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문학기행 주제에는 두 명의 생존인물이 포함돼 있는데 모두 슬로베니아 관련이다. 앞서 적은 슬라보예 지젝(1949년생)과 페터 한트케(1942년생)다. 오스트리아의 간판작가이면서 독일문학의 새로운 목소리를 대표했던 한트케도 이젠 여든이 넘은 나이이고 지난 201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공식적인 정전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966년에 첫장편(아직 번역되지 않은 <말벌들>)과 문제희곡(<관객모독>)을 발표한 이래로 어느덧 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도 많지만 한편으론 적잖은 작품이 소개돼 있기에 한트케문학에 대해서 뭔가 말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여러 각도와 주제로 접근해볼 수 있겠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건 한트케의 출신(그는 하층계급, 소위 무산계급 출신이다)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슬로베니아와의 관계이다(이들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작품이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의 하나인 <소망 없는 불행>(1972)이다.

어머니의 자살(1971년말.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이었다)이 계기가 돼 쓰인 <소망 없는 불행>에서 사생아 아들 한트케는 어머니의 생애(1920-1971)를 되짚어보면서 외할아버지의 삶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이야기는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과 똑같은 곳에서 50여 년 전에 태어나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그 지역에 쓸 만한 땅은 교회나 귀족 지주의 소유였다. 그중 일부는 대개 수공업자들이거나 가난한 농부들이었던 주민들이 소작하였다. 모두들 너무도 가난해서 땅을 조금이라도 소유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농노라는 신분제도는 형식상 1848년에 폐지되었으나 실상은 그전의 상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민음사판, 13-14쪽)

외가쪽 가계에 대한 설명인데 사실 가난한 소작농과 같은 무산계급은 ‘가계‘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의 부친은 ‘아버지‘가 아니라 머슴으로 살았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서 그의 외가라는 것은 외할아버지대 때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외할아버지는 어떤 인물이었던가.

˝외할아버지는 남의 집에서 태어나 유일한 소유물이었던 축제일 옷이 입혀진 채 제대로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땅속에 묻혔다. 그러나 맨주먹으로 머슴살이를 했지만 몇 세대가 지난 후에는 매일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정말로 편하게 느낄 만한 환경에서 자라난 첫번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빈 곳이 많은 세려증서를 가졌던 첫번째 인물이었다.˝(14쪽)

유감스럽게도 번역문의 상태가 안 좋은데(인용문 앞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한트케의 외할아버지는 장례식도 없이 땅속에 묻히기는커녕 딸이 자실했을 즈음 여든여섯의 나이로 생존해 있었다) 역자가 번역서(2002년 출간)보다 먼저 펴낸 연구서 <페터 한트케 연구>(1995)에서는 같은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남의 집에서 태어나고, 유일한 소유물이었던 축제일 옷이 입혀져 땅속에 묻혀 제대로 장례식도 없이 죽어간, 빈곳이 많은 세례증서를 가졌던 맨주먹의 머슴살이 생활로 몇 세대가 지난후 내 외할아버님은 매일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정말로 집처럼 느낄 수 있었던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첫번째 사람이었다.˝(127쪽)

그러니까 바로 앞세대까지와는 달리 외할아버지는 농노(머슴살이)적 예속상태에서 벗어난 첫번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해방된 농민‘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해방‘은 남성에 한정된 것으로 한트케의 어머니는 여전히 전근대적 예속과 차별 속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곧 한트케의 외할머니는 ˝여자란 이유만으로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불행하다는 의식마저도 결여된 삶을 산 것이 된다(객관적 불행이 주관적으로는 의식화되지 않는 상태다). 그에 비한다면 한트케의 어머니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꼈지만 현실에서는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배움에 대한 열망을 품었지만(˝그건 그녀가 아이였을 때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건 허용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할아버지께 무엇인가 배우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할아버지껜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짓 몇번으로 거절당했고 그 이후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19쪽)

그렇게 하여 그녀는 가능성은 품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이 되는 일에 실패한다. 그러다가 2차대전이 터지고 그녀는 한 독일장교(은행원 출신으로 경리담당 장교였다)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갖게 되지만, 유부남이었던 남자는 그녀를 버린다(‘자기 자신‘이 되려는 시도에서 또 한번의 실패). 주변사람들은 아이에겐 무조건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독일 하사관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한트케란 성을 가진 이 남자가 결국 한트케의 아버지가 된다. 술주정꾼에다 폭력을 일삼았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불행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결국 노년에 병까지 얻게 된 어머니는 아들에게 전보를 보내고 약국에서 미리 구한 수면제를 써서 삶을 마무리한다. 아들은 어머니의 자살이 불행한 삶에 종지부를 찍는 의직적 결단으로 이해하며 슬픔속에서도 긍지를 느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직전에는 첫번째 아내와의 결별이 있었다) 한트케는 어머니의 삶을 되새겨보는 과정에서 자기 존재의 다른 기원과 마주한다. 독일인 아버지와는 다른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 한트케는 오스트리아 남부 케른텐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는데(클라겐푸르트가 주도이며 한트케는 클라겐푸르트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그라츠대학에 진학한다), 원래 케른텐주에는 슬로베니아계 주민이 과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살았다고 한다(독어와 슬로베니아어가 같이 쓰이는 이중언어지역이었다).

1918년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가 남부 케른텐을 정령하면서 이 지역의 운명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데(오스트리아로 남을 것이냐, 유고슬라비아로 편입될 것이냐) 1920년 UN 감시하에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과반수가 오스트리아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투표에서 한트케는 유고슬라비아에 표를 던졌고 이 때문에 주변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꿈꾸었던 동화의 나라‘ 슬로베니아에 대한 한트케의 동경과 애정, 슬로베니아 독립에 유감을 표하면서 세르비아의 유고연방주의에 대한 지지는 (이는 밀로세비치에 대한 지지로까지 이어진다) 어찌보면 외할아버지의 선택을 반복하는 제스처로 보인다. 그것이 정치적, 도덕적 비난을 무릅쓰는 일이라 하더라도.

언젠가 카뮈는 알제리전쟁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이런 식으로 답한다. 만약 진리가 어머니와 함께 있지 않다면 나는 어머니의 편에 서겠다고. 어머니와 진리 사이에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자신은 어머니를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카뮈만큼이나 ‘어머니의 아들‘ 작가의 면모가 뚜렷한 한트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유고 내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한트케는 어떻게 답할까. 나의 상상은 이렇다. 만약 어머니가 정의와 함께 있지 않다면 나는 어머니의 편에 서겠다. 내게 한트케의 문학은 그런 아들의 문학이다.

어제 류블랴나에서 블레드로 오는 버스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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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블랴나의 일정을 마치고 지금은 블레드 호변에 있다. 어젯밤 늦게 류블랴나에 도착해서 오늘 아침일정을 좀 여유있게 시작했는데 류블랴나의 구도심이 워낙에 작아서 예정한 곳들을 다 둘러보고서도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류블랴나에서 블레드까지는 1시간쯤 소요되는 거리. 내일은 블레드호수의 섬 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예정이고 오후에는 클라겐푸르트로 향하게 된다. 무질박물관을 찾게 되면 비로소 문학기행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이전에 적은 대로 류블랴나 방문은 슬라보예 지젝과 페터 한트케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막상 방문을 준비하면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시인과 작가로 프란체 프레셰렌과 이반 찬카르에도 주목하게 되었다(과연 국내에도 소개될 수 있을는지). 오늘 아침 드디어 류블랴나 도심투어를 진행하면 프레셰렌 동상과 함께 그가 사랑했던 여인과 율리아의 부조상을 보게 되었다.

(...)

호수 산책으로(블레드호를 한바퀴 돌았다.두시간쯤 소요) 피곤하여 어제는 일찍 잠이 들었다. 아직 이른 새벽인데 눈이 떠진 김에 어제의 일정을 마저 적는다. 류블랴나 구도심을 둘러보고(프레셰렌광장을 거쳐서 삼중교(일명 삼다리)와 백정의 다리, 용의 다리(용다리) 등을 지나서 류블랴나성에 올랐고 전망대에서 류블랴나 시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흡사 프라하성이나 페트리진언덕 전망대에서 프라하의 전경을 내려다봤을 때의 느낌이 들었다. 프라하의 인구가 130만 정도라고 하니 같은 수도라도 류블랴나는 그 1/4도 되지 않는 규모의 도시다.

류블랴나 구도심 안내는 프라하에서 온 체코 가이드가 해주셨는데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등 발칸여행도 담당하시는 분이라(내년 1월 체코문학기행의 담당가이드이기도 하다) 류블랴나 가이드 경험이 있었다. 함정은 프라하에서 자차로 8시간 운전하여 류블랴나까지 왔다는 것. 마지막까지 류블랴나 가이드 투어가 미정이었던 이유다.

아무려나 가이드의 안내로 구도심 투어를 무탈하게 진행하고 일행은 레스토랑 율리아(페르셰렌의 ‘그녀‘일 것이다)에서 점심을 먹고 류블랴나대학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대학도서관(국립도서관이었다) 내부 로비까지는 구경할 수 있었다. 도서관 건물 앞에서 내게 류블랴나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해주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 류블랴나학파에 대한 간략한 소개강의를 진행했다. 거기까지가 핵심일정.

블레드로 이동하기 전에 한시간반쯤 자유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류블랴니차 강변 블록을 거닐다가 꿈꾸는 책들의 집(House of Dreaming Books)이라는 영어간판 서점에 들렀다. 인연이다 싶어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책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쉽게도 없다고 했고 대신 믈라덴 돌라르의 책 한권(재작년에 나온 영어책이었다)을 꺼내주었다. 반갑게도 지젝에 대해선 자신도 안다면서 서점 앞길을 자주 걸어다닌다고까지 했다. 지젝의 책을 팔 만한 서점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한 서점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길찾기로 검색해보니 바로 대학도서관 거리 쪽에 있었고 나는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10분 남짓 소요.

모양새는 대학구내서점 같은 모양새의 크지않은 서점에는 영어와 슬로베니아어 책들이 꽂혀있었는데 지젝의 책보다 먼저 한강 작가의 책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적의 책은 신간 위주로서가의 한칸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는 류블랴나 방문기념품으로 그의 책(에세이)과 돌라르의 책을 구입했다(돌이켜보니 서점 직원의 사인이라도 받을 걸 그랬다).

블레드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페터 한트케와 슬로베니아란 주제를 염두에 두고 한트케 문학 전반에 대한 소개강의를 했다. 그 내용은 블레드호 얘기와 함께 따로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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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블랴나의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 류블랴나 공항에 도착한 건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지 18시간만이었다(22시간을 넘겼던 스페인문학기행의 기록은 갱신되지 않았다). 공항은 우리 지방공항 수준으로(규모가 더 큰 국내공항도 있으리라) 작고 아담했다. 류블랴나행 비행기도 소형기종이어서(키가 큰 유럽인은 비행기 천장에 머리가 닿았다) 수하물도 바로 나왔다. 주차장 대기하던 픽업버스에 올라 20여분 달려서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숙소에 닿았다. 6층 방에 짐을 푸니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그리고 오늘, 류블랴나의 새벽과 아침을 차례로 사진에 담았다. 비로소 문학기행의 첫날이 밝았다.

어제 늦게 숙소에 든 탓에 오늘은 보통보다 늦게 일정을 시작한다. 류블랴나 구시가 훑어보기가 일정이고 도시의 유일한 대학이라는(류블랴나는 인구가 28만으로 역대급의 작은 수도다) 류블랴나 대학에까지 이르면 슬라보예 지젝과 류블랴나학파에 대해 소개할 예정이다. 그리고 한트케문학에 대한 입문적 소개와 함께 중유럽과 발칸의 경계 문제에 대한 쿤데라와 한트케의 의견차이를 해설하려 한다. 미리 그려본 오늘의 일과다. 오후까지 류블랴나 일정을 소화하면 4시경에는 블레드 호수 쪽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오늘 밤의 숙박지는 블레드 호변이다.

교회 종소리가 가끔 울린다. 그와는 무관하지만 아침을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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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한 건 인친공항을 떠난 지 13시간 반이 지나서였다. 류블랴나행 비행기로 환승하는 것까지는 순조로웠지만, 출발이 늦어지고 있다. 기장의 안내로는 테크니컬한 문제라고 하는데(그 이상은 모르겠다) 최소 30분이상 지연될 모양이다. 한국과는 7시간 시차여서 현지시간으론 밤 10시가 지나고 있다(한국은 새벽 5식가 지났다). 아무래도 자정 안에 숙소에 들기는 어려울 모양이다.

여행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발생하는데 항공편도 예외는 아니다(언젠가 인천공항에서 출발 자체가 1시간여 지연됐던 일이 떠오른다). 장시간 비행에다가 시차까지 겹쳐서 다들 지친 상태인데 탈이 날까 염려된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선 환승대기 시간이 넉넉했지만 서점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대신에 슬로베니아 모더니즘의 대표작가 이반 찬카르(1876-1918)의 이름을 익히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슬로베니아 화폐에 들어간 시인/작가가 두 명인 듯한데 바로 오전에 적은 프란체 프레셰렌과 이반 찬카르다. 슬로베니아어가 소수민족어여서 문학적 성취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은 작가로 보인다(영어로는 몇작품 번역돼 있다).

한트케 연구서를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독립국가의 역사가 짧은 슬로베니아에서는 역사적 시대구분을 왕의 치세나 몇째 공화국이 아닌 작가로 대신한다고 한다. 프레셰렌 시대, 찬카르 시대, 하는 식이다. 나라가 작으니 그만큼 독자가 적어서 작가로선 불리할 터인데 그런 예우를 받는다니 상쇄가 되겠다.

예정보다 한시간 넘겨서 이제 이륙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다음 기록은 류블랴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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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일본문학기행 때 고생한 기억 때문에(역대급으로 공항이 붐볐다) 계획보다 일찍 공항버스에 올랐다(집합시간에 맞춰 7시30분 버스를 타려다가 일찍 눈이 떠진 김에 6시40분 버스를 탔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건 8시10분. 환전하고 유심칩을 구입하니 이번 여행 참가자분들이 눈에 띄었다. 문학기행 모드가 되는 순간이었다(이 모드에선 언제나 여행중인 것처럼 느껴진다. 스위스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공항은 예상보다 한산해서 출국수속을 모두 마치는 데 한시간 남짓밖에 소요되지 않았다(지난번 일본행 시에는 2시간반 이상이 소요됐었다). 모처럼 여유롭게 샌드위치와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어제에 이어서 출발전 소감을 적는다.

이번 여행도 항공편은 루프트한자다(통계를 내보진 않았지만 가장 많이 이용한 항공편 같다). 슬로베니아는 직항이 없어서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게 된다. 환승 대기 시간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서점에 들를지 모르겠다. 2017년 가을 카프카문학기행 때 처음 프랑크푸르트 공항서점에 들렀고 때마침 한강 작가의 영어판 책 두권(<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이 매대에 진열돼 있어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한국작가의 베스트셀러 책이 극히 희소한 때였으니). 그때는 첫 목적지가 빈이었는데 직항이 아니었나 보다. 아무튼 사소한 인연이긴 해도 이후로 프랑크푸르트는 공항서점과 같이 떠올리게 된다.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날아갈 곳은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다. 사실 슬로베니아란 나라와 류블랴나란 도시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전적으로 슬라보예 지젝 덕분이다. ‘동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국내에 소개된 이 철학자의 이름을 접한 건 90년대 후반이지만 책을 정색하고 읽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이고 이후에 나에겐 가장 중요한 동시대 철학자가 되었다(2004년에 타계한 자크 데리다와 함께). ‘지젝거리다‘란 말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는데 내가 바로 그 당사자 중 한명이다(‘지젝 전도사‘였잖은가!). 류블랴나는 내게 그 지젝과 그의 친구들(슬로베니아 라캉학파로 알려진 류블랴나 학파)의 도시였다.

사실 그런 이유만으로 문학기행에 류블랴나를 포함하기는 어려웠을 텐데, 거기에 페터 한트케가 더해지면서 명분이 생겼다(한트케와 슬로베니아에 대해선 따로 다룰 예정이다). 남부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트케는 어머니가 슬로베니아인이다(그러니까 한트케의 외가가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어가 한트케로선 어머니의 언어, 모어인 셈이다. 아버지의 나라(생부와 계부가 독일인이다)와 어머니의 나라(슬로베니아) 사이 오스트리아의 작가 한트케! 한트케문학의 흥미로운 문학지리다.

이 두 사람의 생존 철학자, 작가를 명분삼아 류블랴나를 방문하기로 결정한 뒤, 늦게서야 알게 된 작가가 슬로베니아의 국민시인 프란체 프레셰렌(1800-1849)이다. 류블랴나 도심광장에 동상이 서 있고 광장의 이름 자체가 프레셰렌광장인 데서 그의 위상과 상징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우리에겐 작품이 전혀 소개되지 않아 낯설 수밖에 없는데, 슬로베니아인들에겐 김소월과 한용운을 합해놓은 것 같은 존재다(소월과 만해를 같이 언급한 것은 우리 시인들의 작품 편수가 적어서다).

아마도 류블랴나에서의 첫 일정은 프레셰렌광장을 찾아 그의 삶과 문학을 잠시 음미해보는 일일 듯하다. 온라인에 떠있는 그의 시의 영어본과 한글본(AI번역)을 참고해서 나도 몇마디 소개의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오스트리아문학기행의 본격일정이 그렇게 시작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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