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명강의>(김영사, 2011)와 함께 어제 주문한 책은 제프리 잉햄의 <돈의 본성>(삼천리, 2011)이다. 돈에 무관심하더라도 괴테의 <파우스트>나 고골의 <죽은 혼>을 읽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령 <죽은 혼>에서 치치코프의 행동지침이 되는 아버지의 유훈은 "무엇보다 아끼고 한 푼 두 푼 모아야 해.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건 돈이야."이기 때문이다. 이마무라 히토시의 <화폐인문학>(자음과모음, 2010) 등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경향신문(11. 04. 16) 돈은 ‘경제’가 아닌 ‘정치’다 

화폐에 대한 정통 경제이론의 모든 설명은 상품-교환이론이다. “화폐는 화폐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좀 더 쉽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존 스튜어트 밀)나 “화폐는 교역의 바퀴가 아니라 바퀴를 좀 더 부드럽고 쉽게 굴러가게 해주는 윤활유일 뿐이다 ”(데이비드 흄)는 언급이 여기에 해당한다. 화폐는 ‘중립적인 베일’로서 베일 너머의 실체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돕는 조연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돈의 본성’은 교환을 매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게 저자 제프리 잉햄의 견해다. 잉햄이 경제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화폐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더불어 신용/채권-채무라는 사회적 관계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해석하면 화폐는 ‘중립적인’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 나아가 정치적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화폐가 사회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구성된 약속이란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화폐는 계산화폐여야 한다. 발행자의 계산화폐로 가치부여가 끝나고, 즉 ‘화폐성’이 확립되고 이것이 다시 특정한 형태(금속, 종이, 전자신호 등)로 체현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화폐는 외환시장 같은 곳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장에서 물물교환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특정한 대표 물건이 화폐(상품화폐)로 추대됐으며, 이후 화폐는 사회자처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막후에서 돕고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대립한다. 다시 말하면 화폐보다 화폐성이 우선하는 것이다. 물물교환이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으로 바뀌면서 경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특히 생각해 볼 거리는 시장의 정치화가 아닌가. 물건끼리 바꿀 때에 비해 달리 화폐가 개입하면서 특정한 이해관계가 더 반영된다. 모든 참여자들에게 공평한 시장은 없다는 측면에서 이미 시장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화폐의 정치적인 또는 사회적인 성격은 시장과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다.

환어음과 주화의 다툼에서 화폐의 이런 정치성이 극명히 드러난다. 상인끼리 사용하는 환어음은 가치측정 수단이기 때문에 계산화폐이다. 환어음은 군주나 영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주화(외형상 상품화폐)와 대치했다. 상인과 왕족·귀족은 국정화폐라는 타협을 만들어낸다. 화폐권력을 분점키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금본위제가 종언을 고한 이후 논리적으로도 더 이상 상품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품화폐가 퇴장한 지 오래인데도, 돈이 ‘중립적인 베일’이란 신화는 유지되고 있다. <돈의 본성>은 중립성이란 도그마를 난타한다. 중립적이지 않다면 화폐는 결국 누군가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화폐는 스스로의 이익에 복무하는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밝혀진 돈의 무한 자기복제와 통제불능의 탈인격화는, 과장하면 인간이 배제된 돈의 정치세력화를 떠올리게 된다. 베일을 벗은 화폐가 누군가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화폐가 더 이상 윤할유에 머물지 않고 바퀴의 자리까지 차지했다면, 이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일까.(안치용 | 지속가능사회를위한경제연구소 소장) 

11. 04. 16.  

P.S. '옮긴이의 말'에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상품, 화폐, 자본이라는 세 가지 중심 범주에 대한 대안적인 이해방식을 담고 있는 책들을 3부작으로 번역중이라고 밝혔는데,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이 그 첫번째 책이었다면 <돈의 본성>은 두번째 책이다. 자본에 대한 대안적 이론을 담은 책으로는 닛잔과 비클러의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2012년 중에 번역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권력자본론>(삼인, 2004)의 업그레이드 판이 아닌가 싶다. 좋은 가이드 덕분에 정치경제학 분야의 문제작들을 편하게 소개받을 수 있어서 부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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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어제 낮에 급하게 쓴 것인데, 이번주에 강의차 읽은 고골의 <죽은 혼>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 고골의 편지는 <친구와의 서신교환선>(나남, 2007)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겨레(11. 04. 16) 추악한 삶의 백과사전

“저에게 추악함이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저 자신이 상당히 추악한 편이니까요. 제가 아직 덜 추악하던 시절, 저는 모든 추악함에 당혹해했고, 추악함의 종류와 규모에 우울해졌고, 그리하여 저는 러시아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떨곤 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걸작 <죽은 혼>은 그 추악함 혹은 비속함을 한데 끌어모은 ‘서사시’이다. 비평가 벨린스키가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러시아 삶의 백과사전’이라고 부른 것에 견주면, 고골의 <죽은 혼>은 ‘추악한 러시아 삶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을까.

‘죽은 혼’이란 말은 중의적이어서 ‘죽은 농노’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륜마차를 타고 한 지방도시에 도착한 주인공 치치코프는 지주들을 찾아다니며 죽은 농노들을 구입하려고 애쓴다. 10년에 한번 정도 인구조사를 했기에 이미 사망한 농노들도 명부에 올라가 있었고 지주들은 그들에 대해서도 인두세를 물어야 했다. 그렇듯 농노 명부에는 들어 있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농노들을 사들여서 그걸 담보로 거액을 대출하려는 게 치치코프의 계산이다.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리석고 속물적이면서도 의심이 많은 지주들을 잘 구슬려야 했는데, 치치코프는 주인공답게 그런 ‘실용적인 측면’으로는 대단한 지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농노 200명을 가진 지주를 대할 때와 300명을 가진 지주를 대할 때, 또 500명을 거느린 지주를 대할 때 각기 다른 뉘앙스의 표현이 가능한 러시아식 대화법에 익숙했다. 



죽은 농노들을 사러 다니면서 치치코프가 만나는 지주들은 다만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될 뿐인, 곧 영혼은 이미 죽은 ‘죽은 혼’들이다. 다정다감하긴 하지만 항상 뭔가 모자란 듯한 마닐로프의 서재에 놓인 책은 2년 내내 같은 쪽이 펼쳐져 있고, 탐욕스러운 소바케비치의 방안 가구들은 모두 주인을 닮아서 “나도 소바케비치야!”라고 외쳐댄다. 거꾸로 보면 소바케비치 자신이 그런 소파나 의자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치치코프는 어수룩하면서도 이기적인 여지주 코로보치카와 저열할 만큼 구두쇠인 늙은 지주 플류시킨 등을 더 만나며 그들에게서 죽은 농노를 구입한다. 그의 ‘사업’은 잘 진행돼 나가는 듯하다.

하지만 지사가 주최한 파티에서 한 소녀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귀부인들의 질투를 사게 되고 그가 죽은 농노들을 사러 다닌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도시 전체가 치치코프의 정체에 대한 온갖 뜬소문과 유언비어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지방 검사는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다. 결국 치치코프는 서둘러 도시를 떠나며 말미에서 작가는 그가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살아왔던가를 일러준다.

분명 치치코프는 선량한 주인공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악한도 아니다. 다만 강한 소유욕을 가진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자본과 물욕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고골은 인간에게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욕망도 있다고 믿었다. 보다 높은 섭리에 이끌리는 욕망이다. 그래서 치치코프의 차가운 내면에도 천상의 지혜 앞에 무릎 꿇게 하는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새롭게 변신하게 될 치치코프의 모습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부정적인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고골이지만 안타깝게도 ‘선량한 주인공’을 그려낼 능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러시아여, 넌 대체 어디로 질주하는 거냐?”라고 물었을 따름이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질주하는 것일까

11. 04. 16.  

P.S. '러시아 삶의 백과사전'이라고 하니까 떠올리게 되는 책은 유리 로트만의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나남, 2011)이다. '러시아 귀족의 일상생활과 전통(18-19세기초)'이 부제니까 <예브게니 오네긴>의 배경과도 겹친다. 러시아 문화사에 관한 책으론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8세기 이후 3세기 동안의 문화사를 다룬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이카루스, 2005)와 함께 러시아문화사에 대한 필독도서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 보탤 만한 책은 케임브리지 컴패니언 시리즈로 나온 <현대 러시아문화>(1999)인데, 올해 안에 번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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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6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6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6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6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6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1-04-16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매우 인상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소바케비치 자신이 그런 소파나 의자와 구별되지 않는다"...한동안 못 잊을 문구네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1-04-16 20:12   좋아요 0 | URL
^^
 
개들에겐 지옥이 없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전 (4.19~5.1)

어제 접한 가장 좋은 뉴스는 핀란드의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전' 소식이다.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된다고. 내겐 칸느영화제 부럽지 않은 '선물'이다. 비록 몇 편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번 기획전에서는 국내에 소개 되었던 <성냥공장소녀>,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 외에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연작, 감독의 보헤미안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하는 <보헤미안의 삶> 등 주요 작품 11편이 상영된다. 단연코 이야기 하건데,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를 한편이라도 본다면 그의 이름을 되뇔 수밖에 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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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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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공장 소녀- The Match Factory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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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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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빛- Lights In The Dusk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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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12 13:41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11-04-16 08:34   좋아요 0 | URL
^^

easybird 2011-04-12 23:31   좋아요 0 | URL
소식을 듣고 두달전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렸죠~ 그 얼굴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얼굴들..

로쟈 2011-04-16 08:35   좋아요 0 | URL
아키 카우리스마키 팬이시군요.^^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카이스트 사태에 대한 소감을 적은 게 돼버렸는데, '대학 주식회사화' 혹은 '대학의 몰락'에 관한 책들을 안 그래도 모아읽으려던 참이었다. 참고로, 지난주 시사IN의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같은 주제의 책들을 묶어서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11. 04. 12) [문화와 세상]학생을 자살로 내모는 ‘명문대病’

“미국의 명문대는 자살률이 더 높다.” 서남표 카이스트(KAIST) 총장이 최근 학생과의 개별면담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네 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수가 연이어 자살함으로써 사회적 충격을 던지고 있는 ‘카이스트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2006년 부임 이후 세계적인 명문대학을 목표로 개혁을 주도하면서 무한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서 총장에게 학생들의 자살은 경쟁 시스템의 불가피한 부산물이자 ‘나약한 정신력’의 결과로 간주됐을 것이다. 그의 발언에서 자살률조차도 아직 명문대 수준이 못 된다는 인식을 읽는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우리 옛말이 있긴 하지만 이 말의 서남표판은 ‘명문대가 된다면 자살이 대수랴’가 될 듯싶어서다. 하지만 그 명문대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명문대일까. 

소위 ‘서남표식 개혁’의 성과는 ‘눈부시다’. 보수언론이 자주 내세우는 지표에 따르면 서남표식 개혁이 추진된 덕분에 ‘더 타임스’ 세계대학평가에서 카이스트의 순위는 쑥쑥 올라갔다. 2006년 198위, 2007년 132위, 2008년 95위, 그리고 2009년에는 69위가 됐으니 50위권 진입도 코앞에 두고 있다. 서울대가 47위라고 하니 카이스트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순위다. 게다가 공학·IT분야로 한정하면 서울대(27위)를 제치고 21위다. 대체 무엇이 평가 기준인지 궁금한데, 매년 세계 200대 대학을 선정해 순위를 매긴다는 이 영국의 일간지는 동료평가(40%), 교수 1인당 논문 인용지수(20%), 교수 대 학생 비율(20%), 국제기업의 대학평가(10%), 외국인 교수 비율(5%), 외국인 학생 비율(5%)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료평가’를 어떻게 산출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기준에 ‘사회 속의 대학’이 갖는 의의는 포함돼 있지 않는 듯하다. 대학 구성원들의 자긍심 또한 평가항목에는 빠져 있는 듯싶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졸업자 취업률도 눈에 띄지 않는다. 국가별 행복지수 같은 것도 예가 되지만 평가항목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순위가 가능한 것이 모든 유(類)의 평가가 갖는 함정이다. 그런 결과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흔히 대학들 간의 무한경쟁시대라고 하고, 대학 경영자들은 입만 열면 ‘대학 경쟁력’을 외친다. 미국 시카고신학교의 서보명 교수가 쓴 <대학의 몰락>이란 책을 보면 미국 대학에서조차도 경쟁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이다. 대학별 랭킹을 발표하면서 각 대학을 순위경쟁으로 내몰기 시작한 것이 고작 30년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학이 서구 중세의 산물인 걸 감안하면 대학평가의 역사란 퍽 일천하다. 하지만 이 일천한 역사가 대학의 이념까지 바꿔놓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대학의 자유’라는 이념이 ‘대학 간 경쟁’으로 변모했으니 이만한 지각변동을 대학의 역사에서 또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서 교수에 따르면 ‘대학 순위 정하기’를 통한 순위 경쟁의 도입은 레이건 시대 보수주의 혁명의 혁혁한 성과이다. 1960년대 좌파운동의 본산지였던 대학을 자본주의 경쟁체제로 밀어넣음으로써 대학을 기업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교육은 상품이 되고 학생은 소비자가 되었으며 대학은 품질관리와 품질보증의 대상이 됐다. 그리하여 자본과 소비만이 대학을 말해주는 시대가 됐다. 대학의 자유와 비판정신이 이제는 한갓 퇴색한 전통에 불과하다면, 대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대학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 명문대 수준의 자살률을 갖기 전에 다시금 고민해볼 문제다

11.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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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1-04-12 02:05   좋아요 0 | URL
숙연해지는 글입니다... 과연 미국식 자본주의의 바깥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mirror 2011-04-12 04:14   좋아요 0 | URL
서남표의 방식은 미국 방식이 아닙니다. 어떤 미국 대학이 서남표식으로 하나요? 서남표의 정책은 신자유주의란 것도 아니죠.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이나 영국에서 징벌적 등록금제도 본적 있습니까? 부정적인 모든 것을 미국제로 몰려는 몰상식한 짓들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대학처럼 인문학 교육에 힘쓰는 대학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미국 또는 신자유주의라는 카테고리에 가두려고 합니까?
대학과 학자들의 경쟁은 필연입니다. 사회의 각 영역에서 경쟁이 사라져도 학자들 사이에 탁월함의 구별은 필연입니다. 위대한 업적과 그렇지 않은 업적은 구별되고, 위대한 업적이 대학에서 교육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이 구별 과정이 경쟁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다만, 서남표는 영어강의와 징벌적 등록금제라는 황당무계한 한국식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잘못이죠.

mirror 2011-04-12 04:24   좋아요 0 | URL
그리고 미국의 대학 순위가 기업에 대학을 종속시키려는 의도라고 단정짓는 그 근거가 의문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한 철학 교수가 각 대학들의 철학과 교수들에게 일일히 편지를 보내 매년 각 분야별로 순위를 업데이트하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선택을 도우려는 것이죠. 이렇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를 물어서 각 분야의 뛰어난 대학들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인가요? 이 철학과들의 순위와 기업이 무슨 관련이란 말인가요?
그리고 대학 순위 매기는 것은 독일에서도 열심히 합니다. 그 동안 순위 안 매기고 돈을 그냥 나누어 먹어서 발전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매년 슈피겔 같은 곳에서 순위도 매기고, 한국의 BK 사업과 같은 사업도 해서 예산도 분배합니다.
서남표의 해괴망측한 정책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없는 지독히도 한국적입니다. 이것을 신자유주의 또는 미국탓으로 돌리는 것은 저급한 한국 지식인들의 몹쓸 습관을 답습하는 것 같습니다.

pjy 2011-04-12 12:28   좋아요 0 | URL
EBS에서 방영했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한토막이 생각납니다.
대리모가 출산후 아이의 양도를 거부했는데 딜은 딜이라고 주장하는 거..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데도 부작용은 당연한거고 그게 인생이고 세상이라고 말하는 ㅠ.ㅠ
이런, 되는대로 살거였으면 공부는 뭐하러 하냐고요~ 머리아프게~~
 
인류동물학 읽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월간지 '책&'(393호)에 실은 이번달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한 책들을 골랐다.  

  

책&(11년 4월호) 동물과 인간의 공존

“한 국가가 얼마나 위대하며 도덕적으로 진보했는지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과연 한국은 얼마나 위대하며 도덕적으로 진보했을까.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런 물음이 조금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전례 없는 구제역 사태로 가축 350만 마리를 살처분했고, 게다가 매몰지의 침출수로 인해 또 다른 재앙이 예고돼 있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대책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어서, 공장식 밀집사육의 문제점이 다시금 지적되고,  가축의 면역력을 키우는 친환경 축산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인간과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당장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건 강제할 수 없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다만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함께 ‘육식주의’를 반성의 도마 위에 올려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 몇 권의 책이 도움을 줄 수 있겠다.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는 ‘육식주의를 해부한다’는 부제대로 육식주의를 정면으로 문제 삼는다. ‘육식주의’란 말 자체가 ‘채식주의’에 견주기 위한 저자의 신조어다. 그는 “특정 동물들을 먹는 일이 윤리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를 육식주의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런 명명을 통해서 육식주의가 하나의 입장이자 이데올로기이며 동시에 폭력이라는 걸 시사한다. 한국인에게선 큰 차이가 없기는 하지만, 쇠고기와 개고기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내면화된 육식주의’의 인식이 동물의 대상화와 몰개성화, 이분화를 통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동물을 생명체가 아닌 ‘살아있는 물건’ 정도로 간주하고 독립된 개체이지만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서 그들을 인식하며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눈다. 고기는 즐겨먹어도 송아지 고기를 먹는 건 반대한다거나 개고기를 먹는 건 혐오스럽다고 여기는 태도는 그래서 가능하다. 하지만 똑같이 육식주의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며 그 결과 미국에서만 한 해에 100억 마리의 동물이 도살당한다. 초당 317마리 꼴이다. 이러한 현실이 바뀔 수 있을까? 저자는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직시하고 공감하고 증언하는 일이 변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함께 느낌’, 곧 공감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 새로운 관계는 어떤 것일까?   

동물행동학자 마크 베코프는 <동물 권리 선언>에서 ‘온정으로 맺어진 공동의 연대’를 제안한다. 사실 성서의 동물관에 따르면, 동물은 인간보다 열등하며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간주됐다. 서양에서는 그러한 차별이 동물은 이성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화돼 왔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은 동물의 지각과 감성능력에 관한 놀라운 사실들을 계속 발견해내고 있으며, 저자는 이러한 발견에 근거해 우리의 가치체계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살해당한 해변가의 하니걸을 추모하는 듯 행동한 수컷 바다거북이나 죽은 새끼를 품에 안고 깊은 슬픔에 빠진 어미 고릴라의 모습은 동물에게 인간의 정신적 특성을 부여하는 ‘앤스로포몰피즘’ 혹은 의인관(擬人觀)이 과연 인간의 고안품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들이 우리처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가까운 존재로서 그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물과 그렇게 온정적으로 공존함으로써 우리가 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 우리의 삶도 더 윤택해질 거라는 것이 저자의 조언이다. 당장에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뭔가 현실 가능한 것 그리고 온정을 베풀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로운 학문으로서 인류동물학의 권위자인 할 헤르조그는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에서 동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와 성찰의 지평을 더 확장시킨다. 그는 15년 동안 채식주의자로서 도덕적 지조를 지켜온 한 인류학 박사가 구운 뇌조고기 맛에 반하면서 단번에 채식주의에 등을 돌린 사연도 들려주고, 자신이 애완용으로 키우는 보아뱀 샘에게 과연 고양이를 먹이로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는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서는 흑백논리적 윤리로 재단할 수 없는 ‘괴로운 중간지대’가 있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혐오하며 잡아먹기도 하는 동물에게 우리가 보이는 태도와 행동, 유대감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함을 보여주는 학문이 바로 인류동물학”이란 저자의 결론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사실 삶의 근원적인 복잡함을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몫이라면, 인류동물학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철학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물을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1. 04. 10.  

 

P.S. '동물철학'과 관련하여 내가 먼저 떠올리는 책은 데리다의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이다. 언젠가 동물철학에 관한 책들을 몇권 모으면서 구한 책인데, 분량도 얇기에 번역되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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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먹을수록 죽는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20 18:04 
    육식 혹은 육식주의를 비판한 책들이 여럿 출간된 바 있는데, 결정판이 나왔다. 최소한 제목상으로는 그렇다.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현암사, 2011)니까. 부제는 '육식에 관한 10가지 논점과채식주의를 향한 선언'이다. 육식 문제가 점점 흡연 문제와 동일시되지 않을까 하는 전망도 불가능하진 않을 듯싶다. 공공장소에서는 육식을 금하는 것 같은. 여하튼 고기를 먹어도 이젠 목숨 걸고 먹어야 하는 듯하다. 영화 <카페 느와르>에서 햄
 
 
푸른바다 2011-04-10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 같네요. 그런데 어째 피터 싱어가 완전히 빠졌네요. 모든 사람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는 동물 철학에서 충분히 중요한 사상가일텐데요...^^

로쟈 2011-04-11 23:40   좋아요 0 | URL
네, 코너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리뷰여서요. 싱어의 <동물해방> 등은 전에 다룬 적이 있어서 포함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