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가장 눈에 띄는 재출간 도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비봉출판사, 2009)이다. 지난 1996년에 출간됐다가 절판됐었는데, 액면가는 2만원에서 2만 5천원으로 올랐다. 상대적으로 초판이 얼마나 비쌌던가를 알 수 있다(새삼 적시하는 것은 내가 책을 구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 이번엔 소장도서로 마련해둠직하다(게다가 전면개역판이라고 한다).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1. 07) 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역지사지 도덕론 

애덤 스미스(1723~1790·그림)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국부론>이다. 근대 경제학의 탄생을 알린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미스를 유명인사로 만든 출세작은 <국부론>보다 앞서 집필한 <도덕감정론>(1759)이다. 1996년 한 차례 번역·출판된 바 있는 이 책이 출판사의 전면적인 번역 수정을 거쳐 명료한 문장으로 새롭게 나왔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 자신은 경제학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학이 분과학문으로 독립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도덕감정론>으로 명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 스미스’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소도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뒤 1752년 글래스고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임용됐다. 그 자리는 전 시대에 도덕철학자로 이름을 날린 스미스의 스승 프랜시스 허치슨의 뒤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사회철학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이 시기에 유창한 강의로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도덕철학자 스미스의 강의가 책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도덕감정론>이다.

<도덕감정론>은 <국부론>만큼이나 오해의 안개에 쌓여 있는 저작이다. <국부론>이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하는 저작인 데 반해 <도덕감정론>은 이타심을 강조한 저작이라는 것이 그런 오해의 한 양상이다. <국부론>의 이기심을 <도덕감정론>의 이타심으로 제어하고 교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부론>에서 시장원리주의를 설파한 스미스가 그보다 먼저 <도덕감정론>에서 복지국가론·후생경제학을 주창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스미스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동일한 원리 위에 세워진 중층 건물과도 같은 저작이다. <도덕감정론> 위에 <국부론>이 얹힌 모습인 것이다.

‘도덕감정론’ 하면 도덕심 또는 이타심이 떠오르기 십상인데, 도덕감정을 이타심으로 한정하여 이해한 사람은 스미스의 스승 허치슨이었다. 스미스는 스승의 생각을 비판하고, 이타심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도덕감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도덕감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동감(sympathy·공감) 능력’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쁨·슬픔·욕구·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경우 즐거움을 느끼고 그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 경우엔 불쾌함을 느낀다.

스미스는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적정성’이라고 말한다. 이타심이라고 해서 꼭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팽개치고 남을 돕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이라고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 행위도 그것이 적정한 수준이라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상상력이야말로 공감 능력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그 적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스미스는 여기서 ‘제3의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간 행위의 경험적 축적 위에서 그런 관찰자를 상정할 수 있으며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그런 관찰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관찰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도덕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스미스가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스미스는 공감의 원리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조화와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늘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질서 있게 운행하듯이, 인간의 이기심도 질서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의 이런 규명 위에서 <국부론>의 논의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기심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 사회적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따름이다.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였다. 노동과 자본이 분화되지 않고, 자본가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던 시대였다. 스미스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와 질서는 소박한 단순상품생산 시대의 목가적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이론을 노동과 자본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스미스의 ‘자유방임’ 논리를 자신들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더구나 스미스의 ‘자유방임’ 주장은 그 시대의 상업자본가들의 독점과 특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할 경우에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애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모든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철학자’가 스미스였던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11. 07.   

P.S. '급진적 철학자'로서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애덤 스미스를 재조명한 책들이 없진 않다. 조나단 와이트의 경제학 소설 <애덤 스미스 구하기>(생각의나무)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론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의 <윤리학과 경제학>(한울아카데미, 1999) 덕분에 <도덕감정론>의 의의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센은 펭귄판 <도덕감정론>의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하다). 제목은 '윤리학과 경제학'이지만, 센은 경제학의 두 가지 기원으로 '윤리학'과 '공학'을 든다(각각 윤리학적 기원과 계산논리적 기원이다). 경제학이 오늘날과 같이 탈윤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절반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센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른바 '현대 경제학의 시조'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 더구나 경제학의 주제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야 같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꽤 최근까지 경제학을 '도덕철학 우등졸업시험'의 한 분야로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학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17쪽)    

해서 이러한 전통에서 일탈한 현재의 '주류 경제학'은 일종의 '돼먹잖은 경제학'이다(거기에 비한다면 센코노믹스는 좀 '돼먹은 경제학'이겠다). 돈은 많이 벌어서 으스대지만 안하무인이고 근본을 모르는 망나니. 소위 '경제학'에 대해 내가 가진 불편한 느낌의 기원도 그런 데 있다. 고등학교 때 '경제'를 배웠지만, 기억에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만이 조금 언급되었을 뿐 <도덕감정론>은 다뤄지지 않았고, 경제학의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 단 한순간도 경제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경제학은 단 한 과목도 수강하지 않았다. 경제학이 도덕철학의 일부였다는 것만 알았어도 생각을 조금 달리했을 지 모를 일이다...   

P.S.2. 대출도서를 반납하기 위해 동네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관한 참고도서를 살펴봤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몇 권의 책에서 관련 장을 복사했는데, 일단 제임스 버컨의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탄생>(청림출판, 2007)이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 요긴해 보인다. "<도덕감정론>은 흄과 허치슨, 맨더빌, 샤프츠버리, 로크, 홉스를 거슬러올라가, 17세기 시민전쟁의 정치적, 종교적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영국의 오랜 전통의 절정이자 최후를 장식하는 백조의 노래다."(83쪽)라는 게 서두의 평.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라는 점이 이상하지 않다. 한 대목 더 인용하면,  

이 책의 제목은 철학적 저작의 의도를 정확히 대변해준다. <도덕감정론>은 왜 어떤 행동은 옳고 어떤 행동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 권위가 필요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옳거나 그르다고 느끼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인간에게 언제나 옳고 좋은 것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경우에 인간이 어떻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한다. '왜 여자가 정숙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남자는 여자가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를 따진다.(86쪽)  

홍훈 교수의 <인간을 위한 경제학>(길, 2008)은 제목보다는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란 부제가 더 적합한 책인데, <도덕감정론>에 대해서도 내용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박순성 교수의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풀빛, 2003)은 생각 밖으로 알찬 소개서이자 연구서. 스미스의 경제학과 윤리, 혹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관계에 대해서는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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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2-16 23:26 
    애덤 스미스에 관한 책은 드물지 않게 나와 있고, 그의 <도덕감정론>이 <국부론>만큼 중요하게 간주돼야 한다는 것도 '상식'에 속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직접 읽어볼 엄두를 못 내는 독자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읽는다>(동아시아, 2010)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니 '좋은 입문서'에 대한 관심으로도 읽어봄직하다는
 
 
목동 2009-11-0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기본 미덕은 '공감'인데요. 쌍방의 적정 수준을 유지함으로서
의식이나 물질의 흐름(소통)이 일어난다는 말같습니다. 대학1학년때
경제학개론(고교때 정치경제) 수강후로 오늘 처럼 일상의 경제용어를
공부했습니다. 윤리학과 경제학 문장들은 선문답같아 쉽지 않습니다.

로쟈 2009-11-07 17:27   좋아요 0 | URL
사실 주류 경제학은 '경제공학'이라고 개명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첨단의 '금융공학'처럼). 인간과 삶에 대한 지극히 협소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으니까요. '제몫 찾아주기'가 필요한 듯싶습니다...

[해이] 2009-11-0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사야지 ㅋㅋ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

다이조부 2009-11-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2만원에서 5천원 올랐는데 그렇게 많이 오른건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당시 책값이 비쌌네요.

제가 2001년 대학신입생때 김밥집에서 서빙을 하면 꼴랑 시간당 2000원을 받았는데,

요즘 그런 일을 하면 5000원까지 받을 수 있거든요.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네, 요즘 책값들에 견주면 3만원은 넘어갈 텐데, 재판이라서 그 정도로 매겨진 듯해요. 초판은 정말 비쌌죠. 요즘이라면 4만원대 책이었습니다...

koreack 2009-11-11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공학'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입니다. 경제학에 대한 그 불편하신 감정은 이해가 갑니다마는.. 지극히 협소한 이해라고 하시면 경제학자들 많이 섭섭하겠군요. 주류(어디까지를 '주류'라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네요. 맑스경제학 하시는 분들에게는 어지간한 비판적 학자도 전부 '주류'로 보일테니...) 경제학의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법론, 현실적 영향력에 관해서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학자들이 크루그만이 말한 것처럼 현란한 수식을 통해 당연한 사실을 하나 증명해 놓고 그 틀을 세상 전체로 확대하고 때로는 남들이 그렇게 보기를 강요하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리적, 체계적 연구방법과 분석적 시각 자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것이 낸 성과와 그 시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다른 학문분야와의 결합이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거겠죠. 오히려 다른 학문 영역을 침범한다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하시는 분들도 많지 않던가요? ^^ 경제와 인간의 복지, 자유 등에 대한 센의 철학적 논의 역시 의사결정론과 일반균형이론 영역에서 남긴 수리적 분석에 기반하여 나온 것이랍니다. 센의 후기 저작이 아닌 그 논의들만 보셨다면, 역시 "협소하다"는 평을 내리셨을 것 같습니다만. ^^

로쟈 2009-11-08 10:53   좋아요 0 | URL
섭섭해할 경제학자들이 많다면 오히려 다행인데, 정말 그럴지는 의문입니다.^^; 경제공학이란 '비아냥'을 면하기 위해선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듯해요. 이번 경제위기에 직면해서도 경제학자들의 무능력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는데, 특히나 한국에서는 경제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C급 경제학자 우석훈씨의 푸념이기도 하지만...

목동 2009-11-08 12:03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은 통제된 실험을 할 수 있지만 경제학은 경제자체가 우리들 이야기이기(경제할동) 때문에 모형을 만들어 예측하기 쉽지 않을 것같아요. 인간의 뇌, 자연의 기후, 경제의 공통점은 '답이없다'지만 예측성 해설만으로는 쉽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런 연유로 다른 학문과 결합이 가속화될 것같구요. 우리의 현실에 유능하고 겸손한 경제학자와 포용적이며 거시적인 정치가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최근에는
well-being GDP 를 제시한 학자도 있다는데요.

yamoo 2010-07-19 18:30   좋아요 0 | URL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성과과 그 시각...인문분야에서 경제학만 그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설득력 있는 깔끔한 설명방식..원츄입니다~ㅎㅎ

노이에자이트 2009-11-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경국은 요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글을 많이 쓰더군요.아담 스미스는 탐욕스런 상인들을 그 누구보다도 비판했지요.저는 다카시마 젠야<아담 스미스>가 좋았습니다.문고판에 값도 싸구요.저자는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를 기업하는 자유를 이론적으로 다져놓은 인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고 그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로쟈 2009-11-08 18:45   좋아요 0 | URL
대개는 하이예크주의자를 자처하는 학자들이죠. 아담 스미스는 좀 특이한 포지션인 거 같습니다. 같은 자유주의라 하더라도...

koreack 2009-11-1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또 왔습니다. ㅎㅎ 이거 괜히 잘못 적었다가 욕얻어먹는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사실 로쟈님의 블로그를 즐겨 보고, 선배의 선배님이라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몇번 들은 적도 있습니다. ㅋ 그러니 미워하진 말아주시고 귀엽게 봐주시길. ^^
말씀하셨다시피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 성격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거리가 있겠죠.. 저는 현재의 모습에 불만이 있지만, 한편으로 백안시하는 시각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practice로서의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제 생각에는 경제학이 이 측면에 있어서 과도한 기대를 받는 측면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학문 규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지만요) 학문의 성격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 개별 사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일반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 아니던가요. 베이컨 등등의 시기 정립된 과학의 성격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물론 모형의 구축과 일반화는 예측을 위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이 "쟤는 왜 경제위기를 예측도 못해?"라는 식으로 이어진다면 모든 학문이 유사한 짐을 짊어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에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으라고, 그렇지 못하니 뜬구름 잡기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변호 대신 자아비판(?)을 해보자면... 경제학을 공부하면 기본적으로 normative하기보단 positive한 면을 배웁니다. 방법론을 엄밀히 한다는 점에서 나쁘게 보지 않지만, 결국 이것이 개별 학자들의 세계관을 고정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세계관과 방법론을 원용한 것까지는 좋은데, 잘못하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꼴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경제학계의 에너지가 "보다 정밀한 모델의 구축"과 "경제학적 틀로 구체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많이 쓰인다는 것입니다. 케인즈와 같이 "천재의 시대"가 가고, 아주 작은 것들의 설명 내지 개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 시대의 단면이지요. 저는 이게 틀렸다고는 말할 자신이 없지만, 그만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분명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구조적 담론을 제시하는 (주로 좌파경제학 하시는 분들이지요) 분들에게서는 (수리/계량적 방법을 기반으로 하는 입장에서 보기에) 체계성이 떨어지거나, normative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창조적인 시각을 제시하기에는, 학계의 분위기도 그렇고 "직업상" 분위기가 주류나 비주류나 너무 빡빡하죠.
하지만 각각 저는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자들이 반드시 사회의 큰 틀을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어설피 거대담론을 제시하는건 입과 귀만 피로하다고 생각하고요. 임금, 산업, 금융 등 이슈에서 구체적인 기준 하나를 잘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경제학자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적 자본, 건강 불평등이 갖는 심리적, 문화적 함의 등 우리 사회의 보다 복합적인 측면을 보려는 시도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래봐야 저는 아직 일개 학생이지만) 아직 대안적 시도들은 한계가 많습니다. 단적인 예로 스티글리츠가 MEW를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역사적, 보편적 분석이 가능한 수준까지 가야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글이 너무 길었는데, 어쨌든 제 말씀은 이런겁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합리성 가정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갑자기 행태경제학에 의존하려는 등의 행동 역시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런 움직임은 다른 대안에서도 곧 실망을 맛보게 될겁니다. 비판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들을 발견하는 노력에도 정당한 credit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미스가 가졌던 혜안을 상당부분 잃은 것은 아쉽지만, 그것을 다시 얻는 방식이 반드시 옛날식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경제학자들의 몫이겠쬬.
시간이 있으시다면, 크루그만 등과 주류경제학자들의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른 것을 떠나 이런 논쟁 자체가 사실 상당히 부럽습니다. ^^
http://www.nytimes.com/2009/09/06/magazine/06Economic-t.html
http://modeledbehavior.com/2009/09/11/john-cochrane-responds-to-paul-krugman-full-text/

로쟈 2009-11-11 20:21   좋아요 0 | URL
네, 자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류동민 교수의 <프로메테우스 경제학>을 보니 문제의 지형이 짐작가능했습니다. normative한 맑스주의 경제학도 positive한 설명(수학적 논리에 기초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고 저자는 썼더군요. 거꾸로 이제 positive 위주의 경제학도 어떤 normative를 계획할 수 있는지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한겨레에서 박혜영 교수의 '시대를 읽는 문학' 칼럼을 옮겨놓는다.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정치가 토마스 제퍼슨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상업과 농업에 대한 그의 생각이 흥미를 끈다(나도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장사꾼들의 자유'와 '농부들의 자유'를 대비시켜서 자유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하지만, 제퍼슨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썰렁'하다. <토마스 제퍼슨의 이해>(세종출판사, 2005) 정도인데 그나마 품절된 상태. 캠브리지 컴패니언 시리즈의 <토마스 제퍼슨>과 <게티즈버그 연설, 272단어의 비밀>(돋을새김, 2004) 등의 저자 게리 윌스의 <미국의 발명> 정도를 참고문헌으로 찾아놓는다. 윌스의 책은 번역되면 좋겠다.   

 

한겨레(09. 11. 07) '자본의 애완견’ 민주주의에 바치는 추도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는 게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인데 왜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야 하는지, 왜 농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반대하는데도 4대강 사업으로 여의도의 13배가 넘는 옥토를 막무가내로 절단해야 하는지, 나아가 왜 납세자들의 허락도 없이 내년도 급식비 지원을 갑자기 중단하여 25만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당장 굶주리게 만드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른바 민주주의 시대인데 왜 데모스(demos)인 우리들은 이토록 무기력하게 되었는가? 우리 시대의 이 ‘불가사의’한 민주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의 경제사상은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미국 민주주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부도덕한’ 민주주의로 변질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몬티첼로의 성인’으로 불렸던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제3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건국 초기 미국 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민주주의가 지금의 신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경제체제를 전제로 한 것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국가를 건설함에 있어 어떤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제퍼슨은 이른바 ‘해밀턴주의자’로 불리던 중상주의자들과 대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공업에 토대를 둔 강력한 선진국을 만들려던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과 달리 초대 국무장관이었던 제퍼슨은 소규모 농업에 토대를 둔 도덕적인 민주국가를 꿈꾸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농부들이야말로 가장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덕성스러운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성은 이 목적을 위해 형성되어야 한다. 사회와 관련하여 옳고 그름을 인식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도덕적 능력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도덕적인 사례를 농부와 교수에게 던져보라. 전자가 후자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농부는 교수처럼 인위적인 법칙에 이끌려 나쁜 쪽으로 빗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땅을 돌보며 사는 농부가 땅에 대한 아무 감각도 없이 인위적인 논리만 만들어내는 교수보다 훨씬 도덕심이 뛰어나다는 제퍼슨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다. 사실 교수는 궤변만 늘어놓을 뿐 옳고 그름을 판단할 도덕능력이 없기 일쑤라는 것은 이미 지난번 총리지명 청문회에서도 다 드러난 일이다.

도덕적인 사회의 근간은 상업이 아닌 농업이라는 생각에서 제퍼슨은 해밀턴이 주장한 중앙은행 설립에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은행이 설립되면 주기적인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통해 은행가들이 사람들의 돈을 다 털어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의 정당성과 신생 민주국가의 정통성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모든 경제권력도 인민에게서 나오는 그런 민주주의의 수립에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는 상비군보다도 은행이라는 기관이 우리의 자유에 더 위험천만하다고 믿는다. 만약 미국 인민들이 자신들의 화폐발행권을 사설은행이 통제하도록 허용한다면 처음엔 인플레이션으로, 그다음에는 디플레이션으로, 은행과 은행 주변을 맴돌며 성장한 기업들이 모든 재산을 인민에게서 강탈하여 마침내 아버지들이 정복한 미 대륙에서 그 자식들은 눈떠 보니 노숙자 신세가 되도록 만들 것이다. 은행으로부터 화폐발행권을 빼앗아 원래 귀속되어야 마땅한 인민에게로 돌려주어야 한다.”  

주권재민과 함께 경세제민이 민주주의의 근간임을 적시한 제퍼슨의 생각이 옳았음은 지금도 반복되는 월가의 파생상품 남발과 미국 은행의 도미노 파산공포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제퍼슨의 소망과 달리 경세제민의 핵심인 화폐발행권은 결코 인민의 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달러 발행과 미국 통화정책을 쥐락펴락하는 연방준비은행이 경세제민보다는 상업적 이해관계에 철저할 수밖에 없음은 12개의 준비은행의 우두머리 격인 뉴욕준비은행의 대주주가 바로 체이스맨해튼과 시티은행이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퍼슨이 은행을 반대한 이유는 국가건 개인이건 간에 은행의 핵심 기능이 바로 돈을 벌기 위해 빚을 늘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국채건 사채건, 투자건 대출이건, 융자건 저당이건 간에 모든 빚은 원금 플러스 이자이기에 전체 통화량은 항상 화폐발행량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즉 이자로 인해 처음부터 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는 경세제민이 아닌 ‘위기관리’가 경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으며,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는데도 항상 빌린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갚아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개인이건 국가건 언제나 무기력하게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빚에 토대를 둔 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자유’와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며 살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런 경제는 당연히 사회를 부도덕하게 만든다. 제퍼슨은 “공공 부채만큼 정부를 그토록 타락시키고, 국가를 그토록 부도덕하게 만들 동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채는 외부의 어떤 적보다도 더 심각한 파멸을 내부에 야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이 부도덕한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4년에 한 번씩 선거를 하고, 입법부, 사법부가 있다고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모든 권력의 집중을 막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시장의 창녀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경제 권력부터 사람들에게 되돌려줘야 할 것이다.(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09.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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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11-07 15:21   좋아요 0 | URL
한국형 워싱턴 Statemanship은 없을까요? 실은 '한국형'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지요.

로쟈 2009-11-07 17:28   좋아요 0 | URL
미국이 타산지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미국 민주주의가 가지 않은 길...

게슴츠레 2009-11-09 13:08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 인민주권을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의 측면에서도 사유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고진도 LETS에서는 통화발행권이 모두에게 있다며 이는 허울뿐인 인민주권의 실질화라고 말한 바 있죠. 물론 그 현실성은 의심스럽지만 인민주권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보충하려는 시도는 평가되어야 할 몫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자비나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의 보편적 복지, '기본소득'에 관련된 논의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맥락에서 좀 주목받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로쟈 2009-11-09 19:01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정치경제학이 필요한 것이죠. 사실 예전 교과서는 정치/경제라고 같이 묶여 있기도 했었지만.^^;
 

이번달 '고교독서평설'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루고 있고, 연재의 마지막 회였다(역시나 분량상 생각만큼 자세하게 다루진 못했다). 지난 1일까지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여러 여건상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다리다 보면 또 기회가 오겠지...  

고교 독서평설(09년 11월호) 고독한 인간의 끝없는 기다림 

인간 존재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부조리극

블라디미르 : 자, 갈까?
에스트라공 : 그래, 가자.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일랜드계 프랑스 작가 새뮤얼 베케트(1906~1989)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게 끝난다. 고도에 대한 두 주인공의 막연한 기다림으로만 채워진 이 연극은 고도라는 이름과 작가 베케트를 ‘20세기의 문학적 신화’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정작 ‘고도’가 누구이며 그들의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고도가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해 베케트가 “내가 그걸 알았다면 작품에 직접 써넣었을 것”이라고 답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분명 기이하면서도 한편으론 매력적인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번 시간에는 극의 구성과 성격 묘사가 불합리하고 낯설다는 의미에서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분류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작품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와 모호함을 풀어 보도록 하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인 만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조금 깊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자, 그럼 고도를 만나러 가 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
먼저 ‘2막의 희비극’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의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한다. 1막에서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등장하여 황량한 시골길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아래서 고도를 기다린다. 둘은 고도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동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도둑 이야기, 갈보(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집에 간 영국인 이야기 등을 하며, 다투기도 하고 이내 화해하기도 한다. 또한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하자는 말까지 주고받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런 그들 앞에 끈에 목이 묶인 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럭키’와 채찍을 들고 그의 주인 행세를 하는 ‘포조’가 나타난다. 에스트라공은 럭키를 불쌍하게 여겨 손수건을 건네주려고 하나 오히려 발로 걷어차인다. 포조는 대화 상대가 되어 준 대가로 두 사람에게 럭키의 춤을 보여 주고 그가 생각을 말하게 한다. 그러나 럭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을 뿐이다. 포조와 럭키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한 소년이 나타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가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2막은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설정돼 있다. 나무에 잎이 조금 돋은 게 달라졌을 뿐이다. 블라디미르는 활기차게 등장하여 기이한 노래를 부르고, 에스트라공은 풀이 죽은 상태로 등장한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위로하면서 어제의 일을 화제 삼아 보지만, 에스트라공은 포조와 럭키를 기억도 하지 못한다. 1막에서 떨어진 럭키의 모자를 블라디미르가 발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모자와 럭키의 모자를 빠르게 바꿔 쓰는 놀이를 한다. 

그들 앞에 다시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포조가 럭키를 잡아끄는 끈의 길이가 더 짧아졌다. 그 사이 포조는 장님이 되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포조와 럭키는 넘어지고, 포조는 살려 달라고 소리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를 도와준다. 블라디미르는 포조를 일으켜 세운 뒤 어제 일을 물어보는데, 포조 역시 전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언제부터 장님이 되었느냐’란 질문에는 버럭 화까지 낸다. 포조와 럭키가 퇴장하자 소년이 다시 등장한다. 소년 또한 블라디미르에게 어제의 일을 모른다고 하면서 1막에서와 똑같이 고도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구원에 대한 기대와 절망
이렇듯 2막은 1막의 상황을 대동소이하게 반복하며 두 사람의 기다림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베케트는 앞에서 나온 부제를 통해 이 반복적인 기다림, 또는 기다림의 반복을 ‘희비극’으로 연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작품의 비극성이 주로 기다림의 부조리한 본질과 말의 한계 그리고 삶의 유한성 등과 같은 무거운 주제와 연관된다면, 희극성은 부랑자, 광대 같은 인물들의 모양새 및 그들의 서커스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다. 무거운 주제와 가벼운 표현 기법 사이의 이질적인 결합이 이 연극의 주된 정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더불어 이 희비극성은 ‘기다림’ 자체가 갖는 정조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체감하게 한다. 만남이란 사건이 지속적으로 유예된다면 기다림이 갖는 무의미함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무의미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일까?  

<고도를 기다리며>를 단순히 ‘부조리한 기다림’의 드라마로만 간주하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기독교적 상징을 간과하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개신교 가문에서 태어난 베케트는 자신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기독교적 모티프를 많이 활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 작품에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무시하기 어렵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구원에 대한 기대와 절망의 ‘베케트식 형상화’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블라디미르의 입을 빌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도둑의 이야기를 작품에 직접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베케트는 이 작품의 주제를 묻는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절망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구원받았다. 기대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았느니라.” 관념들을 믿지는 않지만 관념의 형상화에는 늘 매료된다고 하면서, 베케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에 관념이 놀랄 만큼 잘 형상화되어 있다'고 평했다.   

1막 서두에서부터 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로 소개되는 블라디미르는 두 도둑놈 가운데 하나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확률치고는 괜찮지.”라고 말한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반반이니까 나쁜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확실한’ 확률이 아니라는 데 있다.

블라디미르 :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복음서를 쓴 네 사도 가운데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거나 어쨌든 그 근처에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놓았거든. (사이) 이봐, 고고, 가끔은 맞장구를 쳐 줘야 할 것 아냐?
에스트라공 : 그래. 아주 아주 흥미롭네.
  
블라디미르 : 넷 중에 한 사람만 말이야. 나머지 셋 중에서 둘은 숫제 언급도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두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는 거야.

여기서 ‘네 사도’란 4대 복음서의 저자를 말한다. 그런데 ‘둘은 언급조차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는 블라디미르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요한복음>에서는 추가적인 언급 없이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다고 기술되었으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두 도둑이 모두 예수를 비웃고 모욕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도둑 한 명이 예수를 모욕하는 다른 한 명을 꾸짖으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하자, 예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답한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리라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은 물론 ‘복음(福音)’이라는 말뜻 그대로 ‘좋은 소식’이다. 

다시 말해, 블라디미르의 의문은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왜 나머지 세 사람의 얘기는 제쳐 놓고 그 사람의 말만 믿느냐’는 것이다. 에스트라공은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산술적으로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반반의 구원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절반이 아니라 8분의 1, 곧 12.5%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는 ‘썩 괜찮은 확률’이 아니다. 이것이 블라디미르의 근심이자 고통이며,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끌고 가는 작가의 문제의식이다.

고고와 디디,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자
절반의 구원 가능성이 보통의 사람들, 곧 바보들이 갖는 희망이고 기대치라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광대’의 구원은 훨씬 낮은 기대치를 갖는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다림 또한 헛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 기다림을 지속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부조리’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간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도둑처럼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면 삶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게다가 영구한 시간에 비하면 삶의 유한함은 ‘순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포조의 말을 빌리면,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순간’에 불과하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라는 포조의 대사는 이러한 세계관을 집약하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볼 때 구원이 없다면 삶의 지속은 무의미하다. 만남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기다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더는 버틸 수가 없다며 자꾸만 자살을 꿈꾸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막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의 대사는 이 문제를 간결하게 정리해 준다.

에스트라공 : 이 지랄은 이제 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 그럼 구원받는 거지.


이 대목에서 고도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고도’가 누구인지는 확정할 수 없더라도 ‘삶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없는 삶, 곧 고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삶은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것이 더 나은 삶이다. 물론 더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생각은 그렇다. 다만 그들을 붙들어 매는 것은 희박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다.  

애초에 막이 오르면 에스트라공이 낮은 돌무덤에 앉아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면서 내뱉는 첫 대사는 “되는 일이 없어(Nothing to be done.).”다. 이 대사는 “더는 못 하겠어”란 뜻도 갖는다. 반면에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평생 그런 생각을 멀리하려고 애써 왔지. 블라디미르, 잘 따져 봐, 아직 다해 본 건 아니잖아, 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여기서 “되는 일이 없어.”라는 체념, 혹은 “더는 못 하겠어”라는 포기 그리고 “아직 다해 본 건 아니잖아.”라는 분발의 촉구는 삶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대표한다. 더불어 무대 위의 두 주인공은 블라디미르의 말대로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마치 아벨과 카인 그리고 예수 곁의 두 도둑이 인간의 대표자인 것과 마찬가지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는 러시아식 이름이고, 에스트라공은 프랑스식 이름이며, 포조와 럭키는 각각 이탈리아와 영어식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이들은 ‘인류’라는 대표성을 갖는다. 

‘8분의 1’의 기대와 ‘8분의 7’의 절망
그런데 삶에 대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각기 다른 태도는 과연 구원에 대한 판정을 가능하게 할 만큼 ‘의미 있는 차이’일까? 서로를 ‘디디’와 ‘고고’라 부르는 이 단짝은 여러모로 다르긴 하다. 블라디미르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에스트라공은 자신이 ‘시인’이었다고 떠들어 댄다. 블라디미르는 끈기가 있는 반면에 에스트라공은 비약을 잘하고, 블라디미르는 과거의 사건들을 잘 기억하지만 에스트라공은 모두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블라디미르는 입에서, 에스트라공은 발에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 사소한 차이로 수렴된다. 1막과 2막 끝에서 두 사람이 모두 “가자.”라고 얘기하면서도 가만히 있음으로써 ‘간다’와 ‘가지 않는다’라는 행동의 차이를 무화(無化)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1막에서 ‘주인과 하인’으로 등장한 포조와 럭키조차도 2막에서는 ‘장님과 벙어리’가 되어 등장하면서 신분적 차이가 흐릿해지며 그들을 연결해주는 끈의 길이도 짧아진다. 성취되지 않는 기다림 속에서 모든 차이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이 연극에서 가장 긴장되는 대목은 2막에서 누군가 오는 것을 보고 고도로 착각한 블라디미르가 환호하며 흥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라 만세를 부르는 블라디미르와 대조적으로 에스트라공은 “난 지옥에 떨어졌군!”이라며 낙담한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으며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하며 서로 껴안는다.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은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다. 이렇듯 그들의 차이를 지우고, 그들의 탄원을 공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산술적으로 답하자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8분의 1’의 기대와 ‘8분의 7’의 절망이다. 이 부조리한 배합 비율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현대인의 희비극적인 자화상으로 만든다. 

09. 11. 07.  



P.S. 베케트의 드라마와 관련하여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은 그의 연출노트이다. 파버앤파버 출판사에서 내는 <새뮤얼 베케트의 연출 노트(The Theatrical Notebooks of Samuel Beckett)> 시리즈는 네 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1권이 <고도를 기다리며>(1993)이다. 1부에서는 본문과 자세한 주석, 그리고 2부에서는 1975년에 베케트가 직접 연출한 베를린 실러-극장 공연의 연출노트를 사진판으로 수록하고 있다. 오래전 영풍문고 양서부에서 보았던 책인데, 이번에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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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09-11-0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네요. 이 책에서 선생님 글 읽는게 일상의 낙이었는데 말이죠. 이제는 이 잡지에서는

샘 글을 못 보는군요

로쟈 2009-11-07 21:59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매번 지각원고를 보내서 편집자에게 좀 미안한 연재였습니다. 좀더 여유가 있을 때 50매짜리 연재를 해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일이 하나 준 만큼 마음은 편합니다.^^;

비로그인 2009-11-08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읽으면 좋을 거 같은 책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로쟈 2009-11-08 10:55   좋아요 0 | URL
자기 자신에게 속는 건지도 모르죠...
 
헤세의 '데미안'과 전쟁의 의미

'출판저널' 10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의 한 장면'을 다소 뒤늦게 옮겨놓는다. 새로 연재하는 코너인데, 제일 처음 다룬 책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쓰다 보니 분량제한에 걸려 애초에 구상했던 것만큼의 이야기는 늘어놓지 못했다(그래서 일부 내용은 이달 11월호에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로 번졌다). '출판저널'은 대개의 잡지들처럼 어렵게 꾸려지고 있지만 읽을 만한 기사들이 많아서 독서가들에겐 아주 유익할 듯싶다(알라딘에서는 판매가 되지 않는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홈피(http://www.publishingjournal.co.kr/?p=2542)를 통해서 내용을 일별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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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09년 10월호)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이란 질문에 “단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라고 답한 적이 있다. “아마도 중2 때 읽었던 듯하고 그때 요절했다면 ‘이 한권의 책’이 될 뻔했다”고 덧붙였다. 그때보다 훨씬 나이를 더 먹은 지금은 물론 ‘내 인생의 책’도 달라졌다. 하지만 충격의 ‘원체험’을 찾자면 아무래도 ‘수레바퀴 밑’으로 기어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 시절에 읽은 세계문학전집판은 다시 구할 수 없기에 나는 <수레바퀴 아래서>라고 새로 번역된 책을 책상머리에 두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래서’보다는 ‘밑에서’가 더 강한 정서적 울림을 갖는다. 그 ‘밑’은 ‘밑바닥’의 ‘밑’이기도 하니까.  

더듬어 보면 <수레바퀴 밑에서>은 내 독서체험의 밑바닥이다. 성냥팔이 소녀도 죽고, 인어공주도 죽었지만, 그리고 <삼국지>에선 허다한 영웅호걸들이 비장하게도 죽고, 어처구니없게도 죽어나갔지만,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죽었을 때만큼은 슬프지 않았던 듯싶다. 헤세의 분신이었던 한스는 곧 나의 분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눈물까지 흘렸던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책을 읽은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의적으로 공부를 소홀히 했다. 그것이 죽은 한스에 대한 연대감의 표시이면서 ‘가정과 학교’에 대한 나대로의 반항이었다. 반항치고는 건전했다. 방과 후에 급우들과 탁구를 치러 다닌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한스만큼 허약하긴 했어도, 덕분에 한스처럼 신경쇠약에 걸리지는 않았다. 연이어 다른 책들을 읽은 것도 한스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헤세의 또 다른 대표작이자 국내에서는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 <데미안>에 대해서 나는 데면데면했다. 중학교 때 읽었는지 대학교에 들어와서 읽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다. 하긴 이 책을 얼마 전에야 완독했으니 이전에는 읽은 게 아니라 읽다가 덮은 거였다. 두껍지도 않은 책을 그것도 몇 번씩이나 읽다가 그만둘 정도였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하다. 기억에 나는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등장하여 구해주는 대목까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건 똑같이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곤 하지만,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와 ‘한스 기벤라트의 이야기’는 뭔가 달랐다는 뜻이다.  

둘 다 성장기 소년의 이야기인데, 무엇이 다르다고 여겼던 것일까? 집안이 좀 달랐을까? 다시 책을 뒤적여보니 한스의 아버지 요제프 기벤라트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하는 인물로 결코 가난한 축에 들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뱅이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졸부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고 하니까, 말 그대로 중산층이다. 싱클레어도 당시의 기준으론 중산층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으론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무엇보다도 프란츠 크로머와 비교해보면 그렇다. 크로머는 술꾼인 재단사가 아버지였고 온 가족이 악명이 나 있었다고 소개된다. 반면에 싱클레어의 집은 너무 밝다 못해 광채가 나는 세계였다.  

물론 <데미안>에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가 있다.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세계인가! 바야흐로 이 두 세계가 어떻게 맞닿아 있고, 어떻게 교차하며 그래서 어떤 사건들을 빚어낼는지 기대되지 않는가?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주한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사실 내가 <데미안>에서 읽고 싶은 건 그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이야기보다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와 이웃 아낙네들의 싸움판 이야기가 더 ‘소설적’이며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두 세계 사이에 낀 주인공을 다루는 거라면 싱클레어 대신에 하녀 리나를 주인공으로 삼아도 좋았겠다. 하지만 헤세는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나중에 크로머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의 대표격으로 등장하지만,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 데미안에게 바로 제압당한다.   

소위 ‘교양소설’에서 주인공은 진정한 자기되기의 과정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이 아닌 것을 경험해야 한다. 노발리스의 말을 빌면, 거기서 근본적인 타자성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면 경험이란 단지 허울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싱클레어는 과연 그러한 ‘타자성’을 경험한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 싱클레어가 꾸는 꿈은 시사적이다.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할 무렵 싱클레어의 꿈에는 크로머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환상은 크로머가 현실에서 저지르지 않은 것조차 꿈속에서 자행하게 했다. 그의 사주를 받아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을 자주 꾼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싱클레어에게서 타자 경험의 극대치이다. 하지만, 이 경험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꿈) 속에서 이루어진다. <데미안> 전체의 이야기에 환상성이 짙게 드리워 있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데미안> 번역자의 한 사람이었던 전혜린은 “데미안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개념, 하나의 이데아이다. 그러나 어떤 현실의 인간보다도 더 살아 있고 더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무엇이다.”라고 1960년대에 적었다. 이 평가는 곧 신화가 됐다. 그리하여 짐작에 전 세계에서 <데미안>을 가장 많이 읽는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이다. 하지만 나는 “독일의 전몰학도들의 배낭에서 꼭 발견되었다는 책,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의 마력이 여전히 미심쩍다. <수레바퀴 밑에서>와는 달리 <데미안>은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09. 11. 07. 

P.S.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전혜린판 <데미안>도 찾아서 읽고 싶다(루이저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함께. 전혜린이란 이름이 떠올려주는 두 작품이다). 기억엔 삼중당문고의 <데미안>이 그녀의 번역이었던 듯싶다. 독어판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의 표지를 찾아보니 영어판보다 한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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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장소설" 아닌 '성장소설, "순진함" 아닌 '순진함'
    from 게슴츠레의 공부터 2009-11-09 13:24 
    로쟈 님의 페이퍼를 보고 예전에 인도철학사를 수강하면서 제출했던 <데미안>서평이 생각나 찾아 업데이트해본다. 수업 레폿이라는 글의 형식은 근본적인 한계들을 가지는데 그 중 하나가 해당 수업의 내용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을 함께 듣지 않은 이들에게 보이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색을 맞춘답시고 어거지고 개념들을 구겨넣어야 했지만 기초적인 이해가 없어도 큰 무리는 없이 남에게 보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런 부차적인 것이
  2. 헤세의 차라투스트라 VS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11 19:32 
    이번달 '출판저널'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루고 있으며, 지난달에 읽은 <데미안>의 한 장면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지면에는 첫문단과 끝에서 두번째 문단이 누락됐는데, 여기서는 되살려놓도록 한다.   출판저널(09년 11월호)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니체의 가장 난해한 책  헤세가 13살 때 아버지에게 보낸
 
 
perky 2009-11-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레바퀴 밑에서를 고등학생때 읽었었는데요. 저도 로쟈님처럼 이 책 읽고나서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었었어요. 공부에 대한 회의감이 너무 크게 밀려와서 괜시리 반항도 해보고..이 책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 정신적으로 방황을 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책은 적어도 수험생에게만은 피해야 할 책인 듯 싶어요;;
그래도 제게 최고의 헤르만헤세 책은 역시 '데미안'이었어요. 대학생때 처음 읽었는데, 세상이 새롭게 보이더군요..문장 하나하나에 전율해가며 미친듯이 줄 그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었던..제 대학생때의 정신적 바이블..
'황야의 이리'도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고요.(헤르만헤세 책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다 좋군요. ㅋㅋ)

로쟈 2009-11-07 17:01   좋아요 0 | URL
헤세 마니아이시군요.^^ 저는 <수레바퀴 밑에서> 이후 몇권을 탐독하고 시도 좋아했지만, 헤세의 정신주의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갖고 있습니다. <데미안>의 정신주의에 대해서도 그래서 별로 감동이 없었던 듯해요. <황야의 이리>는 나중에 <마의 산>과 같이 읽어보려고 벼르고는 있습니다.^^

목동 2009-11-07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스'의 어린시절은 '닥터지바고'의 '피사'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합니다.
또한 '한스'에 대한 궁금증은 '오스카 쉰들러'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궁금증과 비슷합니다. '한스'는 우리의 분신같아요.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미성공에 대한 자기연민을 갖게 합니다.

로쟈 2009-11-07 17:03   좋아요 0 | URL
'파샤' 말씀이신가요? 아직 다시 읽어보지 못했지만 '미성공' 이상의 문제를 건드리는 듯싶어요. 기타노 다케시의 책을 읽다가 떠올린 생각은 '정해진 인생'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라는 것입니다...

canon 2009-11-0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경량의 [헤세와 신비주의] (한국문화사, 1997)를 읽어보면 헤세가 제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헤세 같은 사람들을 Divine Light Group이라고 하지요. 사이비 신비주의자.

로쟈 2009-11-08 10:54   좋아요 0 | URL
데미안과 관련해선 읽어본 책입니다. 사이비 신비주의가 따로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비로그인 2009-11-0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혜린하면 '생의 한가운데'가 생각나더군요. :)
전혜린의 에세이를 읽었음에도 그가 데미안을 번역했다는 건 까맣게 몰랐네요.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수레바퀴 밑에서'는 아무런 임팩트가 없었어요. 대신 데미안에 대해서는 열렬했지요. 수레바퀴 밑에서는 20대가 훌쩍 넘어서야 읽은 탓일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재밌네요, 주위를 가만 보면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은 못 본거 같아요. '수레바퀴 밑에서'에 빠져드는 사람과 '데미안'에 빠져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로쟈 2009-11-09 19:06   좋아요 0 | URL
에세이집에 보면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에 관한 글이 연이어 실려 있습니다. 글쎄요, <데미안>에 대한 열광은 저로선 미스테리입니다.^^;
 

이음책방의 금요강독(http://blog.aladin.co.kr/mramor/3166496)에 들렀다 귀가하느라 매주 거르지 않던 서점순례를 생략했다(대신에 이음책방에선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을 구입했다. 듣자하니 서점 운영이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이번주 신간에 대해서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과 언론리뷰를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이거다!' 싶은 뜻밖의 책은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의 책은 관심도서로 눈도장을 찍어둘 만하다.  

내 경우엔 지리학자 하름 데 블레이의 <공간의 힘>(천지인, 2009)와 빈스 에버르트의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이순, 2009)가 그런 책이다. 사실 둘다 제목에 끌린 셈인데, <공간의 힘>의 경우엔 부제가 '지리학, 운명, 세계화의 울퉁불퉁한 풍경'이다. 그의 전작인 <분노의 지리학>(천지인, 2007)도 사실 제목에 끌려 구입해놓고 읽진 못했는데, 이번엔 '세계화'를 다루고 있기도 해서 필독해볼 참이다. 게다가 "우주론에 있어 칼 세이건이 남긴 업적을, 하름 데 블레이는 지리학에서 이루고 있다"(빌 모이어스) 같은 추천사는 아주 '쥐약'이다.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의 광고 문구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아내도 아니고 지식쯤이야!). '빌 브라이슨을 능가하는 지식예능인의 출현!' 저자가 물리학 전공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하니까 '지식예능인'이 구라는 아니다. 최근엔 '강연콘서트'도 새로 등장했다고 하니 우리라고 '지식예능인'이 출현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다. '개그정치인'이나 '만담재판관'들보다야 우리의 정신 건강에 유익할 듯싶다. 관심도서 두 권의 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9. 11. 07) 세계는 두 부류다… 평평하거나 주름지거나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로 인해 세계가 평평해졌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유럽, 북미, 동아시아, 호주 등 ‘중심부’에만 적용되는 얘기다. 하름 데 블레이는 “지구는 문화적으로는 물론이고 물리적으로도 아직 울퉁불퉁한 땅”이라면서 “주변부에는 세계인구의 85%가 살지만 세계 총소득의 25%만 돌아간다”고 말한다. 지도상의 검은 점은 미국·멕시코의 국경, 중국과 대만 사이의 해협,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등 중심부와 주변부를 가르는 주요 경계지점들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에 의해 수십억 인구와 기업들이 장소와 언어·문화에 상관없이 동시에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내용의 <세계는 평평하다>를 쓰면서 자신의 ‘발견’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대비시키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는 미국 정보통신 산업의 중요한 아웃소싱 대상으로 떠오른 인도를 다녀온 뒤 아내에게 “여보, 내 생각에는 말이야. 지구는 평평해”라고 속삭이면서 마음 속으로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경향’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수식어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중동문제 전문가이기도 한 칼럼니스트 프리드먼은 자신이 평평하다고 명명한 세계가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것을 예상했다. 그는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나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저자의 권한으로 그런 제목을 만들어본 것뿐이다”라며 도망갈 구멍을 남기는 영악함을 보였다. 물컵을 보면서 ‘물이 반밖에 차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칼럼니스트가 뽐내면서 내놓은 ‘평평한 세계’라는 키워드는 울퉁불퉁한 현실의 세계를 가려버림으로써 세계인의 인식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미시간 주립대 지리학과 교수인 하름 데 블레이가 <공간의 힘>(원제 The POWER of Place)의 서문을 “두바이 힐튼 호텔의 전망 좋은 방에서, 혹은 싱가포르 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창가 좌석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실제로 평평해 보인다”는 말로 장식한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세계는 실제로 평평해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프리드먼의 외눈박이 시각이 내포한 해악을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블레이는 우선 지구에 살고 있는 70억 인구를 세계인·지역인·이동인으로 분류했다. 세계인은 중심부에서도 상위층에 위치한 운 좋은 사람들을, 지역인은 가장 가난하고 이동성이 적으며 울퉁불퉁한 공간의 영향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동인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해 하위층에 자리잡는 이주민들이다. 공간적으로는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를 지나 동아시아와 호주에 이르는 세계화가 이뤄진 지역을 평평한 중심부로, 그 밖의 지역을 주변부로 나눴다.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엔 완고한 장벽이 존재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남아공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저자는 이 장벽을 남아공 백인 정권이 펼친 악명 높은 흑백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비유했다. 이 장벽이 자연적인 경계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란 뉘앙스를 담고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세계를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로 나누어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적 방법론을 연상시킨다.

저자는 지리학자답게 각 장마다 언어, 종교, 질병, 재난, 분쟁, 출생률·평균수명, 도시화율, 여성의 정치참여 비율 등을 담은 세계지도들을 동원했다. 이런 시각적 자료들은 지구촌의 현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블레이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이 제기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장소에 따라 커다란 번영의 수단과 기반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절망적인 결핍의 삶에 직면할 수 있다”는 명제다.

그렇다고 블레이를 반세계화론자로 단정지을 수는 없어 보인다. 그는 현대로 올수록 절대빈곤은 감소하고 있으며, 다양한 이동수단 및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도입은 문화적 선택권을 넓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세계화의 중심점과 주변부들은 현대화와 통합의 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고 있지만, 그에 따라 장벽이 더 높아지고 공간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세계화의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평평한 중심부’ 내부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프리드먼의 주문은 평평한 세계의 끝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미국식 세계화에 동참하라는 것이지만, 블레이는 반대로 시각을 평평하지 않은 외부로 돌려 지구를 더 평평한 세계로 만드는 데 동참하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문제는 ‘어떤 세계화이냐’인 것이다. (김재중기자)   

서울신문(09. 11. 07) 우리는 정말 스스로 생각하고 사는가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북극 빙하가 녹고,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기후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을 늘어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탄소 배출을 제한하고 태양열 같은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는 데 온갖 돈을 쏟아붓는다. 과연 이런 행동은 옳은 방향인가.  

사랑에 빠진 상대가 멍청이인 것을 알지만 헤어나질 못하는 여성이 있다. 이성이 자리한 대뇌피질은 “녀석을 차버려!”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감정 중추인 변연계는 소리친다. “그래도 저이는 진짜 귀엽잖아!” 결국 그냥 사귄다.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면서. 그런데 이게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의 소비를 촉진하는 힘이었다면, 어떤 상관관계로 풀어낼 수 있을까.

●보고 듣는 대로 믿는 현대인 꼬집어
독일에서 ‘가장 재미있는 물리학자’로 불리는 빈스 에버르트는 끊임없이 묻는다. 인간이 지금처럼 생활한다면 수년 뒤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환경론자의 히스테리는 정당한가. 진정 친환경 제품을 이용하면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을까. 휴가철에 여행가방을 들지 않고, 해외로 벗어나지 않는 독일인은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없는 것인가. 유전자 변형 토마토를 생산하는 기업은 인류의 건강에 해악을 저지르고 있는가.

비만이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꼭 벗어나야할 ‘악의 축’으로 규정한다면, 다이어트 팁을 ‘먹는 양을 줄이고 운동해라.’가 아닌 ‘다른 부모를 찾아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에버르트는 이런 질문들은 던지고 다소 황당하면서도 유머스럽고 기발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조경수 옮김, 이순 펴냄)를 완성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합니까.” 책 첫머리부터 저자는 뜬금없이 질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그럴싸하게 ‘당연하지. 생각하지 않는 그 순간은 나 자신은 내가 아닌거야.’라는 대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생각하고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생각’은 ‘언제 천장 페인트칠을 했더라?’거나 ‘괴델의 정리가 뭐였지.’라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판단과 주장을 만들어내는 사고 행위이다. 하지만 정보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인간은 그 사고를 대체로 ‘아웃소싱’한다. 확인되지 않는 소문과 각종 음모론, 감언이설 등에 접하며 사고의 오염을 겪는다.  

“인간은 특별히 잘 듣지도 못하고, 냄새를 잘 맡지도 못하고 털도 별로 없으며, 날카로운 발톱이나 맹수같은 이빨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토끼만큼 증식했다. 수레바퀴와 천연두 백신을 발명했고 심지어는 전기로 창문을 올리는 장치마저 고안해냈다. 사고는 우리의 진화적 지위이다. 그런고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토록 적다는 사실이 나는 매번 놀랍다.” 저자는 책을 통해 안일하게 생각하고, 들은 대로 되풀이하며, 본 대로 믿어버리는 무감각에 강력한 전기 자극을 주어 사고 세포를 되살리고자 한다.

논리적이면서도 유머 가득한 풍자
앞서 말한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지구 역사를 보면 인간이 이산화탄소를 방출하지 않았을 때도 이미 엄청난 기온 변화가 있었다. 1만 5000년 전 빙하가 녹은 것은 네안데르탈인들이 고기를 불에 구워먹기 시작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 탓이 아니다. 기후 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이산화탄소만 꼽을 수는 없다. 사실 기후 연구도 결코 정확한 과학이라 하기 힘들다. 저자는 세계 기후 보고서 13장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기후 모델은 연계된 비선형적인 카오스적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기후 시스템의 장기적 예측은 불가능하다.” 

지금의 환경 오염이 안전한 수준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험에 가입할 때든, 세상을 구할 작정이든, 어떤 경우에도 간과하기 쉬운 세목을 꼼꼼히 읽어라.”는 저자의 말은 영향력있는 학자들의 말이라도 비틀어보고 따져보는 과정을 가져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기, 종류, 추가사항 등을 캐묻는 커피 주문이 귀찮아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저자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결정권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뭔가 결정한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2유로 80센트를 내고 얻는 것은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빈스, 톨, 프라푸치노, 캐러멜, 로우팻, 디카페인’으로 규정되는 자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책은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 기발한 전략으로 가득하다. 물론 과학자답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논거로 주장을 뒷받침한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정작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잊어버린 엘 고어 같은 사람들이 짜증난다.”거나 “전 재산을 침대 밑에 보관하고 빨리 돈을 꺼내줬던 할머니가 홈뱅킹의 최초 형태” 등 톡톡 튀는 내용으로 재미를 더한다. 마치 해학 넘치는 시사 스탠딩 쇼를 글로 옮겨놓은 듯.(최여경기자)

09. 11. 06. 

P.S. '빈스 에버르트'를 검색하면 뜨는 책은 <스스로 생각하시오!>이다. 이게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의 원제인가?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n1180FGXW0U 참조. 독어라서 내용은 전혀 모르겠지만, 어떤 분위기인지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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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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