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64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 모파상의 단편들을 강의하면서 다시 읽은 '목걸이'에 대해서 적었다. 데뷔작이자 대표작 '비곗덩어리'를 다루려고 했으나 분량을 고려해서 더 간단한 작품을 골랐다. 강의에서는 '비곗덩어리'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주간경향(20. 02. 17) 허영심이 낳은 불행, 자본주의 사회의 진실


안톤 체호프와 함께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기 드 모파상은 한국에도 일찌감치 소개된 작가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빼어난 데뷔작 <비곗덩어리> 이후 약 300편의 단편을 통해 단편소설의 규칙을 새롭게 창조했다. ‘모파상 단편’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고 할까. 그런 인상을 각인시켜준 작품이 널리 알려진 단편 <목걸이>다.


여기 아름답고 매력적인 한 여성이 있다. 의당 부유하고 저명한 남자와 결혼하여 호사스러운 삶을 누려야 할 것 같은데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아무런 기회도 잡지 못하고 평범한 하급 공무원의 아내가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면 또 그런 처지에 적응하여 살 수 있을 터인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운명 혹은 운명의 착오가 자신에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누려야 할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고통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마틸드 루아젤이다. 마틸드는 계급과 의식이 분열된 전형적인 사례다. 하층계급에 속하면서도 의식과 감각은 상류층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녀에게는 근사한 옷이나 보석이 없었지만 그런 것을 갖고 싶어했고,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기숙학교 시절의 부유한 동창 친구가 한 명 있었지만 만날 때마다 속상한 마음이 들어서 비탄에 빠졌고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발단이다. 더 진행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은 어느 날 남편이 들고 온 초대장이다. 장관이 개최하는 연회에 초대되었다고 해서 남편은 의기양양해 하지만 마틸드는 화부터 냈다. 연회에 입고 갈 옷이 어딨냐는 것이다. 남편은 몰래 모아놓은 비상금을 다 털어서 드레스 비용으로 내놓는다.

그렇지만 의상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마틸드에게는 마땅한 장신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여자들 사이에서 가난한 티를 내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것은 없다며 마틸드는 울상이 된다. 남편은 부유한 동창에게 부탁해보라고 제안하고 마틸드는 오랜만에 친구를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놓는다. 친구는 흔쾌히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주고, 마침내 연회 날 마틸드는 화려한 성공을 거둔다. 마땅한 의상과 장신구를 갖춘 그녀는 다른 여자들보다 더 예쁘고 우아하고 매력적이었으며 남자들의 주목을 한껏 받았다. 마틸드는 달콤한 승리감에 도취되었고 들뜬 행복감을 만끽했다. 그렇지만 마틸드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목에 걸었던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마틸드와 남편은 이 끔찍한 참사에 경악하여 여기저기 행방을 찾아보지만 허사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거액의 돈을 빌려 같은 목걸이를 구입해 친구에게 돌려준다. 이후 부부는 무시무시한 빚을 갚기 위해 끔찍한 내핍 생활을 하게 된다. 마틸드는 서민계급의 여자들처럼 억척스럽게 생활하며 돈을 아꼈고, 마침내 10년이 지나고 나서 채무를 모두 청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의 주부가 되었고, 이제는 나이도 들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길에서 마틸드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의 동창 친구를 만나 10년 전에 돌려준 목걸이의 진실을 털어놓는다. 친구는 경악하며 마틸드의 손을 잡는다. 자기 목걸이는 가짜였다면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 단편의 교훈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분수를 몰랐던 마틸드의 허영이 그녀의 불행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모파상의 단편은 물질적 부가 계급적 차이를 낳고 그에 따라 시간도 달리 배분된다는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진실과 직면하게 한다. 이 진실은 마틸드뿐 아니라 독자까지도 경악하게 만든다.

20.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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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14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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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12년 전에 <롤리타>에 대해 쓴 글이다. 문학동네판의 새 번역본이 나오기 전이어서 민음사판과 기타 번역본에서 <롤리타>의 첫 단락을 비교해 읽었다. 마침 이번주에도 <롤리타> 강의가 있어서 다시 들여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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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푸슈킨의 삶과 죽음

12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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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올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 4관왕에 올랐다. 많은 이들이 기대와 함께 예견한 결과이지만 그래도 ‘쾌거‘의 의미가 감소하지는 않는다(‘기생충이 바이러스를 삼킨 날‘이라고 중얼거렸다). 봉 감독과 한국영화뿐 아니라 아카데미와 세계영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래 영화의 한 방향성을 이 영화가 제시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영화관에서 <기생충>을 봤을 때(칸 영화제에서 이미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후였을 것이다) 나는 ‘물건‘이 나왔구나 싶었다. 바로 전해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안겨준 께름칙함에서 벗어나게 해준 쾌작이었기 때문에. <버닝>에서 <기생충>으로의 이행은 문학에 비유하자면 세련된 신경향파 문학에서(그러니까 여전히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영리한 계급문학으로의 진화에 해당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강점 덕분에 <기생충>은 한국영화의 성취를 넘어서 대번에 세계영화의 성취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예술사가 하우저는 20세기가 영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20세기 문학은 19세기말에 발명된 영화에 맞서 여전히 한수 위의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폴란드의 거장 키에슬롭스키가 낙담한 대로). 그렇지만 21세기에는? 영화의 역사도 이제는 125년에 이르고 문학에 대한 채무도 거의 청산한 것처럼 보인다. <설국열차>가 내게 불만스러웠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각본상까지 받은 <기생충>은 일단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성취에 크게 힘입고 있다. 봉 감독을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이 각본작업에 참여한 실력자여서다.

<기생충>을 본 날도 나는 한국문학을 비교해서 떠올렸는데 항상 앞에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더는 그렇다고 말할수 없게 되었다. 한국사회의 불평등에 대해서 <기생충>만큼 정확하게, 그리고 실감나게 묘파한 2000년대 한국문학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기생충>은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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