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한길그레이트북스' 100번째 책으로 나온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2008)을 실마리로 삼아서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게 무엇인지 적은 글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를 여러 차례 다루면서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mramor/802981 등 참조).

한겨레21(08. 05. 27)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예술의 종말’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그거 뭐 유행 아닌가? (근대)문학, 철학, 역사 가릴 것 없이 떼로 종말을 고했다고 하는데, 예술이 끝났다는 게 굳이 새로운 소식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재차 드린다. 예술은 언제 종말을 고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그 종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너무 과한 질문인가? 얼핏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나름대로의 예술관과 예술철학으로 무장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에 따르면, 너무도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함께 박스 하나만 잘 기억해두면 된다. 비누 상자다.

‘예술’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아트(Art)’가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미술’을 뜻하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술의 종말’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1964년의 한 전시회에서다. 그는 당시 뉴욕 이스트 74번가의, 마치 재고품 창고 같은 모양새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슈퍼마켓에서나 진열돼 있을 법한 ‘브릴로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는 걸 보고 미적 혐오감을 넘어서는 철학적 흥분을 느낀다(‘브릴로’는 청소용 세제의 브랜드다. 이 비누 상자 옆방에는 켈로그 상자들도 쌓여 있었단다).

물론 워홀이 마켓에서 이 상자들을 사다가 미술관으로 그냥 옮겨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상자들은 그가 브릴로 상자를 모방해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즉 진짜 브릴로 박스는 골판지로 만들어졌지만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합판으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재질의 차이가 육안으로는 식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해서 겉보기에는 똑같은 두 종류의 박스가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단순한 상품상자로서의 브릴로 상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워홀의 팝아트 작품으로서의 브릴로 상자. 하지만 이 두 상자는 보는 것만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 흔히 무엇이 예술작품인가는 ‘보면 안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 경우엔 ‘봐도 모른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미술이 시각(눈)의 문제에서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술은 더 이상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철학적으로 따져보자. 똑같게 보이는 두 상자가 어떻게 해서 하나는 그냥 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이 되는가? 어떤 사물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는 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여 단토가 내놓은 대답이 ‘예술의 종말론’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1965년에 발표한 ‘예술계’란 논문과 1981년에 출간되고 최근 번역돼 나온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펴냄)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도 또 유효하지도 않다면 거기서 예술의 역사가 종말에 이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나쁜 소식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 국내에는 단토가 1995년에 이 문제를 다시금 총정리해서 내놓은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펴냄, 2004)가 먼저 소개됐다. 이 책에서 단토는 헤겔주의자로서 예술의 종말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하나의 중대한 목적을 갖는다. 곧 자유의 확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시대에 도달하게 되면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그것은 달리 역사의 완성이기도 하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창작자가 될 수 있다면 예술은 종말에 이른다. 예술의 민주주의가 곧 예술의 완성이다

08. 05. 21.

 

 

 

 

P.S. 애초에 단토의 책을 글감으로 삼은 건 '한길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해서였다. 최신간이라 다 읽어볼 여력은 없었고 한두 장 정도 읽어보고 간단하게 감상을 적으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서문에서부터 책은 막히기 시작했다. 기념 띠지까지 두르고 나온 책으로서는 좀 민망한 일인데, 가령 단토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의 선구적인 예로 뒤샹의 예술세계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보라.

"나는 먼저 뒤샹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상적 존재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속하는 대상 - 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 - 을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키는 미묘한 기적을 처음으로 행한 사람은 미술사의 선구자인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57쪽)

뒤샹의 작업이 갖는 의의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인데, 얼핏 읽어도 셋째 문장과 넷째 문장은 서로 모순 아닌가? 그에 따르면, 뒤샹은 (1)일상의 하찮은 대상들이 미적 향수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는 것이 되니까.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이 두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내가 보기에 일상의 하찮은 대상들이 "미적 향수에 부적합하다"는 건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을 잘못 옮긴 것이다. 'improbable'은 물론 '있음직하지 않은', '사실 같지 않은'이란 뜻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고 여기서의 강조점은 그럼에도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즉 미적 향수(감상)의 후보(대상)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뒤샹에 의해서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 있는지는 역자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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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서 단토 교수님한테서 답장이 오다 (작성중)
    from 마음―몸―시공간 2008-06-03 07:05 
      최근 아서 단토 교수님의 저서 『일상적인 것의 변용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김혜련 옮김, 한길사, 2008, 448쪽) 한국어판에 대한 번역 논쟁이 로쟈 님의 블로그에서 진행중입니다. (로쟈 님의 글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참조 → http://blog.aladdin.co.kr/mramor/2102426). 저는 그 논쟁에 참여하여 나름대로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제 견해가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원문의 의미는 통상적으로는 도저히 아름다움과는 아무 상관없는 물건들이 뒤샹에 의하여 미적지위를 획득했다...이런 취지인가요? 그러면 improbable은 직접적인 해석을 해선 안되고 일종의 반어법? 어렵도다...역시 외국어는 어렵네요.

로쟈 2008-05-22 01:04   좋아요 0 | URL
그게 상식에 맞지요. 그냥 방점을 improbable이 아니라 candidates에 찍어서 읽으면 되는데(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후보), 역자가 너무 축어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뒤따라 나오는 문장들과의 호응도 무시할 만큼...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자번역을 넘어야 되는데...그건 그렇고 아서 단토를 몇 년전부터 많이 소개하시는군요.저는 여기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qualia 2008-05-22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로운 오역 사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길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 『일상적인 것의 변용』 번역판 57쪽에서 인용하신 번역문은 원문을 보지 않아도 오역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종의 논리적) 비문이군요. 번역자 분이 앞뒤의 의미상 동치 구문을 180도 정반대로 번역했으니까요.

즉 원문의 〈his acts〉에 해당하는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과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는 의미상 동치 구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번역문은 위 앞뒤 동치 문장을 완전히 180도 반대 의미의 대립 문장으로 옮겨 놓았네요. 번역자 분이나 편집자 분이 이 대목의 번역문에서 문맥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느끼셨을 법한데요. 아쉽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위 번역문에서 〈these unedifying objects〉를 〈하찮은 대상들〉이라고 옮긴 것도 미흡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한 의미는 앞뒤의 긴 문맥을 충분히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위 인용문의 내용으로 보건대,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aesthetic delectation)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혹은 저자의 의도)을 훨씬 더 정확하게 전달하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원래 〈edify〉는 “지적으로, 도덕적, 정신적으로 교화하다”, “지성, 지적 능력, 덕성 따위를 기르다”라는 뜻을 지녔으므로(To instruct especially so as to encourage intellectual, moral, or spiritual improvement), 위 문맥에서는 〈edify〉의 원뜻에서 유추하여 “미적 감상, 미적 감흥, 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다”로 충분히 의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뜻을 지닌 〈unedifying〉이 쓰였으므로 “미적 감상/감흥/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따위로 번역해줘야 하겠죠.

따라서 〈these unedifying objects〉를 〈하찮은 대상들〉이라고 옮긴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미흡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열대 2008-05-2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이것은 그의 행위들이,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다 품위없는 물건들을 놓아 두고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 적어도 적합한 장소안에서는 아름다움이라 할만한 것들을 발견될 수 있게 실제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는 그의 행위를 미학적 거리에서 볼 때 전혀 미적이지 못할 만한 것을 놓아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 practical demonstrations...) 특정한 장소안에서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뒤샹의 작업행위 자체가 모두 역설적이지요. ^^

qualia 2008-05-22 16:35   좋아요 0 | URL

규 님, 반갑습니다. 규 님께서도 번역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하지만, 규 님께서 제시하신 위 번역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원문의 의미를 전혀 올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첫째, 규 님께선 원문의 문장 구성/형식을 전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 따라서 규 님께선 위 원문을 그 본디 의미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완전한 재창작 수준으로 오독 · 오역하였으며, 셋째, 규 님의 번역안은 원문의 의미를 떠나 우리말 문장 구성만을 놓고 볼 때도 말이 되지 않는 비문이기 때문입니다.

① 위 원문에서 〈It is (just) possible ~ aesthetic delectation:〉 부분과 〈practical demonstrations ~ in the least likely places.〉 부분은 역접 관계로 이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디 영문에서 쌍점(:, 콜론)은 앞 문장을 동일한 의미로 재차 설명하거나 부연 설명하는 뒤 문장을 이어주는 기능을 합니다. 영어로는 “that is to say”, “namely”, “viz”에 해당하고 우리말로는 “다시 말하자면”, “이를테면”, “즉” 따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규 님께선 위 앞뒤 문장을 역접적으로 잘못 파악했고, 따라서 잘못 번역하셨습니다.

② 〈in the least likely places〉에서 “the least ~”는 “적어도”가 전혀 아닙니다. 최상급 “the most”의 부정어로서, 위 원문에서는 “가장 ~하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을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으로 번역한 것은, 위에서 로쟈 님뿐만 아니라 제가 설명했듯이, 원문을 잘못 읽고 잘못 옮긴 것입니다. 원저자가 의도한 내용은 그 정반대입니다.

③ 규 님의 번역문 [이것은 그의 행위들이,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다 품위없는 물건들을 놓아 두고 그것들을 미적 향수의 후보로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연출하고 있지만, 적어도 적합한 장소안에서는 아름다움이라 할만한 것들을 발견될 수 있게 실제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이 잘 되지 않는 불완전한 비문입니다. 주어와 서술어가 전혀 호응하지 못하는 문장이며, 주절과 종속절도 전혀 호응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능동과 피동이 뒤섞인 문장 구성도 문장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습니다.

이상과 같은 까닭들 때문에 〈뒤샹의 작업행위 자체가 모두 역설적이지요〉라는 규 님의 의미 있는 논평은 그 빛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coco 2008-05-22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esthetic distance는 여기서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적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후보로 묘사'했다는 말에 맥락이 부여되겠죠. 대강 정리해보면,

"미적인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 곧 그 대상들을 미적인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qualia 2008-05-23 00:50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 안녕하세요? 토론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님께도 유익한 토론 거리를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문제의 원문과 그에 대한 carboni68 님의 번역문을 인용해 놓고 말씀드리죠.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미적인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 곧 그 대상들을 미적인 기쁨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① 위에서 〈aesthetic distance〉는 잘 알려진 문학 · 예술 분야의 전문 개념의 하나입니다. 〈미적 거리〉로 번역하고 통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carboni68 님의 해석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② 게다가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뜯어와 「샘」이라는 제목을 떡하니 붙여놓고 눙치는 장난질 자체가 이미 예술 행위이고 미(학)적 행위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행위 자체는 소변기라는 대상에 대해서 이미 어떤 미적 태도/자세/관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일종의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소변기를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런 정황을 언급하고 있는 원문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를 〈미적인 것과 거리를 둔 채 ~ 이러한 대상들을 배치했다〉고 독해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오독임을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③ 그리고 능동적 현재분사형인 형용사 “unedifying”이 들어 있는 〈these unedifying objects〉를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과 같이 수동적 과거분사형 어구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러한 다듬어지지 않은 대상들〉이라는 독해 자체가 오독입니다.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와 같이 일상적으로는 〈미적 감흥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원문의 맥락에 더 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④ 〈improbable candidates〉를 〈부적절한 것/대상/후보들〉로 옮기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서 단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적 대상으로서 적절한가 부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 작가의 의도나 감상자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그럴싸한 예술 작품으로 변용되고 표현될 수도 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주의 모든 사물들 중에 예술 작품의 소재로서 부적절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즉 모든 것이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이미 예술적 대상으로서 적절한 것이고, 우주 만물이 예술 작품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다면, 이미 그 적절함/부적절함의 문제 따위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은 작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에 따라, 때론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하고, 때론 그냥 사물 그 자체로 존재할 수도 있는 일종의 가능성/비가능성(probability/improbability)의 문제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위 원문의 문맥에서 〈improbable candidates〉를 〈부적절한 것/대상/후보들〉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⑤ carboni68 님께서 번역하신 위 번역문의 내용은 인용한 원문의 마지막 문장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와 전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서로 반대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마지막 문장은 앞 문장들을 부연 설명하고 있는 문장으로서 같은 내용을 말하는 동치 문장입니다. 즉, (앤디 워홀과 마르셀 뒤샹 같은 예술가들이) 평소에 아름다움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던 대상들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미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실제적으로 보여줬다는 얘기죠. 따라서 carboni68 님의 번역은 전체적으로 오역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열대 2008-05-2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다시 해보면,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그의 행위는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대상들을 특정한 미학적 거리에 배치하고, 그것들을 전혀 그럴듯하지 않음에도 그럴듯한 미적 대상의 대상으로 변모시킨 것으로, 다시 말해 가장 적합하지 않는 장소에 아름답다고 할 만한 것이 발견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qualia님의 의견에 따라본 것인데, 훨씬 매끄럽군요.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
(제가 처음에 그렇게 번역해본 것은 님이 말씀하신 반어법이 오히려 콜론 뒤에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the least를 at least로 잘못 해석한 것이었군요.ㅋ)

qualia 2008-05-23 01:46   좋아요 0 | URL

규 님, 고맙습니다. 제 의견은 그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규 님의 독자적인 의견을 더 듣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위 번역문은 조금은 나아진 듯합니다만, 여전히 덜컹거리는 문장이고, 요령부득의 비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뒷부분은 여전히 오역에 가깝고요.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그를 수도 있습니다. 비판적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규 님의 토론에 감사합니다.

coco 2008-05-2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틀린 부분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improbable 부분이 아니라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부분입니다. 이것을 '미적 거리에 포함하고'라고 번역하니까 뒤샹의 작품이 나름 아름다운 것처럼 이해되어서 뒷부분의 imprbable이 나오는 문장과 내용상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아름답지 않은' 이라는 내용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가장 뒷문장 "그럼으로써 그는 가장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법한 장소에서 일종의 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practical) 보여주었다."과도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at ... distance 관련하여 금성에이스 사전의 예문도 인용합니다.

⊙ He is usually kept at a respectful ∼. 그는 평소 경원(敬遠)을 당하고 있다.
(이 경우 at a respectable distance는 respect(존경)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로쟈 2008-05-23 00:21   좋아요 0 | URL
미적 거리, 혹은 심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는 미학 용어입니다. 어떤 실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미적인 인지와 감상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거리'를 말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책상의 사과는 심미적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식욕의 대상이죠). 하지만 식욕이 채워진 상태에서라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과를 미적인 대상으로 관조해볼 수 있겠죠. 그때 관여하는 것이 '심미적 거리'입니다...

coco 2008-05-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그럼 그것이 개념어인가요? 그렇다면 위에서 관찰자의 미적이 아닌 다른 이해를 차단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언급되는 연관된 부분이 있나요?...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죠^^

qualia 2008-05-23 01:48   좋아요 0 | URL

앗, 제가 carboni68 님의 글에 댓글을 다는 사이에 여러 개의 댓글이 이미 올라와 있었군요. carboni68 님의 견해에 대해서는 제가 위에서 자세하게 답변드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공부가 됩니다. 좋은 의견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coco 2008-05-23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의 the least likely places(가장 미적이지 않을 것 같은 장소)는 어디일까요? 바로 뒤샹의 작품 전시장이겠죠. 말하자면 그곳이 추(미의 반대라는 의미에서)해야 추한 곳에서조차 미는 발견된다는 생각을 관객들이 갖게 된다는게 뒤샹의 의도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가장 미적이지 않게끔 만들었다는 뒤샹의 의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setting~ 과 rendering~ 의 두개의 동격의 동명사구에 의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setting~ 과 rendering~ 구문은 동격의 구문으로서 뒤샹이 작품을 미적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반복입니다. aesthetic distance가 미학용어가 되면 앞뒤 문맥이 맞는지요? 미적인 감상이 가능한 거리를 확보해 주었는데 왜 전시회장은 가장 미적인 것과 거리가 먼 장소가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문장이 심오해지기 시작하면 저자의 문제거나 우리의 독해력의 문제거나 둘 중 하나일 경우겠지요.

qualia 2008-05-24 02:13   좋아요 0 | URL

완전히 잘못 이해하시고 있습니다. carboni68 님뿐만 아니라 juin 님, 그리고 아래에 다시 댓글을 올리신 규 님까지 모두 아서 단토의 이야기를 엉뚱하게 오해하시고들 있다고 저는 결론적으로 판단합니다.

① 아서 단토의 위 원문에서 〈the least likely places〉는 “작품 전시장”(carboni68 님과 규 님 견해)도 아니고, “일상적인 공간”(juin 님 견해)도 아닙니다. 〈places〉라는 낱말의 표면적 의미(즉 장소)에 얽매여 전혀 엉뚱한 오해를 하신 것입니다.

예컨대 쉽게 말하자면, 그냥 냄새(혹은 환각적 냄새)가 코를 찌르는 소변기에 불과한 것을, 마르셀 뒤샹이 예술적으로 장난을 쳐서 「샘」이라고 해서 갖다놓으니까, 감상자들이 그걸 보고 “아하, 그럴듯한데!” 하고 일종의 미적 느낌을 말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일종의 아름다움이 발현되어 나오는(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 대상을 장소 개념을 동원해서 〈places〉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places〉는 굳이 “장소”라고 하지 않고 “대상”이라고 번역해도 될 것입니다. 전시장이나 일상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② carboni68 님의 위 설명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오독을 근거로 하여 설명을 하시고 있으니, 당연히 그 다음은 말이 될 리가 없습니다. 두 개의 동명사구 〈setting ~〉과 〈rendering ~〉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도 맞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각각은 뒤샹이 소변기(혹은 일상적 기성품)를 가져와서 전시 공간 안에 배치한 행위의 측면을, 그 다음에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일상적인 것의 예술적 변용의 측면을 각각 나눠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③ 이해를 돕기 위해 문제의 원문을 우리말로 풀어서 제시해 보겠습니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 마르셀 뒤샹의 행위는 다음과 같이 해석이 가능하다.

㉡ 그는 전혀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일상적 대상들을 특정한 미적 거리 안에 새롭게 배치했다.

㉢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것들을 전혀 그럴듯하지 않음에도, 꽤 그럴듯한 미적 감흥을 자아내는 대상들로 변모시켰다.

㉣ 즉 그러한 작업은,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 모종의 아름다움이 얼마든지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제가 제시한 번역 초안은 아서 단토의 의도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해하기 좋게 하느라고 원문보다 길게 풀어서 번역했기 때문에 간결성이 떨어지긴 합니다. 혹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판바랍니다.

qualia 2008-06-01 07:56   좋아요 0 | URL

juin 님의 위 댓글에 간단하게 답변드립니다.

① juin 님 → 뒤샹이 미적 향수(저는 '심미적 쾌감' 정도가 더 와닿지만)를 문제삼았고 단토 또한 인지와 심미안을 미술작품의 본질에서 문제삼고 있는 맥락에서 볼 때, 저 문단은 부분적으로는 carboni68님의 해석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carboni68 님의 해석이 부분적으로는 맞다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곳의 논의 문맥에서), carboni68 님의 말씀 전부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맞는지 틀리는지 얘기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기본적 개념에 대한 초보적 이해조차 없이 문제의 개념들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난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② juin 님이 풀이한 해석 → “<뒤샹의 행위는 그러한 사물(오브제)들을 어떤 심미적 거리에 놓아서 새삼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긴 했는데, 다만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는 채로 그렇게 했다(미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이런 퍼포먼스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 혹은 보여주게 된 것은 미(혹은 미 개념)라 할 만한 것은 대상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긴 했는데, 다만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는 채로 그렇게 했다”고요? 이 해석은, 위 원문만 놓고 본다면, juin 님의 주관적인 확대 해석일 뿐입니다. 원문에는 역접적 표현이 없습니다(improbable의 역설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서 단토의 문맥과 상치된다고 봅니다. 뒤샹의 변용 작업은 미 혹은 아름다움의 전통적/통상적 개념에 대한 반발 · 재고 · 수정 따위를 불러왔다는 것이지, 뒤샹의 변용 작업이 (처음부터) 심미적 쾌감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뒤샹의 변용 작업이 심미적 쾌감에 호소했느냐, 호소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사후적인’ 문제입니다.

③ juin 님 → “위 서평기사에 헤겔이 언급되어 있긴 한데, 두 링크를 읽고 제가 이해한 바로는 여기서 '발현'이란 뒤샹이나 워홀이나 단토의 의도와 전혀 다르지 않나 싶은데요. 차라리 '발견'이라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 그렇지 않아도 저도 처음에는 〈발견〉이라는 낱말을 넣어서 번역했었습니다. 즉 다음과 같이 번역했었죠.

㉣ 즉 그러한 작업은,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 모종의 아름다움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댓글을 작성해 올리면, 원래의 글 저자인 로쟈 님의 전자우편함으로 댓글이 자동으로 날아갑니다. 로쟈 님의 전자우편함에서 제 댓글을 확인하면 위와 같이 번역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견〉이 적절하냐, 〈발현〉이 적절하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라는 원문을 사물을 주어로 해서 번역할 것이냐, 수동으로 할 것이냐 능동으로 할 것이냐 하는 따위의 문장 구성 문제로서, 각각의 경우에 따라 〈발견〉도 가능하고 〈발현〉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발견〉이나 〈발현〉의 용어 선택 문제와 “뒤샹이나 워홀이나 단토의 의도”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서로 번지수가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palefire 2008-05-23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로자님의 서재에 들렀는데 정말 흥미로운 번역논쟁이 진행중이군요. 전반적인 번역오류는 qualia님이 지적해주신 부분들이 맞습니다. 첨언하자면 improbable의 번역문제는 'aesthetic delerection('미적 향수'로 옮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뒤샹이 직접 했던 표현으로 "Apropos of Readymade"라는 1961년에 쓴 짧은 글에 나온 표현입니다.
"A point that I want very much to establish is that the choice of these "Readymades" was never dictated by aesthetic delectation.The choice was based on a reaction of visual indifference with at the same time a total absence of good or bad taste ... in fact a complete anaesthesia" (내가 정말로 확립하고자 했던 점은 이러한 '레디메이드'의 선택이 미적 향수에 결코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선택은 좋은 취향 혹은 나쁜 취향의 총체적인 부재를 동반한, 시각적 무관심의 반응 - 사실상 완전한 무감각 - 에 따른 것이었다).
(이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peak.org/~dadaist/English/TextOnly/readymades.html)
이 문맥을 참조할 경우 improbable candidate에서 'improbable'은 뒤샹 자신의 레디메이드에 대한 개념 - 즉 '미적 향수'에 대한 반란 -을 단토가 패러프레이징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즉 '그럴듯하지 않다/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의 주체는 단토이기 이전에 뒤샹이었던 셈이겠죠. 물론 단토는 뒤샹의 이러한 개념적 전환을 포스트모던/개념주의 예술의 맥락에서 중요하게 취급합니다.(이와 관련해서는 http://www.csulb.edu/~jvancamp/361_r1.html에 실린 단토의 다른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로자님이 지적하신 모호함의 의미가 풀립니다. 결론은 이런 맥락들이 제시되지 않고서는 지적하신 부분은 논리상 모순으로 보이기 딱 좋은 부분이므로('미적 거리'라는 개념에 대한 로자님의 지적은 맞습니다. 뒤샹이 변기를 전시장에 갔다 놨다고 해서 예술적 오브제와 관람자 사이의 미적 거리가 깨지는 건 아닙니다. 이건 지젝도 지적한 부분이죠), 역자가 각주처리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delelection은 enjoyment(향유)의 의미도 갖고 있지만 원래 delight와 동일한 의미라는 점에서 '쾌'에 해당하므로 '향수'라는 역어도 재고할 만한 대상으로 보입니다.

qualia 2008-05-24 02:26   좋아요 0 | URL

palefire 님, 도움 말씀 고맙습니다. 알려주신 글을 읽어봤는데요, 아서 단토의 글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다만, palefire 님의 오타 몇몇 개가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coco 2008-05-23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한가지, 여기서 unedifying objects는 빗자루나 변기 등을 예를 들면 피카소식으로 변형하거나 칠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는 뜻입니다.

qualia 2008-05-24 02:29   좋아요 0 | URL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위에서 설명한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coco 2008-05-23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듣고 본 것들을 저 몇문장에 투사하며 과시하는 대회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듯 하군요. 독해의 기본은 필자의 글에 대해 될 수 있는 한 내재적이어야 합니다. 내재적인 독해만으로 한계가 있을 경우 외부의 참조대상도 의미가 있겠지요. 하지만 일단은 내재적이어야 하며, 대부분의 글, 특히 유럽어의 글은 그렇게 외부대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글이 있다면 퀄리티가 나쁜 글이겠지요. 저는 뒤샹에 관심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저 간단한 문장에 대해 기본적인 단어의 의미와 앞뒤 맥락만 확인하는 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질적인 분위기인 듯하니 저는 이만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좋은 토론 되세요^^

qualia 2008-05-24 02:40   좋아요 0 | URL

웬 뜬금없는 말씀이신지요? 토론/논쟁은 본디 자기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상대방을 논박하고 논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장을 충분한 논거로써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행위입니다. 물론 상대방의 견해가 옳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상호작용 행위가 진정한 토론/논쟁이겠죠.

뜻하지 않게 서로 감정을 다치게 했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carboni68 님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열대 2008-05-23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로자님이나 qualia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미적거리'라는 말은 미학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어입니다. carboni68님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자주 사용되는 개념어까지 의심해가면서 번역을 한다는 것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토의 책을 다 읽어 보지도 않고 미리 판단을 내리는 것 역시 무리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그런데 juin님이 하신 말씀은 제가 전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거로군요. 왜냐하면, the least likely places에 대한 해석을, 저로서는 계속 그 장소가 '전시장'일 거라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게 '일상적 장소'라고 해석한다면 또 이야기가 180도 달라지거든요. 아무튼 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나저나 전에 제가 들었던 수업 중에 아서 단토의 텍스트를 가지고 번역하는 게 거의 전부였던 수업이 있었는데 그 때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머리가 뱅글뱅글도네요. ^^단토는 워낙 유명한 사람입니다. 난해한 걸로. ㅋ

아열대 2008-05-2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in이 생각하신 것처럼 해석해 본다면, 뒤샹의 행위는 특정한 미적 거리에 these unedifying objects를 놓고, 미적향수를 위해서는 improbable한 candidates를 rendering함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엔 부적당한) 일상적인 장소에서조차 아름다움따위를 발견할 수 있게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정도가 되겠네요. 흠..

qualia 2008-05-24 02:45   좋아요 0 | URL

규 님, 규 님의 추가 의견에 대해서 답변이 될 수 있는 댓글을 위 carboni68 님 글 밑에 올려 놨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토론 참여에 감사합니다.

coco 2008-05-24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장을 미적거리가 있게 세팅할 수도 (아닐 수도) 있고, 미적거리의 정도를 조절(a certain)할 수도 있나요? 그럴 수 있는게 미적거리인가요? 미적거리를 통제하고 꾸미는 법에 대한 관련 서적 좀 소개해주시죠.^^ 그리고 전시장을 세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당연히 뒤에 나오는 place는 전시장이지, place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백번 양보하여 다 맞다고 치면 뒤샹이 의도했던 바가 전시장에서 변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한 후 이후에도 집에서 변기를 아름답게 생각하라는 것인가요? 여기 참 문제가 심각하군요....

qualia 2008-06-01 06:37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의 위 말씀은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도대체 미적 거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이 무슨 논의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띄어 쓰기 좀 올바로 지켜주십시오.

① carboni68 님 → “그리고 전시장을 세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당연히 뒤에 나오는 place는 전시장이지, place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 “전시장을 세팅”하다니요? 여기서 〈미적 거리〉는 기본적으로 심리(주의)적 개념입니다. 공간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재거나 조절할 수 있는 실제의 거리 따위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미적 거리〉는 전시장 같은 물리적 공간과는 관련이 없는 개념입니다. 간접적이고 부차적인 관련은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미적 거리〉 개념은 그런 간접적 · 부차적 관련이 전혀 없이 성립할 수 심적인 거리 개념입니다.

② carboni68 님 → “그리고 백번 양보하여 다 맞다고 치면 뒤샹이 의도했던 바가 전시장에서 변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한 후 이후에도 집에서 변기를 아름답게 생각하라는 것인가요? 여기 참 문제가 심각하군요....”

⇒ 참으로 요령부득인 말씀입니다. 기본적인 개념 파악도 없으면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쟈 2008-05-2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하게 'improbable'이 오역돼 있다는 걸 지적하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게도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인용문을 다 해석해두었더라면 오해의 소지도 줄었을 거란 생각이 사후적으로 듭니다. 일일이 답글 달지 않고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인용문에 대한 제 해석은 qualia님의 해석과 대동소이합니다. 한가지 차이라면 'places'를 저는 그대로 '장소들'이라고 본다는 것뿐입니다. 'the least likely places'를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라고 해석하구요, 그건 일반적으로 '변기'가 놓여있을 장소라고는 기대되지 않는 미술 전시장이죠. 그곳에 뒤샹은 자전거 바퀴나 변기 등을 갖다놓았고, 그럼으로써 이 오브제들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미적 감흥'이 발견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로쟈 2008-05-24 21:45   좋아요 0 | URL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확률이 가장 낮은 대상으로서이긴 합니다. 저로선 미적 감흥을 인지적 충격(이것도 예술인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qualia 2008-06-01 09:02   좋아요 0 | URL

로쟈 님과 juin 님께 답변드립니다.

① 로쟈 님 → “한가지 차이라면 'places'를 저는 그대로 '장소들'이라고 본다는 것뿐입니다. 'the least likely places'를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라고 해석하구요, 그건 일반적으로 '변기'가 놓여있을 장소라고는 기대되지 않는 미술 전시장이죠. 그곳에 뒤샹은 자전거 바퀴나 변기 등을 갖다놓았고, 그럼으로써 이 오브제들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미적 감흥'이 발견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 위에 인용해 놓으신 아서 단토(Arthur C. Danto)의 원문을 놓고 볼 때, 그 내용의 내적인 논리상, 〈the least likely places〉가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장소〉 혹은 〈가장 예기치 않은 장소〉따위로서의 전시장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고 이상해 보입니다. 아름다움 혹은 미(美)가 발견되거나 발현되는(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 대상은 구체적 사물이고 작품인데, 그리고 인용 문장 전체가 그 대상/작품과 관련지어 얘기하고 있는데,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앞 문장을 같은 의미로서 재차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문장인데, 그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전시장 얘기를 한다는 것은 내적인 내용 논리상 전혀 느닷없어 보입니다. 제가 파악하는 바로는 〈~ in the least likely places〉를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정도로 해석해야 그 내적 논리에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그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용 문장 자체가 지닌 내적인 내용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해석하자면, 〈미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대상들 속에서도〉따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저자이신 아서 단토 교수님께 직접 여쭤보기로 하고, 지난 5월 25일 몇 가지 질문을 적어 전자우편을 보냈더랬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답신이 없네요.

② juin 님 → “단토의 글을 보면, 그 오브제들이 예기치 않게 '미적 감흥'의 대상이 '된다'가 아니라, 여전히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는 채 거기(미술의 장) 존재함으로써 미의 본질을 문제삼는 것이고 미술은 이제 개념과 철학의 문제이므로 그 어떤 사물이든 어떤 지각적 요소든 잠재적으로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이 아닌지요.”

⇒ 아서 단토의 얘기는 문제의 오브제들이 “여전히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는 채 거기(미술의 장) 존재”한다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아름다움과는 지극히 동떨어져 보이는 대상들이 미적 거리 안에 놓이게 되자 예기치 못한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켰고, 그 사실이 아름다움/미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재검토하게 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따라서 그 오브제들이 미적 감흥과 상관이 없이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모종의 새로운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거기 있는 것이죠.

그러한 새로운 미적 감흥이 있었기에, 즉 종래의 미 개념을 재검토 · 재정의할 만한 것이 있다고 봤기 때문에, 아서 단토가 문제의 예술철학적 저작을 쓰게 된 것 아닙니까?

로쟈 2008-06-02 13:15   좋아요 0 | URL
qualia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읽을 때는 아무래도 'places'와 'objects'를 동일시하기는 어려웠지요(저는 뒤샹의 작업이 갖는 의의를 '장소의 이동'이란 관점에서 읽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보니까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여전히 모호하긴 하지만. 단토 교수로부터 답신을 받게 되면 알려주시길...

아열대 2008-05-24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댓글이 꼭 화면에서 본 순서대로 달리지 않다는 게 신기하군요.^^
저 역시 places를 장소로 보지 않고 대상으로 본다는 건 지나친 억측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샹이 처음에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지 않았다면 이 모든 헤프닝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

qualia 2008-06-01 09:08   좋아요 0 | URL
규 님, “지나친 억측”은 아닙니다. 인용문의 내적인 내용 논리상 저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그 뜻이 정확히 밝혀지겠지만, 그래서 제가 그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재로선 제 주장이 내용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coco 2008-05-24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e least likely ... 는 beauty에 연결됩니다. 이건 시가 아닙니다.

로쟈 2008-05-24 20: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시가 아니며 어렵게 해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qualia 2008-06-01 09:14   좋아요 0 | URL
carboni68 님, 위 말씀은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라는 짧은 문장에서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동어반복이죠. 다만,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가 문제겠죠.

coco 2008-05-2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qualia 2008-06-0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아서 단토 교수님께 지난 5월 25일 밤에 몇 가지 논란점에 대한 질문을 적어서 전자우편을 보냈더랬습니다. 아서 단토 교수님의 정확한 답변을 듣고 나서 논의하고자 지금까지 댓글을 올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6월 1일 지금까지 답신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다시 전자우편을 보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수신 확인조차 안 된 것으로 나옵니다.

아서 단토 교수님께선 1924년 01월 01일 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여든 다섯 살이십니다. 혹시 너무 연로하셔서 인터넷에 접근이 뜸하시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일상적인 것의 변용』 번역판에는 로쟈 님께서 지적하신 것 이외에도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더군요. 예컨대, 227쪽 각주 6)에 〈찬사적 힘은 비언표적 힘(illocutionary force)의 한 사례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여기서 〈illocutionary force〉를 〈비언표적 힘〉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류입니다. 〈illocutionary〉의 접두사 〈il-〉은 결코 〈not; 비(非)〉를 뜻하는 것이 아니죠. 〈in, into, within; 안, 내(內), 속〉을 뜻하는 접두사죠. 수많은 국내의 화용론(pragmatics) 관련 논문, 책에서 〈illocutionary force〉를 〈비언표적 힘〉이라고 잘못 번역해 쓰고 있습니다. 그런 오류를 답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번역어조차 천차만별로 중구난방의 극치입니다. 한국의 언어학계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것일까요? 전문 학술 용어는 통일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것의 변용』 한국어판의 성과나 중요성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자 분의 노고가 크다고 봅니다. 몇 가지 오류 때문에 번역자의 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qualia 2008-06-0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 단토 교수님께서 드디어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받은 날짜 2008-06-02, 22:58). 일주일째 수신 확인이 되지 않아 아예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젯밤 혹시나 하고 제 전자우편함을 열어봤더니, 〈arthur danto Re: Dear Professor Arthur Danto, I have so...〉라는 답신 문구가 첫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한밤 환호성을 질렀더랬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저를 비롯한 토론/논쟁 참여자 혹은 참관자 분들께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제 블로그에 제 질문 편지와 아서 단토 교수님의 답신을 올려놨습니다만, 이곳의 댓글란에 그 전문을 올려서, 이 번역 토론/논쟁을 알차게 이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아무런 논평 없이 편지 원문을 그대로 올립니다. (각각의 원문에는 몇몇 오타와 탈자가 있습니다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올립니다. 단, 제 실명과 전자우편 주소는 익명으로 하겠습니다). 많이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콸리아qualia의 질문 편지 ---------------------------------

Dear Professor Arthur Danto,

(Excuse me, Sir. But I already sent you my email concerning some questions about the various interpretations of some sentences in your book three days ago, and I am afraid that you have not yet check out my email. I also suspect that my email was treated as spam automatically, and so I want to send you my email again. I hope that my email can be received safely. My email addresses are: mind◇◇◇@naver.com; ♡♡♡mind@hanmail.net. Thanking you in anticipation.)

Hi, Professor Arthur Danto. My name is H-O-N. I am a Korean and translator. I live in Seoul, South Korea. I am very pleased to email you. I have some questions about the matter of translation of the meaningful sentences in your book. Would you give me some answers to my questions?

One of the most important books that you have written in 1981,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was recently translated into Korean by Professor H. Kim, Cheonan University. I congratulate you on the publication of Korean edition of your precious book.

By the way, the heated debate over the interpretation of some sentences of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is now going on in a Korean blog site. I am participating as a leading member in this interesting debate.

The sentences in your book that we are now enjoying debating on their correct interpretations are as follows: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I have some questions about the correct interpretation of the important words/concepts in the above sentences:

(1) What do “these unedifying objects” refer to? In my view, the meaning of “these unedifying objects” seems to be everyday objects that are not usually thought to give us any aesthetic delectation. Here, I interpret the word “unedifying” as ‘not evoking any aesthetic experience in our minds’ or ‘not wring any aesthetic feelings from us’. Is my interpretation corret? Other debater argues that “unedifying” means ‘undisguised’. Which one do you mean? I want to know what meaning you intended to express by the word “unedifying”.

(2) In the debate among us, the most intensively discussed problem is what the proper meaning of “improbable candidates” is. I suspect that the word “improbable” should entail antinomy or paradox that in the above context everyday objects can not only be the mere simple ordinary objects that usually give us no aesthetic enjoyment but also the probable art works that give rise to aesthetic delectation when set at a certain aethetic distance. In other words, it seems to have paradoxical double meanings that oppose each other. Some argue, however, that “improbable candidates” just means what is not suitable for aesthetic delectation. But I do not think so. What do you think about this problem?

(3) what is the exact meaning of “the least likely places”? Do “places” mean galleries or museums in the above sentences? Many of us think so. But I do not think so. I regard this word “places” as equivalent to ‘commonplace objects’. What is the correct interpretation?

We are very confused with your highly profound book. We need your help. I am very happy to look forward to your kind answers.

With best wishes,

H-O-N

▷ 아서 단토 교수님의 답장 --------------------------------------

Dear H-O-N,

Thank you for your kind letter, and for taking the trouble to write. I
realized when I re-read the sentence in your letter, that it is at once
high condensed, and at the same time rather casual, which was my style
at the time I wrote the book, and probably still is.

It is obviously bout Duchamp's readymades, which I took for granted were
unedifying. They were - and are - very familiar objects, with very
familiar uses, at least in American everyday life.
he snow shovel is meant to clear the ground of snow, the grooming comb
is meant to comb the hair of household pets etc. They are not
"edifying." in that they do not instruct, uplift, or make better persons
of us.

"Setting at an aesthetic distance." makes use of a familiar concept in
aesthetic theory, the idea of of "aesthetic distance" - it was an
expression first used by E. Ballough in a famous essay - and it means
displaying the object in such a way that there is no inclination to use
it, but merely to look at it. The notion of distance is metaphorical.
You would probably find Balloughh's essay in any anthology of Anglo
American aesthetics.

And the reference to beauty in "the least likely places" means: once we
set the object at an aesthetic distance, i.e., once we cannot use it,
then we might begin to see that the object is beautiful. The urinal that
Duchamp tried to exhibit in 1917 might have been set at an aesthetic
distance by virtue of its placement in an exhibition space, like a
gallery.There it would be unavailable for use, and one might be
impressed with the beauty of the form - something that we would be blind
to if we simply entered a men's room and urinated, without thinking of
the aesthetics of the receptacle.

The sentence was meant to be a little satirical. In fact the whole book
is full of satirical or ironical passages. This is one.

Thanks you for your interest, and your enthusiasm!

Good luck!

Arthur Danto

군말: 제가 아서 단토 교수님께 ‘서울’에 산다고 했는데요. 사실, 저는 지방 도시에 삽니다. 외국인한테는 한국의 수도를 말해줘야 감을 잡을 것 같아서, 편의상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산다고 한 것이랍니다.

로쟈 2008-06-03 13:21   좋아요 0 | URL
qualia님 해석이 맞네요. 저자의 설명을 들으니 명쾌합니다. 답변을 얻어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침마다 신문을 손에 집어들긴 하지만 안팎으로 '좋은 소식'을 접한 지 오래된 듯하다. 특히나 쇠고기 파문과 관련한 기사들을 읽노라면 매번 기가 차고 어이가 없다(다른 얘기를 늘어놓을 기력마저 다 빼놓는다). 귀갓길에 듣자 하니 라디오의 9시 뉴스에서도 언급이 되던데, 이번 협상은 한마디로 '판타스틱'한 협상이었다. 다만 우리 입장이 아니라 미국 정부와 축산업자들의 입장에서. 아침나절에 읽고 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던 기사를 옮겨놓는다. 대국민 담화문이 내일인가 발표된다고 하는데, 한겨레의 내일자 칼럼 제목을 빌면, '저 꼼수들을 어찌할 것인가' 심히 우려되고 걱정된다. 누구 말대로 '정권 교체'가 이렇게 대단한 건지, 이렇게 통제불능인 건지 새삼 놀랍다...

경향신문(08. 05. 21) 24개월 미만도 “멕시코 아쉽다”…30개월 이상도 “한국 환상적”

미국 축산협회가 지난 3월 멕시코가 24개월 미만 미국산 송아지만 수입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자 아쉬움을 표시했다가 한국 정부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허용하자 “환상적인(fantastic) 합의”라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을 앞세운 미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정부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원칙을 지킨 반면 한국 정부가 ‘백기 항복’한 데 대해 미국 축산협회가 대조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대만·일본에 앞서 멕시코와의 형평을 요구하며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20일 경향신문이 미 축산협회의 소식지를 확인한 결과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 지난 4월18일 미국 축산협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한국 쇠고기 시장의 개방에 박수를 보낸다”고 밝혔다. 특히 축산협회는 “이처럼 ‘환상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까지 협상대표단은 물론 조지 부시 대통령과 의회 지도자들의 노력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한·미 쇠고기 협상 결과를 ‘환상적’이라고 표현했다.

앤디 그로세타 축산육우협회장은 “지난 2월 (이명박 대통령 경축사절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얼마나 많은 한국 소비자들이 양질의 미국산 쇠고기를 슈퍼마켓이나 음식점에서 접하고 싶은지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멕시코가 미국과 협상을 벌인 끝에 지난 3월27일 24개월 미만 사육용 미국산 송아지만 수입하기로 한 데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시했다. 미 축산협회는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은 2003년 멕시코 정부에 의해 수입이 중단된 이후 오랫동안 계속된 민감한 이슈”라며 “멕시코가 OIE 가이드 라인을 조만간 받아들이길 바란다”고 밝혔다. 멕시코보다 우리 정부가 먼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한 데 대해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우리는 언제까지 2등만 할 것이냐. 멕시코와 우리 정부는 입장이 다르다”고 말했다.(강진구기자)

한겨레(08. 05. 22) 저 꼼수들을 어찌할 것인가

지난 석 달이 십 년처럼 느껴지게 했다는 이명박 정권은 역시 딴 나라 정권인가 보다. 압도적 다수의 우리 국민이 아무리 거부해도 소수의 미국 축산업자 이익을 위해 실제론 달라진 게 없다는 ‘추가협의 서한 교환’ 이벤트까지 벌이니 말이다. 사실 추가협의는 하나의 외교 이벤트였을 뿐, 근본적 문제 해결은커녕 합의문의 글자 하나 바꾸지 못했다. 국제통상 전문가, 시민단체 그리고 야당이 ‘이명박 정부는 끝내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고 국민을 기만하며 우롱했다’고 평가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은 ‘얻을 건 다 얻었다’고 당당하니 꼴사납다.

미국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광우병 발생 국가다. 인간광우병 환자도 발생했다. 광우병을 일으키는 원인물질 프리온은 소의 뇌와 척수 등 특정 부위에 집중된다. 또한, 프리온은 소의 나이가 많을수록 더 많이 축적된다. 광우병 걸린 소의 나이는 대부분 30개월 이상이었다. 광우병 걸린 소의 증상 가운데 하나는 잘 서지도 못해 주저앉는 ‘다우너’이다.

미국은 도축하는 모든 소에 대해 광우병 검사를 하지 않는다. 소 2천 마리 중 한 마리꼴로 표본 검사를 할 뿐이다. 1년에 도축 된다는 3500만 마리 가운데 3498만 마리는 검사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에선 광우병이 의심되는 ‘다우너’까지도 학교 급식용으로 납품됐다. 광우병 위험을 줄일 사료정책은 축산업자의 반발에 밀려 시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은 20개월 미만만 수입한다. 이제까지 우리나라도 30개월 미만의 살코기만 수입했다. 미국 쪽의 반복된 협약 위반 때문에 지금까지 수입을 중단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사안을 단순화하고 쉽게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그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보고받고 어떻게 결론을 내렸을지는 분명해 보인다.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려 했던 정부는 어느 날 졸지에 ‘30개월 이상’과 ‘위험부위’는 물론 ‘검역주권 포기’까지 선택했다. 이제 그 과정이 조속히 그리고 소상하게 규명돼야 한다. 이와 유사한 시행착오가 빚어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대운하, 수돗물 민영화, 미국식 건강보험제도 도입, 시장주의 교육정책, 재벌 위주 경제정책, 수도권 중심의 국토개발정책, 공기업 민영화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실패할 가능성이 큰 정책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파동을 통해 국민은 깨닫고 있다. 그동안 눈과 귀를 막고, 건강한 판단능력을 마비시킨 것이 누구인지, 어떤 정치 세력과 어떤 언론이 진실로 국민 건강과 안전과 권익을 생각하는지를.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터득하고 있다. 인터넷 댓글, 촛불집회, 펼침막 설치, 탄핵서명 등. 가시적으로 드러난 서명 숫자만도 130만명을 넘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상대방은 꼼수에 능하다. 그건 ‘재개발 헛공약’은 남발하면서 불리한 ‘대운하 사업’과 ‘쇠고기 협상’은 꼭꼭 감추는 선거 전략에서 이미 드러났다. ‘물류’에서 ‘관광’을 거쳐 ‘치수’로 대운하 사업 목적도 그때그때 바꾸듯 쇠고기 수입조건에 대한 변명도 눈치껏 바꿔가며 그 순간만 모면하려 했다. ‘진정성’은 실종되고 스스로 ‘못 믿을 정부’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모든 문제를 단순히 ‘소통’의 문제로 치부하려 든다. 꼼수에 동원할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립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과 ‘진실을 오도하지 않는’ 언론이.(김상종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08.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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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05-22 13:37   좋아요 0 | URL
이번에 언론에 제기능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2등 할거냔 소린 정말. 어쩌라구요.ㅡ,.ㅜ

로쟈 2008-05-23 00:23   좋아요 0 | URL
이들이 5년간 대한민국을 끌고 간다니까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털세곰 2008-05-25 16:59   좋아요 0 | URL
그래서 하루빨리 저들을 결단내야 합니다. 어떤 아는 사람은 블라디에서 나욤느이 우비짜 한 명 고용해 오는데 천 불 미만이라며 경비 모으자고 하더군요. 물론 극단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글쎄요... 전 심정적으로는 지지합니다. 한 명이 희생해 대한민국 절대다수 국민이 살 수 있다면 전 지지합니다.

털세곰 2008-05-25 17:04   좋아요 0 | URL
물론 작금의 사태는 우리의 영도자이신 불도저 '그 분' 혼자만의 생각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주변엔 수많은 인의 장막이 쳐저있고 또한 그 분께 경제적 이윤관계, 정치적 득실관계로 얽힌 수많은 또 다른 사람들이 있겠지요. 심지어 물건너에도. 그런 세력 모두의 표징이 바로 츠키야마 아키히로이지요. 5천만 국민을 상대로 한 일상적인 기만, 독선, 거짓, 비양심, 국가와 민족, 국토를 배신하는(또는 준비중인) 일련의 작태... 최소한의 보즈메지예라도 절실합니다.

로쟈 2008-05-25 21:45   좋아요 0 | URL
'나욤느이 우비짜'에서 웃어야 할지 참.^^; 갹출한다면 저도 보태겠습니다...

털세곰 2008-05-27 02:09   좋아요 0 | URL
최소 비용은 10불입니다. ㅋㅋㅋ

2008-05-29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 )의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길, 2008)이 번역돼 나왔다. 초판은 1973년에 나왔는데, 그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원제는 '흥미로운 시대')(2002)를 내기 직전인 2001년에 다시 펴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이 주로 반란과 혁명 등에 두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1917년생이어서일까?). 겸사겸사 소개된 그의 책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둔다.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미완의 시대- 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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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
길(도서출판) / 2008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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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디트- 의적의 역사
에릭 홉스봄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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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에릭 홉스봄 지음, 김정한.정철수.김동택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8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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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5-21 09:15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어제 도착한 책이 홉스본의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였는데....우연의일치

로쟈 2008-05-21 17:03   좋아요 0 | URL
혹은 코드가 비슷한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0:35   좋아요 0 | URL
<밴디트>는 예전 <원초적 반란>으로 나온 책인가요? 그리고 표지의 사나이는 판쵸 비야인가요?

로쟈 2008-05-22 01:18   좋아요 0 | URL
<밴디트>는 제가 안 갖고 있어서 판초 비야인지는 모르겠고요, <원초적 반란>과는 다른 책입니다. 이 양반이 '반란'이나 '혁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14   좋아요 0 | URL
아..다른 책이었구만요.반란이나 혁명 하니까 생각나는데 <혁명의 시대> 뒤의 문헌해제에 아이티 혁명을 다룬 제임스<블랙 자코방>을 소개했더라구요.사실 아이티 같은 곳은 구미 학자들이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우리 홉스봄 옹은 역시...

로쟈 2008-05-24 14:32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이 역사쪽으론 상당히 밝으시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27 01:00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 트로츠키 주의자들이 은근히 많은지 블랙 자코방도 번역되어 있더라구요.

로쟈 2008-05-28 21:5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블랙 자코뱅>(필맥, 2007). 588쪽이라니 입이 벌어집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29 23:34   좋아요 0 | URL
공지영 씨가 한 때 트로츠키 주의자였다는 설이 있던데...사실인지 궁금해요.그냥 번역만 했을까요? 저한테 주간지 기자 근성이 있는지 이런 것 알아보는 게 재밌더라구요.

로쟈 2008-05-29 23:39   좋아요 0 | URL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을 번역한 적이 있죠. 트로츠키주의자라... 글쎄요...

노이에자이트 2008-05-30 00:52   좋아요 0 | URL
에릭 홉스봄은 스탈린-트로츠키 논쟁을 어떻게 봤는지 궁금해요.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 2권에서 중국혁명을 둘러싼 스탈린 트로츠키 갈등을 어떻게 봤는지 찾아봤는데 의외로 분량이 적어서 실망했어요.다른 사람 신세를 지는 수 밖에요.

로쟈 2008-05-30 23:29   좋아요 0 | URL
<혁명가>는 빨리 읽히는 책은 아니어서 '어떻게 봤는지' 찾아보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30 23:50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정독하는 수 밖에요.
 

아직도 피해가 다 집계되고 있지 않은 중국 쓰촨성의 대지진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말이 없다. 부실로 지어진 학교건물 때문에 학생들의 희생이 더 커졌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이번 참사는 자연의 대재앙을 미리 예견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관련되는 게 아닌가 싶다. 희생자들에게는 그저 애도의 뜻을 표할 따름이다. 이번 지진과 무관하게 중국에 대한, 그리고 중국소설에 관심을 점차 갖게 되는데, 최근에 눈길을 끄는 중국 현대소설들이 소개되어 오랜만에 소설에 대한 독서욕을 부추긴다.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으로 나온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와 <화장실에 관하여>가 그 책들인데, 한겨레21에서 읽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참고로 말하자면, 줄거리도 소개되고 있다). 나는 칙릿 따위가 아니라 이런 소설들이 소설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한겨레21(08. 05. 15) 혁명보다 섹스

소설 시장이 시들하다. 몇 년째 상종가를 치던 일본 소설마저 매물이 줄어든 모양새다. 하루키와 류를 제치고 현해탄을 넘어오던 일본 신세대 작가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래서인지 최근 중국 소설 출간이 늘어나는 추세는 출판사들의 고뇌를 떠올리게 한다.

섹스를 통해 깨달은 혁명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중국 소설은 문화혁명 이후의 작가들, 특히 위화, 쑤퉁, 모옌 등을 중심으로 소개돼왔다. 올해부터는 이들을 벗어나 ‘알려지지 않은’ 중국 현대작가들이 소개되고 있다. 웅진지식하우스는 5월부터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을 내놓기 시작했다(일반적으로 중국의 ‘당대문학’이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즉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문학을 말한다). 일단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1만원)와 <화장실에 관하여>(예자오옌 지음, 조성웅 옮김, 1만1천원)가 나왔고 한동, 왕강, 판샤오칭, 마위웬, 류전원 등의 작품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출판사 쪽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 위주로 선별했다고 밝혔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2005년 광저우의 문예지 <화청>에 발표된 직후 중국 당국에서 판금 조처를 당하며 유명해진 책이다. 중국 문단에 꽤 큰 충격을 몰고 왔는데, 문화혁명을 과장된 언어로 비꼬는 ‘괴탄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은 판금당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마오쩌둥의 명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성애의 최음제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기에 인민해방군의 모범 병사 우다왕은 사단장 사택에서 취사를 맡는 공무분대장으로 임명된다. 이 자리는 우다왕에겐 간부가 되는 출세의 사다리다. 그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신조를 철썩같이 받들고 마오 주석의 어록을 줄줄이 외우며 사단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가지 방해물만 없었다면 우다왕은 계속 이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그가 채소를 따거나 계란탕을 끓일 때 땀에 젖은 등을 은밀히 쳐다보는 사단장의 젊은 아내, 류렌만 없었다면.

류렌은 우다왕에게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글이 적힌 팻말이 식탁이 아닌 다른 곳에 놓여 있으면,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한다. 팻말이 계단 아래에 올려져 있던 날, 우다왕은 얇은 잠옷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드러나는 눈부신 허벅지의 기습을 받는다. 이때부터 우다왕은 류렌에 끌리는 자신의 본능을 혁명 의지로 이겨보려는 승률 제로의 전쟁을 시작한다. 마침내 류렌이 자신을 사단장 막사에서 내치려는 날 밤, 우다왕은 류렌의 아름다운 몸을 끌어안는다. 용서받지 못할 두 연인은 사단장이 베이징에 가 있는 동안 모든 문을 잠그고 알몸으로 섹스를 거듭하며, 마오의 모든 ‘성물’을 때려부수는 기행을 벌이게 된다.

홍보 카피처럼 <색, 계>보다 위험하고 <화양연화>보다 매혹적인지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이 소설은 무척 재미있다. 작가는 혁명의 구호를 성애의 구호로 타락시키면서 그것이 얼마나 텅 빈 기호인지를 폭로한다. 혁명은 시대의 가해 행위였다. 우다왕이 매일처럼 외우고 다닌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중국 민중의 빈곤과 계급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우다왕이 혁명을 믿는 이유는 숭고한 대의 때문이 아니라 밥과 출세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을 통해 이 진실을 발견한다. 혁명의 시간은 지독한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옌롄커는 ‘한국 독자들께 보내는 편지’에서 “(이 소설은) 저의 창작에서 그렇게 돌출된 위치를 차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운명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놓이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인상적인 고백이다.

<화장실에 관하여>는 1980년대 중반에 등단한 예자오옌의 중·단편을 묶었다. 알려진 대로 1980년대는 중국 문학이 문화혁명의 잔해를 헤치고 도약하던 시대다. 문화혁명 이후의 소설은 혁명의 상처를 핥는 것부터 시작한다. ‘상흔 문학’과 ‘되돌아보기 문학’(반사문학)이 그것이다. 이어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과감한 형식 실험을 시도하는 ‘선봉문학’이 등장했다. 한국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위화와 쑤퉁의 출발점도 선봉문학이다. 선봉문학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주로 개인의 일상을 냉정하게 묘사하는 ‘신사실주의’도 나타났다. 예자오옌의 소설들을 통해 신사실주의 소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표제작 ‘화장실에 관하여’는 블랙 유머가 돋보인다. 고등학교(중학)를 졸업하고 하방해 공장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화자. 같은 공장에 양하이링이라는 어여쁜 아가씨가 들어온다. 어느 날 그녀는 동료들과 상하이 연수에 나선다. 연수 마지막날 상하이 시내를 구경하던 어여쁜 양하이링은 심한 요의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인심 나쁜 상하이에선 화장실을 찾기가 힘들다. 처음엔 말하기조차 부끄러워하던 그녀는 미친 듯 “화장실이 어딨어요, 어딨나구요!”라고 소리지르는 ‘수위’에까지 이르고 만다. 결국 그녀의 바지 한 부분에서 조금씩 물이 떨어진다.

이 사건은 양하이링에게 일생의 수치요 상처였다. 그때, 공농병 대학생(대학에 뽑힌 농민과 노동자 자녀들) 시대는 가고 대학 입시가 부활했다(1977년). 양하이링은 미친 듯 공부해 대학에 합격한다. 화자도 이 시기 그녀와 같이 공부해 대학에 들어간다. 양하이링이 대학에 간 이유가 촌뜨기에겐 소변마저 허락하지 않는 중국 대도시의 화장실 때문이었다면, 화자가 대학에 간 이유는 전혀 다른 화장실 때문이다.

중국 현대사와 화장실의 관계
문화혁명이 가장 치열했던 시절, 원래 지식인이던 화자의 부모는 우파로 몰렸다. 그들은 매일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자백서를 써야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신이 청소한 화장실 한 곳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호통을 듣고 달려간다. 그런데 똥통에서 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달걀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막대기로 힘껏 밀자 달걀은 데굴데굴 굴러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 여성 간부가 일을 보다가 자신의 오줌이 달걀을 때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뛰쳐나왔다. 누군가 “해방 이전, 우리 빈민들은 배불리 먹지 못했다. 이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방향이다!”라고 썼다. 계급의 적을 찾지는 못했으나 결국 사람들이 달걀을 조사하기 위해 맛을 보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화자가 기를 쓰고 대학에 입학한 것은 우파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예자오옌은 화장실을 통해 문화혁명의 일상과 그 이후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연가’는 어느 중산층 부부의 파경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고, ‘추월루’와 ‘대추나무 이야기’는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점철된 역사를 개인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옌롄커의 소설 첫머리. “삶의 수많은 진실들은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발견한다. 중국 소설은 다른 질감의 고통과 절망을 보여준다. 문화혁명의 상처, 톈안먼에서 목도한 이상의 붕괴, 자본주의와 빈곤, 애국주의로 결탁한 국가와 자본, 그리고 삶. 중국 소설은 우리가 거쳐 지나간, 혹은 한 번도 도달하지 않은 역사의 대지에서 자신의 향기를 뿜고 있다. 그것을 음미하는 건 침향을 맡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다.(유현산기자)

08. 05. 20.

P.S. 더불어 귀갓길 전철에서 읽은 지진 관련기사 하나도 옮겨놓는다. 32년전 탕산의 대지진과 이번 지진을 비교하면서 중국 당국의 대응 방식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자연의 재앙은 변한 게 없지만 그간에 중국은 많이 달라졌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의 신속하고 적극적인 현장지휘는 무릇 정치가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경향신문(08. 05. 19) 탕산 대지진과 원촨 대지진

1976년 7월28일 새벽 3시42분. 중국 허베이성 탕산시 일대를 규모 7.8의 강진이 강타했다. 베이징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인구 70만명의 조그만 공업도시는 단숨에 폐허로 변했다. 중국은 당시 학교마저 문을 닫았던 문화대혁명 기간 중이었다. 실권을 잡고 있던 ‘4인방’은 지진 발생 사실조차 숨겼다. 외부에 진실이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79년이었다. 지진 발생 2개월 만에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고, 덩샤오핑이 마오의 뒤를 이어 제1인자가 된 화궈펑을 제치고 실권을 잡은 뒤였다. 중국은 24만2769명이 숨지고 16만4851명이 부상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탕산 대지진이 일어난 지 32년 만인 지난 5월12일, 이번에는 쓰촨성 원촨현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규모는 7.9로 탕산 대지진을 능가했다. 탕산 대지진과 다른 점은 대낮인 오후 2시28분에 발생한 것이다. 학교마다 오후수업이 한참 진행 중이어서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또 탕산은 평지였던 반면 원촨 일대는 히말라야 지진대 옆에 자리잡고 있는 고산지대여서 구조작업이 한층 힘들었다. 구조대원들이 피해지역에 진입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 희생자가 늘 수밖에 없었다.



탕산 대지진 때와 가장 다른 점은 중국 지도부의 적극적인 대응이다. 베이징 지질대학 출신의 원자바오 총리는 대지진 발생 1시간 만에 전용기를 타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기자는 처음에는 산간지방에서 일어난 단순한 지진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원 총리가 현장에 갔다는 것을 보고 일이 심상찮음을 알았다. 원자바오 총리는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에서 지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촨, 두장옌, 베이촨 등 재해 지역을 직접 찾아가 진두지휘했다.



지금은 수리공학과 출신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중국 국영방송인 CCTV는 지진 발생 1시간 뒤부터 24시간 재해방송에 들어가 지진 발생 1주일째인 지금까지도 계속해 인명 구조 및 복구작업 소식을 생방송으로 전하고 있다.

중국의 적극적인 정보 공개로 중국 국내에서 온정의 손길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유언비어가 나도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2003년 4월 사스 발생 당시 사실 자체를 숨겼다가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결국 사람은 사람대로 죽고, 망신은 망신대로 당했던 교훈을 제대로 살린 셈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제는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진 측면도 있지만 말이다.

올해는 78년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30주년을 맞는 해이다. 난국을 맞아 중국 전체 국민이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개혁·개방정책의 성과이다. 개혁·개방 결과 경제가 급성장했고, 국력 증강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 과감하게 건국 이후 최대의 국난을 외부에 공개토록 한 것이다. 당장은 어렵지만 13억 중국 사람들은 ‘한 집안 식구’가 됐다. 닫고 감추는 것보다는 열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홍인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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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5-20 11:52   좋아요 0 | URL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를 읽었기 때문에 참 반가운 페이퍼예요. 그런데 형광펜으로 칠하신 부분의 인용처럼 저는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던데요. 이레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옷을 벗은 채로 지내며 모든 성물을 때려부수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었지만 말입니다.

류렌을 이겨내려고 할때, 류렌의 유혹을 이겨냈다고 믿었을 때의 우다왕에게 기다리고 있는건 류렌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 뿐이더군요. 그 쓸쓸함과 좌절은 곧 모든 열정앞에 지워지고 말지만.

로쟈 2008-05-20 15:04   좋아요 0 | URL
벌써 읽어보셨군요.^^ 재미란 게 편차가 있으니까요. 저는 6월에나 읽어볼 참입니다...

소경 2008-05-20 23:02   좋아요 0 | URL
<인민을 위해 복무하거라>, <색계>, <화장실에 관하여> 그리고 <원자바오>도요. 다 읽고 싶네요. 얼른 레포트건 발표건 시험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었으면..... 쪼금만 월급은 포틀래치처럼 책으로 불쌀라야 버려야 겠네요 ^^:

로쟈 2008-05-20 23:07   좋아요 0 | URL
우리의 가여운 월급들입니다.^^;

philocinema 2008-05-21 16:49   좋아요 0 | URL
성을 소재로 했지만 "왜설적"이기보단 "예술적" 감흥을 주는 소설 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성애"가 만인에게 강요되는 "혁명"의 당위를 뛰어넘어 버리는 바를
문학적으로 잘 표현해낸 것 같더군요.

여하튼 어제 반나절 읽는동안 오금이 저려와도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가진
꽤 괜찮은 소설이었습니다.

일독을 권할만 합니다.

로쟈 2008-05-21 17:03   좋아요 0 | URL
사실 제목만으로도 읽을 만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입니다.^^

섬나무 2008-05-21 22:06   좋아요 0 | URL
갑갑한 현재에서 로쟈님의 취향에 걸맞는 품격있는 위락도구로 보이네요.
모든 것을 책으로 해결하는 로쟈님!^^
출구가 아닌 것 같은 그 출구가 가장 안전한 출구 같습니다.
책에 의한 출구. 앎에 의한 출구.

로쟈 2008-05-22 00:49   좋아요 0 | URL
문을 살짝 열어보는 만큼의 '출구'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0:45   좋아요 0 | URL
<우상과 이성>에선 당산 지진 당시 현지 중국인들이 보여준 질서정연한 모습을 칭찬했는데 이젠 당산 지진도 이런 식으로 이번 지진과 비교하는 기사가 올라오는군요.당산에 대한 우리의<기억>역시 달라졌기 때문일까요?

로쟈 2008-05-22 00:47   좋아요 0 | URL
24만이 죽었는데, 질서정연했다는 건 넌센스 아닐까요? 그냥 망연자실 해서들 앉아있었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08   좋아요 0 | URL
그런 대참사였는데도 이웃을 돕는 모습에 감명 받았다고 해서 리영희 선생이 그 뒤로도 많이 인용한 사건이었어요.리 선생은 중국이 개방정책을 취한 뒤로 그런 공동체 정신이 없어졌다는 글을 쓰기도 했지요.

로쟈 2008-05-22 01:14   좋아요 0 | URL
'당산 시민을 위한 애도사' 말씀이신가요? 그 공동체 정신의 이면이 지진의 발생 사실조차 비공개로 숨긴 거라면 무엇을 애석하게 여겨야 할지 모호해지는 듯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5-22 01:32   좋아요 0 | URL
글쎄요.이제 그런 참사를 숨긴 사실에도 눈을 돌리자는 생각도 하게 되었으니 우리의 시각이 더 균형잡히게 되었다고 해야 되겠죠? 여하튼 당산 지진은 리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리 선생은 당산 지진 당시 언론 통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았죠.

로쟈 2008-05-24 14:33   좋아요 0 | URL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좌편향(이상화)도 있었지요...
 

국내외적으로 어수선하고 심신도 피로하여 좀 쉬려고 했는데, 다른 날도 아니고 5.18에 올라온 기사 하나가 눈에 밟힌다. '국민화합을 위한 특별기도회'에서 조용기 목사가 했다는 설교를 요약해주고 있는 기사다. 한국의 대형교회들 또한 광우병 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새삼 일깨워준다(달리 종교가 아편이겠는가).

노컷뉴스(08. 05. 18) "광우병 괴담은 사탄의 계략"

조용기 원로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18일 서울 시청 앞에서 열린 '국민화합을 위한 특별기도회'에 설교자로 나서 "광우병 괴담은 국민에게 불안감을 주기 위한 사탄의 계략"이라고 지적하고 "대통령을 믿고 따르며 기도로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다음은 '두려움과 형벌'이란 제목으로 전한 조용기 목사의 설교 내용이다.

■ 설교 요약
성경의 '욥기'에 보면 '어느 날 두려워하고 걱정하니 재앙이 임했다'고 말한 구절이 있다. 욥은 많은 재산과 재물도 잃고 온몸에 종기도 났다. 그때 욥은 "나의 두려워하는 것이 나에게 임하고...고난만 남았구나"라고 탄식했다. 이것이 바로 도적질하는 마귀가 하는 짓이다. 마귀가 좋아하는 것은 '부정적인 상상'이다. 욥도 얼토당토않은 부정적 생각하다가 그대로 재앙이 일어났다. 마음에 무서워하고 불안해하면 그것이 생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땐 "원수귀신아 물러가라!"라고 대적해야 한다. 바로 오늘처럼 모여 기도하며 대적해야 한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여 간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오늘의 여러분의 간구를 통해서 축복이 오게될 것이다. 우린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해야한다. 예수가 있으므로 희망이 있고 두려움은 없다.

한국에 '광우병 공포'가 몰아닥치고 있다. 매스컴에 의해 과장되고 있다. 광우병 공포는 가정과 생활에 공포를 일으키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공포가 들어가면 이성이 마비되고 패배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광우병 공포가 매스컴을 통해 이렇게 야단법석인가? 국민의 불안만 가속되고 있다. 한우고기까지 못 먹고 있다. 병보다 마음에 일으키는 공포가 더 무서운 것이다. 광우병 괴담은 병 자체보다 공포를 일으켜 우리를 패배시키려는 마귀의 계략인 것이다. 광우병 괴담은 또, 미국과 우리나라를 이간질하려는 정책이다. 우리는 미국과 교역하며 잘 살게 된것이다. '미국 물러가라!'고 하면 우리가 낙후될 뿐이다.

그리고, 광우병으로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것은 현 정부를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들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이다. 민주주의 절차에 의해 대통령 뽑았으면 지켜봐줘야 한다. 이같은 배후에는 특정 방송과 신문이 편파 보도로 반미사상, 정권 무력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 방치하면 재앙이 온다. 그럼, 우린 광우병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나? 전문가와 과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뜬 소문에 의한 소문, 근거없는 괴변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 제가 아는 바로는 '전문가들은 미국소 먹어서 광우병 걸릴 확률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이 괜찮다면 그런 줄 알아야한다. 내가 아는 미국 변호사가 '미국의 많은 한국교포가 미국 소고기를 먹었는데도 광우병 걸린 사람 하나도 없다'고 했다.

광우병 괴담에는 배후가 있다. 투쟁이념을 가진 단체들이 국민을 선동하지 말아야한다. 특정 매스컴은 왜 옛날 필름 보여주고 또 보여서 불안감을 가중시키는가? 초, 중학생이 무엇을 아는가? 그들을 충동해서 밤에 벌벌떨며 나오게 한 것이 참된 이념인가? 우리는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우리가 대통령을 안믿고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대통령이 된지 석달도 안됐는데 어찌나 비난을 하는지 민망해서 볼 수가 없다. 이는 시집온 지 석달도 안된 며느리에게 왜 아들을 낳지 못하냐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1년은 보고 이야기 해야 한다.

예전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전에 우리 군을 파병하기 전에 기도부탁을 해왔다. 박 대통령은 "파병을 하면 우리의 많은 젊은이가 죽을텐데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나라를 생각하면 파병해야겠고 젊은이를 생각하면 하지 말아야겠으니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렇게 예수 믿지 않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국민을 걱정했는데, 하물며 예수 믿는 장로가 국민을 못살게 할 리가 있겠는가? 대통령을 믿고 기도로 밀어주는 여러분들이 돼야겠다.

아마 날 욕할 사람들 많을 것이다. 나는 어떤 편도 아니다. 하나님 편이다. 우리 민족의 안정을 위해 현 정부를 짓밟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이다. 오늘 주님과 대통령의 지도력을 믿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길 기원한다.(조혜진 기자)

08. 05. 19.

P.S. 설교 요약을 읽으면서 한국교회의 고질인 '미국 제일주의' 혹은 '종미주의'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데, 오전에 읽은 기사에도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고뉴스(08. 05. 18) '종미(從美)파'가 쇠고기 파국 불렀다

쇠고기 협상은 들춰내면 들춰낼수록 그악하다. 협정문 곳곳에 독소조항이 진을 치고 있고, 그 독소조항을 들여다보면 SRM(광우병위험물질)이 그득하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해도 우리가 수입 중단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협정을 맺은 것은 나라의 주권을 포기한 것이나 진배없다. 거기에 협상 과정에서 영문 번역이라는 치명적 실수까지 더해져 도대체 협상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런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또한 정부가 쇠고기 협상의 유일한 근거로 내세우는 OIE(국제수역사무국) 기준도 철저하게 준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SRM이 들어간 꼬리곰탕이나 티본스테이크, 수육(삼차신경절)을 먹을 가능성이 커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이번 쇠고기 협상은 이명박 대통령과 국무위원 그리고 청와대 내 이른바 ‘종미(從美)파’ 참모들이 주도한 작품이다. 청와대 곽승준(국정기획), 김중수(경제), 김병국(외교안보), 박재완(정무), 이주호(교육과학) 그리고 사퇴한 박미석 전 사회정책수석까지 모두 미국 박사 출신으로 이들은 한미동맹 강화를 외교·안보의 핵심가치로 여기고 있다. 국무위원들 가운데 강만수(재정경제), 이윤호(지식경제), 김성이(보건복지), 정종환(국토해양) 장관등이 대표적인 미국 유학파들로 이들은 교육·의료·환경 등 각종 정책 입안과정에서 미국식 모델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1급 이상 핵심 보직자들의 절반이 해외에서 유학이나 연수를 했고, 그중에 72%가 ‘미국파’다. 특히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권 핵심 멤버들은 전 정권에서 ‘동맹파’로 불리는 사람들보다 한 발 더 나가 있는 ‘종미파’ 사람들로 한미동맹 강화를 통해 국제관계 뿐만 아니라 남북문제 나아가 우리의 국방과 경제적 문제도 풀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한 마디로 ‘미국 제일주의’다.

쇠고기 협상은 미국 우선, 미국 제일주의이라는 정책의 연장선상에 비롯됐다. 지난 정부부터 수년을 끌다시피 해 온 한-미 쇠고기 협상이 협상시작 불과 일주일 만에 끝나버린 상황은 국민들에게는 놀랍기 그지없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내막을 살펴보면 이명박 정부는 출범 전부터 한미관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쇠고기 문제를 화끈하게 풀어주려 했고 이를 총선 뒤 끝낼 공산이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국민들에게 경제살리기에 대한 높은 기대만 잔뜩 품어준 상태에서 단시간 내 가시적인 효과를 내려면 한미FTA 비준을 연내 관철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쇠고기 문제를 될 수 있는 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조급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검역 주권’과 ‘국민 생명권’은 도외시 됐다.

지난 8일 청와대 수석들은 이례적으로 청와대 춘추관을 찾아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익명으로 처리해 줄 것을 부탁한 이들 청와대 참모들은 “쇠고기 문제가 정치사회적으로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것에 대해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광우병 문제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며 “송구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측의 쇠고기 문제 해결로 미국에서 연내 한미FTA 비준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퇴임을 목전에 둔 부시 대통령과 행정부가 FTA 비준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오바마와 힐러리는 한미FTA에 반대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이런 여러 현실적 조건들을 다각적으로 계산하지 않은 채 일방적이고 단순하게 ‘모 아니면 도’식으로 접근, 사태를 그르쳤다. 주체성이 결여된 이러한 ‘대미 추종’은 쇠고기 협상과 같은 굴욕적이고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과도한 ‘종미주의’는 남북관계도 틀어지게 만들었다. 정권 출범과 함께 남북대화는 단절됐고, 우리는 북한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는 사이 미국은 북한과 더욱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 조만간 북핵문제가 완전히 타결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미국은 다음달부터 50만 톤의 식량을 북한에 지원키로 했다. 우리는 매년 해왔던 식량 지원을 중단했는데 오히려 미국은 지원하는, 이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북한은 ‘통미봉남(미국과 통하고 남한은 봉쇄)’ 수순에 돌입, 미국과만 상대하면서 남한을 배제시키고 있다. 이제야 이명박 정부는 안절부절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는데 이것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쇠고기 협상의 후폭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듯, 1개월 앞 정세도 파악 못하는 정권의 무지와 철학의 빈곤함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무모한 대미(對美) 질주는 이웃한 중국에게도 거리감을 심어주고 있다. 현재 중국은 이명박 정권이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MD(미사일방어계획) 참여 계획 등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적극편입하려는 움직임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이 모두 정권 핵심에 ‘자주파’가 사라짐으로써 생긴 일들이다. 자주파와 동맹파가 힘의 균형을 유지할 때 이명박 정부가 표방하는 ‘실용주의’도 가능하다. 이명박 정권이 쇠고기 파문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비극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김성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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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5-19 01:53   좋아요 0 | URL
한시름 놨습니다. 30개월 이상 수입분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순복음교회에서 처리해 줄 껍니다..^^

로쟈 2008-05-19 10:34   좋아요 0 | URL
기도로 SRM을 물리치려는지...

웽스북스 2008-05-19 01:55   좋아요 0 | URL
심각하네요 -_-
안그래도 오늘 갔던 모임 중 한 분이 오늘 새문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거기 장로님께서 기도하시길

사탄이 우리 아이들을 빨갱이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뭐 이런 기도를 하셨다고해서 깜짝 놀랐는데

오호 통제라입니다-_-

멜기세덱 2008-05-19 03:20   좋아요 0 | URL
그래도 사탄이 맹박이 보단 낫네요.
광우병 걸려 죽는것보단, 빨갱이 되는 게 낫지.....암.....ㅋㅋ

로쟈 2008-05-19 10:35   좋아요 0 | URL
이런 행태들 때문에 한국 교회에 대한 혐오를 지우기 어렵습니다...

마늘빵 2008-05-19 09:09   좋아요 0 | URL
어이쿠 저분은 심심할때마다 한번씩 나와서 종교집회를 여신다니까요. -_- 좀 이제 집에 들어가지.

로쟈 2008-05-19 10:33   좋아요 0 | URL
단테의 <신곡>에 보면 교황들도 다수 지옥에 가 있죠...

Arch 2008-05-19 09:15   좋아요 0 | URL
친미가 아니라 종미군요. 짜고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로쟈 2008-05-19 10:33   좋아요 0 | URL
대한민국 기득권층의 현주소 같습니다...

반딧불이 2008-05-19 10:5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저분이 MB의 늙은 불독이군요. "우린 광우병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나? 전문가와 과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 도대체 이분의 전문가와 과학자는 누군지....

stella.K 2008-05-19 11:38   좋아요 0 | URL
까깝하네요. 다윗왕을 가르쳤던 나단 선지자 같은 목사는 없는가 보네요.
장로란 이유만으로 목사가 같은 편이 되면 안되는 건데...ㅜ.ㅜ

로쟈 2008-05-20 22:40   좋아요 0 | URL
가재는 게편이죠...

리기다소나무 2008-05-19 16:44   좋아요 0 | URL
광우병괴담은 사탄의 괴략이란 말은 소를 수입하는 건 명박이니까 명박이가 하나님??
사탄이랑 맞서서 이겨라 30개월된 쇠고기먹고 명박이 이겨내삼~
30개월쇠고기먹고 명박이 이겨내삼~ 30개월쇠고기먹고 명박이 이겨내삼~

로쟈 2008-05-20 22:40   좋아요 0 | URL
할렐루야!..

섬나무 2008-05-19 18:45   좋아요 0 | URL
종교란 저렇게 천박하게 쓰려고 인간이 개발한 정치도구지요.대체 나라가 어떻게 되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어요. 6월 4일이 보궐선거라던데 투표권자들이 미친 정부에 브레이크를 걸어주기를 고대해보는데, 정말 갑갑한 현실입니다.

로쟈 2008-05-20 22:39   좋아요 0 | URL
종교의 다른 용도도 물론 있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좀 천박하게 쓰이는 것 같습니다...

나의왼발 2008-05-19 20:02   좋아요 0 | URL
조용기는 목사도 아니고 악질 종교 사기꾼입니다. 제가 총신대 신학대학원장 하셨던 분을 아는데 그 분도 조용기는 절대 기독교 목사가 아니고 종교 팔아먹는 사기꾼이라고 욕을 하시더군요. 조용기=문선명=조희성=정명석

로쟈 2008-05-20 22:39   좋아요 0 | URL
흠 그렇다면 한국에는 목사님보다 사기꾼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순오기 2008-05-19 20:30   좋아요 0 | URL
흠~ 교회에 장기방학(?)중인 요즘, 오히려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낀답니다~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면서도 아직은 목사나 교회를 섬길 마음이 없다지요!
기독교 목사들의 아전인수격인 성경 들이대기에 20년 교회생활에 방학을 선언했죠.
무조건적인 믿음과 기도로, 광우병이나 사탄 빨갱이가 다 물러가면 좋겠군요.^^

로쟈 2008-05-20 22:38   좋아요 0 | URL
무교회 신앙도 있다니까요...

canon 2008-05-20 00:26   좋아요 0 | URL
조용기의 이런 발언도 한심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조용기는 이단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4차원의 영성이라는 것은 사이비 종교인 신사상 운동(쓰레기 책인 론다 번의 [시크릿]이 추종하는 바로 그것)의 주장을 그대로 베낀 것입니다(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 교리적으로 이단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23년 전에 조용기의 신학이 이단임을 밝힌 책도 발행되었습니다.

로쟈 2008-05-20 22:36   좋아요 0 | URL
이 대회 자체는 한기총에서 주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조목사가 이단이라면 한기총도 이단이 되는 걸까요?). 그의 발언은 정통/이단이라는 교리 문제 차원이 아니라 상식의 차원에서 보고 싶습니다...

군자란 2008-05-20 17:54   좋아요 0 | URL
저는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많은 손해를 준다고 생각합니다.진화생물학이나 현재 물리학관련된 책들을 읽다보면 아직까지도 사실 함부로 판단한다는 것에 많은 두려움을 느낌니다.
종교도 나름대로 현재 가장 큰 권력을 가진것도 단지 무지한 백성들의 책음으로 돌리는 것도 상당히 부담이 되고,종교도 나름대로 효용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용기 목사가 사기꾼이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사실을 큰그림에서 봐야지 작은 것에 집착하다보면 어느 새 진실은 없고 공허함만 남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5-20 22:34   좋아요 0 | URL
판단은 어려운 것이지만 동시에 불가피한 것이죠. 이번 발언으로 조목사의 삶 전체를 판단할 의도나 필요는 제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발언의 부적절함과 어이없음을 지적할 수는 있는 것이죠. 신자들은 다르게 생각할는지 몰라도...

canon 2008-05-22 08:57   좋아요 0 | URL
조용기가 이단인 것은 사실이며 얼마든지 증명 가능한 것이고, 한기총이 무식해서 조용기의 정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조용기는 상식의 차원에서 봐도 문제있는 인간이고, 기독교의 차원에서 봐도 문제있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로쟈 2008-05-23 00:25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둘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기독교 차원에서는 그렇게 큰 차이가 있나 보군요(하지만 당사자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