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길에 서점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의 하나는 강유원 번역으로 새로 나온 <공산당 선언>(이론과실천, 2008)이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뿌리와이파리, 2006)도 읽은 터라 '내친 김'이란 생각도 들었고 이미 몇 종의 <공산당 선언>을 갖춰놓고 있는 만큼 '컬렉션'을 마저 채운다는 뜻도 있었다(이 <선언>과 함께, 여러 신간들을 들었다 놓고 고른 책은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간사랑, 1998)이었다. 오바마 탓일까?).  

집에 돌아와 맛보기로 내가 읽은 것은 부록 중의 하나인 '1882년 러시아어판 서문'이다. 이진우 번역의 <공산당 선언>(책세상, 2002)에도 포함돼 있는지라 비교해보기 위해 옥스포드판 영어본과 함께 한참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누구를 위한 책들인가?). 그나마 15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김태호 번역의 <공산주의 선언>(박종철출판사, 1998)이 눈에 띄기에 나란히 펼쳐놓았다(알다시피 <공산주의 선언>은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의 대본이기도 하다). 그 정도 준비한 상태에서 '러시아어판 서문'(69-71쪽)을 읽어보도록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공산당 선언>의 러시아어 초판은 바쿠닌이 번역하여 1860년대 초에 <종>의 인쇄소에서 나왔다. 서양은 당시 <선언>의 러시아어판에서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파악은 오늘날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먼저 '초판' 얘기가 나오는 것은 1882년판이 2판이기 때문이다. 바쿠닌(1814-1876) 번역의 초판이1860년대 초에 나왔다고 했지만 후주(102쪽)에 밝혀진 대로 러시아어 초판은 1869년에 출간됐다(엥겔스는 1888년 영어판 서문에서도 출간연도를 1863년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그때쯤으로 착각했던 듯하다. '1860년대 초'라는 말은 '1863년'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번역자도 바쿠닌이 아니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1856-1918, 사진)였다. 초판에 결함이 많아서 1882년에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돼 있다(<공산주의 선언>, 129쪽). 그리고 초판을 낸 잡지 '<종(Kolokol)>의 인쇄소'에는 주석이 붙어 있는데,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나는 살아있음을 외친다"를 구호로 내세운 혁명잡지. 헤르젠(Herzen)과 오가르요프(Ogarjow)가 발행. 1857년부터 1865년에는 런던에서 1865년부터 1867년에는 주네브에서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러시아에서 혁명운동 보급에 의미있는 역할을 하였다."(102-3쪽)

인용문에서 두 러시아 망명 인텔리겐치야의 표기는 부정확하다. '게르첸'과 '오가료프'라고 해야 맞다(박종철출판사판은 '알렉산드르 게르쩬과 니꼴라이 오가르요프'라고 표기했다. '게르쩬'은 맞지만 '오가르요프'는 오기다). 사진은 알렉산드르 게르첸(1812-1870, 오른쪽)과 니콜라이 오가료프(1813-1877)의 모습(1861년).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를 참조할 수 있다(게르첸의 유명한 자서전 <과거와 사색>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아무려나 러시아에서 나온 초판에 대해서 서양에서는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으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것('서양'보다는 '서구'가 더 적합하겠다. '서유럽'을 가리키니까).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은 영어본의 표현으론 'literary curiosity'이다.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라는 얘기다("어, 러시아판도 있네!"). 그러던 것이 1880년대에 들어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이젠 그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이어지는 건 그 이유다.

당시(1847년 12월)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직도 얼마나 제한된 지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는 각각의 나라들의 각각의 반정부 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라는 <선언>의 마지막 장이 극히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요컨대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러시아와 미합중국. 당시는 러시아가 유럽의 전체 반동의 최후의 거대한 예비군을 이루고 있던 때였으며, 미합중국이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여력을 이민을 통해 흡수하던 때였다. 두 나라는 유럽에 원료품을 공급하고 있었고, 동시에 유럽 공업제품들의 판매시장이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당시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존 유럽질서의 기둥들이었다.

요는 <공산당 선언>이 씌어지던 시기만 하더라도 러시아와 미국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열외 지역이었으며(그러니 이 두 나라에서 <공산당 선언>은 남의 나라 얘기였을 테다) 원료 공급처이자 판매시장으로서 유럽의 질서(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 달라졌다는 것. 먼저 미국의 경우.

오늘날에는 얼마나 다른가! 바로 유럽의 이민 때문에 북아메리카는 거대한 농업생산이 가능해졌으며, 그것의 경쟁은 유럽의 토지 소유 - 대토지 소유든 소토지 소유든 - 그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다. 게다가 그 이민 때문에 미합중국은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이제까지의 공업 독점을 머지않아 부술 수밖에 없을 힘과 규모로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다. 두 가지 사정이 아메리카 자체에 혁명적으로 반작용하고 있다. 정치체제 전체의 토대인 농업인들의 중소 규모 토지소유는 차츰 거대 농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있으며, 공업지대들에서는 이와 동시에 처음으로 대량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자본들의 거짓말 같은 집중이 전개되고 있다.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 덕분에 미국에서 (1)대규모 농업생산과 (2)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인데, "그 이민 때문에 미합중국은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이제까지의 공업 독점을 머지않아 부술 수밖에 없을 힘과 규모로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다."란 대목은 약간의 수정을 요한다. '빼앗다'란 동사는 보통 '누구에게서'란 간접목적어를 필요로 하는데, '공업자원들'을 누구에게서 빼앗는다는 말일까?

영어본에서는 "it enabled the United States to exploit its tremendous industrial resources with an energy and on a scale that must shortly break the industrial monopoly of Western Europe, and especially of England, existing up to now."로 번역되는 부분이고, 여기서 'exploit'는 '개발하다'는 뜻이다('노동력'을 목적어로 할 경우에는 '착취하다'로 번역하지만). 풍부한 노동력(이민자)을 갖게 되면서 방대한 규모의 자원 개발과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읽는 게 자연스럽겠다(<공산주의 선언>에서는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우려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라고 옮겼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하에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제 프롤레타리아 운동 또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 1848-1849년의 혁명 동안에는 유럽의 왕후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부르주아들도 이제 막 깨어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을 러시아의 간섭에서 찾았다. 차르는 유럽 반동의 우두머리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차르는 가치나(Gatschina)에 혁명의 포로로 있으며, 러시아는 유럽의 혁명적 행동의 전위를 이루고 있다.

처음 <공산당 선언>이 나오던 184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유럽 반동의 우두머리였고, 그때의 러시아 황제(차르)는 니콜라이 2세였다. 그의 뒤를 이은 황제가 1861년 농노해방을 단행한 알렉산드르 2세(사진)인데, 이 1882년 러시아어판 <공산당 선언>이 나오기 직전인 1881년에 '인민의 의지' 당원들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의 위협 때문에 한동안 페테르부르크 주변의 가치나에 칩거한다. "오늘날 차르는 가치나(Gatschina)에 혁명의 포로로 있으며"라는 대목은 그런 사정을 가리킨다. 러시아는 이제 유럽 혁명 대오의 전위다!

<공산당 선언>은 블가피하게 닥쳐오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적 소유의 해체를 선포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러시아에서 급속히 꽃피는 자본주의로 인한 현기증과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부르주아적 토지소유에 대립하여, 토지의 태반이 농민들의 공동 보유임을 발견한다.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오늘날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이렇다. 러시아의 혁명이 서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지금 러시아의 토지 공동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두 문단이다. 이 결론부가 아마도 러시아판만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러시아의 향후 운명(혹은 진로)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먼저 유의할 단어는 '오브시치나'(러시아식 농촌공동체, 곧 '농촌 코뮌'을 말한다. 발음은 '옵쉬나'). 강유원본에는 따로 주석이 붙어 있지 않은데, 김태호본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오브쉬치나'를 '오브시치나'로 수정해서 옮겨본다.

러시아 촌락 공동체를 흔히 미르라고 부르는데, 이 촌락 공동체를 토지 소유와 분배 형태를 중심으로 파악할 때는 오브시치나라고 부른다. 촌락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자연적 결합이며, 가옥은 사유 재신이지만 경지는 공유되어 몇 년마다 성원 사이에 재분배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각 성원은 분배받은 경지를 사적으로 점유하여 경작했다. 방목지 등은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은 이 촌락 공동체를 근거로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7쪽)

지향적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해체와 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목표로 한다. 한데, 1880년대 러시아 사회는 부르주아적 토지소유와 농민 공동체(오브시치나)의 공동소유가 공존하고 있었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였다. 인민주의자들(나로드니키)은 직접적인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친 이후에 비로소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고 강변했다.    

이 쟁점에 대한 유익한 안내서가 베르쟈예프의 <러시아 지성사>(종로서적, 1980)이다. 러시아 지성사의 전개도 다루고 있지만 원제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The Origin of Russian Communism)'(영역본)이다. 러시아어본의 제목은 '러시아 혁명의 기원과 의미'이고. 참고로, 예전에 같이 소개됐던 <러시아 사상사>(범조사, 1985재판)는 원제가 '러시아 이념'이다.

Николай Бердяев Духовные основы русской революцииНиколай Бердяев Русская идея

다시 반복하자면,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얻었던가?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렇지는 못하다. 마르크스는 이듬해인 1883년에 세상을 떠나며 엥겔스도 1895년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역사는 러시아 혁명의 시작과 끝까지도 목격하였다.1880년대에도 "심하게 붕괴된 형태"라고 했던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지금은 거의 와해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 선언>의 메시지는 어떻게 해독되고 실천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계급의 대립을 철폐함으로써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이다.(강유원, 역자후기, 159쪽)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획은 아직도 유효한가? 아직도 가능한가? <공산당 선언> 160주년을 보내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08. 11. 08.

Первая программа Союза коммунистов. "Манифес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в контексте истории

P.S. 이미지는 작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된 <선언> 160주년 기념판이다. 그리고 아래는 1848년에 나온 독일어판 <공산당 선언>과 1948년에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러시아어판 <공산당 선언>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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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라는 잡지는 <낭만의 망명객>을 읽고서 알게 되었죠.그리고 그 책에 나온 게르첸과 오가료프,게르첸 부인의 삼각관계는 참...거시기하더군요.게르첸은 부인을 친구에게 뺏기고 그 슬픈 마음을 자서전에 담았다고 하는데 일본에는 번역되어 있다네요.자서전 문학의 명저라는데 저도 읽어 보고 싶어요.엄청나게 두툼하답니다.

로쟈 2008-11-08 16:44   좋아요 0 | URL
네, 꽤 두툼하죠. 저도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을 모셔두고만 있으니까요. 톰 스터파드의 드라마까지 해서 세트로 번역되면 좋을 텐데요. 저는 제 코가 석자라서 엄두를 못 내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를 버린 여자가 다른 남자 애기까지 임신하고...아...그 심정이 어땠을까요.그 무렵에 유럽의 1848년 혁명까지 실패했으니 그가 비관주의자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아요.

로쟈 2008-11-08 19:5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농민 공동체에 대한 기대로 넘어가니까 아예 비관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겠죠...
 

주말 북리뷰들을 둘러보다가 눈에 띈 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출판인포럼에 참석차 내한한 일본의 한 원로 편집자의 인터뷰 기사다. 일본 출판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표적인 인문서적 출판사인 헤이본사의 대표편집국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출판 편집자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이 눈길을 끈다. 이렇게 저렇게 안면을 튼 편집자들이 열명은 되고, 나 역시도 '편집간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 그가 던지는 '위대한 편집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란 물음에 흥미를 느낀다. 대답은 간명하다. 읽는 것! 그가 참여했다는 '독서회'가 우리 출판계에도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한겨레(08. 11. 08) “위대한 편집자는 끝없는 독서가”

한국출판인회의가 창립 10돌을 맞아 기획한 세계출판인포럼을 이틀 앞둔 지난 4일 서울 세종호텔에 여장을 푼 류사와 다케시(63·사진) 전 헤이본(평범)사 대표편집국장의 손에는 노란 포스트잇 딱지들이 잔뜩 끼워진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정말 좋은 책이어서 두 번째 읽고 있다”는 그 책은 <조선전쟁의 사회사>,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쓴 <전쟁과 사회>의 일본어 번역본이다.

편집자는 무엇보다도 ‘읽는’ 존재다. 그밖에도 다양한 역할과 중요한 일이 편집업무에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편집의 진정한 핵심은 ‘읽는 것’이다. 그게 거의 대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쓴이가 하지 못하는 것, 글쓴이 이상으로 편집자에게 가능한 것, 그것은 읽는 것이고 정독하는 것이며 비평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편집이라는 끝이 없는 일의 출발점이 아닐까?”

이번 포럼에서 발표할 글의 주제인 ‘위대한 편집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대답을 그는 ‘읽는 것’,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전세계 출판인 50여명이 함께한 이번 포럼에는 출범 4년째인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제7차 대회의 확대판으로 세계편집자포럼도 함께 열렸다.

게이오대학 경제학부에서 사상사를 전공한 그가 일본의 대표적 인문서적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헤이본사에 입사한 건 1968년. 신출내기 편집자 시절부터 담당했던 대표적 혁신계 사회과학자요 인문학자인 후지타 쇼조(5년 전 작고)를 따라 대여섯명 규모의 독서회에 참가했다. 고전학자 사이고 노부쓰나와 함께한 또다른 독서회는 그가 지난 1월 타계할 때까지 37년간이나 계속했다.

일본 고전과 구미의 고전 중에서 번역되지 않은 문학이론이나 역사이론서들을 “한 줄 한 줄 소리내어 가며 매우 엄밀하게 읽었던” 독서회는 매월 1회 일요일 오후에 6시간씩이나 이어졌다. “매번 준비하고 사전조사를 하는 게 몹시 힘들어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직무상의 일과는 직접적인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라 여겼고, 거기서 읽는 일의 즐거움과 깊이를 느꼈다. “30여년이나 계속된 독서회는 아마 드물겠지만, 헤이본사 내에도 독서회가 여럿 있었을 정도로 일본 출판계엔 70년대까지는 그런 모임이 상당히 많았다. 그게 일본 출판계 힘의 원천이었다.”

2000년까지 32년간 헤이본에 근무하면서 8년간 편집일 전체를 총괄하는 이사로서 대표편집국장직을 맡았고 방대한 백과사전의 디지털화라는 선구적 작업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충실한 ‘읽기’가 바탕이 됐나 보다. 근대 일본의 발전은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이에 조응한 방대한 서책(書物) 발간의 상호 상승작용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그는 말했다.

“1960~80년대까지만 해도 이와나미 신서의 권당 10만부 판매 여부가 성패의 척도가 될 정도로 책이 많이 읽혔다. 대형 출판사들은 매년 대졸자들을 5~6명씩 뽑았고 그들의 월급은 일반 대기업 사원들보다도 월등 높았다. 그들은 최고급 지식인들이었으며 유명작가들도 편집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80년대부터 조락의 기미가 보이더니 90년대 들어서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와나미, 주오고론, 고단샤에서만 나왔던 신서들도 여기저기서 출판됐으나 비슷한 기획들로 차별성이 없어졌으며, 그나마 괜찮다는 이와나미 신서 초판이 1만여부 판매 수준으로 졸아들 정도로 기운은 쇠락했다. 탈활자화가 무섭게 진행됐다. “2000년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신문연구소의 후신)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신문 읽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5% 정도가 손을 들었다. 호세이(법정)대 강의 때도 매년 그렇게 물었는데 손 든 사람은 3~5%밖에 되지 않았다.”

편집자들도 여유가 없어졌다. “예전엔 편집자 한 사람이 연간 6~8권의 단행본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그때의 2배인 10여 권이나 된다.” 부수가 적더라도 수십년 이상 꾸준히 읽히면서 영향력이 지속되는 좋은 책이,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라도 단기간에 그 영향력이 끝나버리는 매체나 책보다 훨씬 더 낫다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편집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해서는 좋은 책이 나올 수 없다.”

독서행위 자체를 지식과 사람들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공동행위’로 파악하는 그는 과잉 시장화·상품화가 부른 출판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사회 주체들이 ‘공동전선’을 결성해 반지성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국경을 넘은 공동전선이 필요한 것이다.

1년에 3~4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재체제 아래서 한국 젊은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해적판을 구해 읽었다는, 상상도 하지 못한 놀라운 사실에서, 만든 이들의 손을 떠난 순간 읽는 이의 것이 돼버리는 책의 엄청난 침투력을 새삼 실감했다”고도 했다.(한승동 선임기자)

08. 11. 07.

P.S. 독서행위 자체가 지식과 사람들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공동행위’라는 주장에 눈길이 간다. 일종의 '독서 코뮤니즘' 아닌가? 음미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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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8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8 0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8-11-08 10:53   좋아요 0 | URL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의 표지가 참 인상적입니다. 찾아보니 국내 디자인 팀의 작업이네요. 이래저래 책은 영물인가 봐요. 덕분에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1-08 16:42   좋아요 0 | URL
책만한 물건도 드물죠.^^;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3   좋아요 0 | URL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엔 정말 재미있는 일화가 많아요.소련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구요,칼 쇼르스케가 일본 방문한 이야기도 있어요.한때 일본에 함스부르크 황혼기에 대한 책이 많이 팔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쟈 2008-11-08 16:4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9   좋아요 0 | URL
독서회에 모여서 저렇게 책을 읽는군요.정말 대단한 직업의식입니다.

로쟈 2008-11-08 16:42   좋아요 0 | URL
저런 모습이 '스탠다드'라면 좋을 텐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7:33   좋아요 0 | URL
저도 80년대의 일본의 인문사회과학 번역본들을 90년대부터 헌책방에서 꽤 사모았죠.지금도 도움이 많이 된답니다.그리고 광주의 모 도서관에는 아사하라 쇼코(오옴 진리교 교주)의 저서<최후의 해탈자>도 있답니다.이 이야기를 광주사는 일본 남성에게 했더니 와...한국 대단하다고 하더라구요.

로쟈 2008-11-08 19:51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어지간한 대학도서관에도 없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9 15:44   좋아요 0 | URL
아사하라 쇼코가 광주에 오옴 진리교 한국지부를 두려고 그랬을까요.

로쟈 2008-11-09 20:52   좋아요 0 | URL
ㅎㅎ 광주 분위기가 그런가요?..
 

'로쟈의 한줄'을 오랜만에 적어둔다. 아니 정확하게는 '로쟈의 한 단어'라고 해야겠다. 최근 번역돼 나온 <독일 비애극의 원천>(새물결, 2008)의 첫 페이지를 들춰보다가 발견한 '한 단어'이다. '인식비판적 서설'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벤야민 선집 6권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외>(길, 2008)에도 '인식비판적 서론'이라고 포함돼 있다. 각주에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최성만/김유동 옮김으로 2008년 중반에 한길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라고 돼 있다. 출간은 좀 미뤄지는 듯한데, 이 '서론'은 최성만 교수가 맡은 부분이고 한길사의 양해를 얻어 수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벤야민이 이 서설/서론에서 제사(에피그라프)로 끌어오고 있는 것은 괴테의 '색채론 역사의 자료'('색채론의 역사에 관한 자료')이다('자료'이니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국역본 <색채론>에는 빠져 있을 듯하다). 두 번역본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일단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건 한 단어이다. 두 번역을 차례로 옮겨본다.

"지식에는 속이 없고, 반성에는 겉이 없어서 지식에서든 반성에서든 전체는 엮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서 어떻게든 일종의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학문을 필히 예술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체성을 보편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것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예술이 언제나 전적으로 개개의 예술작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듯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학문도 역시 매번 전적으로 각기 개별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바에서 입증되어야 한다."(새물결, 11쪽)

"전체라는 것은 지식에서든 성찰에서든 조립될 수 없는데, 그것은 지식에서는 내부가, 성찰에서는 외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학문에서 모종의 전체성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 학문을 예술로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우리는 그 학문을 어떤 일반적인 것, 과도하게 넘쳐나는 것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고, 예술이 각각의 개별 예술작품에서 재현되듯이 학문 역시 각각의 개별 대상에서 그때그때 온전히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길, 145쪽)

말하자면, 이 대목은 벤야민 번역이 아니라 괴테 번역이고, 비교해서 읽어보다가 발견하게 된 건, 의아하게 생각한 건 강조한 두 단어의 차이다. 다른 부분들에서의 차이야 번역 문체상의 차이로 넘어갈 수 있지만 똑같은 단어를 '전체성'과 '학문'으로 다르게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제3자 대조를 위해서 영역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Neither in knowledge nor in reflection can anything whole be put together, since in the former the internal is missing and in the latter the external; and so we must necessarily think of science as art if we expect to drive any kind of wholeness from it. Nor should we look for this in the general, the excessive, but, since art is always wholly represented in every individual work of art, so science ought to reveal itself completely in every individual object treated.(Verso판, 27쪽)

문제의 단어는 this(이것을)로 번역돼 있다. 짐작대로 지시대명사다(그건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의 두 역자는 이 '이것'을 서로 다르게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맥상 무엇이어야 할까? 괴테가 이 대목에서 '기대하는' 것이 '전체성'이므로 '찾으려는' 것 역시 '전체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대목의 번역은 어느 한쪽이 수정되어야 한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의역/직역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과제'를 실행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08. 11. 07.

P.S. 참고로, 차봉희 편역,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에도 '인식비평 서론'이 번역돼 있는데, 같은 대목이 이렇게 옮겨져 있다. "지식은 성찰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것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전자에서는 내적인 것이, 후자에서는 외적인 것이 빠져 있으므로, 어떤 유형으로든지간에 우리가 학문에서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학문을 필연적으로 예술로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은 일반적인 것이나 전체적인 것 안에서 추구될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술이 늘 개개 예술 작품 속에서 구현되듯이, 학문도 역시 모든 개개의 분야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180쪽) 여기서도 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을 번역어로 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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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1-07 13:22   좋아요 0 | URL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Da im Wissen sowohl als in der Reflexion kein Ganzes zusammengebracht werden kann, weil jenem das Innre, dieser das Äußere fehlt, so müssen wir uns die Wissenschaft notwendig als Kunst denken, wenn wir von ihr irgend eine Art von Ganzheit erwarten. Und zwar haben wir diese nicht im Allgemeinen, im Überschwänglichen zu suchen, sondern, wie die unst sich immer ganz in jedem einzelnen Kunstwerk darstellt, so sollte die Wissenschaft sich als jedesmal ganz in jedem einzelnen Behandelten erweisen.

문제 삼으신 곳은 독일어에서도 역시 지시대명사 "diese"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인데요, 예를 들어 이 부분이 첫 문장에서처럼 "jenem(Wissen)"과 "dieser(Reflexion)"로ㅡ두 명사의 위치와 성이ㅡ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문맥이었다면 그것이 "전체성(Ganzheit)"을 가리키는 것인지 "학문(Wissenschaft)"를 가리키는 것인지 좀 더 확연히 드러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두 단어 모두 여성 명사라 "diese"가 지시하는 것을 명사의 성으로 따져보려는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는군요.^^;

다만 1) 문법적인 관점에서 "diese"가 그 이전 문장 안에서 가장 나중에 등장했던 단어를 받는 것이라는 원칙을 상기해본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말은 "전체성(Ganzheit)" 또는 "모종의 전체성(eine Art von Ganzheit)"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2) 내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학문 역시 예술의 방식을 따라 일반적인 것(das Allgemeine)과 과도한 것(das Überschwängliche) 안에서가 아니라 개별적인(einzelnen) 것 안에서 전체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역시나 "diese"는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두 번째 번역에서 "학문"으로 옮겨진 목적어를 '전체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학문' 정도로 이해한다면 내용적인 면에서 크게 어그러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축자적인 면을 고려하는 적확한 번역을 생각할 때는 두 번째 번역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1-07 23:26   좋아요 0 | URL
네, 짐작대로군요. 러시아어에서도 '전체성'과 '학문'이 모두 여성명사입니다.^^;

2009-03-03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랑구 2009-03-10 01:35   좋아요 0 | URL
로자님, 아직 책을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 권 부쳐드리고 싶습니다.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학문과 전체성 얘기의 힌트에 감사하는 마음에서요.
그리고 지난 번 글은 꼭 '비밀 댓글'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체크하는 난이 있기에 어리버리 체크하는 바람에..

최근에 제가 학생들과 스터디하면서 아감벤(남겨진 시간), 바디우(사도 바울), 랑시에르(미학안의..), 지젝(죽은 신..)의 글들을 죽 읽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벤야민이 간섭되고 있는 글들이고요. 그들이 서로 비슷한 측면을 공유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들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에게도 와 닿아야하는데, 그 점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서양 사상가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에 바쁜 우리, 그런 우리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로쟈님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좀 해보시길 권합니다.

아 참, 기술복제도 최근에 로쟈님 지적을 숙고하면서 좀 손질을 봤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감사^^ 그 때 제가 반응을 했었죠. 여하튼...

로쟈 2009-03-10 06:20   좋아요 0 | URL
아, 책은 바로 구입했습니다.^^ 내달에나 읽어볼 듯합니다. 여러 철학자들의 벤야민 커넥션에 대해선 좋은 글을 써주시기를!^^
 

어제오늘 '오바마 혁명'으로 들떠 있지만, 내일 11월 7일은 러시아혁명 기념일이다. '10월 혁명'이라고 보통 불리지만, 그건 구력으로 1917년 10월 25일에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요즘으로 신력으로는 11월 7일이다(그러니까 신력으로는 '11월 혁명'이다). 러시아에서는 몇년 전부터 국경일에서도 제외됐지만, 다행히 이를 기념할 만한 책이 올해도 출간됐다. 프레더릭 코니의 <10월 혁명>(책세상, 2008)이 그것이다. 2004년에 나온 책이니까 '고전'이라기보다는 '최신' 연구서다. 부제는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 나는 주초에 책을 구입했지만 아직 읽어볼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거를 수는 없어서 러시아 혁명에 관한 읽기 리스트라도 만들어둔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로 골랐다(기대만큼 많이 소개되진 않았다. 절판된 책들도 있고)...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10월 혁명-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
프레더릭 C. 코니 지음, 박원용 옮김 / 책세상 / 2008년 10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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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옮김 / 교양인 / 2008년 3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2008년 11월 06일에 저장
구판절판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슬라보예 지젝.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외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08년 5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2008년 11월 06일에 저장
절판
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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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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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새물결, 2008)이 출간됐다(원래는 한길사에서도 출간한다고 예고돼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 별다른 리뷰들이 뜨지 않아 그냥 마이리스트만을 만들어둔다. 벤야민에 관한 리스트는 뽑아놓은 적이 있기 때문에 대신 바로크 관련서들을 찾았다. '독일 비애극'이 주로 바로크 드라마들이기 때문이다(러시아어본의 제목은 아예 <독일 바로크 드라마의 기원>이다). 바로크 관련서라면 음악, 미술, 건축 등이 떠오른다. 바로크 미술에 대해서는 이번에 열리는 '서양미술거장전'이 좋은 볼거리가 되겠다...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
발터 벤야민 지음, 조만영 옮김 / 새물결 / 2008년 1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11월 04일에 저장
품절
바로크
신정아 지음 / 살림 / 2004년 11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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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꿈 : 1600-1750년 사이의 건축
프레데릭 다사스 지음 / 시공사 / 2000년 8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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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로크, 어떻게 이해할까?
토마스 R. 호프만 지음, 이주영 옮김 / 미술문화 / 2007년 9월
12,000원 → 12,000원(0%할인) / 마일리지 36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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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2008-11-05 11:12   좋아요 0 | URL
한길사에서는 현재 편집중에 있는데 곧 출간될 것으로 보입니다. 번역자는 김유동(강원대 교수, 독문학)과 최성만(이화여대 교수, 독문학) 선생입니다. 특히 김유동 교수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으로 써서 이 분야의 진정한 탁월한 연구자입니다. 역주가 아주 깐깐하고 풍부하게 달려있다고 들었습니다. 기대해보죠.

geistes 2008-11-05 11:37   좋아요 0 | URL
김유동교수는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혹 정말 독일에서 논문을 썼다 하더라도 '독일에서 논문으로 써서...진정한 탁월한 연구자'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문제가 있네요.

하지만 '새물결'이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이 확 나긴 하네요. 동문선과 함께 경계하는 출판사 중 하나입니다.

로쟈 2008-11-05 18:45   좋아요 0 | URL
동문선보다는 그래도 나은데요.^^

책사랑 2008-11-05 16:53   좋아요 0 | URL
물론 전공자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번역을 보장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수년 간 연구해온 성과는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알려드리고자 한 것은 그래도 전공자에 의한 번역이 그나마 좋은 번역을 위한 최소의 조건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 서울대에서 학위를 하신 듯 합니다. 알아보아야 할 듯... 뭐, 그것이 번역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리고 벤야민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벤야민 사상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서 국내 벤야민 전공자들도 세부 분야를 전공했죠. 그런 점에서 김유동 교수는 바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으로 학위를 해서 '진정한 탁월한 연구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점을 믿고 번역을 기다려보자는 취지에서... 이해를 부탁합니다.

로쟈 2008-11-05 18:44   좋아요 0 | URL
아마 다른 분과 혼동하신 것 같습니다. 김유동 교수는 아도르노 전공자이고, <아도르노 사상> 등의 저작을 갖고 있습니다. <계몽의 변증법>의 역자이기도 하구요. 연구와 번역은 성격이 좀 다른데, 아무튼 이름을 걸고 나오는 책인 만큼 기대는 해봅니다...

책사랑 2008-11-05 19:17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경상대 독문과 김유동 교수가 아도르노 전공자이시고, 제가 말씀드린 김유동 교수는 지난 해인가 강원대 독문과 교수로 임용된 동명이인의 다른 분입니다. 제가 두 분을 모두 알기에 말씀드립니다.

로쟈 2008-11-05 21:11   좋아요 0 | URL
동명이인이었나요?!..

geistes 2008-11-06 00:15   좋아요 0 | URL
호기심에 찾아봤는데 정말 강원대독문과에 김유동이란 분이 계시네요.
국회도서관에 검색해보니 그 분이 쓰신 것으로 추정되는--경상대 김유동교수도 비슷한 '업계'종사자이시니 헷갈립니다^^--벤야민 논문이 2편정도 있네요.
박사학위를 어디서, 무엇으로 했는지, 내신 책도 없는 것 같고, 앞으로 기대를 해봐야겠군요. 근데 윗분은 저분을 '진정한 탁월한 전공자'로 인정해주시는 것을 보니 저 분이 쓰신 박사학위논문을 읽어보셨나 보군요.
번역에 나서신 분이 그 분이라면 한국에서 만들어내는 자신의 첫번째 학문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최x만교수님은 새물결의 벤야민 번역에 분개하시던데, 여하튼 새물결의 번역은 믿음이 안갑니다. 책값만 얄굿게 비싸구요.

바벨의도서관 2008-11-06 13:11   좋아요 0 | URL
geistes 님, 이제는 물론 확인하셨겠지만,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도르노 전공자로서 경상대에 재직 중이신 김유동 교수님과 독일에서 [독일 비극의 원천]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책사랑 님 말씀대로- 강원대에 재직하고 계시는 김유동 교수님은 다를 뿐 아니라, 이 김유동 교수님은 벤야민 전공 이전에 [독일 비극의 원천] 번역의 적임자인 게지요.

geistes 님의 말("근데 윗분은 저분을 '진정한 탁월한 전공자'로 인정해주시는 것을 보니 저 분이 쓰신 박사학위논문을 읽어보셨나 보군요.")에는 솔직히 비아냥이 느껴집니다. 박사학위논문을 읽어보지 않아도 그런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벤야민 전공자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지의 여부를 알면 됩니다(국내의 벤야민 전공자들이 많지 않아, 저도 대부분의 전공자들(강사와 교수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책사랑 님이 김유동 교수님의 박사학위논문을 읽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진정[…] 탁월한 연구자"라는 평가는 필경 이전에 한길사에 계실 때 알게 된 최성만 교수님을 통해 접하게된 평가를 그대로 반복한 것일 테지요. 그러나 그 평가의 근거로 내세운 "독일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으로 써서"라는 표현이 그렇게 다그칠 정도의 문제인 지는 모르겠습니다. [독일 비극의 원천]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썼으니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이 분야의 전문가다 정도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일 텐데 말입니다.

......

그러잖아도 그제 김유동 교수님과 이 난데없는 번역본 때문에 통화했습니다. 최성만 교수님이 이미 전화로 알려주었다면서, "이런 책에는 번역본이 여러 개 있는 것이 좋지요"라고 말하며 웃으시더군요. 물론 진짜로 웃을 기분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선점 효과의 문제가 있으니까요).

geistes 2008-11-06 18:50   좋아요 0 | URL
책사랑님과 카이로스님은 출판계에서 일하시는 것 같고, 서로 일면식이 있으신 분 같습니다.
뭐 대단한 논쟁을 벌이자는 일도 아니니 간략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책사랑님이 가지고 계신, 아니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편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특히 학문의 경우, 어떠한 근거로 그 사람의 업적을 평가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해외학위의 경우 한국에서 검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수사회를 봐도 동료교수가 해외에서 학위했다고 하면, 같은 전공자일 경우 그것을 구해 읽어보는게 '업계' 윤리상 당연한 학문적, 인정적 윤리(!)일텐데 그런 것조차 무시될 경우가 태반입니다. 지도학생이 지도교수가 무슨 논문을, 저작을 썼는지 모르는, 그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경우가, 동료가 쓴 책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 대부분은 한국에서 논문을 쓴 이에 대한, 한국에서 한국어로 공부를 하는 이에 대한 편견에 쌓인 무지 도는 무관심에 기인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나마 한국에서 나온 학위, 학술지 논문은 논문 쓸 때 찾아나 보지요, 해외에서 나온 논문은 거의 체면치레로 참고문헌에 올려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강원대 김유동 교수님의 학문적 업적이 정말 업계에서 인정받는다면, 그래서 '진정한 탁월한 연구자'라는 평가를 내릴려면, 동료 학자들의 구술로 된 인정이 아니라 평가주체인 동료학자가 쓴 논문을 읽어보면 됩니다. 그 논문이 학문적 인정을 받는다면 동료학자가 읽었을테고 참고문헌으로 인용을 했겠지요. 이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사항입니다. 이 정도만 상식적으로 확인을 하시고 기획이나 편집을 임하신다면, 뭐랄까요, 동료학자들의 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가장 편하고 권위있는 방식이 동료들의 평가에 의한 것이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편집인은 책에 가장 적합한 연구자를 물색하고 확인하고 검증할 책임이 있는 역할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학자에 대한 평가는 학자가 내리는게 다르고, 기자가, 출판편집자가 내리는 평가는 또 다른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한 분야의 전문가라면, 특히 인문학의 전문가라면 당연히 자국어로 된 연구서나 번역, 논문으로 평가해야 되지 않을까요. 소문으로만 떠도는 해외 학위로 무엇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국회도서관에서 그 분의 논문을 찾아본 것은--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교수까지 오르신 분이 연구서 하나 없고, 학술지 논문이 두편 정도밖에 안된다는 사실이--물론 더 되는데 제가 못 확인한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의외로 여겨집니다. 저는 그 분이 동료들사이의 평가 외에는 아직 벤야민 전공학자로서 검증이 되지 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분의 해외학위 하나로 전문분야의 탁월한 성취 운운하는 것이 나이브하다고 생각하는 제 판단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한길사 번역이 나오면, 새물결 번역과 비교해 진정 번역자의 전문가로서의 검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학위여부가 아니라 번역서의 번역 정도가 진정 학자로서의 진검승부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제가 자주 들르는 싸이트에 나름 지적권위를 가진 한 분은 새물결 번역을 소개하면서 벤야민의 사상이 너무 난해해서 '공들인 번역본을 가지고도 읽어낼 수가 없다'라고 평하시더군요. 저는 직접 두 번역으로 평가해보려 합니다.

여하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geistes 2008-11-06 14:35   좋아요 0 | URL
그리고 제가 최성만교수님께 벤야민 번역에 대한 분개--아케이드프로젝트등에 대한--를 우연히 낀 술자리에서 사담으로 들었던게 2005년 초봄이었는데 벌써 3년반도 훨씬 넘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겠지만 솔직히 이젠 그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출판돼나온 책으로만 평가하자 싶습니다.

바벨의도서관 2008-11-10 15:58   좋아요 0 | URL
geistes 님, 답글 잘 읽었습니다. 이상하게 위의 글에는 답글이 달리지 않네요. 며칠 동안 답글을 못 단 이유입니다. 오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글에 딸린 '댓글달기'를 눌러보니 여기는 열리네요.

전에 상당히 큰 규모의 인문사회과학 출판사 편집부에서 한동안 일했지만, 책사랑 님과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분이 작년 말에 이곳, 로쟈 님의 '북'로그에서 자기의 이력을 간단히 언급한 것을 통해 알 뿐입니다.

로쟈 2008-11-06 23:30   좋아요 0 | URL
설왕설래가 많은 듯한데, 책이 출간되면 다 해명될 수 있겠죠...

lefebvre 2008-11-07 11:55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얘기들이 오고갔었군요! 저도 호기심에 강원대 김유동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찾아봤더니 논문 제목은 "Walter Benjamins Trauerspielbuch und das barocke Trauerspiel: Rezeption, Konstellation und eine raumbezogene Lektüre"이네요. 지도교수는 Klaus Garber인 듯하고('-인 듯'한 이유는 감사의 말을 보내곤 있는데 지도했다 안 했다는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참고문헌을 보니 가버 교수의 벤야민 연구서 2권이 있기는 합니다만), 2004년에 출판된 걸 보니 굉장히 빨리 국내에서 교수자리를 차지하셨네요! 단 4년만에! ㅎㅎㅎ 아참 학교는 처음 들어보는 대학이네요. 오스나브뤽대학(Universität Osnabrück). 하노버라는 도시로 유명한 니더작센 주의 또 다른 도시 오스나브뤽에 있는 공립학교라고......

로쟈 2008-11-07 23:27   좋아요 0 | URL
조사가 확실하네요.^^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 관한 김교수의 논문을 읽어봤는데, '서술구조'만 다루고 있어서 좀 아쉽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6:08   좋아요 0 | URL
오스나브뤽은 경제사에 나오는 한자동맹의 일원인 상업도시로 유명했는데 여기서 일생을 보낸 학자 유스투스 뫼자는 헤르더와 괴테에게도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독일 낭만주의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지요.괴테의 <시와 진실> 13장 끝무렵에 이 도시와 뫼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읽어보세요.그다지 길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독일어 잘하는 사람들 부러워...저는 이름만 독일어지 단어 몇개 밖에 몰라요.

로쟈 2008-11-08 16:53   좋아요 0 | URL
그 몇 안되는 단어에 '오스나브뤽'도 들어가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7:25   좋아요 0 | URL
고유명사는 꽤 많이 안답니다.일반명사는 안되지만요.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