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와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 출간 기념 대담이 내일 저녁 청어람 아카데미 지하소강당에서 열린다(http://blog.aladin.co.kr/mramor/3933690 참조). <유토피아 이야기>의 번역자이자 <메트로폴리탄 게릴라>의 저자 박홍규 교수와 대담을 나누게 됐는데, 조연 역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제는 '우리시대의 유토피아를 찾아서'이다. 겸사겸사 멈퍼드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현재 구할 수 있는 멈퍼드(멈포드)의 책은 세 권밖에 되지 않아서, 박홍규 교수의 저서도 몇 권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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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게릴라- 박홍규의 루이스 멈퍼드 읽기
박홍규 지음 / 텍스트 / 2010년 6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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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이야기
루이스 멈포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0년 6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0년 08월 23일에 저장
품절
Lewis Mumford: A Life (Paperback)- A Life
Donald L. Miller / Grove Pr / 2002년 10월
37,250원 → 30,540원(18%할인) / 마일리지 1,53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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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standing Lewis Mumford (Hardcover)- A Guide for the Perplexed
Kenneth R. Strunkel / Edwin Mellen Pr / 2004년 2월
223,400원 → 201,060원(10%할인) / 마일리지 6,04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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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4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장 정리 일이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데, 잠시 틈을 내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어제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노마드북스, 2010)와 같이 구입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역사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책과함께, 2010)을 다룬 기사다. 같이 묶은 데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브라우닝의 책은 '홀로코스트' 연구서이고 이 분야의 '학장'이라고 할 라울 힐베르크에게 헌정된 책이다.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8)의 저자 힐베르크 말이다. 소개는 이렇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1992년에 초판이 출간되었으며(1998년 재판), 한국어판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1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사회 하층 계급의 평범한 중년 남성들로 구성된 나치의 한 예비경찰부대가 수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또한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한 사례를 심층 연구한 이 책은 라울 힐베르크의 선구적 업적인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의 뒤를 잇는 홀로코스트 연구의 또 다른 기념비적 저서로 평가받는다."  

경향신문(10. 08. 21) 특수 상황선 누구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  

연쇄살인범이 잡히면 그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악마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류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학계의 논의도 크게 보면 비슷한 구조다.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극도로 유대인을 증오했거나 잔악한 사람들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즉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미국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1992년 처음 발표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원제 Ordinary Men)은 이런 질문을 물고 늘어져 강력한 가설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제목에 등장한 ‘평범’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수백만명을 죽게 만든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주창했듯, 사악함이나 세뇌효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 등 심리적 요인이 잔혹한 행위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암시한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학살 책임자나 피해자보다는 학살을 직접 수행한 말단의 당사자를 집중 추적한 연구서로 최초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온 뒤 요나 골드하겐이라는 학자가 같은 자료로 브라우닝과 정반대의 결론, 즉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 책을 출간하면서 꽤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브라우닝은 개정판(98년) 후기에서 골드하겐의 공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어 양자 사이의 논쟁의 뼈대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아주 평범한 학살 집행자들’은 나치 독일 당시의 ‘101예비경찰대대’. 101예비경찰대대는 1942~43년 폴란드에 투입돼 유대인 3만8000여명을 학살하고, 4만4200여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명실상부한 ‘죽음의 부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의 중년 남성 500여명으로 구성된 101예비경찰대대 구성원은 대부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반(反)나치 성향이 강한 함부르크 지역 출신이었다. 철저한 훈련과 이념교육을 받은 정예부대는커녕 대부분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다. 말 그대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브라우닝은 함부르크 검찰이 1960년대에 전직 101예비경찰대대원 125명을 취조한 기록을 분석,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 전문가’가 돼 갔는지 규명했다. 1942년 7월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 작전에 나서기 직전 101예비경찰대대의 지휘관은 임무를 설명하면서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말한다. 500여명 가운데 12~13명이 나왔다. 나머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유대인 1500여명의 머리통을 총탄으로 차례차례 날려버리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물론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몇명 죽이고 나서는 빠져나온 부대원도 생겼다. 20% 정도가 열외를 택한 것으로 추정됐다. 놀랍지 않은가. 10명 가운데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거니와 범죄자도, 적군도 아닌 민간인을 시체더미로 만드는 데 나선 것이다. 학살 작업을 거부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물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부대원들도 첫날의 경험을 한 뒤 극심한 스트레스와 역겨움을 호소했다. 부대로 돌아와 독한 술에 만취했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말한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사살 임무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들은 결코 ‘미쳐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갔다.” 대부분은 학살을 무덤덤한 일상으로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학살을 즐기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요소는 ‘동조(同調)’와 ‘권위에 대한 복종’이었다. 대원들은 동료나 상관에게 ‘사나이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체면을 중시했고, ‘최고위층의 명령’이라는 권위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 학살을 계속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공개적으로 비동조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의 능력 밖에 있었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웠다.”

브라우닝은 “학살을 저지른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결코 사면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이해’했을 때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브라우닝의 결론은 평범한 사람도-나를 포함해서-특수한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우닝도 “잔혹성은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뿌리를 볼 때 사회적”이라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한 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이야기에서 엄청난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우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정부들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근대적 삶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다”(지그문트 바우만)라는 명제는 불편하지만 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이해가 홀로코스트 학살자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살 임무를 거부한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었으니까.(김재중기자) 

10. 08. 21.  

P.S. 기사 말미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이 언급되는데, 바우만의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도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 번역중이란 얘기를 언제 들은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 덧붙여, 츠베탕 토도로프의 <극한에 직면하기> 같은 책도 소개되면 좋겠다. 몇년 전 프리모 레비를 읽을 때 들춰본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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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1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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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2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4회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지만 체감 시간으론 몇 년이 흐른 듯하다. 이사준비로 어젯밤 늦게까지 땀을 빼고 오늘 하루 종일 분주했던 게(포장이사이니 힘이 들 건 별로 없었지만) 이유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공간이 달라졌다는 점(2004년에 러시아에 체류한 걸 고려하면 5년만이다!).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리듬과 감각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릴 듯하다. 그때까지는 '1박2일'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기분으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따라 읽는다. 엊저녁에 교정을 봤건만 '토끼굴'에 굴러떨어진 것처럼 새삼스럽다. 전문은 연재코너에서 읽으실 수 있고 여기에 옮겨놓는 건 그 일부이다.   

“토끼굴은 일정한 직선 방향으로 터널처럼 뻗어 있다가, 갑자기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어찌나 갑작스럽던지 앨리스는 너무 깊어 보이는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멈춰야지 하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자, 이제 네오와 함께 모피어스를 따라 굴러 떨어진 ‘토끼굴’이다. 이런 경우엔 보통 인원 점검을 다시 하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어서 대신에 ‘RSI’에 대한 복습만 간단히 하도록 한다. 실재계-상징계-상상계 얘기다. 교재는 다시 <HOW TO READ 라캉>이다. 상징계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멕시코에선 TV 드라마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찍는다고 한다. 매일 25분짜리 에피소드를 찍어대는데 배우들에겐 미리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당일 아침에 그날 찍을 대본을 나눠준다는 홍상수 감독보다 더 심한 경우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찍을 건 찍는다. 어떻게? 멕시코 방식은 이어폰을 활용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배우가 즉석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자 이제 뺨을 한 대 갈기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을 해. 그리고 껴안아!”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런 것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이다.  

이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말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우리의 발화 행위는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전제에 의존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박쥐와 소통하기 어려운 것은 박쥐와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상징적 차원 혹은 상징적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재볼 수 있는 일종의 척도다. 대타자가 단일한 대행자(agent)로 인격화되거나 사물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언제나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인격화의 예라면,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의 삶을 바치도록 만드는 자유니 공산주의니 민족이니 하는 대의(Cause)는 사물화의 예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실을 관장하고 조정하며 인도하는 ‘신’, 자유’, '공산주의’, ‘민족’ 등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우리가 ‘소타자(small other)’라면 이 소타자(개인)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끼어든다. 말이 좀 어려운가? 이럴 땐 지젝식 EDPS를 활용하자.  



한 가난한 농부가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신디 크로퍼드와 단둘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세계 3대 모델로 불리기도 했던 미녀다. 그렇다고 굳이 신디 크로퍼드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며 각자가 알아서 다른 미녀로 대체해도 좋다. 하여간에 둘이 섹스를 한 후에 신디가 농부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 “그레이트!” 하지만 자신의 만족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농부는 말한다. 바지를 입고 얼굴엔 콧수염을 그려서 자기 친구처럼 분장해달라는 것이다. 자신이 변태가 아니라고 겨우겨우 안심시킨 농부는 신디가 그의 원대로 분장을 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고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이야 방금 전에 신디 크로퍼드와 섹스했다!” 

여기서 “언제나 증인으로 현존하는 이 제삼자는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의 가능성을 배반한다.”(<HOW TO READ 라캉>, 21쪽)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남이 봐줘야 하며 알아줘야 한다(그래서 비디오로 찍어두기도 한다). 제삼자가 개입하지 않는 섹스가 ‘상상적 섹스’라면 농부가 자신의 만족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원했던 건 그 ‘상상적 섹스’를 ‘상징적 섹스’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친구라는 제삼자가 필요했다. 이 ‘제삼자’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타자’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대타자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이런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대타자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대타자라는 비실체적 ‘실체’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힘을 갖는다. 대타자가 규칙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가령 체스 경기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체스 경기자가 있어야 하며, 축구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다루려는 축구 선수들이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스 경기자와 축구 선수들만으로 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려면 거기엔 규칙(대타자)이 적용돼야 하고 작동해야 한다. 이 규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는 지난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오래 전에 쓰인 서평이긴 하지만 라캉-지젝의 ‘실재’ 개념을 능숙하게 정리한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글을 잠시 따라가 본다.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2010)에 수록돼 있는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는 서평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영원히 괴물을 품고 사는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핵심에는 잔인할 정도로 낯선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것,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일컬은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도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 괴물성의 비형이상학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305쪽)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점은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이질적인 부분’ 혹은 ‘괴물성’이라는 데 있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라캉은 한 공포영화에서 착상을 얻어 이것을 ‘괴물(Thing)’이라고 불렀다. 다음 회에는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참고로, <반대자의 초상> 역주에서 라캉이 착상을 얻은 영화가 존 카펜터의 <괴물>이라고 해놓았는데, 착오다. 라캉이 본 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1982)이 아니라 하워드 혹스의 <괴물>(1951)이다(라캉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나도 하워드 혹스의 영화는 보지 못했고, 카펜터의 영화만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한 대중연예지가 ‘역대 최고의 SF영화 톱 25’를 뽑았을 때 10위에 선정된 수작이다. 그럼 1위에 오른 작품은? 바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10.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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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0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0 0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8-2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타자의 개념을 완전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정말 이해하기 쉽고 명확합니다.

로쟈 2010-08-20 23:2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제 역할은 가이드라서요.^^
 

오랜만에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보낸 원고인데,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 <차 한 잔> 읽기이다. 분량상 한번 더 다루어야 할 듯하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269 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펭귄판 『가든파티』의 서문에서 로나 세이지는 맨스필드를 가리켜 “배제, 불안, 이동, 단속성을 글로 피력했던 대단한 모더니즘 작가”(one of the great modernist writers of displacement, restlessness, mobility, impermanence)였다고 평했다. 그녀를 특징짓는 명사들은 모두 이동성의 범주에 속한다. 가난한 축에 속했다면 ‘자주 이사를 다닌 모더니즘 작가’로 불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러한 특징은 맨스필드 자신이 뉴질랜드 태생이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활동한 작가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맨스필드가 작품 속에 그렇게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중의 하나가 ‘계급의식’이다. 맨스필드의 문학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가든파티」를 비롯한 몇몇 작품에서는 두드러지는 주제다. 나로선 특히 「차 한 잔」 같은 작품으로 맨스필드를 기억하게 된 까닭에 더 강조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우선 주인공은 결혼 2년차의 로즈머리 펠이다.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고, 남편은 그녀를 끔찍이 사랑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 부부가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 쇼핑을 하고 싶을 때는 평범한 사람들이 동네가게 가듯이 파리로 훌쩍 떠나버리는 식이다. 꽃을 사고 싶으면 고급 꽃가게에 들러서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라일락은 싫다고 말하면 점원은 지당하다는 듯이 굽실거리며 라일락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운다. 그리고는 가냘픈 여점원이 커다란 흰 종이 봉지를 한 아름 안고서 비틀거리며 차를 타는 곳까지 그녀의 뒤를 따른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오후 로즈머리 펠은 자주 들르는 골동품 가게에 들렀다가 주인이 소개하는 아주 고가의 조그마한 상자를 본다. 탐나는 물건이었지만 주인에게 보관해달라고만 하고 길을 나선다. 그때 그녀는 잠시 이상한 통증을 느낀다.  

누구나 살다보면 두려울 때가 있게 마련이다. 숨은 곳에서 어떤 사람이 뛰쳐나와 밖을 내다볼 때 그건 참말로 끔찍하기만 한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적인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특제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위고 시꺼멓고 희미한 모습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자가 - 어디에서 왔을까? - 로즈마리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렇게 문득 로즈머리의 공간으로 ‘침범’해온 가여운 여인이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로 이렇게 부탁한다. “사-사모님, 차 한 잔 값만 주시겠어요?” 그녀는 차 한 잔 값도 갖고 있지 않은 무일푼이었다. “참 희한하군요!”(How extraordinary!)라는 것이 로즈머리의 인상이다. 사실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건, 그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녀에겐 예사롭지 않은 일이며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더 희한한 일을 고안해낸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한 이 만남이 그녀에겐 예사롭지 않은 사건, ‘모험’(adventure)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면 어떨까? 자기가 늘 책에서나 읽고 무대에서나 구경하던 그러한 사건들을 몸소 실연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스릴 만점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 나서면서 옆에 있는 희미한 모습의 여자에게 집에 가서 차나 한 잔 들자고 말했다. 바로 그때 훗날 친구들이 깜짝 놀라도록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하고 말하는 듯한 자신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뒷부분은 원문과 같이 음미해보자. 

It would be thrilling. And she heard herself saying afterwards to the amazement of her friends: "I simply took her home with me," as she stepped forward and said to that dim person beside her: "Come home to tea with me."

멀찍이서 이 장면을 봤다면,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불쌍한 여인에게 부유한 젊은 부인이 뜻밖의 적선을 베푸는 것으로 볼 만한 대목이다.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차를 마셔요! 마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이방인과 과부와 고아)에게 ‘환대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로즈머리의 시점에서 기술되는 이 장면의 핵심은 그러한 윤리와 무관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Come home to tea with me"가 아니라 "I simply took her home with me"이다. 나중에 친구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뭐.”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놀래게 만들 자신의 모습에 도취돼 있을 따름이다.

즉 이것은 ‘인정미담’이 아니라 ‘모험담’이다. 이 장면에서 그녀에겐 아무런 타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 옆에는 단지 ‘희미한 사람’(dim person)이 서 있을 뿐이다(‘희미한 모습의 여자’만큼의 구체성도 갖고 있지 않다). 로즈머리 자신이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기하고 있지만, 이 장면을 카메라로 옮긴다면 ‘희미한 사람’은 초점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희미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순서상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뭐.”라고 말하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차를 마셔요”라고 말했다는 식으로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자기 차를 같이 타고 가서 차를 마시자는 로즈머리의 뜻밖의 제안에 대해서 여자가 못 미더워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심지어 로즈머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사모님, 사모님은 저를 경찰서에 데려가는 건 아니시겠죠?”라고 물어볼 정도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들은 말을 잘 듣는 법이다. 결국 로즈머리는 낯선 여인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빌로드 손잡이를 손으로 잡으면서 그녀는 일종의 승리감을 느꼈다. 사로잡다시피 한 조그마한 포로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야 당신을 붙들었군요.’” 물론 친절한 의도에서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많은 걸 입증해주려고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놀라운 일도 가끔씩 일어나는 법이고, 부자들도 인정은 있으며, 여자들은 모두 자매지간이라는 사실 등등. 로즈머리는 그녀 쪽으로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겁먹지 말아요. 도대체 나하고 같이 가는 게 어때서 그래요? 우리는 여자들이에요. 내가 좀더 잘 산다면 당신도 당연히 기대는 해야…….”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말을 끝맺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다행히 차가 멎었다.  

로즈머리는 “우리는 여자들이에요.”(We're both women)라면서 ‘연대감’을 표시하지만, 그것은 기만적인 감정이다. 이 장면에서도 그녀는 그렇게 ‘관대하게’ 말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돼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우리는 같은 여자’라는 전제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을 그녀가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곧이어 나오지만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 방에서 벽장을 다 열어젖히고 상자란 상자를 모조리 끌러 보여주고 있는 부잣집의 어린 소녀와 같았다.”  

관대하고 자비로운 부잣집 여성으로서 낯선 타인에게 예기치 않은 환대를 베푸는 역을 ‘연기’하고 있는 로즈머리는 ‘손님’을 이제 자신의 침실로까지 안내한다. 그리고 벽난로 앞에 의자에 앉으라고까지 권한다. 과연 이 ‘어린 소녀’ 로즈머리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녀와 ‘손님’은 차 한 잔을 같이 마실 수 있을까?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할 수 있지만, 나머지 이야기는 한숨 돌린 후에 마저 하기로 한다. ‘차 한 잔’ 마시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군... 

10. 08. 17.  

P.S. 맨스필드는 생전에 세 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는데, <독일 하숙집에서>(1911), <행복>(1920), <가든파티>(1922)가 그것이다. <행복>과 <가든파티>는 표제작이고 타이틀엔 'and Other Stories'라는 말이 붙어 있다. 그녀가 1923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것이 <비둘기집>(1923)인데, <차 한 잔>은 바로 이 유고 작품집에 실려 있다. 그런 때문인지 국내에 번역된 작품집엔 대개 빠져 있다. 범우사판과 시사영어사판(대역본)이 내가 구할 수 있는 판본이었다. 다양한 번역으로 소개돼 있지 않아 아쉽다. 30여 편이면 전집 분량인데, 아직 작품전집이 소개되지 않은 것도 아쉽고.   

거기에 덧붙여 유감스러운 것은 맨스필드에 관한 전기가 한 편도 소개되지 않은 점이다. 물론 지명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같이 교우했던 버지니아 울프나 D. H. 로렌스와 비교할 때 아쉬운 대목이다. 영어권에는 4-5종의 전기가 나와 있는 듯싶다. 맨스필드와 버지니아 울프를 비교한 연구서 등 몇 권도 개인적으론 관심이 가지만, 이 또한 한정이 없어서 <차 한 잔>을 음미한 후에 나는 일단 맨스필드를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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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31 21:55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차 한 잔> 읽기의 계속인데, 한 차례 더 다뤄야 마무리가 된다. 이후에 예정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읽기로 넘어갈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666 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젊고 부유한 귀부인 로즈머리가 길에서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한 여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대목에서
 
 
2010-08-17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7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1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막판에 남편이 그 부랑여인에게 한 말 때문에 로즈마리가 그녀를 서둘러 내보내는 장면이 압권이지요.그래도 로즈마리는 구김살없는 부잣집 사모님이라는 생각이에요.

로쟈 2010-08-18 17:54   좋아요 0 | URL
네, '순수한' 가식을 보여주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3회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 3회분을 발췌해놓는다. 역시나 전문은 창작블로그의 연재공간에서 읽어보시면 된다. 연재에는 매회 따로 제목이 붙지 않는데, 이 발췌는 제목을 붙이면서 관련서의 이미지를 링크해놓으려는 목적도 갖는다.  

이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첫 번째로 읽을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이다. 원제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따온 <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2002)이다.(...)  



지젝의 분석과 성찰을 따라가보기 전에 제목의 핵심인 ‘desert of the real’이란 말부터 따져본다. 이 영어 표현에서 ‘of’는 동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실재라는 사막’ 혹은 ‘실재계라는 사막’이란 뜻이다. 또 다른 궁금증. ‘더 리얼(the real)’이란 말의 번역은 ‘실재’도 되고 ‘실재계’도 되는가? 그렇다. 가급적 난해한 철학 용어나 정신분석 용어는 피하려고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는데, ‘the real’이 그런 경우다. 일단은 ‘실재’나 ‘실재계’란 말이 나오면 ‘the real’의 번역어라고 생각하시는 게 좋겠다(전공자들은 ‘실재’란 번역을 선호하지만 실상 일반 독자가 읽는 번역서에서는 ‘실재계’란 말이 더 자주 나온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여 이 연재에서는 맥락에 따라 이 두 번역어를 혼용할 예정이다).

철학에서건 정신분석에서건 대부분의 개념어는 짝을 갖는다. ‘남자’ 하면 ‘여자’, ‘감성’ 하면 ‘이성’을 떠올리게 되는 식이다. 먼저 ‘실재계’는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존재의 현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 곧 상징계(the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실재계(the Real)의 하나이다. 기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숙지해두는 게 좋겠다. ‘실재계(R)-상징계(S)-상상계(I)’의 머리글자를 차례로 따서 ‘RSI 상항조’라고도 부른다. 다르게는 ‘실재-상징적인 것-상상적인 것’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또 상상계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연관지어 ‘영상계’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상용되는 용례에 따른다. 일간지 같은 데서야 이런 전문 용어들과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지만, 영화잡지나 문예지의 경우엔 사정이 달라서 어느 정도 ‘독자’ 흉내를 내려면 ‘RSI’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다. 가령, 영화평론가들의 좌담에서라면 기탄없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대답이다.

“지젝이 영화에 대한 깨우침을 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지젝에게 지혜를 베풀어준 셈이지요. 지젝 자신도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고요. 어쩌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영화는 자기의 RSI 매트릭스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상자였던 셈이지요. 그는 라캉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동원했지 그 역은 아니었습니다.”(<씨네21> 763호)

이 인용문에 대해 조금 부언하자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라기보다는 “라캉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고, 이 점은 영화평론가의 ‘발견’이 아니라 지젝의 직접적인 ‘고백’이다. 그는 “나는 라캉의 개념들을 본질적으로 저급한 대중문화의 개념들로 제대로 번역해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개념들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확신했다”라고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가 말한 ‘저급한 대중문화’의 표본은 물론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게다가 지젝은 오페라광이긴 하지만 결코 ‘시네필’은 아니다. 그 점이 시네필 평론가로선 불만스러울 수 있겠지만, 지젝 자신이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을 만큼 애초에 가까웠던 것도 아니다. 참고로, 2003년 방한했을 때 한 대담(『당대비평』 24호)에서 그 많은 영화를 다 보면서 언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지젝은 이렇게 답했다.

“천만에요. 제가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영화들의 3분의 1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예컨대 저는 로셀리니의 작품을 한 편도 보지 않았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장에 갈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영화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중요한 영화 텍스트에 대한 대부분의 분석이 책의 형태로 이미 나와 있기 때문에 연구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지젝의 ‘작업 비밀’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젝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의 분석이지 ‘영화’가 아니다. 국내에는 ‘철학책’들보다 먼저 소개된 지젝의 ‘영화책’들, 예컨대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등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인용으로 돌아가면, ‘RSI 매트릭스’라는 것이 바로 ‘실재계-상징계-상상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허다한 영화비평에서, 심지어는 영화 저널리즘에서도 라캉과 지젝의 용어들이 활용되기에 이 정도는 아는 체를 해주셔야겠다. 그렇게 셋이 짝지어 다닌다면, ‘실재계’만 분리해서 알 수 없으므로 통째로 챙겨두도록 한다. 라캉 입문서인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서 체스 게임을 예로 들고 있는 지젝을 따라가보자.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상징적 관점에서 ‘기사’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징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18~19쪽)

나부터도 체스에 익숙하지 않으니 ‘효과적인’ 예는 아니지만, 어쨌든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것이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징계로 등록될 수 있다. 한편 실재계는 인용문에서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라고 정의됐는데, ‘연속적인 환경’은 ‘우발적인 상황(contingent circumstances)’의 오역이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9·11이라는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기도 하다.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여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건이다.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것은 마치 폐허가 된 ‘실재의 사막’과 대면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10.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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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8-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되요? 저는 실재계가 진실의 핵심부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사회적 좌표를 흔드는 것은 허상과 허위로 가득한 현실에서 실재를 목격하고 난 결과론적인 것으로 이해했었는데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로쟈 2010-08-20 23:28   좋아요 0 | URL
흠, 실재와의 조우 자체가 사회적 좌표에 대한 충격인데요. 그래서 가장 흔한 조어가 '외상적 실재'란 말이고요. 어떤점에서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신 건지요? 실재는 상징계에서 좌표값을 갖고 있지 않기에 표시되지 않고, 의미를 부여받지도 못합니다. 말 그대로 간극이고 구멍이죠. 그게 우리말 '실재'와 충돌하는 의미 같기도 합니다. '진짜로 있는 것'이 구멍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안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