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지난주는 외부 일정이 가장 많은 주였는데(목요일 하루만 일정이 없었다), 국내외적으로도 사건/사고가 많았다. 화요일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대표적이다. 관련 칼럼을 뒤늦게 읽고서 오래만에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기록'으로서의 의미도 가질 수 있을 듯해서다.  

  

경향신문(10. 11. 27) [이택광의 왜?]“잃어버린 10년” 주장 우파들의 위기관리 

이례적인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동북아지역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남북관계’에 집착해서 비인도적인 북한의 만행에 초점을 맞춰 연일 지면을 장식하고 있지만, 상황은 이보다도 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런 주장들을 경청해보면, 결론은 뻔하다. 모든 잘못이 북한에 있기 때문에 정당한 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과연 지금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동북아 정세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북한에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보수언론들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북한은 ‘원래’ 이런 집단이고 ‘본성’이 호전적인 전쟁광들이 아닌가. 그런데 연평도 포격을 놓고 새삼스럽게 북한 응징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이 발발했을 때, 외신들이 차분하게 남북 상황에 비추어 둘 다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혹시 모를 우발적인 실수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의 대표 보수신문이라는 한 일간지는 “대한민국이 공격당했다”는 선정적인 제호를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한반도의 긴장 고조를 우려하는 사회구성원과 주변국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런 행동은 역시나 주변국의 이해관계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북한의 맹동주의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이처럼 남북의 권력집단은 서로 만나면 으르렁거리지만 사실은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두 북한 탓”이라는 도덕적 결론만을 되풀이 선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 논리는 정확하게 북한의 것과 같은 것이다. 민간인을 살상한 뒤에도 사과 한 마디 없이 오직 모든 것이 “남한 탓”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의 억지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역이다. 평소 자유를 수호하고 인권을 중시한다는 한국의 보수언론들에서 똑 같은 논리를 되풀이해서 듣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북한 문제를 ‘국익’ 차원에서 풀어가는 것이지 선전선동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한국 사회의 기획에서 ‘상수’이지 ‘변수’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북한은 항시적 ‘위기’인 것이고, 따라서 국가위기관리의 차원에서 북한 문제를 풀어가는 합리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이번 연평도 사건으로 도마에 오른 것은 이른바 우파들의 대북정책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햇볕정책을 “퍼주기”라고 비판하며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던 우파들의 노선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건이 터진 이후에 우파들이 보여준 태도나 행동은 실망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북한을 비난하는 선동적 발언이나 쏟아냈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연평도 주민들이 인천항으로 대피했지만, 수용시설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이처럼 허술한 대처 상황을 보고 있으면 우파들이 목청을 높이는 “안보의식 해이”의 원인이 국민들 탓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연평도 사건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진단이 나올 수 있지만, 실제로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런 위기상황을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며 과거 정권의 정책을 ‘좌편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집권했으면 그 주장에 합당한 실력을 우파들은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에 대처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들도 똑같이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 빼고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뿐이다.(이택광_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경향신문(10. 11.27) [2030 콘서트]비둘기와 매의 시간

군인 두 명 전사와 민간인 두 명 사망이라는 참혹한 비극 앞에서 비둘기파와 매파가 싸운다. 매는 말한다. 햇볕정책이 김정일 정권에 핵을 쥐어주고 정권 붕괴를 지연시키면서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둘기는 말한다. 최근의 강경책이 북한 군부 강경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하게 하여 이런 일이 생겨났다고

양쪽 논리는 평행선이다. 매는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면 줄수록 북한의 도발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비둘기는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굴복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대적하면 대적할수록 북한의 도발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매는 문제점을 지적당하면 ‘그러므로 더 강경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비둘기도 문제점을 지적당하면 ‘그러므로 더욱 퍼줘야 한다’고 한다. 이 일관된 두 세계관은 주어진 모든 정보를 저 좋은 대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양립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나 반목한다.

여기서 지워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이다. 양쪽 모두 우리의 행동이 북한을 무리 없이 바꾸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유권자들이 북한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압록강까지 도달하는 것이나, 굶주린 북한 주민들에게 쌀을 건네주는 인륜적 행위에 사실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다만 한국 사회가 일구어낸 알량한 부가 어떤 무력에 의해 위협당하는 상황을 원치 않을 뿐이다. 그래서 비둘기와 매는 똑같이 유권자들에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한다. 그들은 상황을 관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리해야만 하니까. 그러므로 사건이 터지면, 그건 우리 사회가 상대편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서로 믿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갑론을박의 형식이 이렇다.

물론 찬찬히 따져보면 쌍방의 주장은 모두 오류다. 비둘기는 햇볕정책이 북한을 항시적인 군사도발을 요하는 체제에서 이탈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햇볕정책 10년 동안 그런 변화는 조금 진행되는 듯하다가 사라졌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미국이 보조를 맞췄다면 훨씬 나았을 거란 가정도 있지만,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다. 오히려 햇볕정책이 지속됐더라도 북한에 3대 승계를 위한 어떤 도발이 필요했을 거란 예측이 더 의미있다.

매는 강경책이 북한 정권의 전투성을 거세하거나 그것이 거세된 다른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선 국지전, 전면전, 체제의 전면붕괴로 인한 혼란 등이 리스크로 발생한다. 매의 전략은 성공할 길이 있다 하더라도 아찔한 줄타기의 길이다. 그렇다고 비둘기가 의기양양해야 할 이유도 없다. 비둘기의 노력과정에서도 도발과 국지전에 대한 리스크는 존재하고, 그런 북한에 실망한 우리가 매파로 이동할 경우 문제는 고스란히 반복될 테니까. ‘적화통일’의 가능성은 매의 소심증으로 취급하더라도 그렇다.

오늘의 비둘기는 매를 공격하기 위해 매파 정권의 안보무능력을 열심히 질타한다. 비둘기나 매나 북한만 욕해선 답이 없으니 정부를 욕한다. 그런데 매와 비둘기가 이렇게 합창하면 정권이 다음 도발상황에서 ‘확전’의 가능성을 무릅쓴 보복전의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비둘기의 정부 비판은 자기파괴적이다. 비둘기도 매도 옳지 않지만, 우리에겐 둘 이외에 다른 방도도 없다. 쌍방 모두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북한을 직시하는 것이 논의의 출발점이리라. 하나의 시대가 어스름하게 저무는 시간, 비둘기와 매의 구별이 안 가는 시간, 비둘기와 매의 시간이 왔다.(한윤형_자유기고가) 

10.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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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11-29 18:08   좋아요 0 | URL
한윤형씨의 양비론은 참으로 무책임하게 보이는 군요. 비둘기의 노력과정에서 일어나는 도발/국지전과 매파의 결과 일어날 수 있는 전면전을 동일시하는 그 사고구조가 참 기이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택광 교수의 컬럼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인질범이 인질극을 벌이는 경우 그 인질범이 나쁜 놈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인질범에게서 인질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수우파의 경우 아무 대책없이 인질범이 나쁜놈이고 잡아죽여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자꾸때리다 2010-11-29 18:52   좋아요 0 | URL
그냥 답이 없는 것 같아요. 햇볕정책이 북한을 바꿀 거라고 믿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똘아이는 마구 때려도 똘아이 짓하고 사탕발림을 해도 똘아이 짓하잖아요. 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위치를 휘청이게 할 수 있는 변화 자체를 싫어하니까요.

lo초우ve 2010-11-29 22:26   좋아요 0 | URL
철사는 적당히 휘어졌을때 바로 잡으면 반듯하게 잡히지만,
완전히 접혀졌다가 다시 피려면 모진 망치질과 담금질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휘어졌다가 펴논 철사는 그 흔적이 남습니다.
과연 우리가 남북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정책하에 살아왔던 국민들은
정말 빠른시간내에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 지금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같은 민족끼리 어우러지지 못하는 그런 단점을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민족이 서로 선을 긋고 아옹다옹 하던 그 국가들이
이제는 서로 통일이 되어 한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독과 동독이 그러하듯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통일이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베르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휴전선은 이제 없어져야 된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나는 전후 세대이지만
우리 선조의 역사를 보면 남북이 합쳐져 고구려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원래는 하나였는데, 지금은 휴전선이라는 선을 그어놓고 그렇게 살아가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넘에 이데오르기 때문에 지금은 북한은 권좌에 있는 최고 통치권자와 남한은 현재 무능력한 정치인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통일을 못하고 있다고 생가합니다.
연평도 폭격을 가지고 우리가 이 일을 논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이견일뿐입니다.
그리고 정치권의 이기심과 자리지킴을 배제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 국민들은
늘 이러한 토론에 을박양논을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11-30 08:10   좋아요 0 | URL
http://yfrog.com/juwhw0j
 

'이주의 관심도서' 리스트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웅진지식하우스, 2010)와 함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려주는 또 다른 책은 마크 뷰캐넌의 <사회적 원자>(사이언스북스, 2010)다. 이른바 '사회물리학' 입문서로도 읽을 수 있는 책인데, 관련서로는 필립 볼의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까치, 2008)가 있다. 일간지 리뷰 가운데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매일경제의 소개는 책의 서문을 정리해주고 있고, 중앙일보는 전문가 리뷰를 싣고 있다.  

  

매일경제(10. 11. 27) 사회속에 숨어있는 물리학법칙 찾아라

1970년대 미국 대도시에서는 흑인과 백인의 거주 지역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었다. 흑인들은 도심 지역에 고립된 채 빈곤에 허덕였고, 백인들은 부유한 교외에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인종 분리가 인종차별주의의 영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토머스 셸링은 이 문제의 원인이 '차별'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셸링의 연구 결과 다른 인종과 잘 섞여지내는 사람들도 자신이 외로운 원자로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주지를 옮기고 있었다. 차별이 아닌 다른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이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인종 분리의 이면에는 개개인 생각보다 더 강력한 어떤 힘이 작용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의 연구는 특이한 방법으로 진행됐다. 우선 그는 체스판에 흰 동전과 검은 동전을 무작위로 배열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종주의자여서 이웃에 다른 인종이 하나라도 있으면 이사를 한다'는 규칙 하에 동전들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때는 당연히 인종간 분리가 아주 빠르게 일어났다.

그는 다시 흰 동전과 검은 동전을 무작위로 배열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람들은 다른 인종들과 잘 어울리지만, 주변에 다른 인종만 가득한 곳에서 혼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규칙을 세웠다. 실험 결과 이번에도 동전들이 완전히 흑과 백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1년 발표된 이 논문은 '사회 전체의 결과는 특정한 사람들의 욕망이나 의도, 습관이나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인간 세계에는 구성원의 심리보다 더 강력한 어떤 '법칙'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사회적 원자'는 사회를 하나의 물체로, 인간은 그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원자로 이해하면서 배후에 숨어 있는 패턴이나 수학적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저자는 과학 학술지 네이처 편집자로 일한 바 있는 이론 물리학자 마크 뷰캐넌. 그는 인종주의, 민족 학살, 주식시장의 주가 변동, 헛소문과 루머의 확산 등 온갖 사회 과학적 사례를 물리학적인 방법으로 깔끔하게 설명해 낸다.

인간 세상에는 철학, 인문학, 사회학, 경제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뷰캐넌의 '사회적 원자'는 여기에 '과학'이라는 또 다른 렌즈를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정아영 기자)   

중앙일보(10. 11 27) 사회 물리학 … 모방·적응·기회주의자 …

신간 『사회적 원자(The Social Atom)』는 인간과 사회의 근원적 문제를 마치 자연을 이해하듯 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최근 새롭게 뜨고 있는 ‘사회 물리학(social physics)’의 야심찬 도전을 소개하고 있다. 사회 물리학은 사회를 하나의 물체로, 그리고 인간을 그 사회를 이루는 ‘원자’로 이해하려는 학제간 연구 분야이다. 부의 불평등, 인종분리, 금융 시장의 등락 등 전통적 사회과학이 못푼 인간 사회의 문제를 물리학 방법론으로 대신 풀어보겠다는 시도다.

이론물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인 저자 마크 뷰캐넌은 이 책을 “부, 권력과 정치, 계급 사이의 증오, 인종 분리에 대한 책”이라고 정의한다. 인간 사회의 문제가 복잡한 이유를 인간 자체의 복잡성에서 찾는 기존의 사회과학적 관점을 저자는 거부한다. 자연과 인간세계에 대한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은 그리 복잡하지도 자연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특히 집단행동의 경우 자연과 인간을 구분짓는 기존의 관점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물리학의 연원은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의 대도시에서 흑백 인종분리가 큰 문제로 대두됐다. 당연히 인종주의 탓으로 돌려지곤 했다. 그런데 1971년 하버드대 경제학자 토머스 셀링은 ‘극단적인 소수를 꺼리는 성향’을 규칙화하여 체스판 위에 인공 사회를 구현해 보았다. 그 결과 아무도 바라지 않더라도 잘 섞여있던 사회가, 마치 물과 기름이 분리되듯이, 인종분리로 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체스게임은 사회 집단이 각 개인의 욕망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흘러갈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로 줄곧 인용된다. 2005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셀링의 선구적 연구 이후 주가의 등락, 교통의 흐름, 패션의 유행, 집단적 히스테리 등 사회과학의 고전적 주제들을 인간의 집단 행동을 통해 설명하려는 사회물리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마크 뷰캐넌은 “인간은 부화뇌동하는 동물이다. 펭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정보가 부족하면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한다. 펭귄들이 한 마리가 먼저 들어가 아무 일 없으면 그때서야 물에 몸을 던지듯이. 인간은 과연 펭귄과 얼마나 같고 다른가, 『사회적 원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저자는 물질 세계의 원자가 작동하는 방식과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사는 방식이 서로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원자는 어떤 합리적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지만 정교한 열역학의 법칙을 만들어 낸다. 인간도 각자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총합인 사회의 집단적 행동은 예측이 가능하다고 했다.

저자는 인간 사회에서 집단을 움직이는 패턴 혹은 법칙을 찾아내려 시도한다. 한 원자가 다른 원자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인간은 분명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집단 속에서 그리 자유롭지만은 않다. 저자가 볼 때, 인간은 마치 펭귄과 같이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를 모방하고, 적응하며 산다.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인 계산기가 아니다. 상황에 적응하는 기회주의자이다.”

물론, 인간의 행동과 마음을 완벽하게 기술하는 물리 방정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저자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다”는 불가지론적 인간과학 관점이나 “인간은 합리적 선택 가설에 근거한 이성적인 존재”로 보는 고전경제학과 출발점을 달리한다. 자연 현상을 잘 설명해낸 자연 과학의 방법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인간 사회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안한다.

책에는 복잡계 이론, 네트워크과학, 신경 과학, 행동 경제학, 진화 심리학 등 최신 과학 방법론도 소개된다.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어려운 수학이나 과학 전문지식이 없이도 인간과 사회 집단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앞으로 사회물리학이 펼쳐갈 미래가 어떤 모습을 가질 지, 과연 인간 사회의 고질적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김승환 포항공대 교수_물리학) 

10.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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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정리하다가 몇주 전 교수신문의 기사가 눈에 띄기에 일부를 옮겨놓는다. 한국의 푸코 수용사에 대해 점검하고 있는 학술대회 발표문의 요약이다. 전공자가 바라보는 푸코 수용사의 오해와 과제가 무엇인지 정리해볼 수 있다. 발표자는 '푸코의 근대성'에 관한 연구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받은 허경 박사이다. 들뢰즈의 <푸코>(동문선, 2003)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교수신문(10. 11. 08) 푸코 번역이 가져온 한국 지식인 담론의 변화  

(...) 푸코의 한국적 수용사에서 또 하나 검토해야 할 부분은 국내외에 널리 펴져 있는 푸코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다. 우선, 푸코는 대부분 후기구조주의자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푸코 자신이 구조주의자라는 명칭을 강력히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이해는 매우 도식적이다. 이는 푸코의 사유를 광의의 의미로라도 ‘구조주의적’이라 칭할 수 있는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60년대 말까지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둘째, 주로 푸코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로서 바라보는 견해에 관련된 것으로, 이러한 이해는 대부분 푸코를 푸코 자신이 권력-지식론을 통해 폐기처분한 진리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또는 그람시와 같은 문제틀 안에서 자주 보이는 경우이다.

셋째,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오해는 푸코를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자신의 저작 혹은 대담에 걸쳐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스스로 근대와 근대성의 시기를 가장 중요시하는 사상가로서 그러한 문제틀을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서구인인 푸코에게 자신의 곧 서구의 현대란 서구의 근대 시기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탐구는 현대를 구성한 ‘현대의 零度’로서의 근대의 탐구를 필연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면에서 푸코에게 ‘근대’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 곧 오늘, 현대이며 따라서 푸코에게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란 하나의 사이비 문제로서 인식된다.

넷째, 하버마스를 필두로 한 헤겔주의적 이해가 있다. 이들은 푸코가 “합리주의 전통을 거부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푸코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푸코가 거부하는 것은 헤겔주의와-혹은 어떤 다른 이론과-합리성 자체를 동일시하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 이외의 다른 합리성은 없다는 독단적 합리성의 형식을 거부할 뿐이다. 푸코에게 있어서 합리성의 형식은 늘 복수와 다수성으로서만 존재하고 나타난다. 하버마스의 푸코 비판은 근본적으로 푸코가 헤겔주의적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수의 합리성 형식들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 곧 푸코가 헤겔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며, ‘근대’ 혹은 ‘계몽’에 대한 푸코의 입장에 대한 근본적 오해에 기반한 것이다.

수용 과정의 오해와 극복할 점들
다섯째, 좀 더 세부적인 것으로서, 푸코의 권력-지식론과 관련된 이해다. ‘지식은 어떻게 권력에 봉사했는지’, ‘문명의 역사는 결국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온 권력의 역사’라는 문제틀이다. 이는 사실상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관한 플라톤 이래 마르크스까지 이어지는 서구의 전통적 관점으로, 전통적인 자유-억압-해방의 이론틀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푸코의 권력-지식론은 이와 달리 “권력과 지식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분리불가능하게 서로를 구성했으며, 그것들 각각이 서로에 대해 미친 생산적 효과를 분석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권력에 관해 일반적으로 상정되는 이른바 억압-해방의 가설을 명백히 거부 혹은 제한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푸코 수용사의 과제 상황들은 무엇일까.
1) 푸코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번역본의 확립이 시급하다.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저술들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어림잡아 보아도 프랑스 현지 저술 분량 전체의 1/3도 되지 않는다. 여기에 번역의 질이라는 문제까지 더 해진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2) 푸코 사상의 균형 잡힌 이해가 요청된다. 이제까지의 푸코 이해는 사실상 ‘자신이 읽은 푸코에 한정된 이해’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혹은 푸코 전공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자신의 전공 혹은 지적 취향에 맞추어 ‘과학사가’, ‘문학비평가’, ‘권력과 지식의 철학자’, ‘고고학자’, ‘주체의 해석학자’ 등처럼 푸코의 일면을 전체인 것처럼 강조하거나, 혹은 강조점을 이동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 푸코가 사용한 개념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실상 앞의 두 가지 문제 상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부정확한 푸코 이해에 기반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시키는 경우이다. 이는 주로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으로 푸코의 주요 개념어에 관련된 저작 혹은 푸코 주요 개념어 사전의 발간, 그리고 이제까지 국내에서 저술되거나 번역된 푸코 관련 연구서ㆍ논문 등을 망라한 서지 및 일람표의 작성ㆍ발간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 자신이 유학한 국가 혹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국가의 일반적 연구 동향에 따르는 편향된 이해를 푸코에 대한 일반적 이해인 것처럼 당연시하는 오류의 경우가 있다. 각 연구자들은 그러한 이해가 편향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야 한다.

5)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푸코의 이론을 마치 마르크스의 지위를 대체하는 또 하나의 이론적 지주로서 신봉하거나 우상화하는 ‘식민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푸코는 결국 어떤 경우에도, 마치 이전 시대의 칸트나 헤겔, 마르크스 혹은 베버의 경우에처럼, 그 ‘오리엔탈리스트적 함의’를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한 명의 서구 사상가에 불과하고,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이용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허경_고려대 철학연구소)

■ 이 글은 2010년 1월 15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한국번역비평학회의 월례발표회,  동 학회 주최로 2010년 10월 9일 강원대에서 열린 학술대회 등에 제출한 논문들을 요약한 것이다.  

1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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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7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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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0-11-2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푸코까지도 관심 있으시군요..
 

'이주의 관심도서' 리스트를 만들어놓기로 한다. 건너뛸 때도 있겠지만, 매주 눈에 띄는 책 다섯 권씩을 골라놓을 참이다. 사실 어제 신간을 검색하다가 얼추 다섯 권 정도가 차기에 직접 구입도 하고 장바구니에 넣기도 했는데, 그 리스트이기도 하다. 주종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쪽이다. 그중 가장 평이하면서도 모두가 읽어볼 만한 책은 앨버트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웅진지식하우스, 2010)이다. 원제는 '반동의 수사학'으로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가 번역본의 부제다. 우석훈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허무주의야말로 가진 자들이 바라는 가장 강력한 대중적 경향이다. 부디 독자 여러분도 허시먼과 함께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날 첫 출발점을 찾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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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10년 11월 25일에 저장
절판
네그리의 제국 강의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10년 11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0년 11월 25일에 저장

코뮨주의- 공동성과 평등성의 존재론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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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원자- 세상만사를 명쾌하게 해명하는 사회 물리학의 세계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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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어제 오전에 쓴 것인데, '기본소득'에 관한 얘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칼럼은 '미친 존재감의 민주주의'에서 멈추었다. 요지는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함께 새로운 민주주의의 발명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참고한 책은 박홍규 교수의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필맥, 2005)와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2010)이다. 기본소득 문제를 다룬 <분배의 재구성>(나눔의집, 2010)도 조금 참고했지만 칼럼에 담지는 못했다.  

경향신문(10. 11. 23) [문화와 세상]‘미친 존재감’의 민주주의를 꿈꾼다

서양 민주주의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특히 아테네의 민주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건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실상은 어떠했을까?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식을 조금 보강할 필요가 있겠다. 일단 기본적인 정보를 나열하면 당시 아테네의 인구는 20만~25만명 정도였고, 시민으로서 권리를 인정받는 성인 남성은 약 3만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노예와 여성이 시민에서 배제된 까닭이다. 그래도 그 3만명은 매달 수차례, 매년 40회씩 광장에 모여 국정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결권을 행사했다. 물론 다 모인 건 아니어서 한 번에 5000~6000명 정도가 참여했고,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모였지만 출석 수당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의 ‘기원’이라면 우리는 그보다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을까?

어떤 기원이 모델로서의 의미도 갖는다면 노예와 여성을 배제한 아테네 방식을 ‘제한적’ 민주주의라고 평가절하할 수만은 없다. 거꾸로 그 ‘제한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제한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알다시피 민주주의의 대전제는 모든 시민 혹은 국민이 정치적 주권자로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민들 ‘사이의’ 평등이며, 모든 인간이 ‘시민’으로 인정받지는 않았다. 아테네의 경우에 노예와 여성은 생산활동과 가사노동을 전담해야 한다는 이유로 오직 성인 남성만이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차별의 정당성이 아니라 두 가지 활동의 병행이 어렵다는 인식이다.

가령 아테네에서 공무원이나 법관 같은 공직은 1년 임기의 추천제였다. 요즘 초등학교 일부 교실에서 반장을 돌아가면서 맡는 식이다. 그렇게 시민권을 가진 자는 누구나 공직자가 될 수 있었지만 무보수 명예직이어서 돈벌이가 되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럼에도 공직을 맡을 수 있었던 건 모든 시민이 어느 정도는 먹고살 만했기 때문이다.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공직을 사익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고, 시민으로서의 명예와 공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테네식 민주주의가 시사해 주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물적 토대’가 갖는 의의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의식’만 가지고 작동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노예적 삶으로부터 해방된 시민을 필요로 한다.

‘잉여’라고 자칭하는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가 만만치 않다. “민주주의가 되어도 내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내’가 참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민주주의’다. 마치 노예와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테네 민주주의처럼 말이다. 구조적인 취업난 속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다수의 청춘들이 “우린 아직 인간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들의 모습을 담은 책 제목을 빌리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항변한다. 물론 ‘비인간’으로 내쫓기는 것은 청춘들만이 아니다. 우리시대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시민’의 삶이 아닌 ‘난민’의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틀어막고 정치적·제도적 공간에서 배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쩌면 그리스의 제한적 민주주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시민과 비시민을 분할하는 민주주의 말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혹 모든 구성원을 주권자 시민으로서 포함하고 대우하는 민주주의를 우리는 새로 발명할 수 있을까? 유행하는 말로 ‘미친 존재감’을 자랑할 만한 민주주의를 잠시 꿈꾼다

10.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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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국식 민주주의가 옳은 길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2-19 09:26 
    어제 '뒷북성'으로 발견한 책은 왕사오광의 <민주사강>(에버리치홀딩스, 2010)이다. 서구식 민주주의,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를 비판한 책으로 경제대국 중국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책으로 소개됐는데, 사실 저자의 민주주의 비판은 '상식'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가라타니 고진이나 지젝의 민주주의 비판도 맥락을 같이한다). 민주주의를 사라지게 만드는 현재의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
 
 
2010-11-25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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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5 1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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