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래저래 바쁜데다가 심난한 일들이 쌓여가고 있지만, 벌여놓은 일이어서 마저 매듭을 짓기로 한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85쪽이다. 각주13) 중간쯤, “외부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연결되는 커플은 처음에 사랑에 빠진 듯이 보이게 하며, 그 후 한 단계씩 외면적인 연결이 진정한 사랑으로 자란다.” 이건 앞에서 얘기된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을 다시 요약/반복하고 있는 대목인데, “사랑에 빠진 듯이 보이게 하며(first pretends to be in love)”는 좀 이상한 번역이다(pretend를 왜 ‘가장하다’라고 번역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서로 가장하지만”이란 뜻이다. 즉 가장(흉내)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해간다는 것.

(10) 이제 다루어지는 영화 <유럽 ’51>의 주인공은 로마의 부유한 가정주부 이레네이다. 그녀는 사교생활에만 관심을 쏟는데, 그녀의 무관심에 대해 보복이라도 하듯이 어린 아들이 자살한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녀는 과거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공장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면서 빈민(역자는 ‘빈자’라고 옮겼다)들을 돕는다. 하지만, 온전한 위안을 얻지는 못한다. 좀도둑을 신고하지 않고 자수를 권하다가 그녀는 법정에 서게 되고, 보호감호 처분을 받은 후에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감방에 갇혀 있는 그녀의 주위로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그녀를 새로운 성녀라고 부르고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에 대한 ‘명백한’ 독해, 즉 ‘즉자적인’ 이해는 이레네가 죄의식의 압력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Irene breaks down because of the unbearable pressure of guilt). 물론 지젝은 죄의식의 진정성을 물으면서 이러한 독해를 뒤집는다. 지젝의 요지는 87쪽에 상술돼 있는데, 그에 따르면(또 정신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큰 타자(the Other)에 편집증적으로 죄의식을 투사함으로써 우리가 맡아야할 책임을 제거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다 ‘근본적인 외상’(radical traumatism; 역자는 ‘진정한 외상성’이라고 옮겼다)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역자는 ‘탈출’로 계속 옮겼는데, 부정적인 뜻이므로 ‘도피’가 더 타당하다) 죄의식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즉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도피하기도 하지만, 죄의식 ‘속으로’ 도피하기도 하다(이에 대한 원문이 내 책엔 누락돼 있다).

(11) 뒤로 넘어가기 전에, 86쪽의 각주14)는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역이다. “우리로 하여금 <독일 영년>에서 에드문트의 자살에 대한 로셀리니의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듯한, 심지어 냉소적이기까지 한 논평을 ‘진정한
희망의 빛’으로 위치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 출현한 이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 좀 길지만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It is this new community of believers emerging as a by-product of Irene's act that enables us to locate properly Rossellini's seemingly unintelligible, even cynical comment on Edmund's suicide in as 'a true light of hope'” 그리고 인용문이 이어지는데, 이 문장은 어려운 구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It-that 강조구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번역돼 있다.

번역의 요지는 “로셀리니의 논평을 ‘진정한 희망의 빛’으로 위치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의)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인데, 'a true light of hope(진정한 희망의 빛)'이 받는 것은 ‘comment(논평)’이 아니라 ‘Edmund's suicide(에드문트의 자살)’이다. 해서 다시 옮기면, “<독일 영년>에서의 에드문트의 자살을 ‘진정한 희망의 빛’이라고 한, 로셀리니의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심지어 냉소적이기까지 한 논평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레네의 행위의 부산물로서 출현한 이 새로운 신자 공동체이다.”

(12) 같은 각주에서, 중간의 ‘희망의 강세(accent of hope)’는 좀 어색하다. ‘희망에 대한 강조’가 어떨까 싶다. 그리고, ‘자살적인 근본적 움츠러듦의 행위(the suicidal act of radical withdrawal)’에서 ‘withdrawal’은 이후에 여러 차례 나오는 단어인데, 역자는 ‘물러남’ 등으로 매번 다르게 옮기고 있다. 가급적이면 통일시켜줄 필요가 있고, 나는 ‘물러남’이나 ‘철회’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 나앉는 행위를 말하는바, 이것이 자살적인 행위, 혹은 상징적 자살 행위이다(이 절의 제목은 “왜 자살은 유일한 성공적인 행위인가?”이다).

(13) 이후 88-89쪽에서 설명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큰 타자’의 기능이다. 그것은 ‘숨은 작인(hidden agency)’이면서 동시에 ‘순수한 외관의 작인(the agency of pure semblance, of an appearance)’이다. 그리고 90-92쪽에서 이 순수한 외관에 대한 강박적인 논리의 끝장을 보여주는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몰락이다. 대중(mass: 역자는 ‘군중’이라고 옮겼는데, 이건 선택의 문제이지 싶다)이 그를 ‘큰 타자’로 간주하는 게임을 더 이상 계속하려고 하지 않게 되자 그는 무력하게 몰락했다(그는 원래 무력했다). 원죄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인데, 신은 항상 이미 죽어 있지만(‘항상 이미’라는 건 데리다도 아주 즐겨 쓰는 문구이다), 인간이 원죄의식을 떠맡음으로써 그는 ‘비존재’의 경험에서 면제된다.

다시 <유럽 ’51>로 와서, 93쪽. 결론적으로 “그녀(이레네)의 시도는 실재계를 죄의식의 상징적 세계로 통합함으로써, 그것을 이데올로기적 장 내에 위치시키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실재계의 외상적인 조우(그녀의 아들의 자살 행위)를 되찾으려는 절망적인 시도일 뿐이다.” 원문은 "Her attempt ... is to recover the traumatic encounter of the Real (her son's suicidal act) ..."로 나가는데, 나는 ‘recover’가 (물론 ‘되찾다’ ‘회복하다’란 뜻도 있지만) 여기선 ‘보상하다’란 뜻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본다(외상적인 조우를 되찾고자 한다는 건 논리적으로 좀 이상하다).

‘절망적인(desperate)’은 ‘필사적인’으로 옮기고 싶고. 즉, 이레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실재와의 외상적인 조우를 상징계 속에 통합함으로써(간단히 말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할당함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고자 시도한다. 조금 내려가서 ‘목적격적인 잔여-배설물(objectival remainder-excrement)’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언어학을 전공한 친구에게도 확인해 본 결과 objectival이란 단어는 ‘목적격(objective)’의 형용사로 쓰이지 않는다. 그냥 ‘대상적’이란 뜻이지 않을까 한다.

(14) 이제 세번째 영화 <스트롬볼리>. 에스토니안 망명객 카린의 이야기인데, 그녀는 2차대전시 이탈리아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스트롬볼리라는 화산섬에서 온 가난한 어부와 결혼한다. 그런데 섬에서의 가부장적인 폐쇄적인 생활에도 숨이 막힌 카린은 분화구가 있는 산길을 따라가다가, 분화구에서 올라온 증기에 질식되어 사라진다(“오 신이시여!”란 소리와 함께). 그녀가 떠나는 것인지 마을로 되돌아가는 것인지 이탈리아판에서는 열린 결말로 남겨놓는다. 이러한 결말에서 보면, 카린은 어떠한 행동(action)도 완수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행위(act)는 완수되었다(action과 act는 그렇게 구별된다).

지젝이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는바, 이 행위란 상징적 자살(=zero point) 행위이다. 96쪽에서 행위에 대해 재정의하고 있는 대목: “라캉적 의미에서의 행위란 상실 속에는 상실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가 포기 자체를 포기할 수 있게 되는 이 물러남일 뿐이다.”(And the in the Lacanian sense is nothing but this withdrawal by means of which we renounce renunciation itself, becoming aware of the fact that we have nothing to lose in a loss.) 오역이랄 건 없는데, 조금 풀어서 다시 번역하면, “라캉적 의미에서의 ‘행위’란 바로 이러한 물러남(철회)일 뿐인바, 어떤 상실 속에서 우리가 상실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우리는 이 물러남을 통해서 포기라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포기할 게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자신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이래가지고야 도대체 언제 끝날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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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하 지젝은 로셀리니가 버그만을 주연으로 찍은 영화 <독일 영년>, <유럽 ’51>, <스트롬볼리> 3부작을 차례로 분석한다(유감스런 것은 내가 이들 영화들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본 버그만 주연의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가스등> 등이다). 77쪽에서는 예비적으로 <로베레 장군> 얘기를 하는데, 독일 게슈타포가 전설적인 빨치산 로베레 장군을 닮은 좀도둑에게, 레지스탕스의 기밀을 빼내기 위해서 로베르 장군 역을 시키지만, 이 좀도둑이 진짜로 로베레 장군으로서 죽는다는 내용이다(하는 수없이, 독일군은 그를 ‘로베레 장군’으로서 총살한다).

가운데 부분에서, “독일인들에게 그들이 찾는 이름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에서 ‘이름(names)’은 ‘이름들(명단)’로 복수형이 돼야 한다. 물론 이 ‘이름들’은 게슈타포가 찾는 레지스탕스 조직원들의 이름이다. 그러니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돼야 한다. 이 ‘가짜 로베레 장군’ 사례를 일컬어 지젝은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혹은 ‘상징적 위임 떠맡기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78쪽은 그에 대한 자세한 부연설명이다.

(5) “이러한 변증법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모든 인간 행위(성취, 실행)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행위(자세, 가장)일 뿐이라는 통념적인 지혜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다.” 이게 요점인데, 나는 ‘자세(posture)’란 번역이 맘에 들지 않는다. 이건 가장(pretence)과 유사한 의미로서 ‘포즈’라고 옮기는 게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의 통념적/상식적 지혜란 것은 모든 행위가 다 (진정성이 결여된) 포즈라는 것이다. 하지만,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에 의해서 이러한 지혜는 전복된다. 이어지는 문장, “우리가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인격화의 진정성, ‘우리의 행위(자세)를 진지하게 취하기’가 갖는 진정성이다.”(78쪽) 이것의 원문은 이렇다: “the only authenticity at our disposal is that of impersonation, of "talking our act(posture) seriously.”(34쪽)

역자는 ‘impersonation’을 ‘인격화’라고 옮겼는데, 물론 이 단어는 ‘인격화’ ‘의인화’란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흉내’란 뜻이다. 앞의 사례에서 좀도둑이 로베레 장군을 ‘흉내’냈다고 말하지, ‘인격화’했다고 말하지 않는다(‘인격화’란 ‘사물화’와 반대되는 말로서, 말 그대로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흉내의 진정성, 즉 ‘우리의 (연기)행위(혹은 포즈)를 진지하게 하기’의 진정성이다.”(로베레 장군 역을 정말 진지하게 연기한 좀도둑처럼!)

여기에 붙어 있는 각주5)에 바로 나오는 것이지만, act란 말은 굉장히 다의적이다. 그것은 상상적 차원에서 fake, show, performance이고, 실재의 차원에서 doing, exertion, stroke이며, 상징적 차원에서는 edict, decree, ordinance, enactment이다. 또한 독일어에서 ‘Act’는 누드화(the painting of a nude human body)이기도 하다(영어에서도 act는 성행위란 뜻을 내포한다). 이상을 종합해서, 나는 ‘act’가 우리말로는 대략, 연기, 행위, 성행위, 법(조문)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부분에서 ‘행위’ 대신에 ‘(연기)행위’를 고른 것은 그러한 문맥을 좀 살리기 위해서이다.

(6) 79쪽부터는 본격적으로 3부작 얘기이다. 지젝은 이 세 편의 영화에는 어떤 미끼(함정)가 있다고 말한다. 당연히 세 영화에 대한 손쉬운 독해/이해를 피해야 할 것이다. “즉, 만일 우리가 ‘자연발생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지각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원문은 “if we perceive it in a 'spontaneous' way, we are inevitably led stray.”이다. 뭐가 문제냐고? 내가 맘에 안들어 하는 건, “‘자연발생적인’ 방식”이란 말이다. 번역은 단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문맥을 옮기는 것이다(더 확장시켜서 거창하게 말하면, 문화를 옮기는 것이다). 일대일로 대응하는 단어들을 옮긴다고 해서 문맥이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번역을 잘 하는 게 아닌 것은 영어실력이 이러한 문맥에 대한 이해력을 보증해 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한 여자친구가 <동갑내기 괴외하기> 같은 영화를 보고(오늘자 <씨네21>을 보니까 평론가 정성일이 이 영화 등과 ‘귀여니’ 현상에 대해서 다소 흥분한 글을 썼던데) 순진하게 받아들이며 재미있어 할 때(이 영화 정말 짱이다!), 우리는 그 여자친구가 이 영화를 ‘자연발생적’으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넌 영화를 너무 자연발생적으로 이해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spontaneous' way”란 표현이 이 문맥에선 ‘깊은 생각(고려) 없이’란 뜻이므로, 똑같이 좀 현학적인 어휘이긴 하지만, 이럴 땐 ‘즉자적’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즉, 만일 우리가 ‘즉자적인’ 방식으로 이 영화들을 본다면, 우리는 필시 길을 잃게 된다.”(원문에서 ‘it’이 받는 건 ‘each of these films’이다.)

(7) <독일 영년>의 내용은 1945년 점령지 베를린에서 10살된 소년이 나치 교사의 영향 하에 아버지를 죽이고 방황하다가 아파트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콘크리트 폐허 더미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이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전체가 그것을 위해 찍혔던 장면이란 물론 베를린의 폐허 속을 헤매는 에드문트의 마지막 방황과 그의 자살이다.”(80쪽) 이것의 원문은 “The scene for which the entire film was shot is of course the final wandering of Edmund in the ruins of Berlin and his suicide.”(35쪽)이다.

번역문에 내용상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사소한 거지만, 우리말에서 ‘그것’이란 지시대명사는 앞엣말을 받지 뒤엣말을 받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번역문은 말 그대로 번역투의 문장이다. 좋은 번역, 좀더 섬세한 번역은 그러한 (우리말로는 어색하거나 비문법적인) 번역투의 흔적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번역이다. 해서, 나라면, “이 영화 전체의 초점은 물론 베를린의 폐허 속을 헤매는 에드문트의 마지막 방황과 그의 자살 장면에 맞추어져 있다.”라고 옮기고 싶다.

이 영화에 대한 즉자적인 독해는 한 어린 소년이 못된 교사의 사주에 의해서 (부친살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그 죄의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죄지은 자가 벌받는 이야기라고 읽는 식이다). 하지만, ‘뒤집기의 천재’인 지젝은 이 에드문트의 (자살)행위를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적인 ‘충분한 지반’에도 정초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정초된 행위”로서의 ‘자유의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서 에드문트는 ‘성자(saint)’이다.

(8) 역시 내용에는 지장이 없는 지적인데, 81쪽에서 “<독일 영년>을 만든 지 2년이 지난 다음 로셀리니는 성 프란시스에 관한 영화 <프란체스코>를 찍는다.”는 어떤가. 여기서 ‘프란시스(Francis)’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도사 프란체스코의 영어식 표기이다. 이 번역의 우스꽝스러움은 가령, “플레이토(Plato)에 관한 유명한 영화 <플라톤>”이라고 대치시켜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성 프란시스’는 ‘성 프란체스코’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부적절한 번역은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번역에 대해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91쪽에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영어식 ‘부카레스트’로 옮긴 데에서도 반복된다.

한편, 각주 7)에서 ‘순수 지출점(a point of pure expenditure)’. ‘expenditure’는 바타이유에게서 흔히 ‘낭비’나 ‘탕진’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a point of pure expenditure’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저주의 몫>에 나올 거 같기도 하고... 이 각주의 뒷부분(82쪽)에는 ‘인디언 신민들(Indian subjects)’란 말이 나오는데, 남미의 원주민은 ‘인디언’이 아니라 ‘인디오’라고 번역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subject'도 이 문맥에서 '신민들'이라고 옮기는 것은 너무 고상해 보인다. 해서, 나라면 '피지배 인디오들'이라고 옮기고 싶다.

(9) 82쪽 본문 맨아래줄. “모든 ‘병리적’ 동기화로부터 구출된 의지”에서 ‘구출된(delivered)’은 ‘해방된’으로 옮기고 싶다. 이후에 85쪽까지는 별 문제 없이 읽힌다. 84-5쪽에서 지젝은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이 어째서 히치콕의 <로프>보다 뛰어난 작품인가를 해명한다. <독일 영년>의 상황에 대입시켜서 말하자면, <로프>는 소년을 사주한 나치 교사에 대해서, “그러니까 애들한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교훈을 제시하는 정도에 머문다는 것. 때문에, <로프>에는 ‘자유의 지점(point of freedom)’이 결여돼 있다.

(<유럽 ’51>부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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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2장 “왜 여자는 남자의 징후인가?”는 두 개의 절로 구성돼 있다. (1)왜 자살은 유일한 성공적인 행위인가? (2) ‘세계의 밤’. 이 두 절을 통해서 집중적으로 지젝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라캉적 의미에서의 ‘행위(act)’이다. 사실 행위란 개념은 그의 전 저작들을 관통하는 키워드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상당히 포괄적이면서 깊이 있는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이 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책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이 장 역시 약간 직역투이긴 해도 무난하게 읽힌다. 하지만, 일부 오역들 혹은 좀 내키지 않는 번역들도 드물지는 않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먼저 지적한 이후에 핵심을 정리하기로 한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는 원저는 도서관 책을 직접 복사한 것인데,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물론 실수이지만) 각 페이지의 마지막 두 줄씩이 누락돼 있다. 이후에 이 책이 도서관에서 실종도서가 되는 바람에 다시 복사할 수도 없고 해서, 바보 같은 책이 돼 버렸는데, 어쨌든 그런 까닭에 거기에 해당하는 부분들의 오역은 여기서 지적할 수 없다.

(1) 첫문장에서 ‘진정한 대사령(大赦令)’은 ‘true act of grace’의 번역이다. 물론 사전에 보면 ‘act of grace’가 ‘친절한 행위’ 혹은 법률용어로 ‘특사법(特赦法)’이라고 돼 있고, 후자의 경우 ‘act’는 법(조문)이란 뜻이다. 그런데, “로베르토 로셀리니에게서 잉그리드 버그만(역자는 ‘버그먼’이라고 표기했는데, 나는 호응관계를 고려하여 ‘버그만’이라고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과의 만남이라는 기적”(사실, 이 장의 제목에서 말하는 여자는 바로 잉그리드 버그만이고, 남자는 감독 로셀리니이다)이 왜 특사나 사령(赦令)에 해당할까?(로셀리니가 감옥에 있었나?) 순전히 비유적인 의미에서 그런 뜻을 함축할 수도 있겠으나 다소 억지스럽다(비유적인 의미라면 ‘ ’나 이탤릭체가 쓰였을 것이다). 게다가 ‘대사령’? 그렇게 번역되려면, 원문에 대문자가 쓰여야 할 것이다. 나라면, 이건 그냥 더 포괄적인 의미로 ‘진정 은혜로운 행위’라고 번역하겠다.

(2) 이어지는 문장에서 ‘무시무시하게까지 여겨질 방식’은 ‘un almost uncanny way’의 번역인데, uncanny를 ‘무시무시하게’로 옮긴 것은 이 문맥에선 좀 오버이다. 이 uncanny의 계기가 될 만한 것은 뒤에 설명되지만, 로셀리니가 찍은 <무방비 도시>(1945)에서 악역을 맡은 두 인물의 이름이 잉그리드(Ingrid)와 베르크만(Bergmann)이었다는 것이다(Ingrid는 독일식으로 ‘잉그리트’라고 발음될 거 같은데, 여기선 ‘잉그리드’라고 해주는 게 좋을 거 같다. 역자는 본문에선 ‘잉그리트’라고 옮기고 각주2)에서는 ‘잉그리드’라고 옮겼다). 물론 이 두 이름을 합치면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이 된다. 아마 이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잉그리드 버그만은 한편으론 놀라기도 했을 것이고, 그래서 할리우드에서의 모든 것(예정된 부와 명성)을 포기하고 로셀리니에게 사랑의 편지를 쓴다(이러한 버그만의 행위가 지젝이 말하는 ‘행위(액트)’의 한 모델이다). 그리고 그 편지는 우여곡절 끝에 로셀리니에게 전달되는 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uncanny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uncanny는 프로이트의 용어이며, 우리말로 이에 근접한 것은 ‘섬뜩함’ 정도이다. 즉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것을 말한다. 물론 ‘섬뜩함’의 장점은 우리에게 낯익은 어떤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도 이 말을 쓴다는 점에 있다(이 경우 “갑자기 섬뜩해지지 않았겠니!”라고 할 때처럼 ‘갑자기’ 등과 호응해서 쓰인다. 그리고 그런 것이 프로이트가 의도한 의미에 가깝다). ‘기괴한 낯설음’ 혹은 ‘두려운 낯설음’이라고 풀어주기도 하지만, 이럴 경우 ‘낯익은 낯설음’이란 의미가 살아나지 않으며 두 단어로 풀어져 있어서 개념어로 사용하기에 번잡하다. 물론 uncanny란 말 자체도 독어의 Unheimliche에 엄밀하게 대응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섬뜩함’이란 역어가 uncanny에 그다지 뒤질 것도 없다(더 적합한 역어가 있다면 제안해 주시기 바란다). 해서, 나의 제안은 ‘무시무시하게까지 여겨질 방식’을 ‘섬뜩한 방식’으로 옮기는 것이다.

(3) 75쪽에는 오스틴(J. L. Austin; 1911-1960)의 화행(speech act)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액트’를 설명하고자 하는 지젝에게서 이 ‘스피치 액트’(발화행위라고도 번역한다)가 중요한 참조사항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흔히 자신의 제자인 설(John Searle)과 함께 묶여서 오스틴/설의 화행론이라고 칭해지는 이 이론은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서도 중요한 전거가 되고 있으므로 한번쯤 살펴두시는 것이 좋겠다.

 

오스틴의 주저인 (1970, 166쪽)는 옥스포드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오스틴이 1955년에 하버드대학의 ‘윌리엄 제임스 강좌’에서 강연한 내용을 펴낸 것인데, 우리말로 두 가지 번역본이 있다. 장석진 교수가 옮긴 <오스틴: 화행론>(서울대출판부, 1990)과 김영진 교수가 옮긴 <말과 행위>(서광사, 1992)가 그것이다. 번역은 대조해 보지 않아서,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하진 못하겠는데(후자는 절판인 것 같다), 전자는 인터넷 서점에서 3,000원도 안 하니까 얼른 구입하시기 바란다(요즘은 배송료도 안 문다). 지젝이 ‘표준적인 교범’이라 지칭하고 있는 책이 바로 이 <화행론>이다.

 

 


 

 

 

 

 

 

참고로, 존 설은 지난 2000년에 제4회 다산철학강좌에 초빙되었던(지젝은 제7회였다) 세계적인 언어철학자이자 심리철학자이며, 그의 책으론 강연집인 <합리성의 새로운 지평>(철학과현실사, 2001)과 방한에 즈음에 출간되었던 <정신, 언어, 사회>(해냄, 2000)가 있다. 데리다의 오스틴 비판((1977)란 논문) 때문에 촉발된 데리다와 (오스틴을 대신한) 설의 논쟁은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의 7장을 참조할 수 있다. 설에 대한 재반박으로 데리다가 내놓은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유한책임회사 Limited. Inc>이다.

이 화행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말과 행위의 이분법(‘통념적인 지혜’)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다. 말이 곧 행동이기에. ‘언어를 통한 치료(talking care)’를 의도하는 정신분석학이 이 화행론과 궁합이 잘 맞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라캉은 이미 오스틴이 공식화하기 이전에 ‘화행이론가’였던 것이다. 76쪽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문자 앞의 avant la lettre’라고 옮긴 것은 (이미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대해서도 같은 걸 지적한 바 있는데) 오역이다. 그것은 “(라캉이) 화행이론이란 말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화행이론을 공식화하고 있는 것 아닌가?”로 옮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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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번역된 지젝의 단행본 저작은 모두 7권이다(*이 글은 지난 1월에 씌어졌다). 아마도 내년까지는 4-5권이 더 번역돼 나올 듯하다. 그 중 5권이 2001-3년 사이에 나온 것들이다. 이 정도면 지젝 ‘르네상스’는 아니더라도 푸코나 들뢰즈의 경우처럼 일종의 ‘붐’은 형성할 수 있을 터인데, 현재의 사정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여러 차례 지적된 바대로,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함량 미달인 탓이다(그것은 상대적으로 푸코나 들뢰즈 번역의 경우 오역이 없지는 않더라도 ‘찬물’을 끼얹을 정도는 아니라는 반증도 된다). 이 번역의 수준은 책의 판매량과 직결돼 있는데(그만큼 독자들의 안목이 예리하다는 의미도 된다), 알라딘 통계를 기준하여 순위를 매기면([ ]안은 원저의 출판년도),

1. <삐딱하게 보기>(김소연 외, 1995)[1991]
2.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2002)[1989]
3.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주은우, 1997)[1992]
4.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김종주, 2003)[2002]
5. <환상의 돌림병>(김종주, 2002)[1997]
6. <향락의 전이>(이만우, 2001/2)[1994]
7. <믿음에 대하여>(최생열, 2003)[2001]

이다. 물론 판매량을 결정하는 요인에 출판년도도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신통찮은 번역의 경우에 절판되는 것이 예사이므로, 오랫동안 팔리고 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대략 그 번역의 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순위에 동감한다. 이 7권에 대해서 일부분이라도 대략 원저와 대조해 본 결과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데올로기>를 빼면, 잘팔리는 두 권의 ‘영화책’은 지젝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이전에 번역된 저작이라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그렇겠지만, 나는 지젝의 이름을 영화학도에게서 처음 들었는바,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화학을 하는 사람들 간의 입소문에 의해 지젝은 처음 우리의 ‘지식장’ 혹은 ‘지식시장’에 편입됐다.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바, ‘현대이론’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영화이론을 공부하는 영화학도에게서 숭배하건 무시하건 간에 라캉과 정신분석학은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라캉에 대한 열정을 보라). 요즘은 아무리 무식한 영화학도라고 해도 ‘라캉’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없이 영화과를 졸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교수가 덩달아 무식하지 않는 한).

그런데 그 (신화적이면서도 난삽하기 짝이 없는) 라캉이론의 영화에 대한 개입(방식)을 가장 쉬우면서도 현란하게 보여준 이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 ‘지적 영웅’ 지젝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앞으로 나올 또다른 ‘영화책’ <들뢰즈와 결과들 Deleuze and Consequences>(2004)의 번역이 영화학도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알다시피 얼마전에 출간됐다).

물론 지젝의 ‘영화책’들이 읽기 쉽다는 것은 순전히 상대적인 의미에서일 뿐이다. 당연히 지젝을 읽는 것은 라캉을 직접 읽는 것보다 10배는 쉽다. 그리고 그의 ‘영화책’들은 현재 번역/교정중이라는 <불안정한 주체 The Ticklish Subject>(1999)나(<까다로운 주체>로출간됐다)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 Tarrying with the Negative>(1993) 등의 ‘철학책’(독일관념론을 다룬다)보다는 3배쯤 쉽다(물론 이들 ‘철학책’들에도 영화 얘기가 들어가 있긴 하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비교적 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에게 그냥 만만하게 읽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나는 <삐딱하게 보기>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를 재미있게 완독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해서, 지젝을 처음 접하는 이들이 우리말로 지젝을 읽고 즐길/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다소 ‘계몽적인’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거창한 것은 아닌바, 비교적 읽을 만한 우리말 번역본을 같이 읽으면서 중요한 핵심을 정리/이해하고, 일부 오역들은 교정해 나가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년쯤인가(혹은 2002년에) 나는 <향락의 전이>에 대해서, 이러한 방식을 시도해 보고자 했는데, 워낙에 견적이 안나오는 번역서라 그걸 교정하면서 함께 읽는다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내가 조금 게으르고 다른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그래서 정한 원칙은 우선 읽을 만한 번역을 읽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정한 커트라인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이다. 그게 허리인바, 나머지 4권은 차라리 없으면 더 좋을 허리이하적인 번역서들이다(이런 번역서들은 각자의 골방에서 사적으로만 음미하는 게 좋겠다). 내가 권장하는 것은 그나마 있어서 다행인 번역서 3권을 한달에 한권씩이라도 독파해 보시라는 것이다. 그 읽을 순서는 좀 임의적이지만, 나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서 <삐딱하게 보기>로, 그런 후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전이해 가겠다. (가령, 쿤데라님처럼) 영화를 안 좋아하는 분들은 그냥 <이데올로기>로 바로 들어가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이겠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원제(Enjoy your symptom!: Jacque Lacan in Hollywood and out)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라캉 정식분석학의 핵심개념들을 헐리우드 안팎의 영화들을 소재로 하여 설명하고 있는 ‘계몽적인’ 책이다. 딜런 에반스가 쓴 <라캉 정신분석 사전> 같은 류의 책들이 보다 직접적인 용어설명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지젝의 영화책들은 그 추상적인 용어 혹은 개념들에 ‘실감’이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비유컨대, <사전>이 비타민이나 영양제(라캉 캡슐)라면, 지젝의 책들은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라캉 식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한 식탁이라면, 누구라도 충분히 즐길만하지 않을까?.. 

다음번에 다룰 내용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2장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얘기와 함께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를 설명하고 있는(동시에 데리다에 대한 라캉주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1장은 내가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내 기억에 평이하게 읽혔던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간다(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는 있겠다). 혹 읽으신 분들이 질문이나 문제제기를 하실 경우에는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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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름슬레우를 다룬 글에서 미루어 두었던 숙제를 해치우기로 한다. 검토의 대상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에서 옐름슬레우와 관련된 대목들이다. 2장 ‘언어학과 문자학’ 중 115-121쪽.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부분을 예로 들고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다. 내가 참고한 것은 스피박(G. Spivak)의 영역본 'Of Grammatology'(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6)이다.



먼저, 115쪽 하단부: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이며 물질적인(음성적, 문자적 등) 실체(또 의미적, 심리적, 논리적인 실체)와 독립되어 있다.” 이 대목은 괄호가 잘못 쳐져 있는데,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 실체(의미적, 심리적, 논리적), 물질적 실체(음성적, 문자적 등)와 독립적이다.”로 고쳐져야 한다. 이어서 “우리가 위에서 제안했듯이, 소리와 의미의 단위는 여기서 놀이의 확실한 폐쇄이다.”/ “The unity of sound and of sense is indeed here, as I proposed above, the reassuring closing of play.”(57쪽)

바로 이전에 얘기되고 있는 것은 엘름슬레우의 언리학(Glossemantics) 개념들이 갖는 특징으로서의 형식성(formality)이다. 이에 따르면, “소리와 언어 사이에는 아무 연계성”이 없다.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유희’이다. 이것은, 소쉬르식 용어를 쓰자면, 기표와 기의간의 안정된 결합이 유예되면서, 즉 기표가 미끄러지면서 벌어지는 유희이다. 그런데, 소리라는 단위나 의미라는 단위는 자연스레 그들간의 안정적인 결합을 가정하면서 이러한 유희를 중단시킨다. 해서, “우리가[내가] 앞에서 주장한 바 있듯이, 소리 단위와 의미 단위는 정말로 그러한 유희를 확실하게 중단시킨다[는 뜻을 갖는다].”(난 처음에,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라고 봤는데, of가 양쪽에 걸린 걸로 봐서는 각각의 단위로 해석돼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the unity of sound and sense’라고 해석하면 더 이해하기 편하다.)

다음, 옐름슬레우로부터의 인용: “...그러나 어느 경우든 현대 언어학이 인지하듯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에 대해 변별적이지 못하다.”(118쪽) 변별적이지 못하다라는 말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통시적 고찰=공시적 기술’이 되는가? 문맥으로 봐서,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description)과 ‘무관하다’고 옮겨져야 한다(영역은 A are irrelevant for B 구문이다).

이어지는 언어학자 울달 인용문.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의 차이라는 개념 덕분에 우리는 언어와 문자가 대체로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 표현들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for it is only through the concept of difference between form and substance that we can explain the possibility of speech and writing existing at the same time as expressions of one and the same language.”(58-9쪽)

문제는 speech를 ‘언어’라고 옮긴 것.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건,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이다. 따라서 ‘언어와 문자’는 ‘음성과 문자’로 고쳐져야 한다. 다시 옮기면,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라는 서로 다른 개념 덕분에 우리는 음성과 문자가 각각 같은 언어에 대한 동등한 표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부분: “만약의 공기의 유출 또는 잉크의 유출, 이 두 가지 실체 중 하나가 언어 자체의 일부분이라면 언어를 바꾸지 않고 이 둘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If either of these two substances, the stream of air or the stream of ink, were an integral part of the language itself, it would not be possible to go from one to other without changing the language” 여기서 ‘공기의 유출’은 ‘음성(언어)’이고 ‘잉크의 유출’은 ‘문자(언어)’이다. 잘못 옮긴 건, ‘일부분이라면’이라고 한 것. 완전히 반대로 옮긴 것인데, ‘전체라면(integral)’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다시 옮기면, “만약에 공기의 유출[음성]이나 혹은 잉크의 유출[문자]이라는 이 두 가지 실체 중 어느 하나가 한 언어의 전체라면, 그 언어를 바꾸지 않고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L1(언어1)=S(음성)이거나 L2(언어2)=W(문자)라면, 당연히 S에서 W가 교호하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언어(L1, L2)가 필요하다. 이건 형식논리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옐름슬레우와 그의 코펜하겐학파가 소쉬르처럼 음성언어에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문자언어 혹은 표기적(graphic) 표현-실체에 의존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개방한다는 것. 이들은 음성과 문자에 표현적 실체(substance of expression)로서의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들은 서로 독립적이며 서로를 대신할 수 없다.

해서, “언리학은 문학적 요소에 대한 접근과 문학에서 형식의 놀이와 규정된 표현 실체를 연결하는 문자로 표기된 텍스트로 통하는 것에 대한 접근을 지칭한다.”(120쪽 두번째 문단) 이건 우리말로 너무 심하지 않을까? 영역은 이렇다: “It[Glossemantics] showed how to reach the literary element, to what in literature passes through an irreducibly graphic text, tying the play of form to a determined substance of expression.”(59쪽)

다시 옮기면, “언리학은 (문학의) 이 ‘문자적’ 요소, 즉 문학에서 ‘형식의 유희’[기표의 유희]를 규정된 표현 실체[의미]에 연결시켜 주는, 이 환원불가능한 표기 텍스트를 관통하고 있는 그 무엇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literary를 ‘문학적’이 아닌 ‘문자적’으로 옮겼다. 이탤릭체로 강조돼 있는 것이 그것의 어원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文)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색하기에 ‘문자적’이라고 해둔다.

데리다는 이 문자적 표기에는 텍스트의 ‘의미’(현전으로서의 음성)로 다 환원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보며 옐름슬레우와 코펜하겐학파의 언리학은 이를 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코펜하겐학파가 루소나 소쉬르와 달리 문학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작업을 더욱 전면화(radicalize)한다.

“따라서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 일반의 구조에서 이 심급을 벗어나는 것은 일정한 기술 유형을 필요로 할 가치가 있는데, 언리학이 아마 그 규범과 가능성 조건을 최상으로 도출시켰을 것이다.”(121쪽)/ “That which, with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in the structure of a literary text in general, escapes that framework, merits a type of description whose norms and conditions of possibility glossemantics has perhaps better isolated.”(59쪽)

오포야즈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문학성(being-literary; literariness), 혹은 ‘문학적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면서, 음운론적 심급을 특권화하고, 그것이 지배적인 시문학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코펜하겐 학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시만이 아닌) 문학 전반의 ‘문학성’의 탐구에 관심을 두며, 이때 언리학이 요긴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 해서, 다시 옮기면,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의 일반 구조에서 (형식주의자들의) 이론적 틀을 벗어나면서도 그 규범과 가능성의 조건을 하나의 유형으로 기술할 필요가 있는, 그러한 유형을 언리학은 보다 잘 도출시켜 왔다.” 약간 의역을 했는데, isolate의 번역이 좀 까다롭다.

계속. “아마도 이렇게 해서 언리학은 문학 테스트의 구조와 문학성의 문학적 생성사에서, 특히 <근대성>이라는 개념에서 순전히 문자 표기적인 성층을 연구하는 데 최상의 준비를 해온 것이다.”/ “It has perhaps thus better prepared itself to study the purely graphic stratum within the structure of the literary text within the history of the becoming-literary of literality, notably in its 'modernity.'”

불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literality는 '문학성'이 아니라 '문자성'이다. 다시 옮기면, “언리학은 문자성이 점차 문학으로 생성되어 가는 역사, 특히 그 ‘근대성’의 역사 속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순전히 표기적인 층위에 대한 보다 나은 연구를 준비해 왔다.”

이어지는 문단들도 읽기에 불편한데, 하여간에 이런 식으로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덧붙임: 앞에서 약간 의역했다고 한 부분에 대한 러시아어판 번역(Laputsky옮김, 2000)을 우리말로 옮기면, "문학사와 문학텍스트의 구조에서 음성과 무관한 것은 다른 설명을 요구했고, 그것의 규범과 가능조건에 대해서는 특히 언리학이 분명 더 잘 밝혀주었다."(185쪽) 더 간명하게 번역돼 있는데, 이해하기도 물론 더 쉽다.(여기서 다른 설명이란 건, 음운론과 시에 집중했던 형식주의와는 다른 설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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