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5월의 읽을 만한 책'을 선정해서 발표했다(http://www.kpec.or.kr/index.asp). 3권 정도는 생소한 책이다. 나대로 읽을 만한 책을 보태본다. 물론 한 달 동안 읽을 수 있는 분량은 넘어선다. 하지만 다 읽지 못하더라도 훗날 어떤 책들이 나왔는지, 어떤 책들을 읽었으면 했는지에 대한 '기록'의 역할은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절반 정도는 '구경'의 의미도 있다...

 

 

 

 

1. 문학

문야분야의 책으로 작가 신경숙씨가 추천한 책은 정지아의 두번째 소설집 <봄빛>(창비, 2008)이다(<행복>이 첫번째 소설집이었다). "정지아의 <봄빛>속에 담겨있는 단편소설들은 이즈음의 소설들하고는 바로 구별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까마득히 잊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존재들. 지금의 우리들을 몇 겹 만 파 들어가고 나면 거기에 역사와 세월의 더께를 쓰고 한을 품은 채 그러나 그 한을 토로하는 게 아니라 묵묵히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존재들이 정지아가 골라낸 문장의 숨결을 타고 고스란히 되살아나 있다. 어찌나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한 자락 한 자락 펼쳐내는지 바로 옆에서 보고 있는 듯하다."라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이 소설집에 대해서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씨의 리뷰를 미리 읽었는데 유익한 참조가 될 듯하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69#). 더불어 '이즈음의 소설'들도 같이 읽으면 좋겠다. 가령 최근에 나온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2008)이나 손홍규의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2008) 같은 소설집들(이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63208 참조).

 

 

 

 

2. 역사

역사분야의 책으로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꼽은 책은 <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시공주니어, 2008)이다. 유럽편 1,2권이 먼저 나온 듯한데, "사진을 통해 세계 문화유산 여행을 다니며 글을 통해 서양사를 배우다 보면 우리 역사를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 놓고 생각하게 되는 자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추천자의 생각이다. 어차피 자녀들에게 '세계문화유산 답사'(!) 해외여행을 시켜줄 형편이 안되는 대다수 학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해줄만한 책선물이지 싶다(설마 가보자고 조르지는 않겠지!). 5월이 낼모레 아닌가.    



 

 


이덕일소장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종묘와 창덕궁을 비롯해 정조와 정약용의 꿈이 담긴 수원 화성, 불국사·석굴암과 경주 역사 유적지구, 그리고 각지의 고인돌 유적 등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다."  찾아보니 그에 관한 책들도 몇 권이 나와 있다. 흠 '종묘' 정도면 그래도 만만할 듯싶군...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미셸 세르의 <천사들의 전설>(그린비, 2008)이다. 다소 의외인데, 좋은 책이긴 하나 액면가 5만원의 고가본이기 때문이다. 추천사에 따르면 "<천사들의 전설>은 소설의 형식을 띤 철학책이고 글자보다 그림이 더 많은 화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화보집'으로 읽어도 되겠다(나는 도서관에 들어오기나 기다려봐야겠다)

'헤르메스의 철학자' 세르의 책은 국내에 몇 권 소개돼 있고 앞으로도 몇 권 더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입문서로 제격인 책은 가장 처음 나온 <해명>(솔출판사, 1994)인데, 이미 절판된 지 오래다. <헤르메스>(민음사, 1999), <기식자>(동문선, 2002) 외에, 이번에 알게 됐지만, <사랑할 때 우리는 동물이 되는가?>(민음인, 2006)도 소개돼 있다. 64쪽짜리이니까 '에피타이저' 정도로 읽을 수 있겠다.

 

 

 

 

4. 정치

정치분야의 책으로 김광웅 교수가 추천한 책은 얼마전에 나도 리뷰를 읽은 적이 있는 <아마추어 정부의 몰락>(중앙북스, 2008)이다. 제목의 '아마추어정부'란 일본의 전 내각 '아베 정부'를 가리킨다. 책은 "자민당 파벌 정치가 어떤 때는 성공하고(고이즈미) 또 어떤 때는 실패하는가(아베)"를 살펴본다는데, "일본정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측근정치’(팀)가 파탄난 격이 된 아베의 경우는 같은 측근정치이면서 그 팀이 외부와의 소통을 소홀히 한 결과 전혀 다른 결과를 빚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전형적 정치행태보다 국민과의 소통이 훨씬 더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어 우리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찾아보니 다케나가 헤이조의 <구조개혁의 진실>(한국경제연구원, 2008)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런 책들을 더 열심히 읽어봐야 할 사람들은 요즘 '왕초보'란 말까지 듣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아마추어 정부의 몰락'은 국민에게 민폐다. 일본 얘기가 나온 김에 나는 '전후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을 다룬 요시미 순야의 <왜 다시 친미냐 반미냐>(산처럼, 2008)를 읽을 만한 책으로 떠올려본다. 요시미의 책은 꽤 여러 권이 소개돼 있는데, <만국 박람회 환상>(논형, 2007) 등도 눈길을 끈다. '전후 정치의 주술과 시민의식'을 다룬 책이다. 모두 '전후시기'를 문제삼고 있지만 '타산지석'으로서는 모자라지 않을 듯싶다.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가 추천한 경제서는 고지마 히로유키의 <확률의 경제학>(살림Biz, 2008)이다. 경제교양서로 분류되지 않나 싶다. 추천사에 따르면 "이 책은 수학, 통계학, 경제학, 논리학, 사회사상 등을 폭넓게 넘나들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도박이나 보험, 자산운용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환경문제, 나이트(F.Knight)의 불확실성을 통한 인간행동의 본질, 공유지식(common knowledge)이라는 집단적 추론 형식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평등의 문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와 같은 철학적 문제도 빼놓지 않았다."

겸사겸사 경제학 교과서가 아닌 경제학 교양서들을 찾아봤는데, 독자의 반응이 가장 좋은 책들이 유병률의 <서른살 경제학>(인물과사상사, 2005)과 최근 고정 독자층을 확보한 듯 보이는 팀 하포드의 <경제학 콘서트1,2>(웅진지식하우스, 2006/2008)이다. 책 자체들보다는 "요즘 독자들은 이런 책들을 읽는다"는 점에서 관심을 둘 만하다.

 

 

 

 

6. 사회

사회분야의 책으로 김문조 교수는 헨리 젠킨스의 <컨버전스 컬처>(비즈앤비즈, 2008)를 추천했다. 저자는 "MIT 인문학부 교수이자 미디어비교연구 프로그램 주관자"라고 하는데, "경계를 초월한 다양한 미디어 채널들이 콘텐츠의 교류를 촉진하고, 여기에 참여문화나 집단지성을 추구하는 미디어 수용자들의 적극적 의지가 가세되어, 콘텐츠의 자유로운 교합이 이루어지는 문화적 컨버전스가 초래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책은 '컨버전스 문화'에 대한 청사진 정도 되겠다. 화두가 '미디어'에서 '컨버전스'로 이동해가는 것인지? 좀 늦된 나는 미디어에 대해서나 이해해두어야겠다.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민음사, 2002)가 (여전히 안 읽힌다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여전히 고전이고, 레프 마노비치의 <뉴미디어의 언어>(생각의나무, 2004)는 뉴미디어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그리고 최근엔 프랑크 하르트만의 <미디어철학>(북코리아, 2008)도 출간됐다. 물론 이 분야에는 양쪽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의 책들이 출간돼 있다.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한 책은 가브리엘 워커의 <공기 위를 걷는 사람들>(웅진지식하우스, 2008)이다. 원제는 '공기의 바다(An Ocean of Air)' 정도이지만, '공기 위를 걷는 사람들'이 된 건 저자의 이름이 '워커'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부제대로 "지상에서 우주까지, 보이지 않는 공기를 찾아 나선 위대한 도전과 모험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그 공기 때문에 떠올린 책은 바슐라르의 <공기와 꿈>(이학사, 2000)이다. 나란히 읽으면 공기 위를 '꿈꾸며' 걸을 수 있겠다. 거기에 우주에 관한 책 얘기도 보태고 싶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서해문집, 1998)는 이미 절판됐지만, 이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으로 대신할 수 있다. 오언 깅거리치의 <아무도 읽지 않은 책>(지식의숲, 2008)이 그 책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2064706). 이런 책을 읽는 건 '독서'가 아니라 그냥 '휴식'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예술'보다는 '문화'로 분류될 책이다. 정동주의 <다관에 담긴 한-중-일의 차문화사>(한길사, 2008)이니까 제목대로라면 '비교문화사' 책이다. "다관은 차를 끓이거나 우려내는 역할을 하는 오래된 역사를 지닌 그릇이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으로부터 백제시대 차나무를 건네받은 일본의 차 문화사 비교는 그냥 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들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다양한 시각과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라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아직 차를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그냥 몇 권의 책을 둘러본 정도다. 지난 겨울 중국여행때 사들고 온 녹차라도 빨리 먹어치워야겠다...

 

 

 

 

9. 교양

5월의 교양은 우주교양이다('우주적 교양'까지는 아직 갈길이 멀겠지만). 이한구 기자가 추천한 책이 가가린의 <푸른 빛이었다>(갈라파고스, 2008)이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구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사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 체험담을 각각 2부로 나눠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어설픈 리포트 같기도 하지만 당시 사회주의 체제를 고려하며 읽는다면 내용은 참으로 진솔하다."는 평이다. 개인적으론 '5월의 읽을 만한 책'들 가운데 유일하게 다 읽은 책이기도 하다(이번주 '한겨레21'에 소감을 적어놓았다). 가가린보다 좀 업그레이드된 우주여행 안내서로는 미국 우주인들의 달 탐사기 <문더스트>(사이언스북스, 2008)를 읽어볼 수 있겠다. <우주비행사가 들려주는 우주여행 설명서>(한승, 2008)나 <안전하면서도 위험한 우주여행 상식사전>(뿌리와이파리, 2008) 모두 이번 '한국인 우주인' 탄생을 겨냥하여 나온 책들이다.  

 

 

 

 

사실 개인적으론 아직도 '우주여행'보다는 그냥 '우주'에 관한 책들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사이언스북스, 2008)와 남순건 교수의 <스트링 코스모스>(지호, 2007)가 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승산, 2002)와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김영사, 2006)도 책장에서 꺼내놓고 싶지만 글쎄...

 

 

 

 

10. 전기

'나대로 전기 읽기'는 68혁명 40주년을 맞아 타리크 알리의 <1960년대 자서전>(책과함께, 2008)을 고른다(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55124 참조).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이후, 1999) 등이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인데, 이 책은 개정판이 곧 나올 예정인 것으로 안다. 겸사겸사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한번 더 볼까 싶다(아니면 <몽상가들>?)...

  

 08. 04. 29.

 

 

 

 

P.S. 5월의 고전 읽기는 '고전 읽기' 자체를 문제로 삼는 책을 골랐다. '21세기 인문학의 변형'을 화두로 한 커트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휴먼&북스, 2008)이 그것인데, 개인적으론 이 '무거운' 책을 4월 내내 야금야금 읽었다(원저 자체가 두꺼운 건 아니다). 자세하게 따로 적어두지 않았지만 책은 인문학 자체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책들 가운데 가장 도전적이고 가장 유익하다(번역에 일부 흠이 있지만 개인적으론 상반기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다. 물론 이때의 '개인'은 소위 '인문학 강사'로서의 개인이다). 5월에는 이에 대한 페이퍼를 적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내가 <인문학의 즐거움>과 같이 읽는 책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과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이다(카우프만의 책은 번역서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되니 주의해야 한다. 쇼리스의 책은 물론 널리 알려진 책이고 나는 완독하진 않았었다). 그리고 김윤식 교수의 <백철 연구>(소명출판, 2008)를 대출해놓았는데, 한국 대학에서 문학연구의 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고전 읽기', 더 나아가 '인문학 공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봐야겠다. 맙소사, 이 좋은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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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지아 씨 하면 빨치산의 딸 생각나는데 그때가 스무살이었던가요.이제 40대...세월이 팍팍 지나는 소리...오...그리고 저 백인 남자는 말론 브랜도 아저씨? 이 사나이도 이젠 불귀의 객이 되었구먼요.

로쟈 2008-04-30 23:10   좋아요 0 | URL
네, 매력있는 배우였죠.^^;

PhEAV 2008-04-2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은 피아니스트 폴리니의 음반에서 본 게 더 익숙하네요. ^^;

로쟈 2008-04-30 23:10   좋아요 0 | URL
책 표지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섬나무 2008-04-3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이랑 교양이 마지막 목록이었으면 이 그림을 못 볼뻔 했네요.^^ 근데 대문에 확대된 먼 풍경과 하늘빛, 말하는 뒷통수가 훨 좋습니다.

로쟈 2008-04-30 23:11   좋아요 0 | URL
그림을 갖다 붙여놓는 게 돈 드는 일은 아니어서요.^^;

치유 2008-07-15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겨진 우주란 책을 중2학생인 녀석이 봐도 이해가 될까요??
때론 이렇게 어려울것 같은 책을 주문해달라고 조르면 어찌해야할지를 모르겠어요.

로쟈 2008-07-15 14:46   좋아요 0 | URL
흥미만 느낄 수 있어도 성공 아닐까요?^^
 

'피터 싱어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놓은 김에 관련기사를 찾았다. 작년 봄에 방한했던 것이 기억나서다. <오늘의 세계적 가치>(문예출판사, 2007)에 실린 피터 싱어의 문답강연에 대해 몇 마디 적어놓을까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가 않다. 도올인터뷰 기사로 소개를 대신한다.

중앙일보(07. 05. 21) [도올인터뷰] '실천윤리학'의 거장 피터 싱어 교수를 만나다

미국 프린스턴대 석좌교수이자 타임지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100인의 한 사람으로 꼽은 피터 싱어(Peter Singer) 교수가 내한했다(본지 5월 18일자 18면 기사 참조). 도올 김용옥 기자가 17일 서울대 호암관에서 그를 만나 점심을 같이 했다. 싱어 교수는 21일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연을 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상가로서 우리는 재미있는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싱어 교수는 보통 철학자들과는 달리 어법이 진솔하고 직설적이며 간결했다. 버트런드 러셀 이후로 가장 많은 사회적 논쟁을 생산하고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철학자로서 정평이 있다"는 것이 도올의 말이다.

-좀 거칠게 질문하겠는데 윤리학(ethics)이란 무엇인가?

"윤리학이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how we ought to live)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정의가 간결해서 좋다. 그대는 전통적 윤리학 학파 중에 어디에 속하는가? 혹은 속하지 않는지….

"나는 공리주의 학파(utilitarianism)에 속한다."

-그대의 주장이 전통적 공리주의와 다른 것이 있다면?

"전통적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쾌락의 정도의 기준에 의하여 윤리적 가치를 결정한다. 그러나 나는 쾌.불쾌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모든 지각.의식 있는 존재(sentient being)의 선호(preference)에 관한 것이다. 그 선호의 만족을 최대화시키거나, 선호를 방해하는 불만을 최소화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다."



-당신의 선호공리주의(preference utilitarianism)에 의하면 인간이 살기를 선호할 때도 있지만 죽기를 선호할 때 그것을 합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안락사 허용의 문제다."

-그러한 허용에 도달케 되는 윤리적 과정에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은가? 존엄한 인간의 의식적 결정이라면 몰라도, 뇌사 상태에 있는 인간이라든가, 유아의 경우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생명의 종료를 누가 감히 결단하겠는가?

"내가 말하는 것은 불가피한 비극적 상황에 관한 것이다. 소생 가능성 없는 뇌사의 인간이라든가, 너무도 심각하게 불구로 태어난 신생아의 경우, 주변의 식구나 양식을 가진 의사가 어려운 논의 끝에 도달한 합의(선호)를 인정해 주는 것이 더 자비로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인간의 오판이라든가 보험금, 범죄 동기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개입될 우려가 많다.

"안락사는 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큰 사회적 부작용이 없다. 나의 논의에 많은 사람이 부정적 견해를 표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인도주의(humanitarianism)에 관한 그들의 관념이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편향의 대부분은 기독교적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유대교의 경우는 좁은 울타리의 동네사람이나 선민의식에 절어있는 유대인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수가 말하는 '이웃'도 기껏해야 인간이라는 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성차별(sexism), 인종차별(racism)이 악이라면 물론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도 악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지각.의식 있는 존재의 고통의 경감이나 이해 관심에 관한 동등한 배려다. 저등 의식의 유아보다 더 고등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물도 많다. 이런 동물은 마음대로 죽이면서 안락사 문제에만 인도주의라는 존엄성의 잣대를 운운하는 것은 위선이다. 절대적인 듯이 보이는 윤리적 직관(intuition)이라는 것도 편견투성이다. 직관 자체가 진화해야 한다."



-그대는 유대인인가?

"그건 왜 묻나? 우리의 논의와 유대인은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혈통상 분명한 유대인이지만 사상이나 종교로 말하면 날 유대인으로 규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그냥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미국의 상층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국제세계에 부도덕한 많은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데 당신은 책임이 없나?

"당신이 말하는 것은 미국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매우 조직화된 유대인 로비스트를 지칭하는 것이나 그들이 곧 유대인은 아니다. 유대인 중에는, 촘스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칼 마르크스 같은 이도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 탄압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무신론자인가?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어 이 세계를 창조했고 지배하고 있다면 도대체 인간세상을 왜 이따위로 작동시키고 있는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질문을 나는 극복하지 못했다. 인간의 문제를 궁극자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나의 입장을 지각 있는 모든 존재의 입장과 항상 환치(換置)해 보는 것이 모든 종교적 명제에 우선한다. 대체적으로 종교는 공평성(impartiality)을 결여하고 있다."



-지각 있는 존재에 관한 당신의 주장은 불교의 중생(衆生)이론과 통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호가 '도올'이듯이 불교는 돌멩이에도 저급한 의식이 있을 수 있다고까지 보는 것 같다. 내 이론은 존재를 거기까지 넓히지는 않는다."

-신경계(nerve system)의 유무인가?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관한 것이다."

-식물에도 정보 전달 체계는 있다.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무를 톱으로 자를 때 나무가 통증을 안 느끼는 줄 어떻게 아는가?

"현대과학의 상식 수준에서 이야기하자."



-당신 강연 제목을 묻겠는데, 21세기에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첫째 이 세계의 불필요한 고통(unnecessary suffering)을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 둘째 이 세계는 이미 이 세계의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부를 축적해 놓았다. 단지 분배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못사는 나라의 음식.의료.교육을 위해 힘써야 한다. 셋째 환경을 파괴시키지 않는 방향에서 우리의 문명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환경파괴 가스와 연료의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

-미국은 에너지 낭비 체제의 확보를 위해 이라크까지 침공하지 않았나?

"에너지 이유만 아니라 남의 나라에 민주를 만들어 주겠다고 간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 결과는 수천 수만의 생명이 아무 이유 없이(for no good reason) 죽어만 갔다. 유엔의 결정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행동한 것은 미국역사의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다."

-부시는 좋은 사람인가?

"그는 대체적으로 기만적이다. 아주 자비로운 보수인 것처럼 가장했으나 약자와 가난한 자를 무시했고 개인의 자유를 짓밟는 감시체제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오리건주의 안락사법을 뒤엎으려 했다. 보수적 기독교인의 지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나는 최근 '요한복음'을 새로 번역하고 강해했다.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나나 당신과 같은 사상가(윤리교사)의 한 사람이다. 그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그가 죽은 지 40.50년 후부터 집필된 것인데 별 신빙성이 없다."

-한국에 대한 생각은?

"한국은 세계적으로 매우 지위가 높은 나라다. 경제적으로 11위권에 든다면, 한국인은 이제 글로벌한 사유를 해야 한다. 해외원조금을 너무 적게 내놓고 있다. 그리스 같은 나라도 국민총소득의 0.17%를 내놓는데 한국은 0.1%밖에 안 내놓고 있다."



-북한에 대한 생각은?

"인민의 고통에 대한 배려가 매우 부족한 나라 같다."

-그래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그 나라의 지배자와 선의의 피해를 받는 대중을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 북한의 인민들에게는 보편적 자비의 가치를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북한 인민들을 도와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에 관한 의견은?

"나는 구체적 정황은 잘 모른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이 평화롭게 접촉하고 핵문제를 해결하고 개성공단이나 철도와 같은 경협을 추진하는 문제에 관해 미국이 보다 너그럽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미국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미국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피터 싱어는 1946년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나치 탄압을 피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이다. 현재 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드캠프석좌교수로서 범세계적 기아퇴치.생명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멜버른대에서 "나는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석사논문을 썼고, 옥스퍼드대에서 '시민 불복종'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그의 조부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준 고전학자였다. 그의 명저 '동물해방' '실천윤리학'은 세계 철학계의 매우 인기있는 텍스트이다. 철저한 채식주의자.

08.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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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28 14:36   좋아요 0 | URL
인터뷰가 실질적이고 간결하네요. 정말 좀 거친 직설적인 질문들이 현실감 있습니다. 마치 싸우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묻는 이나 대답하는 이나 학문적 수식이 없어 좋습니다. 피터싱어의 공리주의 혹은 윤리학을 눈치채기에 부족하지 않네요.
'독설의 팡세'를 읽고 에밀 시오랑과 로쟈님은 매치가 안되는 듯 하다고 생각했답니다. 역자는 그가 주는 충격이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으며 절망적이고 불편하다고 했는데 내겐 이보다 유쾌하고 통렬한 사고는 없어 보입니다.

행복이란 아주 희귀한 것이다. 늙은 후에나 노망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행복은 극히 소수의 인간에게만 베풀어진 혜택이다./
나는 노망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ㅎㅎ 내가 지금 불행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노망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니 이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하는 책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로쟈 2008-04-28 23:38   좋아요 0 | URL
시오랑에 대해서는 몇 차례 다룬 적이 있는데요. 잘 안 맞아 보이나요?^^

비로그인 2008-04-29 12:18   좋아요 0 | URL
도올의 질문과 싱어의 대답이 모두 명쾌합니다.
싱어의 생각에 공감하는 편이랍니다.
저의 서재에 옮기고 싶습니다.
의미심장한 인터뷰기사소개 고맙습니다. 로쟈님.


로쟈 2008-04-29 13:4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도서관에 갔다가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인간사랑, 1999)를 대출해왔다. 표지가 너무도 유치해서 구입하지 않은 책인데 이번에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도 번역된 김에 손길이 갔다. 같이 대출한 책은 최훈의 <벤담 & 싱어>(김영사, 2007)이다. 아마도 싱어는 국내에 가장 많이 소개돼 있는 윤리학자일 텐데 그 자신이 많은 책들을 펴내고 있기도 하다.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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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살아가기- 현대 사회와 실천윤리, 다산 기념 철학 강좌 10
피터 싱어 지음, 구영모 외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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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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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계화의 윤리- 실천윤리학의 거장 피터 싱어의
피터 싱어 지음, 김희정 옮김 / 아카넷 / 2003년 12월
12,000원 → 11,400원(5%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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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World: The Ethics of Globalization, Second Edition (Paperback, 2)
Singer, Peter / Yale Univ Pr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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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4-27 20:55   좋아요 0 | URL
벤담&싱어 재밌습니다. ^^ 저는 <죽음의 밥상> 나오자마자 사서 집에 모셔놨어요. 전에 사놨던 싱어의 책이 몇 권 있는데 아직 못 읽었네요. 싱어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아서.

로쟈 2008-04-27 23:23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가 대부분 잘 읽힙니다.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2008-04-28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28 23:39   좋아요 0 | URL
싱어의 책들은 대부분 도서관들에 비치돼 있을 겁니다...

소경 2008-04-28 23:52   좋아요 0 | URL
몇몇 권들은 단대(법대) 도서관에만 비치되어 있더군요 ..쩝 ㅠㅠ

로쟈 2008-04-28 23:55   좋아요 0 | URL
돈이 없으면 발품이죠.^^;
 

낮에 학교 연구실에 다녀온 사이에 전화선 공사를 하는 바람에 서재가 폭탄을 맞은 꼴이 돼 버렸다. 주로 바닥에 쌓아놓았던 책들이 뒤죽박죽이 된 탓에 마침 읽어보려던 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시름이 늘어서 가뜩이나 찌푸린 날씨 같은 기분인데 책들마저도 '비협조적'이니 무얼로 울적함을 달래야 할는지. 예전에 쓴 시나 한편 옮겨놓는다. 접시에 코라도 박고 싶은 마음에...

Lost Highway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이다, 한순간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 깨알같은 생의 일지(日誌)들은 백열등 아래 잠 못 이루며
얇은 가슴팍 갈피마다 눌러 적힌 글자들을 뒤적여야 한다
무얼 자백하고 무얼 숨겨야 할 것인가
언젠가 부질없는 마음이 긁고 간 이 치욕스런 오점들
언젠가 다시 불꽃 속으로 사그라질 이 덧없는 회한들
어느 한순간이다, 바로 한순간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 접시에 코를 박고 종이들은 숨을 죽인다

08. 04. 26.

P.S. 시의 제목은 물론 파스빈더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3)를 패러디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1997)의 것이고 지금 듣는 음악은 그 주제가 데이비드 보위의 '나는 착란에 빠졌어요(I'm Deranged)'이다(http://www.youtube.com/watch?v=OtpHR3d0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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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까 2008-04-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배경화면을 로쟈님 서재사진으로 한번 바꿔보심이..

로쟈 2008-04-26 23:47   좋아요 0 | URL
제가 온라인 서재를 만든 이유가 없어집니다.^^;

Mephistopheles 2008-04-28 00:03   좋아요 0 | URL
지젝을 로쟈님 서재로 초대하면 아마도 가능할지도...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좋아하시나봐요.이 영화가 대표작이라서 그의 전기도 이 제목이던데요....로날드 헤이만이 쓴 전기 국역판은 도서관에도 없고...저는 독일 역사논쟁에서 이 감독을 처음 알았어요.장정일씨가 되게 좋아하더라구요.근데 요절했네요.

로쟈 2008-04-27 09:22   좋아요 0 | URL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좋아하고 사실 <불안>은 보지 않은 영화입니다. 전기는 읽어봤지만.^^

다락방 2008-04-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니까 로쟈님, 시도 쓰시는군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

로쟈 2008-04-27 09:21   좋아요 0 | URL
옛날에 쓰던 걸 가끔씩 올려놓고 있습니다.^^;

Mephistopheles 2008-04-2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스트 하이웨이의 마지막 부분 그로테스크한 외모를 출동시킨 누구를 많이 닮은 마를린 맨슨의 기억이 자꾸 나는군요..^^
 

오언 깅거리치(깅그리치)의 <아무도 읽지 않은 책>(지식의숲, 2008)과 관련하여 마이리스트만 만들어두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2058799), 마침 적당한 리뷰도 있기에 옮겨놓는다. 한 서평대로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이라지만 저자의 품이 상당히 많이 든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가끔씩 만나게 되는 일급 학자들의 전문성과 대중성이 경탄스럽다). ‘위대한 책에 관한 집요한 책에 관한 매혹적인 책’이란 평도 무색하지 않다. 우리 과학사와 관련해서도 이런 책들이 나왔으면 싶다...  

경향신문(08. 04. 26) ‘태양중심설’ 논문에 누가 주석 달았을까

과학비평가 아서 케스틀러는 초기 천문학의 역사를 다룬 베스트셀러 ‘몽유병자들’에서 16세기의 한 논문에 대해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자 “역사상 가장 판매가 신통치 않은 책”이라는 혹평을 남겼다. 이 논문의 이름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중심설에 의문을 제기하며 태양중심설을 정교하게 설명해놓은 기록이다.

1970년 가을, 근대과학혁명을 불러온 코페르니쿠스의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참여하게 된 저자는 문제의 논문이 출간 당시보다 20세기 이후에 더 많이 읽혔을 것이라 추정한다. 태양중심 우주론을 다룬 첫 5%는 “지적으로 즐길 수 있게” 쓰였지만 나머지 95%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전문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입해서 읽고 활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선전문구가 무색하게도, 당시의 독자로 추정할 수 있는 사람은 케플러·튀코 브라헤·갈릴레이 등 천문학자와 출판업자 9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이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던 중 저자는 에든버러 왕립천문대에서 충격적인 책 한권을 만난다. 희귀도서들을 둘러보던 중 그가 발견한 ‘회전…’ 초판본에는 여백 가득히 그림과 글이 적혀있었다. 너무 어려워서 아무도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과 달리 가장 전문적인 뒷부분에 집중적으로 적힌 주석의 주인공은 1540년대 유명 천문학자 에라스무스 라인홀트로 밝혀진다. 이 특별한 책 한권에 홀린 그는 오르후스에서 베이징, 코임브라에서 더블린, 멜버른에서 모스크바, 장크트갈렌에서 샌디에이고까지 수십만 ㎞를 여행하며 도서관을 뒤진다. 성인, 이단자, 불량배, 음악가, 영화배우, 의사, 장서광들이 소유했던 수백권의 초판·재판본들 속의 필체와 제본방식은 그를 미궁에 빠지게도 하고 불타는 연구경쟁 속에 던져넣기도 한다. 결국 그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다. “아서 케스틀러는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었다.



저자인 하버드대 과학사 교수 오언 깅거리치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소행성을 갖고 있을 정도로 저명한 천문학자다. 그는 30년 동안 600여권의 ‘회전’ 초판·재판본을 찾아냈고 그 결과를 “코페르니쿠스의 ‘회전에 관하여’의 주석에 관한 조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은 이 ‘주석’을 펴내는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회고록이다. 표지나 여백에 남겨진 필체와 흔적을 통해 책의 원주인과 이동경로를 찾아내는 집요한 조사과정이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다. ‘천문학사 저널’에 실린 서평의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이라는 표현에서 더 나아가 ‘위대한 책에 관한 집요한 책에 관한 매혹적인 책’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책 한권에 대한 이 완벽한 연구는 이제 종종 경매에 나온 희귀본이 도난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책 말미에 ‘회전…’ 초판과 재판본을 소장하고 있는 나라 목록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한권도 없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8권, 중국에 1권이 있다하니 속이 쓰려온다.

08. 04. 26.

P.S. 기사의 서두에서 인용된 아서 케스틀러(Arthur Koestler, 1905-1983)의 얘기는 책의 '들어가는 글'에 들어있다. 국내엔 '아서 케슬러'로 소개되었고 소설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 과학에세이 <야뉴스>(범양사, 1993) 등이 번역되었다. 그 케슬러가 쓴 "초기 천문학의 역사"가 <몽유병자(The Sleepwalkers)>(1959)라는 것이고, 찾아보니 623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물 간 베스트셀러는 아니고 지난 1990년에 재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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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37   좋아요 0 | URL
케스틀러가 천문학에 관한 책도 썼군요.저는 한낮의 어둠의 작가로만 알았는데...일본인들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이름이 붙은 별이름도 꽤 된다고 하던데요.그래서 천문학에 관한 희귀본이 많나보죠.

로쟈 2008-04-27 18:38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쪽도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가 여럿 되니까요...

네모선장 2008-04-29 12:32   좋아요 0 | URL
수학분야도 뛰어납니다.
수학의 노벨상 격인 필즈상도 동남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세번 중국이 한 번 수상했습니다^^

로쟈 2008-04-29 13:49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납니다. 일본의 수상자 한 사람이 <학문의 즐거움> 저자였죠...

네모선장 2008-05-01 13:2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히로나카 헤이스케 현재 서울대 수학과에 초빙되어 수업하고 계신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