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학원에 다녀올 때까지 한두 시간 '재택'을 해야 할 상황이어서 무얼 할까 하다가, 지난주말에 미뤄놓은 페이퍼를 쓰기로 했다. 사실 오전에 네댓 시간을 원고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15매를 쓰면서 그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는 게 좀 우울하긴 하다. 사전준비가 부족한 탓이다) 여가를 좀 가졌으면 싶지만 요즘 형편이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고 또 막바로 '생계'와 관련한 일을 하자니 스스로를 너무 혹사시키는 듯하여(?) '무보수 알바'을 하기로 한 것(서재일이 내겐 '무보수 알바'에 해당한다). 게다가 오늘은 무보수에다 '불편한 알바'로군...     

 

<뉴레프트 리뷰>(길, 2009)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게 두어 주 전이다. 나는 격월간인 이 잡지가 연간으로 번역된다는 게 좀 불만스럽긴 하지만 서구 이론/담론의 한 수준을 보여주는 잡지(혹은 학술지)이기에 소개되는 것 자체는 환영한다. 그래서 바로 구입을 하고 가장 먼저 읽을 논문으로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와 테리 이글턴의 '자본주의와 형식'을 꼽고서 원문까지 구했다(랑시에르의 원문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참에 랑시에르의 미학, 혹은 '미학과 정치'를 정리해보자는 게 개인적인 계산이었다.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과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2008), 그리고 작년 12월 방한 강연문의 하나인 '감성적/미학적 전복'이 정리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관심사는 '뉴레프트 리뷰'와는 별로 상관이 없고, 다만 랑시에르의 미학에 한정돼 있었던 것.  

랑시에르의 글을 읽으며 그런 관심에 걸맞는 '한정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면 좋았겠다. 한데, 막상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건 불편과 당혹감이다. 그 불편은 먼저 두 가지 출처를 갖는다. <뉴레프트 리뷰>의 출간을 소개하는 기사의 이런 대목: "출판사측은 “현재 국내에 있는 좌파적 성격의 잡지들은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을 반영할 뿐”이라며 “1년간의 준비 끝에 나오는 <뉴 레프트 리뷰>의 한국어판은 우리의 협량한 지적 풍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고 밝혔다."(한국일보) 그리고, <미학 안의 불편함>의 역자가 '옮긴이 서문'에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런 대목: "이런 의문들이 드는 것은 랑시에르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여러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글들이, 그리고 그 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들이,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결국 현실과 분리된 채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말장난 하는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생각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21쪽)  

물론 정확하게 똑같은 대상을 두고 평한 것은 아니지만 <미학 안의 불편함>의 역자가 거명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들뢰즈,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르, 바디우 등인 걸 보면, 그리고 <뉴레프트 리뷰>에서 보드리야르나 바디우, 랑시에르의 글도 읽을 수 있는 걸 보면 서구산 '고담준론'에 대한 두 가지 평가는 사뭇 대조된다. 그들의 이론/철학은 "한국의 협량한 지적 풍토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의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나로선 '둘다 불편하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두 가지 평가가 모두 번역이란 매개를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에서라면 어떻게 고급 수준의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이 나올 수가 있을까?(그러니까 낮은 담론 수준 운운은 누워서 침뱉기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말장난"이라도 우리에게 제대로 번역/소개된 적이 있을까?(사실 '메시지'야 어떻게 전달한다손 치더라도 '말장난'을 옮기는 건 매우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한다. 역자는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랑시에르의 말장난을 옮기고 있는 것인지?)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를 읽기 시작한 건 몇 주 됐지만 처음 서너 쪽을 읽은 게 전부였고 다른 일들 때문에 미루다가 마저 읽은 게 지난 일요일쯤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청하, 1995)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랑시에르의 다른 글들에도 보인다. 그러니까 겹쳐 놓으면 겹치는 부분도 아주 적지는 않다. 따라서 하나의 글만 온전하게 해독할 수 있다면 대강의 요지는 파악한 것이 되며 다른 글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물론 그 '하나'를 이해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중반쯤 읽다가 나는 그것이 랑시에르 탓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이 글에서 'configuration'란 단어를 역자는 '공형상화'라고 옮기는데('con-figuration'으로 읽어서), 의미를 유추해볼 수는 있지만 '공형상화'는 한국어가 아니다. 그것이 차라리 '콘피겨레이션'이라고 음역해주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는지 의문이다(철학계에서는 '위버멘쉬'란 음역도 번역어로 쓰지 않는가). 혹은 그냥 '모양새'나 '형태'로 옮기는 건 무식한 일일까?  

번역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이런 건 또 어떨까. "이마누엘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미감적 파악의 중요한 사례로 그림 장식을 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데, 이 장식들은 어떤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성의 장소의 향유에 기여하는 한에서 '자유미'다."(476쪽) 원문은 "It is no coincidence tht in Kant's Critique of Judgement significant examples of aesthetic apprehension were takedn from painted decors that were 'free beauty' in so far as they represented no subject, but simply conributed to the enjoyment of a place of sociability."(139쪽)  

"사회성의 장소의 향유에 기여(conributed to the enjoyment of a place of sociability)" 같은 번역은 직역이면서 전형적인 번역투인데, 나라면 "사교 공간을 쾌적하게 해주는" 정도로 옮기고 싶지만, 원문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subject'를 '주체'로 옮긴 건 의문이다. 물론 다의적인 단어여서 '주체'인지 '주제'인지는 매번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림 장식'과 관련되는 것이라 '주제'가 타당하지 않나 싶다. 다른 대목에서 'subject'를 '주제'라고 옮긴 곳도 있기 때문에 역자 나름대로 선택한 것일 텐데, 의견이 좀 다르다고 해야겠다.  

그렇게 의견이 다른 대목이 더 있다. "시인은 표상적인 주제를 일반적인 형상의 디자인으로 대체하고 시를 무용술이나 선풍기의 회전과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477쪽) 원문은 "The poet wants to replace the representational subject-matter of poetry with the design of a general form, to make the poem like a choreography or the unfolding of a fan."(139-140쪽)  

인용문에서 '시인'은 '말라르메'를 가리킨다. 말라르메의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나 그의 시 가운데 '부채' 연작 같은 게 있었던 듯하다. '선풍기의 회전'(unfolding of a fan)이라고 옮긴 건 '부채 펼치기'를 뜻하는 게 아닐까?('선풍기의 회전 같은 시'는 얼른 연상이 안된다.) 그리고 '안무'란 뜻의 'choreography'는 '무용술'이라기보다는 어원적 의미 그대로 '무용 기록(법)'이란 뜻이 아닐까 싶다. 말라르메는 시어를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시를 어떤 춤이나 동작의 기록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이 말라르메에 대한 나의 얕은 지식에 부합한다.      

이제 그런 얕은 지식을 가지고 조금더 깊이 들어가보기로 한다. '깊이'라기보다는 '본격적'이라고 해야겠다. 프랑스문학뿐만 아니라 사실 나의 철학적 지식도 교양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전문가적 지식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반적인 교양 수준의 사회적 제고와 확산이라고 생각하기에 소소한 교양이라도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공유하고자 애를 쓴다. 가령 나는 <헤겔 미학>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헤겔 미학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교양 수준에서 알고 있고, 그런 수준에서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상은 예술이 아닌데, 그것은 이 조각상이 집합적 자유의 표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조각상이, 집합적 삶과 그 조각상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사이이 거리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479쪽) 같은 문장을 읽으면 그게 맞는 말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조각상은 예술이 아니다"? 

미심쩍어 확인해본다. 원문은 이렇다. "The statue, in Hegel's view, is art not so much because it is the expression of a collective freedom, but rather because it figures the distance between hat collective life and the way it can express itself."(141쪽) "not so much because A but rather because B"구문으로 돼 있다. A라는 이유에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하다, 라는 뜻이겠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각상은 A라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예술이다." 물론 '...is art not...'이라는 연쇄를 '...is not art...'라고 잘못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번역문을 보통은 한번이라도 다시 확인해보지 않는지? 한국어판 편집자 서문은 "좋은 글들을 오역으로 뒤덮어 한탄만 나오게 만드는 문화 속에서 어려운 글들을 꼼꼼하게 손보아 가독성을 높여준 훌륭한 번역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란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런 오역은 '한탄'은 아니더라도 '한숨'은 나오게 한다. 원문과 대조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  

이 '한숨'은 '긴 한숨'이다. 이런 대목은 어떤가. "조각상은 그것을 생산하는 의지가 타율적인 경우에만 자율적이다. 예술이 더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480쪽) 이 논문의 부제인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가 무슨 의미인지 가장 확실하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대목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또한 잘못 옮겨졌다. 원문은 "The statue is autonomous in so far as the will that produces it is heteronomous. When art is no more than art, it vanishes."(142쪽)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역자가 이 논문을 직접 옮긴 것이 맞는지(혹은 진지하게 옮긴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됐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아서다. 요즘은 똑똑한 초등학생도 알 만한 관용구인데, 'no more than'은 '단지, 고작(only)'이란 뜻이다. 이걸 '더이상 -가 아닐 때'라고 직역(?)함으로써 번역문은 "예술이 단지 예술에 불과할 때, 예술은 사라진다"는 랑시에르의 역설을 동어반복으로 바꿔놓았다. 역자나 교열자는 바로 앞문장의 "조각상은 그것을 생산하는 의지가 타율적인 경우에만 자율적이다"이란 역설과 "예술이 더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는 '허무한' 동어반복이 과연 호응한다고 본 것일까?   

헤겔에서 벤야민으로 넘어가보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루이 아라공의 소설 <파리의 농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수잔 벅모스의 인용에 따르면 "나는 밤마다 침대에서 그 책을 읽었는데, 몇 자 읽기도 전에 심장박동이 빨라져 더이상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실제로 <파사젠베르크>의 최초의 메모는 이때부터 씌어졌다."라고 벤야민은 적었다). 그와 관련된 대목이다. "물론 발자크의 진열장을 가장 탁월하게 변모시킨 것은 파리 오페라 거리에 있는 낡은 유형의 우산 상점의 진열대인데, 루이 아라공은 여기에서 독일 인어의 꿈을 인지하고 있다."(484쪽)   

'오페라 거리'는 '오페라 파사주(Passage de l'Opera)'를 옮긴 것이다. '오페라 아케이드'라고 옮길 수도 있겠다. 아라공이 <파리의 농부들>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나중에 위스망 대로를 만드느라고 다 철거됐다 한다(그러니 지금은 파리에 가봐도 구경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이 아케이드에서도 특히 "낡은 유형의 우산 상점의 진열대"(old-fashioned umbrella-shop)가 자주 언급되는데, '발자크의 진열장'이 '오래된 골동품 진열장'이므로 'old-fashioned'는 '낡은 유형'보다는 '구식'이나 '골동품'이란 뜻으로 새기는 게 더 좋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우산 상점(umbrella-shop)'.  

<미학 안의 불편함>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렇게 돼 있다: "바로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오페라 골목의 낡은 지팡이 가게를 신화적 풍경과 놀라운 시로 변형시킨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를 읽고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90쪽) 분명 지시대상이 같을 듯싶은데, 하나는 '우산 상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팡이 가게'다. 우산도 팔고 지팡이도 파는 가게인지, 아니면 불어 단어가 '우산'으로도, '지팡이'로도 번역되는 것인지 오역 여부를 떠나서 궁금하다. 'umbrella'야 우산이 맞지만, <파리의 농부>를 다룬 다른 글들에서도 '지팡이'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건 대체 뭔가 싶다.  

이어서 낭만주의 시학에서 시인의 역할에 대한 설명: "그리하여 시인은 단지 화석들을 캐내고 그것들이 지닌 시적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자연학자나 고고학자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이상적인 사물들의 신체 그 자체 속에 새겨져 있는 전언들을 간파하기 위해 사회의 어두운 밑바닥이나 무의식 속을 파고드는, 일종의 증상학자가 된다."(484쪽) '자연학자'는 'naturalist'를 옮긴 것으로 흔히는 '박물학자'를 가리킨다. 시인은 박물학자이자 고고학자이면서 동시에 증상학자가 된다는 것이 요지다. 그런데, '이상적인 사물들'은 뭔가? 이게 'ordinary things'를 옮긴 것이다. '일상적인 사물들'의 오타인 것. 번역이 굉장히 급하게 이루어졌고, 출간작업 또한 시일을 다투면서 진행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증상학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새로운 시학은 사회로 하여금 그 자신의 비밀을 깨닫게 만드는 과제를 스스로 떠맡으면서, 정치적 주장과 교의로 가득 찬 시끄러운 무대를 떠나 사회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 일상생활의 내면적인 실재 속에 감추어져 있는 수수께끼와 환상을 드러내는 새로운 해석학의 틀을 짠다."(484-5쪽) 여기서도 '일상생활의 내면적인 실재'는 'the intimate realities of everyday life'를 옮긴 것인데, '내면적인 실재'처럼 거창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냥 '일상생활의 친근한 현실' 정도의 뜻이 아닐까?    

조금 딱딱하더라도 원문에 충실하게 옮긴다는 것이 다른 번역본들에서 내가 받은 역자의 번역관인데, 기이하게도 이 랑시에르 번역에서는 부주의하거나 불충실한 대목들이 자주 나온다. "상품 물신숭배가 벤야민으로 하여금 파리 아케이드의 지리와 한가로운 구경꾼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들레르 상상계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485쪽)에서도 '보들레르 상상계의 구조'는 '보들레르 이미지의 구조(sthructure of Baudelaire's imagery)'를 옮긴 것이다. '이미지의 구조'를 '상상계의 구조'라고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짐작엔 아무래도 'imagery'를 'imaginary'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심증은 이런 문장을 읽으며 더 굳어진다: "문화비평은 낭만주의 시학의 인식론적 모습으로, 예술의 기호들과 삶의 기호들의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485쪽) 원문은 "The critique of culture can be seen as the epistemological face of Romantic poetics,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the signs of art and the signs of life."(145쪽) 놀랍게도 '교환방식에 대한 이론적 설명(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이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이라고 엉뚱하게 옮겨졌다. '탈주술적' 번역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착시'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근본적인 오역이라 할 만한 두 가지를 지적하고 마무리짓기로 한다(실수도 너무 자주 반복되면 필연처럼 보인다). 먼저 재현의 문제를 다룬 대목: "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 사이의 '안정적인 관계의 상실'은 관계짓는 힘의 상실이 아니라 그 형식들이 복수화된 것이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도 '재현 불가능'하다."(490-1쪽) 뒷문장의 원문은 "In the aesthetic regime of art nothing is 'unrepresentable'"(149쪽) 아마 역자도 이런 문장을 번역서에서 봤다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재현불가능한 것은 없다"라는 랑시에르의 핵심적인 주장을 역자는 정반대로 옮겨놓았다(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이 가장 나쁜 오역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재현의 가능/불가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현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랑시에르가 홀로코스트 재현 불가능론("홀로코스트는 재현 불가능하며, 예술이 아니라 증언만을 허락한다")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오역은 미스테리하다.  

그리고 끝으로,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랑시에르의 정식화: "미학적 정식이 처음부터 예술을 비예술과 연결하는 한에서, 그 정식은 예술의 삶을 두 개의 소실점, 곧 단순한 삶이 되는 예술이나 단순한 예술이 되는 삶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492쪽) 원문은 "To the extent that aesthetic formular ties art to non-art from the start, it sets up that life between two vanishing points: art becoming mere life or art becoming mere art."(150쪽)  

'삶이 되는 예술'/'예술이 되는 '은 'art becoming mere life'/'art becoming mere art'를 옮긴 것이고, 물론 '예술이 되는 삶'은 '예술이 되는 예술'의 오역이다. 쉽게 말하면 예술의 삶(life of art)은 '삶을 위한 예술'(타율성)과 '예술을 위한 예술'(자율성) 사이에서 진동한다는 것. 랑시에르의 표현으론 이렇다.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의 삶은 정확히 말하면 왕복 운동하는 것, 곧 타율성에 맞서 자율성을 실행하고, 자율성에 맞서 타율성을 실행하고,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한 가지 연결에 맞서 다른 연결방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메시지 전체는 궁극적으로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한 편의 논문을 갖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랑시에르의 사례를 보건대 한국어판 <뉴레프트 리뷰>를 일반 독자가 읽고 제대로 해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원문을 대조해서, 적어도 참조해서 읽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거나 오독할 수 있는 대목들이 적잖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재로선 거기까지일 것이다. 조급한 번역과 부실한 교열/편집은 자랑할 게 못되지만 '한국적 현실'이다. 이것을 '우리의 협량한 출판 풍토' 탓이라고 하면 내가 오버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번역은 한 사회의 총체적 문화 역량과 관련된다.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에서 결코 높은 수준의 번역이 나오지 않는다. 사회적 보상도 낮고 대우도 부족한 형편에 언제나 '기대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을 들추며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09. 02. 21. 

P.S. 랑시에르 논문의 오역들을 지적했지만 그 다수는 단순한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정오표 등을 통해서라도 바로잡았으면 좋겠다(한데, 그런 부주의는 왜 대부분의 인문 번역서에 만연한 것일까?). 혹자는 번역비평에 대해 '식은 죽먹기'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 번역작업에 비하면 번역비평의 수고는 약소하다(그래서 보상도 없을 뿐더러 별로 하는 이도 없는 것 아닌가?). 이건 '프로'의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나는 번역의 동업자가 아닌 한 독자로서 내가 지불한 책값이 정당한지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 확인의 방식이 언제나 '식은 죽먹기'다.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이다. '식은 죽'이되 남이 먹다 남긴 죽이니까. 이런 걸로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양서를 읽고 정신을 살 찌우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며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유감스러운 건 한국어로 그런 양서를 읽기가 쉽지 않다는 것. '식은 죽'이라도 계속 먹어치우면 좀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미학 안의 불편함>의 경우 나는 앞뒤로 조금씩 읽고 더 읽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현학적으로 기술된 글을 완전히 체계와 문화가 다른 언어로 번역을 했으니 이 책을 읽고 단번에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나아가 무례하기까지 한 요구일 것이다."(9쪽)란 역자의 판단을 존중해서다. 그 요구가 독자의 것인지 역자의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나는 조심하는 차원에서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이 책은 올여름에 <미학과 그 불만(Aesthetics and Its Discontents)>이란 제목으로 영역본이 나올 예정인데, 아마도 가을쯤엔 '체계와 문화가 아주 다르진 않은 언어'로 읽을 수 있을 듯싶다(러시아어로는 마지막 장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환'만이 번역돼 있다). 그때까지는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이 조금 더 누그러지기를 기대해본다(그의 영화론이나 이미지론도 더 번역되면 좋겠고). 덧붙여, 시간이 되면 <뉴레프트 리뷰>의 다른 논문들에 대한 독후감도 나중에 적어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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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역 논란의 한 가지 사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0 14:50 
       교수신문(09. 03. 09) 알라딘 블로그의 ‘오역 논란’이 유쾌한 이유  마르고 닳도록 강조되는 번역의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오역에 대한 지적도 끊이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오역의 당사자로 주목된 역자들이 ‘나 몰라’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역자가 자신의 오역에 대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 사과하고, 정오표를 올려 작은 화제가 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유명 인터넷 논객인 로쟈의
 
 
기인 2009-02-2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흠.. 지난번부터 알아차린 것이지만, 로쟈님은 한국어 번역본 읽으실때 원문/내지는 같은 서구언어와 대조하면서 읽으시네요. 제 생각에도, 원본/같은 서구언어로만 읽는게 편하기는 한데, '한국어'로 결국 학문을 해야 되기 때문에, 번역본을 참조하면서 개념어들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로쟈님도 이 때문에 원문/서구언어본과 한국어 번역본을 대조해서 읽으시는 거 맞죠? ^^; ㅎㅎ

로쟈 2009-02-21 01:03   좋아요 0 | URL
그런 비밀을 눈치채시다니!^^; 원서로 보는 거야 혼자 보면 되지요. 번역본은 같이 읽을 수 있는 거니까, 관심을 갖고 고쳐도 보고 합니다. '한국어'에 매인 몸이어서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구요...

2009-02-2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2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비평이 과연 "식은 죽 먹기"일까요? 해당 언어와 문화, 그리고 문학비평과 번역론 등 전반에 걸친 확고한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인데요???

"no more than art" 에서 no more than 이 art 가 그 정도밖에 안 됨을 강조하는, 혹은 only 를 강조하는 말임을 모르고 한 - 부주의한 차원을 벗어난 - 번역이라면 문제는 문제로군요.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죠...?

로쟈 2009-02-23 21:36   좋아요 0 | URL
베테랑 번역자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려나 믿기지 않는 오역들입니다...

람혼 2009-02-2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런 일이... 조금 충격적인데요. '사소한' 실수로 보이는 부분들이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라 그 '파급'이 좀 크게 느껴집니다. 아직 <뉴레프트리뷰>의 랑시에르 논문은 읽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렇게 많은 오역들이 있었군요. 논문 읽을 때 참조해야겠습니다. 아라공의 Paysan de Paris는 예전에 읽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에 관해서는 제 기억으로도 '지팡이(canne)'가 맞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랑시에르의 <미학 내의 불만(Malaise dans l'esthétique)> 원서에서도 이 부분은 "la boutique de cannes obsolète"(Galilée, 2004, p.71)로 되어 있는 걸 봐서도 '지팡이'가 맞을 듯합니다(영역자가 이를 '우산대(canne à parapluie)'로 파악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만...). <뉴레프트리뷰>에 다른 글을 번역한 한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로쟈님, 시간 나시면 제가 번역한 글에서도 오류가 있다면 바로 잡아주셨으면 하는 바람 전해봅니다.

로쟈 2009-02-23 21:34   좋아요 0 | URL
네, 좀 충격적이면서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오역이 원문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하고 명백한 것들인데(하지만 '치명적인' 것들이죠), 베테랑 역자가 실수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문명론의 개략>(홍성사, 1986)을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예전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지만 어느새 희귀해져서 어지간한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책이 돼버렸다. 갑자기 후쿠자와가 생각난 건 며칠전 학교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다가 분실한 줄 알았던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을 다시 찾은 때문. 후쿠자와는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던 탓에 번역과 출판 등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고 많은 번역어들을 만들냈다. <번역어 성립사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간에 '<문명론의 개략> 읽기'도 두어 권 소개된 바 있는데, <서양사정>, <학문의 권장> 등과 함께 그의 3대 저작으로 꼽히는 <문명론의 개략>이 새로 나오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마루야마의 책에 다 포함돼 있는 건가? 책이 당장 옆에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한편, <서양사정>과 함께 후쿠자와가 참조했다는 프랑수아 기조의 <유럽문명사>도 소개되면 좋겠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이 두 책과 별개로 읽는 건 불가능하다고도 하고). 어차피 책을 다 훑어볼 여유는 없고, 이번에는 개략적인 윤곽만 잡아보려고 한다(일본 사상사 관련서들도 다수 참조할 수 있다). 번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화'란 주제를 생각할 때 그의 문명론을 빼놓을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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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허호 옮김 / 이산 / 2006년 3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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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가와무라 신지 지음, 이혁재 옮김 / 다락원 / 2002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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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마루야마 마사오.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김석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30,000원 → 28,500원(5%할인) / 마일리지 90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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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김석근 옮김 / 역사비평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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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2-21 03:18   좋아요 0 | URL
유키치하면 자동으로 돈이 연상되어 버려서 원래 뭐하는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돼요 ㅎㅎ

로쟈 2009-02-21 11:21   좋아요 0 | URL
일본에 자주 가시나 보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1 16:05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 하면 저는 김옥균이 생각나네요.

로쟈 2009-02-22 00:08   좋아요 0 | URL
네, 개화파들이 많은 영향을 받은 걸로 돼 있죠...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4:55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저런 사진을 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후쿠자와는 사상가로 알려졌는데도 긴 칼을 찬 사진이군요.하기야 예전에 태평양 전쟁 때 일본 파일럿들도 공중전 나가면서 일본도를 차고 가는 사진을 보고 이 나라는 칼이 그냥 다순한 칼이 아니로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냥 단순한 무기 이상의 존재...

로쟈 2009-02-22 15:12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 자신이 사무라이 계급 출신인 걸로 아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6:23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의 전통 관행이나 의식을 없애려고 긴칼 차고 외출을 못하게 하고 그랬어요.그래도 워낙 칼에 의미 부여를 하는 나라니까...우리나라는 군인출신들도 국회의원이 되면 장군보다 의원 님 소리 듣는 걸 더 좋아한다잖아요.예전 김용옥 씨가 일본에선 선비를 일본어로 사무라이라고 하면 된다고 해요.실제로 유학을 받아들여 공부한 계급도 사무라이니까요.무인에 대한 관념 자체가 우리와 다른 것 같아요.

로쟈 2009-02-22 17:58   좋아요 0 | URL
네, 자세한 건 후쿠자와의 자서전을 보면 알겠는데, 책이 안 보이네요.--;
 

체호프의 드라마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러시아 희곡은 아마도 고리키의 <밑바닥에서>(1902)일 것이다(일제때는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공연됐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대학로에서 뮤지컬로도 자주 공연되곤 했다. 오늘 기사를 보니 극단 유가 이번에 정극으로 다시 <밑바닥에서>를 무대에 올린다. 장소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이고, 김수로, 엄기준 두 배우가 주연을 맡는다고 한다. 나로선 두 배우 때문이 아니라 고리키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번쯤 시간을 내보고 싶다. <밑바닥에서>는 강의시간에 가끔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한겨레(09. 02. 17) 김수로·엄기준 ‘밑바닥에서’ 희망을 쏘다 

영화와 티브이 브라운관을 누비며 활약 중인 배우 김수로(39)씨와 뮤지컬 무대 출신의 배우 엄기준(33)씨가 나란히 연극 무대에 섰다. 두 사람은 극단 유가 지난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올린 <밑바닥에서>(연출 황재헌)에 젊은 도둑 ‘페펠’ 역과 사기도박 전과자 ‘사틴’ 역을 맡아 열연했다.

<밑바닥에서>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 막심 고리키가 1902년 발표한 희극. 싸구려 여인숙에서 살아가는 여러 인간 군상의 삶을 그렸다. 지난 15일 저녁 공연을 끝낸 두 사람을 분장실에서 만났다. 

“10년 안에 꼭 무대에 서려고 했어요. 제 주변에서도 영화보다는 연극 무대에 섰던 향기가 더 짙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았죠. 9년 만에 서 보니 정말 무대의 향이 짙고 좋더라고요. 커튼콜 때의 전율은 말 그대로 짜릿하죠.”

2000년 연극 <택시 드리벌> 이후 9년 만에 출연한 김씨는 “다시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없던 에너지가 다시 생겨 계속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영화와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의 만능 연예인으로 인식되지만, 기실은 무대에서 배우의 길을 시작한 연극인 출신. 대학 시절 극단 목화에 들어가 <백마강 달밤에>(1994)를 시작으로 <택시 드리벌>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 등 많은 연극에 출연했다. 

엄기준씨의 무대 경력은 김씨보다도 화려하다. 지난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매력적인 까칠남 손규호로 스타가 되었지만 뮤지컬계의 원조 꽃미남 배우 출신이다. 지난해 연극 <미친 키스>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그는 “14년간 뮤지컬과 연극 무대에 서 왔고, 드라마를 시작한 지도 2년이 채 안 되어 아직도 무대가 더 편하다”고 털어놓았다. “수로 형과 무언가 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불러줘 고마울 뿐이다.”   

고리키가 <밑바닥에서>를 썼던 1890년대 러시아는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 경제 공황 등으로 사회 밑바닥 빈민들이 급증하던 때였다. 도둑, 사기꾼, 알코올 중독자, 성공하고 싶어 하는 수리공 등의 극중 군상들은 어쩌면 2009년 한국의 ‘밑바닥’ 사람들과 너무도 닮았다. 이 작품이 100여 년을 뛰어넘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밑바닥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고,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인간이므로 끝까지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엄기준)

“동시대에서는 덜 행복하고 덜 만족스럽더라도 미래의 나 자신과 나의 후대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더 좋은 인간들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공감했다.”(김수로)   

두 사람은 “고전의 힘과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입을 모으면서 “앞으로도 1년에 1~2편씩 꾸준히 무대에 서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드라마, 뮤지컬 무대에서 계속 러브콜을 받고 있는 엄씨는 “알아보는 분이 많아질수록 무대에서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며 “수로 형처럼 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김씨에게도 이번 무대의 의미는 남다르다. 1997년 서울예술대 연극과를 졸업했다가 올해 동국대 공연예술학부에 다시 입학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연극을 더 공부하고 싶고, 제대로 된 배우 훈련을 하고 싶었다”며 “좋은 정극, 좋은 고전을 많이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더 좋은 배우로 거듭나서 김수로가 나오는 연극은 볼만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덧붙였다. 3월22일까지.(정상영기자) 

09. 02. 17. 

 

P.S. 러시아어 문고본 <밑바닥에서>의 표지이다. <밑바닥에서>는 러시아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다(이 드라마가 최초로 흥행을 거둔 건 독일에서라고 한다). 아래는 1902년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밑바닥에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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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리키 휴머니즘의 최대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24 23:43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어제 오전에 쓴 글인데,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의 한 대목을 다루고 있다. 시중에는 세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밑바닥>(동천사, 2005)은 영어본을 옮긴 중역본이며 기억에 번역이 좋지 않았다. 이 글에서의 인용은 <밑바닥에서>(지만지, 2008)와 <밤주막>(범우사, 2008)을 근거로 한 것이다.  
 
 
2009-02-18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r 2009-02-18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에 대학로에서 뮤지컬 버전으로 본 적이 있어요. 이 공연도 보러갈까 싶었는데 장소가 예술의 전당이라... 개인적으로 예술의 전당을 참 싫어하거든요-_- 교통도 불편하고, 주변에 먹을만한 밥집 하나도 없어서 말이죠;

무해한모리군 2009-02-18 10:18   좋아요 0 | URL
Kircheis님 좋아하시는 밥종류 말씀하시면 바로 추천 들어갑니다..
회사가 거깁니다 ㅎㅎㅎ

로쟈 2009-02-18 22:18   좋아요 0 | URL
백년옥 같은 두부집도 괜찮은데요...

무해한모리군 2009-02-1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로에서 하는 뮤지컬 버전을 본 적이 있는데, 이 공연도 한번 봐야겠네요.

Kir 2009-02-18 17:14   좋아요 0 | URL
(로쟈님, 신성한 서재에서 본문과 무관한 엉뚱한 댓글 죄송합니다!!!)
휘모리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감사합니다! 육류를 제외한 모든 식단 OK입니다. 저의 비루한 위장을 비롯한 소화기관에 육류는 엄청난 압박과 부담을 주거든요.

무해한모리군 2009-02-19 17:50   좋아요 0 | URL
어떤 종류를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일단 로쟈님 추천 집도 괜찮구요.
1. 예술의 전당 맞은편에서 사당역 쪽으로 조금 올라오다 보면 양마니라는 곱창집 옆에 오리엔탈국수집이 있습니다. 여기도 무난하군요.

2. 예술의 전당 길건너편에 에릭스스테이크가 있는 뒷편에 있는 백반을 파는 복있는집도 괜찮구요..

3. 한정식이라면 바로 앞에 있는 농군도 점심엔 괜찮은데 저녁엔 비쌀라나~
 

랑시에르 번역에 관한 페이퍼를 올려두려고 했으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도 있고 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봐야 두 권의 책 이야기다. 하나는 최근 바짝 붐을 타고 있는(짐작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개봉과 함께 바람을 탄 듯하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죽음의 중지>(해냄, 2009)이고, 다른 하나는 퓰리처상 수상작가 어네스트 베커(1924-1974)의 <죽음의 부정>(인간사랑, 2008)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09. 02. 14) 죽음이 사라진 세상… 천국일까? 지옥일까?

장생불사(長生不死)는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실명하고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 인류 본성의 밑바닥을 보여줬던 <눈먼 자들의 도시>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87)는 이번에는 '죽음이 소멸된 사회'라는 세계를 가상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진 사회, 경제, 도덕적 문제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라는 첫 문장이 암시하듯 갑자기 죽음이 소멸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현세에서 '불멸'의 권리를 얻게 된 사람들, 태초 이래 인류의 가장 큰 꿈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새 생명은 진실로 아름답다"고 외치며 집단적 환희감에 빠져든다.

하지만 웃는 사람이 있으면 우는 사람이 있는 법. 죽음의 협력 거부라는 난공불락의 벽에 부딪힌 장의업계는 정부에 가축 매장과 화장사업의 독점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죽지 않는 환자들로 만원을 이룬 병원에서는 환자를 복도에 내어놓는다. 돌봐줄 환자가 없는 호스피스들도, 생명보험 해약 요구가 빗발치는 보험사들도 통곡의 벽에 머리를 찧는다. 근본적 존재 위기에 빠진 것은 교회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이 없으며, 부활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무의미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죽음의 중지로 인한 사람들의 환호는 '지옥의 종소리'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희망과 절대 죽지 않는다는 공포 사이에 던져진 인간군상의 모습이 한폭의 만다라처럼 그려진다. 정부가 특별한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이, 죽음 직전의 가족을 둔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찾는다. 아직 죽음이 활동하는 국경 너머에 죽을 병에 걸린 환자들을 데려가주는 마피아는 이제 자선조직이 된다.

방송사 사장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면서 혼란의 7개월은 종식된다. 편지의 발신자는 '죽음'. 죽음은 이 실험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건 나를 그렇게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이었어요. 물론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언제까지나라는 말과 영원히라는 말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것처럼 동의어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걸 솔직히 고백해야겠군요." 

줄 바꾸기와 인용부호 따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작가 특유의 문장도 여전하다. 책을 덮고 나면 공자가 던진 '삶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는가'(未知生 焉知死) 하는 무거운 철학적 질문이 한 노대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를 깨닫고 그 긴 여운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이왕구기자)   

한편, 베커의 유작에 관해선 별다른 리뷰가 올라온 바 없다. 출판사 소개도 고작 넉 줄이 전부다. "현대 저술 중에서 죽음인식에 대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저술은 에른스터 베커의 <죽음의 부정>(1973)일 것이다. 이 책은 죽음과 관련된 현대적 고전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심화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죽음의 부정>은 에른스터 베커 자신이 암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3개월 전에 비문학 작품 분야에서 퓰리처 수상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책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출간되긴 하지만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라는 스피노자의 경구를 에피그라프로 달고 있는 베커의 책은 개인적인 관심사에 잘 들어맞는 책이다('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가 나의 네 가지 주제다). 비록 36년 전 책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주제만을 놓고 보자면 그간에 더 나은 진전이 있었는지 얼른 답하기 어렵다. 머리말의 필자는 베커의 주장이 갖는 의의를 이렇게 정리한다. "베커가 내린 근본적인 결론은, 세상을 납골당으로 변하게 하고 모든 개인과 국가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혁명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이타적인 동기들 - 보다 큰 전체와 합병하고, 보다 큰 대의명분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우주적 힘을 받들고자 한 우리의 욕망 - 에서 비롯된 것들이라는 것이다"(13-14쪽).  

사실 이 책을 서점에서 본 지는 오래됐지만 구입을 미루다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이유는 번역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서 방금 인용한 대목부터가 오역이다.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Becker's radical conclusion that it is our altruistic motives that turn the world into a charnel house - our desire to merge with a larger whole, to dedicate our lives to a higher cause, to serve cosmic powers - poses a disturbing and revolutionary question to every individual and nation."  

번역문은 접속사 that 이하의 전체를 마치 보어절인 것처럼 옮겼는데(Becker's radical conclusion is that- 을 옮긴 것처럼) 이는 물론 전혀 엉뚱한 해석이다. conclusion을 받는 동격절이기 때문이다. 전체 문장의 주어 'Becker's radical conclusion'을 받는 동사는 'poses'이다("베커의 과격한 결론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불온하면서도 혁명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중학생도 알 만한 구문을 엉뚱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나머지 번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베커 자신은 이 책의 주제를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가 서문의 시작에서 하는 말. "존슨 박사는 죽음에 대한 고찰이 놀랄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죽음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이라는 동물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인간 행위 - 주로 죽음의 치명성을 피하려고 고안된, 어떤 면에서는 죽음이 인간의 최종 운명이라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고 고안된 행위 - 의 주요 동기라는 것 이상이다."(29쪽)  

역시나 원문 '이상의' 번역이다. 원문은 이렇기 때문이다. "The prospect of death, Dr. Johnson said, wonderfully concentrates the mind. The main thesis of this book is that it does much more than that: the idea of death, the fear of it, haunts the human animal like nothing else; it is a mainspring of human activity - activity designed largely to avoid the fatality of death, to overcome it by denying in some way that it is the final destiny for man."  

먼저 'prospect of death'를 '죽음에 대한 고찰'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하다. 어려운 '고찰'에까지 갈 것도 없이 '죽음에 대한 예상', '죽음에 대한 전망'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저자가 암과 투병하면서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존슨 박사'는 물론 저명한 영어사전의 편찬자 새뮤얼 존슨을 가리키겠다. 그런데 여기서도 역자는 지시대명사 that을 앞의 나오는 것 이상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잘못 읽었다. "새뮤얼 존슨은 죽음에 대한 전망은 우리의 정신을 놀랄만큼 집중시킨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는 죽음이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하의 내용은 왜 그런가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죽음이라는 관념,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인간이란 동물에 들러붙어 괴롭히는 것은 없다. 죽음은 인간 활동의 핵심적인 동기이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대부분 죽음이라는 숙명을 피해보고자, 죽음이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자 계획된 것이다."    

우리는 번역에 대해서도 원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경구는 이 경우에도 적절해 보인다.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Not to laugh, not to lament, not to curse, but to understand). 언젠가 놀랄 만큼 집중해서 죽음에 대한 책들을 읽게 될 날이 올 것이다...  

09.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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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2-16 23:52   좋아요 0 | URL
죽음이 없으면 무간도지요.무한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감당할 수도 없을겝니다....그래서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엄마의 한을 풀기위해 그 먼나라 별나라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거 아니겠어요.ㅋㅋㅋ
그러니 <돌아 가야 할 때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라는 거죠.중의적이네요.ㅋㅋ

로쟈 2009-02-17 01:12   좋아요 0 | URL
불멸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불멸을 감당하기 어려운 게 인간이죠...

람혼 2009-02-17 00:4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랑시에르 번역에 관한 페이퍼는 어쩌면 국역본 <미학 안의 불편함>에 대한 글일 거라는 예상이 살짝 드는데요...^^

로쟈 2009-02-17 01:11   좋아요 0 | URL
미리 정해둔 제목은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입니다. '미학 혁명과 그 결과'와 함께 다루려고 해요. 시간이 되면...

2009-02-17 0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애초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이나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 같은 책을 생각했지만 조금 읽은 느낌으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에 더 가깝다. 해서 '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독창적 번역론!'이란 광고문구에서 '최고의 번역가'와 '독창적 번역론'에 괄호를 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읽을 만한 책으로 남을 듯싶다.   

어제 책을 구하고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건 직역/의역의 문제를 다룬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인데, 번역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기대지 않고 번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한 것이 좋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진단에서부터 '조리법'이나 '요리법'이란 한국어 대신에 '레시피(recipe)'라고 읽는 것이나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 번역하는 것 등의 사례 제시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러니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란 지적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론 직역이나 의역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만큼('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선택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직역 편향이 좀 교정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례로 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이나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일본도 이제는 외국어 원문을 자기 말로 길들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외국에서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면서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가 확실히 도약하고 자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번역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것이 번역문이고 어느 것이 창작문인지 일반이이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란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직역/의역의 문제가 경제적/문화적 자신감과 연동돼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라!). 한갓 취향이나 이론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신현상학> 번역이다. 1998년에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고 쉬운 말로만 번역한 하세가와 히로시의 번역본이 나오자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네 사정이 달라진 건 또 아니다. 해서 "난해하기로 소문한 헤겔의 저서를 (...)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려하고 명쾌한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독자들에게 충격과 감격을 주었"다는 건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다. 때문에 드는 생각은 <헤겔 사전>(도서출판b, 2009)이 그렇듯이 자체적인 역량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국어본 <정신현상학>을 기다리기보다는 하세가와의 일역본을 중역하는 게 더 낫지/빠르지 않을까 싶다.   

일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지만 하세가와의 솜씨를 감상해보면, 그는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명쾌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의 현실은 아직 이런 사례와는 거리가 멀다. 번역비평에 관한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읽은 논문 중의 하나는 '비트겐슈타인 번역의 미학'(박정일)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 전공자이자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서광사, 1997)을 번역한 바 있는 필자가 두 가지 종류로 번역돼 나온 <청갈색책> 번역에 대해 비교분석을 시도한 논문이었다. 그 두 종이란 진중권 번역의 <청갈색책>(그린비, 2006)과 이영철 번역의 <청색책. 갈색책>(책세상, 2006)을 말한다. 필자를 따라서 한 대목만 원문과 같이 비교해본다.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신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침대에서 뒤척이는 것을 보고 "이제 일어나려나?"하고 혼잣말을 할 때처럼 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 274쪽) 

"예를 들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의 움직임들을, 어떤 사람이 침대에서 방향 전환하는 것을 내가 예를 들어 "그는 일어나려고 하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바라보듯이 바라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가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 250쪽)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 also I don't look at my own movements as I might look at someone turning about in bed, e.g., saying to myself "Is he going to get up?"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But there is not one common difference between so-called voluntary acts and involuntary ones, viz,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 the 'act of volition'."   

먼저, 두 번역에 대한 비교평에서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voluntary acts' 'involuntary ones' 'act of volition' 등의 표현을 '의지적 행위'' '무의지적 행위' 의지 행위'(진중권)라고 옮긴 것이 '수의적 행위' '불수의적 행위' '의지의 작용'(이영철)이라고 옮긴 것에 비해 어색하며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act'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킬 때 주로 '활동'이란 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근거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see(보다)와 look at(바라보다)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쓰는 데 진중권은 이를 모르거나 놓치고 있다는 것. 이어지는 다수의 사례를 통해서 필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영철본에 비해서 진중권본은 "번역 요건의 최소한의 정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번역자의 학문적 기반을 의심케 하다"고 혹평한다. 그렇지만 진중권본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반면교사로서는 유용하다는 평을 내린다(진중권본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읽는다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다는 증거다!).        

한데, 비트겐슈타인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로서 나의 초점은 좀 다른 데 있다. 대의를 파악하는 데 둘다 별 지장이 없다면 가독성 면에서는 진중권본이 좀 낫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다 지나친 직역투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번역의 탄생>의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동적인 언어라서 명사나 명사구보다는 동사구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명사가 한국어보다 훨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려워"진다.  

대체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란 첫 구절을 어떻게 옮기는 것이 나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놀람'이란 명사형도 우리말에서는 어색하지만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는 건 또 뭔가? 뭔가 심오해 보이는, 그래서 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정작 영어에서 그 표현이 그토록 심오하며 시적인 표현인 것인지?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고 옮기는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 그냥 "이런 경우에는 놀랄 게 전혀 없다"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와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라는 두 문장에서도 차이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공통점이다.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를 '직역'한 것이긴 하나 '현존이 있다'나 '부재가 있다'는 표현은 한국어가 아니다(동어반복이거나 모순어법이다).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옮길 수는 없을까? "하지만 소위 수의적 행위와 불수의적 행위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작용'이라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 같은 문장도 자꾸 읽고 쓰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수용될 수 있다. 많은 번역투의 문장과 문체가 한국어화된 것처럼. 하지만 한국어의 특성에 맞게 가려쓰고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옮겨주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란 문제가 말 그대로 '선택의 문제'라면 나는 그쪽을 택하고 싶다. 어떤 쪽인가? 아래 문장을 순차적으로 좀더 우리말에 가깝게 바꾸어본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라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이영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진중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의적 행위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는 불수의적 행위는 서로 다르다.  

09.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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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역은 국어를 잘해야 한다
    from Ellie's Professional Software Insight 2009-02-19 00:53 
    원글 쓰신분의 예는 헤겔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서적을 번역한 예여서 왠지 더 까다롭고 심오한 내용인 것 같지만 ^^ 이런 문제는 기술서적을 번역할 때도 발생한다. 번역할때 같이 공역하던 분들과 계속 토론했었던 것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너무나 장황하고 영어 표현의 특성상 우리나라말과 바로 매치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이것을 원문을 존중할 것인가 우리가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역할 것인가를 많이 논의했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출판사 측에서는 당연히..
  2.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from weekly님의 서재 2011-06-14 01:39 
    1. 나는 비트겐쉬타인의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중 진중권의 것을 샀다. 그 이유는, 1).초반 몇 문장을 읽어보니 이영철 번역본보다 잘 읽혔다. 2). 적당한 분량의 재미있는 해제가 달려 있었다. 3). 이영철 번역본의 표지가 만화책 표지처럼 조잡해 보였다. 2. 나는 철학책을 살 때, 직역을 위주로 했다느니 저자의 문체를 느낄 수 있도록 번역했다느니 하는 역자의 말이 있으면 그 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 책은, 요컨대 가독성이 심하게
 
 
2009-02-16 0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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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09-02-17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라...이런 번역이 아직도 완전히 부재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군요^^
박정일씨는 미드를 보면 놀랄 것 같습니다. '완전히 부재가 존재한다'는 투의 영어식 표현이 미국 중산층 이상의 회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입니다. 그런 미드 대사를, 영어의 명사위주 표현을 그대로 번역한다면-.,-?
voluntary의 번역인 '수의적隨意的'이란 표현은, 한문을 공부했던 저에게도 한자 표기가 없으면 알아볼 수 없는 낯선 표현인데요. 번역어의 선택을 보면서 이영철교수가 일본어판을 상당수 차용하지 않았나라는 의심과 함께,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의도적으로, 너무 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일본어역을 참조하거나 거의 일본어판으로 번역한 경우, 의미는 대충 헤아려지지만 서양어 원본만 보고 번역에 임할 때는 떠올릴 수 없는 한자조어가 많이 등장하면 의심해 볼만 합니다.

로쟈 2009-02-16 15:06   좋아요 0 | URL
'voluntary'가 영한사전에 '수의적'이라고 나옵니다. 생리학 용어로. 영한사전의 모델이 또 영일사전일 테니까 열매님의 의혹도 자연스럽지요. '수의적 행동'이란 말을 의학쪽에서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법해서(의학용어도 일어에서 오잖아요) 놔두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명사형 표현을 직역하면 이상하긴 합니다.의사의 재빠른 도착이 그녀의 빠른 회복을 가져왔다...따위인데,의사가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이 빨랐다로 해야지요.물주구문이 특히 이런 해괴한 번역투 문장을 양산해 냅니다.

로쟈 2009-02-18 22:25   좋아요 0 | URL
수용이란 게, 어느 시점까지는 필요하지만 그 이후엔 '자기화'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요...

paul 2009-02-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번역문'이 양산되는 한 가지 이유가, 결국 번역의 '정확성'을 '직역'과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얼마나 의미를 쉽게 전달할 것인가'보다는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것인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물론 번역의 정확성은 엄밀히 지켜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언어의 무게중심은 번역되는 문장이기 보다는 번역한 문장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번역이 단순하게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닌, 옮겨지는 말의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창조적 행위라고 보았을 때, 번역의 창조성과 가치는 그런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환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직역과 정확한 원뜻에 집착하는 것도 번역(변혁)의 불안에 대한 자기방어적 제스처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9-02-18 22:26   좋아요 0 | URL
제 표현으론 '자신감의 문제'이고 '책임의 문제'인데, '충실성'이라는 이유로 대개는 회피하려고 하지요...

weekly 2011-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먼댓글을 썼다가 바로 지웠는데 시스템에 아직 반영이 되지 않았나 보네요...-.-)

먼댓글보다는 댓글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위에 비트겐쉬타인의 원문 인용 부분에 한정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rising of my arm"과 기지개 켜는 것은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rising of arm"이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지는 책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 involuntary를 불수의적이라 번역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심장은 불수의적입니다. 우리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런 건 비트겐쉬타인의 논의 대상이 아니죠.

3. 로쟈님께서 "... 놀랄 게 전혀 없다"로 옮기신 부분은 그렇게 옮기시면 안됩니다. 비트겐쉬타인이 의도한 바는 진중권이 번역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관찰하는 태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로 나중에 다시 언급됩니다. 다시 말해 전혀 일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4. "... 차이가 있다"를 "... 다르다"로 번역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뒤에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쟈님식대로 하면 '공통의 다름'이라는 정체불명의 말이 생겨날지도 모르겠습니다.

5. 인용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지 작용이 있으면 의지적 행위가 되고 의지 작용이 없으면 무의지적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진중권 번역본은 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반면 이영철 번역은 밋밋합니다. 저 원문의 번역만 놓고 보아서는 박정일이 주장하는 대로 이영철 번역은 "참으로 아름"다운 반면 진중권 번역은 "최소한의 정도"도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진중권이 원문의 맥락을 탁월하게 부각시켜 놓은 노고는 아무도 칭찬을 하지 않는군요. 번역에 있어 최고로 중요한 항목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