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작성한다. 한달 단위로 목록을 뽑았었지만, 지난 6월에 사정이 좋지 않아 5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연장했었고, 여름이 실질적인 '독서의 계절'이라곤 하지만 책만 읽을 수 있는 계절은 아니기에 기한을 넉넉하게 잡기로 했다. '새로 나온 책'들에 대한 편애 때문에 미리 이런 리스트를 뽑는 게 취향에 맞지는 않지만 여하튼 다섯 가지 주제에 따라 다섯 권의 목록을 만들어본다. 이를테면 오지선다인 셈이며 주제별로 한 권 정도씩을 읽어보자는 게 나의 제안이다(빠져나갈 구멍들도 만들어놓았다). 이런 사회적 독서의 제안 취지는 소위 '상식'을 공유하고 공통감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첫번째 주제는 지난 6월의 '후일담' 같은 것인데, 실질적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무의식은 '97년 체제'처럼 보이지만 여하튼 공식적으로 더 많이 공론화되고 있는 것은 '87년 체제'이며 그 '민주화'의 열망과 절망이 연말 대선을 앞둔 올해의 화두이다. 최근에 출간된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07)은 지난봄에 나온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후마니타스, 2007)과 짝을 지어 읽어볼 만하다. 후자는 경향신문의 기획특집이었고 전자는 현재는 휴간중인 당대비평의 편집위원회가 엮은 것으로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이란 화두를 붙들고 있다. 다양한 필자들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모색해보고 있다.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되새겨보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되어줄 듯하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 창간 5주년 기념으로 기획했던 것은 문제의 진단보다는 해법이었는데, 우리시대의 명망가 '다섯 지식인이 말하는 소통과 공존의 해법'을 담은 <여럿이 함께>(프레시안북, 2007)는 '부교재' 정도로 읽어봄 직하다(지면이 아닌 온라인으로도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몇년 동안 부쩍 언론 노출 빈도가 잦아진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2/2005)는 '한국 민주주의' 담론 유포에 도화선이 된 책이다. 넓은 의미의 '정치적인 것'이 아닌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서 지난 20년을 회고하고 문제를 진단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 2007)는 우리의 시야를 동아시아로 넓혀주는 책. 한국적으로 '행동'하기 이전에 동아시아적으로 '사고'해볼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두번째 주제는 한반도와 북미관계이다. 새로운 화제는 아니지만 일부러 이 주제의 책들을 검색해본 일은 드물었다. 최근 BDA 문제가 타결되어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와 주변국들간의 긴장관계가 일단은 해결국면으로 접어든 양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을 향한 로드맵이 앞으로 탄탄대로일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욱식의 <동맹의 덫>(삼인, 2005)의 표현을 빌면 우리에게 가로놓여 있는 건 '동맹의 덫'과 지정학적인 '지독한 역설'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주 따끈한 신간들은 아니지만 개번 맥코맥의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이카루스미디어, 2006), 브루스 커밍스 등의 <악의 축의 말명: 미국의 북한 이란 시리아 때리기>(지식의풍경, 2005), 마이크 모치주키 등의 <대타협: 북한 vs 미국, 평화를 위한 로드맵>(삼인, 2004) 등이 모두 관련서들도 눈길을 끄는 책들이다. 거기에 백낙청 교수의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이 최근 국내에서 나온 책으로는 독보적이다.

소개에 따르면 "통일을 지금의 분단체제보다 국민들이 더 나은 체제에서 살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인식 하에서, 국가연합 형태의 점진적인 분단체제 극복을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는 지은이는 이른바 '6.15 시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전쟁 같은 불가피한 파국을 전제로 하는 일회성 사건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은 어느 순간 '도둑같이' 찾아올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만큼 사전대비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여름 휴가중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다).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나열한 듯싶은데 스트레이트로 하나 더 보태자면 '인문학 문제' 또한 이 여름의 읽을 거리이다. '인문학 위기'는 이미 지난 2-3년간 학술 저널리즘의 최대 유행어가 되었고, 최근에는 급기야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이란 것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인문학 IMF'라고도 할 만한데(생각해보면 경제파탄 10년후에 정신파탄이 수반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덕분에 인문학-인문주의-인문정신의 가치와 위상과 정체성에 대한 물음들이 간단없이 제기되었던 건 나름대로 소득이라 할 만하다.  

최근에 한국학술협의회에서 펴낸 <인문정신과 인문학>(아카넷, 2007)은 한국 인문학의 현재를 가늠해보는 데 유익한 참조가 될 만한 글들을 다수 싣고 있다. 대담 코너에서는 김우창 교수와 최근 타계한 리처드 로티의 서신대담이 연재돼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책에 손길이 간다. 그런 대담 꼭지에서도 시사되는 바이지만 한국 인문학의 간판급 지식인으로 자주 거론되는 이는 김우창 교수이다(가령, '김우창 vs 리처드 로티', '김우창 vs 가라타니 고진' 등등). 알려진 대로 문광훈 교수의 여러 저작들이 인문학자 김우창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김우창의 인문주의>(한길사, 2006)은 대표적이다. 내친 김에 5권으로 묶인 김우창 전집에 이 여름에 독파해볼 수도 있겠다(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더불어 이미 많은 화제를 모았던 책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 또한 시세에 둔감한 분들을 위해 다시금 거명해둔다. 앞서 언급한 교육부의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에 보면 "인문학은 자기와 주변의 이해를 돕고 품위 있는 삶을 유도하는 학문"이라고 규정돼 있는데, 이는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존중하게 되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얼 쇼리스의 주장을 참고한 것이다(라고 부언해놓았다). 그 정도면 '한국을 움직인 책' 후보감이다.     

인문학 알레르기가 있으신 분들은 이 여름에 통섭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최재천 교수의 '작명'이지만 어느새 입에 익숙한 단어가 돼버린 통섭은 개별 학문의 경계를 넘어 폭넓게 사유하는 것을 뜻하는데, 사실 기원으로 소급해 올라갈 수록 현재의 허다한 학문들은 몇몇 교차점과 공통의 근원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학문의 '오래된 미래'를 다시 회복해보자는 취지로도 들린다. 에드먼드 윌슨의 <통섭>(사이언스북스, 2005)이 소개된 이후 올해엔 아예 통섭원총서 제1권으로 <지식의 통섭>(이음, 2007)까지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책들을 구해놓은 지는 꽤 되는데, 이번 여름에나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읽어도 좋겠다. 통섭 본래의 아이디어도 그러하고.    

 

 

 

 

드디어 좀 가벼운 분야로 와서 올 여름에 읽을 문학이다. 일단은 <올해의 좋은 소설>(현대문학, 2007), <올해의 좋은 시>(현대문학, 2007)을 꼽아둔다. 물론 '좋은 소설'에 선정된 작품들은 대개 문예지들에 발표되었던 중단편들이다. 장편소설들이야 독자들이 알아서 챙겨읽지만 문예지들이 거의 읽히지 않는 상황에서 아깝게 묻히게 되는 문제작/수작들이 적지 않다. 그런 작품들을 좀 챙겨두자는 취지이고 최소한 동시대 작가들이 어떤 고민거리를 안고 있으며 어떤 성취에 도달하고 있는가 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겠다. 그리고 고른 장편들은 동아시아 삼국의 문제작들을 꼽았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거론하는 건 새삼스럽지만 지난 1967년에 씌어진 그의 대표작 <만년원년의 풋볼>(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이번에 재출간됐으므로 핑계가 없지는 않다. 이전에 나온 고려원 전집판은 절판된 상태였고 나도 따로 구해두지 않았던 터라 이참에 게획을 잡은 것. 그리고 중국 소설로는 본토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 된 작가 위화의 최신작 <형제>(휴머니스트, 2007)이다. 3권짜리로 종횡무진 중국 현대사와 그 시대를 살아간 군상들의 삶을 대표작가의 입담을 통해서 들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올 상반기 최대 베스트셀러이자 문제작인 김훈의 <남한산성>(학고재, 2007)은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는데, 동아시아 3국의 소설을 비교해보려니 다른 작품을 얼른 떠올리기 어려웠다. 이미 읽으신 분들은 한번 더 읽으시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여름 휴가때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라면 교양과학서를 일순위로 꼽는다. 일반독자들에게 추리소설이나 SF소설에 해당하는 것이 내겐 교양과학서들인 셈인데, 지난 2-3년간 휴가다운 휴가를 다녀온 적이 없어서 스스로는 실행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밀린 책들이 많지만 이 여름에 읽을 책들도 부지런히 사두었다. '한국 최고의 과학지성들이 현대과학의 난제에 도전한다'는 부제의 <우주와 인간 사이에 질문들 던지다>(해나무, 2007)은 국내 필자들의 책이어서 거명은 하지만 270쪽의 얄팍한 책이다. 휴가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닥날.

아미르 아젤의 <데카르트의 비밀노트>(한겨레출판, 2007), 도널 오셔의 <푸앵카레의 추측>(까치글방, 2007) 모두 수학(기하학)에 관한 책들이다. 올해가 18세기의 수학자 오일러 탄생 300주년이라고 하여 그에 관한 책을 찾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내에는 변변한 책이 소개돼 있지 않다(오일러는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수학자이다).

<핀치의 부리>의 저자 조더던 와이너의 <초파리의 기억>(이끌리오, 2007) 또한 소설에 못지 않은 재미와 이야기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된다(원제는 보다 고급스럽다. <시간, 사랑, 기억>). "행동도 당연히 유전자에 적혀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마땅하다 믿고 그 증거를 찾아낸 생물학자 시모어 벤저와 그의 연구과정을 풀어낸 책. 진화학, 동물행독학, 분자생물학등 생물학의 다양한 파노라마가 한 곳에서 펼쳐진다"고. 그리고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란 부제의 <의학의 진실>(마티, 2007)은 교양서를 거의 읽지 않는 동생들에게 선물을 할까 생각중이다(그들은 의사이다)...

07. 07. 01.

 

 

 

 

P.S. '사회적 독서'만 늘어놓고 보니 약한 허전한 듯하여 '개인적 독서' 목록도 적어둔다. 현재 읽고 있거나 조만간 읽어볼 생각인 책들이다(주로 에세이들이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와 <브레이크 없는 문화>(이카루스미디어, 2007)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소개한 바 있고, 미셀 포쉐의 <행복의 역사>(열린터, 2007)는 프랑스 역자학자의 행복을 주제로 한 대중적인 에세이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해왔던가를 돌이켜보노라면 행복에 대한 강박에서 약간은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그리고 프랑스 미술사가인 다니엘 아라스의 <디테일: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도서출판 숲, 2007)는 기이하게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책이다. "이 저작은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다. 그것은 디테일이다. 우연하게 보여졌거나 차츰차츰 발견된, 식별되고 고립되고 전체에서 분리된 디테일은 '멀리서' 성립된 것처럼 보이는 미술사의 범주들에 의문을 던진다. 프랑스의 미술사가 다니엘 아라스는 그림 속 디테일의 서로 다른 지위를 연구함으로써 또 다른 미술사를 제안한다. 그것은 붓과 시선의 실천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미술사다."란 소개가 머쓱한데, 경제력 때문에 아직 구입한 책은 아니지만 충분히 관심을 끄는 책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1902-1977)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갈라파고스, 2007)는 어제 퇴근길에 손에 든 책인데, '한 기억술사의 삶으로 본 기억의 심리학'이 부제이다. 저자인 루리야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신경심리학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올리버 색스의 책들에서 그의 이름이 종종 언급되면서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러시아에서는 그의 <일반심리학 강의> 등이 아직도 교재로 나오고 있다(아래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신경심리학의 기초>).

Основы нейропсихологии

책은 솔로몬 셰르셉스키라는 러시아 출신의 언론인 겸 기억술사에 관한 루리야의 임상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다. 국역본은 영역판의 중역이지만 193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나 같은 러시아문학 전공자의 관심 또한 충분히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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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01 21:4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페이퍼를 오면 제가 읽고프지만 부담가서 못읽고 있는 책들을 자주 접합니다. 그 책이 지니는 무게감 때문에 주제별로 줄줄이 엮어 볼 수 없는. 언제쯤이면 로쟈님 같이 독서를 할 수 있으려나...

로쟈 2007-07-01 23:55   좋아요 0 | URL
'사회적 독서'에 올려놓는 책들은 대부분 내용 자체가 '부담'스러운 책들은 아닌데요.^^; 줄줄이 읽으려면 경제적인 부담이 될 듯하나...

동대장 2007-07-10 09:07   좋아요 0 | URL
경제적 부담에 한표 던지고 갑니다.
 

주말판 경향신문에서 옮겨온 연재이다. 문광훈 교수의 '천천히 사유하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 문학/예술의 종언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아직도 문학/예술에 뭔가를 기대한다면 그건 '세계시민적 공동체'(혹은 '세계공화국')에 대한 기여 지분과 관련해서가 아닐까 싶다. 너무 점잖은 글이긴 하나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구경할 겸 스크랩해놓는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얼음바다’(1823년경)는 얼음덩이 아래 가라앉은 배의 잔해를 보여준다. 칼날처럼 치솟은 얼음조각이 보여주듯, 인간의 노력은 자연의 위력 앞에 쉽게 좌초되고 만다. 그러나 가없는 수평선은 지금의 좌절이 한 때의 일일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국가적 단위 속에서 이 국가를 넘어 서로 교류하는 이상적 상태-세계시민적 공동체는 이 ‘더 나은 세계’의 한 예가 될지도 모른다.

경향신문(07. 06. 30) [천천히 사유하기]예술과 세계시민적 공동체

거창한 제목은 날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도 때로는 주위를 살펴야 하듯, 한 주제도 그 맥락을 고려할 때 온전해진다.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다루건 그 밑에는 늘 심미적 경험의 가능성이 자리했지만, 예술의 좌표를 제대로 짚으려면 그 환경-내외적 현실조건을 살펴야 한다.

2007년 6월의 한국은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흔히 말하듯 그것은 지난 40여년에 걸친 압축성장의 결과겠지만, 그래서 그동안 억눌려온 많은 것들이 하나씩 곪아터져 나오는 까닭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길게 보면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어 가는 징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단계에서 간과되거나 희생되는 면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치러야 할 소모와 낭비는 너무 커 보인다. 여전히 불안정한 부동산 가격이나 대선을 앞둔 정파들의 이전투구, 아이들의 지옥같은 학교생활, 가계부채의 증가는 그 몇가지 예일 뿐. 사람들의 눈빛은 우리가 전투하듯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고, 그 어깨는 누군가가 만든 대열 속에 이 다음의 전선으로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불안정은 나라 밖에도 있다.

전쟁과 테러, 미국의 일방주의, 국제기관의 무능, 불공정한 노동조건, 종교분쟁과 문화갈등, 그리고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당면 문제는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아 보인다. 다국적 자본은 후진국의 값싼 노동력으로 이윤을 늘리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당한 몫을 나눠갖지 못한다. 이 불안은 물가상승과 구조조정으로 더 가중되고 있다. 모두가 불안하다면 중간층이라도 튼튼해야 하는데, 이들 역시 허약하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잠재된 문제는 ‘불균등하게 작용할’ 공산이 크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새로운 유토피아-신자유적이거나 복고적이지 않은 ‘세계시민적인 좌파’가 필요하다고 최근에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이전에는 권력의 획득이 유토피아의 포기로써 가능했다면, 이젠 유토피아의 포기란 곧 권력포기가 된다. 따라서 이 이상을 실행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적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독일 사민당 당수의 ‘사회적 세계화’를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편의 과제일 수는 없다. 그것이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 더 본격적으로 논의되겠지만, 보수당이나 일반대중에게도 열려 있다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이런 개방성조차 변질될 수 있다. ‘구조조정’이나 ‘노동유연화’에서 드러나듯, 오늘날의 많은 언어는 원래의 함의를 잃어버렸다. 구조조정이란 이름 아래 이 땅의 비정규직은 노동인구의 절반을 넘어섰고, 힘겹게 쟁취한 노동권은 ‘개혁’의 기치 아래 다시 박탈되고 있다. ‘유연화’가 노동권과 인권을 얼마나 경색시키는 것인지 우리는 잘 안다. 위험사회적 조건은, 벡이 지적하듯 오늘날엔 국내외를 막론하고 더욱 철저히 실현되고 있다. 많은 사상적 종교적 문화적 가치들은, 정부의 것이건 민간단체나 세계기관의 것이건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편재화된 ‘정당성 결손(Legitimationsdefizit)’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시작하여야 하는가? 예술의 방법은 무엇일까?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무엇보다 ‘느낀다’. 이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글로 쓰여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지금껏 눈여겨보지 못한 것이 화면 위에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되고, 무덤덤했던 가슴이 어떤 선율로 울렁댐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듯 어떤 건축물에서는 사람 사는 공간이 이렇게 구획되고 구성될 수도 있음을 새삼 겪는다. 예술은 그 나름으로 심정을 어루만지며 감각에 호소한다. 그것은 정서적 인습을 뒤흔들어 세계를 더 본래의 모습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감각적 진동은 사고의 변화로 이어진다. 심미적 경험은 삶의 넓이와 깊이를 다시 느끼게 한다.



예술경험에서 중심은 주체-자아-개인이고, 이 개인의 변화 가능성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다. 예술에는 자연의 원형상(Urbild)-본래적 형식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은 지금의 많은 것이 화석으로 남을 거라고 말한다. 반대로 버림받는 어떤 것은 언젠가 존중될 것임을 알려준다. 생성의 맥락을 잇는 가운데 그것은 이미 비판적 이미지를 담는다. 예술과 만나면서 자아는 “섬세하게 조율된 영혼”(쉴러)으로 주형될 계기를 얻는 것이다. 이 계기는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해야 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한’ 하는, 느끼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무엇이다. 심미적 각성은 철저히 개인의 의사에 맡겨진다. 이 점에서 도덕이나 윤리 또는 법률의 구속과는 다르다. 예술에서 나는 나 밖에 선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 토대는 더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가 그렇듯이, 증가된 재화가 조화된 세계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시대에서도 왜곡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의 항소가 멈출 수는 없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감각의 신선함이고, 이 신선함으로 유지되는 깨어있는 의식이다. 예술은 바로 이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에는 상투성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다. 상투성이 타성의 반복이라면 예술은 타성의 경계를 넘어 경험의 배후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다시 물러나자. 예술의 새로움도 오늘날에는 대개 오염되어 있다. 시장과 자본의 개입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느낀다면 우리의 자유는 좀더 넓어지고, 새로 생각하는 만큼 더 깊어질 수도 있다. 이 에너지로 우리는 생활세계 안에서 조금 다르게-편견을 줄이고 거짓을 삼가며 서로를 더 배려할 수 있게 될까? 미시적 실천 속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술은 자유와 자율, 그리고 관용을 연습하게 한다. 생기를 잃지 않은 영혼만이 부당함에도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세계 사이에 조율된 심성이 있다면, 예술을 통한 이 길은 이렇듯 에둘러 있다.(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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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자적하게 '파도타기와 공잡기'란 페이퍼를 쓰고 있다가 문득 오늘이 마감인 보고서 파일을 저장해오지 않은 걸 알게 됐다. 부랴부랴 학교에 나올 수밖에(이런 게 '파도타기'다!). 오는 길에 경향신문에서 '작가와 문학사이' 마지막회를 읽었다. 덩달아 6개월 또한 이 연재를 '문학의 뒷계단'에 옮겨놓았으니 나로서도 감회가 없지 않다. 안면이 없지 않은 두 문학평론가의 얼굴을 지면에서 보니 반갑기도 하고, 매주 하던 일 한 가지가 줄어서 기쁘기도 하다. 기꺼이 마저 옮겨놓도록 한다.  

심진경(왼쪽)·신형철씨가 신세대 문학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80년대, 90년대 학번인 두 사람은 작가적 자의식, 젊은 독자들의 수용태도 등에 대해 일부 이견을 보였으나 계몽과 교양의 손을 떠난 문학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경향신문(07. 06. 30) [작가와 문학 사이]시리즈 결산… 새로운 한국문학을 논하다

지난 1월6일부터 매주 연재됐던 ‘작가와 문학 사이’가 막을 내린다. 김연수부터 한유주까지 13명의 소설가, 문태준부터 김경주까지 10명의 시인을 다룬 이 시리즈는 현재 우리 문학계의 주역으로 떠오른 1970년대 생 이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심층 조명해 호평을 받았다. 필자로 참여한 문학평론가 심진경씨(소설)와 신형철씨(시)의 대담을 통해 새로운 한국문학을 진단했다.

▲ 수록작가

시인: 문태준 황병승 진은영 김선우 강정 손택수 김민정 이장욱 이병률 김경주
소설가: 김연수 박민규 강영숙 윤성희 김중혁 이기호 천운영 정이현 편혜영 박형서 김애란 백가흠 한유주

# 자신만의 방언같은 소문자 문학

신형철:전통적인 스타일의 시인과 새롭고 전위적인 시인을 교대로 다뤘다. 이장욱 황병승 김민정 김경주 등 젊은 시인들의 특징은 서정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다. 시적인 것이라는 큰 범주가 있다면 서정적인 것은 하위 범주이면서 가장 유력한 범주다. 그러나 그것 사이에는 틈이 있다. 90년대에 워낙 서정시가 주류였기 때문에 2000년대 시인들은 대개 그에 대한 반작용을 보인다. 문태준이나 손택수 같은 시인도 서정시를 쓰지만 서정적인 것의 상투성, 그 메커니즘의 위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심진경:김연수와 한유주는 10살 차이가 나고 문학의 색깔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들을 아우르는 특징이라면 문학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방언 같은 문학, 소문자 문학, 개별 문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김연수는 역사를 다루지만 그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회의한다. 이기호도 기존 소설 관습을 뒤집고 비트는 시도를 한다. 박민규나 편혜영을 보면 기존의 인간이란 종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새로운 인종의 출현을 기대한다. 개별 지도를 만들어가는 영세업자들이 오늘의 작가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육화(肉化)

신형철:2000년대 문학의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육화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초반의 전위적 시는 대중문화를 끌어들이건, 패러디를 하건 정치적·계몽적 요소가 있고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보수적인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몽적 자의식이 없다. 시에 대해 숭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시인이 드물고 여러 예술 장르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90년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머리로 받아들인 근대적 인간들의 시대였다면 지금 작가들에게는 포스트모던 문화가 그대로 들어와 있다. 장르 문학과 본격 문학의 경계 흐리기, 무국적, 젠더적 혼란, 인류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기 등이 자연스럽다.

심진경:김중혁의 작가의 말(펭귄뉴스)을 보면 자기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이 혼합된 레고블록이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한 조각의 레고블록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이런 식의 자기 이미지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다. 작가가 이 정도는 알고 이 정도 음악은 듣고 이 정도 예술 영화는 봐야 한다는 자기검열, 교양인의 상은 사라졌다. 무작위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90년대 백민석이 비트음악과 록음악을 말할 때에는 고급문학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표지로 소비했으나 지금의 박민규는 저항하기 위해 끌어온다든가 하는 자의식이 없다. 자기가 즐기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농민이 농업사회의 주체이고 노동자가 산업사회의 주체라면 후기 산업사회의 주체는 기계다. 자기를 단일한 주체로 호명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아바타로 분열, 해체시키고 다시 합칠 수 있는 기계로 보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워졌다.

# 교양속물 vs 자기전시

신형철:소설은 이래야 한다, 시는 저래야 한다는 숭고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문학은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훨씬 스타일에 대한 압박을 덜 느끼고 자유롭게 한다. 수용자 층의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워서 젊은 세대의 독자는 말 많은 젊은 시인들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작품이 이질적이라는 건 윗세대의 담론 아닐까.

심진경:황병승의 시와 한유주의 소설은 책의 형태가 아니라 인터넷을 떠돌고 각자의 블로그에 퍼가는 형태로 소비된다. 대신 이 세대는 칙릿이나 일본소설을 산다. 자신을 현학적으로 포장하고 과시하기 위해 문학을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적인 시, 연애시가 아니라 황병승의 시를 알고 있다는 식의 자기자랑, 내지는 개성의 표현방식으로 사용된다.

신형철:소비하는 방식이 바뀐 건 맞는데 외적인 방식이 바뀌었을지언정 자기세대의 문학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수용한다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황병승의 시를 읽는다면 단순히 좋아하기 때문이지, 이전 세대처럼 이만큼은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그러는 건 아니다.

심진경:이들은 물론 황석영 책 정도는 읽어줘야 한국 현실을 안다는 이전의 교양 속물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나름의 리스트가 있는데 이는 자기 전시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필독서 목록이 버지니아 울프에서 폴 오스터로 바뀌었으며 고급음악에 대한 느낌도 바흐나 모차르트에서 ‘라디오헤드’의 록음악으로 변했다. 개별적인 문화소비로 보이지만 그들만의 장(場)이 있다는 뜻이다.

# 후광 사라진 시대의 작가의식

신형철:문학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작가 역시 그 위계질서의 위를 차지하려는 입신양명적인 욕망을 버렸다. 문학이 다른 예술 장르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소설가가 기타리스트 나부랭이와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니다. 이기호가 말한대로 소설가는 소설을 써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후광이 사라졌기 때문에 ‘너는 구두를 닦냐, 나는 소설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옛날처럼 비평가가 권위있는 이름의 시대라면 말 못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비평가라고 말한다.

심진경:이전 선배들이 보여주는 리더의식, 작가가 보통 사람과 다른 지성인이라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문학적 환경이 예전보다 비천해지면서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이 작동한다고 본다. 예컨대 윤성희나 김애란이 비천한 삶을 그리는 것, 김중혁이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박민규가 전직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 등에는 소설가라는 이름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이는 제스처가 있지 않을까.

신형철:그런 자의식이 너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심진경:김중혁의 말처럼 누군가의 레고블록이라도 되고 싶다면 그게 작가적 자의식일 것이다. 그런 자의식 없이는 문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단 80년대에 비대해진 문학의 권력화, 제도화와 상관없는 게 오늘의 작가들이라면 오히려 60~70년대와 맥이 닿을 것이다.

# 신세대 문학, 예술 아니면 유령

신형철:근대문학이 했던 역할이나 위상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시인, 소설가들이 거꾸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문학은 점점 주변화, 소수화, 취미화의 길을 갈 것이다. 이 현상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야기하면 너무 갑갑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걸 해야 했기에 왜곡되고 비대해졌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 치열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소설은 아직 모르겠다는 느낌이 많고 시에 대해 호의적이다. 지금 독자에게는 한국문학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이 있다. 90년대 시와 소설이 남긴 부정적 효과 중 하나인데 서정시 일변도나 여성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내면과 성찰의 이미지다. 특이한 시와 소설이 동시대 독자들에게 재미있네, 다르네, 우리 이야기를 하네, 그런 느낌을 준다면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기성 독자와 평론가들이 선입견을 자꾸 고착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심진경:문학의 전문화, 세분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일반인들이 더 접근하기 어려운 클래식, 하이모더니즘이 될 것이다. 전문적인 독해능력, 지루함과 낯섦을 견딜 수 있는 고급 취향의 영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현실이 있고 문학이 그걸 재현한다는 사고 대신,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현실에 대한 사유가 훨씬 탄력적으로 변한 건 신세대 문학의 장점이다. 단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가지를 미디어를 통해 경험하면서 모방의 모방이 거듭되고 사유없는 사유, 경험없는 경험이 떠다니는 것을 경계한다면. 자칫 유령이 될 수도 있다.

# 다루지 못한 작가들

신형철:시인 김행숙을 언급하고 싶다. 서정적인 것에 대한 자의식, 긴장이란 면에서 2000년대 시인의 등장 이전에 독보적인 자기 목소리를 냈고 직관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쓰는 시인이다. 소설가 전성태는 타자를 재현할 수 있는가라는 논란의 중심에 선 작가다. 빠트려서 죄송하다는 멘트가 들어가야 할 듯하다.

심진경:동의한다. 김숨도 다뤘으면 좋았을 것이다. 장편 ‘백치들’, 단편집 ‘침대’를 냈는데 같은 이야기를 아주 낯설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중동에서 일하다 돌아온 아버지를 방 안에 모래바람을 몰고 온 백치로 묘사한다든지, 현실적 이야기를 믿을 수 없게 한다. 권여선은 나이로 보면 젊은 작가가 아니지만 굉장히 특이한 인간형을 제시한다. 홍상수(영화감독)식의 자기비하가 우월감의 다른 표현이라면 권여선은 자기우월감 없이 바닥으로 추락시키는 자의식을 보여준다. 매우 공감가는 캐릭터이다.(진행·정리|한윤정기자)

07. 06. 30.

P.S. 두 평론가의 '일부 이견'에 대해서는 노랗게 색칠해놓았다. 8년 정도의 연배/세대 차이가 이견을 낳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소설(심진경)과 시(신형철)라는 장르적 관심(이해관계)의 차이가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두 장르가 공동운명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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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장마철이지만 서재의 스크린을 여름 휴가 모드로 미리 바꾸고(휴가를 갈 일이 없을 듯해서 기분만 내본다) 서핑하는 사진도 갖다 붙여놓는다. 보기에 제법 시원하군... 

6월 한달을 거의 파도타기로 보낸 듯하다. 서핑 수준의 그런 폼나는 파도타기가 아니라 바닥에 발들 딛고 있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살짝 발을 떼어 균형을 잡는 '파도타기' 말이다. 재미를 제외한다면 그런 파도타기의 목적은 순전히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다(소위 물먹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해수욕장에 나가 그런 파도타기를 해본 건 10년도 더 전의 일 같지만 여하튼 그 '실감'을 오랜만에 느끼던 와중에 한달이 훌쩍 다 지나가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밀린 잠을 보충하고 일어나니 밀린 책들이 수십 권이다. 이런 경우에 순서를 따지는 건 무의미해서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을 몇 페이지 읽다가 벨르이의 소설 <페테르부르크>를 몇 페이지 들춰보고(읽어야 하는 러시아어본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문학동네, 2000)에도 손길이 갔다. 아직 국역본이 완간되지 않은 '이 빠진' 번역서와 함께 영역본을 빼놓고(내겐 러시아어본도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뜻으로 오늘은 서론을 읽어두기로 했다. 예전에 얼마간 읽었지만 따로 정리는 해두지 않았다는 게 이유이다(그땐 구 영역본을 참조했는데, 지난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파도타기 말고 진짜 공부를 위한 자세도 가다듬을 겸. 

  

책에서 먼저 읽게 되는 건 가다머가 제사로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구이다. 제목이 따로 붙어 있지 않은 한 후기시의 전반부라는데, 우리말 번역은 이렇다.

그대가 스스로 던진 공을 받아 잡는 동안은
모든 것이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이지만;
영원한 공연자(共演者)가 그대에게
그대의 중심으로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신이 만든 거대한 다리의
저 곡선들 중의 한 곡선을 따라 던진 공을
그대가 불시에 잡게 되는 경우
그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가 아닌
세상의 능력이라오.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이 시에 대한 해설이 따로 붙어 있지 않지만 국역본에는 간략한 해제가 달려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시는 "만년의 스위스 시절에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돌보아준 나니 분덜리-폴카르트 부인에게 헌정된 시이며, 전집 제2권에 실려 있다." 이어지는 해설. 

"'중심'이란 말이 이 시의 요체이다. '중심'은 개인적인 중심과 영원성 혹은 신의 '중심'으로 구별되고 있다. 여기서 '중심'은 공간적인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서 타자로부터 다가오는 중심을 말한다. '영원한 공연자'가 '그대의 중심'을 향해 공을 던질 때, 다시 말해 우리가 협소한 중심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중심을 상대할 때, 비로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만의 것이 아닌 '세상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

중심의 형이상학이 이 시의 요체인가는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에서 두 가지 공잡기가 대비되고 있다는 것. 그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던진 공을 받는 것이다. 즉 자가-포구(self-catching)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메랑처럼 자기가 던지고 자기가 받는 것인데,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순전히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자가-포구는 혼자서 하는 파도타기에 가깝겠다.

다른 하나는 좀 다른 종류의 공잡기이다. 그건 공을 던진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영원한 공연자'이기 때문이다. 영역본에서는 '영원한 공연자'를 'eternal partner'라고 옮겼다(러시아어본에서는 이를 여성명사로 받았다). '영원한 파트너'라고 해도 무방할 텐데, 문제는 이 공연자/파트너가 '그대의 중심'을 향하여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던진 공,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받는/잡는 것이다. 그럴 경우 "why catching then becomes a power -/ not yours, a world's." 즉, 그때 공을 잡는 것은 그대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능력이라는 것. 왜 아니겠는가?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라고 해설에도 적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해석행위' 혹은 그것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해석학이란 게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점. 가다머가 서론에서 주장하고 있다시피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은 학문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명백히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는 '공잡기'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내가 써놓은 걸 읽는 게 아니라 누군가(혹은 영원한 파트너가!) 써놓은 걸 읽고 이해하는 일이 곧 우리 '세계 경험'의 요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축적하는 행위로서의 공부는 공을 제대로 잘 잡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다. 제대로 된 프로텍터와 미트도 준비해서 다양한 투구폼과 구속과 구질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영원한 파트너께서 던지는 공은 사인도 없이 날아올 때가 많기에 밥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미트를 벗어서는 안될 터이다...  

서문을 읽겠다고 해놓고 잠시 딴전을 피웠다. 다시 가다머의 묵직한 공을 받기 위해 책상머리로 가야겠다(그는 영원의 나라에서도 현란하게 공을 뿌려대는군!). 이건 혼자서 파도타는 것과는, 자리만 보전하는 것과는 양상이 좀 다르다. 이 여름에도 중무장을 하고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공을 잡게 되더라도 그건 세상의 능력 덕분이고, 밥상을 차려준 사람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은 공부가 부족한 것인바 곧장 'X카바'로 들어가야 한다). 이크, 공이 벌써 날아오고 있다!..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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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니면 사기꾼'이란 평을 듣는 덴마크의 문제적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이 열린다고 한다. 말은 '특별전'이지만 고작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니 괜히 나까지 머쓱하긴 하다. 더구나 신작 <오 마이 보스>를 제외하면 이미 DVD 타이틀로까지 다 나와 있는 영화들이어서 '발견'의 새로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듯싶고. 개인적으론 그의 영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지만 이후에 나온 영화들을 다 챙겨보진 못했다(<킹덤>이나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모두 부분적으로만 보았다). 이번에 나온 신작 <오 마이 보스>는 예기치 않게도 코미디라고 하니까 그 중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도 싶다.

Антон Долин. Ларс фон Триер. Контрольные работы. Анализ, интервью. Ларс фон Триер. Догвилль. Сценарий

개인적인 기억을 하나 더 보태자면, (모스크바 통신에도 적은 바 있지만) 나는 러시아에서 라스 폰 트리에가 갖는 거장으로서의 위상에 좀 놀란 적이 있다(몇 년전 상황이긴 하나, 라스 폰 트리에, 왕가위, 기타노 다케시, 김기덕이 러시아에서 꼽은 '우리시대의 거장'들이었다). 그걸 웅변해주었던 건 지난 2004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키노텍스트'란 영화총서의 첫 권이 라스 폰 트리에에게 바쳐졌다는 점. 작품론과 함께 감독과의 인터뷰, 그리고 <도그빌>의 시나리오 등으로 구성된 책이었다(망설이다가 구입을 미루었던가?). 우리의 '키노텍스트'들도 보다 폼나게 나옴직하지 않을까?.. 

모아놓은 기사들은 <오 마이 보스>에 대한 리뷰와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에 대한 소개이다.

경향신문(07. 06. 29) [영화 가로지르기]‘오 마이 보스’

‘오 마이 보스’(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가짜 사장으로 부임한 무명배우의 이야기다.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해고를 책임지고 추진할 악역이 필요했던 진짜 사장은 가짜 사장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도록 한다.

‘오 마이 보스’에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고유한 인장이 찍혀 있다. 도그마 영화에 대한 감독의 신념이 대사에까지 등장하고, 형식미에 있어서도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개성적 편집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자신의 모습까지 드러내는 감독은 점프 컷(두 장면 사이를 부자연스럽게 단절시키는 편집기법)을 이용하여 관객의 정서적 이입을 적절히 견제한다. 편집의 위력을 생생한 형태로 보여주는 점프 컷에는 영화라는 매체의 독자적 정체성이 간직되어 있다.



‘오 마이 보스’는 전문성의 신화를 재치있게 조롱한다. 첨단 IT기업의 경영자로 행세하는 무명배우 크리스토퍼의 모습은 허상에 의해 미화된 기업가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 마이 보스’는 단순한 가짜사장 소동이 아니라 능력에 비해 명성과 위신이 턱없이 부풀려져 있는 기업가 모두에 대한 풍자로까지 읽힌다. 가짜 사장을 둘러싼 소동에는 지위와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내장되어 있다. 영화는 능력이나 전문성에 대한 일반적 믿음이 일종의 신화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크리스토퍼(젠스 알비누스)는 전통적 의미의 능력 때문에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라운(피터 갠츨러)의 평판관리 혹은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고용되지 않는가.

한편 ‘오 마이 보스’의 직원들은 자본의 모든 대리인들에게 본능적으로 공손하다. 그들은 회사의 냉혹한 조직문화에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실제 소유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체불명의 ‘사장님의 사장님’까지 등장하지만, 직원들은 그 익명의 권위마저도 충실히 추종한다. 자본가에게 부여된 지엄한 권위 앞에서, 그들은 권위의 허상을 직시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한 채 권위가 수반하는 화려한 후광에 현혹되고 만다. 그들이 사장의 비정한 행태에 대해 묵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면 사장의 정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은폐될 수 있었을까. 감독은 자신의 앞날을 자본가에게 위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오 마이 보스’의 대사처럼, 배우에게 관객은 법이고 무대는 법정이다. 그러나 배우가 단지 현실로부터 격리되어 무대에 유폐된 존재라면, 그가 과연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관객과의 소통이 운명인 배우가 밀폐된 자의식의 세계에 갇힌 은둔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예술지상주의는 자칫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역할모델로 숭배하는 ‘감비니’는 실존 배우가 아니라 라스 폰 트리에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트럭의 이름이다. 가상의 인물 감비니를 원용하여 자신만의 연기론을 변호하는 크리스토퍼는, 현실에서 유리된 채 예술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어버린 예술가들을 상징한다.

배우의 진정한 임무란 과연 무엇일까. 가짜 사장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배역과 대사에만 관심이 있다. 그가 직원을 해고하는 악역을 맡지 않으려는 것도 배우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지 해고의 부당성에 대한 확고한 자각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직원들의 해고를 초래할 매각계약서에 마침내 서명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숭배하는 배우 감비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충동적으로 계약서에 서명한다. 해고된 직원들의 운명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예술에 몰두하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모습은, 자폐적 순수예술이 결국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볼테르는 진실보다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충고한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목적은 자연을 거울에 고스란히 비추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어쩌면 예술가의 숙명은 평화로운 거짓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지 않은 진실을 증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 마이 보스’에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권위에 맹종하는 직원들, 가공된 이미지로 자신을 체계적으로 미화하는 자본가, 그리고 자신만의 관념적 예술세계로 도피한 예술가까지. 사람을 진실의 거울에 비추는 것이 예술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초상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몫일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고 ‘순수예술가’라는 호사스러운 칭호만을 탐한다면, 결국 크리스토퍼처럼 힘 있는 자들의 충직한 공모자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황승현 영화평론가)

경향신문(07. 06. 28) 하이퍼텍 나다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

대학로 하이퍼텍나다 극장에서 ‘도그만 선언’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특별전이 28일부터 7월 4일까지열린다. 6월14일 개봉한 그의 최신작 ‘오! 마이 보스!’의 개봉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상영이벤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독창적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첫 장편 데뷔작으로 비쥬얼리스트로서의 그의 감성과 단 한번의 NG 없이 2주 동안 모든 촬영을 마무리 지으며 연출력을 선보인 장편 데뷔작 ‘범죄의 요소’(1984) 가 눈에 띈다. 또 2000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여주인공 비요크에게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선사했던 2000년작 ‘어둠 속의 댄서’(2000)와 1995년 ‘도그마 선언' 이후 다시 장르영화로 돌아와 관객과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위해 만든 코미디 영화 ‘오! 마이 보스!’(2006)까지 총 3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상영작 소개-

<범죄의 요소>(1984)

은퇴해 카이로에서 생활하고 있던 피셔 형사는 경찰학교의 스승이었던 오스본과 동기 크레이머의 요청으로 유럽으로 돌아온다. 피셔가 1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은 3년 전에 종결된 것으로 알았던 연쇄살인사건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의 요소'라는 책을 쓰기도 한 오스본은 복권을 파는 아가씨들만을 골라 토막살인을 저지르는 일명 복권 살인사건의 수사를 포기한 채 현실 감각을 잃은 듯이 행동하기 시작하고,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 해리 그레이는 차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어둠 속의 댄서>(2000)
공장에서 일하는 셀마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자신을 닮아 역시 눈이 멀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체코에서 이민 온 그녀는 아들이 13살이 되기 전 눈을 고쳐주겠다는 소망 하나로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고된 노동에 몸을 맡긴다. 그녀의 유일한 삶의 기쁨은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춤과 노래의 상상 속에 빠지는 것. 이 행복한 상상은 늘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셀마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평온하던 그녀의 일상은 사치스런 아내 때문에 힘겨워하는 집주인인 경찰관 빌과 가까워지면서 예상치 못한 비극을 맞이한다.



<오! 마이 보스!>(2006)

지난 10년간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자신이 회사의 보스라는 정체를 숨기고 평직원처럼 지낸 라운!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을 했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그래서 그는 엉터리 배우를 섭외해 회사 매각을 위한 가짜 보스를 만들어낸다. 보스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10년 근속의 직원들은 그가 진짜 보스인줄로만 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보스, 직원들의 눈엔 무언가 수상해 임무를 다그치는 라운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직원들, 이 사이에서 어설픈 가짜 보스는 과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07. 06. 29.

P.S. 영어권에서도 지난 2005년에 라스 폰 트리에 인터뷰집이 출간됐다(그보다 먼저 2003년에도 비슷한 포맷의 인터뷰집이 출간된 바 있다). 영화학도들에겐 필독서가 됨 직하지만 번역된다면 일반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되지 않을까?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잭 스티븐슨의 연구서 <라스 폰 트리에>(2005)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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