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한편을 더 옮겨놓는다.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란 글에 포함돼 있었지만 시만 따로 빼놓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병 속의 시간

그대를 그리워하다 남는 시간은 빈병 속에 넣어둔다
시간은 시간의 과욕이며 연적(戀敵)이다
그리움이 막막할수록 부질없는 시간은 빈병 속에서 묵직해지고
나는 어느덧 텅 빈 세상 하나를 거느리게 되었다
빈병 속 보이지 않는 자갈이 깔리고 보이지 않는 꽃들이 핀 길
그대가 원한다면 느티나무 두 그루를 마저 심겠다
보이는가, 저 텅 빈 세상의 물살과 바람과 먼지……
그대를 그리워하다 남는 시간이, 아아 더 소중해 보인다
시간은 시간의 변덕이며 불가피한 오용이다
그대를 그리워하던 다락 같은 방도 이젠 저 빈병 속에 있다

 

10. 09. 17. 

P.S. 이 시는 아마도 짐 크로스의 노래 '병 속의 시간(Time in a bottle)'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다. "만약 시간을 병 속에 저장할 수 있다면"이라고 시작하는 노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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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go 2010-09-17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

lo초우ve 2010-09-1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감상 잘했습니다 ^^

로쟈 2010-09-17 23:09   좋아요 0 | URL
^^

비로그인 2010-09-1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병 안에 들어가고 싶어져요.

로쟈 2010-09-17 23:09   좋아요 0 | URL
흠, 좀 답답할 거 같은데요.^^;

trenwelling 2010-09-1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빈병속의 시간'모두 시적 모호함을 담을 수 있는 훌륭한 용기들 이군요. 로쟈님 시들 가끔 보았지만, 시는 좀... 하는 생각이었는데. 좋은 시네요.몇번씩 더 읽고 싶게 만드는.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 산문인지 모르겠지만 한번 보고 싶군요.
'그대를 그리워 하던 다락같은 방도 이젠 저 빈병속에 있다'. 아... 가슴이 저릿.

로쟈 2010-09-17 23:10   좋아요 0 | URL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09-17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없는 소리지만 '자작시'를 지젝시로 읽은 1인입니다.


아 그나저나 그대를 짝사랑만 하던 답답하던 20대 초반도 이젠 저 빈병 속에 있다....ㅜㅜ

로쟈 2010-09-17 23:20   좋아요 0 | URL
지금은 20대 후반이신가요?^^

자꾸때리다 2010-09-18 00:33   좋아요 0 | URL
86년생임다...

2010-09-17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7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2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2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계 사막> 2장으로 바로 들어가기가 애매해서 아침에 지방에 내려가기 전에 부랴부랴 예전에 쓴 글을 보완했다. 애초엔 '팜므파탈' 얘기를 좀 다루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연휴에 여유를 좀 얻었으면 하고 바라는 수밖에... 

<실재계 사막>의 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에 관한 한 문단을 읽는다.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의 한 대목 읽기이며, 일종의 추석맞이 ‘선물’이다.

"사랑이 폭력이라는 말이 발칸의 저속한 속담 -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 -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57쪽)

인용된 발칸의 속담은 영어로 "If he doesn't beat me, he doesn't love me!"이다. 요즘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가는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테니 너무 진지하게 경청하진 마시길(속담은 속담일 뿐 오해하지 말자!). 이와 관련하여 얼른 떠오르는 영화는 발칸의 영화가 아니라 스페인 영화이다. 페도로 알모도바르의 도발적인 영화 <욕망의 낮과 밤>(1990)이 그것인데, 이 영화의 원제목이 ‘Átame!’이고 영어제목은 <나를 묶어줘! 나를 풀어줘!>(Tie Me Up! Tie Me Down!)이다. 그리고 물론 한국영화로는 장선우의 <거짓말>(1999)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한국영화로서는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을 다룬 드문 영화이지 않을까?).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원문은 이렇다. “violence is already the love choice as such, which tears its object out of its context, elevating it to the Thing” 곧 “사랑은 이러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러저러한 의미에서 폭력”이라는 구문이다. 우리말 번역은 이 대목을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라고 옮긴 것인데,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봐야겠다. 그리고 문장은 뒤집어서 이해하는 게 더 용이하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 자체가 이미 폭력”이라고 읽는 게 더 좋겠다는 말이다. 결국에 '사랑=폭력'이라는 것이니까 대차는 없는 것이지만 초점은 달라진다. “폭력이 곧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이 곧 폭력”'이라는 게 여기서는 초점이니까.

전체를 다시 옮기면 “사랑의 선택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숭고한 대상’으로까지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자리에서 ‘사물/괴물’이라고 옮긴 ‘Thing’을 그냥 ‘대상’이라고 하면 의미전달은 잘 안 되기에 여기서는 ‘숭고한 대상’이라고 옮겼다. 여하튼 이것이 ‘사랑의 폭력’, ‘사랑이라는 폭력’이 뜻하는 바이다. 가령, 2007년의 추석맞이 영화로 개봉됐던 곽경택 감독의 영화 <사랑>의 주인공 주진모(채인호)의 경우를 보자. 한겨레 신윤동욱 기자의 리뷰를 잠시 따라가보면 영화는 이런 구도이다.

태초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년 채인호(주진모)는 첫눈에 소녀 정미주(박시연)에게 반한다.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는 통속성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예쁘고 소녀의 집은 부자다. 산동네 소년은 괜스레 소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소년과 싸운다. 소녀는 소년을 생일에 초대하지만, 하필이면 소녀의 집은 그날 망한다. 그리고 첫 번째 이별. 고등학생 인호는 또 싸운다. 하필이면 싸우다가 인호를 병으로 찌르는 본드쟁이 복학생은 미주의 오빠다. 그렇게 남자는 인호와 미주의 끊어진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 ‘지나친’ 정공법이요 통속성의 기본이다. 미주의 본드쟁이 오빠는 노름쟁이 엄마를 껴안고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사랑의 맹세. “니가 내 지키도. 나도 니 지키주께.” 인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순수한 사랑, 곧 순수한 폭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맥락(학교와 가족사)에서 박시연(정미주)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연을 바라보는 진모의 시선은 건달세계에서 진모가 휘두르는 주먹보다 앞서는 근원적인 ‘폭력’이다. 영화 <사랑>은 그 맹목적인 사랑의 끝을 향해서 단순무식하게 돌진해나가는 ‘순정영화’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오면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다. “몬테네그로의 민담에서 악의 근원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은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며, 모든 것에 편파성의 색조를 입힌다.”

여기서도 떠오르는 영화는 몬테네그로 영화가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 <말레나>(2000)이다. ‘세기의 미녀’라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말레나는 마을에서 모든 남성의 시선 끌어 모으는, 그럼으로써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는” 여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2차 대전이 한창인, 햇빛 찬란한 지중해의 작은 마을. 이 마을의 매혹적인 여인 말레나가 걸어갈 때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그녀를 훑어 내리고 여자들은 시기하여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레나토는 그녀를 연모하는 열세 살의 순수한 소년이다. 남편의 전사소식과 함께 말레나는 욕망과 질투, 분노의 대상이 된다. 남자들은 아내를 두려워해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고, 여자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모함한다. 결국 사람들은 독일군에게까지 웃음을 팔아야 했던 말레나를 단죄하고 그녀는 늦은 밤에 쫓기듯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 레나토만이 진실을 간직한 채 마지막 모습을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1년 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말레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 그녀의 곁엔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불구가 되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도 근원적인 폭력은 말레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 이전에 말레나를 무자비하게 탈맥락화함으로써 ‘숭고한 대상’의 지위로까지 고양시키는, 소년-레나토의 순수한 연모의 시선에 자리한다. 이러한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 

10.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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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7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7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G.Ego 2010-09-17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카 벨루치와 박시연! 오! 이런 누나들이 옆집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벨루치 누나는 이제 나이가 꽤 드셨겠군요.

로쟈 2010-09-20 08:44   좋아요 0 | URL
네, 그나마 덜 끔찍해졌지요.^^;
 

자작시집이라고 펴낸 것 중에서 <생의 바깥에서>(1995)라는 게 있는데, 눈에 띄기에 뒤적여보다가 하나 옮겨놓는다.   

내겐 너무 뻑뻑한 詩 

그에겐 뻑뻑한 속주머니가 있어 
뻑뻑한 건 주머니가 아니고 뻑뻑한 건 
주머니와 손의 관계이지만 관계를 
이루는 방법이지만 그에겐 
손가락 두 개가 겨우 들어갈 만한
속주머니가 있어 뻑뻑한 아주 은밀한 주머니야 
알겠어, 손가락 두 개란 말씀이야
속주머니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건 바로 
속주머니의 마음속에 꾸역꾸역 머리를 찔러넣는
마음 아프게 하는 손가락이지만 말씀이야
어찌 알았겠냐는 말씀이야 
속주머니, 그 작은 새장에서
노래하는 새들을 말씀이야 뒷짐지고
노래하는 착한 새들을 말씀이야
도대체 
어찌 알았겠냐는 말씀이야
뻑뻑한 속주머니의 뻑뻑하지
않은 속사정을 말씀이야 
속마음을 말씀이야 

그 손가락 두 개인 거란 말씀이야
바로 詩란 말씀이야 

  

10. 09. 15. 

P.S. 아침에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지난달에 마지막으로 뵙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소식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여러 일정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는 건 내일로 미뤄졌다. 지상을 떠난 사람들 생각을 잠시 하다가 <생의 바깥에서>의 발문을 쓴 친구도 떠올렸다. 발문의 끄트머리쯤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저 유희이고, 말장난이고, 거짓말이고, 엄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구에도 진실이 있듯, 쾌락전후에도 고통이, 농담 뒤에는 진담이, 엄살 속에는 아픔이 존재한다. 그의 웃는 모습 속에는 분명히 그런 아픔들이 있을 것이다(요즈음은 능청스러워진 것인지 멍청해진 것인지, 내 눈에 그런 것들이 거의 안 보인다). 그러나 웃음과 즐거움이 너무 두드러져, 다른 것들이 잘 안 보인다. 밖으로 도는 웃음이, 확산되고 스며드는 웃음이 된다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의 웃음은 경계허물기의 웃음이 되어, 삶의 너머로 날아오르고 영혼 깊은 곳으로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흠, 요즘도 능청스러워졌거나 멍청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어떤가, 친구, 그런가?.. 

P.S.2. 시집의 표제작인 '생의 바깥에서'는 옮겨놓은 줄 알았더니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모스크바 통신'에만 올려놓았던 모양이다. <생의 바깥에서>라는 건 내 기억에 테러조직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한 기자의 며칠간을 다룬 프랑스 영화의 제목이다. 그와 무관하게 제목만 빌려서 내가 오래 전에 쓴 시는 이렇다. 

나는 잘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못 이룬 부활의 꿈을 되새김한다.
생의 껍질을 깨고 생의 바깥으로 튀어나온 노른자위가 내지르는 저
맛좋은 소리여, 기름이 튀는 소리여, 아으 생색내는 소리여!

언젠가 나도, 맛있는 프라이가 될 날이, 생의 바깥에서
그대의, 아으 그대의 품안에서 눈물이 기름처럼 튀어오를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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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5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15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거운 발걸음을 하셔야겠군요.
시에 대한 감상을 몇 자 적어보려 했는데
부음을 들으셨다는 글에 멈칫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로쟈 2010-09-15 23:36   좋아요 0 | URL
고통 속에서 계속 사셨더라도 마음이 편친 않았을 거 같아요. 무병장수는 다들 기원하지만 이루긴 어렵죠...

미지 2010-09-1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의 바깥에서>.. 참 좋은데요.^^

로쟈 2010-09-16 09:01   좋아요 0 | URL
^^

반딧불이 2010-09-1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로쟈 2010-09-16 23: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lo초우ve 2010-09-1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비가 오는군요.. ㅠㅠ

사람은 언제나 늘 왔다가 가는거자나요

명복을 빕니다...

로쟈님 힘 내세요..

로쟈 2010-09-16 23: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1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1회를 발췌해놓는다. 원고가 밀려 있어서 오늘 아침까지 헉헉대며 쓴 것이다. 내주엔 한 주 쉴 예정이어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아니, 트이기를 바래본다.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라”라는 주장과 함께 지난 회에 다룬 건 신체 자해자들이나 <피아니스트>의 여주인공의 ‘실재에 대한 열정’이 피하고자 한 것이 비현실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재 자체라는 지젝의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이 ‘실재의 열망’, ‘실재에 대한 열정’은 거부되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면 마지막까지 가기를 거부하는 태도, “외양들(appearances)을 보존하자”는 태도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실재의 열망’이 던졌던 문제는 그것이 실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단지 가짜의 열망이었다는 데 있고, 이 가짜의 열망이 외양들 배후에서 무지막지하게 실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그런 노력은 실재와 마주치기를 회피하려는 궁극적 전략이었다는 데 있다.(<탈이데올로기>, 23쪽; <실재계 사막>, 61쪽)

 

어떻게? 이번에는 프란시스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 감독판 2000)을 예로 들어보자. 지젝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친숙한 예이기도 할 텐데, 영화 속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주인공 커츠(쿠르츠) 대령은 “프로이트적 의미의 ‘원초적 아버지’에 해당하고, 어떠한 상징적 법에도 종속되지 않은 외설적 향락의 아버지, 소름끼치는 향락의 실재와 직접 대면하려고 나서는 절대적 주인을 대신한다.”(<탈이데올로기>, 27쪽; <실재계 사막>, 65쪽) 중요한 것은 그가 야만적인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서구 권력 자체의 필연적인 결과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커츠는 완벽한 군인이었지만 군 권력체계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했고 결국은 체계가 제거해야 할 과잉이 되었다. “이 영화의 궁극적 지평은 권력이 그 자신의 고유한 과도 잉여를 낳고, 자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를 모방해야 하는 작전을 통해 이 잉여를 없애야만 하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다.” 즉 여기서 문제는 체계로부터의 병리적 일탈이 아니라 체계 자체가 필연적으로 생산해내는 과잉이다. 윌라드는 커츠를 제거하는 비밀작전에 투입이 되는데, 그의 임무는 공식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전을 지시하는 장군의 말대로 “그것은 결코 없던 일이다.”  

(...)

<지옥의 묵시록>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은 그 계통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집단적인 정치활동의 전망이 되는데, 그 계통은 그의 초자아 과잉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엔 그것을 완전 제거하도록 강요된다. 더 이상 초자아의 외설성에 의지하지 않는 혁명적인 폭력이다. 이런 ‘불가능한’ 행동은 진정한 모든 혁명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66쪽)

이 대목은 다소 부정확하게 번역됐는데, 첫 문장은 “What remains outside the horizon of Apocalypse Now is the perspective of a collective political act breaking out of this vicious cycle of the System which generates its superego excess and is then compelled to annihilate it”을 옮긴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지평 바깥에 있는 것, 그러니까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은 정치적 집단행동이란 전망인데, 이 정치적 행위란 체계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는’ 것이다. 체계의 악순환이란 이미 예시된 대로 체계가 그 자체의 과잉으로서 커츠와 같은 ‘초자아적 과잉’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제거해야만 하는 악순환을 가리킨다. 혁명적 폭력은 더 이상 그러한 초자아적 외설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가능한’ 행위, ‘불가능해 보이는’ 행위가 모든 진정한 혁명적 과정의 표지가 된다.  

그러한 행위를 회피한다면 ‘실재에 대한 열정’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다. 그리고 그 핵심은 권력의 더럽고 외설적인 이면과의 동일시이다. 그 동일시는 영웅적 수임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그것은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놔두자!”(<실재계 사막>, 70쪽)가 아니라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 하자!”(Somebody has to do the dirty work, so let's do it!)는 태도다. 이것은 “그래 내가 책임진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적 태도의 뒤집힌 거울상이다(“우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아요”라는 말에서 나는 가끔 ‘아름다운 영혼’을 느낀다). 우리가 우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세가 또한 그러한 ‘영웅적’ 태도에 대한 찬양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국가를 위해 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이다, 라는 논리가 그러한 찬양에는 깔려 있다.  

지젝이 실제로 거론하고 있진 않지만 그가 사례 목록에는 1980년대 이란 콘트라 사건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반군 콘트라를 지원한 스캔들이다. 이 사건에 대한 의회 청문회에서 작전의 ‘악역’을 맡았던 올리버 노스 중령이 당당하게 국가를 위한 자신의 애국심과 신념을 밝혀서 ‘영웅’으로 부상하기도 했었다.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변호였다. 레이건에서 노스가 있었다면, 히틀러에겐 히믈러가 있었다. 이건 지젝이 직접 들고 있는 사례인데, 히믈러는 1943년 10월 4일 포젠에서 SS 지휘자들에 대한 연설을 통해 유대인 대량학살이 “우리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이자 결코 씌어진 적도 결코 씌어질 수도 없는 한 페이지”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물음과 직면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서도 전적으로 명쾌한 해결책을 찾기로 했습니다. 나는 남자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그들을 죽이거나 죽이도록 한 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나중에 우리의 아이와 손자들에게 복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SS 지휘자들은 히틀러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히틀러는 전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최종 해결책’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히믈러가 ‘총대’를 맨 터라 그들 간에 공유된 음모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독일 국민 전체는 이것이 사활이 달린 문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후방의 다리는 파괴되었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지젝은 실재에 대한 ‘반동적인’ 열정과 ‘진보적인’ 열정을 이론적으로는 대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반동적’ 열정이 법의 외설적 이면에 대한 보증․배서라면, ‘진보적’ 열정은 (‘정화에 대한 열정’에 의해 부인된) 적대라는 실재와의 대면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실재(계)는 적대를 도입하는 과잉적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접촉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서 지젝은 실재를 우리가 직접 대면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terrifying Thing)’로 보는 표준적인 비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인 실재는 상상적인 베일이나 상징적인 베일에 감춰진 어떤 것이 아니다. 기만적인 외관 밑에 우리가 직접 쳐다보기엔 너무나 두려운 ‘궁극적 실재라는 괴물(ultimate Real Thing)’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궁극적인 외관(ultimate appearance)이다. 이 실재라는 괴물은 그 존재를 통해서, 혹은 존재한다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상징적 세계의 일관성을 보장해주는 한편, 그 구성적 비일관성(적대)과의 대면은 회피하게 해주는 환영적 유령(허깨비)일 뿐이다.  

(...) 

10.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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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4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5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말과 휴일에 연이어 강연행사에 다녀왔더니 '정신력'이 바닥이다. 써야 했던 원고들이 고스란히 밀렸으니 내주, 아니 당장 오늘 일정이 빡빡해졌다. 혼미한 틈에도 눈에 띄는 기사가 있어서 일단은 스크랩해놓는다. 시 번역에 관한 것인데, 최정례 시인이 자신의 시 영어 번역에 참여한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기억엔 김광규 시인의 경우에도 자신의 시 독일어 번역에 참여했던 듯싶다(시인 자신이 독문학자이다). 이런 경험들을 모아놓아도 번역뿐 아니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가 되지않을까 싶다. 

경향신문(10. 09. 13) “시 번역, 장벽 넘기 어려워… 원작자가 직접 참여 중요”   

“문학작품 창작자가 번역에 직접 참여하면 오역을 피할 가능성이 높겠죠. 특히 낯선 외국어의 표현과 어휘를 접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영감, 창조적 역량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시는 번역되는 순간 원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흔히들 말한다. 국내에 번역돼 출간되는 숱한 해외 문학작품들 가운데 시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최정례 시인(55)은 시 번역에 존재하는 까다로운 장벽을 넘기 위해 원작자가 직접 번역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2008년 말부터 지난해 말까지 1년간 미국 버클리대학에 방문학자 자격으로 머문 최 시인은 미국 시인 브렌다 힐먼(세인트매리대 교수)과 함께 직접 자신의 시 53편을 영어로 공동 번역했다. 미국 시 전문 저널 ‘프리 버스(Free Verse)’에 최 시인의 시 ‘보푸라기들(Motes)’ ‘한 오천 살은 먹은 내 마음이(The Five-thousand-Year-Old Heart I’ve Swallowed)’ ‘없는 나무(The Absent Tree)’ 등 9편이 번역돼 실렸다. 최 시인의 시선집도 출판사 ‘팔로프레스(Parlo Press)’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 <레바논 감정> <붉은 수수밭> 등의 시집을 통해 밀도 높은 시어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시편들을 선보인 최 시인은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받았다.

한국 시인과 미국 시인이 공동으로 직접 자신의 시를 번역하기는 최 시인이 처음이다. 초벌 번역은 한국문학을 전공한 웨인 드 프레메르(Wayne de Fremere)가 맡았고, 최 시인과 힐먼이 원작의 의미를 해치는 표현을 바로잡고 영문 시 형식에 맞도록 가다듬었다. 최 시인은 “양국의 작가가 원작자이자 동시에 번역자의 역할을 했다”며 “공동 번역은 번역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들을 섬세하게 처리해 번역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번역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로 주어의 명확화, 상투적 시어의 번역, 관용어구의 번역, 잠재적 의미의 파괴 등을 꼽았다. 한국 시의 경우 주어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영시의 경우 구조상 주어가 없으면 문장 구성이 불가능해진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최 시인은 “번역이 불가피하게 변형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생략된 주어를 찾아 새롭게 지시함으로써 모호했던 원전의 의미와 감정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고 밝혔다. 또 ‘숲’이란 시의 ‘아름다운’을 영어로 번역할 때 ‘beautiful’이란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라는 조언에 따라 ‘ultimate’ ‘ideal beauty’로 번역하기도 했다. 

“영어로 번역했을 경우 원본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들이 있어 신비하게 느껴졌어요. ‘한 오천 살은 먹은 내 마음이’의 경우 영어로 번역하고 나니 오히려 더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미국에는 김소월·김지하·고은 등 몇몇 한국 시인들의 시가 번역돼 있지만 미국인들에게 잘 읽히지는 않는 상황이다. 최 시인은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경우 해외의 현대 시와 감각이 통하기 때문에 잘 번역될 수 있다면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고 말했다.(이영경기자)  

10. 09. 13.

 

P.S. 잘 읽히지 않는다는 번역이지만, 한국 시의 영역본은 국내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답게 한국문학총서'로 10권이 출간돼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2-3권 갖고 있는 시리즈이고, 아예 이 번역시를 대상으로 한 시 비평을 고려해보기도 했었다. 나중에라도 좀 여유가 생기면 손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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