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학술출판 트렌드

이번주 한겨레21의 별책부록으로 실린 글을 옮겨놓는다. 아직 지면으론 보지 못했는데, 2010년의 인문출판 트렌드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한데 구성을 보니 초점은 '트렌드'가 아니라 '키워드'였다.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2010년의 '출판시장 키워드' 다섯 가지를 꼽고 있는데, 결과적으론 '역사와 그 반복'이 내가 고른 키워드가 됐다. 다른 필자들과 달리 출간예정 리스트를 잔뜩 나열한 건 이미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리스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피해가기 어려웠다. 나머지 키워드는 '장편소설' '프로슈머' '연예인 실용서' '실패하지 않는 삶' 등이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6609.html 참조).  



한겨레21(10. 01. 22)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출판시장 키워드 5 

2010 키워드① 역사와 그 반복 

사회학자 김홍중 교수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펴냄)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생존’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치로 설정하는 사회적 합의를 달성했다. ‘생존이 부끄러움이 되는 감수성’을 ‘진정성’이라고 부른다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진정성이 유효할 수 있는 환경과 토대를 상실했다. 그래서 가장 절박한 관심이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가 돼버렸다. 하지만 경제불황과 맞물려 2009년 한 해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의 인기가 급격하게 하락한 것은 반전의 한 조짐이다. 우리는 생존보다 더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2010년 출간 예정 인문·사회과학서들에 거는 기대이다.  

생존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기에 올해는 비단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우리의 지난 100년사를 더듬어보게 한다. 따라서 올해의 트렌드라면 아무래도 역사와 그 반복이 될 듯하다. 먼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산 이들이 준비했던 근대국가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그들이 꿈꾼 나라>(돌베개)나 강제병합 전후의 사정을 짚어줄 <대한제국흥망사>(돌베개)가 눈길을 끄는 책이다. 일제시대사 쪽으론 경성제국대학의 의의를 해부한 <식민권력과 근대지식>(서울대출판문화원)과 <식민지 검열의 역사적 성격>(소명출판) 등도 드물게 다루어진 주제라 관심을 모은다.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기에 현대사 분야에서도 기대작이 없지 않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펴내는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역사비평사)이나 염인호의 <또 다른 한국전쟁>(역사비평사), 박찬표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 한국현대사>(후마니타스), 김종엽의 <분단체제와 87년체제>(창비), 서동진의 <한국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창비) 등이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임지현·백영서 등 한국의 대표적인 인문학자들을 인터뷰해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의 지형을 탐색한 <세기말 한국 인문학의 지각변동>(그린비)도 필독 범주에 넣을 만하다.

번역서들의 면면도 화려한 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길)이 새로 완간되고,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길)이 새 번역본을 얻는 것 외에도 사회심리학자 미드의 주저 <정신, 자아, 사회>(한길사)와 독일의 개념사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전 5권·푸른역사)이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화려한 번역서의 면면
철학·이론 분야에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이 <처음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창비) 외 여러 권 소개될 예정이고,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민음사),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 <정치를 말한다>(도서출판b),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도서출판b) 등이 우리말 번역본을 얻는다. 독창적인 데리다 연구서인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김상환의 <데리다와 들뢰즈>(창비)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10. 01. 22.  

P.S. 특집에는 '2010 이런책이 보고 싶다' 코너도 있는데, 소설가·문화평론가·편집자 등이 속내를 드러냈다. 읽어보니 이쪽이 더 재미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6603.html). 거창하게도 나는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을 읽고 싶다고 적어보냈다. 

Cover: In 1926

특정 연도,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

다윈 탄생 200주년이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2009년에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1989년’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연말에야 크리스 하먼의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책갈피 펴냄)가 출간된 정도였고, 이마저도 재간본이다. 영어권에서 동유럽과 소련의 현실사회주의 붕괴 과정을 다룬 책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관심사는 그들과 전혀 다른 건가 싶기도 하다. 한 박자 늦은 것이긴 하지만, 2010년에라도 읽어볼 수 있을까.  

특정 연도에 대한 역사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인문학자 한스 굼브레히트의 주저작 <1926년: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1997)란 걸 알게 되면서다. 500쪽이 넘는 이 두툼한 책을 읽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이런 종류의 책이 번역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 더듬어 올라가면 국내에 소개된 책 가운데는 중국사학자 레이 황의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 펴냄)도 꼽아볼 수 있겠다. 명나라 만력제의 한 치세를 다루지만 한 시대와 국가제체에 대한 총체적인 조감도를 매혹적으로 펼쳐 보이는 책이다.

우리의 경우 ‘1950년대’나 ‘1960년대’ 같은 식으로 한 시대를 다룬 책들은 더러 있었다. 여전히 ‘시대’나 ‘체제’가 우리의 주된 코드이자 키워드이다. 하지만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1960년’에 대한, ‘1980년’에 대한 책, 개인의 일상적인 삶의 감각과 시대정신과 국제사회의 변동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을 이제는 우리도 가져봄직하다. 당장 올해에 그런 걸 읽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군.


댓글(4) 먼댓글(1)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2010년 출판시장,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from 뻥 Magazine 2010-01-23 12:23 
    2010년 주인공은 누규~ [2010.01.22 제795호]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출판시장 키워드 5   한겨레21에 난 2010년 출판시장 트렌드 기사다. 필진에 로쟈님 글도 있고 내 책도 언급되었다. 하루에 한 번씩 내 책 모니터링을 하면서 다양한 시선을 목격한다. 책을 읽지 않고 쓴 혐의가 짙은 서평도 보고, 읽었지만 주마간산으로 읽은 서평도 있다. 어떤 독자는 너무 꼼꼼하게 분석을 해서 나를 놀래킨 독자도 있다. 작가
 
 
다크아이즈 2010-01-2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 시장 키워드에 점자책 사진이 우뚝 서 있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페이퍼가 제게 너무 어려워 접수 못할 땐 이렇게 엉뚱한 수수께끼를 홀로 풀다 가곤 한답니다. ^^*

로쟈 2010-01-22 23:28   좋아요 0 | URL
아, 그건 그냥 기사에 있는 걸 가져온 거예요. 짐작엔 '더듬어본다'는 의미이지 싶네요...

목동 2010-01-23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인문.사회학 관련서 출판 및 독서의 증가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봅니다(책속에서만 어떤 방법을 찾으려다 실패한 것인지 모르지만). 현재 도시간 경쟁은 일회성(소비성) 에너지 분출장을 마련하는데 집중해 있습니다. 도시의 발전을 위해 초대형(복합기능)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뜻은 미루어진듯(표심을 잡지 못함) 합니다.고급화된 영양공급으로 육질화된 에너지 분출은 개인간의 소비경쟁을 더 부른듯 합니다. 더 높은 양질의 삶을 위해 인문학적인 희망도 중요하지만 양극화로 절망적인 개인이 자가 발전할 수 있는 관련 프로그램들이 많이 운영되고 참여 했으면 좋겠어요 <희망의 인문학/얼쇼리스/이매진>.

로쟈 2010-01-23 12:37   좋아요 0 | URL
'인문학적 희망'보다는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겠지만, 전자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는 것도 목격해온 바이죠. 이중의 전략이 그래서 필요하다는 생각이예요...
 

일주일 내내 강의와 서평 원고에 매달리다 보니 말 그대로 '부지하세월'이다. 딱히 그런 사정 때문은 아니지만 어제는 큼직한 탁상용 달력을 얻어다 책상맡에 놓았다. 알라딘 달력이 있지만 작년의 고급스런 달력에 비하면 너무 볼품이 없고 일정을 적어두기에는 바탕색도 너무 어두워서 갖다버리려고 한다(아이러니컬하지만, 작년 달력은 사진들이 너무 좋아서 모셔두고 있다!). 원고를 쓰다가 간간이 읽은 기사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뉴레프트리뷰>(길, 2009)에 실린 데이비드 하비의 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정리해주고 있다(책은 지난주에 나왔지만 판권면에는 발행일자가 작년 12월 31일로 돼 있다).  

    

한겨레(10. 01. 21) 도시는 꿈꾼다…‘착한 개발’의 꿈을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니 창조는 파괴를, 건설은 폐허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폭력과 추방과 강탈의 잔혹극이다. 대체 생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도시의 재개발 폭력은 왜 끝없이 재연되는가. 이 강탈과 축적의 악무한적 연쇄를 끊어낼 대안적 도시화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자본의 한계> 등의 저작으로 친숙한 데이비드 하비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가 이번주 출간된 <뉴레프트리뷰> 한국어판(2호)의 ‘도시에 대한 권리’란 글에서 이 문제를 짚었다.  

그가 볼 때 도시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계를 변형시킨 결과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도시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형성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이 투입된 생산물에 대해 권리를 갖듯 그들이 만든 삶의 터전인 도시에 대해서도 권리를 갖는데, 하비에 따르면 그것은 “도시를 변화시키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권리”다.

문제는 오늘날의 도시화가 자본주의적 잉여의 생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도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과잉축적의 위기를 공간의 부단한 생산과 파괴를 통해 잠정적으로 해소하는 공간이기 때문인데, 이런 사실은 자본주의 도시화의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제2제정기 조르주 외젠 오스만(1809~1891)이 주도한 파리 개조다. 당시 오스만의 작업은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잉여자본과 실업 상태의 노동력을 흡수하는 한편, 도처에 소비와 쾌락의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써 노동계급의 급진적 열망을 잠재우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시공간의 개조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하비는 오스만의 파리 개조가 “새로운 신용과 금융체계를 마련해 타인자본을 조달함으로써 도시의 기반설비를 개선하는 가장 원초적인 케인스주의 체계를 구축했다”고 평가한다.  



이 오스만 모델은 1940년대 미국의 대도시에서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다. 당시 미국은 과잉축적의 산물인 잉여자본과 노동력이 세계대전의 특수 덕에 일시적으로 해소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엔 상황을 낙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그들에게 오스만의 선례는 축복이었다. 신용규제를 풀어 유휴자본이 도시공간에 투입되게 함으로써 전후 자본주의를 전지구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도시 개조는 1990년대 다시 한번 경제의 핵심적인 안정화 기제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부동산시장은 도심과 교외주택, 사무빌딩 등을 건축하면서 막대한 잉여자본을 흡수했고, 이를 다시 첨단 금융기법(부채의 증권화)과 결합시켜 소비재·서비스 부문의 소비를 폭발적으로 확대시켰다. 이런 도시화는 세계적 현상이었다. 뭄바이, 서울, 볼티모어, 요하네스버그, 타이베이, 모스크바, 두바이 등 세계 곳곳의 대도시가 거센 건설붐에 휩싸였다. 이런 ‘글로벌 오스만주의’는 대중들에 대한 순치라는 또다른 효과를 낳았다.

“재산가치를 지키는 일이 최대의 정치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최신 부티크와 쇼핑몰, 안온한 커피매장이 선사하는 신기루 같은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도시공간의 재구조화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파괴와 건설이, 인간적 삶의 확보가 아닌 잉여자본의 흡수라는 체제 논리에 의해 진행되는 한,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린 자들의 저항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의 갈등과 폭력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사회운동은 어떤 요구를 내걸어야 하는가. 하비는 “잉여의 생산과 활용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확립”을 제안한다. 도시화가 잉여를 해소하는 주요 통로이므로, 그 잉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민주적 관리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희망적인 것은 세계 각지에서 야만적 도시화에 저항하는 사회운동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비는 이 투쟁들을 단일한 전선으로 결집하기 위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실천 슬로건이자 정치적 이상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엔 물론 ‘강탈에 의한 축적’의 배후에 자리잡은 세계화된 금융자본과의 투쟁 역시 포함된다.  

책에는 이밖에도 미셸 아글리에타, 마이크 데이비스, 프레드릭 제임슨 등 ‘좌파 석학’들의 예리한 현실진단이 담긴 16편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피터 고언과 수전 왓킨스의 글들 역시 핵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이세영 기자) 

10. 01. 22.  

P.S. 개인적으론 나도 어제 <뉴레프트리뷰> 제2권에 대한 서평을 써서 보냈다. 하비의 글은 아직 읽지 못했고, 내가 초점은 맞춘 건 주로 NPT에 관한 글들이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동 2010-01-23 09:37   좋아요 0 | URL
최근 정부는 행정구역 개편 추진으로 도시(지역 간) 통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개조 및 개보수와 합병은 인구 100만을 기준으로 광역도시권을 만드는 작업인데요. 전 정부의 마스트플랜을 뒤엎은 세종시 문제도 생각해볼만 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TV속의 도시'는 희망을 꿈꾸게 하지만 그 도시속에 들어가 보면 인간성과 관계의 틀은 여전합니다. 미국 정보국이(?) 취하는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개의 계란을 깨뜨려야 한다'는 고전적인 논리는 어느 도시 공간에도 유효한 듯합니다.
 

니콜라이 고골의 가장 유명한 단편이자 러시아 단편문학 백미 중 하나인 <외투>의 새 우리말 번역본이 두 종이나 더 출간됐다. 새로 나온 창비세계문학의 러시아편 <무도회가 끝난 뒤>(창비, 2010)에도 수록돼 있고, 펭귄클래식으로 나온 <코 외투 광인일기 감찰관>(펭귄클래식코리아, 2010)에도 들어가 있다. 마침 내주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고골의 작품들을 다루는데, <외투>의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한 재미이겠다. 혼자 누리려다가 누설해놓는다. 같이 누리면 재미가 두 배가 될 수도 있으니까...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10년 01월 21일에 저장
절판
무도회가 끝난 뒤 - 러시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박종소.박현섭 엮어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1월 21일에 저장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1월 21일에 저장

검찰관·외투 (양장)
니꼴라이 고골 지음, 김세일.송정수 옮김, 임양 그림 / 가지않은길 / 2006년 7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10년 01월 21일에 저장
절판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0-01-21 10:04   좋아요 0 | URL
코, 광인일기가 1830원으로 보이는 리스트입니다...^^

로쟈 2010-01-21 11:12   좋아요 0 | URL
'성공적인' 리스트로군요.^^

목동 2010-01-21 14:29   좋아요 0 | URL
서울 면적의 1/13정도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근대 유물의 분포 밀도로 으뜸이라 하던데요. 도시내 250개의 각종 박물관중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년 260만의 관광객이 몰린다니, 역사적 유물과 스토리가 곧 자원이군요. 가보고 싶습니다.
 
레르몬토프의 고독

아트앤스터디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내가 강조한 건 소설의 주인공 페초린이 자의식을 가진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라는 점이다(레르몬토프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도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가장 좋아한 작가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곧 늙어가면서 그의 고독과 낭만적 환멸에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됐지만, 엊그제 안나 게르만의 목소리로 레르몬토프의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들으려니까 다시금 뭔가 아련한 감상 같은 것에 젖게 되었다(http://www.youtube.com/watch?v=Bl9VDbRwOxo). 그녀의 노래는 국내에서 언젠가 TV드라마의 주제가로도 쓰인 적이 있다. 오랜만에 찾아보니 <우리시대의 영웅>의 새 영화 버전도 유튜브에는 올라와 있다(영화는 1966년판, 1975년판, 2006년판 등이 있다). 겸사겸사 어제 강의 자료의 일부와 함께 이미지들을 올려놓는다. 아래 자료는 박사학위논문의 일부이기도 한데(학위논문인지라 말은 좀 어렵게 써놓았다), 논문은 올 하반기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푸슈킨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오네긴과 작별을 고하는 데 반해서, 레르몬토프는 그의 분신적 형상인 페초린과 보다 긴밀한 유대를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1인칭 시점하에 페초린의 내밀한 언어로 보다 밀착된 페초린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레르몬토프는 <우리시대의 영웅>(1840)에서 (남편에 대한 지조를 맹세한 타치야나와는 달리) 남편에게 페초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떠나가 버린  베라를 (벼락을 맞은 듯이 서 있던 오네긴과는 달리) 있는 힘을 다해 뒤쫓아 가는 페초린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일 내 말이 10분만 더 달릴 힘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그마한 계곡에서 올라와 산에서 벗어나 가파른 모퉁이에 이르자, 말은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뛰어내려, 말을 일으키려고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겨우 들릴 듯한 신음소리가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몇 분 후에 말은 숨을 거두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채 홀로 초원에 남았다. 걸어서 가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낮의 불안감과 간밤의 불면 때문에 기진맥진한 나는 축축한 풀밭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민음사판으론 217쪽) 

그렇게 울기 시작한 페초린은 한참동안 통곡을 하며, 그의 성격을 특징짓는 ‘의연함’과 ‘냉정함’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즉 인용한 대목에서는 페초린의 가장 약한 모습이, 그의 ‘성격갑옷’이 일시적으로 제거된 채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본모습이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요구는 현실에서 좌절되기 마련이며, 이에 대한 정서적인 상관물이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다. 그것은 페초린 자신이 곧 자인하듯이, 대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경멸적으로 외면할 만한 모습이다. 때문에 평소의 페초린이라면, 철저하게 가장했을 터인데, 이 문제의 장면에서는 그것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 

여기서 페초린 자신의 분신이자 그의 신체의 연장(extension)으로서의 말은 가파른 모퉁이에서 쓰러지는데(이 말이 쓰러지자 페초린은 더 걷지 못한다), 모퉁이란 두 공간이 서로 이접되는 지점을 말한다. 그것은 시간의 모퉁이, 즉 전환점에서 시간이 이접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간축 상의 전환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이접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예비)어른의 경계이다. 하지만, 페초린의 ‘어린아이’는 이러한 상징계적 차이의 질서를 수용하지 못하며/않으며 상상계적 자아상에만 집착한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왜소함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 연후에만, 전능함에 대한 자신의 꿈을 단념한 연후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요구에는 이러한 인정/단념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전부에 대한 요구를 계속적으로 고집하며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영웅>에서 페초린은 바로 그러한 ‘어린아이’이며, 그런 점에서 작가 레르몬토프의 형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초린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억압돼 있으며, 카프카즈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인물인 막심 막시므이치는 너무 나약한 권위의 ‘아버지’인데(페초린에게 권위적인 아버지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만>에서의 얀코가 유일한다), 이것은 레르몬토프적 상황과 대동소이할 따름이다. 레르몬토프적 상황이란 것은 2자적 관계에서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상실하고 3자적 관계에서 그가 이상적-자아로서 지향해야 할 ‘아버지’는 약화/결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낳은 원인은 어머니의 이른 죽음이기도 했고, 너무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부부간의 불화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러한 결과로 그는 상상계와의 이접 이후에 상징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할당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게선 ‘상징적 아버지’를 ‘상상적 아버지’와 궁극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팔루스적인 어머니’ 혹은 ‘남근을-가진-어머니’가 대신한다.  

‘남근을-가진-어머니’란, 성교 중에 아버지의 음경을 ‘잘라내어’ 자기 것으로 만든 어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팔루스의 상징을 ‘거세’한 어머니이다. 레르몬토프에게서 이러한 팔루스적인 어머니상과 일치하는 것은 외조모 아르세니예바 부인이다. 이러한 어머니상은 자신 속에 ‘나’를 다시 집어넣은, ‘나’를 다시 흡수한, 그래서 ‘나’를 자신의 팔루스로, 혹은 무(無)로 환원시켜버리는 ‘어머니’이며, 그것은 행복과 죽음의 현혹이다. 이에 대한 레르몬토프적인 공포는 페초린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반영돼 있다. 그에게 결혼이란 말은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는데, 불가피한 결혼에 대한 연상은 모든 열정에 종말을 가져오며, 그의 마음을 돌처럼 굳어버리게 만든다. <공작의 딸 메리>에서의 그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이 결혼만 아니라면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스무 번이라도 내 생명을, 심지어 명예까지도 내기에 걸겠다... 하지만 나의 자유는 팔아넘길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가? 그 속에 있는 무엇이 내게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무엇이 되려는가? 나는 미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사실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어떤 타고난 공포이며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다. 거미나 바퀴벌레나 쥐들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고백해야할까?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한 노파가 어머니에게 나의 대한 점을 쳐준 일이 있다. 그때 노파는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내게 예언했다. 그 말은 나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나의 마음에는 결혼에 대한 극복하기 힘든 혐오감이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에 뭔가가 노파의 예언이 실현될 거라고 내게 말해주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늦춰지도록 노력할 것이다.(민음사판으론 186-7쪽)

여기서 페초린은 자신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를 댄다. 하나는 사람들이 거미나 바퀴벌레, 쥐를 무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타고난 공포’라는 것이고,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는 점쟁이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란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각인될 수 없는 것이며, 이 ‘타고난 공포’는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두 번째 이유와 양립되지 않는다. 또한 노파의 예언이 두려워서 결혼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됐다는 것도 사실 <운명론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는 페초린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순적인 것이다. 페초린적인 태도는 결혼이 두려워서 회피하기보다는 정말로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나보코프는 페초린의 죽음이 페르시아에서 돌아오는 도중의 불행한 결혼과 연관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이 두 가지 이유는 페초린의 제2의 본성(second nature)으로서 결혼에 대한 공포의 직접적인 원인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억압되어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란 무엇일까? 레르몬토프의 전기와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남근을-가진-어머니’에 대한 공포, 즉 거세 공포이다. ‘본능적으로’란 말은 현대적인 관점에선 ‘무의식적으로’란 의미인데, 거미나 바퀴벌레 등 다리가 많은 동물들의 무의식적인 상징 또한 거세공포이다(다리가 많은 것은 자신의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까라는 불안 심리의 반영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으로서 ‘남근을-가진-어머니’는 자궁회귀본능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와는 다른 어머니이며, 이 ‘팔루스적인 어머니’로의 회귀가 ‘어린아이’로서는 죽음에의 현혹이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페초린의 경우에 노파의 예언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이 거세 공포에 대한 상징적인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노파의 예언은 그의 거세공포에 대한 사후적인 승인에 해당한다.   

결혼의 불가라는 예언의 지평 속에 놓여 있는 시간은 연속적이며 균질화된 시간이다. 그러한 지평에서는 시간의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지 않다. 레르몬토프의 공간적 상상력이 대지와 하늘을 두 축으로 한 은유적인 상상력이었다면, 그의 시간적 상상력은 (페초린의 경우에 미루어서 말하자면) 예언에 속박된 환유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환유적 상상력 속에서 ‘나’는 세계 전체로 확장될 수 있지만, ‘너’라는 타자의 세계로의 비약은 가능하지 않다. 때문에 레르몬토프의 창작세계에서 ‘나’의 고독은 필연적이다... 

10. 01. 19. 



P.S. 2006년작 <우리시대의 영웅>의 하일라이트는 http://www.youtube.com/watch?v=UENblKYDTMY 참조. '공녀 메리'('공작의 딸 메리') 부분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1-19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9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馬)이라는 상징성에 남성상(男根)까지 비유하는 건 좀 무리겠죠?" -책도 안 읽어보고 페이퍼의 내용으로만 생각해보는 개인적인 의견-

로쟈 2010-01-19 23:24   좋아요 0 | URL
러시아문학에선 보통 여성을 상징합니다.^^

목동 2010-01-1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 단락은 '페티시즘(Fetishism)'과 비슷한데요.

로쟈 2010-01-19 23:26   좋아요 0 | URL
연물주의란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목동 2010-01-20 08:11   좋아요 0 | URL
예,,신체의 특정부위나 특정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대리만족하는 경향인데요.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적인 왜곡현상중에 하나로 일본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에서 뛰어나게 묘사되던데요.

카스피 2010-01-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이 재간되었군요.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로쟈 2010-01-21 07:29   좋아요 0 | URL
네, 고전은 정의상 다시 읽는 책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1-2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남자배우가 정말 미남이군요.여배우들보다 더 눈에 띕니다.특히 눈썹과 수염이 예술이네요.

목동 2010-01-22 19:43   좋아요 0 | URL
권총든 얼굴이 로쟈님과 비슷(?)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22 23:50   좋아요 0 | URL
그건 좀...
 

<뉴레프트리뷰2>가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소개기사는 물론 책 자체가 눈을 씻고 봐도 뜨지 않는다. 연간 체제로 나온다고 했고 작년 2월에 1권이 나왔으니까 '제때'이긴 하다. 어떤 볼륨으로 어떤 글들이 묶였을지 궁금하지만 확인은 하루이틀 더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대신에 조지 오웰의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010)에 대한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하루키의 <1Q84> 덕에 작년에 때아닌 <1984> 붐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 전체주의 비판 소설 탓에 많이 가려진 것이 '사회주의자 오웰'의 면모다(그렇지 않고서야 대한민국의 그 많은 학생들이 <동물농장>을 읽을 수가 있겠는가). 그에게 공정하자면 '동물농장'에만 들를 것이 아니라 '위건 부두'도 같이 둘러보아야겠다. 개인적으로는 <동물농장>과 <1984>밖에 읽지 못한지라 그의 르포르타주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웰이 사회주의자라는 건 알았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온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오웰은 '얼치기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아래 기사를 읽으며 되새겨보게 된다...       

한겨레(10. 01. 16) 사회주의를 위한 사회주의자 비판 

그는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마흔일곱,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 믿었고 그 주의를 옹호했다. 조지 오웰(1903~1950). 그는 현대문학의 고전 <동물농장>(1945)과 <1984년>(1949)을 쓴 소설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무엇보다 그는 사회주의 정치평론가였고 직접 혁명전선에 나선 행동가다. 



한데 그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년>은 일종의 반공 우화 소설로, 사회주의의 ‘적자’로 군림했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흔히 소개되고 그렇게 읽힌다. 아이러니다. 아니, 반토막 진실이다. 그가 1937년에 발표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런 독해가 상당 부분 오독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1936년 초 오웰이 좌익 출판단체로부터 영국 북부 탄광지대의 대량 실업 문제에 관한 르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그는 편집자 빅터 골란츠의 부탁을 받고 두 달에 걸쳐 위건과 리버풀, 반즐리 등 탄광지대를 집중 취재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묵는 하숙집과 탄광노동자의 가정에 머물며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집다운 집에서 살 권리도 박탈당한 노동계급의 삶을 체험했다. <위건 부두…>는 당시 대량 보급되며 반향을 일으켰는데, 오웰은 스스로 <위건 부두…>를 통해 전투적이며 정치적인 작가로 거듭났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훗날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진지한 작품들은 그 어느 한 줄이건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쓴 것들이다.” 

 

<위건 부두…>는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글로 돼 있다. 1부 ‘탄광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은 오웰이 목도한 영국 노동계급의 궁핍한 생활상과 실업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기록한 르포다. 낱낱이 묘사되는 1930년대 영국 공업지대의 빈곤과 주택난, 도시재건축의 살풍경은 오늘 한국사회를 연상시킨다.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을 논한 2부는 에세이 형식으로 쓴 정치평론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논쟁적인 것은 바로 이 글이다. 1930년대 영국 좌파 사회주의 리더들을 직접 겨냥해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청탁한 편집자 빅터 골란츠는 오웰이 파시즘과 싸우러 스페인에 간 틈을 타서 오웰의 논지에 대해 반론하는 서문을 넣고 출판했다. 골란츠는 그 뒤 오웰의 스페인 내전 참전기 <카탈루냐 찬가>(1938)에 대한 출판도 거부한다.

1936년은 대공황이 세계를 휩쓴 때이자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세력을 키워가던 때다. 오웰의 말을 따르면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기가 불가능한 세상”이며 “사회주의가 후퇴”하던 때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에서 당시 영국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그가 보기에 “누구라도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때에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더 못 받는 것은 바로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 그룹이 잘못된 전술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책자에 글줄이나 쓰며 말끝마다 마르크스를 인용하며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태도로 무장한” 사회주의자들이다. 오웰의 비판 대상에는 평생 사회주의자로 산 버나드 쇼도 포함된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이 거품을 물고 부르주아 규탄에만 열을 올림으로써 사회주의엔 오직 증오만이 있는 것처럼 노동계급과 대중들에게 비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물질적인 유토피아를 사회주의의 목표로 선전하고 ‘미련한’ 러시아(스탈린) 숭배와 기계 숭배의 냄새를 풍김으로써 사회주의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평범하고 수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파시즘으로 돌아서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직직원 등 중산층을 사회주의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것이 오웰의 주요 논지 중 하나다. 오웰의 사회주의자 비판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놓고 그 안에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악마의 대변인’으로 나섰다고까지 오웰은 말한다.

그렇다면 오웰이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단 ‘반파시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체제의 산업사회와 그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파시즘을 아울러 ‘전체주의’라고 이해한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의 요체를 ‘정의와 자유’, ‘압제에 대한 반대’라고 말한다. 그 사회주의의 구체적 상을 찾으려 하면 일순 모호해지는 감이 있다. 오웰이 보기에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는 꼴을 보기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사람이다.

오웰이 반대했던 것은 파시즘이었다. 그 전체주의였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빚어내는 그 압제적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늉만 했을 뿐 그 전체주의적 성격에서 흡사한 면모를 보이며 사회주의를 오도했던 스탈린주의를 그토록 맹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당대의 파시즘 승리에 대한 오웰의 경고와 통찰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 떨릴 만큼 현실적이다. “상황은 절박하다. 사회주의를 효과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파시즘을 타도할 가망은 없어진다. … 스스로를 선택된 민족으로 여기는 파시스트 국가들이 서로 치고받다 망하는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제 파시즘은 국제 운동이 되었으며 파시스트 국가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단결하고 있다. … 전체주의 세계라는 비전이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웰이 비판하는 1930년대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모습은 오늘날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오웰은 말한다.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 버렸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오웰이 던진 숙제는 오늘에도 유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진보논객 박노자씨는 이 책의 추천글에서 이렇게 썼다. “오웰은 20세기 문학을 통틀어 가장 선명한 ‘비판적 개인’이다. 오웰이 죽을 때까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이다. 그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비판적 개인’의 독립성 사이에 어떤 적대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는 21일은 오웰 사망 60주기가 되는 날이다.(허미경 기자) 

10. 01. 17.  

P.S. 참고로 지난 2003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다. 올해도 겸사겸사 몇 권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댓글(13) 먼댓글(1)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좋은 작가의 작품이라면 두 권 이상은 읽어야
    from 승주나무의 책가지 2010-01-17 13:43 
    단행본 단위로 책을 읽는 시기는 조금씩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의 저작이 1권만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좀 신경써서 봐야 하는 작가는 최소 2~3권 정도는 읽어야 그 사람의 사상이 드러나는 것 같다. 최초의 전작주의 시도는 도스또옙스끼였는데 후기 장편을 읽으면서 독서의 맛을 알았다. 그 다음은 김유정, 김수영... 작가 작품목록 단위로 읽으면 단편적으로 섭렵한 정보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목동 2010-01-17 11:43   좋아요 0 | URL
19세기경 영국 수상들을 배출한 '이튼'칼리지 등은 '존로크'의 교육철학을 기본으로 교육이 진행되었죠. '이튼'을 졸업한 조지오웰은 다음 코스인 옥스퍼드를 진학할 정도의 성적이 못돼 경찰을 지원합니다. 요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해병대 등을 지원하는 고교졸업생 정도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식민지(버마)의 경찰관이 되면서 식민지에 대한 실태를 경험하게 되고, 급기야는 런던과 파리의 밑바닥 생활을 합니다. 아마 그것은 어떤 속죄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식민지의 경찰관되어서부터 유럽의 경향에(파시즘)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듯합니다. 어쩌면 영국 교육의 효과(?)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오웰의 작품들은 <버마의 나날>의 아류일 가능성 높습니다. 우리의 일제강점기때 오웰같은 일본 경찰관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1950년대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철도 노동자의 애환을 그린 영화 <철도원>이 생각납니다.

로쟈 2010-01-17 11:45   좋아요 0 | URL
네, <버마의 나날들>(1934)이 데뷔작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 다음이군요. 연보를 보니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 다음이 바로 <카탈루냐 찬가>(1938)이구요. <1984>가 마지막 작품이란 걸 새삼 확인합니다...

주니다 2010-01-17 11:40   좋아요 0 | URL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상금도 꽤 되는군요. 책 구입에 많은 힘이 되시겠네요.^^ 올 한해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빕니다.

로쟈 2010-01-17 11:47   좋아요 0 | URL
감사. 언제 한번 뵈야 할 텐데요. 다들 바쁘신가 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7 13:52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것은 오웰이 비판하는 1930년대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모습은 오늘날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

진보가 꼭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고 말하기 주저스런 이유가 저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로쟈 2010-01-17 15:25   좋아요 0 | URL
오웰식으로 하면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죠...

승주나무 2010-01-17 13:55   좋아요 0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오웰이 1903년생이니 100주년 아닌가 합니다. 200주년이라고 해서 깜놀했습니다^^;;

로쟈 2010-01-17 15:24   좋아요 0 | URL
오타가 있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17 15:31   좋아요 0 | URL
저는 오웰 전기를 읽고 느낀 건데 오웰이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들 간의 살육전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에 회의주의자가 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물론 그런 자세를 성찰이 깊어졌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로쟈 2010-01-17 15:33   좋아요 0 | URL
<위건부두>는 참전 전에 쓴 거니까 이미 그런 단초는 갖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mirror 2010-01-18 04:26   좋아요 0 | URL
박노자 얘기에서 뿜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오웰은 박노자와 한겨레를 가장 비판했을 거예요. 가장 경직되고 엉뚱하며 비현실적인 소리만 해대는 관념좌파 박노자가 오웰의 이 책의 서문을 쓰다니, 오지랍도 넓습니다. 유럽좌파 지식인 운운하는 것도 한겨레 기자의 농담인 듯..

로쟈 2010-01-19 09:53   좋아요 0 | URL
'왼쪽으로'를 주장하지만, 박노자는 비교적 온건한 사민주의를 지지하는 걸로 아는데요. 박노자를 포함하여 그 '왼쪽'이 몽땅 비판대상이라면, '좌파'가 얼마 안 남을 거 같습니다...

mirror 2010-01-20 05:45   좋아요 0 | URL
이 기사에 따르면, 오웰은 당시 영국의 좌파를 과격하다고 비판한 것은 아니지요. 지금 과격과 온건의 여부가 비판의 초점이 아닙니다. 박노자가 온건한 사민주의를 주장하건, 과격한 공산주의를 주장하건, 이것은 저의 비판의 초점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