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기사를 보고 저녁에 서점에 들러 손에 든 책은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민음사, 2008)이다(알라딘에는 아직 입고가 안된 듯하다). 예전에 정명환 선생의 다른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이번에 역자가 새롭게 개정판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말>은 좋아하는 책이고 또 내가 불어 원서까지 갖고 있는, 많지 않은 책 중의 하나여서 이번 번역본의 재출간이 반갑다. 오직 '읽기'와 '쓰기'만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이 독특한 자서전은 오래전 기억을 다시금 잠시 떠올리게 해주는 '기억 재생기'이기도 하다. 계기가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10. 28) '나는 왜 문학병을 앓았나' 사르트르의 고백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자서전으로 꼽히는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자서전 <말>이 44년 만에 새로 번역돼 나왔다. 최근 민음사에서 발간된 <말>은 고 김붕구(1922~1991) 서울대 교수와 함께 1964년 이 책을 번역했던 정명환(79) 서울대 명예교수가 본문을 수정하고 새로 주석을 단 판본이다.



정 교수는 이 책의 해설에서 "1964년 <말>의 출간이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그 해 가을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절하자 한 출판사의 요청으로 김 교수와 함께 거의 한 달 만에 번역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내가 맡은 1부의 번역에는 지금 누가 들추어볼까 겁이 날 정도로 잘못된 곳이 많았다"며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권유로 개역을 시작해 1년 반에 걸쳐 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자서전은 한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조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시절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절은 사르트르의 정신적 토양이 됐다. 이 책의 1부와 2부인 '읽기'와 '쓰기'가 그 토양이다. 키 작고 병약했으며, 약한 사시(斜視) 증세를 보였던 소년 사르트르는 양서로 가득찬 외조부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일곱살 무렵부터 외조부와 운문으로 편지를 교환한 일화 등을 들려준다.

정 교수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자존감을 획득했던 사르트르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이를 일종의 '문학병'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구해 주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속임수로 나를 끌어넣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말>을 쓸 무렵 '문학 결별' 선언을 하며 문학과 현실참여의 분기점에서 양자의 관계성에 대해 고민하던 사르트르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러나 자서전 말미에서는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라도 적고 있다. 정 교수는 이는 단순히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기 위한 문학이 아니라, 정치는 정치대로 중시하되 기존질서를 비판하고 절대미의 경지를 추구하는, '정치적 참여를 넘어서는 문학'을 추구하겠다는 사르트르의 문학적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말>을 어떤 각도에서 읽느냐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각도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 야릇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여러 철학적 저서와 문학작품의 씨앗을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고, 또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귀중한 시사를 얻을 만하다"고 <말>이 가지는 의미를 밝혔다.(이왕구기자)

08. 10. 28.

P.S. 잠시 찾아보니 기사에서 언급된 최초의 번역본은 <말>(지문각, 1965)이다. 1964년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고 나서 김붕구 교수와 함께 한달만에 옮겼다고 하니까 책은 1965년초에 나왔겠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다시 나온 <말>(민예사, 1992)이다. 역자는 동일한데, 부분적으로 수정이 가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김붕구 교수를 역자로 한 책으로 <책읽기와 글쓰기>(삼문, 1994)도 출간됐었다. 이 역시 <말>을 옮긴 것이다. 완역이었는지는 긴가민가한데, 만약 그렇다면 김붕구본의 독자적인 <말>이겠다. 이 두 불문학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도 각각 번역하는 바람에 나는 두 종의 번역본을 읽었다...

사르트르 얘기가 나온 김에 한권만 더 적어놓자면, 계약결혼한 아내 보부아르가 그의 죽음에 부친 책 <작별의 예식>(두레, 1982)도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 1984)에서 이 책에 관한 아름다운 평문을 읽고 시립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기억이 난다. 아, 손에 닿을 듯이 기억이 나는데, 너무도 오래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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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 Les Mots (이경석 옮김)
    from 성실히 살았으면 2009-08-25 23:39 
    장 폴 사르트르가 50대 후반에 쓴 자전적 소설이다. 사르트르의 (엄마쪽)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사르트르가 처음 책을 접하고 말을 배우고, 혼자 영화 찍는 것처럼 연기 놀이를 하고, 소설을 읽고 쓰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것이 사르트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하는 책이다. 참고로 예전에 번역되어 "책읽기와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1990년대에 나온 책도 있고, 최근 민음사 시리즈로 나온 것도 있다. 이 책을 접하게..
 
 
2008-10-29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9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8-10-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시안 프로이트 같애, 아님 말고.^^ 오랜만이어요, 언제 만나서 밥먹읍시다.

로쟈 2008-10-29 22:51   좋아요 0 | URL
아님 같애요. 한번 밥 먹으면 몇 년씩 가네요.^^;
 

커피 브레이크에 잠깐 시간을 내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문학의 갱신과 역할에 대해서 다룬 두 권의 책, <인문학의 즐거움>과 <저항의 인문학>을 뭉뚱그려서 다룬 글이다. 모두 상반기에 나온 책이고 몇 차례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얼마전 인문주간을 계기로 '인문학 문제'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았다.

한겨레21(08. 11. 03) 시민 가까이의 인문학

지난 10월 6일부터 12일까지 한국학술진흥재단 주최의 인문주간 행사가 열렸다. 2006년 ‘인문학 위기’에 대한 대응의 하나로 마련된 행사가 세 번째를 맞았고, 올해의 주제는 ‘일상으로서의 인문학’이었다. 학술제와 대중 강연, 답사, 문화 체험, 공연·전시 등의 프로그램은 예년과 다르지 않았지만 참여기관수가 늘어나면서 행사의 규모도 조금 커졌다고 한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직접 참여해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인문주간’을 보내면서 인문학을 주제로 한 책 두 권을 떠올려보았다. 미국 러트거스대학에서 교양과정의 작문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는 커트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휴먼&북스 펴냄)과 컬럼비아대학에 오래 몸담았던 저명한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마티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을 직접 쓰는 게 낫지 않을까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란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인문학의 즐거움>은 사실 ‘즐거움’과는 다소 무관한 책이다. 원제 ‘아츠 오브 리빙(Arts of Living)’은 ‘삶의 기술’이나 ‘삶의 예술’로 번역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자가 제시하려는 바람직한 인문학상일 뿐이고 실제로 그의 초점은 현재의 인문학에 대한 비판에 놓여 있다. 목차에 걸린 ‘거대한 분리 - 시민사회와 전문가’나 ‘이론이 치른 대가 - 인문학의 고립과 지식’ 같은 장 제목이 미리 암시해주는 대로 저자의 비판은 주로 ‘인문학의 엘리트 프로페셔널리즘’을 향한다. 사유의 핵심이 단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바꾸는 데 있다고 믿는 그는 인문학의 목적이 전문지식과 일상적인 생활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교양’이 아닌 ‘과학’을 표방하면서, 전문가를 위한 학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면서 고립과 소외를 자초했다.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입지를 고수하기 방책으로 과학에서와 같은 정확성을 모색해왔지만 그 결과는 시민대중과의 단절을 대가로 치른 '유사 과학'이었다. 인문학은 과학의 방법론을 모방함으로써 과학의 경쟁자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인문학 전반이 우리의 실제생활에는 그다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연구에 너무 많은 자원을 쏟아 붓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저자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예술의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서라면 영문학 같은 학문을 후원할 것이 아니라 예술을 직접 후원하는 게 더 낫지 않으냐고 말한다. 예컨대, 그는 ‘1900년까지의 영국소설’ 같은 과목을 의사, 공학자, 웹마스터 등과 같은 비전공자들에게 문화적 소양을 길러준다는 이유로, 혹은 정치적 견해를 수정하기 위해 가르치는 것보다는 수강생들이 실제로 소설을 ‘쓰고’ 리놀륨 판화를 ‘만들고’ 사진을 ‘찍는’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대부분 대학제도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인문학자라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주장이지만 인문학이 더 시민 가까이 다가서고 보다 더 예술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인문학의 즐거움>의 저자보다는 전통적인 인문학과 인문주의를 옹호하는 편이지만 <저항의 인문학>에서 사이드가 강조하는 것도 인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작가와 지식인의 공적 역할이다. 그 또한 인문학의 토대와 인문학을 둘러싼 정세가 변화했으며 그에 따라서 인문학의 정체성과 역할 또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인정한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탈식민주의 이론가로서 사이드가 주로 비판하는 것은 근대 인문학의 유럽중심주의다. 이 점에서는 세계체제론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견해를 같이하는데, 그들에 따르면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역사적으로 유럽이 전 세계체제를 지배하던 특정 시점에 유럽의 문제,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미국이라는 다섯 나라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주제선택이나 이론화방식, 방법론, 인식론 등에서 이들 학문은 그것이 태동했던 시대의 제약을 떠안게 되었다. 그러한 제약과 편견에서 탈피하기 위해 사이드는 교양교육의 주요 과목을 서구 정전으로 제한하는 일, 세계를 이해하는 유럽중심주의적 관점과 태도, 제3세계의 전통과 언어에 대한 무관심 따위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주의의 새로운 관심과 역할이 요청되는 것이다.   

인문주의와 나란히 가는 '민주적 비판'

사이드에게서 그러한 인문주의와 나란히 가는 것이 ‘민주적 비판’이며, 이것이 작가와 지식인의 공적 역할이다. 그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아랍어 단어 두 가지에서 영감을 끌어낸다. 그 두 단어는 ‘무타카프(muthaqqaf)’와 ‘무파키르(mufakir)’인데, 무타카프는 문화/교양을 뜻하는 ‘타카파(thaqafa)’에서, 무파키르는 사유를 뜻하는 ‘키프르(kifr)’에서 온 단어다. 곧 지식인이란 교양을 가진 인간이면서 사유하는 인간이다. 오늘날 지식사회의 전문화가 낳은 부정적인 양상은 이러한 전통적 지식인의 단절이고, 학계와 공적 영역의 분리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이드가 강조하는 작가-지식인의 역할은 사회정의와 경제적 평등, 그리고 ‘자유로서의 발전’(아마티아 센)에 대한 요구다. 그것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말을 빌면, “현실주의적 유토피아를 집합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의 창출”을 돕는 역할이다.

인문학 위기 담론의 유행 이후에 한국사회에서는 '최고경영자(CEO)인문학' '노숙자인문학'이 새로운 인문학의 희망처럼 번져가고 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중요한 것은 CEO도 아니고 노숙자도 아닌 ‘CEO와 노숙자 사이’가 아닐까? 바로 민주주의의 주권자로서 일반 시민들이 공부하고 향유해야 할 중간층 인문학의 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인문학인가?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인문학의 즐거움’을 맛보기 전에, ‘저항의 인문학’을 실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통과해야할 질문처럼 보인다.

08. 10. 28.

P.S. 관련페이퍼로는 '음란과 궁상 사이의 인문학'(http://blog.aladin.co.kr/mramor/1616364), '인문학의 즐거움에 대한 아쉬움'(http://blog.aladin.co.kr/mramor/2029908), '에드워드 사이드와 라이오넬 트릴링'(http://blog.aladin.co.kr/mramor/2246701) 등을 더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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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 2008-10-2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한겨레21에서 글 보고, 수업시간에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어서
글 퍼갑니다...

물론 출처 표시는 했는데,
그래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먼저 허락받지 못하고 퍼간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양해해주시길 바라면서...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

로쟈 2008-10-29 00:0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한데, 학생들보다는 강사들이 읽어야 할 책인데요.^^; <인문학의 즐거움>은 두툼한 만큼 좀 전문적일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구요, <저항의 인문학>은 번역이 썩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대학원생쯤 돼야 소화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가시장미 2008-10-29 0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댓글을 보니 두 권 다 제가 읽기에는 어려울 듯 하네요. -_ㅠ 강사들 말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을만한.. 쉬운 책도 추천좀 해주시와요. ^^

로쟈 2008-10-29 17:19   좋아요 0 | URL
<희망의 인문학>은 쉬운 편입니다. 다른 고전 읽기들도 비교적...^^;

2008-10-29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9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의 저자 앨런 와이즈먼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함께 그의 책 <가비오따쓰>(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재출간을 기념하는 뜻인 듯하다. 지난주 서점에 깔린 <가비오따쓰>가 재출간 도서(월간 말, 2002)라는 건 알았지만 역자가 생태공동체운동가인 황대권씨라는 건 이번에 알았다. 마침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저자와 역자, 두 사람의 대담이 게재되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10. 27)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 산 증거”

‘가비오타스(Gaviotas)’는 콜롬비아 동부 야노스의 오지에 있는 작은 생태공동체다. 그러나 인구 200여명의 조그만 마을이 일으킨 작은 기적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비오타스인들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불모의 땅에 열대우림을 부활시켰다.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소나무를 심었다. 또 수경재배법을 통해 채소를 자급자족했다.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시하며 구성원들이 창조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가비오타스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모델로 보여주면서 전 세계에 감동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책이 <가비오따스>(랜덤하우스)다.

저자 앨런 와이즈먼(61)은 가비오타스인들의 고군분투기를 통해 환경을 손상시키는 힘이 거꾸로 그것을 회복시키는 데도 사용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는 ‘인간 없는 세상’이라는 도발적인 상상을 통해 오늘날 ‘인간 있는 세상’의 문제점을 통찰한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가비오따스> 재출간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를 <가비오따스>의 번역가이자 <야생초 편지>의 저자인 황대권씨(53)가 지난 24일 만나 대담을 나눴다.



황대권=<인간 없는 세상>은 DMZ(비무장지대)가 모티브였다. DMZ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앨런 와이즈먼(이하 와이즈먼)=같은 민족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이를 뚫고 새가 날아와 먹이를 먹는다. 한때 폐허였던 곳이 생명들로 가득 차 있다.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의 DMZ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DMZ처럼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위기에 처해 있다. DMZ 보존은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을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립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협력하는 일이기도 하다.



황대권=나는 <야생초편지> 등을 통해 전통적 농업이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야생의 풀을 식량으로 삼고 야생에 적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와이즈먼=그렇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전통적 농업은 지속될 수 없다. 물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파괴한다. 20세기 농업 기술은 화학비료와 유전자조작으로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식량 생산량이 증가한 만큼 빈곤층도 20세기에만 4배가 늘었다.

황대권=이 시점에 <가비오따스> 출간 10년을 놓칠 수 없다.

와이즈먼=<인간 없는 세상>이 제목처럼 ‘우리가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에 대한 얘기라면 <가비오따스>는 인류가 어떻게 자연과 함께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주는 교훈이 필요하다.



황대권=10년 동안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어떻게 변했나.

와이즈먼=가장 중요한 것은 가비오타스가 콜롬비아의 극심한 폭력적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비무장 공동체인데도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야자나무를 심어서 지속가능한 바이오연료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 바이오연료를 위해 숲을 밀어버리지만 가비오타스는 기존 숲과 함께 야자나무를 심고 그것이 숲의 토양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황대권=가비오타스가 자급자족 공동체지만, 생산물을 바깥 세계에 파는 구조여서 예측하기 힘든 세계 경제에 의존한다는 딜레마가 있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까지는 생태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지만 너무 커져버리면 부작용이 생긴다. 우리가 커지는 것만을 위한 성장을 계속한다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번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지금까지 크기를 키우는 성장을 번영이라고 했다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비오타스는 ‘선한 자본주의’의 사례다. 지속가능성에 가장 가까운 생태공동체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그것이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재활용되도록 노력한다.

황대권=한국에도 생태공동체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 생태공동체 운동의 현황은 어떤가.

와이즈먼=미국에는 LA 한가운데에 커다란 생태공동체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등 매우 저렴하게 살면서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는 또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소비자가 생산자의 영농을 미리 지원하고, 수확물을 분배하는 것)가 확산되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위기와 심각한 대기 오염 등으로 인해 생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더 늘어날 것이다.

황대권=좌우 대립이 심각한 콜롬비아에서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살아남은 것을 보고 희망을 봤다. 가비오타스의 성공 이유는 무엇일까.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또 모든 이들이 공동체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그들이 비무장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게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정치적 중립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운동가도 아니다. 저널리스트다. 연구하고 사실을 발견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내 책에는 무엇이 그렇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설교하는 게 아니라 사실만을 보여준다. 그것이 책이 성공한 이유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도 단지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깨달음을 준다.

황대권=세계 금융위기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 없는 세상’에 한 발 다가가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금융위기는 <인간 없는 세상>에서 말한 대로 어떤 것이 지나치게 커지면 더 이상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지구는 수많은 재앙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아름답게 살아남았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다. 이는 순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우리가 지구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누구?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애리조나대 국제저널리즘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하퍼’ ‘뉴욕타임스’ ‘애틀랜틱먼슬리’ 등의 매체와 미국 국영라디오방송인 NPR에 진보적 관점의 글을 기고해왔다. ‘LA타임스’ 객원편집위원을 지냈다. 다수의 수상경력을 가진 베테랑 작가이기도 하다. 꼼꼼한 현장 취재와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글을 써왔다. 지난해 펴낸 <인간 없는 세상>으로 ‘미국 최고의 과학 저술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한국을 비롯해 세계 20개국에 출간되면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08.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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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말에 '상반기 베스트'를 꼽은 적이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2107809#C1526414). 그러니 10월말에 '하반기 베스트'를 꼽는 것이 억지스럽지는 않겠다(연말에 무얼 할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보겠다). 알다시피 굉장히 많은 책들이 지난 몇 달 사이에도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기준을 정하지 않으면 주관적 베스트를 꼽는 것도 어려워진다. 내 기준은 6월 이후 출간된 책 가운데, '시의성이 있으면서도 내게 영감을 준 책'이다(영감을 주는 건 제목이나 목차만으로도 가능하다). 둘다 충족되면 좋겠지만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거기에 번역서라는 조건이 추가된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국내서의 경우 내가 두루 살펴보지 못해서다. 인문 번역서의 경우는 그래도 두루 '구경'이라도 해봤다고 얼마간 자부할 수 있다. 어차피 주관적 리스트인 만큼 이러저런 변명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하여간에 "이때 이런 책이 나왔었지"란 걸 먼훗날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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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티-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
조나단 글로버 지음, 김선욱.이양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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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너선 글로버는 뜻밖의 '발견'이다. 나는 서문만 읽고서도 원서를 주문했다. 번역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기념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잘 읽고 싶어서. 지난 여름 방한했던 마사 누스바움의 강연에서도 글로버란 이름을 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공동연구를 수행한 적도 있었다고. 누스바움의 주저들도 소개된다면 단연 베스트에 포함될 것이다...
러시아 사상가-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갈등과 배반, 결단의 순간을 되살린다
이사야 벌린 지음, 에일린 켈리.헨리 하디 엮음, 조준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6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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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가장 반가웠던 책은 이사야 벌린의 이 '묵직한' 책이다.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삶과 결단의 순간들을 추척하고 있는 이 책은 러시아문학과 사상 공부에 자긍심을 불어넣어준다. 내가 나란히 꽂아두고 있는 게르첸의 자서전이나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을 주인공으로 한 톰 스토퍼드의 희곡 <유토피아의 해안>이 번역된다면, 그 또한 단연 올해의 책 후보다...
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 고생물학자 굴드 박사의 자연사 에세이
스티븐 J. 굴드 지음, 김동광.손향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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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반기 베스트 목록은 오늘 <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을 사들고 오면서 구상한 것이다. '어느 인문주의적 박물학자의 고백'이 서문이다. 멋지지 않나? 한 도서평론가는 이렇게 평했다. "굴드 박사는 시종일관 우아하고 친근한 문체로 글을 쓴다. 그의 문장에는 독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고상함과 명쾌함이 있다." 답답함과 천박함이 거들먹거리는 시대에 이 얼마나 청량한 말인가!..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새로운 역사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문강형준 옮김 / 난장 / 2008년 8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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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이 하워드 진의 베스트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8년 한국의 여름을 기억할 때 한번쯤 떠올리고 싶은, 그리고 떠올리게 될 책이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바야흐로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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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현실에 어두운 한국의 경제학자들 얘기를 옮겨놓고 보니 조금이라도 위안거리가 없을까 찾게 된다. 마침 지난주에 출간된 송기호 변호사의 책 <곱창을 위한 변론>(프레시안북, 2008)에 눈길이 간다. 저자는 알다시피 지난 촛볼 정국 때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펼친 바 있다. 프레시안에서는 우석훈씨의 발문을 옮겨놓았는데, 그걸 스크랩해놓는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6155813). 생각해보니 곱창 전골을 먹어본 지도 오래됐다. 오늘처럼 좀 쌀쌀한 날씨엔 딱 좋은데, 어쩌다가 그런 사소한 즐거움도 포기하게 되었는지...

프레시안(08. 10. 26) "송기호는, 대한민국의 '에이스'다"

송기호 변호사가 <곱창을 위한 변론>(프레시안북 펴냄)을 펴냈다. 송 변호사는 이 책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를 일방적으로 추종한 결과 우리의 농업, 먹을거리가 얼마나 위기에 처했는지를 고발한다. 송 변호사가 고군분투하며 막으려고 애를 썼던 한국 정부의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그 결과일 뿐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할 때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평화를 해치는 차별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북돋는" 통상법이 가능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지난 촛불 집회는 이런 통상법을 향한 시민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줬다. 송 변호사가 이 책을 다음 이들에게 받치는 이유이다.
  
"이 책이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을 바로잡는 정당한 활동을 하다가 부상당하고 연행되고 수배되고 처벌받은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희망한다. 특히 2008년 9월 9일 서울 조계사 앞에서 회칼에 피습을 당하신 분의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큰 충격을 받았을 가족에게도 깊은 위로를 드린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주저앉는 소의 도축을 완전히 금지하는 입법예고를 하는 데 이바지한 <PD수첩>에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 나는 허물 많은 신앙인의 한 사람이지만,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다음은 이 책에 실린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의 '발문' 전문이다. <편집자>

송기호는, 나의 벗이다
  
나도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알거나 친구를 사귀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만 보자면, 직장 시절부터 나는 '친구'와 '적', 이렇게 두 부류만으로 주변이 구성된 듯한 삶을 산 것 같다. 현대, 에너지관리공단, 총리실, 이렇게 안정된 직장들에 다니던 시절에도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나는 하극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의 상사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예의는 갖추었지만 거침없이 얘기를 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수많은 적과 아주 약간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대인기피증이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깊은 교류를 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말로 내 마음에 있는 얘기를 하기가 무섭다. 좌파로 살아온 사람들은, 크든 작든 나와 유사한 대인기피증을 삶의 증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녹색당 창당 운동을 포기한 채 더 이상 활동가가 아니던 시절, 그래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조금씩 가르치고 글을 쓰던 시절을 기억하겠지만, 나는 두 번의 직업 활동가로서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유학 가기 직전,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다음.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또 황당한 정부를 만나서 "이건 도저히 아니다"라고 글을 쓴 걸 보면 나도 곱고 편하게 산 편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스무 살 넘어서 싸운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가슴 한 편에 담고, 되도록이면 명랑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또 웃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는 편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그렇게 내가 초록정치연대의 정책실장으로, 직업 활동가로 일종의 정치운동을 하던 시절에 국회 토론회장에서 내 앞의 발제자로 처음 만났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일부러 누가 짠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토론회의 발제자로 여러 번 나서게 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정부에서 주관한 토론회에 역시 앞뒤 순서의 발제자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송기호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내가 등을 기대고 쉬는, 거의 유일한 벗이고 동지인 셈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은 법률적 분석까지 떠맡아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이것저것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송기호 덕분이다. 그는 유능하고, 진지하고, 꼼꼼하다. 이 세 가지 전부, 내가 갖추고 있지 못한 덕목이다. 나는 대체적으로 무능하고, 장난기와 짓궂음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덜렁덜렁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는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형이고, 법학과 경제학 이 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그와 내가 같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식품은 안전해야 한다, 그리고 농업이 살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점이다. 전혀 다른 조건에서, 전혀 다른 학문으로, 그리고 전혀 다른 스타일로 각각 진화해왔지만,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그는 농업이라는 문으로 들어왔고, 나는 생태학이라는 문으로 들어왔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는 '쌀나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서울 내에서만 살았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서울 밖에 나가본 완전 '서울 촌놈'이다.


  
우리 모두는 송기호에게 빚지고 있다

송기호의 눈은 언제나 농업에 가 있는데, 나는 솔직히 농민보다는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과 같이 소위 '농업 생태계'에 먼저 눈이 가고, 그 후에 농민들을 보는 편이다. 송기호의 눈은, 나와는 달리 농민들을 먼저 보고, 그 후에 농업을 보는 것 같다. 그 차이점은, 우리가 걸어왔던 다른 길만큼이나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생겨난 농산물들이 유통을 거쳐서 소비자에게 넘어가는 식품안전이라는 단계에서, 나와 송기호는 서로 등을 대고 지난 정권을 버텨왔다. 노무현 정권은 한국에서 최초로 '농업 포기 정책'을 공식화시켰고, 그 정권 내내 나와 송기호는 "농업이 뭐 그리 중요하냐?"라는, '타칭 좌파'―한나라당이 그렇게 불렀다―혹은 '자칭 진보 세력'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며, 그 포위를 끝끝내 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정권이 바뀌었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빠른 시점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문제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는 중요한 변곡점 하나를 넘었다. 그 변곡점의 최정점에 바로 송기호가 서 있었다. 그 유명한 <100분 토론>에서의 미국 농림부 서류의 오역 사건에서부터, 농림부 장관 고시의 오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송기호가 집어낸 것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공화국의,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양아치들의 난장판 사건에 대한 거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전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단단히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믿어라, 그리하면 쇠고기는 안전해질 것이다"라고 외치는 나라에 살고 있었다. 쇠고기는, 어쩌면 다가올 한국의 비극에 대한 예비자, 마치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모래 위에 성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협상 문헌에 대한 엄밀한 검토는 고사하고, 원문 번역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믿어라, 국민들아!"를 말하는 현실. 이 우울한 현실은 송기호의 손에 의해 하나씩 벗겨져 나갔고, 그 진실이 발가벗고 우리 앞에 현실로 드러났을 때, 내가 협상가로 참여하던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은 실수라기보다는 우리나라 행정 자체가 그렇고, 협상도 그렇고, 무엇보다 지금 진행되는 많은 정책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엄청난 파국 앞에 혼자 서 있던 사나이, 그가 바로 송기호였다. 그가 보여준 현실의 드라마는 위대한 문학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송기호는, 한국의 에이스다
  
한국이 거대한 야구단이라고 한다면, 좀 미안한 얘기지만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혹은 고려대학교 교수님들의 그룹은 2부 리그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학문적으로는 20~30년 전에 은퇴하였지만, 그래도 시민 야구단에서는 강속구를 뽐낼 수 있는, 그런 2부 리그이다. 그렇다면 공무원 집단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한국 야구팀의 에이스는? 류현진이다. 그는 카스트로도 감탄할 정도로, 세계 최강의 쿠바팀에도 '지대로' 통하는 한국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다. 정말 감탄스러운 투수이다. 그렇다면 진짜 한국의 에이스는 누구인가? 노벨문학상에 도전하겠다는 시인 고은인가, 아니면 노벨평화상 후보에 거론된 적이 있는 시인 김지하인가? 아니면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주는 엄청난 공로를 세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의 에이스인가? 아닌 듯싶다.
  
제대로 된 연봉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팀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지, 혹은 관객들이 충분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올해 한국에서 위기의 한국을 구해내고 다음 번 등판을 위해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리고 가장 많은 등판을 기록한 투수는 바로 송기호다. <100분 토론>을 비롯한 빅 매치들, 신문을 포함한 매체에 대한 기고, 그리고 실제 만루 위기를 병살타 처리한 깔끔한 명투구를 가장 많이 기록한, 한국의 실질적 에이스는 바로 송기호이다(이에 비하면, 나는 8점차 이상 차이 난 경기에서 패전 처리로나 가끔 등판하는, 꽈배기 변칙 좌완이다.)
  
그런 송기호가 맹활약했던 지난 게임에 대한 복기의 기록을 한국의 독자 여러분들에게 선보인다.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어지간해서는 복기를 하지 않고 "진 것은 잊어버려" 혹은 "다음 게임이 더 중요하지"라고 말하는 좀 나쁜 습관이 있다. 진 게임이나 이긴 게임이나, 어떻게 졌고 어떻게 이겼는지를 잘 복기해서 분석하는 것은 에이스가 되는 투수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습관이다.


  
만약 독자 여러분 중 송기호처럼 이기는 게임을 하고 싶고, 좋은 분석을 하면서 토론에서 절대로 소리 지르지 않고 상대방을 케이오시키는 게임을 하고 싶으신 이가 있다면, 한국의 에이스 송기호의 복기본을 잘 분석해보시기 바란다. 우리가 그의 글을 읽어야 하는 것은, 재미를 위해서나 감동을 위해서나 혹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이기는 방법을 배우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송기호가 펼쳐 보인 지난 촛불 정국의 분석은 감동스러운 드라마이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흔히 말하듯 "팬들의 성원과 사랑" 덕분이 아니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말하듯 "죽도록 열심히 했"기 때문도 아니다. 조용하지만, 그는 한국 최고의 승부사이고, 또한 최고의 국제 통상 분석가이다. 송기호는 통상 조문과 법적 절차를 분석하지만, 제발 여러분들은 송기호를 분석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팀을 꾸릴 만한 송기호 급의 에이스가 아직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내 리그나 해외 리그나, 전혀 꿀림 없이 게임을 소화할 수 있는 좋은 선발 투수 혹은 좋은 수비수들이나 의미 있는 진루타를 칠 수 있는 선발 선수들이 독자 여러분 중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명박 시대의 어둠을 딛고 흥미롭고 재밌는 게임을 펼쳐볼 수 있을 것 아닌가?(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88만 원 세대 저자)

08.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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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28 17:33   좋아요 0 | URL
농업보다 농민을 먼저 생각한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그러기가 쉽지 않죠.인류보다 인간 개인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듯이.

이중결합 2008-10-28 20:27   좋아요 0 | URL
'역사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한다'는 비유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0-28 22:55   좋아요 0 | URL
'송기호 휴머니즘'이라고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