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나온 책 가운데 제목만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관심도서 1위는 자오팅양의 <천하체계>(길, 2010)이다. '21세기 중국의 세계인식'이란 부제가 붙었다. 분량이 좀 얇은 편이어서 '선언적'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닌가 싶어 아직 주문을 넣진 않았지만, 이런 소개문구는 나 같은 독자에게 '딱'이다('나 같은 독자'가 많지는 않은 모양인지 언론리뷰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미국을 제치고 21세기 대국을 꿈꾸는 중국의 철학은 무엇일까. 현재의 주목할 만한 중국철학자 자오팅양은 전통의 문제와 21세기 중국이 처한 세계사적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어떤 사상적 편린을 펼쳐 보이고 있는지를 이 책에서 명쾌하게 제시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이 난세에 처한 것은 '세계'는 있지만 '천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하'란 바로 고대중국의 철인들이 갖고 있던 관념으로 천하를 얻는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서양적 의미에서의 제국[패권] 개념과는 대립되는 중국 전통의 관념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세계 VS 천하', '세계체계 VS 천하체계'를 비교의 범주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단지 '서양의 패권주의에서 중국의 시대로'라는 시사적 구호를 그럴 듯한 이념으로 포장한 것이 아닐까란 의혹을 사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그럴 듯함'에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천하' 관념을 통해 새롭게 세계 정치 제도를 평화롭게 이끌고 갈 구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제국의 논리가 아닌지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책소개에는 이미 이런 경계심도 미리 적어두고 있지만, 배울 건 배우고 취할 건 취할 수 있으리라. 1961년생이므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저자의 소개는 이렇다.  

중국철학계에서 "Trouble Maker"로 일컬어지고 있는 저자는 "하나밖에 없는 현대 중국의 진정한 철학자"이자 "사유가 정밀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철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이라거나 '가장 창조적인' 같은 수식어구는 무시해도 좋겠다. 다만 'Trouble Maker'라면 그가 일으킨 'Trouble'이 어떤 것들인지 읽어봤으면 싶다('옮긴이의 말'에 들어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소개보다는 그가 리쩌허우의 제자라는 말이 훨씬 더 '구체적'이다.  

저자 자오팅양(趙汀陽, 1961~ )은 리쩌허우(李澤厚)로부터 철학을 배웠으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둘의 영향, 즉 중국 고전을 통한 문제의식과 비트겐슈타인을 탐독하여 얻은 방법론적 가르침을 종합하여 저자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 방법론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관점이 없는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책의 역자도 리쩌허우의 <학설>(들녘, 2005)를 옮긴 노승현 박사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리쩌허우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개다. 저자의 이미지를 찾으니 '中國哲學新星'이란 문구도 뜨는군(문득 우리는 '한국철학신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세계체계' 대신에 중국 전통의 '천하체계'를 내세운 만큼 자부심이 없지 않겠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다.

오로지 중국의 세계관만이 등급에서 '국가'보다 높고/큰 분석의 각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정치에 관한 문제에서 중국의 세계관, 즉 천하 이론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세계 질서와 세계 제도의 이론을 고려했다. 따라서 중국이 세계를 책임지고 세계를 위한 이념을 어떻게 창조하려고 하는지가 우리의 진정한 문제여야만 한다.”

남 잘 났다는 소리니만큼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사실 동양고전이라고 우리가 맨날 읽는 것도 <논어>이고 <맹자>이니 그런 불편함은 약간 기만적이다. '중국의 지혜'는 좋지만, '중국의 세계관'은 안된다는 태도처럼 보이니까. 

여하튼 '천하체계'란 제목 자체가 호방하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만한, 아니 그를 능가하는 스케일을 자랑한다. '中國哲學新星'의 실력을 감상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주의 책'이다... 

10.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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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4-17 14:00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대륙은 스케일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 번 피부로 느끼게 해주네요..

로쟈 2010-04-18 22:21   좋아요 0 | URL
자연조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7 17:03   좋아요 0 | URL
대국굴기에서 '기'를 힘주어 말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대국주의는 경계할 필요가 있겠죠. 리쩌허우의 대담집인 [고별혁명]을 보면 그가 현실의 중국이 싫어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중국의 패권주의나 대국주의에 대해선 비판적 시각을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의 제자는 또 모르겠지만요.
여담이지만 또 다른 망명 지식인인 시인 베이다오를 강연회를 통해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리 중국을 비판하던 그가 미국에 이어 중국이 패권국가가 되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거부감이 없더군요. 그 정도 위상은 적어도 동아시아 국가에선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걸 보고 꽤 놀랐습니다. 동서(東西)라 말하지 않고 중국을 동아시아의 대표라 자처하며 중서(中西)라 말하는 기만이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로쟈 2010-04-18 22:20   좋아요 0 | URL
달리 '중국'이 아니지요. 거기에, 인구가 13억이 넘는 나라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paul 2010-04-18 11:42   좋아요 0 | URL
<영웅>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양조위가 모래 사막위에 검으로 쓴 '천하'라는 글귀...ㅎㅎ

로쟈 2010-04-18 22:19   좋아요 0 | URL
사실 아주 친숙한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4-18 15:56   좋아요 0 | URL
간단히 말해서 중국의 천하관념은 조공-책봉 관계이고 이런 국제관계가 유럽처럼 약육강식하는 살벌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지요. 약소국이 다소 숨쉴 여력도 만들어 주고...우리나라 사학자들도 사대주의가 중국에 종속된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일명 '사대주의 정당화학파'가 꽤 세력이 있지요.그런데 현실적으로 21세기의 천하질서는 음...동북공정이나 서남공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로쟈 2010-04-18 22:19   좋아요 0 | URL
동북공정 같은 건 속좁은 '제국주의'의 행태죠. 천하체계는 소위 '제국'의 논리에 더 가까울 듯해요. 읽어봐야 알겠지만.

mirror 2010-04-19 02:37   좋아요 0 | URL
시민 또는 국민을 백성으로 보는 것만 해도 전근대적인 관점이 아닐까요?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홉스와 로크, 루소의 정치철학에 기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것을 대체할 이념은 새로 등장하지 않았고요. 현재의 중국의 국가체제를 용인하면서 천하를 운운하다니요. 허황된 중국 지식인의 전형을 보는것 같습니다. 지금 중국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기위한 참고로서 이런 책이 번역되는 것은 좋지만, 실제로 중국 유학생들이 그런 생각인지는 의문입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대상이거나 유학한 나라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의 후광에 힘입어 행세하려는 것이 전통적인 한국의 학자들 행태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나 유럽에 갔다온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중국유학출신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적 지적 전통은 현대사회의 미래의 대안을 제시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해왔고, 지금까지는 미래의 가능성도 보여준 적 없습니다.
'관점이 없는 견해'란 표현은 다른 데서 베낀 것입니다. 80년대 중반에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 Thomas Nagel의 저서 이름이 'View from nowhere'입니다.

로쟈 2010-04-19 23:29   좋아요 0 | URL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이념은 등장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몰락이 '역사의 종언'이라고 믿는 입장에서라면 코웃음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많은 문제점을 지닌 나라이므로 중국 지식인의 생각이 허황하다고 보는 것은 미국이 이상사회가 아니므로 미국 지식인의 사상을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로선 '세계체계'라는 걸 상대화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귀가길에 습관대로 대형서점에 들러봤지만 눈에 띄는 신간이 별로 없었다. 모처럼 '조용한' 주로 분류해야겠다. 그런 가운데 버스에서 읽은 책은 김예슬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와 함께 이장욱의 첫 소설집 <고백의 제왕>(창비, 2010)이다. 전자는 3/4쯤 읽었고('김예슬 선언'은 의외로 '유나바머 선언'을 떠올려주었다. 아니, 자연스러운 건가?), 후자에선 평판작 '변희봉'을 읽었다. 첫머리에 실린 '동경소년'을 잡지에서 읽을 때 다 모아놓으면 그림이 되겠다 싶었는데 그 '그림'의 표제가 '고백의 제왕'이다. 몇 편 더 읽으면 나의 느낌을 말해볼 수 있겠다(일단 내가 받는 인상은 역시나 그가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단편들은 언어의 바깥을 지시하기보다는 그 지시가능성 자체를 음미해보는 쪽이다. 그는 '변희봉'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밴, 히봉'에 대해 쓴다). 작품을 이모저모 뜯어보고 있는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10. 04. 17) 순결한 고백이 추한 욕망을 만날 때…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평론가인 이장욱(42)의 첫 번째 소설집 ‘고백의 제왕’(창비 펴냄)이 보여주는 세계는 현실의 공간일 수도, 환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혹은 현실적인 환상, 환상적인 현실일 수 있다. 

서로 다른 서사를 품은 8편의 단편소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일관되게 등장하는 ‘유령’, 그리고 ‘죽음’이다. 한결같이 낯설고 기괴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담(奇談) 류와는 궤를 달리 한다. 이장욱의 탄탄한 문장이 선연한 이미지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들의 무대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이어주는 기괴한 곳, ‘아르마딜로 공간’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모든 작품의 뿌리에는 ‘비(非)존재로서의 존재들’-예컨대 외계인 또는 우리 사회의 이주노동자 등과 같은 이들-에 대한 위로와 성찰이 담겨 있다. 타임워프(시·공간 이동)와도 같은 이상한 곳 ‘아르마딜로 공간’에서는 ‘지난해의 여름을 달려가던 택시’가 ‘25년 전의 겨울을 걸어가던 빨간 모자를 쓴 여자아이’를 치는 등 숱한 죽음이 잇따른다.  

‘변희봉’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영화 ‘괴물’, ‘플란다스의 개’에 출연했던 배우 변희봉은 끊임없이 마주친 인물임에도 만기와 그의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부재의 인물이다. 게다가 ‘배우 밴히봉’의 존재에 대해 무한 의문과 회의를 품고 동대문운동장 곁을 지나던 만기 앞에는 엉뚱하게도 사직구장에서 사라져버린 롯데 이대호의 파울공이 떨어진다. 말이 없던 여자친구는 점점 형체가 희미해지며 결국 눈에 보이지 않게 되고(‘동경소년’), 죽어버린 유령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난다(‘기차 방귀 카타콤’).  

그런가하면 ‘곡란’에서는 하루에 두 번 기차가 서는, 간이역이 있는 시골 마을 모텔이 아예 자살 명소와도 비슷하다. 함께 자살하기 위해 방에 들어선 세 사람이 주저하는 곳에는 과거에 이곳에서 목숨을 끊었던 온갖 유령들이 바글바글하다. ‘곡란’은 그들이 묵은 모텔의 이름 ‘목란’의 외벽 전구가 군데군데 끊어져 ‘곡란’으로 보인데서 나온 제목이다. 왜곡된 소통의 상징과도 같은 장치다.  

표제작 ‘고백의 제왕’은 대학 동창들의 송년회 술자리에서 ‘고백의 제왕’으로 통했던 친구 곽(郭)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가 풀어놓았던 고백들은 진실 여부를 떠나 너무 구체적이고 충격적이어서 듣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중학생 시절 환갑이 넘은 식당 아주머니와 가진 첫 경험, 자신의 누이를 자살하도록 만들었던 기억, 홍일점으로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J의 임신, 낙태 등 일련의 고백들은 자리를 냉랭하게 만들거나 분란의 공간으로 바꿔내는 마성(魔性)을 띤다. ‘고백’이라는 가장 진정성어린 형식이 개인의 추한 욕망과 맞물리며 낳는 결과를 묵시록적으로 보여준다.  

이장욱은 ‘작가의 말’에서 “결국은 어둡고 고요한 진심만이 남는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 “존재하는 것은 타자(他者)라는 관념이 아니라 당신이며,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말”이라고 소통하는 삶에 대한 애정과 바람을 담았다.  

 

1994년 시로 등단한 이장욱은 첫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2005)로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았고, 시인으로서 내놓은 시집 ‘정오의 희망곡’ 등 역시 젊은 감각으로 노래한 새로운 서정에 대해 시단의 상찬이 쏟아졌다. 또 단편 ‘변희봉’은 지난 2월 이장욱에게 ‘젊은 작가상’을 안겼고, 지난달에는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박록삼기자) 

10.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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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2010-04-17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의 제왕'이란 소설집 제목에서 '나는 선언의 천재'로 시작하는 황병승 시가 연상되네요.

선언, 고백 이런 단어만 놓고 보면 낡은 느낌인데,시인들은 언어를 다루는 신비한 능력이 있나봅니다.



로쟈 2010-04-17 09:33   좋아요 0 | URL
그게 시인들의 프라이드죠...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사진이 홈피에 올려져 있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이런저런 근심은 사실 지난 겨울의 무모한 일정이 낳은 후유증이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04. 15. 

P.S. 레닌주의는 일단 국가권력을 쟁취하고, 이어서 일상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식이지만, 수유너머에 처음 다녀오면서 그 순서를 거꾸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우리의 일상을 먼저 바꾸면서(공부하는 일상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레닌과 마오가 각각 발명한 혁명의 공식을 우리 시대에 맞게 한번 더 발명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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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6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6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대학신문의 메인서평이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을 다루고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본격적인' 서평의 모양새여서 흥미롭게 읽었다. 필자는 홉스봄의 <혁명가>(길, 2008)와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이후, 1999) 등을 옮기고, <대중과 폭력>(이후, 1998)을 쓴 김정한 박사다.

대학신문(10. 04. 11) '레닌’이라 쓰고 ‘혁명’이라 읽기 

혁명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한 천재적인 수완을 가진 개인이나 음모적인 비밀결사로 만들어지는 혁명은 없다. 그것은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정세 속에서 어떤 우발적인 사건이 도화선이 돼 일어날 뿐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도 그 시작은 이와 다르지 않았다. 3월 8일(구력 2월 23일) ‘세계 여성의 날’에 식량 부족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해야 할 일부 군인들이 시위에 동참해 부패의 온상인 관공서를 점령하면서 차르가 퇴임하는 ‘2월 혁명’이 일어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상황이었다. 당시 레닌은 스위스의 취리히에 망명해 있었고, 1917년 1월의 한 연설회에서 “우리 나이 든 세대는 이제 다가올 혁명의 결정적인 전투를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레닌에게도 혁명은 죽기 전에 이루지 못할 꿈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2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레닌은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디뎠다. ‘4월 테제’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즉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차르 독재가 무너진 후 꾸려진 임시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성향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러시아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니! 처음에는 볼셰비키조차 레닌의 구상에 냉담하게 반응했고, 그가 오랜 망명생활로 말미암아 정치적 감각을 상실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결국 ‘4월 테제’는 대중들을 사로잡았고, 마침내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주의를 선포하는 ‘10월 혁명’의 초석이 되었다.

레닌은 무엇을 한 것일까? 볼셰비키조차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말하지 않을 때, 또는 멘셰비키처럼 그것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당연한 듯 고수하고 있을 때, 그는 대중들의 흐름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전환할 길을 모색했다. 이는 근본적인 사고의 좌표를 전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예컨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본주의가 ‘성숙’한 다음에나 가능하며, 그러므로 후진국인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수립이 당면한 과제라는 당대의 ‘상식’을 뛰어넘어, 레닌은 혁명에 관한 모든 것을 새롭게 사고했다. 이것이 『레닌 재장전』의 핵심 전언이다. 현존 질서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정치적 기획에 대한 ‘사고금지’(Denkverbot)가 불문율이 된 오늘날, ‘레닌’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강요하는 ‘사고금지’를 무력화시키고 근본적인 사고의 좌표를 바꾸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히 ‘레닌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레닌’이라는 이름을 학계에 불러들이는 데 크게 공헌한 지젝이 말하듯이,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의 말과 행위를 똑같이 되풀이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인 해방의 정치가 붕괴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던 시대에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레닌이 실제로 한 일이 아니라 하지 못한 일, 끝내 소련의 몰락으로 귀결했으나 세상을 바꿀 가능성의 문을 열었던 시도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금융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주의나 자유민주주의를 변혁하는 정치를 사고하지 못하는 한계를 돌파하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물론 이런 전체적인 주제에도,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대부분 2001년 독일에서 열린 한 국제콘퍼런스의 발표문들에 기초해 있어서, 모두 레닌을 재장전하고는 있지만 그 조준하는 방향은 저자에 따라 다양하고 차별적이다. 레닌의 정치가 지닌 현재적 의미를 탐색하는 글도 있고, 그의 철학적 입장을 되짚어보는 논문도 있으며, 레닌 하면 떠오르는 악명 높은 전위당 문제를 파헤치는 것도 있고, 단순히 레닌의 여러 한계를 소묘하는 데 머무는 것도 있다.

여기서 이 책에 담긴 수많은 내용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인상적인 쟁점은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하나는 헤겔의 변증법이다. 예컨대 미카엘-마차스, 앤더슨, 쿠벨라키스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이 해체돼 세계적인 좌파 연대가 무산된 후 베른도서관에서 헤겔을 읽기 시작하는데, 이 헤겔의 변증법이 레닌의 정치적 사고를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조는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반헤겔, 반변증법의 기치가 대세를 이루었던 점과 대조적이다. 물론 지젝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르크스, 라캉, 헤겔을 결합하는 철학적 작업을 계속해왔지만, 과연 레닌과 더불어 헤겔이 복권될 것인지 사뭇 지켜볼 일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국가 문제이다. 레닌 자신은 “모든 혁명의 중요한 문제는 국가권력이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라자뤼스나 네그리가 그러하듯이 최근의 국가 비판은 혁명을 국가권력의 장악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고 ‘비국가주의 정치’를 요청해왔다. 그러나 이 책의 일부 저자들은 그런 시도가 국가권력을 너무 쉽게 기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예컨대 벤사이드는 대항권력이라는 수사학으로 정치권력의 쟁취라는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의 난점을 회피하는 데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권력을 모른 척할 수는 있을 테지만, 권력이 우리를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본격적인 논쟁이 없지만, 차후 ‘레닌과 헤겔’, ‘레닌과 국가’라는 쟁점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있는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맥락에서는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이른바 PD(민중 민주) 계열의 좌파들이 레닌주의를 모델로 삼아 전위당 노선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물론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레닌주의 노선은 폐기됐지만, 그 유산은 오랫동안 좌파들을 악몽처럼 짓눌렀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라는 암묵적인 금기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견고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레닌과 미래의 혁명』에 실려 있는 2부의 난상토론을 일독해보길 권한다. 특히 2008년 촛불시위를 평가하면서 레닌이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함의를 제시하는지 고민해볼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김정한 박사_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10. 0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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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4-1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이렇게 소개하시니까 1만명이 안 낚이는 겁니다...포맷을 바꾸시면 어떨까요? <(지젝의) 혁명 고전 강의>, <그 괴물은 (레닌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혁명을 부탁해> 뭐 이런...^^;; 썰렁한 흰소리 한 죄로 재빨리 도망갑니다.(이 댓글이 페이퍼에 문제가 되면 삭제요청을 해 주세요~ 아무튼 도망갑니다.)

로쟈 2010-04-15 22:46   좋아요 0 | URL
그 점은 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획중인 책도 있지만 당장은 곤란하기에 이렇게라도...^^;
 

어제 온라인에서의 블로거 활동에 관해 한 주간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요즘 '1인 3역'을 계속해나가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란 자기반성도 하던 차였는데(이러다간 조만간 침몰하지 않을까 싶다), 내친 김에 '로쟈'가 언론에 처음 노출된 게 언제였던가 찾아봤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1999년부터였지만, 언론에 처음 이름이 오른 건 2003년 가을 지젝의 방한을 다룬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서였다('지젝'도 2001년 6월 한국경제의 한 칼럼에서 처음 이름이 비친다. 네이버 검색으로는 그렇다). 마침 지젝의 번역서 몇 권에 대한 서평을 올려놓던 시절이다. 그렇게 처음 기사화된 이름을 보고 좀 재미있으면서도 낯설게 느꼈던 듯싶다. 하지만 일회적이었고, 2007년 1월초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인터넷 서평꾼'을 다룬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된 이후에야 비로소 '로쟈'란 이름은 주목을 받는다. 한겨레21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 칼럼을 연재하는 건 그해 8월부터다. '로쟈'란 이름을 언제까지 끌고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려되기도 한다. 오래전 오마이뉴스 기사를 '아카이브' 자료로 챙겨놓는다.  

 

오마이뉴스(03. 10. 09) 어려운 지젝, 사람들 왜 모이나

지젝이 왔다. 그런데 과연 온 것인가. 자연적 실체로서 그는 비행기를 타고 입국하여 몇몇 강연을 진행 중에 있다. 오긴 온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 오래 전에 도착하였으나 그 학문적 실체가 제대로 구성되거나 조명되지 않았다. 상상적 실재로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을 뿐, 지젝은 늘 오고 있는 중이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사상계의 거목에 대한 탐사가 손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단순히 '철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최신의 서구 철학계(이 용어에 대하여 지젝은 거부하겠지만)가 모든 종류의 정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어마어마한 질량을 압착한 한 권의 사유물을 토해내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지적 바탕이 없고서는 그의 저작, 심지어는 목차조차 도대체 어떤 사유의 그물로 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플라톤에서 코소보 사태까지, 구조주의에서 공포소설까지, 그저 두루두루 아울러서 지식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거의 한 문장 속에 동시에 출현시켜 그 자체로 세계의 복합성을 문자로 드러내버리는 지젝의 사유는 전공자는 물론이거니와 '국영수 중심'으로 성장해온 우리의 인문 환경에서는 도무지 해독 불가능한 암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젝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는 박학다식한 동구권 학자'에 머무르고있다.

방한한 지젝, 하지만 그의 학문은 여전히 오고 있는 중
두번째 이유로는 성실하지만 부주의한 번역물과 불성실하고 빈약한 오역물이 지젝에 대한 관심을 차단시킨다. 문학과 영화에 대한 약간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그 착오를 가려낼 수 있을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이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오역은, 저작권법에 따라 다른 이가 좀더 섬세하게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지젝의 저작에 대한 리뷰를 쓴 '로쟈'씨가 작년 12월 말에 쓴 내용에 따르면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경우 "일반 독자가 이 교양서를 읽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역서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겐 고역만을 선사한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초역판이 2001년 7월에 출간되었다가 번역 과정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2002년 9월에 '개역판'으로 내면서 책값을 무려 9000원이나 인상하여 하드커버로 출간하였는데, 의미있는 교정과 보완은 전무하다는 것이 로쟈씨의 의견이다.

세번째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인 이 세계의 불가해한 속성 때문이다. 그의 저작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것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의 실례이다. 현대사회의 본질은 (그것이 미국이든, 이라크든, 슬로베니아든, 한국이든) 기본적으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인 억압적 융합과 긴장과 대립에 따라 매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현상 속에 감춰져 있으므로 그 실체에 대한 접근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이론적 바탕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억압은 사라지거나 축소되지 않고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든다. 그리고 '귀환'한다. 다양한 시선이 필요한 이유가 된다. 



지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 권의 책
지젝과 더불어 사색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괴롭다. 누구보다 소통을 열망하는 학자지만 우리의 허약한 지적 기반은 의미있는 최소한의 소통, 곧 '독서'조차 불편하게 만든다. 지젝은 말한다. 현대는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아편을 대신한 마리화나, 사이버 섹스 등 실체가 없는 가상현실에 대해 열망'한다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현대는 혁명, 테러리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 '실재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따른 근본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다고 지젝은 말한다. 따라서 그 사이 제3의 길, 곧 자유·다양성·인권·관용 등의 민주적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만 따로 추스르고, 그 정치적 발언록의 즙만 짜낼수록 지젝은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므로 세 권만 따로 추려 읽도록 하자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김소연 옮김). 홀로코스트, 후천성 면역결핍증, 체르노빌,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를 성찰하는 지젝의 진지하면서도 날렵한 시선이 충만한 저작이다. 라깡식 판독법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경쾌하게 드러내준다.

<항상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김소연 옮김). 지젝이 영화학자들과 더불어 라깡의 정신분석학 방법론으로 히치콕의 영화를 분석한 책이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골고루 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히치콕 영화의 분석을 통해 현대 사회의 주체 형성을 다루고 있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주은우 역). 할리우드로 집약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풍부한 사례를 통해 라깡을 재구성한다. 라깡을 사이에 두고 푸코, 하버마스, 롤스 등이 얽힌다.(정윤수/박형숙 기자) 

10. 04. 15. 

P.S. 본기사에 딸린 박스기사에는 이런 지적도 들어 있다. "한편 지젝 학문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라깡 등에 대한 출판 인프라가 빈약한 우리네 인문학 풍토에서, 그들을 '뛰어넘는' 지젝에 대한 과도한 열광은 또 다른 '지적 패션'이라는 지적도 들린다." 그간에 '빈약한 출판 인프라'가 괄목할 만큼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젝의 책은 이후에도 매년 3-4권씩 출간됐고, 올해도 예외는 아닐 듯하다. 지젝의 이미지를 아바타로 내걸고 '로쟈'는 그 '지적 패션'을 '지적 일상'으로 바꾸려고 나름 애써왔지만(1만명의 독자층을 만드는 것이 잠정적인 목표치가 될 수 있다), 낙관적으로 말해서 전망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10년, 혹은 20년이 걸리면 가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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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1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를 첫머리에 쓰면 안보이나요? <하우 투 리드 라캉>을 엊그제 배달받고 들여다봤는데 제게는 읽는 것이 괴롭지만 흥미롭습니다. 라캉의 다음을 읽는데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0-04-16 01:11   좋아요 0 | URL
어느 책인지는 모르겠지만(네 < >로 묶으면 안보이게 되더군요) 흥미로움이 괴로움보다 점점 커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푸른바다 2010-04-1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 서울대에서 지젝이 강연할 때 가보셨는지요?^^

로쟈 2010-04-16 22:22   좋아요 0 | URL
물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