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의 <모범소설집>(창비)이 오랜만에 다시 나왔다. <돈키호테> 완역본 출간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이후에 기대해봄직한 일이었는데, 다행히 제 때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돼 반갑다. 안 그래도 이번 여름에는 스페인문학에 대해 다시 강의하면서 모범소설집을 읽어볼 계획이었다. 



이번 번역은 창비판 <돈끼호떼>의 역자인 민용태 교수가 맡았다. <모범소설집>은 1613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12편의 단편모음집인데, 시점은 <돈키호테 1부>(1605)와 <돈키호테 2부>(1615) 사이다. '모범소설'은 무슨 뜻인가. "단편소설은 세르반떼스 자신에게도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에스빠냐에서도 전례 없던 최초의 장르로, 제목의 ‘모범’은 말 그대로 하나의 전형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돈키호테>가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라면 <모범소설>은 근대 단편소설의 효시가 되는 것인가. 적어도 스페인문학사에서는 그런 의의를 갖겠다. 















이전판은 <모범소설>(오늘의책)이란 제목으로 나왔었고, 지금 보니 2003년판이다. 바로 구입하지는 않다가 나중에 구한 기억이 있는데, 사실 어디에 있는지 현재로선 찾을 수 없다. 
















<모범소설>이나 <모범소설집>은 완역본이고, 12편의 단편 중에서 몇 편을 고른 선집은 따로 나왔었다. <개들이 본 세상>(시공사)과 <유리 학사>(문학과지성사) 같은 책이 그런 경우다. 강의에서는 일정상 전집을 참고하되 선집을 읽게 될 듯하다. <개들이 본 세상>은 5편, <유리 학사>는 4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유리 학사'와 '사기 결혼'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단편으로 대표작이라고 봐도 좋겠다. 


발표 시기는 <돈키호테 1부>(2부에 대한 구상은 나중에 갖게 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세르반테스에게 <돈키호테 1부>는 그냥 <돈키호테>였다)보다 뒤이지만 상당수 작품은 그 전에 쓴 것으로 보이기에 <모범소설집>과 <돈키호테>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또 <돈키호테>에 들어가 있는 몇몇 에피소드는 <모범소설집>의 이야기와 비슷한 면모도 갖고 있는데, 그렇게 '활용'하고 남은 이야기들을 따로 묶은 것이 <모범소설집>이라고도 본다. 그래서 작품들 간에 편차가 있는 것.


"1613년에 출간된 <모범소설집>은 크게 귀족을 주인공으로 이상주의적 교훈을 담은 소설과 도시 서민과 날품팔이, 떠돌이 악사, 건달, 도둑 같은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로 나뉜다. 두 부류의 문체와 소설의 짜임새 및 완성도에서 보이는 차이는 이들이 긴 시간에 걸쳐 쓰인 작품들임을 알려준다."
















개인적으로 올해 강의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중세문학까지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중세의 기사로망스와 스페인 피카레스크소설을 <돈키호테>의 전사로 다룰 수밖에 없다. 프랑스문학에서는 크레티앵 드 트루아와 라블레의 작품들을 올해 안에 다룰 예정이다. 
















피카레스크 소설로는 작자 미상의 <라사리요>(대역본을 포함 세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다)와 마테오 알레만의 <구스만 데 알파라체>(아카넷)가 <돈키호테>에 영향일 미친 작품들이다. 직접 강의에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참고해보려고 한다. 근대소설사의 대략적인 전개는 기사로망스(프랑스)->피카레스크소설(스페인)->돈키호테->모험소설(영국)->교양소설(독일)->사회소설(프랑스)로 이어진다. 물론 연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계승과 변형의 관계다. 이러한 이행과정을 그 배경이 되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연관해서 해명하는 것이 근대소설 발생과 진화 해명의 과제다. 기본 골격은 세워두었기에 살을 붙여서 세계문학 강의로 출간할 예정이다. 이 또한 올해의 과제다...


20.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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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20-02-1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강튀아 관련책을 찾다가 여기까지 거슬러 왔네요
바흐찐의 책까지 찾았지만 품절이네요 대학도서관에서 찾아내어 아싸 하고 있습니다ㅎ
올해에 출간될 책에 위에서 말씀하신 근대소설사가 다루어진다는 거죠? 그 자료들 중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당연 들어가는거고요?
빨리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은 돼야되겠죠? 강의는 어디서 언제쯤?ㅋㅋ
 

이번주 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강의에서 읽은 김에 알퐁스 도데의 장편 <사포>(예문)에 대해서 적었다. 그간에 단편만 소개된 작가인데, 장편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

















한겨레(20. 01. 31) ‘시적 선택’ 앞에서 ‘산문적 진실’을 택하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는 우리에게 ‘별’이나 ‘마지막 수업’ 등의 단편으로 친숙하다. 한동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들이어서 한국 독자들에게는 가장 유명한 19세기 프랑스작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대 작가로 더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 에밀 졸라의 작품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비교해 보아도 도데의 인지도는 예외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명성의 이면도 없지 않다. 그는 적잖은 장편소설을 남겼다. 졸라와 모파상 등과 함께 자연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그의 장편들이 과연 단편들에 견주어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현재로선 유일하게 번역된 장편 <사포>(1884)를 손에 들며 던지는 질문이다.



제목의 ‘사포’는 그리스의 여성시인 사포를 가리키는데 소설에서는 여주인공 파니의 별명이다. 사포의 조각상 모델이 되면서 파니는 사포라고도 불린다. 주정뱅이 마차꾼의 딸인 파니는 남의 손에 자라다가 열일곱 살에 조각가 카우달의 눈에 띄어 모델이 되고 동거녀가 된다. 그런 그녀를 시인 라구르너리가 달콤한 시로 유혹하고 파니는 새로운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그 또한 삼년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 그녀는 또 다른 예술가의 손에 넘어간다. 파니의 남성편력은 그런 식으로 이십년 가까이 이어지는데, 그러다가 한 가면무도회에서 장 고셍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소설의 서두이다. 파니는 무엇보다도 장의 젊음에 반한다.


스물한 살의 미남 청년 장은, 파니를 뮤즈로 희롱하거나 숭배한 예술가나 부르주아들이 갖고 있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스물한 살의 나이와 단지 사랑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단순함,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게 파니의 생각이다. 열다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곧 두 가지 장애에 부딪힌다. 하나는 파니의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의 계급차다. 남부 프로방스 출신으로 파리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았던 장은 파니의 남성편력을 알게 되면서 당혹감을 느낀다. 파니가 내뱉는 저속한 말들도 불편하게 생각한다. 장은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외교관이 되기 위해 파리에 상경했으며 시험에 합격한 뒤 연수기간 동안만 한시적으로 파니와 동거하리라 생각한다. 사회통념상 하층계급 출신의 ‘매춘부’ 파니는 동거 상대는 될지언정 배우자는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니와의 관계에 염증을 느끼던 장이 이렌느라는 젊은 처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를 “더러운 부르주아!” “화냥년!”이라고 부르면서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보인 상태였다. 비록 파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장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지만 장에게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렇게 파니를 떠난 장이 이렌느와 결혼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로 복귀하면서 끝난다면 자연스런 소설의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도데는 방향을 튼다. 파니가 사랑했던 가난한 조각가 플라망이 위조수표 발행 혐의로 구속됐다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장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금 파니를 찾아간다. 이 선택의 결과로 장은 이렌느와의 파혼과 아버지와의 의절을 대가로 지불한다. 그는 다만 외교관으로 파니와 함께 페루로 가려고 한다. ‘시적 선택’이라고 할 만한데 마지막 순간 파니는 자신이 그런 선택에 동참하기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이유로 장을 거부한다. 도데의 <사포>가 보여주는 것은 이렇듯 엇갈리는 시적 진실과 산문적 진실의 조우이다.


20. 0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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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

14년 전에 쓴 글이다. 벤야민이나 데리다의 글을 한창 읽을 때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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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타타르키비츠와 미 개념

13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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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이 어쨌다구?

12년 전에 쓴 글이다.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한창 읽을 때였던 듯. 세계문학 강의 때문에 한동안 시간을 낼 수 없었는데 상반기에 강의책을 몇 권 갈무리하게 되면 밀린 독서로 돌아갈 생각이다. 워밍업 차원에서 다시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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