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 현실과 번역의 길'(http://blog.aladin.co.kr/mramor/2246155)에 덧붙였던 글인데, 분량이 길어져서 따로 제목을 붙인다. <권력과 지성인>(창, 1996)과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의 몇몇 오역에 대한 코멘트이다.



먼저, <권력과 지성인>의 오역 한 대목만 지적한다(제목의 '지성인'도 '지식인'이라고 옮겨져야 한다). 영국 BBC의 리스(Reith) 강좌(1993년)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내가 관심을 갖는 대목은 4장 '전문직업인과 아마추어'이다('전문가와 아마추어'라고 옮기고 싶다). 책에 대한 요약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 2003)의 1부 3장을 참조.

 

 

 

 

사이드는 서두에서 국내에도 많이 소개돼 있는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 레지(스) 드브레(번역본은 '레기 드브레이 Regis Debray'라고 옮겼다)의 <교사, 작가, 명사: 프랑스의 지식인들>(1979)의 내용을 따라가는데, 드브레에 따르면 20세기 프랑스 지성사는 지식인들의 주 활동무대를 기준으로 몇 단계로 나뉜다. 1880-1930년까지는 소르본느대학이 활동거점이었고 대부분의 지식인이 대학교수였다. 그리고 1930년 이후 대략 1960년까지는 '신프랑스평론' 같은 출판사/잡지가 활동의 주무대가 된다. 이에 대한 서술이다.



"대락 1960년까지 사르트르, 드 보바르, 까뮈, 모리악, 지드, 말로와 같은 저술가들은 제한 없는 영역에 걸치는 저술활동, 자유에 대한 신조, 그리고 1960년대 이전에 있었던 성직자적 엄숙성이라는 것과, 그러한 것과 대조적인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요란스러운 광고의 중간쯤 성격을 지닌 그들의 담론으로 인해 사실상 교수직을 박탈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118-9쪽)

사르트르 등의 저술가들이 "사실상 교수직을 박탈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원문은 이렇다: "Until roughly 1960, such writers as Sartre, de Beauvoir  ... were in effect the intelligentsia who had superseded the professorate because of ..." 즉 대학 바깥의 지식인이었던 이들이 1930년까지 대세를 이루던 교수들, 곧 강단 지식인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걸 번역본처럼 엉뚱하게 옮겨놓으면 "잘못된 번역서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엉터리로 아느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번역서'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특히나 저작료까지 지불한 번역서일 경우엔 오히려 수용에 '걸림돌'이 된다(오늘도 조금 보다가 한숨을 내쉰 지젝의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같은 경우가 유감스럽게도 드물지 않다). 사이드의 지식인론을 집약하고 있는, 때문에 분량에 비해서 상당히 유익한 <지식인의 표상>이 제대로 다시 번역되기를 바란다...



말이 나온 김에, 사이드가 생각하는 인문학과 인문주의에 대한 성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에서도 몇몇 오역들은 교정되면 좋겠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본문 첫 페이지의 이런 대목: "세 번째로는, 비서구 문화권에서 성장한 경계인이자, 사이문화인bicultural인 제가 보통의 토박이 미국인이나 '서구인'으로 불리는 이들에 비해 관점이나 전통 같은 것에 특히 민감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17쪽) 원문은 "Thirdly, I grew up in a non-Western culture, and, as someone who is amphibious or bicultural, I am especially aware, I think, of perspectives and traditions other than those commonly thought of as uniquely American or 'Western'."

이 책 역시 미국의 문화와 인문주의 등을 주제로 한 2000년과 2003년의 연중 강연들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인문주의의 영역'을 테마로 한 첫 강연문에서 사이드는 자신이 '미국의 인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몇 가지 든다. 인용문은 그 세번째 이유인데, '에드워드 사이드'란 특이한 이름이 암시해주듯이('에드워드'는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를 딴 것이고 그의 아랍인 성이 '사이드'이다) 그가 영국 지배하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랍인(팔레스타인인)이면서 예루살렘과 카이로(이집트)의 영어 학교를 다니고 미국대학에서 영문학 교수가 된 자신의 성장배경이 그것이다. 자신이 '경계인'이고 '바이컬추럴'('2개 국어 사용자'를 뜻하는 '바이링구얼'을 떠올려보라)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서구 외에 다른 전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

번역문은 "'those commonly thought of as uniquely American or 'Western'" 다음에 'perspectives and traditions'가 생략돼 있다는 걸 놓침으로써 '독특하게 미국적이거나 서구적이라고 간주되는 관점이나 전통"을 "보통의 토박이 미국인이나 '서구인'으로 불리는 이들에 비해"라고 오역했다. 사이드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관점이나 전통 이외의(other than) 관점이나 전통에 대해서도 자신이 특별히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예컨대, 그는 '아랍문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미국인'이다!). 때문에 그의 관심은 "미국 인문주의의 유럽적 선조들 그리고 서구의 시야 '바깥'으로 여겨지는 것이나 그 바깥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오역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신뢰를 잠식한다(사실 사이드를 번역하는 일은 어렵다. 그의 문장들은 나도 별로 즐기는 편이 못된다). 또 다른 사례로 동료교수이자 비평가 라이오넬 트릴링(1905-1975)에 대한 언급('리오넬 트릴링 Lionel Trilling'이라고 옮긴 것에서 역자가 '초면'이란 걸 알 수 있다). 저명한 문학비평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트릴링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거의 없다. 찾아보니 아주 옛날에 <문학과 사회>(을유문화사, 1960)가 번역된 정도('라이오넬 트리링'으로 표기됐고, 역자는 양병탁). <자유로운 상상력(The Liberal Imagination)>의 번역이다(두산백과사전을 따른 제목인데, '진보적 상상력'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제 말년의 동료인 리오넬 트릴링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컬럼비아의 인문학 수업은 학생들에게 독해의 상식적 기초를 제공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으며, 후에 학생들이 읽은 책들을 잊어버린다 하더라도(많은 학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적어도 같은 책을 잊어버리는 셈 아니겠냐고 말입니다."(20쪽)

여기서 "제 말년의 동료 리오넬 트릴링"은 "my late colleague Lionel Trilling"을 옮긴 것인데, 'late'는 '고(故)'란 뜻이다. 나라면, "제 동료였던 고(故) 트릴링 선생님"이라고 옮기고 싶다. 그리고 '상식적 기초'라고 옮긴 건 '공통의 기초(common basis)'를 잘못 옮긴 것이다. 트릴링이 말하기를, 대학의 인문학 강좌가 학생들에게 공통의 독서목록을 제시하므로 나중에 학생들이 읽은 책을 다 잊어먹더라도 '똑같은 책'을 잊어먹은 것이 아니겠는가?(이게 교양교육의 의의다!).

"이 말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사회과학이나 과학 분야의 기술적인 글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읽지 말자는 주장에 반하는 말이었으므로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었습니다."(20쪽) 원문은 "This did not strike me as an overpowering argument, but, as opposed to not reading anything except technical literature in the social sciences and sciences, it was compelling nevertheless."(4쪽)

이 대목에서 'overpowering'을 그냥 '인상적' 정도로 옮긴 것은 인상적이지 않다. '반대주장을 압도할 만한'이란 뜻이다. 어떤 반대주장인가? 인문학 무용론 내지는 교양교육 무용론이겠다. 중간의 삽입구를 제거하면, 이 문장은 This did not strike me as an overpowering argument, but it was compelling nevertheless."로 요약된다. 트릴링의 주장은 overpowering 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compelling 하기는 했다는 것. 번역문에는 이런 대구가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다시 옮기면, "그것은 제가 보기에 인문학을 옹호하는 압도할 만한 주장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전문서만 읽으면 된다는 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내세웠던 트릴링은 어떤 인문주의를 실천했나? "그들 가운데 몇몇 -특히 트릴링- 은 자주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에 비판적이었으며, 때로는 불온하게, 물론 세간의 이목이나 그들의 학계 동료와 학생들의 의견이 그랬었다는 것이지만, 전문용어나 과도한 전문가주의 없이 인문주의적 삶이 닿을 수 있는 가장 풍요롭고 가장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21쪽) 원문은 "Some of them -Trilling in particular- frequently spoke critically about liberal humanism, sometimes even disquietingly, although in the public eye and in the opinion of their academic colleagues and students, they represented the humanistic life, without jargon or undue professionalism, at its richest and most intense."

컬럼비아대학출판부 주최의 강좌였던 만큼 컬럼비아대학의 인문학 전통에 대한 '자화자찬'이 좀 들어간 대목인데, 트릴링을 필두로 컬럼비아'학파'의 경향을 지목하고 있다. 말의 좋은 의미에서 '보수적'이고 '고지식했다'고 이해된다. '자유주의적 인문주의(liberal humanism)'는 자유분방하면서 관용적인 인문주의겠다. 가령 청바지를 입고 인문학을 강의한다든가, 교양 독서목록에 최신 문학작품을 집어넣는다든가 하는. 트릴링 등은 그런 태도에 대해서 자주 비판적이었다는 것. 그런 보수적 태도와 '불온하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disquietingly'는 내가 읽기엔 '걱정스러울 정도로'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disquietingly'는 앞에 나오는 'spoke'에 걸린다(로카드님이 지적해주셨다). 

다시 옮기면, "특히 트릴링 선생님을 비롯하여 몇 분은 자주, 심지어 걱정스러울 정도로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에 대해 비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또 대학 동료나 학생들이 생각하기에는 전문용어 들먹이기나 같잖은 전문가주의와는 거리가 먼, 가장 풍요로우면서도 가장 강렬한 인문주의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흠, 이젠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인문주의적 삶'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드문 것 아닌가 싶다(전문용어나 들먹이면서 같잖은 전문가 행세를 하는 이들은 드물지 않지만)... 

08. 0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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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8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8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ose가 perspectives and traditions를 받는 대명사고 그 뒤의 thought는 분사인가요?

로쟈 2008-08-18 23:23   좋아요 0 | URL
네, 명사라면 복수형이 와야겠죠...
 

지난주에 필요 때문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창, 1996)을 뒤적거렸는데, 이미 알고 있었던 바이지만 한심한 오역들이 속출하여 짜증스러웠다. 원제가 '지식인의 표상(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s)'이지만 '오역의 표상'이라고 해도 무방한 책이다. 이에 대한 맛보기 지적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 2003)의 1부 3장을 참조할 수 있다. 책은 서경식 교수도 '영향과 격려를 많이 받은 책'이라고 토로하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938368), 한국어로 이 책을 읽고 영향과 격려를 받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참고로, 일본어본과 중국어본의 제목은 모두 <지식분자론>이다). 젊은 세대가 어제의 야구 한일전에서처럼 일본을 '이기고자' 한다면 이런 대목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혹시나 해서 서평을 검색해보니 수년 전 <말>지의 기사가 뜨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제목 그대로 '구조화된 졸속 번역, 부실한 한국 인문학'에 대한 지적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게 씁쓸하다.  

말(2001년 2월호) 구조화된 졸속 번역, 부실한 한국 인문학

최근 대학원생들이 발간한 무크지 <모색>은 사제지간이 아니라 도제가 되어버린 대학원생의 실태, 그리고 교수와 학생간 침묵의 카르텔을 폭로했다. "번역을 제자들에게 시키는 것은 그나마 애교로 봐줄 만하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 논문, 심지어 책까지 대부분을 제자들이 집필하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수천만원짜리 프로젝트의 대부분을 수행한 대학원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수고비 명목의 몇십만원에 불과하다."

'허리 아래' 이야기는 누구도 공개하지 않듯, 이 공공연한 비밀은 지금껏 우리 모두를 '비밀결사대'로 만들었다. 결사대란 한사코 비밀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 현실의 상처부위가 내뿜는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폭로했다. 몇 사람(필경 폭로한 사람이리라)이 다칠 테고 문제의 교수는 도덕적인 질책으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도의적 책임을 지고 교수직에서 물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뒷말이 나올 것은 뻔하다. "왜 나만 갖고 이러냐. 그런 교수가 어디 한둘이냐." 맞다.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한둘이 아닌 상황을 만드는 문화 혹은 구조'로 옮아간다.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의 대역비리는 공모적인 것이 아니라 착취관계에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석박사과정 학생 가운데 지도교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느긋한' 처지는 거의 없다. 출신학교가 평생을 따라다니고, 이후 학문적 행로의 대부분을 결정하는 '순종주의' 풍토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양 철학자 김상봉씨는 이런 현실에서 건실한 학술번역이 나올 수 없다고 꼬집는다. "박사 후 연구원 과정에 지원한 제자에게 지도교수가 학술서적 대역을 요구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의 장래를 쥐고 있는 교수의 요구를 부당하다 해서 거절할 수 없는 입장으로 난처해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학생이 책임 있는 번역을 하리라 보기는 힘듭니다."

"왜 나만.... 어디 그런 교수가 한둘이냐"
지난해 언론과 여론을 들끓게 했던 영어공용어화론의 중심에 있던 소설가 복거일씨는 "모국어와 이별한다는 것은 당장은 쓰라린 일이지만, '큰마음 먹고' 후손을 위해서 한국어를 버리자"고 진심 어린 걱정을 털어놓았다. 영어에 주눅들어 있는 이들에게는 다만 '엽기적인' 농담으로 들리겠지만, 논쟁의 거품을 걷으면 언어기능주의의 뼈대가 드러난다. 당시 복거일씨의 주장에 『신동아』2000년 9월호에 반론을 제기했던 정시호 교수(경북대 독어교육과)가 "언어를 '가지고'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사고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학술서적의 번역을, 해당 외국어를 '좀 하는' 학생들에게 맡긴 교수들은 언어기능주의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다.

혹은 그들이 '나쁜' 교수이기 때문인가. 그런 면도 없지 않다. 만약 '학자적 양심'이란 것이 있다면 최소한의 양심이 없는 교수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법학전공 C교수가 십 수년 전에 출간한 『위대한 법사상가들』은 일본어로 된 논문을 학생들에게 번역시켜 출간했다는 사실은 이미 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다. 자연히 오역 투성이에 한글도 아닌 일본어식 표현이 곳곳에서 튀어나오지만, 이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C교수는 최근에도 번역서를 자신의 저작으로 둔갑시키는 등 학자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학계의 평가가 이미 퍼져 있다.

오역문제가 공론화된 사례는 물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도서출판 창. 1996)이 번역상의 오류로 인해 완전히 재번역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다.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을 번역해 국내에 사이드를 최초로 소개한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과)는 지난 1996년 『교수신문』 지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오역사례를 나열하고 재번역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자인 당시 전모 서경대 교수와 서모 고려대 강사의 반론도 있었다. 지상논쟁은 끝났고, 오역사례는 회자되고 이슈를 낳아 책임 있는 학술번역의 중요성은 학계에 어느 정도 환기되었다.(실제 번역을 맡았던 이는 이름이 실렸던 교수가 아니었다고 한다.)

오역으로만 따지자면 우리 시대의 스승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학문적 존경의 최상급에 위치한 고 함석헌 선생 역시, 일본어 중역으로 인한 과실의 표적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이니, 오역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선생의 간디와 칼릴 지브란 번역본은, 일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배운 적 없는 해방 이전 식민지 시대에 공부했던 60, 70년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지금껏 검증된 결정적인 오역사례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에서 'trade union'을 '노동조합'이 아니라 '무역협회'로 번역한 경우는 번역작업이 사회현실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는 가장 희극적인 사례이다.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에서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one-dimentional man)이 '평면적 인간'으로, 제랄드 그라프의 '문학에 대항하는 문학(Literature against itself)'이 '자신이 적이 되어가는 문학'으로 오역되는 등, 이들 오역의 심각함은 원서가 갖는 날카로운 현장감과 정치성이 두루뭉수리로 희석되어 버리는 데 있다.

잘못된 번역서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유종호 교수(연세대 국어국문학과)는 번역의 기술적인 어려움에 주목하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다급하게 요구해서 졸속으로 번역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하는 경우 일어와 영어 중역으로 번역을 망치는 경우도 있지만, 번역 자체가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도 간과할 수 없지요."

하지만 '번역은 반역'이라는 문학작품 번역의 원초적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번역이 어렵다는 사실에 호소하기에는 국내 학술서 번역의 오류는 이미 정도를 넘어서 있는 실정이다. 인문학 강의실에서 교재로 번역서를 쓰다가 실패했던 경험을 토로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고, 번역서를 '해독'하다 결국 원서를 찾아 확인절차를 거치는 낭비는 흔한 사례이다.

번역은 반역 아닌 졸역, 오역인 현실
오역과 졸역의 문제가 영세한 우리의 출판현황과 얽혀 있다는 지적은 비약이 아니다. 특히 인문학 번역서는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저렴한' 비용으로 단기간에 번역되기 일쑤다. 자연히 번역자는 출판사와의 게임에서 제2의 창작자가 아닌 '계약직 노동자'에 불과한 위상을 갖게 될 뿐이다. 굵직한 오역사례가 자주 발생하는 '현대미학사' 역시 그러한데, 전문적인 학술서의 경우 번역자에게 출판의 대가로 인세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저작권 로열티의 일부를 부담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지난해 윤건차 교수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당대)를 번역한 장화경 성공희대 교수는 번역자가 대접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출판사에서는 두꺼운 학술서적을 두세달 만에 번역해달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엔 꼼꼼히 번역하기 힘들어요. 게다가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한 학술서적의 번역료를 형편없는 인세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재판을 찍을 때 인세를 챙겨주질 않는 일도 있습니다."

최근 한 일본문학 전문번역가는 출판사가 15일만에 책 번역을 요구하는 황당한 경험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판사를 악덕기업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출판사와 번역자 모두 척박한 학문현실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학술서적은 대학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서 의무구매하도록 돼 있다. 책값이 비싸고 소장에 적합한 도서관용 하드커버와, 저렴하고 휴대하기 편한 시장판매용 소프트커버의 두 종류로 출판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떻든 미국의 학술전문 출판사는 좋은 책만 출간한다면 '싸고 빠른' 번역자에게 맡겨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몰두하지 않아도 적자는 면한다.

번역에 손놓고 있는 교수들에게 일말의 면죄부가 있다면, 그건 번역을 연구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학계의 풍토다. 니체의 저서를 영어로 번역한 월터 카우프만이 니체 전문학자로, 롤랑 바르트를 영어로 옮긴 수잔 손탁이 미국에서 바르트에 관해 일가를 이뤘다고 인정받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리나라에도 리처드 로티를 줄곧 번역해온 김동식 육사 교수가 있지만, 김 교수의 작업을 학문적인 성과로 인정하기보다는 성가시고 고된 작업을 대신 해내서 감사하다는 정도이다.

오역문제를 지적해온 박홍규 교수는 일본과 비교하면서 번역작업의 학문적 가치를 재차 역설한다. "일본에서는 산스크리트어같이 희귀한 언어로 된 저서나 경전의 번역이 탁월할 때는 석박사 학위 논문으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책임 있는 번역판이 구비돼 있기 때문에 원전을 인용할 때도 번역서의 페이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번역물이 '지적인 공유재산'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지요."

박교수는 졸속한 국내 번역실태에 분기탱천 '번역 윤리'를 언급하고, 급기야 '번역감시단'을 만들자는 주장을 펼칠 만큼 졸역으로 인한 지적태만과 허위의식이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우리말이 학문언어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이미 학계에 팽배해 있다. 김상봉씨는 우리말이 근대적인 학문언어로 성장하는 계기를 번역작업의 활성화에서 찾고 있다. "번역은 우리말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장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국어의 발전이라고까지 봅니다. 졸속한 번역은 우리말을 발음기호로 전락시켰습니다. 가능한 한 우리말을 개발하려고 애쓰고 끊임없이 학문적인 말을 길러내는 것이 철학(인문학}에서 번역작업이 할 일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가 지난해 발간되면서 그간 잠수해 있던 문제의식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번역의 문제조차 근대성이라는 체에 걸러야 하며, 알다시피 우리의 근대라는 체는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번역자 임성모 씨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다. 지금에 와서야 '저항으로서의 번역'(윤지관)이 회자되지만, 그것 역시 삼중 번역된 근대의 상처를 끌어안고 시작해야 할 프로젝트다.



주체적 번역으로 근대성 이룬 일본
반면 일본은 서양 근대의 산물을 일찌감치 철저히 번역해 모방했다. 그 결과 이제 주체적 모방으로 나아가는 활주로를 뚫어낸 것이다. 일본사상사 전공자인 강재언 교수의 구분법에 의하면, 18세기 초반에 네덜란드어 번역으로 난학(蘭學)이 활성화된 사실을 두고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의 갈림길이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2백년 번역 역사를 거치면서 일본은 근대를 형성하고 완성했으며, 번역에서도 '주체적 번역'이라는 역설적인 단어의 배합을 허용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를 증명하듯 얼마 전에는 한 학자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마치 소설처럼 번역해 대단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랜 번역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번역을 괄시하면서 원서와 저자의 권위를 숭배하는 국내 학계에서는 언간생심 생각지도 못할 시도다.

이제 오역(욕?)의 역사를 마감할 시기라는 의식은 합의에 이르렀다. 한길사에서 출간하고 있는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처럼 정전들을 '번역'하여 우리의 고전으로 '변형' 시키는 기초작업이 절실하다. 학문 식민주의, 원서 숭배를 벗어나면서 창조의길을 모색하는 출발점은 오히려 철저히 '번역의 시대'를 겪어내는 데 있다. 그것만이 서구 근대의 오류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한다면 학술번역의 막중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이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보며 다시 새길 교훈이다.

제도적으로 학술번역을 육성할 필요도 있다. 다행히 그런 움직임도 미약하나마 포착된다. 학술진흥재단에서는 올해 번역지원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교육부에서 지난달 초 발표한 '2001 학술연구 지원 기본계획'에 따르면 동서양 학술 명저와 고전 번역사업 지원비가 10억원으로 확대됐다. 다만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섣부른 당위를 내세워 우리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에만 집중투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제도 바깥에서 가능한 것이 인문학이므로 제도적 개선은 출발이 될지언정 도착점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이옥진기자)

08. 08. 17.

P.S. 이후의 상황과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재작년에 나온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연속해서 참조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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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tuepeak 2008-08-17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 교수의 저작 목록이 제법 긴데 몇 개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냥 다양한 주제를 놓고 요약 정리한 수준밖에 되지 않던데, 저런 사정이 있었군요..

로쟈 2008-08-17 23:53   좋아요 0 | URL
법학 교재들의 표절 시비도 있었지요...

book소리 2019-01-13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제목의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각각 출간했더군요. 이런 경우 괜찮은 책이라 훗날 다시 출간했거나 이전 책이 번역상 문제가 있어서 번역을 다시하여 재출간 했을 거 같아 두 책을 동시에 펼쳐두고 비교해보면 재밌겠다 싶어 둘다 책꽂이에서 꺼내 들었습니다. 98년 아무 곳이나 펼치고 몇 줄 읽었는데 제가 영어문장을 읽고 이해했을 때의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것이라는 대명사를 그대로 옮긴다거나 더욱 더 추구한다 같은 부분에서는 도대체 무얼 더 추구하는가 싶어 추구의 대상을 앞뒤로 수색했네요. 그래서 같은 부분을 12년 판에서 찾아보고 다른 부분도 이런 방식으로 몇 군데 비교읽기를 해보니 처음엔 거친 번역에 실망했다가 나중에는 원서를 구해서 직접 해석해보고 두 권과 비교해보면 영어실력이 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번역을 꼼꼼하게 하고, 자국어로 글을 잘 엮어 내는 문화가 확고히 자리 잡을 때야 비로소 한국의 학문 역량이 세계와 견줄 준비가 될 것 같습니다. 번역자에게만 문제가 있다면 번역자만 비판하면 되는데 번역 관련 전반적인 토대가 문제라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거 같다는 게 문제죠. 영어 강의를 한다느니 외국인 학생을 유치한다느니 등등의 억지 코스프레 글로벌 대학을 운운하는 거 보면 처음에는 씁쓸하다가 종국에는 쓸쓸해지더군요. 카우프만이 여러 생각이 들게 하다가 로 선생님 블로그까지 오게되었네요.
 

촘스키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 하워드 진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 촘스키가 언어학자이면서 정치평론가라면 하워드 진은 역사학자이면서 운동가이다(촘스키의 표현을 빌면 "하워드 진은 한 세대의 양심을 변화시켰다"). 아직 그의 대표작 <미국 민중사>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애독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국내에 소개되는 추이는 유심히 지켜보는 편이다. 이번에 나온 책은 신작 에세이 모음인데,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듯하다(게다가 요즘 우리에게 딱 필요한 제목이다!). 그의 책이 올해만 해도 세 권째 출간됐으니 아마도 가장 지명도 있는 지식인의 한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겸사겸사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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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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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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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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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하워드 진.도날도 마세도 지음, 김종승 옮김 / 궁리 / 2008년 10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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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8-19 16:05   좋아요 0 | URL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요즘 통 책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어서 엄두가 나지는 않지만요.

그런데 혹시 바사미언 '만의' 텍스트도 읽어보신 적 있으세요? 궁금해서...

로쟈 2008-08-19 16:32   좋아요 0 | URL
아뇨.^^ 단독 저서로 소개된 책은 안 뜨는데요...
 

주말 북리뷰들을 둘러보다가 최근 관심사와 무관하지 않은 책 한권에 눈길이 갔다.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살아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원제는 'Getting a Grip: Clarity, Creativity, and Courage in a world gone mad'이니까 '꽉 틀어쥐기'쯤 될까? 직역하면 '미쳐가는 세상에서의 투명성, 창조성, 그리고 용기'가 부제다. '틀어쥐다'의 목적어들인지? 여하튼 원제에 '민주주의'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리뷰를 읽어보니 그와 무관하지도 않은 책이다. '민주주의의 기술'을 설파하는 책이라니까. 대충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하워드 진의 추천사가 발목을 잡는다(그의 추천사는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긴 하지만). "모든 세대에는 사상, 행동, 정신의 측면에서 선구자가 되는, 몇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탐욕과 권력의 낡은 장벽들을 깨고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높게 비춘다. 프란시스 무어 라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한번쯤 손에 쥐어볼 생각이다(게다가 저자가 공저자로 참여한 <굶주리는 세계>(창비, 2003)나 <희망의 경계>(이후, 2005)가 저자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기도 하고).

한국일보(08. 08. 16) 민주주의도 '기술'이다

한국은 늘어가는 올림픽 메달 수처럼 풍성한 민주주의를 길러 왔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 발전을 거듭해 왔을까?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산 쇠고기 파문은 우리가 과연 일상적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자괴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촛불들'이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크게 봐서, 저 같은 고민은 글로벌하다. 삶의 공공성이 망실돼 가는 지금, 두 괴물 사이에 끼어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세계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주범은 선거(민영화)와 시장(상품화)이다. 민간 자본이 선거 시스템에 개입하고 시장과 적극 연루돼 민주주의를 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범지구적으로 위기를 몰고 오는 주체는 정치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 조지 W 부시, 딕 체니 등이거나, 글로벌을 외치는 시장경제주의자들에게 있다. 9ㆍ11 이후 6년 동안 미국의 화학산업계는 안전 척도를 거부했고, 부시의 백악관과 유착해 있던 전 석유 로비스트는 기후 변화를 얕보도록 공식 보고서를 편집하기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민주주의가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최적화'해낼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검토할 때다. 민주주의도 기술(art)이다. 에리히 프롬의 명저 <사랑의 기술>을 떠올리게 하는 책은 민주주의론의 최신 버전이다. <굶주리는 세계> 등의 책으로 국내에서도 낯익은 생태정치학자인 저자는 "어떤 기술도 학습될 수 있듯 민주주의 역시 배움을 통해 끝없이 향상돼 가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민주주의란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 작동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장을 효과적으로 펴 나가기 위해 동원하는 개념적 장치가 '앙상한 민주주의(thin democracy)'다. 합리적 합의와 상호 소통을 불능케 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로, 미국 사회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의 현실적 정치 체제를 겨냥한 말이기도 하다. 그 반대로 책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행동의 통로를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정치 체제, 그것들이 시민의 힘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돼 가는 창조의 과정 등을 요체로 하는 민주주의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타인의 발언에 귀 기울이는 기술, 협상과 조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기술, 경험을 성찰하고 학습하는 기술들을 전제하는 민주주의다.

1999년 미국 캔사스의 한 고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절반이 중퇴하는 상황이 벌어진 사례는 민주주의를 몸으로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교육 붕괴의 원인이, 지역 주민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고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여기는 삶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들은 신뢰 회복을 위한 모임에서 서로 만나기 시작했고 학교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민주주의의 생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8년 만에 고교의 졸업생 비율은 80%까지 상승했다.

책은 인간들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편적 속성을 두고 '마음속의 리얼리즘'이라 표현한다. 부시 행정부가 2002년 이라크 침공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내놓았던 가짜 증거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해 일어설 수 있는 자신감과도 같은 것이다. 또 야만적 행위가 유발하는 공포감은 오히려 바람직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사용할 자원으로 쓰여질 수도 있다.

책은 희망적이다. 관계망을 추구하는 인간 고유의 속성, 개인적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공공성 등 의미 있는 행위와 삶을 향한 근원적인 욕구 때문에 인간은 속성상 공적인 존재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책을 옮긴 뉴사우스웨일즈대 사회학과 국제연구스쿨 대학원생 우석영씨는 "한국도 국민들의 정치 혐오증을 딛고 시민을 중심으로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구축해 갈 때"라고 밝혔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 체크 리스트' 등 작은 읽을거리가 자칫 이론적일 수도 있는 논의에 흥미를 보탠다.(장병욱기자)

08. 08. 16.

P.S. 기자는 "'촛불들'이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적었는데, 반대로 '촛불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이 봇물이다(곧 나올 계간지들의 화두도 아마 '촛불'일 성싶다). 몇 권의 이미지를 뽑아본다.

낮에 동네 시립도서관에서 잠시 들춰본 <인물과 사상> 7,8월호도 '촛불' 관련 글들을 싣고 있다. 강준만 교수의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시위'(8월호)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가 보기에 촛불시위는 스펙터클주의자(청계천) 이명박이 예기치 못했던 '스펙터클에 대항하는 스펙터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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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7 0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7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본문학 번역 60년>(소명출판, 2008)이란 책이 지난달에 나온 걸로 아는데, 한국일보의 리뷰기사는 오늘 떴다. 광복절이란 시의성을 고려한 게 아닌가 싶다. 비교적 자세한 소개를 담고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08. 15) 하루키·바나나는 한국문학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윤상인(53) 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일본문학 번역 60년 : 현황과 분석>(김근성 강우원용 이한정 공저ㆍ소명출판 발행)은 1945~2005년 국내 출판된 일본문학 번역서 전체의 서지목록을 작성하고 그에 대한 분석을 담은 국내 첫 연구서다. 학술적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목록 자료만큼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자료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에서의 일본문학 수용 양상. 윤 교수를 만나 '일본문학 번역 60년사' 이야기를 들었다.

■ 현재 일본문학 붐은 60년대 붐의 재판
현재 한국 출판계의 일본문학 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부상한 1990년대 초반부터 이어지고 있는 '장기 호황'이다. 하지만 이 호황은 해방 이래 일본문학 수용 역사에서 별쭝난 현상이 아니다. 60년대에 이미 '1차 부흥기'라고 부를 만한 일본문학 붐이 일어났고, 이후 90년대 '2차 부흥기'를 맞을 때까지 일본문학 번역 건수는 꾸준히 늘었다.(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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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본문학 붐의 기점은 4ㆍ19혁명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배일 정책으로 50년대 소설 7편 번역이 전부였던 것이 급반전했다. 그 해 청운사의 <일본문학선집>(전7권) 등 4개 출판사에서 일본 주요 작가 중단편 선집이 나오고, 고미카와 준페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시하라 신타로, 하라다 야스코 등의 소설 단행본 13권이 출간되는 등 60년대에 걸쳐 641편(중복 번역 포함)의 작품이 번역됐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15개 출판사에서 중복 출간됐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68년에는 6권짜리 전집(실제는 선집)이 신속히 간행됐다. 그 번역자에는 한무숙 전광용 정한모 천상병 이호철 최인훈 등 작가들이 다수 포함됐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이른바 '중간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시자카 요지로의 장편은 63년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 4, 6위를 차지했고, 65년 첫 출간된 미우라 아야코의 장편 <빙점>은 66~67년 내내 베스트셀러 1위를 점했다. 윤 교수는 그 요인으로 대일 문화정책 변화, 일본문학에 대한 호기심 증폭,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은 '4ㆍ19세대'의 출현 등을 꼽았다.

■ '독자 친화'적인 일본문학
윤 교수는 일본문학이 한국문학보다 앞서 변화하는 독자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고 분석한다. 국내 문학의 기반 자체가 빈약했던 60년대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 등의 작품은 읽을거리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70, 80년대엔 추리소설 기업소설 애정소설 역사소설 등 오락성 짙은 대중소설이 쏟아져 들어왔다.


90년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등 새로운 감성의 문학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적 욕구를 만족시켰다. 윤 교수는 "88올림픽 이후 국내 독서대중은 10대 후반~20대 위주로 재편됐는데 이들은 사회역사적 책임감보다는 개인주의와 소비 욕구에 충실한 세대"라며 "여전히 거대담론을 중시하는 한국문학에 거리감을 느끼던 신세대 독자들에게 하루키의 쿨한 감각, 류의 도저한 상상력, 바나나의 만화 풍 소설이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에는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등이 산뜻한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중간소설 영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일본소설일까. 윤 교수는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러시아문학이 근래 들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데 비해 일본은 폭넓은 독서 욕구를 가진 독자들이 뒷받침하는 탄탄한 소설 시장이 있어서 작가들이 창작에 전념하며 더 나은 작품을 써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과 일본의 지리적 근접성, 사회문화적 동질성 등도 요인으로 꼽았다.



■ 상업주의에 매몰된 일본문학 시장
윤 교수는 여타 외국문학과 달리 일본문학은 시종 출판사가 주도하는 상업출판의 형태로 국내에 소개돼 왔다고 지적한다. 그러다보니 번역작품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일본 내에서 문학상을 받거나 많이 팔린 작품을 실시간으로 들여오는 경우가 많다. 아쿠타가와 상의 경우 그 수상작은 60년대부터 거의 빠짐없이 국내 소개되고 있다.

윤 교수는 "이는 상업적으로는 안전할지 몰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국내 출판계가 일본의 문화 유통구조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일본문학 전공자나 전문 번역자가 스스로 좋은 작품을 골라 독자에게 소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번역 품질의 검증도 시급하다. 70, 80년대 횡행하던 날림번역은 90년대 들어 전문 번역가 군의 형성으로 많이 개선됐지만, 10명 남짓한 유명 번역가들에게 의뢰가 몰리다보니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감지된다는 것. 윤 교수는 "60년대 번역 수준이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라며 "일본 문학 및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이들이 번역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훈성기자)

08.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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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16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특히 60-70년대 대하역사물 번역목록을 봐야겠어요.
마지막 구절, 일어 번역의 질에 관해선 60년대에 김소운 씨가 했던 말과 똑같네요.로쟈 님은 일본 소설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로쟈 2008-08-17 00:37   좋아요 0 | URL
많이 읽지 않아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가는 다자이 오사무 정도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 좋아하는 한국인이 굉장히 많군요.저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역사소설 <풍도>와 <누란>입니다.둘 다 약소국의 비애를 그린 작품입니다.전자는 장편으로 고려말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 이야기입니다.후자는 중편인데 누란의 위기라는 표현에 나오는 그 나라 누란의 비극적인 망국사입니다.한족과 흉노 사이에 끼인 나라의 운명.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참한 나라.우리나라는 거기에 비하면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대로 운신의 폭이 넓은 나라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로쟈 2008-08-17 17:47   좋아요 0 | URL
이노우에는 처음 듣는 작가인데요.^^; 일본과 중국 소설들을 상대적으로 읽지 않은 편이어서 따로 견적을 내보고 있습니다...

2008-08-1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8-18 00:18   좋아요 0 | URL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