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새로 나온 책들의 리뷰를 훑어보는 일이 습관처럼 돼 버렸지만 이번주 '산책'은 그다지 흥이 나지 않는다. 묵직한 책들이 눈에 띄지 않고 관심도서도 별로 없어서이다(게다가 몇 권은 주중에 다루었기에 덧붙일 말도 없고). 그러는 와중에 겸사겸사 저자 한 사람과 안면을 터두기로 한다. 고고학자 C.W.쎄람. 이미 여러 권의 책이 국내에 소개돼 있는 대중적인 고고학 저술가이다('세람'이라고도 표기돼 왔다). 이번에 나온 책은 'C.W.쎄람의 사진으로 보는 고고학 역사 이야기'를 부제로 달고 있는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이다. 일종의 고고학사이며 사실은 'A Picture History of Archaeology'가 원제이므로 국역본의 경우 제목과 부제가 뒤바뀌었다고 해야겠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둔다.

문화일보(08. 03. 07) 옛 문명에 대한 상상과 도전 고고학 300여년사를 말한다

1485년 4월 로마 아피아가도에서 인부들이 우연히 석관을 발견하자, 석관 속 시신이 완벽하게 보존된 미모의 아가씨였던 덕분인지 단 하루 만에 2만여명의 구경꾼이 몰렸다. 과거의 로마에 쏠리는 세인의 관심은 고고학으로 이어졌다. 고대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고, 새롭게 드러난 현장과 자료를 토대로 사라졌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를 되살려내는 본격 고고학은 18세기 초에 출발했다. 서기 79년 8월20일 베수비오화산 폭발로 매몰됐던 폼페이에서 나폴리 토목기사 알쿠비에레의 지휘로 1748년 첫 발굴 작업이 이뤄졌다.

고고학은 문헌 조사, 현장 발굴 등 과학 분석이 행해질 뿐 아니라 역사가, 탐험가, 지리학자, 여행가 등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시적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해온 학문. 고고학이 태동한 18세기 초부터 21세기인 현대에도 낭만적인 모험에 대한 꿈과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현재진행형 학문이다. 지금도 소설, 미술, 공연 등을 통해 끊임없이 부활하는 이집트문명 등 고대문화는 해석과 재구성을 통해 오늘과 이어지고 있다.



국내서 번역 출간된‘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원제 ‘신, 무덤, 그리고 학자들’)을 통해 고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일깨운 저자는 독일의 신문기자이자 출판인. 트로이, 이집트, 멕시코 등 고대문명 현장의 사람과 일화를 중심으로 1957년에 펴낸 이 책은 최근 50여년간의 발굴사가 빠진 50년 전 저서지만 고고학 300여년사와의 매혹적인 만남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어려서부터 트로이 발굴을 꿈꾸었고 오십 나이에 모험가적 기질의 두 번째 아내를 맞았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 그는 1870년부터 1873년 100~150명의 인부를 동원해 호메로스의 글 등에서 그 존재가 전해져온 트로이의 발굴을 감행했다. 아내의 머리에 씌운 트로이의 황금장신구에서 남다른 상상력으로 신화 속 헬레나의 흔적을 짚어냈던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 출신으로 독학파 발굴 전문가였다. 이집트가 세계 고고학계에 문호를 개방한 것은 1789년 나폴레옹 원정 때였다.

옛 멕시코 건축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독일 남작 훔볼트에 의해 18세기 후반 시작됐다. 1799년 프랑스공병대가 나일강변 로제타에서 발견한 현무암조각인 로제타석이 담고 있는 고대이집트 상형문자의 비밀을 해독한 이는 프랑스의 학자 샹폴리옹이다.

발굴 초기의 현장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간접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며, 문명의 발상지에서 펼쳐지던 각종 발굴 사례는 이국 문화 유물의 파괴와 약탈과도 맞물리며 이질적인 문화의 만남을 증언한다.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모험’ 등을 통해 익숙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서는 고고학의 주인공들이 구체적인 일화를 통해 되살아난다.(신세미기자)

08. 03. 08.

P.S. 개인적으론 한번도 고고학에 매혹을 느껴본 적이 없다. 어린시절 흥미를 느낀 쪽은 고고학이 아니라 천문학이었기에. 그런 탓으로 소장하고 있는 고고학 관련서는 아마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물론 <지식의 고고학>이나 <폭력의 고고학> 같은 책들까지 포함한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혹 '변심'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구입하고픈 책은 쎄람의 책들과 함께 <현대 고고학의 이해>(사회평론, 2006)와 <과거 읽기 - 최근의 고고학 해석방법들>(학연문화사, 2007) 등이다. 고고학 전공 교재로 사용되고 있을 법한 책들이다.

국내서라면 이선복 교수의 <고고학 이야기>(뿌리와이파리, 2005)와 한국 고고학회에서 펴낸 <한국 고고학 강의>(사회평론, 2007)가 입문서이자 교양 교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현대 고고학의 이해>와 <한국 고고학 강의>는 작년 이맘때 쓴 '고구려와 러시아 고고학'(http://blog.aladin.co.kr/mramor/1078355)에서 한번 꼽아본 책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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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8-03-10 22:47   좋아요 0 | URL
학교 소모임 중 공부할 <한국고고학강의>보다 전에 사 둔 <지식의 고고학>을 얼른 읽고 싶네요. 해야 할건 해놓고 읽어야 하지만;;;

로쟈 2008-03-11 23:30   좋아요 0 | URL
설마 '현장'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읽거나 하시진 않겠죠?^^
 

잇따른 시간강사들의 자살이 다시 뉴스에 오르고 있다. 남 얘기도 아니기에 관련기사들을 모아놓는다. 작년 봄의 관련기사는 http://h21.hani.co.kr/section-021037000/2007/05/021037000200705030658004.html 참조.  

경향신문(08. 03. 08) 대학강사, 그들은 왜 절망하는가…서울大만 3명 자살

지난달 11일 서울대 불문과 강사 박모씨(43·여)가 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3년 노문과 백모 박사, 2006년 독문과의 권모 박사의 자살에 이어 서울대 인문대학에서만 세번째다. 학교 측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입장이지만 주변에서 전하는 원인은 달랐다.

한 시간강사는 “노문과 백 박사 자살 때도 학교 측은 우울증이라고만 하고 넘어갔다”며 “이들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단순 우울증이 아니라 시간강사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숨진 박씨는 오랫동안 대학 시간강사로 일하며 학업을 계속했으나 교수 임용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서울대뿐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강의를 했으나 강의료는 턱없이 적었고, 이런 상황에서 최근 병으로 수술까지 하는 등 악재가 겹쳤다. 박씨는 결국 설연휴 직후 학교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캠퍼스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27일에는 지방의 한 사립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던 한모씨가 자신이 학위를 딴 미국에 가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한씨는 유서에서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넘으려고 발버둥치며 4년을 보냈다…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다년간 시간강사로 버티기는 불가능하다”고 시간강사의 부당한 처우와 설움을 고발했다.

우리나라 전체 대학 강의 중 시간강사들은 40%대. 그러나 강사들의 처우는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열악하다. 다른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50~55%를 받지만 시간강사는 교수 임금의 3분의 1도 안된다. 시간강사들의 강의료는 국·공립대는 시간당 4만원, 사립대는 시간당 3만원 수준이다.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박모씨는 “지난해 2학기 주당 3시간 강의하고 월 42만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용 자체도 지극히 불안정하다. 사립대의 한 시간강사는 “신학기에 학교에서 전화가 오면 강의하는 거고 안 오면 계약 해지”라며 “그나마 조교가 전화해서 통보하는 식”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시간강사들의 모임인 비정규교수노조를 이끌고 있는 김동애씨(61·여)는 “강의료가 정해진 날짜에 안 나와서 경리과에 전화하면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귀찮게 하느냐’는 식”이라며 “이런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 교육위원회에는 대학강사 처우 개선을 골자로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인 이주호 의원(한나라당)이 발의한 개정안은 시간강사에게 교원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이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간강사들은 개정안의 조속 처리를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지난해 9월부터 183일째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강사 30여명과 서양사학회 회원들은 개정안 처리를 촉구하는 각종 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천막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시간강사 김영곤씨(59)는 “한창 연구와 강의에 몰두해야 할 학자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현실이 슬프다”며 “대학들은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개정안에 난색을 표하지만 뒤로는 매년 막대한 적립금을 쌓아두고 있다”고 지적했다.(박수정기자)

뷰스앤뉴스(08. 03. 07) 시간강사 또 자살, '죽은 시간강사의 사회'

대학강사 고 한경선씨 “학벌로 나눠먹고 비정규직 악용"
열악한 근무조건과 박봉, 대학들의 근무 및 임용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을 비관한 한 대학강사가 먼 이국 땅에서 자살한 사건이 뒤늦게 알려져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유서 3장이 담긴 한국 비정규직 시간강사의 현실
7일 비정규직교수노조에 따르면 지난 2006년부터 건국대 충주 캠퍼스에서 시간강사로 일해오던 대학강사 한경선(44세, 여)씨가 지난 달 27일 텍사스주 오스틴시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한씨는 딸과 투숙하던 오스틴시 한 모텔에서 음독후 경련을 일으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지만 오전 11시께 사망했다.

한씨는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서울 미동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텍사스주립대에서 테솔 분야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나 장기간 교원임용에서 떨어지다 2006년부터 충주의 모 대학에서 ‘실용영어’를 가르쳐왔다. 한씨가 자살을 단행한 모텔에서는 비정규직 시간강사의 설움과 고통, 대학 임용의 부조리한 현실을 절절히 담은 유서 3장이 발견됐다.

한씨는 “제가 삶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은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그럴듯한 구호나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진정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항이라 생각된다”고 유서의 첫 머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 쓰면 될 줄 알았지만...”
그는 대학 교수 임용과 관련해 “귀국 초에는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 쓰면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란 마음으로 하루를 쪼개어 고시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열심히 논문을 쓰며 보냈다”며 “하지만 이곳에선 이러한 연구업적과 강의경력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절망감을 토로했다. 그는 “그것은 뜻 맞는 몇몇 학교들끼리 연합해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특정인의 학교 임용을 가로막아,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경쟁에서 도태되어 결국엔 그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며 교수사회에 만연한 '학벌 나눠먹기'의 폐단을 질타했다.

“비정규직 신분 악용한 대학 횡포에 참담”
그는 또 “○○대학에서 강의전담교수로 있는 동안에는 그 신분상 약자인 점으로 인한 유형들로 나타나게 되었다”며 비정규직 시간강사라는 취약한 신분이 대학 사회에서 과다 업무와 부당한 대우로 이어졌던 경험도 토로했다. 한씨는 “책임시수를 책임학점제로 변경하면서 초과강사료를 주지 않으려 했던 부서장이 외국인교수에게 출퇴근시 사고에 대한 보상을 직접 모색하던 모습에 더욱 참담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고 적었다.

“다시는 나 같은 사람 나오지 말기를...”
그는 또 “1년 단위로 3년까지 계약이 갱신될 수 있는 상황하에서 주임교수의 재임용 추천조항은 그의 부당한 처우에 무방비로 놓이게 될 소지를 야기할 조항”이라며 “구체적으로, 교재변경등의 이유로 부서장의 방에 한사람씩 불러 부서장과 과목주관교수 합동의 심문식 면담이라든지, 외부출강금지건과 관련한 동료교수 파면, 그리고 2006년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영어수준 평가도구인 모의 토익시험지의 공개거부 등 이곳에서 지낸 만 2년이 마치 20년같이 느껴지던 일련의 사례들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그 동안 겪은 이러한 부조리와 모순은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란 초기의 순수한 열정에서 이 사회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애초의 희망과 비전을 접게 만들었다”며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저와 같은 이가 있지 않았으면 한다”며 장문의 유서를 끝맺었다.

대학강사 교원지위 관련법은 국회 표류
한씨의 자살은 동일한 석.박사 학위를 소유하고 연구업적을 쌓아도 여전히 전임교수가 아니면 교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국내 시간강사들의 절박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2003년에는 서울대 시간강사 백모씨, 2006년에는 서울대 시간강사 권모씨와 부산대 시간강사 김모씨가 현실을 비관하며 목숨을 끊었고 최근에는 서울대 불문과 강사도 생을 마감했다.

국회는 지난 2007년 5월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를 인정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주호 한나라당 의원 대표발의)을 발의했지만 2월 임시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고 국회 바깥에서는 비정규직교수노조의 1인시위와 천막농성이 1백83일째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죽은 시간강사의 사회'임을 잇따라 자살하는 시간강사들이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최병성 기자)

담비(08. 03. 07)  美 텍사스 오스틴서 자살한 시간강사 故 한경선씨 유서 전문

6일 서울신문은 <'국내大 부당대우 좌절’ 女강사 美서 자살>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한국에서의 시간강사 생활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결국 타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고 한경선(44·여)씨의 소식을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한씨는 지난달 27일 새벽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의 한 호텔에서 모두 석 장의 유서를 남긴 채 쓰러져 있었다. 미국에 함께 동행한 딸이 발견, 병원에 옮겨졌으나 이날 오전 11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현지 경찰은 딸의 증언등을 토대로 한씨가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스틴 한인회는 고 한경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오는 3월 15일 오후 7시 오스틴 한인장로교회에서 추모식을 갖는다.

담비는 오스틴시 한인 포털 <Austin114>에 올라온 한씨의 유서의 전문을 게재한다. 유서의 첫번째 장과 두번째 장에는 한국 대학의 교수 임용 부조리와 시간강사의 설움이 길게 적혀있고 유서의 세번째 장에는 "<첨부> 1. 한경선/이가영 미국비자 사본 / 2. 2006/2007년 강의교수 임용계약서 사본 / 3. 탄원서 / 4. 2007년 작성 한경선 영문이력서"라고만 적혀 있다. 이 첨부내용들은 한국에 거주중인 유족에게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USB 메모리스틱에 저장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편집자주]

이 글을 받으실 때, 저는 이곳 오스틴에서 그토록 바라던 평온한 휴식을 비로소 얻게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2004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 후 정신 없이 일하며 보냈던 처음 1년을 제외하고는, 제정신을 갖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떤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넘으려 발버둥 거리며 만 4년을 보낸 후 이곳 오스틴에서 비로소 갈망하던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삶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은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럴듯한 구호나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진정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항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귀국 초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 쓰면 학교에 자리를 잡을수 있으리란 마음으로 하루를 쪼개어 고시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열심히 논문을 쓰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러한 연구업적과 강의경력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뜻 맞는(이해가 맞는) 몇몇 학교들끼리 연합해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특정인의 학교 임용을 가로막아,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경쟁에서 도태되어 결국엔 그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양가족을 지닌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다년간 시간강사로 버티기는 불가능하고, 강의교수로 지내면서 임용에 필요한 정도의 논문을 쓰기는 사실상 거의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장의 규모가 비교적 적은 이곳에서 기업체의 불공정 단합처럼 몇몇 학교들의 이해단합이 더욱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며, 이는 공정한 경쟁에 기초한 상생발전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으로, 개인과 학교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 학문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본인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공시한 2005년 1학기 교원임용에 원서를 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2005년 3월말에 가서야 1차 심사에 대한 연락을 통보 받고 다시 해당학기 중반까지 임용과정이 지지부진하게 흐르다가, 5월말경에 이의 결과를 학교측으로부터 통보 받는 기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또한 이와는 다르게, 2006년 2학기 중앙대학교와 인하대학교에 응시한 교원임용과정에서는 1차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연구나 강의 경력면에서 납득되기 어려운) 결과를 경험했습니다. 그 후 이러한 일들이 몇몇 학교들이 (즉, 건국대, 한양대, 성균관대) 주도한 협력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경험을 통해 이곳에선 원하던 연구활동을 하기 힘듬을 감지하여 미국대학에도 원서를 내었으나 일은 잘 되지 않았습니다(저의 미국 비자사본(첨부1)을 보시면 어떻게 그러한 결정들이 이루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에서 강의전담교수로 있는 동안에는 그 신분상 약자인 점으로 인한 유형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즉, 비정규직이란 점을 악용한 고용자측에 유리한 조건을 담은 2006년도와 2007년도 계약서(첨부 2)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2007년도 계약서에 굵은체로 쓰여져 있는 책임학점은 이전 계약서에서 변경된 것으로, (주당 12학점(시간)에서 주당 12학점으로 변경) 현재 모든 교양영어과목 2시간 1학점제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자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변경된 조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임시수를 책임학점제로 변경하면서 초과강사료를 주지 않으려 했던 부서장이 외국인교수에게 출퇴근시 사고에 대한 보상을 직접 모색하던 모습에 더욱 참담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둘째, 1년 단위로 3년까지 계약이 갱신될 수 있는 상황하에서 주임교수의(원칙과 기준이 모호한) 재임용 추천조항은 그의 부당한 처우에 무방비로 놓이게 될 소지를 야기할 조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교재변경등의 이유로 부서장의 방에 한사람씩 불러 부서장과 과목주관교수 합동의 심문식 면담이라든지, 외부출강금지건과 관련한 동료교수 파면, 그리고 2006년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영어수준 평가도구인 모의 토익시험지의 공개거부등 이곳에서 지낸 만 2년이 마치 20년같이 느껴지던 일련의 사례들이었습니다.

현 체제에서 최고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대학에서 행하는 모순과 불공정한 처사는 같이 일하던 동료교수의 파면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첨부 3-탄원서). 그의 파면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학교측의 주장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이고, 이의 행정적, 법적절차를 위해 그들이 제시한 서류들과 주장들을 보고 전해 들으면서, 이 기관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했습니다. 그 동안 겪은 이러한 부조리와 모순은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란 초기의 순수한 열정에서 이 사회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애초의 희망과 비전을 접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저와 같은 이가 있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기원을 위해 두서없이 이 글을 써서 전해 드립니다.

2008년 2월 25일
텍사스 오스틴에서 한경선 드림 

08. 03. 08.

P.S. 아감벤식으로 말하자면 시간강사야말로 전형적인 '호모 사케르'이다. "성스러운 자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자" 말이다. 강의실에서야 학생들로부터 '교수님' 대우를 받지만 현실에서는 '저임금 비정규직'이다. 로마법에 따르면 호모 사케르는 "‘희생양(제물)로 삼을 수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이다. 한국의 대학사회는 여러 시간강사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지만 대학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죽은 시간강사의 사회'는 그래서 '호모 사케르의 사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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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정규 교수가 쏘아 올린 작은 공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5 21:21 
    이번주 신간 국내서 중에는 작년에 비정규 교수(시간강사) 문제를 다룬 프레시안의 연재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을 묶은 책도 포함돼 있다. 해가 바뀌어서 제목은 <비정규 교수, 벼랑끝 32년>(이후, 2009)이 됐다. 따로 서평이 뜨지 않아서 프레시안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9. 04. 25) 32년 동안 모두 알면서 말하지 않은 정답  때때로 묻
  2. 죽은 시간강사와 암흑의 카르텔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31 23:36 
    천안함과 선거 정국으로 인해 묻혔지만 지난주에 한 시간강사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메일함을 확인해보니 이튿날인 26일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쪽에서 보낸 메일이 와 있다. 이후에도 이번 사건과 관련한 메일을 몇 차례 더 받았다. 개인적으론 엊그제가 시간강사를 하다가 2003년 목숨을 끊은 친구의 기일이기도 해서 마음이 더 착잡했다. 대학사회에서 비정규 교수 문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대부분 외면한
 
 
marr 2008-03-08 17:06   좋아요 0 | URL
로쟈님, 동종업계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노동현장에서 비정규 노동자가 온갖 불법과 비인간적 작태에 맞서 수십일 동안 120m 고공 농성을 해도 어디 기사 한줄 안나고, 꼭 분신이나 자살처럼 극단적인 사태가 발생하면 겨우 관심을 가지는 현실이 너무 냉혹합니다.
저희 학교는 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분회가 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과 논의하여, 월요일 학교 본관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많은 선생님들과 연대의 마음을 모으고 싶습니다.

로쟈 2008-03-08 19:00   좋아요 0 | URL
전례로 보아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 한국사회의 의사표현 방식은 삭발, 단식, 분신, 자살 등에 한정돼 있으니까요...

라주미힌 2008-03-08 18:39   좋아요 0 | URL
치솟는 학비는 다 어디로 간걸까요 ㅡ..ㅡ;

로쟈 2008-03-08 19:00   좋아요 0 | URL
아시는 대로 대부분 재단으로 들어갑니다...

2008-03-08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8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ti 2008-03-08 21:21   좋아요 0 | URL
남의 일이 아니라, 가슴이 더 아픕니다.

로쟈 2008-03-08 22:41   좋아요 0 | URL
자살한 일부 강사들은 친구이자 지인들이기도 해서 저 또한 착잡합니다...

paviana 2008-03-08 23:00   좋아요 0 | URL
비정규노조의 김동애선생님한테 배운적이 있어요.
여전히 힘겹게 그러나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뵈니 반갑기도 하지만 역시 착잡하네요.
지도교수님 돌아가신 병원에서 뵙고 못뵜으니 5년도 더 된거 같네요.
갑자기 선생님이 뵙고 싶네요.참 좋은 분이신데..

로쟈 2008-03-09 21:21   좋아요 0 | URL
언젠가 TV에도 한번 나오셨더랬죠...

Mephistopheles 2008-03-09 01:37   좋아요 0 | URL
천만원이 넘어 가버린 등록금이 떠오르는군요..에휴.

로쟈 2008-03-09 21:21   좋아요 0 | URL
교육 '사업'이죠...

사량 2008-03-09 17:14   좋아요 0 | URL
비정규직교수노조 및 천막농성과 관련하여 언급된 선생님들 연세가 환갑 전후네요. 더욱 가슴이 쓰라려집니다. ㅜㅜ

로쟈 2008-03-09 21:22   좋아요 0 | URL
구조적으로 젊은 강사들은 '투쟁'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2008-03-10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몇 권의 책을 살펴보려고 대형서점에 갔다가 손에 든 책은 리처드 레인의 <장 보드리야르>(앨피, 2008)이다. 덕분에 상기하게 된 거지만 어제가 작년에 세상을 떠난 보드리야르(1929-2007)의 기일이었다. 또 그 덕분에 떠올리게 된 건 작년 이맘때 급하게 청탁을 받아서 쓴 추모기사다(http://blog.aladin.co.kr/mramor/1082396). 몇몇 적임자가 거절하는 바람에 나한테까지 연락이 왔었고 또 어지간한 청탁은 거절하지 않는 편이어서(대신에 기한은 잘 못 지킨다) 나대로 또 '작문'을 했던 것. 레인의 책은 그때 참고하기 위해 교보에서 구입했었다. 국역본을 손에 든 건 그런 인연에서다(지난번에 나온 <리오타르>도 나는 바로 완독했다).

 

 

 

 

그런데, 이 페이퍼는 보드리야르를 위한 것이 아니다(레인의 책을 찾게 되면 몇 마디 적을 수는 있겠다). 요즘 나오는 인문 번역서들의 편집에 대한 몇 가지 불만을 적기 위한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도 전철에서 읽어나가다가 몇 번 눈살을 찌푸리게 됐는데, 번역이 아니라 편집상의 오류 때문이다. 맨먼저 이 책에서도 아직 생존해 있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레비스트로스(1908-1991)'라고 표기됐다(38쪽). 이전에도 한번 지적한 바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1807030), 멀쩡히 살아있는 대학자를 '죽은 자'로 취급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원서에는 생몰연대 따위가 들어가 있을 리 없다(는 아니고 표기돼 있다고 한다). 고유명사의 원어병기나 인물의 생몰연대는 보통 편집자가 '서비스' 차원에서 첨가해주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문제는 '서비스의 질'이다.

레비스트로스만 하더라도 한 백과사전에 잘못 기재돼 있다는 설이 있는데 조금 전에 확인해보니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던 '네이버'에서도 '레비스트로스(1908- )'라고 수정돼 있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읽은 책들은 모두 이 책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보리스 와이즈먼의 만화책 <레비스트로스>(김영사, 2008)의 첫문장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1908-1991)는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다."(7쪽)이고,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서도 "이런 분석의 대가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1908-1991)다."(30쪽)로 돼 있다. 너무 친절한 편집자들이 이왕 나서는 김에 약간의 손품만 더 팔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오류들이다.

 

 

 

 

일단 선입견을 갖게 되니까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나오는 '포래치'를 '포래치'라고 하거나 '바로레아'를 '바로레아'로 표기해놓은 것도, 설혹 역자가 그런 고집을 부렸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포트래치'나 '바카로레아'로 표기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에서 '소모'로 옮겨진 'expenditure'도 단순히 '지출'로만 옮기는 건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지 못한다.  

관련문헌을 소개하고 있는 '보드리야르의 모든 것'에서도 편집자는 굳이 안 해도 될 실수를 범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저작 국역본이 있는 경우 병기해주는 '서비스'를 하는 과정에서, 저명한 연구자인 마이크 게인이 "의심할 바 없이 장 보드리야르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한 <상징적 교환과 죽음>의 국역본이 <불가능한 교환>(울력, 2001)이라고 엉뚱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이 책의 원저명은 국역본 표지에 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보드리야르를 다룬 최상의 비평적 해설"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페파니스의 책 'Heterology and the Postmodern: Bataille, Baudrillard, and Lyotard'에 대해서는 국역본을 병기해주고 있지 않다. <이질성의 철학 그리고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리오타르>(시각과언어, 2000)로 소개돼 있다는 걸 잊은 것이다.  

물론 실수나 착오는 누구나 범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줄여나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조금 더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홀대 받기를 원하는 독자는 없는 법이니까...

08.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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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03-08 18:55   좋아요 0 | URL
본문 검색을 통해 원서를 찾아보니, 원서에도 생몰연대가 나와 있긴 합니다. 모스(1872-1950), 라캉(1901-1981), 바르트(1915-1980) 식으로요. 원서엔 '레비스트로스(1908-)'라고 잘 적혀 있네요. 어쨌든 "원서에는 생몰연대 따위가 들어가 있을 리 없다"는 말씀은 사실과 다릅니다. 요즘 워낙 뒤숭숭해서 한 마디에도 조심하셔야 할 듯합니다. ㅜㅜ

로쟈 2008-03-08 18: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책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그렇더라도 편집자가 쓸데없는 개입을 한 것이죠. 2000년에 나온 책에도 생존해 있던 양반을 1991년에 죽은 걸로 처리해놓았으니까요...
 

이번주 시사IN의 북섹션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과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의 '한국 공습'에 관한 기사다. 지난 월요일에 전철에서 읽었는데, 두 꼭지로 저널에 소개된 기사들 가운데 가장 충실하고 유익하기에 챙겨놓을 만하다.  

시사인(08. 03. 04) 내몰린 자들이야말로 체제의 얼굴이다

올해는 유럽의 철학자 아감벤과 랑시에르의 저작이 한국에 도착한 원년으로 기록될 만하다. 어느 전문지에서는 아예 ‘한국 공습’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상륙을 알렸다. 유럽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이들이 제기한 논제로 떠들썩했거니와 그 풍문은 한국에도 일찌감치 알려졌다. 정작 그들의 주요 저작은 제대로 소개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2004년 이후에는 ‘왜 그들의 저작이 번역되지 않는지 의아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 사이 젊은 연구자가 알아서 번역 작업에 착수해 그 내용이 사이버 공간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늦었지만 거세다.



올해 쏟아져 나올 두 철학자의 번역물은 줄잡아 10여 편에 이른다. 먼저 선을 보인 것은 자크 랑시에르의 저작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펴냄)를 비롯해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펴냄)이 출간되었다. 조르조 아감벤의 저작 <호모 사케르> 1권(새물결 펴냄)도 첫 테이프를 끊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통해 한국에 첫 발을 디딘 랑시에르는, 반목의 철학자 혹은 불화하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평등의 옹호자로도 알려졌다. 기회의 평등이 아니다. 오히려 기회의 평등이란 무한경쟁과 그로 인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될 뿐이라는, 근본 태도를 취한다.



근대국가의 폭력 혹은 무능력에 대한 성찰
랑시에르는 1970년대에 일찍이 자신의 스승인 알튀세르를 ‘기성 엘리트 권력의 옹호자’라고 비판하면서 떠들썩하게 절연했고, 이후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활발한 저작 활동을 벌였다. 그는 끊임없이 정치와 철학을 말하지만, 전통 의미의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오히려 기성의 정치철학이라는 학문 분야 자체를 품평 대상으로 삼는다고 평가받는다. 

이를테면 그는 사람들이 보통 ‘정치’라고 받아들이는, 분배에 관한 합의 절차가 사실 정치가 아닌 ‘치안(Police)’에 속하는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치안은, 협의의 질서 유지뿐 아니라 구성원에게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모든 활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런 분배의 과정이란, 이미 분배받을 권리를 인정받은 사람이 자기 몫을 찾아가는 것일 따름이다. 분배 방식을 놓고 논란할 수 있겠지만, 누가 분배받을 자격이 있는가는 묻지 않는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본래 의미의 진짜 정치란, 기성의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에 별반 기여한 것이 없어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뻔뻔스럽게도’ 평등주의 논리에 입각해 자기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몫이 없는 자들이 자기 존재를 인정받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로운 원리에 따라 재구성하도록 강제하는 ‘범법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기득권자에게는 불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등장했음을 환기시킨다. 데모크라시의 어원인 데모스, 즉 평민이 귀족 정치인이나 과두 독재자와 동등한 자격을 요구하고 나선 과정을 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데모스로부터 폴란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배제된 자들이 통치하는 엘리트에 항의했을 때, 그들은 단지 임금 인상이나 작업 조건 따위 드러난 요구뿐 아니라 동등한 상대자로 인정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고 말한다. 달리 보자면 폴란드의 기성 지배층인 노멘클라투라가 자유노조(솔리데리티)를 동등한 상대자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 순간 지배층은 이미 패배했다고 본다. 

그가 현대 사회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정체적 주체로 인정받은 노동계급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발언권을 얻은 노동자 외에도 정당하게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다양한 특수집단,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으나 자기들의 곤경을 정치화하는 데 더더욱 가로막혀 있는 ‘이주자’ 등에게 눈을 돌린다. 그들이 말을 해도, 사회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혹은 듣지 않는다. 목소리가 없는 자인 것이다.



한 사회에서 말할 공간이 없으므로 지워진 것으로 간주되는 ‘배제된 자’에 관한 랑시에르의  관심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aer)’라는 개념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호모 사케르는, 직역하면 성스러운 자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자이다. 로마법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희생양(제물)로 삼을 수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그들은 희생 제의의 제물이 될 수 없고, 반대로 누군가 그들을 죽여도 그 행위는 처벌받지 않는다. 체제가 체제 바깥으로 밀어낸 자인 셈이다.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은 이미 ‘미등록’ 이주 노동자, 흔히 불법 체류자로 불리는 이들의 처지를 환기시키면서 이 개념을 원용하곤 했다. 수유+너머 고병권 연구위원은 “미등록 이주 노동자야말로 한국 사회의 호모 사케르다”라고 지적한다.  산업적으로 엄연히 의미 있는 존재인 이들이, 정치 사회적 신분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법 체류자에게는 고용주가 임금을 체불하고 폭행을 일삼아도, 가해자는 별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가 출입국관리소에 넘겨질 뿐이다. 고씨는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예외 존재가 권력의 정상 작동을 폭로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의 예외적 존재인 미등록 이주 노동자 역시 우리 사회의 정상성이 무엇인지를 폭로한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바로 우리 얼굴, 우리의 야만이다”라고 지적한다. 

<문학과 사회> 편집위원인 김태환은 ‘푸코가 법의 형식 속에서 작동하는 억압 권력의 기제를 밝혀내려 했다면 아감벤은 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어떤 예외적 상태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권력의 본질을 포착하려고 했다’고 분석했다(<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 김태환, ‘예외성의 철학-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통치권력과 벌거숭이 삶>’).

"아우슈비츠를 절대악의 자리로 밀쳐내지 마라"
김씨의 분석대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이란 표면 말뜻과 달리 진정한 자연 상태의 인간이 아니라 근대 주권자가 만들어낸 존재이다. 둘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아감벤은 독일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의 주권 개념에 줄을 댄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주권자는,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예외 상태, 즉 비상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자이다. 이런 카를 슈미트의 테제는, 아감벤에 이르러 주권은 누가 호모 사케르인지를 결정할 만한 권력이라는 것으로 변주된다. 보호받아야 할 보편 삶과 그렇지 않은 예외 삶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 그것이 주권이라는 것이다. 김태환씨는 아감벤에게 기대어 이렇게 의미를 확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주권자에게 사람들은 모두 ‘호모 사케르’이고, 호모 사케르로 낙인찍혀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사람에게는 모든 타인이 주권자이다.”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끄집어낼 때, 아감벤의 포부는 야심차다. 그는 푸코를 언급하면서 병원과 감옥의 ‘대감금’의 재구성에서 시작된 푸코의 연구가 수용소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지 않았는지 의아해한다.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한나 아렌트에 관해서는 통찰력 있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생명 정치의 관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고 꼬집는다. 그는 “두 사람의 관점을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통해 결합시켜보겠다”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아감벤의 질문은, 유럽에 많은 불편함을 야기했다. 이를테면 그는 ‘20세기에 의회 민주주의 국가가 그토록 신속하게 전체주의 국가로 변모하고, 또 전체주의 나라가 오늘날 거의 아무런 단절도 없이 신속하게 다시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또 세르비아의 인종 청소에서 볼 수 있듯이 옛 공산권 국가의 지배계급이 가장 극단의 인종 차별주의자로 전락하거나 유럽에서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 재생한 현상에 착목하고 그 이유를 분석하는 데 골몰한다. 현대 사회에서 입 달린 이들은 누구나 전체주의에 혐오감을 표시하는데 사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기이한 인접성을 갖는다는 암시인 셈이다. 

그에게 난민과 수용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범법자와 감옥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근대 국가의 정체를 드러내는 존재라고 본다. 우선 그는 1789년 인권선언문의 성격을 분석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제목을 단 인권선언은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평등하게 태어나고 존재한다’고 선포한다. 출생 그 자체가 권리의 원천이자 담지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한 인간이 갖는 권리는, 오로지 특정 국가 시민의 권리 속에서만 보전된다. 그런 경향은 점점 더 강화된다. 국적을 잃은, 시민권 없는 이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생각해보면 그 괴리가 극명하다. 이제 인권은, 국민으로서 혹은 시민으로서 권리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만 불려나온다. 아감벤이 난민, 즉 시민이 아닌 자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아감벤은 난민은 인간과 시민, 즉 출생과 국적 간의 연속성을 깨뜨림으로써 근대 주권의 근원적 허구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유럽에서 이런 상황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적나라해졌다. 난민과 무국적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유럽 국가는 앞다투어 국적 박탈과 귀화 철회를 가능케 하는 법령을 도입했다. 한 국가가 보호할 인간, 즉 시민과 시민 아닌 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1915년 프랑스에 이어, 벨기에는 전쟁 기간에 반국가 행위를 저지른 시민의 귀화를 철회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 정점은 사람을 완전한 권리를 보유한 시민과 2등 시민으로 구분한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이다. 시민권의 전제로서 의미를 가졌던 인권은 점점 시민권과 분리되었다. 이제 국제기구와 개별 국가는 ‘인간의 신성불가침한 권리’를 엄숙히 선언하곤 하지만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지극히 무능하다.

아감벤은 수용소와 관련해서도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한다.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들이 인류를 대상으로 자행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위선적이라는 것. 누구든 수용소에 오는 사람은 합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는 지역으로 들어서는 것이고, 그곳에서 개인의 권리나 법적 보호라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떻게 모든 법이 멈추는 곳, 그런 장소와 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나’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말한다. “수용소에서 잔혹한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아닌지는 그 시점에 주권자로 행세하는 경찰의 예의바름과 윤리 감각에 전적으로 달렸다.”



지난 2004년 전세계 사람은 아부그래이브 수용소에서 이라크인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우연히 폭로된 사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 사태에 관한 미국의 태도도 목도했다. 럼스펠드는, 약간 유감을 표했으나 테러와의 전쟁, 혹은 악의 제거라는 명분으로 인권 유린을 정당화했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첫 권이 쓰여진 것은 1995년. 아부그래이브의 참상이 벌어진 것은 그 이후이지만, 아감벤의 지적은 마치 그런 사태를 예견한 것처럼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아감벤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숱한 수용소를 통해 그런 통찰에 도달한다. 이를테면 1991년 이탈리아 경찰이 알바니아 불법 이민자를 본국으로 송환하기 전에 임시로 수용했던 바리의 축구 경기장, 바이마르 정부가 동유럽 출신 유대인 피난민을 집결시켰던 코트부르-질로프의 외국인 집단 수용소, 심지어 프랑스의 국제 공항 내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를 희망하는 외국인을 억류하는 곳인 대기 구역 또한 수용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외국인 보호소라는 이름의 감금 시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기해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질 것이다.



수용소의 가장 극단 형태는 아우슈비츠였다. 그런데 아감벤은 그에 대해서도 불편한 발언을 해댄다. 아우슈비츠를 절대 악의 자리로 밀쳐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아감벤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희생 제의적 아우라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꼬집는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호모 사케르의 명백한 사례이다. 희생자 본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희생 제의라는 베일로 가리지 말아야 하는 진실은, 유대인은 광기 어린 거대한 홀로코스트 속에서 말살된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직접 언급했듯이 마치 ‘머릿니’처럼, 달리 말해 벌거벗는 생명으로서 말살되었다는 점이다’(<호모 사케르> 231쪽).

이에 대해 김태환은 ‘나치라는 절대 악과 서구 민주주의 체제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아감벤의 태도가, 특히 나치 문제에 민감한 독일에서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아감벤은 첫 권에서 이미 독일의 수용소가 나치 체제 전에 세워졌음을 지적했다. 또  악명 높은 생체실험은 나치 체제뿐 아니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판사 구실을 했던) 미국에서도 사형수와 장기수 등을 대상으로 버젓이 행해졌음을 환기시킨다.(노순동기자) 



시사인(08. 03. 04) "푸코는 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팡테옹 뒤편에 있는 조르조 교수의 집을 찾아 내 손에는 마침 2007년 말월에 출간된 아감벤 교수의 <왕국과 영광>에 대한 안토니오 네그리의 서평이 실린 서평지가 들려 있었다. 대화는 서평을 실마리 삼아 시작되었다.

당신은 네그리와 함께 지금 세계 지성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논의되고 있다. 관계를 물어도 되는가.
네그리와 나는, 아주 가까운 친구이다. 하지만 사상적 입장은 전혀 다르다. 나는 네그리가 말하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와 관련된 네그리 이야기 중 내가 가장 공감하는 테제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핵심이다’라는 말 정도이다. 내 생각의 수용과 관련해 최근 참으로 재미있는 일을 여럿 겪었다. 어제는 독일의 한 프란체스코회 수사가 찾아왔는데, 벤야민과 나의 종말론에 관한 빼어난 논문으로 박사 논문을 완성했더라. 물론 이곳 프랑스에서는 나를 전혀 다른 맥락에서 보지만.

<호모 사케르>를 읽다 보면 푸코와 관련해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데, 독일어본을 보면 당신이 푸코에 대해 조금 비판스러운 태도를 갖는 듯 보이는 반면, 영어본에서는 푸코의 말기 사상의 흐름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판적이라…. 전혀 그렇지 않다. 번역본들이 여러 모로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점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nuda vita’(벌거벗은 생명)를 영어본은 ‘naked life’ 또는 ‘bare life’로 옮기고 있는데, 전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벤야민도 쓰고 있듯이) ‘mere life’에 가깝다. 푸코의 경우 어떤 푸코냐가 문제일 텐데, 적어도 푸코가 ‘법’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말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연할 때의 푸코는 이 문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다. 그가 통치와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법 또는 법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까닭은 반드시 밝혀야 할 핵심 과제이다.

당신의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는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두 사람은 분명히 대학 시절부터 서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이력을 대조해보면 명확하다. 물론 하이데거는 강사 신분이고 벤야민은 운동권의 팸플릿을 돌리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이데거 선생께 직접 여쭈어봤더니 ‘기억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강한 부정은 아니었다. 하이데거 선생은 카프카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였는데, 나중에 아렌트 말로는 자기가 카프카 책을 잔뜩 갖다 드렸으니 분명히 읽었을 것이라고 하더라(웃음).



2001년의 9.11 테러와 함께 서구 지성계에서 급부상한 사상가를 두 명 꼽으라면 단연 ‘제국’과 ‘다중’이라는 다분히 논쟁적인 개념을 제시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호모 사케르’라는 독특한 정치철학 개념을 제출한 조르조 아감벤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두 사상가 모두 이전부터 활발히 저작을 발표해오고 있었으나 9?11테러는 ‘잠에서 깨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라는 바이런의 말처럼 두 사람을 일약 서구 지성계의 신데렐라로 등장시켰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두 사상가가 모두 미국이라는 자본의 제국,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사상의 제국과는 전혀 거리가 멀면서도 두 제국의 중심 자장에 놓인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두 사상가는 ‘제헌 권력’ ‘생명 정치’ 따위 몇 가지 핵심 개념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일부 좌파는 두 사람을 한데 묶어 좌파적 상상력의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려 하지만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것은 그러한 개념어일 뿐 그들이 각자 개념에 부여하는 위상학적 위치는 180도 다르다. 왜냐하면 네그리가 여전히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새로운 주체(‘다중’)의 창출이라는 좌파 정치학의 틀 안에 있다면, 아감벤은 근본적으로는 하이데거에 대한 정치 독해를 축으로 벤야민과 독일의 문제적 법철학자인 슈미트에 대한 비판 독해를 개념적 성좌로 갖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 1권의 제목인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에서 그러한 영향사를 직감할 수 있다. ‘주권’에 관해서라면 아무래도 칼 슈미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며, 생명과 이어지는 ‘권력’ 문제라면 1970년대 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한 푸코의 말년 강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벌거벗은 생명’ 하면 신칸트 학파의 헤르만 코헨으로부터 시작해 존재(Sein)와 단순한 존재자들(Seiende)을 대립시키는 하이데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영향사는 아감벤의 개인 이력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의 노동자이자 철학자인 시몬 베유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했으나 그가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독일 법철학이었다. 그는 모라비아 같은 전위적 문학 서클과 교류하는 한편 파솔리니의 영화에 사도 빌립보로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이어 벤야민을 발견하게 된 그는 그 유명한 이탈리아 벤야민 전집 편집자로 일을 하지만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그가 찾아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원고 편집 문제와 관련된 격렬한 논쟁 뒤에 출판사와 결별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편집상 문제만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발굴한 원고 그대로 편집하게 된다면 벤야민은 (아도르노를 중심으로 한) 프랑크푸르트 학파(그리고 유대적 해석을 대표하는 친구 숄렘)와 결별하고 (슈미트와 칸토로비츠가 대변하는) ‘정치 신학적 흐름’으로 편입될 일대 지성사적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도 좌파 해석가들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이데거에서 출발한 다채로운 지적 횡단
하지만 그의 이처럼 다채로운 지적 횡단 중에서도 가장 이채롭고 결정적인 것은 하이데거와의 만남이었다. 1966~1969년 하이데거가 프랑스 남부의 한 수도원에서 은거한 채 동학 10명과 함께 헤겔과 헤라클레이토스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연 것은 이미 전설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는 이 세미나 명단에서 아감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아감벤의 가장 빼어난 저서로 꼽히는 소책자로, 그의 전체 개념틀 또는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언어와 죽음>은 바로 이 세미나 경험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이런 의미에서 연구 공동체인 ‘수유 너머’의 하이데거 세미나 안내문 중 하이데거의 영향 면에서 “아감벤이 부분적이라면, 아감벤이 크게 기대는 아렌트는 전면적으로 하이데거에 기대고 있으며”라는 부분은 정확히 정반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즉 아감벤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하이데거 해석자이며, 동시에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맞선다고 말이다. 이는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이탈리아어 ‘nuda vita’가 ‘vita activa’라는 아렌트의 핵심 개념을 풍자적으로 겨냥한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푸코는 ‘대감금’을 이야기하지만 20세기 수용소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탐구하지만 막상 ‘정치철학’을 결여하고 있다는 그의 진단에서도 확인된다.

아마 이러한 의미에서 그를 20세기 사상사의 살아 있는 화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정치-생명-권력’이라는 삼각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철학을 구축하는 아감벤의 작업에 전세계 지성의 관심이 모이는 것은,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가 일상화한 테러로 대체되고 생명이 정치 권력과 과학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조형준_새물결출판사 편집주간)

08.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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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 2008-03-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슈비츠와 굴락이 절대악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어지면 지젝의 전체주의론과는 다른 결론이 나오겠군요.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권력과 배제의 문제를 시공을 초월하여 동질적인 것으로 다루는 아감벤의 비역사성엔 뭔가 이론적 안이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로쟈 2008-03-07 17:06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비판도 듣는 듯합니다. 자세한 건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Ritournelle 2008-03-0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아감벤의 것이 아니라 랑시에르의 것이 아닐까요?

로쟈 2008-03-07 17:0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사의 오류네요...

람혼 2008-03-0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와 아감벤에 대해 깔끔하고 수려하게 정리한 좋은 기사로군요. 이렇게 갈무리해주시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출간 예정인 저 모든 책들이 좋은 국역본의 모습으로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그나저나 전 최근에, 예전에 속독(速讀)으로 일독하고 제쳐두었던 불어본 한 권을 시간을 쪼개서 다시 정독하고 있는 중인데요, 아마도 예정에 없던 국역본을 한 권 따로 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두 작품의 작곡을 동시에 진행 중인 '조금' 바쁜 상황이기는 하지만, 꼼꼼한 비교 독해를 한 번 수행해야 할 것 같아서요. 최근 로쟈님의 개인적인 리스트에는 어떤 [수많은^^;] 책들이 속해 있을까 궁금합니다. 여담이지만, 개강의 열기(?)가 찾아온 캠퍼스의 봄은 어떤 분위기일까, 슬며시 궁금해지기도 한답니다.^^

로쟈 2008-03-07 23:51   좋아요 0 | URL
'예정에 없던 국역본'이 '그 책'인가요?^^; 캠퍼스의 봄은 아직 완연하다고는 볼 수 없고요, 첫주가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몇몇 학생들이 눈빛이 그래도 노곤해지려는 강의에 채찍이 돼 주지요.^^

sommer 2008-03-0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이론적 탁월함은 그의 방법론 즉, '어원론적 추적'-벤야민과 하이데거가 동일하게 공유하면서도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겠지요-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호모 사케르, 오이코노미아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지요.

로쟈 2008-03-08 09: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호모 사케르>의 초장에 나오는 '어원론적 추적'은 1급 철학자의 파워를 여실히 보여주죠...

마늘빵 2008-03-0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시사인 보면서 저걸 읽었는데, 첫번째 든 생각은, 아 시사잡지에 이런 내용을 담아도 될까, 였고, 또 하나는, 아 아감벤 확 끌린다 였습니다. :) 아감벤은 전 사실 모르고 있던 사람인데, 내용을 읽어보고는 저랑 코드가 확 맞아버렸어요. 아렌트도 아직 못 읽었는데 아감벤까지. -_- 두 사람 다 확 끌려버리는데, 기사 중엔 아렌트와 아감벤을 놓고 서로 다른 견해가 등장하기도 하더라고요. 재밌었어요.

로쟈 2008-03-08 09:27   좋아요 0 | URL
저도 뜻밖의 특집으로 읽었습니다. 우리의 '시사' 수준을 좀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지만...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의 '서문'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옮겨놓는다. 며칠전 컬처뉴스에 리뷰를 썼던(http://blog.aladin.co.kr/mramor/1945199)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의 번역이고 그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이다. 비록 '서문'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우리에게 주어진 국역본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가와 우리가 랑시에르를 얼마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참고로 문단은 편의를 위해서 원문/번역문보다 더 잘게 쪼갰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여인, 학교에서 히잡을 벗지 않으려는 여학생들, 적자를 내고 있는 사회보장제도, 바칼로레아 제시문 중 왕좌를 차지했던 라신과 코르네유를 끌어내린 몽테스키외·볼테르·보들레르, 자신들을 위한 연금제도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벌이는 임금생활자들, 대안적 입시제도를 도입한 그랑제콜, 날로 대중화되어 가는 리얼리티 TV·동성결혼·인공수정…….

이처럼 그 성격이 이질적인 사건들을 한데 묶어 볼 수 있게 해주는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수많은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정신분석가들,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작가들은 진작부터 줄줄이 책과 기사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면서 답변을 내놓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증상은 동일한 질병의 발로인데 이 모든 결과들에는 오직 단 하나의 원인이 존재할 뿐이다. [역시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 원인은 현대 대중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끝없는 욕망이 군림하는 통치체제, 즉 흔히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이런 비난의 독특함을 구성하고 있는지 살펴봐야만 한다. 분명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새로울 게 없다. 실상 그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증오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다수[데모스]의 지배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속에서 정당성을 갖춘 모든 질서의 붕괴를 목도한 자들이 일종의 욕으로 사용한 단어이다.

권력이란 당연히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나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혐오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신성한 법의 계시만이 인간의 공동체를 조직해 주는 유일한 합법적 토대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러하다. 확실히 민주주의를 향한 이와 같은 맹렬한 비난은 동시대의 의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비난 자체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닌데, 그 이유 역시 단순하다. 나는 이런 비난을 퍼뜨리는 자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이에 대해서 논쟁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목도하기도 했다. 이 비판은 민주주의에 뭔가 알맹이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민주주의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해왔다. 먼저 귀족주의적 입법자들과 전문가들의 술수가 있는데,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보고 그와 타협하려고 애썼다. 미국 헌법의 제정 과정은 이런 술수의 고전적인 예인데,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라는 현실에서 최대치를 얻어내고자 권력들을 조직하고 공공 기구들간의 균형을 맞추는 한편, 서로 동의어로 간주되는 두 가지 [공공]선(善)을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엄격히 한정했다. 최선의 정부와 소유질서의 보존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실용적 비판의 성공은 자연스레 또 다른 비판의 성공을 북돋웠다. 청년 맑스는 공화주의 헌법의 토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소유권임을 손쉽게 폭로할 수 있었다. 공화주의 입법자들은 그런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맑스는 아직까지 그 원천이 고갈되지 않은 사유의 전형을 정립할 수 있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는 단지 외양이자 도구일 뿐으로서, 그 외양 아래서 혹은 그 도구를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권력을 관철하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외양[즉, 형식적 민주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라면 자유와 평등은 더 이상 법제도나 국가에 의해서 대표[대의]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태 자체를 통해서 구현될 것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책의 주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이 두 가지 모델에 모두 딱 들어맞지 않는다. 비록 그 두 모델에서 빌려온 요소들을 결합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이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주창자들 모두는 자신들이 단순히 민주주의적인 국가인 게 아니라 딱 잘라 말해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주창자들 중 더 실제적인 민주주의 같은 것을 요청하는 자는 없다. 오히려 이들은 누구나가 민주주의를 너무 많이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인민들의 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제도들에 불평을 늘어놓거나, 그런 권력을 제한하는 어떤 조치를 취하자고 주장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몽테스키외, 매디슨, 토크빌의 동시대인들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는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들이 불평하는 것은 인민들[이라는 존재] 자체, 그리고 인민들의 습속이지, 인민권력의 제도들이 아니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타락한 통치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사회를 들볶고, 그럼으로써 국가를 들볶는, 문명의 위기이다. 도대체 왜 이들이 이처럼 오락가락하는지는 일견 놀랄 만한 일이다. 실제로 차이의 존중, 소수자들의 권리, 차별철폐 조치 등과 관련된 모든 악을 우리에게 퍼뜨림으로써 [프랑스] 공화국의 보편주의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이유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바로 그 자들은, 미국이 무력을 통해서 전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고 하면 앞장서 박수를 쳐대는 자들이다.

확실히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중 담론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우리는 여타의 모든 통치체제 중 민주주의가 최악의 통치체제라는 말을 듣는 데 이골이 나 있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정서는 이 통상적인 공식을 훨씬 더 논란을 일으킬 만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요컨대 민주주의라는 통치체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모든 차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민주주의 사회가 자신을 붕괴시키도록 내버려둔다면 나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달리 민주주의 사회 탓에 허약해진 개인들을 다시 결집시킴으로써 문명의 가치들, 문명들간의 충돌과 관련 있는 그 가치들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면 민주주의라는 통치체제는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 새로운 증오가 제시하는 테제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좋은 민주주의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이라는 재앙을 억압하는 민주주의이다. 이어질 본문에서 나는 이 테제의 구조를 분석하고, 이 테제가 맺고 있는 이해관계를 도출해볼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동시대의 이데올로기 형태를 단순히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분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황을, 그리고 이 세계가 정치라는 말로써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분석은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양산한 스캔들을 명확히 이해하고,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활기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08. 03. 05.

P.S. 새 번역문을 읽다 보니 거듭 국역본에 유감을 표하게 된다. 그런 공적인 유감에다가 사적인 유감까지 보태고 싶은데, 알고 보니 역자는 몇몇 포스트를 통해서 번역상의 문제를 제기한 나를 명예훼손으로 이미 1월말에 고소까지 했다.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다시 책을 펴들고 역자 서문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다. "독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저자의 반어적 표현과 반전을 거듭하는 논의 전개 방식이다. 아마도 저자는 민주주의의 혼란스러움과 반목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논점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7-8쪽)

이건 혹 역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고쳐 읽게 되니 말이다. "독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역자의 반어적 표현과 반전을 거듭하는 번역 방식이다. 아마도 역자는 말도 안되는 번역의 혼란스러움과 자신의 몰이해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번역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그 점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듯싶다. 독자들이여, 역자를 주의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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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학 철학 그리고 모순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3-06 11:06 
    * 로쟈님의 2008년 3월 5일자 페이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 중에서 발췌 - 이처럼 그 성격이 이질적인 사건들을 한데 묶어 볼 수 있게 해주는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 세상에 좋은 민주주의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이라는 재앙을 억압하는 민주주의이다.
 
 
canon 2008-03-06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지적한 번역 오류를 "허위사실"이라고 보는 '구체적'인 이유를 역자 백승대에게 직접 듣고 싶네요.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고 더 공부할 생각이나 할 것이지.

로쟈 2008-03-06 22:5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궁금합니다.

마립간 2008-03-06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 내용을 저의 서재에 옮깁니다.

로쟈 2008-03-06 22:50   좋아요 0 | URL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3-0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맥락일 수도 있겠지만,
새삼 이윤기 선생의 '장미의 이름'(강유원)에 대한 대응(?)이 참 대단하다 생각되네요.

로쟈 2008-03-06 22:48   좋아요 0 | URL
번역에도 급이 있고 격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