을 하던 지식인의 유형들은 모두 사망했으며, 다중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직할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지식인’이자 자유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면서도 생산자가 되어 새로운 지식 체계를 만드는 ‘대중지성’은 인터넷에서 더 보편적이며 활발하다. 인터넷상의 대중지성들은 때로 자신이 대중지성에 속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카데미의 수준에 버금가거나 으뜸가는 지식을 창출해낸다.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 인터넷 서평꾼들이 모인 카페다. 인터넷 책 세상의 오피니언 리더로 꼽힌다. ‘책에 관한 한 가장 수준 높은 담론이 진행되는 곳’이란 평가는 이 사이트의 존재를 아는 이들에게는 어색하지 않다. 자발적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올린 ‘텍스트’가 대중지성의 근간이다.

최근 출간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 b)에 대한 서평이 책 출간과 거의 동시에 올랐다. 비평 대상은 라캉, 들뢰즈의 서구 철학 서적, 김훈, 은희경, 이문열의 문학 작품 등 인문학 전반과 이창동의 밀양 등 영화를 망라하고 있다. 이곳의 ‘지성’들의 글쓰기 수준은 계간지 비평 수준 못지 않다. 갓 나온 번역서의 오류를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이다.

때로는 책 번역자가 이 카페를 찾아 논쟁을 벌인다. 회원들간에도 ‘주례사 댓글’은 없다. 각자의 글에 논쟁하고 토론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카페지기 조영일씨(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ID 소조)는 “문학이나 지식에 관한 논의들이 특정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독자나 일반인들의 논의를 이끌어내는 장이 없었다”며 카페 개설 배경을 밝혔다.

비평고원에서 고정 코너를 갖고 있는 ‘불멸회원’들은 고수들이다. ‘로쟈’, ‘폭주기관차’, ‘쌍수대인’, ‘로카드’ ‘아이온’, ‘김남시’, ‘K’, ‘brick’ 등 8명이다. 조씨는 “불멸회원들은 박사 학위자, 비정규직 강사, 자영업자, 번역가, 취업준비생, 일반 회사원들”이라고 말했다.

자연과학쪽의 ‘대중지성’으로 꼽히는 곳은 생물학연구정보센터 사이트인 브릭(BRIC)이다. 황우석 박사 논문 조작 의혹을 처음 제기한 곳이다. 서울대 이병천 교수팀의 ‘늑대 복제’ 논문의 오류를 지적한 곳도 브릭이다. 기존 아카데미아가 애초 시도도 못할 검증을 해낸 것은 ID로만 알려진 익명의 연구자들이다.

익명의 유권자들이 무수한 정치·개혁 담론을 쏟아내며 ‘정치권력’의 향방에 영향을 미쳤던 2002년 대선 당시의 노사모 사이트도 ‘대중지성’의 한 전형으로 꼽힌다. 상근기자들이 아니라 시민기자들이 중심이었던 초기 오마이뉴스도 대중지성의 사례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 지식iN’은 더 많은 익명의 대중들이 만들어내는 지식의 곳간, 인터넷 ‘대중지성’의 상징이다. 익명의 네티즌들이 수천만 건의 질문과 답변으로 지식을 쌓아 올린다. 이 ‘지식’은 인터넷상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체계화된 형태를 띠었다. 네이버 홍보팀 이경률 대리는 “인터넷이란 미디어를 통해 지식 공유의 시대를 열었다. 특정인 한 사람의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의 질문에 여러 사람이 답을 달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이를 통해 ‘집단지성의 활성화’도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 지식인들이 독점했던 지식 체계를 인터넷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대중이 가져간 것(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러면 대중지성은 과연 지혜로운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최근 나온 책 ‘여럿이 함께’에서 영국 유전학자 프란시스 골튼(1822~1911)이 시골 장터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시골 장터에서 열린 황소 몸무게 알아 맞히기 퀴즈에서 아무도 답을 맞히지 못했지만, 퀴즈에 참가한 사람들이 적어낸 몸무게를 합쳐서 나누어 보니 맞았다는 이야기다. 신교수는 “단 한사람도 맞히지 못했지만,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이니까 정확한 몸무게를 맞힐 수 있었다. 언론도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대중의 지혜를 모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중은 잘 안다”고 말했다. ‘대중의 지혜’는 디지털 철학자로 알려진 피에르 레비 캐나다 오타와대 교수의 “개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집단은 가능케 한다”는 ‘집단지성’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의견은 다르다. “대중의 지혜는 사실 하나마나 한 소리다. 확률적으로 대중은 늘 지혜롭게 돼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 자체의 힘(머리 수 파워) 때문에 대중의 선택은 정당화되고 지혜가 되게끔 돼 있다. 대중은 이미 ‘지혜’라는 답을 내장하고 있는 개념이다. 예컨대, 대중이 선거에서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망정 그걸 무슨 수로 꾸짖을 것이며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도 “대중지성이 기존에 나온 사실을 적시하고 수정하고 지혜를 모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가지 주제에 매달려 중요한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기존의 지식인이고 전통적 지식인”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 대중지성에서 새로운 개념의 노동착취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나 이를 저급하게 모방한 네이버 지식iN이나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제는 선(善)의지를 가진 대중지성의 결과물로 채워진다. 그러나 참여자 또는 조직구성원이랄 수 있는 대중지성에 대해서는 배려가 없다. 대중지성이 생산한 양질의 결과물로 상당한 수익을 올린다. 새로운 노동착취의 시대가 온 것이고, 그 착취는 선의지, 자율성, 참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정환씨(다중네트워크센터 대표)도 “기업과 자본이 자기네의 이윤 축적을 위해서 사실상 다중지성을 착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네이버가 대표적이다. 또 국가와 기업이 서로 협력하면서 지적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헤게모니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트 포드주의, 팀제, 자율책임제 등 노동자가 상상하고, 기획하고, 조직하는 시스템도 기업체가 대중지성을 이용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독주 체제, 국가·국적·국경을 초월한 거대 자본의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체제를 ‘제국’이라고 규정한 조씨는 향후 지식사회의 과제를 대중지성과 제국의 대립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 기업적으로 일어나는 제국적 흐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대중지성이 최후의 보루고 여기에 승부가 걸려 있다”고 말했다. 대중이 네트워크적 권력인 ‘제국’에 속해 있으면서 그것에 대항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이란 설명이다.

그 가능성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미선·효순이를 위해 온라인에서 촛불을 들기로 결의하고, 오프라인인 광화문으로 그 촛불을 들고 나온 수십만의 추모 인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위해 온·오프라인 운동을 벌인 사례가 그런 경우이다. 지식인의 무덤 위에 태어난 대중지성의 성격과 역할을 주목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07. 06. 19.

P.S. '대중지성'이란 말은 연초에도 한번 기사화된 적이 있다. '개중과 대중지성'이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10482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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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6-1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지성'이라는게 한편으로는 '범부'들 중에서 지적 관심이 높은 이들의 새로운 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기본적으로 '대중과 지식인'이라는 것이 이분화되어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이 원론적인 문제였겠으나 '대중지성'의 영토라는 곳 역시 어떤 특수화된 '대중'들의 영토로 보일 수도 도 있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중사회에서는'지식'도 상품처럼 소비되는 것이니 '지식상품'의 소비를 통해서 '돈'을 대신하는 '자본'을 가지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제가 가끔 스스로 그런 건 아닌지 생각해보곤 합니다.돈 벌 재주는 없고 돈 만 버는 놈들에게 지기는 싫고..)
'대중지성'이라는게 결국 '일반인의 지식인화'의 경향성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식인의 대중화 경향성'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네요.물론 상호적이겠으나...대중지성 네트워크를 이끄는 이들이 '지식인의 대중화'를 말한다면 그 '대중'이 특권화된-최소한 교육,문화자본은 확보한-'일반인'을 '대중'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저도 '인문학'이 학교에 머무는 것에 반대하고 '회사원'들이 '인문사회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쭈어봅니다.제가 아는 '대중'중에 여기 옮겨진 기사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열에 아홉은 되어보입니다...

로쟈 2007-06-19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대중지성'이란 말이 유포되고 있지만(어떤 의미에서는 모순형용적인) 그 기반은 인터넷이란 새로운 소통공간(비평공간, 다중네트워크, 브릭 등), 그리고 재야 학술공동체(수유 등)이죠. 공통적인 건 대학 바깥에서 어떠한 제도적 지원 없이 자생적으로 지식/학술담론들을 생산/유포한다는 것이겠구요. '특수화된 대중', 곧 '특별한 대중'이라고 새로 분류할 건 없을 거 같습니다. 저부터도 그렇지만 대학에 한 다리 걸치고 있는 경우들도 많기 때문에. 그냥 "돈 안 받고 노동력 착취당하는" 새로운 부류의 학도들이 생겨난 거라고 생각합니다(예전 같으면 재야/초야에 묻혀 있을텐데, 인터넷으로 인하여 저처럼 '행세'하게 된 것이기도 하구요)...

전자인간 2007-06-19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논의에서도 '나열'과 '체계' 사이의, '교양'과 '전문성' 사이의 구분은 어쩔수 없이 따라다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수유+너머 같은 경우에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양과목 성격의 강좌가 있는 반면, 수십명의 소수 정예를 대상으로 한 스파르타식 '대중지성 프로젝트'와 각종 세미나가 있는 것을 보면, '저변으로서의 대중'과 '전위로서의 소수 지식인'의 구별은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존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생각할 때 도대체 '대중지성'이란 말이 얼마나 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 차라리 이런 경우에는 '재야지성'이란 말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더군요. 뭐, 그렇다고 수유+너머의 시도가 무의미하다거나 부정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로쟈 2007-06-1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다 한참 덧글을 달았는데 시스템 불안으로 날아가버리네요(다시 쓸 여력은 없습니다. 요점은 말씀하신 대목의 연장선상에서 수유 등과 네이버iN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대중지성'에 대한 비판들은 이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스템이 안정화돼 있지 않으면 '대중지성'이란 게 얼마나 무용지물인가를 입증해주는 듯합니다.--;

yoonta 2007-06-2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평고원같은 곳은 외관으로 봤을 때는 누구나 접근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대중적?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폐쇄적인 공간이더군요. 대학원세미나자리에서 만나서 하는 이야기들을 그냥 인터넷으로 옮겨왔을 뿐이지 소위 말하는 "대중지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죠. 장점이라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를 훔쳐볼 수 있다는 정도?
반면 수유+너머의 기획에는 나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제도권밖에서 학문적 담론을 생산해 낼수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죠. 다만 그것을 "대중지성"이라는 식으로 뭔가 획기적인 새로운 (대중)운동방식을 고안한 것처럼 과대광고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6-2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평고원이 폐쇄적이라고 하신 건 선입견 같습니다. 저도 다른 카페를 운영해봐서 아는데 등업에 제한이 없을 경우 광고 스팸들을 처리하는 데도 애를 먹습니다. 글쓰기에 자격제한을 두는 것은 그런 걸 걸러내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워낙에 중구남방이어서 '세미나'라고 하기엔 뭐하지요. '수유'와 비교하셨는데, 순수한 온라인 모임과 오프라인 중심의 공동체는 차이가 있지요. 짐작과 다르실지 모르지만 수유에 관계하는 비평고원 회원도 여럿 됩니다...

yoonta 2007-06-2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히 등업제한문제만을 이야기한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곳 성원들의 의사소통방식입니다. 소위 그곳의 불멸회원분들은 다들 로쟈님 같지는 않더군요. 제 느낌상 그곳은 그냥 그곳 불멸회원들의 놀이터일 뿐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제 선입견일수도 있습니다. ^^ 소위 "대중지성"이라는 표현은 비평고원같은 소수만을 위한 커뮤니티보다는 오히려 이곳 알라딘서재같은 곳이 더 어울린다고 봅니다.
 

지난 토요일이 '블룸스 데이'였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하루를 기리기 위한 더블린 시민(아일랜드 국민)들의 기념일이다. 이 날을 특별히 기억해서가 아니라 토요일자 신문들에 관련기사가 실렸기에 알게 됐다. 그리고 일단 알게 되면 또 그냥 지나치기도 어려운 법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말엔 지나쳤는데, 다시 눈에 띄기에 일단은 관련 이미지들을 찾아서 스크랩해놓는다. 언제 한번 더블린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일정을 6월 중순으로 맞춰야겠다...

한겨레(07. 06. 16) 한국판 블룸스 데이 ‘구보의 길’ 꿈꾸며

6월 16일, 오늘은 ‘블룸스 데이’(Bloom’s Day)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학사에 뚜렷이 등재되어 있다(*아예 'BloomsDay'라고 붙여쓴다). 블룸스 데이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인 1904년 6월 16일을 기리는 날로, 소설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의 이름에서 따왔다.

소설 <율리시스> 이날 하루 동안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이 더블린 시내를 배회하는 내용을 축으로 그의 아내인 몰리 블룸,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 스티븐 디덜러스 등 세 명의 중심 인물을 등장시킨 소설이다. 현대 영문학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문제작이지만, 난해한 문체와 현란한 기법, 방대한 분량 때문에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어렵다는 평을 듣는다.

그럼에도 소설 주인공 이름을 딴 블룸스 데이는 더블린 시민과 아일랜드 국민은 물론 전 세계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 대표적인 문학 축제로 자리잡았다. 해마다 6월 16일이 되면 소설 무대인 더블린에서는 레오폴드 블룸의 행적을 따라 걷거나 소설 <율리시스> 의미를 되새기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마련된다. 축제는 대개 1주일 전부터 시작되는데, 올해의 경우 지난 9일부터 조이스와 <율리시스>를 소재로 한 영화 상영과 노래 공연, 전시회, 걷기 행사 등이 펼쳐졌거나 진행되고 있다.

블룸스 데이의 절정은 역시 당일인 16일. 이날 아침 더블린의 제임스 조이스 센터에서 ‘블룸스 데이 브렉퍼스트(아침)’를 먹는 것으로 시작된 축제는 지역 명사들과 조이스 마니아들이 참가하는 <율리시스> 낭독회와 연주회, 뮤지컬 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블룸스 데이의 핵심은 아무래도 주인공 블룸의 발길을 따라 더블린 시내를 걷는 답사(walking tour)에 있다.

‘레오폴드 블룸의 발자국을 좇아서’라는 이름의 답사 프로그램은 이미(11, 13, 14일) 진행되었고, 16일 하루 동안에만도 ‘조이스와 영화’ ‘음악과 정치’ 등을 주제로 한 다양한 테마 답사가 예정되어 있다. 특히 올해는 조이스의 연작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이 출간된 지 100년이 되는 해여서 <더블린 사람들>의 무대를 밟는 답사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블룸스 데이의 마무리는 17일 정오 조이스 센터에서 있을 ‘<율리시스>의 기원들’이라는 강연이 장식할 참이다.

블룸스 데이의 성공을 보면서 생각한다. 우리 문학에서도 블룸스 데이와 같은 축제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없지 않다. 한국판 ‘블룸의 길’에 해당하는 코스가 우리에게도 있다. 바로 ‘구보의 길’이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인공 구보가 걸었던 1930년대 경성의 중심부 노선이다.

건축학자 조이담씨는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2005)라는 책에서 소설 속 구보의 하루를 1934년 8월 1일로 특정하고, 청계천변 다옥정 7번지 집에서 출발해 종로네거리와 동대문, 남대문과 경성역, 광화문통 등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총연장 15.7㎞(전차 구간 5.7㎞ 포함)의 ‘구보 노선’을 정리해 놓은 바 있다. 복원된 청계천과 광화문, 시청 광장, 서울역, 남대문 등을 포괄하는 이 노선은 한국판 ‘블룸의 길’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지난달 29일과 이달 9일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씨가 독자들과 함께 답사한 남한산성 길 역시 문학·역사 기행 코스로 개발할 만하다. ‘구보의 길’이든 남한산성로든, 한국판 ‘블룸의 길’의 출현을 꿈꾸어 본다.(최재봉 기자)

중앙일보(07. 06. 16) 하루의 힘

'블룸스데이'를 아시나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매년 6월 16일을 '블룸스데이'라고 부르며 축제를 벌인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의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의 이름을 딴 '블룸스데이'엔 블룸이 거닌 길을 따라 걷거나 그가 먹은 음식을 똑같이 먹는 이벤트를 펼친다. 그리고 더블린의 공영방송에선 아예 아침부터 30시간에 걸쳐 '율리시즈'를 낭독한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별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율리시즈'가 1904년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 반까지 하루가 채 안 되는 19시간여 동안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무대로 일어난 일들을 장장 800여 쪽에 25만여 단어로 담아낸 것임을 감지하는 순간 '블룸스데이'의 비밀 아닌 비밀이 풀리기 시작한다.

사실 말이 800여 쪽이지 그것은 영어 원본의 경우이고 '율리시즈'의 우리말 번역본은 해설을 포함해 1300여 쪽이 넘는다.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 하루, 아니 19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을 묘사한 것이라니! '율리시즈'를 보노라면 하루, 즉 24시간=1440분=86400초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것들의 은밀한 압축이요, 함축인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고 경탄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스탈린 시대 강제수용소에서의 단 하루의 일들로 한 권의 결코 만만치 않은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단 하루의 삶일지라도 그것은 한 권의 소설 이상을 탄생시킬 만큼 그 뭔가로 농축돼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율리시즈'에 묘사된 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한평생의 숙제요, 존재할 이유이며 삶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 앞에선 묘한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김종건 전 고려대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 시절 원어 강독 시간에 '율리시즈'를 만나 자신의 평생을 그것의 번역을 위해 바쳤다. 1968년 국내 최초로 '율리시즈'를 번역한 김 교수는 20년 후인 88년 다시 개정번역을 냈고, 또 한 해 모자란 20년 후인 올해 2007년에 세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다. 평생 고치고 또 고친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의 평생을 소설 '율리시즈'에 묘사된 하루와 고스란히 맞바꾼 셈이다. 그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을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평생을 바친 것이다. 물론 노 교수의 학문적 투혼도 무서울 정도지만 25만 단어 이상의 사연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가 뿜어낼 수 있는 하루의 힘, 그 하루의 저력은 무섭다 못해 위대하지 않은가.

그래서 하루가 아까운 것이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사단칠정 논쟁을 펼쳤던 것으로 유명한 고봉 기대승의 13대 후손인 기세훈 변호사의 고택 사랑채 당호는 다름 아닌 애일당(愛日堂)이다. 애일당이라…하루를 사랑하는 집? 아니다. 애일당 툇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시간 가는 것이 너무 아쉬울 만큼 좋다. 결국 애일당은 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는 하루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깝고 아쉽다는 함의가 깃든 집 이름이 아닐까.

하지만 하루가 지나는 것을 아깝게만 생각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아까운 하루를 최고의 하루, 위대한 하루로 만드는 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터리, 오늘은 선물!" 그렇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분명히 선물이다. 그 선물인 오늘 하루를 최고의 날로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이다.(정진홍 논설위원)



07.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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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6-1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겨레에서 봤는데 로쟈님 올리실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저 무겁고 두꺼운 <율리시스>가 책장 한 곳에 누워있군요.

로쟈 2007-06-18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크랩 정도는 대신해줄 만한 비서를 구해야겠습니다.--;

eddie 2007-07-0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수유님 블로그에서 보고 왔습니다. 이 글 제 개인 블록에 퍼가도 될까 해서요. 아 그런데 돌아보니 참 재밌는 포스팅이 많네요. 멋져요^^

로쟈 2007-07-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가끔 놀러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