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초에 시사IN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12#). 금융 위기와 함께 불황 국면으로 접어든지라 경제와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정작 한국 대학에는 한국경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가 없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기사다. 이유는? 연구업적을 평가받기 위해서는 미국 경제학지에 논문을 실어야 하고 그러자니 주로 그쪽 경제학의 이슈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다들 자기 자리 보전하기도 바쁘다는 얘기다). 경제 호황기라면 으레 그려려니 하겠지만, 사정이 안 좋다 보니 제법 한심하게 보인다. 사실 다른 분야에도 '한국 학문'이 있느냐고 하면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지만서도... 

시사IN(08. 10. 21) 한국 경제학계에 ‘한국경제’ 학자 없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경제학은 그렇게 무력하냐고”(복거일, 10월13일 조선일보 칼럼), “시장 만능을 외치던 그 많은 경제학자들은 다 어디에 숨었나”(이정우, 9월30일 한겨레 칼럼) “배반의 경제학”(김순덕, 10월10일 동아일보 칼럼).

미국발 금융위기로 신뢰를 잃은 것은 투자은행만이 아니다. 사회과학의 꽃이라던 경제학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있다. 왜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느냐며 질타하는 목소리가 보수·진보 모두에서 나온다. 이런 비판은 특히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 경제학계에 대한 실망으로 모아진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 경제학계는 한국 경제학계에 비하면 체면을 세울 만하다. 10월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55)를 선정했다. 폴 크루그먼은 2000년 1월부터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해왔다. 이미 2005년에 부동산 거품 붕괴로 인한 미국 경제위기를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연일 블로그·인터뷰 등을 통해 미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대폭로> 등 그가 쓴 수많은 대중 경제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작보다 더 베스트셀러가 됐다. 크루그먼은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비판적 지식인’에 가깝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이틀 전 조선일보는 “경제가 대공황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학계에서 무슨 체면으로 누가 노벨상을 받을 것인가, 받은들 그 따가운 눈총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라는 칼럼을 게재했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폴 크루그먼을 선정해 그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있었다.

폴 크루그먼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한국에도 화제가 됐다.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긍정하는 케인지언 학파가 부활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민주당은 크루그먼을 빌려 ‘MB노믹스’를 비판하기도 했다. 크루그먼은 감세 정책과 규제완화 정책을 비판해왔다. 기실 크루그먼이 노벨상을 받은 명목은 ‘신무역이론’ ‘무역이론과 경제지리학의 통합’에 관한 공로다. 부시 비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곱씹어봐야 할 것은 경제학자의 사회적 역할일지도 모른다. 

“한국 현실 경제 연구자, 존중받지 못해”
금융위기에 경제학자가 무기력하고 무능하다는 비난이 높지만, 여전히 미국 경제 담론을 이끄는 것은 경제학자이며 특히 대학 교수들이다. 뉴욕 대학의 루비니 교수(<시사IN> 제54호 참조)가 좋은 예다(*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17). 그는 과거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예측했을 뿐만 아니라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도 정확히 예언한 바 있다. 그는 매일같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쓰고(58쪽 상자 기사 참조) 방송에 출연해 경제 위기 대책을 설파한다.

부시 대통령이 처음 구제금융법안을 의회에 상정했을 때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미국 경제학자 166명이 반대 서명을 했다. 그 짧은 시간에 신속히 서명을 받은 것도 놀랍고 대부분 대학 교수인 것도 눈에 띈다. 미국 정부의 은행 국유화 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도 교수들이 주도한다. “공적 관리는 손익계산에 관심을 두지 않으므로 잘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의 방침은 경제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틀렸다”(케이시 멀리건 시카고 대학 교수) “영국처럼 은행  지분을 매입하는 방식이 옳다”(폴 크루그먼)라는 식이다. 

한국 경제학계의 경우,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이나 위기 탈출구를 제시해 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한국 경제의 현안이 주류 학계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 일간신문 경제부 기자인 ㅇ씨는 요즘 연일 쏟아지는 경제위기 기사를 쓰느라 바쁘다. 그는 “경제 전문가 조언을 구할 때, 대학교수 말보다 차라리 삼성경제연구소를 인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라고 말한다. 대기업 경제연구소가 대학교수가 해야 할 몫을 대신하는 것이다.

한국인 경제학자 중에 경제 현안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 집단에 관한 연구로 한국 사회 변화에 큰 울림을 준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라든지,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88만원 세대’ 담론을 처음 제기한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공약을 비판했던 이준구 서울대 교수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장하준 교수는 서울에서 9000km 떨어진 영국에서 활동하며 한국 학계에 몸을 담은 적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학자가 한국 경제학자보다 더 자주 인용된다.

김상조 교수는 “미국은 학풍이 다양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폄하할 수 없다. 한국에도 현실 문제를 연구하는 교수가 꽤 많다. 미국도 폴 크루그먼 같은 비판적 경제학자는 소수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경우는 자신들의 생각과 다를 때 이념적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으로 인정하지 않고 ‘색깔론’으로 몰아붙인다.

홍훈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현실을 말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학계의 중심에 있거나 이런 내용이 연구나 교육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학 연구와 교육이 한국 경제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학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사람이 더욱 적다”라고 경제 학계의 풍토를 전했다.



홍훈 교수가 2007년 발표한  논문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변화와 한국학계의 수용(1960 ~2006년)>은 경제학계의 자화상을 뼈아프게 묘사하고 있다. 논문은 말한다. “한국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해외 학계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은 정당화하기 힘들다” “달리 말해, 한국의 경제학은 한국의 경제와 지속적으로 유리되어 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경제 문제에 대한 진정한 전문가로 자처하기 힘들다.” “주요 대학의 이른바 일류 경제학자의 연구일수록 외국 학술지를 지향해 한국 경제의 현실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주요 대학의 이른바 일류 경제학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서울대 교수들이 대표 사례가 될 듯하다.  한국 언론이 가장 인용하기 좋아하는 서울대 경제학 교수진은 어떤 모습일까. 전체 31명 교수 가운데 29명(94%)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이 중에 젊은 교수일수록 그의 논문 목록에서 한국 경제와 관련 있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 경제학계 내에서 한국 고유의 경제 문제, 즉 재벌, 아파트·부동산, 세금 정책 등이 논쟁이 되는 일이 드물다.


 
미국 학술지 논문 게재가 최고 목표

왜 이럴까? 부교수·정교수 승진 등에 필요한 연구 업적 평가의 기준이 해외 SCI급 저널에 실린 논문 횟수이기 때문이다. 국내 학술지보다 미국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3~5배 이상 높은 점수를 받는다. 미국 경제학지에 논문이 실리려면 미국 경제학계의 이슈를 따라가야 한다. 이준구 서울대 교수는 “젊은 교수 처지에서는 한국 경제를 연구하는 것보다  미국 현안에 관한 논문을 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한국 경제를 연구해야 할 동기부여가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드물게 나오는 한국 경제 관련 논문조차 미국적 방법론을 숫자만 바꿔 한국에 대입한 경우가 많다.

폴 크루그먼은 올해 6월 쓴 칼럼에서 한국의 촛불집회에 대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신 여론 가운데 일부는 비합리적인 면이 있지만, 쇠고기 문제는 볼썽사나운 미국 외교에 모욕당했다는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과  뒤엉켜버렸다. 한국인을 비난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어느 한국 경제학자가 쓴 미국 쇠고기 칼럼보다 이 짧은  문장이 더 화제가 됐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앞으로 기자들이 한국 경제를 알기 위해 외국 경제학자에게 물어봐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신호철기자)

08. 10. 26.

P.S. 경제 현안과 관련해서는 강단 경제학자들보다 인터넷 시민논객들이 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젠 새삼스럽지 않게 되었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10. 25) 경제학자 뺨치는 ‘인터넷 스타 논객’

금융당국이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에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인터넷에선 경제학자를 뺨치는 시민 논객들이 속속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대표적인 시민 논객은 다음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미네르바’다. 미네르바는 금융위기가 본격화하기 전인 지난 8월 말 아고라에 산업은행이 인수하려던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부실화를 정확히 예견한 글을 올려 주목을 받았다. 그는 쉬운 경제이론과 통계 등을 적절하게 활용해 정부의 잘못된 경제 예측과 처방, 언론의 부정확한 보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글은 수만 건의 조회를 기록하고,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삽시간에 퍼지면서 경제 관련 토론을 위한 ‘필독 항목’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미네르바 신드롬’ ‘미네르바 효과’라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미네르바는 9월 중순 “10년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며 절필을 선언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함께 다시 아고라로 돌아와 하루 5개 이상씩의 글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외환시장 대책과 관련해 22일 “최소 500억~ 700억달러 규모의 외부 달러 차입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며“이제 남은 것은 일본 달러 공수뿐”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했다.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인 <한토마>에서도 스타 논객들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논객으로 <아고라>에서 활동하던 ‘SDE’, ‘명사십리’와 <한토마> 토종 논객인 ‘삼성해체’ 등이 있다. 거시경제 전망을 주로 하는 ‘SDE’는 “앞으로 지엠, 포드 등 미국 자동차 회사의 부도-유럽 은행의 부도-미국 지방은행의 부도-한국 저축은행·건설회사·캐피탈사 유동성 위기-한국 외환부분 신용 위기 등 9가지 위기가 시차를 두고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삼성해체’는 주로 ‘금융위기에 서민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글을 쓴다. 그는 최근 <한토마>에 올린 글에서 “조금이라도 여윳돈이 있는 서민이라면 빨리 달러로 바꿔야 한다. 지금 막차라도 타야 하는 이유는 ‘자산보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권유했다.

김상종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시민 논객의 등장은 정부의 경제위기 대책이 건설경기 부양 등 특정기업과 ‘강부자’를 위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며 “시민 논객의 분석이 정부정책보다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있는 이상 ‘미네르바’ 같은 시민 지성은 계속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박종찬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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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26 16:01   좋아요 0 | URL
외환위기 때문에 외국의 핫머니까지 급전으로 가져다 쓴 직후인 1998년 봄 당시의 시사월간지를 보니 외환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한국지식인의 죄 운운하는 기사가 있더라구요.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군요.

로쟈 2008-10-26 19:24   좋아요 0 | URL
변한 게 없으니 반복되는 거겠죠...

루쉰P 2008-10-26 16:15   좋아요 0 | URL
정말 문제가 크네요... 어떻게 한국 경제문제에 대해 같은 땅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일까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일까요. 황색 피부, 흰 가면을 쓴 우리나라 경제 교수들이 문제군요. 도대체 한국 경제에 대해 배울려면 누구 책을 봐야 할지 참으로 문제네요. 흠...그렇다면 로쟈님의 추천대로 '아고라'의 미네르바님을 찾아가서 한국 경제의 해답이란 무엇인가를 구도를 해야겠네요. 음하하하

로쟈 2008-10-26 19:25   좋아요 0 | URL
네, 학자들에게 대단한 걸 기대하면 안됩니다...^^;

비로그인 2008-10-26 21:04   좋아요 0 | URL
이 글 담아갈게요.

로쟈 2008-10-26 21:42   좋아요 0 | URL
네, 제목은 수정했습니다...

바보 2008-10-28 09:5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글 담아갈께요. ㅇㅇ

로쟈 2008-10-28 23:03   좋아요 0 | URL
^^
 

부제가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론의 역사'인 책이 있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나남출판, 2008)인데,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하나로 출간된 만큼 학술적 가치는 인정받는 책이겠으나 손에 들기는 어려워 보이는 책이다. 교수신문의 서평에서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상상력·이해력 모두 A+"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8317x). 하지만 대략의 윤곽을 따라가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중에 관심있는 장만 선별해서 읽어볼 수도 있겠고. 일단은 서평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8. 10. 20)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상상력·이해력 모두 A+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발표되면서, 지난 수천 년 동안 다분히 이질적인 개념으로 간주돼왔던 시간과 공간은 수학적으로 동등한 특성을 지닌 하나의 가족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시간과 공간은 “통일이 돼도 크게 해될 것 없는” 유사한 개념이 아니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통일돼야만 하는” 하나의 좌표세트였던 것이다. 그 후로 이론물리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굳이 구별하려고 애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간의 추상적인 특성을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으로부터 유추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학문을 떠난 현실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을 동일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에게 시간을 인지하는 기관은 딱히 존재하지 않지만, 공간을 지각하는 기관은 다양하게 발달돼 있다. 또한 시간의 이동은 인간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고 거시적 관점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공간의 이동은 개인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 (물론 지구 근방에 한해)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으며, 한 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는 동선은 경험과 의식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제아무리 상대성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좌표계로 간주한다 해도, 우리의 뇌리 속에는 시간보다 공간을 우선시하는 ‘공간 편향적 비대칭’이 존재한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Concepts of Space)』은 인류가 공간을 인지하고 분석해온 역사를 포괄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 철학사조와 유대 기독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공간개념을 설명하는데 거의 1/3 이상을 할애하고 있어서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라는 부제가 다소 무색한 감이 있지만, 절대공간이 물리학의 주 무대로 등장하게 된 과정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이다.

공간은 모든 만물을 담고 있는 상자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사물의 ‘위치적 성질’에 불과한 것인가. 전자가 맞다면 물체가 없어도 공간은 존재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물체가 하나도 없는 공간은 더 이상 공간이 아니다. 라이프니츠와 호이겐스는 후자를 주장했으나 경쟁자였던 뉴턴은 물체의 운동을 서술하기 위해 ‘모든 운동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필요했고, 거기에 신의 속성을 닮은 ‘절대성’까지 부여했다. 물론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인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소박한 사고방식에서 출발해 머나먼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을 일종의 ‘장소’개념으로 간주해 등방성과 균질성을 부정했고, 그의 사상은 근 2천년 동안 서양의 공간개념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의 철학자 텔리시오가 “공간은 물질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간의 균질성을 옹호했고, 파트리티우스는 이것을 더욱 구체화시켜 “공간은 실체나 물질성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오랜 세월동안 추상적 세계에 머물러있던 공간은 수학적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 후 피에르 가상디와 토마소 캄파넬라 등에 의해 균질적이고 무한한 공간의 개념이 정립됐으며, 이것이 뉴턴에게 전수돼 고전물리학의 근간인 절대공간의 개념이 탄생한다.

뉴턴의 첫 번째 운동법칙, 즉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절대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지상태와 등속운동상태가 구별되려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절대공간뿐이기 때문이다. 뉴턴은 절대공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가 그 유명한 ‘회전하는 물통실험’을 제안했다. 물을 가득 채운 물통을 천장에 밧줄로 매달아놓고, 밧줄이 충분히 꼬일 때까지 물통을 서서히 돌린다. 그 후 물통을 쥐고 있던 손을 가만히 놓으면 꼬인 밧줄이 풀리면서 물통이 회전하게 되고 평평했던 수면은 원심력에 의해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곡면이되는데, 이 현상은 물통과 물 사이의 상대운동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즉, 가속운동이야말로 절대공간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절대운동’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도 허점은 있다. 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우주공간에서 물통을 돌려도 수면이 오목해질 것인가. 수면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것은 절대공간에 대한 운동 때문이 아니라 우주에 분포돼 있는 질량의 분포 때문일 수도 있다. 만일 천체들이 지금과 다르게 배열돼 있다면 오목해지는 정도가 달라질 수도 있으며,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텅 빈 우주에서는 회전하는 물의 수면이 아예 평평하게 유지될 수도 있다(이것이 바로 마흐의 원리이다). 버클리와 마흐, 그리고 라이프니츠와 호이겐스 등은 절대공간이라는 불완전한 개념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뉴턴의 역학은 현실세계를 너무나 정확하게 서술할 뿐만 아니라 과학을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수단’으로 바라보던 당시의 풍조에 잘 부합됐으므로 한동안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돼 왔다.

저자는 절대공간의 개념이 상대성이론의 휘어진 시공간으로 대치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하나의 章을 통째로 할애했다. 다른 대부분의 교양과학서적에서는 뉴턴의 물리학이 상대성이론 때문에 하루아침에 갑자기 권좌에서 밀려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뭇매를 맞아가며 서서히 와해됐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뉴턴의 절대공간은 오일러와 칸트 등에 의해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일반상대성이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마흐의 원리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았으며, 19세기말에는 절대공간의 상징인 에테르의 관측실험이 실패로 끝나면서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이 상황은 아인슈타인의 특수 및 일반상대성이론이 등장하면서 말끔하게 정리됐고, 공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닌 리만 기하학의 n-차원 다양체로 대치됐다. 공간개념은 1920년대에 등장한 양자역학에 인식론적 해석에 의해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되고, “공간은 왜 3차원인가”라는 근본적질문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됐지만 아직 이렇다 할 해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저자는 미시물리학과 거시물리학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공간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 책의 초판은 1954년에 출판됐고, 1992년에 확대개정판이 나오면서 지난 40년 동안 공간문제와 관련해 이루어진 새로운 발전상이 여섯 번째 장으로 추가됐다. 여기에는 그 동안 초판에 가해졌던 비난이 부분적으로 해명돼있으며, 1960년대 이후의 물리학을 비롯해 공간의 차원을 파격적으로 늘인 초중력이론과 초끈이론도 소개돼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책의 전반부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야머의 뛰어난 분석력과 박학다식함이 다소 누그러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머는 최신물리학에 철학이 결여돼 있음을 넌지시 비치면서, 물리학이 공간의 철학적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는 희망은 철학이 공간의 물리학적 문제를 풀어주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허황하다는 단언으로 끝을 맺는다.

유대교적 공간개념도 하나의 장(제2장)에 걸쳐 소개돼 있는데, 책의 머리말을 쓴 아인슈타인조차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언급을 회피했다. 유대교의 철학이 공간의 변천사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아놓고 특정 종교관을 심각하게 다룬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물리학이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공간문제에 접근하려는 독자들에게는 이 부분도 나름대로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박학다식함에 놀라다가 중간쯤 가면 아예 혀를 내두를 정도가 되고, 끝 부분에 가면 백과사전 한 권을 독파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역자는 막스 야머의 방대한 지식을 독자들에게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각 장마다 역주를 정성껏 달아놓았다. 본문의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것도 가능한 한 원문을 훼손시키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역자의 배려일 것으로 짐작된다. 공간을 한 가지 관점에서 서술하기도 어려운데, 야머는 이것을 역사, 철학, 종교, 물리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막강한 지식을 자랑하며 단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독자의 생각까지 첨가됐을 때 콘텐츠가 얼마나 크게 부풀어 오를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 -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과 집중력, 상상력,이해력에서 모두 A+를 받기에 충분하다.

08. 10. 25.

P.S. 서평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이 책의 머리말은 아인슈타인이 썼다. 소개 페이지를 보니 이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야머 박사의 책은 공간개념이 고대와 중세에 차지했던 지위를 연구하는 데 크게 중요하다. 그는 연구들에 근거해서, 근대적인 (1) 유형의 공간개념이 르네상스 이후에야 비로소 발전되었다는 견해로 기울어진다. 그 개념은 공간을 모든 물질적 대상을 담는 상자로 여긴다. 내가 보기에 고대인들의 원자론은 원자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2) 유형의 공간을 전제해야 했던 반면에, 세력이 더 컸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학파는 독립적(절대적) 공간이라는 개념 없이 잘 해나가려고 했다. 신학이 공간개념의 발전에 끼친 영향들에 관한 야머 박사의 견해들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공간문제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관심을 분명히 불러일으킬 것이다."

흥미로운 건 아인슈타인의 그러한 평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막스 야머가 <아인슈타인과 종교>(1999)라는 책까지 썼다는 점이다. 부제는 '물리학과 신학'.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과 신학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야머는 이를 막바로 다룬다. 살아있었다면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한편, 현대 물리학이 함축하는 시공간의 의미에 대해서는 한스 라이헨바하의 <시간과 공간의 철학>(서광사, 1986)이 유명한 저작이(었)다(하지만 수학에 어두운 내가 읽기엔 어려운 책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평가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은 현재 철학아카데미 원장인 이정우씨의 작품이다. 아마도 대학원시절에 번역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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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링 2008-10-25 19:50   좋아요 0 | URL
이런 책 완전 제 취향이에요~

로쟈 2008-10-25 20:26   좋아요 0 | URL
관심분야신가 보군요.^^
 

작년초인가 스토리텔링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어보고 이 주제의 책들은 실용서나 처세서 정도로 치부하는 편인데(그나마 인문학에서 돈 된다고 하는 쪽이다. '스토리텔링'과 '콘텐츠'는 금박 입은 단어들이다), 제법 유혹적인 책이 출간됐다(하기야 이 서재도 많은 이들에겐 그냥 '실용적인' 도서 정보 제공처이겠지만).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아우라, 2008). 이름이 생소한 저자보다는 역자가 더 눈길을 끄는데, <내 이름은 김삼순>을 연출한 김윤철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번역이다. 아마도 한예종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책인 모양이다. 그런데, 유혹적이라고 한 건 이 책이 스토리텔링의 비밀 전수서로서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입문서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원저의 제목이 '시나리오작가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시학>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런 아이디어쯤은 다들 가져봤을 것이다. 단 저자인 티어노는 그걸로 책 한권을 써냈다는 점이 차이다. 일반독자들이 <시학>을 접할 수 있는 유익한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8. 10. 25) 시나리오 작법의 비밀 알려줄까요

방송가와 영화판 언저리에 작가 지망생 집단이 형성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누군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야기의 끈을 잡아채려 시간을 톺고 있을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몇 달 씨름 끝에 완성한 금쪽같은 대본에 내려진 주변의 혹독한 평에 좌절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바로 이런 이들에게 관객이 감동하는 이야기를 쓰는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속삭이는 책이다. 그 비밀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에 담겨 있다. 알고 보면, 이 2천년도 더 묵은 책 <시학>은 이 시대 드라마 생산공장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공공연한 시나리오 작성의 바이블이다.

할리우드의 스토리 분석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마이클 티어노가 쓴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을 밑줄 삼아 할리우드산 명작 영화들을 조목조목 분석해놓은 작법 지침서라 할 수 있다. 글쓴이는 단언한다. “위대한 영화를 분석해 보면, 그 영화를 만든 작가와 감독은 관객들이 어떻게 드라마에 반응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시학>은 바로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극적인 이야기 구조의 근본 요소를 꼼꼼히 적시하고 있는데, 그 극적 구조의 비밀 문을 여는 제1의 열쇳말은 이렇다. “이야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좋은 작가는 이야기를 위해서 일하고, 시원찮은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극적인 이야기 구조란 무엇인가. 글쓴이 티어노는 이를 풀어내기 위해 ‘액션 아이디어’라는 용어를 꺼내놓는다. 굳이 풀이하자면 ‘플롯화된 이야기 개요’라고 할 수 있는 이 용어를 통해 글쓴이는 이야기(=드라마)는 액션, 곧 행동임을 일러 준다. <시학>은 이야기는 반드시 행동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행동은 인물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극적 행동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영화 <조스>는 식인 상어를 막으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요컨대 <조스>라는 전체 이야기가 딛고 서 있는 아이디어는 바로 식인 상어를 막는 일, 그 행동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 플롯을 짜는 능력 또는 강력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가 보기에 구성보다 대사나 성격 묘사에 능한 것은 초보자들이지 좋은 작가가 아니다. 나아가, 이야기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려면 어떻게 써야 하나? <시학>의 대답은 행동의 극적인 통일, 곧 플롯의 통일이다. “이야기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반드시 하나의 전체 행동을 모방해야 한다.”

단일하게 통일된 플롯은 이야기 속 사건들이 서로 개연적인 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존재하게 한다. 어떤 사건이 들어 있든 들어 있지 않든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그 사건은 꼭 필요한 게 아니므로 과감히 빼라는 얘기다. 인과관계로 연결된 사건을 통해 하나가 된 플롯은 바로 한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그려내며, 중요한 것은 그 플롯 행동이 주인공의 가장 깊숙한 욕망과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일된 플롯이야말로 이야기의 목적이라고까지 설파하는데, 이는 관객의 감정이입 혹은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플롯 구조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관객의)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일어나고, 공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일어난다. 주인공의 운명 변화에서 그 원인은 악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과실(착오나 실수)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극적인 이야기에서는 반드시, 주인공이 일으키거나 주인공이 연루돼 있는 ‘비극적 행위’가 일어나야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비극적 행위는 잭(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이 차가운 대서양 얼음바다에서 로즈(케이트 윈즐릿)를 구하기 위해 널빤지를 밀어올려준 뒤 죽는 일이다.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의 실수는 코모두스를 로마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일어나며, 막시무스는 이 ‘과실’로 말미암아 가족을 잃고 노예가 되고 끝내 죽음에 이른다.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 레스터(케빈 스페이시)는 삶이 아름다우며 그 순간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총을 맞는 것이다.(허미경 기자)

08. 10. 25.

P.S. 소설가 박민규씨의 추천사는 이렇다: "여기 마이클 티어노가 전하는 <스토리텔링의 비밀>이 있다. 이는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당신을 연결해줄 가장 쉽고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제 축구는 축구선수들에게 맡기고, 타고난 당신의 재능 위에 이천년 이상 역사를 장악해온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탑재하라. 티어노의 말처럼 할리우드라는 원형 경기장에 뛰어나가서도 당신은 두 팔을 벌리고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덤벼, 다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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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0-26 00:05   좋아요 0 | URL
헤...막시무스다...

로쟈 2008-10-26 00:48   좋아요 0 | URL
'다 나와!'란 대사는 요즘 많이들 입에 물고 다니실 거 같아요...
 

이번주 주목되는 신간 중의 하나는, 하지만 서점의 신간코너에서 보지 못한 책은 도시사회학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제국에 반대하고 야만인을 예찬하다>(이후, 2008)이다. '마이크 데이비스'라는 이름을 이젠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올해 들어서만 벌써 세번째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 나온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 2007) 이후에 출간된 <조류독감>(돌베개, 2008), <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이후, 2008)가 모두 데이비스의 책이다(처음 소개된 책은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 1994)이었다).

그 중 타이틀만 놓고 보자면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게 되는 책은 이번에 나온 <제국에 반대하고 야만인을 예찬하다>이다. 좌파 학자들 가운데 가장 약진하고 있는 경우라 생각된다(데이비스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뉴레프트 리뷰'의 한국어판이 올 12월말부터 연간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관련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17470.html 참조). 리뷰를 보니 촘스키가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과 함께 2007년에 읽었던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도 평했다 한다. 꽂아놓기라도 해야 할 책 아닌가?..

한국일보(08. 10. 25) '현대판 로마' 미국의 추한 속살 들춰내다

미국은 현대의 로마다. 9ㆍ11 이후 미국은 세계화의 모델이면서 신군사주의와 신제국주의의 이념적ㆍ실질적 지지대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토머스 페인 등 나라의 선조들이 상상했던 형태의 국가로부터, 미국은 가도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은 아닐까?



아들 부시 정권이 심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제국에 반대하고 야만인을 예찬하다>는 좌파의 문제 의식과 어법으로, 미국의 현재를 해부한다. 11월 4일 결전의 날을 앞두고 치열히 전개되고 있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싸움은 물론, 나아가 미국의 뿌리깊은 모순을 이해할 단서를 제공한다. 뚜렷한 문제의식 아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보여주는 역사적 통찰이 인상적이다.

부시는 물론 럼스펠드, 딕 체니 등 네오콘들이 일차적 성토 대상이다. "하나의 악행(9ㆍ11 테러)을 다른 악행(이라크전)으로 되갚고, 석유를 대가로 무고한 이들이 살육되는 세계의 시민으로"(13쪽) 미국인들을 편입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부시측이 선거 당시 전략적으로 무게를 둔 것은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기독교 신도였다고 지적한다. 기독교에서 악의 세력과 영적 전투를 벌이는 지상의 교회, 즉 전투적 교회(church militant) 측의 영향력이 2000년 대선 당시 정점에 달했다는 분석이다.

화려한 쇼와 매체의 조작에 가려진 미국의 모습도 보인다. 인공호수와 18홀 골프장, 잡역부와 노동자들의 거주지 등 두 곳으로 선명히 양분된 캘리포니아는 "시궁창 호수 너머로 빠르게 멀어져 가는 '캘리포니안 드림'의 현장"(215쪽)이라고 지적한다.

이라크전 등에서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한다며 미 공군의 자랑으로 이야기되는 정밀 폭격은 미국의 위선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과연 어떨까? 민간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아니, 더 위험하다. 전투 공간에 대한 '인식' 수준이 급격히 높아질수록 상대편의 지휘통제시설을 정밀한 폭격으로 파괴하여 적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곧 "민간의 원거리 통신과 전력망, 데이터 회신 노드까지 무차별 파괴한다"(171쪽)는 것이다.

이밖에도 미국의 오류를 적시하는 저자의 펜 끝은 가차없다. 1967년 베트남전에서 101공수사단 소속의 정예 부대원들이 무차별 살육을 벌였던 일,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마을 양민학살사건 등이 미국의 전쟁범죄로 언급된다. 저자는 노근리 사건에 대해 "인디언 토벌(운디드니 학살)로 악행을 떨친 제7기병대의 복사판"(149쪽)이라고 성토한다.

저자는 이론이나 주장을 설파하기보다,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저널적 태도를 택한다. 예를 들어 정밀 폭격의 이름으로 얼마나 무수한 아녀자들이 살육됐는지 서술하는 대목이 그렇다. 그것은 결국 "펜타곤 계획자들이 미래의 핵심 전장으로 여기는 곳, 즉 제3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정부 능력의 시험대"(176쪽)라는 것이다. 간간이 등장하는 미국 내부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세묘는 현재의 대선 직전 국면까지 밑그림을 제공한다.



이 책은 미국의 좌파 역사학자이자 도시사회학자인 마이크 데이비스가 2001~2007년 '소셜리스트 리뷰' 등 비판적 매체에 실었던 글을 모아 묶은 것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은 이미 국내에도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슬럼, 지구를 뒤덮다>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등 여러 권이 소개돼 있다. 언어학의 거두이자 당대의 비판적 지성을 대표하는 노엄 촘스키가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과 함께 2007년에 읽었던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평한 책이다.(장병욱기자)

08. 10. 25.

P.S. 마이크 데이비스와 함께 주목되는 또다른 저자는 <벌거벗은 제국주의>(인간사랑, 2008)의 존 벨라미 포스터이다. 좌파 생태학자다. 작년에 <슬럼, 지구를 뒤덮다>와 함께 '경합'을 벌였던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책갈피, 2007)에 이어서 <벌거벗은 제국주의>는 <제국에 반대하고 야만인을 예찬하다>와 '2라운드'를 벌이는 셈이라고 할까? 두 권을 묶어서 다룬 경향신문의 기사가 이 점을 잘 짚어주고 있다.

<제국에 반대하고…>가 기교파의 글이라면 <벌거벗은 제국주의>는 정통파에 가깝다. 오리건대 교수(사회학)이자 월간 ‘먼슬리 리뷰’의 편집장이기도 한 존 벨라미 포스터는 책에서 미국이 본질적으로 제국인 이유를 개념 분석과 현대사를 바탕으로 깊이있게 설명한다. 비판적 시각도 분명하다.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방지를 이유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이 실은 WMD 확산을 조장했다”거나 “미 제국이 한 일은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세계평화)가 아닌 폭스 아메리카나(미국이 퍼뜨리는 천연두)에 지나지 않는다”는 서술들이 그러하다.(정환보 기자)

마음은 두둑하지만, 다 따라가다가는 주머니가 슬럼화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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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10-25 21:58   좋아요 0 | URL
책장의 용적율도 높여야 하고요;;;;

로쟈 2008-10-25 23:13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로 방바닥 용적에도 한계가 있어서요. 아파트가 무너진다고도 하니...--;
 

보통 '철학아카데미 원장'이란 타이틀로 소개되는 '재야 철학자' 이정우 씨의 신간 <천하나의 고원>(돌베개, 2008)이 출간됐다. 이미 예고돼 있던 책이라(http://blog.aladin.co.kr/mramor/2126438 참조) 놀랍지는 않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얇은 책이다(이번주에 눈에 띈 책들 가운데 가장 얇다). 제목이 얼핏 시사해주는 것처럼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저자의 표기로는 <천의 고원>)에 대한 '읽기'이다. 한데, 그 점이 명시돼 있지는 않다. 머리말도 없이 다짜고짜 본문으로 들어가서는 "<천의 고원>은 개념적 콜라주이다."란 문장으로 시작할 따름이다. 짐작에 책은 "<천의 고원> 읽기의 개념적 콜라주"로 정리할 수도 있겠다. 들뢰즈 관련서에 대한 서평을 준비하고 있어서 결들여 빨리 읽게 될 듯하다. 일단 한겨레의 리뷰를 옮겨놓는다(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주에도 고명섭 기자가 어떤 책을 다룰지 알아맞혔다)...

한겨레(08. 10. 25) 들뢰즈의 ‘탈주’는 소수자를 향한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새 저서 <천하나의 고원-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사진)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 개의 고원>(1980)의 해설이자 보충이다. 책의 제목이 ‘천하나의 고원’인 것은 <천 개의 고원>의 주요 개념을 그의 관점에 따라 충실하게 설명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책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함으로써 하나의 고원을 덧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새로 배치된 고원이 이 책의 부제에 담긴 ‘소수자 윤리학’이다. 윤리학(에티카)의 관점에서 <천 개의 고원>을 다시 읽은 것이 이 책인 셈이다.

들뢰즈의 관심은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와 같은 전기의 순수 이론철학에서 가타리와 함께 작업한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같은 후기의 실천적 사회철학으로 옮겨갔다. 특히 <천 개의 고원>은 들뢰즈 사유의 물줄기가 모두 모여들어 넘실대는 저수지와 같은 저작이다. 전기의 존재론적 사유가 저류를 이루고 그 위에 사회철학적 사상이 난만하게 꽃핀 연못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천하나의 고원>은 <천 개의 고원>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 존재론에서 윤리학으로 설명을 진전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들뢰즈의 존재론과 윤리학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이 드러난다.

지은이가 <천하나의 고원>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천 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야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야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구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생성의 일시적 응결 형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리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토대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명섭 기자)

08. 10. 25.

P.S. 개인적으로 특이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한국 지식사회의 '들뢰즈 열풍'이다. 다른 철학자들과 비교하면 유례가 드물 정도로 단 기간에 대부분의 책이 번역되었고 각기 다른 목소리이긴 하지만 '들뢰즈 합창'이 여기저기서 울려퍼졌다. 주요 개념들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번역도 제각각이어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들뢰즈'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지만('Guattari'의 표기만 하더라도 '가타리' '거타리' '가따리' '과타리' '구아타리' 등 제각각이다), 한가지 열풍이 다른 열풍으로 넓어지고 깊어진다면 말릴 이유는 없다고 본다(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양체(multiplicity)'를 구성하고 있는 들뢰지언들의 '잘난 체'도 보기좋게 넘어갈 수 있겠고. 이 책에서는 기존 번역어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새로운 번역어들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 저자의 첫번째 잘난 체이다. 그건 좀 흔한 종류에 속하지만, 특이한 것은 인용문헌에서 보이는 두번째 잘난 체이다. 

<천 개의 고원> 대신에 굳이 <천의 고원>이란 제목을 고집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저자는 왜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 국역본을 한권도 인용하지 않는 것일까?(나머지 책들에 대해서는 불어본의 쪽수만을 표기해준다.) 심지어 자신이 번역한 <의미의 논리>(한길사, 1999)조차도. 읽어줄 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일까?(그렇다면 아예 불어로 책을 쓰는 건 어떨까?) 학술논문들에서 그런 잘난 체는 흔한 것이긴 하나, 대중 교양서(?)에서 그런 '폼'을 보는 건 씁쓸하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이 텍스트만큼 희화화되고 속화된 텍스트도 찾기 힘들 것 같다"는 '특이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저자는 <천 개의 고원>을 개나 소나 읽고 떠들어대는 책으로 보는 듯하다) "기존의 오해와 왜곡을 논파하는 비판적 측면에도 비중을 두었"다면, 무엇이 어떻게 잘못 이해/번역되었는지 짚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한국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저자가 약간의 애정이라도 갖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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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5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5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8-10-26 00:20   좋아요 0 | URL
이정우씨의 "잘난 체"는 어떤 면에서는 김용옥씨의 허세와 비슷한 면이 있죠. ㅎㅎ
그래도 그 분 책은 나오면 즐겨읽게 되더군요. 지난번 출간된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도 그분 특유의 "잘난 체"를 느끼게 하는 구절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들뢰즈와 관련된 서평을 쓰신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

로쟈 2008-10-26 00:47   좋아요 0 | URL
둘러보면 '잘난 체'는 들뢰지언들의 모든 차이를 지우는 속성소 같기도 합니다.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들뢰즈만 좀 읽었다 치면 다들 우쭐거리더군요.^^; 토드 메이의 <질 들뢰즈>가 제일 얇아서 읽고 있는데, 역자 약력을 여러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역마살꾼 2008-10-26 18:52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들뢰즈 열기는 어떤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이정우씨 책보다 금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데리다의 미발표 수고가 훨씬 관심이 가는데 아직 구하질 못했습니다. 로쟈님은 혹시 읽어보셨는지요? 역자가 잘 번역을 했을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0-26 19:24   좋아요 0 | URL
기사가 뜬 건 봤는데, 정기구독자만 읽을 수 있게 해놓았잖아요. 말만 좌파 저널이지 카피레프트에 있어서는 보수보다도 더 보수적인 저널입니다.--;

2009-07-20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