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293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자음과모음, 2011)에 대한 독후감을 간단히 적었다. 굉장히 많은 문제를 사유하고 변주하면서 제시하는 이 '악보'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머릿속에서 독자 스스로가 연주하고 감상해야 하는 이중의 역할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이 쓰여지고 쓰여져야 할 테지만, 그냥 개인적인 생각 '한 자락'을 펼쳐놓는 데 그쳤다. 

   

기획회의(11. 04. 05) 사유의 불협화음을 연주하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아니 하나의 악보가 있다(이건 ‘악보’에 대한 서평인가?). <사유의 악보>라고 적혀 있으니까. 실제로 표지에도 악보가 그려져 있고 본문에도 몇 개의 악보가 들어가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악보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것만 믿고 덤벼들었지만 책은 악보만큼이나 유혹적이면서도 동시에 난해하다. 어쩌면 이 책은 독서를 위한 책이 아니라 연주를 위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서곡과 종곡을 제외하고 13개의 악장과 8개의 변주로 구성된 이 ‘악보’를 제대로 읽는 일은 9번째 변주곡을 쓰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작곡에 재주가 없는 나로선 변죽만 울리는 서평에 만족하려 한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책장을 열고 서곡부터 ‘들어볼’ 것이다. 저자는 “모두를 위한,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하나의 책”이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를 인용하면서 ‘모두’를 위한 책이 아니라 ‘소수의 단수들을 위한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런 엄포도 보탰다. “이 글들은 결코 어떤 설득이나 해명을 위해 작성되지 않았다. 이 글들은 확신을 가진 이들만을 위한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한낱 불가해한 종이 뭉치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서 ‘확신’은 ‘불가능성’과 함께 하며, ‘불가해’는 ‘불확정성’과 짝을 이룬다는 보충설명이 따른다. 불가능성이냐 불확정성이냐의 선택을 촉구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의 가장 진정한 의도이자 가장 불순한 의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도인지 어림하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또 이렇게 적었다. “하나의 책은 준비된 자에게만 허락되며, 그렇게 ‘준비’되기 전에 하나의 책은 단순히 휴지 조각들일 뿐이다.” 이런 건 뭐랄까, 사르트르가 랭보의 시구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에 붙인 주석과 비슷하지 않을까. “오오 계절이여! 오오 성(城 )이여!/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란 ‘희한한 시구’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적었다. “여기에서는 누가 질문을 받는 것도 질문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물음은 대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물음이 그 자체의 대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보통 ‘확신’이나 ‘준비’는 단독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수식어로 갖는다. 하지만 저자는 ‘확신을 가진 이들’과 ‘준비된 자’라고만 적었다. 무엇에 대한 확신이고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건 암묵적인 것이다. 책에서 자주 반복되는 ‘저’라는 지시 형용사는 그런 암묵적인 맥락과 공유된 전제들의 지표라 할만하다(저자는 ‘첫 문장’이란 말 대신에 ‘저 첫 문장’이라고 적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란 말 대신에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쓴다. 아마도 이 책은 그 ‘저’가 가장 많이 출몰하는 책일 것이다). 누가 공유하는? ‘소수의 단수들’이 공유하는. 저들만의 코드표 혹은 난수표!

물론 맥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가 ‘절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라는 ‘확신’, 그 확신을 당신도 공유하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이 절멸의 문제를 마주할 자신이 있는가?”라고. 그렇다면 ‘준비’는? “그렇다면 당신은 ‘혁명’을 사유할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혁명의 준비, 혁명을 사유할 준비이다. 하지만 이 절멸과 혁명에 대한 사유는 어렵고도 어렵다.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우리는 그 절멸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혹은 그보다 더, 절멸의 이전과 이후를, 사유해야 한다. 이것은 이론 이후를 사유하는 것, 그리고 또한 사유 이후를 실천화하는 것, 따라서 실천 이후를 이론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제와 그것이 안고 있는 근본적 아포리아를 한마디로 이론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라고 저자는 정리한다. ‘사유의 악보’ 그리기는 이 불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시도이다. 그 ‘불가능한’ 시도를 통해서, ‘사유의 불협화음’을 통해서 그는 ‘기형의 맹아’와 ‘잡종의 지식’, 그 ‘난잡한 씨앗’을 흩뿌리고자 한다. 그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 이상으로 기형적이고 잡종적이며 난잡한 글쓰기가 창궐하는 데에서!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독자’로서 내가 서곡을 들으며 느낀 점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전문가 리뷰’라는 간판을 걸고 있으니, 전문가 흉내도 좀 내야 하는 처지다. 그래서 결어와 각주의 형식으로 조금 덧붙인다. 저자의 서평관에 대한 주석이다. 사실 ‘인문학 서평을 위한 몇 개의 강령들’(<기획회의>에 수록됐던 글이다)까지 적어놓은 책에 대해 서평을 붙인다는 것은 좀 곤혹스러운 일이다. 기자들이 쓰는 서평은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일갈하고서 저자는 ‘전문가들의 서평’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잊지 않는다. 책을 통독하고 정독할 가능성은 높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객관적이지도 그리 문제적이지도 않을 수 있으며 “전문가의 시각은 그 자신의 전공에 대한 치밀한 논리와 정치한 소개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대중의 필요 혹은 대중의 문제의식과 조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따라서 언론이나 전문가를 믿지 말 것이며, 오히려 그들에 반대하고 그들을 전복시키기 위한 서평을 쓰라고 권유한다.

의문이 없는 건 아니다. 서평에만 한정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의 필요’ 혹은 ‘대중의 문제의식’을 고려한 글쓰기와 소수의 단수들을 위한 글쓰기는 어떻게 접속할 수 있으며 어떻게 양립가능한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글쓰기는 자평대로 “1990년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이 풍미하고 그 이식의 행위들의 횡행했던 남한의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풍경의 정중앙을 관통한 이가 쓴 글들의 모음”으로서 최대치를 보여준다. 지식사회학적 의미도 갖겠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다.  

하지만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자의식과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란 전략에 비하면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란 고민은 저자에게 덜 중요한 듯싶어서 아쉽다. 가령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라는 매혹적인 악장에서, 저자는 자진해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야구를 ‘무타무주(無打無走)’의 야구라고 부르고, “무타무주의 야구는 이사만루의 야구가 ‘멸종’해버린 세상에서 만나게 될 하나의 새로운 삶의 미학 또는 미학적 윤리학”이라고 추켜세우는데, 노히트노런은 타자가 아닌 투수의 기록 아닌가. “이사만루라는 절대적인 순간에 과연 무타무주는 ‘가능할’ 것인가?” 같은 ‘불가능한’ 물음이 아직은 재치로만 들린다. 

11. 04. 08.  

P.S.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데리다와 바타유, 알튀세르가 포진하고 있는 처음 세 악장보다는 <아톰의 철학>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하는 4악장부터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란 제목이 붙은 장이다. 많은 각주들을 거느린 '학구적' 스타일의 앞 장들보다 한결 여유로운 스타일의 이런 글이 내가 '유혹적'이라고 부른 글이다. '무타무주의 야구' 같은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저자는 그러한 명명이 '순수한 형식적 악취미'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아놓긴 했다).   

저자는 각주에서 2009년 지면에 발표된 이 글에 대한 '생산적인 비판의 독해'는 박가분의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에서 읽을 수 있다고 적었다. '삐리리 불어봐 해체주의: 이웃 블로거 '람혼' 독서 후기'란 글인데, 제쳐놓았다가 이번에 읽었다. 박가분은 (1)최정우(람혼)가 가라타니 고진의 타자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2)근대성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는 데리다주의 혹은 해체주의의 지평에서 나온 것이고, (3)하지만 근대성은 데리다주의 혹은 해체주의의 지평을 초과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의 비판의 타겟은 람혼이라기보다는 데리다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에 묶일 만한 명민한 비판이지만 동시에 데리다를 단순화한 비판이기도 하다. "해체주의가 일종의 문화상품으로 소비되는 걸 보고 나서 역으로 데리다는 그동안의 해체를 가능하게 했던 역사적 전통으로 돌아간 것이다"(329쪽) 같은 주장이 단순화의 예이다. 역사적 전통에 대한 '기억과 보존의 책임'은 내가 아는 한 데리다의 해체와 처음부터 같이한다. 그것은 뒤늦은 자각 같은 게 아니라 해체의 조건 자체이다. "말년의 데리다는 해체주의적 실천을 통해 역설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근대적 유럽의 유산을 재발견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따라서 면밀한 검증을 필요로 한다.     

한편, 다시 <사유의 악보>로 돌아오면, 정중앙에 위치한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 같은 악장은 내게 난해하다. 음악이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면,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악장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가 이끄는 음악집단 '레나타 수이사이드'의 현란한 연주에 견주면, 비평가 최정우는 기타리스트 최정우에 비해 '둔중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가 애착을 갖는 '중독(中毒)'과 '중독(重讀)' 증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모든 말, 개념과 문장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반복하고 되새김질하면서 아주 느리게 이동한다. 그래서 때론 60킬로로 달리는 스포츠카 같다. 내가 기대하는 건 그가 제 속도로 쾌속질주하는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람혼 2011-04-09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책에 대한 로쟈님의 서평이 참 반갑고 소중하며 예리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제겐 그만큼 큰 기쁨이자 영광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에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60km/h로 달리는 스포츠카'라는 표현에서는 크게 웃었습니다.^^ 말씀하시고 기대해주신 대로, '저' 쾌속 질주의 방법을 제 나름으로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게는, 제가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을 비춰주는, 그런 소중한 표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속 깊은 제언과 날카로운 비판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인 생각의 한 자락'이라고 (저를 패러디 하시면서^^)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이 글을 읽으며 저는 다시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지점들에서 개인적인 정리도 할 수 있었습니다.

로쟈님이 지적해주신 부분도 있고, 또 제 나름으로 이런저런 서평들을 보면서 느낀 바도 있고 해서(아직 로쟈님의 글 같은 '본격적인 서평'이 없어서 조금 망설이고 있던 차였는데요), 조만간 제 책에 대해 저자 자신이 직접 제시하는 일종의 '매뉴얼' 혹은 옹호와 첨언의 변들을 작성해볼까 합니다. 아마도 이는 또 다른 '사족'이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겠으나, 서두에서 말씀하신 대로 저 역시나 스스로 이 책에 대해서 더 많은 말들이 쓰여질 수 있고 또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잠시 덧붙이자면, 저자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누구를 위해 쓰는가' 하는 문제는 제게도 개인적으로 대단히 소중하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제가 '서곡'에서 '확신을 가진 준비된 소수'에 대해 말했지만, 저는 그 소수가 수적이나 양적으로(또한 현재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소수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소수의 독자들이란 창조되어야 하며 또한 창조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 내기와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11-04-09 08:17   좋아요 0 | URL
<사유의 악보> 매뉴얼을 쓰신다는 거지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독자'들이 곧 거대한 고래처럼 등장하길 고대하겠습니다.^^

yoonta 2011-04-10 14:07   좋아요 0 | URL
좀 늦었지만 출간 축하드립니다. 람혼님..^^
람혼님 블로그에 이 책출간관련 글이 없어서 인사를 못드리고있었는데 로쟈님 서평을 빌어 축하드리게 되네요.

책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지만 목차를 보니 그동안 람혼님 블로그에서 봤던 몇몇 글들이 보이는군요. 그동안 람혼님 글들을 읽으면서 혼자서 놀라움을 금치못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가네요. 온라인에서 몇몇 블로거들의 글들을 접해보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람혼님의 글들과 위에서 로쟈님이 언급한 박가분의 글들은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었던 최상의 만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런 풍성한 만찬거리를 즐길수 있었던 '소수의 독자'로서 감사한 마음에 한마디 남겨봤습니다. 앞으로도 더 풍성한 사유의 결과물들을 펼쳐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람혼 2011-04-15 00:50   좋아요 0 | URL
yoonta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축하의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로쟈님 서재를 무단점거(?)하여 저 또한 감사의 말씀을 남깁니다.^^)

안 그래도 제 블로그/서재에도 책 출간에 관해 '저자의 변'을 남길까 하고 있는데요(혹은 위의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일종의 '사유의 악보 읽기 매뉴얼'을 작성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아직 시간이 없어서 남기지 못했는데, 조만간 써서 올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요즘 녹음 작업 때문에 외부와 연락을 끊고 거의 스튜디오에만 박혀 있습니다).

제 글에 대해 항상 좋은 의견과 날카로운 비판의 글 남겨주셨던 yoonta님이시기에, 남겨주신 그 축하의 말씀과 과분한 상찬의 말씀이 제게는 더욱 소중하고 가슴 짠하게 느껴집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풍성한 결실 많이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본령은 희곡이다. 이번에 그의 대표 희곡 가운데 하나인 <적자색 섬>(지만지, 2011)이 번역된 김에, 희곡들만 따로 모은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소설로는 <젊은 의사의 수기. 모르핀>(을유문화사, 2011)도 새로 나와서 같이 주문해두었다. 그의 희곡들만 모아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가코프 희곡 읽기와 함께 요즘 나의 독서욕을 자극하는 건 브레히트 희곡 읽기인데, 얼마전에 한국브레히트학회에서 엮은 네 권짜리 선집이 나온 때문이다. 20세기 러시아와 독일의 가장 대표적인 극작가들을 한국어로 비로소 만나보는 일도 제법 흥분되는 일이잖은가!.. 아래는 <적자색 섬>의 등장인물들이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적자색 섬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심지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4월
12,000원 → 11,400원(5%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1년 04월 03일에 저장
구판절판
백위군 (희곡)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강수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2월
12,000원 → 11,400원(5%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1년 04월 03일에 저장
구판절판
조이카의 아파트- 지만지 고전선집 320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막래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월
12,000원 → 11,400원(5%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1년 04월 03일에 저장
구판절판
조야의 아파트.질주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혜란 옮김 / 책세상 / 2005년 3월
6,900원 → 6,210원(10%할인) / 마일리지 340원(5% 적립)
2011년 04월 03일에 저장
품절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평꾼'의 일상이 얼핏 독서로 채워질 듯하지만 실상 더 많은 시간은 책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거나(그러다 하루에도 여러 번 주문을 넣기도 하고) 책상을 정리하는 데 소요된다. 이 경우에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이다. 강의자료를 정리하고 책상을 좀 치우다가, 지나간 교수신문에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4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올려놓은 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마음산책, 2011)에 대한 역자의 소개이다. 덕분에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도 처음 알게(보게) 되었다. '아름다움과 민주주의'는 마지막 장의 부제이면서 '옮긴이의 말'의 제목이다...

  

교수신문(11. 03. 28) 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를 옹호하는 이유  

오늘날 미술비평이 어떤 위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간주된다. 한국에서 미술비평이 주로 학계의 강단비평이나 미술가의 전시홍보용으로 유통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새삼스런 사실도 아닐 것이다. 이것이 물질세계에서 미술을 경험하는 우리 삶에 미술비평이 그렇게 불충분하고 무력한 이유이자, 미술이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비평과 무관한 불특정 다수에게도 항상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미국의 문화평론가 데이브 히키의 이 책은 아름다움과 민주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술의 효용을 논한 평론집이다. 초판은 1993년 진보와 보수진영이 격하게 대치했던 문화전쟁 시기에 나와 학계에 적잖은 물의를 일으켰고, 그로부터 16년 뒤인 2009년에 서문과 제5장 ‘아메리칸 뷰티’가 추가된 개정증보판이 시카고대학교출판부에서 나왔다. 이 책은 개정증보판을 완역한 것이다. 

히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린 것이요, 미술품은 보는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술품의 가치를 판단할 때 그것의 외양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대중을 가르치고 이끌려는 기성 제도의 노예가 되고 만다. 즉 미술의 힘은 구경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일견 새로울 것이 없는 이 악의 없는 주장으로 히키는 미술품의 의미에 천착하는 학계로부터는 ‘이단아’로, 형식주의와 후기 구조주의 비평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비평을 갈망하는 대중독자들로부터는 ‘자이언트’로 불리게 되었다. 이른바 문제적 평론집이 된 이 책에서 히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다음과 같다.

먼저 히키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아름다움 없이 대중의 주체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정의 내릴 수 없으며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구경꾼의 감탄을 자아내는 저녁노을에서 신인선수의 점프 슛, 광고와 패션, 그리고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은 지식의 세례를 받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 전체와 관계를 맺는 광범위한 가치이기에 지지집단에 의해 언제나 논의되고, 재발견되고, 다시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그리스 최고의 절색 헬레네, 베르니니가 조각한 테레사 수녀의 무아지경은 물론이고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워홀의 실크스크린까지 아름다움의 언어는 기독교 시대 이전 지중해 연안의 제반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찬란한 다신교 유산의 일부임을 말한다. 


>헬무트와 브룩스, N.Y.C., 1978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목적(형식주의)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미술이 대표적이다. 이 책의 제2장에 나오는 카라바조의 「성 토마스의 불신」(1601)과 메이플소프의 「헬무트와 브룩스, N.Y.C.」「루, N.Y.C.」(1978)처럼 미술에는 엄숙한 종교 교리에서부터 파격적인 성행위까지 거의 무엇이든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다. 여기서 히키가 강조하는 바가 아름다움의 언어, 곧 민주주의다.

히키에 따르면 미술에서의 민주주의는 아름다움이냐 추함이냐, 즐거움이냐 고통이냐, 예술이냐 외설이냐 식의 양자택일의 자유와 혼동돼서는 안 된다. 또한 미술전문가가 논쟁적인 이미지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예술작품‘으로 몰아가는 행위와도 혼동돼서는 안 된다. 히키는 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속세의 구경꾼들을 참여시켜 발언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을 에워싸고 있는 고급화와 신비화, 도덕적 고립의 분위기를 극복하고 ‘주변성’을 알린다는 점에서 열렬히 옹호한다. 동시에 그 사진을 외설로 규정하고 미국 국립예술기금의 예산을 대폭 삭감시킨 공화당 제시 헬름즈 상원의원의 행동 역시 칭찬한다. 메이플소프에게 포르노성 사진을 제작할 자유가 있듯이, 헬름스에게도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사진에 반대할 자유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술은 이러한 논쟁 속에서만이 기성 가치와 통념에 저항할 수 있고, 훌륭한 정치의 영역으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 있다. 미술의 힘이 이러할진대, 미술 감상이 유익하다는 이유로 보란 듯이 우리와 이미지 사이를 가로막고 계도하려는 미술관(비영리 대안공간도 포함된다)·대학교·재단·출판업체들을 뭉뚱그려 히키는 ‘치료기관’으로 부른다. 그가 보기에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와 나치 독일의 문화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치료기관의 대표적인 마취 전문가들이다.

히키가 아주 예리하게 본 것이 바로 치료기관의 정체를 벗겨 낸 부분이다. 미국 미술계는 전후 호황을 누리면서 뉴욕의 사설 갤러리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네트워크에서 미술 관련 박사와 석사들로 구성된 거대한 행정기관으로 팽창했다. 그리고 공공자금으로 운용되는 탈근대주의적 대안공간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치료기관들이 획일적인 연동 후원 체제를 운영하면서 권력과 비과세 자금을 획득하기 위해 인정사정없는 경쟁을 벌여 왔음에도 미술평론가들은 ‘시장의 타락’에 불평하는 것으로 자족하는가 하면, 구경꾼의 시각적 즐거움과 상관없는 비영리 기관들이 내놓는 특정 작품들에 대해서는 문화적 자선의 한 형태라는 경솔한 판단을 내린다고 히키는 비판한다.

미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료기관의 이러한 모습은 최근 한국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미술전문가들은 여전히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미술의 논쟁적 힘을 마취하여 미술관용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성급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름다운 미술품이 팔리면 곧바로 특권층의 우상숭배적인 상품이라며 낙인을 찍고, 잘 나가는 좌파 비평가들은 엘리트주의적 압제의 표상이라며 미술품의 외양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하찮게 취급한다. 이 모든 해석들이 미술을 경험하는 우리 삶에 아무런 떨림도, 쓸모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해석의 자유를 빙자한 해석의 폭정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히키의 생각이다.

이 책은 서양 미술에서 아름다움의 역사를 되풀이하거나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경쟁적인 이론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대신에 호메로스가 헬레네의 절색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이 시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묘사했듯이, 히키는 르네상스부터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이 대중에게, 미술가에게, 비평가에게, 정치권력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각도에서 접근해감으로써 그것이 입체적으로 조명되길 바란다. 아름다움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독보적으로 평가받는 히키의 비평은 유행의 최전선에 놓인 갖가지 이론과 담론이 난무하는 한국 미술비평의 양적 팽창과 질적 답보라는 위기의식에 유용한 키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박대정_프리랜서 큐레이터) 

11. 04. 03.  

P.S. 책 표지의 그림은 카라바조의 <성 토마스의 불신>이다. 색채를 입으니 훨씬 더 생생하군...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내 2011-04-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뉴스를 보니 로쟈님이 조국 교수님, 장하준 교수님과 함께 3대 저자-지식인으로 뽑혔군요..ㅋ 축하드립니다 ^^;

로쟈 2011-04-03 18:20   좋아요 0 | URL
그건 '뉴스'가 아니에요. 연말쯤엔가 나온 거니까.^^;

canon 2011-04-04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책 주문을 자제합니다. 지금까지 구입한 책이 7,000만 원이 넘더군요. 한 권에 30만원인 책도 있어 권수로는 생각보다 많지 않네요.

로쟈 2011-04-05 08:24   좋아요 0 | URL
상당한 애서가시네요. '1억클럽' 같은 갈 만들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책으로 1억을 날린 사람들의 모임...

canon 2011-04-0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년 동안 7,000만 원을 쓴 것이니 그렇게 책을 많이 산 것은 아닙니다. 로쟈님은 1억 이상을 날렸을 것 같은데...

로쟈 2011-04-07 09:58   좋아요 0 | URL
요즘 돈으로 환상하면 그렇게 될 거 같은데, 사실 대학까지 들어가는 자녀 교육비가 2억이 넘는다고 하니, 1억 정도는 '애교'지요.^^;

우주 2011-04-06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담하게도 이 메이플소프의 사진을 올리셨군요(^^). 이 포스트를 보신 분들이 꽤 있을 텐데, 사진을 보고도 댓글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놀랍습니다. 아무래도 사진을 실제로 보거나 해상도가 높은 파일로 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최소한 좋다, 나쁘다, 역겹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등등 어떤 반응이든 있어야 정상일 텐데요(?). 저자인 히키가 말하는 이 땅의 "치료기관"들이 "반민주적" 지상 과제를 수행하는 데 성공했나 봅니다.

로쟈 2011-04-07 12:59   좋아요 0 | URL
이미 '못볼 걸' 너무 많이 본 탓이 아닌가 싶은데요.^^;

우주 2011-04-07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볼 것'이라면 문외한이 아닌 저도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거든요. 흑백 사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장면, 그런 장면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에도 이 경우에 사진으로서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하는 구체적인 의문이 일기 전에 받은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어요. 저자인 히키는 이 사진과 관련해서

"메이플소프는 왜 그 실제적이며, 은밀하며, 향기로운 광경에 복종해야 했을까? 그리고 왜 그것을 사진에 담기로 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그 탄원자는 윤활제를 바른 다른 사람의 주먹이 자신의 항문에 처박히도록 엎드려 복종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사진에 찍히기로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에게 생각해보기를 촉구하며 그 나름 느낀 바를 쓰고 있기도 하죠. 이 이미지에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못 볼 걸' 너무 많이 봐서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주저되고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메이플소프의 X 포트폴리오가 물의를 일으킬 때 동시에 전시되던 '포르노 다운' 포르노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저자의 말을 감안하면 작금의 이 상황이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

aleph 2011-04-07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이플소프 사진은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보기 드문 파격이네요. 다소 충격적이었다는..^^ 메이플소프의 이미지가 구경꾼들이 한마디씩 하게끔 만든다는 데 절로 공감이 되고 포스팅해주신 책에도 흥미를 갖게 되네요.

우주 2011-04-07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는 미술, 아름다움,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 한국에서는 잠잠하니 히키가 일컫는 '치료기관'의 교육이 이 땅의 선남선녀에게 효과적으로 먹혔음을 증명해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욱이 식자들의 참여가 그 어느 블로그보다 활발한 것으로 아는 로쟈 님의 블로그에 대담하게 이 메이플소프의 사진이 올려졌는데 말입니다. 전국회의원인 변호사 최재천 씨가 주간경향에 서평을 올렸는데, 그분은 이 책을 읽고는

"책의 요지는 예술의 세상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미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그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다. 그런 아름다움의 언어가 곧 민주주의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103231453451&pt=nv

라고 쓰셨더군요. 많은 분들이 메이플소프의 이 이미지를 보고 무엇이든 느껴서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여 반응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이 (물론 이 이미지를 보고 '아름다움'을 떠올려야 한다는 건 아님) 이 땅에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할 운명인가 하는 회의마저 드는데, 기우일까요?
 

서울대 대학신문에서 미하일 바흐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얼마전에 두 권이 선을 보인 바흐친 선집을 계기 삼아서 바흐친의 삶과 한국에서의 바흐친 수용과정에 대해 짚어주고 있다. '바흐찐'과 '바흐친'이란 표기가 기사에서도 혼용되고 있는데, 선집본이 '바흐찐'이란 표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표기의 통일성을 위해서 제목과 태그는 '바흐친'이라고 해놓는다.  

  

대학신문(11. 03. 27) 미하일 바흐찐, 또는 신화의 귀환

우리나라에 바흐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였다. 바흐찐은 루카치로 대표되던 맑스주의 문예이론의 엘리트주의를 넘어서는 한편으로, 문학과 예술의 민중적 토대에 대한 모색이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바흐찐은 문화를 루카치처럼 ‘해방’과 ‘진보’의 위대한 이념이 전개되는 과정이 아니라 ‘대화’와 ‘웃음’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이 종합되고 역사 속에 풀려나오는 과정으로 묘사했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평범한 민중들의 삶 자체가 일으키는 사건이었고 이는 ‘민중문화’를 노래하던 1980년대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혁명의 고향인 러시아 출신의 이론가라는 사실은 바흐찐을 ‘신화적’ 위광 속에서 조명하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문화의 시대’에 진입하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은 홀연 사라져 버렸다. 그의 책들은 절판도서의 목록에 올라갔고 세간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효용이 다한걸까? 그리고 2011년, 돌연 그가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완역본’이란 꼬리표를 달고서. 그저 철지난 이론의 반복일까? 혹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신화의 귀환일까? 그의 이름이 낯선 독자들을 위해 간략한 소개부터 해보자. 



바흐찐, 신화와 삶의 이력
1895년에 태어난 바흐찐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은 혁명의 격랑이 러시아 전역을 휩쓸던 때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빈궁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서클을 조직해 강의와 연구, 세미나를 하며 그 시간을 버텨냈다. 『문예학의 형식적 방법』(1928),  『프로이트주의』(1927),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 등은 이 무렵 바흐찐이 서클 친구들의 명의로 출판한 책들인데,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란중이지만 적어도 바흐찐의 영향아래 쓰여졌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정식으로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저작은 1929년에 나온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이었고, ‘대화주의’라는 개념을 낳은 이 책은 후일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다 준다. 



우연하게도 첫 저작이 나온 직후 바흐찐은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돼 카자흐스탄 유형길을 떠나게 된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스탈린의 대숙청 와중에 ‘미심쩍은’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작업의 일환이었던 듯하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중앙아시아 황무지로의 유배는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새옹지마랄까, 유형의 댓가로 바흐찐은 잔혹한 시대에서 살아남게 된다. 이 시기 그의 청년시절의 벗들은 대부분 총살되거나 실종됐던 것이다. 유형이 끝난 후엔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연구를 이어나갔다. 1930년대의 괴테론(크로노토프론)이나 1940년대의 민중문화론이 이 시절의 성과들이다. 특히 『프랑수아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1940년대 집필, 1965년 출간)는 시간이 갈수록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대작으로 현대철학과 문화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 사후, 정식으로 복권된 바흐친은 19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과 함께 서구사회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게 된다. 그의 저술들이 속속 발굴·번역됐고, 1980년대에는 ‘바흐찐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것이다. 한국에 그의 이름이 소개됐던 것도 이런 맥락을 통해서였다. 



바흐찐과 한국사회의 두 번째 만남. ‘귀환’의 의미
짐작했겠지만 80년대에 영미권을 통해 소개된 바흐찐은 어느 정도 이론적 기성품의 형태에 가까웠다. 바흐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서구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그의 저작들 역시 중역본들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절 한국사회와 바흐찐의 만남이 ‘신화’와 뒤이은 ‘망각’으로 기록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열광이든 망각이든 우리 자신의 체화된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출간된 바흐찐 선집 두 권, 『예술과 책임』과 『프로이트주의』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바흐찐 신화가 이미 한물간 지금 그의 저작들이 원어로부터 출간됐다는 사실은, 어쩌면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의 사유를 우리 내적 문제들과 부딪히게 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생산하게 만들 기회일지 모른다. 유행하는 이론이 아니라, 빛바랜 신화일지언정 고전으로서 바흐찐을 읽게 된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유의 새로운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번에 나온 선집은 이른바 바흐찐 사유의 ‘기원’에 해당하는 글들이다. 1920년대 초엽에 집필된 ‘예술과 책임’, ‘행위철학’은 번역의 난해함과 어려움 때문에 지금껏 제대로 읽히지 못했다. 이런 텍스트가 한국어로 초역됨으로써 전공자뿐만 아니라 여타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 또한 바흐찐의 초기 사상에 접근할 통로가 생겨난 것이다. 아직 두 권에 불과하지만 한국어판 선집 간행의 가장 큰 의미는 여기 있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바흐찐과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더 이상 ‘신화’라는 후광 속에 있진 않을 듯하다. 신화는 제대로 알지 못할 때나 피어나는 이미지니까. 하지만 신화의 휘장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현실을 생산하는 사유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만남을 문화라 한다면 바흐찐도 언급했듯, 역사 속의 문화는 신화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나날의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에 다소간의 매혹을 느꼈다면 서둘러 도서관으로가 바흐찐의 글들을 넘겨보길 바란다. 그것이 사유와 실천으로서 문화의 시작인 것이다.(최진석_러시아연구소 연구원)  

11. 04. 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책을 읽을 자유'란 제목이 눈에 띄어 칼럼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택광 교수의 '인문학 칼럼'이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도 언급돼 있는데, 말하자면 '철학책을 읽을 자유'는 '책을 읽을 자유'의 하위범주가 된다. 그런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봄직하다.

 

국제신문(11. 03. 30) 철학책을 읽을 자유

철학자라는 말은 멋있게 들리지만 어원을 따져보면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실 논리에 근거해서 본다면 철학자는 오늘날 결코 환영받을 수 있는 인간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지(智)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남녀관계도 그렇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과잉의 상태이다. 지에 대한 과잉의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란 누구겠는가. 한마디로 지적 행위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철학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가는 일에 급급한 평범한 사람에게 철학은 쓸데없는 고민을 만들어내는 귀찮은 행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앎에 대한 욕망에 빠지면 세속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남들이 좋은 차를 사거나 멋진 집을 사기 위해 고심할 때 철학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에 골몰하면서 진리에 대해 알고자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비싼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가디언'지의 질문에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지젝이 '헤겔 전집'이라고 대답한 것은 그래서 단순한 위악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돈으로 40만 원가량인 전집을 자신의 소유물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말하는 이런 '심리'를 짐작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누구나 쉽게 지젝과 같은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서평블로거 로쟈 이현우가 출간한 책은 '책을 읽을 자유'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든 존재는 자유를 갈망하지만 이현우에게 그 자유는 무엇보다도 '책을 읽을 자유'인 것이다. 이 의미심장한 '자기주장'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국 유학 시절 소속 학과사무실 게시판에 유명 출판사의 채용공고가 자주 붙곤 했는데 지원자격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인상 깊은 지원자격이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었다. 컴퓨터회사라면 당연히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에게 취업의 기회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자격규정은 사실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자격요건을 밝혀 놓은 까닭은 그만큼 '책을 읽는 것'이 의미 있는 자질이자 능력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책을 읽을 자유'는 그렇게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그만큼 경제적 여유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직장인들은 업무에 쫓겨서 어렵고, 학생들은 그 못지않게 스펙 쌓는 일에 바빠서 못한다. 이런 사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업무'나 '스펙'과 관계없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철학'이라는 지를 사랑하는 특이한 행위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철학과를 가겠다는 자식을 말리지 않을 부모가 과연 한국 사회에 얼마나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철학의 도시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파리에 가면 고등학생들이 두꺼운 철학책을 읽고 있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카페나 공원에서 철학과 관련한 토론이 벌어지는 일도 아주 흔하다. 이런 프랑스의 지적 풍토를 부러워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사실 이렇게 프랑스가 독일을 제치고 철학의 나라로 거듭 난 것은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필수적으로 철학을 이수해야하는 교육제도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프랑스에서 의무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철학에 대한 기초지식 정도는 모두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한국에서 최근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도 프랑스처럼 제도적 뒷받침과 결합한다면 일시적 유행으로 그치진 않을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인문학을 자신의 삶에서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실정에 맞는 제도화가 가능할 수 있겠다. 지에 대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해준다는 시혜적 대책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문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철학적 화두로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각자의 삶에 하나씩 품을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이런 제도화도 뜬금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까닭에 '철학책'을 읽을 자유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다.(이택광_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11. 04. 02.  

P.S. 최근에 '철학책을 읽을 자유'의 향유대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철학자는 미셸 옹프레이다. <반철학사4: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인간사랑, 2010)에 이어서 <반철학사3: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인간사랑, 2011)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철학교사로 오래 근무한 이 철학자의 '반(反)철학사'는 전체가 6권으로 예정돼 있는데,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 이전에 <반철학사1: 고대의 현자들>, <반철학사2: 크리스트교적 쾌락주의>가 배치돼 있고,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 이후에는 <반철학사5: 사회적 행복주의>와 <반철학사6: 욕망하는 기계>(이상 가제)가 뒤를 받치게 된다. 철학적이라기보다는 미학적인 표지가 인상적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eti83 2011-04-03 04:0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팬클럽이 생겼습니다.
이름은 고공비행이고, 이주일에 한번씩 모이는 느슨한 독서클럽입니다.
줄여서 '고비'인데, 이주에 한번씩 고비를 넘기고 공부하며 인생의 고비를 넘기자는 의미가 있죠.

로쟈님이 번역하신 지젝님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했네요.
아직 시작한지 하루밖에 안돼서 홈피는 없지만 우선 이렇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앗, 멤버들이 로쟈님의 친필 사인을 원하고 있어요!

로쟈 2011-04-03 08:57   좋아요 0 | URL
ㅎㅎ 팬클럽까지 거느리기엔 제가 '카리스마'가 없는데요.^^; 아무튼 '고비'들을 잘 넘기시길 바랍니다. 새로 책이 나오면 사인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의문점이 생기시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몇가지 교정사항은 조만간 올려놓을 예정입니다...

난다 2011-04-03 17:49   좋아요 0 | URL
허걱~~저도 그 팬클럽에 가입해야 하는데...ㅎㅎ 우리 독토에서는 폭력이란 무엇인가 지난 주에 읽었습니다... 제가 강력히 주장해서..반응 뜨거웠지요....암튼 인문학이 사회 전반에 넘치는 그날까지...로쟈님은 저공비행.. 팬클럽은 고공비행 해주십시요...ㅎㅎ

로쟈 2011-04-03 18:21   좋아요 0 | URL
반응이 뜨거웠다고 하시니 궁금하네요. 종종 '강력히 주장'해주시길.^^

park6 2011-04-07 01:13   좋아요 0 | URL
철학도로서 댓글을 달지 아니 할 수 없는 글이군요ㅎㅎ파리가 정말 철학의 도시인가요? 그렇다면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네요~

아, 그리고 전부터 로쟈씨에게 알려드리고 싶은 정보가 있었는데요. '진단명:사이코패스'라는 책에 엉터리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책 132쪽에 소설 롤리타에 대한 옮긴이 주가 있는데요. 완전히 엉터리 정보더라구요.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알려드려요~ㅎㅎ

로쟈 2011-04-07 10:07   좋아요 0 | URL
<진단명>은 안 갖고 있어서 '도움'은 안 되는 정보지만 참고는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